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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31

예술신학 심광섭 Philo Kalia, 신대식 『예술신학』을 읽고...

알라딘: 예술신학

심광섭 (지은이)
대한기독교서회2010-02-20



전자책
13,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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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감사의 글

제 1장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제 2장 하나님을 보는 환희
제 3장 예수의 미의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의 구조
제 4장 글로리아. 예술신학의 근본 개념
제 5장 창조의 아름다움
제 6장 멋. 인간학적 예술신학의 기초 개념
제 7장 아름답다 예수여! 십자가 책형의 미학-숭고
제 8장 미학적 구원론
제 9장 율법의 사용과 성도의 향기로움 삶
제 10장 성만찬의 미학과 그리스도인의 삶
제 11장 영성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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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심광섭 (지은이)
감리교신학대학 및 대학원 졸업(1985)
독일 베텔신학대학(Kirchliche Hochschule Bethel) 신학박사(1991)
(사)한국영성예술협회_예술목회연구원 원장

지은책
기독교 미학의 향연(2018)
공감과 대화의 신학 F.Schleiermacher (2015,2016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예술신학 (2011, 2011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 (2003)
탈형이상학의 하느님. 하이데거, 바이셰델, 벨테의 신론 연구 (1998)
신학으로 가는 길 (1996)


최근작 : <십자가와 부활의 미학>,<기독교 미학의 향연>,<공감과 대화의 신학> … 총 8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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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ristian fine arts / Christian Aesthetics

심광섭 저, 『예술신학』을 읽고...
아트가브리엘 2011. 11. 24. 18:37 
http://blog.daum.net/artangel/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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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출자: 신대식,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기독교미술학과,
 제출일: 2011.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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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본 연구자는 개혁교회 경건주의 역사와 경건주의 신학에서 추구하는 신앙과 학문적 경향이 기독교 지상대명령과 문화명령에 얼마나 중요하게 연관을 갖는지 의문과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번 연구 중에 심광섭의 『예술신학』을 통하여서는 감성적 인식의 폭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과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분석해 보고, 개혁교회가 지금까지 추구하는 신학적 경향과 기독교인의 삶에서 인식을 새롭게 할 계기로 삼고저 한다.
    연구자료가 감리교 토양의『예술신학』이라는 점에서는, 칼빈주의 장로교 시각과 다르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본 연구자는 겸손한 자세로 개혁의 완성을 향하여 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과거 역사적 개혁교회 경건주의 신앙과 전통의 시각에서 장점을 수용하고 보완할 점을 찾으려고한다. 이를 위하여 학문적 자료로 삼고자, 제1장부터 제11장까지 요약정리하고, 개혁교회 경건주의와 개혁교회생명신학의 실천적 입장에서 문제점과 대안에 간결하게 본 연구자의 논지로 마치려 한다.

