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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9

아비담마(adhidhamma)란 무엇인가?

The Pale Blue Dot.

아비담마(adhidhamma)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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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마(adhidhamma)란 무엇인가?
∙지구별∙여행자 2018. 12. 1. 08:09
『아비담마 길라잡이』 강의 참고자료
각묵 스님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 차 례 -
1. 아비달마 불교란 무엇인가?
2. 부파불교란 무엇인가?
3. 아비달마를 특징으로 하는 불교는 아비달마 불교라 불러야 한다
4. 아비달마 불교의 특징
5. 아비달마 불교가 주류불교(主流佛敎, Mainstream Buddhism)이다
6. 북방의 아비달마(Abhidharma)와 남방의 아비담마(Abhidhamma)
7. 아비담마(adhidhamma)란 무엇인가

8. 법(法, dhamma)이란 무엇인가
9. 초기불교에서 법(dhamma)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10. 아비담마에서 법(dhamma)은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이다
11. 법(法, dhamma) 혹은 구경법은 해체(vibhajja)했을 때 드러난다
12. 이 세상에는 몇 개의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 있는가
13. 이러한 법들은 여러 가지 영역으로 분류가 된다
14.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법(dhamma)의 분류 - 4位 82法
15. 법은 찰나와 상속(相續, 흐름, santati)이다. 여기에 사무쳐야 한다
16. 법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 파악해야한다
17. 제법은 철저한 상호의존에 의해서 존재한다
18. 아비담마는 위빳사나 수행의 이론적 토대이다
- 아비담마에서 본 마음의 특징
- 부록: 여러 가지 도표들


1. 아비달마 불교란 무엇인가?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Pali: abhidhamma)를 교학체계로 하는 불교를 아비달마 불교라 한
다. 아비달마는 부파불교의 교학체계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신 뒤 100년쯤 뒤부터 나누어
지기 시작하여 후에 18개 혹은 20개로 나누어진 부파불교는 아비달마라는 방법론을 토대로 한 불교
이다. 그래서 부파불교를 교학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부를 때는 이를 아비달마 불교라 한다. 
불교 2600년 역사는 초기불교 - 아비달마(아비담마) - 반야․중관 - 유식 - 여래장 – 정토 – 밀교 – 선
불교로 전개되어 왔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 갈라짐’을 뜻하는 ‘부파(部波)’라
는 용어는 초기교단을 제외한 불교 2600년사에 존재했던 모든 불교교단에 적용되어야하는 술어이
다. 그러므로 아비달마를 토대로 하는 불교교단만을 부파불교라고 불러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인도,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 등의 북방불교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의 남방불교에서 아주 많
은 교파, 종파, 부파로 나누어진 것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불교의 교단적인 특징이기 때문이
다. 
그리고 같은 대승불교의 흐름에 속하면서도 각 교파의 교학적인 특징을 따서 반야를 교학의 토대로
하는 불교를 반야중관 불교라 하고, 식전변을 토대로 전개하는 불교를 유식 불교라 하며, 여래장과
불성을 근본 교의로 하는 불교를 여래장 불교라 하고,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 불교를
정토불교라 하며, 다라니(진언) 수지를 기본으로 하는 불교를 밀교(진언불교)라 하고, 참선수행을 근
간으로 하는 불교를 선불교라 부르는 것처럼, 아비달마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는 당연히 아비달마 불
교라 불러야 마땅하다.

2. 부파불교란 무엇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에도 단일한 교단체계를 유지해 내려오던 불교교단이 부처님이 입멸
하신 후 100년쯤 뒤에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누어진 이후의 불교교단을 학자들 특히 일본의 불교학
자들은 부파불교(剖波佛敎)라 부른다. 부파불교는 그 후 200~300년에 걸쳐 이들 두 교파로부터 다시
분파하여 20여 개의 교단(敎團)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러한 불교를 통틀어서 부파불교(剖波佛敎)라
한다. 
초기불교의 단일 교단이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 Sthavira)와 대중부(大衆部, Mahāsaṅgika)로 나누
어진 것을 근본분열이라 한다. 북방불교의『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의하면 다시 대중부에서 본말
을 합하여 9부가 전개되고 상좌부에서 본말을 합하여 11부가 나누어져서 모두 20개 부파로 전개된
다고 한다. 남방불교의『도사』(島史, Dīpavaṁsa)와『대사』(大史, Mahāvaṁsa)에 의하면 대중부 계열에
는 6개의 부파가 전개가 되고 상좌부에서는 본말을 합하여 12부로 나누어져서 모두 18개 부파가 된
다. 이처럼 두 교파에서 18개 내지 20개 부파로 나누어진 것을 지말분열이라 한다. 지말분열은 BC 2
세기경이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분열의 이유 등은 분명치 않다고 한다. 불교교단의 분파와 각
부파의 명칭에 대해서는 『인도불교의 역사』 136쪽 이하를 참조하기 바란다.
한편 이러한 부파불교의 전개양상을 잘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첫째, 남방 상좌부불교에서 전승되어오
는 『도사』와 『대사』와 『논사 주석서』를 들 수 있고, 둘째, 북방불교의 설일체유부에 속하는 세우
(Vasumitra)가 지은 『이부종륜론』이 있으며, 셋째 BC 2세기부터 AD 5세기에 만들어진 인도의 불교
비문들을 들 수 있다. 첫 번째로 든 『도사』나 『대사』등에 의하면 모두 18부파가 존재하였고, 두 번째
로 언급한 『이부종륜론』에 의하면 20부파가 있었으며 세 번째로 든 인도 각지에서 발견된 비문에 나
타나는 부파명을 근거로 앙드레 바로우(A. Bareau) 교수는 34개의 부파명을 들고 있다. 다양한 종족
과 언어와 문화를 가진 광대한 인도에서 교통까지 불편하던 시대에 불교가 인도의 여러 지역으로 전
파되어 가면서 이러한 부파가 나누어진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3. 아비달마를 특징으로 하는 불교는 아비달마 불교라 불러야 한다
의정스님의 『남해기귀내법전』과 『이부종륜론』등에 의하면 그 당시 교단을 니까야(Nikāya, 部, 모음,
집단, 교단, sect, school)라 불렀다. (『인도불교의 역사』 131쪽) 이를 토대로 일본의 학자들이 이 시대
의 불교를 부파불교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CBETA로 검색해보면 한역 대장경에는 부파란 명칭이 검
색되지 않는다.)
지금도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는 불교의 교파 혹은 종파(sect) 혹은 종단(order)을 니까야(Nikāya)라
부른다. 예를 들면 지금 스리랑카의 가장 큰 종파를 시암 니까야(Siam Nikāya)라 하는데 1753년에 서
구 열강의 침략으로 계맥이 끊어진 스리랑카 불교가 태국(Siam)에서 계맥을 다시 전승하여 스리랑카
불교를 중흥시킨 교파이다. 그 외에 유력한 종파로는 1800년에 미얀마의 계맥을 다시 전승한 아마라
뿌라 니까야(Amarapura Nikāya)와 1864년에 설립된 라만나 니까야(Ramanna Nikāya)가 있다. 현재
태국에는 마하 니까야(Mahā Nikāya)와 담마윳띠까 니까야(Dhammayuttika Nikāya)가 대표적인 종단
으로 자리하고 있고 미얀마에는 투담마 니까야(Thudhamma Nikāya)와 쉐긴 니까야(Shwegyin
Nikāya)가 대표적인 종단이다.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를 막론하고 불교 2600년 역사에는 수많은 교단 혹은 교파 혹은 부파 혹은 종파
들이 존재하여 왔다. 중국에는 5-7세기에만 13개 이상의 종파가 있었으며 후대에 더 많은 종파들로
분파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불교에도 5교9산을 위시한 많은 종파들이 있었고 지금은 100개
가 넘는 종단이 있으며 일본불교와 티벳불교 역시 마찬가지이고 남방불교의 여러 국가들에도 마찬
가지이다. 그러므로 특정시대의 불교에만 한정시켜서 그 불교를 부파불교(Nikāya Buddhism)라고 칭
하는 것은 엄정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잘 전승하여 이를 연구하여
아비달마라는 엄정한 교학체계를 완성하여 이를 수행에 적용시켜 해탈열반을 추구한 불교를 부파불
교라 칭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교는 그 교학체계의 가장 큰 특징이 되는
아비달마 불교라 불러야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비달마 불교는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사라져버린 불교가 아니고 인도에서 불교가 사
라질 때까지 항상 주류(mainstream)가 된 불교이며 지금도 남방의 불교국가에서 면면부절로 전승되
어 오는 세계의 주류불교이다.

