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6

알라딘: 인간현상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지은이),양명수 (옮긴이)

알라딘: 인간현상

인간현상  | 한길그레이트북스 23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지은이),양명수 (옮긴이)한길사1997-04-22
원제 : Le Phenomene humain (1938년)


목차

001. <이른 생명> 
002. 우주의 바탕 
003. 사물 안 
004. 청년지구 
005. <생명> 
006. 생명의 출현 
007. 생명의 팽창 
008. 땅, 어머니 
009. <생각> 010. 생각의 등장 
011. 펼쳐지는 얼누리
 012. 현대세계 
013. <다음 생명> 
014. 집단 출구 
015. 집단을 넘어 ; 큰사랑 
016. 세상의 끝


책속에서

샤르댕이 비알레에게 보낸 편지
샤르댕의 ‘오메가 신학은 그리스도를 우주진화의 원리로 본다. 
우주진화는 흩어진 여럿이하나가 되는 사랑의 운동이요 의식확장 운동이다. 
거기에 그리스도가 있으며 그런 점에서그리스도는 처음(알파)이요 나중(오메가)이다. - 이용빈
1940년 북경에서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샤르댕은 1946년까지 북경에서 구금상태에 있었다.
이 기간에 주저인 『인간현상』을 썼다. 
전쟁은 갈라짐이요 미움이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그는 인류가 사랑으로 하나가 될 날이 오리라고 믿었다. - 이용빈

P. 40 어쨌든 우리는 ‘전체‘를 과학에 따라 기술할 것이고 그때 어떤 기초전제의 영향이 없을 수는 없다.

 그 전제에 따라 체계 전체의 구조가 짜여진다.
이 책의 경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어 얘기 진행의 판을 짠다. 
첫째 전제는 우주의 구성물에서 얼과 생각에 우선권을 두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사실을 ‘생물학의 현상‘으로 본 점이다.
자연 가운데서도 사람이 지닌 특별한 뜻 그리고 사람의 유기체 성질,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가설을 처음부터 부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두가설이 없이는 인간현상을 일관되게 종합하여 그릴 수 없다.  접기 - 이용빈

저자 및 역자소개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Pierre Teilbard de Cahardin)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881년 5월 1일 프랑스 중부 오베르뉴에서 태어났다. 18세에 예수회에 입회하여 1911년 신부가 되기까지 신학·지질학·고생물학 등을 연구했다. 소르본 대학에서 포유류의 진화를 연구, 자연과학 부문의 박사 학위를 받고 ‘파리 가톨릭 연구원’의 지질학 교수 자격도 얻었다.
1923년 과학적 사명을 띠고 중국에 파견된 후 20년 이상 지질학 및 고생물학 연구와 탐험에 몰두했다. 1929년 저우커우뎬에서 베이징원인 화석을 발굴한 것은 고고인류학 분야의 가장 빛나는 업적 중 하나다.
2차대전 후 파리로 돌아온 떼이야르는 ‘파리 과학연구원 국립중앙연구소장’에 임명되었으며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초빙되기도 했다. 1951년에는 인류학 연구기관인 뉴욕 웬느 그렌 재단의 상임연구원으로 초청받고, 1955년 선종하기까지 거기서 연구와 집필을 계속했다.
그는 신학자·철학자이기 전에 지질학자요 고생물학자였다. 그러나 경험적 현상의 발견과 설명에만 치중하는 단순한 과학자는 아니었다. 지질학과 고생물학의 발전 속에 함축된 인간의 의미를 숙고함으로써 조화로운 세계관 수립에 힘쓴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과학적 진화론을 신학에 도입하여 과학과 종교의 조화를 꾀하고 나아가 우주의 미래를 예시함으로써 현대 그리스도교 신학계로부터 예언자적 신학자로, 신화적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사후 5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5년에 유엔 본부에서 ‘인류의 미래 ─ 떼이야르의 현대적 의의’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은 그의 사상이 인류 발전에 공헌한 바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Le ph?nom?ne humain, L'avenir de l'homme, L'apparition de l'homme, La vision du pass? Le groupe zoologique humain, Hymne de l'univers 등의 주요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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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물질의 심장>,<그리스도>,<인격적 우주와 인간 에너지> … 총 9종 (모두보기)


