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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6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화쟁의 정치 필요” < 조성택, 불교신문 2016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화쟁의 정치 필요” < 종단 < 기사본문 - 불교신문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화쟁의 정치 필요”종단
입력 2016.07.13 09:58
기자명홍다영 기자 hong12@ibulgyo.com



조성택 고려대 교수 제19차 불교포럼서 강조




“세월호, 북핵문제, 최근 강남역 화장실 여성 살해까지 심각한 사회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사회는 둘로 쪼개져 버린다. 편이 갈리고 극단적 주장이 난무하면서 어느새 사건의 본질은 사라지고 만다. 이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직업 정치인들에게 있다. 때로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갈등을 확대재생산하기도 한다. 한국 사회는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부재한 사회다.”



조성택 고려대 교수<사진>는 조계종 재가불자지도자 네트워크인 불교포럼이 13일 오전 서울 그랜드 앰버서더 호텔에서 연 제19차 포럼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조 교수는 ‘화쟁의 정치’를 주제로 한 강의를 통해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이는 쟁투가 한국 정치의 민낯이라고 지적하며, 갈등을 현안해결은 물론이고 더 큰 발전의 에너지로 만들어 가는 일에 정치가 앞장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날 조 교수는 “다른 사람의 옳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분열되고 대립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면서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화쟁의 정치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 교수는 장님들이 각자 만지고 있는 부분을 두고 코끼리 전모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코끼리 전체를 생각한다면 각각의 주장 모두에 부족함이 있다”고 지적하며 “단 하나의 옳음이 아니라 복수의 옳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옳음’이 ‘저들의 옳음’과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큰 옳음’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것이 바로 화쟁의 정치라는 설명이다.

조 교수는 또 “갈등의 상황은 오히려 각자만의 코끼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온전한 코끼리를 볼 수 있는 기회”라며 “‘나의 옳음’을 관철하고 ‘저들의 그름’을 타도하려는 독선적 정의감이 아닌 서로의 옳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화쟁적 성찰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피력했다.



이날 강의에 앞서 최근 새롭게 출범한 불교포럼 3기 집행부 임원 10여명에 대한 소개도 있었다. 김동건 상임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3기 출범을 맞아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는 불교지도자들이 결집해 불교 위상을 높였으면 한다는 총무원장 스님의 당부가 있었다”면서 “1, 2기 때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해 부처님 가르침을 사회에 구현하고 한국불교 위상을 높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조성택] 배타적 주장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정의‘들’의 화쟁 - 불교닷컴 2015

[조성택] 정의‘들’의 화쟁 - 불교닷컴

[조성택] 정의‘들’의 화쟁
서현욱 기자
승인 .12.22

종교포럼 “지금여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배타적 주장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화쟁적 성찰’ :조성택, 한겨레 2016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화쟁적 성찰’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화쟁적 성찰’

등록 2016-06-02 

진영 논리를 앞세운 극단적 배제와 쟁투가 일상화된 우리 사회에서 ‘공존의 정치’가 가능하려면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라”는 원효의 ‘화쟁’ 사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통합과 상생을 기원하며 전국을 걸어 순례한 조계종 화쟁코리아 100일순례단이 2014년 6월10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모든 여정을 마무리하는 회향식을 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9) 화쟁
지금 한국에 정치가 있는가? 만약 정치의 목적이 오로지 권력 쟁취에 있고, 개인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서 이해된다면, 정치는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정치가 본래의 역할, 즉 ‘서로 다른 것들을 어울리게 하는 기술’로서 이해된다면 지금 한국에 정치는 ‘없다’.

선거에서 승리하는 일이 목표인 정치, 내 편은 옳고 저들은 그르고, 패거리에 충성하는 게 곧 정치생명을 보전하는 일이 되는 정치, 내가 살기 위해서 상대를 죽여야 하는 쟁투의 정치가 오늘날 한국 정치의 민낯이다.

