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 을묘천서와 천주실의 : 네이버 블로그
[162.7] 을묘천서와 천주실의
신인간
2021. 7. 2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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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천서와 천주실의
- 도올 김용옥의 을묘천서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박길수 (모시는사람들 대표, 서울교구)
1. 을묘천서는 천주실의인가?
이 글은 천도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을묘년 종교체험, 일반적으로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하는 ‘이서(異書)’를 받는 사건에서 ‘을묘천서’가 ‘천주실의(천주실의)’인가를 따져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최근 도올 김용옥 선생(이하 ‘도올’ 또는 ‘도올 선생’으로 씀, 필자의 恩師이시다)이 펴낸 동경대전 1+2(통나무, 2021)과 그 해설 동영상인 도올 TV 강의(유튜브)에서 “을묘천서(乙卯天書)란 바로 천주실의(天主實義)이다”라고 주장하는 바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성격을 띤다.
도올 선생이 유튜브 강의나 동경대전(통나무)에서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고 주장하는 직접적인 근거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을묘천서’ 사건을 전하는 천도교 초기 역사서(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의 내용으로 볼 때 이에 해당하는 책은 천주실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 선생님께서 그 책을 펼쳐 보시니 유학의 책이라고 할 수도 없고, 불가의 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책이었다. 도무지 문장의 이치가 온당치를 않아 그 진의를 풀어 깨닫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先生披覽 於儒於佛之書 文理不當 難爲解覺, 102)라는 구절을 대표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둘째, 이 책(‘을묘천서’)의 “최종적인 성격이 “기도지교(祈禱之敎)”(기도의 가르침)로 규정될 수 있는 책, 그런데 그 책은 한문으로 쓰여진 책, 이 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마테오리치가 쓴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년10월~11월에 간행)가 그것이다.”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삽화(揷話)의 마지막 장면인 “‘이 책은 진실로 생원님께서 받으셔야만 할 책이군요. 소승은 그저 이 책을 생원님께 전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원컨대 이 책에 쓰여진 대로 뜻을 이 세상에 펼치소서.’라는 말이 끝나나마자 스님은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몇 발자국 안에 그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리 선생님은 마음에 신이(神異)함을 느끼었다. 그리고 그 스님이 신인(神人)임을 알아차렸다. 그 후로 우리 선생님은 깊게 그 책을 연구하여 그 이치를 투철하게 깨달았다. 그 책에는 기도하는 바에 관한 가르침이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此書眞可謂生員主所受, 小僧只爲傳之而已. 願此書以行之也.’ 辭退下階 數步之內 因忽不見. 先生心常神異 乃知神人也. 其後深察透理, 則書有所(祇)禱之敎, 103)”라는 부분을 근거로 제시한다.
도올 선생은 이에 대한 방증도 몇 가지로 제시한다. (괄호 안은 동경대전(통나무)의 쪽)
① 대선생주문집에는 ‘금강산유점사(金剛山留漸寺)’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이 에피소드를 만든 사람은 ‘유점사(楡岾寺)’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또 도원기서에는 금강○사(金剛○寺)라고 하여 그 선사(禪師, 老師)의 소종래(所從來)를 잘 알지 못한 채 썼음을 알 수 있는바, 선사(禪師)를 금강산 유점사의 스님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105쪽)
② 다시 말해, 위의 삽화에서 ‘선사(禪師)’ ‘노사(老師)’ ‘승(僧)’ ‘소승(小僧)’으로 표기된 인물은 “헛되이 불서를 오래 읽었으나 끝내 신령스러운 체험을 얻지 못했다(徒讀佛書 終未神驗)”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신앙을 추구했으나 불교 교리로부터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한 이로서, ‘유점사 스님’으로 보이지 않는다. (105쪽)
③ (도올 선생은) 그 사람이 유교나 불교에 대한 소략한 지식을 갖추고 당대 세상에 회의적이던 어떤 지식인이 천주실의라는 책을 의도적으로 수운에게 전한 사건으로 보았다. 그리고 수운은 그를 통해 천주실의를 처음 접했다고 보았다. “수운은 이미 10년 동안의 장궁귀상(臟弓歸商)의 여로를 통해 천주교를 접했고, 천주교 집회에도 무수히 참관하면서 조선민중의 애타는 열망을 몸소 체험하였다. 따라서 실의와의 만남은 그에게 천주교 교리의 핵심을 파악하게 만드는 위대한 도약의 계기를 허락하는 것이었다.” 또 그 “책은 겉장이 뜯겨져 나갔을 것이고(그래서 ‘天主實義’임을 즉각 알지 못하였을 것이고), 천주의 천지창조 그리고 만물을 주재안양(主宰安養)하는 천주에 대한 바른 이해를 촉구하는 중사(中士)와 서사(西士)의 논쟁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다. (106쪽)
④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는 본인의 주장에 (생전에) “표영삼 선생님도 충심으로 동의하시었고, 윤석산도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하였고, “성주현도 을묘천서는 천주실의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106쪽)
⑤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를 읽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또 다른 논거로 「포덕문」과 「논학문」에 나오는 ‘상제’나 ‘천주’라는 단어와 수운 선생이 제자들과 나누는 문답의 형식이 천주실의의 구성방식을 구대로 따르는 점을 들었다.
