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7

한국이 낳은 진인 류영모(柳永模)의 생애와 영성 (1-2) - 당당뉴스




한국이 낳은 진인(眞人) 류영모의 생애와 영성 (1)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1년 03월 27일 (일) 14:08:35

한국이 낳은 진인(眞人) 류영모의 생애와 영성 (1)



▲ 다석 류영모


류영모는 1890년 3월 13일(경인년 음력 2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냈다. 아버지 류명근은 연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후에 장로가 되었으며, 모친 김완전은 정동교회 권사로 신앙생활을 했다. 두 분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은 류영모가 16세(만15세)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 들인지 5년 후의 일이었다. 류영모는 어릴적에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고 통감과 맹자를 배웠다. 신식 학교가 생기자 서울에 있는 수하보통학교를 거쳐서 경신중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기독교계 학교인 경신학교에 들어간 데는 사연이 있다.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후 절망과 분노를 느끼고 있던 차에, 15세의 소년 류영모는 나라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서울 종료에 있는 YMCA를 드나들었다. 거기서 초대 총무인 김정식의 연설을 듣고 감동되어 기독교에 입신하게 되었으며, 그의 영향으로 경신학교와 관계가 있는 연동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가 경신학교 졸업반에 있을 때, 남강 이승훈의 부름을 받아 평북 정주에 있는 오신학교 교사로 부임되어 갔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20살이 되던 해였다.

류영모가 오산학교 교사로 갔을 때 그곳에는 여준, 신채호, 윤기섭, 이광수 등이 교사로 가르치고 있었다. 그 때 독실한 신자였던 류영모는 오산학교에 기독교의 정통신앙을 전했으며, 그의 영향으로 당시 교장이던 남강 이승훈도 기독교 신자가 되어, 후에 3.1 운동 33인 가운데 기독교 측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3.1 독립운동의 정신적인 산파역 중 하나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오산학교 재직 중 류영모에게는 사상적인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그는 거기서 톨스토이, 노자, 불경 등을 접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교회의 전통신앙을 넘어서 보다 심층적인 영성적 종교/신앙을 추구하게 되었다.

류영모는 대학에 진학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물리학교에서 과학(물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거기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 버렸다. 그때 그의 심경의 큰 변화를 일으킨 직접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톨스토이의 사상적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귀국한 후 류영모는 김효정과 결혼하여 슬하에 삼남 일녀를 두었고, 자신은 부친의 사업(피혁업)을 도우면서 당대의 천재들이라고 불리던 정인보, 최남선, 이광수, 문일평 등과 교우하면서 최남선이 발행하는 <청춘지>에 종종 기고하였다.

그후 류영모는 3.1운동으로 인해 폐허되었던 오산학교가 재건되면서 일제에 의해 쫓겨난 고당 조만식 교장에 이어 오산하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제가 교장인준을 거부하는 바람에 일년 반 만에 물러나야 했다. 이로 인해 류영모는 마음의 아픔을 겪었지만 당시 그 학교 졸업반에 재학 중이던 함석헌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후로 함석헌은 불과 11년 연상의 류영모를 평생 동안 큰 스승으로 존경하고 극진히 모셨다.

서울에 온 류영모는 YMCA 총무 현동완의 간청으로 월남 이상재의 뒤를 이어 일종의 종교 강좌에 해당하는 연경반(硏經班)을 맡게 되었다. 이 강의는 1928년부터 1963년까지 약 35년간 지속되었으며, 함석헌, 김흥호, 서영훈, 류승국, 박영호 등도 참석하였다. 여기서는 성경 중에서 특히 요한복음이 많이 강의되었으며, 동양의 고전/경전들 즉 도덕경, 반야심경, 금강경, 논어, 중용 등의 내용도 다루어졌다. 한편 류영모는 일본의 우찌무라(內村)에게 영향 받은 김교신, 송두용 등 성서조선지 동인들과 사귀면서 그 모임에도 종종 참석했으며, 성서조선지에 기고도 하였다. 그리고 성서조선사건 때는 함석헌, 김교신, 송두용, 류달영 등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살이(57일간)도 하였다. 그런 중에도 때때로 광주(빗고을)에 있는 한국의 토착 수도원이라 할 수 있는 동광원에 내려가 말씀도 전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도 하며 지내기도 하였다.

