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生真 is with Sunghwan Jo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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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29일 제14차 한일시민동학기행, 10월 30일 제1회 나주 동학농민혁명 국제학술회의.11월 2~3일은 불경대학교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공동개최로 제25차 국제불교문화학술회의 미륵신앙의 역사적 접근 발표·토론 및 현지조사.질풍노도와 같은……랄까, 매우 충실한 10일간이었다.
순서는 앞뒤가 다르지만 사실 이들(미륵-동학-나주)이 따로따로 갈라지지 않고 한 가닥 실로 연결돼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 대학이 위치한 익산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 때 왕도를 두었다.그 무왕이 쌓은 미륵사는 미륵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미륵신앙과 사상은 백제 멸망 후에도 유민들의 마음을 지탱했다.나중에 이 땅을 지배했던 신라나 고려에서도 옛 백제령 백성과 호족을 회유하는 의미에서인지 미륵불을 모시는 절을 새로 건립하였다.논산의 관촉사와 김제의 금산사가 그 예이다.
시대는 내려 19세기.동학 자체는 수운 최제우가 경주에서 일으켰고 교주 수운과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경상도 사람이었다.그런데 그 동학이 무력봉기·혁명사상이 된 것은 이곳 전라도에서였다.
거기에는 동학의 교리나 조직뿐만 아니라 전라도에--사실 충청도를 포함한 옛 백제령 지역에--넓고 깊이 뿌리박혀 있던 미륵사상이 촉매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미륵사상은 미륵하생의 이상세계 비전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30일 국제회의를 개최한 나주는 전라도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동학농민군 앞에 함락·항복하지 않고 나주목사 민종렬의 휘하에 공격을 막아낸 마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동학군의 공격을 막아냈기 때문에 나중에 서울에서 남코시로가 이끄는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가 주둔해 오자 '동학당' 토벌의 거점으로 여겨져 체포·처형된 '동학당'의 시신이 수북이 쌓이는 참극도 벌어졌다.또한 안하무인 일본군에 대한 반발로 격렬한 의병운동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혁명은 망해도 동학의 꿈과 이상은 죽지 않았다.한국 근현대의 주요 종교인 증산교·대포교·원불교는 모두 전라도에서 흥하고 있다.그리고 그것들은 미륵신앙·사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특히 증산 교주 증산 강일순은 스스로 상제라 칭하다가 돌아가실 때 "내가 보고 싶으면 금산사 미륵불을 만나러 가라"고 말을 남겼다고 한다.
원불교 교주 소태산 박중빈 역시 자신의 교단이나 회중에 대해 미륵이 설법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용화회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등 암암리에나마 미륵신앙을 매우 의식하고 있었다.
10月25~29日まで第14回日韓市民東学紀行、10月30日には第1回羅州東学農民革命の国際学術会議。11月2~3日は佛教大学・円光大学校円仏教思想研究院共同開催で第25回国際仏教文化学術会議「弥勒信仰の歴史的接近」発表・討論および現地調査。疾風怒濤のような……というか何というか、非常に充実した10日間であった。
順番は前後するが、実はこれら(弥勒—東学—羅州)がバラバラではなく1本の糸でつながっているともいえる。
わが大学の位置する益山は百済の武王(在位600~641)の時代には王都も置かれた。その武王が築いた弥勒寺は弥勒信仰の中心となった。
弥勒信仰と思想は百済滅亡後も遺民の心の拠り所となった。後にこの地を支配した新羅や高麗でも、旧百済領の民衆や豪族を懐柔する意味もあってか、弥勒仏を祭る寺を新たに建立した。論山の潅燭寺や金堤の金山寺はその一例である。
時代は下って19世紀。東学そのものは水雲崔済愚が慶州で興したし、教祖の水雲と第2代教主の海月崔時亨は慶尚道の人だった。ところが、その東学が武力蜂起・革命思想となったのはここ全羅道においてであった。
それには東学の教理や組織だけでなく、全羅道に――実は忠清道も含めた旧百済領の地域に――広く深く根付いていた弥勒思想が触媒になったと考えて間違いなかろう。弥勒思想は、弥勒下生の理想世界のビジョンをかなり具体的に描写していたからである。
ところで30日に国際会議を開催した羅州は、全羅道内でほぼ唯一、東学農民軍のまえに陥落・降伏せず、羅州牧使閔種烈の指揮下に攻撃を防ぎ切った町であった。
皮肉なことに、この時に東学軍の攻撃を防ぎ切ったがゆえに後にソウルから南小四郎率いる日本軍後備歩兵第19大隊が駐屯してくると「東学党」討伐の拠点とされ、逮捕・処刑された「東学党」の死体がうず高く積み上げられる惨劇も繰り広げられた。また傍若無人な日本軍への反発から激しい義兵運動が起こった場所でもあった。
ところで、革命は潰えても、東学の夢と理想は死ななかった。韓国近現代の主要な新宗教、甑山教・大倧教・円仏教はすべて全羅道で興っている。そしてそれらは弥勒信仰・思想とも密接にかかわりを持っていた。
特に甑山教教祖の甑山姜一淳は、自ら上帝と称していたが、亡くなる時に「わしに会いたくなったら、金山寺の弥勒仏に会いに行け」と言い残したという。
円仏教の教祖少太山朴重彬もまた、自らの教団や会衆について弥勒が説法する場所をさす「(龍華)会上」という語を用いるなど、暗々裏にであれ弥勒信仰を非常に意識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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