Ⅱ. 심광섭의 ‘예술신학’의 요점

제 1장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계몽주의시대 이후 이성과 계시를 대립시킨 개신교회와 카톨릭교회의 정통주의 모두 다 신앙을 이성을 통해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동일
하다. 즉, 계시의 가능성을 인간 이성의 지평 안으로 제한하는 방법론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신앙의 신비는 이성적 개념으
로서 도달하고자 하는 논리적 진리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선과 미의 범주로 이해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진성미의 카테고리는 인간이 추구하는
근본범주이다.
    오늘날 기독교신앙이 공감의 폭이 너무 좁고 감정에 대해서 적대적이며 상상력을 질식시킨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말해 기독교 신앙에는 어
떤 심미적 철학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미에 대한 긍정이 없이는 결국 어떤 신앙도 없고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하나님도 있을 수 없음을 인
식해야만 한다.
    신학이 조형을 통해 나타난 아름다움을 경원시한 또 하나의 다른 원인은 감성적인 세계는 허위의 세계이며 초감각적인 세계만이 진리의 세계
라고 주장해 온 플라톤주의의 강한 영향권 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신앙은 공동체의 교리적 진술에 치우쳐 지나치게 논리적이 됨으로
써 공동체의 감성을 소홀히 하거나  간과했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시대에 펼쳐가야할 신앙은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 광적(廣的), 감성의 신앙이
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미와 씨름한 기독교신학과 교회의 역사
    1) 고대교회와 아우구스 티누스
초대 기독교미술은 콘스탄티누스 이전(313) 미술과 이후 미술로 나뉜다. 초대교회는 결코 회화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교회의 가장 초기의 작품들
은 종교화가 허용되었다는 정황을 충분히 반영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가장 선하시고 아름다운 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분"이며
아름다움 자체라고 고백하였다.
    2) 중세와 르네상스
르네상스 예술은 자연과 인간을 발견하고 종교적 지배로부터 인간과 자연을 해방하고자 했다. 가령 프랑드르의 예술가들은 자연적인 것과 초자
연적인 것을 한 화면에 섞어 자연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3) 종교개혁과 근대
루터교회는 회화에 매우 개방적이다. 칼뱅은 회화에 대해 음악보다 더 단호하다. 원칙적으로 이미지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어떤 형상이든지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미신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지만 어떤 상을 조각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이기 때문에 그것을 순전하고 정당하게 사용하기를 원한다" 했다. 그러나 칼뱅은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며(출20:4), 또 그러한 일은 다소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유형적으로 표
현하는 일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면 형상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거나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하는 일은 더욱 더 정당한 일이 아닐 것이며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상물 외에는 무엇이라도 회화로 표현하든가 조작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결론짓는다." 고 하여, 예술의 기능을 인정하지만 예술
이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 경우라 하더라도 예술은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칼뱅은 "형상물 사용이 어떤 악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해도 교육을 위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단언한다.
한국교회에서 이미지 사용에 대한 사정은 더 열악하다. 그 이유는 개혁교회적 전통과 청교도적 영향으로 더욱 강화된 금욕주의적 미학의 전통이
한국교회에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4) 신앙의 아름다움을 찾는 현대신학의 고투
근대신학의 창시자 슐라이어 마허(E Schleiermacher)는 종교를 심미적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직관
과 감정"이며 "무한자에 대한 느낌과 취향"이다.

  2. 아름다움을 찾는 신학
    1) 감성으로 신학하기
최근 교육가들은 감성적 경험이 지적작용을 고무한다는데 일치한다. 따라서 그들은 교육과정에서의 오감의 작용( 맛, 접촉, 듣기, 냄새 맡기, 보
기)을 고무한다. 네델란드 신학자 종교가 반더 레우는 예술( 춤, 연극, 문학, 회화, 건축, 음악)을 신학적으로 읽는 신학적 미학으로부터 출발하여
신학적 주제를 미학으로 읽는 미학적 신학을 훌륭하게 결합하고 있다. 이제 예술신학, 예술목회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제 2장 하나님을 보는 환희

  1. 신학의 감각
기독교 신학의 주류 전통은 자신을 감각과 느낌 등 감성의 언어를 통해 표현하기 보다는 개념과 논리 등 이성의 언어를 통해 표현해 왔다. 아무리
위대한 지식의 체계라도 그것이 신앙의 경험에 근거하고 그 경험을 해명해 주지 못한다면 공허한 것이 되고 만다. 
    시인 엘리엇은 현대의 기독교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 "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느
낄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사람의 오감 중에서 단연 뛰어난 것은 '보는 것'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인간 예수로 육화함으로써 "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기독교를 청각중심의 종교, "들음의 종교"로만 알고 있으나 기독교는 시각, 곧 "봄의 종교"이기도 하다. 동방교회는 봄을 강조한 반면, 서
방교회는 들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방교회가 말씀의 계시를 배제해 왔다면, 서방교회는 특히 개신교는 미학을 배제해 왔다. 양자는 서로 보완되
어야 한다.

  2. 신학 그리고 하나님을 그리는 예술
기독교신앙의 학문인 신학은 생명의 원천이며 생의 신비이고 생의 최고의 가치인 진, 선, 미, 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기리고 사랑하고 그리
워하고 즐거워하며 생각과 언어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예술적 활동으로서 그분을 그리는 학문이다. 나는 신학을 인간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이
그리워 그분을 그리는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3. 창조주 하나님의 예술적 행위
칼뱅도『기독교강요』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예술가로 언급한다. "하늘의 무수한 성군을 놀라운 질서에 따라 배치, 배열하시고 서로 어
울리게 하신 그 예술가야말로 얼마나 위대한가?" 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외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신 최
초의 예술가이시다. 요한일서 서문은 미학적 그리스도를 위한 대헌장이다.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바...,"

  4.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는 즐거움
강보에 쌓여 구유에 뉘인 아기예수의 형상(눅 2:7). 그는 보이지 아나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골1:15).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오 그 본체의 형상(히1:3).

