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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2

백승종 장일순

백승종

21 February 2021
무위당 장일순, 물질 만능의 세태를 질타하다

장일순(1928~1994)은 평생 단 한 권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언어도단(言語道斷) 곧, 말로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동서양의 종교와 고전에 두루 해박하였고 특히 노자(老子)를 믿고 따랐다.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노자의 이 말씀 따라서 그는 입을 다문 것이 아니었을까.
당호 ‘무위당(无爲堂)’이 상징하듯, 그는 돈과 명예와 지위를 얻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때인가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두문불출하고 살다시피 한 사람이다 보니, 뭐라고 붙일 딱지가 없어요.” 
실은 일평생 그가 종사한 일이 여럿이었다. 약자를 구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그였다. 평화와 정의의 세상을 만들고자 그가 노심초사한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던 재사였다. 
장일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려우나, 굳이 말하면 ‘생명사상가’요 20세기 이 땅을 대표하는 ‘양심적 지성’이었다고 말해도 좋겠다. 식자들은 그의 사상을 요약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세 가지를 하나로 보았다고 말하곤 한다. 
장일순의 가장 큰 매력은 언행일치에 있었다. 사소한 일상사부터 어렵고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장일순은 언제나 함께 일하고, 더불어 나누며, 서로를 극진히 모시며 살고자 했다. 그는 세속(朝市)에 숨은 ‘대은(大隱)’이요, 난세의 ‘대현(大賢)’이었다. 

교육사업과 민주화운동을 넘어 

일제 말 그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했다. 그런데 해방 직후 점령군인 일개 미군 대령을 서울대학교 총장에 임명한다는 내용의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이 나왔다. 장일순은 이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제적되었다. 6ㆍ25전쟁 직후에는 도산 안창호의 구국정신을 본받아, 고향 원주에 ‘대성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때아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교육자 장일순의 삶을 망가뜨렸다. 군부는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그를 3년간이나 옥에 가두었다. 평소 장일순은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중립화’론을 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형기를 마친 장일순은 1963년 대성학원 이사장직에 복귀하였는데, 이번에는 독재정권이 추진하던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에 걸려 사회활동이 금지되었다. 
정권의 엄혹한 감시 아래서도 그는,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1968년에는 고향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또 1971년 10월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함께 독재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며 가두 시위를 벌였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흥기를 알리는 횃불이었다. 
그 2년 뒤에는 홍수로 재난을 입은 강원도민을 구제하고자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조직했다. 또 ‘민청학련사건’의 구속자 석방을 위해 국제사회의 연대를 꾀했다. 장일순은 민주화운동의 숨은 대부였다. 

생명 사상으로 

그의 삶에 일대전환이 일어난 것은 1977년이었다.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 되겠다.” 그는 일체의 사회운동을 공생의 원리에 따른 ‘생명운동’으로 전환했다. 1983년에 그는 농촌과 도시의 직거래를 위한 ‘한살림’이 출범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 그는 생명 사상의 원류였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의 기념비를 원주에 세웠다.
말년의 장일순은 생명사상을 주제로 숱한 강연회를 열었다. 노자에 정통했던 그였기에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도덕경’을 풀이했다. 이현주 목사는 그 내용을 정리해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를 펴냈다. 이 책이 나오고 몇 달 지난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장일순은 영영 눈을 감았다. 
돈에 환장한 세상! 
“지구 전체가 지금 온통 장삿속으로 돌고 있어요.” 장일순은 어느 강연에서 세태를 그렇게 비판했다. “돈이 기준이 돼 있는 세상이니까, 사람이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데 적당한가, 알맞나 이러한 문제는 얘기도 안 되는 거라.”
“내 자식이 꼭 일등 해야 되고, 요놈이 꼭 출세해야 되고, 요놈이 꼭 돈 많이 모아야 되고. 그러니까 공해가 올 수밖에 없잖아요. 일등만이 가치 있고, 나머지는 무시되는 이건 엄청난 공해입니다.” 
과학을 비롯한 일체의 학문이 인간의 오만과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장일순은 현대문명을 날카롭게 해부했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심지어는 우리까지도 사람 죽이는 무기를 생산하고 있어요. 그게 지금 이익이 제일 많아요. 전부 무기장사라고….” 
이런 사태는 종국적으로 “반(反)생명적이고, 반자연적이고, 반인간적”인 비극을 빚게 될 것이다. 한정된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고 말 것도 당연한 일이다. “도깨비도 이런 짓은 안 해요.” 장일순은 장차 현대문명과는 정반대되는 새 문명이 출현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밥 한 사발에 우주가 담겨 있다 
“일체 현상은 유기적 공존체(有機的共存體)요, 서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것이니, 개체와 전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하나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 (만물이)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이 말이에요.” 그렇다면 관계의 회복이 본질적인 과제로 부각될 터다. 우리가 지나친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생태계의 질서가 되살아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장일순은 어디서 이런 확신을 얻었을까.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서 감화된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해월 선생은 ‘밥 한 사발을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아느니라’,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밥 한 사발이 되려면, 많은 농부가 땀을 흘려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하나가 되어야만 밥 한 사발의 농사가 이뤄진다. 그러니까 그 밥 한 사발은 우주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생전에 장일순이 자주 언급했듯, 최시형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고 일렀다. 이때 하늘은 사람을 비롯해 곡식 한 알, 돌멩이나 버러지 하나까지도 포함한다. 모두가 하늘이며, 그 하늘이 서로를 극진히 위해야 평화도 정의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의 장일순 사상의 중심이다. 

