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디다르마
보디다르마(타밀어: போதிதர்மன், 산스크리트어: बोधिधर्म, 생몰년 미상) 또는 보리달마(菩提達磨, 중국어 정체자: 菩提達摩, 병음: Pútídámó), 달마(중국어 정체자: 達摩, 병음: Dámó)는 남인도 출신의 타밀인 승려로, 선종의 창시자인 동시에 초대 조사이자 인도 불교의 제28대 조사이다. 남인도의 팔라바국 왕자로 태어나 왕족의 허울을 벗어던져버리고 북위의 불제자로 귀화하였으며,[1] 160세까지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나 자세한 생몰년은 기록이 없다. 무예를 한 승려라는 전설도 있다.
전설에 나오는 생애[편집]
천축향지국 왕의 셋째 아들로 남인도 파사국(타밀어: பல்லவர்)에서 태어났다. 470년 무렵 남중국에 와서 선종을 포교했다. 반야다라에게서 배우고 40년간 수도했다. 불심 깊던 양 무제와 선문답을 주고 받았다는 전설이 있다.[2] 520년 전후에 북위의 도읍 뤄양에 갔다가 그 후 허난성 숭산 소림사에서 좌선수행(坐禪修行)에 정진하고, 그 선법(禪法)을 혜가 등에게 전수하였다. 달마의 전기에는 분명치 않은 점이 많다.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 염화미소나 보리달마를 다룬 여러 이야기는 후대에 첨삭된 것으로 보여진다. 염화미소 전설과 서역 28조의 전법설(傳法說)은 인도의 어떤 문헌에도 기록이 없고 중국 대륙 선종 초기 문헌에도 기록이 없다. 보리달마도 남북조시대에 서역에서 온 보리달마라는 이름의 중을 다룬 기록이 있지만, 그 사람은 낙양의 아름다운 불탑을 보고 경탄해마지 않는 매우 경건한 중이거나 불경인 『릉가경(楞伽經)』 중에서 무척 까다로운 경전에 통달하고 논리에 맞고 체계 있는 수련법이라고 주장하는 이입사행(二入四行)을 강조한 승려로서 선종 조사인 보리달마와는 그 성격이나 행적이 판이하다.
당송 시대 선종의 발전과 더불어 보리달마의 전기가 추가되고 여러 가지 허구를 이용한 전설이 보완되어 선종의 제1대 조사로서 달마상(達磨像)이 사실(史實)과 무관하게 허구로서 확립되었다. 양 무제와의 선문답을 다룬 이야기, 혜가가 눈 속에서 팔을 자르고 법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 서역에서 서방으로 돌아가는 보리달마를 만났다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가 좌선 수행 중에 졸음이 몰려와서 자신의 눈꺼풀을 떼어 던져버렸더니 그 자리에서 최초의 차 나무가 자라났다는 전설도 있다.[3]
그러나 보리달마는 『사권릉가경(四卷楞伽經)』을 중시하고 이입(二入)[4]·4행(四行)[5]을 교시하고, 북위 말기 귀족성을 띤 가람불교와 수행한 체험을 도외시한 강설불교(講說佛敎)를 날카로운 비판한 일, 중생의 동일진성(同一眞性)을 믿고 선을 실천하고 수행하는 노력 등은 사실로 인정된다. 제자에는 혜가·도육·승부·담림 등이 있다.
역사상 사실[편집]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달마를 다룬 여러 내용은 불교에서 지대하게 영향받아 중국에서 발흥한 종교인 선종이 중국에서 대단히 번성하자 종교상 권위의 원천인,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거룩하고 고결한 분위기와 심상을 연출하려고 후대에 꾸며진 이야기이므로 믿어서 근거나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정도나 성질은 전혀 없다.
서역 이십팔조 傳法說이나 염화미소를 비롯한 전설은 인도의 어떤 문헌에서도 기록이 전무하고 중국 선종의 초기 문헌에서도 전혀 보이지 않듯이 달마도 마찬가지다. 보리달마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인, 5세기 東魏의 楊衒之가 쓴 『洛陽伽藍記』를 보면 남북조시대 때 서역에서 온 보리달마라는 이름의 승려를 다룬 기록이 있다.