4. 아비달마 불교의 특징
첫째, 아비달마 불교는 초기불교를 계승하는 불교교단의 정계(正系)이다. 아비달마(abhidharma)라는
술어는 ‘법(法, dharma, 다르마)에 대해서[對, abhi, 아비]’라는 일차적인 뜻을 가지며 그래서 아비달
마는 ‘법의 연구’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현장스님은 구사론에서 이를 ‘대법(對法)’으로 옮겼다. 여기서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佛法, Buddha-dhamma]과 존재하는 모든 것[一切法, 諸法, sabbe dhammā]을
뜻한다. 아비달마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대면하여 연구한[對, abhi] 것이다.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초기불교라 하며 이것은 일차결집에서 율장과 경장으로 전승이 되
었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가르침 즉 다르마를 연구하여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체계화하고 표
준화 한 것이 아비달마 불교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 발전시킨 교학체계를 아비담마/아비달마라고
하며 이것은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으로 확정이 된다.
둘째, 아비달마 불교는 제자들[성문, 聲聞, sāvaka, śrāvaka)의 불교 즉 성문들의 불교이다. 아비달마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 즉 다르마(법)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 불
교는 제자들의 불교 배우는 입장의 불교 전통을 계승하는 불교이다. 이러한 수동적이고 보수적인 입
장의 불교이었기 때문에 후대 대승교도들은 이를 성문승(聲聞乘, Śrāvaka-yāna)이라 불렀다. 성문(聲
聞)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즉 제자들이라는 뜻이다. 성문은 특히 아비달마 불교시대에는
출가 제자들에게만 한정되었다.
셋째, 이처럼 아비달마 불교는 출가주의 불교이다. 그들은 출가하여 비구 혹은 비구니가 되어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하였다. 재가와 출가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고 출가를 전제로 하여 교리나 수
행형태를 조직하였다. 
그러므로 아비달마 불교는 승원에 머물면서 금욕생활을 하고 교학과 수행에 전념하였다. 당시 교단
의 주된 관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한 교리의 해석이었으며, 자연히 출가자와 승원(僧院)
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불교의 성격을 띠어갔다. 따라서 출가를 전제로 하여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
서 수행하고, 또 타인의 구제보다는 자기 수행의 완성을 우선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후대의 대승불교
로부터 소승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대승에서 소승으로 지칭하는 불교는 바로 이 아비달마 불
교 혹은 부파불교를 뜻한다.
넷째, 국왕이나 왕족이나 큰 상인들의 후원을 받았다. 출가 수행자들이 승원에서 교학과 수행에 전념
할 수 있었던 것은 국왕이나 왕족이나 큰 상인들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광대한 장원을
사원에 희사했다. 아쇼카 왕이 불교에 귀의하여 인도의 10곳으로 전법사단을 파견한 것은 아비달마
불교가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고 아비달마 교학이 더 정교하게 다듬어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나
(『인도불교사』70쪽) 카니시까 왕이 설일체유부에 귀의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인도
에서 만들어진 여러 비문들은 그 지방의 유력한 인사들이 교단에 토지를 보시한 사실을 적고 있다.
다섯째, 아비달마 불교는 수행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였다. 특히 불교의 정계(正系)임을 자부하
는 상좌부 불교는 아비달마(아비담마)가 철저하게 위빳사나 수행의 토대가 됨을 강조한다.(『아비담마
길라잡이』제8장 §1의 [해설]2를 참조할 것.) 빳냣띠(paññatti, 施設, 槪念)를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빠
라맛타, paramattha, 究竟法)로 해체해서 드러나는 구경법들 가운데 열반을 제외한 71가지 구경법들
이 위빳사나 수행의 토대가 된다고 강조한다.(72가지 법들은『아비담마 길라잡이』제1장 §2의 [해설]
2와 제2장 §3과 특히 제7장 §1을 참조할 것.)
아비달마 불교 시대의 출가자들은 생활의 걱정 없이 출세간주의를 관철하여 연구와 수행에 주력하
였으며 이렇게 하여 분석적이고 치밀한 불교교리를 완성시켰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남방 상좌부의
칠론( 七 論 )과 설일체유부의 칠론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논( 論 )’이라는 말의 원어가 ‘아비다르마
(abhidharma)’이고 이를 한역(漢譯)한 것이 아비달마(阿毘達磨, 阿毘曇)이다. 북방 아비달마를 집대성
한 것으로는 세친스님의『아비달마 구사론』을 들 수 있고 남방 아비담마를 토대로 부처님의 가르침
을 정교하게 해석한 것으로는 붓다고사 스님의 『청정도론』을 들 수 있다.
여섯째, 넓혀서 생각하면 아비달마뿐만 아니라 더 후대의 반야중관, 유식, 여래장, 정토, 밀교, 선불교
도 모두 ‘법에 대해서’ 혹은 ‘법의 연구’로 번역되는 아비달마 불교에 영역에 넣을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 2600년사에 존재하는 모든 불교는 모두 부처님의 법(달마)을 그 시대 혹은 그 지역에 맞게 연구
하고 해석한 불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 2600년 역사는 모두 초기불교와 아비달마 불교
의 둘로 대별할 수 있다.

5. 아비달마불교가 주류불교(主流佛敎,Mainstream Buddhism)이다
이처럼 부파불교에서 완성한 교학과 수행체계인 아비달마 불교는 지금까지도 남방의 스리랑카, 미얀
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에 전해져서 지금까지도 단절됨이 없이 전승되어 온다. 그러므
로 초기불교의 핵심인 법을 대면하여 연구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해석하고 표준화하여
계승하고 있는 아비달마 불교는 불교역사에서 단절된 적이 없는 불교체계이다.
대승불교가 생긴 뒤에도 부파교단은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대승불교를 압도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AD 399년에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로 성지순례를 한 법현 스님은『법현전』에서 그 무렵 인도에는 소
승을 학습하는 절과 대승을 학습하는 절과 대승과 소승을 함께 학습하는 절 등의 세 가지가 있었다
고 적고 있다. 여기서 그는 소승불교가 유행하던 나라 9개국, 대승불교가 유행하던 나라 3개국, 둘을
겸학하던 나라 3개국을 들고 있다. 
현장 스님(602-664)의『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소승을 배우는 사원 60개소, 대승을 학습하는 곳 24개
소 둘 다를 겸하는 곳 15개소이다. 이처럼 소승불교 즉 부파불교 쪽이 훨씬 많다. 
한편 671년에 인도를 탐방한 의정스님(635-713)의『남해기귀내법전』에 의하면 이 시대에도 소승불
교는 대승을 압도하고 있었다.(이상『인도불교의 역사』147-148쪽 참조) 
인도에서 불교가 없어질 때까지 인도불교의 주류는 바로 이 부파불교 혹은 아비달마 불교 혹은 소승
불교였다. 인도만 한정해서 말하면 대승불교는 한 번도 주류였던 적이 없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지
금도 불교 정계임을 자부하는 상좌부 불교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그들의 절대적인 귀의를 받으며 엄정한 교학과 수행체계로 면면부절하게 전승되어 온다.

6. 북방의 아비달마(Abhidharma)와 남방의 아비담마(Abhidhamma)
강사는 아비담마(Abhidhamma)라는 용어와 아비다르마(Abhidharma)라는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하
고 있음을 밝힌다. 아비담마는 남방의 상좌부(Theravāda)에서 전승되어온 교학체계를 뜻하고 아비다
르마는 유부나 경량부 등 북방에서 심화된 교학을 말한다. 이 아비다르마는 중국에서 아비달마(阿毘
達磨, 阿鼻達磨)로 음역이 되어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아비담마는 중국에서 아비담(阿毘曇)으로 음역
된 듯하다.
이처럼 남방불교에 전승되어오는 아비달마의 가르침은 빠알리어로 표기하여 아비담마
(Abhidhamma)라 칭하고 북방불교에 전승되어오는 아비달마의 가르침은 산스끄리뜨 아비다르마
(Abhidharma)의 음역인 아비달마(阿毘達磨, 阿鼻達磨)라 구분하여 부르는 것이 학계의 흐름이다. 이
둘을 통칭할 때도 후자인 아비달마로 칭한다. 필자도 본 교재에서 이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이하 본 강의 교재는 남방 상좌부의 아비담마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아비담마
(Abhidhamma)로 표기하고 있음을 밝힌다.

7. 아비담마(adhidhamma)란 무엇인가
문자적으로 ‘아비담마(abhidhamma, Sk. abhidharma)’는 접두어 abhi와 명사 dhamma로 분석된다.
여기서 접두어 abhi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① about(~에 對해여)와 ② above(~의 위에
= 뛰어난, 수승한[勝])이다. 
그러므로 전자로 해석하면 아비담마는 ① ‘법에 대해서’라는 뜻이 되어 ‘법의 연구’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현장 스님은『아비달마 구사론』에서 아비다르마를 대법(對法)으로 옮겼다. 아비담마는 초기불
교의 핵심인 법(담마)을 대면하여 연구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해석하고 표준화한 것이다.
(standardization) 
후자로 해석하면 아비담마는 ② ‘수승한 법’이라는 뜻이 되어 ‘법의 핵심’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승법(勝法)으로 옮기기도 하였고 무비법(無比法)으로도 옮겼다. 특히 붓다고사 스님은『담
마상가니』의 주석서인 『앗타살리니』에서 ‘abhi’라는 접두어를 ‘뛰어나다, 특별하다’라는 뜻 즉 후자로
정의하고 있다. CBETA로 검색해보면 중국에서도 후자 즉 승법(勝法)이나 무비법(無比法)으로 옮긴 경
우가 더 많다.
한편 주석서 문헌들은 경의 가르침을 방편적인 가르침[方便說, pariyāya-desana]이라 부르고 아비담
마의 가르침을 비방편적인 가르침[ 非 方 便 說 , nippariyāya-desana]이라 부르고 있다.(DhsA.154;
MAṬ.ii.123 등) 경의 가르침은 듣는 사람의 처지나 입장을 고려한 것이고 아비담마의 가르침은 그런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법만을 대면하여[對法] 법의 핵심만을 드러낸[勝法] 가르침이기 때문이
다.

