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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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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민 연구실 > 일본종교 연구 > 제8장 2. (3) 후미에를 통해 본 일본그리스도교




제8장 2. (3) 후미에를 통해 본 일본그리스도교


WRITER: 관리자 (222.♡.9.79) DATE : 14-09-05 16:12 READ : 841

(3) 후미에를 통해 본 일본그리스도교.pdf (170.4K), Down : 18, 2014-09-05 16:12:30

(3) 후미에를 통해 본 일본그리스도교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통해 서구의 정신 세계에 근저에 깔린 그리스도교가 일본에서 어떤 식으로 정착해갔는지 살펴보고 있다. 엔도 슈사쿠는 폐결핵을 앓았고 세 차례 대수술을 받으면서 약 2년 7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지냈다. 그는 병상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체험을 했고 신이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실존적 불안을 느꼈다고 한다. 신의 침묵에 대한 실존적 불안. 체험과 함께 그는 실제로 후미에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후미에는 나무판 위에 예수상을 넣은 것으로 그리스도교 박해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후미에 제도가 있었다. 엔도 슈사쿠가 <침묵>이라는 소설을 구상한 동기 중 하나가 후미에라고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가사키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우연히 오오라 천주당 안에 발로 밟힌 성화 후미에가 놓여진 집이 있어서 가보았다. 나가사키에서 맨 처음 후미에를 보았을 때부터 나의 이 소설은 조금씩 모양새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오랜 투병생활 도중 마멸된 후미에의 그리스도 얼굴과 그 옆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검은 적족 발자국을 몇 번이고 마음 속에 되새겨 보았다. 배교자라는 이름만으로 교회도 말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역사로부터 말살된 그들의 침묵 속에서 다시금 되살리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의 마음을 거기에 투영하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동기이다”

나가사키는 일본에 그리스도교가 처음 전파되어서 많은 신도수를 갖고 있었던 곳이다. 후미에의 ‘후미’의 의미는 ‘밟다’ 는 뜻이고 ‘에’는 ‘그림’을 뜻한다. 따라서 후미에는 ‘밟힌 그림’이라는 뜻이다. 에도 막부 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정책의 하나로 단가 제도가 있었다. 매년 한 번씩 실시한 단가제도는 예수상이나 마리아상의 동판을 바닥에 놓고 이를 밟고 지나가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것을 못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크리스챤으로 착출당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밟고도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신앙 생활을 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매년 한 번씩 그리스도의 얼굴을 밟았던 것이다. 그러한 크리스챤들의 신앙이 어떠했을까에 대해 의문을 품은 엔도 슈사쿠는 침묵이라는 책을 쓰게 된 것이다.

동판으로 된 성모 마리아 상이나 십자가상의 예수의 모습은 워낙 많이 밟아서 그 형체도 흐릿해졌다. 그러한 후미에를 본 엔도 슈사쿠가 강하게 느낀 것은 그 그림을 밟은 사람, 그 사람들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성화를 밟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마음자리 안에 그리스도는 어떤 분으로 있었을까. 병중에 후미에를 본 다음 후미에를 밟은 사람들이 어떤 신앙을 갖고 살았을까. 그들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셨고 예수는 어떤 분이셨을까. 엔도는 그것을 자기 소설에서 풀어가고자 했다.

후미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밟아서인지 나무에는 발의 모양이 나있었고 밟혀진 그리스도의 얼굴은 이그러져 있었다. 도쿄에 돌아와서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그 그림을 밟았던 사람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때 그들에게 떠올랐던 것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분, 가령 꿈이나 이상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이라면 연인의 얼굴이나 어머니의 얼굴이라든지 그런 것이 떠올랐을 것이다.”

엔도 슈사쿠는 후미에를 직접 보면서 이걸 밟았던 사람들의 마음과 배교한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를 생각했다. 이것이 엔도가 침묵 소설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또한 <침묵>에서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이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유대교나 그리스도교가 모두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으나 유대교에서 기다리는 메시아는 선민 사상에서 자기 민족의 왕으로 재림할 분이고,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메시아는 인류의 보편적인 메시아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유대교에서 기다리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고 고백하는데 반해, 유대교에서는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본다.

<침묵>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대해서 13번 나오는데 매번 변용되어 나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엔도 슈사쿠는 자기 안의 신관과 예수관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변형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처음에는 아주 강하고 위엄있는, 질서를 지배하고 어려운 난관을 잘 헤쳐나갈 수 있는 강한 이미지였다가, 일본에서 어려운 박해 상황을 겪으면서는 피땀이 나도록 수난받는 얼굴로 등장한다. 
  • 또한 주인공이 순교를 결심했을 때 떠오른 예수의 얼굴은 온화하고 자긍심을 잃지 않는 예수의 얼굴이었다. 이렇게 예수의 얼굴은 강한 아버지의 얼굴에서, 갈수록 온화하고 감싸주는 얼굴로 변화한다. 
  • 맨 마지막에 떠올리는 예수는 배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후미에를 밟을 때 ‘밟아도 좋다’ 라고 말해주는 예수이다. 그때 로돌리코는 서구의 그리스도교가 일본의 풍토 안에 스며듬을 체험한다.