"西域에서 온 보리달마라는 沙門이 있다. 페르시아 태생의 胡人이다. 멀리 변경 지역에서 중국에 막 도착하여 탑의 金盤이 햇빛을 받아 빛나고 光明이 구름을 뚫고 쏟아지며, 寶鐸이 바람에 울려 허공에 메아리치는 情景을 보면서 그자는 聖歌를 읊조려 찬탄하고 신의 조화가 분명하다고 칭송했다. 일백오십 세인 그자는 많은 나라를 돌아다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지만, 이토록 훌륭한 사찰은 이 지상에서 존재하지 않고 佛國을 찾아도 이만한 곳은 아닐 듯하다고 말한 뒤 '南無南無'(namunamu ; 歸依)를 부르면서 며칠이나 계속하여 合掌했다."[6]
하지만, 이 기록 내용에서의 보리달마는 洛陽의 아름다운 불탑을 보고 敬歎해마지 않는 매우 敬虔한 승려이거나 불경인 『楞伽經』 중에 매끄럽지 못하면서 어렵고 무척 까다로운 四卷本『楞伽經』에 통달하고 二入四行[주 1]이라는, 논리에 부합하고 체계 있는 수련법을 강조한 승려로서 선종의 보리달마와는 그 성격이나 행적이 아주 다르다.
근 90%가 11세기 이후에 작성되거나 인쇄된 방대한 둔황문헌[주 2] 중에 보이는 몇몇 기록에서의 보리달마도 인도 불교에 지대히 영향받아 중국에서 발흥한 종교인 선종에서 추존하는 보리달마와는 사상과 수행하는 방법과 이론·논리 구조가 전혀 다르다.
보리달마가 소림사 일대인 허난성 송루어에 머문 문헌상 시점은 북위 시대 초 孝文帝 즉위 10년인 486년에서 孝文帝 즉위 19년인 495년이지만 당시 허난성 송루어에는 소림사라는 사찰은 있지도 않았으므로[7] 보리달마는 소림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듯이 보리달마를 다룬 이야기는 후대 선종이 득세하면서 보리달마를, 선종을 상징하는 인재로 追尊하고자 꾸며낸 여러 가지 전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같이 보기[편집]
주해[편집]
- ↑ 二入四行은 득도하는 근본이 되는 방법을 理入과 行入으로 양분하고 行入을 四分한 수행법 일종으로서 그 내용은 一、 理入: 불경에 의거하여 불타의 근본이 되는 의미를 깨달음。 二、行入: 불타의 근본 뜻을 깨달으려는 수행으로서 이 行入을 四行으로 四分(一、報怨行: 수행하는 사람이 고통당할 때는 過報라고 판단해 다른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하면서 미워하지 않는 방법。 一、隨緣行: 인연 따라 일어나고 사라져 없어지는 苦樂에 알맞은 상태로 변하는 방법. 一、無所求行: 밖에서 구하고 대상에 마음이 늘 쏠려 잊지 못하여 매달리지 말고 空을 깨달아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갖고 싶거나 구하고 싶은 마음과 대상에 마음이 늘 기울어져 잊지 못하고 매달리는 마음을 버리는 방법。 一、稱法行: 자신의 품격과 성질은 본디 맑고 깨끗하다는 空이 처한 형편에서 空을 실행하기에 꼭 알맞은 布施와 忍辱과 持戒와 精進과 禪定과 智慧를 연수하는 방법)。
- ↑ 敦煌文獻. 莫高窟을 위시한 둔황 일원 석굴 유적에서 발견된 고대 한문 · 산스크리트어 · 위구르어 · 소그드어 · 구자어 · 호탄어 · 티베트어 · 몽골어, 히브리어로 쓰인 문헌 대부분은 사본이지만, 『金剛經』처럼 일부는 인쇄본도 있기에 『둔황사본』이라는 통칭은 부당하고 문서는 다분히 사료나 서적과 구별되는 서류라는 뜻으로 사용되므로 둔황 석굴 유적에서 나온 典籍 다량은 포괄할 수가 없어 이것도 지양해야 해서 문서나 사본 전반을 갈무리해 학술 연구에서 典據나 참고가 될 만한 자료인, 3%에서 4%만이 연대가 표기된 둔황문헌은 4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중 80%에서 90%는 9세기 이후에 작성됐다. 