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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9

Ch’oe Han’gi and the philosophy of Ki : UBC MA thesis, Pek, Unsok

Ch’oe Han’gi and the philosophy of Ki : the problem of Korean philosophy - UBC Library Open Collections

UBC Theses and Dissertations

Ch’oe Han’gi and the philosophy of Ki : the problem of Korean philosophy (2003)
Pek, Uns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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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What concerns me here is 'how cognitive changes were made' and 'how such changes affected a cognitive agent and a community of cognitive agents, in perceiving contents.' My thesis is, in this sense, a text-based case study of cognitive changes (to say, the phenomena of Enlightenment). In practice, this focuses on a Korean writer, Ch'oe Han'gi (1803-1877)'s works and their related literature, proceeding an inquiry into his intellectual changes through reading and writing practice of Asian and Western texts mainly of philosophy and sciences. For providing an account of Ch'oe's intellectual practice, I adopt basically the approach of cognitive-historical analysis and social epistemology that is used for my addressing some social and cultural dimensions of human cognition and the problem of communicating 'acquired cognition' (i.e. philosophical and scientific knowledge) among different historical, social and cultural contexts. Sweeping the starting ground with the broom of critical-linguistic analysis, I construe Ch'oe's original stylization of epistemology—his notion of cognition (experience through observation-inference-confirmation)— as an exemplary model for contemporary Korean philosophers who are trying to (re-)create 'Korean-style philosophy,' so as to contribute to philosophical activities in a global scale. Ch'oe's enlightenment was in complex ways formatted in the twilight zone between light from the West and from the East. So that could illuminate some constraints socially, culturally and historically imposed on individual choice in cognition in the West and the East, by mirroring the limitations of the self-confidently preserved substantial beliefs of both parties. Those beliefs had been assumed to be of universal applicability until their respective limitations were revealed when they encountered one another. Concluding my account of Ch'oe's enlightenment, I finally develop the 'verb-first-style epistemology' from Ch'oe's original insights. Therewith, I propose a way of having room for all sorts of selections on each individual's attributes, while reaping the benefits of synthetic practice via accommodating diverse lenses, perspectives from diverse fields in cognition.

여기서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인지적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와 '그 변화가 인지적 행위자와 인지적 행위자 공동체가 콘텐츠를 인지함에 있어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 논문은 인지 변화(즉, 계몽주의 현상)에 대한 텍스트 기반 사례 연구입니다. 실제로는 한국의 작가 최한기(1803-1877)의 작품과 관련 문헌을 중심으로 철학과 문학을 중심으로 아시아와 서양 문헌의 읽기와 쓰기 실천을 통해 그의 지적 변화를 탐구한다. 과학. 최 신부의 지적 실천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 인식의 사회적, 문화적 측면과 '획득된 인식'(즉, 철학적 및 과학적 지식)을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살펴봅니다.

 비판언어학적 분석의 빗자루로 출발지를 휩쓸면서 나는 최 신부의 인식론에 대한 독창적인 양식화, 즉 그의 인식(관찰-추론-확인을 통한 경험) 개념을 다음을 추구하는 현대 한국 철학자들의 모범적인 모델로 해석한다. '한국형 철학'을 재)창조하여 세계적인 철학 활동에 기여한다. 최 신부의 깨달음은 서쪽 빛과 동쪽 빛 사이의 황혼지대에서 복합적으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는 양 당사자의 자신감있게 보존된 실질적인 신념의 한계를 반영함으로써 서양과 동양의 인지에 있어 개인의 선택에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부과된 일부 제약을 밝힐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념은 서로 마주했을 때 각각의 한계가 드러날 때까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최 신부의 깨달음에 대한 나의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마침내 최 신부의 독창적인 통찰로부터 '동사 우선형 인식론'을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나는 개인의 속성에 대해 다양한 선택의 여지를 가지면서, 인지에 있어서 다양한 렌즈와 관점을 수용함으로써 종합적 실천의 이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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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ABSTRACT TABLE OF CONTENTS

1. Introduction: Making Up 'Korean Philosophy' 
2. Ch'oe Han'gi in Focus: Twentieth Century 
2.1 Nineteenth Century: Retrospective Imaging 
2.2 Modernization Projects: Prospective Historicizing 
3. Before the Philosophy of Ki
3.1 Choson Korea: The Moral Kingdom 
3.2 INTERLUDE: Clash of Worlds —-—
3.3 Western Worlds in Translation: Intellectual Hegemony — 
4. Birth of Philosophy of Ki: Manifesto of (Korean) Enlightenment 
4.1 Confucian or meta-Confucian
4.2 From Confucian to post-Confucian 
5. Conclusion: Ch'oe Whispers

Bibliography i
Appendix I: Chinese Publications of Western Knowledge by Protestant Missionaries (-1867)
Appendix II: Changing Perception of the World by Koreans (1402-1834)

2023/11/12

** 최한기의 신기(神氣) 개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기(神氣)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기 (神氣)

한국고전종합DB 고전번역서 > 기측체의 / 신기통

한국고전종합DB


> 고전번역서 > 기측체의 > 기측체의 서 > 최종정보

기측체의 서

백승종의 역사강의 - YouTube 최한기 1,2,3

백승종의 역사강의 - YouTube


백승종의 역사강의
백승종의 역사강의@l_7464‧357 subscribers‧35 videos
제페토 영상편집




17:32NOW PLAYING

최한기 3 - 인간은 정교한 기계이다

백승종의 역사강의

40 views2 days ago
#조선여성의성 #최한기의기계론 #영조와화순옹주 #결혼의목적 최한기는 특이하게도 자생적인 근대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당대의 통념을 멀찌감치...




12:00NOW PLAYING

최한기2 - 성리학자들과는 어떤 점에서 무엇이 달랐는가

백승종의 역사강의

59 views9 days ago
최한기는 독창적인 학자였지요. 그야말로 근대적인 지식인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는 당대의 주류였던 성리학자들과는 무엇이 얼마나...





17:30NOW PLAYING

최한기 1 그는 과학의 눈으로 여성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백승종의 역사강의

96 views2 weeks ago
외국 유학을 하지 않아도, 근대적 학교를 다니지 않고도 생각이 완전히 바뀐 지식인이 있었습니다. 19세기 전반에 한국 사회에 혜성처럼 등장한...

3. 최한기가 들려주는 기학 이야기 Youtube

[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이야기] 3. 최한기가 들려주는 기학 이야기 Youtube

120. 혜강 최한기 - 기학


120 

저자 :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 (1803~1879) 편자(編者) : 구태환 & 이주한 제목 : 기학 

원제(原題) : 기학 (氣學) (1857) 

출판사 : 주니어김영사 (2009. 11) 236p

CONTENTS 

시대적 배경 (4/4) 

혜강의 생애 「기학(氣學)」 선별(選別) 소개

독거노인 

■ ‘시대적 배경’은 이해를 돕기 위해, 개인적으로 정리해 둔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 

시대적 배경 (4/4) 

1800년 6월 4일 건강하던 정조에게 갑자기 종기가 생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과 등으로 번지면서 피 고름이 나올 정도로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지자 10일 후인 6월 14일부터 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러고는 6월 28일 저녁 49세를 일기로 승하(昇遐)했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는 병명을 등에 나 는 부스럼[등창]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학자가 감염성 질환으로 인한 패혈증(敗血

症)sepsis을 사망 원인으로 보고 있죠. 패혈증은 상처를 통해 체내로 침입한 균에 의한 감염으로, 지금도  적절한 항생제 투여와 감염 부위의 고름 제거를 제때 하지 않으면 치사율이 50%가 넘는 패혈성 쇼크를  일으킵니다. 정조도 사망 전날 의식을 잃었었고요. 그러나 정조 사망 이후 벌어진 일들을 보면서, 일부 학 자들은 독살설(毒殺說)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하필이면 정조의 치료를 진두지휘한 좌의정 심환지(沈煥之)(1730~1802)와 우의정 이시수(李時秀)(1745~1821) 모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함께 사도세자의  죽음에 앞장섰고 정조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노론 그중에서도 벽파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정조를  치료한 어의(御醫) 심인은 심환지의 먼 친척으로 심환지가 적극적으로 추천한 인물이고, 그가 사용한 치 료 방법이 환부(患部)에 증기(蒸氣)를 쐬는 연훈방(煙熏方)이었는데 거기엔 수은이 함유되어 있어서 수은  중독을 일으킬 수도 있었으며, 가장 의심스러운 건 등창에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는 인삼을 정조 가 사망하는 날까지 복용하게 했다는 점 등이 그 근거입니다. 