류영모는 아버지의 반대로 농촌생활을 못하였으나, 부친의 상을 벗은 후 북한산 비봉 아래에서 과수원 농사도 하였다. 그 후 구기동 산자락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계속 생활했다. 그때부터 그는 일일 일식의 금욕생활을 하며 아내와는 해혼(解婚)을 선언하고 잣나무 판자 위에서 혼자서 자며 깊은 사색과 명상의 수도생활을 영위했다. 이것은 류영모가 고대 이집트의 수도사들이나 성안토니와 같은 사막의 수도자의 금욕적 영성생활을 몸서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46년 4월 26일에 생애를 마친다고 일년 앞서 선언하고, 그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30년 동안 쓴 것이 다석일지(多夕日誌)이다. 그것이 그가 남긴 유일한 유저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특히 주목할 일은 류영모는 그의 일지나 강좌에 있어서 깊은 종교적/철학적 사상들을 순수 우리 말 한글로 풀이하여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생전에 노자, 중용, 금강경, 반야심경, 천부경 등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그 중 일부는 김흥호 씨와 박영호 씨에 의해 정리 출판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류영모는 1981년 2월 3일 33200일을 살고 91세의 나이로 특별한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평소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 특히 함석헌 김흥호 류달영 박영호 박재순 제씨에 의해 그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최근(1998년)에는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에서 강의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는 생전에 특별한 티를 내지 않고 보통사람으로 살았으나 그를 가까이서 보고 따르건 사람들은 그를 보통 사람이 아닌 큰 스승으로 존경했으며, 심지어 한국 땅에 보낸 공자나 노자와 같은 진인(眞人) 혹은 성인(聖人)으로 느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소년시절에 접한 기독교 신앙을 평생토록 간직하고 살았지만, 전통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고, 동양의 전통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 및 한국의 고유종교사상까지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상호 조명 내지 통섭하여 웅대한 통전적/우주적 영성으로 승화시킨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한국이 낳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요 또한 심오한 영성(사상)을 지닌 탁월한 영성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석 류영모 선생의 인상에 대해 박영호씨의 형 박인호씨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분장되지 않은 예수, 석가, 공자의 본 모습을 알고 싶지만 쉽지 않다. 그 런데 다석 류영모 선생의 모습을 뵙고는 옛 성자들의 본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초라하리만큼 소박한 생활, 송구하리만큼 겸손한 태도, 천진하리만큼 순수한 마음, 그리고 놀라우리만큼 번쩍이는 지혜를 느꼈다."(박영호 엮음, 다석 유영모, 100쪽)

끝으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즉 류영모는 과연 그리스도 신앙인이었나 하는 질문이다. 어떤 이가 예수, 석가, 공자 가운데 누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류영모는 그런 비교는 하는 것이 아니라고 답하고는, 객관적으로 서열을 매길 수은 없지만 주관적으로 누구를 더 좋아할 수는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자신에게도 의중 인물이 있다고 했으며, 내가 잘못하였을 때 내게 잘하라고 책망을 내리시는 분이 바로 나의 의중지인(意中之人)인데, 그가 바로 자신의 참 스승인 예수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자신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아무리 유불선 등 여려 종교 사상들을 섭렵하고 그들 속에 깊이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의 심중 깊은 곳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교회 지도자들은 다석 류영모에게서 참 종교인의 바른 자세와 영성적 삶의 모범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먼 과거의 사람들이 만든 "교리"(dogma)와 문자주의라는 틀 속에 갇혀서 생명이 깜박거리고 있는 종교 혹은 교회를 살려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한 그에게서 성경의 심오한 진리들을 깊이 탐구하고 해석해 내는 영적 통찰력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 성경 속에 담긴 깊은 사상과 깊은 영적 진리들을 바로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 바로 오늘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사료된다. <계속>


▲ 류기종 박사


인봉 (211.232.208.151)

2011-03-28 15:41:12




오늘날 한국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 체제 내에서 다석선생을 되돌아보고 공부하며 학이시습의 즐거움을 반추할 수 있는 인사가 있다는 것이 반갑고 놀랍군요?

