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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1

[심광섭 신비주의] 기독교 미학: 감성을 통해 읽는 기독교 신앙 : 자료실 : 베리타스

[심광섭] 기독교 미학: 감성을 통해 읽는 기독교 신앙 : 자료실 : 베리타스
[심광섭] 기독교 미학: 감성을 통해 읽는 기독교 신앙
2010년 제 7회 기독교문화 학술 심포지엄 발제문
입력 Dec 06, 2010 02:10 PM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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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광섭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조직신학/예술신학)
1.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우리는 예술에 대한 통찰, 예술적 감성과 신앙의 감성이 한국의 개신교에서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에 모였습니다. 선언문처럼 보이는
이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오늘날 신학과 교회가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 감성을 통해 표현되는 신앙을 그만큼 절실하게 느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미학'(美學, Ästhetik)으로 번역되어 통용되는 이 용어를 그리스어 어원에 따
라 옮기면 감각적 지각에 관한 이론이다. 미학의 물음은 고대 희랍 철학의 역사만큼이
나 오래되었지만 18세기에서야 비로소 철학의 한 분과로 다루어지게 된다. ‘미학’의 개
념은 지성의 인식과 감각적 인식 사이를 구분한 바움가르텐(A.Baumgarten)에 의해 세
워진다. 칸트(I.Kant)는 판단력비판에서 미학 이론을 처음으로 높이 세운 사상가로 평가
된다. 계몽주의 시대에 미학 이론이 정립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감성과 감정에 대한 관
심은 인간의 인식능력과 한계에 대한 물음의 이면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특히 낭만주
의자의 큰 관심사였다. 감성과 감정(정감)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 신학에서는 슐라이어
마허(F.Schleiermacher), 조나단 에드워즈(J.Edwards), 존 웨슬리(J.Wesley), 윌리엄 제임스
(W.James) 등에 의해 주목받게 되나 신학의 주류에 의해 외면당해 왔다. 근대 미학은 반
성적 감각지각에 관한 이론과 생산적인 상상력 혹은 환상에 관한 이론, 자연과 예술에
서 느끼는 감정들과 아름다움의 이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근대의 전형적인 현상인
삶이 각 영역으로 독립되고 분할되는 경향에 따라 예술도 문화의 고유하고 자율적 영
역으로 분리됨으로써 근대 예술은 종교적인 콘텍스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게 되었고
고전 형이상학의 해체와 더불어 하나님 개념 안에서 진․선․미(眞․善․美)가 통합되었던
것도 해체되기에 이른다.
‘기독교 미학’을 말하려고 할 때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이후 전개된 신앙과 예술의 소원
한 관계로 축소될 수 없다. 대부분 기독교와 예술의 관계를 다룬 서적들이 교회와 예술
의 소원하고 불편한 관계를 지적한다. 힐러리 브랜드는 예술에 대한 개신교의 태도를
한 마디로 “개신교의 역사에서 너무나도 빈번히 강조된 것은 예술의 기쁨이 아니라 예
술의 폐해였다”고 딱 잘라 판정했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의 기독교는“기독교의 합리
성”(존 로크, 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 1695), “신비적이지 않은 기독교”(존 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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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Christianity not mysterious, 1696)에 이어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칸트,
Religion innerhalb der reinen Vernunft, 1793)로 축소되었고, 자유주의 시대인 19세기에
기독교 신학은 특히 독일에서 변증법적 이성과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나
갔다. 감성과 인간의 경험이 배제되거나 주변화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종교
개혁 원리 중에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의 전통은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비평
을 만나 성서의 역사비평으로 발전되었고, 한국교회에서는 선교 초기부터 성경읽기, 성
경쓰기(필사), 성경공부 등을 통해 성서원칙이 “하나님 말씀” 강조의 신앙으로 독특하게
계승되었고, 신학적으로는 20세기 칼 바르트(Karl Barth) 등 신정통주의자들의 ‘말씀의
신학’의 영향으로 감성과 경험 배제의 신앙이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기독교의 역사에서 예술과 미를 제한적이지만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씨름한 역사도 만만치 않다. 예술 혐오자요 엄격하고 금욕적인 기독교를 조성한 자로
알려진 존 칼빈조차 심미안이 결여된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꽃의 아름
다움에 우리의 눈이, 향긋한 내음에 우리의 오관이 끌리게 만드신 주님이 아니신가? 그
렇다면 그것들에 도취하는 것이 죄란 말인가? [...] 주님은 실로 단순한 필요를 넘어 우리
가 주의를 기울일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을 많이 만드시지 않았던가?”
근대 개신교 교회와 신학의 교부인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
는 종교를 심미적 과정으로 이해한다. 그에게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
관과 감정”이며, “무한자에 대한 느낌과 취향”이다. 그는 종교를 지식이나 윤리가 아닌
제3의 독립적인, 미학적 범주를 사용하여 정의한 것이다. 이것은 이성이 학문과 사회
의 유일한 입법자로 군림하기 시작한 계몽주의 시대에 나온 통찰이라 더욱 새로운 정
의라 할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예술과 종교 사이에서 유비적 관계를 보았다. 낭만파
시인 슐레겔(F. von Schlegel)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 카스퍼 프
리드리히(Caspar D.Friedrich)의 관계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신앙론』 3절에서 기독교 신앙(경건)을 지식(Wissen)이나 행위(Tun)가
아니라 감정(Gefühl)혹은 직접적 자기의식(unmittelbares Selbstbewußtsein)의 규정성으
로 정의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경건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있는 공동체로 교회를 재정립
하고자 했다. 여기서 경건은 “감정의 규정성”으로서 교회의 처음과 나중이다. 감정의 규
정성이란 감정의 정조를 말하는 것으로서 감정이 어떠어떠한 상태의 색체를 띄고 있다
는 것이다. 감정의 근본규정성이란 감정이 자기 자신, 하나님 그리고 세계와 만나 울리
는 모양의 근본구조를 말한다. 감정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직접적 자기의식”을 목
표로 하며, 감정이 직접적 자기의식 안에서 세계와 만나면 자유와 의존의 상호작용의
모양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현실을 수용하는 의식이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 나타난다. 감정의 규정성으로서의 경건은 원칙적으로 지식과
행위에 앞서는 것이긴 하지만 경건을 지식과 행위로부터 분리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
다. 슐라이어마허는 경건의 본래적 자리를 앎과 행위가 아닌 감정으로 제시함으로써
경건을 교리 및 윤리적 행위나 합리적 가르침과 동일시하려 했던 정통주의나 계몽주의
자들과 거리를 둔다.
종교적 경험을 신학, 특히 구원론에 연관시켜 전개한 탁월한 신학자는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이다. 웨슬리는 자신의 신학을 경험의 차원으로 명백하게 연결시킨
최고의 인물이다. 테오도어 러년은 서양 신학사에서 웨슬리의 독특한 공헌으로 “정통
경험”(orthopathy), 곧 바른 종교경험을 꼽는다. “바른 종교경험”은 웨슬리의 신학적 특
성을 드러내기 위해 만든 신조어로서 “정통교리”(orthodoxy)와 “정통행위”(orthoprax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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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대비되면서 이들을 보충하는 개념이다.
정통교리란 바른 믿음을 의미한다. 교회사는 바른 믿음을 얻기 위한 논쟁사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바른 믿음을 얻기 위한 논쟁은 초기 교부시대와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 정통주의 진영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단에 맞서 교회를 지키고 세울 필
요성이 있었던 고대 교회나 교단의 고백을 공고히 하려고 했던 종교개혁 이후의 고백
주의와 정통주의에서 정통교리를 강조했다면, 정치신학이나 최근의 당양한 해방신학
운동에서는 정통교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정통행위를 강조한다. 복음의 수
위성은 사회의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질병을 드러내 알리고 그것을 바로 잡아가기 위해
실천하는 정통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정통행위의 강조는 분명 오늘의 신앙과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근거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있으며, 신앙은 사회적, 생태적 실천
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일깨웠다.
웨슬리는 종교인이 된다는 것,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지적 차원에서의 교리적 승인이
나 실천적 차원에서의 선행과 자비행 이전에 일어나야 할 존재의 사건, 곧 하나님의 영
이 일으키는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경험을 포함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럴 때에만 신
앙이 살아있는 실재가 되고 생동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경험은
그것이 올바르게 해석되고 전달되기 위해서 정통교리의 말씀이 필요하며 세상을 성화
하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정통 행위의 실천이 필요하다. 그러나 말씀과 행위는 그것
을 이끌어내는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지고 충격을 받아야 하며 더 나아가 경험을 통해
매개되고 수용되며 소통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죽은 정통교리’를 통렬히 비난하면서
살아있는 종교의 자리를 이렇게 제시한다.
“한 사람이 모든 점에서 정통이어서 바른 의견을 신봉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열심히 변호할지도 모릅니다. 그는 우리 주님의 성육신에 대하여
또는 영원히 복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
는 다른 교리에 대하여 바르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세 가지 신조 모두 -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이라고 호칭되는 것 -에 동의할지도 모릅니
다. 그러나 그것 역시 유대인, 터키인 혹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전혀 종교를 갖지 않았
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종교,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웨슬리는 정통교리보다는 정통행위에 우
선성을 둔다. 그렇지만 웨슬리는 올바른 것을 승인하는 것과 올바른 것을 행하는 것도
기독교적인 ‘믿음’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제삼의 것을 찾았
고, 그것을 러년은 ‘정통체험’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정통체험이란 “진정한 믿음의 표
시인 영적 실재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과 그것에의 참여를 의미한다.”
20세기 이후 넓은 의미의 하나님 말씀의 신학은 미학적 경험에 대한 신학적 이론을 필
요로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으로 지시된 하나님 말씀과의
실존적 만남의 경험은 감각적으로 중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
육신의 말씀, 곧 몸이 된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선 감각적 지각
을 전제한다. 몸을 얻지 못한 말들은 주르르 미끄러져 내리고 말뿐이다. 기독교조차 하
나님이 만든 피조물의 물질적 측면을 단지 그것이 물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연의 실재 한 조각을 취하여 행위와 접
합시켜 의식과 물질성을 이음매 없는 구조로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능력이 있다. 인간
을 통해 자연은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이 없으면 말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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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의 신학은 종교 개념과 종교 심리학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과 거부를 재고해야 한다.
기독교 미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뿐만이 아니라 언어 외에 어떤 방식으로든
지 그의 지각가능성과 현상의 형태를 통해 나타난다는 점을 새롭게 주시해야 한다. 여
기서 기독교 미학은 풍경이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우렸던 창조론의 한계를 넘어 감성과
아름다움 일반에 대한 신학적 반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최근 한국 기독교 안에서 예술과 신앙, 미학적 경험, 신학적 미학에 관한 저술이
국내외 안팎에서 저술되거나 번역되고 있음을 눈여겨본다. 기독교 신앙은 지정의(知情
意)로 받아들이고, 지정의를 통해 다시 표현되어야 한다. 개신교회와 신학은 신앙의 참
(眞)과 선(善)을 설교하고 신학화하는 일에만 주력하였지 신앙의 아름다움(美)을 깊고
넓게 성찰하지 못했다. 아름다움이 없는 세계에서는 혹은 최소한 “그것을 더 이상 발견
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세계에서는 도덕적 선도 또한 왜 그러해야 하는지의 자명성과
매력을 잃게 될 것이다."
중세의 신학자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란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안셀무스 이후, 신학과 교회는 1,000년 동안 이
명제를 금과옥조로 받들면서 성서와 교회를 통해 전승된 기독교 신앙을 개념적이고 지
성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며 해석하는 데 일방적으로 주안점을 두었다. 그 결과 신앙
을 삶을 통해 느끼고 실천함이 없어도 바르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만 있다면 좋은 신앙
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의 교리적 진술에 치우쳐 지나치
게 논리적이고 윤리적이 됨으로써 공동체의 감성을 소홀이 하거나 간과했다. 이런 이
유로 나는 새로운 시대에 펼쳐가야 할 신앙은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 “感性을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sensum), “광적(廣的) 감성의 신학”이
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과 신앙이 하나로 묶이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도래했음
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이 걸어야 할 새로운 방법론, 곧 “예술적 방법
론”이다. 들음과 이해의 신앙에서 통전적 봄과 통합적 느낌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나는
기독교 미학의 새로운 명제로서 “아름다움을 찿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을 제
시한다. 이 명제는 안셀무스의 명제인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보완하고 넘어서 신앙의 구체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드러내기 위함이다.
학문분류와 명칭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사색과 연구가 필요하지만, 나는 기독교 미학
을 신학적 미학과 미학적 신학으로 구분하여, 신학적 미학은 한 그리스도인이 예술과
실재(實在)의 미적 차원을 바라보는 방식 즉, 예술과 미적인 것은 기독교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탐구하는 분야로 정의하고, 미학적 신학은 예술적 사유를 통해 기독
교(기독교 신학)를 알고 표현하는 과제를 담당한 분야로 정의한다. 본 글에서는 “기독교
