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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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丁若鏞 | |
이름 | 정약용 (丁若鏞) |
시호 | 문도(文度) |
아호 |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 |
출생 | |
사망 | |
본관 | |
직업 | |
신장 | 약 161cm 초과[6] |
분야 | |
주요 활동 | 집필, 연구, 발명 |
종교 | |
가족관계 | |
직계 후손 | 6대손 정해인 |
1. 개요[편집]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아껴 쓰는 데 있고, 아껴 쓰는 근본은 검소하게 말하는 데 있다. 검소한 연후에나 능히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연후에나 능히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한 자가 되는 그 자체가 백성을 다스리는 수장의 의무다.
2. 생애[편집]
외가가 해남 윤씨이며 어머니는 국문학사를 공부할 때에 꼭 나오는 문인인 윤선도의 후손이다.[17] 부친의 관리 생활을 보고 자람으로써 백성 중에 사회적 약자들인 궁민(홀로 사는 노인, 과부, 홀아비, 고아)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 것인지를 깨달았다. 외가의 학문과 친가의 실천이 다산의 이론과 실천에 도움을 준 것이다.
임오화변이 일어나던 해인 1762년 8월 5일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 6. 10 ~ 1792. 4. 9)과 어머니 해남 윤씨(? ~ 1770. 11. 9)[18] 사이의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정약용은 매우 차분하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 일화로 어릴 적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종기가 큼직하게 났는데 눈가에 나서 또래들이 마치 눈썹같다고 그를 삼미, 말 그대로 눈썹이 3개라고 놀리듯이 불렀는데 화내지도 않고 "어 그러냐? 그래"라고 대했다고 한다. 아예 스스로를 삼미(三眉)라고 부르고 삼미집이라고 글을 쓰는 통에 놀리던 아이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1783년(정조 7) 증광 생원시에 3등 7위로 입격하고, 1784년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익의 성호학파 중에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서파에 속한다. 이는 당시 남인들의 복잡한 혼맥도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익의 종손이 이가환이고[19] 이가환의 외조카가 이승훈이며 이가환의 누이의 아들이 이벽이고 이벽이 정약용의 누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처남 매부 관계가 된다.
성균관 유생 시절 때 성균관 우수학생들을 모아 상을 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정조는 정약용을 처음 보았다. 이후 마음에 들었는지 자주 불러 시를 짓게 했다. 정조의 눈에 들어 예쁨을 받았으나 최종 시험인 대과에는 계속 미끄러진다. 그것도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성균관 시험에서는 툭하면 1등을 먹는데 대과만 보면 떨어지는 것이다.
정약용의 대과 불합격이 남인인 그를 견제한 노론의 입김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는 음모론이 있는데 하필 남인 영수인 채제공이 주재한 시험에서 정약용이 합격한 사실이 음모론의 주된 근거가 된다. 물론 음모론에 대응하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 단국대학교 사학과 김문식 교수는 사암연보의 기록을 토대로 남인 계열인 정약용이 갑자기 출세하거나 급제하면 노론의 공격을 받게될까 우려해 정조가 천천히 급제시켰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의 반응을 보면 건국대 사학과 신병주 교수와 당시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였던 최태성도 이 주장에 동의하는 모양[20]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갑과 2위(아원)로 급제하고[21] 등용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받고 해미에 유배된지 10일만에 풀려난다.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정조가 청나라에서 수입한 기기도설을 전해주고 연구하도록 해서 이를 바탕으로 거중기와 녹로(轆轤)[22]를 제작하고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이었던 수원화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23] 허나 이 일은 후에 그의 발목이 잡히는 큰 계기가 된다. 서용보는 파직되었음에도 화려하게 부활하여 후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의 반열에까지 오르는데 순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총애가 깊어 이를 기반으로 권세를 휘두른다고 당대 유생들에게 비난을 듣기도 했으며 훗날 정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편찬 위원에까지 참가하게 되었고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정약용을 괴롭힌다.
이후에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년) 3월 신유박해 때 두 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오늘날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유배되었다. 노론에서는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셋째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이후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24]되었다.[25]
정약용이 18년 동안 귀양 생활을 조정에서 끊지 못했던 것도 영의정이던 노론 벽파의 거두 서용보가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26]
강진이 그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종가로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바로 이 집안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다. 신위를 불태워 처형된 윤지충, 권상연은 정약용과 먼 외가 친척 사이가 된다. 그런데 하필 강진현감이 노론 벽파의 맹장 이안묵이였는데 이안묵은 금평군 이제의 증손이고 이하술의 손자였으며 종친의 후손이였는데 이안묵은 서학의 추종자의 친척이고 남인인 정약용을 못마땅히 여겨 유배지에서 정약용을 냉혹하게 대했고 정약용도 이안묵 재임 3년 동안 유배지에서 힘들었다. 이안묵은 강진현감에 있었을 때 토색질을 하여 탄핵당하고 권유와 합작해 대혼저지기도 사건에 가담하여 역적으로 몰려 정법당했다. 진짜 정약용을 괴롭힌 사람은 노론에서 악연인 서용보와 친했지만 서학 문제로 원수가 되버린 이기경과 노론 벽파의 강경파인 이안묵이 되겠다.
방례초본과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를 썼다. 목민심서는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기 위한 책이고 흠흠신서는 공정한 재판을 논한 책.
18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유배되어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연구의 성과가 나타나는 유배 후반기에 탈고된 것이 많다. 정약용을 공격한 노론 벽파가 몰락했지만 당시 정국에는 평지풍파가 일어났었기에 조정에서는 정약용의 유배를 잊어버리고 석방하지 않았다.[27] 아들들이 가끔 석방을 위해 격쟁(왕의 행차에 꽹과리를 치면서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기록도 있고 그의 죄안을 삭제하려다가 도리어 공격당하는 기록도 있다. 이 시기에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가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1818년 8월에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저술 활동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 1836년 2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4세. 정약용이 사망한 날은 다름 아닌 60주년 결혼 기념일(회혼일)이었다고. 정약용이 죽은 2년 후 15세에 약혼을 맺었던 부인 홍씨도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9일 전인 1910년 8월 20일 조정에서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提學)을 추증하고 문도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조와는 그야말로 소울 메이트인데 젋은 시절부터 술자리고 개인적인 자리까지 항상 불렀다고 한다. 정조 사후 그는 박해를 받지만 정조의 증손자인 헌종이 즉위하면서 달라지는데 헌종은 안동 김씨를 밟으며 개혁을 추진하던 개혁 군주였고 김정희, 조병헌 등 유배를 가있던 개혁적 성향의 선비를 데려와 개혁을 추진하였다. 일설에는 정약용이 죽은줄 모르고 벼슬을 다시 제수하려 했으나 죽은 것을 알고 슬퍼했다는 야사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다산의 묘소를 중심으로 다산 유적지가 위치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경기도에서 건립한 실학박물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건너편에는 다산생태공원도 위치하고 있다. 이 일대로 가는 교통 수단은 남양주 버스 58-3, 63, 58번, 양평 버스 8-8, 양평 버스 2000-1번이 있으며 직접 연계는 58번 뿐이다(나머지 노선 이용시 다산 유적지 입구 로터리 하차 후 도보 이동). 강진군에 있는 유배지인 다산 초당 또한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임오화변이 일어나던 해인 1762년 8월 5일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 6. 10 ~ 1792. 4. 9)과 어머니 해남 윤씨(? ~ 1770. 11. 9)[18] 사이의 5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정약용은 매우 차분하고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 일화로 어릴 적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종기가 큼직하게 났는데 눈가에 나서 또래들이 마치 눈썹같다고 그를 삼미, 말 그대로 눈썹이 3개라고 놀리듯이 불렀는데 화내지도 않고 "어 그러냐? 그래"라고 대했다고 한다. 아예 스스로를 삼미(三眉)라고 부르고 삼미집이라고 글을 쓰는 통에 놀리던 아이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1783년(정조 7) 증광 생원시에 3등 7위로 입격하고, 1784년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익의 성호학파 중에서 천주교를 신봉하는 신서파에 속한다. 이는 당시 남인들의 복잡한 혼맥도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익의 종손이 이가환이고[19] 이가환의 외조카가 이승훈이며 이가환의 누이의 아들이 이벽이고 이벽이 정약용의 누나와 결혼했기 때문에 처남 매부 관계가 된다.
성균관 유생 시절 때 성균관 우수학생들을 모아 상을 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정조는 정약용을 처음 보았다. 이후 마음에 들었는지 자주 불러 시를 짓게 했다. 정조의 눈에 들어 예쁨을 받았으나 최종 시험인 대과에는 계속 미끄러진다. 그것도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성균관 시험에서는 툭하면 1등을 먹는데 대과만 보면 떨어지는 것이다.