처음에 로드리고는 페레이라 신부로부터 배교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순교하리라고 결심한다. 그가 순교를 결심하고 순교장으로 갈 때 나가사키 시내를 거쳐 가는데 거기서 떠오른 얼굴은 마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시면서도 꿋꿋하게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던 예수님의 얼굴이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다음에 십자가형을 당하리라는 예감을 갖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잂지 않았던 예수님의 얼굴, 로드리고 자신도 그런 얼굴을 의도적으로 갖고자 노력했다. 

그는 순교장에 도착하고 나서 바로 순교를 당하지 않고 그곳에서 머물러 있게 되면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코고는 소리로 알았던 것이 구덩이 속에서 거꾸로 매달려 신음하는 소리였다는 사실이다. 그 소리의 정체와 함께 ‘네가 배교하지 않으면 저들은 그대로 죽을 것이다. 저들을 구원하는 것보다 네가 믿는 하느님, 네가 몸담고 있는 교회를 배반하는 것이 더 큰 죄라고 여기느냐’라는 페레이라 신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결국 로드리고는 후미에를 밟겠다고 말하고 만다.

로드리고는 순교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순교는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것이었고, 결국 후미에를 밟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거꾸로 매달려 고문당하고 신도들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로드리고는 후미에를 밟는 곳에 가서 후미에 속의 그리스도 얼굴을 보았다. 그에게는 자기 생애를 다 바쳐 가장 성스럽고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온 얼굴을 밟는 일이었다. 

후미에를 바라보는 순간 그 속에 있는 분이 로드리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이다’ 엔도 슈사쿠는 로드리고가 생각하는 그리스도 얼굴이 변형되는 모습을 통해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구체적으로 로드리고와 다른 등장인물을 통해 엔도 슈사쿠가 말하려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먼저 그는 서구의 그리스도교와 일본에 들어온 그리스도교 간의 엄청난 거리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동양인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은 양복을 입은 것처럼 말이다. 엔도 슈사쿠는 이것이 서구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전지전능한 아버지와 같은 신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전지전능한 하느님은 구약성경의 하느님이지 신약으로 와서 예수를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신약성서에서 많은 예화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은 어떤가? 대표적으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먼저 유산을 땡겨받아서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다 써버리고 돈이 다 떨어지니까 아버지한테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내가 아들이라는 자격을 감히 청할 수 없으니까 하인 노릇이나 하면서 빌어먹고 살아야겠다 생각을 하고 왔는데 저 멀리서 아들이 오는 것을 본 아버지가 신발도 안 신고 뛰어나가 아들을 껴안았다는 것이다 그걸 예수님이 가르쳐 준 하느님이시다. 돌아온 탕자를 끌어안는 어머니 같은 하느님에 엔도 슈사쿠는 포인트를 맞춘 것이다.

엔도 슈사쿠는 서구에서 전해지는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이 아니고 돌아온 탕자를 나가서 끌어안는 어머니 같은 하느님이야말로 예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의 모습이라고 보았다.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이라는 신관의 전환을 가져오기 위해 엔도 슈사쿠는 자기 작품 속에서 많은 상징적인 표현들을 통해 이것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서구의 그리스도교와 일본 그리스도교 간에 자신이 느낀 거리감을 극복하는 포커스를 맞춘 것이다. 엔도 슈사쿠의 작품 세계에서 그려진 하느님 모습은 루오가 그린 예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루오의 작품에서 드러난 특징은 아주 강한 선으로 그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얼굴을 클로즈업시켜 마치 살아있는 예수가 나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리고 있다. 루오의 예수 상 안에서는 승리한 예수가 아니라 인간의 아픔에 동참하고 함께 하시는 예수의 얼굴모습, 특히 눈을 발견할 수 있다.


<침묵> 중에서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로드리고의 변화이다. 로드리고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볼 필요가 있다. 강한 신앙과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로드리고는 순교까지 각오하고 일본에 갔다. 그런데 일본 상황의 소용돌이에 들어가면서 결국 그가 인간적으로 지녔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강한 자로서의 로드리고로부터 가장 약한 자로서의 로드리고로 바뀌게 된다. 결국 교회로부터 추방당한 자, 스스로 교회를 떠난 자가 되고 자기가 갖고 싶었던 자아상이 무너지면서 진정한 자기를 만나게 된 것이다. 엔도 슈사쿠는 자기가 그리고자 했던 하느님을 로드리고를 통해 묘사하고자 했다.

