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보이지 않는 지금, 루쉰을 읽는다
장정일 (소설가)
승인 2020.08.01
〈루쉰 독본〉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이지영 그림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때, 루쉰을 읽는다. 한 권은 루쉰의 대표적인 소설과 중요한 산문을 한자리에 모은 〈루쉰 독본〉(휴머니스트, 2020), 다른 한 권은 앞의 책을 엮은 이욱연이 루쉰의 작품을 해설하면서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여러 병독(病毒)을 함께 살피고 있는 〈루쉰 읽는 밤, 나를 읽는 시간〉 (휴머니스트, 2020). 지은이는 이 책의 머리말에 “기성세대가 되고 각계 지도층”이 된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면서, “청년 시절의 불꽃같은 삶을 훈장 삼아서 지금은 권력의 자리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루쉰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으면 한다”라고 썼다.
지은이의 또 다른 책 〈곽말약과 중국의 근대〉(소나무, 2009)에 나와 있듯이, 루쉰과 궈모뤄(곽말약)는 중국 현대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가이자 당대를 대표했던 지식인이다. 루쉰과 궈모뤄는 각기 중국 현대소설과 현대시의 주춧돌을 놓았다. 두 사람은 의사가 되기 위해 일본 유학을 했으며, 유학 중에 새로운 중국 건설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결심했다. 또 두 사람은 국민당에 반대하고 중국공산당에 협력한 공통점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궈모뤄가 중국공산당의 공식적인 ‘나팔수’였던 반면, 루쉰은 끝내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정도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차이는 궈모뤄가 희곡에 공을 들인 극작가이기도 했으나, 루쉰은 희곡을 쓰지 않았을뿐더러 연극을 증오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루쉰은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일본인 교수가 틀어준 뉴스 필름 속에서, 일본군에게 처형당하는 중국인 포로를 넋 놓고 바라보는 동포의 모습을 보고 충격받았다. 루쉰은 그 장면을 보고서 ‘중국인은 구경꾼’이라는 정의를 얻었다. 구경꾼은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에 거리를 둔 채, 수동적이고 몰자각적이 된다. 루쉰은 자기 민족의 구경꾼 의식을 흔들어 깨우고자 육체를 고치는 의사가 되기보다 작가가 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루쉰 연구자들은 저 일화를 ‘환등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소설과 에세이에는 중국인의 구경꾼 의식을 질타하는 장면과 논설이 번번이 등장한다.
‘아Q’만큼 어리석은 ‘아Q 구경꾼’
〈루쉰 독본〉에는 그의 대표작 〈아Q정전〉(1921)이 실려 있는데, 이 작품을 끌고 가는 중요한 모티프가 구경꾼 의식이다. 대표적인 세 장면을 보자. ①아Q는 몇 시간 전에 자오씨 댁의 하녀인 우 어멈을 희롱했다. 이 때문에 자오씨 댁 사람들이 모여 아Q를 처벌할 계획을 짜고 있는데, 아Q는 “시끌벅적한 구경거리”가 난 줄 알고 접근했다가 된통 매를 맞는다. ②아Q는 성안에서 우연히 혁명당원이 참수당하는 것을 보고난 뒤 마을로 돌아와 마을 사람들에게 “자네들 목이 잘리는 거 본 적 있나?”라고 뻐긴다. 이는 “너희들 ○○○이 나오는 새 영화 봤어?”라고 뻐기는 어린 학생의 심리와도 같은데, 무엇보다 이 장면은 루쉰이 일본에서 보았던 뉴스 필름 속의 넋 빠진 동포를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③작품의 끄트머리에서 아Q는 혁명을 핑계로 도둑질을 한 도적떼의 일원으로 사형당하게 된다. 그런데 아Q가 진짜 나쁜 놈인 것은 고작 도적질을 한 것에 있지 않다. 사형수는 처형장으로 가면서 늠름하게 노래를 뽑아 구경꾼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데 아Q는 그러지 못했다.
지독한 루쉰. 그는 〈아Q정전〉을 이렇게 끝마쳤다. “성안의 여론은 다들 불만이었다. 총살은 목을 치는 것보다 볼거리가 못 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얼마나 덜떨어진 사형수였는가? 그렇게 오래 거리를 끌려다녔으면서도 노래 한 소절 못하다니. 괜히 따라다니느라 헛고생만 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중국 현대소설의 시초인 〈광인일기〉(1918)는 〈아Q정전〉보다 더 심원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광인)은 자신이 가족에게 잡아먹힐 것이라는 불안에 시달리는데, 이 작품에 나오는 식인(食人)은 4000년 동안 중국인의 사고와 관습을 통제해온 인의도덕(仁義道德), 곧 예교(禮敎)를 은유한다. 루쉰은 중국의 종교가 되어버린 예교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제도’라며 규탄했다. 작중의 광인은 주위를 향해 “당신들 지금 바로 고쳐야 해. 진심으로 고쳐야 해. 앞으로 식인하는 사람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들은 알아야 해”라고 외치다가 돌연, 자신도 알게 모르게 식인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각성에 다다른다. “4000년 동안 식인을 해온 곳. 오늘에야 알았다, 나도 그 속에 여러 해 동안 섞여 있었음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여동생의 고기를 몇 점 먹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욱연의 해설을 보자. “알고 보니 자신도 사람 고기를 먹은 적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세상이 온통 식인 사회이고 다들 식인을 했는데, 그곳에서 누가 예외일 것인가. 광인 역시 과거에서 온 사람, 어둠의 시대 속에 뒤섞여 산 사람이다. 식인 시대의 흔적이 그의 몸과 마음에 귀신처럼 서려 있을 수밖에 없다. 홀로 각성한 그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외쳐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도 다른 사람처럼 식인을 했다. 곤혹스럽고, 창피하고, 난감한 상황이다.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서 생을 포기해버릴 수도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지금, 해설에 나오는 광인을 ‘그’로, 식인을 ‘성추행’으로 바꾸어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루쉰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향해 서 있던 사람이었으나, 그 때문인지 항상 가망 없는 희망에 매달렸다. 〈광인일기〉의 마지막을 “식인해보지 않은 아이가 혹시 아직도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라”라고 끝맺은 것도 그 증거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이 병독도 다음 세대를 잘 가르치는 것에서 치유의 희망을 찾을 수 있겠다. 그런데 N번방을 모의한 범죄자들이 일찍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디지털 성범죄 경력을 시작했다니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식인을 하지 않은 아이가 있기나 한 것일까.
이주노는 〈광인일기〉를 연구하는 데 책 한 권을 통째 바친 〈루쉰의 광인일기, 식인과 광기〉(21세기북스, 2019)에서, 이 작품 마지막에 나오는 광인의 진술은 전망이 불확실하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4000년 동안 식인의 역사를 지닌 땅에서 ‘사람을 잡아먹어본 적이 없는’ 아이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구할 수 있는 ‘아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 자신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오늘’ ‘지금’ ‘나’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미래의 아이를 구하는 최선의 방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