정약용의 대과 불합격이 남인인 그를 견제한 노론의 입김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는 음모론이 있는데 하필 남인 영수인 채제공이 주재한 시험에서 정약용이 합격한 사실이 음모론의 주된 근거가 된다. 물론 음모론에 대응하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 단국대학교 사학과 김문식 교수는 사암연보의 기록을 토대로 남인 계열인 정약용이 갑자기 출세하거나 급제하면 노론의 공격을 받게될까 우려해 정조가 천천히 급제시켰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의 반응을 보면 건국대 사학과 신병주 교수와 당시 대광고등학교 한국사 교사였던 최태성도 이 주장에 동의하는 모양[20]
1789년(정조 13) 식년 문과에 갑과 2위(아원)로 급제하고[21] 등용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받고 해미에 유배된지 10일만에 풀려난다.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정조가 청나라에서 수입한 기기도설을 전해주고 연구하도록 해서 이를 바탕으로 거중기와 녹로(轆轤)[22]를 제작하고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이었던 수원화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23] 허나 이 일은 후에 그의 발목이 잡히는 큰 계기가 된다. 서용보는 파직되었음에도 화려하게 부활하여 후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의 반열에까지 오르는데 순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총애가 깊어 이를 기반으로 권세를 휘두른다고 당대 유생들에게 비난을 듣기도 했으며 훗날 정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편찬 위원에까지 참가하게 되었고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정약용을 괴롭힌다.
이후에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년) 3월 신유박해 때 두 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오늘날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유배되었다. 노론에서는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셋째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이후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24]되었다.[25]
정약용이 18년 동안 귀양 생활을 조정에서 끊지 못했던 것도 영의정이던 노론 벽파의 거두 서용보가 극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26]
강진이 그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종가로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바로 이 집안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다. 신위를 불태워 처형된 윤지충, 권상연은 정약용과 먼 외가 친척 사이가 된다. 그런데 하필 강진현감이 노론 벽파의 맹장 이안묵이였는데 이안묵은 금평군 이제의 증손이고 이하술의 손자였으며 종친의 후손이였는데 이안묵은 서학의 추종자의 친척이고 남인인 정약용을 못마땅히 여겨 유배지에서 정약용을 냉혹하게 대했고 정약용도 이안묵 재임 3년 동안 유배지에서 힘들었다. 이안묵은 강진현감에 있었을 때 토색질을 하여 탄핵당하고 권유와 합작해 대혼저지기도 사건에 가담하여 역적으로 몰려 정법당했다. 진짜 정약용을 괴롭힌 사람은 노론에서 악연인 서용보와 친했지만 서학 문제로 원수가 되버린 이기경과 노론 벽파의 강경파인 이안묵이 되겠다.
방례초본과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를 썼다. 목민심서는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기 위한 책이고 흠흠신서는 공정한 재판을 논한 책.
18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유배되어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연구의 성과가 나타나는 유배 후반기에 탈고된 것이 많다. 정약용을 공격한 노론 벽파가 몰락했지만 당시 정국에는 평지풍파가 일어났었기에 조정에서는 정약용의 유배를 잊어버리고 석방하지 않았다.[27] 아들들이 가끔 석방을 위해 격쟁(왕의 행차에 꽹과리를 치면서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기록도 있고 그의 죄안을 삭제하려다가 도리어 공격당하는 기록도 있다. 이 시기에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가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1818년 8월에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저술 활동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 1836년 2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4세. 정약용이 사망한 날은 다름 아닌 60주년 결혼 기념일(회혼일)이었다고. 정약용이 죽은 2년 후 15세에 약혼을 맺었던 부인 홍씨도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9일 전인 1910년 8월 20일 조정에서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提學)을 추증하고 문도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조와는 그야말로 소울 메이트인데 젋은 시절부터 술자리고 개인적인 자리까지 항상 불렀다고 한다. 정조 사후 그는 박해를 받지만 정조의 증손자인 헌종이 즉위하면서 달라지는데 헌종은 안동 김씨를 밟으며 개혁을 추진하던 개혁 군주였고 김정희, 조병헌 등 유배를 가있던 개혁적 성향의 선비를 데려와 개혁을 추진하였다. 일설에는 정약용이 죽은줄 모르고 벼슬을 다시 제수하려 했으나 죽은 것을 알고 슬퍼했다는 야사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다산의 묘소를 중심으로 다산 유적지가 위치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경기도에서 건립한 실학박물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건너편에는 다산생태공원도 위치하고 있다. 이 일대로 가는 교통 수단은 남양주 버스 58-3, 63, 58번, 양평 버스 8-8, 양평 버스 2000-1번이 있으며 직접 연계는 58번 뿐이다(나머지 노선 이용시 다산 유적지 입구 로터리 하차 후 도보 이동). 강진군에 있는 유배지인 다산 초당 또한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3. 기타[편집]
- 법과 법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지리학과 의학 등 다방면에 손을 댄 다재다능한 학자이다. 원래 유학자인만큼 사서 육경에 관한 해석들이 있다. 현재 유학계에서는 정약용의 유학에 대한 관점을 주자에서 공자로의 회귀라고 보고 있다. 당대의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해석을 따르고 감히 주자를 비판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약용은 주자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받아들여 '논어고금주'란 논어 주석본의 통합본을 펴내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오규 소라이와 같은 일본의 유학자들의 해석까지 참고한 것은 대단한 점. 그런데 '일본이 이렇게 유학이 발달하여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니 이제 일본은 조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란 생각을 한 건 빗나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2000년대에 접어든 현재에도 유학과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유학자. 졸업 논문을 써오면 90%가 정약용에 대해 써 오는 일이 벌어진다.
- 정약용은 폭음하기를 싫어했는데 하필 정조의 술버릇이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주의였어서 정조가 술 따라줄 때는 영 힘들었다고 한다. 정작 남들이 다 나자빠지고서도 자신은 비교적 멀쩡했다 하니, 폭음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술이 굉장히 센 체질이거나, 아니면 체면상의 허풍일 것이다. 정약용은 자식들을 훈계하는 편지에서 이 일화를 거론하는데 아래 인용문이 바로 그 내용이다.'나는 태어난 이래 아직까지 크게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어, 나 자신의 주량을 알지 못한다. 포의(布衣)로 있을 때에 중희당(重熙堂)에서 삼중소주(三重燒酒)를 옥필통(玉筆筒)에 가득히 부어서 하사하시기에[28] 사양하지 못하고 마시면서 ‘나는 오늘 죽었구나.’라고 마음속에 혼자 생각했었는데, 몹시 취하지 않았었다. 또 춘당대(春塘臺)에서 임금님을 모시고 고권(考券)할 때에 맛있는 술을 큰 사발로 한 그릇 하사받았는데, 그때 여러 학사들은 크게 취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남쪽으로 향하여 절을 올리기도 하고[29] 어떤 이는 연석(筵席)에 엎어지고 누워 있고 하였지만, 나는 시권(試券)을 다 읽고, 착오없이 과차(科次)도 정하고 물러날 때에야 약간 취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내가 술을 반 잔 이상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는 것이다. 소가 물을 마시듯 마시는 저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는 적시지도 않고 곧바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의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다. 저 얼굴빛이 주귀(朱鬼)와 같고 구토를 해대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자들이야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요컨대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대부분 폭사(暴死)하게 된다. 술독이 오장육부에 스며들어 하루아침에 썩기 시작하면 온몸이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 크게 두려워할 만한 점이다.'다산 시문집 권21 <유아(遊兒)에게 부침>
- 생애에 언급된 정약용과 차의 관계에 관련해서 더 첨언해 보자면 확실히 그는 차(茶)의 달인이다. 정약용은 한방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아암 선사에게서 배우기 이전에도 본래부터 차에 관심이 많았으며 스스로 능히 독자적 연구와 제조마저 가능하였다. 다산초당에서 칩거할 당시 호구지책을 강구하는 와중에서도 재배하였고 이를 일종의 약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한방의 구증구포(九蒸九泡)의 원리로 차를 달이고 농축해 장기간의 보존이 가능하도록 '떡차'를 주로 만들었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정약용과 한반도에만 전래되는 차의 제조 방식이다. 다만 그는 차를 즐겨 음용하는건 한민족의 체질상 알맞지 않고 건강을 다스리는 일종의 약의 연장선으로 여긴 흔적이 명확하다. 고려 시대 이후 조선조에 억불과 멸불 정책의 반복된 시행 과정과 성리학의 지배가 장기화되어 중국의 다예(茶藝) 일본의 다도(茶道)가 흥성하는 와중에도 유독 차의 위상이 조선에선 맥을 추지 못한다. 이렇게 한반도의 차(茶) 문화가 대다수 소실되는 와중에도 그 맥은 계속 이어져 갔는데, 초의선사는 오늘날 한국의 차 연구에서 선구적인 인물로 존재한다. 바로 이 초의 선사에게 떡차를 비롯해 차를 가르친 이가 바로 정약용이리라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다.#
- 활쏘기, 말타기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학자임을 감안한다면 이상한 것도 아니지만.[30] 여유당전서에 직접 써놓았는데 정약용 뿐 아니라 규장각 각신들은 하나같이 10순(50발)을 쏴서 4발도 못 맞췄다고 한다. 덕분에 자신을 비롯한 규장각의 각신들을 정조가 북영(훈련도감의 본영)에 가둬두고 20순(100발) 중 최소 20발은 맞춰야 풀어주게 했다. 나중에는 5발 중 3발을 맞출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었다고 적어놓았는데 그 와중에도 깨알같이 정약용 본인이 가장 으뜸이었다고 자랑한다. 정약용 본인도 선비의 육예 중 두 가지를 못 하는 것에 대해 자신 활쏘기 훈련 부족 뿐 아니라 무를 천시하는 세태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며 한탄했다.
