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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7

한·일 ‘생명철학의 대화’ 물꼬 트다 < 동아시아의공통가치를찾아서 - 동양일보 2016

한·일 ‘생명철학의 대화’ 물꼬 트다 < 동아시아의공통가치를찾아서 < 지난 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한·일 ‘생명철학의 대화’ 물꼬 트다
기자명 조아라 기자
입력 2016.05.03 

청주서 ‘동양적 생명관 재조명’ 첫 자유토론
▲ 동양포럼 첫 번째 ‘한·일 회의’가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을 주제로 3일 충북예총회관 따비홀에서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사진·최지현>

(동양일보 조아라 기자)권일찬 교수 “주역은 살아있는 생명의 영원한 진리”

야마모토 발행인 “동양생명관은 사후보다 현세주의적”

김연숙 교수 “생명의 근원적 관계성은 ‘온양’에 바탕”


동아시아의 중심지 청주에서 한국과 일본의 첫 번째 철학 대화가 시작됐다.

‘철학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동양포럼 운영위원회(운영위원장 유성종)는 3일 충북예총회관 따비홀에서 첫 번째 ‘한·일 회의’를 개최했다.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을 주제로 한 이날 회의는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이뤄지는 세미나나 토론회와 달리 참석자 전원이 둘러 앉아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자유롭게 토론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돼 눈길을 끌었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한·중·일이 함께 공공하는 철학대화모임 대표)이 운영했던 교토포럼의 형식을 차용한 것으로, 김 주간은 25년 동안 매달 한 번씩 전 세계 57개국에서 300여회가 넘는 회의를 개최해 온 바 있다.

특히 이날 회의를 위해 야마모토 교시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츠치다 타까시 전 정화대 교수, 변영호 도유문과대 교수 등 3명의 일본 지식인들이 청주를 찾았다.

이날 회의를 열며 김 주간은 “일본과 중국, 한국이 과거의 다난한 역사와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뜻을 모아 모두 행복해지는 공공의 세계를 열어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살아있는 의미를 정리하고 어떻게 살아야 삶다운 삶이 되는지 생명에 관한 문제부터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번 주제를 정했다”며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 주제 발표가 있었다. 먼저 주역연구가인 권일찬 전 충북대 교수가 ‘동양적 생명관-주역학의 입장’을 주제로 주역에서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설명했다.

권 교수는 “주역은 우주론적으로 변화하는 천인합일적 유기체론적 생태론적 자연의 이치(천도)에 따라서 천지의 뜻과 이상인 생을 펼치기 위해 사대 성인이 완성한 궁극적 진리인 종교, 철학, 과학기술이 통합된 살아 있는 생명의 궁극적이면서 영원한 철학이고 과학기술”이라고 밝혔다.

야마모토 교시 발행인은 ‘동양적 생명관-일본 불교의 입장’을 주제로 교리 중심의 한국 불교와 달리 실천적이며 생활적인 일본 불교에서 생명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발표했다.

그는 “서양에 비해 동양의 생명관은 사후보다 현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현세주의적 생명관이 농후하다”며 “동아시아에서는 초월적 절대자인 신불(神佛)과 범부의 ‘단절’ 보다도 중생의 능동적인 ‘신심(信心)’에 의한 신불로의 귀명, 본존과의 일체화를 지향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밝혔다.

김연숙 교수는 태아를 잉태한 여성의 몸을 소재로 한 김선우 작가의 작품 ‘탯줄’ 등을 예로 들어 ‘한국적 생명관’을 이야기했다. 김 교수는 “생명의 근원적 관계성은 살려는 것과 살리려는 것의 ‘조응’이라고 본다. 생명체가 편안하게 자라도록 따뜻하게 감싸며(온양·穩養) 살려는 것을 살리려고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 주는 어머니의 몸과 같은 것”이라며 “‘살려는 것’을 기특하게 여기고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보다 근원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각각의 발제 후 자유토론이 이어졌으며 마지막으로 세 사람의 발표 내용에 대한 종합 토론이 이뤄졌다.

토론에는 주최 측인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과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전 꽃동네대 총장)을 비롯, 장준호 전 청주대 부총장, 김용환 충북대 교수, 홍민기 한국교통대 교수, 이성도 한국교원대 교수, 박영대 화가, 조성환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전임연구원, 네모토 마사쓰구 충북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이종각 전 충북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이날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은 마무리 인사를 통해 “이 동양포럼이 국민들이 삶의 가치를 생각하며 살게 하는 기본적 토양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큰 기대를 한다”며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들, 특히 멀리 일본에서 오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동양포럼 한·일회의’ 내용은 5월 23일자에 게재 됩니다.

첫번째 한·일 회의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 < 동아시아의공통가치를찾아서 - 동양일보 2016

첫번째 한·일 회의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 < 동아시아의공통가치를찾아서 < 지난 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첫번째 한·일 회의 <6>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6.05.22 

한철학적 생명관의 핵심은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 지난 3일 충북예총회관 따비홀에서 동양포럼 운영위원회의 주관으로 열린 첫 번째 ‘한·일 회의’에서 참가자들이 열띤 논쟁을 펼치고 있다.



