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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4

동양포럼(52) / 그리운 한국인 (1) - 고운 최치원 < 창사특집 < 지난 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52) / 그리운 한국인 (1) - 고운 최치원 < 창사특집 < 지난 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창사 26주년 특집> 동양포럼(52) / 그리운 한국인 (1) - 고운 최치원
기자명 박장미 기자
입력 2017.10.11 

한국인의 인문정신을 접화군생으로 개신한 신라의 석학
김용환 충북대 교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동양포럼 운영위원회는 그리운 한국인의 첫 번째 순서로 신라 말의 대석학 고운 최치원(857~?) 선생을 선정했다. 그의 사상과 삶을 그리고 기리는 좌담회를 지난 4월 21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열었다. 이날 좌담회에는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김용환 충북대 교수가 참석했다. <편집자>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오늘은 그리운 한국인 시리즈의 첫 번째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세계를 다니면서 공공하는 철학대화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제기되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세계 여러 곳을 다니시는데, 세계에 제시할 수 있는 한국인의 철학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가장 특징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처했어요. 늘 마음속에 허전한 느낌이 남았고, 철학적 빈곤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자신은 개인적으로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한국인의 철학의 원초적인 모습은 접화군생적 영성의 철학이고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뽑으라면 고운 최치원 선생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해왔는데 마침 최영성 교수께서 보내 주신 ‘고운 최치원의 철학사상’(도서출판 문시헌, 2012)을 열심히 읽었고, 많은 시사를 받았습니다. 최치원은 당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당(唐)나라에 가서 최고의 문물을 접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함몰되지 않고 자기의 사상과 철학을 더 심화 발전시켰습니다. 그것이 학문하는 자세에서 세계화의 참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라시대에도 그랬지만 우리가 21세기 오늘을 살면서 참다운 사상, 철학, 예술, 문화를 가꿔갈 때 안팎을 두루 살펴 밖에서 얻은 자극으로 안을 깊이하고, 안에서 나타나는 자의식으로 세상과 대화하는 것을 계속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좋은 형태로 나타난 것이 최치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풍류도를 다시 한 번 우리가 한국사상의 원점으로 재부각 시켜서 이 시대에 갖는 의미와 미래에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최치원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과 내일에 그 뜻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최영성 교수님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신라 말의 대석학 고운 최치원(857~?) 선생은 당대 최고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 최인연·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일대 삼최(一代三崔)’로 일컬어집니다. 당대 최고 지성인의 한 사람이었지만, 골품제에 얽매여, 중국 유학을 통해 온축한 경륜과 포부를 펴지 못한 채 시대의 불우(不遇)를 한탄하며 은거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학문할 수 있는 개방적인 풍토와 자율을 중시하는 육두품 집안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남다른 학구적 노력을 기울여 학자로서 대성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상사·정치사·문학사 등에서 불후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사상적 경향을 살펴볼 때, 그는 기본적으로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유자(儒者)로 자처하면서도 불교 및 도가사상에 정통하였으며 그 밖의 여러 사상을 한 몸에 체득하였던 천재적인 사상가입니다. 그는 원효와 함께 한국사상사의 서장(序章)을 장식하는 거봉(巨峯)입니다. 그를 문장가로 일컫는 것은 표피만 보는 단순한 평가입니다. 그는 철학자, 더 나아가 사상가-사상 운동가였습니다. 최치원 선생은 ‘나말 여초’라는 역사적 전환기의 정치적·사상적 변화를 대변한 시대정신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6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국제적 감각을 갖추었던 대표적인 중국통이기도 했습니다. 근자에 와서는 한국과 중국의 친선(親善), 우의(友誼)를 다지는 차원에서 그에 대한 연구가 중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신라 하대에서 중요한 사상적 동향의 하나로 동인의식의 대두(擡頭)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당시 지식인계층 내부의 의식세계가 투영된 이 동인의식을 크게 부각시키고 고양한 학자는 곧 최치원입니다. ‘우리의 것’을 찾으려는 ‘우리 의식’은 바로 최치원 동인의식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최치원 선생의 철학사상은 바로 이 동인의식이 핵심이 되는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동인의식’은 최치원 사상에 있어 결정(結晶)의 하나라 할 만한 것으로서, 그의 철학사상의 전체적인 구조와 맥락을 짐작하게 하는 관건이기도 합니다. 동인의식은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사상적 밑뿌리를 캐고자 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특히 그가 말한 ‘현묘한 풍류도(風流道)’를 지닌 우수한 문화민족으로서의 강한 자부심과 긍지가 동인의식으로 표출되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귀국한 뒤 그에게 있어서는 거의 모든 면(특히 사상·종교면)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데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여기서 최치원 사상의 핵심과 통일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 서(鸞郞碑序)’에서 화랑의 주요 행동 강령-실천 덕목을 예로 들어 풍류의 실체를 증언했습니다.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 여덟 글자는 최치원이 해석한 풍류의 실체입니다. 앞의 것이 체(體: logos)라면 뒤의 것은 용(用: praxis)입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입니다. 최치원 선생이 풍류를 ‘현묘지도’라 한 것은 논리로 접근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신비적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인식에는 경험론, 합리론, 직관론 세 가지가 있는데, 신비주의는 직관론과 통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천도설교(天道設敎)’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현묘지도’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학들이 고유의 사상과 종교를 범칭(汎稱)하여 ‘고신도(古神道)’라 일컬었던 이면에 이런 내력이 있습니다. ‘신도’ 이외에 적절한 명칭을 얻기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최치원 선생은 고유사상을 비롯한 우리의 민족문화를 재발견하고 이를 선양함으로써 민족주체의식을 드높였습니다. 문화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선진문화를 수용해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 또한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풍류도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전통을 보편적 가치기준과 개념을 가지고 해석 설명하여, 당시 국제무대인 당나라에게까지 선양하려 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문화의 정체성과 특수성을 탐색하여 우리의 것을 ‘세계의 것’으로 만들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고유사상인 ‘풍류’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가치를 부각시키면서도, 풍류를 당시의 보편적 가치 기준으로 해석해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려 했던 것은 단적인 예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사적 흐름과의 관련선상에서 이해하고, 또 보편적 가치기준과 개념으로 자리매김하려 했다는 점에서, 문화적 측면에서의 국제화·세계화에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문화의 보편적 성격에만 함몰돼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망각하거나 외면한 것이 결코 아니었음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최치원 선생은 ‘진감선사비문’ 첫머리에서 “대저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차이가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교를 하고 유교를 하는 것은 필연적이다”고 했습니다. 즉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인·인도인·신라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출신에 따라 진리와 거리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국경을 넘어선 인간의 보편성,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자각, 그리고 진리를 향해 중국이나 인도로 향하는 신라인의 향학열과 진취성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위에서 ‘사람은 출신국에 따라 차이가 없다(人無異國)’는 선언은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의 보편성과 인간 본질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당시 독존적(獨尊的) 경향이 유난히 강했던 당나라에 대해 ‘인무이국’의 논리를 가지고 위와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치원 선생의 ‘주체의식’과 ‘문명의식’은, 신속화·정보화·세계화의 이 시대에, 동서 문명의 보편성 추구와 세계화 지향을 시대적 과제로 하는 현대인들에게 국제화와 주체의식의 관계를 다시 한 번 깊이 되새기도록 합니다. 