- 주역에 관심이 많았다. 다만, 점을 치는데 주역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약용 당대에는 주역으로 점을 쳐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주역이 성리학의 주요 경전이기에 연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유배지에서 주역을 작정하고 연구하여 주역사전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31] 정약용은 자신이 저술한 책 중에서 '주역사전'과 '상례사전(喪禮四箋)'만이라도 전승된다면 나머지 책들은 없어져도 상관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주역 연구를 자기 학문의 중심에 두었다. 오늘날 주역을 점치는 역서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유교의 역사 초기는 물론 송나라 성리학 태동기 소강절의 케이스에서 보듯 주역은 핵심 경전이었다. 정약용의 주역 연구는 상수학적인 접근을 주로 하고 있다.
- 어린 시절에는 하도 씻기 싫어해서 형수인 큰형 정약현(정약용과는 11살 차이)의 아내가 붙잡고 박박 씻기는 행사가 매일 일어났다고 한다. 장을 담그는 것처럼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 함께 저포놀이를 하며 놀아 주는 등 이 형수가 정약용을 많이 챙겨줬다고.
- 천연두나 홍역같은 전염병을 앓았었다. 두 살 때 홍역을 앓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다행히 홍역 전문의로 유명했던 이헌길의 구제를 받아 살아났다. 이 때 후유증으로 오른쪽 눈썹 위에 흉터가 남아 마치 눈썹이 세 개가 있는 것 같이 보였고, 때문에 자신의 호를 삼미자(三眉子)라고 했다. 10세 이전의 시문을 모아 자신의 문집을 엮어서 ‘삼미자집(三眉子集)’을 만들었다. 비극적이게도 어린 아들을 천연두로 잃었고, 슬픔에 벅차 지은 시가 여유당전서에 남아있다. 이후 천연두와 홍역에 대한 연구를 해 <마과회통>을 펴냈다. 한편 자신를 살려준 이헌길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또한 탈모를 겪어 여유당전서에서 '감고 빗는 수고로움 없고, 백발의 부끄러움도 면한다' 며 탈모의 스트레스를 긍정적으로 풀어냈다
- 유사역사학자들은 한사군 한반도설이 식민 사관이라 주장하는데 사실은 정약용도 한사군 한반도설을 주장 했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참고. 또한 유사역사학자들이 툭하면 주장하는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되찾자'라는 식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 적이 있다. 원문('여유당전서 시문집 12권 요동론') 요약하면, 조선의 힘으로는 요동을 차지해도 나라에 피해만 크다는 주장이다. 제1차 요동정벌 문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다. 경세제민을 주장하던 정약용다운 생각. 마지막에 '진실로 나라가 강성해서 중원을 엿본다면 그 땐 요동을 먼저 얻어야 하며 이것이 된다면 통쾌한 일'이라고 말했었다.
- 노비 종모법을 실시한 이래 노비가 감소하자 이를 비판하며 오히려 그 이전의 악습인 일천즉천(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조선 시대에 노비제 완화를 주장한 측은 서울 경기 지역에 터잡은 서인 계열이었고 지방의 군소 지주인 남인들은 격렬히 반대하는 양상이 일반적이었다."신해년(1731년) 이후 출생한 모든 사노(私奴)의 양처(良妻·양인 신분의 처) 소생은 모두 어미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니, 이때부터 위는 약해지고 아래가 강해져서 기강이 무너지고 민심이 흩어져 통솔할 수 없게 되었다."
(정약용의 주석) 임진년(1592) 난리 때에는 남방에서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한 사람들이 모두 집안의 종 수백 명으로 군대를 편성했는데, 임신년(1812) 난리 때에는 고가 명족(故家 名族 오래된 명문 집안들)들이 창의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한 명의 종도 구하기 어려웠으니,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대세가 완전히 변한 것을 알 수 있다.목민심서 예전육조(禮典六條) 변등(辨等)
이 발언은 정약용에게 일부 탈성리학적 일면이 있음만을 강조하며 조선 후기 개혁 담론의 최선봉에 세우고, 정약용을 기준으로 조선 후기의 변화와 식자층의 담론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단순한 해석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 정조에게 총애받던 사람이었던지라 반대급부로 정적이 너무 많아져서 정조 승하 후에 괴롭힘을 받게 된다.
- 정조가 정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다산시문집 제15권 선중씨묘지명에 나온다. 그러나 한편 일각에서는 다산시문집이 정약용이 저술한 책이라 외모가 아름다웠다고 평가받았다는 이야기를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정약용 자신이 평가한 것도 아니고 정조에게 들은 용모 평가를 가지고 자신이 저술했기에 결코 신뢰하기 어렵다고 볼 수 없다.
-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역인 현릉원의 식수를 마무리하고 논공행상을 하려고 하는데 수레로 싣고 온 문서뭉치를 표 하나로 정리했다는 일화가 있다. 식목연표(植木年表)에 발함 해서 농담조로 "정약용은 엑셀 사용의 선구자였다"라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였다. #
-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도 등장한다.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다. 그는 천주교로 개종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의 정적들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학자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정조(正祖)가 그를 어여삐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 윤치호, 《윤치호일기: 1916년 ~ 1943년》 (김상태 편역, 역사 비평사, 2001년) 613페이지
- 남양주 시에서 공식 제작한 정약용 캐리커처. 길거리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방법은 캐리커처를 도입한 남양주 PAY N 지역화폐 환영 문구가 붙어있는 가게를 보면 된다. 들고 있는 책은 <목민심서>다.
- 2017년 12월 18일부터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동과 가운동이 다산동으로 바뀌었다. =그 주변 부동산 이름도 다산으로 바뀌어 버렸다. 다만 현지 반응은 왜 바꿨음? 정도로 요약 가능하다. 도농동과 가운동 생활권은 생각보다 분리된 편이라 그리 단합성이 높은 편은 아니다.
- 점잖은 이미지와 달리 모기 때문에 빡쳐서 쓴 글도 남아있다.증문(憎蚊) - 정약용(1762~1836)
맹호가 울 밑에서 으르렁대도
나는 코 골며 잠잘 수 있고
긴 뱀이 처마 끝에 걸려 있어도
누워서 꿈틀대는 꼴 볼 수 있지만
모기 한 마리 왱 하고 귓가에 들려오면
기가 질려 속이 타고 간담이 서늘하구나.
부리 박아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어이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불어넣느냐
이불을 덮어쓰고 이마만 내놓으면
어느새 울퉁불퉁 혹이 돋아 부처님 머리처럼 돼버리고
제 뺨을 제가 쳐도 헛치기 일쑤이며
넓적다리 급히 만져도 그는 이미 가고 없어
싸워봐야 소용없고 잠만 공연히 못 자기에
여름밤이 지루하기 일 년과 맞먹는다네
- 평소 법의학에 관한 저서를 저술하기도 했고 본인도 영민한 인물이라는 점이 반영되었다. 흠흠신서에선 조선시대에 벌어진 살인 사건들에 대하여 상세한 사건 내역과 해결, 범인들에 대한 이야기 및 미지의 사건으로 끝난 살인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까지 싣고 있다. 현대 법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정약용의 방법론은 상당히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다 할 수 있다. 흠흠신서에서 고을 수령이 괜히 자비를 베푼답시고 중범죄자의 처벌을 가벼이 하는 것은 쉽게 재범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니 일벌백계가 옳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법학의 사상적 바탕이 되는 여러 학문들과는 전혀 다른 학문적 배경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정약용의 방법론에 대한 현대 법학적 관찰에는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 주요 저술로는 여유당전서 500여 권에 포함되어 있는 사서 육경에 관한 저작들, 1표2서(경세유표[39], 흠흠신서[40], 목민심서), 3론[41], 마과회통[42], 아방강역고[43], 아언각비[44], 아학편[45] 등이 있다. 500여 권의 전서 중 연구 및 번역이 이루어진 것은 절반 정도. 워낙 학문 분야가 광범위해서 고르게 연구되지 않았다는 평도 있다. 그래서 다산학이라고 따로 분류할 정도이며 한글로 완전히 풀이된 저서는 절반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2018년 현재도 계속 연구되며 번역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정약용/저술 문서 참조.
- 후대에는 1표 2서가 대표작으로 꼽히지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정약용 본인은 《주역사전》, 《상례사전》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았다. 다만, 〈자찬묘비명〉에서 자신의 학문 역정을 회고하면서 "육경사서(六經四書)로써 자기 몸을 닦게 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했으니 본말을 갖추었다 하겠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자신도 1표2서를 일생의 역작으로 여긴 것은 분명하다.