● 때 : 5월 3일
● 곳 : 충북예총 따비홀

● 발제자
△권일찬 전 충북대 교수
△야마모토 교시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김연숙 충북대 교수
●토론자
△츠치다 타까시 전 교토대 교수
△변영호 도유문과대 교수
△장준호 전 청주대 부총장
△김용환 충북대 교수
△홍민기 한국교통대 교수
△이성도 한국교원대 교수
△이종각 전 충북대 교수
△박영대 화가
△네모토 마사쓰구 충북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조성환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전임연구원
△지영 원광대 요가연구소 연구원

●주최자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 기록 : 조아라·박장미 취재부 기자
● 사진 : 최지현 사진부 기자

■권일찬 전 충북대 교수



주역 관점에서 본 동양적 생명관
생명은 ‘기(氣)’, 양기와 음기의 묘합
생명은 ‘역(易)’, 늘 변하며 변하지 않는 것


■ 야마모토 교시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불교 관점에서 본 동양적 생명관
생명은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인 ‘불성’
산천초목은 모두 불성을 지녀


■ 김연숙 충북대 교수 
작품 ‘탯줄’ 통해 본 한국적 생명관
생명은 치열한 생존충동이며 생존의지
살려는 것과 살리려는 것의 ‘조응’



동양포럼 운영위원회(운영위원장 유성종)는 지난 3일 충북예총회관 따비홀에서 첫 번째 ‘한·일 회의’를 개최했다. ‘동아시아의 공통가치를 찾아서’라는 동양포럼의 가치와 지향에 따라 그 첫 주제로 동양적 생명관의 특징을 한·중·일 비교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회의에는 야마모토 교시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츠치다 타까시 전 교토대 교수, 변영호 도유문과대 교수 등 3명의 일본 지식인과 국내 교수, 학자, 예술인들이 참석해 열띤 논쟁을 펼쳤다.
먼저 주역연구가인 권일찬 전 충북대 교수가 ‘동양적 생명관-주역학의 입장’을 주제로 주역에서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설명했다. 
이어 야마모토 발행인은 ‘동양적 생명관-일본 불교의 입장’을 주제로 교리 중심의 한국 불교와 달리 실천적이며 생활적인 일본 불교에서 생명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발표했다. 

김연숙 충북대 교수는 태아를 잉태한 여성의 몸을 소재로 한 김선우 작가의 작품 ‘탯줄’ 등을 예로 들어 ‘한국적 생명관’을 이야기했다. 

한국과 일본 간 철학 대화의 물꼬를 튼 이날 회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주>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먼저 오늘의 주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이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난 26년에 걸쳐 일본을 거점으로 한·중·일의 공통 가치를 찾는 작업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공통인식이 형성되는가 싶으면 도중에서 그것이 부서지고 또 어느 정도 정리되는가 싶으면 파괴되면서 많은 좌절과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공들여온 끝에 중국과 서양, 일본과 서양 사이에는 괄목할 만한 공통인식이 공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인 제가 항상 가슴 아프게 느꼈던 것은 한국 안에서 한철학과 한사상에 관한 공통인식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밖에서 내세울만한 것이 별로 없고 외국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구태여 불러서 들을만한 내용이 없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국 사람을 따로 불러서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날로 강화돼 가고 있었습니다. 없으면 만들기라도 해서 당당하게 대화를 나누고, 공통의 세계를 열어간다는 염원이나 의지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정리가 안 되고 공부했다는 사람도 원숭이 흉내 내기에 바빴다는 것이고 그저 서양 것, 중국 것을 번역하고 설명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스스로가 연구하고 이해한 범위 내에서 한사상과 한철학을 일본에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힘든 작업이었는지 모릅니다. 한·중·일의 공통 인식을 정리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열기 위해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차원을 열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한·중·일이 함께 생각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삶다운 삶이 되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 생명에 관한 문제부터 정리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문제는 겉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와서 저는 유성종 선생님과 함께 동양포럼을 일으키고 ‘철학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키치를 들고 출발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의 생각과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문헌들을 읽고 해석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부둥켜안고 있는 문제를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가슴으로 느끼고 스스로의 팔다리로 행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실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결코 전문지식인들이 벌이는 고답적인 공리공론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에 조금 더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보태서 너와 나와 그들의 공감, 공명, 공진의 영역을 펼쳐가자는 것입니다. 공리공론이 아니라 실심, 실행, 실천입니다. 여기에 최우선되는 것이 생명이라는 화두입니다. 우리들의 생명관을 잘 들여다 보면 알게 모르게 서양적 생명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입니다. 요즘 방송 매체나 신문, 잡지 등을 보면 생명이란 유전자라는 생물과학적인 생명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과학적인 생명관인데 거기서 한 발짝 더 나가서 몸과 마음과 얼이 감동하는,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눈이 떠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동양적 생명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세 분의 생각을 제시했습니다. 먼저 주역 공부에 모든 것을 걸어오신 권일찬 교수께 청탁해 중국 고전의 으뜸으로 치는 주역에서 생명을 어떻게 파악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두 번째는 일본 불교에서는 생명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에 대해서 야마모토 발행인께 들어 보고자 합니다. 야마모토 발행인은 미래공창신문사를 창설하기 이전에 불교 전문지의 불교전문기자였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많은 취재를 했고 많은 사람을 만나 고민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단불교 또는 교리불교가 아닌 생활불교 또는 실천불교에 대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연숙 교수는 자신의 따님인 김선우씨가 그린 그림을 통해 새로운 생명관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저는 스물한 살 밖에 안 된 그녀의 그림을 보고 그 제목으로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라는 천부경의 한 구절을 붙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철학적 생명관의 진수가 거기에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분이 순차적으로 말씀하시고 각각에 대한 토론을 한 뒤 자유토론을 하겠습니다. 이번의 첫 번째 국제 포럼을 통해 ‘동아시아의 공통가치를 찾아서’라는 본 포럼의 기본 지향을 되새겨볼 때 생명이야말로 한·중·일이 함께, 더불어, 진솔하게 머리와 가슴을 맞대고 공구공론(共究共論)해야 될 긴급의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주역의 관점에서’
권일찬 전 충북대 교수(주역연구가)