그런데 2009년 2월, 정조가 심환지에게 안부를 묻는 개인적인 편지인 어찰(御札)이 공개되었습니다. 그것 을 근거로 심환지가 사실은 정조의 측근이라는 주장과 함께 말이죠. 그러나 정조 사후(死後) 진행된 일련 의 상황을 덮기에는, 그 편지 한 장은 너무나 얇아 보입니다. 정조와 (정조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간택(揀擇) 후궁인) 수빈 박씨(1770~1822) 사이의 차남인 11세의 순조(純祖)(1790~1800~1834)(23대)가 즉위하 면서 정순왕후는 꿈에도 그리던 권력을 수렴청정(垂簾聽政)으로 획득했고, 심환지가 정조의 측근이었다면  (가령 정약용처럼) 정조의 죽음과 함께 몰락했어야 했을 텐데 오히려 심환지는 정순왕후에 의해 정조가 죽 은 바로 당일에 영의정으로 승진하면서 정조가 시행했던 모든 개혁을 다시 뒤집어버리는 데 앞장섰고, 심 환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이시수가 영의정으로 승진했습니다. 정조의 죽음이 의심스럽다며 많은 관료와  유생들이 책임을 묻자 정순왕후와 심환지는 그때까지 어의로 있던 심인을 처형했는데, 그것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꼬리 자르기일 뿐이고요. 사실 효종의 죽음도 정조의 죽음과 매우 비슷했습 니다

시파와 벽파 간의 대립은 순조가 즉위할 때쯤엔 피비린내가 진동할 정도였지만, 그들 모두 서구 문물을  대표하던 서학을 박해(迫害)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기득권은 변화를 싫어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죠.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질기도록 오래 살았으며 노론-벽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왕후는, 남인과 시파를 쫓아내고 벽파를 등용하면서 자기의 세상이 왔다고 기뻐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너무도 짧았습니다. 정조가 중용한 인물 중에는 시파인 김조순(金祖淳)(1765~1832)도 

3 해우비책 解愚BY書 16 

독거노인 

있었는데, 그의 장녀 순원왕후 김씨(純元皇后 金氏)(1789~1857)가 1802년 순조의 정비가 되자마자 권력 의 기반을 닦은 김조순은 1804년 정순왕후를 밀어내고 스스로 1년간 섭정했고, 1805년부터 명목상으로 는 순조가 친정(親政)하나 실질적으로는 김조순이 이끄는 안동 김씨 가문이 권력의 핵심을 모조리 장악해 버렸기 때문이죠.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울화(鬱火)가 치밀었는지, 정순왕후는 순조의 친정이 시작 된 해에 환갑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고요. 정순왕후의 죽음과 함께 벽파는, 다시 집권한 시파에 의해 궤멸 하고 맙니다. 그러나 사실 시파는 처음부터 자기만의 색깔은 없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조순 등 시파가 집권하긴 했지만, 그때부터 당파가 아닌 가문의 독재 그러니까 (붕당정치가 끝나고) 왕 비의 친가(親家) 세력인 외척(外戚)이 정권을 독점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정치형태인 세도정치(勢道政治) 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도정치로 국정이 문란(紊亂)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힘겨워졌고, (조선의 배와는 모양이 다르다는  의미로 외국의 배를 가리킨)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하면서 외세의 바람이 불자 사회적인 불안감이 고조되 기 시작했습니다. 그 하나의 결과가 순조 12년(1812) 약 5개월간 발생한 농민 반란인 홍경래(洪景來)의  난입니다. 순조의 외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가 순조보다 먼저 죽는 바람에 효명세자와 (풍 양 조씨인)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1809~1890)의 아들 헌종(憲宗)(1827~1834~1849)(24대)이 순 조의 뒤를 이어 8세에 즉위했고,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정정하게 살아 있으니 왕대비인 신정왕후는 기를  펴지 못했지만, 이때부터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에 권력 쟁탈을 위한 암투(暗鬪)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다 헌종이 23세의 나이로 후사(後嗣) 없이 죽자,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은 (사도세자의 서(庶)장 남 그러니까 정조의 이복동생으로) 실질적인 힘이 하나도 없던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1754~1801)의  서(庶)손자 철종(哲宗)(1831~1849~1864)(25대)을 허수아비로 즉위시킵니다. 노론-벽파가 지속적으로 은 언군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조는 은언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킵니다. 정약용의 경우처럼, 그것이  목숨을 보전하는 길이자 정조가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죠. 그곳에서 은언군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고 빌린 돈은 갚을 능력조차 없을 만큼, 웬만한 평민보다도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 정조 가 은언군을 늘 안쓰럽게 여긴 것을 알고 있던 순조 역시, 대신들의 반대 속에서도 가능한 한 은언군의  가족을 돌봐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 때부터는 완전한 평민이요 농사꾼의 삶이었고, 그런 삶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철종은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저놈이 꼴에 왕족이래. 믿겨?”라는 사람들 의 멸시와 관아의 감시 속에서 그저 농민으로 나무꾼으로 태어나 그렇게 살고 있었죠. 그래서 즉위 후에 도 안동 김씨 세력의 말에 일언반구(一言半句)조차 하지 못했고 대신들과 백성들에게조차 강화도령(江華 道令)이라는 조롱도 암암리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것과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 별개의 범주일 때가 많습니 다. 공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독서를 통해 해박한 지식을 겸비했던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으니까요. 그렇 다면 혹시 철종도 그런 부류의 사람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19세에 즉위한 철종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는 ‘강화도령’이 맞습니다. 그러나 6년 후인 1855년 봄 성균관 유생들만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에 참관한  철종은, 직접 유생들에게 질문하면서 채점까지 했다고 한다. 온종일 공부만 했다고 해도, 6년 만에 까막눈 에서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에게 질문하고 그들의 대답에 채점까지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철종은 왕으로 서의 바쁜 일과를 소화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해서 사실은  많은 독서량과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나 뜻한 바가 있어 즉위를 위해 감춘 것이거나 아니면 그 1855년의  기록이 거짓이거나. 그 기록의 출처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4~1907)의 「면암집」입니다. 위정척 사(衛正斥邪) 운동의 중심인물이었고, 당시의 권력자 흥선대원군도 비판했으며, 항일 의병장으로 활동하

4 해우비책 解愚BY書 16 

독거노인 

다가 75세에 쓰시마섬에 잡혀간 9월부터 일본의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겠다며 단식했고 중풍(中風)까지  겹쳐 이듬해 1월 1일 사망한 이가 바로 최익현이죠. 대쪽같다는 말로도 부족한 인물입니다. 22세이던  1855년 수험생으로서 철종과 ‘직접’ 질의응답을 통해 합격한 산 증인인 그런 최익현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한 건, 철종의 속마음입니다. 겉으로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자존감에, 국정에 대해선 알 고 싶어 하지 않았고, 자포자기(自暴自棄)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릴만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썩을 대로 썩어 있던 철종 11년(1860) 최제우(崔濟愚)(1824~1864)가 동학(東學) 을 창시했고, 잇따라 전주와 제주 등 곳곳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발생했습니다. 이때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군도 : 민란의 시대〉(2014)이죠. 