  5. 성령 안에서 신학하기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사막 빈들로 가신다. 사막은 인간의 업적, 성취가 없고 인간의 자랑이 끝나는 곳이다. 사막은 인간이 스스로를 만들어 가
지 못하고 자기 힘만으로 실현 할 수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의 체험 장이다. 텅 빈 속에 하나님만
오시니 하나님과 예수는 하나가 되었다.

제 3장 예수의 미의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의 구조

  1. 예수의 미의식
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아름다움과 선을 향한 에로스는 타자의 아름다움에 먼저 주목하고 그 아름다움에 때문에 사랑한다. 반면 그리스도의 아
가페적 사랑은 단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기독교인의 사랑은 타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타자의 곤
경을 먼저 주목하는 아가페의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누더기와 넝마 같은 인간성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미적 감각이고 미의
식이다.

  2.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의 구조
    1) 미적판단
논리적 판단이 개념을 통해서 대상을 인식하려고 하는 반면, 미적판단은 대상이 나의 표상 속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쾌감 혹은 불쾌감에 관
심한다는 것이다. 미적판단은 증명될 수 없지만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구속력을 갖는다.
    2) 미적자유
미적자유는 예술 외적인 목적에서 해방되어 전적으로 그 목적을 자기 자신 속에 갖는 자신의 형식의 완성에만 과제를 두는 무관심적인 활동에서
나오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만족은 대상에 대한 이해관계와 결부된 유쾌한 것, 선한 것과는 달리 대상이 그 자체로 만족스러운 자유로운 만
족 무관심한 만족이다.
    3) 미적 충일함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눅9;33)라는 고백과,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나
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는 고백처럼 자기의 이해 밖에서 일어난다. 아름다움은 대상이 의미하는 가치
를 형상화하기 때문에 만족을 창출하지만 그 만족이 아직 기호로써 중개되기 때문에 기호가 현실을 담보하지 못하는 한 충분하지 못하다.
    형상 또는 외형의 세계, 곧 현실을 떠난 것은 주관의 환상일 뿐 예술에서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 논의가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리얼리즘은 현실적 실천에서 세계를 잇는 그대로 재현하려 했으며 모더니즘은 세계를 의식의 흐름으로 재구성하려했다.


제 4장 글로리아, 예술신학의 근본개념

    루터는 영광의 신학에 대하여 십자가의 신학을 내세운다. 십자가의 신학은 수난의 서술에서 그려진다. 성육신이 미의 미학을 논의한다면, 수
난과 십자가는 추의 미학을 서술한다. 영광은 교의학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고 드러내는 계시와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성서와 신학에
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낼 때 나타난 현상과 경험을 제시하기 위한 개념이기 때문에 예술신학의 근본개념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1. 성서의 영광이해

아름다움이란 관념은 신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 33장 17정 "네 눈은 왕을 그 아름다운 가운데서 보며...,"에 사용한 외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다. 히브리 사상이나 신약성서에서는 주요한 역할 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답다(καλος)는 70인역(LXX)에서 창세기, 지혜서, 아가서,
전도서, 잠언, 등 여러 번 등장하는데, 창시기 1장의 '좋았다'(פוב(는 단어도 미학적인 아름다움이나 내적인 효용성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창조자
의 기대에 부합하는 피조물의 직무상의 능력을 표현한 무질서 안에서의 질서를 의미한다. καλος(美)의 의미는 외적 특질을 의미하는 폭넓은 개
념(용기, 유용성, 선함)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창조가 성공적이었다는 뜻이며 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승인을 의미한다. 그래서 라틴어 성경은
καλος를 Pulchrum(美)이 아닌 bonum(善)으로 번역했다. 세계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그리스적이다. 성서미학에 나오는 것은 그리스어
로 번역함으로써 그리스영향을 통해 성서로 가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영광의 구약 개념 כבוד)카보드)나 신약δόξα(독사)는 빛, 광휘(光輝), 광
채(光彩)를 의미한다.
10/31/21, 1:22 PM 신대식의 예술세계
https://blog.daum.net/artangel/1182 3/5


