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0

Philo Kalia - 『러시아 그림 이야기』(#김희은 지음/갤러리 까르찌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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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그림 이야기』(#김희은 지음/갤러리 까르찌나 대표)
서양 미술사를 어느 정도 익히면서 이제 러시아 미술 그리고 동양 미술 순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러시아 미술사, 책만 사놓고 읽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화가들의 이름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의 이름은 르네상스의 기를란다요나 바로크의 젠틸레스키의 이름이 입에 붙기보다 더 힘든 것 같다. 한 단계 오르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주어져야 한다. 그 계기가 바로 갤러리 까르찌나를 운영하며 아트딜러로서, 전시 기획자로서, 그리고 박물관 도슨트로서 열심히 생활하는 자로 자신을 소개하는 김희은 관장이다.

김희은 관장은 6월 26일 예술신학콜로키움 강사로 모신 분이다.

그와 안면을 트기 위해 지난 4월 11일 까르찌나 오픈 특강에 서영석 목사님과 함께 참석했다. 강연장 앞쪽에 앉아 그림을 보고 강의를 경청하고 메모하며 강의에 빨려 들어갔다. 만장한 강연장이었다. 

바로 그날 메모를 토대로 포스팅을 했어야 했는데 시기를 놓쳐 다시 그 메모를 찾을 수 없다. 그 강의의 인상과 초점은 아직 남아 있어 이 책을 읽으니 더욱 살아났다. 그의 강의는 시종일관 진지한 생명력이 넘쳤고 그것이 그림의 형상과 색채를 통해 시선과 귀를 사로잡았고 코를 통해서도 흡입되었다.(와인 한 잔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 책의 제명은 흔한 러시아 미술사가 아니라 러시아 그림 이야기다. 그림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저자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다. 

그래서 독자의 이야기가 된다. 그는 20여 년 전(2019년 초판이니까 지금은 24년 전) 러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후 펼쳐진 삶을 한마디로 “깜깜한 동굴”로 기억한다. “30살의 문맹인, 그때의 내 모습이다. 읽지도 쓰지도 말하지도, ... 소통할 수 없는 현실의 답답함,... 늘 갇혀 살아야 하는 현실의 좁은 공간”에서 그에게 자유와 해방을 준 것이 바로 미술관이었고 그림이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설명에서는 풋풋하고 강한 생명의 냄새가 난다.

이 책에 나오는 화가들은 40여 명이 넘는다. 이름을 익히기 위해 가나다 순으로 적어본다. 

겐리크 세미라드스키, 니콜라이 게, 니콜라이 야르첸코, 드미트리 레비츠키, 레오니드 솔로마트킨, 마르크 샤갈, 미하일 네스테로프, 미하일 브루벨, 미하일 시바노프, 바스네초프, 바실리 막시모프, 바실리 베레샤긴, 바실리 수리코프, 바실리 트로피닌, 바실리 페로프, 바실리 푸키레프, 발렌틴 세로프, 베네치아노프, 브루벨, 블라디미르 마코프스키, 빅토르 바스네쵸프, 사브라소프, 아르카지 플라스토프, 안드레에 마트베예프, 알렉산드르 이바노프, 야로센코, 이반 니키틴, 이반 쉬스킨, 이반 아르구노프,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이반 크람스코이, 이삭 레비탄, 일리야 레핀, 카를 브률로프, 카지미르 말레비치, 콘스탄틴 마코프스키, 콘스탄틴 플라비츠키, 쿠스토디예프, 크람스코이, 파벨 페도토프, 표도르 브루니...


김희은은 17개의 주제를 정해 화가들의 그림을 풀어간다. 특히 19세기 러시아의 척박한 환경에 처한 가난한 민중의 삶,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왕과 귀족 그리고 성직자의 어두움, 그 어두움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을 갈망하고 애타는 갈증을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리는 강렬한 민중들의 생명력, 곧 사랑이 작품 곳곳에 스며있다. 

민중을 착취하는 19세기 러시아의 사회와 역사는 19세기 후반 나라 안팎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 사회를 닮아 있어 더욱 감정이입이 잘 된다.

첫 장의 제목은 프쉬킨의 시를 따라 “삶은 그대를 속일지라도” 마음은 미래를 사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그림을 통해서 읽어낸다. 그래서 그에게 그림은 삶(생명)을 담는 그릇이다. 

인생은 불평등하고 얄궂은 결혼으로 덧입고(2장, 장 분류는 책에는 없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인 죽음을 맞이하지만(7장), 
빛과 어둠 속에서 眞理에 대한 물음, 善의 실천 속에서 쉬지 않고 美를 추구하면서(11장), 
세상의 변혁을 꿈꾸지만(12장), 
인간과 사랑에 빠져 고독한 악마의 시험에 들기도 하고(14장) 
전쟁 속에서 잔인한 상처를 입기도 하며(8장) 
절대권력의 허무함을 탄식하기도 한다(15장). 
그래서 인간은 마법의 묘약인 보드카를 찾기도 하지만(6장) 
찬란한 자연의 선물, 러시아의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회복과 평화를 누리기도 하고(3장) 
무엇보다 예술 세계 속에 꿈과 환상의 현실을 옮겨놓는다.(4장, 5장) 
러시아의 소녀들(9장)과 
미녀들(10장)은 
신화와 전설을 만들고(17장), 
샤갈은 사랑을 노래하고(5장) 
말레비치는 러시아 사회주의 현실과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고독 속에서 철학하는 예술을 이끌어낸다.(16장)


나는 두 작품만 소개하련다. 