앞으로의 글이 무엇을 말할 지, 귀추가 주목된다 할 것입니다. 건필을 기도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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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진인 류영모(柳永模)의 생애와 영성 (2) - 당당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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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진인 류영모(柳永模)의 생애와 영성 (2)
류기종 | rkchg@hanmail.net





입력 : 2011년 04월 03일 (일) 16:13:21
최종편집 : 2011년 04월 05일 (화) 16:52:05 [조회수 : 3042]







한국이 낳은 진인 류영모(柳永模)의 생애와 영성 (2)

다석 류영모의 <중심 사상>



1. 하나님 곧 일자(一者)와 귀일(歸一) 사상

▲ 류기종 박사


다석은 하나님을 태일(太一)이라고 불렀다. 태일은 곧 궁극적 일자(the Ultimate One)라는 뜻이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근원인 궁극적 실재로서의 일자(一者) 혹은 절대자로서, 만유와 모든 인간은 이 궁극적 일자(한아님/한얼님)에 힘입어 살고(존재하고) 하나님을 머리에 이고/모시고 위로 하나를 향해 올라가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궁극적 일자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귀일 철학사상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도 한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사상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엡4:6, 롬11:36).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궁극적 하나(일자)이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전체(the whole)가 하나님이다. 궁극적 하나로서의 하나님은 만유를 자신 안에 포함하며 또한 만유는 하나님 안에서 노닌다. 여기서 우리는 다석의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과 우주만물과의 관계를 일즉다(一卽多)의 관계로 이해한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범재신론적 신관 및 우주관의 색채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류영모에 따르면 이 궁극적 일자로서의 하나님은 유한한 우리 인간들에 대해서는 없는 상태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비적 존재로서의 얼(靈)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얼은 보이는 실체가 아니며 어떤 모양도 지니지 않기에 무(無)와 같은 존재이다. 즉 하나님은 텅 빈 허공과 같이 없이 계시는 분이이시다. 아마도 다석은 불교의 궁극적 실재로서의 절대무(絶對無) 혹은 공사상(空思想)의 원리를 깊이 파악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류영모는 하나님을 장횡거(張橫渠)가 말한 태허(太虛)로도 표현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은 본디 이름이 없다. 하느님에겐 이름을 붙일 수 없다.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이면 이미 신이 아니요 우상이다"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우리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살며, 또한 얼나(영적인 존재)로 거듭나서 이 근원적인 궁극적 일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존재들임을 거듭 거듭 강조했다. 그리고 그 길을 바로 알려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가 이해한 하나님은 전적으로 초인격적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반대로 인격적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초인격적인 실재(하나님)라고 말할 수 있겠다.


