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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2

훈육 訓育 DISCIPLINE

훈육 訓育 DISCIPLINE (/1230)
임용고시 교육학/교육학 용어 사전4 : 교육사회학

2010. 12. 24. 


1. 사회적 규제나 학교의 규율과 같이 사회적으로 명백하게 요청되는 행위나 습관을 형성시키고 발전시키는 것.
2. 단체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여러 가지 바람직한 습관을 형성시키거나 규율위반과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를 교정하는 것을 말한다.
3. 훈육을 위해서는 흔히 의도적으로 상과 벌이 사용되나 실제로 생활습관의 형성은 사회화(社會化)의 전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4. 최근에는 상과 벌에 의한 훈육보다는 대화나 상담을 통한 심리적 교육의 절차나 원리를 적용하려는 경향이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류민영
저는 이 블로그를 유아교육, 초등교육 그리고 중등교육 까지 우리나라의 교육에 관심있는 모든 부모님들과 예비교사 분들 그리고 현직교사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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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육 訓育 - 나무위키

훈육 - 나무위키

훈육

최근 수정 시각: 

1. [편집]

덕()으로써 사람을 인도하여 기르는 것.

2. [편집]

가르쳐 기르는 것. 순화어는 '타이름'.

3. ··[편집]

훈육은 고대 중국의 유목민족으로, 상나라 시대에 활동했다.

3.1. 역사[편집]

훈육, 귀방(鬼方), 험윤흉노는 동일한 민족이지만 시기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고 여겨진다.[1] 다만 《사기》에는 험윤과 훈육을 개별로 적고 있어 그들이 두 개의 다른 민족이라고 보기도 한다.[2] 또한 이들 모두가 황제 헌원씨의 후예라고 보기도 한다.[3] 그러나 사실상 훈육, 귀방, 험윤 등의 융적(戎狄)과 흉노 등의 유목민족은 모두 어떠한 계승관계도 찾을 수 없다.[4]

주나라의 시조 고공단보는 원래 빈(豳)에 살았는데, 훈육의 공격을 받아 그들에게 신하로 복종했으며, 이후 기산(岐山)으로 옮겨갔다.[5][6][7] 《맹자》 또한 고공단보가 신하로서 훈육을 섬긴 고사를 기록하지만[8] 고공단보가 기산으로 옮긴 이유는 강녀(姜女)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지 훈육이 원인이 아니라고 적은 점은 다르다.[9]

근대에 와서 왕궈웨이량치차오, 우치다 간푸(內田吟風) 등의 학자들은 모두 훈육, 험윤, 흉노 모두가 공통의 선조를 가진 동일한 민족이라고 여겼다. 다만 현대의 학자 린윈(林沄)은 형질인류학, 자연환경 등의 관점에서 분석하면 훈육 등 융적(戎狄)과 후세의 흉노 등의 유목민족은 어떠한 관계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10]

[1] 《晉書》卷97〈四夷傳〉:「匈奴之類,總謂之北狄。匈奴地南接燕趙,北暨沙漠,東連九夷,西距六戎。世世自相君臣,不稟中國正朔。夏曰:薰鬻,殷曰鬼方,周曰獫狁,漢曰匈奴。」[2] 《史記》〈匈奴列傳〉:「匈奴,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曰淳維。唐虞以上有山戎、獫狁、葷粥,居于北蠻,隨畜牧而轉移。」[3] 《魏書》卷1〈帝記第一〉:「昔黃帝有子二十五人,或內列諸華,或外分荒服。昌意少子,受封北土,國有大鮮卑山,因以為號。其后世為君長,統幽都之北,廣漠之野。畜牧遷徙,射獵為業,淳朴為俗,簡易為化,不為文字,刻木紀契而已。世事遠近,人相傳授,如史官之紀錄焉。黃帝以土德王,北俗謂土為托,謂后為跋,故以為氏。其裔始均,入仕堯世,逐女魃于弱水之北,民賴其勤,帝舜嘉之,命為田祖。爰歷三代,以及秦漢,獯鬻、獫狁、山戎、匈奴之屬,累代殘暴,作害中州,而始均之裔,不交南夏,是以載籍無聞焉。」[4] 林沄《戎狄非胡論》[5] 《吳越春秋》〈吳太伯傳〉:「其後八世而得古公亶甫。脩公劉后稷之業,積德行義,為狄人所慕。薰鬻戎姤而伐之,古公事之以犬馬牛羊,其伐不止;事以皮幣、金玉重寶,而亦伐之不止。古公問何所欲?曰:欲其土地。古公曰:『君子不以養害害所養。國所以亡也而為身害,吾所不居也。』古公乃杖策去邠,踰梁山而處岐周。」[6] 《史記》〈周本紀〉:「古公亶父複脩後稷、公劉之業,積德行義,國人皆戴之。薰育、戎狄攻之,欲得財物,予之。已複攻,欲得地與民。民皆怒,欲戰。古公曰:『有民立君,將以利之。今戎狄所為攻戰,以吾地與民。民之在我,與其在彼,何異。民欲以我故戰,殺人父子而君之,予不忍為。』乃與私屬遂去豳,度漆、沮,逾梁山,止於岐下。」[7] 여담으로 기산으로 옮겨간 고공단보의 해당 고사를 근거로 건물 이름을 지은 것이 임시수도기념관의 사빈당이다.[8] 《孟子》〈梁惠王下〉:「孟子對曰:『有。惟仁者為能以大事小,是故湯事葛,文王事昆夷。惟智者為能以小事大,故太王整事獯鬻,勾踐事吳。以大事小者,樂天者也;以小事大者,畏天者也。樂天者保天下,畏天者保其國。《詩》云:「畏天之威,於時保之。」』」[9] 《孟子》〈梁惠王下〉:「對曰:『昔者大王好色,愛厥妃。詩云:『古公亶父,來朝走馬;率西水滸,至於岐下;爰及姜女,聿來胥宇。』當是時也,內無怨女,外無曠夫;王如好色,與百姓同之,於王何有!』」[10] 林沄《戎狄非胡論》

