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0

알라딘: 지금, 여기의 유학

알라딘: 지금, 여기의 유학


지금, 여기의 유학  |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유학도서
김성기 (지은이)성균관대학교출판부2005-02-25






Sales Point : 122

8.8 100자평(0)리뷰(5)
목차


[여는 글] 왜, 지금 유학인가 - 최영진
 
[제1부] 지금, 현재의 유교
유교, 민주주의, 자본주의 - 윤무학
종교로서의 유교, 그 역할과 전망 - 김성기
여성의 경험으로 읽는 유교 - 이숙인
동아시아의 미학지평과 유가예술정신 - 임태승
계몽의 빛, 유교 - 이향만
 
[제2부] 유학의 영원한 이상
중국 유학의 연원과 전개 - 김용재
한국 유학의 맥과 흐름 - 이상성
유학의 이상: 자아의 성숙과 세계평화 - 진성수
유학의 생태 친화적 자연관 - 안은수
인간에게 어떻게 도덕이 가능한가? - 이상성
 
[마치며] 동아시아의 미래는?
21세기 동아시아의 유교적 전통과 미래사회 - 조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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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성기 (지은이)

1956년 출생
화타문 79대 전인
현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교수
유학·동양학부 학부장 및 유학대학원 원장 역임

현 화타오금희 한국본부 회장

최근작 : <지금, 여기의 유학>,<동아시아 유교문화의 새로운 지향> … 총 5종 (모두보기)


평점 분포

8.8



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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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유학 

유교란 무엇인가? 유학이란 무엇인가? 이런 물음을 던졌을 때 한 번에 무엇이다라고 정의 지워 이야기 하기는 참 어렵다. 하지만 유교와 유학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과 그리고 유교와 유학이 우리 사회에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것은 저 멀리 몇 천년 전 부터 유학을 받아들여 우리의 학문으로, 우리의 종교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의 그것을 지금 현재 새로이 고찰한다는 의미에서 '지금, 여기의 유학'은 의미를 갖는다.

'지금, 여기의 유학'은 현재의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난 유학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데 있어서 아주 훌륭한 책이다. 유학이란 제목으로 다루고 있으나, 실제 내용에서는 유학의 학문적인 의미보다는 유교라는 종교 혹은 생활의 의미로 다루고 있다.

여러명의 필자들이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등 전반적인 면을 아우르며 유교의 현재적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갖는 유교적 의미를 넘어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유학이라는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더불어 이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게 해준다. 더불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책을 통해 유학의 새로운 면모를 알 수 있었다. '여성의 경험으로 읽는 유교' 에서의 유교의 여성관과 '동아시아의 미학지평과 유가예술정신'에서 논하고 있는 유학이 추구하는 예술관이 자유라는 것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유학의 다양한 면모와 대립적인 구도로만 생각했던 유학과 유교가 그렇지만 않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사회의 서구문명과 적절한 조화를 통해 앞으로 더 발전적인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반면 이 책을 읽고 아쉬웠던 것이 많다. 그래서 칭찬보다는 쓴소리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아마도 유학을 가장 쉽게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이 담긴 훌륭한 책에 대한 애정어린 말로 보면 좋겠다.