동양에는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가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문화와 역사의 배경이 되는 학문이 있습니다. 그러한 학문 중에서 천부경과 주역이 가장 오래되고 근원적인 학문입니다. 따라서 천부경과 주역을 모르고는 동양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학문을 근본적이고 주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부경과 주역의 시원적이고 근원적인 핵심 개념은 태극입니다. 태극은 불경의 부처, 성경의 하나님, 도교의 도 그리고 힌두교의 브라흐만과 동일한 개념입니다. 태극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기(일기)와 음양오행론(도와 리에 해당됨)입니다. 동양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학문은 다른 말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태극의 문화이고 태극의 역사이며 태극의 학문입니다.
태극과 태극에서 비롯된 기와 음양오행론의 동양학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면 상수역으로 동양오술인 명리학, 점, 의학, 상학, 산학, 천문기상, 오운 욕기 그리고 율려 등이 있고, 의리역으로는 유가, 도가, 묵가, 주자학(성리학) 그리고 제자백가가 있습니다.
태극의 개념과 이론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면 첫째, 태극의 본질적 개념으로써 무극일기(내향적 신비체험)가 있고 둘째, 실존적으로는 기의 작용과 변화 원리를 나타낸 음양 오행론(외향적 신비체험)이 있습니다.
기와 기의 작용과 변화원리를 나타낸 주역의 원리(태극의 원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천인합일사상으로 천지인 셋이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하늘과 땅과 인간과 만물 만사는 태극 일기에서 모두 탄생했으므로 기 일원론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천지인이 기로 형성되어 있으며 기의 매체로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정신 물질 일원론적 유기체론적 생태론적(시스템 이론) 세계관을 나타낸 살아 있는 생명철학입니다.
둘째, ‘일음일양지위도’는 음양 간에 상호 반복운동을 하는 것이지 어느 하나가 영원히 지배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동적 균형’인 도를 향해서 음양 간의 변화작용을 나타낸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주는 그리고 그것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는 생명의 도입니다.(종즉유시)
셋째. ‘생생지위 역’, ‘천지지 대덕 왈 생’은 음양이 서로 교감함으로써 만물이 변화 생성한다는 의미입니다. 천지의 큰 덕을 일컬어 낳는 것, 즉 생이라 합니다. 역경은 인생을 낙관적으로 봅니다. 역에서는 죽음보다 삶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생생을 역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주역의 생은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유교의 인,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사랑과 같은 개념입니다.
넷째,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는 궁극에 이르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도는 수없이 움직이며 머무르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사물은 변해야 항구할 수 있고 항구한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항구합니다. 주역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다섯째, 중정의 원리는 인간의 행위가 시와 중에 부합해야 합니다. 일의 성공을 위해서는 적절한 시기와 환경에서 실행해야 합니다. 사람은 적절한 때에 행동하고 적절한 시기에 멈춰야 합니다. 시와 중을 터득하면 사람들은 진취적으로 변하며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도 갖게 됩니다.
결국 주역은 우주론적으로 변화하는 천인합일적 유기체론적 생태론적 자연의 이치(천도)에 따라서 천지의 뜻과 이상인 생(生)을 펼치기 위해 사대 성인이 완성한 궁극적 진리인 종교, 철학, 과학기술이 통합된 살아 있는 생명의 궁극적 영원한 철학이고 과학기술입니다. 또한 이에 근거하여 인간의 삶을 이해 설명하면서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타내주고 ‘수시변역 이종도야’라는 원리에 따라서 인간이 삶의 문제를 지혜롭게 대처(피흉추길)하고 해결해주는 학문입니다.
특히 주역의 철학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내용 있는 현대물리학 차원의 과학기술(역학 역술)이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다른 철학 종교경전과 다를 뿐 아니라 뉴턴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적 기계론적 고전물리학적 과학기술이 지나치게 발달하여 나타난 현대사회 위기와 문제를 보완 극복하고 21세기 새로운 문명 창조, 즉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이 조화를 위해 가장 의미 있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시대적으로 더욱 차별화된 의미와 가치입니다.
태극에서 비롯된 주역은 인류와 지구를 살릴 수 있는 동서양의 유일한 진리로서의 학문입니다.
동양학적 생명관은 태극과 태극에서 비롯된 역학 역술과 홍익인간 이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일본 불교의 관점에서
야마모토 교시(山本恭司) 미래공창(未來共創)신문사
발행인