하나는 일리야 레핀의 <고해를 거절하다>(1879-1885)(책, 121-123)이고 
둘째는 니콜라이 야르첸코의 <삶은 어디에나>, 1888(책, 5-12)이다.

역사적으로 종교(기독교)가 타락했다고 하지만 화가들의 비판과 저항은 예언자적이다. 
목사와 신부, 감독과 주교와 총회장은 이들의 신랄한 비판에 귀를 막을 것이 아니라 경청해야 한다. 
종교가 각성(깨달음과 깨우침)을 넘어 쉬임없는 변혁과 새로 낳음을 통해 교회다운 교회를 넘어 거룩하고 공정한 시장과 거룩하고 정의로운 정치를 꿈꾼다면 화가의 예언자적 비판은 구원의 복음이다.

일리야 레핀의 <고해를 거절하다>(1879-1885)는 학생 시절 보았던 윌리엄 샤프가 그린 도스토옙스키의 대심문관 목판화(1943년)보다 강렬했다. 

그 목판화는 지상에 돌아온 예수를 거절하는 90성상의 노심문관의 대화를 다룬다. 
노심문관은 돌아온 예수에게 “자 나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오시 마시오. ... 어떤 일이 있더라도 돌아오지 마시오!”라고 말하고 어두운 거리로 쫓아 버린다. 예수를 배제하는, 죽어 생명력을 잃은 교회의 모습을 너무 신랄하게 풍자한다.

<고해를 거절하다>는 부패한 러시아 혁명을 위해 일신을 바친 한 혁명가에게 사형이 내려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그를 구원한답시고 위선의 사제가 나타나 고해성사를 말한다. 
누구도 죽음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 초연해질 수 없다. 
시인 김지하는 1974년의 군사재판을 이렇게 회고한다. “사형이 구형되었다. 내 뒷자리의 서경석이 한마디 했다. 
‘웃기네.’ 나도 웃었다. 
김병곤이의 최후 진술이 시작되었다. 
첫마디가 ‘영광입니다!’ 아아,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게 무슨 말인가? ‘영광입니다!’ 
사형을 구형받자마자 ‘영광입니다’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나는 엄청난 충격 속에 휘말려들기 시작했다. 이게 도무지 무슨 말인가? 
분명히 사형은 죽인다는 말이다. ... 그런데 ‘영광입니다.’ 성자(聖者)의 말이다.”
(<흰 그늘의 길 2>, 364)


이 그림에서도 혁명가는 자신의 깨끗하고 헌신적인 신념 앞에 흔들림이 없다. 그는 한편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사제를 쳐다보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 사제 손에 들려진 십자가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여기서 과연 누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인가? 십자가를 들고 있는 사제인가, 사형 언도를 받고 죽음의 길로 들어서기 전 십자가를 바라보는 바로 이 사람인가?

김희은은 강연에서 마지막 작품으로 설명했던 니콜라이 야로첸코의 <삶은 어디에나>(1888년)를 책에서는 머리말에서 첫 그림으로 소개한다. 답답했던 러시아의 처음 생활에서 생의 의미를 불꽃처럼 만난 그림이리라.
 
이 그림은 유형 떠나는 혁명가 가족이 기차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즐기는 모습이다. 밖을 보니 비둘기 떼가 보이고 엄마는 자신들의 하루 식량에서 빵 한 조각을 떼어내 아이가 보는 앞에서 비둘기에게 던져준다. 김희은은 이 그림에서 “나눔의 아름다움을, 생명의 귀함을, 그래서 얻는 사랑의 감정”을 읽는다. 삶(생명)은 감옥의 쇠창살 안팎에서 살아 생동하며 움직이는 것이다.
 
시인 김지하도 죽음과 같은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은 벽면증(壁面症)에서 계시처럼 임한 생명체험을 하고 이겨낸다. “그런데.... 마침 봄이었다. 아침나절 쇠창살 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비쳐들 때 밖에서 날아 들어온 새하얀 민들레 꽃씨들이 그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며 하늘하늘 춤추었다.” 그 쇠창살 틈사이에서 자란 개가죽나무, 그날따라 유난히 푸르고 키가 크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눈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감방에 돌아와 앉자마자 울기 시작해서 두세 시간은 족히 울었을 것이다. 우는 동안 내내 허공에서 ‘생명! 생명! 생명!’하는 에코가 들려왔다. 시인이 깨달은 말씀이다. ”생명의 이치를 깨닫고 몸에 익힌다면 감옥 속이 곧 감옥 바깥이요, 여기가 바로 친구들과 가족이 있는 저기가 아니던가!“”(<흰 그늘의 길 2>, 430-432)

야로센코의 ‘삶(생명)은 어디에나’의 체험이나 김지하의 무소부재한 생명체험이나 둘이 아닌 하나의 체험이다. 생명(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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