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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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희 朴普熙 | Bo Hi Pak | |
출생 | |
사망 | |
묘소 | |
학력 | |
가족 |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 |
복무 | |
최종 계급 | 중령 (대한민국 육군) |
최종 보직 |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국방무관 보좌관 |
상훈 | 화랑무공훈장 (1951년) 금성 화랑무공훈장 (1953년) 포트 베닝 미 육군보병학교장 표창 (1957년) 주한미군사고문단장 표창 (1959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표창 (1960년) 대한민국 국무총리 표창 (1963년)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표창 (1971년) 국민훈장 목련장 (1971년)[2] 은관문화훈장 (2002년) |
1. 개요[편집]
2. 상세[편집]
1930년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현 아산시 염치읍)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6년 천안농업학교를 졸업했고,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충남 아산시의 도고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0년 6월 1일 육군사관학교 생도 2기로 입교하였다.[3] 그러나 육사 생도가 된 지 24일 만에 6.25전쟁이 발발하여 생도로서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제9보병사단 제28보병여단 소속이었으며, 전쟁 중 소대장, 중대장, 연대작전장교로까지 전쟁에 임했다. 이후 1952년 미국 포트 베닝 육군보병학교에 유학을 가 신임장교 지휘참모과정을 수료했고, 1955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서 근무하면서 육군정보학교 어학반(영어과)을 수료했다. 이후 다시 미국 포트 베닝 육군보병학교의 특수연합군반으로 유학을 가 1956년 수료했다. 그는 포트 베닝에서 화학기 교관으로 근무했다. 그 후, 1957년 UN군 사령부 내 미 군사고문단장 전속부관, 1960년 대한민국 국방부차관 보좌관, 1961년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국방무관 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또한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외교학 전공을 하여 학사 학위를 수료했다.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 중령까지 임하다가 1964년에 명예퇴역하였다.
1957년 통일교에 입교하여 문선명과 인연을 맺었다.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했기에 미국 정치인들과 어느 정도 아는 사이이며, 영어 실력이 유창하며, 특히 동시통역을 잘하기에 문선명의 총애를 받았다. 문선명의 동시통역사로도 활동했다. 통일교 2인자 소리까지 들으며 워싱턴 타임즈, 세계일보, 평화자동차, 금강산국제그룹 등 통일교 계열 기업들의 대표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리틀엔젤스예술단과 유니버설 발레단의 창단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선화예술학교 교장, 선화학원 이사장, 한국문화재단 총재를 역임했다. 2010년에 리틀엔젤스와 함께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참전국 16개국 순회공연을 주도하기도 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문선명이 "압록강을 헤엄쳐서라도 조문하러 가라"고 명령했는데, 의외로 북에서 순순히 조문단 수용 의사를 밝혀 방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무단 방북으로 간주되었고, 차기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대한민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해외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박정희 정부의 코리아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1978년 미 하원 청문회에 서기도 했다. 이는 애당초 통일교 자체가 코리아게이트에 깊이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프레이저 보고서 참고.
독립협회를 이끈 서재필의 조카이자, 하버드대학을 졸업하여 박정희 대통령 때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한 서영수를 포함한 6명이 1984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박보희를 납치하여 권총으로 위협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서영수 일당은 권총으로 박보희를 위협하며 몸값 100만 달러를 요구했으나, FBI에 검거되어 실패하였다. 당시 이런 사건을 벌인 이유는 돈 때문만이 아니라 통일교에 불만이 많아서라고 한다.#
그의 딸인 발레리나 문훈숙은[4] 문선명의 죽은 아들 문흥진과 영혼결혼하였다. 박보희는 1984년 11월 아르헨티나의 '라플라타가톨릭대학'의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다.
1957년 통일교에 입교하여 문선명과 인연을 맺었다.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했기에 미국 정치인들과 어느 정도 아는 사이이며, 영어 실력이 유창하며, 특히 동시통역을 잘하기에 문선명의 총애를 받았다. 문선명의 동시통역사로도 활동했다. 통일교 2인자 소리까지 들으며 워싱턴 타임즈, 세계일보, 평화자동차, 금강산국제그룹 등 통일교 계열 기업들의 대표이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리틀엔젤스예술단과 유니버설 발레단의 창단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선화예술학교 교장, 선화학원 이사장, 한국문화재단 총재를 역임했다. 2010년에 리틀엔젤스와 함께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참전국 16개국 순회공연을 주도하기도 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문선명이 "압록강을 헤엄쳐서라도 조문하러 가라"고 명령했는데, 의외로 북에서 순순히 조문단 수용 의사를 밝혀 방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무단 방북으로 간주되었고, 차기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대한민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해외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박정희 정부의 코리아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1978년 미 하원 청문회에 서기도 했다. 이는 애당초 통일교 자체가 코리아게이트에 깊이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프레이저 보고서 참고.
독립협회를 이끈 서재필의 조카이자, 하버드대학을 졸업하여 박정희 대통령 때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한 서영수를 포함한 6명이 1984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박보희를 납치하여 권총으로 위협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서영수 일당은 권총으로 박보희를 위협하며 몸값 100만 달러를 요구했으나, FBI에 검거되어 실패하였다. 당시 이런 사건을 벌인 이유는 돈 때문만이 아니라 통일교에 불만이 많아서라고 한다.#
그의 딸인 발레리나 문훈숙은[4] 문선명의 죽은 아들 문흥진과 영혼결혼하였다. 박보희는 1984년 11월 아르헨티나의 '라플라타가톨릭대학'의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