미학”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할 것이지만 우리는 다음 절에서부터 엄격하게 말하여
미학적 신학을 전개할 것이다.
2. 기독교 미학의 인식론: 영적 감각론
1) 하나님 경험과 영적 감각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미 항상 세계경험과 연관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계와 관
계하며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세계관계성 속에 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 행동하였고, 행동하고 있으며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 경
험가능하고 경험 가능해야 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모든 가르침과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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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중 어느 것도 반 경험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가령,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 예수
의 성육신과 부활 등의 가르침은 경험 가능한 행위이며 가르침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을 세계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행위는 세계의 일상
적인 경험 밖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경험 속에서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된다
면 하나님은 세계의 한 대상이나 한 사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고립된, 별도의 특별한
세계영역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세계 전체 안에서 만나져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에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경험되어야 한다. 슐라이
어마허도 종교의 본질에 관하여 말하면서,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한 하나
님의 행위로서 표상하는 것, 그것이 종교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일부 사건이나 혹은 특정한 대상이나 특별한 순간에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언제 어디서나 경험 가능하다. 위르겐 몰트만(J.Moltmann)은 아우구
스티누스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라는 물음의
대답을 변형시켜 이렇게 답한다. 몰트만의 아름다운 시적인 표현으로 서술된 답변을
통해 영적 감각이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이어주고 서로 교감하고 사귀게
하며 하나님과 온 피조물이 서로서로 거하게 하는 매개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는 육체의 아름다움과 활동들의 리듬과 눈들의 광채와 포
옹들과 느낌들과 냄새들과 형형색색의 이 창조의 소리들을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을 내가 사랑할 때, 나는 모든 것을 껴안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피조물들 속에
서 나는 나의 모든 감각들을 가지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내가 만나는
모든 것 안에서 나를 기다립니다.
오랫동안 나는 당신을 내 안에서 찾았고, 내 영혼의 달팽이 집 속으로 기어 들어갔으며,
접근할 수 없는 장갑차를 가지고 나를 방어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바깥에 계
셨으며, 내 마음의 좁은 데로부터 나를 삶에 대한 사랑의 넓은 영역 속으로 이끌어 내
셨습니다. 이리하여 나는 내 밖으로 나왔으며, 나의 영혼을 나의 감각들 안에서 발견하
였고, 내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찾았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삶의 경험들을 더 깊게 하였고, 그것을 위축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나
는 더욱 더 여기에 있고 싶습니다. 내가 보다 더 직접적이며 전체적으로 여기에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더욱 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삶의 무한한 원천을, 삶의 영원을 느낍니
다.”
몰트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온갖 피조물 속에서 모든 감각들
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내면적 인간 영혼의 비
좁고 견고한 달팽이 집 속으로만 들어갈 것이 아니라 인간 영혼 바깥으로 나와 찬란하
게 펼쳐지고 끊임없이 생성하는 삼라만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체험하는 감각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접촉점을 찾으라는 것이다. 인간의 일상적인 형편은 영적
실재에 무감각하며, 영적 감각에 둔감하며, 신적인 실재에 무지하고 한마디로 이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찬란하게 펼쳐지고 끊임없이 생성하는 삼라만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체험하는 감각들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일상적인 경험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을 하나님과 연관된 경험으로 만
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적 감각이다. 기독교 미학에서 감성의 복권을 진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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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하는 이유는 신적 실재를 머리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구체적으
로 느끼고 표현함으로써 신앙의 생동성과 역동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신학은 전
통적으로 거론되었던 영적 감각을 통해 감성의 복권을 시도할 수 있다.
영적 감각이란 무엇인가? 시편 115편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 생활하던 시기를 반
영하고 있는 본문이다. 이방인들은 어마어마한 신상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랑한다. 그
러나 이들 신상에는 감각이 없다. “신상은 입은 조각해놨지만 말하지 못하며, 눈도 그려
놨지만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
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
하니라”(시 115: 5-7). 그렇게 크고 웅대하고 화려하지만 보고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살아있는 감각이 신상에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상은 말을 못하는 벙어리라는 것
이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은 다 그와 같으니라”(시 115:8).
성서에서 무감각은 우상이고, 따라서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결국 감각이 죽어있고, 감
각이 죽어 있으니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예수께서는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고친다(막 7:31-37). 귀먹은 것이 고쳐짐으로써 그는 세상의 소
리를 들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말더듬이가 고쳐짐으로써
그는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이제 그
는 세상과 방해받지 않고 소통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자기 힘으로 그리면서 살
수 있게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감각을 회복시킴으로써 한 사람을 생동감 있는 인격이 되게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란 세상과 살아있는 소통을 할 수 있는 감각과 감성이 살아있는 사람
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육신의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
신다. 예수께서는 한 때 제자들에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다”(막 8:18)고 책망하신 적이 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대개 일반 사람들은 새로운 실재
를 보지 못한 채 사는 데 그것은 “마음의 완악함”(막 3:5)과 “마음의 둔함”(막 8:17)때문이
다. 그들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은 새로운 감각, 곧 믿
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예수께서는 육적인 감각만이 아니라, 영적인 감각이 열리길
원하고 있으며, 영적인 감각은 믿음을 통해 열린다는 것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자라
도 보게 하고, 불신은 보는 자라도 맹인이 되게 한다(요 9:39).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의 말씀 안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각할 수 있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
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32).
2) 기독교 미학과 기독교 윤리
기독교 미학은 오늘날 더 이상 진(眞)과 선(善)과 형이상학적으로 통일선 상에 있는 깨
어지지 않은 미(美)의 이론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 근대 형이상학의 근본 위기를 언급하
지 않더라도 아름다움의 범주는 기독론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운 종말론적 개념이다. 자
연 역시 직접적으로 소박하게 하나님의 좋은 창조로서 경험될 수 없으며 유의미성과
무의미성 혹은 반의미성의 모호한 경험의 원천이다. 창조로서의 자연의 경험을 그리스
도의 창조 중보직(요 1:3; 고전 8:6; 골 1:16f.; 히 1:2. 계 3:14)에서처럼 기독론적으로 정초
할 수 있는 것처럼 창조의 미학도 십자가의 신학으로부터 보아야 한다. 신약성서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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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노래로부터 그리스도를 해석했다. 고난받는 야훼의 종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어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
당한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
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형이상학적인 전체성의 미학과는 달리 예수의 삶
과 정신은 십자가의 고난에서 “추(醜)의 미학”으로 인도된다.
우리는 십자가의 아름다움에서 “미학을 미에 대한 학설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별로 의
미가 없다”는 아도르노(Th.Adorno)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는 만일 “미학이 아름답다
고 칭해지는 것들의 체계적인 목록일 뿐이라면 그것은 미의 개념 자체 속에 포함된 생
명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철학자 헤겔이
말한 것처럼,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관을 쓰고 형장으로 십자가를 끌고 가 십자가에 매
달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순교적인 죽음의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은 고대
그리스의 미의 형태로는 표현할 수 없다.”
왜 인간은 추한 것을 표현하는가? 침묵이 때로는 위대한 발언인 것처럼, 아름다움의 부
정인 추함이 어떤 것에 생기를 주는 표현적 서술일 때가 있다. 추함이 아름다움의 배경
또는 둘레가 될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직접 미적 존재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아
름다운 것이 주는 쾌감은 언제나 자유로운 자기활동의 감정을 주지만, 추한 것이 주는
불쾌감은 자기충동의 감정을 준다. 예술은 미적인 것만 말하는 게 아니라, 숭고, 비극
그리고 희극과 같은 성격적인 것(das Charakterische)을 포함한 미적인 것을 말한다. 십
자가의 추는 비참하고 참혹한 현실, 죄악과 한과 폭력에 저항하는 예술적 형상화일 수
있겠다. 아도르노는 히틀러의 참혹한 통치를 몸소 겪은 다음 이런 말을 했다: “예술의
형태는 인간역사를 문서보다 더 합당하게 기록한다. 참혹한 형식은 참혹한 삶을 부정
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 일이 없다”. “예술은 추한 것으로 배척당한 것을 자신의 사안
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와 같은 것들을 통합하거나 온건하게 만들거
나 혹은 가장 역겨운 것을 유모를 통하여 그것의 존재와 화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
술이 그림으로 창작하거나 재생산하는 세계를 그러한 추를 통해 단죄하기 위해서이
다.”
그러나 십자가 밑에 드리운 어둠과 침묵에서 어떤 빼어난 은유와 상징으로도 그릴 수
없는 현실을 만난다. 시인 송경동은 2007년 10월 11일 일산 주엽역 태영프라자 앞에서
일어났던 노점상 철거에서 죽음에 이르게 한 붕어빵아저씨 고(故) 이근재 선생님 영전
에 바친 詩에서 어떤 그럴듯한 표현으로도 그릴 수 없는 삶, 어떤 그럴듯한 은유로도
보여줄 수 없는 현실, 어떤 아름다운 수사로도 형상화 할 수 없는 그 밤, 어떤 상징으로
도 새겨줄 수 없는 그 아침을 이런 말로 노래한다.
당신의 죽음 앞에서
어떤 아름다운 시로 이 세상을 노래해줄까
어떤 그럴듯한 비유와 분석으로
이 세상의 구체적인 불의를
은유적으로 상징적으로
구조적으로 덮어줄까
[...]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보다 잔인하진 않았으리
이렇게 일상적이지는 않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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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편적이지는 않았으리
이렇게 평범하지는 않았으리
송경동,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 중에서
기독교 미학은 은유와 상징 등 그 어떤 수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언어의 불모지인 십자
가에서 나타난 참혹한 형식인 ‘추’를 예수의 수난사를 통하여 읽고자 한다. “수난”
(Passion)이라는 단어는 고통(고난)과 열정, 격정, 열애 곧, 열정적 사랑이라는 두 가지 의
미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는 하나의 큰 수난, 한 열정적인 사랑의 이야기
라는 말이다. 일본의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는 박해와 고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
을 밟는 것이 교회의 교리가 정한 배교일지언정 그 분이 행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버리
는 것이 아닐 것이며,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과 나의 주님이 다름”을 한 성
직자 페레이라의 고백을 통해 이렇게 증언한다. “그것은 신부가 오늘날까지 포르투갈
이나 로마, 고아, 마카오에서 수없이 보아온 그리스도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위엄과 자랑스러움을 지닌 그리스도의 얼굴이 아니었다. 아름답게 고통을 견디
는 얼굴도 아니었다. 유혹을 물리친 강한 의지의 힘을 보여주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의
발치에 놓인 그분의 얼굴은 바싹 마르고 지쳐 빠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밟은 탓으로,
동판이 박힌 판대기에는 거무스레한 엄지발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
도 너무나 밟힌 탓에 움푹 파이고 마멸돼 있었다. 움푹 파인 그 얼굴은 고통스럽게 신
부를 쳐다보며 호소하고 있었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괜찮다. 너희들에게 짓밟히기 위
해 나는 존재하고 있다.’”
십자가의 고난과 사랑은 사실 예수의 삶 전체를 수놓았던 삶이다. 미학이 지각능력과
판단능력에 관한 이론이라면 기독교 미학은 예수의 미의식에 기초해야 한다.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고 이러한 판단을 내린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보고 옳고 그름, 온당함과 온당치
못함에 대해 내리는 판단을 미의식 혹은 미적 판단이라고 한다. 가다머(H.-G. Gadamer)
에 의하면, “건전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란 특수한 것을 일반적인 관점에서 판단할 능
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예수는 한 구체적인 사건을 보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판단한 것이 아니라 진
