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기철학.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기철학. Show all posts

2023/09/29

기일원론(氣一元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일원론(氣一元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일원론 (氣一元論)
===
유교 개념 - 우주만물이 기에 의해 생성되고 존재한다는 성리학이론.

태허 뜻: ‘하늘’을 달리 이르는 말.

태허 뜻: ‘하늘’을 달리 이르는 말., 중국 철학에서, 음양을 낳는 기(氣)의 본체를 달리 이르는 [국어 사전]

 태허의 의미

1 태허 太虛 : ‘하늘’을 달리 이르는 말.

2 태허 太虛 : 중국 철학에서, 음양을 낳는 기(氣)의 본체를 달리 이르는 말. 송나라 장횡거(張橫渠)가 주장한 개념으로 이것이 응집되어 만물이 되고, 만물은 분해하여 이것이 된다고 한다.

===
태허

태허 [太虛]는 북송대의 성리학자인 장재(張載:1020~77)가 우주만물의 근원이 되는 일기(一氣)를 가리킨 개념이다. 하늘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무극이 곧 태극(太極) 이라고 해석한다. 주희의 사상에 큰 영향을 준 장횡거(장재 張載,張橫渠 )는 이를 태허(太虛)로 해석하는데, 태허는 텅 빈 것이 아니라 이미 기(氣)로 충만한 터전인 것이다.

태허는 장자 〈莊子〉 지북유(知北遊)에 처음 나오는 말로서 만물을 포함하고 있는 거대한 공간, 구체적으로는 천공(天空)을 뜻하는 것이었다. 태허가 이러한 공간적 의미를 떠나 형이상학적 본체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장재에 의해 '태허즉기'(太虛卽氣)의 명제가 확립되면서부터이다.

장재는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기(氣)의 모임과 흩어짐에 의해 설명했다. 기가 모이면 만물이 생기며, 만물이 사라지면 기가 흩어진다. 기가 흩어진 상태를 허(虛)라고 하며, 근원적인 허의 상태를 태허라 한다. 따라서 태허라는 것은 기가 흩어져 있는 우주 만물의 근원적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태허는 기가 흩어져 있는 것이지 기가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허무(虛無) 또는 공무(空無)와는 다른 것이며, 그런 점에서 '태허즉기'의 명제는 '유(有)는 무(無)로부터 생긴다'는 노장적 우주생성론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기일원론 철학을 대표하는 서경덕(徐敬德)의 사상에서도 태허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형이상학적 본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서경덕은 그의 태허설에서 "태허는 담연무형(淡然無形)이다. 이것을 선천(先天)이라 부르는데 그 크기는 바깥이 없고 그 앞에는 시작도 없으며 그 온 바는 궁구할 수 없다. 그 담연하여 허하고 정(靜)함이 기의 체(體)이다"라고 했으며, 또 "태허는 허하면서 허하지 않다. 허는 곧 기이다. 허는 끝이 없고 커서 바깥이 없다. 이미 허라고 말하면 어떻게 이것을 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허하고 정한 것은 기의 체요,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기의 용(用)이다"라고 했다. 이는 '태허즉기'라는 장재의 명제를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기의 체용과 관련해 설명하는 것이었다. 서경덕은 만물의 형이상학적 본체를 기라고 보고, 기가 아직 작용하기 이전의 본질을 기의 체라 했으며 기가 모이고 흩어짐으로써 일어나는 천지 만물의 생성을 기의 용이라 했다. 기의 체가 곧 선천이며 태허인 것이다.


===


===


===


===


===


===


===

2023/09/27

오대산에서 기철학을 < 명경대 < 오피니언 강원도민일보 2010

오대산에서 기철학을 < 명경대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강원도민일보



오대산에서 기철학을
기자명 이광식
입력 2010.04.12






기생 황진이는 자신을 높이는 일을 좋아했다. ‘송도삼절(松都三絶)’이 그러하다. 30 년 면벽 수도한 지족선사를 파계시켜 놓고 황진이는 “나와 박연폭포와 서화담이 송도의 삼절이다”고 기염을 토한다. 이 말은 곧 화담 서경덕이 당대에 상당한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음을 드러낸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계곡에 물이 빠진 뒤에 찾아가 보았더니 솥에는 이끼가 가득했으나 서화담은 태연히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한다.

화담 서경덕은 ‘기철학(氣哲學)’과 관련된 세 편의 글을 쓴다. 화담의 기철학은 스승도 없이 예의 지독한 가난과 절대 고독 속에서 터득한 것이기에 매우 독창적이다. 그 때까지 성리학은 ‘기(氣)’ 곧 ‘감각적 경험 세계’와 ‘이(理)’ 즉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세계’라는 개념으로 이 세계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설명해 왔다. 주자도 그랬고, 화담 이후 이퇴계나 이율곡도 그랬듯이 성리학의 주류는 ‘이’를 중심에 놓고 사유한다.

하지만 화담은 ‘기’를 중심에 놓는다. 세상 모든 것이 ‘기’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만물이 이루어지기 전의 혼돈의 맑고 형체가 없는 태허(太虛)를 일컬어 만물이 이룩되기 전의 선천(先天)이라 한다. 선천의 이 맑고 비고 고요한 것이 기의 근원이다. 선천이 열리는 것이 이가 발휘된 때다.” 화담은 이렇게 기의 근원을 명쾌히 밝히고, 기에서 음양 두 개의 기가 나와 만물을 형성한다고 설명한다.