둔황문헌 내용은 다종다양하지만, 불교 문헌이 압도해서 거의 90%를 차지한다. 한문과 티베트 문자로 쓰인 불교 문헌에서도 불경 사본이 가장 많다. 『金剛般若波羅密經』 사본이 1000여 점에 달하듯이 같은 경전이 숱하게 중복된다. 불경 다음으로는 도교 문헌이 많고 유교 문헌도 1% 이상 있다. 史籍으로는 『史記』, 『漢書』 『文選』, 『甘棠集』, 『往五天竺國傳』을 위시해 다수한 필사본 殘簡이 끼어 있다. 둔황문헌에서는 문서가 각별히 주목을 끈다. 고문서 전통이 거의 없는 중국으로서는 소중히 간수해야 할 문헌이다. 사원 승려 명부, 재산 등록부, 收支 장부, 戒牒[징계장] 등 사원 관련 문서가 1000여 점이나 되어 당시 불교 사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일반 주민과 관련된 문서로는 호적, 役務 臺帳, 물자 징수 장부, 매매ㆍ대여, 고용상 계약서, 가산 분할이나 양자와 이혼, 노예해방 같은 일상에 관한 證書가 있다. ※출처: 정수일 선생, 『실크로드 사전』, 창비, 2013. 10.31.
각주[편집]
- ↑ 양현지(楊衒之),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547년.
- ↑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 ↑ 조은아 (2012). 《중국차 이야기》. 살림출판사. 8쪽. ISBN 9788952219374.
- ↑ 이입과 행입(行入)
- ↑ 보행(報行)·수록행(隨綠行)·무소구행(無所求行)·칭법행(稱法行)
- ↑ 5세기경 東魏 楊衒之가 편찬한 『洛陽伽藍記』.
- ↑ 『魏書』 제114 권 「釋老志」
참고 자료[편집]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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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중국 선종의 조사 457년 ~ 528년 | 후임 혜가 |
달마
달마 | |
---|---|
생몰년 불상 | |
諡号 | 마스터 셍, 마스터 얀 |
직물 | 남천축국 |
땅이 없다 | 중국 |
종파 | 중국 선종 초조로 여겨지는 |
분할 | 반와카 다라(『경덕전등록』 제2권) |
제자 | 도육· 혜가 (『속 고승전』권 제16) |
菩提達磨(보다다루마, 중국어 : 다마마 , 산스크리트어 : बोधिधर्म , bodhidharma , 바디 달마 )는 중국 선종 의 개조로되어있는 인도인 불교 승. 달마 , 달마 조사 , 달마 대사 라고도 한다. 「다르마」라고 하는 것은, 산스크리트어 로 「법」을 나타내는 말. 타츠마와의 표기도 있지만, 「낙양가람기 [1]」나, 이른바 중국 선의 전적 「속고승전 [2]」등 당대 이전의 것은 타츠마라고 표기하고 있다. 화상에서는, 눈빛 날카롭게 수염을 낳고 귀를 붙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많다.
평생 [ 편집 ]
보리 제달마에 대한 전설은 많지만, 그 역사적 진실성에는 많은 의심도 갖고 있다. 남천 축 [주1] 국왕의 제3왕자로 태어나 반약 다라의 법을 얻어 불교의 제28조 보살제달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오래된 보리 제달마에 대한 언급은魏撫軍府司馬楊衒之撰『洛陽伽藍記』卷一永寧寺의 조( 547년 )에 있으며, 모든 다쓰마 전설은 여기에 시작된다고도 알려져 있다.
그 당시 페르시아에는 서부 지역의 승려, 보살, 후족이 있었습니다. 불모의 후예에서 중간 지구로 여행하기 위해.
