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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선생이 주해한 동경대전을 읽고
하나 2021. 8. 2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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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1
작가 김용옥
출판 통나무
발매 202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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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은 코로나 극복과 21세기의 방향을 제시하는 시대적 요청
어떻게 하면 코로나 바이러스를 박멸하고 마스크를 벗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도올 선생의 <동경대전> 역주(譯註)에서 찾아본다.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에 수운의 ‘동경대전’이 세상으로 나올 떄 콜레라가 창궐했는데,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도올 선생에 의해서 ‘동경대전’ 해설서가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 기간에 나왔다.
이와 관련하여 적중되는 조짐을 보이는 예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開闢) 아닐런가 태평성세(太平聖世) 다시 정(定)해 국태민안(國泰民安) 할 것이니 개탄지심(慨歎之心) 두지 말고 차차차차 지냈어라 하원갑(下元甲) 지내거든 상원갑(上元甲) 호시절(好時節)에 만고(萬古)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이 세상에 날 것이니….”(『용담유사』「夢中老少問答歌」)
도올 선생은 동학정신과 결부하여 “인간의 참다운 평등과 조화는 오로지 황제적인 신(神)이 사라지고, 모든 인간이 하느님이 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조선왕조 500년이 동학으로 마무리
아랍인에게는 ‘코란’이라는 경전이 있고 유대인에게는 ‘모세오경’이라는 경전이 있다. 이러한 경전에 버금가는 경전이 아니라 으뜸의 경전이 <동경대전>이라고 도올 선생은 강조한다. <동경대전>이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지은 동학의 경전이며, 동학의 제2대 교조 해월 최시형(崔時亨)에 의해서 경진년(1880)에 초판본 <동경대전>이 강원도 인제군 남면 갑둔리에서 한 달(5월 9일에 시작하여 6월 14일 목활자본으로 발간) 만에 후다닥 간행되었다.
이듬해(1881년)부터 콜레라가 크게 유행하자(「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신사년 ‘시세추是歲秋 대역大疫’이라고 기록함), 이미 민간에서는 동학에 입도하면 괴질에 걸리지 않는다는 입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에 동학도의 숫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경북 상주 전성촌에 도피처로 살림을 꾸린 해월 최시형은 1886년 4월에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금년에는 악질(콜레라)이 크게 유행하리니 도인들은 기도에 힘쓰는 동시에 특히 청결을 주로 하라.” 하며 아울러 다음과 같은 예방법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묵은 밥을 새 밥에 섞지 말라. 묵은 음식은 다시 끓여 먹어라. 침을 아무 데나 뱉지 말라. 만일 길이거든 땅에 묻고 가라. 대변을 본 뒤에 길가이거든 땅에 묻고 가라. 흐린 물을 아무 데나 버리지 말라. 집안을 하루 두 번씩 청결히 닦으라.”
당해 6월에 과연 괴질(콜레라)이 크게 유행하여, 수만 명이 죽었고 서울에서만 만 명 넘는 사망자가 보고되었다. 그 당시 해월의 당부대로 기도와 위생수칙을 지킨 동학도는 무사하였을 뿐 아니라, 해월 신사(神師)께서 사시는 마을 40여 호에도 병에 걸린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충청, 경기, 전라, 경상 등에서 소문을 듣고 신사를 찾아 도에 드는 자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동학의 사상체계를 잘 담은 대표적인 경전으로 사대부와 지식층을 위해서 한문체로 쓰인 ‘동경대전’과 일반 민중 특히 부녀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한글로 지어진 ‘용담유사’를 꼽는다. 이들 중 ‘동경대전’이 도올 김용옥 선생을 만나 이제야 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대선생주문집’과 동경대전 ‘경진초판본’에 대한 번역·해설서 곧 도올판 《동경대전1·2》이다.
“동학을 해설하는 자들이 유학의 넓고 큰 뜻, 그 도덕성의 배후에 있는 형이상학적 가치체계와 고전의 철학적 배경을 모르고 그냥 피상적으로 ‘성誠·경敬·신信’ 운운하는 것을 나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수운 본인과, 수운을 이해하고 해설한다고 하는 학인들 사이에, 너무도 경지의 차이가 크고 언어의 장벽이 높은 것이다. - 중략 - 수운의 사상이야말로 조선유학이 우리 민중의 가슴에 심어놓은 건강한 가치관의 총화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문화적 유산, 그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이 동학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이 사실 하나가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심원한 행운인지를 나는 되씹고 되씹게 된다.” - 도올의 『동경대전2』, pp. 93~94 인용
『을묘천서(乙卯天書)』는 ‘천주실의’보다 더 오래된 ‘신편서축국천주실록’
수운의 궁극적 관심은 “인간해방”이었다. 인간을 자기가 창도한 조직 속에 “가두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가 포덕을 시작하면서 먼저 한 것이 부인을 입도시킨 것이요(박씨 부인은 자진 입도했다), 그가 데리고 있던 두 여노비(女婢)를 해방시켜 하나는 첫째 며느리로 삼았고 하나는 수양딸로 삼은 일이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이었다.