2. 가온찍기

다석은 55년 9월 22일 일지에서 “가온찍기”란 뜻을 지닌 말로서 “직상일점심”(直上一點心, 마음에 한 점을 찍고 곧장 위로 오른다) 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 이후로 그는 이 "가온찍기"([.])란 뜻을 나타내는 말을 여러 형태로 설명하였다. 우선 가온이란 말은 하늘과 땅의 중심 즉 모든 시간(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영원)과 공간의 중심을 나타낸다. 고로 “가온찍기”란 하늘과 땅 즉 모든 시간과 공간과 영원의 한 복판/중심에 한 점을 찍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가온찍기"란 자신의 존재의 중심과 또한 우주(만물의) 중심을 정확히 맞추어서 저 무한/영원의 세계로 직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류영모의 "가온찍기"는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우리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또한 우주만물의 생성 변화의 깊은 이치 곧 존재의 신비(mysteries of beings/existences)를 올바로 깨닫는 견성(見性) 혹은 대각(大覺)의 순간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가온찍기"는 우리 인간의 큰 깨달음의 순간 즉 붓다의 정각(正覺) 혹은 영성가들의 영적 대각성(spiritual enlightenment)의 순간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 류영모는 "가온찍기"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는 것의 무한한 가치를 자각하고 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쏘아 맞히듯이
곧이곧고 신성하고 영특한 영원한 나의 한 복판을 정확하게 명중시켜 진리
의 나를 깨닫는 것이 가온찍기"[.]"이다. 나의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긋
(끝)이 나타난 것이다.... 가고 가고 영원히 가고 오고 오고 영원히 오는 그
한복판을 딱 찍는 가온찍기"[.]"야말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찰나 속에
영원을 만나는 순간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늘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며 곧이 곧 가온찍기"[.]"가 인생의 핵심이다. 그러나 깨닫는
가온찍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끝끝 내내 표현해보고 또 표현해보고
나타내보고 또 나타내보여야 한다. 내가 내 속알을 그려보고 내가 참나를
만나보는 것이 끝끝 내내이다.(다석어록, 박영호 편, 홍익재간, 31쪽)


3, 얼나와 제나

다석 류영모의 사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얼나"라는 개념일 것이다. 류영모에 따르면 얼(靈/Pneuma/신성)은 영적 생명 혹은 성령 혹은 진리을 지칭한다. 따라서 제나(selfish ego) 혹은 몸나(bodily person)는 인간의 죄성인 탐진치를 완전히 벗지 못한 인간 곧 육적인 사람 혹은 자연인을 의미하며, 얼나는 진리를 완전히 깨친 사람으로서 득도견성(得道見性)한 사람 즉 영적인 사람(spiritual person)을 지칭한다. 따라서 얼나는 진리의 영인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진리를 깨친 사람 곧 진리를 깨침으로 모든 속박에서 해방된 온전한 자유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얼나는 영인靈人) 곧 영적인 사람, 진인(眞人) 곧 진리를 소유한 사람, 도인(道人) 곧 도(道)와 하나가 된 사람, 법인(法人) 곧 무상정등정각(正覺)을 한 사람을 지칭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와 석가는 진정한 의미의 "얼나"의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류영모는 이 얼나의 개념을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류영모에 따르면 얼(靈)은 개체가 아니라, 전체이며, 무소부재며,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상대적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얼 혹은 얼나(신 혹은 신성)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신성 혹은 불성인 얼 혹은 얼나는 없는 곳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으나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제나가 죽고 없어질 때, 철저히 회개/회심하고 새로 태어날 때 "얼나"가 탄생하게 된다. 다석은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여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고 말한 나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말한 나, 그리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말한 "나"는 바로 지연인/육신의 예수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영적 존재로서의 "얼나"를 칭한다고 말했다. 다석은 얼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생의 의미란 내가 깨달은 얼나로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달으면 아무 때나 죽어도 좋습니다. 내 속에
벌써 영원한 생명(얼나)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얼나는 죽
지 않는 생명이기에 이 몸은 아무 때나 죽어도 좋습니다. 밥 먹고 똥누고 하
는 일을 얼마나 더 보자고 애쓰는 일은 참 우스운 일입니다. 얼나는 죽음이
없습니다. 이 껍데기 몸이 죽는 것이지 참 나인 얼(얼나)은 죽는 것이 아닙니
다. 죽음이란 이 몸이 퍽 쓰러져 못 일어나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껍데기가
그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진리(하느님의 생명)인 얼나는 영원한 것입니다.