- 애절양이라는 시가 유명하다. 이는 백성들이 군역의 고통에 시달린 나머지 '이렇게 아이를 낳은 내 물건이 죄다'라는 의미에서 고자되기를 선택해버린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시의 형식은 지키면서도 그 내용은 민중의 고통을 정면으로 다룬 것으로 시의 내용에 혁신을 가져온 것으로 유명하며 시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시는 시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비판하였다. <애절양>은 한국 역사에 남은 사회 비판 시가 중에서도 손가락 내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명시라서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시다. 또한 경기도에서 암행어사 직을 수행하다가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지은 한시 <적성촌에서>[46] 역시 오늘날까지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를 비판하는 데에 자주 언급되는 한시 중 하나다. 안빈낙도를 노래한 <타맥행>(打麥行, 보리타작이라는 뜻이다.) 역시 자주 언급되는 작품.
- 당시 폐단이 심했던 풍수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에 대해 비판한 적도 있다. <풍수집의>를 통해 풍수 자체를 학문적으로 분석한 적도 있지만 <풍수론>에서 '말라 비틀어진 뼈가 어떻게 산 사람에게 복을 내릴 수 있는가'라며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정약용 자신이 죽을 때도 유언으로 '괜히 명당 찾으려고 지관에게 물어보지 말고 그냥 고향 뒷산에 묻어 달라'고 할 정도였다. 유언대로 다산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고향집 뒷편 언덕에 묻혔다. 재미있는게 현대의 풍수 전문가들 중에는 정작 정약용의 묘소가 훌륭한 명당이라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47]
- 문학적으로도 성과를 냈다. 여러 문학론을 전개하는 한편 시문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중국의 것을 벗어나서 조선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용과 표현 면에서 독특한 작품들을 여럿 창작했다. 그러나 당대 사대부들의 문자가 한문이었기 때문인지 결국 한시만을 중점적으로 남기는 데 그치고 국문시가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소설문학 쪽에는 비판적이어서 당대에 흥미 위주로 유행하던 소설들을 모두 퇴출시켜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냉철하고 꼼꼼한 면이 더 강한데 소설을 배격한 것도 그 내용이 현실의 문제를 바르게 인식하고 바로잡기보다는 흥미 위주의 허무맹랑한 쪽으로 흘러가는 데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1. 그의 이름을 딴 것들[편집]
정약용이 한국 내에서 인지도와 명성이 높은 위인인 만큼 그의 호인 다산은 굉장히 다양한 곳에서 쓰인다.
서강대학교의 D관(다산관)은 그의 호를 딴 것이다. 그런데 서강대학교의 건물 이름은 가톨릭 관련 인물을 중심으로 정해지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배교 문제가 얽혀 있다.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도 '다산정보관'이라는 이름의 도서관이 있다. 한기대의 이념인 '실사구시'에 꼭 어울리는 인물이라 따온 것으로 보인다. 1층 내부에 영정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고, 도서관 앞에는 '다산 선생께서 이 앞에서 담배피지 말라 하셨다!'라는 표지도 있다. 도서관의 외부 벽면과 엘리베이터가 전부 유리로 만들어져있어 상당히 멋진 외관을 자랑한다.
한국경제신문에서 "다산(茶山) 경제학상, 다산 경영상, 다산 기술상, 다산 금융상"등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에도 다산 경제관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5층짜리인데, 강의실 보다는 학과 사무실, 교수 연구실, PC실... 등등이 더 많다. 대부분의 경제학과 강의는 연결되어 있는 퇴계 인문관에서 진행된다. (이황의 호 퇴계 맞다.) 둘 모두 성균관 출신을 학교 건물에 쓴 예.[48]
아주대학교에서도 다산관이 있다. 인문대와 경영대가 같이 사용하고 있다.
강원대학교의 남자 기숙사 건물 중 하나의 이름도 다산관인데, 주변 기숙사(퇴계관, 율곡관)의 이름이 유학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전통을 지킨듯. 게다가 강원대학교의 교훈이 실사구시이기도 하다. 또한 강원도 인재 개발원의 기숙사 두 동 중 한 동의 이름도 다산관이다. 나머지 한 동은 율곡관.
서울과학기술대학교를 상징하는 건물인 다산관(등록문화재 12호)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본관이었으며,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본관 건물이었다. 과거 건물 꼭대기에 시계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안전상 이유로 철거되었다. 학내 건물 번호는 2번이다.
세종대학교에도 다산관이 존재한다.
강원도 횡성군 소재 민족사관고등학교에도 다산관이란 건물이 있다. 이 건물과 충무공 이순신의 호를 딴 충무관 두 건물은 민족 사관고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쌍둥이 수업동이다. 헌데 정약용이 이순신을 평가한 사례를 본다면 영 껄끄러운 연결이다. 원래 파스퇴르유업이 세운 것이라 한쪽은 의료진 지원 요구가 실질적 물량 공급 요청이었던 나머지는 자신이 다 해결한 전설적 명장이고, 파스퇴르가 붙인 우두법을 조선에서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주역이란 점이 붙어진 이유일 수 있다.
서울특별시에서 운영하는 다산콜센터가 바로 정약용의 호를 딴 것으로. 정약용처럼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준다는 취지로 전화 한통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또한 서울에는 그의 호를 딴 다산로도 있다.
북극에는 다산 과학기지도 있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에는 '화서다산도서관'이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소재 동양대학교에도 다산관이 있다. 유아교육과나 사회복지학과, 행정경찰학부 등 인문/사회 관련 학과가 사용 중이다.
다산신도시라는 신도시 명칭도 그의 호를 딴 것이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으며, 마침 남양주시는 조안면 능내리 일대에 정약용의 생가 및 그 주변을 관광지로 한 다산 유적지가 있기도 하다. 또한 남양주시에는 정약용 도서관 또한 존재한다.
경기도 이천시 소재 다산고등학교라는곳이 있다. 정약용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 학교인지는 모르나 정약용의 호인 다산을 따서 만든거다.
광주광역시 과학기술원(GIST) 캠퍼스 안에도 다산빌딩이라는 부속 건물이 있다.
서울 대일외국어고등학교의 강당으로 쓰이는 커다란 홀의 명칭이 '다산 홀'이다.
서강대학교의 D관(다산관)은 그의 호를 딴 것이다. 그런데 서강대학교의 건물 이름은 가톨릭 관련 인물을 중심으로 정해지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배교 문제가 얽혀 있다.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도 '다산정보관'이라는 이름의 도서관이 있다. 한기대의 이념인 '실사구시'에 꼭 어울리는 인물이라 따온 것으로 보인다. 1층 내부에 영정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고, 도서관 앞에는 '다산 선생께서 이 앞에서 담배피지 말라 하셨다!'라는 표지도 있다. 도서관의 외부 벽면과 엘리베이터가 전부 유리로 만들어져있어 상당히 멋진 외관을 자랑한다.
한국경제신문에서 "다산(茶山) 경제학상, 다산 경영상, 다산 기술상, 다산 금융상"등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성균관대학교에도 다산 경제관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5층짜리인데, 강의실 보다는 학과 사무실, 교수 연구실, PC실... 등등이 더 많다. 대부분의 경제학과 강의는 연결되어 있는 퇴계 인문관에서 진행된다. (이황의 호 퇴계 맞다.) 둘 모두 성균관 출신을 학교 건물에 쓴 예.[48]
아주대학교에서도 다산관이 있다. 인문대와 경영대가 같이 사용하고 있다.
강원대학교의 남자 기숙사 건물 중 하나의 이름도 다산관인데, 주변 기숙사(퇴계관, 율곡관)의 이름이 유학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전통을 지킨듯. 게다가 강원대학교의 교훈이 실사구시이기도 하다. 또한 강원도 인재 개발원의 기숙사 두 동 중 한 동의 이름도 다산관이다. 나머지 한 동은 율곡관.
서울과학기술대학교를 상징하는 건물인 다산관(등록문화재 12호)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본관이었으며,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본관 건물이었다. 과거 건물 꼭대기에 시계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안전상 이유로 철거되었다. 학내 건물 번호는 2번이다.
세종대학교에도 다산관이 존재한다.
강원도 횡성군 소재 민족사관고등학교에도 다산관이란 건물이 있다. 이 건물과 충무공 이순신의 호를 딴 충무관 두 건물은 민족 사관고를 상징하는 건물이자 쌍둥이 수업동이다. 헌데 정약용이 이순신을 평가한 사례를 본다면 영 껄끄러운 연결이다. 원래 파스퇴르유업이 세운 것이라 한쪽은 의료진 지원 요구가 실질적 물량 공급 요청이었던 나머지는 자신이 다 해결한 전설적 명장이고, 파스퇴르가 붙인 우두법을 조선에서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주역이란 점이 붙어진 이유일 수 있다.
