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3

[북클럽] ‘조던 피터슨’이라는 현상 - 조선일보

[북클럽] ‘조던 피터슨’이라는 현상 - 조선일보



[북클럽] ‘조던 피터슨’이라는 현상
곽아람 기자
입력 2021.04.20 00:00


학생들과 함께한 피터슨(가운데) 교수. 그는 “인생은 고통이고 악(惡)으로 더럽혀져 있지만 사랑, 믿음, 진실, 용기가 고통과 악의 접근을 막는 무기가 된다”고 했다.

2030 여성들이 좌지우지하는 출판시장에 신기하게도 구매자의 80% 이상이 남성인 책이 있습니다. 3주째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 토론토대 교수의 ‘질서 너머'입니다.

질서너머

피터슨 교수는 ‘PC’라 부르는 ‘정치적인 올바름', 특히 페미니즘에 대해 반대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놓는 것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본인들이 페미니즘의 피해자라 여기는 젊은 남성들은 피터슨의 그런 발언을 “사이다”라며 열광합니다. 꼭 반(反)페미니즘을 부르짖어서만 인기가 있는 건 아닙니다. 전작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는 “세상을 탓하기 전에 네 방부터 치우라”며 선 굵은 아버지 상을 보여줘 호응을 얻었죠. 인생은 어차피 고통인데 거기에 굴하지 말고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이 피터슨 교수 철학의 핵심입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조언도 엄격한 기독교 근본주의에 입각한 것인데 여성들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엔 쉽지 않죠. 논쟁적인 저자 피터슨 교수를 양지호 기자가 줌으로 인터뷰했습니다.

[反페미니즘 선봉 조던 피터슨 교수 “2030 男性이 내게 열광한다”]

피터슨 ‘현상’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참고할만한 책들도 함께 소개했습니다. 저널리스트들이 쓴 ‘20대 남자'(시사인)과 30대 남성 사회학자 최태섭씨가 쓴 ‘한국, 남자'(은행나무)입니다.

[20대 남성은 왜 페미니즘을 미워하나]

첫 책 ‘12가지 인생의 법칙'이 나왔을 때 제가 한 이메일 인터뷰도 참고로 링크합니다.

["세상 탓하기 전에 네 방부터 치워" 스타 교수의 버럭강의]



사회 모든 곳에선, 특히 신문 지면에선 ‘균형’이 중요하죠.

한쪽 면 톱 기사로 피터슨 인터뷰를 소개하고 다른 쪽 톱으로는 이번주에 나온 페미니즘 책 중 특히 돋보이는 책을 소개한 건 그 때문입니다.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인 변호사 이브 로드스키는 세 아이의 엄마인데 ‘썩 괜찮은 남자'였던 남편이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모든 가사노동을 자기에게 떠맡기고 있다는 사실을 꺠닫습니다. 그 불공정함에 대한 분노를 해소하게 위해 가사노동 분담 게임을 제안하죠. 그가 쓴 ‘페어 플레이 프로젝트‘(메이븐)는 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페어 플레이 프로젝트 /메이븐

[“남편이 집에서 내 말을 듣기 시작했다”]

“2020년은 ‘내향성 인간들의 복수(revenge)’였다나.”

미국에 있는 친구와 비대면과 집콕의 ‘코시국’ 일상을 논하던 중 이 말을 듣고 무릎을 쳤습니다. “나는 원래 ‘집순이’라 그래도 견딜 만한데 활달한 사람들은 힘들 것 같다”고 했더니 안 그래도 저런 농담이 유행한다며 얘기해 주더군요.

사람 만나면 에너지를 많이 빼앗기기 때문에 북적이는 모임에 가느니 집에 혼자 있는 걸 좋아합니다. 사회생활에 걸림돌이 된다 여겼던 성격이 오히려 장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난 1년간 깨달았습니다. 세상 만사에 음지가 있으면 양지도 있다더니 팬데믹이 준 의외의 ‘선물’이라고나 할까요.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 10주년 기념판 /RHK

내향인의 힘을 짚은 대표적인 책 ‘콰이어트’(RHK) 10주년 기념 특별판이 나왔습니다. 조용한 책벌레 소녀였던 저자 수전 케인은 프린스턴대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됩니다. 내성적인 성품이 직업과 맞지 않아 고생하던 중 ‘왜 세상은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하고 내향적인 사람은 자기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원래 성격을 감추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죠.