최근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협치’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협치를 ‘다수’를 만들기 위한, 정치공학적인 게임으로 이해하는 한 한국 정치의 현실은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 ‘다수결’을 유일무이한 민주주의의 원리로 신봉하는 셈법의 정치가 우리 정치의 또다른 민낯이다.


쟁투의 정치, 패거리 정치는 직업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시민사회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사회적·정치적 현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 것을 꺼린다. 특히 나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 속에서는 침묵을 금(金)처럼 여겨야 한다.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진영논리 속에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해 증오와 혐오의 딱지를 붙이는 것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같은 공론의 장에서 언어폭력과 정신적 폭력은 거의 일상화되었다.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토론하는 대화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세월호, 북핵 문제 그리고 최근의 강남역 화장실 여성 살해 사건 등, 심각한 사회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사회는 둘로 쪼개져 버린다. 사람들은 자신의 진영 안에서만 발언하려고 한다.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진영 안에서 발언의 편향성은 점점 강화되고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편이 갈리고 극단적 주장이 난무하는 가운데 사건의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증발되어 버리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이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직업 정치인들에게 있다. 갈등과 분쟁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역할임에도 지역민 혹은 특정 계층의 이해 다툼으로 변질·악화시키고 있다. 때로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기도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부재하는 사회다.



다른 견해에 증오·혐오의 딱지
폭력 일상화…‘진영’ 점점 강해져

특정계층 이익만 추구하는 정치
‘다양성’ 추구 다원적 세계관 부재

원효 화쟁사상 ‘복수의 옳음’ 용인
독선적 정의 아닌 ‘다름’ 인정해야



지난 세기 동안 한국인들은 국권 상실, 식민지, 분단, 그리고 전쟁이라는 참혹한 시련을 겪어오면서 집단적으로 내면화해온 꿈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반듯한’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한국인들에게 반듯한 나라를 세우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개인의 성취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며 중요한 일이었다. 이는 한국인들만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에서 만들어진 집단적 정서와 같은 것으로, 민족주의와 같은 개념의 잣대만으로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추동했던 역사적 동기 또한 ‘개인’의 이익추구와 권리신장이라는 서구적 관점만으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개발도상국의 한국인들에게 자유와 민주 그리고 윤택한 삶이란 개인적 동기 이전에, ‘반듯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집단적 염원 같은 것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어 이제 우리 모두가 살고 싶은, ‘반듯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정치를 개혁하는 일이다. 이 글에서 제안하는 ‘화쟁의 정치’는 정치개혁의 청사진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시작을 재촉하기 위한 것이며,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정치문화의 모습을 그려보기 위함이다.

화쟁(和諍)은 원효(617~683) 고유의 용어다. 화쟁은 특정한 사상체계가 아니라 일종의 세계관이다. 화쟁은 다양성을 긍정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경전을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의 상호 배타성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화쟁론을 통해 서로 다른 주장들이 결코 모순되거나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원효가 들고 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예화에서 잘 드러난다. 코끼리 전모를 다 볼 수 없는 장님들은 각자가 만지고 있는 부분이 코끼리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코끼리가 “벽과 같다”고 하며 또다른 이는 “기둥과 같다”고 한다. 그야말로 ‘백가(百家)의 이쟁(異諍)’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원효는 “모두 옳다”(개시, 皆是)고 한다. 각 주장들이 코끼리가 아닌 다른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에 원효는 “모두 틀렸다”(개비, 皆非)고 한다. 코끼리 ‘전체’를 생각한다면 각각의 주장 모두에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개시와 개비는 동전의 양면이다. 개시개비는 A가 맞으면 B가 틀렸고, B가 옳다면 A가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 ‘복수의 옳음’을 용인하는 것이며 나아가 ‘나의 옳음’이 절대적일 수 없음을 인정함으로써 더 큰 옳음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대 개시가 ‘벽’과 ‘기둥’ 둘 다 코끼리의 모습이라고 하는 모순과 역설을 공존하게 하는 원리라면 ‘개비’는 모순적 상황을 새로운 변화로 이끌고자 하는 ‘갈등전환’의 관점이다.