양명수 (옮긴이) 
신학자이자 인문주의자로서 영성과 지성, 신앙과 윤리, 개인과 사회, 서양과 동양을 아우르는 통합적 사유와 정신세계를 이루어 낸 사상가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배재대학교 신학과 교수를 거쳐 1999년부터 2020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교목실장과 대학교회 담임목사로도 일했다. 2018년 제14회 이화학술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기독교윤리학회(Society of Christian Ethics)의 Global Scholar에 선정되어 2020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66회 연례학술대회에 초청되었다. 일본 교토 대학교와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 및 로잔 대학교에서 동서양 사상을 강연했다.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명예교수다.
청년 시절, 누구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그 열망을 갖는 데에는 기독교 정신이 큰 역할을 했다. 신학자가 된 후에도 기독교가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은 그의 연구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었다. 그의 저술은 기독교 신앙이 한 개인의 삶을 위로하고 자유케 할 뿐 아니라, 정의와 사랑과 평등 같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발전시키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 언어로 욥기를 풀어내면서도 그의 깊은 영성과 탁월한 지성을 맛보게 한다. 그 밖에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성명에서 생명으로』『퇴계 사상의 신학적 이해』(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외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세창출판사), 『녹색윤리』(서광사), 『어거스틴의 인식론』(한들출판사), 『기독교 사회정의론』『호모 테크니쿠스』(한국신학연구소) 등을 저술했다. 옮긴 책으로는 『하나님이냐 돈이냐』(대장간), 『악의 상징』(문학과지성사), 『인간현상』(한길사), 『윤리와 무한』(다산글방)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욥이 말하다>,<[큰글자책]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읽기 >,<아무도 내게 명령할 수 없다> … 총 32종 (모두보기)

평점분포    9.5

마이리뷰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

데카르트 이후 근대사상은 물질과 정신을 분리한 철학적 이원론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근대과학의 실험정신 역시 감각적으로 인식 가능한 관찰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정신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유물론에 경도되었다. 그러자 과학적 세계관이 주도한 근대문명은 유물론적 철학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정신세계의 가치와 중요성을 상실한 유물론적 윤리로 역사와 사회를 오염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과학은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등장하여 근대 물리학의 기초를 재구성하고, 철학 또한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엮어 세계를 유기체적으로 사유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앙리 베르그송, 사무엘 알렉산더, 로이드 모건, 알프레드 N. 화이트헤드가 등장한 것이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은 이러한 근대사상의 변곡점에서 태어나 종합적 사유를 체득한 과학자이자 신학자였다. 그는 가문의 전통을 따라 예수회에 가입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하였지만, 이집트에서는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쳤다. 또한 신학수업을 마치고 30세가 되어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삶에서든 생각에서든 과거의 종교에 머물지 않았다. 고생물학적 관심을 갖고 화석을 연구하는 지질학 교수가 되어, 몽골과 중국, 인도와 자바에서 발굴탐사를 하면서도 ‘우주의 운행방식과 목적’에 관한 종교적인 사색을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로 구성된 발굴팀이 북경원인의 유골을 발견하여 과학자로서의 명망을 얻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학적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교회의 박해와 추방에 시달려야만 했다.

[인간현상]은 떼이야르의 사상이 무르익은 1938년(57세)부터 2년 동안 집필된 책이다. 철학적으로는 젊은 시절 깊은 영향을 받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1905]의 목소리가, 과학적으로는 블라디미르 버나드스키의 “정신세계(noosphere)” 이론이 이 책에 녹아 들어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종교와 과학 양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진화론과 결합된 종교사상을 담고 있는 [인간현상]은 교황청의 서적 검열에 걸려 그가 죽고 나서야 출판되었고, 출판되고 나서도 과학계로부터 “형이상학적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사는 동안 자기 시대를 맛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창조적인 사상은 얼마가지 않아 과학과 종교 진영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신학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구성할 수 있는 사상적 무기를 얻게 되었다.