또 도올 선생은 동경대전(통나무) 주해에서, 을묘천서란 곧 천주실의라는 전제하에서 수운 대신사가 을묘천서(도올로서는 천주실의)를 얻어서 본 사건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① “동학의 제1의 원리는 인간의 자율성이요, 인간이라는 존재 내에 이미 모든 천지의 조화가 구비되어 있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수운이 (을묘천서=천주실의를 읽고 : 필자 주) 내린 최종 결론은 ‘서학(천주교)은 기도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정확한 파악이고 핵심적 요약이다.”(106쪽)
② “기도는 자율의 세계가 아니라 타율의 세계요, 의타적(依他的) 구원을 희구하는 것이다. 수운은 을묘천서, 즉 천주교의 핵심 교리와 본격적으로 해후하면서 타율적 구원과 자율적 구원의 문제를 동시에 삶의 과제상황으로 껴안게 된다.”(106~107쪽)
③ “그래서 그는 ‘하늘님(天主)’(=하느님)과의 만남을 추구하게 되지만, 그는 하늘님을 만나는 순간 이미 그 타자와 인간의 모든 수직적 관계를 부정해 버린다. 천주(天主)에 대한 그의 추구는 초월과 내재, 인격성과 자연성, 자율과 타율, 수직과 수평의 모든 얽힘을 일소타기(一笑打棄)해 버리는, 인류사에 그 유례가 없었던 신성(Divinity)과 인성(Humanity), 그 양방향의 도약이었다.”(106~107쪽)
④ 수운이 을묘년에 천주실의(=을묘천서: 필자 주)를 읽음으로써, 수운은 아리스토텔레스 - 토마스아퀴나스 - 마테오리치로 이어져 오는 서양의 철학과 단군 이래의 우리 민족의 사상의 맥락을 모두 아우르고, 서학(마테오리치)(과 고유사상?)의 한계를 일거에 혁파하고, 동학을 창도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수운의 동학은 “우주적인, 전 인류사의 지성사가 종합되고 깨져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 천주실의(=을묘천서)를 만난 사건이다. (도올 선생의 <동경대전> 유튜브 강의, 15, 16, 17, 18화)
도올 선생은 원 사료에 ‘한 권의 책[一卷書]’으로 표기된 천주실의를 후대의 천도교 학자나 천도교인들이 ‘乙卯天書)’라고 신비화하고, 또 그것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의 이야기를 신비화하였다고 비판한다. 즉 수운이 ‘선사’를 ‘신비한 효험(神效)’이라거나 ‘신인(神人)인 줄 알았다’‘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因忽不見]’ 등의 표현은 수운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오히려 본지(本旨)를 왜곡하는 후대 ‘천도교인’들의 신비화 작업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도올 선생은 수운 선생의 동경대전에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천도교인들의 ‘수운에 대한 신비화’의 욕구로 말미암은 요소들을 걷어내고 보면, 소위 을묘천서라는 것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그것은 천주실의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2. 천주실의는 어떤 책인가?
천주실의는 1603년에 초판이 출간되었으며, 을묘년(1855)을 기준으로 할 때 이미 250년이나 된 책이다. “모두 8편으로 나누어 174항목에 걸쳐서 서사(西士: 서양학자)와 중사(中士: 중국학자)가 대화를 통하여 토론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가톨릭 교리서이며 호교서(護敎書)”로서 “(중국학자는) 전통 유학과 불교, 도교를 주로 논하고” “(서양학자는) 스콜라철학과 선진유학(上帝 信仰이 비교적 온존해 있던 유학-필자주)의 고전을 들어 천주교의 교리를 펴고, 그 사상을 이론적으로 옹위(擁衛)하는 형식”으로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책이다.
제1편은 신의 존재증명을 시도한다. 제2편은 불교와 도교의 공(空) 사상을 논박하고 유교의 태극설(太極說)을 옹호하며, 상제(上帝)의 11가지 성격을 설명한다. 제3편은 천국의 필요성과 식물의 생장력, 동물의 감각력, 인간의 지적 영혼의 특성의 차이를 설명한다. 제4편은 인간의 영혼이 신령하다는 것과 악마의 지옥의 기원에 대한 범신론적 일신론을 논박하였다. 제5편에서는 윤회설을 중심으로 동양(인도, 중국)과 서양의 회통 가능성을 소개하였다. 제6편에서는 지옥, 천국 및 연옥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고 그 비판에 대한 재비판을 전개하였다. 제7편에서는 천주와 인간성, 천주의 사랑, 그리스도교설 등을 설명하며 ‘신앙’과 ‘사랑’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제8편에서는 유럽의 문화, 제도 및 천주교의 성직제도(獨身制)를 설명하고, 중국의 종교문화의 잡다함을 비판하였다. 끝으로 원죄(原罪)와 천주강생(天主降生)의 설을 말하고, 천주교에 귀의할 것을 강조한다.
천주실의의 핵심 요지는 “첫째, 우주만물에는 창조주와 주재자가 존재하여 끊임없이 만물을 안양(安養)하고 있으며, 둘째, 인간 영혼은 불명한 것으로 후세에 각자의 행실에 따라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응징이 있음을 밝혔다. 셋째, 불교의 윤회설을 배격하고 오로지 사랑의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고, 중국 고경(古經)에 이미 이와 같은 가르침이 밝혀져 있으니 공부하고 귀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천주실의는 유몽인의 어우야담(1623년 이전)에 8편의 편목(篇目)이 소개되었고,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 간행)에서도 편목을 열거하고 있다. 이로 보아 중국에서 출간된 지 늦어도 20년쯤 후에는 조선에 그 내용이 소개되고 있었다. 이후 “이익(李瀷)이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을 필두로 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이헌경(李獻慶) 등이 천주실의와 그 밖의 서교서(西敎書)를 읽고 각기 서학변(西學辨),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 등을 펴내어 유학적 관점에서 예리하게 논평하였다.
반면 천주실의를 기반으로 서학(西學=서양의 종교, 과학 등 학문 전반)에 대한 관심과 연구, 그리고 이를 넘어 ‘천주교 신앙’으로까지 나아간 사람들도 있으니,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노력의 결실로 1784년(정조 8년)에는 이미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천주교가 민중들에게 전파되어 감에 따라 천주실의 한글본이 18세기 중엽에 이미 전파되고 있었다.