이제 원효의 ‘코끼리’를 정치적 상황에 적용해보자. 코끼리의 전모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어느 한 주장도 제한되거나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되 다른 사람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때 점차 코끼리의 전모를 완성해갈 수 있다. 다만 코끼리 아닌 것을 코끼리라 우기거나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주장들이 한자리에서 펼쳐지면서 어지럽고 혼란스럽기도 하겠지만, 이 ‘평화로운 다툼’의 과정을 통해서만 조금씩 코끼리의 전모에 다가갈 수 있다. 한 사회의 발전 또한 마찬가지다.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과 방법을 놓고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고 때론 갈등도 빚고 다툼도 있을 수 있지만 그 길만이 지속적 발전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길이다. 화쟁의 정치란 단 하나의 옳음이 아니라 복수의 옳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옳음’이 절대적일 수 없으며 ‘저들의 옳음’과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함께 ‘더 큰 옳음’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정치를 말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1892~1971)는 정당정치에 관한 그의 명저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정치란 갈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완화하거나 조절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서로 다른 의견이 공존하는 것, 갈등이 늘 상존하는 것이 정치가 작동하는 현실이며 정치가 필요한 현장이다. 샤츠슈나이더 그리고 화쟁의 정치학에서 갈등은 그 자체가 문제적 상황이 아니다. 갈등의 상황은 오히려 각자만의 코끼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온전한 코끼리’를 볼 수 있는 기회다. 갈등을 현안 해결과 더 큰 발전의 에너지로 만들어가는 일, 그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다.



조성택/고려대 철학과 교수 ㄱ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을 실천하려는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 정의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옳음만을 정의라고 집착하면서, 다른 사람의 옳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분열되고 대립과 갈등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분쟁의 양상이 바로 그러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옳음’을 관철하고 ‘저들의 그름’을 타도하려는 독선적 정의감이 아니다. ‘나의 옳음’과 ‘저들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고, 서로의 옳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개시개비의 화쟁적 성찰이다. 화쟁적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 정의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화쟁의 정치란 다툼이 없는 평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투되 평화롭게 다투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다.

조성택/고려대 철학과 교수 ㄱ민족문화연구원 원장

※ 이 기획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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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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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6

Namgok Lee '적정하고 정당한 분노 조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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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하고 정당한 분노'