[인간현상]은 정신과 물질, 종교와 과학, 창조와 진화를 총체적으로 용해시킨 책이다. 유물론에 기초한 신다윈주의적 과학의 진화이론과 목적론에 근거한 정통 기독교신학의 창조론 사이의 대립구도를 깨뜨리고, 이 둘을 모두 수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실재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를 정신(뜻과 얼)에서 찾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도입하고, 존재의 사실성만이 아니라 의미를 동시에 포착하려는 종합적 직관을 과학에 주문함으로써 만들어낸 길이다. 그러나 인간 “현상”은 우주의 운동에 대한 설명을 특정한 존재론에서 유추하는 방식에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따라 출현하고 있는 것들의 어떤 경험법칙”을 찾는 방식으로 독자의 동의를 구한다.

떼이야르는 진화를 생명에 국한시키지 않고, 물질 자체에 “생명을 향한 목적을 지닌 기초적인 정신”이 있다고 봤다. 지구를 구성한 무기물의 운동에 이미 진화의 시작이 있었고, 이 진화는 새로운 형질의 우연한 출현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적이 있는 정향진화(正向進化)”로서 일정한 방향을 지닌다는 주장이다. 어디서 어디로 가는가? 무기물(“이른 생명”)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반성적 의식인 “생각”으로, 생각에서 보다 큰 “다음 생명”인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서 우주사건은 펼쳐진다. 이것이 [인간현상]의 4부 구조를 구성하는 골격이다.

그렇다면 왜 진화를 “인간” 현상으로 이름 짓고, 그것을 통해서 우주사건의 특징을 대변하려 했을까? 떼이야르는 정신과 물질이 종합된 “우주의 바탕”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쇄가 인간이고, 인간에게서 우주 바탕의 변화가 가장 활발히 일어난다고 봤다. 이것은 근대 계몽주의를 독선으로 빠뜨린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는 전혀 다르다. 떼이야르는 우주가 그 동안 진화해온 까닭이 “인간의 탄생”에 있다고 보고, 인간을 “생명 전체가 기울인 노력의 열매”요, 진화의 “첨탑”이요, “꽃봉오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정체된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인류의 분투에 대한 촉구를 동시에 겨냥한 말이다.

떼이야르는 [인간현상]에서 상승하는 우주운동에 관한 필연적인 법칙이나 종교적인 낙관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우주의 진화가 이제 “진화 자체가 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함으로써, 인류로 하여금 “다음 생명”인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 생명”을 다루는 4부는 과학적 논증보다는 종교적 비전으로, 논리적 연역보다는 직관적 지혜로 채워져 있다. 우주의 진화로 인해 등장한 반성적인 “생각”과 그것의 집단현실인 “얼누리(noosphere),” 이 현재 우주의 본바탕에 이미 활동하고 있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한 사랑과 생명의 열정으로 “큰 사람”이 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떼이야르가 [인간현상]에서 우주진화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유는 매우 거대하고 장엄하다. 그는 독자들로 하여금 과학을 읽으면서 종교를 연상하게 만든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를 튼튼하게 할 때 인류의 얼은 최고에 달하고 가장 활기찬 생명력을 띠게 될 것”이라는 그의 확신은 문명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인간현상]은 단지 고생물학적 관찰의 결과나 종교적 신념을 서술하지 않고, 인류의 참된 비상(飛上)을 호소한다. “주저하지 않고 (인류가 길러낸 생명과 평화의) 직관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 여기에 진화하는 우주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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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10년 2013-02-15 공감(8) 댓글(0)

     
인간현상(테야르 드 샤르댕), 긴 성장 기간 없이 어떤 깊은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진화 