넓게 열린 마음으로 우리 문화와 전통을 가장 ‘민족적’이고 ‘원형적’으로 잘 살려서 세계에 널리 알리는 것이 바람직한 국제화요, 세계화라고 할 때, ‘뿌리 있는 국제인’이 되기를 염원했던 최치원의 주체적인 사고와 열린 자세는 현대인들에게 어느 것이 바람직한 국제화요 세계화인지 일깨우는 바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최치원 철학사상의 핵심인 ‘인간 주체’의 문제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화적 보편성 및 독자성의 문제는 천여 년 뒤인 오늘에서도 여전히 추구해야 할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 최치원은 그저 과거 완료형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시대를 고민하는 지성인으로 살아 있습니다. 그의 철학사상 역시 단순히 역사상의 정신적 유산으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연면히 생동한다고 하겠습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고운 선생을 세계화시대에 맞춰서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세계 시민성에 관심이 있는데 그런 각도에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흔히 한국이 낳은 학자 중에 세계 시민성에 버금가는 이론의 토대는 19세기 해강 최한기 선생이 조민유화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생의 세계 시민과 더불어 평화를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 세계 시민성을 제시한 것입니다. 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최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동인의식은 독특성, 개별성, 독자성, 동문의식은 보편성, 세계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둘이 아우러지는 의식구조를 최치원 선생이 표명했다는 것입니다. 동인의식이라고 할 때 ‘동’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최치원 선생은 경주 최씨의 시조인데 그가 말씀하신 동인의식이 25대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학으로 이어진단 말이죠. 동인의식은 주체의식이면서 밝은 광명을 지양하는 의식이고 동시에 그의 영향력은 서학까지 포함하는, 동학적 가치관에도 연결된다고 볼 때 동인 의식에 관해 좀 더 논의해 보는 게 어떨까요. 두 번째는 ‘난랑비 서’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난랑’이라는 것은 장자에 나오는 봉황새처럼 한 화랑이 꿈을 펼치면 천하를 포용하고 날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대단한 기회를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난랑에 담겨 있는 의도가 과연 신라의 화랑에 국한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삼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던 우리의 원초적 뿌리가 삼랑과 연결된 게 아닐까요. 유불선 또는 도교가 이 땅에 외래종교로 들어왔지만 그 토대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것입니다. 그럼 그 토대의 심연을 우리가 어디까지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풍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그 중 제 마음에 드는 풀이는 ‘풍’을 풍월에 비유한 것입니다. 풍월은 결국 배달입니다. 배달민족이 걸어갈 길. 한민족이 걸어갈 배달의 도로서 풍류도를 얘기했을 때 유불선 그리고 조망이라고 하는 포괄적 토월의 관점에서 환국의 환인에 대한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깊이 있게 보면 어떤 이야기가 깊이 있게 전개될 것인가 궁금합니다. 또한 선생께서 독특한 자극을 주셨습니다. 한국인의 윤리를 설명할 때 늘 세 가지 포인트를 둡니다. 하나는 합리주의, 정감주의, 영명성입니다. 합리성은 꼭 필요합니다. 의사소통을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대개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정감성을 살려낼 지가 고민입니다. 이것은 감성의 상통인데 여기에 대한 독특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것을 고운 선생이 한 포함삼교에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영명성은 감성과 이성 중심의 교육에서 한 차원 높은 것이고 다루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영명성을 다루는 교과가 한국에서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21세기 미래에서 이것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는지, 포함삼교에서 어떠한 힌트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세 번째는 최치원 선생은 인간존엄 사상에 놀랍게 눈을 뜨신 분입니다. 사람은 출신국에 따라 차이가 없다고 하셨지요. 환국을 강조하는 것과 인존을 강조하는 것이 진감성사비문에 고운 선생이 강조한 내용과 맥을 같이 하는데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궁금합니다. 이 둘의 연결이 잘된다면 놀라운 맥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선생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최 교수 “김 교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하나가 그대로 모두 논문거리입니다. 미리 좀 말씀드리면 낙랑비 서문은 현재 전하는 것이 76자밖에 안 되거든요. 좀 더 많이 남았다면 좋았겠지만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 있죠. 최치원 선생은 동녘-동(東)자를 자주 쓰면서 이 글자만으로 한 편의 철학적인 글을 씁니다. 동은 역시 광명이고, 동은 생명의 시작이다. 방위로 따지면 어질-인 자이고, 모든 변화의 꼭지점이 바로 동이다. 거기서 동은 변화를 나타내 ‘접화군생’의 ‘화’자가 바로 이어지거든요. 최치원 선생은 그냥 생화라 쓰지 않고 나아서 변화하고 변화해서 새로운 생이 되는 생화의 논리를 펴는데 거기에 주목하지 않으면 화자가 안 보입니다. 홍익인간까지 다 하나로 이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최제우가 지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을 보면 최치원이 가진 동의 개념과 확연히 다릅니다. 최치원 선생의 동자에 담긴 철학을 3분의 1만 받아 들였어도 동학의 굉장히 큰 종교적 체계가 정립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쉬운 측면이 있습니다. 자기 조상인 최치원은 큰 틀에서 제시했는데 아주 미미한 부분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최제우 선생이 자기 호까지도 ‘할아버지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라면 나는 물 위에 비친 수운 아니냐’ 하고 지었다는데, 최치원의 사상 체계에 비하면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난랑비 서를 말씀하신 것에 동감합니다. 화랑은 576년에 제도화됐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된 것이죠. 신라에 와서 국가적으로 제도화된 것뿐입니다. 신라의 교육기관이 왜 이렇게 늦게 세워졌느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만 보고 둘은 못 보는 것입니다. 신라는 이미 대학이 성립되기 이전에 화랑도라는 인재 선발제도가 있어 굳이 국립대를 만들 필요성을 못 느낀 것입니다. 그 문제는 앞으로 학계서 검증될 문제입니다. 난랑비 서를 쓸 당시는 최치원 선생이 당대 최고 문장가니 영문왕의 능에 세워 놓는 비문이라면 보다 잘 써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국수주의, 민족주의가 많이 퍼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분위기들을 반영해서 거기에 담은 것이죠. 단순하게 난랑만 애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내용들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삼랑은 삼신이고. 중국이 음과 양으로 나눠보려 한다면 한국은 삼원사상으로 얘기할 수 있고, 우리는 특히 삼원을 중시했고. 환국·천국·인국, 인간 중심, 군주 중심으로 얘기한다면 뭐든 많이 갖춰야 할 것이라고 하니 인간 중심주의의 극치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풍류에 대해서 주로 풍월도라고 하는 것이 그냥 붙은 것이 아닙니다. 풍월이라고 해서 좀 더 개념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입니다. 풍류에 대해서는 바람-풍(風)자. 바람과 물을 갖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고 들으면 그럴 듯하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제가 최치원 선생 풍류를 연구하다 보니 개념부터 봐야 되겠더라고요. 최치원 선생의 문장 특징이 다 근거를 들이댑니다. 이미 중국에서 풍류라는 말을 썼고, 하나의 사상 체계로서의 풍류라는 용어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가서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다 보니 한 명이 떨어져 나와 유교를 만들고 해서 도교를 만들고 해서 나눠지게 됐다는 얘기가 나오거든요. 저는 틀림없이 거기서 따다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개념으로 바람과 물, 그 중에서 정감성 부분만 빼서 풍류라고 한 것은 한 측면으로 고착화시키는 폐단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술 먹고 시 읽고 노래 잘하는 것만 남아 있어 아쉬운 점이 있는데 풍월도라는 명칭도 적지 않게 작동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해석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고 풍류란 말은 근거가 있는 말입니다. 원래 있었던 말인데 끌어다 최치원 선생이 명명한 말에 가깝습니다. 최치원 선생의 사상체계는 천부경에서 얘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흡사한 대목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천부경에 대해 굉장히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저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사상체계가 내려왔고 문자화된 것이 19세기지 그런 사상이 없었다고 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리고 합리성, 정감성, 영명성에 관해 말씀하신 부분은 저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한 가지만 질문 드리겠습니다. 고운 선생의 ‘동인의식’이란 혹시 서융(西戎)과 대칭된 것, 중국에서 옛날에 멸시했던 동이(東夷)는 현재 중국 동쪽의 고로로 발달한 동이(東夷)문화 아니었습니까? 그 당시 그들은 동이 서융이라고 했잖아요? 공자가 그리워한 주(周)나라는 서융에서 나온 나라이고, 요순(堯舜)은 동이라는 거 아닙니까? 맹자에서조차 순임금은 동이라고 하는데, 고운 선생의 이 동서의 동인, 서인은 동이와 서융과 연관해서 쓴 것이 아닐까요?”

