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08

박정미 닥터지바고와 안나카레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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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미

어제 저녁산책을 하다가 러시아의 하얀평원을 걷는다는 상상을 했다.
동시에 닥터지바고와 안나카레니나를 꺼내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겨울양식과 같은 두 책.

그러다가 예전에 두 책을 소재로 해서 끄적이던게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찾아보았다.
조금 길다.
===

<안나>의 아름다움과 <라라>의 사랑

-겨울이면 <닥터 지바고>를 찾아 읽는다. 고생하는 <유리(지바고)>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따뜻한 거실 쇼파에서 창 밖 바람소리를 들으며 이 책을 읽는 기쁨은 각별하다. 눈 덮여 더욱 광막한 러시아 평원. 그 위에 뜨는 초승달도, 그 아래 자작나무의 긴 그림자도, 굶주려 울부짖는 늑대도 모두 겨울날이 되어야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러나 이번 겨울은 <닥터 지바고>없이 그냥 넘어갈 모양이다. 얼마쯤은 협동조합에 정신이 팔려서이기도 하다. 예전만큼 시간이 널널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내 마음의 양식이 아닌가. 배 곯고 살 수는 없다. 그러니 이번 겨울양식은 얼마전부터 다시 붙들고 있는<안나 카레니나>가 대신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여주인공은 무조건 다 예쁘다. 그래서 안 예쁜 나는 책을 읽다가 승질(!) 날 때가 많다. 그래도 예뻐야만 남자 작가들의 예술적 영감을 불러올 수 있다면야, 아량을 베풀어 줘야지 뭐. 더구나 <안나 카레니나>와 <닥터 지바고>를 쓰게 만든 아름다움이라면 더욱이. 안나와 라라처럼 단순히 예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인 주인공은 나도 반한다. 그런 아름다움은 남자-여자를 넘어선 우리네 삶의 꽃이다.

-여자의 예쁨과 아름다움을 어떻게 구별 지을 수 있는가. 예쁨은 어린 것이다. 미숙한 것이다. 존재의 표면을 스쳐지나는 것이다. 예쁨은 아름다움의 한 속성에 불과하다. 예쁨은 아름다움으로 깊어지고 성숙할 수도 있지만, 때로 익지 못하고 저속함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아름다움은 예쁨을 넘어서 있다. 아름다움은 존재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신적인 속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아름다움은 생명이 그 안에서 잉태되고 자라고 편히 쉴 수 있을 만큼 품이 넓고 크다. 예쁨은 질투를 불러일으키지만, 아름다움은 누구나 그 안에서 넉넉하게 누릴 수 있다.

-문학사상 가장 아름다운 인물로 그려졌다는 여주인공 안나와 라라. 그 아름다움은 남자들에게 한편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른 한편 공경의 대상으로 되는 양면성을 띠게 된다. 정복에의 욕망과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은 양가적 욕망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대지의 여인만이 가지는 징표이다. 안나의 무성한 검은숲 같은 머리칼(혹은 라라의 황금숲같은 머리칼), 영혼의 깊이와 생기를 드러내주는 호수 같은 눈, 경쾌하고 기품이 살아있는 몸짓은 대자연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둘은 주위의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어머니와 같은 품을 가지고 있다. 안나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의식하기 전의 모습(브론스키를 만나기 직전 기차 안에서 연출하는 따뜻한 장면과 오빠네 어린 조카들을 살뜰히 대하는 모습)과 라라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극복한 후의 모습(야전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을 때의 위로자 역할, 바리끼노의 도서관에서 미소만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장면)은 묘하게도 일치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표적이 되고 두 여자는 유혹을 당하게 된다. 남자의 유혹 앞에서 비롯된 두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태도는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다르게 발전한다. 그리하여 끝내는 그 간격을 좁힐 수 없게 되었다.
-안나를 유혹한 브론스키는 비록 철없는 귀족장교에 불과하지만 안나의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까지도 함께 알아보고 사랑한다. 그러나 안나가 그 사랑에 굴복하여 가정을 버리고 불륜에 몸을 맡겼을 때, 그녀는 내면의 힘을 잃게 되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반쪽만 남은 자신의 외형상 아름다움은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무기로 인식됐다. 안나는 자신의 외형적 아름다움과 그 힘을 강화시켜 그것으로 덧없는 열정을 영원히 소유하기를 원했다. 아름다움은 사랑을 지키는 무기였고 연인을 조종하는 권력이 되었다. 또한 그 아름다움은 타인과 자신 사이를 막는 무시무시한 갑옷으로 그녀를 감쌌다.