국비 유학을 준비하면서 원진숙 교수님께서 당신의 박사 학위 과정 이야기를 해주셨다. 교수님께선 박사 과정생으로 있으면서 이화 여대에서 강사 일을 했다고 하셨다. 그 시절 교수님의 대학에서 이화여대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긴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끝이 보이지 않은 어두컴컴한 터널 속이 교수님의 처지와 비슷하게 느껴졌다고 하셨다. 보이지 않는 막연한 미래를 위해 매일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공부를 해나갈 것 아셨기에 교수님께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셨다. ‘터널이 끝나는 것처럼, 언젠가 공부도 빛을 보기 마련이니.’ 나 역시 공부를 하다가 막연한 미래 때문에 불안하고 힘들어할 시간이 올 것이다. 하지만 무기력감에 함몰돼 공부의 여정을 중간에 포기하면 빛을 볼 가능성을 아예 사라진다. 빛이 보이기 전까지 내가 어떠한 발전과 변화가 있었는지 보지 못하지만, 터널을 통과한 후 돌이켜 보면 참 많은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긴 성장 기간 없이 어떤 깊은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자연의 역사다. 그러나 그러한 기간이 일단 지나면 ‘전혀 새로운 것’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거대 분자의 시기는 단순히 우리가 그린 지속의 도표에 한 부분을 장식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를 마감하는 어떤 임계점과 같은 것이다. 또 그것은 세포의 출현으로 초기 진화 질서에 단절이 있었다고 하는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영역에서든’ 정말 새로운 것이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장차 활짝 꽃 피었을 때에야 그것을 알아보고 처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종자와 첫마디를 찾으러 나서도 첫 단계란 항상 감추어져 있고 파괴되어 있고 잊혀 있다.

 

샤르댕의 ‘인간 현상’을 읽으면서 원 교수님의 조언이 겹쳐 보였다,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변화의 과정에 있다. 하지만 이 변화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외관상 변화가 있을 때에만 이를 알아차릴 수 있다. 샤르댕은 우리가 변화를 알아챌 수 있는 지점을 ‘오메가 포인트’라고 불렀다. 즉 조그만 변화들이 모여 전혀 새로운 것들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나는 공부를 세상을 알아가고, 이를 보는 시야를 넓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지식과 생각의 축적이 아니라 이를 통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변화가 중요하다. 공부를 하면서 다양한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면서 나 역시 조금씩 변할 것이다. 하지만 이 변화는 나 자신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다. 이때 나는 공부에 대한 회의와 무기력감에 빠져 이를 포기할 수 있겠지. 하지만 원진숙 교수님과 샤르댕이 말하는 것처럼 변화가 눈에 보이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순간에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변화에 대한 몸부림이 바탕이 됐을 때에만 이것이 가능하다. 

 

샤르댕은 신학자인 동시에 지질학자, 생물학자다. 신학과 과학은 그 뿌리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샤르댕의 이력은 낯설다. 특히 생물학은 다윈의 진화론을 중심으로 한 학문 아닌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창조론을 옹호하는 기독교의 전통과 이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샤르댕은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진화’를 옹호했다. 이는 목적이 있는 진화로 다윈의 진화론과 별개이며 기독교에서도 수용 가능한 입장이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과 달리 진화에는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윈은 우연에 의해 생명체가 진화한다고 말하지만, 샤르댕은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진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이를 통해 과학이 반박 불가능한 객관적 사실의 집합이 아니란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 현상들의 표면만을 다루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그 이면을 살피는 학문이다. 이면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해석을 통해서만 ‘추측’할 뿐이다. 즉, 인간이 현상으로 나타난 ‘결과’에 자신을 투영해 얻어낸 ‘결론’이 모여 과학을 이루는 것이다.

 

