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징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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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대중문화에서[편집]
현실 세계에서는 악당이 더욱 번성하는 수가 많고, 현대 소설에서는 그것이 리얼리티라는 이름으로 존중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뻔한 리얼리티가 싫었고, 그 무렵의 유행이던 '어둠과 악의 승리'라는 결말에 식상해 있었다.
악당은 수갑을 차라. 그런 단순하고도 정직한 느낌으로 지금 발표된 것과 같은 결말을 선택했다.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개정판에 추가된 작가의 말
이야기의 양상이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졌고 평면적인 이야기가 외면되는 현대에서는 언뜻 권선징악이 유명무실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시대가 변해도 사람은 사람인지라 권선징악 플롯은 건재하다. 오히려 얼뜨기 창작자들이 무리수를 써서 악인을 억지로 관객의 편으로 삼으려 하다가 '가해자 미화', '피해자 무시'라는 도덕적 문제가 생기고 반사회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으며, 때문에 악인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무조건 선을 제시하기만 해서는 이야기가 너무 단순해지기 때문에 문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평면적인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아예 인물의 선악에 대한 패러다임을 재조명해 '중심 인물이 정말 선한 자인가' 하는 물음을 인물에게 제시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상만 보더라도 단편적인 권선징악보다는, 리처드 3세, 맥베스[4] 등의 작품들에서 나오듯 주인공들이 악인이거나 혹은 선인과 악인의 경계를 오고가는 인물들을 주역으로 삼는 이야기가 개발되어 인기를 얻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착했던 이가 타락하거나, 악한이 선의 편으로 돌아서는 등의 변주를 통해 이야기의 다양성과 복잡함, 사실성과 깊이를 확보한 것이다.
악인들만 등장하는 작품도 악인을 중점적으로 묘사하되 옹호하지는 않는다. 대신 현대의 이야기는 악인을 관객 편으로 끌어들이면서도 권선징악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악인이 악행을 하며 활보하다가 정의구현을 당하거나, 반대로 개과천선을 하더라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든지, 어이없는 개죽음을 맞게 만들어지는 것 등이 있다.
반면 의도적으로 극단적인 선과 극단적인 악을 나눠 권선징악을 표현하려고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작위적인 작품이 된다. 권선징악 플롯 자체가 대체적으로 선과 악을 단순화해 구별하기 때문에 복잡한 현실을 대변하기 어려운데, 사람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니 절대선, 절대악 인물상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작위적일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와 선을 권장하는 인류의 관습이 있기 때문에 동화나 고전설화, 민담 등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대계 권선징악 형태를 띄고 있다. 콩쥐팥쥐, 흥부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의도적인 권선징악의 경우는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쓰는 동화나 만화 애니메이션에서 아예 클리셰 수준으로 흔하게 나온다. 어린아이들은 아직 현실의 어두운 면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힘들어 할 수 있으므로, 내용을 단순화하고 어린이 교육에 크게 지장이 안 갈 내용을 쓰려고 하면 권선징악의 주제가 많이 다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매체 속 권선징악은 아직까지도 현실에서는 거의 대부분 불가능한 형태의 온갖 비현실적인 방법이나 수단을 동원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5]
동화 이외에 의도적으로 권선징악을 메인 플롯으로서 많이 사용하는 곳은 정치선전물이다. 주로 국가단위 등의 단체에서 자신들의 정의를 주입시키고자 쓴다. 애초에 전쟁이란 건 대체적으로 '이념싸움'이기 때문에 양극화시킨 것을 아무런 고증이나 해설도 없이 선악으로 구분시켜 단순화시키기 쉬운 것. 쉽게 말해 자신들을 절대선, 상대를 절대악으로 표현하고 '착한 우리편'이 나쁜 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6] 다만 이 경우엔 진정한 의미의 권선징악이 아니다. 선과 악의 정의를 국가단위의 단체의 입맛에 맞게 변질시켜버리기 때문. 극우 미디어물이나 프로파간다가 대표적이다.