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판단을 내린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
내고자 하심이라!” 모든 사람들은 관습, 전통, 조상이나 본인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이
렇게 일반적인 관점에서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는 가장 중요한 것, 사물의 근본을 보고
판단한다. 그에게서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 그것이 예수의 미의식이고 미적 판
단이다.
성서는, 특히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영광’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나사
로의 병을 보고도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요 11:4) 영광
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용어이다. 영광이란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는 능력과 힘이다.
그 영광은 그와 하나가 된 아들 안에 나타나며, 아들을 통하여 교회에 전달된다. 영광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일을 드러내는 집약적인 개념이면서 동시
에 미학적인 개념이다. ‘영광’이란 말의 일반적인 뜻은 찬란, 찬연, 휘황하게 빛난다는
뜻이다. 영광이란 ‘아름다움’이란 말의 성서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
름다움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영광에서 기독교 신앙의 지고의 아름다운 경지를 본다.
그리스도인은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고, 말과 행위로 표현하고 그 아름다움을 온 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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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산다. 요한은 주님의 영광을 이렇게 설파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요 1:14)
예수는 세상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는 심미감을 갖고 있다. 예수의 그 같은
미적 판단은 그의 아가페적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엔도 슈사쿠는 다시 『침묵』에서 그
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증언한다. “성경에 나오는 인간들 중 그리스도가 찾아 헤맨 것
은 가버나움의 하혈병 앓는 여인이라든가, 사람들에게 돌로 얻어맞는 창녀처럼 아무
매력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은 존재였다. 매력 있는 것,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린다면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다. 빛이 바래 누더기가 다 된
인간과 인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사랑이다.”
기독교 미학이 포괄적인 신앙의 지각의 이론이라면 그것은 윤리적 지각의 이론을 포함
한다. 신앙의 말씀은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응답과 책임을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산
상수훈의 말씀처럼 “예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마 7:24), 다시 말해, 말씀에 따라 살
고 행동하는 자라야 지혜 있는 사람이다. 신앙의 응답은 “예-예-남발”, “주여-주여-부르
짖음”이나 “입술고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며 마음으로 믿으며
(롬 10:10), 이에 상응하는 몸짓과 삶의 행위로써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행
하는 자여야지 듣는 자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
다(약 1:22). 이러한 인식은 바로 신학적 미학에 속한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린다”(약 1: 23-24). 신앙으로부터 나온 행위가 없다면
이 신앙은 새로운 자기 인식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망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3. 기독교 미학의 근본개념 :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미학과 윤리는 삶을 영위하는 태도와 삶의 형식을 보는 두 가지 형식이다. 이 두 형식
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섭하거나 어느 한 쪽으로 환원될 수 없으나 서로 밀접하게 연
관되어 있다. 나는 미학과 윤리의 상호관계를 고린도후서 3장의 예를 통해 서술하면서
기독교 미학의 근본개념을 제시하려고 한다.
바울의 편지들은 처음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문서이다. 바울은 후기의 복음서와 달리
예수에 대하여 거의 이야기 하지 않는다. 바울은 예수의 삶과 사역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에 더 역점을 두어 서술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 2절에서 고린도의 남녀 그
리스도인들을 사도를 위한 편지(추천서)요 심지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한다. “너희
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
이라”(고후 3:3).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나의 텍스트인 바, 그 텍스트의 저자
는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 살아 있는 편지는 모세가 돌판에 기록한 율법과 차
원이 다른 것으로서, 이 차이는 영과 문자의 차이이며 복음과 율법의 차이이다. 벗어야
할 수건은 옛 계약 문서에 덮인 수건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덮인 수건이다.
그리스도인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
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그러나 구약이 가릴 수 있었듯이 우리의 복음도 가릴 수 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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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
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4-6). 구약의
텍스트, 다시 텍스트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발견하는 그리
스도인의 삶 사이에 해석학적 순환이 결성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상을 우리에게 펼쳐 보임으로써 구약성서의 궁극적 의미를 완성한다. 그리스도의 얼굴
은 구약성서가 설명하고 찬양했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모상이다. 이 하나님의 영광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빛난다. 하나님의 영광에 감촉된 신앙은 인식론적
과정만이 아니라 감성적 과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 접촉되고 설득당하고 사로잡힌 그리
스도인들의 생활 전체를 붙잡는다. 복음의 말씀 속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
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는 자는 그 자신 그리스도 상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할 것이고 그
상으로 변할 것이다. 말로 선포되고 문자로 기록된 복음의 의미는 인간의 삶 속에서 만
나는 역사적 결단 속에서 마침내 완성된다. 복음을 듣고 읽는 행위는 삶의 실현 속에서
완성된다. 성서로 문자화된 그리스도의 초상이 그의 실재의 모방이듯이 신앙의 삶은
그리스도의 모방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권면한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은 곧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얼굴이다(갈 3:1). 십자가에
달린 자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 그러나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자연적인 초
상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보는 부활의 빛에 의해 조명된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신앙
은 십자가에 달린 자를 다른 눈 곧, 밝은 눈으로 관찰한다. 신앙은 눈앞에 전개된 사실
너머를 본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서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예수의 삶과
인격의 부분적 특징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와 사역 그리고 죽음이 신
앙에 새로운 빛, 즉 새로운 창조의 빛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
이다(고후 5:16-17). 신앙의 눈으로 보는 그리스도상은 단지 발명품이나 종교적 환상이
아니라 신앙인에게 인상을 주고 감동시킴으로써 그 삶을 변화시키고 참되게 만든 발견
된 진리이다. 미학적 성경 읽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찬반(贊反)에로의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자 앞에서 새로운 삶으로 변하기를 원한다.
‘영광’은 성서와 신학에서 하나님의 자기계시 때 나타난 현상과 경험을 제시하기 위한
개념이기 때문에 기독교 미학의 근본개념으로 삼아도 좋다고 본다. 기독교 정통주의의
마지막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난다. Soli Deo gloria!(오직 주님께만 영광!) 웨스
트민스터 간추린 교리문답이 말하듯이 인간의 중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이며 그를 영원히 즐기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인간의 이기적인 삶을 넘어서 하
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살아야 한다. 존 웨슬리에게 이것은 마음과 삶의 성화
로 전개된다. 사실 초기 교부들 이래로 신학 전통은 항상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임을 말해 왔다. 주님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
이요, 인간의 최고의 목적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향유하는 것, 이것
이 인생과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다.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모든 열락(悅樂)의 궁극 원천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인들 가운데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
릴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부름을 받는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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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얼굴에서 보며 이 빛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가운데 비추었다고 말함으로써 영광
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고 그것을 새창조론과 연결하여 해
석할 수 있는 착상을 제공한다.
4. 기독교 미학 : 반(反)하나님 나라에 저항하고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환희
신학함이란 오늘 여기에서 일어나는 온갖 反하나님의 나라의 행태에 분노하고 저항하
며 그럴수록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며 그리는 환희(歡喜)와 열락(悅樂), 곧 기
쁨과 즐거움이다. 독일의 여신학자 도로테 죌레(Dorothe Sölle)는 하나님을 그리는 이유
를 복음에 대한 환희와 反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노로 요약한 바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의 본래적 언어는 예언자적 저항과 분노의 언어이기보다 기쁨과 평화의 언어이다.
그녀는 저항은 아름다움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덧붙인다. “성 프란치스코나 튜링엔의
엘리자베스 혹은 마르틴 루터 킹의 저항은 아름다움의 지각에서부터 자란 것이다. 가
장 오래되고 가장 위험한 저항은 아름다움에서 태어난 것이다. 월터스토프도 “평화의
가장 고등한 수준은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항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미
로움과 달콤함의 맛을 가직할 때 단지 파괴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창조로 나아갈 수
있다. 시편에서 ‘기쁨’은 ‘찬양 시’의 직접적인 동기이고, ‘고난’은 ‘탄식 시’의 직접적인
동기이다. 기쁨과 탄식, 이것은 생리적으로 나오는 인간의 대극적 근본 감정이며 열정
이다. 감정과 열정을 담아낸 신학의 언어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
가 나의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하고 질문했다. 나는 ‘아름다운
힘’을 사랑한다고 답하고 싶다. 성 프란체스코, 디트리히 본회퍼 그리고 마르틴 루터 킹
의 저항의 힘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지하고 체험함으로부터 자란 것이다.
개신교인들은 “예술품이 언제나 작가가 믿는 종교의 표현이거나 종교를 표현하는 것이
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작가는 자신의 종교를 표현하기 위해 예술을 창작한다는 논제
를 개발해 왔다.” 그러나 예술과 신앙(신학)의 관계에서 예술은 단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성서의 이야기와 교리를 설명하거나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써만이
아니라 예술 자신만이 가지는 독특함과 고유함으로 신앙(신학)과 관계해야 한다. 신학
의 역사가 옛 것, 본질적인 것, 같은 것, 동일한 것을 고수하는 정통의 역사, 동일성의 역
사라면 예술사는 새 것, 다른 것, 창조적인 것, 본질의 변형적 표현, 차이를 추구해 온 이
단의 역사이다. 신학에서는 이성의 논리를 통해 동일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혔다면 예
술에서는 감성을 통해 차이가 배양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미학은 신학과 교회가 예
술을 통해 자기혁신의 시각에 눈뜨는데 기여할 것이다.
미래의 신학 방법론에는 예술적 감성론이 추가되어야 한다. 인류 문명은 최근 새로운
세계문화(Weltethos)를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기술과 경제개발이 많은 공헌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생태계의 위기와 빈부 격차의 심화, 인간성의 파괴, 생활세계의
파편화 등 인류를 파멸의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인류는 당혹하고 있다. 이
제는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면서까지 물질적 편리와 풍요를 바라보는 성장 이데올로기
를 넘어선 본래적인 인간성의 실현과 성취를 바라보아야 할 중요한 시점이다. 그동안
자연과학적 사유는 세계를 대상화, 사물화하고 물질의 표피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었다.
생명공학과 뇌과학 등 고도의 과학기술 문명 속에서도 인간성을 하나님과 잇대어 이해
할 수 있는 전체적 감성으로써 신학하기가 요청되고 있다.
계몽주의와 근대화 이후 신학과 교회는 올바르고 지적인 교리의 형성(정통 교리), 성서
6/11/23, 9:45 PM [심광섭] 기독교 미학: 감성을 통해 읽는 기독교 신앙 : 자료실 : 베리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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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역사-비평적 분석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행동(정통 행위)에만 지나치게 전
념함으로써 전일적(全一的) 기독교 영성 형성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인간, 자연 및
우주의 전체성은 큰 이야기나 이성적 체계로써만이 아니라 작은 이야기, 느낌과 체험,
곧 미학적 감성을 통해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미감적 경험(느낌, 체험)은 물
질의 깊이 안에서 생동하는 영을 찾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성례전성이 드러나게
된다. 기독교 미학의 힘은 성령 안에서 역사하는 감수성과 상상력, 이성을 해방하여 기
존 리얼리티의 독점을 타파하고 하나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데 있다.
출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료실