극불경에는 그런 것이 없고, 입으로 남오를 노래하고, 손바닥을 맞대고 몇 일을 지낸다.— " 낙양 Jialan Ji " 제 1 권 용닝 사원 기사
눈부신 태양의 금판, 구름 탁자 위의 빛, 바람에 흔들리는 보두오,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보십시오. 찬양을 부르는 것은 정말 기적입니다. 구름이 백오십 년이 되고 모든 나라가 흩어졌으므로 이 절은 아름답고 아름다우며 잠부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요즘 서역의 스님으로 보리 타다마라는 사람이 있었다. 파사국( 서사인 아침 페르시아 ) 태생의 후인이었다. 그는 하루카를 떠나 중국으로 왔다.
자신이 말하는 곳에서는, 나이 150세로, 여러 나라를 경유해, 발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지만, 이 영녕사의 훌륭함은 참부제 에는 또 없다, 비록 불국토 를 뚫고 없이 요구해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입에 「남무」라고 주창하면서, 며칠도 계속 합장하고 있었다.
영녕사의 탑의 금의 승로반이 태양에 빛나고, 그 빛은 구름 위까지도 비추고, 또 보황이 바람을 받아 울려 주창하고 진실로 신업이라고 칭찬했다.
제자의 운림 이 전하는 곳 [3] 에 따르면, 보리 제달마는 서역 남천축국에서 국왕의 제3왕자로서 태어나 중국에서 활약한 불교의 스님.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의 사람으로, 도선 의 전하는 곳에 의하면 남북조 의 송 의 시대(늦어도 479년 의 사이 의 성립 이전)에 송경 남월에 왔다고 되어 있다 [4] .
북송 시대의 경덕 년(1004-1007년)에 선자 선사 도하라에 의해 편찬되어 선종소의의 사전으로서 권위를 가지게 된 ' 경덕 전등록 [5] '이 되면 보리 제달마는 중화5 조 , 중국 선의 초조로 여겨진다. 이燈史에 따르면 석가 에서 세고 28대째로 되어 있다. 남천축국향지 [주2] 왕의 제3왕자로 태어난다 [6] . 중국 남방으로 도해해 낙양 교외의 부산 소림사 에서 면벽을 한다. 확인된 것만으로 도육, 허가 의 제자 가 있다. 그의 종파는 당초 쥰가슈(료가슈, 쥰가 케이에 연관)라고 불렸다.
보통 원년( 520년 ), 다쓰마는 바다를 건너 중국 에 포교에 온다. 9월 21일 ( 10월 18일 ), 광저우 에 상륙. 당시 중국은 남북조 로 나뉘어 있었고, 남조는 양 이 다스렸다. 이 책에서는 남조량의 무제 는 불교 를 두껍게 믿고 있으며, 천축에서 온 고승을 기뻐하며 맞이했다. 무제는 타츠마에게 질문을 한다.
황제가 묻자 "내가 왕위에 올라 사찰을 짓고 비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경전을 썼 느니라 공덕이 무엇이냐"고 공자는 " 공덕
이 없다 . , 그것은 실재가 아니다." 황제가 "진정한 공덕이 무엇이냐" 고 대답하자, "순수하고 아름다운 둥근 몸은 공허하고 고요하여 세상에서 그런 공덕을 구하지 않는다." 황제가 다시 물었다 . "성스러운 진리의 첫 번째 의미가 무엇입니까." 스승님이 "성인이 없다"고 하셨고, 황제 가 "나에게 누구인가" 라고 말했고, 스승이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다. 선생님은 기회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 달 19일에 몰래 강북으로 돌아왔다.
— ' 경덕진등록 ' 권삼
Teiji는 물었다. “위는 즉위한 이래로 절을 만들고, 경을 찍고, 승려를 얻는 것 수는 없다. 어떤 공덕 이 있을까.”
스승은 말했다. "아무도 공덕이 없습니다."
제는 말했다. "어째서 공덕이 없는가."
스승은 말했다. “이것은 단지 인간계 ·천계의 소과이며, 번뇌를 늘릴 뿐의 유루
의 원인입니다. 말했다. "진정한 공덕이란 어떤 것일까?"
대답했다. "정치는 묘원이지만 그 본체는 원래 비어 있습니다. 이렇게 공덕은 속세에서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는 또 질문했다. “성경의 근본적인 의미는 어떠한 것일까?”
스승은 말했다. “이 세상은 어지럽고 거룩한 것도 없습니다.”