기철학의 선배라 할 중국의 소강절이나 장횡거 등이 중국 철학사에서 이단시되었듯 화담도 후학들로부터 진정한 선비로서 존경받았지만, 그의 학문은 정상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다. 기철학은 김시습에게서 발견되고 최한기에서 일시 번성하다가 조선 말기 언더그라운드 철학자에게서 시대의 변혁과 함께 다시 분출되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데….

오대산 일대를 기 논의 및 수행의 중심지로 만든다는 계획이 추진 중이다. 
불교적 기는 물론 풍수적 기, 요가적 기 등 다양한 논의가 이뤄지는 가운데 
철학적 기 얘기도 해야 한다 생각하여 
한국적 기철학의 태두인 화담 서경덕 선생의 기 이야기를 잠시 떠올려 본 것이다.

이광식 논설실장 misan@kado.net

===
R Kwak 저술2018 — 그동안 신라 오대산문수신앙 형성 시기와 구조 둘러싸고 많은 논의 ... 흥미로운 것은 오대산에서 행하는 예참 신앙 대상  의례 내용에도 두 . 록이 차이가 ...
페이지 24개
===
율곡연구원, 오대산 국립공원과 기록유산 활용방안 모색
송고시간2021-09-07
(강릉=연합뉴스) 이해용 기자 

율곡연구원은 오대산 관련 기록유산 활용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오대산국립공원과 업무협약을 했다고 7일 밝혔다.

오대산은 예로부터 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찾은 명산으로서 
  • 율곡 이이 선생의 '유청학산기'
  • 김창흡의 '오대산기' 등의 유산기(유람기)가 전해진다.

이들 유산기는 오대산의 옛 등산로 발굴의 기초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선인들의 산수 유람 문화를 복원하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다.

율곡연구원은 이번 협약을 계기로 강원 도내 국학진흥사업 차원에서 이들 유산기와 관련 문화유적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정리 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오대산을 자연과 인문이 융합된 힐링 공간으로 오대산을 새롭게 꾸며나가는 데 힘을 합칠 예정이다.
===


===


===

氣哲學(기철학)의 형성한 徐敬德(서경덕) 선생

청남 권영한 홈페이지입니다

氣哲學(기철학)의 형성한 徐敬德(서경덕) 선생


徐敬德(서경덕)선생은 스승 없이 혼자 공부하였다.
불교에도 홀로 깨달은 분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那般尊者(나반존자)이다.
흐르는 물, 날라 가는 구름, 변하는 萬象(만상) 등을 보며 혼자 깊은 산 속에서 우주만물의 이치를 다 깨친 분이라고 한다.
ㄱ와 마찬가지로 徐敬德(서경덕)선생도 혼자서 진리를 깨진분이라 한다.
徐敬德(서경덕)은 송도(지금의 개성시) 사람이었는데 조상 때부터 집안이 별로 변변치 못했다.
서경덕의 아버지는 원래 德望(덕망)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덕을 숨기고, 비록 가난한 살림살이 엇지만 마음을 항상 편안 하게 가졌기에 이웃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공경했다.
서경덕의 어머니는 그를 낳기 전 공자의 사탕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10달 뒤에 태어난 아기가 바로 서경덕이었다고 한다.
서경덕은 태어 날 때부터 보통 아이와는 달리 매우 영특했다. 자라면서 스스로 글 읽는 것을 알았고 한번 본 것이면 죄다 외워버렸다.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또한 많은 것을 기억했다.
어느 날 서경덕은 「書經(서경)」을 읽고 있었다.
‘1년은 366일이 된다.’라는 내용에 대해 해석을 해놓은 구절이 있었는데 그것을 거듭 생각해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경덕은 경서에 통달했다고 하는 노인이 개성부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갔다.
“1년은 366일이 된다. 이 구절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서경덕이 말했다.
“여기에 적힌 해석은 비록 늙은 스승이나 나이 많은 선비라 하더라도 아는 사람이 적어 나 또한 배우지 못했다
네.”
노인이 말했다.
서경덕은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통달한선비가 없으니 우리 儒學(유학)의 도는 사라졌구나.”
서경덕이 탄식했다.
서경덕은 「서경」의 그 구절을 베껴서 벽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잠자고 밥 먹는
것도 잊고 깊이 파고 들어갔다.
드디어 보름 만에 비로소 깨닫게 되어 그 가지를 가르고 실마리를 풀려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이때 서경덕의 나이 17세였다.
“聖賢(성현)의 도의는 모두 책에 실려 있으니 다른 데서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하면서 그 뒤로도 많은 고전을 읽어 그 속에 적힌 뜻을 모두 이해하고 또한 발전시켜 세상에 빛을 남기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 진리는 바로 책 속에 있는 것이다.
독서를 많이 그리고 精讀(정독)하는데에 萬象(만상)의 본질과 통하는 길이 있는 것이다.