‘내향성의 위대함’을 증명해 보겠다는 목표로 수년간 연구 끝에 펴낸 책이 ‘콰이어트’입니다. 전 세계 40여 국에 소개됐고 국내에선 15만 부 팔렸습니다. 저자는 “사람들은 훌륭해지려면 대담해야 하고, 행복해지려면 사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외향적인 국가’인 미국에서조차 두세 명 중 한 명은 내향적”이라며 “자신의 기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간 외향적인 척 버텼던 많은 내향인이 ‘나다움’의 이점을 느끼게 된 것이 10년 된 책이 다시 읽히는 힘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옳다 여겼던 모든 가치에 의문을 품게 하는 이 ‘뉴노멀’의 시기를 통과하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숙고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코로나가 끝난 후 인류의 지적 자산은 더욱 풍성해질 겁니다. 곽아람 Books 팀장
#북스#북클럽#뉴스레터








곽아람 기자

문화부 Books 팀장. 독서 에세이 '매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어릴 적 그 책', 아메리카 문학기행 '바람과 함께, 스칼렛', 미술 에세이 '그림이 그녀에게', '미술출장', 뉴욕 체류기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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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페미니즘 선봉 조던 피터슨 교수 “2030 男性이 내게 열광한다”

“反페미니즘 선봉에 선 지성인” 조던 피터슨 교수 인터뷰
양지호 기자
입력 2021.04.17 03:00










질서 너머

조던 피터슨 지음|김한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460쪽|1만7800원

조던 피터슨(59)은 ‘현상'이다. 그의 책 예약 구매자의 80%, 정식 출간 이후 누적 구매자의 66%(교보문고)가 남성이다. 20대 남성이 23.5%로 가장 많다. 여성이 주도하는 국내 출판 시장에서는 ‘검은 백조’ 같은 존재다. 신간 ‘질서 너머’는 출간 이후 3주 동안 국내 주요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5만부 이상 팔렸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저자가 반(反)페미니즘 선봉에 선 지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보니 2030 남성 위주로 인기가 많다”며 “일부 국내 남성 독자는 ’82년생 김지영'보다 많이 팔려야 한다며 소셜미디어 등에서 홍보를 하고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지친 2030 남성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전작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고 했던 그는 신작에서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말라”고 한다. 따르고 싶지 않은 ‘정치적 올바름’은 따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그를 최근 줌 인터뷰로 만났다. 그는 “나는 약자를 대변해서 욕을 먹는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약자는 2030 남성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정치적 올바름을 신경 쓰지 않는 발언으로 인기를 얻은 조던 피터슨 토론토대 심리학과 교수. 그는 인터뷰에서도 “남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을 더 매력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등 발언을 이어 갔다. /웅진지식하우스

–당신을 공격하는 사람이 많다.

“난 약자를 대변한다. 대부분 그래서 비난받는다. 내가 말하는 ‘약자(dispossessed·빼앗긴 자들)’란 정치적 올바름이 지배하는 세상 때문에 유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500만부 이상 나간 전작 ’12가지 인생의 법칙'은 국내에서 30만부 이상 팔렸다. 한국 남성 독자가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특정 독자층을 생각하고 책을 쓰지 않았다. 문화가 다른 한국에서 남성 독자가 내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건 내게도 흥미롭다. 남성들에게 ‘네 꿈을 이뤄도 돼’라고 말해주는 메시지가 먹히는 것이라 추측한다. 일각에서는 ‘약탈적이고 위계적인 남성적 문화’가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모든 남자는 자라나서 폭군 같은 가부장이 될 거라 공격한다. 터무니없을뿐더러 위험한 주장이다.”