8. 법(法, dhamma)이란 무엇인가
법(法, 담마, dhamma, Sk. dharma)은 인도의 모든 사상과 종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술어이며
또한 방대한 인도의 제 문헌들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
다. 초기불교 문헌에서도 dhamma(Sk. dharma)는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이다. 
빠알리『삼장』에 나타나는 담마(dhamma)의 여러 의미를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는『담마상
가니』(法集論)의 주석서인『앗타살리니』(DhsA.38)에 나타나는 붓다고사 스님의 주석이 가장 잘 알려
져 있다. 여기서 스님은 dhamma를 ① 빠리얏띠(pariyatti, 교학, 가르침) ② 헤뚜(hetu, 원인, 조건) ③
구나(guṇa, 덕스러운 행위) ④ 닛삿따닛지와따(nissatta-nijjīvatā, 개념이 아닌 것)의 넷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 』 (MA.i.17)에서 붓다고사 스님은 ‘모든 법[ 諸 法 , 一 切 法 , sabbadhammā, sabbe dhammā]’을 설명하면서 법(dhamma)의 용처를 아래의 열 가지 경우로 설명하고 있
다. “‘법(dhamma)’은 ① 교학(가르침, pariyatti), ② 진리(sacca), ③ 삼매(samādhi), ④ 통찰지(paññā),
⑤ 자연적인 현상(pakati), ⑥ 고유성질(sabhāva), ⑦ 공성(suññatā), ⑧ 공덕(puñña), ⑨ 범계(犯戒,
āpatti), ⑩ 알아야 할 것(ñeyya) 등을 나타낸다.
법(dhamma)에 대한 경들과 여러 주석서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법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 가르침(교학, 진리, 덕행)으로서의 법이요, 둘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뜻하는 법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요즘 서양학자들은 전자를 대문자 Dhamma로 후자를 소문자 dhamma로 표
기한다. 전자는 불법(佛法, Buddha-dhamma)으로 정리되고 후자는 일체법(一切法, 諸法, sabbe
dhammā)으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佛法]과 일체법은 같은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에서도 “일체법이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一切法 皆是佛法,
제17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佛法]이 바로 법(dhamma)이
요,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밝힌 것이며[一切法], 이것은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과 깨달음을 실현
하는 토대가 된다.

9. 초기불교에서 법(dhamma)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초기불교에서 법은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교학과 수행으
로 구성된다. 세상의 모든 학문과 사상과 종교는 이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
교도 역시 그러하다. 불교에서는 전자를 교학(빠리얏띠, pariyatti, 배움) 이라 부르고 후자를 수행(빠
띠빳띠, paṭipatti, 도닦음)이라 부른다. 초기불교에서 교학은 아래의 여섯 가지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수행은 37보리분법으로 정리된다. 이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자세한 것은『초기불교이해』
를 살펴보기 바란다.
① 교학으로서의 법
『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들은 교학으로서의 법을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의 여섯으
로 정리하였다. 이것은『초기불교이해』제2편의 제6장부터 제16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여
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온(蘊, 무더기, khandha): 5온 = 물질[色, rūpa], 느낌[受, vedanā], 인식[想, saññā],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ā], 알음알이[識, viññāṇa]의 다섯 가지 무더기이다.
처(處, 감각장소, āyatana): 12처 =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內
處]와 형색․소리․냄새․맛․감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대상[六外處]인 12가지 감각장소이
다.
계(界, 요소, dhātu): 18계 = 12처의 마음[意, 마노, mano]에서 여섯 가지 알음알이를 독립시켜서 모
두 18가지가 된다. 즉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와 형색․소리․냄새․맛․감촉․
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와 눈의 알음알이[眼識], 귀의 알음알이[耳識], 코의 알음알이[鼻識],
혀의 알음알이[舌識], 몸의 알음알이[身識],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의 여섯을 합하여 18가지가 된다.
근(根, 기능, indriya): 22근 = 22근은『초기불교이해』제10장의 자료를 참조할 것.
제(諦, 진리, sacca): 4제 =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
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
리[苦滅道聖諦]의 네 가지 진리이다.
연(緣, 조건발생, paccaya, paṭiccasamuppāda): 12연기 =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나타낸다.
『초기불교이해』제15장과 제16장을 참조 것.
② 수행으로서의 법
주석서들은 37보리분법(菩提分法, 助道品, bodhipakkhiya-dhammā)을 들고 있다.
4념처(마음챙김의 확립), 4정근(바른 노력), 4여의족(성취수단), 5근(기능), 5력(힘), 7각지(깨달음의 구
성요소), 8정도(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 八支聖道)의 일곱 가지로 분류되며 법수로는
모두 37가지가 된다.(.(이들에 대해서는『초기불교이해』제3편의 제17장부터 제25장까지를 참조할 것.

10. 아비담마에서 법(dhamma)은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이다
불교에서 법(dhamma)은 ① 부처님 가르침[佛法, Buddha-dhamma]과 ② 존재하는 모든 것[一切法,
諸法, sabbe dhammā]을 뜻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비담마는 이러한 법(dhamma)을 연구하는(abhi,
對) 체계이다. 그러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아비담마는 법을 연구하는가? 아비담마는 ‘고유성질[自性,
sabhāva, Sk. svabhāva]’이라는 방법론을 도입하여 부처님 가르침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분
류하고 분석하고 고찰하여 체계화하고 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법을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
(attano sabhāvaṁ dhārenti ti dhammā - DhsA.39)”으로 정의한다. 북방 아비달마의 논서인『아비달마
구사론』에서도 현장스님은 능지자상(能持自相) 혹은 임지자성(任持自性)으로 옮겼다. 
아비담마는 먼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유성질을 가졌는가 가지지 않았는가라는 기준으로 고찰하여
① 고유성질을 가지지 않은 것들을 ‘개념’ 혹은 ‘개념적 존재(빤냣띠, paññatti, Sk. prajñapti, 施設, 假
名)라 하여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개념적 존재는 허공 꽃과 같고 토끼 뿔과 같고 거북이 털과
같아서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비담마는 이렇게 개념적 존재를 해체하거나 배제하고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②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을 아비담마에서는 궁극적 실재, 혹은 구경법[勝義法, paramatthadhamma]이라 부른다. 아비담마 전반에서 별다른 설명이 없는 한 법(dhamma)은 바로 이 구경법을
뜻한다. 아비담마는 이처럼 부처님이 설하신 다양한 법들을 고유성질을 가진 것[任持自性]이라는 측
면에서 연구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해석하고 표준화한 것이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존재에는 ① 인습적인 것(sammuti)과 ② 궁극적 인 것(paramattha)의 두 가지가
있다.(VbhA.95 등) 
① 인습적인 것은 보통의 개념적인 것(paññatti)과 인습적 표현(vohāra)을 지칭한다. 예를 들면, 중생,
사람, 남자, 여자, 동물 등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우리의 분석적이지 못한 밑그림을 구성하는, 외관
상 견고하게 남아 있는 산, 바위, 나무 , 집 등 여러 대상들이 모두 인습적인 것(sammuti)에 포함된다.
이런 개념들은 궁극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아비담마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나타내는 대상은 그들 자체로는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개념적인 것이지 사실 그대로가 아니다. 아비담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
은 고유성질[自性, sabhāva]을 가진 실재가 아니다. 여러 궁극적인 것들이 모여져 이루어진 것들을
편의상 각각 다른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을 뿐이다.
② 궁극적인 것은 그와는 반대로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sabhāva)을 가진다. 이것은 최종적인 것이
요,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존재의 구성성분이며, 경험을 정확하게 분석한 결과로서 존재하는 구극
의 단위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법(dhamma)이라 한다. 예를 들면 사람 남자 여자 등은 인습적인 것
이지 구극의 단위가 아니다. 사람이란 지·수·화·풍의 사대와 그에서 파생된 물질인 눈·귀·코·혀·몸 등과
마음, 이 마음과 같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신작용들[마음 부수]이라는 최소단위들이 모여서 이루어
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땅의 요소나 물의 요소, 감각접촉, 느낌, 의도 등은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가진 궁극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것은 인습
적인 존재의 영역에 속하며 땅의 요소 등은 궁극적인 실재라 부른다. 
이처럼 우리가 아비담마의 분석적 도구를 가지고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여보면 이런 인간이니 자연
이니 너니 나니 하는 등의 개념 그 자체는 궁극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정신-물리적[名
色, nāma-rūpa]인 과정일 뿐이 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정신-물리적인 과정들은 모두 최소단위들이
매순간 특정한 조건하에서 서로 조합되어 생멸을 거듭하는 것이다. 이런 그들 자신의 고유성질
(sabhāva)을 가진 최소단위(dhamma)들을 아비담마에서는 궁극적 실재(paramattha, 혹은 구경법, 究
竟法, paramattha-dhamma)라 한다.
이런 궁극적 실재는 정신-물리적인 현상의 구체적 본질로서 존재하지만 너무 미세하고 심오해서 훈
련이 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이것들을 인식할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은 개념(paññatti)들로
뒤덮여 있어서 궁극적 실재를 보지 못한다. 대상에 지혜로운 주의[如理作意, yoniso manasikāra]를
기울임으로써 인간은 개념을 넘어서 보게 되고 궁극적 실재를 앎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 실재는 최상의 지혜[智]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아비담마 길라잡이』제1장 §1의 [해설]에서
인용)