영화, 특히 복잡한 내용을 담기 어려운 많은 수의 액션영화의 기본 플롯도 권선징악이다. 다이 하드 시리즈와 같이 경찰이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대부분 경찰은 정의의 편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현대의 창작물에서 히어로물, 협객물이 꾸준하게 나오는 이유는 아직도 사람들이 권선징악에 대한 많은 수요가 존재하고 있고 마음 속으로 선행을 실제로 행동으로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의와 혼란만이 판을 치는 현실에서 예로부터 전해저 내려오는 신화나 전설속 의인들 현대가 되어서는 주로 영화에서 등장하는 영웅이나 비현실적인 초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라거가 협객이 나타나서 악인들을 무찌르고 본인은 전혀 잘못이 없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쓴다거나 가난이나 그 밖의 여러 이유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그 환경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 질수 있도록 도움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구제해 주는 장면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와 쾌감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픽션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사회 속에서 진짜로 벌어진 일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바람과 그 영웅을 실제로 현실 속에서 만나보고 싶다는 아쉬움과 여운은 결코 무시할 수 없고 작품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되며 작품의 흥행에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준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반대로 현실에서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인 선을 추구하거나 실천하고 어느 나라를 가던지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은 엄연히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여러 가지 한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불가능하다 오히려 악인들과 부조리가 승리하기 쉬운 불합리적이고 불공평하며 억울한 상황이 훨씬 많아서 기왕 차라리 영웅보다는 악당이 낫다는 이유로 희극과 권선징악적 창작물을 싫어하고 반대로 비극이나 피카레스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나 현대의 창작물들은 사회가 점차 급격하게 변화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인간 개인의 가치관으로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게 힘들어지고 어려워지는 상황으로 변해가고 있어 피카레스크나 사회의 부조리 또는 인간 비판적인 사상이나 생각을 주장하는 것을 소재로 한 내용을 담는 작품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며 지금도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
세력간, 혹은 개인간의 대결을 다룬 창작물 대부분은 권선징악을 기본 베이스로 해서 정의가 악을 이기는 구도로 시나리오를 짜는게 전통이지만 대한민국의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악이 선을 이기는 권악징선으로 내용이 흘러간다. 물론 이러한 권악징선 스토리는 일반적으로 다소 모험적이거나 아이러니를 통한 감독이 개인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무리 클리셰를 비틀고 입체적인 전개를 꾀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지,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 인간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며 항상 선하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 일상 속에서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어줍잖게 힙스터병 걸린 창작자들이 "난 클리셰를 파괴하겠어!"라는 포부에 차서 기존과는 다른 시도를 했다가 처참하게 망하는 일도 널리고 깔렸다. 문단 최상단에 인용된 이문열의 말을 떠올려보자.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러서도 인륜을 저버린 악인은 반드시 작품의 결말에서 주인공이나 주인공 측 인물들에게 패배하거나 격퇴되는 식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무조건 선을 제시하기만 해서는 이야기가 너무 단순해지기 때문에 문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평면적인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아예 인물의 선악에 대한 패러다임을 재조명해 '중심 인물이 정말 선한 자인가' 하는 물음을 인물에게 제시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상만 보더라도 단편적인 권선징악보다는, 리처드 3세, 맥베스[4] 등의 작품들에서 나오듯 주인공들이 악인이거나 혹은 선인과 악인의 경계를 오고가는 인물들을 주역으로 삼는 이야기가 개발되어 인기를 얻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착했던 이가 타락하거나, 악한이 선의 편으로 돌아서는 등의 변주를 통해 이야기의 다양성과 복잡함, 사실성과 깊이를 확보한 것이다.
악인들만 등장하는 작품도 악인을 중점적으로 묘사하되 옹호하지는 않는다. 대신 현대의 이야기는 악인을 관객 편으로 끌어들이면서도 권선징악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악인이 악행을 하며 활보하다가 정의구현을 당하거나, 반대로 개과천선을 하더라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든지, 어이없는 개죽음을 맞게 만들어지는 것 등이 있다.
반면 의도적으로 극단적인 선과 극단적인 악을 나눠 권선징악을 표현하려고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작위적인 작품이 된다. 권선징악 플롯 자체가 대체적으로 선과 악을 단순화해 구별하기 때문에 복잡한 현실을 대변하기 어려운데, 사람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니 절대선, 절대악 인물상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작위적일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와 선을 권장하는 인류의 관습이 있기 때문에 동화나 고전설화, 민담 등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대계 권선징악 형태를 띄고 있다. 콩쥐팥쥐, 흥부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의도적인 권선징악의 경우는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쓰는 동화나 만화 애니메이션에서 아예 클리셰 수준으로 흔하게 나온다. 어린아이들은 아직 현실의 어두운 면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힘들어 할 수 있으므로, 내용을 단순화하고 어린이 교육에 크게 지장이 안 갈 내용을 쓰려고 하면 권선징악의 주제가 많이 다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매체 속 권선징악은 아직까지도 현실에서는 거의 대부분 불가능한 형태의 온갖 비현실적인 방법이나 수단을 동원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5]
동화 이외에 의도적으로 권선징악을 메인 플롯으로서 많이 사용하는 곳은 정치선전물이다. 주로 국가단위 등의 단체에서 자신들의 정의를 주입시키고자 쓴다. 애초에 전쟁이란 건 대체적으로 '이념싸움'이기 때문에 양극화시킨 것을 아무런 고증이나 해설도 없이 선악으로 구분시켜 단순화시키기 쉬운 것. 쉽게 말해 자신들을 절대선, 상대를 절대악으로 표현하고 '착한 우리편'이 나쁜 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6] 다만 이 경우엔 진정한 의미의 권선징악이 아니다. 선과 악의 정의를 국가단위의 단체의 입맛에 맞게 변질시켜버리기 때문. 극우 미디어물이나 프로파간다가 대표적이다.