9/27/23, 12:32 AM 청남 권영한 홈페이지입니다

기철학에서 본 똥의 가치와 의미 - 학지사ㆍ교보문고 스콜라

기철학에서 본 똥의 가치와 의미 - 학지사ㆍ교보문고 스콜라

기철학에서 본 똥의 가치와 의미
The Value and Meaning of Poop in Ki Philosophy

김교빈(Kyobin Kim) 
한국종교교육학회 종교교육학연구 제67권
등재여부 : KCI등재
2021.12 65 - 80 (16 pages)
인문학 종교학
이용수 57 인용하기 공유하기
원문저장 원문보기 구매하기
초록
 
목차
 
참고문헌
 
해당 권호 수록 논문
국문초록

기(氣)는 동양에서 수천 년 동안 자연과 사회, 물질과 정신을 아우르며 만물의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쓰여 왔다. 이 논문은 사이언스 월든의 ‘똥본위화폐’ 연구 프로젝트에서 똥의 순환과 가치 정립에 대한 인문학적 이론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이다. 특히 이 논문은 화담 서경덕의 기철학을 중심으로 똥의 가치와 의미를 논하고 있다. ‘똥본위화폐’ 프로젝트가 기철학에서 얻을 수 있는 사고는 첫째 순환적 사고이다. 특히 장자, 장횡거, 서화담은 만물의 변화를 기의 취산으로 설명하면서 모든 존재가 거대한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둘째로 기철학이 주는 시사점은 만물 평등의 관점이다. 장자는 모든 것을 상대화시킴으로써 만물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끌어냈다. 장횡거 또한 만물이 기로 이루어져 있고 기의 취산을 통해 순환 과정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만물은 평등하다는 생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서경덕은 그런 사고를 확장하여 현실에서의 실천으로까지 나아갔다. 셋째로 기철학은 똥을 더럽다고 보는 인식의 전환을 가능케 하며 이를 바탕으로 만물일체론을 끌어낸다. 만물이 하나라는 장자와 장횡거의 생각, 그리고 기의 질서가 수의 질서로 환원되며 수의 질서는 소리의 질서로 환원된다고 보고 대자연의 하모니로 어우러지는 대화해(大和諧)의 세상을 꿈꾼 서경덕의 생각이 모두 그러한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똥본위화폐’ 프로젝트가 현대사회의 소득불균형과 인간 소외, 세대 갈등, 학점과 학위에 따른 교육 격차 등의 문제 해결을 목표로 삼는다면 이 같은 사고를 기반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분리와 투쟁이 아니라 공감하고 소통하는 감통(感通)의 세계관으로 바꿔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문초록

several thousand years ago in the East asia, ki has been used as a concept to explain the change in all things, encompassing nature and society, matter and spirit. This thesis is a study to prepare a humanistic theoretical basis for the circulation and value establishment of poop in Science Walden s ‘feces Standard Money’ research project. In particular, this thesis discusses the value and meaning of poop, focusing on the philosophy of Hwadam Seo Gyeong-deok. The first thought that the ‘feces Standard Money’ project can be obtained from the Ki philosophy is cyclical thinking. In particular, Zhuang-tzu, Jang-jae, and Seo Hwa-dam explained the change of all things as gathered and scattered, all beings could not escape from the great cycle. Second, the point of preview of Ki philosophy is the perspective of equality in all things. By relativizing everything, Zhuang-tzu drew on the idea that all things are equal. Jang-jae also developed the idea that all things are equal in that all things are made of qi and the cycle repeats the cycle through the extraction of qi. And Seo Kyung-duk expanded such thinking and moved on to practice in reality. Third, Ki philosophy enables a change in the perception that poop is dirty, and based on this, draws out the unity of all things. The idea of &#8203;&#8203;Zhuang-tzu and Jang-jae that all things are one, and the idea that the order of Qi is reduced to the order of numbers and the order of numbers is reduced to the order of sound, and is the story of Seo Kyung-deok, who dreamed of a world of dialogue and harmony in harmony with nature. All thoughts make such a transformation of perception possible. If the ‘feces Standard Money’ project aims to solve problems such as income inequality, human alienation, generational conflict, and educational gap according to grades and degrees in modern society, then based on this thinking, the separation of human to human and human to nature is It should be possible to change to a worldview of sympathy and communication, which is not a struggle, but a feeling of empathy and communication.

氣철학 확립한 화담 서경덕의 사상과 문학|동아일보

氣철학 확립한 화담 서경덕의 사상과 문학|동아일보

氣철학 확립한 화담 서경덕의 사상과 문학
김상운 기자
입력 2016-05-27

 
고전번역원 28일 학술대회조선 성리학계의 이단아 화담(花潭) 서경덕(1489∼1546)의 사상을 조명하는 학술회의가 열린다.

한국고전번역원(원장 이명학)은 ‘화담 서경덕의 사상과 문학’ 학술대회를 28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에서 개최한다. 화담은 독특한 기(氣) 철학과 자연법칙 연구로 조선시대 사상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최일범 성균관대 교수가 ‘화담 서경덕의 성리학과 역학사상’ 주제발표를 통해 화담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철학적 의미를 고찰한다. 이어 전호근 경희대 교수가 화담의 격물(格物) 이론과 기 철학을 분석한다.


최유진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은 ‘후대 문학에 영향을 미친 화담의 시학적 코드’에서 화담에 대한 후대의 형상화와 시학적 의미를 다양한 차원에서 재조명한다. 권순긍 세명대 교수는 화담의 도술(道術) 일화가 당대에 어떤 함의를 갖고 있었는지 소개한다. 김형찬 고려대 교수가 좌장을 맡은 종합토론에는 김시천 인천대 교수와 김형술 서울대 교수, 장경남 숭실대 교수 등이 패널로 참여한다.