11. 법(法,dhamma) 혹은 구경법은 해체(vibhajja)했을 때 드러난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의 특징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니까야에서는 존재를 온․처․계․근․제․연 즉 5온․
12처․18계․22근․4제․12연기의 법들로 해체해서 설하고 있고, 아비담마/아비달마에서는 존재를 고유
성질의 차이에 따라서 82법, 75법, 100법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해체하는가? 개념[施設, paññatti]을 해체한다. 인간은 실로 개념의 동물이다. 인간은
수많은 대상을 대하면서 무수한 인식이나 관념들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 요소
를 뽑아내어 종합하여 특정한 개념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만들어내면 우리는 즉시 그
것에 의미부여를 하게 되고 그것을 실체화하여 그것에 속아버리게 된다. 개념들에 묶여있는 한 진정
한 자유, 진정한 해탈이란 없다.
여기서 ‘개념’ 혹은 ‘개념적 존재’는 빤냣띠(paññatti, prajñapti)를 옮긴 것이다. 이를 중국에서는 시설
( 施 設 )로도 옮기고 『 중론 』 에서는 가명( 假 名 )으로도 옮겼다. 그러면 무엇으로 해체하는가? 법들
(dhammā)로 해체한다. 나라는 개념, 중생이라는 개념, 세상이라는 개념, 미인이라는 개념, 돈이라는
개념, 권력이라는 개념, 신이라는 개념을 법들로 해체한다. 이런 것들에 속으면 그게 바로 생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체해서 드러나는 궁극적 실재를 구경법(究竟法, paramattha-dhamma)이라 한다.
해체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불전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
으로 칭송되는 왕기사 존자는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S8:8)이라고 찬탄하고 있
다. 여기서 해체는 위밧자(vibhajja)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 위밧자라는 술어는 빠알리『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위
밧자와딘(vibhajja-vādin, 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 불렀다.
그래서『상윳따 니까야』「와지라 경」(S5:10)에서 와지라(Vajirā) 비구니 스님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읊고 있다.
“왜 그대는 ‘중생’이라고 상상하는가? 
마라여, 그대는 견해에 빠졌는가?
단지 형성된 것들[行]의 더미일 뿐 
여기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도다. {553}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더기들[蘊]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로다. {554}
여기서 ‘중생’은 개념적 존재[施設, paññatti]이고 ‘형성된 것들[行]’과 무더기들[蘊]은 법들(dhammā)
이다. ‘마차’는 개념적 존재의 보기이고 ‘부품들’은 법들의 보기이다. 불교에서 ‘나’라는 개념적 존재
[施設, paññatti]를 오온이라는 ‘법(dhamma)’들로 해체해서 보는 것은 이처럼 오온무상(五蘊無常)과
오온개고(五蘊皆苦)와 오온무아(五蘊無我)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해체해서 보기의 가장 좋은 비유로는 「대념처 경」(D22)에 나타나는 백정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세존
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마치 솜씨 좋은 백정이나 그 조수가 소를 잡아서 각을 뜬 다음 큰길 네 거리에 이를 벌
려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
(界)별로 고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D22 §6; M10
§12 )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무슨 뜻인가? 백정이 소를 키울 때도 도살장으로 끌고 올 때도, 끌고 온 뒤에 묶어서 둘 때도, 잡을
때도, 잡혀 죽은 것을 볼 때도, 그것을 베어서 부분마다 나누지 않고서는 그에게 ‘소’라는 인식은 사
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뼈로부터 살을 발라내어 앉아있을 때 ‘소’라는 인식은 사라지고 ‘고기’라는 인
식이 일어난다. 그는 ‘나는 소를 팔고, 그들은 소를 사가져 간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고기
를 팔고, 그들은 고기를 사가져 간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이 비구가 이전의 재가자이었거나 출가
를 하였어도[명상주제를 들지 않는] 어리석은 범부일 때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덩어리
를 분해(해체)
하여 요소별로 따로따로 반조하지 않는 이상 그것에 대해 중생이라거나 사람이라거나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DA.iii.770; MA.i.272;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183)
나와 세상 등을 온․처․계․연 등의 법들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법으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그는 불교
적 수행을 하는 자가 아니다. 개념적 존재로 뭉쳐두면 속는다. 법들로 해체해야 깨닫는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12. 이 세상에는 몇 개의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 있는가

고유성질을 가진 것이 법이라면 당연히 이 세상에는 몇 개의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 있는
가를 규명해야한다. 이것은 아비담마의 출발점이요 토대요 기초이다. 상좌부에서는 82법을 들고 있
고, 설일체유부에서는 75법으로 결론짓고, 대승의 아비달마인 유식에서는 100법을 들고 있다. 
예를 들면 화학에서는 이 세상에서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물질을 원소기호로 정리하여 최근에
코페르니슘을 112번으로 명명하였으며 비공식적으로는 118번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방
법론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물리와 화학은 물질만을 다루지만 아비달마는 정신의 영역까
지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로 해체해서 설하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화학에서는 원자는 고유성질을 가진 최소단위이지만 물질은 원자상태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남․북방 아비달마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설명한다. 물질은 최소단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나라 깔
라빠(kalāpa) 상태로 존재한다고 한다. 물질 기본적으로 여덟 가지 법들의 무리(깔라빠)로 이루어져있
다[八事具生]고 남․북방 아비달마는 이구동성으로 강조한다. 여기에 대해서는『아비담마 길라잡이』제
6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13. 이러한 법들은 여러 가지 영역으로 분류가 된다

존재하는 모든 법들은 일체법으로 분류가 되고, 일체법은 다시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분류가 되며, 유
위법은 다시 심법과 심소법과 색법으로 분류가 되고 이 가운데 심소법은 다시 공통되는 것들, 해로운
것들, 유익한 것들을 분류가 되며 이는 다시 반드시들과 때때로들로 분류된다.(『아비담마 길라잡이』
참조) 이것은 생물학에서 생물을 ‘계․문․강․목․과․속․종’으로 분류하는 것과 같은 방법론이라 할 수 있
다.
이러한 일체법을 상좌부에서는 심․심소․색․열반의 4위(位)의 4가지 영역의 82법으로 분류하고 설일
체유부에서는 여기에다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을 설정하여 모두 5가지 영역[五位]의 75법으로
분류하고 대승 아비달마인 유식에서는 다섯 가지 영역[五位]의 100법으로 분류한다.(도표를 참조할
것) 이 가운데 심(心)․심소(心所)․색(色)․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은 유위법이고 열반은 무위법이
다.(아래 도표 참조)
상좌부와 설일체유부의 법수들의 심․심소․색․열반의 4위(位)의 법들은 대동소이한데 설일체유부에서
심불상응행법을 설정하는 것이 남방 아비담마와 북방 아비달마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14.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법(dhamma)의 분류 - 4位 82法

① 마음[心, citta]: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ārammaṇaṁ cintetī ti cittaṁ).”(DhsA.63.) 마음
은 대상을 안다[了別]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다양하게 일어나더라도 안다는 특징으
로만 본다면 하나이지만 그 하나인 마음을 아비담마에서는 여러 유형으로 구분짓고 있다. 이런 유형
들은 복수로 ‘마음들’이라고 표현하는데 ① 마음이 일어나는 곳[地, bhūmi, 경지]와 ② 업과 과보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89가지로, 더 자세하게는 121가지로 구별한다.(<도표> 참조)
② 마음부수(마음附隨, 心所, 쩨따시까, cetasika): “[마음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며, 동일한 대상
을 가지고 동일한 토대를 가지는, 마음과 결합된 52가지 법을 마음부수들이라 한다.”(『아비담맛타 상
가하』II.1) “사람들이 비록 ‘왕이 온다.’고 말하지만 왕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그는 항상 수행원들
과 함께 온다. 그와 같이 마음이 일어날 때는 결코 혼자 일어나지 않고 항상 마음부수라는 수행원들
과 함께 일어난다.”(DhsA. 67) 공통되는 것 13가지, 해로운 것 14가지, 아름다운 것 25가지로 모두 52
가지로 분류한다.(<도표> 참조)
③ 물질[色, rūpa]: “변형(變形)된다고 해서 물질이라 한다.”(S22:79) “‘변형된다(ruppati)’고 했다. 이것
은 물질(rūpa)이 차가움 등의 변형시키는 조건과 접촉하여 다르게 생성됨을 두고 말한 것이
다.”(SAṬ.ii.210) 변형(ruppana)은 변화(viparinnāma)와 다르다. 변형(變形)은 형태나 모양이 있는 것이
그 형태나 모양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물질만의 특징이다.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
(수․상․행․식)와 같은 정신의 무더기들의 경우 변화는 있으되 형태나 모양이 없기 때문에 변형은 없
다. 그래서 변형은 물질에만 해당된다. 물질은 구체적인 물질 18가지와 추상적인 물질 10가지로 모
두 28가지로 분류한다.(<도표> 참조) 
④ 열반(涅槃, nibbāna): “출세간이라 불리고, 네 가지 도로써 실현해야 하며, 도와 과의 대상이고, 얽
힘이라 부르는 갈애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아비담맛타 상가하 VI.30)