영화, 특히 복잡한 내용을 담기 어려운 많은 수의 액션영화의 기본 플롯도 권선징악이다. 다이 하드 시리즈와 같이 경찰이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대부분 경찰은 정의의 편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현대의 창작물에서 히어로물, 협객물이 꾸준하게 나오는 이유는 아직도 사람들이 권선징악에 대한 많은 수요가 존재하고 있고 마음 속으로 선행을 실제로 행동으로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의와 혼란만이 판을 치는 현실에서 예로부터 전해저 내려오는 신화나 전설속 의인들 현대가 되어서는 주로 영화에서 등장하는 영웅이나 비현실적인 초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라거가 협객이 나타나서 악인들을 무찌르고 본인은 전혀 잘못이 없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쓴다거나 가난이나 그 밖의 여러 이유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그 환경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 질수 있도록 도움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구제해 주는 장면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와 쾌감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픽션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사회 속에서 진짜로 벌어진 일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바람과 그 영웅을 실제로 현실 속에서 만나보고 싶다는 아쉬움과 여운은 결코 무시할 수 없고 작품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되며 작품의 흥행에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준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반대로 현실에서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인 선을 추구하거나 실천하고 어느 나라를 가던지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은 엄연히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여러 가지 한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불가능하다 오히려 악인들과 부조리가 승리하기 쉬운 불합리적이고 불공평하며 억울한 상황이 훨씬 많아서 기왕 차라리 영웅보다는 악당이 낫다는 이유로 희극과 권선징악적 창작물을 싫어하고 반대로 비극이나 피카레스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나 현대의 창작물들은 사회가 점차 급격하게 변화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인간 개인의 가치관으로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게 힘들어지고 어려워지는 상황으로 변해가고 있어 피카레스크나 사회의 부조리 또는 인간 비판적인 사상이나 생각을 주장하는 것을 소재로 한 내용을 담는 작품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며 지금도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
세력간, 혹은 개인간의 대결을 다룬 창작물 대부분은 권선징악을 기본 베이스로 해서 정의가 악을 이기는 구도로 시나리오를 짜는게 전통이지만 대한민국의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악이 선을 이기는 권악징선으로 내용이 흘러간다. 물론 이러한 권악징선 스토리는 일반적으로 다소 모험적이거나 아이러니를 통한 감독이 개인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무리 클리셰를 비틀고 입체적인 전개를 꾀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무엇이 옳고 옳지 않은지,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 인간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며 항상 선하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 일상 속에서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어줍잖게 힙스터병 걸린 창작자들이 "난 클리셰를 파괴하겠어!"라는 포부에 차서 기존과는 다른 시도를 했다가 처참하게 망하는 일도 널리고 깔렸다. 문단 최상단에 인용된 이문열의 말을 떠올려보자.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러서도 인륜을 저버린 악인은 반드시 작품의 결말에서 주인공이나 주인공 측 인물들에게 패배하거나 격퇴되는 식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3. 기독교에서[편집]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7]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8]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태오의 복음서 19:16-24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태오의 복음서 25장 31절 - 46절
4. 현실과의 괴리[편집]
현실에서는 권선징악을 실천하려는 사람은 있되 정작 실행에 옮겨도 대부분 개인은 불행해지고 주변에서 그다지 보상받지 못하거나 되려 비난받고 어떨 때는 아예 사회에서 배제되는 케이스도 흔하다. 도와주고 누명쓰기 같이 본인의 의도 자체는 의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할지언정 정작 본인이 구해준 피해자가 자신을 비난하거나 심하면 아예 본인을 가해자로 지목하며 덤터기를 씌우기도 한다. 심지어는 누구보다도 앞서서 정의를 실현해야 할 경찰/검사 같은 공무원들조차도 뇌물/인맥 등의 이유로 범죄자들을 묵인하는 경우가 많다. 피고의 형량 역시 피고의 재산과 권력의 정도에 반비례한다.