유교라는 것이 오랜 전통의 것이라면 이와 대비되는 서구사회의 것들과 만나 지금 현재를 되새겨 보는데 중점을 두며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정치, 경제, 종교, 예술 등 그 전반적인 면에서 고찰되고 있으며 하나하나 파악하여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이미 유교와 유학이 갖고 있는 한계들을 변명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무수한 논쟁들은 이미 자주 언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로 한계로 인정해야 하는 것들도 없지 않다. 가부장적인 요소라는 것을 좋게 표현하려 했으나, 이 역시 유학의 한계인 것만은 틀림없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미 인식하고 있는 유교에 대한 것들을 되집고 있을 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아쉬웠던 것은 이미 우리가 유학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 그리고 지금 시대에 대해 한계라 느낀 것들을 재차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 논의의 한계가 보인다. 더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한국 사회이지, 중국의 사회가 아니다. 중국의 유학과 우리의 유학은 비록 그 뿌리는 비슷할지언정 실로 다르다. 하지만 앞선 내용들이 지금 우리의 유학을 다룸에 있어 중국의 유학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어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공자와 주자 등이 설파한 유학은 우리 나라에 와서 또 다른 모습으로 변형 되어 왔음을 간과한 것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책의 구조에 있어서도 유학이 갖는 현대적 의미와 유학에 대한 내용,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유학에 대한 챕터를 먼저 앞에 두고 유학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뒤에 둬서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했으면 더 좋았을 듯 하다. 이유인 즉, 본문 서두에서도 밝혔듯 많은 사람들이 유학과 유교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려져 있음은 인식하지만 유학과 유교의 차이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즉 그것에 대한 개념과 역사 등에 대한 인식이 바로 서야 현대적인 관점에서의 유학과 유교를 제대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챕터를 나눔에 있어 앞뒤를 바꿨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끝으로 어떤 것이든 장단이 있다고 본다. 유학은 옛날의 것이 아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기저에 깔린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학문이라고, 종교라고도 볼 수 없는 한국 사회의 하나의 사상으로 우리 안에 내제 되어 있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조금 더 접근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으로 유학이라는 것을 현대사회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끔 그 한계를 시인하고 유학의 장점을 부각시켜 현대사회에서 유학의 의미를 되새겼던 것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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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dreaming 2007-08-03 공감(6)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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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유학

유학(儒學), 그리고 유교(儒敎). 이 두 단어는 (적어도 나에게는) 결코 언급하기 쉽지 않은 단어이다. 한문학을 공부하고, 유학·동양학을 배우는 나에게 있어서 감히 유학과 유교를 언급한다는 것은 내 분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서, 견강부회(牽强附會)를 하고 있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지난 3천여년간, ‘유학(儒學)’ 이라는 담론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있었는가. ‘사서(四書)’ 라고 부르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의 안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내용 중에 단 한글자의 한자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설전(舌戰)이 오갔는가. 이런 내용에 대해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덧붙일 수가 있단 말인가.

보통 유학에 관련된 책을 한번 살펴보자. 책 한권의 분량을 보면 다들 깜짝 깜짝 놀라신다. 하긴, 책 한권에 300~400페이지는 기본으로 잡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 바로 유학이다. 특히 논어(공자의 ‘어록’ 이라고 생각하면 간편하다.) 한 권에 대해 해석을 첨부해 놓은 책만해도 그 분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 책들 중에서 유독 얇은(?) 페이지 수를 자랑하는 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 소개하려는 ‘지금, 여기의 유학’ 이다.





‘지금, 여기의 유학’ 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 책은 1부에서 ‘유학의 현대적 의미’를, 2부에서는 ‘유학의 미래’를, 마지막으로 마침글에서는 ‘유학의 동아시아적 담론’을 풀어썼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유학(儒學)’ 관련 서적을 자주 읽는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은 꽤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사실, 우리나라에 출판된 다양한 책들 중에서는 ‘유학의 현대적인 의미에 대한 재조명’을 한 책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거의 모든 책들이 ‘유교의 이상적 세계와, 유교관’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유교’ 라는 것에 대해 일반 독자층에게 어필하기가 많이 힘들었다. 때문에 오히려 독자들이 유교에 관련된 책들을 멀리하게 되었고, 때문에 유학이라는 것이 고루(孤陋)한 학문으로 남아버렸고, 유학은 이러한 관심에 대한 해결책이 없이 더더욱 선인(先人)들의 옛 글귀를 탐독하면서 그 속으로 현실도피를 해버려서, 더더욱 고루(固陋)한 학문이 되어가는 악순환을 반복해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유학에 대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책이다. ‘유학의 현대적 의미’ 에 대한 고찰, 그리고 유교의 미래와 동아시아의 담론적 요소들. 지금까지 나왔던 기존의 책과는 다르게, 좀더 유학에 대한 문턱을 낮추어서 일반 독자들을 끌어 앉으려고 한다는 점은 기존의 유학에 대한 고루한 이미지를 벗어나게 하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느껴진다.