15. 법은 찰나와 상속(相續,흐름,santati)이다. 여기에 사무쳐야 한다

고유성질을 가진 것이 법이다. 그리고 열반을 제외함 모든 유위법들은 찰나적인 존재이다. 이것이 아
비담마에서 설명하는 법의 가장 큰 특징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찰나(刹那, khaṇa)를 ‘법의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으로 이해한다. <주1>
<주1>
예를 들면, 설일체유부에서는 찰나를 “하나의 법이 지닌 온갖 상(즉 생․주․이․멸)의 작용이 모두 이루
어질 때”라고 정의하기도 하고, “법(존재) 자체를 획득하고서 무간(無間)에 바로 소멸하는 것”라고 정
의하기도 한다.(권오민 역,『아비달마 구사론』251쪽, 244쪽, 593쪽 참조) 그래서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는 ‘법의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이라고 찰나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학자들은『아비
달마 구사론』을 분석하여 아비달마의 찰나는 75분의 1초 정도의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상좌부 주석
서들의 설명을 보면 상좌부의 찰나는 훨씬 더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이 찰나는 다시 일어남[生, uppāda]과 머묾[住, ṭhiti]과 무너짐[壞, bhaṅga]의 세 부분으로 이
루어져 있다고 주석서들은 말하고 있다.(『아비담마 길라잡이』제4장 §6과 해설 참조) 서양에서는 이
것을 sub-moment라고 옮기고 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찰나(亞刹那)’라고 옮겼다. 그러나 이
아찰나라는 술어는 주석서의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찰나는 전문술어로 인정하지 않기 때
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고유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찰나를 아찰나로 쪼갤 수는 있고, 아찰나를 다
시 아아찰나로 아아찰나는 다시 아아아찰나로 … 이렇게 쪼갤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아찰나로 쪼개
버리면 법이 가지는 고유성질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전문술어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그
래서 찰나는 ‘법의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찰나동안에 존재하는 법은 당연히 조건발생 즉 연이생(緣而生)이다. 그리고 전찰나의 법이
멸하면 바로 다음 찰나의 법이 조건발생한다. 그러므로 단멸론도 절대로 될 수 없다. 이것을 남․북 아
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에서는 등무간연(等無間緣, samanantara-paccaya)이라 하여 아주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전찰나가 멸하면 후찰나로 흘러간다.[相續, santati] 그러니 법은 단멸론도 상주론도 아
니다. 아비담마는 이렇게 법들을 찰나(khaṇa, Sk. kṣaṇa)와 흐름[相續]으로 멋지게 설명해낸다.
찰나와 흐름(상속)은 모든 불교 특히 남․북방 아비담마/아비달마와 대승의 아비달마인 유식 교학의
양대 축이 된다. 상좌부 아비담마 뿐만 아니라 모든 북방불교의 교학적 토대가 되는『아비달마 구사
론』전체에서 찰나와 상속은 아주 많이 나타나고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유찰
나(有刹那) 즉 찰나적 존재”(『아비달마 구사론』제2권 593쪽)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찰나란] 법(존
재) 자체를 획득하고서 무간(無間)에 바로 소멸하는 것을 말하니, 이와 같은 찰나(kṣaṇa)를 갖는 법을
‘유찰나(kṣaṇika)’라고 이름한다.”라고 찰나를 정의한다.(Ibid) 그래서『아비달마 구사론』의 역자는 “찰
나적 존재를 설하는 유부에 있어 존재(법, dhamma)와 찰나는 동의어이다.”라고 강조한다.(제3권 925
쪽)
그리고 찰나와 상속 특히 상속은『아비달마 구사론』제9품「파집아품」(破執我品)에서 자아 등의 실체
가 있다는 삿된 견해를 척파하는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온의 상속’, ‘제온의 상
속’, ‘오온의 상속’, ‘유루온의 상속’ ‘찰나생멸하는 제행의 불이(不異)의 상속’이라는 표현이『아비달마
구사론』제9품에는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아비달마 구사론』권오민 역, 제4권 1340쪽 등과 특히
제4권 1379~1380쪽을 참조할 것.)
그리고 이 찰나와 상속은 대승불교의 아비달마인 유식으로 그대로 전승되어서 유식의 가장 중요한
이론인 식전변설로 전개된다. 세친 스님의 제자인 안혜 스님은『유식30송』을 설명하면서 이 식전변
을 ‘인찰나가 멸하고 과찰나가 인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으로 멋지게 해석한다. 그리고 유식의 여
러 주석서에서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현행훈종자(現行薰種子),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구조
로 식전변을 멋지게 설명하고 있다.(『成唯識論疏抄』등) 
이처럼 남․북방 아비담마/아비달마와 대승 아비달마인 유식도 유위법을 찰나와 흐름[相續]으로 설명
해 낸다. 이것이 아비담마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사무치지 못하면 아비담마
와 유식은 한낱 고승들의 언어적 유희에 불과하게 되고 말 수 있으니 두려운 일이다. 
나아가서 윤회는 이러한 찰나생․찰나멸의 흐름으로 설명된다. 그래서『청정도론』등은 “무더기(蘊, 온)
와 요소( 界 , 계)와 장소( 處 , 처)의 연속이요, 끊임없이 진행됨을 윤회라고 한다.”(Vis.XVII. 115;
DA.ii.496; SA.ii.97)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상좌부 아비담마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물․심의 현상은 생멸을 거듭하지만 물질이 생멸하는
속도와 마음이 생멸하는 속도는 서로 다르다고 설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에서는 물질이 머무는 동안
마음은 16번이나 일어났다가 사라진다고 가르친다.(물질이 일어나는 순간까지 합치면 17번이 되고
그래서 1:17로 정리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상좌부 아비담마의 인식론은 정교하게 체계화되었다. 이
렇게 인식과정을 정리해 보면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 같은 우리 마음은 너무나 엄연한 법칙에 의해서
매찰나 생멸하고 있다는 것을 아비담마는 가르쳐주고 있다.


16. 법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 파악해야한다

이것은 모든 불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다
“법들에는 보편적인 특징[共相]과 개별적인 특징[自相]의 두 가지 특징(lakkhaṇa)이 있다. 이 둘 가운
데서 물질의 무더기[ 色 蘊 ]는 변형되는 것이 개별적 특징[ 自 相 , paccatta -lakkhaṇa = sabhāvalakkhaṇa]임을 밝히셨다. 변형되는 것은 물질의 무더기에만 있고 느낌 등(즉 수․상․행․식)에는 없기
때문에 개별적 특징이라 불린다. 무상․고․무아라는 특징은 느낌 등에도 있다. 그래서 이것은 보편적
특징[共相, sāmañña-lakkhaṇa]이라 불린다.”(SA.ii.291∼292)
중국에서는 보편적 특징을 공상(共相)으로 개별적 특징을 자상(自相)으로 옮겼다. 이 자상(自相)과 공
상(共相)은 법(dhamma)을 파악하고 구명하고 이해하고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으로 아비담마/
아비달마와 중관과 유식과 여래장 계열의 모든 논서에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자상과 공
상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교교학을 논할 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비담마․아비달마 특히『아비달마 구사론』에서 보듯이 북방 아비달마가 이처럼 제법의 자상의 입장
을 너무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반야부의 경들은 제법무아로 특징지어지는 공상(共相)을 강조하고 있
는 것이 분명하다. <주>
<주> 自相謂一切法自相。如變礙是色自相。領納是受自相。取像是想自相。造作是行自相。了別是識
自相。如是等。若有為法自相。若無為法自相。是為自相。共相謂一切法共相。如苦是有漏法共相。
無常是有為法共相。空無我是一切法共相。-『대반야바라밀다경』
그러나 <주>에서 보듯이 반야부의 경들에도 제법의 자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자상을 말
하지 않으면 우리는 법들의 구분이나 차이나 분류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야․
중관은 단지 공상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반야심경』은 오온[자성]개공(五蘊[自性]
皆空)을 강조하고 있다.


17. 제법은 철저한 상호의존에 의해서 존재한다

찰나동안에 존재하는 법은 당연히 조건발생 즉 연이생(緣而生)이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24가지
조건[緣, paccaya]을 통해서 모든 법의 상호의존[paṭṭhāna] 혹은 상호관계를 밝히고 있고, 설일체유부
에서는 6인-4연-5과로써, 유식에서는 10인-4연-5과로써 제법의 상호의존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상호의존은 크나큰 힘(satti, śakti)을 가진다. 화엄의 중중무진연기는 이러한 상호의존이 발달된 것이
지 이것을 초기경의 12연기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북방의『아비달마 구사론』에서는
제법의 상호관계를 6인-4연-5과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데 용어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 6인: 능작인, 구유인, 상응인, 동류인, 변행인, 이숙인
② 4연: 증상연, 등무간연, 소연연, 인연
③ 5과: 증상과, 사용과, 등류과, 이숙과, 이계과
이렇게 남방불교의 핵심인『청정도론』과 북방불교의 요체라 할 수 있는『아비달마 구사론』은 이러한
상호의존[緣]을 통해서 제법의 상호관계를 심도 깊게 설명해내고 있다. 상호의존은『아비담마 길라잡
이』제8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18. 아비담마는 위빳사나 수행의 이론적 토대이다