의로운 사람이 보상을 받거나 악인이 처벌되지 않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게 일상적으로 흔하게 일어나는 일도 아니며, 그 반대의 사례(권악징선, 완전범죄)도 굉장히 많기 때문에 항상 일반적이라 할 수 없다. 여러 제도와 법률을 도입했을 때부터 사람 하나하나의 행동을 선한 의도인가, 악한 의도인가로 단순히 해석하기엔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복잡해졌다. 더구나 착하고 나쁘다는 기준도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주관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착한 일 했다고 저절로 행복해지거나, 나쁜 짓을 한다고 저절로 불행해지는 것 자체가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낭설에 가깝고, 착한 사람이라고 착한 일만 하진 않고, 반대로 나쁜 사람이라고 나쁜 짓만 하지도 않는다.[9] 악의 평범성도 있다. 그리고 도덕적으론 나빠도, 법적으로 불법이 아닌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아무리 비윤리적인 짓들을 밥 먹듯이 하고 다녀도, 단순히 도덕적인 비난만 받으며, 법적으로 처벌시키진 못하므로 사회 생활에 지장을 안 받는다.
악인을 처벌하는 것 또한, 증거를 잘 모아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고발하여 그 악행이 낱낱이 밝혀지고 해당 악인이 법의 심판을 받으면 다행이지만, 범죄자를 처벌하려면 기본적으로 가해자가 누군지 알고 잘못을 했다는 증거가 있을 때에만 처벌이 가능한 것이지[10], 증거가 없으면 오히려 피해자가 무고로 처벌될 수도 있으며, 증거는커녕 범인이 누군지조차 모르면 그 범인이 스스로 자수하지 않는 이상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가진 게 많은 힘이 있는 악인이 자신의 권력이나 재력, 인맥 등을 이용하여 죄를 무마하거나 감형을 노리는 건 얼마든지 있는 일이며, 심지어 피해자가 사회적 약자이고 가해자가 강자인 경우는 더더욱 심한데,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에 대항할 만한 뒷배경이나 인맥 등이 없는, 말 그대로 가진 게 없는 이상은 솜방망이 판결이 나오는 건 양반이요, 심하면 무죄 판결이 나와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사법불신이 괜히 존재 하는 게 아니다. 하다못해 집행유예나 벌금형 정도로 끝나면 유력자 대상 소송에서 정말 천만다행인 셈이다. 적어도 유죄라는 의미이고 법원에서도 피고의 죄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범죄나 사고를 겪고 있으면, 대부분 "저 사람 불쌍하네"라고 생각하며 방관하지, 거기에 끼어들어서 피해자를 도와주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이는 양극화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괜히 나섰다가 자기가 해를 입을 수도 있고, 어차피 본인이 당한 것도 아니고 남의 일이라서 관심도 없는 데다, 그냥 단순히 범죄 가해자가 자신과 친분이 깊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적반하장으로 가해자를 감싸고, 피해자 비난을 하는 경우도 상당히 흔하기 때문에[11], 피해자도 가해자 이상으로 유리한 게 많고 힘이 있어야 이런 일을 겪지 않는다.
또한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어도 범죄를 저지른 시기나 소속된 국가에 따라 처벌의 강도가 다른데, 과거에는 불법이 아니었거나 상대적으로 가볍게 처벌하다, 나중에는 그 행위가 불법으로 바뀌거나 처벌이 강화되면 법이 개정 되기 전에 잘못한 인간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살거나 가벼운 처벌을 받고 끝나는 것에 비해, 법이 개정되고 잘못한 인간들은 비교적 강한 처벌을 받는 불공정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고, 특정한 국가에선 특정한 범죄에 솜방망이 처벌을 선고하는 것에 비해, 다른 특정 국가에선 그 범죄를 심각하게 여기고 강력하게 처벌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조두순처럼 중국이나 미국이었으면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을 강력 범죄자들이 한국에선 겨우 징역 몇 년만 선고 받고 풀려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웃기는 건 아무리 극악무도한 악인이라도 정작 본인들은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착하다고 믿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들 입장에선 그게 왜 나쁜 짓인지 전혀 모르거나 피해자에게 책임전가 또는 자기합리화를 하여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많은 데다, 자기 자신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므로 자신은 나쁘지 않다고 부정하려 하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잘못은 반성은커녕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악행이나 범죄를 저지른 것을 비난하는 경우도 흔한 편이다. 이는 피장파장의 오류와 원천봉쇄의 오류의 원인이기도 하다.
