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남명 조식.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남명 조식. Show all posts

2023/10/21

알라딘: 조선의 유학자, 조식 남명 조식의 생애와 사상

알라딘: 조선의 유학자, 조식 남명 조식의 생애와 사상


다음


























Sales Point : 520

9.0 100자평(0)리뷰(2)
이 책 어때요?


기본정보
464쪽


책소개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조식의 생애와 학문을 조명한다. 조식은 1500년대 경상도 일대의 산림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했던 은자이자 학자이다. 성리학 이론보다는 실천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황과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당대의 학문적 위상이나 이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이황 이상이었다.

조식은 여남은 번 이상 벼슬을 제수 받았지만 단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간신들이 권력을 잡고 얼토당토않은 정치를 펼치는 때에 벼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에 상소를 올려 조정의 정치를 정면으로 추궁했다. 1555년 을묘년에 명종에게 올린 <을묘사직소)>에서는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다”고 썼고 수렴청정을 펼치는 문정왕후는 “깊은 궁중에서 살아온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썼다. 가을 서릿발이 칼날처럼 쏟아졌다. 이로써 유학자의 마땅함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올바른 유학자의 전형을 세웠다. 조선 대장부의 기개와 절조를 보여주었다.

흔히 조식의 학문을 ‘경의지학’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경은 유학자가 자신을 수양하는 방법론이고 의는 사회적 실천의 기준을 말한다. 과연 조식은 스스로를 수양할 때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듯 삼갔고, 불의와 맞설 때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책은 조식의 생애와 학문을 ‘찬찬히’ 따라간다. 저자인 한문학자 허권수는 조식에 대한 전기 기록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방대한 분량의 원전 자료를 섭렵했다. 조식이 살았던 경상도 삼가현, 김해부, 진주목 등지의 지리적 공간도 빠짐없이 살폈다. 또한 조식이 직접 쓴 필적을 비롯해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다채로운 도해를 소개한다. 조식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서 촬영한, 실감나는 사진도 함께 보여준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조선 유학자 조식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목차


서문 우리 시대의 남명 조식 읽기

1장 1501년, 삼가현 토동에서 태어나다
01 산처럼 큰 인물의 출현
02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문득
03 아버지 조언형의 억울한 죽음

2장 1530년, 김해부 탄동에 산해정을 짓다
04 산악처럼 우뚝하고 연못처럼 깊게
05 과거의 길, 효도의 길, 그리고 학문의 길
06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 학문의 경지
07 까마귀의 검은색은 빗물로 씻어낼 수 없고
08 암울한 죽음의 시대, 때를 만나지 못한 현사(賢士)들

3장 1548년, 계부당과 뇌룡사를 짓다
09 닭이 고니의 큰 알을 품듯
10 가혹할 만큼 엄격한 출사(出仕)의 기준
11 후학을 가르치는 기쁨, 현사(賢士)와 사귀는 즐거움

4장 1555년, 명종 임금에게 을묘사직소를 올리다
12 벼슬길로 나오라는 이황의 권유
13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죽음을 결심한 상소
14 온 나라를 흔들어 놓은 을묘사직소의 파장
15 해인사에서 만나자는 약속
16 지금은 벼슬할 만한 때가 아니니

5장 1558년, 벗들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다
17 어진 사람은 산을 사랑하고
18 지리산 유람에서 만난, 세 군자의 숨결

6장 1561년, 지리산 덕산동에 산천재를 짓다
19 벽에 ‘경(敬)’자와 ‘의(義)’자를 붙인 까닭
20 부지런한 농부들이 연둣빛 들로 나올 때
21 이기론보다 쇄소응대(灑掃應對)를 강조하는 학문
22 얼토당토않았던 권간(權奸)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7장 1568년, 선조 임금에게 무진봉사를 올리다
23 대장부의 출처(出處)는 태산처럼 묵직해야
24 서울로 올라가 명종 임금을 만나다
25 선조 임금에게 ‘구급(救急)’ 두 글자를 올리다
26 백성은 귀중하고 임금은 가벼우니
27 아전의 폐해를 지적한 상소, 무진봉사(戊辰封事)

8장 1572년, 처사로서의 삶을 마치다
28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없겠는가?
29 김굉필의 그림 병풍이 전해진 내력
30 죽고 사는 일은 평범한 이치이니
31 부침을 겪은 후인들의 추존 활동