노자의 삼보(三寶)를 실천하며 

우주 만물이 내 한 몸이라는 생각은 노자에게서도 발견된단다. 장일순은 그렇게 보았다. 하여, 그는 노자의 ‘삼보’를 실천하자고 주장했다. 그 첫째는 자애 곧 사랑이다. 어머니가 객지에 두고 온 자식 생각하듯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검약이다. “하늘과 땅과 만물의 도움으로 생긴 모든 물건을 알뜰하게 모시고, (쓰고)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자”고, 장일순은 주장했다. 물론 현대인의 삶은 이것과 거리가 멀다. 다들 빚 살림을 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나라도 가계도 부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더러 지하의 장일순은 과연 뭐라고 일갈할 것인가. 
셋째는 겸손이다. “큰 나무가 이렇게 되자면, 그 밑에 수많은 잔뿌리가 있어야 해요. 잔뿌리 없이 큰 나무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대(大)와 소(小)는 하느님 아버지의 차원에서 보면 같은 거라.” 장일순의 비유는 곧 생명과 진리의 본바탕에서 사물과 나의 관계를 세우자는 뜻이다. 
그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어지러워진 남북문제도 우리는 풀 수 있겠다. “주인인 우리가 미국이나 소련, 그리고 그네들 욕심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에 관계 없이, 남북이 스스로 내왕하고 우리 전통, 우리 살던 방식대로 살겠다고 했더라면 분단이 되었겠어요?”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처음부터 우리 현대사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주판을 잘못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털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장일순의 쩌렁한 목소리가 아직 귓전에 남아 있다.

출처: 백승종 , <선비와 함께 춤을>(사우, 2018)

==

백승종
23 April 2018
  · Pyeongtaek, South Korea  · 
생명운동가 장일순, 농촌 살리기 노력에 반독재 투쟁 앞장

장일순(張壹淳, 1928~1994, 호는 无爲堂)은 평생 단 한 권의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언어도단(言語道斷) 곧, 말로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동서양의 종교와 고전에 두루 해박하였다. 특히 노자(老子)를 믿고 따랐다.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노자의 이 말씀 따라서 그는 입을 다문 것이 아니었을까.
당호 ‘무위당(无爲堂)’이 상징하듯, 그는 돈과 명예와 지위를 얻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때인가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두문불출하고 살다시피 한 사람이다 보니, 뭐라고 붙일 딱지가 없어요.”
실은 일평생 그가 종사한 일은 한둘이 아니었다. 약자를 구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그였다. 평화와 정의의 세상을 만들고자 그가 노심초사한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던 재사였다.
장일순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굳이 말하면, ‘생명사상가’요, 20세기 이 땅을 대표하는 ‘양심적 지성’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식자들은 그의 사상을 요약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세 가지를 하나로 보았다고 말하곤 한다.
장일순의 가장 큰 매력은 언행일치에 있었다. 사소한 일상사부터 어렵고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장일순은 언제나 함께 일하고, 더불어 나누며, 서로를 극진히 모시며 살고자 했다. 그는 세속(朝市)에 숨은 ‘대은(大隱)’이요, 난세의 ‘대현(大賢)’이었다.

교육사업과 민주화운동을 넘어
일제 말 그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했다. 그런데 해방 직후 점령군인 미군의 일개 대령을 서울대학교 총장에 임명한다는 내용의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이 나왔다. 장일순은 이를 극력 반대했다가 제적되었다. 6ㆍ25전쟁 직후에는 도산 안창호의 구국정신을 본받아, 고향 원주에 ‘대성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때 아닌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교육자 장일순의 삶을 망가뜨렸다. 군부는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그를 3년간이나 옥에 가두었다. 평소 장일순은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중립화’론을 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형기를 마친 장일순은 1963년 대성학원 이사장직에 복귀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독재정권이 추진하던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다시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에 걸려 사회활동이 금지되었다.

정권의 엄혹한 감시 아래서도 그는,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1968년에는 고향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또 1971년 10월에는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함께 독재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흥기를 알리는 횃불이었다.
그 2년 뒤에는 홍수로 재난을 입은 강원도민을 구제하고자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조직했다. 또 ‘민청학련사건’의 구속자 석방을 위해 국제사회의 연대를 꾀했다. 장일순은 민주화운동의 숨은 대부였다.