가해자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무작정 용서만 해서도 안 되는데, 전혀 반성하지 않으면서 감형을 위해 반성하는 척 연기하다가 나중에 다시 재범하는 일도 많기 때문에,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일 때 용서해야지, 단순히 겉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다고 쉽게 용서하면 안 된다. 관련 표현으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가 있다. 더구나 가해자를 용서하는 건 피해자의 몫인데, 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제3자가 개입해서 (반성하는 척 하는) 가해자를 감싸고 편드는 것도 잘못된 방식이다.
그리고 어떤 사건에서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는 그 사건 당사자들만 아는 일이며, 제3자들은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알기 힘들기 때문에, 피해자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사실은 가해자거나, 가해자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사실은 피해자인 경우도 있고, 쌍방이 잘못했는데 한 쪽만 잘못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도 많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증거가 없어도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주장만 믿으려는 경향이 있고, 그걸 악용해서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더 유리해지도록 없는 일을 지어내거나 자기 잘못은 빼고 피해자의 잘못만 이야기하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니까 증거가 없거나 양쪽의 의견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 친한 사람이 하는 말만 믿으며 2차 가해를 저질러선 안 된다.
현실에서 극악한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 간 대표적인 사례로는 잭 더 리퍼, 지미 새빌 같은 대부분의 완전범죄 가해자들, 상당수의 독재자, 학살자 등등이 있다.
다만 현실에서도 어디까지나 힘이 있거나 운이 좋은 악인들만 생존하는 것이지, 반대로 제대로 죗값을 치르고 인과응보를 받은 사례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단순히 권악징선인 사례들만 보고, 권선징악을 부정하며 일반화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판단이다. 더구나 현실은 범죄를 많이 저지르고도 멀쩡하게 사는 게 흔할 정도로 만만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찰이나 판사들도 범죄자를 제대로 검거 못할 정도로 무능하지 않고, 심하면 자신의 악행으로 인해 인생 자체가 끝장 날 수도 있다. 게다가 악인이라고해서 강자만 있는 것은 아니고, 피해자라고해서 약자만 있지도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해자들도 자기보다 힘이 없고 만만한 사람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지, 자기보다 강자인 사람은 잘 노리지 않으므로 사람 잘못 건들여서 역관광 당하는 경우도 있어 항상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유리하지는 않다. 더구나 악인이 성공하는 게 그렇게 쉽고 흔한 일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벌을 두려워하고 불법인 행위들을 피해다닐 이유도 없다. 이건 반대로 권선징악인 사례들만 보고 권악징선을 무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12] 이들은 가용성 편향 및 생존자 편향과도 유관한 문제이다.
의로운 사람이 보상을 받거나 악인이 처벌되지 않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게 일상적으로 흔하게 일어나는 일도 아니며, 그 반대의 사례(권악징선, 완전범죄)도 굉장히 많기 때문에 항상 일반적이라 할 수 없다. 여러 제도와 법률을 도입했을 때부터 사람 하나하나의 행동을 선한 의도인가, 악한 의도인가로 단순히 해석하기엔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복잡해졌다. 더구나 착하고 나쁘다는 기준도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주관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착한 일 했다고 저절로 행복해지거나, 나쁜 짓을 한다고 저절로 불행해지는 것 자체가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낭설에 가깝고, 착한 사람이라고 착한 일만 하진 않고, 반대로 나쁜 사람이라고 나쁜 짓만 하지도 않는다.[9] 악의 평범성도 있다. 그리고 도덕적으론 나빠도, 법적으로 불법이 아닌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아무리 비윤리적인 짓들을 밥 먹듯이 하고 다녀도, 단순히 도덕적인 비난만 받으며, 법적으로 처벌시키진 못하므로 사회 생활에 지장을 안 받는다.