붙임 성운(成運)이 쓴 남명선생묘갈
접기


책속에서


높고 깊은 산이었다.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남쪽의 큰산으로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큰산 밑에서 큰 인물이 나타난다는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지리산과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위대한 인물이 출현했다. 조선의 유학자, 조식(曺植)이다. ㅡ 1절 ‘산처럼 큰 인물의 출현’ 중에서
후대의 이익(李瀷)은 이황과 조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황은 소백산 아래에서 태어났고 조식은 지리산 동쪽에서 태어났는데 모두 경상도 땅이다. 경상좌도는 인(仁)을 숭상하고 경상우도는 의(義)를 주로 하여 유가가 기개와 절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바다가 광활하고 산이 우뚝한 것과 같았다. 이 이황과 조식에게서 우리 학문의 밝... 더보기
시냇가에 있는 집은 풀로 지붕을 이고서 집 이름은 뇌룡사(雷龍舍)라고 했다. 그 뜻은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가 용처럼 승천하고, 연못처럼 잠잠하다가 뇌성벽력이 치는 것처럼 한다”는 것이다. 곧 꾸준히 실력을 쌓아서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ㅡ 9절 ‘닭이 고니의 큰 알을 품듯’ 중에서
조식의 상소는 추상같이 준엄했다. 이 시대에 임금이라는 존재는 신성(神聖)과도 같아서 말 한마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임금과 임금 어머니의 잘못을 대놓고 지적하는 조식의 상소는 다른 벼슬아치나 선비들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ㅡ 14절 ‘온 나라를 흔들어 놓은 을묘사직소의 파장’ 중에서
조식은 늘 제자들에게 “장부의 처신은 태산처럼 중후해야 하고 마땅한 때가 이른 후에 자신의 경륜을 펼쳐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처신도 당연히 이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ㅡ 24절 ‘대장부의 출처(出處)는 태산처럼 묵직해야’ 중에서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허권수 (지은이)


남명학 연구의 1인자
우리나라 최고의 한문학자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 한문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또한 우리나라 남명학(南冥學) 연구의 1인자로 손꼽힌다. 30여 년 동안 경상대학교 교수로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2017년 정년퇴임했다. 남명학연구소 소장을 지내면서 남명학 연구 공간인 ‘남명학관’ 건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저서와 번역서 100여 권이 있다. 현재는 동방한학연구소를 열어 후학을 기르고 있다.

최근작 : <한문공부 60년>,<외재 정태진의 생애와 학문>,<조선의 유학자, 조식> … 총 34종 (모두보기)


알라딘: 남명 문집

알라딘: 남명 문집


남명 문집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문집
조식 (지은이),오이환 (옮긴이)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2012-01-20






정가
18,000원
판매가
17,100원 (5%, 900원 할인)
마일리지
900원(5%) + 멤버십(3~1%)
+ 5만원이상 구매시 2,000원
배송료
무료
수령예상일
지금 택배로 주문하면 10월 25일 출고
(중구 서소문로 89-31 기준) 지역변경
Sales Point : 59

0.0 100자평(0)리뷰(0)
이 책 어때요?
전자책
14,400원

카드/간편결제 할인
무이자 할부
소득공제 770원






수량










장바구니 담기
바로구매
선물하기
보관함 +


중고 등록알림 신청
중고로 팔기





182쪽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국내도서 > 고전 > 우리나라 옛글 > 산문


책소개
16세기 사림의 태두 남명 조식. 그의 글에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중시하는 그의 유학사상과 의(義)를 중시하는 선비정신, 당시 유학자들의 계보를 알 수 있는 그의 교우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결벽하면서도 정이 깊은 그의 인간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남명학의 전문가 오이환 교수가 조식의 핵심적 사상이 담긴 작품을 고르고 기존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목차


시 詩
칼자루에 적어 장원한 조원에게 줌 書劍柄贈趙狀元瑗 3
우연히 읊음 偶吟 4
산해정에서 주경유에 차운해 在山海亭次周景游韻 5
구암사에 부침 題龜巖寺 6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부침 題德山溪亭柱 7
삼족당이 유언으로 해마다 보내 주라 한 쌀을 사양함 辭三足堂遺命歲遣之粟 8
제목 없이 無題 10
느낀 바 있어 有感 11
명경대 明鏡臺 12
덕산에서 우연히 읊다 德山偶吟 13
멋대로 짓다 만成 14
냇물에 목욕하며 浴川 15
덕산에 집터 잡아 德山卜居 16
아들을 잃고 喪子 17
서쪽 집 늙은이에게 寄西舍翁 18
배를 노래함 詠梨 19
산해정에서 대학팔조가 뒤에 적어 정인홍 군에게 줌 在山海亭書大學八條歌後贈鄭君仁弘 20
동짓달에 읊다 地雷吟 21
제목 없이 無題 22

부 賦
발원 샘의 노래 原泉賦 25
백성이 바위라네 民巖賦 31

명 銘
좌우명 座右銘 41
검에 새김 佩劍銘 42
혁대에 새김 革帶銘 43
신명의 집 神明舍銘 45
말을 삼가라 愼言銘 47
쇠로 만든 사람 金人銘 49