▷최 교수 “그런 게 나옵니다. 최치원 선생은 사람인(人)자를 많이 쓰는데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하나의 방향입니다. 인방(人方)이라는 방위를 얘기하는 것인데 인자는 어질-인(仁)자와 같은 것이죠. 발음도 같고. 인방이라는 것은 동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산둥반도부터 한반도까지 포함한 개념이 인방이 되고 나중에 동이(東夷)가 됩니다. 최치원 선생은 이미 동이라는 시대에 살아서인지 인방이라고 했어요. 그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유 위원장 “당나라에 유학하신 분이고 그쪽의 사실(史實)에 시대적으로 가까운 편이었기 때문에, 결국 동인이라는 말씀 속에는 적잖이 한민족의 테두리인 동이족과의 관계를 대칭적으로 쓰신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최 교수 “최치원 선생이 뭐라고 하셨냐면 그 이면에는 너희들이 중원이고 동방이라고 무시하는데 쉽게 말하면 잘못된 생각이다. 선진문명은 동에서 나왔다. 순임금도 동이라고 나온 것인데 어떻게 중화문명을 얘기하느냐. 단순히 동쪽에 있다고 동이라면 말이 되느냐. 반박하는 데서 동자 개념이 나온 것입니다.”

▷김 교수 “제가 한 말씀 덧붙이겠습니다. 갑골문을 연구했던 분 중 유승국 선생이 광개토대왕 비문 원류를 찾다가 갑골문의 이(夷)-자는 오랑캐-이가 아니라 사람인이라는 것을 밝혔어요. 왜 그러면 동이는 동인인데 왜 오랑캐로 풀이하고 해석했는가? 아마도 중국이 한국적인 변방에 대해 갖던 가치 평가적 개념이 들어가 오랑캐라고 폄하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 주간 “여러분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새삼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첫째로 풍류(風流)에 관해서입니다. 최 교수께서는 최치원이 우리의 고유사상을 풍류라고 명명했지만, ‘風流’라는 말은 중국의 고서에 이미 나와 있고, 그것을 차용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문헌학적으로 상고하면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는 약간 다릅니다. 그것은 저 자신이 한중일을 왕래하면서 한중일의 학자·전문가·학생·정치가·사업가·주부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 보고 거기서 걸러진 것입니다. 특히 바람과 관계되는 철학대화를 나누었던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여러 해전의 일입니다만, 아마도 북경에 있는 인민대학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주제는 공공하는 철학을 중국철학-특히 공맹유학-과 비교하는 철학대화였습니다. 한 대학원 학생-스스로 중철 전문의 박사과정 후기생이라고 말했습니다만-의 예리한 질문에서 진솔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자께서 아는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는데-그것이 공맹유학의 핵심인데-공공하는 철학을 중국에서 펼치려고 하시는 김 선생님은 물과 산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좋아하십니까?라는 질문이 나와서, 저는 물과 산을 똑같이 좋아하지만, 바람을 더 좋아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는 사람-지자-도 아니고, 어진 사람-인자-도 아닐 텐데 어떤 사람입니까? 라는 반문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찾는 사람-탐자(探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학원생은 다시 묻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은 활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관적(靜觀的)이라는 게 공자의 말씀인데, 김 선생님은 어떻습니까? 찾는 사람은 유희(遊戱)적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이라고 대답했었습니다. 저의 의도는 중국인의 사상―그것이 공자의 것이라고 해도―과는 다른 한국인의 사상의 한 모습이라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토대학에서 있었던 공공하는 철학대화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소위 ‘일본적 영성’에 과한 대화였는데 결론만 말씀드리면 ‘일본적 영성’은 대지에 뿌리를 내려야 제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비교해서 한국적 영성이라는 게 있느냐? 있다면 어떤 영성이냐고 해서 구태여 말을 해야 한다면 대지에 뿌리를 내려야 제 역할을 하는 대지적 영성이라기보다는 아니라 천공적 영성-하늘 높이 비상하는 데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라고 대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 나름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이렇습니다. ‘바람’이란 공기-기-숨(호흡)-혼과 영-생명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바람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공기를 들이쉬고 내쉬는 것-그것이 다름 아닌 ‘목숨’이요 ‘이노찌(일본말로 생명인데, 호흡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중국어의 ‘싱밍(生命)’도 현대 중국인이 자각하고 있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저 자신의 개인적인 중국 체험에 의하면, ‘싱(生)’은 겉으로 나타나는 가시적인 생명현상이고, ‘밍(命)’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작용하는 천지생물지덕(天地生物之德=천지만물을 낳고 기르는 큰 힘)을 낳고 살리는 대덕(큰 힘)=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물이 가지는 힘이라는 것이-물론 일부이기는 합니다만-중국인 학자들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노자의 상선(上善如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를 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왜 제가 이렇게 한중일의 공공하는 철학대화의 두 토막 이야기를 말씀드리는가 하면, 여기서 중국의 풍수적 영성과 일본의 풍토적 영성과의 대비에서 한국인의 풍류적 영성을 상정(想定)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문제관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영성의 문제를 종교적 신학적 맥락에서 벗어나서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탐구해보자는 뜻에서입니다. 둘째는 ‘포함삼교’에 관해서입니다. 물론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에서는 유교·불교·도교라는 세 가지 외래종교-사상-과의 연관 속에서 말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시대적 상황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포함삼교’라는 최치원의 네 글자가 갖는 의미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즉응하면서도 그것들을 넘어서는 보다 보편적인 뜻으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원대립적 상황을 합일(合一)적 사고로 해결하려는 중국사상이나, 이원대립 이전의 원초적 비대립-무(無)-로 환원시키려는 일본사상과는 달리 이원대립의 대립자 사이에서 함께·더불어·서로 끌어안고 넘어서려는(間越·包越·共越) 한사상의 삼차원 상관 연동적 매월(媒越) 또는 삼차원 횡단(橫斷)매개(媒介)적 개신(開新)을 차이화(差異化)시키려는 것입니다. 거대(巨大)한 중국대륙 국가와 강포(强暴)한 일본 섬나라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흡수·동화·통합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의 개성-고유성·자립성·독자성-을 유지·발전·개방시키기 위해서는 ‘사이에서 함께·더불어·서로서로 보익보완하면서 새로운 차원·지평·세계를 열어갈-개신(開新)이 지상과제-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고요. 그리고 세 번째는 접화군생에 대해서입니다. 그것은 글자의 뜻대로 ‘만나면 바뀌고 바뀌면 온갖 것이 다 살아난다’는 대단히 귀중한 알맹이가 담긴 사상입니다. 몸과 맘과 넋이 잘 어우러지는 만남을 통해서 타자와 자기가 진정으로 생명적 변화=생화를 겪게 되면 거기서 세상의 모든 일들과 것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개신개벽이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경험·증험·효험의 과정을 통해서 체득한 바는 한국인의 영성은 접화군생적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적 영성이 일본 땅에서 모든 외래적인 것을 일본화시키는 습합(習合)적 영성과도 다르고, 모든 것을 통째로 집어삼켜 버림으로써 어떤 차이나 이질도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하면서도 그것은 한없이 높고 관대한 중화문명문화의 감화력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는 문덕감화(文德感化)적 영성과도 판이한 특징이라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 자신의 체험·경험·증험·효험의 축적에서 나온 문제 제기적 가설에 불과합니다.”