–한국에서 남혐·여혐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먼저, 여자가 남자를 싫어하고, 남자가 여자를 싫어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른 성에 대한 증오는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가부장적 사회구조는 문제다. 사법 시스템이 특정 성별에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혐오를 정당화한다면 그건 실수다.”


−당신은 행복보다 책임이 중요하다며 부모가 돼 책임을 지라고 한다.

“행복은 찰나에 불과하다. 삶을 가장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의미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데서 나온다. 이는 행복과 달리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부모가 되는 것은 가장 심오한 책임을 지기로 하는 것이다. 결혼해서 애 안 낳고 뭘 대단한 일을 할 텐가(What the hell else you gonna do?)?”

−한국은 출생률(0.84명) 꼴찌 국가다. 여성들은 ‘경력 단절’에 대한 걱정이 크다.

서구 문화는 젊은 여성들에게 ‘성공적인 커리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틀렸다. 내가 봐온 절대다수의 여성은 30대가 되면서 학력이나 지성과 상관없이 아이에 대한 애착이 커졌다. 내 대학원생 여성 제자들 여럿도 그랬다. 진심으로 충격받았다. 아이를 낳자 커리어보다도 ‘내 아들’ ‘내 딸’이 가장 중요해졌다.”

−남성 육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남자는 신생아 육아를 위해 만들어져 있지 않다. 젖도 안 나온다. 또 여성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에게 매력을 느낀다. 남자가 집에서 애만 보고 있으면 남편에게 느끼는 매력이 급락(nosedive)할 가능성이 크다.”

−당신은 보수인가.

“정치적으로 보수라고 할 수 있다. 사회과학 전공자로서 ‘(정부의) 바보 같은 개입이 이뤄지면 의도했던 결과가 아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을 익혔다. 합리적인 사회과학자라면 모두 아는 얘기다. 학문적으로는 굉장히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책에서 12가지 법칙을 제안한 피터슨은 신작에서도 12가지 법칙을 제안한다. ’이데올로기를 버려라' ‘고통스러울지라도 감사하라' 등이다. 그는 책임지는 삶을 살라는, 징징대지 말고 어른이 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항우울제 부작용으로 지난해 병원을 드나들었고, 자살 충동에도 시달렸다. 인터뷰 중 두어 번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는 “이 책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죽음에서 구해줬다”고 했다. 1993년 미국 하버드대 교수로 임용됐고, 1998년 고국인 캐나다 토론토대 심리학 교수로 옮겼다. 현재는 휴직 중. 그는 “교편을 다시 잡을지는 고민하고 있다”며 “유튜브 등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심리상담은 계속 할 계획”이라고 했다.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전 세계적으로 350만명이 넘는다.


왜 젊은 남성은 조던 피터슨에 열광하는가?

조회수 2.1만2018. 12. 12. 20:5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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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성의 지적 영웅으로 떠오른 '조던 피터슨 현상'의 이면을 분석한다.
출처: Cage Skidmore, “Jordan Peterson”, CC BY SA
젊은 남성들의 지적 영웅으로 떠오른 캐나다의 임상 심리학자 조던 베어런트 피터슨(Jordan Bernt Peterson, 1962년생)

조던 피터슨 현상에 대한 설명에서 꼭 나오는 이야기가 “정체성 정치의 실패를 입증하는 증거”, “남성 중심 가부장제를 옹호하고 기독교 질서나 강조하는 역사적 반동”이라는 이분법이다. 그런데 많은 이분법이 그렇듯이 사실 이런 진단은 현상의 껍질만 슬쩍 보고나서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아주 단순하게 조던 피터슨에 투영한 바에 지나지 않는다.

먼저 한 쪽에서는 조던 피터슨은 ‘역사의 올바른 길’인 페미니즘, 정치적 올바름, 다문화주의를 비난하는 시대착오적 인물이며, 수많은 젊은 남성들이 이에 선동당하고 동조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증상이라고 주장한다. 