테이는 말했다. "그럼 朕와 대좌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스승은 말했다. “ 인식 할 수 없습니다.”
황제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승은 기연이 맞지 않았다고 알고 이달 19일 몰래 강북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무제는 후회하고 사람을 사용해 타루마를 불러오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타츠마는 부산 소림사에 있어서 벽을 향해 9년 좌선 을 계속했다고 되어 있다 [7] 하지만, 이것은 그의 벽관 을 오해해 생긴 전설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벽관 은 타츠마의 종지의 특징을 이루고 있으며, 「벽이 되어 보는 것」 즉 「벽처럼 움직이지 않는 경지에서 진리를 보는 선」이다. 이것은 나중에 확립된 중국 선에서 육조 혜능 의 말로 여겨지는 '좌선의 정의' [8] 등에 계승되고 있다.
오도리 2년 12월 9일 ( 529년 1월 4일 ), 카미코라는 승려가 자신의 곁 을 잘라 [주 3] 결의를 표하고 입문을 요구했다. 타츠마는 그의 입문을 인정하고 이름을 혜택 으로 바꿨다. 이 혜가가 선종의 제2조이다. 이후 중국에 선종이 퍼졌다고 한다. [10]
영안 원년 10월 5일 ( 528년 11월 2일 )에 150세에 천화 했다고 한다 [11] [주4] . 일설에는 타츠마의 고명을 부러워한 보리 제류지와 광통율사에게 독살되었다고도 한다 [12] [13] . 諡은 원각대사 [14] .
한편 '경덕전등록'은 달마몰 후 도교 의 범해와 비슷한 후일담을 전한다 [15] . 중국의 고승전에는 종종 볼 수 없다. 그것은 다쓰마의 천화로부터 3년 후, 서역 으로부터의 귀도에 있던 송운 이 파미르 고원 의 아오미네라는 장소에서 타츠마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 때, 타츠마는 한척 신, 즉 신발을 한쪽만 손에 들고 걷고 있어, 송운이 「어디에 갈 수 있을까」라고 묻자 타츠마는 「인도에 돌아간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 “당신의 주군은 이미 보고 있다”고 전했다는 것이다. 종운은 귀국하고 나서 이 일을 말해 주었다. 귀조한 송운은 효명제 의 붕괴 를 알게 된다. 효장제가 타츠마의 무덤을 열자, 관 안에는 한척 신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입 사행론에 대해 [ 편집 ]
그의 사적, 언행을 기록한 어록으로 여겨지는 것에 『二入四行論』이 있다. 야나기 다 세이야마에 의하면 『2입 4행론』이 타루마에 관한 가장 오래된 어록에서 타루마 전설의 원형인 동시에 타루마의 사상을 전한다고 되어 있다. 둔황문서를 바탕으로 복원된 『다쓰마 2입 4 행론 』에 등장하는 삼장법사가 보리다테마 그 사람이라고 믿어지고 있다. 이것은 일부 기존 선종의 문헌을 부분으로 포함하는 중요한 문헌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부키 아츠시 는 『2입 4행론』의 내용을 정사분석해, 이것이 보리 제달마의 교설이 아니라 중국인에게 밖에 쓸 수 없는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16] . 게다가 이부키 아츠시는 『2입 4행론』의 작자는 누군가라는 문제에 도전해, 혜택 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7] .
영향 [ 편집 ]
타츠마에 의해 중국에 선종이 전해지고, 그것은 육조 혜능 에까지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임제종 · 조동종 등 선종5 가로 나뉜다. 일본 종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선종에서는 타츠마를 중요시하고, 「조사」의 말로 타츠마를 표현하기도 한다. 선종에서 '조사 서래의'(그렇게 하면 좋다: 다쓰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이유)라고 하면 '불법의 근본의 의미'라는 것이다.
타츠마가 면벽 9년의 좌선에 의해서 손발이 썩어 버렸다고 하는 전설이 일어나, 완구로서의 다루마 가 생겼다. 이것은 '복다루마'라고 불리며 길기물 로서 현재도 사랑받고 있다.