서울특별시에서 운영하는 다산콜센터가 바로 정약용의 호를 딴 것으로. 정약용처럼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알려준다는 취지로 전화 한통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또한 서울에는 그의 호를 딴 다산로도 있다.
북극에는 다산 과학기지도 있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에는 '화서다산도서관'이 있다.
경상북도 영주시 소재 동양대학교에도 다산관이 있다. 유아교육과나 사회복지학과, 행정경찰학부 등 인문/사회 관련 학과가 사용 중이다.
다산신도시라는 신도시 명칭도 그의 호를 딴 것이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으며, 마침 남양주시는 조안면 능내리 일대에 정약용의 생가 및 그 주변을 관광지로 한 다산 유적지가 있기도 하다. 또한 남양주시에는 정약용 도서관 또한 존재한다.
경기도 이천시 소재 다산고등학교라는곳이 있다. 정약용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 학교인지는 모르나 정약용의 호인 다산을 따서 만든거다.
광주광역시 과학기술원(GIST) 캠퍼스 안에도 다산빌딩이라는 부속 건물이 있다.
서울 대일외국어고등학교의 강당으로 쓰이는 커다란 홀의 명칭이 '다산 홀'이다.
3.2. 한국 천주교와의 관계[편집]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신자 중 하나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례명은 사도 요한. 이벽,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권철신, 이총억 등 남인 계열 학자들과 함께 천진암에서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토의하곤 했는데 그들은 천주교를 신앙으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였던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의 시발점으로서 성지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행적에 논란거리가 있으며 한국 천주교 입장에서는 X맨 같은 존재. 본래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지만, 신해박해(1791년) 당시 조상의 제사를 불허하는 교황 비오 6세의 교서가 내려지자 대부분의 양반 신자들과 함께 배교하였다. 이후 신유박해(1801년) 때는 형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문제로 같이 국문을 받았으나, 정약종의 집에서 발견된 문서에서 '정약용이 모르게 해야 한다', '형제가 함께 서학(천주교)를 할 수 없으니 내 죄다.' 같은 문서가 발견되면서 해당 시점에서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혐의가 사라진다.
오히려 정약용은 권철신, 황사영 등을 고발했다. 나아가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를 추쇄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믿음이 약하고 사리 분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노비나 어린이를 중점적으로 심문하여,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이었다. 어떻게 보면 심리적 심문의 한 방법이니 천재적 발상이긴 하다. 덕분에 북경 천주당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자 정약용의 매부이기도 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에 대해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분노했고, 다른 신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문 반면 정약용은 자진해서 자신이 세례성사를 주었다고 자백할 정도였다. 정약용은 이런 행적에도 불구하고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하나는 워낙에 신유박해가 정치적 성향이 컸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형인 정약종에 대해서 고변하라는 것은 거부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후 행적. 과연 이후에 정약용이 배교자로 남았는지, 아니면 회개하고 천주교로 원복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믿었음을 후회하는 글을 여럿 남겼으며, 아무도 볼 위험이 없고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자찬묘지명에서조차 천주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정약용이 끝까지 배교자로 남았다고 간주하고 있다. 반면 샤를르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약간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주요 참고 문헌으로 작성했다고 하나 <조선복음전래사>가 실존하는 서적인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많다. 달레 신부는 이 책이 박해 기간 중에 땅에 묻혀 유실되거나 가족들이 비본(秘本)으로 소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고종 때 정약용 문집이 <여유당전서>로 출간되었을 때 공개되지 않은 저서가 일제강점기에 출간되기도 했는데, 거기에 <조선복음전래사>는 없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공개된 비본 중 앞서 언급한 자찬묘지명과 신유박해 때 유배간 친지들 묘지명이 있었다.
이에 실제 <조선복음전래사>라는 책은 없고, 달레 신부가 정약용의 묘지명들을 그리 부른 게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일단 이 <조선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정약용이 배교 행위에 대해 참회하였으며, 수시로 몸에 고통을 가하는 보속 행위를 하였고, 죽기 전에는 마침 조선에 들어와 있던 중국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49]에게 병자성사를 받았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동일한 얘기가 정약용의 집안에서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기록이 없는 것은 천주교로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상태니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원복했다는 기록을 남기긴 힘든 상황이기도 하고 실제로 신유박해 시기에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처형된 3남 정약종 집안은 나주 정씨 문중에서 축출되었다가 1961년 원복하였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이후에 가까이 했다는 물증으로, 정약용의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 발굴했을 때 십자고상이 실제로 출토되었다. 현재 이 십자고상은 부산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즉 정약용의 장을 치르고 관에 유해를 넣을 때 다가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들이 천주교인이었으며, 그들은 정약용이 죽는 순간 천주교인이었음을 확신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정약용이 배교하여 다른 신자들을 체포하는데 적극 협력해서 천주교인들의 원수쯤으로 생각되고 있었는데 십자가를 함께 묻어줬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당시 한 동네에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형수 유소사 세실리아와 조카딸 정정혜 엘리사벳도 살고 있었다. 정약용의 직계 후손도 4대손부터 천주교로 분명하게 원복했고, 그 전에도 박해를 피해 대놓고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지는 않아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현재 정약용 직계 7대손인 정호영이 정철상과 정하상의 순교로 대가 끊긴 정약종의 후손까지 대표하고 있다.
단 십자고상은 가짜 성유물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종손인 정호영이 정약용의 묘는 이장이나 파묘를 한 적이 없다고 십자고상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 반면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서는 '정약용의 후손에게서 기증받았다'는 말을 제외하고 언제 이장했으며 누구에게 언제 이 유물을 받았는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 십자고상의 진위에 대한 논란 때문에 바티칸박물관 전시도 무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단, 현재 한국 천주교에서도 딱히 정약용을 교회의 위인으로 밀고 있지는 않다. 정약용은 순교자도 아니고, 천주교로 원복했는지 여부를 불문하고 배교의 전적도 있기 때문에 시복시성 대상에는 포함될 여지가 없다.[50]
하지만 위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 철학사를 다시 쓸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정약용의 사상적 기반이 유신론에 있는지 무신론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단서라는 것이다. 물론 단적으로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규정하기보다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적어도 그가 천주교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있고, 유신론에서도 동양의 전통 사상과 서로 넘나들면서 학문적 장치로 활용했다는 연구도 있어 전공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정약용이 초기에는 확실히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이다. 동시에 유학자기도 했고.
현재로서는 특별한 반증이 나오지 않는 이상, 1791년 신해옥사 이후로는 정약용이 천주교를 거부했다는 것을 정설이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후 행적에 논란거리가 있으며 한국 천주교 입장에서는 X맨 같은 존재. 본래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였지만, 신해박해(1791년) 당시 조상의 제사를 불허하는 교황 비오 6세의 교서가 내려지자 대부분의 양반 신자들과 함께 배교하였다. 이후 신유박해(1801년) 때는 형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문제로 같이 국문을 받았으나, 정약종의 집에서 발견된 문서에서 '정약용이 모르게 해야 한다', '형제가 함께 서학(천주교)를 할 수 없으니 내 죄다.' 같은 문서가 발견되면서 해당 시점에서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혐의가 사라진다.
오히려 정약용은 권철신, 황사영 등을 고발했다. 나아가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를 추쇄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믿음이 약하고 사리 분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노비나 어린이를 중점적으로 심문하여,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방법이었다. 어떻게 보면 심리적 심문의 한 방법이니 천재적 발상이긴 하다. 덕분에 북경 천주당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자 정약용의 매부이기도 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에 대해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분노했고, 다른 신자들에 대해서는 모두 입을 다문 반면 정약용은 자진해서 자신이 세례성사를 주었다고 자백할 정도였다. 정약용은 이런 행적에도 불구하고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하나는 워낙에 신유박해가 정치적 성향이 컸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형인 정약종에 대해서 고변하라는 것은 거부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후 행적. 과연 이후에 정약용이 배교자로 남았는지, 아니면 회개하고 천주교로 원복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믿었음을 후회하는 글을 여럿 남겼으며, 아무도 볼 위험이 없고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자찬묘지명에서조차 천주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정약용이 끝까지 배교자로 남았다고 간주하고 있다. 반면 샤를르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약간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주요 참고 문헌으로 작성했다고 하나 <조선복음전래사>가 실존하는 서적인지에 관해서는 이견이 많다. 달레 신부는 이 책이 박해 기간 중에 땅에 묻혀 유실되거나 가족들이 비본(秘本)으로 소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고종 때 정약용 문집이 <여유당전서>로 출간되었을 때 공개되지 않은 저서가 일제강점기에 출간되기도 했는데, 거기에 <조선복음전래사>는 없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공개된 비본 중 앞서 언급한 자찬묘지명과 신유박해 때 유배간 친지들 묘지명이 있었다.