이명학 한국고전번역원장은 “화담은 독특한 사상체계를 완성했지만 그동안 상응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며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그의 사상이 학계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독창적인 기철학의 길을 연 거인_ 서경덕

New Tab



독창적인 기철학의 길을 연 거인_ 서경덕
정정진 2017. 12. 24. 17:30





신분평등사상으로까지 연결된 독창적 기이론




이런 서경덕이었으니 조정에서 몇 차례 벼슬을 내렸다고 그가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으리라. 이런 생활 속에서 서경덕은 마침내 그의 학문적 사변과 철학적 사유를 정리해야 할 시기에 다다랐다. 쉰여섯 살에 들어 그의 병이 깊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리기' 등 논설 네 편을 지었다.




알다시피 이와 기는 성리학의 기초로 우주나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원리이다. 중국의 주자가, 우주는 어떤 원리인 '이'와 그 작용인 '기'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설파한 뒤 여러 학자들이 그 본질을 규명해왔는바, 서경덕은 이것을 무엇이라고 해명했는지 간단히 설명하면 그 내용은 이러하다.




형체가 없는 태허(太虛 : 우주생성 이전의 상태)를 선천(先天)이라고 하니 그것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으며 쥐면 비어 있고 잡으면 없으며 귀로 들을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 이 태허에는 곧 단 하나의 기가 있을 뿐인데 후천(後天)에는 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약동이 일어나며 동시에 개벽이 일어난다. 이 같은 동작이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 그렇게 시키는가? 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역시 제 스스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을 '이'(理)의 시(時)라고 한다.




이런 논리는 확실히 주자의 설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는 또 촛불이 타서 없어지는 것 같지만 그 기는 우주 안에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이 인간도 태어났다가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보이지 않는 속에서 우주 속에 그대로 있다고 했다(이것을 물질불변설이라고 부른다).




이런 그의 선, 후천설과 물질불변설 등을 두고 당시의 학자들, 곧 이황 같은 유학자들은 정통의 설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이에 그의 제자들은 서경덕의 학설이 주자의 이론과 다른 것은 중국의 주염계의 설에 따랐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철저하게 독창적이요 스스로 깨친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이론과 학설은 원효와 함께 우리나라 사상사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형이상학에 몰두했다고 해서 현실문제를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정의 일을 논하기도 하고 잘못된 현실에 늘 민감하게 반응했다. 서경덕과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무슨 다툴 일이 있으면 관가에 가지 않고 그를 찾아왔을 만큼 그가 현실 또는 민중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지함은 서경덕의 철학을 토대로 해 지은 '토정비결'을 민중들에게 주었고, 허균은 그의 사상을 키워 현실개혁을 부르짖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 민중들은 그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유학자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 그의 선, 후천사상과 '기' 속에 '이'가 내재해 있다는 설은 조선 후기의 신분평등사상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어쨌든 논설 네 편을 지어놓고 병이 더욱 깊어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칠월 칠석날, 병석에 누웠던 그는 제자들에게 그를 화담에 옮겨달라고 했고, 화담의 물로 씻고 돌아오자 곧 임종을 알리는 호흡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 제자가 "선생님, 지금 생각이 어떠십니까?" 하고 물으매 "살고 죽는 이치는 이미 안 지 오래다. 생각이 편안하다"라고 대답한 다음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이야기 인물한국사 1_ 이이화

2023/09/26

徐敬徳 (李氏朝鮮) - Wikipedia

徐敬徳 (李氏朝鮮) - Wikipedia

徐敬徳 (李氏朝鮮)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徐敬徳
各種表記
ハングル서경덕
漢字徐敬德
発音:ソ・ギョンドク
日本語読み:じょ けいとく
テンプレートを表示

徐 敬徳(ソ・ギョンドク、じょ けいとく、서경덕、1489年2月17日 - 1546年7月7日)は、李氏朝鮮中期の儒学家である。本貫は唐城徐氏[1]南陽徐氏の分籍[2])。字は可久。号は花潭、復斎。妓生黄真伊朴淵瀑布とともに、「松都(松京)三絶」と並び称される。

経歴[編集]

開城に生まれ、寒微(下層階級)の出身であるが早くから苦学し、1531年、科挙生員試に応じて合格し、1540年、大提学の金安国によって「遺逸の士」として推挙されたが、生涯仕官せず、弟子を育成した。北宋張横渠邵康節の学説の影響を受け、南宋朱子学の理元論に反対し、朝鮮で初めて気一元論の唯物論(無神論)的で弁証法的な哲学を打ち立てた。

作品[編集]

  • 花潭集(화담집)
  • 原理気(원이기)
  • 理気説(이기설)
  • 太虚説(태허설)
  • 鬼神死生論(귀신사생론)

弟子[編集]

脚注[編集]

  1. ^ 서경덕(徐敬德)”. 韓国民族文化大百科事典2023年1月12日閲覧。
  2. ^ “唐城 徐氏 (당성 서씨)”. 부천족보전문도서관. オリジナルの2022年11月30日時点におけるアーカイブ。

参考文献[編集]

서경덕(徐敬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경덕(徐敬德)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경덕 (徐敬德)
목차메뉴 접기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학문세계와 저서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화담집
유교
인물
조선전기 『화담집』을 저술한 학자.
이칭자가구(可久)호복재(復齋), 화담(花潭)시호문강(文康)
인물/전통 인물성별남성출생 연도1489년(성종 20)사망 연도1546년(명종 1)본관당성(唐城)더보기
접기/펼치기내용 요약음성 재생


서경덕은 조선전기 『화담집』을 저술한 학자이다. 1489년(성종 20)에 태어나 1546년(명종 1)에 사망했다. 1519년 현량과에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이후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했다. 이보다 기를 중시하는 독자적인 기일원론을 완성하여 주기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를 주장하여 불교의 인간생명 적멸론을 배격했다.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해지며, 박연폭포·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린다.
키워드황진이
박연폭포
송도삼절
원이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더보기
접기/펼치기정의
조선전기 『화담집』을 저술한 학자.