일반 독자들이 편하게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책(사실 대학교 신입생들에게 읽히기 위한 책)이다 보니, 그 내용이 쉬울 수 밖에 없다. 기존의 유학적인 담론들, 즉 공자나, 맹자에 대한 -혹자는 듣기만 하여도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내용들에 대하여, 각각의 주제를 나누어서 한편의 글을 완성했다. 기존의 책들이라면, 지긋지긋한 경전을 싣고 그 뒤에 공자나, 맹자가 가졌던 사상이나 사유를 썼을 터인데, 이 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읽기 쉽게를 표방한 책답게, 독자들이 유학에 대해 한번쯤 질문을 던져 보았을 만한 내용에 대하여, 표제어를 잡고, 그 다음에 내용을 써 내려갔다. 유학에서 여성을 비루한 존재로 보았다고 하는 내용에 대한 반박(?)글 형식과도 같이 작성된 ‘유교와 페미니즘’, 현대의 핵가족화 가운데서 다시 떠오르는 화두인 ‘효(孝)’ 에 대한 담론인 ‘한국 사회의 유교적 전통과 가족주의’ 등 유학에 대한 다양한 접근점을 독자에게 제시하여, 독자가 유학과 더욱 가까운 접촉점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돋보였다.

하지만 문제점 역시 없는 것은 아니다. 워낙 방대한 내용을 독자에게 간단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제시된 글이기 때문에, 내용 자체가 워낙 갑갑하다는 느낌을 준다. 한 사람의 이론이 나온 뒤에, 바로 다음 사람의 이론이 나오고, 또 이에 대하여 대립각을 세우는 이론이 있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의 전환이 너무 빠르다. 독자들의 숨조절을 할만한 적절한 포인트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이러한 내용에 대한 이해가 더디게 느껴질 수가 있을 법하다.



또한 인용문에 대한 글 역시 약간 문제가 될 수 있겠다. 사실 논어나 맹자는 각각의 편(篇)마다 핵심적인 주제들이 있다. 때문에 내용을 이해할 때에 있어서 한 편에 대한 내용을 전부 같이 이해하려고 하여야지, 한 단락에 나온 글귀만을 가지고 해석하려 한다면 엉뚱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 또한 그러한데, 일반 독자들이 그냥 한 구절이 나오는 것을 읽고서 그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물론 각각의 내용들 밑에는 집주(集註)라고 하여 주자가 달아놓은 해석이 있고, 또 이 밑에는 소주(疏註)라고 하여 이 내용에 대하여 그 외의 사람들이 집주에 대하여 해석을 해 놓은 것들이 있는데, 이러한 제반 내용을 완벽히 다 소화를 하려고 하면 아마 몇천페이지는 되는 책이 완성될 테니, 이 역시 문제가 되겠다. 내용을 중시하면 분량이, 분량을 줄이려면 내용이.. 끝없는 딜레마다.

이 책에 대해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한국적’ 인 유학에 대한 길을 소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 유학의 맥과 흐름’ 이라는 파트에서 그 내용을 잠깐 언급하긴 하지만, 독자에게 한국에도 주체적인 유학이 있었다고 하는 점을 충분히 어필하지 못하였다. 사실, 유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최인호씨의 ‘유림’ 인데, 이 책이 오직 ‘한국적인 유학적 담론’ 으로 이루어 진 것에 비해보면 아쉬움이 배가 된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동(同) 출판사에서 ‘조선조 유학 사상사’ 라는 책을 펴 내어 한국적인 유학의 흐름과 그 정신(ex: 이기일원론, 이기이원론, 성호기발설....등)에 대한 내용을 담았으니, 좀더 본격적으로 한국 유학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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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esan 2007-08-0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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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유학