천주실의가 이처럼 이미 조선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을 들어 천주실의를 ‘희한지서(稀罕之書)’로 보고, 수운 선생을 만나기 전까지 전국을 돌며 그 내용을 해독하려 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은 이미 여러 사람으로부터 나온바 있다. ‘선사(禪師)’가 오랫동안 유점사에 칩거하며 수행하는 이라 이 책의 실체를 알지 못하였다고 상정하여도 그 결론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올 선생 또한 이 책이 당대 지식 사회에서 ‘핫 이슈’였지만 “범인(凡人)들이 이 책을 접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하여 ‘선사(禪師)’가 이 책에 유독 무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도(道)를 구하기 위하여 전국을 두루 돌아다닌 주유천하(1844~1854)를 했던 수운은 이 책을 접하지 못했을 ‘범인’에 속할 가능성보다는 접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수운의 여러 글을 보아, 수운이 서학에 대한 일반적인 소문 정도는 이미 충분히 듣고 있었다는 점도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대선생주문집의 기사(記事)는 ‘천주실의’의 내용을 두고 선사(禪師)와 토론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훗날 수운이 남원 은적암에 은거하면서 선국사의 송월당 스님과 ‘유도, 불도, 선도’를 화제(話題)로 삼아 토론한 기록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의 소문만 듣고 있다가 그제서야 그 책을 얻게 되어 ‘심찰투리(深察透理)’하는 과정을 거치고 그 내용을 수용하였을 개연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래에서는 이 점에 대하여 주로 천주실의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3. 유학의 책인 듯도 하고, 불가의 책인 듯도 하다
도올 선생은,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고 하는 중요한 첫 번째 논거로 그 책이 “유학의 책이라고 할 수도 없고, 불가의 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책”이어서 “도무지 문장의 이치가 온당치를 않아 그 진의를 풀어 깨닫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라고 한 대선생주문집의 설명을 들었다. 이는 그 책이 그때까지 한반도 내지 동아시아 전통에서 벗어난 문법 체계나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사상적 근본 체계가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즉 ‘천주교(天主敎)’라고 하는 ‘서양철학’과 ‘서양종교’ 전통에 입각한 내용을 한문으로 쓴 책이므로, ‘한문만 알아서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천주실의는 도올 선생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미 ‘사서(四書: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번역을 마칠 만큼 유학에 대한 수련을 거친 마테오리치가, 원시유학의 상제(上帝)가 곧 천주교의 천주(天主)임을 대단히 논리적으로 풀어나간 글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천주실의의 초판 서문, 첫 문장을 보면 이러한 정황이 분명히 드러난다.
천주실의는 대서방국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 및 그의 수도회원들이 우리 중국인들과 문답한 글이다. 천주(天主)란 무엇인가? ‘하느님’[上帝]이다. ‘실(實)’이라 함은 공허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중국-필자 주)의 육경(六經: 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과 사서(四書: 논어, 대학, 중용, 맹자)에서 여러 성현(聖賢)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라![畏上帝], 하느님을 도우라![助上帝], 하느님을 받들라![事上帝], 하느님과 교감(交感)하라![格上帝]고 말하였다.
천주실의 재판의 서문은 좀더 직접적으로 공자를 언급하고 있다.
옛날 우리 공자님은 수신(修身)을 말하였다. 먼저 어버이를 섬기고 미루어 나가서 하늘[天]을 아는 것이다. 맹자(孟子)의 “[도심(道心)을] 보존하고 [본성을] 길러서 하늘을 섬긴다”[存養事天]는 논의에 이르러 이 뜻이 크게 갖추어졌다. 앎에 있어서나 일을 함에 있어서, 하늘 섬김과 부모 섬김은 같은 한 가지 일이니, 하늘은 이런 섬김들의 대근원이다.
마테오리치 본인의 천주실의 서문은 좀 더 은근하지만, 역시 유학적 맥락에서 낯설거나 투박하지 않아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온 천하를] 화평하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상(日常)의 도리는 궁극적으로 [마음을] 오직 ‘하나로 함’에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현자와 성인들은 신하들에게 충성스런 마음을 권하였습니다. 충성은 두 [마음]이 없음을 말합니다. 오륜(五倫)은 군주(君主)에 관한 것을 첫째로 삼고,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삼강(三綱) 중에서 으뜸입니다. 무릇 바르고 의로운 사람들은 그 점을 분명히 깨닫고 그것을 실천합니다.(천주실의, 29쪽)
수운 대신사는 선사(禪師)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책을 ‘펼쳐보자’ 마자 ‘유학의 책이라고 할 수도 없고, 불가의 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책으로서 문리가 타당하지 않아 이해하여 깨닫기가 어렵다’[(於儒於佛之書 文理不當 難爲解覺]고 하였으므로, 책의 전반을 살핀 이후라기보다는 그 초반부만을 살핀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서두만 보았다 하더라도, 이 책이 유학과 관련 지어 말하는 바가 뚜렷하므로) 벌써 천주실의와의 연관성은 멀어지고 있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문리가 타당하지 않아 이해하여 깨닫기가 어렵다’라는 대목이다. 오늘날은 천주실의의 원문(영인본)과 번역본까지 나와 있으므로, 그 내용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결코 어렵다’고 말할 수 없다. 신(上帝)의 존재 증명이나 성격에 대해서도 최대한 ‘유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며, ‘천국-지옥’이란 것도 불교적 천당-지옥을 떠올려서 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것도 허령(虛靈)이나 지각(知覺) 등의 유학적 논리로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 밖에 천주의 인간성, 사랑, 신앙(信仰)을 비롯하여 유럽의 문화와 제도 등에 대해서도 결코 난위해각(難爲解覺)이라고 할 만한 점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그 논리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조선의 유학자들이 여러 측면에서 밝혀 두었으므로 재론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수운은 물론이고, 그 책을 가져온 선사(禪師) 정도의 지식 수준(도올의 짐작대로 유교나 불교에 소략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다. 그리고 그 책을 들고 이해할 만한 사람을 찾는다면(앞장이 뜯겨 나가서 ‘천주실의’임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주변의 ‘천주학쟁이’를 찾아가는 길이 훨씬 손쉽고 간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천주실의의 서문으로 볼 때 대선생주문집의 어유어불지서(於儒於佛之書)는 “유학의 책이라고 할 수도 없고, 불가의 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책”이라는 뜻이기보다는 어(於)를 ‘기대다, 의지하다’의 뜻으로 보아 “유학에도 의지하고, 불가에도 의지하여 (논리를 전개한) 책”으로 풀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문리부당(文理不當), 즉 “(용어들은 생소하거나 어렵지 않으나) 그 문장의 내용은 타당하지 않다, 마땅하지 않다”는 뜻으로 본다면, 일단은 좀 더 논의를 진행해 볼 수 있다.
4. 그 책의 핵심 가르침은 “기도하라”는 것이다
1) ‘기도’는 곧 천주교, 천주실의의 논리인가
도올 선생은 을묘천서(도올은 천주실의) 사건의 기본 메시지가 “이 책의 내용대로 하옵소서”라는, “천주교 선교사”의 언행과 결부된 것으로 ‘책의 내용’, 즉 핵심적 메시지는 “기도하라는 가르침”이라는 점을 들어 이 책이 천주실의라고 말한다. 이 ‘기도지교(祈禱之敎)’에 따라 병진년(1856)과 정사년(1857)에 걸쳐 양산 내원암과 천성산 적멸굴에 들어가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본다.