생명사상으로

그의 삶에 일대전환이 일어난 것은 1977년이었다. “종래의 방향만으로는 안 되겠다.” 그는 일체의 사회운동을 공생의 원리에 따른 ‘생명운동’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1983년에는 농촌과 도시의 직거래를 위한 ‘한살림’이 출범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 그는 생명사상의 원류였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의 기념비를 원주에 세웠다.
말년의 장일순은 생명사상을 주제로 숱한 강연회를 열었다. 노자에 정통했던 그였기에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도덕경>>을 풀이했다. 이현주(1944-) 목사는 그것을 정리해서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를 펴냈다. 이 책이 나오고 몇 달 지난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장일순은 영영 눈을 감았다.

돈에 환장한 세상!

“지구 전체가 지금 온통 장삿속으로 돌고 있어요.” 장일순은 어느 강연에서 세태를 그렇게 비판했다. “돈이 기준이 돼있는 세상이니까, 사람이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데 적당한가, 알맞나 이러한 문제는 얘기도 안 되는 거라.”
“내 자식이 꼭 일등 해야 되고, 요놈이 꼭 출세해야 되고, 요놈이 꼭 돈 많이 모아야 되고. 그러니까 공해가 올 수밖에 없잖아요. 일등만이 가치 있고, 나머지는 무시되는 이건 엄청난 공해입니다.”
과학을 비롯한 일체의 학문이 인간의 오만과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장일순은 현대문명을 날카롭게 해부했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심지어는 우리까지도 사람 죽이는 무기를 생산하고 있어요. 그게 지금 이익이 제일 많아요. 전부 무기장사라고….”
이런 사태는 종국적으로 “반(反)생명적이고, 반자연적이고, 반인간적”인 비극을 빚게 될 것이다. 한정된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고 말 것도 당연한 일이다. “도깨비도 이런 짓은 안 해요.” 장일순은 장차 현대문명과는 정반대되는 새 문명이 출현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밥 한 사발에 우주가 담겨있다

“일체 현상은 유기적 공존체(有機的共存體)요, 서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것이니, 개체와 전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하나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 (만물이)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이 말이에요.” 그렇다면 관계의 회복이 본질적인 과제로 부각될 터다. 우리가 지나친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생태계의 질서가 되살아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장일순은 어디서 이런 확신을 얻었을까.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서 감화된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해월 선생은 ‘밥 한 사발을 알면, 세상만사를 다 아느니라’,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밥 한 사발이 되려면, 많은 농부가 땀을 흘려야 한다. 뿐만이 아니다. 하늘도 땅도 사람도 하나가 되어야만 밥 한 사발의 농사가 이뤄진다. 그러니까 그 밥 한 사발은 우주적인 만남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생전에 장일순이 자주 언급했듯, 최시형은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以天食天)”고 일렀다. 이때 하늘은 사람을 비롯해, 곡식 한 알, 돌멩이나 버러지 하나까지도 포함한다. 모두가 하늘이며, 그 하늘이 서로를 극진히 위해야 평화도 정의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것의 장일순 사상의 중심이다.

노자의 삼보(三寶)를 실천하며

우주만물이 내 한 몸이라는 생각은 노자에게서도 발견된단다. 장일순은 그렇게 보았다. 하여, 그는 노자의 ‘삼보’를 실천하자고 주장했다. 그 첫째는 자애 곧 사랑이다. 어머니가 객지에 두고 온 자식 생각하듯 서로 사랑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검약이다. “하늘과 땅과 만물의 도움으로 생긴 모든 물건을 알뜰하게 모시고, (쓰고)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자”고, 장일순은 주장했다. 물론 현대인의 삶은 이것과 거리가 멀다. 다들 빚 살림을 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나라도 가계도 부채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더러 지하의 장일순은 과연 뭐라고 일갈할 것인가.

셋째는 겸손이다. “큰 나무가 이렇게 되자면, 그 밑에 수많은 잔뿌리가 있어야 해요. 잔뿌리 없이 큰 나무가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대(大)와 소(小)는 하느님 아버지의 차원에서 보면 같은 거라.” 장일순의 비유는 곧 생명과 진리의 본 바탕에서 사물과 나의 관계를 세우자는 뜻이다.

그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난마처럼 어지러워진 남북문제도 우리는 풀 수 있겠다. “주인인 우리가 미국이나 소련, 그리고 그네들 욕심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남북이 스스로 내왕하고 우리 전통, 우리 살던 방식대로 살겠다고 했더라면 분단이 되었겠어요?”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처음부터 우리현대사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주판을 잘못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털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장일순의 쩌렁한 목소리가 손에 잡힐 듯하다.

