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18

매일 일기를 쓰던 80대 할머니들의 변화 - 오마이뉴스

매일 일기를 쓰던 80대 할머니들의 변화 - 오마이뉴스
찾아가는 마을학교 성인문해교원입니다. 여러 면 소재지에서 모인 '마을한글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씁니다. [편집자말]
80대 어르신 학생들이 초등부 과정을 배우는 일은 쉬운 게 아니다. 그래도 1단계(1~2학년)를 마치고 2단계(3~4학년)에 올라왔으니 매일 일기를 쓰면 글도 쉽게 터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고민 끝에 일기장을 구입해 모든 학생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기 쓰는 방법을 설명했다. 못 쓰겠다는 학생이 대부분이었지만 숙제를 냈다. 일기를 써오면 수업 시작 전에 수거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일기를 수업 시간에 읽고 두 세 줄을 썼어도 잘 썼다고 칭찬하고 모두 손뼉을 치도록 했다.
 
초등부 과정 공부하는 어르신 학생
▲  초등부 과정 공부하는 어르신 학생
ⓒ 이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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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으로 내 생각을 일기장에 써 본 것이기 때문이다. 팔십 평생 첫 일기라서 길게 쓰지는 못한다. 읽고 나서 틀린 글자를 칠판에 판서하고 맞춤법을 가르쳐 드렸다.

처음엔 대여섯 분이 일기를 썼다. 내용도 거의 비슷하다. 내 생각을 써 보는 것이 중요하니 한 줄이라도 쓰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그런데 이 학생들의 일기 내용은 신기하게도 닮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려고 밭에 가서 일했다. 그리고 밥 해서 먹고 설거지했다. 집 안 청소했다. 학교 가려고 이른 점심을 먹었다. 학교에 와서 공부했다. 끝나고 집에 와서 농사일하고 저녁 먹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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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전부다. 사실, 이만큼이라도 내 생각을 글로 써 본다는 것은 이 학생들에게는 커다란 용기이고 대단한 일이다. 그렇지만 매일 일기가 같은 내용이 되다 보니 몇 시에 일어났다는 기상 시간만 달라졌다.

학생들에게 강조해서 말했다. 일기에 그날 한 일을 순서대로 쓰게 되면 매일 같은 일 하니까 같은 말만 있다. 그러니 만약에 밥 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밥 할 때 반찬은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떤 양념을 사용했는지, 그 맛은 어땠는지, 식구들은 그 반찬을 먹으며 뭐라고 말했는지 구체적으로 써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G 학생의 일기가 깜짝 놀랄 만큼 달라졌다.

"날이 더웁다. 점심에는 오이냉국을 만들어 먹고 학교에 가기로 했다. 고추 밭일을 빨리 끈내고 오이밭에 가서 파란 오이를 한 개 따왓다. 그리고 미역을 물에 담가 노았다. 오이를 채 썰어 소금과 고운 고추가루를 너코 살짝 재어 노았다. 그다음에 미역을 빠라 건져 노았다. 여기에 마늘과 깨소금을 너코 서껏다. 마지막에 물과 얼음을 너코 오이냉국을 만들었다. 설탕도 조금 너었다. 시원하고 마싯었다. 남편도 마싯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하하하 크게 웃었다."

나는 G 학생의 일기를 읽어주고 일기는 이렇게 쓰면 된다고 폭풍 칭찬을 했다.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우레와 같은 손뼉을 쳤다.

"여러분도 이런 방법으로 쓰시면 됩니다. 어렵지 않지요? G 학생이 글을 잘 쓰려고 꾸몄나요? 학생이 했던 것을 구체적으로 썼지요. 그냥 내가 무엇인가 하는 과정, 그러면서 느낀 것, 생각한 것들을 그대로 쓰시면 됩니다."

일기 쓰는 학생이 점점 늘어났다. 글쓰기도 날로 향상되었다. 이곳 학생 중에 가장 나이가 가장 적은 S 학생이 있다. 유달리 글 솜씨가 있어서 일기를 잘 쓰는 학생이다. 오늘 일기는 일기가 아니었다. 한 편의 <시>다. '시'를 교재에서 더러 접해보긴 했다. 그렇지만 이 학생들에게 아직 읽고 쓰기도 버겁다. 

그런데 이 S 학생의 일기에서 시 향기가 났다. 소름이 돋으며 가슴이 아려 오는 글이다. 연을 나누지 않았을 뿐이다. 연을 나누니 시 한 편이 탄생했다. 물론 시인이 본다면 많이 다듬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내 눈엔 저세상으로 가버린 아들이 보고파 애끓는 엄마 마음을 표현한 한 편의 애절한 '시'라고 생각되었다. 다음이 S 학생이 쓴 일기(시)다.
 
<보고 싶은 내 사랑하는 아들아>
– S학생의 시(일기)

아들아!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아들아 
내 아들아 별이 되거라

오늘
또 
내 애끓는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넌 
단 한 번도
화안 하게 웃어주지 않았다.

 
 
나는 일기를 읽으면서 눈물이 글썽했다. S 학생에게 정말 잘 썼다 칭찬하고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쉬는 시간에 연유를 물었다. 아들이 지병으로 저 세상으로 갔다고 했다. 밤마다 잠이 오질 않아 아들 방에 가서 창문을 열면 캄캄한 어둠만 가득할 뿐이라 했다.

그러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영롱한 별들만 반짝이고, 보고 싶은 아들의 모습은 어디서도 볼 수 없다고 했다. 한글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놀랍다.

"선생님 감사해유. 늦게라도 글을 배워 이렇게 일기장에 마음을 적어 보니 꽉 막힌 마음이 조금은 뚫어지는 느낌이 들어유."

덧붙이는 글 | 브런치 스토리에 발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