철종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왕족이 또 있었습니다. 본래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 (麟坪大君)(1622~1658)의 7대손으로 왕위계승권은 없었지만, 순조에 의해 은언군의 동생 은신군(恩信君)(1755~1771)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철종과는 사촌지간이 된 동시에 왕위계승권을 획득한 이가 남연군 (南延君) 이채중(李采重)(1788~1836)입니다. 남연군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일찍 죽 었고 셋째와 넷째 사이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는데, 넷째가 야심이 매우 큰 인물이었으니 그가 조선  후기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입니다. 바로 위의 셋 째 형 이최응(李最應)(1815~1882)은 끝까지 이하응과 대립하던 민씨 세력의 편에 서 있다가 결국 임오군 란(壬午軍亂)(1882) 때 (흥선대원군의 처남인) 민겸호(閔謙鎬)(1838~1882)와 함께 암살당하죠. ‘을사조약 (乙巳條約)’ 또는 ‘제2차 한일협약(第二次韓日協約)’이라고도 불렸던 을사늑약(乙巳勒約)(1905)의 체결에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자결한 민영환(閔泳煥)(1861~1905)이 민겸호의 아들입니다. 흥선대원군과 관련 되거나 배경으로 한 영화로는 〈명당〉(2018)과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1804~1866)의 생애를 그린  〈고산자 : 대동여지도〉(2016) 그리고 조선 최초의 여성 명창 진채선(陳彩仙)(1842~?)과 그녀의 스승 신재 효(申在孝)(1812~1884)의 이야기를 다룬 〈도리화가(桃李花歌)〉The Sound of a Flower(2015)가 있습 니다. 

이하응은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권유로 친척이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문하에서 글과 그림을 배우다가 17세에 아버지마저 여의었습니다. 안동 김씨는 왕족 중 야망이 있어 보이 면 죽이기를 서슴지 않았죠. 그래서 이하응은 그들의 주목과 감시를 피하려고 백수건달처럼 지냈고, 양반 들의 잔칫집을 찾아다니며 걸식(乞食)도 했으며, 양반집 하인들이 바닥에 던진 음식도 주워 먹는 등 사람 들에게 받는 모욕이 (삼시 세끼를 먹듯) 일상사였다. 그렇게 자신의 야망을 철저히 숨기며 살았습니다. 그 러던 차에 철종마저 후사 없이 그것도 젊은 나이에 갑자기 승하하면서, (호적상 철종의 6촌인) 이하응의  아들들이 순식간에 철종의 조카들과 함께 왕위계승권의 양대 후보로 떠오르게 됩니다. 천우신조(天佑神助)라 여긴 이하응은 곧바로 왕위 결정권을 가지고 있던 조대비(趙大妃) 신정왕후를 꾸준히 찾아가 협상 을 진행했고, 그 결과 13세의 차남 이재황(李載晃)을 신정왕후의 양자로 입적시켜 즉위하게 만듭니다. 그 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임금(1863~1897)(26대)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광무제(光武帝)](1897~1907)인  고종(高宗)(1852~1919)입니다. 신정왕후의 처지에서는 이하응의 장남 이재면(李載冕)(1845~1912)보다는  어린 고종이 수렴청정(垂簾聽政)하기에 수월하다는 판단에서였죠. 그러나 그녀의 계산은 모두 틀어집니 다. 이하응이 호랑이 새끼임을 알아보지 못한 죄로 말이죠. 

1866년 고종의 정식 부인을 맞이하기 위한 간택이 진행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즉위 이전에 안 동 김씨 가문에서 왕비를 맞이하겠다는 밀약(密約)을 맺어 일부 안동 김씨의 세력을 확보했었지만,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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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노인 

도 여주 민씨인) 16세의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 민자영(閔玆暎)(1851~1895)을 택함으로써 그들 의 뒤통수를 칩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안동 김씨 세력은 훗날 명성황후의 지원군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민씨를 택했을까요?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어렵게 생활하던 민씨는 고아나 다름없어서  외척(外戚)[왕비의 친가(親家)]이 세력화할 가능성도 없고, 똑똑하고, 게다가 자신과 인척 관계에 있는 등  여러모로 조건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閔氏)(1818~1898)는 숙종의 계비였 던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1630~1687)의 6대손 민치구(閔致久)(1795~1874)의 딸이었 고, 민씨는 민치구와 10촌인 민치록(閔致祿)(1799~1858)의 딸이었으며, 아들이 없던 민치록이 민치구의  두 아들 민승호(閔升鎬)(1830~1874)와 민겸호를 어려서 양자로 입적시켰기 때문에 민승호와 민겸호는 민 씨와 12촌인 동시에 호적상으로는 오빠가 됩니다. 

그러나 민씨가 간택되기 이전부터 고종은 궁녀 출신인 귀인(貴人) 이씨(李氏)(1843~1928)를 총애하고 있 었고, 심지어 혼례 첫날밤에도 민씨가 아니라 귀인 이씨에게 갔습니다. 이런 행동이 여인의 마음에 얼마나  큰 비수(匕首)를 꽂는 것인지 모른 채 말이죠. 더구나 민씨와 혼례를 올린 3년 후인 1868년, 귀인 이씨가  아들 선(墡)(1868~1880)을 낳자 민씨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받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민씨는 흥선대원군에게 등을 돌린 안동 김씨 세력과 흥선대원군에 의해 실각(失脚)한 풍양 조씨 세력을  조금씩 자신의 편으로 규합(糾合)하면서 어떻게든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오리라 절치부심(切齒腐心)합니 다. 그러기 3년째인 1871년, 그렇게 바라던 아들을 낳은 지 5일 만에 아들은 차가운 시신이 됩니다. 흥선 대원군이 선물한 산삼을 끓여서 먹이자마자 돌연 죽은 거죠. 민씨의 원래 성격이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 지만, 이때부터 그녀의 성격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나게 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귀 인 이씨의 아들이 13세에 갑자기 죽고, 명성황후가 낳은 둘째 척(坧)이 후에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융희 제(隆熙帝)]이자 마지막 황제인 순종(純宗)(1874~1907~1910~1926)으로 즉위합니다. 

우리나라의 파란만장한 근대사는 거의 모두 고종의 재위 중에 발생했습니다. 고종이 성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최익현(崔益鉉)(1834~1907) 등 대신들 이 고종 11년(1873) 민씨와 힘을 합해 흥선대원군을 운현궁(雲峴宮)에 감금한 이후부터 고종의 친정(親 政)이 시작되어 쇄국정책(鎖國政策) 대신 개방정책으로 방향이 바뀝니다. 하지만 정권을 장악한 민씨 세 력의 행보는 그야말로 광란(狂亂) 그 자체였습니다. 대부분 대신과 백성들까지 흥선대원군을 그리워했을  정도로 말입니다. 민씨 세력의 의외(?)의 도움으로 흥선대원군은 의도치 않게 (그리고 사실도 아니지만)  세도정치를 뿌리 뽑으려 했던 정의로운 정치가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찬성했을 뿐  개방보다는 쇄국정책을 원했던 유학자들 역시 흥선대원군의 정계 복귀를 원하게 되었고요. 

