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臨濟) 없는 임제선(1)
윤창화 민족사 대표
2011.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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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불교 법맥은 임제선
그럼에도 임제록 독서·강독하지 않아
고려말 이후 간행 안된 건 ‘유감’
우리나라 선종은 임제종, 임제선이다. 1990년대 중반 위빠사나가 들어오면서 ‘임제선 일색’의 분위기는 좀 탈색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선불교는 임제선 혹은 간화선이었다.
임제선의 한국 전승은 고려 말에 국사(國師) 태고 보우(1301-1381)가 받아왔지만, 임제선 일색으로 흐르게 한 이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선승인 서산대사 청허 휴정(1520~1604)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선가구감〉 말미에서 중국 5가7종을 평하면서 ‘별명 임제종지(別明臨濟宗旨)’ 장(章)을 두어, 임제선을 최고봉(最高峰)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또 서산의 법손 채영(采永, 조선 후기)은 승보(僧譜) 〈해동불조원류(海東佛祖源流)〉를 편찬(1764년, 영조 40)하면서, 임제선을 전수한 태고 보우를 우리나라 불교의 종조(宗祖)로 정하여 역사적 사실로 확정, 공표했다. 근현대의 대표적인 선승 퇴옹 성철(退翁性徹)선사도 한국불교를 임제선, 임제종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선승들이 구사하는 선풍(禪風, 선사의 독특한 가르침이나 지도 방법 및 스타일) 역시 임제의현의 주특기인 ‘할(喝)’이다.
이와 같이 한국 선불교는 법맥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임제종, 임제선인 것은 누구나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제선이 전해진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518년 동안 그리고 근대 100여 년 동안 임제선사의 법어집인 〈임제록(臨濟錄)〉이 한 번도 간행된 사실이 없다. 어떤 책이 간행, 유포되지 않았다는 것은 곧 그 책이 독서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한국서지연표〉(윤병태 저, 한국도서관협회, 1972)와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저, 탐구당, 1974)에도 〈임제록〉 간행 사실을 발견할 수 없다. 현존하는 고본 목록이나 자료에서도 임제록이 간행 및 유통된 적이 없다. 언필칭 임제선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임제의현의 참모습, 그가 기치로 내 세웠던 절대적인 자유인(自由人), 곧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진인(眞人)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임제록〉이 정보문헌학적으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출판, 간행된 것은 37년 전이다. 1974년으로서 당시 종정이었던 서옹선사(西翁禪師)가 연의(演義, 提唱)한 〈임제록〉(동서문화사, 1974.10.25)이 처음이다. 이때 비로소 우리나라 선원의 납자들은 말로만 듣던 임제록을 보게 되었다. 문자로나마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개 〈임제록〉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 책을 읽은 사람은 한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무지(無知), 무식(無識)해야만 선승이라는 이미지는 또한 임제록에 대해서도 그대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처음은 아니다. 당시 서옹 스님은 〈임제록〉‘해제’에서 “그런데 조계종은 임제종 법맥을 이어오면서 (그의 법어집인) 임제록이 현존(現存)하지 못함은 유감천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개탄했고, 15여 년 전 민영규선생도 ‘몽산덕이와 고려불교’(김지견 화갑논총, 1996)에서 심도 있게 언급했다. 필자는 갈등선(葛藤禪)으로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중계할 뿐이다.
그런데 매우 궁금한 것은 너도나도 임제선을 자처하면서도 왜 〈임제록〉이 간행되지 않았을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간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독서·강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약 600여년 동안 우리나라 선원에서는 임제록을 보지 않았고, 본 선승도 거의 없다.
하나 더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유명한 공안집인 원오극근(1063~1135)의 〈벽암록〉은 600여 년 동안 겨우 1회 개판·간행되었고, 무문혜개(1183~1260)의 〈무문관〉도 간행·강독된 사실이 없다. 중국 선승들에 관한 정보는 주로 〈전등록〉을 통하여 알게 되었던 것이다.