불교적 생명관의 핵심은 생명은 불성(佛性)이요 불성은 다름 아닌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은 각각 개체적 생명체인데 하나하나의 개체생명의 가장 깊숙한 곳에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 내재(內在)하고 있다는 것이 ‘산천초목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山川草木悉皆有佛性)’라는 불교의 생명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는 아주 극진히 귀하게 여겨야 하고 절대로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자비심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공포는 ‘죽음’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불안을 완화시키기 위해 사후의 천국이라는 지복세계(至福世界)를 추구하고, 성직자에게 재물을 바침으로써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손에 넣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죽었고”(니체), 성현들의 계략은 이미 간파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란 ‘죽음’을 완성하는 사람이라면서(‘파이톤’), 태연하게 독배를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는 사랑의 사람(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서양 종교는 ‘죽음’(십자가·종말)이나 사후세계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향성을 니체는 생명력의 쇠퇴라고 지탄했습니다.
서양에 대해서 동양의 생명관은 사후보다도 현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卽身成佛)는 생각이 강합니다. 불교, 유교, 주역, 노장, 한사상, 동학, 일본 신도 등등 하나같이 현세주의적 생명관이 농후합니다. 공자의 “아직 삶(生)을 모르는데 죽음(死)을 어찌 알겠는가!”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정토교에서는 서방의 십만억토(十萬億土)를 기쁜 마음으로 원하는데 반해, 중국불교의 주류를 이룬 천태 지의(智?)는 이것을 ‘방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일본에서 정토신앙을 널리 알린 신란(親鸞)도 정토에 갔다가 곧장 사바(娑婆=예토穢土)로 돌아와서 중생을 구한다고 하면서(?超), 사바의 정토화 쪽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초월적 절대자인 신불(神佛)과 범부의 ‘단절’보다도 중생의 능동적인 신심(信心)‘에 의한 신불(神佛)로의 귀명(歸命=나무南無), 즉 본존(本尊)과의 일체화(타자가 자기에 드러난다)를 지향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여기에는 동서의 ’인간관‘의 차이도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피안(천국)보다도 차안(사바)을 중시하는 종교가 중에 일본의 니치렌(日蓮)이 있습니다. 니치렌은 구마라즙이 번역한 ‘법화경’을 최고의 교전(敎典)으로 삼고, “남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창제행(唱題行)으로 자기 내면 깊은 곳(內奧)의 제 9식을 환기시킴으로써 범주즉극(凡夫卽極·범부에게 가장 종귀한 생명이 용솟음쳐 드러남(現)}의 현증(現證)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니치렌의 이러한 생명관은 서학(천주교)에 대해서 인간생명의 평등과 존엄(인내천)을 주창하다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와 그의 제자 최시형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니치렌의 입정안국(入正安國)이나 동학의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실천철학의 근저에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있고, 거기에는 종교적 도그마를 뛰어 넘은, 지극히 소박한 인간적 직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니치렌은 내 마음(己心)에는 십계(十界)의 생명이 구비되어 있고(일념삼천·一念三千), 나의 생명상태는 우주에 넘쳐흐르는(?漫) 십계의 생명과 감응하여 순식간에 변화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리고 지옥에서 보살에 이르는 구계(九界)의 생명은 윤회하지만, ‘불계(佛界)’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니치렌은 어느 미망인(신도)에게 “당신의 죽은 남편은 살아있을 때에는 생불이고 지금은 사불이다. 생사 모두 부처이니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는 법문은 이것을 말한다”라며, 사후에서도 불계에서 즐겁게 노니는 망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生死卽涅槃). 니치렌은 이것을 ‘활(活)의 법문’이라고도 부릅니다.
니치렌은 또한 하루의 목숨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전 우주)의 재물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생명이 끝나는 시점, 즉 임종의 생명상태(행복과 불행의 정도)는 그대로 우주에 용해되고, 다음 생명으로 인연이 맺어질 때까지는 줄곧 같은 생명상태라고 하는 ‘임종정념관(臨終正念觀)’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동학적 생명관의 특징인, 사바세계에서 실제로 사는 하루하루를 최대한 후회 없이 올바르게 살자고 하는, 둘도 없는 현세를 중시한다는 생명관이 나타나 있습니다.

 
● 살려는 것의 치열함을 그리다
김연숙 충북대 교수


생명을 가진 것들의 본성은 ‘살려는 것’입니다. ‘살려는 것’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은 치열함입니다. 김선우의 그림 ‘탯줄’에서도 치열함이 드러납니다. 곧 터질듯이 불러진 배는 물론이거니와 엉덩이 사이사이의 터져 나온 핏줄들은 그야말로 살려는 것들의 아우성을 보여줍니다. 생명체를 품고 있는 그녀의 몸체는 그야말로 볼 만합니다. 천지 사이에 거침없이 드러낸 그녀의 나신은 의연하다 못해 장엄합니다. 그런데 엄청난 몸체의 수난을 겪는 이의 얼굴 표정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한없이 내어주고 있지만 아까워하지 않는, 염려하는 듯하지만 담연합니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서 몸과 얼굴이 이렇게 대조적일 수 있을까요? 치열함의 주체는 그 몸 안에서 잉태되고 있는 생명체입니다. 그 얼굴은 바로 ‘살려는 것’을 품고 있는 ‘살리려는 이’의 표정인 것입니다. 아직 형체를 이루지 못한 것(미형·未形)을 사랑하고, 형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待) 보호하는 지극한 정성(첩응·貼膺)을 담고 있는 이의 얼굴인 것입니다.
요즘은 생명체들 사이의 다툼과 경쟁을 당연시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적 관계성은 살려는 것과 살리려는 것의 조응이라고 봅니다. 자신의 포태 속에 있는 생명체가 편안하게 자라도록 따뜻하게 감싸며(온양·穩養) 살려는 것을 살리려고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 주는 어머니의 몸과 같은 것, ‘살려는 것’을 기특하게 여기고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보다 근원적인 것입니다.
이런 근원적 관계는 먼 곳의 타인과의 관계나 천지사이에 존재하는 동물, 식물에게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김선우의 그림 ‘자신이 낳지도 않은’에서 보듯이, 마더 테레사는 한 어린애를 애처롭게 품에 안고 있습니다. 어떤 연고나 혈통, 인종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단지 불쌍한 것을 보면 즉시 일어나는 자애로운 마음(긍발·矜發)이 그녀의 몸짓과 얼굴 표정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약해져가는 아이를 향한 연민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눈은 불의를 고발하는 눈빛이며, 어린 생명체들을 죽어가게 만든 전 인류를 향한 질책, 선의의 의분으로 강개(慷慨)한 눈빛입니다. 불쌍한 것을 보면 즉시 일어나는 자애심인 긍발이나 동식물이라도 무고한 생명들을 해치는 것에 대해 강개하는 것이 우리네의 고유한 직관적 정서입니다. 살려는 것을 살리려는 근원적 관계성은 만물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즉 호물(護物)로 확대됩니다. 오직 사람만 위하는 것을 고집하면 사람도 만물도 살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습니다. 인간과 천지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있지만, ‘천부경’에는 “인간 안에서 천지가 하나이다(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연을 정복한다’, ‘자연의 일부분이다’, ‘자연을 모범으로 삼는다(道法自然)’는 다양한 관점들이 있지만, ‘인중천지일’이란 말은 그 의미가 현묘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대단하다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서 천지가 하나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더 작은 것 안에 더 큰 것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20여년의 삶의 경험과 연상을 알기 쉬운 직관으로 표현한다”는 작가 김선우의 말처럼, ‘탯줄’을 보노라면 ‘인중천지일’의 의미를 직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천지 사이에 있습니다. 살려는 것을 살리려는 저 어머니를 다시 보십시오. 자기 안에서 자라고 있는 작은 생명체를 키워내고자 하는 더 큰 생명체인 어머니의 몸체를 주도하는 것은 그녀 안에서 잉태되고 있는 작은 생명체입니다. 땅에 기대고 있지만 머리 부분을 하늘을 향해 담담히 들고 있는 그녀는 천지자연의 온생명에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녀의 몸체가 잉태된 태아의 포태이듯이, 뭇생명체의 포태인 천지자연은 그녀를 감싸고 있습니다. 영겁처럼 깊고 단단한 대지는 새로운 생명을 정성스럽게 기다리는 그녀를 지지하고 있으며, 이미 스며든 새벽의 신성한 기운은 그녀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며, 새날의 희망찬 밝은 빛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자유토론>
▷김태창 주간 “발제하신 분들의 말씀을 잘 들어보았습니다. 먼저 권일찬 교수의 말씀은 ‘생명은 ‘기(氣)’다. 양기와 음기가 서로 묘합하는 것이 생명의 핵심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역(易)이다’, ‘늘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두 개의 명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야마모토 선생의 말씀은 ‘생명은 불성이며 불성이란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라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여기서 생명과 생명력과는 다릅니다. 생명은 생명 현상이고 생명력은 그 생명을 생명으로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을 얘기합니다. 