4. 탐진치 3독과 인간의 죄성(원죄)

류염모는 특히 인간의 실존 이해에 있어서 기독교와 불교의 양측의 입장을 함께 종합해서 본 듯하다. 즉 기독교는 인간의 현존재를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에 의한 원죄의 유전으로 인한 죄성이 만인에 보편적으로 깃드려 있다고 보는데 대해서 불교는 인간이해의 핵심으로서 탐(貪,탐욕), 진(瞋,분노/시기/질투/미움), 치(痴,무지/어리석음/성적충동) 3독을 보편적 성질로 이해한다. 이 탐진치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동물이나 생물들의 삶의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류영모는 이 탐진치의 속성을 동물의 속성 곧 수성(獸性)이라고 말하고,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즉 도덕적인 존재로 혹은 영적인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이 수성인 탐진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인간의 자연적 특성을 탐진치 3독의 내재성으로 보는 불교적 인간 이해는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언급한 인간의 죄성(롬1:29-31,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분쟁, 악독, 수군거림, 우매, 배약, 무정함, 무자비 등)에 대한 진술과 매우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 동물적 요소인 탐진치의 속성 혹은 죄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류영모는 말한다. 따라서 그는 우리 인간이 참 자유인 즉 득도 해탈의 경지에 이른 참사람 곧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인 '얼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 3독(죄성)을 극복하고 거기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자유함을 얻는 일이 바로 제나 혹은 몸나에서 얼나로 거듭나는 일이다. 이 삼독(죄성)을 극복하는 일은 정신적 존재인 인간이 각자의 믿음(하느님에 대한 충신(忠信)과 깨달음 및 자신의 영적 정진을 통해서 이룩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종교(신앙)가 있고 경전이 있고 철학이 있고 도덕이 있고 과학이 있는 것이다. 류영모에게 있어서는 기독교와 불교는 이 탐진치(죄성)의 극복을 위한 최고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5. 씨알과 하느님의 아들

"얼나"의 개념과 함께 다석 류영모 사상의 가장 독특한 것의 하나는 그의 "씨알"사상이다. 류영모의 씨알 사상은 요한 일서3장 9절의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알)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의 말씀에 기초한 듯하다. 류영모는 이 구절을 자주 인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요한일서의 이 말씀은 요한복음 3장에 있는 예수 자신의 말씀인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5-6)란 말씀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내용이다. 둘 다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과 영(성령)으로 났다는 공통성이 있다.

따라서 씨알이란 육적인 나에서 영적인 나로 솟난(승화된) 인간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인간의 자연적 상태(존재)에서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난 존재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씨알의 원형은 바로 전적으로 위로부터 난자 곧 하나님의 아들(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류영모에 따르면 하느님께로부터 옹글게 혹은 전적으로 난자가 바로 하나님의 동생자이다. 따라서 내 속에 와 있는 얼인 하느님의 아들(로고스 혹은 영적 생명)이 바로 내속의 하나님의 씨알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하나님의 씨 혹은 씨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류영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알인 독생자를 믿지 않으면 멸망한 것이다. 위로
거듭날 생각을 안 하니 그것을 모르니까 이미 죽은 것이다. 몸의 숨은 붙어 있
지만 벌써 멸망한 것이다. 이 몸이 죽지 않는다거나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하면
못쓴다. 위로 난 생명(얼나)을 믿어야 한다. 몸이 죽는 게 멸망이 아니다. 벗어
질게 벗어지고 멸망할 게 멸망하고 영원한 생명의 씨알이 자란다. 거듭난 생명
의 씨알로서 위로 나야 그게 사람 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다. 얼을 깨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짐승의 새끼다.(박영호 편, 동
방의 성인 다석 유영모, 도서출판 무애, 369쪽 이하)