약한 자로서의 자기 자신과 직면하게 된 로드리고 앞에 기치지로가 나타난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마치 유다와 같이 아주 약한 자이다. 종전에 자기가 강한 신앙과 신념을 가졌을 때 로드리고는 기치지로를 정말 성서상에 나오는 유다와 똑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자가 예수를 배반하고 사람들을 고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치지로의 약한 면에 강한 분노를 느꼈다. 그런 기치지로가 로드리고를 찾아와서 고해성사를 받겠다고 자기 죄를 고백했다. 로드리고 자신은 이미 교회에서 나간 기치지로가 자기에게 찾아와 울면서 ‘나같이 약한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청한다,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약함 속에 빠져 살아가지만 사실은 하느님을 굳게 신앙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된다’ 이렇게 고백하며 용서를 청하는 기치지로에게서 로드리고는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주님,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신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신은 유다에게 “가라, 가서 네가 할 일을 이루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성화를 밟아도 좋다고 말한 것처럼 유다에게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어라’고 말했다. 네 발이 아픈 것처럼 유다의 마음도 아팠을 테니까.”

일본 안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이질감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침묵>이라는 소설을 풀어내면서, 엔도 슈사쿠는 로드리고라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서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다.’ 이것이 엔도 슈사쿠가 말하고 싶은 하느님의 모습이다. 유태인들이 학살당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나치들은 유대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동료 유대인들을 총살했다. 그때 한 유대인이 이렇게 독백했다고 한다. ‘도대체 지금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옆에 있는 또 다른 유대인은 말한다. ‘저들과 함께 죽어가고 계신다’라고. 아마 엔도 슈사쿠가 말하려고 했던 부분과 이름 모를 한 유대인의 고백이 만나고 있는 측면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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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2. 엔도 슈사쿠를 통해 본 일본 그리스도교

2014-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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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엔도 슈사쿠를 통해 본 일본 그리스도교


엔도 슈사쿠라는 가톨릭 작가의 문제 의식을 통해 전통 그리스도교가 일본 문화 안에서 왜 뿌리를 내리기 어려운지 살펴보기로 하자. 

오늘날 한국에서는 그리스도교 신도가 총 종교인구의 약 25%에 해당되는 데 반해, 일본 그리스도교 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1%에 해당된다. 
그것은 일본이라는 문화에, 일본인들의 마음자리에 그리스도교가 먹혀 들어가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와 일본문화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뭔가가 있는가? ~~은 엔도 슈사쿠 작품 안에 잘 녹아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일본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의 풍토 안에서 그리스도 신자로서 자신이 겪는 갈등 문제를 자기 작품 안에 그대로 녹여서 표현했다. 그가 쓴 대부분의 소설에는 그러한 문제의식이 잘 나타나 있으므로 그의 소설을 통해 일본 그리스도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엔도 슈샤쿠(1923-1996)의 생애와 침묵의 배경

침묵이라는 작품을 살펴보기에 앞서 엔도 슈사쿠의 생애에 대해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어렸을 때 그의 모친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고 이혼을 당했다. 엔도 슈샤쿠는 자신도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배반했다는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가톨릭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어머니로부터 양복을 받은 셈이다. 이 양복은 일본인인 내 몸에 잘 맞지 않았다. 몸에 안 맞는 양복을 입었을 때 느껴지는 어색한 느낌이 바로 자신이 지닌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는 신앙을 버리는 것은 어머니를 버린다는 느낌을 가졌으므로 그리스도교를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뭔가 자기 몸에 맞는 그리스도교를 만들려는 문제의식 속에서 작품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침묵>이라는 소설은 그의 나이 44세 되는, 1966년 작품이다. 작품 배경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17세기 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바스찬 로돌리코는 요셉 페켈러라는 예수회 선교사로 일본에 들어왔다가 결국 배교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 오카야마라는 이름으로 64세까지 살았던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또 한 인물인 페레이라 역시 예수회 선교사이다. 그는 로돌리코에 앞서 일본에 와서 선교활동을 한 로돌리코의 스승으로 로돌리코가 존경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일본 선교에 성공했던 페레이라가 배교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의 배교 소식을 듣고 로돌리코는 어떻게 자신이 존경하던 스승께서 배교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지니고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침묵>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좀 더 살펴본다면, 그것은 일본에 그리스도교가 토착화되려면 전통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변형되어 갈 것인가 라는 문제의식이다. 전통 그리스도교의 신관은 아버지로서의 신이었다. 이러한 신관이 엔도 슈사쿠에 와서 <침묵>이라는 소설 끝에서 나타나듯이 어머니로서의 신관으로서 변형이 일어난다. 전통 그리스도교의 신관이 아버지로서의 신관이었다면, 엔도 슈사쿠에 와서 일본 그리스도교의 신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 어머니로서의 신관이다.