(을묘-병진-정사) 이 세 해의 (수운의) 삶의 역정을 지배하는 테마는 “기도(祈禱)”이다. 전술하였듯이 기도란 막연하게 절이나 하는 행위가 아니다. 절간에서 기도하는 사람이든, 산천 성황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이든, 십자가가 꽂힌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이든 기도란 어떤 내면의 소망을 비는 것읻. 그 소망을 성취시켜 주는 외재적 타자(the other)가 설정되어 있을 때, 기도의 행위는 리얼한 방향성을 갖는다. 사실 기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기독교나, 불교나, 무속이나, 신선사상이나 똑같다. 의타적 성격이 공통되는 것이다. 사실 오직 유교만이 “기도”를 배제하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수운은 천주실의를 만난 후부터 “천주(天主)”(하늘님)의 의미를 리얼하게 느끼기 시작했고, “기도”를 삶의 주제로서 새롭게 발견하였다. 그것은 그가 이미 10년(1844~1854) 동안의 주류팔로에서, 기독교(천주교)야말로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장차 이 민족의 최대 과제 상황이 될 것이라는 주제를 심각히 각성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동경대전(통나무), 110쪽)
그런데 ‘기도’라는 말을 가지고 이것이 천주교와 관련된 서적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계속할 수는 없다. 오늘날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도(祈禱)’라는 말을 검색하면 총 751건의 용례가 검색된다. 태조 때에 2회를 비롯하여 세종 27회, 세조 23회, 성종 34회, 숙종 22회 등이이며 그 밖에도 1회에서 8회 정도의 용례가 나타난다. 최초의 용례인 태조 7년 3월 3일의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한글 번역본을 필자가 요약적으로 정리)
환관인 조순이 (태조의) 어머니의 병환이 급한 때를 당하여 (중략) 임금께서 깊이 염려하시어 기도(祈禱)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그 제기(祭器)들을 몰래 제 집으로 들여갔으니,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어 죄가 목을 베임에서 용서될 수가 없는데도….(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7년, 3월 3일자) (강조 밑줄 필자)
세종 임금대의 첫 기사는 세종 3년 6월 14일자에 보인다.
(전략) 무릇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서울의 여러 문(門)에 영제(禜祭)를 올리되, 각 문마다 3일 동안 매일 하고, 한 번 영제를 지내도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이에 산천(山川)·악진(岳鎭)·해독(海瀆)에 3일 동안 기도(祈禱)하며,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사직(社稷)과 종묘(宗廟)에 기도하며, 주현(州縣)에서는 성문(城門)에 영제를 지내고, 경내(境內)의 산천에 기도(祈禱)한다.(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3년, 6월 14일자) (강조 밑줄 필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식의 기사가 무려 750여회나 보인다는 말이다. 조선 초기 세조 대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예종 이후 이 실록의 기자(記者, 史官)들은 ‘유교적 사고방식’에 투철한 소장 관리들이 맡았을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따라서 도올 선생이 “오직 유교만이 ‘기도’를 배제하는 종교”라고 한 말은 재고의 여지가 많다. 다시 말하면, ‘기도(祈禱)’라는 말로써 ‘천주교의 영향’을 말하는 것은 다른 수많은 방증 자료를 필요로 하는 논리라는 말이다.
도올 선생의 말 대로 수운이 천주교의 핵심 교의를 기도(祈禱)라는 것으로 (해석적인 견지에서)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수운 대신사는 오히려 서학(천주교)의 기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서양 사람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순서가 없으며 도무지 한울님을 위하는 단서가 없고 다만 제 몸만을 위하여 빌 따름이라. 몸에는 기화지신이 없고 학에는 한울님의 가르침이 없으니 형식은 있으나 자취가 없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주문이 없는지라, 도는 허무한데 가깝고 학은 한울님 위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다름이 없다고 하겠는가.」(西人 言無次第 書無皂白而 頓無爲天主之端 只祝自爲身之謀 身無氣化之神 學無天主之敎 有形無迹 如思無呪 道近虛無 學非天主 豈可謂無異者乎)(동경대전「논학문」)
여기서 서양 사람을 ‘서학-천주교’인으로 볼 수 있다면, 수운은 그들의 기도는 (1) 한울님을 위하기보다 제 몸만을 위하여 빌고 (2) 기화지신이 없다고 비판한다. 이 또한 천주실의의 내용을 보고 비판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천주교인들의 신앙 행태에 대한 전언을 기반으로 한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다.
2) 천주실의의 핵심은 ‘기도’인가?
좀 더 심각한 쟁점은 과연 천주실의의 내용의 핵심을 ‘기도지교(祈禱之敎)’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앞에서 천주실의의 핵심은 첫째, 상제, 즉 천주가 우주만물을 주재한다는 것, 둘째, 상제(천주)가 이승에서의 행실의 선악에 따라 후세에 상벌(賞罰)을 가한다는 것, 셋째, 오직 ‘사랑의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라 하였다.