김연숙 교수는 ‘생명은 치열한 생존충동 또는 생존의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철학적 생명관의 핵심에서는 하늘기운(天氣)과 땅기운(地氣)이 사람기운(人氣)의 함께 더불어 고르게 아우르는 작용을 통해서 비로소 이루어지며 그것은 삶과 죽음이 서로 어우러지는 데서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명의 참모습이 예술적으로 형상화된 것이 김선우 작가의 그림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송계 박영대 화백의 ‘생명-율’, ‘율-생명’이라는 그림에는 주역적(음양오합적) 생명의 실상이 훌륭하게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한철학과 중국 주역 철학의 생명관의 핵심이 두 분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제시되었다는 것은 오늘의 모임이 갖는 또 하나의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학과 예술은 함께 가야 한다는 것도 동양인문학의 특성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자유롭게 여러분들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성도 한국교원대 교수 “우선 야마모토 교시 선생님 말씀 듣고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실천적으로 생명이 생명다운 생명이 되게 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실천은 무엇입니까?”

▷장준호 전 청주대 부총장 “야마모토 선생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불교적 생명관의 근본은 근원적 생명력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것이 다름 아닌 불성이라고 하셨는데 불교에서 얘기하는 인간은 객체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아(無我)가 아닙니까? 불성도 마찬가지로 객체적인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닌지요?”

▷야마모토 발행인 “이성도 교수님의 물음에 대해서는 자비행(慈悲行)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삼라만상이 모두 한결같이 불성,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하나하나의 존재물이 지닌 불성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개별별의 개체 생명을 우주생명의 구현체로 보고 소중하게 여기는 행위양식입니다. 그것은 개체 생명만을 귀하게 여기고 거기에만 집착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생명을 생명답게 할 수 있는 실천이란 개체생명과 우주생명이 서로 아름답게 조화·상생하도록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장준호 교수님의 물으심에 대해서는 ‘무아’라는 것이 생명이라는 실체를 완전히 부정한다기 보다는 개체 생명이 가진 모든 지위, 재산, 명예 같은 실체적 부속물을 제로로 해야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 온전히 활동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체험적 진실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야마모토 선생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 불교와 한국 불교의 차이점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석가모니에서 불교가 시작됐다고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광대한 생명력이 석가모니라는 한 인간에게 잠시 출현했을 뿐이지 그가 출발은 아니라고 합니다. 출발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일본은 무사도가 사회를 지배했어요. 많은 사람이 아사로 죽어가는 마당에 염불만 외워서 내세에 간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중 불교로 가는 길입니다. 권일찬 교수가 말씀하신 중국적, 주역적 생명관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생명=태극이라는 생각에는 개체생명에 대한 존중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 제기입니다. 개체 생명을 무시하고 우주생명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자칫하면 무서운 전체주의 사상에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일본의 불교는 한국 불교와 달리 석가모니 숭배가 아니고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 개체적 근원적 생명력과 잘 아우러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츠치다 타까시 전 교토대 교수 “어제 김태창 선생님으로부터 생명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이냐는 날카로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오늘 이 자리에서 ‘생명은 기적’이라는 저의 대답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돕고 행복하게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저의 기본적인 생명관입니다. 저는 80년 전 부모님의 사랑의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태어난 것을 기적이라 느끼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수많은 정자 중 단 하나가 난자에 착상하는 것은 수억분의 일의 확률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인도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이것이 바로 생명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받은 제 생명은 또 다시 많은 생명에 의해 지탱 받고 포용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아름다운 나무, 숲, 아름다운 자연을 봤는데 이것 역시 기적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적의 생명 덕분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할 때 비로소 우리의 밝은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의 아름다운 경치, 아름다운 풍경에서 살아가는 장소를 제공받고 있습니다. 아까 야마모토 선생님이 생명=불성=우주적·근원적 생명력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그런 생명력이 저 자신에 나타난 기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의 불성을 늘 감사하고 자각하는 마음으로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만듭시다.”