이렇게 포덕을 시작하기 5년 전에 있었던 『을묘천서(乙卯天書)』와 관련된 이야기로 최제우는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다가 나이 30세를 전후하여 경주 집사람과 함께 울산으로 이주하여 속유곡동이라는 곳에 초가집을 한 채 마련하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을묘년(1855) 어느 봄날 최제우가 졸고 있는데 한 낯선 승려(禪師)가 찾아와 “금강산 유점사의 중인데 백일치성을 끝내는 날, 탑 아래서 잠들었다가 깨어나니 탑 위에 한 권의 책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얼른 펼쳐보니 세상에서 보기 드문 좀 희한한 책이었습니다. 소승은 이 책을 해석할 사람을 찾아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 보통 박식한 분이 아니라고 우러러보는 소문을 듣게 되어 다짜고짜 책을 가슴에 품은 채 이렇게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생원께서는 이 책을 좀 아십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수운 선생이 그 책을 펼쳐보니 유학의 책이라고 할 수 없고, 불가(佛家)의 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책이었다. 도무지 문장의 이치가 온당치를 않아 그 진의를 풀어 깨닫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스님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제가 사흘의 여유를 드리고 물러가겠습니다. 그간에 자세히 살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러갔다. 사흘 뒤 최제우는 책의 뜻을 일러주었다. 스님은 “부디 이 책대로 행하십시오.”라고 말한 뒤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不見其處). 깊이 살펴 이치를 뚫어 보았더니(探求透理) 기도(祈禱)를 가르치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을묘천서를 신비로운 책으로 간주하여 신화에 안주하는 것보다 동학사상의 보편성에 입각하여 실재하는 책으로 탐색해야겠다. 이런 측면에서 『을묘천서』는 루지에리가 1584년에 저술한 『신편서축국천주실록(新編西竺國天主實錄)』임에 분명하다. 『신편서축국천주실록』에는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의 신(Deus)을 천주(天主)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게다가 승(僧), 천축(天竺), 사(寺), 출가(出家) 등 불교 용어를 적극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예수회 소속의 수도자 루지에리는 승복을 걸치고 선교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수운 대신사가 받은 『을묘천서』가 마태오 리치가 쓴 『천주실의』라고 주장함으로써, 이에 대해 반증하는 논단 발표와 논의로 현 천도교 교구장들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병자 고치려고 부적을 써 봤더니, 어떤 사람은 낫고 어떤 자는 낫지 않아
을묘천서 사건을 겪은 이후 경신년(1860)까지 5년 동안 수운은 이 우주의 주재자 하늘님(하나님=천주天主)을 직접 만나고 싶은 열망이 식은 적이 없었다. 이렇게 을묘천서에서 깨달은 기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행하여, 마침내 경신년(1860) 4월 5일에 상제(上帝)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世人謂我上帝 汝不知上帝耶” ; 세상 사람들이 날 상제라고 부르는데 너는 그 상제를 모르느냐?
“然則西道以敎人乎” ; 그렇다면 기독교의 교리로써 사람들을 가르치리이까?
“不然” ; 그렇지 아니하다!
“吾有靈符 其名仙藥 其形太極 又形弓弓” ; 나에게 영부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다른 형상은 궁궁이다 .
“受我此符 濟人疾病” ; 나의 이 영부를 받아 질병에 시달리는 세상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어라.
그 말에 감동을 받아서 그 부적을 받아가지고 써서 먹어보았더니 몸이 좋아지고 병이 나아졌다. 그래서 딴 사람들의 병을 고치려고 이 방법을 써 봤더니, 어떤 자는 낫고 어떤 자는 안 나았다. 그 까닭을 살펴보았더니 지극히 하느님을 위하는 사람은 번번이 병이 나았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따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효험이 없었다. 결국 낫는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부(靈符)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의 성(誠)과 경(敬)에 달린 걸 깨달았다.
동학은 성인(공자·맹자)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수심정기(修心正氣)는 수운이 새로이 창안하여 무극대도의 큰 덕목으로 삼았다. 도올 선생은 수심정기에서 ‘심(心)’은 천주께서 수운에게 심은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단언한다. 오늘날 천도교에서는 수심정기의 수련을 통하여 시천주(侍天主)할 수 있다고 한다. 시천주가 곧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이니 하느님을 내 속에 모시어 신인합일이 이루어진 자는 어떤 병마도 물리칠 수 있는 면역체계를 형성한 몸(氣) 자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운의 수심정기나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동일한 사상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그 마음을 품으면 반드시 하나님이 된다.*
#다시개벽, #무극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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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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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자 감로 이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