악인을 처벌하는 것 또한, 증거를 잘 모아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고발하여 그 악행이 낱낱이 밝혀지고 해당 악인이 법의 심판을 받으면 다행이지만, 범죄자를 처벌하려면 기본적으로 가해자가 누군지 알고 잘못을 했다는 증거가 있을 때에만 처벌이 가능한 것이지[10], 증거가 없으면 오히려 피해자가 무고로 처벌될 수도 있으며, 증거는커녕 범인이 누군지조차 모르면 그 범인이 스스로 자수하지 않는 이상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가진 게 많은 힘이 있는 악인이 자신의 권력이나 재력, 인맥 등을 이용하여 죄를 무마하거나 감형을 노리는 건 얼마든지 있는 일이며, 심지어 피해자가 사회적 약자이고 가해자가 강자인 경우는 더더욱 심한데,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에 대항할 만한 뒷배경이나 인맥 등이 없는, 말 그대로 가진 게 없는 이상은 솜방망이 판결이 나오는 건 양반이요, 심하면 무죄 판결이 나와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사법불신이 괜히 존재 하는 게 아니다. 하다못해 집행유예나 벌금형 정도로 끝나면 유력자 대상 소송에서 정말 천만다행인 셈이다. 적어도 유죄라는 의미이고 법원에서도 피고의 죄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범죄나 사고를 겪고 있으면, 대부분 "저 사람 불쌍하네"라고 생각하며 방관하지, 거기에 끼어들어서 피해자를 도와주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이는 양극화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괜히 나섰다가 자기가 해를 입을 수도 있고, 어차피 본인이 당한 것도 아니고 남의 일이라서 관심도 없는 데다, 그냥 단순히 범죄 가해자가 자신과 친분이 깊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적반하장으로 가해자를 감싸고, 피해자 비난을 하는 경우도 상당히 흔하기 때문에[11], 피해자도 가해자 이상으로 유리한 게 많고 힘이 있어야 이런 일을 겪지 않는다.
또한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어도 범죄를 저지른 시기나 소속된 국가에 따라 처벌의 강도가 다른데, 과거에는 불법이 아니었거나 상대적으로 가볍게 처벌하다, 나중에는 그 행위가 불법으로 바뀌거나 처벌이 강화되면 법이 개정 되기 전에 잘못한 인간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살거나 가벼운 처벌을 받고 끝나는 것에 비해, 법이 개정되고 잘못한 인간들은 비교적 강한 처벌을 받는 불공정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고, 특정한 국가에선 특정한 범죄에 솜방망이 처벌을 선고하는 것에 비해, 다른 특정 국가에선 그 범죄를 심각하게 여기고 강력하게 처벌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조두순처럼 중국이나 미국이었으면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을 강력 범죄자들이 한국에선 겨우 징역 몇 년만 선고 받고 풀려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웃기는 건 아무리 극악무도한 악인이라도 정작 본인들은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착하다고 믿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들 입장에선 그게 왜 나쁜 짓인지 전혀 모르거나 피해자에게 책임전가 또는 자기합리화를 하여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많은 데다, 자기 자신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므로 자신은 나쁘지 않다고 부정하려 하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잘못은 반성은커녕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과 똑같은 악행이나 범죄를 저지른 것을 비난하는 경우도 흔한 편이다. 이는 피장파장의 오류와 원천봉쇄의 오류의 원인이기도 하다.
가해자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무작정 용서만 해서도 안 되는데, 전혀 반성하지 않으면서 감형을 위해 반성하는 척 연기하다가 나중에 다시 재범하는 일도 많기 때문에,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일 때 용서해야지, 단순히 겉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다고 쉽게 용서하면 안 된다. 관련 표현으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가 있다. 더구나 가해자를 용서하는 건 피해자의 몫인데, 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제3자가 개입해서 (반성하는 척 하는) 가해자를 감싸고 편드는 것도 잘못된 방식이다.
그리고 어떤 사건에서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는 그 사건 당사자들만 아는 일이며, 제3자들은 정확한 증거가 없으면 알기 힘들기 때문에, 피해자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사실은 가해자거나, 가해자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사실은 피해자인 경우도 있고, 쌍방이 잘못했는데 한 쪽만 잘못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도 많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증거가 없어도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주장만 믿으려는 경향이 있고, 그걸 악용해서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더 유리해지도록 없는 일을 지어내거나 자기 잘못은 빼고 피해자의 잘못만 이야기하는 식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니까 증거가 없거나 양쪽의 의견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 친한 사람이 하는 말만 믿으며 2차 가해를 저질러선 안 된다.
현실에서 극악한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 간 대표적인 사례로는 잭 더 리퍼, 지미 새빌 같은 대부분의 완전범죄 가해자들, 상당수의 독재자, 학살자 등등이 있다.
