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2

유식(唯識)-아뢰야식 제8식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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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唯識)-아뢰야식 제8식
프로필
순야 착지
2017. 8. 2.

유식(唯識)은 위즈냐프티 마트라(ⓢvijñapti-mātra)의 번역이다.
vijñapti는 ‘마음 작용’, mātra는 ‘오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유식이란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마음 작용을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6식(識)으로 분류했다.
그런데 유식논사들은 마음의 심층에서 6식에 영향을 미치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발견했고, 또 6식과 아뢰야식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는 말나식(末那識)을 자각해서 마음 작용을 여덟 가지로 분류했다.
 
① 안식
② 이식
③ 비식
④ 설식
⑤ 신식
— 전5식(前五識)
⑥ 의식 — 제6식
⑦ 말나식 — 제7식
⑧ 아뢰야식 — 제8식
 
안식에서 신식까지의 다섯 가지를 묶어서 전5식이라 하고, 의식을 제6식, 말나식을 제7식, 아뢰야식을 제8식이라 한다.
전5식은 눈·귀·코·혀·몸의 감각기관으로 각각 형상·소리·냄새·맛·감촉의 대상을 지각하는 마음 작용이다.
제6식은 의식 기능으로 의식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 작용이다.
제7 말나식의 말나(末那)는 ⓢmanas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고, 의(意)라고 번역한다. 끊임없이 분별하고 생각하고 헤아리고 비교하는 마음 작용으로, 아치(我癡)·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의 네 번뇌와 항상 함께 일어나는 자의식이다.
제8 아뢰야식의 아뢰야(阿賴耶)는 ⓢālaya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저장’을 뜻한다. 그래서 ‘장식(藏識)’이라 한다. 과거에 경험한 인식·행위·학습 등을 저장하고 있는 마음 작용으로, 심층에 잠재하고 있다. 과거의 경험들이 아뢰야식에 잠복 상태로 저장되어 있는 잠재력을 종자(種子) 또는 습기(習氣)라고 한다.
유식학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세친이 유식의 요점을 30개의 게송으로 밝힌 《유식삼십론송》이다. 이 《유식삼십론송》에 대한 10대논사(十大論師)들의 주석서가 《성유식론(成唯識論)》이다.
 
5식은 근본식(아뢰야식)에 의지해서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어느 때는 함께 일어나고 어느 때는 함께 일어나지 않는데
이는 파도(전5식)가 물(아뢰야식)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唯識三十論頌 제15송>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 즉 전5식은 조건에 따라 심층에 잠재하고 있는 아뢰야식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바깥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동적으로 그 대상을 채색하여 자기 나름대로 지각한다.
즉, 그 전5식은 아뢰야식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바깥 대상을 지각한다.
여기서 ‘채색한다’는 말은 자신의 선입견이나 감정으로 그 대상을 덮어씌운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에 대한 판단도 제각각이고,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심층에 잠재하고 있는 아뢰야식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위의 게송에서 ‘어느 때는 함께 일어나지 않는데’는 아뢰야식의 작용이 끊겨 바깥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상태이다.
 
의식은 항상 일어난다.
마음 작용이 소멸된 경지와
무심(無心)의 두 선정과
잠잘 때와 기절했을 때는 제외한다.
<唯識三十論頌 제16송>
 
제6 의식의 내용은 말나식과 아뢰야식이 직접 의식에 작용하거나 그 두 식이 전5식을 거쳐서 작용한 결과이다.
전자인 경우 의식의 내용은 과거 어떤 일을 떠올리는 허상이거나 미래에 대한 상상이고, 후자인 경우 의식의 내용은 지금 바깥에 있는 대상을 자신의 색안경으로 채색한 지각이다.
그러나 ‘마음 작용이 소멸된 경지’와 ‘무심’의 두 선정에서는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음은 두 번째 마음 작용이다.
이것을 말나식이라 하고 
그것(아뢰야식)에 의지해서 일어나고 작용한다.
생각하고 헤아리고 따지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唯識三十論頌 제5송>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하는데
곧 아치와 아견과
아만과 아애이다.
그 외에 감촉 등과도 함께한다.
<唯識三十論頌 제6송>