지금 여기의 유학



예부터 우리나라 전통 학문으로 생각되어온 유학, 그리고, 민간 신앙처럼 종교로서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유교. 유학이라는 것에 대해 떠올릴 때면, 항상 거리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굉장히 오래되고,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 지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고리타분할 것 같고, 답답한 예의범절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고지식한 선비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우리 나라의 유학 사상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려 하고 있다. 그러한 시도 중 하나로 나온 것이 이 책일 것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유학에 대해서 잘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필자와 같이, 유학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유학에 대해 조금이나마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사회의 유학의 전래와, 흐름, 유학적 세계관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고, 그러한 유학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를 모색하고 있다. 유학에 대해 단순히 소개하고, 그것을 옹호하기만 한다면,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그런 유학 서적으로 그쳤을 테지만,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유학을 실용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 특히 우리나라에서 유학을 활용하여, 세계화 시대에 발맞추어 더욱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는 면에서 실용성이 높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또한 읽어보면서 기존의 책들과 다른 면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유학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나 옹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잘못된 점은 과감히 지적하고, 또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유학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해서도 그러한 편견이 옳지 않은 이유를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시원하게 지적을 해 주어서, 왠지 더 설득력이 느껴졌다.
과거의 것에서 현대에까지도 배울 수 있을만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과거보다 더욱 발전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에서 말하려 하는 유학의 가장 큰 교훈이 아닐까 싶다. 그러한 면에서 유학은 여러 가지로 쓰임새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유학에 대해 전반적인 이해와 배경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교양서이자, 유학의 등장 배경과 유학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유지되고, 활용되어 왔는지 보여주는 역사서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개인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여성의 경험으로 읽는 유교’ 부분 이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유학 사상이 깊게 뿌리박혀 있고, 그 중심에는 가부장제가 자리 잡고 있다. 여러모로 생각해 볼 때, 가부장제는 여성들에게 불리한 제도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들에게 희생하고 봉사할 것을 강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가 바라보는 유학과, 가부장제는 다소 여성의 입장으로서는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은근히, 이 책에서 페미니즘의 입장을 취해, 가부장제와 유학을 비판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용은 필자가 기대했던 내용과는 사뭇 달랐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물론, 유학과 가부장제가,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유학의 책임만은 아니다, 과거에는 여성의 지위가 높은 시절도 있었지만, 새로운 왕조가 왕이 되고, 여러 가지 복잡한 사회적 상황과 결부되어, 의도적으로 여성을 낮은 위치에 배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의 지위가 낮아지게 되었다....’는 식의 설명이 주를 이룬다. 역사적인 흐름을 전반적으로 다룸으로써, ‘유학과 여성의 대립’과 같은 극단적인 주제를 살짝 빗겨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유학에 대해 커다란 깨달음을 얻고, 유학을 이해하고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유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고정관념들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었던 기회가 된 것 같다. 유학에 대해서 무조건 ‘좋다, 싫다’ 혹은 ‘옳다, 그르다’는 식의 이분법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유학에 대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여기 저기서 다들 세계화 시대라고 떠들어 대지만, 이렇게 세계적으로 다른 국가들과 교류가 쉬워지고, 가까워진 상황에서 세계인들은 우리나라 고유의 것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더욱 우리 것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다. 이렇게 빠르게 세계화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오히려 우리 것에 대한 가치가 높아지고,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조건 우리것이 옳고,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우리 유학에 있어서도, 무조건 좋고 나쁘다고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 우리는 유학을 현대의 실정에 맞게 실용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객관적인 눈으로 과거부터 이어져 내려온 우리나라의 상황과, 유학을 제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역사적 해설과 함께, 유학에 대한 이해와 객관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이 책은 누구나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풍부한 교양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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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teduri-0- 2007-08-01 공감(1) 댓글(0)




[책과 생각]인간의 미래를 위하여 - 지금, 여기의 유학


우리나라 일반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동양 고전이라 한다면 삼국지가 되겠지만 그를 제외한 가장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논어가 될 것이다. 동양철학의 범주에 포함된 것 중엔 유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제자백가의 사상 등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유학을 떠올리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상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특별히 교양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논어나 맹자의 한 구절쯤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 때문에 김동리의 ‘화랑의 후예’에서 황진사가 자못 박학한 체 하며 ‘관관저구는 재하지주요 요조숙녀는 군자호구로다(關關雎鳩 在荷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하며 한 구절을 읊어내도 그것이 실소를 자아내는 이유는 시경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시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학은 한국인의 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극복되어야 할 전근대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처음 수용된 이후로 뛰어난 학자들에 의해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지만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거치면서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한 원흉으로 온갖 핍박을 받아 왔다. 여기에는 침략자인 일본의 조선의 유교역사에 대한 조롱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데 그것이 식민지 패배주의를 납득하게 하는 기제로서 훌륭하게 작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은 의아할 만하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주체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뛰어난 성취를 이룩한 혁신이라고 추켜올리곤 하지만 근대 일본의 과두 정치가들이 유신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유교적 충의관념이 효과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이 조선의 패망원인을 고루한 유교문화 때문이라고 설명하곤 하지만 자신의 존재이유를 망각한 괴변임에 다름 아니다.