▷최 교수 “최치원 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밝히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철학을 만들어내는 데 힘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사상의 특성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삼원화인데 이것이 양극화로 비춰지는 폐단을 구제해야 합니다. 이것을 식자들이 어떻게 풀어야할 지 책무가 막중하고 무겁습니다.”

▷김 교수 “고운 최치원 선생은 경주 최씨의 시조로서 879년 당나라의 황소(黃巢)의 난 때 ‘토황소격문’을 작성해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혼란기에 ‘시무책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상소하고 수용되지 않자, 유랑하다가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치었습니다. 그는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삼교를 포함하며 만물을 응접하고 뭇 생명들과 화합하는 이치를 담은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한’의 풍류도가 ‘셋’의 삼교사상을 포함하기에, 풍류도는 폭이 넓고 깊어 현묘한 사상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는 자생적이며 원초적이고 본래적 한국의 고유한 정신세계가 고대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밝히고자 노력했습니다. 풍류도는 ‘고신도(古神道)’로서 한국의 자연종교이자 고대신교(古代神敎)입니다. ‘난랑비서’에서 선사(仙史)와 풍류도를 상관연동으로 결합시켜 신선도의 의미를 복원하려 했습니다. 풍류도는 살아있는 개체생명이 대자연의 우주생명과 호흡을 함께하며 변화하는 이치를 살려낸 생명작용의 도를 말합니다. 나라의 풍류도는 자생적 한국선도이며, 삼교융화의 포함삼교(包含三敎)로서 종합성과 통일성을 나타내기에, ‘한’의 멋과 맛의 모델로서 한국인의 정신사를 관통하는 ‘생생(生生)’의 생성작용으로 표상했습니다. 풍류도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의미를 통해 기원에 있어 단군의 홍익·이화라는 살림살이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전통사상입니다. ‘접화군생’은 생명생성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현묘지도입니다. 풍류정신이 드러나는 구체적 양상으로 충효, 무위자연과 선악교화로서 공공실천을 지향합니다. 한민족의 인식으로 신인으로서의 선(仙)이라는 기조에 지상의 인간세계를 낙토(樂土) 또는 승지(勝地)로 연동하여 동인의 의식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화랑의 풍류는 신라 이전 고조선부터 전해지던 신선전통문화를 계승했습니다. 풍류에는 광명숭배의 신앙이 배어있고, 천신과 조상신을 섬기던 토착신앙 전통을 이어주고 매개합니다. 또한 우주의 진기를 살펴서 천리에 통달하는 신선법술이 이루어지고, 나라를 지키고 공을 세우는 무도의 강건함이 함께 살아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외래문화를 수용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재세이화는 치화의 도리, 조화의 도리, 그리고 교화의 도리를 함께 포괄합니다. 밖에서 돌아와서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며,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가르침은 유교의 치화도리입니다. 무위의 일에 처하면서 말하지 않는 가운데 그 가르침을 행하고 순리에 따라 천지만물과 어울리는 가르침은 도가의 조화도리입니다. 그리고 악을 짓지 않고 선을 받들어 봉행하는 것은 중생을 건지려는 불교의 교화도리입니다. 고운 선생은 원리보다 실천행위의 차원에서 유·불·도의 도리의 삼교회통의 이치를 밝힘으로 ‘접화군생’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유·불·도에서 충효·무위·선행의 실천덕목을 서로 매개함으로 풍류도가 추구하는 접화군생의 공공생명 작용이 치화·조화·교화 도리의 삼원적 공공체계임을 입증하였습니다. 이렇게 뭇 생명을 치화하고 조화하며 교화하려면 행위주체의 공공성이 검증되어야 합니다. 이에 따라 화랑은 명산대천에서 심신을 단련하게 되고 학술과 기예를 함께 연마하였습니다. 유가의 치화도리를 함양하면서 수신으로 군자가 되고, 도가의 조화도리를 함양하면서 심신을 허정(虛靜)으로 비우고 정기(精氣)를 바로잡고, 천지만물과 회통하는 신선이 되며, 불가의 교화도리를 함양하면서 하화중생·상구보리를 공공으로 실천합니다. 그러므로 고운이 ‘풍류가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다는 언표는 심신수련·심신연마를 통해 국가적으로 리더십을 갖춘 군자가 되고, 천지만물과 조화를 이루는 진인이 되며, 반야의 지혜로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의 길을 함께 닦는 묘리체득의 과정입니다. 삼보(三寶)의 덕목을 두루 겸한 최고의 화랑이 ‘국선(國仙)’이 됨으로 풍류도(風流徒)의 무리를 능소능대하게 이끌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포함삼교 이치로써 접화군생의 인연을 맺고 치화·조화·교화의 공공실천으로 풍류기풍을 국가차원에서 조성하면서, 단군조선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홍익인간·재세이화(弘益人間·在世理化)의 치화·조화·교화의 도리를 ‘한’으로 계승하였습니다. 고운의 풍류도에 나타난 ‘한’의 현묘지도는 공공의 생명작용으로 수운의 동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수운은 유불선이 천도의 부분으로 유도윤리와 불도의 각성과 그리고 선도의 양기는 사람 성품의 자연스러운 품부(稟賦)이자 천도의 고유성으로 동학이 그 무극대원(無極大源)을 잡아 이루어진 것으로 말했습니다. 풍류도는 한국고대의 제천의식, 하느님을 모시는 신앙에 모태를 두고 있습니다. 단군풍류도를 신라화랑도가 계승하고 다시 동학시천주로 이어지는 가운데 영부(靈符)와 선약(仙藥)을 공유했습니다.”