훈육(訓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훈육(訓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훈육 (訓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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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육 개념
피교육자를 교사 혹은 훈육관이 의도하는 특정한 인성이나 행동 특성을 갖도록 기르는 것.

이칭 훈련(訓練)

훈육은 피교육자를 교사 혹은 훈육관이 의도하는 특정한 인성이나 행동 특성을 갖도록 기르는 것이다. 흔히 품성이나 도덕성 따위를 기르는 것을 의미하지만, 덕으로 사람을 인도하여 가르치고 기르려는 훈육(薰育)과는 달리, 훈육(訓育)은 강제성과 체벌 등 부정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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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정의
피교육자를 교사 혹은 훈육관이 의도하는 특정한 인성이나 행동 특성을 갖도록 기르는 것.

내용

서구적 교육학 개념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과정을 보면, 
영국 스펜서(Spencer, H.)의 지육-덕육-체육의 삼육론과 
독일 헤르바르트(Herbart, J. F.)의 관리-교수-훈련[훈육]의 교육론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한성사범학교 교재로 추정되는 기무라 도모지[木村知治]의 『신찬교육학』(1895)은 삼육론의 관점으로 편찬된 것인데 반해, 1907년에 간행된 윤태영 역술의 『사범교육학』과 최광옥 역술의 『교육학』, 그리고 1908년에 간행된 유옥겸 찬술의 『 간명교육학』은 헤르바르트 교육론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즉, 교육의 방법으로 윤태영은 교수-훈련을, 최광옥은 교수-훈련-체육을 나열하였고, 유옥겸은 교수-훈육-양호를 제시하는 등 이 시기 훈련과 훈육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헤르바르트는 훈육[훈련]을 통해 ‘도덕적 품성 도야’를 지향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훈육이라는 용어는 군사 분야에서 먼저 사용되었다. 즉, 「무관학교관제」(1896. 1. 11. 칙령 제2호) 제8조에 “교관은 교두의 명을 받아 훈육 및 학술과의 교수를 담임하며 학도의 행위를 감시함”이라 하여, 학생의 ‘행위 감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후 ‘학교훈육’[『조선총독부 관보』, 1914. 6. 10.], ‘자녀훈육’ 『동아일보』, 1924. 10. 13.), ‘아동훈육’, ‘불량아동훈육’, ‘점원훈육’ 등 훈육(discipline)은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가정교육과 사회교육 등 다양한 교육의 장에서 “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쳐 기르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학교 현장에 오랫동안 관행적으로 남아있던 훈육 방법은 순종하는 집단정신을 강조하던 [경성사범학교의 교사양성 과정의 부정적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부 교육학자들은 일방적인 규칙, 억압, 처벌을 중시하는 훈육과 생활지도를 구분하기도 하였다. 특히 1940년대 태평양전쟁이 확산되면서, 개인훈육론은 국가 중심의 전체주의적 훈육론으로 전환되었다. 즉, 1942년 10월 1일 제령(制令) 제33호로 반포된 「조선청년특별연성령(朝鮮靑年特別鍊成令), 훈육요지급요목(訓育要旨及要目)」(『文敎の朝鮮』, 205호)이나 훈육관이라는 용어를 보면, 훈육이 헤르바르트가 원래 의도하던 도덕적 품성 도야보다는 군사적 훈련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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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단행본
한용진 외, 『근대한국 교육개념의 변용』(학지사, 2020)
이영덕 · 정원식, 『생활지도의 원리와 실제』(교육과학사, 1994)

논문
김선혜, 「‘훈육’의 교육적 의미의 재해석」(『열린교육연구』 14-2, 2006)
김성학, 「경성사범학교 학생 훈육의 성격」(『경희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논문집』 15,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