샤르댕 역시 과학자로서 자신이 관찰한 현상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내놓았다. 주류 과학자들의 생각과 다르지만, 이것이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부정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과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을 추적하는 과정이니까. 샤르댕은 진화의 대상을 생물을 넘어 정신으로 바라본다. 정신은 또한 진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기존 진화론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물이 진화한다고 보지만, 그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한 정신적 진화를 통해 인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그 정신은 하나님과 연결돼 있으며, 결국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진화의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다. 또한 인간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지금껏 인간 문명을 풍성하게 하고, 학문 세계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샤르댕을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 세상의 중심을 인간으로 설정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관찰하는 것엔 인간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벚꽃이 흩날리는 길거리에 서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같은 시간 동안 모든 사람은 다른 것을 다르게 볼 것이다. 나는 벚나무를 본다. 내 친구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보겠지. 다른 친구는 우리를 바라보겠지. 이렇듯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먼저 주관에 따른 까닭이다. 우리는 우리 문제에 대해서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 어떤 현상을 우리와 동떨어진 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런 낮은 믿음은 나름대로 필요하긴 하지만 역시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아무리 객관에 따른 관찰도 처음부터 어떤 약속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연구의 역사가 흘러오면서 이룩된 사고방식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을 끝까지 밀고 가면, 과학자들이 얻어낸 연구 결과가 정말 연구 대상을 밝힌 것인지 아니면 그들 자신의 생각을 밝힌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전에는 사물 바깥에서 사물과 관계를 형성해서 무얼 발견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관계의 그물 안에 그들 자신의 몸과 얼이 이미 들어가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지질학 식으로 말하자면 변성작용과 내성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인식 작용 안에서 객체와 주체는 결합하여 서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좋건 싫건 간에 사람은 자기가 보는 것 속에 자기가 드러나고 보이는 것이다. 

 

샤르댕은 정신의 중요성과 함께 사랑을 토대로 한 공동체를 중시한다. 요즘 ‘개인주의야?’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개인주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생각이다. 마치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란 듯이 말이다. 샤르댕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이기주의, 원자주의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사랑을 바탕으로 개인주의가 이러한 부정적인 성질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존 듀이의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의 핵심 주장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를 이루려는 현대인의 노력이 이론과 달리 또 기대에 어긋나게 의식을 떨어뜨리고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해서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 지금까지 어떤 길을 취했는가? 물질을 늘렸다. 새로운 산업을 일으켰다. 어떤 사회 계급이나 뒤떨어진 민족을 위해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우리가 하는 노력이란 것이 아직도 그런 것들뿐이다. 모두 기계화하려는 것뿐이다. 하긴 기계화된 동물 사회의 뒤를 이어 기계화된 인간 사회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리 놀타 일이 아니다. 사탐의 지성이 과학을 일으켰지만 그 과학마저도 (순전히 사변이고 추상인 한) 사람의 얼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관계는 아직 겉돌고 그래서 더욱 노예화될 수도 있다……. 오직 사랑만이 개체들을 하나 되게 함으로써 개체를 완성할 수 있다. 사랑만이 속 깊은 만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을 상대에게 내주지 않고 어떻게 상대를 완벽하게 가질 수 있겠는가? 남과 하나가 되면서 ‘내가 된다는 모순된 행위를 실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닐까? 그런 일이 매일 여러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면 어느 날 전 지구 차원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샤르댕이 말하는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자율을 포기하지 않는다. 개인을 중심으로 둔 공동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주의에선 개인은 존중받지 못한다. 개인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쉽게 희생될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중요성을 실로 중요해지면서, 사회가 개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믿음이 강해졌다. 샤르댕의 주장은 과거의 공동체, 전체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다. 아마 그가 바라는 사회는 각각의 개인이 중심에 있으면서 누구도 희생하지 않고 공동체가 제 기능을 하는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기능주의가 말하는 식의 유기적 연결만으로 그의 공동체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사회가 구성원들의 유기적인 연결의 결과물이면, 각 구성원은 저 마다의 역할과 특징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는 사회가 보이는 특징과 질적으로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샤르댕은 단순히 유기적으로 개인이 모여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체가 사회라고 말한다. 사회와 개인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무한 반복으로 연결돼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사회를 파악하기 위해선 개인을 보고, 그 개인을 파악하려면 또 사회를 보면 된다. 이러한 개인이 중심이 되고 독립적인 공동체가 되기 위해선 타인에 대한 사랑이 필수적이다.


그 덩어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엉켜 있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게 된다. 앞에서 우리는 원소들이 거미줄이나 망처럼 서로 얽혀 있다고 했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그물 같은 것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물 역시 나눌 수 없지만 그물의 경우는 비슷한 단위들이 늘어서 있어 원소 하나만 보아도 전체를 알게 되고 반복의 법칙에 따라 그다음이 어떻게 될지 알게 된다. 한 공간을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채워나가는 반복의 법칙 속에서는 그물코 하나하나에 이미 전체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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