이남곡 선생님
애순언니랑 함께 존경하는 여류선생님을 뵈었다. 운좋게 찾은 맛집 점심에 이어 '인생팥빙수'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북촌일대를 쓸고 다니다가 정독도서관이 나오자 그늘 벤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정독도서관의 문향이 경기고시절부터 이어져온다는 이야기를 하다 선생님의 절친 이남곡선생님으로 생각이 번졌다.
"이남곡선생님이 소년시절에 여기 다니셨겠네요.
대단하세요. 그 시골 함평중학교에서 곧바로 경기고 입학이라니."
"중학교 졸업하고 어머니 손잡고 서울 올라오셨다더만. 그 때는 경기고가 대단한지도 모르고 얼결에 시험치셨다고."
"네? 어머니하고만요? 그러면 아버지는요?"
그렇게 해서 듣게 된 이남곡선생님의 가족사는 가슴이 먹먹한 것이었다.
이남곡선생님의 아버님은 사회주의자로서 산에 들어가 빨치산활동을 하시다 토벌대의 선무공작 방송을 듣고 하산을 결심했다.
자수를 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다섯살난 아들과 아내를 생각해서 어렵사리 내린 결단이었다.
그러나 아버님은 하산 당일 저녁에 그 자리에서 총살당하셨다고 한다.
"자윤은 <낙화유수>라는 노래 들어봤나?"
"알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고요."
"남곡형과 도법스님과 <생명평화를 위한 새물결>운동을 하던 때였지. 둘러앉은 순서대로 한곡씩 노래를 부르는데."
"이남곡 선생님 노래 잘 못 하실것 같아요!"
"아니야. 꽤 잘 부르셔. 남곡형이 그 때 낙화유수를 부르시더라고."
노래가 끝난 후 이남곡 선생님이 덧붙인 말을 들은 순간, 여류선생님은 '남곡형을 형으로 평생 모시겠다'고 결심하셨다고 한다.
"'낙화유수는 아버지가 잘 부르시던 노래'라고 어머니한테 들었다고, 남곡형 자신은 심상하게 얘기하시던데 나는 그 때."
그 순간 말씀하시던 여류선생님도 말을 끊고, 듣던 우리도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다섯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살아남아야했던 어머니와 그 다섯살부터 이남곡선생님이 걸어온 한 평생이 그 한마디로 다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영민한 아들이 경기고를 거쳐 서울법대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홀로 된 어머니는 어떤 꿈을 꾸지 않으셨을까. 그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회주의운동을 하다 감옥살이를 사년 넘게 하고, 변변찮은 직업도 없이 젊은 시절을 떠돌 때,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대북추종을 걷는 운동노선에 회의를 느낀 자신을 변절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옛 동지들을 이남곡선생님은 어떤 마음으로 견뎌내셨을까.
"나도 청년시절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이고, 그리고 사상의 전환을 했다.
형식적으로야 감옥에 있을 때 전향했지만, 나는 이미 그 이전에 스스로 사상 로선을 바꾸었다.
그 배경의 하나가 북(北)의 사회주의로부터 일탈(지금의 세습왕조의 기미가 보이는)이었고 남(南)의 사회주의자들의 북(北) 추종이었다.
나중에 나를 배반자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내가 했던 말이다.
‘혁명을 배반한 것은 그들이지, 내가 아니다’"
지난해 이남곡선생님의 페북에서 봤던 글이 아프게 떠올랐다.
이남곡선생님은 인문운동가로서 지금도 여느 청년 못지않게 책을 읽고 왕성한 사색의 성과물을 후학들과 나누고 계신다.
"민주화나 개혁 개방은 북(北)도 피해 갈 수 없는 여정이다.핵무기로도 결코 막을 수 없다.
이것에 대해 회의적이라면 역사를 너무 모르는 것이다."
"남과 북의 국가적 과제의 성격이 질적으로 다른 만큼 ‘통일’에 접근하는 방식이 우선 ‘남북 두 국가의 일반외교 관계’ 수립으로 출발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근래 내 일관된 제안이다.
적어도 남북 내부의 개혁과제들을 수행하는 외적 제약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핵무장한 북(北)은 외부의 작용으로 붕괴하지 않는다.
결국 내부의 변혁으로 변화할 것이다.
그 과정이나 그 시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다.
지금과 같은 대치상황은 그 변화를 지체시킬 뿐이다."
"남과 북이 각각의 국가과제를 ‘통일’이라는 ‘고정 관념’에 방해받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진로에 맞게 개혁해감으로서 그 공유하는 가치가 커질 때 통일을 시도하는 것이 민족 공동체 전체의 이익에 부합할 것이다."
내가 이 근래 곰곰 곱씹어보고 있는 이남곡선생님의 남북수교론이다. 진보진영의 통일지상론의 금기를 깨는 이 주장으로 또 선생님은 어떤 소리를 들으셔야했고 지금도 공격받고 계실까.
지난 75년간의 우리나라 역사를 생각해보았을 때 결국 자유와 번영, 인간 본연의 욕망을 긍정하고 이를 동력으로 삼는 흐름이 주류로서 역사발전을 이끌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욕망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브레이크를 걸어온 비주류의 삶은 실패라고 말 할 수있을까.
비주류는 주류의 욕망이 범람하여 보편가치를 휩쓸어버리지 않고 제도화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정신적 도덕적 물길을 대어주는 역사적역할이 있었다.
비주류가 주류를 대체할 수는 없지만 비주류의 길은 반드시 필요하고,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의 국제정세 속에서 이남곡선생님이 제기한 <남북간일반외교관계수립론>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가늠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이 담대한 제안을 내놓는 선생님이야말로 진정한 비주류, 진보인사라고 확실하게 믿는다.
진정한 진보란 도덕적, 정신적으로 각성하여 끊임없이 시대를 고민하고 진단하여 한발짝 앞서 시대의 과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남한의 독재권력에 저항한 방편으로 더 무서운 북한의 독재권력에 투항해버린 사람들이 진보는 무슨 진보냐.
침묵이 흐르는 우리 벤치를 향해 옛 경기고 본관 건물에서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바람을 거슬러 60년전으로 돌아갔다. 열린 창문을 넘어 교실에 빼곡하게 앉은 학우들 사이에서 키가 큰 한 소년을 그려보았다.
역사에 대한 깊은 슬픔과 가난한 조국에 대한 아픈 연민을 안고 한 많은 어머니의 무거운 기대를 등에 짊어진 소년을 찾아보았다.
북악산이 내다보이는 이 푸른교정을 나온 소년 앞에 놓여진 길고 험한 길을 보았다.
그 길의 슬픔과 아픔과 무상함을 마음 속 깊은 어떤 차원에서는 소년은 이미 알고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