수운 대신사가 이러한 내용을 ‘깊이 살피고 그 이치를 헤아려본’ 끝에, 우주를 주재하고 선악을 상벌하며, 신앙의 대상이 되는 천주와 직접 상면(相面)하거나 소통(疏通)하기를 원하여 ‘기도(祈禱)’하기로 결심하였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는 수운 선생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지 “천주실의에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있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면, 다시 말해 수운 대신사가 을묘년에 받아 본 책이 천주실의라면 가장 중점적으로 들여다볼 핵심 관건은 ‘주재자로서의 천주’의 존재에 대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 ‘천주실의’인 점을 보아도 그러하고, 마테오리치가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동양의 전통적인 ‘상제’가 곧 ‘(천주교의) 천주’라고 말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도올 선생은 선사(禪師)가 가져 온 책의 ‘앞부분 몇 장이 찢겨져 나갔을 것’이며 그 때문에 선사(禪師)나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의 제목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군색(窘塞)해 보인다. 도올 선생은 이 책(천주실의 또는 을묘천서)을 가져다 준 선사가 ‘천주교 선교사’일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런 인물이라면 더욱이 ‘앞 장이 뜯겨져 나간 책’을 들고 다니며 천주교를 포교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천주’ 한 글자를 지향하고 (그 천주가 곧 상제임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주’라는 말을 건너뛰어서 ‘기도’로 바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도올 선생 역시 을묘천서(도올은 천주실의)의 내용에 따라 진행한 내원암과 적멸굴의 기도에서 ‘천주강령(天主降靈)’을 기원하였다는 사실로써, 수운이 천주실의를 통해 “천주(天主)(하늘님)의 의미를 리얼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을 논증하고, “‘기도’를 삶의 주제로서 새롭게 발견하였다.”고 논리를 전개한다.(동경대전(통나무), 110쪽)
천상산(天上山: 千聖山의 오식이다. 천성산에 있는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을 목표로 기도하였다)에서 삼층의 지성단을 결축하고[結築三層壇], 49일기도를 완성하리라 미음의 설계를 굳게 하였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항상 염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하느님[天主]께서 자기에게 영(靈)을 내려주실 것을 축원하였다. 단지 하느님의 명교(命敎)가 있으리라는 것을 대망할 뿐이었다.(동경대전(통나무), 107~108쪽)
여기서 도올은 “결축삼층단” 등의 구절을 들어 “우리 민족의 전통적 민속신앙의 분위기를 따른 것”으로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광신적 접신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하였고, ‘천주강령’이라는 말은 “천주가 하늘 꼭대기에 있고 영을 내려 보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천주 그 자신이 강림한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수운의 기도의 주제는 '천주와의 만남(Encounter with God)'이었던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의 천주실의가 결론적으로 강조하는 바는, 첫째, 이전의 허물을 뉘우치고 진실한 마음으로 ‘선’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 둘째, 한결같이 천주의 성스러운 교회로 인도하여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라고 하였다.(천주실의, 429쪽) 그러나 수운은 천도교를 창도할 당시에 ‘천주교’에 대하여 이와는 전혀 다른 인상(印象)을 가지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글로 써서 반포하였다.
경신년에 와서 전해 듣건대 서양 사람들은 천주의 뜻이라 하여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 하면서 천하를 쳐서 빼앗아 그 교당을 세우고 그 도를 행한다고 하므로 내 또한 그것이 그럴까 어찌 그것이 그럴까 하는 의심이 있었더니….(동경대전「포덕문」)
경신년 사월에 천하가 분란하고 민심이 효박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즈음에 또한 괴상하고 어긋나는 말이 있어 세간에 떠들썩하되, 「서양 사람은 도성입덕하여 그 조화에 미치어 일을 이루지 못함이 없고 무기로 침공함에 당할 사람이 없다 하니 중국이 소멸하면 어찌 가히 순망의 환이 없겠는가.」 「도무지 다른 연고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라 하고 학을 천주학이라 하고 교는 성교라 하니, 이것이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동경대전「논학문」)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수운이 ‘천주교’의 행태에 대한 ‘풍문’ 수준의 상식만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교당을 세우고 그 도를 행한다’는 말은 천주실의에도 자세히 나오는 내용이지만, 이에 대해서도 ‘경신년’의 시점에도 여전히 ‘의심이 있었다’고 하였므로, 을묘년에 천주실의를 접하여 그 구체적인 주장을 파악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유학적 소양에 깊이 침윤되어 있었던 수운 대신사의 눈으로 볼 때 (18세기 조선의 많은 유학자들이 그러했듯이) 천주실의를 보았다면, 그에 대해 부정적, 비판적인 논평이든, 또는 긍정적인 입장이든 훨씬 더 풍부한 에피소드가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의 에피소드로서 전해져 왔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기록에는 천주실의의 풍부한 논변에 관해서는 극히 간접적인, 최소한의 연계성을 짐작할 만한 에피소드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을묘천서는 바로 천주실의’라는 직접적인 주장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과 달리,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를 읽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견해도 많은 편이다. 이런 관점으로 천주실의를 읽어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여기저기에 눈에 띈다. 그러나 이 또한 천주실의가 주로 상제(천주)의 존재증명이나 그것이 동아시아의 상제와 동일한 존재임을 논증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천주실의에 등장하는 상제는 매우 최대한 ‘동양화된’ 특징을 띤다는 점 때문에 생기는 착시현상일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천주실의의 신관을 좀더 면밀히 검토해 보는 별도의 논의(글)에서 새롭게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본다.)
5. 사제(師弟) 문답과 중사(中士)-서사(西士) 문답
도올 선생은 동경대전(통나무) 2권의 「포덕문」과 「논학문」을 주해하면서, 거기에 등장하는 ‘상제’나 ‘천주’의 용어와 그 함의로 볼 때 수운이 천주실의를 통독하였음을 보여준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특히 「논학문」에서 수운이 (용담정으로 수운을 찾아온) 선비들과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동학의 핵심 교의(敎義)을 해설해 나가는 장면은 천주실의가 중사(中士), 즉 중국의 지식인과 서사(西士), 즉 서양의 지식인 사이의 문답으로 천주교의 교의를 해설하고 설득해 나가는 구성양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수운이 천주실의를 통독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한다.(동경대전(통나무) 2권, 135쪽)
필자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서 나타나는‘천사문답(天師問答: 한울님과 수운 최제우의 문답)’과 ‘사제문답(師弟問答: 수운과 제자/선비들 사이의 문답-이것은 필자가 命名한 것이다)’이 동학의 중요한 ‘공부방법’이라는 점을 주목하여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답’ 형식은 동학이나 천주실의만의 특징이라고 말하기에는 논어를 비롯한 동양의 고전들이 이미 익숙하게 취하고 있는 경전의 구성방식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을 근거로 수운이 천주실의에 깊이 감명을 받았고, 나아가 특히 을묘천서가 바로 천주실의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몇 단계의 비약이 필요한, 무리수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6. 동학과 신비주의, 그리고 천도
을묘천서가 천주실의가 아니라면, 을묘천서는 도대체 무슨 책일까?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의 장이 필요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필자의 견해(결론)만을 밝히는 것으로 갈음한다. 을묘천서는 ‘천도교’의 지식인들이 일찍부터 이해한 바대로,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동학 연구자나 천도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대로 ‘수운의 신비체험’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경신년(1860) 4월 5일의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기 전에 그 징후(徵候) 또는 전(前) 단계로서 수운 대신사의 간절한 구도(求道: 나아갈 길)의 물음에 대하여, ‘기도를 해 보자’는 홀연한 몽득(夢得-如夢如覺之間의 得道)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홀연한, 비몽사몽간의 각성과 득도’는 일종의 ‘강화(講話)’ 체험으로서 많은 천도교인 또는 수도인(修道人)들이 경험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수운 대신사도 용담유사 곳곳에서 ‘만고 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받아내어(「안심가」)’ ‘꿈일런가 잠일런가 무극대도 받아내어(「교훈가」)’와 같은 노래를 남긴 것이다.