그래서 안나의 대지성은 그녀의 남자에게서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그녀와 연인 브론스키간에는 무시무시한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갈고 닦아 브론스키를 묶어놓으려고 한다. 그럴수록 브론스키는 속박의 두려움과 싸우며 독립을 갈구하게 된다. 안나가 외면의 아름다움에 집착할수록 내면의 아름다움은 잔혹하게 타들어갔다.
이제 끝을 모르고 치닫는 열정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안나는 브론스키 없이는 자신을 세울 수조차 없게 피폐해져갔다. 브론스키에게 점점 의지할수록 안나의 내면은 비어갔고 균형은 무너졌다. 그리하여 사랑은 열정과 집착으로 대치되고 결국 안나는 광기와 파멸에 이르게 된다.
“난 그에게 벌을 주고, 모든 사람에게서, 나에게서 벗어날 거야.”
감옥이 되어버린 관계. 서로에게 구속이 되어버린 관계. 자신마저도 감옥이 되어버린 그 철저한 유폐를 끝내기 위해 그녀는 죽음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일찍부터 라라에게 외모의 아름다움은 감추어야 할 취약점으로 인식됐다. 그녀는 아름다움이 표적이 되고 사냥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어린나이에 깨달았다. 어린 시절 그녀를 유혹한 남자(어머니의 정부로서 노회하고 비속한 인물)는 그녀 외면의 아름다움만을 탐한다. 그리고 그녀 내면의 아름다움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뼛속 깊이 속물인 그는 그녀 내면의 빛이 그의 삶의 근간을, 뻔뻔함에서 비롯된 힘을, 세상에 대한 승리를 가져다주는 비속함을 흔들까봐 두려워한다. 그녀 안의 지혜로운 영혼은 그 저속한 열정을 경멸하고 저주한다. 하지만 아직 어린 소녀인 그녀로서는 어른인 그를 대적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어린 그녀는 처참하게 패배하고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는다. 상처를 추스린 그녀는 유혹자를 피해 결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굳건하고 성실한 남편과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꾼다.
이제 그녀는 그 아름다움을 감추고 스스로 의식조차 하지않게 된다. 드디어 사랑이 왔지만 그 사랑 또한 그녀 안의 내적 균형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하지만 감추고 드러내지 않을수록 연인 지바고에게 그 아름다움은 내면의 빛으로 더 눈부시게 비추어진다. 그리하여 라라는 연인 지바고에게서 대지의 본래성을 드러내는 여신으로, 러시아의 지모신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안나와 라라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면서 라라의 일방적 승리를 말하는 것은 사실 공평하지 않다.