조던 피터슨이 페미니즘 성향의 앵커와 토론할 때 이들이 항상 물어보는 게 이거다. 왜 젊은 남성들에게 호소하느냐, 왜 너의 영상에 젊은 남성들이 그렇게 열광하느냐, 너에게는 그들을 선동해 정치적 분열을 확대하고 있다는 혐의가 있다. 이런 식이다.

반대편에서는 바로 그 페미니즘 및 기타 사상 때문에 사회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진단하며, 피터슨을 시대의 지성인이자 양심으로 추켜세운다. 이들이 보기에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으로 젊은 남성은 억압당하고 있다. 따라서 피터슨은 언론, 학계의 거짓 선동꾼과 싸우는 시대의 양심이다.

또 다른 한편에선 피터슨의 보수성을 비판하면서도, 정체성 정치(인종, 성별, 성적 지향, 종교, 장애, 민족 등 정체성이나 사회적 집단에 기반한 정치)의 관점에서 피터슨이 “정체성 정치를 무력화시킬 크립토나이트를 대중에게 제공”하고 있으며,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던 좌파는 실은 쇠퇴하고 있”다고 말한다(케이틀린 플래내건, ‘좌파가 조던 피터슨을 두려워하는 이유’).

그러나 이 말들은 모두 부분적 진실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피터슨이 이 정도 입지에 오른 이유는 단순히 페미니즘 하나 비판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가 유명해지고 인기를 얻은 상당한 이유가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에 대한 그의 시원시원한 ‘말빨’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설로 자리잡은 캐시 뉴먼과의 인터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별처럼 많은 수많은 ‘논객’을 뛰어넘고 그가 언어와 종교의 장벽도 뛰어넘고 세계적 스타가 된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마일로 이아노풀로스나 벤 샤피로가 얘기하는 영상들과 비교하면 잘 알 수 있다. 페미니즘을 비롯해서 현대 서구의 진보정치를 비판하는 건 이 사람들이 한 술 더 떴으면 더 떴고 피터슨보다 더 심한 독설을 마구 내뱉는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피터슨 같은 인기와 숭배를 얻어내지 못했다.

여기서 피터슨 본인의 대답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아까 페미니즘 성향의 앵커들이 한 질문들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의미에 굶주려있다. 그들은 방황하고 혼돈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러다가 책임을 지라는 나의 말을 보고 ‘바로 이게 내가 원하던 거야!’라고 깨달은 거다. 그래서 그들이 나의 말에 빨려들어온 거지, 정치적인 메시지는 내가 하는 활동의 본질이 결코 아니다. 남성이 많은 이유? 글쎄 내가 유튜브를 많이 하는데 유튜브는 거의 남성이 하곤 한다.” (조던 피터슨)

나는 이 말이 앞의 다양한 ‘정치적 해석’들보다 훨씬 더 본질에 깊게 다가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유튜브를 많이해서 남성들이 더 열광한다는 추측만 빼면 말이다.

역사 속에서 의미의 역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행복해지고자’가 가장 상식적인 대답일 것이다. 하지만 피터슨은 ‘의미’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 또한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삶이 고통이라는 건 ‘축의 시대’ 수많은 선지자들이 설파하던 진리였다. 

피터슨 말마따나 행복은 깨지기 쉽고 오래 지속될 수 없고 목표로 삼기에 부적절하다. 행복과는 전혀 거리가 멀던 전쟁과 기근이 횡행하던 전근대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터에 나가고 중노동을 하고 문명을 이끌게 만든 건 바로 의미였다. 지금 겪고 있는 이 고난도 무언가 더 큰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꺼이 가시밭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저명한 긍정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긍정적인 심리 상태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쾌락, 이건 호르몬 자극으로 달성할 수 있다. 

둘째는 몰입, 이건 어떤 대상을 성취하고자 할 때 만들어지는 고도의 집중상태다. 