고종의 첫 번째 결과물은 흔히 ‘강화도조약’이라고 부르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1876)로, 고종 14 년 조선이 국제법의 규약에 따라 맺은 최초의 조약이자 강압으로 불평등하게 맺은 일본과의 통상(通商)  조약입니다. 고종 13년(1875) 9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오는 걸 막으면서  벌어진 전투를 빌미로 부산항⋅원산항⋅인천항을 개항하고, 그곳에서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비롯해 일 본에 유리한 여러 조항을 강요한 조약이죠. 이로 인해 고종 18년(1881) 신설된 (양반의 자제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과의 차별대우와 5군영에서 2군영으로 대폭 축소된 규모 그리고 1 년 넘게 월급이 연체되는 등 커져만 가는 위기감을 느끼던 훈련도감(訓鍊都監) 군인들의 서러움에 민씨  세력의 세도정치로 인해 쌓였던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 고종 19년 임오군란(壬午軍亂)(1882)입니 다. 그들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은 다시 집권하게 되고요. 이때 민씨 세력을 모두 죽이려고 했지만, 민씨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까스로 탈출해 살아남습니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흥선대원군은 민씨가 죽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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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公布)하고 장례까지 치렀지만, 한 달 만에 청나라를 등에 업고 나타난 민씨 세력에게 임오군란은 진 압되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납치되어 4년간 감금당합니다. 

그러나 민씨 세력이 다시금 국정(國政)을 장악하면 뭐합니까? 나랏일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했으며, 자 신들이 왜 쫓겨났었는지에 대한 반성은커녕 쫓겨났었다는 사실에만 집착해 보복이라도 하듯 더욱더 나라 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죠. 그 꼴을 보다 못한 김옥균(金玉均)(1851~1894)⋅홍영식(洪英植)(1856~1884)⋅서광범(徐光範)(1859~1897)⋅박영효(朴泳孝)(1861~1939)⋅서재필(徐載弼)(1864~1951) 등 개화파는 일본의 도움을 약속받고서 고종 22년 12월 4일 우정국(郵政局)[우체국]의  완공식 행사 날 무력 쿠데타인 갑신정변(甲申政變)(1884)을 감행합니다. 하지만 일본이 약속과는 다르게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혁명은 삼일천하로 끝이 납니다. 1890년 전봉준(全琫準)(1854~1895)은 운현궁에  기거하던 흥성대원군 휘하에서 몇 달간 식객 생활을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일부 학자들이 개혁의 의지가  넘쳐흐르던 37세의 전봉준과 끊임없이 민씨 세력을 제거하고 재집권할 기회만 노리던 흥선대원군 사이에, 모종(某種)의 밀약(密約)이 있었을 가능성이 짙다고 예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전봉준이 식객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간 몇 년 후, 기어이 전라도에서 대규모의 봉기(蜂起)가 일어납 니다. 모두 같은 해 2월과 5월과 10월 세 차례에 걸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1894)이죠. 이를 진 압하는 정부의 행태도 가관(可觀)이었습니다.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흥선대원군 세력은 일본에 각기 도움 을 요청해 그들의 군대를 끌어들였습니다. 통일된 정책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죠. 청나라와 일본에서 당시  

조선을 콩가루 집안이라면서 얼마나 얕봤을지, 창피한 건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동학군에게는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영혼 없는 약속을 했고, 동학군은 그 말을 모두 믿을 순 없더라도 그 상태로 가다간 결국은  외국 군대가 우리 국토를 유린(蹂躪)할 것이고 그러면 그 원흉(元兇)이라는 누명을 쓸 것 같아 그 말을 믿 는 척하며 자진 해산했습니다. 주도권을 잡은 일본은 개혁을 흥선대원군에게 맡겼고, 하는 둥 마는 둥 정 부 내에서 탁상공론(卓上空論)으로 갑오개혁(甲午改革)[갑오경장(甲午更張)](1894.7~1895.8)이 진행되는  동안, 동학군 진압을 빌미로 군대를 이끌고 온 청나라와 일본은 이때가 기회다 싶었는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제대로 한 판 붙습니다. 그것이 청일전쟁(淸日戰爭)(1894.7~1895.4)이고, 일본의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전락한 조선의 국토는 쑥대밭이 되었고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조선에서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는, 청나라에 달라붙어  있던 민씨뿐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그해 10월 8일 경복궁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 로(三浦梧樓)의 지시를 받은 일본 무사들이 민씨를 시해(弑害)합니다. 작전명 ‘여우 사냥’인 을미사변(乙未事變)(1895.10.8.)이죠. 명성황후 민씨의 삶을 저래도 되나 싶을 만큼 미화(美化)한 영화가 〈불꽃처럼  나비처럼〉(2009)입니다. 이제 거칠 게 없게 된 일본은 시동만 걸어두었던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진행합니다. 이것이 을미개혁(乙未改革)(1895.8~1896.2)이고요. 국모(國母)까지 죽인 일본의  만행(蠻行)에서 의지할 곳은 이제 러시아밖에 없었기에, 고종은 순종을 데리고 생존을 위해 러시아 공사 관으로 비밀리에 거처를 옮깁니다. 아관파천(俄館播遷)(1896.2~1897.2)이죠. 그리고 이때 커피coffee를  사랑한 고종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커피의 발음을 한자(漢字)로 바꾼 〈가비(加比)〉(2012)입니다. 

고종의 아관파천을 괘씸하다며 마음속에 담아 둔 일본은 9년 후 러시아에마저 선전포고합니다. 조선을 놓 고 청나라와 붙어서 이긴 여세(餘勢)를 몰아, 이제는 만주를 놓고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는 러일전쟁(露日戦争)(1904.2~1905.9)이죠. 이때 조선은 중립을 선언합니다. 말이 중립이지 일본을 돕기는 싫고 러시아  편을 들었다가 일본이 이길 경우엔 감당 못 할 일을 당할 테니, 중립을 선언하고 마음속으로 일본이 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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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바란 겁니다. 그러나 이를 모를 일본이 아니었죠. 이 또한 괘씸하다고 생각한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킨 직후 별도로 한양을 공격해 조선과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조일공수동맹](1904.2)를 강제로 체결 합니다. 청나라 때처럼 조선을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兵站基地)로 만든 겁니다. 6개월 후 일 본은 재무와 외교 업무에 일본인 고문(顧問)을 두게 해서 조선의 경제와 외교를 장악하기 위한 제1차 한 일협약(韓日協約)(1904.8)을 체결하고, 이듬해에는 외교권마저 완전히 박탈하는 제2차 한일협약(韓日協 約)[을사늑약(乙巳勒約)](1905.11)을 체결하고요. 특히 이때 일본 편에 서서 열심히(?) 국권(國權)을 갉아 먹는 데 앞장섰던 이들이 을사오적(乙巳五賊)[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외부 대신 박제순(朴齊純)⋅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농상대신 권중현(權重顯)]입니다. 