▷박영대 화백 “오늘 이 좋은 자리에 참가하게 돼 기쁩니다. 사실 이런 자리는 처음입니다. 평생 그림만 그리다 여러 학자들을 많이 뵙게 돼 좋은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여기 야마모토 발행인과 츠치다 교수님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30년 전부터 일본을 매년 한, 두번씩 왔다 갔다 하면서 미술 교류를 해 왔습니다. 한국 작가로는 일본에 친구가 가장 많은 사람일 것이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좋은 점을 많이 배웠습니다. 큰 힘이 됐고 앞으로도 조금 더 노력해 좋은 작가가 되려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2007년 최고의 상이라는 일본 그랑프리를 받고 이듬해에 전년도 수상작가라 해서 특별전을 열어줬습니다. 좋은 시간을 같이 해 주신 여러분께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조성환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전임연구원 “오늘의 동양포럼에서 전개된 바를 제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일본의 생명관은 일원론의 생명관, 중국의 생명관은 이원론의 생명관, 그리고 한국의 생명관은 삼원론의 생명관이 되겠지요. 일본이 전체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화의 세계를 추구한다면 중국은 음과 양의 대립, 한국은 천지인, 삼태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절망적인 소리를 들을 때가 많습니다. 이유는 세대 간의 단절 때문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지 않아 숨을 쉬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인의 생명력이 쇠퇴하는 게 아닌가라는 걱정을 불식하기 어렵습니다. 불통을 통으로 전환시킴으로서 생명력의 소생과 약동을 진작시키는 논의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변영호 도유문과대 교수 “저는 일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한국에 대해 특별히 배울 만한 것이 있느냐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결국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에 대해 마음속에 항상 모자란 느낌이 있었습니다. 김태창 교수님에 대해 저는 많은 매력을 느낍니다. 일본에서 교토포럼을 주재하실 때 많은 어려움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청주에서 새롭게 동양포럼을 일으키셨다는 말씀을 듣고 달려 왔습니다. 청주가 이렇게 좋은 분들이 많은 곳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중심에 있다는 것 인재가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지영 원광대 요가학연구소 연구원 “김연숙 교수님의 발표에서 엄마의 가슴으로 느끼는 생명관에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엄마의 가슴의 차원과는 다른 영성의 차원에 연결되는 생명관의 필요성도 아울러 느꼈습니다.”

▷이종각 전 충북대 교수 “저는 나이가 더하면서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생명력의 소중함을 더더욱 절감하고 있습니다. 결국 철학도 사상도 문학도 예술도 모두 근원적 생명력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생명에 대한 성찰을 다시 해볼 생각입니다.”

▷네모토 마사쓰구 충북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말로는 있다(有)와 없다(無)를 생명체나 비생명체에 두루 쓰는데 일본말로는 생명체에는 ‘이루’와 ‘이나이’를 쓰고 비생명체에는 ‘아루’와 ‘나이’를 써서 서로 구별합니다. 여기서 일본인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있고 없음을 구별하는 생명관의 일단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홍민기 한국교통대 교수 “언젠가 김태창 교수께서 중국인의 생명관은 삶 중심과 죽음 불언급의 특징이 있고 일본의 생명관은 죽음 중심과 삶 경시의 특징이 있는데 한국인의 생명관은 삶과 죽음의 상관연동이라는 특징이 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생각에 공감하는 바가 컸습니다. 그것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 부총장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텃밭을 운영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이와 같은 포럼을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다른 분들이 워낙 좋은 말씀 많이 하셨는데 텃밭 운영하며 느낀 것은 생명이 지닌 씨앗과 토양 인간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협동하고 협력하는 것이 생명을 잉태하고 자라게 하고 성장시키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땀을 흘리고 씨앗을 뿌리고 며칠 후 땅 속을 헤쳐 나가는 생명력을 볼 때는 진한 감동을 느끼고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학교에 있을 때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느낌을 생명을 보며 느끼곤 합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자연을 끈질기게 황폐화시켜 인류를 전멸시키는 지경에까지 왔는데 생명을 소중하게 느끼면서 인간과 자연이 협력의 관계, 조화의 관계, 협동의 관계가 돼야 하지 않겠냐는 새로운 각성을 합니다. 직접 땀을 흘리면서 농사를 지어 보니 벌레 먹은 감자, 찌그러진 고구마도 이 속에 생명이 들어 있다는 생각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이것을 섭취해 생명을 유지한다는 감격도 듭니다. 실제로 농사를 지어 보신 분이라면 한·중·일의 그 어느 분이라도 가장 기본적인 공통 가치가 생명이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김연숙 ■ 고령자 시대의 고령자를 생각한다(1) < 동양포럼 - 동양일보

김연숙

[저]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 - 본질의 저편 읽기

충북대학교 윤리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윤리교육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북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읽기』 등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쓴 몇 편의 논문과 도덕·윤리교육에 관한 논문이 있다.
 




동양포럼 / 기고문 ■ 고령자 시대의 고령자를 생각한다(1)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 / 기고문 ■ 고령자 시대의 고령자를 생각한다(1)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8.02.25 

아버지의 노년, 그 전과 후

김연숙 충북대 교수

● 쌓여만 가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 살아계실 때도 점잖으시더니 돌아가시는 것도 점잖게 돌아가셨군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제가 마지막으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사자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체온은 순식간에 더 떨어져 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디디고 있는 이 대지가 마치 스케이팅을 타는 것처럼 미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이 대지는 제가 정박할 단단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가도 희석되지 않았습니다.

해소 불가능한 그리움이 쌓여간다는 것에 대한 당혹감, 죽음 이후를 알 수는 없지만 죽어서도 아버지를 만날 가능성이 적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에 한이 쌓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후에라도 뵐 수 있으려면 비슷한 삶이어야 할 텐데, 농사일을 하신 아버지는 등이 굽고 손이 닳도록 노동을 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성정상 유명을 달리하신 분으로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을 기웃거릴 것 같지가 않아서 아버지를 어떤 방식으로 뵐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도 아픔이었습니다.