▷김 주간 “앞서 유성종 위원장이 제기한 문제에 대한 최 교수의 응답에 관련되는 저 자신의 개인적인 가설적 견해를 말씀드릴 필요를 느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동(東)은 언제나 개신(開新=새로운 차원·지평·세계를 열음)의 방향이요 영역이요 지역입니다. 그리고 동은 기본적으로 새벽의 때와 아침의 때로 나뉩니다. 저에게 있어서 한국은 새벽의 나라이고, 일본은 아침의 나라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중국은 대낮의 나라이고 유럽과 그 너머에 있는 미국은 저녁과 밤의 나라입니다. 새벽은 칠흑 같은 한밤중과 산뜻한 아침 사이의 아주 짧고도 아주 긴 순간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생각할 때,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고, 밤은 하루의 끝남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새벽은 시작입니까? 끝남입니까? 새벽은 하루의 끝남과 새날의 시작 사이에서 양쪽을 함께 안고 넘어서서 하루의 차원을 갱신하는 찰나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아침이 새 생명의 탄생이고, 대낮이 성장이고, 저녁이 성숙이고, 밤이 사망이라면, 새벽은 또다른 새 생명의 태잉(胎孕)와 태동(胎動)와 태교(胎敎)를 각성케 하는 시기(時機)입니다. 한사상은 접화군생의 영성이 타자와 함께 새 생명·새 사상·새 철학·새 문화를 잉태하고, 그 태동과 태교를 착실하게 이행함으로써, 타자와 자기의 상생과 상화와 공복이 실현되는 새로운 인간사회 건설의 토대구축에 이바지하는 미래공창의 인문학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제가 약 20년에 걸쳐서 전 지구적 시각으로 공공하는 철학대화활동을 해온 솔직한 감회를 말씀드린다면, 유럽대륙의 철학에는 합리적 관념론이 두드러지고, 영국인의 철학에서는 감성적 경험론이 우세한 데 비해서, 미국인의 철학에서는 의지적 실험적 행위론이 현저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어떨까요? 물론 상대적인 이야기입니다마는 중국인의 철학은 합리적 설명이 장황하게 전개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일본인의 철학은 감성적 무상관(無常觀)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생(生)의 약동보다는 사(死)의 체념이 미화되는 경향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한국인의 철학에서는 생의 약동을 찬미하는 영성적 각성이 중시되는 것 같습니다. 이성과 감성의 이원 대립을 그 사이에서 함께 끌어안고 넘어서는 간월적·포월적·공월적 영성철학이 아직 태동기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면 어떨까라는 것이 솔직한 소견입니다. 이번에 고운 최치원 선생을 여러분과 함께 그리고 기릴 수 있어서,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박장미>

천부경은 하이데거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중요한 문헌이다 > 자유게시판 - 사단법인 대한사랑 - DaehanSarang (Daehan History & Culture Assoc.)

천부경은 하이데거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중요한 문헌이다 > 자유게시판 
- 사단법인 대한사랑 - DaehanSarang (Daehan History & Culture Assoc.)

천부경은 하이데거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중요한 문헌이다

대산

글주소
2017-11-28

천부경은 하이데거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중요한 문헌이다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대산 신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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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창 충북대 명예교수는 공공철학과 미래학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흥미를 갖고 지난 30여 년 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조사 연구해 온 원로학자이다.
김태창 선생이 주창한 공공철학(公共哲學)은 ‘활사개공(活私開公)’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공공철학은 근대화 과정에서 생성돼 큰 피해를 낳았던 ‘멸사봉공(滅私奉公)’이나 그것의 안티테제인 ‘멸공봉사(滅共奉私)’가 아닌 ‘공’과 ‘사’를 모두 살릴 수 있는 철학을 말한다.
‘공공철학(公共哲學)’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공공하는’ 철학을 말하는 것으로 서양의 ‘Public Philosophy’와는 다르다. ‘모두가 함께한다’라는 의미의 ‘공공(公共)’에 김 박사는 ‘대화’와 ‘협력’ 등 실천적 의미를 부여해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 되고 글로벌화 된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새로운 ‘공공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김태창 박사는 최근 한국사상의 원형인 천부경(天符經)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
“국내에서 활동할 때 보다 외국에서 일을 하다 보면 우리 것을 알고 그것을 자신 있게 제시하고 설명할 필요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철학적 빈곤에서 오는 좌절감과 패배의식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의 일화를 소개해 드리면,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초대교수였던 박종홍씨가 세계적인 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초청을 받고 자택을 방문하게 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하이데거가 일부러 사람을 보내서 초청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게다가 하이데거가 집에 직접 초대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하이데거가 하는 말이, “일본학자들과 대화를 해서 일본철학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중국철학자들과의 얘기를 통해서 중국인의 철학에 대해서도 많은 시사를 받았다. 그런데 한국인의 독자적인 철학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인의 철학이야말로 근원 철학(radical philosophy)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한 문헌이 ‘천부경’이라는 말을 들었다”라면서, 직접 ‘천부경’을 보여주더니 “이것을 좀 해석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박종홍 교수가 그때까지는 서양철학만 하고 한국철학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천부경’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한국인의 철학을 알게 해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말을 어떤 신부님의 회고담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천부경’은 하이데거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중요한 문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천부경’ 해설서들은 너무 아전인수 적이고 견강부회적인 것이 대부분이어서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이해와 납득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래서 저 자신의 개인적인 해석과 저 나름의 이해를 정리해둔 바가 있습니다만은 오늘은 한 사상의 핵심을 파악하고 설명하는데 좋은 문헌적 자료의 하나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말씀만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위서논란이 끊이지 않고 학술적 신빙성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 팽배하는 현상입니다만 저 자신은 다른 문헌들과 함께 ‘천부경’과 ‘삼일신고’와 ‘참전계경’은 방법과 관점을 제대로 세우고 접근한다면 한(인·민) 철학의 새로운 공동구축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기본 자료로써의 가치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부경’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중요한 문헌이다.
그런데 천부경은 아직까지 한국철학 교과서에 소개되지 않아 일부 한국 국민들만 그 존재를 알고 있고, 천부경을 이해하고 그 중요성과 가치를 알고 있는 한국 국민은 극히 소수에 불과해 안타깝기 그지없다.
공공철학을 주창한 김태창 선생은 193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청주고와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충북대 교수, 충북대 사회과학대학장, 충북대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일본동경대 객원교수, 중국사회과학원 객원연구원, 호주 시드니경영대학원 객원교수, 공공철학공동연구소장(오사카) 등을 거쳤다. 또 세계미래연구협회 국제집행위원, 일본 장래세대종합연구소장, 일본 오사카 공공철학 공동연구소장, 중국 인민대학 초빙교수, 홍콩대학 객원교수 등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카네다 세이치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는 김태창으로 다시 태어났다. 김구 선생, 김좌진 장군과 같은 안동 김씨 가문에 속하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병약했던 소년 김태창은 15세 때 치유불가능이라는 선고를 받고 병상에 누워 지냈다. 극심한 병고 속에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언어능력뿐임을 알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살아남는다면 자신의 언어능력으로, 말로써 세상에 이바지하겠다고. 그리고 기적적으로 그는 건강을 되찾았다.