심광섭, 폴 틸리히 고전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사상사>의 가치

 


폴 틸리히 고전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사상사>의 가치

심광섭 감신대 전 교수, 14일 SNS 통해 전해

기독일보 김재건 기자(haeil20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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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의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사상사> ©심광섭 전 교수 페이스북 캡처

'토요독서모임'을 진행 중인 심광섭 감신대 전 교수가 최근 독서모임의 추천작품으로 선정된 바 있는 폴 틸리히의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사상사>(대한기독교서회)가 지니 고전적 가치를 되새겼다.


심 전 교수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한 학도의 제안으로 폴 틸리히의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사상사>를 읽게 되었다"며 "이 책은 1980년 송기득 교수께서 처음 번역했는데, 그동안 판과 인쇄를 거듭해 출간되고 있다. 40년 이상 계속 나오고 있으니 참으로 장수하는 귀한 책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만큼 근대 사상사에 대한 서술이 탁월하다는 말일거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 이 책만 대략 대여섯 번째 읽게 된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간간이 생긴 오역을 바로잡지 않는다는 점이다. 매우 유감스럽다. 내가 발견하는 이 책의 탁월한 점은 다음의 것들이다"라고 전했다.


책의 두드러진 특징에 대해 심 전 교수는 먼저 "저자가 역사학자가 아니라 조직신학자이자 철학적 신학자이기 때문에 역사 서술을 위한 선택, 해석의 관점에서 틸리히 신학의 특징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라며 "역사의 서술은 역사적 사건을 무미건조하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해석하는 작업이다"라고 했다.


이어 "책의 허리는 슐라이어마허와 헤겔을 다룬 부분이다"라며 "종교개혁 이후, 정통주의, 경건주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를 지나면서 분화된 사상들의 종합을 시도한 사상가들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자로서, 헤겔은 철학자로서 이 일을 시도했고, 종합의 시도는 틸리히의 관심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또 "이 책은 계몽주의 시대를 다룸에서 이성적 근대만이 아니라 낭만적 근대를 다룬다는 점이다"라며 "이 점에서 틸리히는 개신교 신학자로서 '예술신학'의 개척자이다. 틸리히는 프로테스탄티즘이 도덕적 계율의 비신비적 체계가 되어 버렸음을 늘 안타깝게 여긴다. 이것을 극복하는 길은 신적 현존과 인간의 신체험을 진지하게 수용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의 신학에 '철학적 신학', '문화신학'이란 명칭은 늘 따라 붙었던 이름이다. 그러나 틸리히가 근대는 이성의 시대만이 아니라 감성의 시대이기도 했다는 면을 부각하는 것은 실로 경이롭다"며 "낭만주의는 계몽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이성주의적 근대의 어두운 그늘을 드러낸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낭만주의를 포함한 책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틸리히의 역사를 보는 안목은 이미 이성 중심의 근대성을 넘어서고 있다"고 덧붙였다.


심 전 교수에 따르면 틸리히는 계몽주의 본질을 네 가지(자율, 이성, 자연, 조화)로 제시하는데 그 첫째가 자율(自律, autonomy)이다. 그는 "타율(他律, heteronomy)에 의해 지배된 질서를 비판하고 무너뜨리는 독보적 힘은 인간의 자율에 있다. 자율은 가장 숭고한 인간 존엄성의 근거이다. 그러나 틸리히는 신학자로서 자율로 만족하지 않고 신율(神律, theonomy)을 말한다. 신율이란 자율의 신적 근거를 알고, 신적 근거에 잇댄 자율이다"라고 했다.


심 전 교수는 또 "틸리히는 이성의 개념을 비판성이 아니라 보편성부터 서술한다"며 "보편성, 비판성, 직관성 그리고 기술적 이성이다. 틸리히는 기술적 이성을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이성이 지닌 도구성의 긍정적 차원을 역설한다. 특히 신학자가 신학자로서 남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경멸해서는 안 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아도르노 이후 이성의 도구성을 비판하는 것과 다른 양상이다"라고 했다.


틸리히가 관심했던 종합의 사상가 슐라이어머하와 헤겔에 대한 평가도 보탰다. 심 전 교수는 "전통주의는 신앙에 우위를 두었고, 정통주의는 신앙과 사변을 택했으며, 계몽주의는 학문과 이성을 택했다면 슐라이어마허와 헤겔은 신앙과 이성, 신학과 학문, 영성과 지성 등, 양자의 종합을 선택하여 종합을 만들어 낸 사상가들이다"라며 "특히 르네상스 이후, 17-18세기에 형성된 새로운 인간 이해를 신학이 통합했다. 이 둘은 합성 진주가 아니라 진짜 진주로서 오늘에 이르는 사상사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틸리히는 평가한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종합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위대한 종합은 헤겔이 사망하기도 전에 파열되기 시작하는데,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의해 대대적으로 폭탄처럼 터진다"며 "틸리히는 이들 이전에 독일 관념주의 철학에서도 잠깐만 언급하는 셸링을 크게 다룬다. 근대 기독교 사상사에서 낭만주의와 셸링의 사상사적 의미를 언급하는 책은 틸리히가 유일할 것이다"라고 했다.


끝으로 심 전 교수는 "20세기 신학사상에 대한 언급은 빈약하다. 아마 자신이 아직 살고 있었던 시대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추측한다"라며 "그러나 새로운 신학운동에 대한 촉감은 예리하다"고 평가했다.




[출처]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07635#share

[예술신학] ② 영적 감각 - 가스펠투데이

[예술신학] ② 영적 감각 - 가스펠투데이
[예술신학] ② 영적 감각
 심광섭 교수 승인 2019.09.26 08:34 댓글 0기사공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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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서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했다.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은 참 선한 아름다움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는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감각을 ‘영적 감각’이라 말해왔다. ‘영적 감각’은 생소한 용어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교회에서 ‘영안(靈眼)’, 즉 영적인 눈, ‘영적 시각’에 대해 말하곤 한다. 이 글에서는 ‘영적 오감’에 관해 언급하려고 한다. 육체의 감각을 통해 보이는 것을 지각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 성스러운 것, 신적인 것, 하나님을 지각하는 감각을 영적인 감각이라 말한다.

‘영적 감각’은 고대의 오리게네스로부터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중세의 보나벤투라를 거쳐 근현대의 웨슬리, 라너, 폰 발타자르에 이르기까지 발전적으로 계승된 중요한 신학적 사상으로 영적인 것들을 지각하고 향유(享有)할 수 있는 감각이다. ‘영적 감각’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안에 촛불을 켜 인간의 내면만이 아니라 세계와 자연을 통해 발현되는 하나님의 참 선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고 느끼고 사랑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영성을 북돋아준다.

이스라엘의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방인이 섬기는 우상과 대조된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4-8) 우상의 특징은 감각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감하고 공명하고 교류하는 능력이 없다. 이게 우상이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은혜(사랑)는 우리의 감각을 열어주시고 민감하게 하신다.

이 감각은 사랑하는 자의 가슴에서 움 돋아 “시온의 돌들만 보아도 즐겁고 그 티끌에도 정을 느끼는”(시 102:14) 청초한 영혼의 시적 감각이다. 영적 감각은 경험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초경험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감각이다. 영적 감각은 모든 것(종교적인 것뿐 아니라 친구, 가족, 일, 관계, 성, 고통, 기쁨, 자연, 음악, 유행, 문화 등)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나는 감각이다.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 36:9). 주의 빛 안에서 우리는 삼라만상을 통해서 형형색색 빛나는 색채를 본다.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법열' 1647-1652. 대리석, 높이 350 cm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법열' 1647-1652. 대리석, 높이 350 cm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의 모든 것들(萬象)에는 내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장소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는 오직 당신 안에만 내 영혼이 쉴 수 있는 장소가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흩어진 내 자신을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거두어 모아 주시고, 나의 어떤 부분도 당신을 떠나지 말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만을 봤던 그는 주님의 부름을 듣고 회심을 하여 오감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신기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래도 당신은 부르시고 소리질러 귀머거리 된 내 귀(청각)를 열어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은 당신의 빛을 나에게 번쩍 비추어 내 눈(시각)의 어둠을 쫓아 버렸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향기를 내 주위에 풍기시매 나는 그 향기를 맡고서(후각) 이제 당신을 더욱 갈망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맛보고는(미각) 이제 당신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한번 만져 주시매(촉각), 나는 불이 붙어 당신이 주시는 평안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고백록』, X.27.38]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주 상세하게 하나님의 지각, 5가지 영적 감각의 대상이 되도록 하나님을 서술하고, 하나님을 내적 인간의 5가지 영적 감각 의 대상으로 만든다. “하나님은 빵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또 하나님은 빛도 아니다. 하나님은 옷도 아니고 집도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가시적인 것들이고 개별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이다. 당신이 배고프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빵이다. 만일 당신이 목마르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물이다. 만일 당신이 어둠 속에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빛이다. 하나님은 부패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헐벗었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불멸성으로 입히는 옷이다. 썩어질 몸이 썩지 않을 옷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옷을 입는다.”(요한복음 강해, CCL, 36, 133)

그리스도인은 온 몸으로, 즉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통감각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이 말씀은 오감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느끼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거기에 싣는 여일하고 순순(淳淳)한 과정을 의미한다. 다중 감각적 체험과 감각적 경험이 삶을 청초하고 풍요롭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사랑의 자유와 자유한 사랑으로 찰랑찰랑 흘러넘치고 풍성해지는 즐거운 온유함과 가을 햇살처럼 깊이 찾아드는 고즈넉한 겸손함에 무연히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영적 감각은 그리스도인을 지적이거나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사람으로 자라게 한다. 성 테레사의 영성에서처럼 하나님과의 신비적이며 황홀한 사랑의 교감은 하나님과의 영적 감촉(taste and touch)을 통해 완성된다.