  2. 영광의 신학

칼뱅이 창조를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극장) theatrum gloriae Dei"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세계 안에서 감지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현대신학에 두 가지를 기여했다. 하나는 신학의 진리 담론이 논쟁적, 논리적, 사변적, 객관적 성격에서 벗어나 성찰적, 구체적, 경험적, 참여
적 진리담론이 되는데 기여했고, 다른 하나는 신학과 미학, 논리와 감성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통합 된 것이다.
  1)바르트에게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형식(form)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내용이다. 그래서 형식과 내용은 분리될 수 없듯이 '하나님은 사랑'이시
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아름다움'이라는 말이다.
  2) 한스 우어즈 폰 발타자(Hans Urs von Balthasar)는 개신교 신학은 변증법적 사유를 적용하여 신앙으로부터  미완성의 봄(incohtio
visionis)을 제외시키고, 하나님의 계시의 영광을 보는 것과 그 메시지를 들음으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보았다. 
    ① 발타자르의 신학적 구성과 핵심개념으로서 계시와 아름다움
발타자르는 계시신학에 아름다움(美)을 도입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현재화하고 전달하는 일은 예전과 케리그마와 교리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
이 아니라 기독교예술을 통해서 일어난다.
    ② 발타자르의 신적형태들의 지각에 대하여 발타자르 신학적 착상은 ‘하나님의 형상’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인간은 몸을 수단으로 자신이 세
계의 부분이라는 사살을 인식하는 한 자기 자신을 현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현상들 중 하나의 현상으로 인지한다. 그러므로 발타
자르는 인간이 존재하는 혹은 영의 일차적 이미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육체적 ,영적 현상은 항상 반응, 곧 응답적 현상이다. 인간은
현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마치 거울처럼 응답적이고 반영적인 이미지로 반응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다라 창조
되었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거울이며 인간의 영적이며 신체적인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형태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 유사하면서도 동시에
유사하지 않다.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피조된 형상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원초적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피조된 형상은 소외
된 형상이 아니라 형상을 닮아 형상과 일치하게 될 때 가치 있게 되는 형상인 것이다. 이 일치는 지각을 통해 일어난다. 미의 지각이란 삶의 형태
의 지각이며 그것은 인간의 형태 안에서 발견된다. 동시에 이 삶의 형태는 자기 창조적 형태가 아니라 주어진 선사받은 형태이며 자유와 신체성
과 영성을 부여받았다.
    발타자르는 왜 이 형태를 아름다운 형태라고 칭하는가? 삶의 형태의 지각은 지각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즐거움은 한
실재의 진리와 선(善)안에서 발견되며 이 실재는 무한하고 무진장한 가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형태 속에 나타난 이 실재의 현상은 이 형태를 넘
어 실재를 지시하며 동시에 이 형태의 실재 안에 현재한다. 발타자르의 신학적 미학의 대상은 하나님의 계시가 꼴을 취한 형식(form)과 형태
(gostalt)이다.

==발타자르의 핵심적 개념의 형태와 영광==
  형태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나타나 꼴을 취한 형태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는 예수가 기호나 상징이 아니라 형태로 불려져야하는 이유이다. 예
수는 형태로서 하나님의 가리킴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곧 신현(神 顯)이다. 괴테는 형태가 자연에 도취되었을 때 경
험된다고 한다. 여기서 자연은 신적 상상력의 표현이다. 괴테는 후기 저작에서 형태개념을 수정하여 형태는 존재자의 본질의 표현이 된다. 괴테
의 경우와 동일하게 발타자르는 형태의 개념의 이해에서 모든 유형의 이원론을 배제한다. 근원적인 감각의 지각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형이상
학적 진리는 없다고 주장한다. 존재 전체가 분리되고 파편화된 존재자들 속에 나타날 뿐이다. 존재자를 전체성 혹은 절재성의 파편 혹은 모순으
로 지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존재자는 존재의 형태로 간주 되어야 한다.
  아름다움과 영광
발타자르는 교회 교부들과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이 미에 초월적 범주의 자리를 부여했다는 사실만을 언급한다. 만일 신학이 미를 초월적 범주로
버려두어야 한다면 세계를 성령이 역사하는 공간으로 간주할 수 없을 것이며 세계는 창조로서의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론에서 시
작한 발타자르의 형태의 개념과 하나님의 영광은 구속론의 출발점이 된다