청년이 된 김태창 선생은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수많은 대학과 연구소에서 인간철학과 정치철학, 사회철학을 공부한다. 김태창 선생은 국내로 돌아와 명강의로 대학 내외에서 유명해졌다. 충북대 사회과학대 학장이 된 그는 대형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열정을 담아 강의했다. 하지만 학생운동이 한창인 학내에서 제자들로부터는 체제옹호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반대로 국가권력으로부터는 체제비판적이라는 의심을 받았으며, 한때는 체포감금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을 뻔도 했다. 격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는 고뇌하고 신음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 무렵 나중에 동경대 총장이 된 사사키 카케시 교수의 초청으로 김태창 교수는 199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이 되었다. 일제하에서 식민지를 겪은 그는 과거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던 사실을 잊지 않았다.

김태창 교수는 일본을 무시하고,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학문을 닦아 일본 학자보다 뛰어난 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일본에 머무르면서 일본의 참모습을 탐구했다. 김태창 교수가 느낀 것은 ‘언어 경시’와 ‘타자 부재’의 일본이었다. 그 두 개의 일본상은 결국 ‘닫혀진 일본’이었다. ‘일본인’이라는 동질의 이웃 이외에는 모두 경원과 제외의 대상으로서의 ‘이질적인 타자’였다. 김태창 교수는 그런 일본을 타자에게 열린 사회로 바꾸기 위한 철학 대화를 시도했다.

김태창 교수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공(公)’에 편향된 일본인들의 정신풍토에 변화를 일으키고 ‘사(私)’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켜 나갔다. 그리고 ‘사’를 살아 있는 개개인의 원초적인 행복의지로 재해석하고 그것이야말로 제도적 지배가치에 우선하는 참된 인간적 가치의 자연적 기반이라고 역설했다. 그 과정에서 공적 성향이 강한 일본의 제도권 학자들의 반발과 적개심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공공(公共)’보다도 ‘사공(私共)’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태창 교수는 교토포럼을 기획하고 이끌면서 세계 각국에서 각 분야 최고 전문학자들과 철학적 논의를 계속해 나갔다. 그의 ‘공공철학’은 일본을 넘어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까지 확대되는 가운데 《공공철학》 시리즈(전 10권) 중국어판이 출간되기도 했다.
그의 철학은 상대를 수용하고 깊이 이해함으로써 상생하는 데 있다. 서로 매개하고 계발하여 동시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타자를 살리는 것이 곧 자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철학이다.

그는 말한다. “타자를 세우는 것이 동시에 자신도 서는 길이라는 것은 이미 공자도 말한 바 있습니다. 공자는 자기가 서고 싶으면 먼저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루고 싶으면 먼저 남을 이루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단순한 말이지만 이 말을 깨닫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김태창 교수는 80세 생일을 앞두고 20년 넘게 이끌어온 교토포럼에서 물러나 현재는 동양일보의 동양포럼 주간으로 활동하며 현대인들이 인문학적 사고를 통해 삶을 성찰할 수 있도록 ‘철학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지난 30여 년 간 글로벌 장래세대포럼(40회), 공공철학 교토포럼(120회), 재일본외국유학생포럼(30회), 일본 내 유명대학 순회 교토포럼(10회) 등 50여개 국이 넘는 나라에서 수천명의 학자들과 철학대화를 갖기도 했다.

그는 최근 미래는 혼자 만드는 독창(獨創)이 아니라 함께 일으켜가는 공창(共創)이라는 의미에서 ‘미래공창’ 개념을 생각하게 된 배경을 소개하면서, 한·중·일이 함께 더불어, 서로서로 동아시아의 미래를 열어갈 것을 제안하였다.

저서로는『일본에서 일본인들과 나눈 공공철학 대화』(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7) 등 다수가 있다.
김태창 선생은 청주시 문화상, 충북도 문화상,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과 미래학회가 주관하는 제정한 2회 미래세대상 등을 수상했다.

부끄러운 것은 한국 전통철학의 원형인 천부경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인 김태창 박사의 존재를 많은 한국 사람이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한일영성개신정담(韓日靈性開新鼎談)(1) 김태창·기타지마 기신·야마모토 쿄시

 한일영성개신정담(韓日靈性開新鼎談)(1)

대담 : 김태창·기타지마 기신·야마모토 쿄시 / 번역 : 야규 마코토 / 정리 : 조성환

by소걸음Feb 03. 2018


[개벽신문] 제70호(2017년 12월호)
https://brunch.co.kr/@sichunju/183

[해제]

여기에 실린 ‘한일 영성 새밝힘 정담’은 지난 2017년 2월 20일에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과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욧카이치대학(四日市大學) 명예교수,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편집장, 이 세 명이 일본의 교토(京都) 시내에 있는 카페 <우에시마 커피>에서 나눈 영성(靈性)에 관한 철학 대화를 보완한 것이다. 당시의 대화 내용은 [미래공창신문] 제34호(2017년 7월 15일호)에 <동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영성을 말한다>로 게재되었고, 그 후에 이 세 명이 2017년 8월 3-7일에 꽃동네영성원에서 개최된 국제영성포럼(동양일보 후원)에 참가한 성과를 바탕으로 가필·수정한 원고가 기타지마 기신 명예교수가 편집하는 사상철학잡지 [리라

līlā(遊)』 제10호(2017년 12월 간행 예정)에 게재될 예정이다. 이 글은 이 수정된 원고를 야규 마코토 박사가 한국어로 번역하고 조성환 박사가 약간의 표현과 오타를 수정한 것이다.