다만 현실에서도 어디까지나 힘이 있거나 운이 좋은 악인들만 생존하는 것이지, 반대로 제대로 죗값을 치르고 인과응보를 받은 사례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단순히 권악징선인 사례들만 보고, 권선징악을 부정하며 일반화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판단이다. 더구나 현실은 범죄를 많이 저지르고도 멀쩡하게 사는 게 흔할 정도로 만만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찰이나 판사들도 범죄자를 제대로 검거 못할 정도로 무능하지 않고, 심하면 자신의 악행으로 인해 인생 자체가 끝장 날 수도 있다. 게다가 악인이라고해서 강자만 있는 것은 아니고, 피해자라고해서 약자만 있지도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해자들도 자기보다 힘이 없고 만만한 사람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지, 자기보다 강자인 사람은 잘 노리지 않으므로 사람 잘못 건들여서 역관광 당하는 경우도 있어 항상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유리하지는 않다. 더구나 악인이 성공하는 게 그렇게 쉽고 흔한 일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벌을 두려워하고 불법인 행위들을 피해다닐 이유도 없다. 이건 반대로 권선징악인 사례들만 보고 권악징선을 무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12] 이들은 가용성 편향 및 생존자 편향과도 유관한 문제이다.
4.1. 반론[편집]
이런 현실적인 한계가 있지만 사회적인 관점으로 보면 권선징악을 무조건적으로 냉소적인 것으로 취급해도 안 된다는 반론이 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목적은 어찌됐든 간에 정의실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사에 존재했던 수많은 고통과 비극적인 일들로 예를 들면, '공포 마케팅' 문서의 '정치' 문단 내용과 비슷하게 전쟁범죄, 독재자들의 대학살과 권력을 휘둘러서 오늘날에는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마땅한 소수자나 약자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사상교육/세뇌를 통해서 범죄나 전쟁을 위하는 자폭 테러 등의 수단으로 이용하거나 희생시키는 일 역시 자신딴에는, '정의'를 내새워서 벌인일 들이다. 인신공격의 오류처럼 자신네는 선이고 상대네는 악이라는 전제를 깔기도 한다. 즉, 정의는 악행이나 비인도적인 행위, 반사회적인 행동들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하는 도구에 선동 수단으로 얼마든지 변질되어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현실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13] 혐오가 혐오를 낳는 아이러니와 '악은 악으로'의 위험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여성혐오를 경계하기 위해 아무 남성들에게나 '여성혐오자' 프레임을 갖다붙여 본인이 남성혐오자가 되기도 하는 모순과도 같다. 자신은 권선징악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권악징악, 완전범죄 내지 권악징선이기도 하다. '정의'도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개념이자 항상 상대적인 개념이었고, '정의'는 단어처럼 고상하고, 선하고, 합리적인 것에만 사용된 것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로 쓰이거나 사회가 혼란해져서 역사적으로 살기 힘든 난세의 시기였을 때 비인도적인 행동이나 정책을 정당화함으로써 어떻게 해서든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자 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온 게 현실이다.[14]
'선'이란 사회 체제와 질서 유지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존중되는 것이고 반대로 '악'이란 이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배척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당장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당장의 이익을 볼 수는 있다 하나 그 악행에 대한 징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악인과 악행을 동경하는 권악징선이 만연한 사회나 체제는 장기적으로 보면 혁명이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빠져 결국 붕괴를 맞이한 사례가 많으며, 이 때문에 사회는 진심이든 가식이든 간에 권선징악을 추구하는 쪽으로 발전된 것이다.
현실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악이 승리하고 악인이 생존하거나 성공한 사례들이 훨씬 더 많은 건 사실이나 그러지 않은 사례들도 드물게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68 혁명, 봉오동 전투 등이 있다. 설마 이것도 권악징악, 심지어 권악징선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사상의 문제다.
'선'이란 사회 체제와 질서 유지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존중되는 것이고 반대로 '악'이란 이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배척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당장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당장의 이익을 볼 수는 있다 하나 그 악행에 대한 징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악인과 악행을 동경하는 권악징선이 만연한 사회나 체제는 장기적으로 보면 혁명이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빠져 결국 붕괴를 맞이한 사례가 많으며, 이 때문에 사회는 진심이든 가식이든 간에 권선징악을 추구하는 쪽으로 발전된 것이다.