먼저 짚어 볼 것은 도올 선생이 어떤 맥락에서 “동경대전에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그 논거를 찾기가 어려우므로(동경대전(통나무) 2권의 주해 부분에서도 ‘종교 체험’이라는 객관적인 용어로만 쓸 뿐 그 성격이 ‘신비체험’이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고 수운의 합리적인 사고 과정인 것으로 풀어나간다), 대부분의 동학 연구자나 천도교인들이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그리고 동경대전 본문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동경대전은 시종일관 신비체험을 관통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동학은 일반적으로 신비체험, 또는 종교체험이라고 부르는 ‘한울님과 수운 대신사의 대화’ 즉 ‘천사문답(天師問答)’라는 ‘신비한 현상에 대한 경험’ 즉 신비체험 과정을 통해서 동학의 창도와 교리의 체계화 과정이 전개된다.
「포덕문」에서는 스스로를 ‘상제라고 불리는 존재’라고 밝히고, 서도(西道)가 아닌 ‘영부’와 ‘주문’으로서 세상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세상 사람들을 가르쳐서 나[한울님, 또는 한울님을 모신 모든 존재]를 위하게 하라고 한다. 「논학문」에서는 역시 천사문답 경험을 통해 ‘한울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수련하고 글을 정리하여 사람들을 가르라는 천명(天命)을 받는다. 여기서 수운이 마주한 ‘한울님’(上帝, 天主)는 ‘기도지교’보다는 ‘영부’와 ‘주문’을 통해 ‘수이련지(修而煉之)’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는 수운은 ‘수행’과 ‘수양’의 도로서 동학을 창도한다. 이는 천주실의의 요지(要旨)와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도올 선생이 이번에 동경대전을 동학경전의 ‘일지(一指)’로 꼽으며 거의 도외시하는 용담유사에서는 동경대전보다 훨씬 더 생생한 ‘신비체험’‘종교체험’의 장면이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은 도올 선생이 찬양하는 “천주 그 자신이 강림하는 체험”을 수운이 직접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용담유사의 「몽중노소문답가」는 이 을묘천서 이야기를 수운 자신이 직접 가사(歌詞)로 창작해 낸 것이라는 점에서 앞서 말한 몽득(夢得)과 신비한 체험의 정황이 후세 사람들이 수운을 신비화하거나 신격화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노래는 수운 선생이 당신의 생애를 상징적인 이야기로 구성하여 노래한 것으로 두 부부(근암 최옥 부부)가 금강산에서 빌어서 낳은 자식(수운 대신사)이 어려서부터 비범하였으나 이 세상이 혼탁(君不君臣不臣父不父子不子)한 것을 밤낮으로 걱정하다가 “처자 산업 다 버리고 팔도강산 다 밟아서 인심 풍속을 살피다가(=周遊八路, 이 과정에 ‘西學’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흉중에 가득한 회포를 일거에 타파하고 집으로 돌아가 백가시서나 외워 보자고 다짐하며 돌아오는 길에 금강산에 들러 잠깐 잠이 들었다가 ‘우의편천일도사(깃털로 된 옷을 입고 나타난 한 도사)’로부터 무극대도의 창도에 대한 계시를 받는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 결론 부분은 다음과 같다.
金剛山 上上峯에 잠간 앉아 쉬오다가 홀연히 잠이 드니 夢에 羽衣褊褼一道士가 曉諭해서 하는 말이 (중략) 天運이 둘렀으니 근심 말고 돌아가서 輪廻時運 구경하소 十二諸國 怪疾運數 다시 開闢 아닐런가 太平聖世 다시 정해 國泰民安 할 것이니 慨歎之心 두지 말고 차차차차 지냈어라 下元甲 지내거든 上元甲 好時節에 萬古 없는 無極大道 이 세상에 날 것이니 너는 또한 年淺해서 億兆蒼生 많은 백성 太平曲 擊壤歌를 不久에 볼 것이니 이 세상 無極大道 傳之無窮 아닐런가 天意人心 네가 알까 한울님이 뜻을 두면 禽獸 같은 세상사람 얼풋이 알아내네 나는 또한 神仙이라 이제 보고 언제 볼꼬 너는 또한 仙分 있어 아니 잊고 찾아올까 잠을 놀라 살펴보니 不見其處 되었더라.
이 「몽중노소문답가」와 을묘천서 사건 이야기를 조동일은 같은 이야기의 변형형으로 보았다.
노래(몽중노소문답가)
이야기(을묘천서)
세상 근심으로 고민하다가
잠이 들어서
금강산 상상봉에 올라가서
신선의 옷을 입은 노승을 만나
하는 말을 듣고서
그 말을 알아듣고
이치를 깨달아
잠을 깨서 살펴보니
보이지 않았다.
세상 근심으로 고민하다가
잠이 들어서
금강산에서 왔다고 하는
늙은 선승을 만나
주는 천서를 받아서
그 말을 해독하고
이치를 깨달아
(선승은) 계단을 몇 발자국 내려가더니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을묘천서 이야기는 수운 스스로도 감추지 않았던 이야기(경험)였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을묘천서 이야기는 역대 동학-천도교의 사서(史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또 수운 선생 당대에도 이 이야기가 동학과 수운의 포덕 행위에서 중요한 이야깃거리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즉 수운을 체포하기 위하여 어명을 받고 경주에 도착한 정운구가 수집한 이야기를 보고한 내용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정운구가 탐문한 바에 따르면 수운은) 대여섯 해 전에 울산에 이사를 가서 살면서 무명을 팔아 생계를 삼는다 하더니, 홀연 근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다음에, 사람들에게 도를 펴면서 말하기를, “나는 정성을 다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왔는데, 하늘에서 책 한 권이 내려온 것을 다른 이들은 무슨 글자인지도 몰랐으나, 나만 홀로 알아서 도를 닦았다. 그것을 공부해 익혔으므로 이제 사람들에게 가르치노라.”고 했다.