쪼그만 놈이 까분다고 비웃었던 러시아는 대패하면서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조선 주위 어디에도 없었죠. 남은 유일한 방법은 세계를 향해 호소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고종은  1899년 네덜란드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헤이그 회담]Hague Conventions(1907.6)에 (할복 자살이 아니라 지병으로 헤이그에서 사망한) 이준(李儁)(1859~1907)⋅이상설(李相卨)(1871~1917)⋅ (1911년 러시아로 귀화해서 장교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이위종(李瑋鍾)(1887~1917)을 비 밀리에 파견합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었기에 공식적으로 대사를 외국에 파견할 수 없었고 그래서  초청도 받지 못했지만, 회의장 앞에서 피켓팅picketing이라도 하면 뭔가 소득이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서였죠.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 모두 목숨을 건 작전이었지만, 이것은 모든 것이 자국의 이익에 따 라 움직인다는 국제 정세에 무지(無知)했던 무모한 작전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1841~1909)를 조선에 파견해 고종을 폐위 시킨 후, 법령의 제정(制定)부터 관리의 임명까지 일본이 통제하는 것을 골자(骨子)로 한 ‘정미7조약(丁未 七條約)’이라고도 불리는 제3차 한일협약[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1907.7)을 이완용과 짝짜꿍해서 어떤  장애도 없이 일사천리로 체결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대신해 즉위한 순종을 상대로, 일본은 사법 권까지 빼앗는 기유각서(己酉覺書)(1909.7)도 체결했고요. 이때도 조선의 대표는 (순종이 아니라) 이완용 이었습니다. 외교⋅사법⋅행정⋅재무 그 무엇 하나 남아 있는 것 없이 너덜너덜해진 조선은, 결국 순종  즉위 4년 만에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한일합방조약’이라고도 불리는 한일병탄조약(韓日倂呑條 約)(1910.8.22)[체결은 22일이고 공표는 29일]에 의해서 말이죠.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치욕스러운 날이 라 하여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도 부르는 이때에도, 이완용이 초지일관 맹활약(?)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등장부터는 36회 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 이미 자세히 다뤘으니 참고해서 보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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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강의 생애 

고려(918~1392)의 수도였던 북한의 개성(開城)[송도(松都)]에서 태어난 최한기(崔漢綺)(1803~1879)의 자 (字)는 지로(芝老)이고 호(號)는 혜강(惠崗)이다. 자(字)란 보통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성년식 때 지어주는  이름으로 결혼 후 본명 외에 부르던 것이고, 호(號)란 본명이나 자 외에 세 번째 이름으로 주위 사람들이  지어주거나 본인 스스로 지어 제일 편하게 쓰던 이름이다. 본명에는 그 사람의 혼(魂)[넋]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서 부모나 임금 정도만 본명을 부를 수 있었으며, 어릴 때 편하게 부르기 위해 지은 이름으로 성인 이 되기 전까지 사용하는 이름은 특별히 아명(兒名)이라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한양[서울]에서 살고 있던  종2품 무관(武官)의 종갓집 양자로 들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이 컸다. 가장 친한 친구는 〈대동여지 도(大東輿地圖)〉(1861)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이다. 

사대부들에게만 적용되던 성리학은, 임진왜란(1592.5~1598.12)과 정묘호란(1627.1~1627.3) 및 병자호란 (1636.12~1637.1)을 겪은 후엔 일반 백성들에게도 강제되기 시작했다. 개화기 때는 담배처럼 처음부터  팔기 위한 작물 재배가 활성화되었고,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농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상업 으로 흐름이 변해가고 있었으며, 서양의 문물과 개방 압력이 조선 안으로 급격히 몰려오고 있던 때였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평생 서구 문물을 주체적으로 수용해서 새로운 사유를  시도했던 혜강은, 당시 서양 과학을 정리하는 데 온 힘을 쏟아 주저(主著)인 「기학(氣學)」(1857) 외에도  번역서와 저서를 합해 1000여 권이나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산의 500여 권도 놀라울 뿐인데, 그 두  배에 달하니 그가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평생 뭘 하고 있었을지 상상이 됩니다) 그러나 현재 20여 종  120여 권만 전해지고 있다. 혜강은 한양에서의 생활을 고집했다. 그에게 한양은 조선 사회가 중국을 넘어  급변하는 세계의 변화와 정세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관문(關門)이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코 책이었다. 혜강은 34세에 자신의 저서를 통해 세계의 지식인들과 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기(氣)의  본체(本體)[본바탕]를 다룬 「신기통(神氣通)」과 기(氣)의 작용을 다룬 「추측록(推測錄)」의 합본인 「기측체 의(氣測體義)」(1836)를 북경[베이징]에서 출판하기도 했다. 대부분 조선 학자들은 명(明)나라(1368~1644)  멸망 이후 유학의 도(道)는 중국이 아니라 조선에 있다는 근거 없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반면, 극소수의 사 람들은 서양의 문물뿐만 아니라 종교인 천주교까지 수용했다. 그중 천주교는 거부하되 그들의 문물은 주 체적으로 수용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혜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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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용문은, 원문(原文)을 개인적으로 수정 및 편집한 것입니다 ■ 

「기학(氣學)」 선별(選別) 소개 

유학에서는 인륜(人倫)과 인의(仁義)를 취하는 동시에 귀신과 재앙과 상서로움에 대한 것을  변별해내며, 서양의 학문에서는 천문과 수리(數理)와 대기(大氣)에 관한 설을 취하는 동시에  괴이하고 거짓된 화복설(禍福說)을 제거하며, 불교에서는 허무(虛無)[텅 빔]를 실유(實有)[실재 (實在)]로 바꿨다. 이 세 가지를 조화롭게 하나로 귀일(歸一)시키고 옛것을 기본으로 새롭게  바꾸면, 진정 천하에 두루 통용되는 가르침이 될 것이다. 

…… 혜강 최한기 「신기통(神氣通)」(1836) 

혜강의 대표작은 형이상학과 우주론인 「기학(氣學)」(1857)과 정치학인 「인정(人政)」(1860)이라고 할 수  있다. 「기학」은 기존 학문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기(氣)의 운화(運化)[운동과 변화]를 세분해서 설명하고, 「인정」은 국가의 기둥이 될 인재를 평가하고[측인(測人)] 가르치고[교인(敎人)] 선발하고[선인(選人)] 활용 하는[용인(用人)] 것을 순서대로 설명한다. 「기학」은 총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이의 두께와 활자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당시의 책 한 권은 지금의 책 50쪽 분량에 해당한다. 혜강은 데카르트처럼 모든 학 문의 기본 토대를 세우고자 했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존재’Cogito에서 출발했다면, 혜강은 우주 만물 의 본질적인 구성 재료이면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는 존재인 기(氣)에서 출발한다. 기(氣)의 운화(運 化) 원리를 파악해 그에 맞춰 사는 자연스러운 삶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그의 기학은 경험론적인 동시 에 도덕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혜강이 「기학」을 통해 제시하는 것은 참된 학문이고, 무엇이 참된 학문인지에 대해서는 보름달을 직접 그 리는 대신 주변을 칠해 보름달을 표현하는 홍운탁월법(洪雲托月法)을 사용한다. 노자(老子)나 장자(莊子) 가 도(道)를 설명한 방법이자, 서양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신의 속성을 설명한 방법이며,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1889~1951)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려 했던 방법이다. (이렇게 말하니 뭔가  거창한 듯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둠’에 관한 설명으로 그 정반대인 ‘밝음’을 간접적으로 설명하듯이, 쉽게 말해서 ‘비유’나 ‘역설(逆說)’을 사용했다는 말입니다) 