비단 우리나라의 특수성 때문만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하나의 문화권으로 아우르게 하는 유교문화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재인식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동아시아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설명하는 논리인 신유교윤리, 서구적 가치관의 폐해를 치유할 대안으로서의 유학과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뿐만이 아니다. 우리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사상을 앎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우리 사회의 모습을 예측해 보고 개인이 그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미시적 측면에서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에 제목처럼 이러한 논의에 대해 충실한 해답으로서 추천할 만한 책이 ‘지금, 여기의 유학’이다.


1. 가장 기본적인 물음 - 유교는 종교인가?




유학의 역사와 그 흐름에 집중하고 유학 본연의 학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서술하는 장이 대부분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시각에서, 그리고 한 번쯤 궁금함을 가져봤을 만한 의문들에 대해 색다른 관점에서 서술한 내용들 또한 돋보인다. 가장 일반적인 ‘유교는 과연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에 대답이 될 만한 부분이 ‘종교로서의 유교, 그 역할과 전망’이라는 장이다. ‘당신의 종교가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에 혹자는 ‘유교’라고 답하기도 하지만 아마 그 질문에 대답했던 사람도, 그 대답을 들었던 사람도 잠깐이나마 의아하게 생각해봤을 수 있다.

기독교나 불교에 비교해 보았을 때 절대자를 섬기는 종교의 일반적인 특징에 비추어보면 유교는 뭔가 일탈한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흠숭받는 초월자의 존재나 그에 헌신하는 독신 수도자들의 존재도 없다. 그런데 글쓴이는 바로 그러한 면이 현대적인, 대안적인 종교로서의 유교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고 말한다. 자기초월의 신화를 신봉한다는 것에서 원시불교와 유사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것이 머나먼 내세나 사후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현세에서 가능하다고 역설하는 게 유교의 ‘군자론’이다.

즉물적인 현대의 세태에서 점점 자기 자신의 판단만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성공을 갈망하며 자기 절제와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유교의 ‘일용지사가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안히 하는 근본이 된다.’고 하는 가르침과 방법론에서 맞닿아 있다. 지고의 목표인 ‘천인에 합일되는 경지’가 유교가 지향하는 궁극점이기도 하지만 그런 거창한 담론 이전에 성인이 되기 위한 수행방법의 근본은 일상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현대인들이 꿈꾸는 ‘생활의 발견’혹은 ‘일상의 신화’와 유사하다. 항상 근면하고 자기 계발에 큰 관심을 쏟는 한국인들이 오로지 재테크에만 집중하는 지금의 현실은 방향성을 잃은 감이 없지 않으며 그것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유학의 진지하게 탐구하는 학(學)의 모델과 항상 자신을 연마하는 생활습관은 최선책이 될 수 있다.

2. 유학의 자연관은 자연중심적인가?

서양인들은 동양의 가치관에서 자연과 공존하는 인간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계문명의 치료방편으로 꿈꾼다. 그렇다면 과연 유교에서도 그 미덕을 찾아볼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해 ‘동아시아의 미학지평과 유가예술정신’과 ‘유학의 생태 친화적 자연관’이란 장은 논의의 기반을 제공해 준다.

<논어>의 [옹야]편에 나오는 구절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에서 도출된 ‘락(樂)’의 개념은 원래 군자의 적극적 삶의 태도를 표현한 단어였다. 그런데 그것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식될 때는 ‘대상과 (주체가)완전히 하나로 융합된 상태(p149)'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연관을 생각해 볼 때 눈여겨 볼 점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어떠한 실체인가 하는 것이다. 세한고절이라는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는 나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성현과 지사의 고결한 품격으로서 표현된다. 이처럼 자연물이 인간의 덕성에 대비되어 표현되어 있기에 만약 유가에서 인식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칸트식 철학용어와 굳이 비교해본다면 ‘물자체(Ding an sich)’보다는 ‘표상(Vorstellung)’에 더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요컨대 자연을 그 자체로서 인식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기보단 인격적인 덕의 표상으로 이해하는 데 더 치중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사군자에서도 보이듯 ‘사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되 그 보다 ‘자신을 통해 사물을 해석’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했다.(p153) 유물급인(由物及人)의 연원은 이러하다. 그렇기에 도덕과 예술은 통일을 이루는 것이며(p150) 유가적 미학원리인 비덕(比德)은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정당성을 얻는다.