* 이 글은 제 책, <선비와 함께 춤을>(사우, 2018)의 한 대목입니다. 장일순 선생에 대한 여러분의 관심과 애정에 고개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백승종 拜



[Sejin님의 서재] 백승종 책

[Sejin님의 서재] 백승종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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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 / 2000년 6월
  • ---
  • [eBook]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그들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2012년 11월
  • [eBook] 조선의 아버지들-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진정한 아버지 다움 / 2016년 11월
  • [eBook] 세종의 선택- 사람을 살찌우고, 인재를 발탁하고,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 / 2021년 7월   
  • [eBook] 중용, 조선을 바꾼 한 권의 책 / 2019년 9월
  • [eBook] 선비와 함께 춤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선비 정신을 찾아서 / 2018년 5월
  • [eBook] 신사와 선비- 오늘의 동양과 서양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사우 / 2018년 7월
  • ---
  • 생태주의 역사강의- 근대와 국가를 다시 묻는다/ 2017년 5월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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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 추억>는
한국전쟁 이후 56, 57년에 북한으로 파견된 동독 건축가 레셀의 사진 모음집





2022/05/24

[그룬트비의 평민교육사상 정해진 학위논문

RISS 검색 - 학위논문 상세보기



그룬트비의 평민교육사상
한글로보기


http://www.riss.kr/link?id=T13835365
저자


정해진
발행사항


서울 :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5
학위논문사항


學位論文(博士)-- 高麗大學校 大學院 : 敎育學科 2015. 8
발행연도


2015
작성언어


한국어
주제어


그룬트비 ; 평민교육 ; 삶을 위한 교육
발행국(도시)


서울
형태사항


ii, 108 p. ; 26 cm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姜善甫
참고문헌: p. 96-108
소장기관
고려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세종학술정보원
국립중앙도서관


376상세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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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s://dcollection.korea.ac.kr/public_resource/pdf/000000060729_20220524002301.pdf

국문 초록 (Abstract)

    부가정보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이 연구는 18세기~19세기에 형성된 국가차원의 근대적, 계몽주의적 공교육을 비판하고, 평민의 삶 자체를 교육의 기초로 삼을 것을 주장한 덴마크 사상가 그룬트비의 평민교육사상을 소개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교육에 주는 시사점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그룬트비 교육사상의 중심이 되는 “평민” 개념을 다각도로 조망하여 그 의미를 도출하고, “평민적 가치”와 교육의 연관성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평민교육사상의 원리를 다섯 가지로 도출하였다.
    그룬트비의 평민교육사상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개념인 “평민”, 그리고 “평민적 가치”와 관련된 개념들은 그룬트비가 추구하는 “삶을 위한 교육”의 중심을 이룬다. 평민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인간정신의 대표적 표현인 모국어와 민족적 삶의 양식을 유지하며, 나아가 그것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평민교육의 목적은 평민적 삶을 교육의 바탕으로 삼아, 한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있는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삶과 더불어 타인의 삶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적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로운 가운데 공공선을 추구하고. 더 이상적인 공동체적 삶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룬트비는 더 나은 사회는 삶을 통해 계몽된 사회구성원 개개인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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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Ⅰ. 서론 1
    1. 연구의 목적과 필요성 1
    2. 연구의 내용과 방법 7

    Ⅱ. 평민개념의 이해 12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평민의 계층적 의미 13
    2. 이념적 맥락에서 본 평민의 존재적 의미 17

    Ⅲ. 평민교육사상의 등장배경 22
    1. 계몽주의 22
    2. 신인문주의 27
    3. 근대화와 평민교육의 요청 34
    1) 정치적 혁명과 평민 34
    2) 경제적 혁명과 평민 41

    Ⅳ. 평민교육사상 48
    1. 계몽주의적?근대적 교육에 대한 비판 48
    2. 평민교육의 이념 52
    1) 평민교육의 목적 52
    2) 평민교육의 인간상 57
    (1) 정신적 계몽을 통한 도덕적 자유인 57
    (2) 일상의 노동을 통한 독립적 생활인 60
    (3) 공동체적 가치관을 기반으로 더불어 사는 인간 63
    3. 평민교육의 원리 66
    1) 평민적 가치와 문화에 기초한 교육 66
    2) 살아있는 말을 통한 교육 70
    3) 삶의 계몽을 위한 실제적 교육 77
    4) 살아있는 상호작용을 통한 교육 81
    5) 평민계몽을 위한 공동체 교육 84

    Ⅴ. 요약과 결론 90
    1. 요약 90
    2. 결론 92
    참고문헌 96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논문관계도

    1 유재천, "민중",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4

    2 박현채, "민족경제론", 서울: 한길사, 1978

    3 허경진, "조선평민열전", 서울: 알마, 2014

    4 이동수, "시민은 누구인가", 인간사랑, 고양: 인간사랑, 2013

    5 김성오, "“그룬트비 읽기”", 「처음처럼」. 36. 66-83, 2003

    6 백승종, "그 나라의 역사와 말", 서울: 궁리, 2002

    7 신창호, "톨스토이 서민교육론", 서울: 도서출판 써네스트, 2011

    8 김정훈, 유팔무, "시민사회와 시민운동2", 서울: 한울, 2002

    9 정창렬, "“백성ㆍ평민ㆍ민중”", 「역사비평」. 74. 277-278, 2006

    10 송순재, "“덴마크의 자유교육”", 監理敎神學大學, 송순재 외 편. 위대한 평민을 기르는 덴 마크의 자유교육 . 서울: 민들레. 17-65, 2010