'분노'에 대해 더 연구를 집중해 보시겠다는 고려대 조성택 교수가 던진 일종의 화두.
분노(화)라는 같은 말을 써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이 많은 것 같다.
내가 8년간 생활했던 무소유사회(야마기시즘) 특강의 목표 첫번째가 '어떤 경우에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였다.
나도 진행을 해 보았지만, 가장 중심적인 테마고, 가장 오래하는 테마고, 어려운 테마였다.
가장 많이 걸리는 부분이 '어떤 경우에도'였다.
그 가운데도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가 가장 많았다.
조 교수의 연구에 기대가 많이 된다.
나도 분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다.
다만 긴 역사를 통해 볼 때, 분노가 불의한 사회를 무너뜨리는 동력으로는 작용하지만, 새로운 사회로 변혁하는데는 동력으로 되지 못한다는 것에 유념하고 싶다.
한가지만 더 말한다면,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은 '화를 참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를 참으면 '화병'에 걸리기 쉽다.
그 보다는 '적정'하게 화를 내는 것이 차라리 낫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는 것은 일시적 '분노'가 아니라, 지속되는 '사랑'이다.
You, 박정미, 강길모 and 11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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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가 새로운 사회로 변혁하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그런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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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 저는 요즘 바로 그 적정성이 화두입니다. 적정성이란 무엇인가. 역동적 균형, 중용이라는 것, 군자이시중이란 것, 적정시민, 적정기업, 적정사회란 어떻게 가능한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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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핍으로서 투쟁과 충만으로서 투쟁의 차이, 열등감으로서 분노와 자존감으로서 분노의 차이 등등을 바탕에 둔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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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건준
       부당한 걸 보고 분노(화)가 일어난 마음의 상태와 불의나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려는 마음의 상태는 같은가? 다른가?
      분노와 정의감은 같은가, 다른가?
      분노와 사랑은 함께 할 수 있는가?
      자녀가 잘 못할 때, 화를 내는 것과 심하게 나무라는 것은 같은가, 다른가?
      등등 검토해볼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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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남곡
       그렇군요. 저두 노동현장을 뛰면서 오래 고민했던 건데..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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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화)의 적정성 ᆢ화는 나쁜 감정인가. 화도 중요한 감정자산의 하나인가?
    화는 참아야 하는가? 화를 적절히 부려써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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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요하고 일상적인 큰 테마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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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걷잡을 수 없음'이라는 의미를 다분히 담고 있는 말이라서...
    '분노'라는 '감정자체'가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이 이후에 벌어지는 '스스로도 제어되지 않는 감정의 흐름과 그로인한 판단의 error 발생'..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정하고 정당한 분노'는 이미 '분노'라고 정의하기에는 좀 적정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표출방법의 적정성(제어가능)과 사회윤리적 정당성'이...
    담보 된 그 어떤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아무 문제가 없지않나 싶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그저..
    적극적이고 전면적인 의사표시 정도인 셈이죠..
    대상이나 내용에 따라서
    '분노'라는 감정이 적정하거나 정당성을 담보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분노'는 '분노'일뿐이죠..
    제가 조성택 교수님의 문제의식이 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오히려..
    이것은 '표현방식의 성숙성이 목표달성의 합법칙성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 싶습니다...
    사회윤리적양심과
    역사적 합법칙성(시대정신?)에 맞다고 하더라도 '분노'라는 감정은.. 정당화..되거나..
    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씀드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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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충근
       생각나는대로 솔직하게 쓰다보니 글이 좀 거칠고 두서가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지우는 것도 실례인 듯 하구요....ㅠㅜ
      꺼내놓고 싶었던 말은...
      적정하다거나...
      정당하다고...
      이야기 될 수 있는 '분노 또는 분노의 결말(?)'이라는 것이
      있기는 어렵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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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는
    그저 화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상태는 좀 깊이있게 서로 통해가기란 쉽지않은 상태라고 느껴져서.
    그저 그 본질적인것
    언제 어느것 누구에라도 들어맞는 것을 찿아갈 수있는 상태란? 하고 생각해봤을때.
    화가 나는 또는 화가
    날 수 상태에서는
    정상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전개해 갈 수없지않을까요?
    촛불혁명에서 확인했듯이 유리창하나 깨지않고도 나라의 정치의 건강을 회복하려고 해 봤듯이요
    스위스에서 살때 유럽인들은 크게
    받아들이던군요
    세계에 수출할 수있는
    큰 보물이 될듯해요
    나의 앞사람이 여럿을
    해치는걸보고 조금도
    화가나지않은상태에서
    그피해가 않되도록
    스톱시키거나 쳐부수거나했을때 그당사자가 전혀 화가나지않은 상태에서도 두려움없이
    할수있겠다는 심경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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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y
  • 화, 분노 그렇지만 그에 집착하지 않음.. 이론상 그렇다고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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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노하라 스테판에셀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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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스스로 화 나고 싶을 때 화를 내고, 거두고 싶을 때 거둘 수 있는 것도 좋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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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용에
    희로애락지미발을 中이라하고
    발이개중절을 和라고 하였습니다.
    분노가 일기전 고요함에서 경계를 당하면 분노가 일 때 온전함을 잃지않고 정황을 잘 생각하여 분노를 그 상황에 맞게 행하는 것을 중도라고 하는 것 아닐까요?
    말이 아니라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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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황에 따라 참을수도 있고 버럭 화를 내서 대의를 세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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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어려운 부분이네요.
    어제도 버럭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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