위빳사나는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수행이다.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것
은 그 대상이다. 사마타의 대상은 닮은 표상이라는 개념[施設]이고 위빳사나의 대상은 바로 이 법이
다. 그러므로 아비담마는 위빳사나 수행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특히 이 위빳사나의 대상이 되는 법
을 구경법(究竟法, 勝義法, paramattha- dhamma)이라 부른다.
위빳사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施設, 假名, 빤냣띠, paññatti)이라는 술어와 법(담마,
dhamma)이라는 술어를 구분해야한다. 예를 들면 ‘사람, 동물, 산, 강, 컴퓨터’ 등 우리가 개념지어 알
고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빤냣띠 즉 개념적 존재이다. 이것들은 다시 여러 가지의 고유성질을 가진 법
들로 분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적 존재(빤냣띠, paññatti)는 이런 여러 가지 고유성질을 가진 법
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강이라 하지만 거기에는 최소 단위인 물의 요소(āpo-dhātu)를 위시한
고유성질을 가진 물질의 법들이 모여서 흘러감이 있을 뿐 강이라는 불변하는 고유의 성질은 없다. 그
들은 마음이 만들어낸(parikappanā) 개념이지 그들의 본성(sabhāva)에 의해서 존재하는 실재는 아니
다. 
사마타의 대상은 개념(빤냣띠)이요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담마)이라는 것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
분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므로 숙지하고 있어야한다. 그래서 위빳사나는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법들에 대해 무상․고․무아의 세 특상을 꿰뚫는 것(paṭivedha, 洞察,『청정도론』IV.48.) 혹은 수관(隨觀)
하는 것(anupassanā, PT)으로 정의된다. 위빳사나는 이처럼 무상․고․무아를 통찰해서 각각 무상(無相)
해탈과 무원(無願) 해탈과 공(空) 해탈을 실현하는 체계로 설명이 된다.(DA.iii.1003~1004) 
그래서『무애해도』는 “① 확신[信解, 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無常)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표상 없는[無相] 해탈을 얻는다. ② 고요함[輕安, passaddhi]이 큰 자는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
하면서 원함 없는[無願] 해탈을 얻는다. ③ 영지(靈知, veda)가 큰 자는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
서 공(空)한 해탈을 얻는다.”(Ps.ii.58)라고 이 세 가지 해탈을 설명하고 있다.
■ 아비담마에서 본 마음의 특징
⑴ 먼저 마음(citta)은 찰나생․찰나멸이다. 그리고 마음은 상속(相續)한다. 이것을 마음의 흐름[心相續,
citta-santati]이라한다. 우리가 세간적인 차원에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마음들의
흐름, 즉 마음들이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의 마음은 한순간에 생겼다가 멸하는 것이
다. 마음은 한순간에 일어나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수행하고 멸한다. 그러면 그 다음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이렇게 마음은 흘러간다. 이들은 너무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보통의 눈으로는 각
각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⑵ 불교 특히 아비담마에서 마음은 항상 ‘대상(ārammaṇa)을 아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마
음은 대상을 안다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의 고유성질[自性, sabhaava]을 가진다. 마음은 일어나서 대
상을 인식하는 기능을 하고서 멸한다. 그러면 인식과정의 법칙(niyama)에 따라 다음 순간의 마음이
일어난다. 아비담마 전체에서 “마음은 대상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전제이므로 반
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담마빨라(Dhammapāla)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대
상 없이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잘못”(Pm.454)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유식에서도 마음은 언제나 대
상을 가진다. 아뢰야식도 반드시 종․근․기(種․根․器, 종자와 신체와 자연계,『주석 성유식론』194~195
쪽 참조)라는 대상을 가진다. 대상 없는 마음이란 결코 상정할 수조차 없다.
⑶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서는 하나이지만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에 불가설․불가설의 마음이
일어나고 멸했고 일어나고 멸하고 있으며 일어나고 멸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그 종류(jāti)에 따라
서 넷으로 분류가 되는데 ‘유익한[善] 업을 짓는 마음’과 ‘해로운[不善] 업을 짓는 마음’과 ‘과보로 나
타난(vipāka) 마음’과 ‘단지 작용만 하는(kiriya) 마음’이다. 이 넷의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
하다.
⑷ 마음은 대상을 알면서 업(業, kamma, 의도적 행위)을 짓는다. 업이 중요하고 무서운 이유는 업은
반드시 과보[異熟, vipāka]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업과 과보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아비담
마의 가장 큰 관심 가운데 하나이다. 업의 과보는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① 삶의 과정
중에 과보가 나타나는 것이고 ② 다음 생의 재생연결을 결정짓는 것이다. 
⑸ 무수히 짓는 업은 당연히 ① 삶의 과정(pavatti) 중에 무수한 업의 과보를 생산한다. 이러한 무수한
과보 때문에 존재는 삶의 과정에서 무수한 대상과 마주친다. 대상과 마주치는 이러한 무수한 마음을
‘과보의 마음(vipāka-citta)’ 혹은 ‘과보로 나타난 마음’이라 한다. 
⑹ 한생에서 지은 무수한 업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업의 과보에 의해서 ② 다음 생이 결정된다. 다음
생을 결정하는 업은 한 생의 맨 마지막 자와나(javana, 速行) 과정에서 ‘업’이나 ‘업의 표상’이나 ‘태어
날 곳의 표상’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그러면 이것을 대상으로 다음 생의 최초의 마음이 결정되어
일어난다.
이렇게 하여 일어나는 다음 생의 최초의 마음을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ṇa)’이라 하며 이것은
당연히 업의 과보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재생연결식이 결정되면 이 재생연결식은 그 생에 있어서
바왕가 혹은 존재지속심으로 찰나생․찰나멸하며 한 생 동안 상속하고 그 생의 맨 마지막 마음인 죽
음의 마음으로 끝이 난다. 그러면 또 그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위와 같은 과정으로 일어난다.
⑺ 이렇게 업의 과보는 ① 삶의 과정 중에서도 무수히 나타나며 ② 재생연결식이 결정되어 존재를
지속하게 한다. 유식에서도 전자는 인전변(因轉變)과 관계가 있고 후자는 과전변(果轉變)과 연결되어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전자를 인식과정(vīthi-citta)에 개재된 마음(제4장)이라 부르고 후자를 인식과
정을 벗어난(vīthi-mutta) 마음(제5장)이라 부른다. 전자는 대상과 마주치는 역할을 하고 후자는 윤회
를 하고 존재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⑻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은 업을 짓는다. 업은 과보를 가져온다. 과보는 ① 대상과
마주치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② 존재를 지속시키는 역할로도 나타난다. 이처럼 마음은 대상을 만나
서 이를 알고(경험하고) 업을 짓고 과보를 가져오고 또 만나고 알고 업을 짓고를 거듭하면서 찰나생․
찰나멸을 거듭하면서 계속해서 흘러간다(상속). 이것이 우리 마음의 실상이다 이처럼 아비담마와 유
식은 철저히 마음의 찰나와 상속에 바탕하여 법의 이론을 전개해간다.
⑼ 마음은 ①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대상을 아는가? 이것을 설명하
는 것이 인식과정(vīthi-citta, 제4장)이다. 이러한 인식과정은 남방 상좌부 아비담마에 상세히 설명되
는데 이것은 가히 불교인식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인식과정은 물질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물질찰나)과 마음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
(심찰나, citta-khana)은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한 번 물질이 일어났다가 멸하는 순간에 마음
은 17번 일어났다가 멸한다고 전제하는데 이것은 상좌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설명이다.
인식과정은 크게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는 五門인식과정과 마음의 대상을 인식하는 意門인식과정으
로 나누어진다. 오문인식과정에서 예를 들면 눈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는 ‘같은 대상’을 두고
17번의 마음이 생멸한다. 이것도 대상에 따라서 ① 매우 큰 것 ② 큰 것 ③ 작은 것 ④ 매우 작은 것
의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매우 큰 대상일 경우에 17번 일어나는 마음들은 바왕가(지나
간 바왕가, 바왕가의 동요, 바왕가의 끊어짐), 오문전향, 받아들임, 조사, 결정, 7가지 자와나(javana,
速行), 2가지 등록이다. 그러나 충격이 매우 작은 대상들은 바왕가의 동요만 일으키고 인식과정이 끝
나 버린다.(<도표 4.2> 참조) 의문인식과정은 오문인식과정보다 단순한데 그 이유는 오문전향, 받아
들임, 조사, 결정의 과정이 없고 의문전향 다음에 바로 자와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념해
야할 것은 각각의 인식과정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잠재의식을 거쳐서 그 다음의 인식과정으로 넘어
간다는 점이다.
⑽ 마음은 ② 존재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마음을 상좌부에서는 존재지속심
[有分心, 바왕가, bhavaṅga, 잠재의식, life-continuum]이라 하고 유식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알라야윈
냐나, ālaya-vijñāna, 藏識)의 이론으로 발전한다. 마음은 이처럼 찰나생․찰나멸을 거듭하면서 존재를
지속시키면서 흘러간다. 마음을 비롯한 오온의 찰나생․찰나멸의 흐름이 내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재
생(再生, puna-bbhava, rebirth)이라 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재생 즉 금생의 찰나생․찰나멸의 흐름
[相續, santati]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윤회(輪廻, saṁsāra, vaṭṭa)라고 정의한다.
(Vis.XVII.115; DA.ii.496; SA.ii.97)
특히 마음의 흐름과 재생연결의 원동력인 업에 대해서 상좌부 아비담마는 16가지로 자세하게 설명
하고 있는데 남방 아비담마에서 제시하는 業說을 나 자신의 삶에 비추어서 이해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 관련주소
☞ [BBS불교방송] 
☞ [BBS불교방송] 각묵스님의 아비담마 길라잡이
☞ [유튜브] 아비담마 길라잡이
☞ [다음카페] 초기불전연구원
* 출처: 초기불전연구원


希修 220629 초기경전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서양문화와 불교-51 전후 아시아 불교, 새로운 모습으로 서구에 영향 
:매일종교신문

이치란의 종교가 산책

서양문화와 불교-51 전후 아시아 불교, 새로운 모습으로 서구에 영향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상좌부 대선사 아잔 차 서양에 등장

기사입력: 2021/12/13

보검 이치란 스님

====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상좌부 대선사 아잔 차 서양에 등장

인류는 제1차 대전에 이어 제2차 세계 대전을 겪고 나서 새로운 냉전체제에 돌입했다. 세계질서가 양극 체제로 개편되면서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극단적 두 이념의 대립 구도 속에서 세계는 재편되었다.



▲ 티베트의 망명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 로버트 버드 임시 상원 의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 받고 있다.

그동안 고찰해 온 바와 같이 서양 주도의 불교 수용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서양 사람들에 의한 불교 연구나 관심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서양 자체에서도 새로운 불교학자들의 출현과 동시에 아시아 불교 국가들에서 이민 불교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190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만 해도 몇 십 개에 불과하던 불교 명상 센터는 20세기 말이 되면 무려 1천 개가 넘는 명상센터(교리포함)가 설립되었다.



▲ 우드스톡 페스티벌 포스터

유럽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미국에서 소비문화와 전통적인 기독교에 불만을 가진 비트 세대와 히피족들이 동양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비트 세대(Beat Generation)는 1950년대 미국의 경제적 풍요 속에서 획일화, 동질화의 양상으로 개개인이 거대한 사회조직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항하여, 민속음악을 즐기며 산업화 이전시대의 전원생활, 인간정신에 대한 신뢰, 낙천주의적인 사고를 중요시하였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1920년대의 '상실세대(Lost Generation)'처럼 기성세대의 주류 가치관을 거부 하였다.