본 정담(鼎談)에서는 아프리카적 영성, 아시아적 영성, 러시아적 영성, 불교적 영성 그리고 일본적 영성 등 다양한 영성이 논의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프리카의 ‘우분투(ubuntu)’적 영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기타지마 교수에 의하면 ‘우분투’는 타자와의 관계성을 가리키는 말로, 투투 명예대주교는 우분투의 인간관을 “사람은 타자를 통해 인간이 된다.” “우리는 서로의 필요성을 알기 위해 서로 다른 것이다. 인간이란 의존관계에 있다.” 등으로 설명하면서 “우분투는 인간임의 본질이다”라고 설파했다. 이것은 서구근대를 대표하는 데카르트의 “나

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하는 소위 ‘코기토(Cogito)’적 인간관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다. ‘우분투’ 혹은 그것과 공통된 개념은 아프리카 각지에 널리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은 아프리카의 토착 언어에 유래하지만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혼혈인, 인도인 등에게도 흔히 알려지고 쓰이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아프리카 대륙은 영국·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에 의해 구석구석까지 식민지화되어 흑인들의 문화나 전통은 비문명적·야만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서구적 교육을 받은 흑인 지식층들도 서구 백인의 언어·문화를 높이 생각하는 가치관을 적지 않게 내면화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아프리카에서 부와 권력을 차지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아프리카의 문학자·예술가·사상가들은 문학·춤·연극 등을 통해 민중들에게 주체의식을 각성할 것을 호소하였다.

남아프리카를 지배한 백인(영국계,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체제를 구축하고 소수파의 백인과 다수파의 흑인 및 기타 유색인종들을 격리·분리시키고 백인들이 사회의 모든 기득권을 독점했다. 백인들은 “너희들은 너희대로 살라. 우리들은 우리대로 산다”고 하면서 흑인들을 사회적·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 내버려두고 그것에 대한 항의·저항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것에 대해 反아파르트헤이트의 사상가·운동가들은 흑인의 토착적인 개념·사상으로서의 ‘우분투’를 재발견하고 그 개념을 갈고닦아서 대중들로 하여금 아프리카 흑인에게 독자적이고 떳떳한 철학이 있다는 것, 흑인이 결코 열등한 인간이 아니라는 주체의식을 깨우쳤다. 이윽고 그것은 백인과 혼혈인, 그리고 그 밖의 유색인종에게도 전파되어 사람들이 인종격리정책의 모순을 깨닫게 만들고, 마침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자체를 해체시키게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적 변혁의 원동력이 된 ‘우분투’를 보면 한국의 동학(東學)이 외친 ‘시천주(侍天主)’와 ‘후천개벽(後天開闢)’이 떠오른다. 귀천(貴賤)의 차별을 사회질서의 기초로 하는 선천(先天) 5만년이 막을 내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 안에 한울님(天主)을 모시는 존귀한 존재로 서로 존중받는 후천시대가 개벽되었다는 수운 최제우의 메시지가, 이후에 조선왕조의 압정과 서구 및 일본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동학혁명의 큰 물결을 일으킨 것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새삼스럽게 영성을 논하는 것은 고도화하고 복잡화된 현대과학기술문명과 국제자본주의에 의한 빈부격차의 문제, 편협한 국수주의·민족주의·배타주의 등과 같이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도리어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인간적 가치가 상실되는 이 시기에, ‘영성’이라는 시각에서 인간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거기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여는 길을 되찾고자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편집장) : 기타지마 기신 선생님은 [남아프리카의 지도자, 종교와 정치를 말하다―자유의 정신, 희망을 열다]1를 <정천사(正泉寺) 국제종교문화연구소 연구총서 1>로 2012년에 감역·출판하셨습니다. 인종격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붕괴되고 나서 1994년에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넬슨 만델라(Nelson R. Mandela, 1918-2013)와 성공회의 중진(重鎭)인 데즈먼드 투투(Desmond M. Tutu, 1931- ) 대주교 등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 철폐의 사상적 투사들 21명을 인터뷰한 기록입니다. 찰스 빌라 비센시오(Charles Villa Vicencio) 케이프타운대학 명예교수가 신생 남아프리카의 태동기(90년대 초기)에 그들을 실제로 만나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귀중한 자료입니다.
야마모토 교시

김태창 선생님은 1990년부터 일본의 교토를 중심으로 세계적 규모의 ‘공공하는 철학대화 운동’을 26년 동안 꾸준히 계속하신 후에 지금은 충북 청주를 중심으로 국내외에서 지방간·세대간·남녀간 상생의 공공하는 인문학 대화활동을 2년째 전개하고 계십니다. 특히 최근에는 새로운 영성의 새밝힘을 다각도로 실행해 오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두 분 선생님은 작년에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인 조성환 박사의 추천으로 만나게 된 이후로 일본에서 여러 차례 ‘영성’에 관한 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 동안의 대화를 정리하고 한국·일본·러시아·아프리카에 관한 체험 학습을 연결지우면서 함께 공공하는 영성과 그것이 미래공창에 갖는 의의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프리카에서의 우분투 - 아프리카 문학과 우분투 사상




김태창([동양일보] 동양포럼 주간) : 먼저 좋은 책을 보내주셔서 그동안 충분히 관심을 갖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 책에는 아프리카 문학과 사상을 오늘날 일본의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알리고 싶다는 기타지만 선생의 배려와 성의가 담겨 있었습니다.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스님이신 기타지마 선생이 특히 아프리카 사상과 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기타지마 기신(욧카이치대학 명예교수) : 저는 정토진종 혼간지파(本願寺派) 승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생가는 400년 동안 세습된 지방이었고 양가인 정토진종 다카다파(高田派) 쇼센지(正泉寺)는 600여 년 동안 ‘문도(門徒)’라고 불리는 민중들과의 유대관계를 계속 유지해왔습니다.

대학에 진학할 때에는 러시아나 이슬람권의 이란을 공부하고 싶어서 아버지와 상의했습니다만 허락을 받지 못했고, 결국 한자문화권이 아닌 인도 쪽에서 불교를 다시 보려고 1963년에 오사카외국어대학(大阪外國語大學)의 인도어 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들어가 보니까 수업 내용은 고전어가 아니라 현대어뿐이었습니다. 힌디어를 위주로 해서 우르두어도 배웠는데 거기에는 상당한 비율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단어도 들어 있었습니다. 인도에는 상당히 다양한 것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파업과 시위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한일회담과 기숙사 문제가 쟁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를 중심으로 연구하려는 의욕이 안 생겼고 젊었던 저는 장차 세계가 사회주의가 되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익히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고 믿고 러시아어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외대를 졸업하고 오사카시립대학(大阪市立大學) 문학부 문학과 철학전공으로 다시 학사 입학했을 때의 지도교수가 다나베 하지메(田邊元)2의 제자이면서 다나베 하지메 비판의 졸업논문을 썼고, 정치활동을 하다가 3년 동안 형무소로 들어간 모리 노부시게(森信成, 1914-1971) 선생이었습니다. 모리 선생님으로부터 마르크스에

게 큰 영향을 준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 1804-1872) 철학을 읽는 방법을 꼼꼼히 배웠습니다.