이에 실제 <조선복음전래사>라는 책은 없고, 달레 신부가 정약용의 묘지명들을 그리 부른 게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일단 이 <조선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정약용이 배교 행위에 대해 참회하였으며, 수시로 몸에 고통을 가하는 보속 행위를 하였고, 죽기 전에는 마침 조선에 들어와 있던 중국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49]에게 병자성사를 받았다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동일한 얘기가 정약용의 집안에서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기록이 없는 것은 천주교로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상태니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원복했다는 기록을 남기긴 힘든 상황이기도 하고 실제로 신유박해 시기에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처형된 3남 정약종 집안은 나주 정씨 문중에서 축출되었다가 1961년 원복하였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이후에 가까이 했다는 물증으로, 정약용의 무덤을 이장하기 위해 발굴했을 때 십자고상이 실제로 출토되었다. 현재 이 십자고상은 부산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즉 정약용의 장을 치르고 관에 유해를 넣을 때 다가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들이 천주교인이었으며, 그들은 정약용이 죽는 순간 천주교인이었음을 확신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정약용이 배교하여 다른 신자들을 체포하는데 적극 협력해서 천주교인들의 원수쯤으로 생각되고 있었는데 십자가를 함께 묻어줬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당시 한 동네에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형수 유소사 세실리아와 조카딸 정정혜 엘리사벳도 살고 있었다. 정약용의 직계 후손도 4대손부터 천주교로 분명하게 원복했고, 그 전에도 박해를 피해 대놓고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지는 않아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현재 정약용 직계 7대손인 정호영이 정철상과 정하상의 순교로 대가 끊긴 정약종의 후손까지 대표하고 있다.
단 십자고상은 가짜 성유물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종손인 정호영이 정약용의 묘는 이장이나 파묘를 한 적이 없다고 십자고상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 반면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서는 '정약용의 후손에게서 기증받았다'는 말을 제외하고 언제 이장했으며 누구에게 언제 이 유물을 받았는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 십자고상의 진위에 대한 논란 때문에 바티칸박물관 전시도 무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단, 현재 한국 천주교에서도 딱히 정약용을 교회의 위인으로 밀고 있지는 않다. 정약용은 순교자도 아니고, 천주교로 원복했는지 여부를 불문하고 배교의 전적도 있기 때문에 시복시성 대상에는 포함될 여지가 없다.[50]
하지만 위 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 철학사를 다시 쓸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정약용의 사상적 기반이 유신론에 있는지 무신론에 있는지를 가늠하는 단서라는 것이다. 물론 단적으로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규정하기보다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적어도 그가 천주교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있고, 유신론에서도 동양의 전통 사상과 서로 넘나들면서 학문적 장치로 활용했다는 연구도 있어 전공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정약용이 초기에는 확실히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이다. 동시에 유학자기도 했고.
현재로서는 특별한 반증이 나오지 않는 이상, 1791년 신해옥사 이후로는 정약용이 천주교를 거부했다는 것을 정설이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3.3. 가족[편집]
정약용이 다른 형제들에 비해 월등하게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정약용의 형제는 모두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나다. 아예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
맏이인 정약현은 다른 세 동생들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래도 1795년 식년시 진사 3등으로 급제한 어엿한 과거 합격자(정작 벼슬은 못 했다). 아버지 정재원의 상을 치를 때 마당에 누대를 짓고, 상복을 벗자 그 누대를 망하루(望荷樓)라 이름 붙이고[51] 매일 아침 올라 아버지 묘소를 바라봤다는 효자다. 자기 집을 수오재(守吾齋)라고 이름붙였는데, 정약용은 이를 떠올리며 "나는 형처럼 나를 지키지 못하고 살았다"라고 자책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 사람의 사위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조정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불러온 황사영이다. 황사영의 아내 정 마리아[52]는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황사영과 정 마리아의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서 자랐다. 다만 정약현 본인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아 체포되지 않고 처벌을 받지 않았다. 천주교 때문에 어쨌거나 풍비박산나게 된 집안을 지키다가[53] 1821년 전염병으로 생을 마쳤다.[54] 정약현 사망 3년 전에 해배된 정약용이 묘지명을 지어줬다.
둘째인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 생활 중 섬 주민들과 가깝게 지내며 책 하나를 쓰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자산어보이다. 또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는 홍어상인 문순득을 만나게 되는데 그에게서 풍랑을 만나 일본, 필리핀까지 표류하다 흑산도까지 돌아온 이야기를 듣고 이 체험담을 날짜별로 정리한 표해록,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썼다. 이 내용은 정약용에게도 전해졌고 이에 정약용은 제자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문순득을 만나게 해,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집필하게 한다. 두 형제는 강진과 흑산도로 제자를 보내면서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정약전이 목민심서의 초고를 봐주기도 하였으며 후에 정약용은 "약전 형님이 나보다 낫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정약전의 외아들이 혼인 후 자식없이 죽자 흑산도에서 맞은 첩의 아들을 양자로 올리라고 조언하는 등 모든 것을 나누었다. 하지만 정약전은 정약용의 유배가 끝나고도 유배가 풀리지 않아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약용은 둘째 형인 정약전에게 학문과 정신적인 면 모두 크게 의지하였으나 나주에서 각 유배지로 헤어진 이후 임종시까지 결국 만나지 못하였다.
셋째인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본래 도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그는 형제들 중에 가장 늦게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나,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신앙 생활을 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이었고, 신유박해 당시 약전, 약용과 달리 끝까지 배교하지 않아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 순교 과정이 놀라운데, 설화에 따르면 처형 때 하늘을 보고 죽겠다며 누워서(!) 망나니의 칼을 받았고, 첫 칼질이 잘못되어 목이 반만 잘리자 일어 앉아서 성호를 긋고 다시 칼을 받아 처형되었다고.[55] 124위 복자로 시복되어 있다.
정약종의 가족은 특히 신실한 집안이었는지 거의 몰살당했다. 차남 정하상은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기 위해 30년 동안 동정을 지켰지만, 1839년 기해 박해 때 순교하며 한국 103위 순교성인으로 시성됐다. 장남인 정철상도 순교자고, 약종의 후처 유조이 체칠리아[56]와 딸 정정혜 역시 한국 103위 순교성인이다. 장남 정철상도 124위 복자로 시복되었고, 시성 심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서자인지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복동생 정약횡도 유명한 의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우애도 좋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보건대 다산의 아버지인 정재원은 자식 농사에서 역사상 보기드문 성공 사례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다. 아들들이 모두 엄친아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막내(적자 중에서. 정약횡을 포함하면 넷째) 정약용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손자들까지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니.
친인척 관계는 다음과 같다. 정조 대 명재상 채제공과 정약용 형제는 사돈 어른과 사돈 총각 관계이다. 정약용이 어머니를 여읜 후 정약용 형제를 키운 서모 김씨의 큰딸이 채제공의 유일한 혈육이자 서자인 채홍근과 결혼했다. 외가쪽으로 정약용의 어머니인 윤씨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손녀이다. 즉 정약용은 윤두서의 외증손이며 해남 윤씨 가문은 정약용의 외가가 된다. 더 올라가면 윤선도가 윤두서의 증조부이므로 이쪽으로도 연결이 된다. 진산 사건의 윤지충 바오로 역시 정약용의 외사촌.
정약용은 6남 3녀를 두었는데 그중 5명은 천연두로 요절해 최종적으로는 2남 1녀가 살아남았다. 강진에서 유배하던 중 두 아들에게 보낸 하피첩이 유명하며 차남 정학유는 역사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농사 지침 가사'인 농가월령가를 저술했다.[57]
맏이인 정약현은 다른 세 동생들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래도 1795년 식년시 진사 3등으로 급제한 어엿한 과거 합격자(정작 벼슬은 못 했다). 아버지 정재원의 상을 치를 때 마당에 누대를 짓고, 상복을 벗자 그 누대를 망하루(望荷樓)라 이름 붙이고[51] 매일 아침 올라 아버지 묘소를 바라봤다는 효자다. 자기 집을 수오재(守吾齋)라고 이름붙였는데, 정약용은 이를 떠올리며 "나는 형처럼 나를 지키지 못하고 살았다"라고 자책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이 사람의 사위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조정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불러온 황사영이다. 황사영의 아내 정 마리아[52]는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황사영과 정 마리아의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서 자랐다. 다만 정약현 본인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아 체포되지 않고 처벌을 받지 않았다. 천주교 때문에 어쨌거나 풍비박산나게 된 집안을 지키다가[53] 1821년 전염병으로 생을 마쳤다.[54] 정약현 사망 3년 전에 해배된 정약용이 묘지명을 지어줬다.