현실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악이 승리하고 악인이 생존하거나 성공한 사례들이 훨씬 더 많은 건 사실이나 그러지 않은 사례들도 드물게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68 혁명, 봉오동 전투 등이 있다. 설마 이것도 권악징악, 심지어 권악징선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사상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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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세주의 - 권선징악과 권악징선 사이에 있는 중립적인 개념이다. 다시 말해 "인류는 멸망해야 마땅하며, 같은 인류에 속한 자신(주인공)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로 요약된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중립적이나 극단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 인간비판 - 극단적인 권선징악은 대개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 해피 엔딩 - 권선징악이 나오는 작품들은 대개 마지막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작중 인물들 모두가 평화로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난다.
[1] 다만 선과 악을 구분짓는 기준이 다를 순 있다.[2] 이는 자신에게 위험이 되는 존재를 제거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 때문이다.[3] 17세기 평론가 Thomas Rymer가 처음 문학적 개념으로 제시했고, 철학자(법철학, 윤리 전공) Masa Nussbaum이 20세기 들어와 윤리적 개념으로 재평가하여 주목받았다.[4] 다만 이 작품들은 전부 끝이 파멸이다.[5] 대다수의 창작물에선 언제나 악당이 승리할 것 같은 상황이라도 항상 주인공 보정을 받고 파워업 한 주인공이 악당을 역으로 썰어버리는 결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반대로 악당이 그대로 선역측 캐릭터들을 이기는 결말은 극소수인 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창작물들은 주인공을 비롯한 선역이 승리할 확률이 악역이 승리할 확률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편이며, 현실과 가상을 구분 못하는 일부 무식한 사람들은 이런 권선징악인 창작물의 사례만 보고 "현실에서도 나쁜 짓을 하면 100% 벌을 받는다"라는 근거 없는 믿음만 가지며 누군가에게 범죄를 당하고도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고 가해자가 저절로 불행해질 거란 멍청한 기대만 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6] 과거부터 현재 21세기까지 북한이 단순 플롯을 이용하여 자국을 절대선, 외세를 절대악으로 나누는 식으로 주체사상을 선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7] 10계명과 가장 큰 계명인 마태오의 복음서 22:35–40 참고.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8] 다만 디모데전서 5장 8절의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에서도 나와 있지만 이 구절을 친족을 돌보지 마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링크의 성경 해석 참고. 해석 참고.[9] 애초에 악인이나 범죄자들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대부분 피해자가 자신에게 전혀 남이어서이며, 자신의 가족이나 친한 지인들한텐 남들처럼 똑같이 선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특정인한테 악랄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극악무도한 악인은 거의 없으며, 반대로 평상시에 착하다고 인식 되던 사람이 다른 곳에선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을지 모를 일이다.[10]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누가 범인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서, 진범은 잡히지 않고, 범인으로 오해된 사람이 대신 처벌되는 일도 많은 편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그런 적 없다고 주장하고 자기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으므로, 제대로 된 증거가 없다면 진짜로 누명을 쓴 사람과의 구별이 훨씬 더 어렵다.[11] 심한 경우엔 단순 방관이나 실드로 그치지 않고 가해자와 함께 피해자를 괴롭히기도 한다.[12] 사실 현실은 선하고 악한걸 떠나서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권선징악이나 권악징선을 따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법정 싸움에서 피해자가 이길지 가해자가 이길지는 둘 중 어느 쪽이 더 유리하고 누가 더 상황을 잘 대처했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지 선인 또는 악인이여야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현실을 무시한 채 권선징악/권악징선인 사례만 일반화 하면서 그 반대 사례는 생각하지 않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확증 편향, 현실부정일 뿐이다.[13] 이 '정의'라는 단어는 선거철이 되면 또 난무한다. 창작물의 예로는 데스노트의 야가미 라이토가 있다. 또한 관련 표현으로 블레즈 파스칼의 "힘이 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가 있다.[14] 서양의 최고 철학자인 플라톤의 대표적 저서 국가론에서도 돈이 많은 걸 장점으로 꼽았는데, 돈이 많으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어서 좋다 하는 것 말고 하기 싫은 걸 안 해도 된다 하는 걸 꼽았다. 그리고 이 하기 싫은 것은 돈이 없어서 자신의 신념이나 도덕 관념을 저버리는, 소위 말해 비인간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데, 결국 고대인인 플라톤도 악이나 범죄가 어느 정도 경제적 궁핍함에서 기인한다고 알고 있던 셈이다. 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라 아시아의 정치인이자 중국 최고의 명재상이던 관이오도 "일단 백성이 배부르고 곳간이 가득 차야 그 다음 예절이나 부끄러움 같은 걸 생각하게 된다."라며 비슷한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지금 너만 힘든 줄 아냐?' 같은 말,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것의 원흉이기도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