윤창화 민족사 대표 ggbn@ggbn.co.kr
한국 선불교 법맥은 임제선
그럼에도 임제록 독서·강독하지 않아
고려말 이후 간행 안된 건 ‘유감’
우리나라 선종은 임제종, 임제선이다. 1990년대 중반 위빠사나가 들어오면서 ‘임제선 일색’의 분위기는 좀 탈색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선불교는 임제선 혹은 간화선이었다.
임제선의 한국 전승은 고려 말에 국사(國師) 태고 보우(1301-1381)가 받아왔지만, 임제선 일색으로 흐르게 한 이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선승인 서산대사 청허 휴정(1520~1604)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선가구감〉 말미에서 중국 5가7종을 평하면서 ‘별명 임제종지(別明臨濟宗旨)’ 장(章)을 두어, 임제선을 최고봉(最高峰)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또 서산의 법손 채영(采永, 조선 후기)은 승보(僧譜) 〈해동불조원류(海東佛祖源流)〉를 편찬(1764년, 영조 40)하면서, 임제선을 전수한 태고 보우를 우리나라 불교의 종조(宗祖)로 정하여 역사적 사실로 확정, 공표했다. 근현대의 대표적인 선승 퇴옹 성철(退翁性徹)선사도 한국불교를 임제선, 임제종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선승들이 구사하는 선풍(禪風, 선사의 독특한 가르침이나 지도 방법 및 스타일) 역시 임제의현의 주특기인 ‘할(喝)’이다.
이와 같이 한국 선불교는 법맥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임제종, 임제선인 것은 누구나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제선이 전해진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518년 동안 그리고 근대 100여 년 동안 임제선사의 법어집인 〈임제록(臨濟錄)〉이 한 번도 간행된 사실이 없다. 어떤 책이 간행, 유포되지 않았다는 것은 곧 그 책이 독서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한국서지연표〉(윤병태 저, 한국도서관협회, 1972)와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저, 탐구당, 1974)에도 〈임제록〉 간행 사실을 발견할 수 없다. 현존하는 고본 목록이나 자료에서도 임제록이 간행 및 유통된 적이 없다. 언필칭 임제선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임제의현의 참모습, 그가 기치로 내 세웠던 절대적인 자유인(自由人), 곧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진인(眞人)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임제록〉이 정보문헌학적으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출판, 간행된 것은 37년 전이다. 1974년으로서 당시 종정이었던 서옹선사(西翁禪師)가 연의(演義, 提唱)한 〈임제록〉(동서문화사, 1974.10.25)이 처음이다. 이때 비로소 우리나라 선원의 납자들은 말로만 듣던 임제록을 보게 되었다. 문자로나마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모습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개 〈임제록〉이라는 책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 책을 읽은 사람은 한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무지(無知), 무식(無識)해야만 선승이라는 이미지는 또한 임제록에 대해서도 그대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처음은 아니다. 당시 서옹 스님은 〈임제록〉‘해제’에서 “그런데 조계종은 임제종 법맥을 이어오면서 (그의 법어집인) 임제록이 현존(現存)하지 못함은 유감천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개탄했고, 15여 년 전 민영규선생도 ‘몽산덕이와 고려불교’(김지견 화갑논총, 1996)에서 심도 있게 언급했다. 필자는 갈등선(葛藤禪)으로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중계할 뿐이다.
그런데 매우 궁금한 것은 너도나도 임제선을 자처하면서도 왜 〈임제록〉이 간행되지 않았을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간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독서·강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약 600여년 동안 우리나라 선원에서는 임제록을 보지 않았고, 본 선승도 거의 없다.
하나 더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 유명한 공안집인 원오극근(1063~1135)의 〈벽암록〉은 600여 년 동안 겨우 1회 개판·간행되었고, 무문혜개(1183~1260)의 〈무문관〉도 간행·강독된 사실이 없다. 중국 선승들에 관한 정보는 주로 〈전등록〉을 통하여 알게 되었던 것이다.
윤창화 민족사 대표 ggbn@gg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