편지 書
퇴계에게 답함 答退溪書 53
퇴계에게 與退溪書 55
전주 부윤에게 與全州府尹書 56
이원길 재상에게 답함 答李相國原吉書 58
청도 원님께 與淸道졸書 60
오 어사에게 與吳御史書 62
자강자정에게 與子强子精書 67
다시 又 72
성청송에게 답함 答成聽松書 74
오자강에게 與吳子强書 76
성대곡에게 與成大谷書 77
인백에게 답함 答仁伯書 79
김숙부 진사에게 사례함 奉謝金進士肅夫 81
다시 又 83
송파자에게 보임 示松坡子 84

기문 記
누추한 동네 陋巷記 89

발문 跋
한훤당의 그림 병풍 寒喧堂畵屛跋 95
규암이 보내 준 ≪대학≫ 책 꺼풀 안에다 씀 書圭庵所贈大學冊衣下 99
이 군(이 보내 준 ≪심경≫ 뒤에 적음 題李君所贈心經後 102
성중려가 보내 준 ≪동국사략≫ 뒤에 적음 題成中慮所贈東國史略後 104

비문 墓誌
중훈대부 시강원 보덕 증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조 공 묘명-서문과 아울러 中訓大夫侍講院輔德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趙公墓銘 幷序 107
돌아가신 아버지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 묘갈명-서문과 아울러 先考通訓大夫承文院判校墓碣銘 幷序 111
선무랑 호조좌랑 김 공 묘갈-서문과 아울러 宣務郞戶曹佐郞金公墓碣 幷序 115
처사 신 군 묘표 處士申君墓表 119
군자감 판관 이 군 묘갈-서문과 아울러 軍資監判官李君墓碣 幷序 122

상소 疏
을묘년 사직 소 乙卯辭職疏 127
정묘년에 사직해 승정원에 올린 글 丁卯辭職呈承政院狀 134
무진년에 봉해 올린 소 戊辰封事 137

논 論
엄광을 논함 嚴光論 149

잡저 雜著
≪관서문답≫을 해명함 解關西問答 155
대책의 문제 策問題 160
두류산 유람록 遊頭流錄 163
≪경현록≫의 뒤에 씀 書景賢錄後 171

해설 175
지은이에 대해 181
옮긴이에 대해 182
접기


책속에서


불구덩이에서 새하얀 칼 뽑아내니,
서릿발이 달 속 궁전에 부딪쳐 흐르도다.
견우·북두 넓디넓은 터에
정신이 놀지 칼날은 놀지 않는다.
마음이 일에 응할 때
온갖 감정 요동치지만,
배움으로 근본 삼으면
감정이 흔들 수 없다.
어지럽힐 수 있다면 근본이 없기 때문이며
흔들 수 있다면 쓰임이 그치나니,
경으로써 근원을 함양해
하늘 법에 뿌리를 두라.
근왕병을 불러 모으고 나랏일을 정돈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정령이나 형벌에 있지 않고 오로지 전하의 한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사방 한 치의 심장 속에서 말이 땀 흘리며 달리듯 노력해 만 마리 소가 갈아야 할 너른 땅에서 공을 거두는 법이니, 그 기틀은 자기에게 있을 따름입니다. 다만 전하께서 종사하시는 것이 어떤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 쏘고 말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무엇을 좋아하시는지에 존망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접기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손으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써 하는 법이니, 몸이 닦이지 않으면 자기에게 분별력이 없어 좋고 나쁨을 알지 못하므로, 쓰고 버림이 모두 그릇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을 쓰지 못한다면 누구와 더불어 훌륭한 다스림을 이루겠습니까! 예전에 남의 나라를 잘 염탐하던 사람은 그 나라의 세력이 강한지 약한지를 보지 않고 사람 잘 쓰는지 못 쓰는지를 보았습니다. 이로써 천하의 일이 극히 어지럽고 극히 잘 다스려짐은 모두가 사람이 하는 짓이지 다른 데서 말미암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닦음은 나아가 다스림의 근본이요, 어진 이를 등용함은 다스리는 근본이며, 몸을 닦음은 또한 사람 취하는 근본도 되는 것입니다. 천 마디 만 마디 말이 어찌 이 자신을 닦고 사람을 쓴다는 것 바깥으로 벗어남이 있겠습니까? 합당한 사람을 쓰지 않으면, 군자는 들에 있고 소인이 나라를 제멋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조식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조선의 유학자.

1500년대 경상도 일대의 산림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했던 유학자이다. 성리학 이론보다는 실천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황과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당대의 학문적 위상이나 이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이황 이상이었다.

여남은 번 이상 벼슬을 제수 받았지만 단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간신들이 권력을 잡고 얼토당토않은 정치를 펼치는 때에 벼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에 상소를 올려 조정의 정치를 정면으로 추궁했다. 1555년 을묘년에 명종에게 올린 <을묘사직소>에서는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다”고 썼다. 이로써 유학자의 마땅함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올바른 유학자의 전형을 세웠다.