 

 

심광섭 목사 전 감신대 교수(조직신학/예술신학)예목원 연구원
심광섭 목사 전 감신대 교수(조직신학/예술신학)예목원 연구원

실천신학 - 개신교의 성만찬이해와 그리스도인의 삶 / 심광섭 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실천신학 - 개신교의 성만찬이해와 그리스도인의 삶 / 심광섭 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개신교의 성만찬이해와 그리스도인의 삶 / 심광섭 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세례 성찬수정삭제조회 수 3006 추천 수 157 2005.07.21 21: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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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성만찬이해와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와세계 [제235호] 2005년 06월

심광섭 목사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성례전(성사, sacraments), 특히 성만찬1) 의 행위와 신학적 이해와 관련하여 현실 개신교 기독교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동기와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정교회 기독교, 가톨릭 기독교 그리고 성공회 기독교와 비교할 때 현실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복음설교를 성례전보다 앞세웠던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과 무엇보다 성만찬 예배를 소홀히 한 한국에 선교된 개신교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많은 개신교 교회에서 성만찬을 통한 예배의 갱신과 예배에서의 말씀과 성만찬의 균형적 상보관계를 주장하고,2)  또 실행하는 교회가 늘어가는 추세이나,3)  전반적으로 봤을 때 아직도 개신교의 예배는 말씀 중심의 예배라는 판단은 틀린 판단이 아닐 것이다. 매주, 혹은 매달 한 번의 성만찬을 행하는 교회도 늘고 있으나, 대개의 교회에서는 일 년 중 중요한 교회 절기에 서너 번 성만찬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 글이 생동적인 글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 한국 개신교회의 성만찬이해와 성만찬 실행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와 점진적인 형성 및 그 전망을 고찰해야 하겠으나, 현재 매우 많은 교단으로 이루어진 개신교회를 일일이 경험적으로 고찰하지 못한 형편이기 때문에, 개신교의 성만찬이해를 위해서는 종교개혁 신학자들로부터 교회일치를 추구하는 신학자들의 성만찬이해를 중심으로 검토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해서도, 지속적인 성만찬 행위를 통해 어떻게 성도들의 삶이 그 이전과는 다르게,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지를 경험적으로 연구하지 못했음으로 중요한 신학자들의 성만찬 의미에 대한 연구 성과를 검토함으로써, 성만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삶이 지향해야 할 의미와 가치 지평을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 개신교에서의 바람직한 성만찬과 성만찬 생활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아니라 규범적이며 미래적 전망을 내다보면서 서술하고 제시하는 방향의 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한국에서의 교회간 대화를 통한 화해와 일치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쓰고 있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개신교 예배에서 성만찬에 대한 이해와 행위를 높이고 이를 통해 성례전 일반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높여, 교회 안에서의 예배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풍성한 성례전적 삶(sacramental life)을 회복함으로써 세상에서의 기독자의 삶을 새롭게 형성해야 한다는 목표를 두고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장에서는 개신교회의 기원인 종교개혁자들(루터, 츠빙글리, 칼빈)과 그 이후 전개된 중요한 신학자들(웨슬리와 슐라이어마허)의 성만찬 이해의 중요한 초점들을 일별하고, 최근 교회일치에 크게 기여한 BEM문서의 신학적 의의를 논의하겠다. 2장에서는 개신교의 성만찬에서 새롭게 탐구되는 성만찬의 의미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와 가치 지평을 모색하겠다. 그러나 이 글의 무게 중심은 1장보다는 2장에 있다.
 
 
1. 개신교회의 성만찬 이해
 
폴 틸리히(Paul Tillich)에 따르면, 개신교 신학에서 성례전에 대한 물음은 다른 어떤 신학적 물음보다 처음부터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물음이었고, 개혁자들 간에 치열한 논쟁 속에서도 확실한 답변을 주지 못한 물음이었다.4)  그도 그럴 것이 종교개혁은 중세 후기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적 체계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저항에 그 열정이 쏟아 부어지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리스도인의 공적 예배로 이루어진 삶은 성례전에 의해 점유되고 있었다. 성례전은 신자를 치리하며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 체제였다.
 
종교개혁자들이 가한 비판의 초점은 중세 후기의 가톨릭이 기독교를 객관화하고 우상화한다는 것이다. 가톨릭의 성례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은, 기독교 첫 천년 동안 무려 30여개의 성례전으로 무성하게 자랐고 중세 후기(1439년)에 7개로 압축 제정되었던 성례전의 숫자를 다시 한번 대폭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고, 성만찬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도 심각한 이견을 낳아, 급기야 종교개혁교회가 루터파, 재세례파, 개혁파, 영국교회 등으로 분열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대한 만찬 앞에서 형제들이 싸우고 결국 갈라진 것이다. 그 후 개신교회는 말씀 중심의 예배와 신앙생활 속에서 점점 신앙생활의 성례전적 차원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판단이다. 개신교에서 성례전에 대한 이해와 실행이 박약해져 아사 직전까지 온 것 같다. 틸리히는 이러한 상황을 개신교가 “성례전의 죽음”(the death of the sacraments)을 불안에 떨면서 지켜보고 있는 위기의 상황으로 말한다.
 
거시 역사적 관점에서 교회의 끊임없는 개혁과 쇄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성례전적 차원을 회복해야 하며, 따라서 성례전의 문제가 현재 개신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16세기의 분열의 상황에서 벗어나 통합과 일치에로의 길을 마련하기 위해 지금까지 교회와 신학자들이 노력해왔고 그 가능성은 점점 현실화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서로 가르고 또 오늘날 교회들 사이의 화해 노력을 무효화하는 위험스러운 요인들을 이해하기 전에는 지난 500년의 뒤엉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이런 요인들을 핵심적으로 알기 위해 성만찬에 대한 개신교의 핵심적 견해들과 쟁점들을 일별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중세 가톨릭과 종교개혁자들의 성만찬의 이해에 대한 쟁점은 성만찬의 재료인 떡과 포도주가 언제(시간), 어디서(공간) 어떻게(방법) 성물/성체가 되느냐는 것인데, 가톨릭은 실재론을 따라 설명했고, 종교개혁자들은 대개는 유명론을 따라 설명했다. 그러나 이른바 실재론과 상징론은 고대 교회에서부터 존재했던 입장이다. 본래 성례전의 행위에서 상징(Signum)과 상징된 은총의 내용(res) 상이에 성사적 결합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성만찬 사건의 효과적-실재론적 측면과 의미론적-영적 측면이 근원적으로 연합된 채 출발했는데, 게르만인들이 기독교에 들어오면서 두 측면이 나뉘게 되었다는 점이다.5) 실재론(변형론, 화체설)의 입장은 초기 교부들에게서 발견되며 9세기 코비의 라드베르투스(Radbertus of Cobi)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걸쳐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확인되고 트렌트 공의회(1551)에서 절대화된다. 상징론 또한 오리게네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에서 출발하여 중세기 라트람누스(Ratramnus)와 라바누스 마우루스(Rabanus Maurus)에 의해 발전되어 츠빙글리(U.Zwingli)에게까지 이른다. 또한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가톨릭의 말씀과 신앙이 배제된 성만찬을 반대했다.
 
 
1.1 루터
 
대개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성만찬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이고 인격적 임재”(the real and personal presence of Jesus Christ), 혹은 공재설(consubstantiation)으로 명명하여 분류한다. 그러나 루터의 성만찬론은 일관된 것이 아니고 논쟁을 통해 변하고 발전한다.6)  루터의 <교회의 바빌론 유폐>(1520)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만찬을 삼중적으로 유폐시켰다고 주장하는 바, 평신도에게서 잔을 거두어들인 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포로가 된 개념인 화체설, 미사를 선행과 반복적인 희생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 그것들이다.
 
루터의 성만찬 이해는 4단계로 발전하는 바, 첫 단계(1518-22)에서 그는 성만찬이 하느님의 말씀의 은혜의 상징으로서, 떡과 포도주를 봄(seeing)으로써 다른 사람들 및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며, 제정의 말씀을 듣고(hearing), 죄의 용서를 받아들이는(receiving) 차원을 강조한다. 둘째 단계(1523-24)에서 루터는 제정사에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을 강조하여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주장한다. 셋째 단계(1524-25)는 그의 동료 안드레아스 칼슈타트(Andreas Carlstadt)와 츠빙글리(U.Zwingli)와 논쟁하는 기간으로서, 상징이론을 취하하고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가 소통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의 수단이 됨을 강조한다. 넷째 단계(1526-29)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용서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용서가 분배된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성례전 자체를 죄의 용서와 동일시한다. 제정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사적 몸 안에 그리고 몸을 통하여 용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속죄의 희생이 아니다. 그는 또한 성만찬이 사제에 의한 개인 미사가 아니라 공동체의 행위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루터는 고해의 관습을 지속시켰고, 이것이 성례전을 올바로 받게하는 데 중요하다고 보았다. 루터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는 그리스도의 편재(ubiquity)를 가능케 하는 본성의 교류(commicatio ideomatum)에 의해 뒷받침된다. 성만찬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는 우리의 모든 삶이 진정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단서인데, 주의 식탁은 세상에서 불투명해진 그리스도의 임재를 거듭 새롭게 경험하기 위해 되돌아와야 하는 삶의 중심이다. 루터는 성만찬이 은총의 수단이라는 고전적 확신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떡과 포도주는 그것을 무심코 대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구원의 은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성만찬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전달하며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임재를 교회 안에서 효과적으로 알리는 하느님이 선택하신 방법이다.
 