접기/펼치기개설


개성 출신.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 · 화담(花潭). 아버지는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이(理)보다 기(氣)를 중시하는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완성하여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접기/펼치기생애 및 활동사항


1502년(연산군 8) 『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인 일(日) · 월(月) 운행의 도수(度數)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하였다. 1506년 『대학』의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조를 읽다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리오!”라고 탄식하고,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여 두고는 날마다 힘써 궁구(窮究)하였다. 1507년(중종 2) 선교랑(宣敎郎) 이계종(李繼從)의 딸과 결혼하였다.

1519년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花潭)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1531년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

1544년 김안국(金安國) 등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러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다.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중종과 인종이 죽자 “임금의 상(喪)에 어찌 복(服)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자최삼월(齊衰三月)의 상복을 입었다. 황진이(黃眞伊)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해지며, 박연폭포(朴淵瀑布) ·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
접기/펼치기학문세계와 저서


서경덕은 송대의 주돈이(周敦頤) · 소옹(邵雍) 및 장재(張載)의 철학사상을 조화시켜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의 학설을 제창하였다. 서경덕은 「태허설(太虛說)」에서 우주공간에 충만하여 있는 원기(原氣)를 형이상학적인 대상으로 삼고, 그 기(氣)의 본질을 태허라 하였다. 그에 따르면 기의 본질인 태허는 맑고 형체가 없는 것으로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는 한정이 없고 그에 앞서서 아무런 시초도 없으며, 그 유래는 추궁할 수도 없다. 맑게 비어 있고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이 기의 근원이다.

또한 널리 가득 차 한계의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꽉 차 있어 비거나 빠진 데가 없으니 한 털끝만큼의 용납될 틈이 없다. 그렇지만 오히려 실재(實在)하니, 이것을 ‘무(無)’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하는 모든 것은 무한히 변화하는 기의 율동(律動)이다. 그리고 바람처럼 파도처럼 또 소나기처럼 밀리고 맥박 치는 생(生)과 구름처럼 물방울처럼 사라지는 멸(滅)의 본체는 부침하고 율동(律動)하는 태허기(太虛氣)의 고탕(鼓盪)이다.

따라서 서경덕의 기는 우주를 포함하고도 남는 무한량(無限量)한 것이며, 가득 차 있어 빈틈이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이다. 또한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만물을 생성할 수 있으므로, 그것 이외에 어떤 원인(原因)이나 그 무엇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기(氣)는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동은 하지만 기 그 자체는 소멸하지 않는다. 기가 한데로 모이면 하나의 물건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물건이 소멸한다. 이는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다시 물로 환원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서경덕은 “일편향촉(一片香燭)의 기라도 그것이 눈앞에 흩어지는 것을 보지만, 그 남은 기운은 마침내 흩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여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을 주장하였다. 이는 물리학에서 밝히고 있는 에너지 항존율(恒存律)과 같은 것이다.

이기설의 입장을 밝힘에 있어서 그는 “기 밖에 이가 없다. 이란 기의 주재(主宰)이다. 주재란 것은 밖에서 기를 주재하는 것이 아니요, 기의 움직임이 그러한 까닭에 정당성을 가리켜 이것을 주재라 한다. 이는 기보다 선행할 수 없다. 기는 본래 시작이 없는 것이니, 이도 본래 시작이 없는 것이다. 만일, 이가 기보다 선행한다고 하면 이것은 기에 시작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를 기 속에 포함시켜 둘로 보지 않는 기일원론을 주장하였다.

한편 서경덕은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함으로써 “만물은 모두가 잠시 기탁한 것 같으니, 떴다 가라앉았다 함도 일기(一氣) 가운데요, 구름 생길 때 그 자취를 보거니, 얼음 풀린 뒤 그 자취 찾아도 없더라. 낮과 밤은 밝았다 어두웠다 하지만, 원(元)과 정(貞)도 시작했다 또 끝났다 한다. 진실로 이러한 이를 밝게 안다면 장구치면서 우리 님을 보내오리다.”라고 하여 불교의 인간생명이 적멸(寂滅)한다는 주장을 배격하였다.

서경덕의 학문과 사상은 이황(李滉)이이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그 독창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며, 한국 기철학(氣哲學)의 학맥(學脈)을 형성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으며, 그의 사상적인 면모를 밝혀 주는 「원이기(原理氣)」 · 「이기설(理氣說)」 · 「태허설」 ·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의 대표적인 글을 수록하고 있다.
접기/펼치기상훈과 추모


1575년(선조 8)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85년 신도비가 세워졌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화담집(花潭集)』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더보기
접기/펼치기관련 항목
기일원론 유교 개념 우주만물이 기에 의해 생성되고 존재한다는 성리학이론.
서경 유교 문헌 5경의 하나로, 고대 중국의 정치를 기록한 유교경전.
태음력 과학기술 개념 달이 차고 기울어지는 현상을 기초로 하여 만든 달력. 음력.
대학 유교 문헌 유가의 근본 이념을 명확하고도 일관된 체계로 정립한 유교경전.
선교랑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종6품 상계(上階) 문신의 품계.
조광조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교리,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현량과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 중종 때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게 하여 대책만으로 시험한 제도.더보기