마지막 셋째가 의미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존재가 무언가 더 광활한 의미의 사슬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삶과 행동은 단순히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인식한다. 죽음마저 불사하며 어떤 가치에 사람들을 뛰어들게 만드는 것은 그리고 높은 확률로 ‘의미’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요즘 젊은이들은 의미에 굶주려있다. 그들은 방황하고 혼돈에 어쩔 줄 몰라한다.” (조던 피터슨)

바로 이게 문제다. 사실 이 우주는 엄밀히 따졌을 때 의미라는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괜히 도덕경에 ‘천지불인’이라는 말이 있었겠는가. 지구는 사실 우주 위의 먼지 조각에 불과하고, 생명의 진화와 문명의 발전 모두 어떤 면에서는 우연의 산물이다. 

적어도 물리적 실체가 세상의 근본이라는 근대적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면, 이 우주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주 논리적인 귀결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해서’ 존재하지 별 다른 의도나 섭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근대 과학은 그런 섭리 위에서 세워지지 않았다. 따라서 인간도 자연계의 일부라면, 인간 세상도 사실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은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 의미를 느끼는가?

그건 의미를 느끼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껏 높아진 지능과 더 커진 사회집단은 인간에게 막대한 인지적 부담을 안겨주었고, 더 복잡하고 섬세한 의사결정을 요구했다. 한 번 제대로 키우는 데 엄청난 자원이 들게 된 인간의 신생아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언어 능력으로 훨씬 정교해진 공동체 내에서의 정치적 투쟁은 어떻게 관리해야하는가? 집단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구성원들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 이 같은 질문에 더 적절한 답을 내려온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을 이루었다. 아마 의미의 근원을 이루는 수많은 정서가 이 과정에서 다듬어졌을 것이다.

한 번 인간이 인지적으로 제대로 자리잡고 난 뒤에는 한동안 큰 문제가 없었다. 무한하고 복잡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에는 여전히 인간 인식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바라보았고, 영혼과 정령, 부족의 근원에 대해 얘기했다. 그 시기 인간의 삶이 토머스 홉스의 말처럼 “고독하고, 가난하고, 잔인하고, 불결하고,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살아가게 한 것은 이런 의미와 신화, 그리고 사회적 관계망이었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의미와 신화, 그리고 사회적 관계망은 인간의 ‘생존’에 기여했을 것이다.

농경이 시작되고 국가가 세워지고, 이전보다 더욱 복잡한 도전이 제기되자 의미 체계는 한 차례 더 혁신을 이뤄냈다. 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의미를 찾고 보편적인 세상의 질서를 찾아내고자 한 ‘축의 사상’들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도 큰 문제는 없었다. 고등종교 속에서 사람들은 더 큰 의미를 느끼고 더 큰 규모로 협력해나갔다.

아무리 당장의 농사일이 고되도,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알라, 혹은 천지신명의 뜻에 따라 이전부터 해오던 것이었고 앞으로도 할 일이었다. 삶이 정 고될 때는 지역 사회와 확대가족, 종교 공동체 등의 사회적 네트워크에 의지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정서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다 같이 종교의식에 참여하며 자신의 삶은 어쨌든 의미 있는 것이라고 납득했다.

의미의 종말

문제는 그 후에 나타났다. 계몽주의, 과학혁명, 산업혁명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지각변동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신의 섭리에 더 잘 다가가고자 시작했던 프로그램들은 점차 세계에서 마법을 해체해갔다. 

사실 알고보니 이 우주에는 딱히 의미라고 할 게 없었다. 모든 것은 뇌 안에서 벌어지는 뉴런의 전기화학적 상호작용이었고, 다윈주의에 따른 적자생존의 결과였다. 종교는 그저 인간이 자신을 기만하고자 만든 것이었다.