 
1.2 츠빙글리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루터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가 화체설과 유사하다고 반박했다. 츠빙글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육으로 취하는 것 속에 죄의 용서가 있다는 루터의 주장은 신앙의 이해와 성서의 증언과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성만찬은 그 단어(Eucharist)가 의미하는 바, 감사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포하는 자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기쁨이다. 츠빙글리는 제정사의 “이것은 나의 몸이다”(Hoc est corpum meum)의 ‘이다’(est)가 동일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미한다’, ‘상징한다’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츠빙글리는 성만찬에서 마음속에, 곧 명상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속에만 임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인식할 뿐이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는 육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님으로 떡과 포도주는 상징일 뿐이지 상징이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임재는 오직 영적인 것이다. 성만찬은 교회가 하느님을 향해 드리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성만찬에서 성도들은 구원의 중심적 행위를 깊이 숙고함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확인한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강화시켜주는 것이지 그의 인식을 생성해내는 것이 아닌 ‘신앙의 도우미’이다. 츠빙글리의 성만찬론을 대개는‘기념주의’(memorialism)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투키에 따르면,7) 츠빙글리의 입장의 장점과 약점은 상징에 대한 이해에 달려있다고 본다. 만일 상징을 통해 그것이 상징하고자 하는 실체 속에 깊이, 풍부하게 참여하지 못한다면, 성만찬은 신앙생활에 애매모호해질 뿐 아니라 객관적 경험보다는 신자의 주관적 감정에 크게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1.3 칼빈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제2세대 종교개혁자로서 그의 선임자인 루터와 츠빙글리의 장점을 선택하여 위할 수 있었다. 흔히 칼빈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중간 길을 걸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방식을 말하는 점에서만 루터와 다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루터에 더 가깝다. 칼빈이 보기에 츠빙글리는 성만찬 성물에 대한 강조가 약하고 루터와 가톨릭은 너무 강하다. 칼빈은 츠빙글리와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의 편재를 부정하고 하늘에 있다고 주장하나,츠빙글리와 달리 성만찬 성물은 성령의 거룩한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의 권능을 전해준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가르침에는 성만찬식에서의 성령의 역할이 상당히 강조되고, 구체적인 성령임재의 기원(epiklesis)이 예전에 첨가되게 된다. 칼빈은 주님의 몸과 피에 참되고 실제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은 이해되어야 할 사안이 아니라 경험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말한다. 칼빈에게 성만찬 임재는 우리를 천국잔치 자리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칼빈의 이러한 입장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 혹은 ‘능력주의’(virtualism)라 불리운다. 개혁파의 예배는 지나치게 훈화적인 설교를 동반했고, 성만찬을 받기 위한 강도 높은 양심적인 자기 검증을 요구했기 때문에, 성만찬이 있는 날에 수찬을 피하는 신자들이 생기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
 
루터파와 개혁파는 성만찬을 성례전과 우리에게 그 약속(보라!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을 인치는 상징으로 간주하는 전통을 지켰다. 이것이 바로 루터와 칼빈이 설교와 성만찬을 매주 하길 원했던 이유다. 반면 츠빙글리와 재세례파는 만찬이 단지 규례일 뿐이며, ‘이것을 행하라’는 말씀을 지킴으로써 우리의 순종의 표시로 하느님께 드리는 일종의 신앙의 확증, 하느님을 향한 신앙적 표현을 통한 헌신의 확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츠빙글리는 매주 설교와 분기별(부활절, 성령강림절, 가을 그리고 성탄절) 성만찬을 택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가 임하는 공간의 문제를 중시했다. 그 장소가 하늘인가, 성만찬상인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성만찬 논쟁이 주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는 성만찬 신학에서의 은총과 믿음의 문제이다.8) 성만찬이 우리의 신앙을 증대시키는 중요한 은혜의 수단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신앙을 단지 표현하거나 지탱하는 방법인가? “성례전인가 규례인가?” 루터와 칼빈, 그리고 츠빙글리가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만일 성만찬이 정말 하느님의 선물이고 교회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잔치라면 어떠한 차원에서 신앙을 증대시키는 능력을 고찰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2장에서 답변을 모색하겠다.
 
 
1.4 영국교회와 웨슬리
 
영국교회의 대주교인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는 츠빙글리의 계승자인 하인리히 불링어의 입장을 따랐다. 그 후 영국교회는 말씀과 함께하는 성만찬을 연 3회(부활절, 오순절, 성탄절)로 규정하여 사실상 말씀과 성만찬을 분리하는 관행을 낳았고(1604년), 주간 성만찬 집행을 시행하고 화체설을 제외한 성만찬 이해를 받아들이는 입장도 있었으나 17-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성만찬에서의 모든 임재를 초자연주의적인 것으로 거부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츠빙글리의 기념주의가 지배적이 되게 되었다.
 
세속적으로는 계몽주의적 세계관이 지배하고 교회적으로는 경건주의가 지배적이 된 세계 한 복판에서 존 웨슬리(John Wesley: )는 성만찬을 소홀히 하는 분위기를 깨고 성만찬의식의 부흥을 일으켰다. 그는 일기에서 천 회 이상의 성만찬을 하였다고 기록했고, 동생인 찰스 웨슬리와 166개의 성만찬 찬송만을 만들어 책을 발간하기도 하였다.9)  웨슬리의 찬송가 안에 나타난 성만찬 신학은 영국 교회의 성만찬 신학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루터주의와 칼빈주의의 혼합적 성격을 갖는다. 웨슬리 형제는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분명히 했지만, 찬송가 가사에는 루터의 편재주의와 칼빈의 성령을 통한 임재가 다 나타난다.
 
 
1.5 슐라이어마허
 
슐라이어마허(F.Schleiermacher: 1768-1834)는 프로이센의 교회 연합을 그의 <신앙론>에서 신학적으로 성취했던 인물로서, 성만찬 이해에서도 가톨릭은 포함하지 못했으나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의 차이를 연결하는 이해의 가교를 세운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슐라이어마허가 놓은 가교의 특징은 성만찬 부분의 이미 첫 명제에서 드러난다. 그는 이론적인 논쟁점에서 시작하기보다 실제적으로 성만찬 행위에서 만들어지는 “경험”에서 출발한다:“그리스도인은 성만찬을 향유함에서, 그리스도가 제정한 후에 그의 살과 피를 그리스도인에게 베풂으로써 영적 삶을 본질적으로 강화한다.”10)
 
영적 강화에 대한 욕구는 종교적 태도가 주기적으로 갱신되면서 충족되어야 한다. 바로 이 사건이 공중예배의 성만찬에서 일어나는데, 성만찬은 “예로부터 공개적 예배의 최고 정점이다”(§139.2,342). 성만찬은 무엇보다 신자의 공동체성을 강화한다. 성만찬은 경건한 개인성과 상호주관성이 상호적으로 구성됨을 가장 탁월하게 전달하고 강화하는 행위이다. 성만찬은 신도들 간의 차별을 제거함으로써 공공성을 제고하는 바, 여기에 성만찬의 독자성이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떡과 그리스도의 몸, 포도주와 그리스도의 피의 상관관계에 관하여, 매우 실천적으로 생각한다. 이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는 영적 삶의 강화를 위하여 필수적이다. 그리고 공동체적 행위의 성취를 방해할 수 있는 차이점들을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의도는 이처럼 처음부터 새로운 합의의 형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경험을 강하게 강조하고, 성만찬 행위의 영향과 결과를 강하게 강조함으로써 처음부터 교의학적 입장을 무력화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교의학적 입장을 넘어 성만찬교리의 공통점을 두 입장을 제한함으로써 얻는다.: “성만찬에서 피와 포도주, 몸과 떡 사이의 상관관계와 관련하여 개신교회는 한편으로, 오직 이 관계를 향유의 행위와 무관하게 보려는 자들에게 대하서만 반대한다. 다른 한편 이 관계에도 불구하고 떡과 포도주의 향유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영적 향유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는 자들을 반대한다.”11)
 
교리적 차이가 성만찬의 향유를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성만찬은 제정한 말씀을 듣고 떡과 포도주를 향유함으로써 영적 삶을 강화하는 데 있다.
 
 
1.6 BEM 문서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분열된 교회들이 가시적인 일치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들의 세례와 성만찬과 목회(교역)에 대하여 기본적인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는 1982년 페루의 리마에서 신앙과 직제위원회가 50년의 고심 끝에 교회들의 광범위한 일치 기준들을 작성한 것으로서, “그렇게 상당히 광범위하게 서로 다른 전통을 지닌 신학자들의 세례, 성만찬, 직제에 관하여 화목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현대 에큐메니칼운동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일”12)
 
이라고 평가된다. BEM문서에 대한 연구는 여러 방면에서 진행되어 왔기에,13)  여기서는 이 문서의 에큐메니칼 신학적 의의만을 언급하겠다.:
 
1)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언제나 기념, 임재, 희생의 세 단어를 중심으로 되어 왔는데, 이 문서는 기념과 임재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모든 피조물들을 위하여 그가 이루신 모든 일들과 함께 이 기념 속에 임재하며 우리와 친히 교제를 나누신다.”[성만찬 6항]; “성만찬은 영원히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시는 그리스도만이 유일무이하게 드릴 수 있는 희생의 성례전이다”[성만찬 8항]
 
오랫동안 개신교회에 성만찬이해에 대한 기념주의적 입장이 지배해온 이유는 개신교의 공식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적 이성주의가 지배하면서, 개인적 신앙을 강조하는 경건주의 및 부흥운동의 영향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만찬 성물에서 과거의 사실, 갈보리 사건을 단순히 기억하는 황량한 환원주의적인 기념주의에서 벗어나, 성만찬의 성물 속에 현재 임재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예전 속에서 다양하게 강조하고 있음이 나타난다.14): “당신의 성령으로 그것들을 성별하사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당신 아들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성령안에서 새롭고 영원한 삶을 위한 거룩한 음식과 음료가 되게 하소서”(성공회);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받는다”(루터란); 떡과 잔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의 사귐이 되길 간구한다(장로교); 떡과 잔을 나누면서 목사가 “당신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이며, 당신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피”임을 말한다(감리교); “그리스도의 몸, 하늘의 떡 / 그리스도의 피, 구원의 잔”(성공회); 당신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몸, 당신을 위해 부어주신 그리스도의 피“(루터란과 장로교)
 
2) 성만찬의 사효성(ex opere operato/opus operatum)과 인효성(ex opere operans/opus operantis)의 문제에서 객관적인 차원과 주관적인 차원의 중요성을 갈파하여 상보적인 관계임을 말한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임재가 개인의 신앙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분별하기 위하여 신앙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일치하고 있다.”[성만찬 13항]
 
3) 설교와 성만찬의 관계에서 개신교는 설교를 항상 우위에 놓았으나 이 문서는 “성만찬은 교회 예배의 중심적 행사”[성만찬 1항], 양자가 상보적인 관계임을 말한다: “언제나 말씀과 성례를 포함하고 있는 성만찬은 하느님의 일을 선포하고 기념하는 것이다”[성만찬 3항];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이 성만찬의 내용 바로 그것인 것처럼, 또한 선포된 말씀의 내용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성만찬과 선포된 말씀은 서로를 보강한다. 즉 올바른 성만찬 거행은 말씀선포를 포함한다.”[성만찬 12항] 말씀중심의 예배가 목회자의 일방적 행위라면 성만찬은 동동한 상호참여의 의미가 있으며 생동감 넘치는 신령한 예배로 나갈 수 있다[율석교회 가흥순 목사의 경험].
 
4) 성만찬에서 삼위의 역할 특히 서방 교회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성만찬과 성령의 관계성을 강조한다.[성만찬 14항, 23항, 17항]
 
5) 성만찬과 하느님의 나라(통치)를 강조함으로써[성만찬 22항] 예수의 죽음에 고착되다시피 한 이해에서 벗어나 세상을 위한 진정한 화해의 선교[성만찬 20항], 세상 안에서의 정의와 진리 추구[성만찬 17항] 및 새창조[성만찬 18항]가 강조된다.
 