먼저 그녀들의 개인적 삶을 규정짓는 시대상황이 너무나 다른 것을 고려해야 한다.
안나는 구체제가 개인을 압박하던 시기(제정 러시아 말기)에 허위의 귀족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자신만의 진실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가정을 뛰쳐나올 수는 있었지만 자신만의 질서를 세울 수 없었던 그녀는 내적 진실마저 무너진 채 파멸한다.
이에 반해 라라는 구체제가 무너지고 질서가 와해된 시대(러시아 혁명기)에 질서를 갈망하여 내적인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가정의 의무를, 부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켜야할 가치로 인식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가정의 의무를 거스리지 않고도 사랑 그 자체를 누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계급적인 한계도 있다. 라라는 제 손으로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는 서민계층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균형감각은 현실에서의 필요성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 언제나 쉼 없이 일하고 끊임없이 지식을 찾아 공부를 해야만 유지되는 생활 속에서 사랑은 삶의 한 영역에 불과하게 된다.
이에 반해 안나는 생활을 유지할 노동의 필요가 전혀 없는 귀족의 삶을 살았다. 오직 브론스키와의 관계에만 삶의 모든 에너지가 편향적으로 분출되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사랑은 결국 균형을 잃게 되고 그 관계는 건강하게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안나의 자살 장면을 너무나 충격적으로 묘사했다.
“---그 순간, 그녀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고는 어깨 사이에 머리를 푹 숙인 채 객차 밑으로 몸을 던져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러고는 마치 곧 일어날 자세를 취하려는 듯 경쾌한 동작으로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았다. 그 순간 그녀는 자기가 한 짓에 몸서리를 쳤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엇 때문에?’
그녀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뒤로 젖히려 했다. 하지만 거대하고 가차 없는 무언가가 그녀의 머리를 떠밀고 그녀를 질질 잡아끌고 갔다.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그녀는 어떤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왜소한 농부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철로 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불안과 허위와 슬픔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을 때 그 옆에서 빛을 비추던 촛불 하나가 어느 때보다 밝은 빛으로 확 타오르더니, 이전에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모든 것을 그녀 앞에 비춰보이고는 탁탁 소리를 내며 점점 흐릿해지다가 영원히 꺼지고 말았다.”

-외면의 아름다움이라는 작은 촛불에 의지하여 ‘불안과 허위와 슬픔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고 있던 안나. 혁명기 거친 세상을 내면의 빛으로 환하게 밝혀 꿋꿋하게 살아나간 라라.
안나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무너졌고, 비록 어느 수용소의 번호표도 없는 죽음을 맞게 되었을지라도, 라라의 사랑은 그렇게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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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comments

Sunghee Chun
나두 닥터지바고도 보고 안나~도 읽어야겠다 닥터 지바고를 마지막으로 본게 고3때 였는데 야자를 빼먹고 명보극장 이었던가? 암튼 오래 되었네
요즘 느끼는 건데 이세상에서 가장 값진것은 사랑과 평안이 아닐까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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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수
음... 이 긴글을 읽고난뒤 오드리가 떠오르는 건 순전히 정미님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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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혈
오마 샤리프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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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혈
길고 아름다운 글, 박정미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Reply5 y
성봉근
너무 훌륭한 글 솜씨네~감동 또 감동~^^ 그리고 글에 공감!
Reply5 y
이강숙
역시 문학회 선배 짱! 절로 읽어 보고 싶게 만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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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규천
길다..난감..노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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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영
그 유명한 필독서들을 저는 아직까지 못읽어 봤어요. 영화도 못봤구요. 근데 필터링돼서 정리해놓은 글을 보니 언젠가 읽어봐야겠다 싶기는 하네요.
이상하게 명작이라고 정해진 책은 안친했어요. 편독이 심해서ㅎㅎ
Reply5 yEdited
김홍성
댓글들도 모조리 읽었습니다. ㅎ
도서관 가면 안나카레니나를 찾아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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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희
익히 알고 있었지만 필력이 대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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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좋군요. 공감이 가요.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라는 것과 소설로 그려진 픽션이라는 것과 차이가 모호해질 때가 있지요. 우리의 경험과 인식이란 많은 경우 동일시의 결과라 싶어요. 그런 점에서 누군가는 라라의 역할을 또는 안나의 역을 하는 것이겠지요. 한 권의 소설(픽션)을 읽고 그 느낌을 잘 경험할 수 있다면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영화 또한 그럴거예요. 그 몰입된 순간은 그 삶을 경험한 것이겠지요. 사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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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애최
나도 다 읽었다~!!
소녀감성을 벗어나서 다시 읽으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올까나?
긴글 써주는 정미 화이팅~!!… See more
Reply5 yEdi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