수운 선생의 ‘신비체험’(주로 한울님의 降話의 가르침)은 최소한 1863년 10월 28일(수운 선생의 탄신일)까지는 계속되었다. 이 날의 상황을 도원기서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10월 28일은 선생의 생신이다. (중략) 선생이 수저를 들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세상이 나를 천황씨(天皇氏)라고 일컬을 것이다.” (중략)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전에 한 꿈을 꾸었는데 태양의 살기(殺氣)가 왼쪽 넓적다리에 닿자 불로 변하여 밤새도록 타며 사람 인(人)자를 그렸다. 깨어서 넓적다리를 보니 한 점 붉은 흔적이 생겨 사흘을 남아 있었다. 이로써 항상 근심이 되었고 마음속으로 장차 화(禍)가 이를 것을 알고 있었다.” 하였다. 이때부터 상제(上帝)께서 강화(降話)의 가르침을 거둬들이고, 다만 시석(矢石)을 피하는 법만 가르치셨다. 이후로 강화(降話)가 끊어졌다. (밑줄 필자, 밑줄 친 부분은 대선생주문집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기사가 나오던 1863년 10월 전후로 수운 대신사는 「흥비가」, 「불연기연」, 「전팔절.후팔절」 등을 ‘교리 완숙기(完熟期)’의 경편(經篇)들을 집중적으로 집필하였다. 이 완숙기 경편들의 특징은 일체의 신비적 요소가 배제되고 ‘무궁한 이 울 속의 무궁한 나’를 향한 ‘무궁한 사색과 명상’ 그리고 ‘한울님과 나’ 사이에 사이가 없는[無間] 경지, 현상과 실재[한울]가 표리부동[不然其然]한 시정지(侍定知)을 완전히 구현하였다는 데 있다.
도올 선생의 주장을 선의로 해석할 때, 필자가 보기로 빈약한 논리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는 점을 애써서 주장하는 중요한 이유는 수운이 천주실의를 깊이 읽고 그 핵심을 기도(祈禱)와 천주강령(天主降靈)으로 파지(把持)하였다는 것으로써, 수운이 동양과 서양 즉 전 지구를 아울러서 “우주적인, 전 인류사의 지성사가 종합되고 깨져 들어가는”(유튜브 강의) 깨달음으로서 동학을 창도하였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으로 본다.
사실 대중들이 도올 선생의 동경대전을 널리 읽고, 또 유튜브 강의에 열중하는 까닭은 도올 선생이 기존의 동학-천도교의 학설을 비판을 하면서 동경대전에 대한 해석적 쟁점들을 부각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도올 선생이 동경대전에 대한 독자적인 이해를 시도하면서도 궁극적으로 그 참된 의의이 “우주적인, 전 인류사의 지성사가 종합되고 깨져 들어가는” 것임을 종합적으로 밝히고, 그것을 역사기록(대선생사적)과 핵심 경전(동경대전)을 통해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풀어주는 데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의 목적도, 도올 선생의 세세한 의견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올 선생의 진정성을 함께 읽고 공감하는 자세를 기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고 하는 도올 선생의 주장이 동학에서 신비체험이나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는 데에 중요한 목적이 있다거나, 결과적으로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을 읽었다’는 사실을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간에) 감추었다는 식으로 비쳐지게 되는 것은 유념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에 이 점을 집중적으로 논의하는 것이다.
“우주적인, 전 인류사의 지성사가 종합되고 깨져 들어가는” 깨달음, 또는 그러한 지향으로서의 동학의 창도를 다른 말로 하면 ‘다시개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수운이 천도교(동학)을 창도한 것은 ‘다시개벽’을 선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운은 한울님을 만나는 종교체험, 신비체험을 통해 천도(동학)를 받는 상황이 곧 개벽적 사건이라는 점, 그리고 자신이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바로 또 십이제국 괴질운수를 ‘개벽’하는 것 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개벽시(開闢時) 국초(國初) 일을 만지장서(滿紙長書) 나리시고 십이제국(十二諸國) 다 버리고 아국운수(我國運數) 먼저 하네 (중략) 한울님 하신 말씀 개벽(開闢) 후 오만년(五萬年)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成功)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得意) 너희 집안 운수(運數)로다. (용담유사「安心歌」)
가련(可憐)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我國運數) 가련하다 전세임진(前世壬辰) 몇 해런고 이백사십 아닐런가 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開闢) 아닐런가. (용담유사「安心歌」)
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開闢) 아닐런가 태평성세(太平聖世) 다시 정(定)해 국태민안(國泰民安) 할 것이니 개탄지심(慨歎之心) 두지 말고 차차차차 지냈어라 하원갑(下元甲) 지내거든 상원갑(上元甲) 호시절(好時節)에 만고(萬古)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이 세상에 날 것이니…. (용담유사「夢中老少問答歌」)
이상에서 수운 대신사의 개벽에 대한 담론은 한마디로 ‘다시개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운 대신사는 ‘선천’과 ‘후천’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다시’라는 말로써 개벽의 의미가 ‘새로움을 가져오는 것’[開闢時 國初日, 네가 또한 처음]이 ‘실패를 딛고 다시 하는 것’[勞而無功 遇汝成功]이며 ‘낡은 세상이(/을) 변혁되어(/하여) 이상적인 세상이 오(/만드)는 것’[괴질운수 다시개벽, 상원갑-하원갑]이라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이처럼 도올 선생이 강조하고자 하는 “우주적인, 전 인류사의 지성사가 종합되고 깨져 들어가는” 동학의 의의는 ‘다시개벽’ 이하의 개벽사상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올 선생이 ‘을묘천서=천주실의’에 깊숙이 매달리는 까닭은 ‘다시개벽’애 대해 더 풍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용담유사를 (적어도 동경대전(통나무)를 집필하고 전파하는 데 집중하는 현시점에서는) 의도적으로 도외시하는 데서 비롯된 상황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7. 나가는 말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필자는 도올 선생이 동학과 천도교를 위하고자 하는 선의를 기반으로 천도교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비판의 끝자락이 항상 ‘내 설만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는 쪽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마음과, 무엇보다 우리 천도교인들은 고명한 학자들의 고견을 익히 듣되 이를 천도교인의 주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필자에게 도올 선생은 은사(대학 시절 철학 수업을 수강하였다)이시고, 이번 동경대전(통나무)을 간행하기 전후로 필자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필요한 서적을 구입하시면서 필자의 동학-천도교 출판 사업을 격려해 주셨으며, 그리고 친필 사인을 하셔서 동경대전을 증정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바로 그 책을 보며 이 글을 썼다.