선도 악도 아니지만 수행에 방해가 되는 번뇌이고
생존 상태에 따라 얽매인다.
아라한과 멸진정(滅盡定)과
출세간도(出世間道)에서는 말나식이 작용하지 않는다.
<唯識三十論頌 제7송>

위의 게송에서 ‘다음은 두 번째 마음 작용이다’라는 말은 앞의 게송에서 아뢰야식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두 번째로 말나식에 대해 언급한다는 뜻이다.
말나식은 바깥 대상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해서 일어나고, 생각하고, 헤아리고, 비교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
자신에 대해 어리석은 아치,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라고 착각하는 아견, 자신을 높이고 남을 낮추는 아만, 자신만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아애와 항상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에고’의 본바탕이다.
게다가 말나식은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들과 함께한다.
따라서 말나식의 내용은 ‘에고’를 바탕으로 한 상상·허상이고, 이것은 바깥 대상과 관계없이 그냥 내면에서 떠오르는 번뇌이고 분별이고 자의식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말나식이 일어나면 곧바로 알아차리고 잠깐 ‘틈’을 가져야 한다.
이 틈이야말로 말나식을 약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예를 들어 남에게 화를 내려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을 즉각 알아차리고 잠깐만 틈을 가지면 그 충동이 누그러진다.
이 틈을 계속 반복해서 가지면, 에고가 점점 약화되고 감소되어간다.
이게 유식학의 지향점이다.
다시 말하면, 상상과 허상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감정으로 대상을 채색하지 않는 게 마음의 소음을 줄이는 길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나식이 일어날 때, 즉각 그것을 알아차리고 한 발짝 물러서서 잠깐 관조하는 게 말나식을 약화시키는 길이다.
말나식은 ‘에고’의 본바탕이고, 이 에고가 괴로움의 뿌리이다.
에고는 자신을 드러내고 내세우려는 마음의 소음이다.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번뇌인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도 에고를 바탕으로 해서 일어나고,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도 에고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말나식이 일어나자마자 자동으로 반응하지 않고, 그것을 자각해서 누그러뜨리는 게 수행의 시작이다.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멸진정, 모든 번뇌를 떠난 출세간도에서는 말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아뢰야식)은 선도 악도 아니고 
감촉 등도 그러하다.
항상 유전(流轉)하는 것이 급류 같고
아라한의 경지에서 멈춘다.
<唯識三十論頌 제4송>
 
아뢰야식은 너무나 미세하고 마음의 심층에 잠복된 상태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감지할 수 없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 급류 같다.
그런데 잠복 상태에 있는 아뢰야식의 종자가 어떤 자극으로 의식에 떠오르면 탐욕·분노·고락·선악 등으로 나타난다.
비유하면 무슨 씨앗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 좁쌀 같은 갖가지 씨앗이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는데, 그 하나를 집어내어 물을 주면 싹이 돋아나 그 본색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수행자는 분노가 일어날 때 즉각 알아차려서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따라가지 않으며, 한 걸음 물러서서 그냥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즉 분노의 종자에 물을 주지 않음으로써 그 종자의 잠재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통찰을 반복하면 그 종자는 말라 죽게 되는데, 그 온갖 종자가 다 말라 죽은 경지에 이른 성자가 아라한이다.
흔히 유식학의 핵심을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 한다.
즉, ‘오직 마음 작용뿐이고 대상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전5식의 대상[境]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전5식은 감각기관으로 지금 여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바깥 대상, 즉 형상·소리·냄새·맛·감촉을 지각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단 전5식은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 게 아니라 말나식과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채색한 결과이다.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내용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어떤 일이 떠오르는 허상·상상이지만, 전5식의 내용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바깥 대상에 대한 지각이다.
‘무경(無境)’에서 부정하는 대상은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상상·허상과 전5식이 채색한 대상이다. 그 대상은 허구이다.
그 대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모두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그래서 ‘유식(唯識)’이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말은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내용, 전5식의 채색 모두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뜻이지, 전5식의 대상 그 자체도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산과 바다, 나무와 풀, 꽃과 나비 등은 마음이 지어낸 게 아니다.
단, 그것들을 보는 사람마다 생각과 느낌이 다 다른데, 그것은 말나식과 아뢰야식이 제각기 달라 채색하는 종류와 정도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직접 보고 집에 와서 그것들을 떠올리면, 그건 허상이고 상상이다.
‘매사는 마음먹기 나름’이라든가 ‘매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허상과 상상, 채색에 해당하는 말이지 전5식의 대상 그 자체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지금 내 호주머니에 금반지가 없는데, 마음먹기에 따라 있는가.
지금 여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바깥 대상의 채색된 지각과 지금 여기의 바깥 대상 없이 떠오르는 허상·상상은 다르다.
예를 들면, 전자는 어떤 사람이 지금 직접 어떤 대상을 지각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그 사람이 그 대상을 직접 지각하고 나서 집에 와서 그것을 떠올리는 경우이다.
욕설을 듣고 나중에 그것을 떠올리고, 어떤 냄새를 맡고 나중에 그것을 떠올리고, 어떤 음식을 먹고 나중에 그것을 떠올리고, 어떤 것을 만져보고 나중에 그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중생이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채색된 지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원인은 ‘지금 이 순간’에 머물지 못하고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일을 떠올려 거기에 얽매이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떠올려 거기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이상의 여덟 가지 마음 작용이 각각 대상과 작용은 다르지만, 그 각각을 단절된 것으로 사유해서는 안 된다.
전5식과 의식과 말나식은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일어나지만, 그들이 작용한 결과는 아뢰야식에 종자로 저장되기 때문에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다.