둘째인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 생활 중 섬 주민들과 가깝게 지내며 책 하나를 쓰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자산어보이다. 또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는 홍어상인 문순득을 만나게 되는데 그에게서 풍랑을 만나 일본, 필리핀까지 표류하다 흑산도까지 돌아온 이야기를 듣고 이 체험담을 날짜별로 정리한 표해록,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썼다. 이 내용은 정약용에게도 전해졌고 이에 정약용은 제자 이강회(李綱會)를 우이도로 보내 문순득을 만나게 해,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집필하게 한다. 두 형제는 강진과 흑산도로 제자를 보내면서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정약전이 목민심서의 초고를 봐주기도 하였으며 후에 정약용은 "약전 형님이 나보다 낫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정약전의 외아들이 혼인 후 자식없이 죽자 흑산도에서 맞은 첩의 아들을 양자로 올리라고 조언하는 등 모든 것을 나누었다. 하지만 정약전은 정약용의 유배가 끝나고도 유배가 풀리지 않아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약용은 둘째 형인 정약전에게 학문과 정신적인 면 모두 크게 의지하였으나 나주에서 각 유배지로 헤어진 이후 임종시까지 결국 만나지 못하였다.
셋째인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본래 도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던 그는 형제들 중에 가장 늦게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나,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신앙 생활을 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회장이었고, 신유박해 당시 약전, 약용과 달리 끝까지 배교하지 않아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 순교 과정이 놀라운데, 설화에 따르면 처형 때 하늘을 보고 죽겠다며 누워서(!) 망나니의 칼을 받았고, 첫 칼질이 잘못되어 목이 반만 잘리자 일어 앉아서 성호를 긋고 다시 칼을 받아 처형되었다고.[55] 124위 복자로 시복되어 있다.
정약종의 가족은 특히 신실한 집안이었는지 거의 몰살당했다. 차남 정하상은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기 위해 30년 동안 동정을 지켰지만, 1839년 기해 박해 때 순교하며 한국 103위 순교성인으로 시성됐다. 장남인 정철상도 순교자고, 약종의 후처 유조이 체칠리아[56]와 딸 정정혜 역시 한국 103위 순교성인이다. 장남 정철상도 124위 복자로 시복되었고, 시성 심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서자인지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복동생 정약횡도 유명한 의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우애도 좋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보건대 다산의 아버지인 정재원은 자식 농사에서 역사상 보기드문 성공 사례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다. 아들들이 모두 엄친아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막내(적자 중에서. 정약횡을 포함하면 넷째) 정약용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손자들까지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니.
친인척 관계는 다음과 같다. 정조 대 명재상 채제공과 정약용 형제는 사돈 어른과 사돈 총각 관계이다. 정약용이 어머니를 여읜 후 정약용 형제를 키운 서모 김씨의 큰딸이 채제공의 유일한 혈육이자 서자인 채홍근과 결혼했다. 외가쪽으로 정약용의 어머니인 윤씨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의 손녀이다. 즉 정약용은 윤두서의 외증손이며 해남 윤씨 가문은 정약용의 외가가 된다. 더 올라가면 윤선도가 윤두서의 증조부이므로 이쪽으로도 연결이 된다. 진산 사건의 윤지충 바오로 역시 정약용의 외사촌.
정약용은 6남 3녀를 두었는데 그중 5명은 천연두로 요절해 최종적으로는 2남 1녀가 살아남았다. 강진에서 유배하던 중 두 아들에게 보낸 하피첩이 유명하며 차남 정학유는 역사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농사 지침 가사'인 농가월령가를 저술했다.[57]
4. 가계[편집]
5. 대중매체에서[편집]
<영원한 제국>, <원행> 등 정조의 시대를 다룬 소설에서는 정적의 행동을 사전에 간파하는 기민한 탐정의 역할을 맡는다. 탐정 역할로 나오지 않더라도 영민하고 다재다능하고 실학에 밝았던 선구자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해 드라마에서는 지혜롭고 선한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 정약용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중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황인경 작가의 1990년작 소설 목민심서이다. 다만 총 5권 중 초반 1/3은 정약용보다는 홍국영과 사도세자가 주인공이며 당시 작가가 굉장히 자료수집에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가 번역되어 공개되기 전이라 야사에서 따온 내용들이 들어있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 소설 목민심서는 KBS2에서 동명의 이름으로 영상화되긴 했으나 정통 사극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다큐드라마 같은 형식이었다. 해당 드라마에선 정약용을 배우 이진우가 연기했다.
- 2007년 MBC 드라마 이산에서는 배우 송창의가 연기했다. 극 후반에 등장하여 활약상이 많지는 않으나 홍국영 퇴장 후 그를 대신하는 정조의 에이스로 활약한다. 학식이 뛰어난 먼치킨이나 과거 대과에는 번번히 낙방하고 있었으며 성균관 담을 넘어다니다가 평복 차림으로 미행 중이던 정조와 만나게 되는데 자기를 떠보는 정조의 말을 믿지 않고 "네가 왕이면 나는 영의정이다"라고 비웃는다. 기존의 정약용 이미지대로 온갖 첨단 과학 지식을 활용하여 위기를 극복하거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백성들을 돕는 등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인의 모습이 강조된다.
- 한국 영화 조선명탐정 시리즈의 주인공 김민이 정조 시대라 및 나머지 사항을 미루어 볼 때 정약용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인 듯하다.
- 2012년 개봉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정군'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로 나오고 에필로그에서 성인이 되어 과거에 급제하여 정조 앞에 나아가는 장면이 나왔다.
- 2017년 1월 KBS에서 다산 정약용이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무산됐다.
- 2017년 6월 7일자 <조선왕조실톡> 연재분에서 정약용의 유배 생활 당시 집대성한 학문을 '다산위키'라고 패러디해놓았다.
- 웹툰 타임인조선에서는 준재가 감옥에 갇혀있을 때 같이 수감된 모습으로 등장했다. 삼미라는 호에 맞게 한쪽 눈썹이 3갈래로 나뉘어졌다.
- 대체역사소설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에선 미래에서 온 주인공들의 소지품을 보고 정체를 짐작하며 미래에 대해 듣고[58] 망국을 막기 위해 조력자로 활동한다. 원역사보다 오래 살다가 88세 생일에 열린 학술대회이후 노환으로 사망한다.
[1] 정약용 초상, 정약용 생전에 그려진 정약용의 초상화로 가장 유력히 꼽히나 진위여부 논란이 있다. 특히나 정약용 외모의 가장 특징적인 묘사로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이 세 개의 갈래로 나뉘어 졌다고 알려져있는데 보다시피 위 초상화 모습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 후기 이희영이 그린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초상화가 남아있어 이를 보고 일각에서는 진위여부 논란이 있는 위 초상화와 분위기가 매우 비슷하다고 한다. 게다가 정약용이 오랜 귀양 생활로 얼굴이 많이 상했음을 감안하면-비슷한 예로 추사 김정희도 잦은 귀양생활로 말년에 얼굴이 폭삭 늙고 상해 알려진 초상화와 비교해 보면 완전 다른 사람같다.- 함부로 아니라 단정짓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1974년 고 장우성 화백이 그린 정약용 영정이 여태 표준영정으로 쓰였는데 용모나 의상 등 시대상과 고증에 맞지 않는다고 알려져있다. 그런데 2008년 3월 부터 새롭게 정약용 영정 제작에 들어가 2009년 4월 17일 완성되었다고 한다. 초상화를 제작한 김호석 교수는 정약용의 기록을 샅샅이 뒤졌고 다산 후손인 '나주 정씨 월헌공파 종회' 도 찾아가 참석한 약 300여명 후손들의 인상을 직접 관찰하고 특히 다산의 직계 후손 4명의 인상을 자세히 관찰 그 특징을 초상화를 제작할 때 참고했다고 한다. 이 사진 이 초상화가 바로 김호석 교수가 새롭게 제작한 정약용 영정이다..[2] 음력 6월 16일[3] 오늘날 이곳에는 마재성지가 조성되어 있고, 천주교 의정부교구에서 관할하고 있다.[4] 음력 2월 22일[5]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동원공계(東園公系) 23세 약(若)○, 의(義)○ 항렬.[6] 출처 여기서 정약용의 키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당시 남성 평균키가 161cm인 것을 보면 정약용의 키는 약 161cm 초과로 추정된다.[7] 유학자임을 표방함은 틀림없지만 주희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모든 기형(사물)의 '이'는 같다는 성리학의 중심 논리인 이일분수(월인천강)를 비판하는 등의 고학적인 태도에다가 민생을 집요하게 본질시하는 맹자적인 가치관이 더해져 정약용 본인의 색채가 짙은 철학함을 엿볼 수 있다.[8] 대표 저서인 흠흠신서는 한국 법제사상 최초의 율학 연구서이며, 동시에 살인 사건을 심리하는 데 필요한 실무 지침서다. 그리고 법의학·사실 인정학·법 해석학을 포괄하는 일종의 종합 재판학적 저서이다.[9] 홍역의 치료에 관한 의서를 저술했을 뿐 아니라 실제 해당 질병의 의술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10] 일단 한 차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한 것은 사실이나 이후 다시 가톨릭으로 복귀했는가에 대해서는 계속 유교로 있었나 다시 복귀했나에 대한 논란이 있다. 4.2 문단 참조[11] 아버지의 전처[12] 이복 형이다.[13] 이복 동생이다.