물론 이것이 당장 사회를 뒤집었다는 것은 아니다. 근대화를 가장 먼저 시작한 서구 국가들에서도 전통적인 사회체제가 최종적으로 붕괴하는 것은 몇 백년이 걸린 일이었다. 많은 경우 ‘마법을 해체’하는 새로운 지식에 관한 고민은 지식인, 그 중에서도 최신 유행에 가장 민감한 최전선의 지식인의 고민이었다.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교회에 꼬박꼬박 나갔다. 설령 교회가 세력을 잃었다고 해도 무언가 의미를 제공해줄 사회관계망은 차고 넘쳤다. 안정적인 가족, 대규모 노동조합, 다양한 지역사회 클럽들 등등. 내가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하나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삶의 의미는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20세기 후반부터 동시다발적으로 가속화된 경향들은 이 마지막 보루들을 차츰차츰 분쇄해나갔다. 바로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의미가 사라지는 시대가 시작된 듯 싶다. 피임약이 개발되고 가전제품이 광범위하게 보급되면서 여성들이 일터로 쏟아져들어왔다. 이는 전통적인 성역할 규범을 무너뜨리면서 가정의 해체에 큰 역할을 했다.

한편 그 뒤에 들어온 컴퓨터와 인터넷은 기업의 조직방식을 아예 바꿨다. 유연근무, 적시생산, 세계화 등의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논의되면서 기업 경영에 대대적인 혁신을 몰고왔다. 이 모든 변화는 대공장에 기반한 대규모 노동자 집단이 지역사회와 노동조합 커뮤니티 등에 갖고 있던 소속감과 애착을 해체시켰다.

1980년대 서구 선진 사회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상황이 바로 이랬다. 종교는 한참 전에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에 직장에 들어가서 직장을 통해 거의 평생동안 가는 광범위한 사회적 연결망을 형성하기도 어려워졌다. 

결혼은 점점 더 줄었고, 설령 하더라도 오래 유지될 수 없었다. 과거처럼 무심하게 돈만 가져다주면 대충 유지되던 가정생활에 경제적 독립을 이룬 여성이 메달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겠는가?

‘왜 이렇게 힘든 일을 하시나요?’

이렇게 물었을 때는 예전에는 가족을 위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직장 동료들과의 유대관계 때문에, 하다못해 성경에서 근면하게 살라고 했으니까라고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도 불안하고, 미래도 불안하며, 직장도 불안한 세대에서 인생의 의미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면 속 시원하게 답할 수 있을까?


젊은 사람들이 피터슨에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의미를 상실할 경우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 전통 종교, 가족, 일터가 급속도로 해체되는 가운데 많은 젊은이들이 망망대해 속에 내던져진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웹툰 ‘복학왕’의 우기명을 보면 아주 잘 이해될 것이다).

피터슨은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

“일단 뭔가 니가 책임지고 끌고 갈 것을 찾아라.”
“너의 등에 짐을 져라. 그러면 거기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2가지 인생의 규칙은 충만한 의미를 찾는 여정을 위한 피터슨의 가이드인 셈이다. 괜히 그가 부제를 ‘혼돈의 해독제’라고 지은 게 아닌 것이다.

왜 남성들이었나?

1970년대 이래로 몰아친 흐름은 명백히 여성의 상대적 지위를 상승시키고 남성의 상대적 지위를 하락시켰다. 절대적으로 여성이 남성의 우위에 섰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성은 이전에 갖지 못했던 경제적 주도권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고, 문화 컨텐츠 영역에서 막강한 소비자 집단으로 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정치 사회 운동을 이끌고 있다. 전반적으로 상승 국면인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선진 사회에서 근력을 쓰는 제조업은 점점 쇠퇴할 것이고, 사람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은 계속 팽창할 것인데, 이 또한 여성의 상대적 지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추세다.

남성은 반면 대대적인 하락을 겪었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열위에 서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기존에 누리던 지위를 상당 부분 위협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터는 남성 고용을 상당부분 책임지던 제조업이 위협 받으면서 흔들렸다. 가정 영역에서 새로운 역할과 지위를 찾아야 했지만 이건 남성도 여성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지지부진했다.

상대적으로 종교에 더 오래 남아있는 여성들에 비해 남성들은 종교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즉 의미 상실의 폭풍에 있어서 여성보다는 남성이 훨씬 더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이것이 내가 “남자들이 유튜브를 많이 하고 나도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니 남성 팬들이 많은 것이다”라는 피터슨 본인의 진술이 별로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여성은 상승하고, 남성은 하강한다.