이래저래 분별함으로써 
갖가지 대상을 두루 분별한다.
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은
실재하지 않는다.
<唯識三十論頌 제20송>
 
의타기성(依他起性)의 
분별은 조건에 의해서 생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그것(의타기성)에서
앞의 것(변계소집성)을 멀리 떠난 성품이다.
<唯識三十論頌 제21송>
 
이 3성(性)에 의거해서
3무성(無性)을 세운다.
그래서 붓다께서 모든 현상에는 
자성이 없다고 본뜻을 말씀하셨다.
<唯識三十論頌 제23송>
 
이것(원성실성)은 모든 현상의 궁극적인 이치이고
또 진여(眞如)다.
불변하고 분별이 끊긴 상태이기 때문에 
유식의 참다운 성품이다.
<唯識三十論頌 제25송>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현상은 온갖 분별에 의한 상상·허상이고 채색된 지각이다.
이 상상·허상을 바깥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착각해서 거기에 집착하고, 채색된 지각도 참모습이라고 착각해서 거기에 집착한다.
즉, 변계소집성이다. 마음 작용은 여러 조건에 의해 일어나므로 의타기성이고, 의타기성에서 분별하고 집착하는 변계소집성이 떨어져 나간 청정한 성품이 원성실성이다.
이 3성에는 다 고유한 실체가 없으므로 3무성이라 한다.
 
마음이 없어 생각하거나 헤아리지 않으니
이는 출세간의 지혜이다.
주관과 객관을 버림으로써 
문득 전의(轉依)를 증득한다.
<唯識三十論頌 제29송>
 
이것은 번뇌가 없는 상태이고
불가사의하고 선(善)이고 불변이고
안락이고 해탈신(解脫身)이고
위대한 성자이니, 이를 법신(法身)이라 한다.
<唯識三十論頌 제30송>
 
전의의 경지는 불가사의하다.
살펴서 생각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길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또 미묘하고 매우 심오하며, 스스로 체득한 내면의 깨달음이기 때문이고, 세간의 어떤 비유로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成唯識論 제10권>

전의는 번뇌에 오염되어 있는 여덟 가지 마음 작용이 청정한 상태로 변혁된다는 뜻이다.
전의는 온갖 분별이 끊겨 마음도 없고 대상도 없기 때문에 2분법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스스로 체득한 내면의 깨달음이다.
상상과 허상이 일어나지 않고, 대상을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상태이다.
이 전의로 얻은 네 가지 청정한 지혜를 4지(智)라고 한다.
전5식은 질적으로 변혁되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모두 성취하는 성소작지(成所作智)로 바뀌고, 제6 의식은 모든 현상을 잘 관찰하고 자유자재로 가르침을 설하여 중생의 의심을 끊어주는 묘관찰지(妙觀察智)로 바뀐다.
또 말나식의 아치·아견·아만·아애가 소멸됨으로써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을 일으키는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얻고, 아뢰야식의 모든 종자가 소멸되어 마치 온갖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내는 크고 맑은 거울 같은 청정한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성취한다.

참고 : 불교의 모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