결국 ‘천인합일’의 경지는 글자 그대로 인간이 자연에 완전히 귀속되거나 원시적인 형태의 인간으로 돌아간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자연의 모습에서 포착하고 이상화한 덕성을 내면화한다는 뜻이 더 옳다. 그렇기에 아마 서구인들이 현재 추구하는 가치에 가장 부합되는 것은 도가적 자연관이며 유가적 가치관은 서구의 기독교적 자연관처럼 부분적으로 인위적인 느낌이 없지 않으나 그렇게 이상화된 자연을 존숭한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대안으로서 유효하다.

그런데 서양의 관념론에서 인식하는 유교의 자연관과 실제는 큰 차이가 있다. ‘계몽의 빛 유교’에서 말하고 있듯 공자는 유럽에 일찍이 소개되어 루이14세의 궁정에선 논어의 번역본이 읽히기도 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마치 그리스의 현인처럼 Confucius라는 이름을 얻는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공자와 그의 유학사상은 관념론자들에 이르러 전근대적이고 하등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유교의 자연관을 ‘극복되지 못한 자연으로의 세속화된 기본적인 신비한 관계(p178)’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락’의 개념에서도 보이듯 자연과의 일체라는 사고가 주체적이기 보단 수동적으로 비쳐질 여지가 더 많았으며 이미 이성에 대한 합리적인 사유로 신적인 직관으로부터 벗어난 그들은 아직 자연과 구분된 독립적인 주체로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 중국인들을 저열하게 여겼다.







그러나 유교적 미학관점의 자연관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위와 같은 비판은 온당치 못하다. 서구적 관점이 지적하듯 극복되지 못한 자연과 그에 묻어가는 인간이 아닌, 사유의 틀에 의해 재단된 자연과 그것을 능동적으로 인식하는 인간이라고 보는 게 더 옳을 것이다.


3. 유학은 과연 여성의 족쇄인가?

이 책에서 현대 우리사회가 직면한 사회적 이슈와 가장 부합하는 장면은 ‘여성의 경험으로 읽는 유교’일 것이다. 점진적으로 증대되는 여권의 신장에 있어 과연 유학은 여성억압적인 성격이 원래 내재되어 있었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해보고 여성 권익을 위해 유학은 타파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철저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해 서술자는 이미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놓았다. 즉, 과거 대부분의 사상과 종교가 가부장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가부장제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p113)


오경은 남성의 역사였다!?라는 거의 반문에 가까운 도발적인 부제로 시작하는 글은 매우 신선하게 기존의 고정관념을 불식시킨다. 중국 고대왕조의 시조설화를 분석해 보면 고대는 모계중심의 사회였으며 여권이 오히려 우월한 사회였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여성의 혼인과 재가가 자유로웠으며 자유연애 또한 활발했다. <시경>에서 각국의 민요를 다룬 부분인 [국풍]은 그래서 연애 시로 보는 게 더 합당하며 부분적으로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褰裳)’와 같이 깜짝 놀랄 만큼 적극적인 구애시도 존재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유가의 5경을 남녀관계를 기초로 해서 논평하는데 1) 이렇듯 유학의 주요 경전이 성립될 때만 해도 여성의 권익은 그리 낮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긴 안목에서 바라볼 때 중국 역사에서 여권은 점점 하락하는 추세에 있었다. 남녀의 위치가 결정적으로 뒤바뀐 사건을 서술자는 ‘주나라의 은나라 정복’이라고 주장하는데 조직적인 국가체계를 갖춘 주나라가 모계중심의 씨족사회였던 은나라를 정복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고래의 가장 유명한 말 중에 하나인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 는 표현은 전쟁에서 승리한 무왕(武王)의 입에서 나오게 되었으며 이후 여성을 수천 년간이나 옭아맨 족쇄가 되었다.




‘칠거지악’과 소박맞은 여성을 구제하는 ‘삼불거’에 대한 서술자의 지적도 매우 신랄하다. 여성을 구속하는 논리인 칠거지악으로부터 여성을 배려하는 장치로 인식되었던 삼불거가 실제로는 여성의 노동력을 계속해서 장악하려는 지배구조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을 억압했던 족쇄가 얼마나 무겁고 소름끼치는 것이었는지 저자는 날카롭게 분석한다.