● 주려는 아버진 24만원, 받는 이장은 19만원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84세에 임종하실 때까지 거의 10년 이상을 홀로 사시면서 노년기를 보내셨습니다. 평생 애써 마련하신 농지를 아끼면서 힘닿는 만큼, 서로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해가야 하는 농사일이지만, 농업기계화가 된 덕분에 이웃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럭저럭 꾸려 가셨습니다. 특히 농지를 일구고 논에 모를 심는 것과 같은 힘든 농사일은 트랙터와 같은 기계작업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은 농대 졸업 후 농업에 종사하는 구역 이장님이 아버지를 방문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네, 지난 농기계 사용료가 24만원이지?”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장님은 “아닙니다, 어르신, 19만원입니다.” 아버지는 거듭 24만원을 주려하고 이장님은 19만원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비용을 주는 사람은 더 주려하고 받는 사람은 적게 받으려고 애를 쓰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 농총 고령인구 위한 사회적 지원 절실

이 일을 회상하면서 저는 농촌의 고령인구를 위한 사회적 지원이 절실함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도시에서는 실업자를 위한 자금지원이나 공공근로 형식의 고용형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농촌의 고령인구의 경제활동지원을 위한 어떤 적절한 사회적 조치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농업이 기계화되는 추세에 맞춰 마을 단위의 기계지원과 기계를 다루는 인력 등을 공적으로 지원하도록 제도화하는 것은 어르신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하고 장려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 “어차피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다 똑같다”

농사일이 없을 때면 아버지는 동네 노인정에서 동네 분들과 시간을 보내시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정부에서 난방비와 약간의 지원금을 보조했으므로, 이를 쓴다는 명분으로 동네의 젊은 분들이 식사를 준비하여 함께 나누시곤 하였습니다. 또한 버스를 타고 시장에 있는 노인정에 나가셔서, 친구 분들을 만나 점심을 드시고 가끔씩 다방에 가서 쌍화차를 드신 후 늦지 않게 귀가하시는 일과를 종종 보내셨습니다.

그 즈음 아버지를 찾아뵈면, 식사 후 거실에서 따뜻한 맥심 커피를 마시면서, 다정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습니다. 언젠가는 함께 하시던 친구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셔서 몇 분 남지 않았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간은 자랑스럽게 80세를 넘겨 사는 것은 드문 일이며, 옛날에는 60을 넘겨 살기도 어려웠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멀리 창문 밖에 펼쳐진 마을 앞산을 바라보시면서 “이제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다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 아버지도 노년기엔 요양원 신세 지게 돼

생로병사라는 삶의 순환과정이 있듯이, 노년기에는 특히 누구나 요양원이나 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아버지도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있고 응급실로 가신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당신의 건강이나 병 그리고 현대 의료나 병원 등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셨는지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요양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있습니다.

지역에 빈 집이 생기면서 그것을 개량하여 요양원을 짓는 일이 벌어졌고, 구역 사람들은 그것을 반대하여 소송을 걸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의견을 여쭈니 “요양원을 짓는 것이 어떻다고 그러냐. 그럼 이 다음에 우리 같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가라고 반대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구역에 요양원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동네 분들이 노쇠해지거나 병약해지시면 입소하게 되었고, 아버지도 친구 문병하러 들러보시고 오시더니 “음식도 잘 나오고 요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서 좋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차후에 더 노쇠해지면 당신도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상기해 볼 때, 요양원과 같은 사회적 시설은 사회로부터 격리될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함께 자리하고 누구에게나 오픈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요양시설의 노인 폭행이나 학대와 같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통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병원에 있는 것도, 집에 있는 것도 다 좋다”

대체로 아버지는 몸이 편찮으신 경우 병원을 가기보다는 그냥 홀로 겪으신 적도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자연치유를 믿어서라기보다는 병원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더불어 그저 병고가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감내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싶습니다. 한번은 대학의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있습니다. 출근하면서 입원실로 찾아뵙고 좀 어떠신지 여쭤보니, “병원에 있는 것도 좋고 집에 있는 것도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화투를 꺼내셔서 재수 띠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 주치의 선생님 등 대여섯 분의 의사선생님들이 회진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없이 재수 띠기를 계속 할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의 병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으신 채.



● 임기응변 중환자실 입원에 “당장 이것들 빼”

노년기의 아버지는 또 한 차례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습니다. 일반병실이 없어서 임기응변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중환자실로 면회를 갔더니, 다른 환자분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어지럽게 오가는 의료진들의 바쁜 발걸음 등으로 말미암아 심란하실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아버지가 드시는 약을 가져오라고 하였고, 오랫동안 복용해오던 고혈압 약을 보여줬더니, “아버님은 고혈압이 없으셔서 안 드셔도 되는 약입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농사일로 적당히 활동하시고 약주를 거의 안하시면서 음식을 담백하고 간소하게 드시기 때문에 고혈압이라는 말이 좀 의아하기는 하였습니다. 이틀 후에 문병을 갔더니 아버지는 일반실로 옮겨계셨습니다. 마침 올케 언니가 정갈하고 맛깔스럽게 삼단 도시락을 싸와서 아버지께 드시라고 권하고 있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영문을 물으니,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에게 “뭣들 하는 건가, 당장 이것들 빼라”고 무섭게 화를 내셔서 일반실로 옮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고모. 제가 시집와서 20년 넘는 결혼생활 중에 아버님이 그렇게 무섭게 화내시는 거 이번이랑 해서 딱 두 번 뵈었네요. 생전 화내시지 않는데… 또 한 번은 어머니 제사음식 준비하고 있을 때예요. 저 혼자 주방에서 일하고 있고 오빠랑 삼촌이 방에서 바둑 두고 있으니까 ‘얘들이 나와서 거들지 않고 뭐하는 거냐’라면서 엄청 무섭게 혼내셨거든요.”