히피는 196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 LA 등지 청년층에서부터 시작된, 기성의 사회 통념,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의 회복, 자연으로의 귀의 등을 주장하며 탈사회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원으로는 happy(행복한), hipped(한, 화가 단단히 난), hip(재즈용어로 가락을 맞추다), hip(허벅지), "hip,hip"(갈채를 보낼 때의 소리) 등에서 나왔다는 설이 강하다.



▲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1969년 8월 15일부터 3일간 미국 뉴욕 주의 베델 평원에서 개최된 축제이다. 정식 명칭은 ‘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1969‘이다.





이처럼 미국과 유럽이 정신적으로 흔들리면서 많은 젊은 세대가 동양의 종교에서 탈출구를 찾았던 것이다. 특히 불교의 명상은 이들에게 위안의 대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비트세대 작가인 잭 케루악(1922년~1969년)은 자신의 방랑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적 내용의 소설 《길 위에서》의 시리즈 가운데 1958년 《담마 붐즈(The Dharma Bums)》를 발표했다.



▲ 삶과 이상의 이중성을 다룬 소설 담마 붐즈.





일련의 비트 세대 작가들은 물질주의적 가치에 불만을 가진 세대들에게 자신들의 자전적 소설을 써서 대변함으로써 어떤 동질성과 카타르시스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 동양의 종교인 불교의 명상이 대안으로 부각했다는 점이다.



1960년대에 티베트에서, 1970년대에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난민이 꾸준히 유입되면서 불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났고, 1960년대의 반문화 운동은 불교의 서방 확산을 위한 비옥한 기반이 되었다. 불교는 기독교보다 더 체계적인 행복의 길과 서구 생활의 영적 파산과 복잡성에서 벗어나는 길을 약속했다.



▲ 영국에서 1957년 출간된 《선의 길》.





이 무렵 영국 출신 알랜 윌슨 왓츠(1915〜1973)는 1957년 선불교(禪佛敎)와 동양사상에 기반하여 넌픽션인 《선의 길: The Way of Zen》을 출간하여 불교를 서양의 젊은이들에게 소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여운은 지금도 서구 사회 저변에 도도히 흐르고 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모르고 서구 불교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안 된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의 선불교가 주목을 받게 되고 1954년 일본 삼보교단의 설립자인 하쿤 야수타니(安谷 白雲, 1885〜1973) 선사 문하에서 선 수련을 받은 일련의 미국인 제자들인 필립 카플로(1912〜2004), 토니 팩커(1927〜2013), 로버트 베이커 로시(1917〜2010)는 일본과 미국에서 직접 선원을 설립하여 서구인들에게 선불교를 전파했다. 미국이나 유럽에 전파한 일본의 선불교를 다루려면 상당한 지면이 필요하고 관련 인물들이 많다. 현재에도 이들의 영향력은 대단하며 지속되고 있다.



▲ 태국 삼림 수도원의 위빠싸나 스승인 아잔 차와 그의 서양 수제자 아잔 수메도와 서양 제자들.







▲ 태국삼림수행전통의 조실격인 아잔만 대선사1870〜1949).





티베트불교나 일본의 젠불교 만이 아닌 동남아시아에 근거를 둔 스리랑카 태국 불교도 서양에 진출했는데, 태국 동북부의 ‘타이삼림전통’도 상당한 파급력을 갖고 서양에 진출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불교 수행전통은 테라와다(상좌부)가 적통이다. 부처님 승가로부터 수행전통을 꾸준히 계승해 온 불교가 바로 동남아시아에 근거를 둔 상좌부 불교이며, 삼림(숲속)전통‘이다. 스리랑카에도 이런 삼림전통이 있지만, 적통성이 태국으로 넘어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국 삼림전통은 1900년대 아잔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타이삼림전통 법맥을 상술하려면 상당한 지면이 필요하다.



▲ 타니사로 비구(아잔 제오프 1949〜).





서양인들이 이 타이삼림수행 전통에 주목하여 10년 이상 수행을 한 다음 미국이나 영국에 돌아가서 타이삼림전통 방식의 불교명상사원(센터)을 설립하여 불교명상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 아잔 수메도(1934〜) © 매일종교신문







▲ 아잔 수메도가 설립한 치터스터 불교수도원(영국)

타니사로 비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자비삼림수도원’을 개원하였고, 아잔 수메도는 영국에서

치터스터 불교수도원을 개원했다. 이것은 대표적인 케이스이고, 크고 작은 명상 센터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고 보면 된다. 뿐만이 아니라 티베트 계열 명상(교리)센터도 많이 생겨났다.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釋一行 1926년~) 대선사는 프랑스에서 활동 중이다. 영국 출신 상가락쉬타 법사(1925〜2018)도 주요한 인물이다.



▲ 영국에서 삼보불교공동체를 설립한 상가락쉬타법사.





이제 불교는 확실하게 서양으로 가서 정착했다고 봐야 한다. 서양출신 고승들이 출현하여 제자들을 양성하고 수도원이 이곳저곳에 설립되고 있다. 아시아식 불교 방식과는 다른 서양식 불교, 수행불교 위주의 전통이 확립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유대인 불교도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일간 신문 뉴욕 타임스가 이들의 저서와 활동을 보도해 주고 있다.



한국불교의 관점에서 서양불교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갖는 일부 식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그러면 한국불교는 인도불교의 원형성에 얼마나 근접하고 있냐”고 묻고 싶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필자 보검스님(가운데)이 영국에 유학할 때 숭산 대선사가 런던을 방문, 설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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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경전을 공부하긴 해야겠는데 읽어 보면 어지럽고 달리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 Bodhi 스님, Henepola Gunaratana 스님, Walpola Rahula 스님, Anālayo 스님 같은 분들의 책을 읽으면서
  • 또 유툽에 올라온 한국어 영어 '아비담마' (초기불교는 아니지만) 강의는 발견되는 대로 모두 들으면서 한동안을 보냈다.
  • 그리고 Ṭhānissaro 스님의 가르침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불교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에서 '나의 종교'가 되었는데,
  • 타니사로 스님의 승원이 남한 땅 100배 크기의 미국에서 마침 우리 집으로부터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게 아닌가. (가는 길엔 틱낫한 스님의 미국 승원도 있음. 이게 대체 무슨 우연인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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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시간적 능력적 한계를 고려하여 남은 생은 타니사로 스님의 책들만 공부하기로 했다. 다른 해석들은 다음 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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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사로 스님의 책들 무료 다운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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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종교신문] 서양문화와 불교-51 전후 아시아 불교, 새로운 모습으로 서구에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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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종교신문] 서양문화와 불교-51 전후 아시아 불교, 새로운 모습으로 서구에 영향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상좌부 대선사 아잔 차 서양에 등장   인류는 제1차 대전에 이어 제2차 세계 대전을 겪고 나서 새로운 냉전체제에 돌입했다. 세계질서가 양극 체제로 개편되면서 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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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준덕
    한글 번역을 기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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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希修
      문준덕 그간 집필하신 책이 이미 80여권이나 되고 지금도 왕성히 집필 중이셔서요, 저는 공부하기도 바빠 번역까지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 그러나 제가 쓰는 불교 관련 페북 글들은 모두 타니사로 스님 식의 해석이고 (저의 오류도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또 타니사로 스님의 책을 한 권씩 교재로 정해 제가 한국 말로 한 챕터씩 요약 ('설명'의 능력은 안 되고 어디까지나 '요약') 해 드리는 그룹을 3년째 운영하고 있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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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준덕
      사실 초기불교는 한국에서도 니카야는 이미 다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삼학의 중요성은 초기 부파 대승 모두가 강조하고 있고요.. 불교 수행은 모두 삼학에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 希修
      문준덕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석의 차이들이 다소 있고, 다른 해석들을 공부할 때는 해결되지 않았던 의문/혼란이 타니사로 스님의 해석을 공부하면서는 모두 풀려서요. 이건 뭐 어디까지나 제 경우에 그렇다는 말씀일 뿐입니다.
    • 문준덕
      해석의 차이는 그 스님이 얼마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데로 이해를 하고 있느냐에 다라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한역 경전 역시 한문의 이해도에 따라서 해석의 차이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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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준덕
      초기불교 공부자들이 오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대승불교는 석가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고 이해 하시는 분들이 왕왕 있는데..대승불교 안에 비불교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승불교는 초기와 부파 대승의 전적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한역대장경이 불교의 모든 주장들을 고루 담고 있다는 거지요.. 오히려 초기불교 전적 니카야에 대해서는 연구나 번역이 대부분 이루어졌지만 한역 경전 같은 경우는 아직 연구할 분야가 대단히 많슴니다... 초기불교만 고집하는 것은 마치 컴퓨터가 진공관으로 출발을 했으니 진공관 컴퓨터만 고집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필요한 원조 논쟁이죠...
    • 希修
      그렇죠! 결국은 Pali어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것도 다음 생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
    • 문준덕
      팔리어는 사실상 문서상에서나 존재하는 사장된 언어나 마찬가지인데..한글이든 영어든 팔리어든 산스크리트어든 중요한 것은 이치에 부합하고 진리에 부합하는가가 관건이죠... 법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를 하는가?
    • 希修
      네, 솔직히 저는 그동안 동북아에서 나온 불교 해석은 볼 필요도 없지 않나 하는 아주 아주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문준덕 스님의 글을 보면서 크게 반성했습니다! 정말이예요. 어디다 사죄를 드려야 할지.. (^^;)
    • 문준덕
      사죄는 할 필요는 없슴니다. ㅋ 대승불교 수행자들이 다 바보가 아니랍니다 ㅋ
    • 希修
      네, 그런데 번역의 한계라는 것을 자주 느끼게 되어서요. '아'와 '어'의 차이가 처음엔 눈에 잘 안 보일 정도로 작은 듯 해도 언어 하나 하나를 건너갈 때마다 조금씩 커지는 것도 같구요. 뭐 그러나 이건 나중에 걱정할 일인 것 같습니다. 일단은 영어로 된 책 공부하기도 바쁘니.. ^^;
    • 문준덕
      영어 번역 하시는 분들 하고 공유를 하면 됩니다... 제가 영어가 좀 되면 좋으련만 한문 공부 하는라 핑계 ㅋ
    • 문준덕
      불교의 핵심은 사성제 삼법인 팔정도... 이 부분만 제대로 이해를 하면 나머지는 사실상 양념 정도... ?
    • 希修
      문준덕 정확한 해석을 하자면 사실 한문이 영어보다 더 어렵지 않나 싶은 걸요~
    • 문준덕
      한문이 아마도 한 글자에 영어보다 다의를 포함하고 잇을 겁니다... 저는 처음부터 한문으로 경전을 배운지라 ㅋ 사서나 의서 역서 등을 보면서 한문에 대한 안목을 조금씩 넓혔는데... 영어경전 보시는 분들하고 의견을 공유 하면 좋지요... 서로 공유하고 연구하고 토론하다보면 접점을 점점 줄여 나갈 수가 있을 거라는 ...
    • 希修
      문준덕 네, 해석의 여지는 더 넓고 문법적 장치들은 상대적으로 좀 부족한지라, 그래서 한문의 정확한 해석이 영어의 정확한 해석보다 훨씬 어렵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문준덕
      언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느냐가 관건 이겠지요... 사실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이나 한글 영어로 번역을 하는데.. 언어가 적합하지 못한 경우도 더러 있거든여..그래서 진언 같은 경우는 번역을 안 하기도 했습니다.
    • 希修
      문준덕 그쵸. 저는 영어로만 공부를 하니 Pali 용어도 잘 모르지만, 가끔 언급되는 것을 보면 영어와 비슷한 흔적이 어렴풋이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분류법이긴 하지만 이래서 '인도-유러피안 語族'이라는 개념이 나왔었나 보다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언어적 특징 면에선 훨씬 동떨어졌다고 밖에 볼 수 없는 한문으로 공부하는 것은 사실 그만큼 더 어려운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번역이 된 것도 어쩌면 인간 승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문으로 번역하신 이름 모를 많은 분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정말 숙연해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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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준덕
      중국에서 역경은 국가가 맡아서 한 겁니다..물론 일부 개인적으로 한 분들도 있구여.. 인도와 중국은 사실상 접경 하고 있습니다.. ㅋ
    • 문준덕
      한국은 세종이 한글 창제 이전에는 한문으로 의사 소통을 한거죠./... 물론 그래서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서... 훈민정음 어제인가????? 그런 만큼 사실상 한국은 한문과 친숙 합니다., 정부가 한글 전용을 주장하다 보니 한자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대부분이긴 합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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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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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타니사로 비구  서양 불교
2007. 12. 10. 13:23