    11 고병헌, "교사, 대안의 길을 묻다", 서울: 이매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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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7

백승종 |조천호의 [파란하늘 빨간지구 - 기후변화와 인류세, 지구시스템에 관한 통합적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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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조천호의 <<파란하늘 빨간지구 - 기후변화와 인류세, 지구시스템에 관한 통합적 논의>>(동아시아, 2019)

미세 먼지 자욱한 하늘을 보며 우리는 한탄합니다. 파란 하늘이 그립다고요. 지구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지요. 기후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날로 높아가고 있습니다. 마침 국립기상과학원 초대 원장을 지낸 조천호 선생이 시의 적절한 책을 냈습니다. <<파란하늘 빨간지구>>인데요.
이 책을 읽어보니, 과연 전문가다운 분석이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요. 한 구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우리는 인류 문명이 인간 지성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하는 오만을 저지르고 있지만, 지구 역사를 보면 이 역시 좋은 기후 조건을 만난 덕에 일어난 우연한 사건일 뿐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수억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화석연료를 태워 오늘날의 번영을 이뤘다. 하지만 이 번영은 과거 7,000년에 걸친 문명을 지탱해왔던 안정된 기후를 붕괴시킬 정도로 위협이 되고 있다. 이제 인류는 자연적인 기후변동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되었다.”
그랬었군요. 인간 문명의 발달은 기후가 좋은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이네요. 그럼 기후가 나빠지면 어떻게 된다는 말씀인가요? 당연히 망하고야 만다는 것이겠지요. 실제로 저위도 지방 곧 우리보다 위도가 낮은 지역에 사는 이들은 이미 기후변화로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폭염, 쓰나미, 화산 폭발, 지진이 떠오릅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같은 분들은 인간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주장하고 있죠. 그래서 미국은 한때 파리 기후 협약에서 탈퇴한 거고요. 무책임한 초국적 기업가들은 아직도 현대 문명이 양산한 이산화탄소의 유해성을 부정하는 입장입니다. 그럼 과학적 사실은 어떨까요?
“IPCC 보고서의 새로운 판이 발간될 때마다 인간이 기후변화를 일으켰다는 증거가 분명하다는 견해에 힘이 더 실리고 있다. 1차 보고서(1990년)에서는 인간 활동을 기후변화의 원인으로 확신하지 않았으나 2차 보고서(1995년)에서는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로 언급했으며, 3차 보고서(2001년)에서는 인간의 책임이 66퍼센트 이상이라고 밝혔다. 4차 보고서(2007년)에서는 인간 활동이 기후변화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이라 했다. 5차 보고서(2013년)에서는 인위적인 영향이 20세기 중반 이후 관측된 온난화의 주된 원인일 가능성이 95퍼센트 이상이라고 확신의 수위를 높였다.”
으음, 현대에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 이게 모두 인간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온난화의 95퍼센트 이상이 인간 활동의 결과라는 결론입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잘 알아야겠어요. 만약 미국을 비롯한 이른바 제1세계의 시민들이 이런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더욱더 큰 재앙이 곧 오고야말겠지요. 
지금도 이미 늦은 감이 없있으나, 이제부터라도 “인간 활동”에 적극적인 변화를 일으켜야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저자 조천호 선생은 ‘쿠울’한 과학자인데, 그의 글을 읽노라면 기후위기에 맞서 뭔가 자그만 행동이라도 실천해야겠다는 각오가 생깁니다. 참 좋은 책입니다!

백승종 | 김근수 선생의 [로마서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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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4 h  · 
김근수 선생의 <<로마서 주석>>(꽃자리, 2022)


오늘은 부활절이다(2022. 4. 17).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런저런 세상사를 걱정하다가 김 선생님의 신간인 이 책을 떠올렸다.

알다시피 바울의 <로마서>를 칭찬하는 사람은 많으나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적다. 나도 바울의 글을 여러 차례 읽어보았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회를 거듭해 읽을수록 바울이란 사람이 미워지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내 마음에는 마땅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김 선생님의 <<로마서 주석>>은 바울과 나를 화해시키기에 족한 책이다. 아니, 나의 부족함을 일깨우는 양서이다. 이 책은 출발부터가 그동안 내가 읽은 책들과는 다르다. 저자는 신학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나와 같은 역사가의 궁금증을 달래준다. 김근수 선생은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은 로마 공동체에서 돈과 사람을 지원받고 싶었다. 바울은 예루살렘 공동체뿐만 아니라 로마 공동체에 자신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고 호의를 얻고 싶어 로마서를 썼다.” 