불교나 도교는 (영원불변하는 본성이나 고정된 자아(自我)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법무아(諸法無 我)[무물(無物)]를 종지(宗旨)[핵심적인 가르침]로 삼는다며 비판한다. 혜강에게 세계는 허무(虛無)가 아니 라 끊임없이 활동하고 변화하는 현상계의 원리인 기(氣)에 의해 형성된 실유(實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단인 이 둘 사이엔 ‘파도’처럼, 허무(虛無)도 실유(實有)도 아니면서 뚜렷한 효과나 변화를 남기는 ‘현 상’이라는 것도 있음을 이미 78회 송민령의 「뇌과학 연구소」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종교의 주장을  (잡초처럼 쓸모없는 학문이라는 뜻의) 낭유학(稂莠學)으로 규정한다. 혜강에게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살아 가는 동안 개인의 말과 행동이 세상의 기(氣)와 통하거나 통하지 못하고 막히는 것일 뿐, 외부의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화⋅복⋅운명⋅팔자 등을 강조하는 참위학(讖緯學)[방술(方術)] 또한  거짓 학문이 된다. (더 정확한 근거는, 이런 것들의 ‘정의(定義)’가 주관적이라는 점입니다. 하다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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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사태마저도 기회로 생각하고 정말 기회가 되었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세상은 ‘사실’fact의  세계이고, 우리의 정신은 ‘가치’value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좋거나 나쁘다’라는 도덕판단 또는 가치판단 은, 개인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달린 문제일 뿐이죠)  

혜강은 이학(理學)[성리학과 양명학]이 추구하는 이(理)란 기(氣)를 따르는 그림자일 뿐이라며, 대담하게도  이학(理學) 모두를 췌마학(揣摩學)으로 규정한다. (본래는 자기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뜻이지 만, 더 나아가 혜강은 제멋대로 상상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겁니다) 사물에 대한 경험에 기초하지  않은 것에서 출발하는 것들은, 그 주장하는 바가 참인지 거짓인지 판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영국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1902~1994)가 반증(反證)가능성Falsifiability을 ‘과학 vs. 비(非)과학’ 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제시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치(理致)란 독립적일 수 없다. 반드시 뭔가에 (즉 기 (氣)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이(理)란 성리학에서 말하듯 기(氣)를 지배하는 선험적인 실체가 아니라, 사람이 기(氣)의 운화(運化)에 대해 경험과 추측을 통해 구성한 결과물이자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다. 그렇기에 이치(理致)는 기(氣)의 형태나 구성이 변하면 당연히 그에 따라 변한다. 절대적인 도덕은 없 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理)란 이름뿐이니 (현실에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오로지 유일하게 기(氣)만  존재한다는 이런 주장을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고 한다. 이것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 의 사상을 계승한 셈이다. 

이학(理學)에 대한 비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혜강은 측은해하는 마음의 배후에 있다고 여겨져 온  성리학의 본성(性)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 측은해하는 마음은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사태에 직면해서  나온 그러니까 그런 상황이 만들어낸 (우연적인) 감정이며, 그런 감정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이전에 물에  빠지면 죽고, 죽음은 고통이라는 사실 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음속에 그런 정보가 전혀  없다면,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아도 전혀 측은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소시오패스Sociopath 

나 사이코패스Psychopath의 공식 명칭인 반사회적 인격 장애(ASPD)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공감(共感)sympathy 능력만 빼고는 모든 면에서 정상이다. 그렇다면  맹자의 주장대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본성에 기초했다고 보 기는 힘들다. 누군가에게는 없을 수도 있는 건 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태어날 때는 공감  능력이 있었지만 잃어버린 것이라는 반박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 잃어버렸다면 태어나는 순간 에는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할 길은 없어 보입니다) 혜강의 주장을 더 밀고 나가면, 효(孝)나 결혼과 같은  인륜(人倫) 또한 (상황에 따른) 경험과 추측의 산물이 된다. 혜강에게 있어서 참된 학문과 거짓된 학문을  구별하는 기준은, 사물 즉 만물을 이루고 있는 바탕인 기(氣)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과 (현실의 문제를 분 석하고 해결할 수 있는) 실용성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매우 제한적이다. 그래서 혜강은 추측으로 우 리의 경험을 넓혀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쓸모없으니 버리자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학문 역시 기(氣)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고, 기존의 학문들은 그 학문이 형성되고 통용되던 역사의 단계와 처한 환경에 맞는 역할을 했다. 그러므 로 항상 당시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을 끊임없이 개선하고 수정해가는 과정 자체가 학문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기학 역시 그런 기존의 학문 위에서 그런 학문의 단점을 보완하며 세워진 것 이라고 말한다. 

췌마학(揣摩學)이나 낭유학(稂莠學)처럼 형체가 없는 학문을 허학(虛學)이라고 한다면, 현실에 근거해 사 실을 통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seeking evidence와 세상에 쓸모 있는 경세치용(經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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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用)administration and practical usage 그리고 백성들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이용후생(利用 厚生)profitable usage and benefiting의 정신으로 대표되는 학문은 실학(實學)이 된다. 그렇다면 실학 의 구체적인 분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혜강은 네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현상학(現象學)과 비슷 한) 격물학(格物學)이다. 두 번째는 천체의 운행을 다루는 일종의 천문학인 역수학(曆數學)으로, 농사의  시기를 정해 놓은 24절기처럼 계절에 따른 해와 달의 높고 낮음⋅멀고 가까움⋅차고 기움⋅별들의 위치  등 계절의 변화가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탐구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학문이다. 세 번째는 물류학(物 類學)으로, 동식물을 (예를 들어 맛이나 색깔 또는 냉혈인지 온혈인지 또는 거주 장소 등) 여러 가지 기준 에 따라 분류하는 학문이다. 네 번째는 도구를 제작해서 사용하는 것을 다루는 기용학(器用學)이다. 혜강 은 주희처럼 유학의 핵심 항목 중 으뜸인 (구체적인 사물을 극한까지 탐구하는) 격물(格物)을 가장 중시한 다. 구체적인 사물을 극한까지 탐구하면[격물(格物)] 진정한 앎에 이르게 되고[치지(致知)], 그렇게 알게  되면 뜻이 참되게 되고[성의(誠意)], 뜻이 참되면 마음이 바르게 되며[정심(正心)], 마음이 바르게 되면 몸 이 바르게 되고[수신(修身)], 몸과 마음이 바르게 되면 가문이 잘 다스려지고[제가(齊家)], 가문을 잘 다스 릴 줄 알면 나라도 잘 다스릴 수 있고[치국(治國)],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면 천하도 잘 다스릴 수 있 어 천하 만물이 편안해질 것이라는[평천하(平天下)] 게 「대학(大學)」의 ‘8조목’이다. 

허공(虛空)을 채우고 있는 공기(空氣)[비어있는 기(운)]는 정말로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꽉 차 있 다. 지금 같으면 산소나 질소 또는 이산화탄소가 차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런 것들을 모르던 예전에도 부 채를 부치면 바람이 이는 것을 통해 뭔가로 가득 차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렇듯 비어 있는 것 같은 것의  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만물을 구성하는 재료인 기(氣)이다.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으면 서도 평상시에는 의식하지 못하다가, 건강에 이상이 생길 때라야 비로소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느 끼지 못하고 살았던 우리 몸의 기운(氣)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기운을 느낀다는) 감기(感氣)cold라는 표 현이나, 의식을 잃고 쓰러져 몸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기운이 끊겼다는) 기절(氣絶)fainting이라고 부 르는 것이나, 기절할 만큼의 상황에서 ‘기가 막힌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기(氣)는 분명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 명제가 거짓이라면, 기(氣)의 운화(運化)에 바 탕을 둔 침술(鍼術)과 한의학 역시 사기(詐欺)가 된다. 기(氣)는 혈관이나 림프관과는 다른 통로를 통해  움직인다. 그런 통로 중 피부나 근육 쪽으로 통하는 곧고 주된 길을 경맥(經脈)meridian channels, 경 맥에서 갈라져 나와 온몸 각 부위를 그물처럼 얽은 줄기를 낙맥(絡脈)associated vessels, 이 둘을 합해  경락(經絡)meridians이라고 부른다. 경락에도 (림프절처럼) 일정한 거리마다 기가 모여 있는 기혈(氣穴) [경혈(經穴)]acupoints이 있는데, 이곳이 침(針)acupuncture과 지압(指壓)acupressure과 뜸moxa  cautery을 뜨는 자리이다. 경락을 찾겠다고 인체를 해부해봤자 소용없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생명 활동 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있어서 죽는 순간 흩어져 사라지기 때문이다. 