  3) 위르겐 몰트만의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의 영광
칼바르트가 영광을 하나님의 본성에 국한하여 변증법적으로 다루었고 폰 발타자르가 은총과 자연, 계시와 아름다움을 유비적으로 해결할 때, 몰
트만은 은총과 자연을 종말론적으로 접근하면서 아름다움은 역사와 자연을 통해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의 형태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미적 범주는 믿음 안에 있는 새로운 생에 속하는 것이며 이 범주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과 새로운 순종은 샘솟는 기쁨이 없는 율법적 노력
이 되고 만다. 영광은 예술의 부활에서 놀이와 축제의 특징을 입는다. 창조의 놀이는 새창조의 시작인 부활에서 모든 피조물이 당하는 억압에 저
항하고 고난을 극복하여 기쁨의 축제에 참여하는 진정한 놀이의 신학이 된다. 몰트만에게 영광은 하나님의 충만함과 영원한 기쁨의 잔치이다.

  3. 아름다움의 신학, 신학의 아름다움
바르트는 하나님이 아름답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을 받을 만한 형태를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다움 자체인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신학
은 모든 학문 중에 가장 아름다운 학문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삼위일체와 성육신을 통해 나타난다. 성육신의 아름다움은 예술신학의 미가 철
학적 미학에서 취한 방법론이나 철학적 미의 개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부터 고유하게 자리매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발타자르
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아름다움, 즉 객관적 계시에 대한 성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을 미학적 범주로 말할 수 있고 사상적 착상을 제공한다고 평
가한다.

제 5장 창조의 아름다움: 생태 미학적 창조론

    창조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구분되지만 아름다움자체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에 나타난 아름다움을 말한다. 창조의
아름다움은 철학적 미학에서 다루는 자연미와 구분된다. 자연미에는 근대철학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예술미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
으며 존재론적으로 제 2의 현상을 지칭하였다. 중세에는 자연미와 예술미가 구분되지 않았지만 르네상스에 이르러 예술미가 자연미보다 우월하
다는 인식이 싹트게 되어 더 이상 자연을 모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철학자 칸트가 르네상스의 자연미에 대한 예술미의 우월성을 말함
으로써 그 순서를 역전시켰다. 근대이후 개신교신학은 자연친화적인 경건주의나 자연신비주의를 반대함으로써 자연을 성례전적으로 보거나 혹
은 미적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력을 아예 상실하고 말았다.
    장 칼뱅에 의하면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의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으나 타락 후에는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하
여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식을 회복하여 피조물과 갱신된 새로운 관계, 자연을 창조자로서 지각하며 창조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관계를 획득해야 한다. 칼뱅이 창조를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라고 말했을 때 그는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란 점을 말한 것이다. 자연 탐
미주의는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보지 못하고  종교와 윤리로부터 미학의 독립이며, 미학의 자율성에서 본다.
    생태학적 창조론은 생태계의 위기가 직면하여 창조를 생태학적으로만 아니라 미학적으로 봄으로서 생태학적 태도가 제공하지 못하는 창조에
대한 인식을 보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제 6장 멋, 한국의 인간학적 예술신학의 기초개념

    신석초는 한국의 독특한 미의식을 멋으로 규정한다. 멋이란 사치성 유기성의 산물이며 한가한 여유의 상태에서 혹은 잉여 된 정력의 소비작용으로 나타내는 것이지만 직접 사치의 상태는 아닌 것으로 거기에는 상당히 해박한 상식과 고매한 사상과 또는 예절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된 인간 삶의 예술적 표현이라고 한다.

10/31/21, 1:22 PM 신대식의 예술세계
https://blog.daum.net/artangel/1182 4/5

    해천 윤성범은 바르트에게서 직접사사하여 바르트 신학의 화해론이 중요한 위치이듯이 한국에서 솜씨를 화해의 예술로 보고 한국미의 특징을 조화미로 특징짓는다.
    소석 유동식의 풍륭도의 전거는 신라말의 석학 최치원이 쓴 화랑의 미문이다. “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도가 있다 이를 풍류라 한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7장 아름답다 예수여! 십자가의 책형의 미학- 숭고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은 고대그리스의 형태미로는 표현할 수 없다. 십자가는 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추(醜더럽다)라고 해
야 옳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수남과 죽음의 순교를 추의역사로 분류한다
    한완상은 현실 기독교의 승리주의를 경계하여 십자에서 “예수 따르미”의 아름다운 패배의 미학을 그려냈지만 더욱 근원적인 것은 패배의 미
학이 아니라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숭고한 사랑일 것이다.                                 
    어떤 형상이든지 그것을 보면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이 잇다. 그 형상이 사람일 경우 우리는 그것을 멋 혹은 기품이라고 한다. 멋이
인생의 밝음과 어두움이 개입되어 새겨지고 형상화된 아름다움이라면 십자가는 예수의 멋이며, 부활은 온 천하에 드러낸 환상적 놀이, 곧 신명이
요 흥이 될 것이다. 십자가 책형의 예수는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이 형상화 되어 멋과 기품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숭고한
형상(ikon)이다.