** 서경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경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경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서경덕
徐敬德
조선국 경기도 개성부 송도 태수
(朝鮮國 京畿道 開城府 松都 太守)
임기1542년 2월 18일 ~ 1546년 7월 7일
군주조선 중종 이역
조선 인종 이호
조선 명종 이환
섭정왕세자 이호
문정왕후 파평 윤씨

이름
별명자(字)는 가구(可久)
호(號)는 복재(復齋)·화담(花潭)
시호(諡號)는 문강(文康)
신상정보
출생일1489년 3월 18일/음력 2월 17일
출생지조선 경기도 개성부
사망일1546년 8월 13일/음력 7월 7일 (58세)
사망지조선 경기도 개성부에서 병사
국적조선
학력독학 후 1531년 생원시에 장원 급제
경력시인, 문장가, 유학자, 사상가
정당동인 잔존 후예 중 북인
본관당성
부모아버지 서호번(徐好蕃)
어머니 한씨 부인(韓氏 夫人)
배우자이씨 부인
자녀아들 서응기(徐應麒)
친인척이계종(장인)
종교유교(성리학)

서경덕(徐敬德, 1489년 3월 18일(음력 2월 17일)~1546년 8월 13일(음력 7월 7일))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주기파(主氣派)의 거유(巨儒)이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이다. 부친은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이다.[1]

스승없이 독학으로 사서육경을 연마했으며 정치에 관심을 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그의 특이한 독학 방법은 벽에 한자를 붙이고 그 한자와 세상과의 관계를 궁리하였다고 한다. 평생 여색을 멀리했는데, 개성 최고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는 그를 시험하고자 일부러 비가 오는 싸늘한 날에는 자신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였으나 서경덕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의 인품에 감격한 황진이는 그를 스승 겸 서신과 시문을 주고받는 사이로 남았다는 설이 있다. 스승없이 독학을 한 학자로도 유명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함께 개성의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평생을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을 즐기다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2] 붕당의 출현 이후 그의 제자들은 동인과 북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사후 명종 때 이준경 등의 추증 건의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었다가 거듭 추증되어 선조 때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우물에서 물을 마신 적이 있다. 다섯 살 즈음에 우물에 빠질 뻔 한 적이 있었고 3대째 독자였던 그를 애지중지 키우던 집안 어른들은 해마다 그 날을 기념하여 마을 잔치를 벌이고, 자신들의 입지를 다졌다.

출생과 가계[편집]

1489년 음력 2월 17일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무관인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서호번(徐好蕃)의 아들이며 어머니 보안한씨(保安韓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당성(唐城)으로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 또는 화담(花潭)이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풍덕군에 살았다. 증조부 서득부(徐得富)는 관직이 없었고, 할아버지 서순경(徐順卿)은 진용교위(進勇校尉) 부사용을 지냈다. 아버지 서호번이 개성에 사는 보인한씨에게 장가들면서 개성으로 이주했다 한다. 할아버지 서순경과 아버지 서호번은 하급무사로 그의 가계는 빈한한 가계였으나, 그가 학문적으로 성취를 하면서 가세를 일으켰다. 어머니 한씨가 공자(孔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그를 낳았다한다.

기억력이 뛰어났고, 일찍부터 말과 글을 누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터득해서 쓰기 시작하였다. 나이 7∼8세에 이르자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른의 말을 공경히 받들었다. 그 뒤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것이 전부였고, 스승 없이 스스로 학문 연구와 사색에 몰두하였다.

그는 영특하였으나 가계가 빈곤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14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유학 경전인 상서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2] 1502년(14세) ≪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인 일(日) 월(月) 운행의 도수(度數)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하였다.

청소년기[편집]

그가 상서를 공부할 때 서당의 훈장은 '선생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깊이 생각하여 15일 만에 알아내고 말았으니 너는 상서를 사색으로 깨우친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2] 한다. 또한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밭에 나가 푸성귀를 좀 뜯어오라고 하자, 그는 광주리의 반도 차지 않을 정도의 푸성귀만 가지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푸성기를 제대로 뜯지 못한 연유를 물었다.[2]

새가 땅에서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그 이유만을 생각하다가 그만 푸성귀 뜯는 일을 잊어버렸습니다.[2]

화담집 서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그의 엉뚱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향후 그가 전개해나가는 독특한 학문 수행 방법의 모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도 서산에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거나 비가 오는 것, 바람이 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해 깊이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해가 뜨고 지는 이유, 비가 오고 날이 맑은 것, 바람이 부는 이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 산 사람과 시체의 차이점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서적들을 찾아 연구, 규명하려 하였다.

18세 때 ≪대학≫의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조를 읽다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리오!”라고 탄식하고,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여 두고 날마다 궁구(窮究)하기를 힘썼다. 19세에 태안 이씨(泰安李氏) 선교랑(宣敎郎) 이계종(李繼從)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청년기[편집]

젊어서 적극적이던 학습 방법과 지나친 독서와 사색 탓으로 과로에 지쳐 다시는 책을 손에 잡을 수 없을 만큼 몸을 상했고, 이 때문에 21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1년여 동안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회복하는데 주력해야만 했다.[3] 수 년간 요양한 뒤 개성에 돌아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31세 때 조광조(趙光祖) 등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오관산(五冠山) 화담(花潭)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더욱 힘썼다. 그는 조광조 등이 실패할 것을 예견하였는데 기묘사화로 조광조김정 등은 몰락하게 된다.

그는 다시 병의 치료를 위해 1522년 속리산지리산 등의 명승지를 다니기도 했다. 이때 만난 조식(曺植), 성운(成運) 등 같은 당대의 학자들을 만나 교류하였고, 기행시(紀行詩)들을 남겼다.