6) 성만찬을 그리스도인의 삶과 연결시킴으로써,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와 함께 살아가며, 그와 함게 고난당하고, 또 의롭게 된 죄인으로서 그분을 통해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성만찬 10항].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섬기는 종, 타자를 위한 존재로 부름을 받는다[성만찬 24항]
 
7) 성만찬은 성도들의 일치뿐 아니라 지역교회와 온 교회의 일치를 드러내며[성만찬 19항], 모든 사람들과의 일치를 추구하게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의 잔치에 초대하셨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같은 떡을 떼고 같은 잔을 나누는 충분한 교제를 통해 연합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선교적 증거는 개별적인 차원에서나 공동체적 차원에서나 모두 약화된다.”[성만찬 26항]
 
8)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만찬의 집례는 안수받은 교역자가 행하나, 성만찬은 그리스도로부터 은사로 받은 것이며, 교역자는 하느님의 주도권을 대신하는 것이다[성만찬 29항]. 그러나 정의롭고 평등한 사랑의 사귐을 위해서 더 나아가 우리는 “행동의 의미 자체보다 누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예식이나 전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특정한 성직계급만이 이것을 하고 주교만이 저것을 하는 가부장제도가 만들어 낸 문제들을 되풀이하는 것이다.”15)
 
9) 성만찬의 횟수에 관하여, 성만찬은 자주 거행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일 경우 적어도 매주일 행해져야 한다[성만찬 30, 31항]
 
 
2. 성만찬을 통한 그리스도인 삶의 새로운 형성
 
성만찬의 지속적인 실행과 참여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형태(Gestalt)로 되어 가는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지속적인 성만찬 행위를 통해 어떻게 성도들의 삶이 그 이전과는 다르게, 새롭게 형성되어가는지를 경험적으로 연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요한 신학자들의 성만찬의 의미에 대한 연구 성과를 검토함으로써, 성만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삶이 지향해야할 의미와 가치 지평을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성례전은 하느님의 부르심으로서의 교회적 삶과 개인의 삶을 이해하고 형성하는 결정적 거점들이다. 칼 바르트는 세례를 그리스도적인 삶의 정초로 성만찬을 그리스도도적 삶의 갱신으로 이해하고 있다. 성찬례는 성찬생활이 되어야 한다. BEM문서는 성만찬의 의미를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Eucharistia)’, ‘그리스도를 기념(Anamnesis)’, ‘성령의 임재(Epiklesis)’, ‘성도들의 교제(Koinonia)’, ‘하느님 나라의 잔치’로 의미부여하고 있다.16)
 
 
2.1 감사로서의 성만찬
 
최근 에큐메니칼 영역에 성만찬을 “Eucharist(감사례)”의 용어로 표현하는 사례가 점증한다.17)  다른 표현들은 통일성보다는 차이와 거리를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가령, 가톨릭의 ‘미사’(The Mass)는 ‘Ite, missa est(가거라, 너는 보냄받았다.)’에서 온 표현으로서 교회의 중심적이고 사귐의 행위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지 못하며, 개신교에서 좋아하는 ‘주의 만찬(Lord’s Supper)’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회고적 의미만을 드러내며, 성공회가 좋아하는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심원한 사귐과 교제를 강조하지만 성만찬의 다른 의미를 담지 못한다. 반면 ‘유카리스트’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감사와 기쁨으로 만나는 그리스도인의 적절한 태도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Eucharist’는 그리스어 동사 ‘eucharisteo’에서 왔으며, ‘감사하다’는 뜻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처음교회에서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떡을 나누고 하느님을 찬양했으며, ‘감사를 올린다’와 ‘성만찬을 행하다’는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사도행전 2:46-47; Didache 9, 14). 오늘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빠스카 신비에 대한 믿음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막론하고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초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BEM 문서는 성만찬을 본질적으로 “하느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사의 성례전”이라고 정의하면서 “성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로서의 성만찬”에 첫째 의미로 내세우고 있다.18)  
 
감사의 강조는 신앙의 주관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근대 자유주의 신학이 간과한 신앙의 객관적 차원을 보충한다. 감사는 항상 객관적 특성을 갖고 있는 바, 감사는 인간을 넘어 항상 하느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우리네 일상생활에는 한탄하는 대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할 수 있는 기회는 수없이 많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감사는 자기 사랑(amor sui)과 자기 집착(incurbatus in se)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여 타자를 향한 에토스를 키워, 타자의 윤리를 가능케 한다.
 
 
2.2 기억으로서의 성만찬
 
개신교는 성만찬에서 기억/회상(anamnesis)을 강조했고 가톨릭과 정교회는 제정사에서 언급할 뿐이다. 최근의 연구에서 기억은 한갓 과거의 사건에 대한 회고적 반성(mere memorialism)이 아니라 성만찬에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고 승천한 주님의 현존에 대한 고백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늘에서의 종말론적 잔치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는 미래적 기대를 의미한다.19)
 
감사와 기억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다. 유대인은 유월절에서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행위를 반복하여 기억하고 하느님께 감사한다. 그리스도인도 하느님께서 행하신 구원 사역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린다. 태초의 창조부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에서 정점을 이루고 현재에 이르는 구원사를 낭독하는 것은 감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루가복음(루가22:19)과 바울 서신에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했다(I 고린토 11:24, 25). 여기서 기억은 그리스도의 실재를 새롭게 경험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기억은 구원 사건을 강하게 재현해냄으로써 우리를 얽어맨 온갖 종류의 삶의 사슬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될 수 있는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현재화한다.
 
고대교회와 동방교회는 장구한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사를 기억한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성만찬 제정사를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창조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전날 밤으로 기억의 주파수를 제한함으로써 창조에 대한 기억과 새창조에 대한 기대는 사라진다. BEM문서는 성만찬을 이스라엘의 해방됨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연결하여 교회의 새로운 유월절 식사, 즉 새 계약의 식사로 보고,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념(anamesis)일 뿐만 아니라 어린 양의 잔치(계 19:9)에 대한 기대라고 말함으로써 구원사의 기억에 대한 폭을 확장하고 있다.20)
 
이처럼 서방교회의 성만찬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사를 기억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오도 카젤은 그리스도인의 일년과 매일의 삶은 구원사 전체를 새롭게 경험하는 주기가 되어야한다고 말한다.21)  개신교 성서 신학자 바클레이는 “우리의 복되신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고 고난당하신 것을 다시 실현하기 위하여 기억하며,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기억한다”고 말한다.22) 정교회 신학자인 슈메만에 따르면,23) 최후의 만찬은 성만찬에서 목적(telos)으로서 갱신되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완성이며,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며 성취이다. 성만찬은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과 이적의 본질을 지속하는 것이며, 그리고 최후의 만찬을 통해 이제 그는 자신을 사랑 자체로 내어준다. 그는 최후의 만찬에서 그의 사랑을 그의 나라로 드러내고 보증하며, 그리고 그의 나라는 사랑 안에 거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 15:9).
 
성만찬은 부활의 식사이다. 성만찬은 우리에게 나타나신 엠마오의 기념(Anamnesis)이고 우리 가운데 이미 희망 속에서 존재하는 천국의 잔치를 미리 맛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일부분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불균형이 발생한다. “오늘날의 성만찬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교회가 경험하는 전 범위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증-겸비의 성육신, 가르침과 치료의 사역, 희생적인 죽음, 변화를 일으키는 부활, 교회와 세상에서의 임재, 그리고 궁극적인 의의 통치-을 통전적으로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한다.”24)
 
 
2.3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성만찬
 
성서에서 만찬시 성령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처음교회와 동방교회에서는 성만찬시 성령의 초빙이 발견된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성만찬의 제정에서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중시함으로써 예배에서 성령은 주변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성만찬에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 이는 츠빙글리이다. 그에 따르면, 성령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기 위해 역사한다. 오직 성령만이 하느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선사한다. 칼빈도 츠빙글리를 따라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성령은 교회에 부활의 주를 좀더 일반적인 방법에 의해서 경험케 하는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의 삶과 모든 피조물의 삶 속에 있는 보통의 떡과 포도주를 그 이상을 의미하도록 만드시는 분이며 궁극적으로 세계에 대한 성사적 이해를 가능케 하시는 분이다. BEM 문서는 삼위일체적 패턴을 따라, 성만찬을 성령의 초대로 자리매김해고 있다. 성령의 역할은 역사적 예수의 말씀을 현재화하고 생동적이게 하며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위한 성례적 상징이 되게 한다. 더 나아가 전체 성만찬의 행위는 성령을 초대하는 행위인 바, 성만찬은 성령의 역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만찬을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사로 해석하는 것은 균형잡힌 시도이다.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벨커는 성만찬을  창조하며 창조를 보호하며 또 다시 새롭게 창조하는 하느님에 대한 감사(Eucharistie), 십자가에 달렸고 부활했으며 재림할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Anamnesis), 우리를 살리고 해방시키시고 일으키는 성령을 부름(Epiklese)으로 이해한다.25) 성도는 성만찬에서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창조물은 해방된 존재이고 존귀하게 된 존재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성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간구하고 감사드리며 찬양하면서 그들이 하느님의 창조적이고 동시에 새 창조적인 역사에 완전히 의존하면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4 사귐을 통한 하나됨으로서의 성만찬
 
신약성서는 성만찬을 koinonia, 곧 사귐과 교제로 기술하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koinonia) 마시고’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koinonia) 먹는데, 그 이유는 “떡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떡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I 고린토 10:17)이기 때문이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한 몸인 통일성을 분별하는 일은 중요하다. 통일성에 대한 상징은 평화의 입맞춤이다(II 고린토 13:12). 서방교회는 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미사를 진행하고 성만찬을 받는 횟수를 극미하게 줄이면서 강한 일체감을 상실했고 평화의 입맞춤도 성직자들에게만 국한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과제는 예배에서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느님 말씀을 들음으로써 신자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참여함으로써 사귐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성만찬에서 루터가 변화된 떡과 포도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츠빙글리는 변화된 예배자가 관심이다. 회집된 공동체에 대한 츠빙글리의 관심은 매우 크다.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신다. 재세례파에서는 성만찬의 본질은 미사나 성례가 아니라 사귐의 표현이라고까지 했다. 떡과 포도주 안에서의 사귐의 발견은 종교개혁 교회의 위대한 발견이다. BEM 문서는 성만찬을 신자들의 사귐으로 보면서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가 충분히 드러나는 곳은 성만찬”이라고 했다. “성만찬의 축하는 항상 전 교회와 관계해야 하며, 전 교회는 각 지역 교회의 성만찬 축하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스 출신의 에큐메니칼 정교회 신학자 존 지지울라스가 성만찬의 공동체는 탁월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이유도, 성만찬은 우리가 삼위일체의 참된 삶과 사귐과의 교제를 종말론적 진리의 특성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귐(koinonia)은 하느님과 교회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패러다임이다. 그는 교회가 인간과 인간의 자연환경 사이에는 본래적 사귐이 있음을 알게 되길 원하며, 이러한 사귐을 충분히 인식하기 위해 교회의 존재 자체가 사귐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26)
 