제 8장 미학적 구원론

    어떻게 하나님을 세계 안에서 경험할 수 잇는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 안에서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경험되어야 한다. 슐라이어마허도 종
교의 본질에 관하여 말하면서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행위로서 표상하는 것, 그것이 종교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경험을 신
학의 구원론에 연결시켜 전개한 탁월한 신학자는 존 웨슬리(John Wesley,1703-1791이다. 성경은 영적 실재들을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너
희 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니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5-16)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라"(요일1:1)하고, 바울은 자신
을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라고 한다.
    영적 감각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에 의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오리게네스는 영적 감각론을 수립한 최초의 학자
로서 그는 그리스도를 오감을 통해서 지각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리스도를 육안으로 보았다 해서 다 영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시각(inner sight)에 관하여 그리스도가 참된 빛이신 이유는 빌라도와 십자가
에 못 박은 자들이 예수를 육안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 다면 아무도 예수를
보았다 할 수 없다. 청각(hearing)에 관하여, 미각(taste), 후각(smell)에 관하여는 옥합이 깨뜨려질 때는 향기로 하나님의 자기비움(kenosis)과
그리스도의 향기다. 촉각(touch reception)에 관하여 오리게네스는 최고의 완전은 오감을 충분히 사용하는 것을 통해 실현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감각의 집합체인 몸을 통해 말씀이 형상화 되었다는 것이다. 감각이 동물적인 사람은 동물이고 감각이 신적인 사람은 신인 것이
다. 나는 여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서 그 몸은 생각이나 의지정도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자기 몸이 자기를 아끼고 사랑
하듯 자기의 영원한 생명으로 다른 생명조차도 그 안에서 살려 영원히 사는 생명이 되도록 하고 싶은 사랑이다. 그래서 주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과학적 경험과 종교경험에 대하여는 루터, 웨슬리, 슐라이어마허 세 사람 모두 신앙의 경험관련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에게 신학은 사
변신학이 아니라 실천신학이다. 근대의 데카르트와 칸트의 합리주의 전통과는 달리 후설이후의 현대 철학에서도 인식의 조건으로서 경험은 강조
된다. 메를로퐁티(Merleau Ponty)는 몸의 지각을 강조한다. 메를로퐁티는 모든 반성의 근거로서 몸의 전인격적 지각을 말한다. 인간은 몸을 통
하여 경험의 영역과 행위의 영역을 미리 제공받으며 몸의 지각이 모든 사유를 앞서간다. 전통적인 주관과 객관, 정신과 자연, 의식과 몸, 개인과
사회성 등의 이원론을 넘어설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을 제공하고 있다.

제 9장 율법의 사용과 신자의 향기로운 삶

    루터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성은 하나님의 법을 다르기 위한 도덕적 투쟁의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삶이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루터에 비해 종교개혁 이후 특히 루터의 제자 멜란히톤과 칼빈은 율법의 제3용법에 훨씬 더 많이 전념하였다.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신앙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희망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할 삶의 형태화에 관한 규칙이다.

제 10장 성찬의 미학과 그리스도인의 삶

    성찬에 대한 이해는 급기야 종교개혁교회가 루터, 재세레파, 개혁파, 영국교회, 등으로 분열되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예수께서 초대하신 만찬 앞에서 형제들이 싸우고 결국 갈라진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떡과 몸과 포도주와 그리스도의 피의 상관관계에 관하여 매우 실천적으로 생각한다. 개신교회는 성찬의 관계를 향유의 행위와 무관하게 보려는 자들에게 대해서만 반대한다, 다른 한편 이 성찬의 관계에 덕과 포도주, 살과 피의 영적 향유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자들을 반대하여, 그는 경험을 강하게 강조하고 성천행위의 영향과 결과를 강하게 강조함으로써 처음부터 교의학적 입장을 약화시키고 있다. 성찬의 제정의 말씀을 듣고 떡과 포도주를 향유함으로써 영적 삶을 강화하는데 있다.
    심광섭은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인 삶의 새로운 형성은 하나님께 감사, 그리스도를 기억, 성령의 새창조, 사귐(타자의 초대와 사귐, 자연과 우주와의 사귐), 희생제사, 사회적 사랑과 정의 그리고 해방, 하나님 나라의 잔치, 성례전을 위한 거점으로 정리한다.