류영모는 그의 씨알사상을 농사짓고 일해서 먹고 사는 모든 평민들에게도 적용시켰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하나님의 아들딸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민중 혹은 민주(民主)라는 말을 "씨알님"이라는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어 썼다. 따라서 "위로 머리 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다. 모든 사람은 거듭날 생명의 씨(알)로 위로 솟나(거듭나)야 한다. 그게 바로 사람 노릇을 바로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에게는 민(民)이 씨알이고 주(主)로 받들어야 할 님들이다. 따라서 백성인 씨알님(民主)을 잘 받드는 것이 민주정치라고 하였다. 그래서 "씨알을 위함이 곧 하나님을 위함이다. 이 소자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씨알을 모른다 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 함도, 하나님을 모른다 하고 백성만 위한다 함도 다 거짓이다"라고 하였다. 류영모의 이 씨알 사상은 후에 그의 제자인 함석헌에 의해서 민중 신학의 중요개념의 하나인 "씨알철학" 사상으로 옮겨져서 1970년대와 80년대의 민주와 운동의 중요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이 씨알사상의 뿌리는 바로 다석 류영모에게서 나온 것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요한일서의 "하나님의 씨"(the Seed of God)란 말(요일3:9)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6. 기독교와 동양 종교들과의 만남

류영모는 그의 신앙생활의 초기 특히 그의 오산학교 교사 시절에는 열정적인 십자가 신앙의 소유자여서 그의 영향으로 교장 이승훈을 비롯하여 학교 전체가 기독교학교로 발전하였고, 거기에서 주기철, 한경직, 김주항, 함석헌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그가 오산학교를 떠나오면서 그는 톨스토이의 탈 전통신앙의 영향과 함께 유교 불교 도교 등 동양의 종교들의 경전들을 접하고 또한 그들을 깊이 연구하면서 그의 신앙은 점차 그들을 통섭(通涉)하는 통전적(統全的) 영성으로 승화되어 갔다. 그 중에서도 류영모는 특히 기독교와 불교 사이에는 깊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류영모가 이해한 기독교와 불교의 친밀성 혹은 공통점의 가장 중요한 점은 불교의 공(空/빔/없음)과 기독교의 하나님(靈/하느님/한얼님)을 그 근본(본질)에 있어서 매우 밀접한, 어떤 의미로는 동일한 진리를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본 점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빔(Emptiness) 속에 계시는 분" 혹은 "없이 계시는 분"이라는 말을 지주 했다. 이 말은 고대 기독교 신비가(영성가)들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앎의 한계를 전적으로 넘어서는 절대초월의 "궁극적 실재"(Absolute Reality) 혹은 "캄캄한 어둠 속에 계시는 하나님"(God in Darkness) 사상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류영모에 따르면 "빔" 곧 공(空) 혹은 허공은 지순(至純/ultimate purity)의 하나님의 마음을 지칭한다. 즉 허공의 상징은 진선미 곧 순수하고/깨끗하고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허공(빔)을 알고 허공(빔)을 존중하여 맘에 품고 살 때 아름답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다석이 아무리 유불선 등 동양의 전통 종교 사상들 속에 깊이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는 결코 다원주의적 입장으로 흐르거나 또는 종교 혼합주의적으로 흐르지 않고,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해한 하나님 아버지 신앙 곧 만인과 만유를 하나님의 한 부분(씨알들)처럼 차별 없이 대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신앙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석은 늘 (하나님을) 아버지(아버디) 아버지(아버디)라고 불렀으며,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알고 그 분을 위로(존귀히) 모시고 살며 또한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깨달아서 잠시적인/물질적인 세상에 함몰되지 말고 참사람 곧 영적인 사람 즉 "얼나"로 거듭나서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살 것을 강조했다.

다석 류영모의 신앙(영성) 혹은 그의 종교적 입장에 관해 그의 사상적 제자인 박영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승 류영모는 (말하기를) 예수는 공가가 못한 하나님 아버지와 부자유친(父子有親)을 하였다. 그러나 석가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이야 라고 하였다. 이는 공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못하였고 석가는 하나님 아버지를 입에 올리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였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류영모는 크리스천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박영호의 이 표현은 다석이 동양의 전통종교들 그 중에서도 특히 불교 사상에 깊이 침전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큰 틀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나오는 말:

▲ 다석 류영모


다석은 신학자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며 또한 목사나 장로와 같은 교회의 직분자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한 평신도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깊은 (영성적인) 사상들이 나올 수 있을까? 필자는 그의 사상은 바로 그의 진지한 수도사적인 영성적인 삶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의 깊은 사상과 영성이 그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의 가정을 통해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의 가정이 곧 한 수도원의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일생은 한 가정에서 행해졌으나 그의 삶은 고대 이집트나 시리아의 수도사들의 삶과 같이 (동양의 고전/경전들과 함께) 성경에 대한 깊은 연구와 병행하여 지속적인 깊은 사색과 묵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호 다석(多夕)은 바로 깊은 사색과 명상(기도)에 대한 그의 강한 애호(愛好)를 나타고 있다. 그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상사(相思) 혹은 영적인 밀애(密愛) 행위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신비주의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삶은 곧 연속적인 기도의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의 영성은 바로 그의 지속인 기도(영적 혹은 신비적 사색)의 산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석은 진정한 의미의 탁월한 영성가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동안 필자는 서구 기독교의 영성가들 즉 고대교회의 영성가들인 이레니우스와 클레멘트와 오리겐을 비롯해서 버나드와 마이스터 엑크할트 같은 중세교회의 영성과 루터와 칼빈을 중심한 종교 교개혁자들의 영성 및 근대 경건주의자들의 영성 그리고 토마스 머턴이나 샤르댕과 같은 현대의 영성가들에 이르기 까지 주로 서구 기독교의 영성가들의 중심사상들을 연구하고 그들의 영성을 알리는 일에 주력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들을 접하고 큰 감명(환희)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류영모의 영성 곧 그의 삶과 사상이 서구교회의 어느 뛰어난 영성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고 심오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으며 또한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그의 영성(사상)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널리 알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는 세계교회가 주목하는 큰 교회들이 있으나 세계에 내놓을만한 신학(특히 영성신학)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다석의 사상과 영성의 중요성에 대해서 정양모씨는 "앞으로 다석사상 연구가 진척되어 널리 알려지면 세계의 신학계가 놀날 날이 반듯이 오리라고 확신한다"고 말했고, 심일섭씨는 "21세기에 다석사상 이상의 신학사상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이라 생각한다"고 말했으며, 박재호씨는 세속화된 이 나라 기성종교들이 거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석사상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성천재단을 세운 고 류달영씨는 "다석을 공자 못지않게 어진 분이라고 말한다 해도 다석의 인품을 아는 한 사람으로써 거부감 없이 수긍하게 된다. 다석사상이라는 값진 유산을 이 민족의 정신적 뿌리로 삼고 나아가 국경과 시대를 넘어서서 인류의 유산으로 꽃피우도록 힘써야 하겠다"고 말했다. 아마도 위의 분들은 다석 류영모의 사상과 영성이 비단 우리 한국(교계 및 종교계)뿐 아니라 세계적 관심과 주목을 받아야 함을 인식한 분들이라 사료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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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봉 (211.232.208.151)

2011-04-05 21:39:12




예수고 다석이 자기 이름을 알리고자 했겠습니까?
다석이 가장 좋아하고 스승으로 삼아 닮고자 했던 이가 예수였지요. 예수를 그냥 믿기만 한 것이 아니고, 예수의 삶을 자신도 살고자 했어요. 그런 이가 어찌 다석 뿐이었겠어요? 그리고 예수처럼 살고자 하는 것도 어떻게 예수가 산 것과 똑같아야만 하겠냐고요?

생김새도 다르고, 삶의 여건, 조건들이 다 다르거늘, 수많은 예수가 각각 그 자리에 서있다면 어떤 삶을 살았겠어요? 그것을 찾는 것이 결국은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행동에서 나오는 그 모양을 보면 어디 겁나서 예수를 믿을 수 있겠냐고요?

아마도 다석의 예수 사랑은 그런 점에서 지금 이 땅의 예수믿는다는 사람들과는 다를 것입니다.
저는 kinbong 이란 이름으로 네이버에서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필자의 건필과 이 땅의 예수 사랑에 훈풍이 불기를 기도하는 사람이지요. 예수나 다석이라는 이름이 우상이 되어서도 아니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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