1) 타자의 초대와 사귐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사귐의 식사이며 먹는 것과 축성의 행위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봉헌 예식과 영성체 예식은 분리될 수 없다. 성만찬은 단순히 함께하는 사랑의 식사, 교회 공동체가 같이 밥을 먹는 식사 이상이다. 그러나 교회가 성만찬과 사랑의 식사로서의 단순식사를 연결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성만찬을 표징적이고 상징적인 식사로만 이해하여, 사귐의 식사라는 성만찬식의 본질적 성격을 상실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성만찬은 공동의 참여를 통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이 중시되는 시간이다. 예배는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 못지않게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 연대 또한 중요하다. 성만찬은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하며 또한 그 연대를 공고히 한다.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의 구습이었던 사적 미사를 거부하고 전체 공동체의 회집을 전제로 하는 예배의 공공성을 강조했던 점도 같은 맥락이다.27)
 
교회의 근거는 하느님의 영이 ‘생명에로 초대하며 이 생명의 초대에 참여하는’ (In-Vitatio = in + vita) 성례전이다. 성례전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미지인 사랑과 교제로서의 영생을 제공한다. 다양한 삶의 초대(invitation)는 소통적 자유의 삶의 원형이다. 특히 약한 자와 눈에 띄지 않는 자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함으로써 다양성을 보충할 수 있다. 초대란 자유로운 상호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삶(vita)에 머무름(in)이다. 초대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삶에 참여하도록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개방하며 나누고 서로 독려하려는 삶의 태도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구원은 거룩한 자들의 금식에서가 아니라 소외된 자들 죄인들과 함께하는 만찬에서 그 특징이 드러난다. 음식을 함께 나누는 식탁공동체는 예수운동을 특징짓는다. 예수의 초대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다. 예수는 선택된 자들의 거룩함(holiness)이 아니라 모든 자의 전체성(wholeness)을 추구한다. 특히 예수는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고 초대한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태오 11:19; 마르코 2:15; 루가 7:34)이며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루가 7:34)로 불리었다. 우리는 성만찬에서 이러한 예수를 초대해야 한다. 우리가 모셔들이지 않는 한, 그분은 언제까지나 낯선이로 남아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는 성찬례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부자들의 “부의 소유”가 가난한 자들의 가난을 영속화하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의 “자기 의”는 선의 소유이며, 이는 선한 자들과 나쁜 자들의 간격을 만들고 악의 구조적 틀을 고정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초대와 잔치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의 상호 참여와 연대로써 고양된 알찬 삶, 성실(誠實)한 삶의 문이 열린다. 상호 참여로부터 공통의 삶, 선한 삶이 생성한다. 이제 비세례자에게도 ‘열려진 식탁(Open Communion)’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가 왔다.28)
 
하느님의 성례전적 초대는 새로운 삶으로서의 공동체인 인격 공동체를 창조한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둔 예수와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은 교회의 공동체적 본질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교회의 위험과 희망을 암시한다.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의 그늘 아래 있으면서, 동시에 이미 지금 부활의 생명력과 하느님의 미래를 맛보며 산다. 교회는 그의 잠재적 본질을 성례전적 현재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생명: 자연과 우주와의 사귐
 
성례전은 최후의 만찬을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례전의 숫자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며, 그보다 생활 세계의 성례전성을 암시하고,29)  이것은 곧 ‘창조의 영이여 오소서!’ 라고 성령을 부르고(epiclesis) 성령의 현존을 인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임을 암시한다. 교회는 떡과 포도주라는 가장 근본적인 생명의 양식에서 하느님의 영이 신비적적으로 다가옴을 인지하며 신앙과 삶의 길을 찾는다. 그러므로 성례전의 의미는 인간이 자연과 우주와의 사귐을 가능케 하는 다가오는 하느님의 은총에 있다. 교회는 성례전과 말씀 선포와 선교에서 유일한 성례전인 하느님의 영이 자연과 우주 안에 임재하심을 맞이하고 축하하며 증언함으로써 인간은 우주와 자연으로부터 나왔다는 생명중심적 에토스를 키울 수 있다.
 
 
2.5 희생제사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을 희생으로 이해하여 온 역사는 매우 길다. 최후의 만찬은 희생적 언어로 가득하다: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개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오 26:28). 히브리서는 희생제사의 언어를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다. 중세의 신심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지은 인간의 죄 값을 보상하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었다. 여기서 루터는 반복적 희생으로서의 미사를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스투키는 만일 사람이 형벌을 감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성만찬이 죄를 속하는 희생이라고 보는 개념이 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연옥에 있는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제단에서의 이런 희생은 연옥에서의 기간을 감하여 죽은 자의 천국행을 재촉해준다는 것이다.30)  종교개혁 교회는 이처럼 사용되는 나의 죄를 위한 희생제사적 성격을 제거했지만 여전히 죄의 고백은 강조했기 때문에 회개와 고백이 성만찬 안에 강하게 들어왔다. 그 후 성만찬은 갈보리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주관적으로 묵상하는 참회적인 예식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개인적 뉘우침을 유도하여[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405장)] 인간의 무가치성을 강조하는[이 벌레 같은 날 위해...(141)] 분위기가 압도하는 성금요일의 색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억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고조할 수 있다. 우리는 성만찬이 화해, 해방을 주는 즐거움과 평화의 식사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억압의 원천으로서, 그리고 히스테리적이고 자기 학대적인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원천으로 이끌어가며 실제로 사람들에게 그러한 영향을 일으키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31)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희생’(Sacrifice)과 희생제물(Victim)은 구분되어야 한다. 십자가 처형은 나사렛 예수가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처형되었음을 드러낸다: 1) 종교의 이름으로, 2) 지배적 정치체제의 이름으로, 3) 두 가지 법(율법과 로마법)의 이름으로, 4) 여론에 의해(“그 때 그들 모두는 소리쳤다: 그를 십자가에 달으시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의 본질, 곧 인간의 삶을 매우 해롭게 만드는 상황들을 조직적으로 위장시키고 집착하게 만드는 거대한 힘인 죄가 분명하게 폭로된 사건이다. 십자가에서 온 세상의 불의가 드러난다. 구속자이시며 해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바로 이러한 세상의 불의에 의해 희생되었음이 고해져야 한다.
 
 
2.6 사랑과 정의를 통한 해방으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을 사랑과 정의를 통한 해방으로 설명하려 한다면, 완고한 전통주의자와 보수적인 자본주의자들에게는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32) 그러나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service of worship)는 곧 인간성을 섬기는 행위(service of humanity)로 이어져야 한다. 성만찬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가 물질이기 때문에 인간을 하느님과 연결할 뿐 아니라 우리의 동료 인간 및 자연과도 연결한다. 성만찬에서 축하되는 모든 사람의 통일은 인간을 동료 피조물과도 관계맺게 한다. 성례전은 사랑과 정의를 위한 일로 우리를 인도하는 데, 그리스도의 왕국은 교회의 문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 밖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정의란 사회적 사랑이다.
 
벨커에 따르면, 성만찬이란 예수의 목표였던 사람과 하느님과의 화해 그리고 사람과 사람들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함축된 축제이다.33) 성만찬에서만큼 하나됨과 평등과 공동체성이 강조되는 곳은 없다. ‘여러분을 위한’에서는 구체성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에서는 보편성이 강조된다. 따라서 성만찬에서는 근본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이 평등하며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서로서로 가장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만찬은 인간적인 하나됨이라는 사실이 가장 귀중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하나됨은 온갖 종류의 심리적,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BEM문서에 따르면, 성만찬은 세상의 미래의 모습을 상징하는 바, 창조주에 대한 봉헌과 찬양,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우주적 교제,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상징한다.34)
 
장익 신부는 가톨릭의 세계성체대회를 “화해와 나눔과 일치의 잔치”35) 라고 설명하면서, 2차 대전 이래 4년 간격으로 열린 대회 주제들은 바로 사랑과 정의를 통한 평화의 실현을 위한 대회였음을 말한다:  
 
“1960년 뮨헨대회는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베풀어진 양식인 성체를 받아 모셔 한 몸이 된 우리 또한 서로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주제로 삼았다. 극도의 빈부격차 등으로 인한 불의와 내분에 시달리던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1968년에 열린 제39차 대회에서는 성찬의 신비를 무엇보다도 ‘사랑의 유대’의 원천이자 사명으로 제시했고, ... , 19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41차 대회에서 하나의 새로운 통찰로 심화된다. ‘성체와 인류 가족의 굶주림’이란 표어 하에, 인류의 굶주림을 채워주는 양식으로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류 안에서 인류 가족과 함께 굶주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하는 몸으로 동시에 본 것이다”(169)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은 떡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이 나뉘어지듯이 자기희생적인 나눔의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며, 동시에 그런 삶의 실행이다. 명상 인도자가 말라서 굳어버린 흙에 물을 쏟아 부으며 말했다.36)  “보십시오. 흙이 물을 받아들일 수 없고 아무 씨도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손으로 흙을 부순 다음 다시 물을 붇고 말했다. “부서진 흙만이 물을 받아들이고 씨가 자라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부서진 열린 삶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나눔의 삶은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나라를 자기와 일치시킨 삶이다. 그러므로 성만찬 참여자는 예수의 삶과 자기를 일치시킬 수 있으며, 이러한 면에서 성만찬은 온갖 형태의 왜곡, 폭력, 소외, 경제적 비참에 대항해 싸우도록 용기를 주는 장이기도 하다.37)
 
 
2.7 종말론적 의미
 
신약성서에서 성만찬이 행해지는 맥락은 매우 종말론적이다. 최후의 만찬의 제정 말씀에도 하느님 나라가 임박하게 올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과월절 음식의 본뜻이 하느님 나라에서 성취되기 까지는 이 과월절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는...”(루가 22:16, 18).38) 하느님 나라도 식탁교제의 용어로 설명된다: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며...”(루가 22:30). 바울도 주의 만찬을 기대로써 이해한다: “여러분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I 고린토 11:26). 주의 만찬에서 주님의 임박한 오심과 하느님 나라의 시작을 기대한다. 주의 만찬은 창조와 구속에서의 하느님의 사역을 모아 궁극적 완성에 이르도록 몰아간다.
 
성만찬에서의 이러한 종말론적 분위기는 재세례파와 오순절 운동을 제외하고는 개신교회가 계승하지 못했다. 그러나 BEM문서는 “성만찬을 하느님 나라의 식사”로 보고 전 세계를 향한 선교를 고취함으로써 성만찬에서의 종말론이 살아나고 있다. 최근 개신회의 성만찬예문에는 종말론적 언급이 기도문에 포함되어 있다: 가령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승리로 오실 때까지 우리는 그의 하늘의 잔치를 베풉니다.” 성만찬의 종말론적 의미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갖는 의미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희망이다.
 
 
2.8 성사적 세계관 속에서 성사적 삶의 지속적 실현을 위한 거점으로서의 성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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