제 11장 영성의 미학

    핀바르 코놀리(Finbarr B. Connolly)는 영성이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닌 하나님과의 친분 관계를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개신교 교회와 신학에서 영성에 해당하는 단어는 "경건(敬虔)"일 것이다. 경건은 원래 신앙에 근거하여 활동적인 사랑가운데서 모든 삶에 영향을 주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칭하기 위한 개념으로서, 경건주의와 19세기의 각성운동과 부흥운동에서는 점점 개인의 내면성에만 관련된 단어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영성에 그 자리를 내주는 듯싶다.
    신적 미의 세계는 인간이 통상 아주 사랑하는 사물에 관심을 보이고, 추한 현실을 외면하는 것에 대하여 이사야나 아모스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추한 현실을 치유하는 사랑의 힘은 인간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을 넘어선 신의 아름다움의 세계에 진입함이다. 오늘의 영성은 신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체현하고 표현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신적 미의 세계는 형식적 아름다움이 사랑의 내용을 담아내는 세계이다.
 "...하늘은 우리 마음 안에 있소"(프란체스코).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알아봄으로써 거룩해진다. 하나님은 모든 이 안에 그리고 모든 것 안에 계신다. 그런데 그분의 현존은 인간이 알아 볼 때만 드러나신다. 아 그때! 우리에게는 세상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심광섭)


Ⅲ. 결론 

현대사회에서 시각예술의 이미지(Image)는 정지된 채로 머물지 않고 생명의 유기체성처럼 창의적으로 새롭게 예술활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개혁파 기독교 안에서는 이러한 보편적 현상이 어느 때 부터인가 제약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초기 칼빈주의 개혁자들의 시각예술에 대한 인식의 부족과 경원시한 것으로 보인다. 개혁파 입장에서 바르게 인식하려면 지성이나 감성은 인간 본성의 두 측면으로 함께 타락했든지 함께 중생된다고 인식해야 하는 것이며, 성경은 두 본성 중 어느 것이 낫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 연구자는 자연과 예술에서의 심미적 경험을, 세속적 영역 내지는 위험스런 인식으로 여기는 것은 영적경험에 있어서 감성적 경험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주의(ism)을 만들어 칼빈주의로 신봉한 것으로 인하여 개신교 신앙생활은 사소한 오류가 아니라,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을 향하여 가는 목표에 중대한 오류가 발생하였다고 본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에서는 교리와 변증을 듣고, 일상적 삶의 원천은 교회 밖에서 얻게 되는 격으로 예술에 있어서 형상(Image)을 교리적으로는 우상(idol)시하면서도, 삶속에서는 시각예술에 있어 조형적 형상이 신앙생활에서는 은혜의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신앙과 삶의 이원론적 현상에 대하여, 예술적 감성을 신학적 인식의 방법론으로 보완해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4세기 말경에는 성경의 문맹자에게 종교화로 신앙교육을 하였고, 1522년에 성상파괴가 한창일 때 종교개혁자 루터는 삽화를 게재한 신약성경에서 교육적 순기능으로 활용하였던 것과 개혁교회 경건주의자들의 신앙과 윤리적 삶 속에서는 시각예술을 통하여 교육적 기능만이 아니라 선포적 기능까지도 하였던 것을 살펴보았다. 
    본 연구자는 하나님이 주신 예술적 재능으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숭배할 목적으로 우상(idol)을 만드는데 찬성할 수는 없다. 그런 목적과 기능으로 시각예술을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창조한 동산에서 우리가 “휘황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모방해서는 안 되거나, 하나님의 창조적 재능주신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교부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미술은 거짓 신을 숭배하는 악마의 짓"이라 부정했던 이유가 창세기 3장의 금단의 열매를 해석하는 차이에서 생긴 것으로 본다. 하와가 보기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는데, 성경을 편협하게 해석하고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유혹의 제공자라고 생각한 이유에서 조형예술이나 시각예술을 멀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칼빈의 경우에도 시각예술의 조형(造形)을 통하여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경원시한 원인은 그가 어거스틴 이래로 플라톤철학의 계승자가 되었던 이유로 보이며, 감성적인 세계는 허위이며 초 감성적인 세계만이 진리의 세계라고 주장하는 헬레니즘 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21세기부터는 헬레니즘적 스콜라 학문이 아니라 생명신학운동에서 기독교문화의 변혁적 주체가 될 감성(感性, sensibility)의 기능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목회자와 신학자는 예술신학과 문화명령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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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E 문화 예술과 목회
[예술신학] ①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 하나님을 보는 신앙

http://www.gospel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28
심광섭 목사
승인 2019.09.1