1501년 경상도 삼가현(현재의 합천군 삼가면)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1572년 진주목 덕산동(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의 산천재(山天齋)에서 일생을 마쳤다.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제자들이 그의 글을 모아 묶은 <남명집>을 통해 그의 삶과 학문을 접할 수 있다. 접기

최근작 : <을묘사직소, 조선을 움직인 한 편의 상소>,<[POD] 남명 조식>,<남명 문집> … 총 8종 (모두보기)

오이환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오이환은 1949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및 타이완대학 대학원 철학과에서 수학한 후, 교토대학에서 문학석사 및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82년 이후 33년간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에 재직했다가, 2015년에 정년퇴직했다. 1997년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의 제1회 학술대상을 수상했고, 제17대 한국동양철학회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남명학파연구≫ 2책, ≪남명학의 새 연구≫ 2책, ≪남명학의 현장≫ 5책, ≪동아시아의 사상≫, ≪중국 고대의 천과 그 제사≫, ≪해외견문록≫ 2책, ... 더보기

최근작 : <중국 고대의 천과 그 제사>,<국토탐방 - 상>,<해외견문록 - 상> … 총 39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도서 모두보기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큰글자책] 원서발췌 로드 짐>,<원서발췌 전쟁술>,<[큰글자책] 원서발췌 전쟁술>등 총 2,549종
대표분야 : 고전 25위 (브랜드 지수 116,254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조식은 16세기 당시 경상좌도의 이황과 나란히 경상우도를 대표하던 유학자로서 양측이 다 우수한 문인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개중에는 두 문하에 모두 출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려 시대에 성리학이 전래된 이래 그것의 도입과 전개를 주도한 학자들이 영남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당시 영남의 좌·우도를 대표한 이들은 동시에 조선 유학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특히 경상우도는 김종직·김굉필·정여창 등 영남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사림파의 실천적 학문 전통 가운데서 성장한 조식은 개인적으로 사림파의 인물들과 밀접한 인적 관계로 맺어져 있었으며, 그 집안의 학문적 배경도 사림파에 속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평생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는 중국 송대의 학자들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오로지 실천이라고 하는 원·명대로부터 조선 전기로 이어지는 유학의 학문적 입장을 강조했다.
조식은 또한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 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성호 이익 같은 이는 그에 대해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東方氣節之最)”이라는 찬사를 부여했고, 또한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간주했다. 이는 대체로 조식 및 남명학파에 대한 공통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조식의 역대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출처(出處), 즉 벼슬에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에 대한 명철한 판단 여부가 그 기준을 이루었다. 그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출처는 군자의 큰 절개”라 해 이를 매우 강조했고, 그 자신은 한평생 열 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취임한 적이 없었다.
≪남명집≫은 정인홍의 주도로 선조 35년(1602, 임인년) 합천 해인사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는데, 이 초간본은 별로 보급되지 못한 채 장판각의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으며, 갑진본은 초간본을 바탕으로 새로 간행한 것으로, 이 둘은 모두 3권 2책의 분량으로 되어 있었다. 조식의 문집 분량이 이처럼 적은 것은 자신의 저술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경계했던 학문적 입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죽은 후 남은 원고가 임진왜란의 와중에 대부분 소실되었고, 후일 문집에 수록된 것은 후학들의 기억 속에 남아 전해 온 것이거나 각처에서 수집한 자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갑진본 계통의 각 판본에서 계속적인 작품의 추가와 교정이 가해지고, 불완전한 작품이나 타인의 작품이 잘못 끼어든 사례도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남명집≫의 주요 판본들은 대부분 영인 출판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그것들 중에서도 원전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했으면서도 작품들이 가장 포괄적으로 망라된 이정합집본(釐正合集本)을 저본으로 삼았다. 물론 이정합집본 가운데서도 인조반정 이전에 간행된 판본과 다른 점이 있을 경우에는 변화된 부분에 유의해 원형에 가까운 것이 되도록 했다.
이번 번역에 있어서 기존의 번역본들 가운데서는 남명학연구소의 수정판을 참조했으나, 필자의 의견과 다른 부분은 대폭 바꾸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양자를 대조해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필자로서는 이리하여 ≪남명집≫의 번역이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작품 선정에 있어서는 조식의 글들 가운데서도 여러 작품 형식을 안배하는 동시에 자주 언급되는 작품은 대부분 포괄할 수 있도록 유의했고, 그중에서도 조식의 핵심적 사상을 담은 부분은 빠짐없이 수록되도록 배려했다. 그러므로 이 번역본을 통해서도 조식 사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무리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접기


북플 bookple
이 책의 마니아가 남긴 글
친구가 남긴 글
내가 남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