결과적으로 유학 자체에 여성 억압적인 성격이 있었느냐 하는 점에서 서술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공자가 시경을 두고 ‘삼백 편엔 사악함이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공자 또한 자유로운 연애에 어느 정도 개방적인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2) 오히려 후대로 오면서 국가지배이데올로기로 승격된 유교는 점점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남존여비로 대변되는 가부장제가 인민을 지배하는 원리의 연장선이라는 주장은 매우 적확하며 실제로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를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해 왔다. 일본에선 ‘이에(家) 제도’로 흡수되어 메이지 시대 내셔널리즘을 가속화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4. 인간의 미래를 위한 시급한 해결방안

이 책이 우리에게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담론을 제시해 줄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검증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유학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고도로 발달된 인류 문명의 한 시대를 사는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하여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현재가 인류 발전의 최 정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현재의 병폐들을 해결할 사상의 마련이 시급하다. 그 사상을 이룩하기 위해서 새로운 것뿐만 아니라 과거의 것들도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하며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가치관으로서 유학은 새로운 해석을 모색해볼 가치가 있다. H.G. 크릴 교수의 <공자 - 인간과 신화>라는 책에서 볼 수 있듯 필요하다면 지선(至善)으로 추앙되는 공자마저도 성스러움의 장막을 걷어내고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공자 왈 맹자 왈’로서의 유학이 아니라 공자와 맹자가 가졌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유학과 현대 사회와의 접점을 찾는 작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1)본문 p124에 소개된 <사기>의 언급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역경>은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건과 곤에 기초하고, <시경>은 남녀가 서로 만나 가정을 이루는 [관저]를 머리로 삼으며, <서경>은 순이 아황과 여영의 두 자매에게 장가듦을 찬미하였고, <춘추>는 남녀간의 음란함을 풍자하였다.”


2)공자가 시경을 연애 시의 성격 그대로 파악하고 그 아름다움을 찬미했다고 보는 데 신중할 필요가 있다. H.G 크릴교수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시의 문맥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유교적 관점에 따라 곡해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표현은 시경의 한 구절에서 연원한 것인데 '교묘한 웃음에 보조개여, 아름다운 눈에 또렷한 눈동자여, 소박한 마음으로 화려한 무늬를 만들었구나.' 라는 구절에 대해 제자인 자하가 묻자 공자는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이다(繪事後素)”라고 해석한다. 이를 두고 자하가 “(인(仁)이 바탕이고) 예(禮)는 나중입니까?”라고 묻자 비로소 시를 같이 논할 수 있게 되었다며 공자가 흡족해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유가에선 현상에 대해 일정한 가치관을 덧씌우고 그것을 견강부회하는 경우가 많다고 그는 비판하는데 절차탁마(切磋琢磨)또한 동일한 관점에서 비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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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my 2007-07-2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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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현대적 모습.



우리에게 유학이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고리타분한 조선시대, 공자의 말씀, 왠지 뜬구름 잡는듯 한 이야기같은 아득한 느낌... 그래서 이 책은 ‘지금, 여기의’ 유학을 말하고 있다. 작가 또한 여는 글을 통해 우리의 기억속에만 흐릿하게 존재하는, 그렇지만 우리의 생활 속 곳곳이 스며있는 유교적 관습들을 되새겨 보며 이러한 과거의 유산으로써의 유학 뿐만 아니라 최근 유학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통사상과 문화가 인문.사회과학, 예술, 디자인, 산업 콘텐츠로써의 부상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번째는 ‘지금, 현재의 유교’로써 전통적 유학의 모습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종교적, 예술적, 사회적 측면의 유학을 재조명하고 있다. 두 번째는 ‘유학의 영원한 이상’으로 중국과 한국 유학의 흐름 전반을 소개하고 유학안에 담긴 이상적 세계관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의 미래는?’을 통해 21세기 동아시아의 유교적 전통이 미래사회의 빛과 그늘을 어떻게 보안하고 이끌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해석을 제시한다. 이처럼 이 책안의 유학은 더 이상 도덕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과거의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대에 우리들의 생활과 사상, 감정을 바탕으로 거꾸로 바라본 대상이라는 점에서 가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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