나는 약 20여 년 전부터 기독교 신앙이 형상화하는 아름다운 진리의 생명적 형태를 찾는 구도자이며, 그것을 말하고 전하는 전도자임을 자처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책의 제목을 『기독교신앙의 아름다움』이라 달기도 했다. 나는 <예술과 기독교 신앙>, <예술신학> 등을 신설하여 가르치기도 했고, 2013년 예술목회연구원이 창립된 이래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 일은 마치 바울이 복음을 전하라고 명받은 심정과 같은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전 9:16).

여기서 바울이 말한 복음이란 나에게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는”(엡 4:13) 기독교 신앙의 다채롭고 풍요로운 아름다움이다.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환한 얼굴의 하나님은 아름답고 감미로운 분(dulcedo Dei)이다. 복음의 진리(道)와 복음의 실천(德과 仁)은 복음의 아름다움(藝)에 놀라고, 그것에 끌려 노닐고 즐거워함으로부터 나오며(脫) 다시 거기로 향(向)한다. 요컨대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생각(思)하며 행(實行)하기에 앞서 느끼고 반응(感應)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은 중세기의 신학자 안셀무스가 남긴 유명한 명제에서처럼 “지성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으로 여겨져 왔다. 논리적 진리에 더하여 신앙에서 선을 찾고 행하는 전통 또한 오래되었다. 바울은 믿음을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fides Caritate formata; 갈 5:6)으로 이해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나는 예술신학의 새로운 명제로서 “아름다움을 찾는 신앙”(fides quaerens pulchrum)을 제시하였다.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 대주교 성당의 '승리자 그리스도' 6c.

교회사가 펠리칸(Jaroslav Pelikan)은 <승리자 그리스도>상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해 주는 개념은 진•선•미임을 역설한다. 그는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 대주교 예배당에 새겨진 인상적인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 상에 새겨진 “에고 숨 비아 베리타스 에트 비타”(EGO SUM VIA VERITAS ET VITA,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 14:6)에 주목한다. 악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는 참 선한 아름다움이다.

펠리칸은 그리스의 고전적 삼중주인 미, 진리, 선에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주가 상응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길’은 아름다운 것(미)을 지칭하며, ‘진리’는 빛을, ‘생명’은 선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표현한다고 해석한다. 라벤나의 그리스도 상은 길, 진리,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표현한다는 사실에서 신앙의 ‘진리’와 ‘선’만큼 궁리(窮理)하지 못했던 신앙의 ‘아름다움’(美)이 새롭게 화두가 될 것을 요구한다.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眞) 선(善)한 아름다움(美)을 보는 것(觀)이다. 참된 삶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선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유한한 표층에서 발하는 은닉된 신적 근원을 보는 것이다. 논리를 다투는 사실들의 세계보다 존재의 진실이 깃드는 세계가 더 크고, 존재의 진실이 깃드는 세계보다 존재의 감각과 감응하는 세계가 더 깊고 높다. 신앙의 진리와 신앙의 실천은 신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즐거움으로부터 나오고 다시 그곳을 지향한다.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욥의 갈망은 얼마나 치열한 것이고 얼마나 비장하고 간절한 것인가? 욥이 원하는 것은 세상의 것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 하나님 자신이다. 욥이 씨름하는 것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이며, 시비곡직(是非曲直)을 가리기 위한 신학적 쟁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내 간장이 다 녹는구나! (욥 19:26-27)

하나님 자신을 보려는 욥의 갈망은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 마침내 욥은 직접 하나님을 두 눈으로 뵙는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 42:5)


수도자는 시편을 노래하며 부재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맛본다. 하나님이 몸과 마음에 꾹꾹 차게 현존하신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요일 1:1). ‘말씀을 들음’이 신앙의 출발점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봄’은 신앙이 도달하고 그 안에서 살아야할 안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