[14] 조선 최초의 영세 가톨릭 신자[15]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中. 정약용의 편지를 모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책에서도 이 내용이 나온다. 한편 이 내용은 유배 생활 중이던 자신이 쓴 편지 내용이 외부에 알려질 때 그것이 정적들에게 악용되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및 지인들의 신변에 악영향을 줄 것을 근심했던 정약용의 마음을 반영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먼 훗날 한반도의 후손들 외에도 세계 각지에서 아무렇지 않게 인터넷에 쓴 과거의 실언, 망언이 발견되거나 SNS 상에서 실언, 망언을 일삼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터지면서 이 내용은 후세에 큰 지지를 얻게 된다.[16] 공교롭게도 조선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인 임오화변이 있었던 그 해다.[17] 정확히 어머니가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의 손녀이다.[18] 윤덕열(尹德烈)의 딸이다.[19] 이익의 형 이침의 손자이다.[20] 증거가 없으니 명확한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윗선의 개입이 강하게 의심되는 부분은 성균관 안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수재가 1번도 아니고 여러 번 유독 대과에서만 떨어진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과거 합격에 가장 가까운 성균관 유생들 중에서 최상위권이 여러 번 대과에서 합격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큰 시험에 긴장해서라고 보기에는 어렵다.[21] 흔히 정약용의 천재 이미지 탓에 당연히 장원(오늘날의 수석)일 거라 많이 생각하지만 장원은 아니었다. 이 당시 과거에서 장원으로 합격한 사람은 서영보로 당대 최고의 문장에게 제수된다는 대제학까지 지낸 인물이다. 서영보는 서청원의 6대 조상이다.[22] 거중기에 묻혔지만 현대의 크레인과 동일한 역할을 하는 발명품이었다. 성벽을 쌓기 위해 돌을 들어올리기 위한 발명품으로 일반적으로 오해하는 거중기의 역할을 녹로가 하였다.[23] 당시 그가 지은 한시 '적성촌(오늘날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일대.)에서'는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인한 백성들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24] 유배지를 옮김.[25]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에서는 처음부터 강진에서 18년을 살았다고 한 오류가 존재한다.[26] 정약용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는 이유는 정조 이후의 《조선왕조실록》을 서용보가 관리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당대부터 관리간에 인정(뇌물)을 주고 받는 풍습을 비판하고 본인 스스로도 그런 것을 거부했기에 관료 사회에 밉보인 부분이 있어 정약용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줄만한 현직 관료도 없던 점도 작용했다.[27] 서용보가 극렬 반대했다는 설이 있다.[28] 이 때 정조가 따라줬다는 삼중소주는 한 번만 증류해도 40도는 우스운 술을 세 번이나 증류한 물건이니 어마어마하게 독했을 것이다. 게다가 옥필통이라는 게 현대에 학생들이 들고 다니는 필통이 아니라 표구사나 서예교실에서 볼 수 있는 그 굵직한 붓 꽂아놓는 통이다. 즉 요즘으로 치자면 500cc 맥주잔에 보드카를 따라준 격, 아니 혹은 그 이상이다.[29]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임금이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신하들은 임금을 향하여 정좌하거나 혹은 양 가쪽으로 앉아 시립한다.[30] 애초 문관은 나귀를 무관은 말을 타도록 정해져 있었다.[31] 개정을 4번이나 해서 판본이 5개에 이를 정도로 관심을 기울여 집필한 책이다.[32] 경술국치 9일 전인 융희 4년(1910년) 8월 20일에 내려지면서 조선 왕조의 거의 마지막 시호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이 작업을 시행한 인물은 다름 아닌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이다. 당시 이완용은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인물을 신원, 복권하고 명망이 있으나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재야 인사들에게 시호를 내려주는 등의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대상 중 하나가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33] 애초에 여전이라는 말이 '마을의 밭'이라는 뜻이다.[34] 목민심서를 연구하던 북한의 정치 세력인 갑산파는 김일성과 마찰을 빚어 숙청당했다.[35] 정확하게는 이익에서 이어지는 남인 계열 인물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서 안정복은 공서파로 영조 대에 출사해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가르치던 세자 시강원에도 들어있었는데 정조 이전의 기록이 전무하고 60대 이후인 <순조실록>부터 기록이 나온다.[36] 본부인과의 자녀 6남 3녀 중 5명을 천연두로 잃었다.[37] 원래는 크낙새와 함께 밀어줬지만 2000년대 초 크낙새가 사장되는 동안, 정약용을 더 밀어주고 있다.[38] 자 정대초(丁大楚), 손 정춘섭(丁春燮), 증손 정규직(丁奎稷), 고손 정상진(丁尙鎭), 5대손 정해인(丁海寅) 순으로 이어진다.[39] 정조를 성인으로 여기며, 그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해했던 사람이 정약용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책에서 규장각, 장용영, 초계 문신의 존재를 모두 비판한다. 특히 초계 문신의 경우에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학문과 정치의 자유로운 소통을 막는 제도라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이렇듯 그는 사사로운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성역없이 비판했다. 경세유표는 국가 행정론, 목민심서는 지방 행정론으로 관리가 백성을 다스릴 때 취해야 할 자세를 적었다.[40] 형조 계열의 작품으로 오늘날로 따지면 로스쿨, 경찰공무원 준비생들이 읽는 형법 및 형사소송법 교재에 해당하는 책. 형리에게 공명정대한 판결을 위해선 뭘 해야하는가에 대해 조언했다.[41]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현대에 와서 당연하지만 옛날로서는 조금 위험하다는 발언도 있는데 옛날부터 그랬다. 맹자의 역성혁명도 관계있다.[42] 종두법에 대해 다룬 의학서다. 엄밀하게는 마과회통의 주 내용은 마진(홍역)에 대한 연구를 다룬 의학서이며 이 책에 부록으로 박제가와 같이 연구했던 종두법이 수록되어 있다. 이 뒤에는 자식들을 천연두로 잃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다. 9명의 자식들(6남 3녀) 중 무려 6명(4남 2녀)을 앞세웠다. 정약용 본인부터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다가 당시 천연두 치료로 이름이 드높았던 이헌길의 치료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오른쪽 눈썹에 마마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훗날 '삼미(三眉)'라 불리었다.[43] 지리서. 한국의 역대 강역에 대한 연구서이다.[44] 국어 연구 계열 작품으로 출처가 모호하거나 와전된 언휘 200여 개를 정리한 것이다.[45]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이(兒)들을 위한 책이다. 천자문이 어린이들한테는 어렵다 싶어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 관련 어휘 2,000개를 상하로 나누어서 만든 어린이용 한자 단어책이다. 이후 1908년에 지석영, 전용규가 아학편의 한자를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동시에 설명한 단어책을 낸다.[46] 적성촌은 오늘날의 파주시 적성면 일원을 말한다.[47] 앞은 한강이 흐르고 뒤는 언덕이다. 남향에 배산임수, 저절로 기본 명당이 되는 지형인 데다가 묘소 앞을 지난 한강은 곧 합류 지점을 만나기에 기가 모이는 형국이다.[48] 한편 호암관의 호암은 이병철의 호다. 호암관은 기업가였지만 인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이병철 회장을 의도하여 지은 것이라고 하면 꿰어 맞춘거고 그냥 재단 창립자 이름 딴 것이다. 그래서 성대에서 학생 운동이 고조에 이르던 시기에는 학생들이 호암관 명패를 떼버리고 현대 성균관 대학교 창립자이자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의 이름을 따서 심산관이라고 고쳐버린 적도 있다.[49] 1834년 조선에 입국했다. 한국 가톨릭에서 활동한 2번째 외국인 사제. 프랑스인 모방 나 베드로 신부 등이 조선에 입국한 후,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출국했다.[50] 한국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 베드로도 신유박해 당시 순교했지만 한 차례 배교했던 전적 때문에 천주의 종 단계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면 정약용은 그 기준에 한참 미달함을 알 수 있다.[51] 정재원의 묘가 하담(荷潭)에 있으니, 하담을 바라본다는 뜻이다.[52] '정명련'이라고도 하고, '정난주'라고도 한다.[53] 구전되는 말로는 정약종의 시신을 집으로 돌려보내려 싣고 강을 건너오던 배를 강가에서 막아섰다고 한다.[54] 정약현의 아들 정학수도 아버지 뜻에 따라 천주교를 반대하여 처벌받지 않았지만 20세 나이에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55] 출처 잡지경향 1999년 3월호.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순교를 소재로 만들어진 생활성가도 있다. 다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조선시대 사형 자체가 저런 식으로 사형수가 움직일 수 없다. 참수형 참조.[56] 한국 천주교에서는 유소사 체칠리아로 부른다. 召史의 훈음과 독음의 차이.[57] 다만 정약용과는 달리 술을 좋아해서 정약용이 편지로 "술 좀 그만 좋아해라!" 라며 타박할 정도였다.[58] 이때 고종에 대해서는 군대의 봉급을 1년넘게 밀린것에 사람의 자격도 없다며, 아예 일본이 먹기 좋게 나라를 망쳤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