학문 활동[편집]

은거와 학문 연구[편집]

그 뒤 학문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였으나 1531년(중종 26)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대과와 벼슬을 단념하고 더욱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그후 그는 부모의 상을 당하자 여막을 짓고 생활하며 3년을 지내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3년상이 통례였으나, 3년상이나 3년복을 하지 않고 1년복으로 끝내는 일도 허다하였다. 중종실록의 평에 의하면 그의 시묘살이는 세인들을 감복하였다 한다.

1543년(중종 38년)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다들 신왕의 즉위를 기뻐하였으나 서경덕만 홀로 새 왕의 수가 길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슬퍼하며 눈물흘리니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당시에 국상에도 3년상과 3년 상복을 입도록 되어 있었으나 당대의 선비들, 관료들은 상복을 입지 않고 다만 흰 갓과 백의를 3년 걸쳤다. 그러나 서경덕은 "임금의 상에 어찌 상복이 없어야 하겠느냐"며 자최(齊衰) 3월간 상복을 입었다. 신도비문에 의하면 중종의 3개월 상을 치루는 동안, 그는 병을 얻었다 한다.

1544년(인종 1년) 5월 1일 김안국(金安國) 등 일부 관료들과 성균관 유생들이 그를 학행으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러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김안국이언적 등은 그를 후릉참봉에 임명했고, 그는 한사코 부임하지 않아 그해 6월 6일 해임되었다.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중종과 인종이 죽자 “임금의 상(喪)에 어찌 복(服)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자최삼월(齊衰三月)의 복을 입었다.

동시대인인 중종 때의 조광조김정 등과 인종 때의 이언적 등이 현실정치에 적극 진출하여 문제해결을 하려고 한 반면 그는 이것을 모두 공리공담으로 보고 수신과 제가, 학문연구에 치중, 전념하였다.

그가 이처럼 은거생활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은 사회가 심한 혼란기에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사림과 훈척 세력의 대립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3] 관료와 지주 계급은 토지 겸병과 사치 행각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농민들은 계속해서 토지를 상실해갔다.[3] 그는 관직 출사나 속된 시류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대신 학문 연구와 교육으로 사회에 기여하리라 다짐하였다.

사회 불안과 학문적 성취[편집]

1545년(인종 2년) 7월 인종이 사망하자 자최 3년복을 입었다 한다.

중종 때 여러 번 조광조 일파나 온건파인 김안국 일파, 남곤 일파 등이 그를 여러 번 초빙하려 하였지만 그는 나보다 덕망높은 인재들이 많은데 어찌 내가 나가느냐며 모두 거절한다. 혼란한 사회의 사회적 불안은 그를 결코 불행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회에 나가지 않고 은둔을 고집한 덕분에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학문 수행의 결과물인 화담집 같은 저작들은 후대 조선의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4]

게다가 만년에 천하의 명기이자 시인인 황진이와 함께 자연을 향유하면서도 선비로서의 인격을 잃지 않는 고고한 학자로써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4] 사람들은 그와 황진이박연폭포를 일러 송도삼절이라 이름 부르기도 했다.[4]

그는 조선의 많은 성리학자나 양명학실학 등 유학자들을 통틀어 스승이 없는 몇안되는 특이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그는 겨우 서당에서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4] 그의 스승은 자연과 책 뿐이었다. 그 때문에 서경덕은 기존의 유학자들과는 달리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4]

생애 후반[편집]

말년[편집]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는데, 이 책에서 '원이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등의 글을 통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밝혔다. 만년에는 황진이, 대곡 성운 등 소수의 인물들과 교류하며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또한 허엽 등 소수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구술하여 기록하게 했다. 또한 조선 각지의 명승지 등을 다니며 경치를 구경하며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조선 중종, 명종 때의 최고의 기생 황진이는 당대의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5] 하지만 그녀는 서경덕을 유혹하는 데는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한다.[5]

그의 문인으로는 허엽박순(朴淳), 민순(閔純), 박민헌(朴民獻), 고경허(高景虛), 신응시(辛應時), 황진이 등이 배출되었다. 문인의 한사람인 신응시(辛應時)는 후일 '‘오관산 아래 화담 위에 대그릇 / 밥 한 평생 가난을 즐겼네. / 오도가 떨어지지 않아 선각이 되었는데 / 성대에 불행히 일민으로 마쳤네 / 고도 당시에 고사를 흠앙하였더니 / 오늘 지하에 덕인을 매장하였네 / 유명에 알려 그 포증 두루하니 / 아! 백골에도 성은이 젖었어라.' 하며 그를 추모하는 시를 한수 남겼다.

최후[편집]

인종 즉위 후 이언적은 그를 초빙하려 하였지만 사양하였다. 오히려 그는 인종의 수명이 짧음을 예언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니 이언적 등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이언적 등이 다시 그를 조정에 출사하여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서경덕은 자신보다 유능한 인재가 많을 것이라며 이를 거절하였다.

1546년(명종 1년) 개성에서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사후[편집]

명종 때 이준경 등에 의해 여러 번 증직 건의가 있었으며, 6품 이상의 실직을 역임하지 않았다 하여 3품 이상의 직책에 증직을 청하는 부탁은 거절되었다. 그러나 실록은 이준경이 3품 증직을 거절한 것처럼 비방이 가해지기도 했다. 1567년(명종 22년) 2월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었다.