그랬었구나. 이것이 바로 바울의 저술 목적이었다! 외롭기 짝이 없었던 바울, 그는 로마서를 집필함으로써 난국을 헤쳐나가고 싶었다는 것인데, 과연 그의 목적은 달성되었을까. 아니란다. 로마서를 다 쓴 다음 바울은 원고 뭉치를 들고 동지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러나 바울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고 말았다. 바울은 그의 소망과는 달리 예루살렘에서도 로마에서도 공동체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그리고자 한 예수의 모습은 무엇일까. 누구라도 대개 짐작하는 바이지만, 바울과 동시대를 살았던 신자들은 예수가 왜 십자가에 매달려 숨졌다가 부활하였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바울은 사람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김근수 선생님의 설명을 따라가노라면, 평소 내가 제대로 보지 못한 그림이 점차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김 선생님은 <<로마서 주석>>에서 바울이 하느님 나라는 물론이고 가난한 사람들에 관하여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독일 성서학자들을 비롯해 대다수 성경 연구자들은 바로 그 점을 놓쳤다. 그들은 성경을 문헌학적으로 철저히 연구하고 있으나,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예수와 바울의 관심을 크게 부각하지는 않는다. 로마서가 피와 눈물로 가득한 역사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 챈 것은 남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이었다. 김 선생님은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바울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이점이 <<로마서 주석>>의 백미(白眉)라고 생각한다. 부활절 아침에 김 선생님을 떠올리며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약한 사람을 배려하라는 바울의 뜻은 못들은 체하며 술담배나 고기 먹지 말자고 우기는 사람은 달은 못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사람이다. 술담배 안한다고 거룩하거나 믿음이 강한 사람은 아니고, 술담배 한다고 거룩하지 않거나 믿음이 약한 사람인 것이 전혀 아니다.”

“서로 다른 생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을 예수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대할 것인가. ... 바울은 두 가지 가르침을 우리에게 남겼다. 먼저, 서로 판단하지 말라. 그리고, 깨끗함과 깨끗하지 않음은 물건이나 사물 자체에 있지 않다. ... 바울은 약한 사람을 감싸고 강한 사람을 혼내는 입장을 택했다. 바울 자신이 강자에 속했지만, 바울은 강자를 비판하였다. ... 예수는 부자들을 수없이 사정없이 비판했지만, 단 한번도 가난한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잘못이나 약점을 예수가 왜 몰랐겠는가. ... 예수의 말과 행동에서 보이는 놀라운 신비 중 하나다. 예수가 보여준 놀라운 신비의 길을 바울도 따라 걷고 있다.”

백승종 과거로 예측하는 미래 국제사회의 향방

 

과거로 예측하는 미래 국제사회의 향방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을 계기로 유럽 여러 나라가 재무장을 서두릅니다. 영국도, 독일도, 폴랜드도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합니다.
불행중 다행이라면 우크라이나가 잘 싸워주고 있다는 점이지요. 압도적인 러시아의 군사적 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크라이나는 끝까지 버틸 대세입니다. 그 덕분에 과거 소비에트에 강제 통합되었던 여러 나라들이 일시에 쓰러지는 '도미노 현상'을 피할 수 있을 듯합니다.
---
<경상일보>(2022. 3.10)가 제 책 <<제국의 시대>>를 비롯한 몇 권의 신간 서적에 주목하였습니다. 역사란 거울을 통해서 험란한 미래를 개척해 나갈 빛을 찾아보자는 뜻인 것 같습니다. 새 책에서 저는 이런 말을 하였고요, <경상일보>의 기자님도 구 말에 주목해 주었습니다.
“기후위기와 팬데믹, 그리고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세계 질서를 위협하는 지각 변동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난 70여년은 강대국이 정면 충돌하지 않아, 비교적 평화로운 편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아마 사정이 크게 달라질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점증하는 세기적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요. 역사책을 읽으며 곰곰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다음은 신문기사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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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시대
천년 영화의 로마제국, 너무나 짧았던 몽골의 영광, 성공과 실패를 반복한 독일, 엇갈린 운명의 100년 전 동아시아, 현재의 세계제국 소련·미국·중국까지 이 책은 아홉개 제국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사건과 인물을 추적한다.
인류의 역사에 영원한 제국은 없다. 도대체 무엇이 제국의 운명을 바꿔놓았을까. 시민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저자 백승종은 이같은 물음에 답하기 위해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제국사의 패턴을 포착하고,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흘러갈 지 전망한다.
그는 “기후위기와 팬데믹, 그리고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세계 질서를 위협하는 지각 변동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김영사. 백승종 지음.
출처 : 경상일보(http://www.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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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노자의 [도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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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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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덕경>>