기(氣)는 구름이나 수증기를 의미하는 ‘≋’ 모양에서 생겨났다. 구름이나 수증기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 서서히 혹은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하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갑자기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들이 눈에  안 보이고 흩어졌다고 해서 없어진 것은 아니다.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것이다. 이런 기(氣)의 속 성에 대해 제대로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장자(莊子)」 《외편》 11편 〈지락(至樂)〉이다. 장자의 아내가 죽 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슬퍼하기는커녕 화분[항아리]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자의 모습에  문상(問喪) 온 친구가 화를 내자 자신이 그리하고 있던 이유를 장자가 설명하는 부분이다. 처음엔 자신도  슬퍼했지만, 태초엔 육체도 생명도 없이 모든 것이 혼돈 속에 뒤섞여 있다가 변화를 얻어 기가 생겼고, 그  기가 변화를 얻어 형체를 이루어 생명이 생겼다가 이제 다시 (계절의 순환처럼) 변화를 얻어 흩어져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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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로 (즉 고향으로) 돌아간 것인데, 그렇다면 슬퍼할 게 아니라 기뻐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기(氣)라고 하는 것은 견줄 곳이 없을 만큼 커서, 이 기(氣)가 쌓이면 힘이 생기고 운화(運化) 하면 신령스러운 작용이 생긴다. 바로 이러한 것이 기(氣)의 본성이요, 기(氣)의 능한 바이다. 운화(運化)의 기(氣)는 곧 형체 있는 신(神)이요 형체 있는 이(理)이다. 

…… 혜강 최한기 「기학(氣學)」(1857) 

신기(神氣)[마음]는 지각(知覺)의 주체요, 지각은 신기의 경험이다. 몸에는 이미 통한 신기가  있고, 또 통할 수 있는 감각기관이 있다. 몸 밖에는 또 통함을 증험(證驗)[증명하고 경험함]할  수 있는 만물이 있다. 신기가 몸에서 운화할 때는 강약(强弱)과 청탁(淸濁)이 있고, 외기(外氣) 와 교접(交接)하면 선악과 허실(虛實)이 생긴다. 인사(人事)의 막힌 부분을 변화시켜서 변통할  수 없는 천지의 신기에 통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변통(變通)[변화와 소통]makeshift이다. …… 혜강 최한기 「신기통(神氣通)」(1836) 

운화[운동과 변화]란, 생기(生氣)[생명의 기운]가 쉬지 않고 움직이며[상동(常動)] 구석구석 샅샅이 돌아다 녀서[주운(周運)] (눈에 띌 만큼) 크게 변화한다[대화(大化)]는 뜻활동운화(活動運化)를 줄인 말이다. 혜 강은 기(氣)를 성질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기(氣) 그 자체의 보편성과 변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형체로서 파악할 수 없는) 운화(지)기(運化(之)氣), 그런 기(氣)가 특정한 물질과 형체[모습]를 지닌  개체로 드러난 형질(지)기(形質(之)氣), 그리고 천지의 정기(精氣)[운화기]와 부모의 혈기(血氣) 그리고 후 천적인 경험과 학습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지각의 주체이자 인간의 마음인 신기(神氣)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사자나 소와 같은 형질기가 형성되면 그에 따라 육식과 채식으로 운화기도 변하고, 형질기가 죽음에  의해 소멸하면 (모든 건) 다시 운화기로 돌아간다. 외부의 대상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면 신기와 접촉 해서[물들어서] 저장되고, 신기는 저장된 경험의 자료를 통해 추측(推測) 함으로써 운화기와 통하게 되어  변통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마음을 백지 상태[빈 서판/타불라 라사]tabula rasa에 비유한 존  로크John Locke(1632~1704)의 주장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 마음의 바탕 한 부분을 천지의 정기 즉 운 화기가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추측은 앎을 넓히는 요체(要諦)[핵심사항]이며, 철저히 인간의 소관(所管)[일/사항]이다. …… 혜강 최한기 「기측체의(氣測體義)」(1836) 

사람이 사람 되는 까닭이 추측(推測)conjecture이라고 할 정도로, 혜강은 추측에 근본적인 의미를 부여 한다. (즉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뜻이죠) 우선 사물을 경험한 후 그 경험을 미루어 그 사물의 원리 를 추측하고, 그런 다음 그 사물의 원리를 미루어 다른 사물들 나아가 우주 만물의 원리까지 헤아리는 작 용으로, 추측이란 인간의 개체적 한계를 초월하게 하는 사유 작용으로서 신기의 활동이다. 이런 추측에 관 한 책인 「추측록(推測錄)」(1836)과 인간의 신체를 분석한 「신기통(神氣通)」(1836)을 합본해 청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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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한 것이 「기측체의(氣測體義)」(1836)이고, 이에 대한 논의를 더욱 발전시킨 최종본이 「기학」이다. 

비록 추측의 능력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을 생활 속에서 발휘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인간  개인의 책임이라고 혜강은 말한다. 추측이 올바르게 되는 경우엔 운화기와 통하게 되지만, 잘못되는 경우 엔 막히게 된다. 전자(前者)가 선이고 후자(後者)가 악이다. 신기의 경험과 추측을 통해 운화기와 통하는  범위와 정도의 차이에 따라 선과 악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다만 인간 중심적이었던 다산은, 선-악이라는  윤리적인 문제를 선택과 결단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차이가 있다. 혜강이 운화기와의 조화로움에서 선- 악을 보고 다산은 인간의 의지(意志)에서 선-악을 본다는 것이 차이라면, 둘 다 선-악을 상대적인 가치로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이 져야 한다는 데서는 같은 입장이다. 

그렇다고 ‘통함[조화로움]’ 그 자체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무엇과 통하느냐가 중요하다. 사사로운 이 기심에 통하는 것은 통하지 말아야 할 것에 통하는 것이다. 우리가 통하는 것이 통하지 말아야 할 것이거 나 또는 통해야 함에도 그 정도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면 신기는 막히게 된다. 이때 막힌 신기를 다시 통 하게 하는 것이 변통(變通)[변화와 소통]이다. 변통 역시 사람의 일이다. 추측의 통함이 올바른지는 외부  

사물과 사태를 통해 증험할 수 있다. 삶에서 막힘의 경험을 겪었다면, 우리는 자신의 추측을 다시 반성해 서 새롭게 변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외부 세계 또는 세상의 흐름이 잘못된 쪽으로 가고 있다면 어떤가?  그 잘못된 흐름에 자신을 변통해야 하는가? 그 잘못된 흐름에 변통하여 통하는 것이 과연 선이 될까? 이 것이 혜강이 놓친 부분이다. 어쩌면 알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과제로 남겨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흐 름이 잘못된 쪽 또는 제대로 된 쪽으로 가고 있다는 판단을 하려면, 다시 옳고 그름의 절대적인 기준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 인간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을 현재로서 는 알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우리 인간이 지각하면서 살 수 있는 인간만의 세상 속에서 옳고 그름 을 따져야 할 것이고, 그것은 나와 너와 우리의 사람됨을 발현할 수 있게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일 겁니다. 그러자니 수(數)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혜강도 이미 알고 있던 문제이고, 그래서 아래처럼 말합니다) 