● “가까운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중한 것”

병실에서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는 문득 아버지가 연세도 있으시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으시니, ‘티벳사자의 서’의 이야기를 전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까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버님과 책에 나온 이야기를 나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병원에 입원해 계신 분께 죽음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좀 꺼려지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책에는 단 한 번만 듣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열반에 들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책에서 본 건데요. 돌아가시면, 이런저런 무시무시한 소리와 빛들과 험상궂은 형상들이 단계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형상이자 나 자신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평화의 신이라는 것을 알아채야 한답니다. 알아차림만으로도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해요.” 조용히 저의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의 표정에 아주 잠깐이나마 약간의 긴장감이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 듣고 나더니 즉각적으로 “교회나 절에 다니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 “아들이건 딸이건 공부잘하는 놈 대학보낸다”

그 때, 저는 마치 죽비로 머리통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책에서 읽은 내용이라고 변명하듯 중얼거렸습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시진 않으셨지만, 어떤 실망감이 얼굴에 스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의미를 즉각적으로 알 것 같았습니다. 문맹이시지만 아버지는 늘 막내딸인 제게 공부에 힘쓸 것을 독려하셨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들이건 딸이건 공부 잘하는 놈은 누구든 대학을 보낸다.”라고 말씀하셔서 대학이 좋은 것이고 그곳에 가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셨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게 되니, 아버지는 제가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게 될까봐 크게 아쉬워하셨습니다. 제가 공부를 계속해 온 데는 아버지의 뜻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그런 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동안 공부한 내용, 책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자마자 바로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갈하셨던 것입니다. 책을 읽으신 적이 없으셨기에 공부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존경심을 가지셨고 책 속에 엄청난 훌륭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짐작하셨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선친과 거의 마지막으로 나눈 이 대화는 부단히 저를 소환하여 왔습니다.



● 영정사진 속 아버지 눈빛엔 깊은 슬픔 서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제가 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눈치도 못 챈 것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영정사진을 모셔두고 49일이 되는 날까지 기도를 올리던 중,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영정사진을 뵐수록 그동안 평안하고 담담하다고 생각해 오던 아버지의 눈빛에 깊은 슬픔이 서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앞에서만은 모든 자식들이 조심하고 온화하였으며 용돈도 곧잘 챙겨드렸고, 또한 시골 농촌공동체의 오랜 인연 속에서 주변 분들과도 늘 화목하게 살아오셨기 때문에, 전혀 짐작하지 못한 ‘슬픔’이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욕심 없이 자족하면서 노년의 삶을 살아내셨던 것 같은데, 그 슬픔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거듭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마음에 걸리는 일들을 적어봅니다.



● 애별리고(愛別離苦), 외로우셨을 것

무엇보다도 애별리고(愛別離苦), 외로우셨을 것으로 봅니다. 아버지는 막내딸인 저를 매우 사랑하셨고, 저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연로해지실수록 여러 가지 일들이 닥쳐서 점점 더 전화도 제대로 못 드리고 찾아뵙지도 못하였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자식이 소식을 자주 전하지 못해서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즈음 아버지가 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받고 집으로 모셔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집에 가보니 원만하셨고, 오히려 오랜만에 보게 된 이 딸을 딱하게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참으로 불쌍하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사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똑같다. 아버지가 옛날에 6.25 전쟁에 참전하였을 때, 큰 배에 태워져 남쪽에서 속초인가로 가게 되었다. 군인들을 먼저 태우고 사람들을 태웠는데, 난리를 치면서 바글바글 탔단다. 간신히 배에 타고 가는 중에도 풍랑을 만나 모두들 배 멀미를 하면서 여기저기 나자빠지고 쓰러져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원래 하루면 갈 것을 풍랑을 만나 며칠씩 더 걸리면서 간신히 도착하여 살아난 것이다. 그때 ‘멀리서 보면 바다가 평탄한데 막상 바다 속으로 들어오니 이렇게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이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사람 사는 모습도 바다랑 아주 똑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탄하게 사는 것 같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다들 풍랑을 겪으면서 사는 것이다.” 라고 걱정하시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셨습니다.



● 외식 나가면 늘 짜장면만 드셨던 아버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면 애별리고의 고통을 겪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한 자식의 삶의 반경은 부모님의 삶의 반경과 매우 다릅니다. 아버지의 경우, 자식들 집을 방문하셔도 늘 가축을 챙겨야 한다는 이유로 서둘러 귀가하셨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당신의 삶의 반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좀 더 즐겁게 사실 수 있는 생활여건이 되셨다면 조금은 덜 슬프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경우 식사는 담백하고 검소하셨습니다. 대체로 보리밥이나 칼국수를 드시곤 하였으며, 외식을 나가면 늘 짜장면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빠들이 오리백숙과 같은 건강음식을 사오면 매우 부담스러워하셨습니다. 급기야는 “대관절 이런 것을 어떻게 다 먹으라고 사오느냐”라고 나무라셨습니다. 반면 아버지가 자주 방문하시던 노인정에서의 식사에 대해 여쭈자 “노인정에서 화투치고 생기는 개평과 정부에서 보조하는 지원금을 모아서 점심밥을 짓는 아주머니를 고용하고 있단다. 아주머니가 먹던 음식을 다시 내오는 일이 없어 깨끗하고 손맛도 좋아서 다들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작은 공동체에 실질적 지원 이뤄져야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이런 문제는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고 노년기를 맞이하신 분들의 공통적인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혹자는 “노인정과 같은 곳에까지 사회적 지원을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년기의 삶이 우울하고 가난하고 그래서 병이 들어 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소하게 되면 건강보험 등을 통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공적으로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의 노인정과 같은 작은 공동체를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 노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치유제가 된다

공동체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노년기의 삶이 안정되면 그 안에서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과 생활이 안정되어 그 파급효과가 매우 클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사회에는 정로(定老)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현명한 노인을 스승으로 모셔 교화를 펴고 전하며 덕을 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노인을 어르신으로 모셔 교화를 정성스럽게 지켜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여유와 적절한 휴식을 누리는 노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요즘과 같은 피로사회의 스트레스를 줄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도 없고 출구도 없는 경쟁적인 삶의 사이클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자기를 추구함이 없이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하는 노인들의 존재모습은 그 자체로 치유제가 될 수 있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