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자신을 아는 자는 현명하다. 다른 사람을 이기는 자는 힘이 있고, 자신을 이기는 자는 그 뜻이 굳세다. 만족할 줄 아는 자는 부유하고, 힘써 행하는 자는 뜻이 있으며, 그 있을 근본의 자리를 잃지 않는 자는 오래 가고, 몸이 죽어도 잊히지 않는 자는 영원히 산다.
최근에 김영 교수님이 내신 책의 일절입니다. <<생태위기 시대에 노자 읽기>>(청아출판사, 2022)를 읽다 이 구절에서 제 마음이 멈추어 섰습니다. 표현은 간명해도 영원한 지혜가 깃든 말씀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의 핵심을 잘 알아듣고 역사적 경험을 오늘에 되살릴 줄 아는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정확히 아는 이는 현명한 사람이다.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평소에 실력을 쌓은 사람이며, 자신의 감정과 욕심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강한 사람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보다 더 큰 부자는 없고,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정진할 수 있는 것은 확고한 지향이 있기 때문이다. 항상 중심을 잃지 않고 근본 도리를 지키면 오래 유지될 수 있고, 죽어도 그 명성이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어 영원히 살 것이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다시 무슨 말을 또 덧붙일 수가 있겠어요. 이 책은 간명하여도 깊은 뜻을 행간에 간직한 보배입니다. 저자 김영 교수님은 글머리에서 책이 태어난 배경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요.
한문학을 공부해 온 한 학인이(자락학인 김영 선생님이죠!) 노자를 좋아해서 노자 텍스트를 수백 번 읽다가 터득한 문리文理를 바탕으로 노자를 간명하게 풀이하여 시민들이 노자를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안내서를 낸 것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노자를 잘 아시는 분도, 노자를 알고 싶기는 하여도 미처 잘 모르시는 분도 <<생태위기 시대에 노자 읽기>>를 벗 삼아 곁에 두고 자주 꺼내 읽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음용하는 술도 익어야 맛이 나는 법입니다. 하물며 고전을 다룬 책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수백 번 읽다가 저자가 터득한 문리를 간명한 문체에 싣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평생을 학인으로 자처하며 단순 소박하게 사시면서도 세상 불의를 만나면 호랑이처럼 포효하시는 김 선생님의 책이라서 더욱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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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kyu Park

좋은 책을 꼭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소개해 주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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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30

백승종 세종과· 권력 기구로 진화한 집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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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권력 기구로 진화한 집현전

