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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놈, 나쁜 놈, 죽일 놈’
등록 :2020-08-05
#이십년 전이다. 인도의 성산 난다데비의 파노라마가 보이는 북쪽 코사니 마을에 머물며 산에 오를 때였다. 인도 청년 셋이서 말을 걸어왔다. “어디에서 왔냐?” “한국에서 왔다” “남한이나 북한이냐” 하나 마나 한 질문을 던졌다. 히죽히죽 웃는 그들을 보며 ‘네놈들은 안 봐도 비디오”라는 듯 동네 불량배쯤으로 무시하며 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잰걸음으로 그들을 따돌렸다. 그런데 동네 뒷산에 오르듯 마실 물도 간식도 없이 오른 산의 정상은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올라온 시간이 아까워 오기로 정상을 밟고 하산하려니 허기가 져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혀는 마른 논바닥이 됐다. 그때 세 청년이 저만치 내려가고 있었다. 얼마만큼 내려가니 쉬기 좋은 장소에 앉아서 사탕과 초콜릿을 나눠 먹고 있었다. 그 근처에 털썩 주저앉긴 했는데, 아까 그들을 무시한 전과가 있어 차마 구걸도 하지 못하고 처량하게 먼 산만 쳐다봤다. 그런데 한 청년이 선뜻 초콜릿과 사탕을 내밀었다. 누가 그들을 건달이라고 했던가. 나의 구세주들을.
#30~40대까지만 해도 ‘현장에서 기자로서 먹은 짬밥이 얼마인데’ 하며 사람을 보면 그가 도둑놈인지 사기꾼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이제는 갈수록 사람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 보면 믿는 도끼에 발등도 찍히고, 적군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 구원군이 되어주는 사람도 만난다. 그러니 겉만 보고 사람을 차별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20년 전 신문사에서 부서를 이동한 지 4~5개월쯤 되었을 때 한 후배가 ‘내가 쓰는 기사마다 영 마뜩잖다’며 들으라는 듯 비난을 했다. 돌려 말하기보다는 정론직필형이었다. 화가 치밀었음에도 몇번 대화를 해보니 극과 극은 의외로 통하는 데가 있었다. 지금은 가장 자주 ‘밥을 먹자’고 찾아와 종교와 철학을 논하는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그때 그를 다시 상종 않기로 했다면 좋은 벗이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노모가 늘 “아무리 미운 사람도 영영 안 볼 듯 막보기로는 대하지 말라”고 한 당부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다.
#요즘 뉴스를 보면 상종 못 할 인간들 투성이다. 그 인간이 얼마나 의심할 여지 없이 나쁜 인간인지 십자가형에 처한 듯 대못을 친 기사엔 다시 촘촘하게 확인사살 댓글이 잇따른다. 법정에도 3심제가 있고, 잔혹 범죄로 사형을 선고받더라도 목숨까지 끊어서는 안 된다는 데까지 진화해온 인류의 정신사가 무색하게 ‘못된 놈, 나쁜 놈, 죽일 놈’이란 혐오와 낙인찍기가 싼샤댐을 넘어섰다. 그러나 대다수가 낙인을 찍는다고 해서 나쁜 놈인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앞두고 빌라도 총독이 ‘예수와 바라바 중 누구를 놓아줄까’ 물었을 때 대중은 ‘바라바’를 택했다. 예수를 ‘죽어 마땅한 자’로 택한 셈이다. 석가도 사촌 제바달다가 모든 제자를 데리고 교단을 나가버린 적이 있었다. 철저한 왕따였다. 다수로부터 낙인찍혔다가 부활하는 사람이 어디 석가와 예수뿐일까. 무고한 자의 무죄가 뒤늦게 밝혀지는 경우도 많지만, 설사 그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개과천선의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비판은 그 길을 열기 위함이지 아예 봉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사냥할 때도 도망갈 길은 터놓는다고 했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인간의 측은지심이기도 하지만, 자신도 언제 그와 같은 처지에 내몰릴지 모른다는 역지사지, 인과응보의 철리를 알기에 너무 모질게 할 수 없어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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