(2) 어머니로서의 하느님

<침묵>이라는 소설 이후에도 엔도 슈사쿠는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띤 하느님의 모습을 소설의 문제의식으로 삼았다. <깊은 강> 외 다른 소설들에서도 이를 확인해볼 수 있다. 즉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은 어떠한 하느님인지를 그리는 것이 엔도 슈사쿠의 소설 주제라 할 수 있다.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은 인간과 함께 하시는 동반자로서의 하느님이시다. 초월적인 하느님으로서 우리와 무관한 분이 아니라 자신을 밟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이해하는 하느님, 배교하는 사람의 심정과 함께 하는 하느님. 엔도는 그런 하느님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태인들을 총살할 때 다른 유태인들이 보는 앞에서 한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유태인이 ‘하느님이 어디 있는가?’ 하고 독백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하느님은 죽어가는 저 사람들 옆에서 함께 죽어가고 있다’ 고 대답했다고 한다. 엔도 슈사쿠가 말하려던 어머니로서의 하느님 역시 인간의 고통과 무관한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느님이었다. 그는 그런 하느님을 그리려고 노력한 것이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마치 일본인이 몸에 안 맞는 서양 양복을 입은 것에 비교할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인의 감성에 전통 그리스도교 사상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맞출 수 있나? 어머니라는 이미지를 동원해서 맞춘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직 잘 ~~가 남아있다. 

일본인의 감성이 무엇이길래 그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엔도가 본 일본인의 감성은 자연 속에 자신을 몰입시키고 죽음과도 화해하는 감성이다. 
절대신이나 죄에 대해 무감각적으로 반응하는 일본인의 감성에 그리스도교는 잘 맞지 않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인의 감성에 걸맞은 신을 생각했고 거기서 나온 것이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를 지닌 신이다. 
사실 어머니로서의 신관은 엔도 슈사쿠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위엄을 갖춘 아버지로서의 신관보다 어머니로서의 이미지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초월적인 신관아버지로서의 신관이라면 어머니로서의 신관포월적인 신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포월적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기어가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초월적인 신은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간격이 있다면, 포월적인 신은 그들의 역사 안에 함께 하신 분이시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역사 안에 하느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 그들의 체험을 써 놓은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 체험의 핵심은 출애급 사건이다. 그 사건을 중심으로 성서가 씌어졌다. 이 사건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유대인들의 신앙의 핵심이다.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시나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는데 자그마치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어떻게 갔길래 40년이나 걸렸을까. 기어갔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그들의 삶에 함께 하셨음을 의미한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는 출애굽 사건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체험한 바로 그 하느님이 창조주임을 고백하고 있다.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이 사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려는 신관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에 엔도 슈사쿠의 작품은 일본 그리스도교 안에서 새롭게 조명받아 왔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의 모습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들 수 있다. 돌아온 탕자에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이야말로 예수께서 알려주고자 한 하느님의 모습이다. 아들 둘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눠주었는데 큰 아들은 집에 남아 일을 했고 작은 아들은 가출해서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자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는 맨발로 달려가 아들을 껴안았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고자 한 것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맨발로 나가 맞으며, 죽었던 내 아들이 돌아왔네 하며 껴안고 돌아와서 잔치를 벌리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의 신관신약성서에서의 신관은 차이가 있다. 구약성서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에 반해 예수는 ‘돌아온 탕자’에서와 같은 이미지의 하느님을 얘기하면서 율법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신관을 뛰어넘는 신앙을 제시하려고 했다. 예수가 체험한 하느님은 ‘압바’였다. 예수는 하느님을 ‘압바’라고 불렀다. ‘압바’라는 표현은 한국말의 ‘아빠’와 뉘앙스가 유사하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은 하느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란 예수가 체험한 하느님을 자신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이다. 
예수를 통해 새롭게 경험된 하느님을 자신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만들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교회가 되었다. 
예수가 빠진 그리스도교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그래서 엔도 슈사쿠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포인트를 맞추고 그의 얼굴을 통해서 새롭게 하느님을 찾고자 했다. 

그리스도교는 희랍 철학과 만나 그리스도 신학을 형성해 나갔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 그리스도교 신학이 플라톤의 이데아와 만나면서 그리스도교의 본래 정신이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희랍 철학의 껍질을 벗겨내고 원시그리스도교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본래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