https://blog.naver.com/florajean/40045206240

타니사로 비구(Thanissaro Bhikkhu, 1949 - )
- 경전 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하다

타니사로 비구 또는 사람들이 흔히 부르듯이 아잔 제프(Ajaan Geoff,)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아름다운 해변 도시 샌디에고에 있는 메타숲속승원(Metta Forest Monastery)의 승원장이다. ‘아잔’은 ‘스님’의 뜻이고 ‘제프’는 그의 이름 제프리 드그래프(Geoffrey DeGraff)를 짧게 줄인 것이다. 현재 55세의 미국인인 그는 미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불교를 가르치지만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명상에만 치중하지 않고 경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균형감각을 갖춘 스승이다. 또한 미국인들이 지극히 듣기 싫어하는 ‘놓아버림 또는 절제(renunciation)'라는 말이 명상을 잘하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하다고 일침을 놓는 스승이기도 하다.

미국 뉴욕주의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오벌린 칼리지(Oberlin College)에 들어간 그는 졸업 후 무엇을 할까 숙고해보니 남들처럼 회사원도 공무원도 교수도 되고싶지 않았고, 임종을 맞은 자신을 상상해보니 그때 가서 삶을 헛살았다는 후회같은 것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2학년 때 불교명상을 배운 그는 물만난 고기처럼 행복했다. 졸업 후 견문과 시야를 넓히기 위해 타일랜드로 가서 교사를 하던 그는 숲속승가의 명상 스승 아잔 푸앙을 만났다. 그때까지의 삶에서 처음으로 진정 행복한 사람을 만났던 것이다. 그의 인품과 불교승려로서의 삶은 부처의 가르침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었다. 지혜롭고 겸허하며 진솔하고 익살기까지 가진 아잔 푸앙을 만난 순간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온삶을 다 바쳐서 헌신할 수 있는 것을 마침내 찾았던 것이다.

1976년 27세때 수계를 받고 승가에 들어온 그는 아잔 푸앙 밑에서 스승이 입적하던 1986년까지 10년간 수행을 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1991년 메타숲속승원 건설을 돕던 그는 1993년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을 그곳 승원장 소임을 맡아보고 있다. 샌디에고 북부의 높은 산과 언덕에 둘러싸여 있는 아보카도 과수원 안에 아늑하게 자리한 메타숲속승원에서는 재가자들도 그곳에 머물며 단기 및 장기 개별수련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타니사로 비구가 승원장으로 주석한 메타 숲속 승원(Meta Forest Monastery)>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강연과 법문도 열심히 하는 그는 경전공부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명상에만 중점을 두는 미국인들에게 경전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팔리경전의 영역사업에도 열심인 스님이다.

전형적인 미국인 제자들은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과연 명상에 도움이 되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타니사로 비구의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바른 질문’이다. 경전을 보면 붓다는 늘 바른 질문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세계관은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붓다는 지혜로운 질문을 하면 해탈의 길, 고통이 멸하는 길을 가리켜주고, 지혜롭지 못한 질문을 하면 결국 막다른 골목길을 만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옭아매고 가두게 된다고 하였다. 경전을 공부하면 지혜롭지 못한 질문을 피해가는 방법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경전에 담긴 가르침을 잘 듣고 가슴에 새긴다면 명상과 삶을 어떤 마음으로 대할 것인지에 관해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다는 것이다.

미국인 제자는 다시 한 번 반문한다. 하지만 붓다는 경전과 전통을 믿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물론 그런 말은 했지만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배격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현재 미국의 다르마는 마치 ‘말전하기 게임’과도 같다.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전해질 때마다, 또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의 스승으로 전해질 때마다 그 내용이 변해서 본래의 뜻을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가 되는 것이다. 타니사로 비구는 언젠가 이런 말이 쓰여있는 엽서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신 스스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 밖에 아무것도 믿지 말라. - 붓다’ 이것은 분명 칼라마장자경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오전(誤傳)이 틀림없다. 실제 경전을 읽어보면 이렇다. ‘경전으로 전해내려온다해서 또는 스승이 가르친다 해서 무조건 믿지 말고, 논리적이라거나 자신의 기호에 맞는다 해서 믿지도 말라. 다만 실제 인과법의 측면해서 검토해보고 그것이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며 지혜로운 사람들이 비판을 한다면 그만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이롭고 지혜로운 이들이 칭찬을 한다면 계속하라.’ 여기서 주의할 점은 자신만의 판단이 아니라 지혜로운 이들의 판단도 구하라는 것이다.

타니사로 비구는 현재 명상자들에게 가장 지혜롭지 못한 질문이 ‘나는 누구인가’라고 주장한다. ‘이뭣꼬’로 화두선을 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의아스러운 주장이다. 그의 논지를 들어보자. “일부 불교책에서는 명상의 목적이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경전에 보면 그런 것은 별 소득이 없는 질문이라고 가르친다. 어떤 경험들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겠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들 중에 고통을 멈추어줄만한 것이 있는가? 오히려 자신이 누구라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을 때 주어진 상황에서 지혜롭게 행동하기가 쉬워지는 것이다.”

타니사로 비구에 의하면 경전 공부로부터 수행에 특히 도움이 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스승을 구할 때 그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의 온삶을 다 점검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는 계율을 체화한 사람인가? 그의 말이나 행동에서 열정, 혐오, 미혹의 흔적이 있는가? 스승이 한손가락으로 올바른 방향만 가리킨다면 다른 손가락으로 무엇을 가리키든 상관없다는 것은 억지이다. 수련회를 이끌 지도자 승려가 아무리 다급하다 하더라도 그런 방식을 허용한다면 종국에는 깨어있음을 가르치는 기술자나 요기 양성자만를 배출하게 되어 불교계의 앞날이 어두워질 것이다.

<2005년 하버드대학 강연 후... >

둘째 놓아버림 또는 절제를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나? 우리에겐 무한정한 시간과 에너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가치있는 행복을 얻으려면 삶의 좋은 것들이라도 희생을 해야만 한다. 이것은 미국 불교의 가장 큰 맹점이다. 붓다는 미국의 부모나 심리치료사들이 좋다고 한 것들조차도 버리라고 가르쳤다. 그런데도 미국의 불교현장에는 그런 언급이 없다. 다르마가 시장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다르마가 시장의 상품을 팔기위해 이용된 것은 오래전 일이지만 이제는 다르마 자체가 상품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판촉부장과 영업사원의 손을 거쳐 나온 책이 절제라는 엄한 교훈을 가르져주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법사들이 돈이 필요한 것을 감안할 때 대중이 들어야 할 법문보다는 듣고 싶어하는 법문만을 하지 않겠는가.

<자비경(Metta Sutta)을 타니라로 비구가 번역하여 읽어줍니다.>

(2004년 불광 게재)

#타니사로
#비구
#서양불교
#숲속승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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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여성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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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바스티 승원장, 툽텐 쵸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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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필립 카플로 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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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국 최초의 티벳불교 비구니, 출트림 알리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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