아직 무너지지 않고 남은 것

피임기구와 가전제품의 보급, 컴퓨터와 인터넷의 확산으로 가정, 기업, 노동은 유연화되고 해체되어 정보의 흐름으로 재편된다. 공동체 정체성을 제공해주던 장소의 공간은 사라지고 정보, 자본, 기술, 사람이 흘러갔다 나가는 유동적인 공간으로 대체된다.

기존에 사람들에게 의미를 제공해주던 가정, 노동조합, 전통종교, 거대정당은 정보화의 파도에 심각한 재편을 겪게될 것이다. 중앙 데스크가 국민에게 통일된 정보를 제공해주던 언론은 파편화되어 모두가 제각각의 정보들만 받아보는 극도로 개인화된 언론으로 바뀔 것이다. 이것이 20년 전에 에스파냐 출신 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이 그의 ‘정보시대 3부작’ 중 1부인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에서 전망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농경시대와 산업시대까지 인간이 발 딛고 살던 모든 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인간은 앞으로 무엇에 의지하게 될 것인가? 그 다음이 2부의 내용으로, 그 제목은 ‘정체성의 힘’이다. 결국, 사람들은 젠더와 민족 등 다양한 정체성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고 몰려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공론장의 기능이 상실되어 가는 국민국가를 향해 숱한 정체성 그룹들이 뭉쳐서 자신들만의 언론 네트워크를 통해 소리 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정체성 정치’와 그것을 비판하는 조던 피터슨은 모두 하나의 거대한 사회변동의 산물인 것이다.

출처: 퍼블릭 도메인

피터슨은 임상심리학자로서 수많은 상담을 진행하면서 결국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그 자기 자신의 의지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진리가 담겨있다. 구렁텅이에 만족하는 사람을 타인이 아무리 끌어올리려고 해도 본인의 의지가 없으면 한계가 있다.

하지만 거시적 사회적 변화가 가져올 파급효과는 개인의 의지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과학의 시대에 전통 종교를 되살릴 수 있는가? 여성이 남성보다 더 학력이 높아질 시대에 가정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세계화와 기술혁명이 일자리를 끝없이 바꿔나갈 때, 긱 이코노미(Gig Economy; 우버나 에어비앤비와 같은 온라인 중계 플랫폼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독립형 일자리를 형성하는 경제 생태계.)가 사회의 보편적 모습이 될 때 의미를 둘만한 직장을 가질 사람은 얼마나 많이 남을까? 모든 사람이 피터슨처럼 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개인 수양론 차원에서 피터슨의 주장을 거의 다 받아들인다. 요즘 그래서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 전통의 지혜들에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자면, 피터슨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들어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 점에서 나는 기술발전이 인간의 자율성을 집어삼키고 말 것이라는 유나바머의 전망에 훨씬 더 공감이 간다.


출처: (CC BY SA)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조던 피터슨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들어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피터슨을 극우 선동가라고 묘사하거나 그저 정체성 정치의 파행으로 인해 반사적 인기를 얻게 된 것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은 더 깊은 차원에서 생각해보는 것을 권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페미니즘이나 정체성 정치지만, 더 심오한 물질문명의 가차없는 전진이 그 페미니즘을 포함해 피터슨 현상의 근본적 원인이다.

피터슨이 한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9.11 테러가 터진 뒤 사람들은 ‘무엇이 무너졌지?’라고 물었지만 그보다는 ‘아직 안 무너지고 남은 것은 무엇이지?’라고 물어야 했다.” (조던 피터슨)

전례없는 기술발전이 공동체를 파헤치고 의미의 근원을 해체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물어야하는 질문이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 점에서 피터슨이 진영을 막론하고 단순히 안티페미니즘의 전사로만 소비되는 것은 안타깝다.

출처: 9.11 테러로 무너진 WTC의 잔해 (퍼블릭 도메인)
"무너진 것이 아니라 아직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조던 피터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