한 나라의 일은 마땅히 한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 다스려야지, 한두 사람들끼리 자기네 욕심 만을 따라 다스려서는 안 된다. 한 나라 사람들의 공론(公論)이 바라는 사람을 취하여 관직을  맡겨 직책을 완성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한 나라 사람들과 함께 다스리는 공치(共治)이다. …… 혜강 최한기 「인정(人政)」(1860) 

자신에게서 가족으로 가족에게서 타인에게로 타인에게서 사회 전체로 향하는 ‘통함[조화로움]’의 연장선에 서, 혜강은 공리주의(功利主義)Utilitarianism처럼 백성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그러니까 내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남에게도 이익이 되는 경우라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악의 가 치판단의 기준이 백성들이라고, 무조건 백성들의 욕구를 따르자는 것은 아니다. 악한 사람들이 좋아하거 나 싫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선이나 악이 아니고, 한 명의 선한 사람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참된 선과 악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어떻게 누가 무엇으로 구별할 것 이며 그러기 위해선 또다시 절대적인 선과 악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순환논증(循環論證의 오류가 도사리고  있다. (지금도 정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답답할 뿐입니다) 다산에게 사람의 본성은 선을 좋아하는  마음의 욕구에 불과하다. 곧 마음에는 인의예지를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만 있다. 그러므로 본성의 욕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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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사물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실천을 통해 충족되어야 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면서 누군가의 남편 이며 누군가의 직원일 수도 있다. 이런 무한한 관계 맺음 속에서 자기 직분에 맞게 실천을 해야 그것이  덕이고 선이 된다는 것으로, 혜강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여하튼 이익을 취하는 걸 달갑지 않게 생각해서 그런 사람을 소인(小人)으로 깎아내리던 유학과는 반대되 는 입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자가 이야기한 군자(君子)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지배계급을 가리키고, 소인은 피지배층인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윤리와 일반 백성의 윤리를 구분 한 공자가 이익 추구를 좋지 않게 여긴 초점은, 일반 백성이 아니라 지배계급을 겨냥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사상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후의 학풍이 공자의 사상을 잘못 해석했을 뿐.  

‘활(活)’이라는 것은 생기(生氣)vitality이니, 이것이 뛰어난 사람은 오래 살고 성격이 인자(仁慈)하다. ‘동(動)’이라는 것은 (정신이나 기세를 떨쳐 일어나는) 진작(振作)rousing이니, 이것이 뛰어난 사람은 앞뒤 사정을 잘 파악할 것이다. ‘운(運)’이라는 것은 (일이 잘되도록 중간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두루 힘쓰는) 주선(周旋)mediation이니, 이것이 뛰어난 사람은 적절하고 마땅하게 일을 처리할 것이다. ‘화(化)’라는 것은 변통(變通)makeshift이니, 이것이 뛰어난  

사람은 만물을 이해하여 일을 완성할 것이다. 인간이여 ‘활동운화(活動運化)’하라! 

…… 혜강 최한기 「기학(氣學)」(1857) 

활동운화(活動運化)를 굳이 하나씩 구분해서 본 이유는, 사람마다 이 네 가지를 모두 갖고 태어나기는 해 도 각각의 발현 정도는 개인차가 있기에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보완하라는 의 미이다. 특히 활(活)의 의미를 뒤집어 보면 사람의 장수(長壽)와 단명(短命)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 므로, 생명을 인위적으로 늘리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혜강은 운화기를 크게 인간과 관 련된 인기운화(人氣運化)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우주 만물과 관련된 천지운화(天地運化)[대기운화(大氣運

化)]로 구분한다. 인간 역시 우주의 일부이긴 하지만, (타고난 본능과 반대되는 도덕적인 사회를 지향하려 는) 의지(意志)가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만물과도 다른 독특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기운화는  다시 사회적 차원의 통민운화(統民運化)[인민운화(人民運化)]와 개인적 차원의 일신운화(一身運化)로 구 분되고, 그 사이에 가족 관계처럼 인간관계 차원의 교접운화(交接運化)를 집어넣기도 한다. 

혜강이 운화를 ‘천지운화[자연] → 인기운화(통민운화[사회] → 교접운화[관계] → 일신운화[개인])’로 구분  짓는 이유는, 큰 것이 변화하면 작은 것도 그에 따라 변화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개인[일신운화]의  한계를 넘기 위해선 사회의 운화기[통민운화]를 받아들여야 하고, 사회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 우주의 운화 기[천지운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직접적으로 자연환경이나 기후가 변하거나 아니면 간접적으로  자연에 대한 앎[지식]이 변하면, 사회도 그리고 개인의 삶이나 행동도 그에 따라 변하고 또 변해야만 살아 갈 수 있다. 기후가 변했음에도 적응하지 못하면 공룡들처럼 멸종하거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고 뉴턴 의 절대적 시공간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적 시공간의 개념으로 바뀌었음에도 그에 적응하지 못하면 세계에 서 사회에서 뒤처지게 된다. 세계에 대한 앎이 변해서 지구는 둥글고 그래서 세상의 중심은 없으며 모든  나라가 소중하다는 의식의 변화가 일어난 당시에도, 중국을 섬기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심한  노릇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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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강은 기(氣)가 운동하고 변화하는 모습인 운화기의 법칙을 (‘흘러가며 운동하고 변화하는 이치’라는 뜻 의) 유행지리(流行之理) 또는 (‘사물의 이치’라는 뜻의) 물리(物理)라고 부른다. 풍요롭고 바람직한 도덕적 인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그중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천지운화의 유행지리를 아는 것이 그의 학문의  목적이다. 그런데 알 수 없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자체를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형 질기의 작용을 통해서만 운화기의 유행지리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을 뿐이고, 그렇게 파악된 추측지리 (推測之理)를 끊임없이 쌓아가고 수정해 나가야 한다. (101회 「마음의 진화」에서 대니얼 데닛이 비록 의 인화(擬人化)의 위험이 있더라도 마음을 탐구하기 위해선 ‘지향적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비록 폭력의 위험이 있더라도 서(恕)를 통해 타인을 헤아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죠) 다산의 하늘[상제(上帝)]은 인격신이며 신령한 지각과 인식의 능력[영명(靈明)]을 갖춘 존재이다. 그런 하 늘의 영명함은 사람의 마음과 직통[천지영명(天之靈明) 직통인심(直通人心)]한다. 즉 기(氣)라는 물질적  존재는 실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만물의 생성 원리이거나 주재자일 수는 없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 다. 하지만 혜강의 경우, 사람과 하늘 사이에는 기(氣)가 매개(체)로 자리한다[인지심기(人之心氣) 직통천 기(直通天氣)]. 그래서 호흡을 통해 이뤄지는 천기(天氣)와의 직통은, 생명을 유지하는 성스러운 상호작용 이다. 

우주 안의 모든 국가에서 소이(小異)[작고 다름]는 풍토와 물산(物産)이고, 대동(大同)[크고 같 음]은 신기의 운화이다. 

…… 혜강 최한기 「기학(氣學)」(1857) 

혜강의 「기학」은 한 마디로, 운화(運化)라는 원리와 변통(變通)이라는 행동을 강조하면서 성리학에 매몰되 어 당시의 시대적 변화를 외면하려는 개인과 사회의 경직성을 비판한 것이다. 혜강은 문명 간의 충돌에서  승패의 우열은, 풍속이나 예교(禮敎)[예절과 교육]가 아니라 법제와 각종 기계 등 실용에 힘쓰고 남에게  배워 이익으로 삼는 데 있다고 말한다. 외래 문물을 기(氣)라는 개념을 통해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긍정적으로 인정한 것이 혜강의 사상이고, 이것을 스스로 (하나로 크게 통 합되어 함께 어울린다는) ‘대동사상(大同思想)’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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