관련 문헌 [ 편집 ]
- 『선의 어록 1 달마의 어록 2입 4행론』, 야나 기타 세이야마 저, 1969년 쓰 쿠마 서방 (복간) 1996년 치쿠마 학예 문고 , ISBN 4-480-08309-X . 제2판 2016년 쓰쿠마 서방 ISBN 978-4-480-32301-9
- 「인류의 지적 유산 16 달마」, 야나기타 세이야마 저, 1981년 코단샤 (복간) 「다르마」1998년 코단샤 학술 문고 , ISBN 978-4061593138
- 『다쓰마에서 달마 모시시 대사전』 나카무라 히로메/저, 사회평론사간(2011년 7월), ISBN 978-4-7845-1903-3
각주 [ 편집 ]
주석 [ 편집 ]
출처 [ 편집 ]
- ↑ 547년 양분 유미 . 중국어판 위키소스 에는 이 기사와 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낙양가람기
- ↑ 645년도 선선 . 다이쇼 신겨 대장경 T2060_.50.0551b27 .
- ^ 『보리 타다리마 대사 약해 대오 입도 사행모 제자 흐림 서서』에 「법사자, 서역 남천축국인, 시파라문국왕 제3노코자. , 고폐소 隨緇, 사오류 성종. 명심 허허, 통성세사, 내외 구명, 德超世表. 중국어판 위키소스 에는 이 기사와 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다쓰마 사행모 (약칭)
- ↑ '최고승려' 16권, '보살. 남인도의 바라문. 신들의 지혜는 밝다. 다 듣고 깨닫는다. 법이 인도한다. 태초에 송나라 때 남베트남에 이르렀다. . 결국 북위(北魏)에 이르니 이를 따라 선(禪)을 가르치고 가르치라." (Dazheng Xinxiu T2060_.50.0551b27 - c26)
- ↑ 제3권 보리 제달마의 조. 중국어판 위키소스 에는 이 기사와 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傳燈錄/03
- ^ '속고승전'에서는 '파라문종'이 된 것이 '성찰제리' 쿠샤토리아 의 일족으로 바뀐다.
- ↑ "경덕전등기록" 3권 "...송산 소림사에 머물렀다. 나는 벽을 마주보고 앉았고, 나는 마지막에 침묵했다. 예측할 수 없었다. 그것을 벽관람 바라문이라고 불렀다. … 9년이 흘렀고, 서쪽의 Tianzhu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 とある.
- ^ 좌선의 정의 [ 의문점 ]
- ↑ 미즈노 히로모토(Mizuno Hiromoto), " 보살의 두 가지 입구와 네 가지 요소에 대한 이론과 금강삼매 ", "고마자와 대학 연구 회의록" No. 13, 1955년 3월, pp. 49-50, ISSN 0452361X .
- ^ 고야마 사오루 “전광록” 제29장을 참조.
- ^ 오카와 보제 『오등 회원』에서(상기의 전광록의 기술과는 모순된다).
- ^ 도원『 정법안장 』 제25「계성산색」.
- ^ 고야마 사오루『전광록』 제28장 「보리 제달 마장」.
- ^ 카게야마 준오 『선화를 읽는다』 담교사, 2011년 3월, 18페이지. ISBN 978-4-473-03726-8 .
- ↑ 보리법 3권의 말미에는 "3세 위와 송윤이 서구로 돌아가서 충령에서 스승을 만났다. 윤에게 말하기를 "너의 영주님은 이미 세상에 싫증이 나셨군요." 그 말을 들은 윤은 어리둥절했다. 동마이에게서 배우지 마십시오. 이제 질서가 회복되었으므로 명나라 황제는 이미 승천했습니다. 그리고 Xiaosun이 왕위에 올랐고 Yunju가 그 역할을했습니다. 기광황제. 가죽신만 남은 빈 관."
- ↑ 이부키 아츠시(Ibuki Atsushi), " "이종 사원 론"의 성립 ( PDF ) ", "인도불교연구", 제55권 제1호, 일본인도학회, 2006, pp. 127 -134, doi : 10.4259/ibk.55.127 , ISSN 00194344 .
- ^ 이부키 아츠시 「『2입 4행론』의 작자에 대해서--『曇林序』를 중심으로』『東洋学論叢』第32号、東洋大学文学部、2007年3月、204-185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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