그 뒤 선조 때인 1575년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좌의정에 추서되었다. 그 뒤 문묘 종사 후보자로 올랐으나 도학 사상도 일부 가미되어있다 하여 거절되었다. 허엽 등이 꾸준히 서경덕의 문묘 종사를 상소하자 선조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우의정도 과한데 정몽주와 같은 자리에 놓을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1585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지고, 개성의 숭양서원, 화곡서원 등지에 제향되었다.

그의 문하생들은 대체로 붕당 출현 이후 허엽박순 등을 따라 동인이 되었다가, 동인의 남북 분당 이후 북인이 되었고, 북인이 1623년(광해군 15) 인조 반정으로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하면서 그의 사상은 평가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맥 중 일부는 남인으로 계승되었다. 제자인 민순(閔純)의 문인은 윤효전과 한백겸 등인데, 윤효전으로 그는 백호 윤휴의 아버지였다. 또다른 제자는 박지화의 문인인 허교(許喬)로 그는 허목의 아버지였다.

저서[편집]

  • 화담집 (花潭集)》
    • 〈섹알기 (穡戞基)〉
    • 〈원이기 (原理氣)〉
    • 〈이기설 (理氣說)〉
    • 〈태허설 (太虛說)〉
    • 〈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사상과 신념[편집]

실천 중심론[편집]

그는 실천과 직접 연구, 탐구를 통해 진리를 알아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진리는 누군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찾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선생이 18세가 되었을 때 대학의 '격물치지' 장을 읽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학문을 하는데 먼저 격물을 하지 않는다면 책은 읽어서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 뒤부터는 세상의 모든 사물들의 이름을 다 쓰더니 풀을 발라 벽에 붙여놓고 날마다 그것을 하나 하나 규명해내는 것을 일로 삼았다.[3]"

이 기록은 그가 얼마나 실험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그가 평생을 두고 일구었던 물론적 주기철학의 방법론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3]

생사일여론[편집]

그는 기와 이가 둘이 아닌 하나이며 기가 곧 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사람이나 생명이 살아있을 때는 기가 있고 죽었을 때는 그 기가 빠져나가는 것이며, 다만 육체에서 기가 빠져나갔지만 기는 소멸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의 학문적 요체는 끊임없는 사색에 있었다. 그는 물질의 힘이 영원하다고 믿었으며, 물질의 분리는 단순히 형체의 분리이지 힘의 분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4] 그것은 곧 서구의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비교되고 있다.[4] 그는 심지어 죽음 조차도 생물에게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던 기(에너지)가 우주의 기에 환원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주장함으로써 우주와 인간, 우주와 만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이론을 정립시켰던 것이다.[4] 그의 이 같은 독특한 학문과 사상은 이황과 이이 같은 학자들에 의해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조선 기 철학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4]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기 철학자인 최한기는 그의 학문을 사숙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 조부 : 서순경(徐順卿)
  • 아버지 : 서호번(徐好蕃)
  • 어머니 : 보안한씨(保安韓氏)
    • 동생 : 서숭덕(徐崇德)
  • 부인 : 태안이씨(泰安李氏, 이계종의 딸(? - 1561년 1월 7일)
    • 아들 : 서응가(徐應暇)
    • 아들 : 서응기(徐應麒)
      • 손자 : 서우신(徐佑申)
      • 손녀 : 당성 서씨
      • 손녀사위: 임련(任鍊)
      • 손녀 : 당성 서씨
      • 손녀사위: 이응조(李應祚)
      • 손녀 : 당성 서씨
      • 손녀 : 당성 서씨
    • 딸 : 당성 서씨
    • 사위 : 유경담(柳景湛)
      • 외손자 : 유익(柳益)
      • 외손녀 : 유씨
      • 외손녀사위 : 윤복(尹福)
      • 외손녀 : 유씨
      • 외손녀사위 : 강호선(康好善)
  • 첩 : 이름 미상
    • 서자 : 서응봉(徐應鳳)
      • 서손자 : 서춘학(徐春鶴)
      • 서손자 : 서운학(徐雲鶴)
    • 서자 : 서응구(徐應龜)

평가[편집]

만물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자로서의 업적을 남겼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우리역사의 수수께끼》에서 서경덕의 이론 중 이기설(理氣說)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받기도 한다고 말한다. 황진이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유명하다.

시인으로도 활동하여 그는 '조용하고 온화한 것을 즐기므로 많은 사람들이 사모했었고, 지은 시도 자유롭고 안서(安舒)하여 강절(康節)의 기풍이 있었다 한다.'는 평이 있다.

기타[편집]

유교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고 도교적인 사상도 일부 받아들였다. 이때문에 일부에서는 그를 이단이라며 공격하기도 했다.

한때 김종직의 문인이며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낸 이기(李芑)가 그를 찾아와 학문을 논하였으나 그는 이기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았고, 화가 난 이기는 대놓고 노기를 드러냈다고도 한다.[6]

관련야사[편집]

전우치가 서화담에게 도술을 도전하러 가다가 서화담의 집 근처에서 헤매다가 포기했다는 야사가 있다.

서경덕의 제자들[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경덕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각주[편집]

  1.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2. ↑ 이동: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94페이지
  3. ↑ 이동: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95페이지
  4. ↑ 이동: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96페이지
  5. ↑ 이동: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98페이지
  6.  명종 13권, 7년(1552 임자 / 명 가정(嘉靖) 31년) 4월 28일(경진) 4번째기사 "영부사 이기의 졸기"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