세월이 흐를수록 세종은 집현전에 더더욱 큰 권한을 주었다. 학사들이 현실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게 허락한 것이었다. 왕은 그들을 언관(言官)으로 대우해, 대간(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조정의 잘잘못을 따지게 하였다. 집현전은 이제 학술기관인 동시에 권력기관으로 격상했다.
왕은 정치 권력을 여러 기관이 나눠 갖기를 바랐고, 그들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을 정치적 이상으로 여겼다. 다분히 성리학적 발상이었다. 그로 말미암아서 학사들은 언관으로서 왕의 잘못도 지적하고 대신의 월권과 독주를 막기에 힘썼다.
세종 28년(1446) 겨울,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 등은 사소한 일로 궁지에 몰린 대간을 두둔했다. 집현전 학사 10여 명이 집단으로 상소하기를, 대간의 처사가 비록 잘못되었을지라도 엄벌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로가 막히면 나중에 더욱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세종 28년 10월 10일). 왕은 이계전의 발언을 수용해 대간을 너그러이 용서하였다.
돌이켜보면 재위 10년쯤부터 세종은 제도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개혁의 후유증과 부작용을 심각하게 염려하였다. 재위 말기가 되면 왕은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왕은 집현전에 정책을 심의할 권한까지 주어, 새로운 제도와 정책의 문제점을 엄격히 분석 검토하게 하였다. 왕의 태도가 변화하자 집현전의 역할도 완전히 바뀌었다. 학사들이 제도 개혁을 반대하는 사례가 더욱더 많아졌다.
의정부가 사창법(춘궁기 빈민에게 곡식을 대여하는 법)을 세우려 했을 때도 그들은 강력히 반대하였다(세종 26년 7월 14일). 그 당시 의정부는 소금전매법(‘염법’)도 추진하였고, 왕 역시 그 문제에는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집현전은 단호히 이를 거부했다. 국가에서 소금을 제조 판매하면 백성의 생계가 어려워진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그때도 왕은 집현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소금전매법을 중도 폐기하였다(세종 27년 8월 27일). 이밖에도, 왕이 오랫동안 추진한 종이돈(‘저화’)의 부활도 집현전의 반대로 중단되었다(세종 27년 10월 11일).
집현전의 기능과 역할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갈수록 변화해, 마침내 세종의 재위 말년에는 집현전 학사들이 자신들을 길러준 왕과 대립하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세종으로서는 정말 어이없는 사태가 오고야 만 것이다.
세종 28년(1446) 봄, 왕은 작고한 왕비의 넋을 달래려고 불경을 간행하려고 했다. 그러자 집현전은 대간과 함께 반발하였다. 불교의 해독을 잘 아는 왕이 왜, 불경을 간행하느냐며 그들은 저항했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의지대로 불경 간행을 추진하였다. (세종 28년 3월 28일)
이태 뒤에는 더더욱 심각한 충돌이 일어났다. 세종이 대궐 안에 불당을 설치할 뜻을 밝히자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 등이 거세게 반대했다. 대신과 대간은 물론 승정원까지도 합세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정치적으로 큰 소용돌이가 일어났던 것인도 그때 세종은 물러서지 않았다.(세종 30년 7월 23일)
이 문제는 과연 어떻게 해결되었을까. 개혁정치가 조광조는 중종의 어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종은 정승 황희를 불러 이 문제를 상의하였습니다. 그러자 황희가 말하였습니다. ‘신이 그들을 다시 불러오겠습니다!’ 그러고는 즉시 학사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여 직무에 복귀하기를 종용하였습니다.”(중종 13년 2월 2일)
만약 세종 임금도 아니고 황희 정승도 아니었다면 어떠했을까. 왕은 자신이 아끼던 신하들이 배신했다고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요, 정승도 허리를 굽혀 학사들의 복귀를 간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조광조의 견해였다.
국시(國是)가 성리학이었던 만큼 신하들이 반대할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세종으로서는 왕실의 오랜 전통이자 자신의 신앙이기도 했을 불교를 포기하기 어려웠다. 세종은 공식적으로 불교를 신앙한다고 인정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불교관련 행사를 여러 번 개최한 것으로 보아 왕이 불교 신자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아무튼 내불당 사건은 황희라는 믿음직한 정승이 있어 다행히 큰 무리 없이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태 뒤 세종은 세상을 등졌고, 이후 30여년 동안에 조선이란 나라를 좌우한 것은 집현전 출신들이었다. 이름난 정승만도 정인지를 비롯하여 정창손, 신숙주, 최항과 이사철 등 여럿이었다. 유명한 사육신도 무관 유응부를 제외하면 모두 학사들이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세종 28년, 이계전이 현실 정치에 개입한 이후 집현전 학사들은 대관과 한 무리가 되어 갈수록 현실 정치에 깊숙이 끼어들었다. 이로써 언관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진 점은 역사적으로 보아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하지만,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한 본래 의도에서는 동떨어진 폐단이었다. 그때 왕자로서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던 훗날의 세조는 집현전의 독주를 심각하게 염려하였다. 훗날 세조는 왕위에 오르자 집현전 세력의 중심인 박팽년, 하위지, 성삼문, 이개, 유성원을 이른바 단종 복위 사건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아울러 권력기관이 되고만 집현전을 영구히 폐지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나라의 인재를 길러야한다는 요구가 빗발쳐, 성종 때가 되면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홍문관은 처음부터 언관으로 기능하면서 예전처럼 국책 연구기관 또는 자문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홍문관은 처음부터 언관의 하나가 되어 이른바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후 조선에서는 과거의 집현전처럼 국가의 개혁을 이끌고, 독창적인 학문적 연구를 담당하는 기관이 출현하지 못하였다. 조선왕조가 서서히 쇠망한 이유가 그 점에 있었다.
중종 때 개혁정치가 조광조는 세종 시대의 부활을 꿈꾸며 홍문관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현실에 구현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현실 정치에 매달렸다. 이런 사실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출처: 백승종, <<세종의 선택>>(사우, 2021)
사족: 문명사회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없을 수가 없는 것이나,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종이 훌륭한 까닭은요, 이것은 물론 제 생각입니다. 왕은 성리학 중심의 문명화를 꿈꾸었으나 그 자신이 모순적이었어요.
예컨대 개인적으로 불교 믿으면서 정치는 성리학적으로 되기를 꿈꾸었어요. 자기 자신은 며느리들을 마음대로 쫓아내면서도 신하들의 이혼은 끝끝내 반대하고 죄악시하였어요. 자신은 아내를 존중하였으나 사회적으로는 여성의 지위를 부정하였습니다. 청렴을 강조하였으나 왕의 주변에는 협잡꾼들이 들끓었어요.
바로 이러한 모순이 세종의 시대를 다채롭고 활기 넘치는 한 시대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일관성도 중요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몰아붙이면 도리어 세상이 경색되고, 창의성이 사라집니다. 조선 후기는 성리학 일색이 되어 모두가 경쟁적으로 도덕과 인륜이란 이념에 충실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결과는 그다지 좋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지금 왜, 하느냐고요? 수도권 집값 문제도 검찰개혁도 경제성장 또는 녹색 전환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소의 여유를 가지고 대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을 계획적으로 한꺼번에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를 바로잡으면 적어도 또 다른 두 개가 틀어질 수 있습니다. 조급하면 일을 망칩니다. 제 부족한 생각은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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