도올 선생은 “을묘천서는 천주실의이다”라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천도교인(/단)’이 ‘종교적 편향성’이나 무지함 때문에 수운 이야기의 진실을 왜곡했다’고 이야기하거나, 또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일부 천도교인들의 뜻을 부정확하게 인용(‘수운이 천주실의를 보았을 것’이라는 소극적 동의를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고 하는 내 주장에 동의하였’다고 하는 등)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우리로서 우려가 되는 대목은 도올 선생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상 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듣고 천도교를 더욱 벽안시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며, 특히 일부 천도교인들까지 그 주장에 귀를 솔깃하며 마음을 빼앗기는 현상이다. 그 밖의 도올 선생의 많은 ‘천도교인(/단) 비판’ 중에는 천도교인(/단)이 뼈아프게 들어서 새기고 또 스스로 가다듬어 가야 할 대목도 있지만, 참고로만 할 뿐 동의할 수 없는 대목도 적지 않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현재로서는 “타인세과(他人細過) 물론아심(勿論我心), 아심소혜(我心小慧) 이시어인(以施於人)”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한다.
여러 교서들을 참고할 때 당대 민중이나 동학도인들이 수운 대신사의 을묘천서 사건을 ‘신비한 일’로 수용하고 또 그것이 동학 포덕에 일정 부분 역할을 하였음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을묘천서 사건이 후대의 천도교인들에 의해 특별히 더 신비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앞에서 살펴보았다. 당대의 민중들과 달리 천도교 시대 이후의 ‘천도교인’들은 보편적으로 ‘을묘천서 사건’을 무조건 신비화하지도 않으며, 그 이야기를 액면(신비한 상황으로 표현된) 그대로 맹신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선사(禪師)’가 기도를 하면 ‘하늘에서 책이 뚝 떨어진다’고 이해하거나 ‘(천상의 상제 즉) 한울님이 선사(禪師)로 화생하여 비서(祕書)를 내려주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을묘천서’ 즉 을묘년에 ‘천서(天書)’를 받았다는 말 역시, 이 세상 만물, 만사를 ‘천주조화지적(天主造化之迹)’으로 보는 관점에서 명명한 것으로 이해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도올 선생이 동학을 “우주적인, 전 인류사의 종합”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합리적’으로 그것이 종교적 수행, 수련, 수양의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신비체험’이라는 데에 대체로 동의한다. 수운 대신사의 수제자인 해월도 당시의 동학 교단의 분위기에 따라 한울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기를 원하여 강행 수련을 하였으며, 1910년대의 천도교회월보에도 다수의 영적(영적) 사례가 보고-수록되기도 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천도교인들은 수련 과정에서 눈을 감은 채로 글씨(주로 경전의 일부 구절)를 보기도 하고, 또 강화(降話)의 일종으로 강필(降筆) 또는 영부(靈符)를 받는 체험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비체험마저 최근 들어서는 자제(自制)하거나,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시행하지 않는’ 것이 교단의 일반적인 분위기이다.
천도교를 신앙하는 것은 “나(수운)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는”, 즉 ‘한울님과 나(개인)의 일대일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하며 살아가는, 즉 신앙공동체, 군자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의 공동체, 즉 천도교 교단과 같은 조직을 형성하고 유지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일부 집단에서 교리 해석의 과정을 독점하거나 또는 더 나은 교리 해석으로 나아가는 데에 지체(遲滯) 현상을 보일 수도 있다. 아마도 표영삼 종법사(상주선도사)가 도올 선생에게 ‘천도교인(/단)의 답답함’을 토로한 바가 있다면, 바로 그러한 측면에 대한 호소였을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천도교단 내에서 표영삼 상주선도사로부터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은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표영삼 종법사(상주선도사)의 입장 또한 천도교단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천도교인(/단)의 입장은 (긍정적인 현상이든 부정적인 현상이든 간에) 한 기관(중앙총부)이 독점하거나 일군의 사람들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교리, 교사 해석의 체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도교인이 준수해야 할 중요한 규율 중에 “신앙통일(信仰統一)과 규모일치(規模一致)”의 관점에서 보면 교리나 교사 해석에 이견(異見)이 좁혀지지 않고, 특히 ‘교단 밖으로 노출’된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천도교는 천도교인의 사유물이 아니요 세계 인류의 공유물”이며, “천도교는 문호적 종교가 아니요 개방적 종교이며, 천도교는 계급적 종교가 아니요 평등적 종교이며, 구역적 종교가 아니요 세계적 종교이며, 편파적 종교가 아니요 광박적 종교이며, 인위적 종교가 아니요 천연적 종교로서, 지금에도 듣지 못하고 옛적에도 듣지 못하였으며, 지금에도 비할 수 없고 옛적에도 비할 수 없는 새로운 종교”라는 말씀을 잊지 않는다면, 도올 선생과 같은 견해조차도 받아 안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그 기운을 타고[乘氣運]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또 개벽의 사도(師徒)이자 동덕(同德), 동사(同事)로서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교단을 새롭게 하고, 마침내 세상천지를 새롭게 하는 다시개벽의 기회로 삼음직도 하다. 고아심주(固我心柱)하면, 내지도미(乃知道味)하고, 일념재자(一念在玆)하면 만사여의(萬事如意)라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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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신인간>은 천도교의 기관지. 1926년 4월 창간된 월간잡지로 천도교의 교리와 역사 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담론들이 수록됨. 최신호부터 창간호까지 차근차근 소개하여, 동학과 천도교 공부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