저는 시립대의 학사입학시험을 영어와 러시아어로 쳤습니다. 그런 관계로 모리 선생님께서 “러시아어를 읽을 줄 아니까 읽어봐라”고 하면서 19세기 러시아문학과 정치철학 연구를 권유해 주셨습니다. 모리 선생님은 특히 19세기 중기 러시아의 체르니셉스키(Nikolai Gavrilovich Chernyshevskii)를 읽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러시아문학의 기본사상이나 행동원리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문헌을 읽으면서 19세기 러시아의 사상과 문학이 지니는 힘, <백과전서> <생활의 교과서> 역할을 하는 문학의 힘에 매우 감동했습니다.

오사카시립대학 대학원 시절에 친구로부터 “아프리카 흑인문학은 재미있다”는 말을 듣고 영어로 쓰인 현대 아프리카문학도 읽었습니다. 거기에서 19세기 러시아문학의 재래를 보았습니다. 대학교의 교원이 되고 나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재로 아프리카문학을 택했는데 그 이유는 아프리카의 사상에 충격을 받고 그 문학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매력을 한마디로 말하면 아프리카 사람들은 식민지화(植民地化)되어서 엄청난 고초를 겪으면서도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는 점입니다. 작품을 읽으면 제가 용기를 얻고 자기를 돌이켜보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바로 자타의 관계성, 연대를 축으로 한 ‘우분투(ubuntu)’의 사상이었습니다. 저는 아프리카 문학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아프리카의 공동체 안에 전통적으로 내재하고 저항문학 작품에 나타나 있는 사상이 ‘우분투’입니다. 인종차별의 철폐를 흑인 측으로부터 백인과 혼혈인들에게 호소하고 연대하는 사례가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많습니다. 아프리카에는 “함께 운동하는 문화적 전통”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남아공의 인종격리정책은 엄청나게 가혹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문학작품은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품게 해 줍니다.




김태창 : 아프리카 문학의 영어 번역판과 현지어의 원본 사이에는 독해상의 문제가 많지 않습니까?
김태창




기타지마 기신 : 지적하신 대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영어는 민중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와히리어는 체계화되어 있지만 그 외의 토착 언어가 문학에서 쓰이는 것은 별로 없고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로 쓰여 왔습니다. 그런 문학들의 주류는 식민지주의 지배에 대한 저항을 그린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서양근대문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이후 문학에는 점차 토착성이 기본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앞장서서 쓴 사람 중의 하나가 응구기 와 씨옹오(Ngũgĩ wa Thiong’o, 1938- )3라는 케냐 출신의 작가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영어로 썼는데, 작가 활동을 하는 가운데서 “문학은 민중을 떠나서는 안 된다. 민중의 말로 문화를 이어가자. 이것은 유럽에서 단테가 라틴어가 아니라 토착의 이탈리아어로 소설을 쓰고, 루터가 성경을 토착의 독일어로 옮긴 것과 마찬가지다. 아프리카의 식민지 지배는 정치·경제·문화가 일체가 된 지배였고, 그 중심이 되는 것은 문화 지배이다. 그 지배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토착적인 민족어에 의한 문학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입각해서, 1976년에 기쿠유어라는 민족어로 연극 작품 <좋을 때 결혼할거야(Ngaahika Mdeenda)>를 미셸 무고(Micere Githae Mugo, 1942- )와 공동으로 썼습니다. 이 작품은 케냐에 있어서 신식민지주의 지배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것입니다.




야마모토 쿄시([미래공창신문』 편집장) : 한반도에서 세종대왕이 지식인 계급 공용의 문어인 한문과 별도로 민중의 일상생활언어를 소중히 여겨서 한글을 창조하고 널리 보급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민족의 독립은 우선 언어적 독립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타지마 기신 : 기쿠유어로 쓰인 이 연극작품을 현지의 젊은이들이 상연했습니다. 삶의 의욕을 잃었던 ‘백수’나 심지어는 자살미수까지 한 젊은이가 연기를 하면서 힘을 내고, 리허설을 본 비평가가 “모두 프로가 연기하고 있는 것 같다”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연극 자체가 사회성을 지닌 전통적인 아프리카의 토착문화이고 그 전통을 재현시킨 이 연극운동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케냐 정부는 구기를 체포했습니다.




야마모토 쿄시 : 체제 전복의 기폭제가 되는 것을 우려한 권력자가 문학가의 활동의 싹을 잘라 버리려고 한 거군요.




기타지마 기신 : 영어 작품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영어를 읽을 줄 아는 지식층은 숫자도 많지 않고 케냐 정부로서는 무섭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다시 읽고 있는 응구기의 작품인 [악마를 책형(磔刑)시켜라](Devil on the Cross, 1982)는 기쿠유어로 쓰인 원작(Caitaani Mutharaba-ini, 1980)의 영어판입니다. 영어 내용이 알 수 없는 부분이나 가끔씩 나오는 아프리카 언어로 쓰인 노래의 뜻 등은 응구기와 친한 제 친구인 고돈 사이라스 므완기(Gordon C. Mwangi) 선생(시코쿠가쿠인대학四國學院大學 교수)에게 묻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실은 이것과 비슷한 작업이 전에도 있었습니다. 정유재란 때의 일본 수군과 조선 수군의 전투를 그린 영화 <명량(鳴梁)>에서 이순신이 아들에게 “이것(=큰 소용돌이가 일어난 것)은 신의 은총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저는 그 영어 자막의 의미를 이해가 잘 안 돼서 한국의 친구인 조성환 박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순신이 한 말은 서양 언어의 ‘신의 은총’과 의미가 전혀 다른 ‘천행(天幸)’으로 “민중과 신이 공동(共働)해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김태창 : 결국 아프리카문학에 접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어 번역을 매개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이군요. 아프리카문학 속에 살아 움직이는 핵심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우분투’라고 강조하고 계시는데 선생께서는 그것이 어떤 사상이라고 생 각하고 계십니까?



아프리카에서의 우분투 - 우분투란 무엇인가




기타지마 기신 : ‘우분투’란 타자와의 관계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쁜 사람도 포함해서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화되어 간다는 생각이 아프리카에는 있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자기중심주의(egocentrism)가 아니라 타자가 자기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반적인 통행자가 아닌 ‘타자’와 하나의 단위(공동체)를 만들어서 생활합니다. 작은 단위들 사이에서 교류가 있듯이 외국의 단위들과도 서로 의사소통하는 것을 통해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 시작은 ‘자(自)’가 아니라 ‘타(他)’입니다. ‘타’에 의해 발현되어 가는 자기는 실체가 아니라 과도기로서의 자기로, 항상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시작을 합니다. 이것은 불교로 말하면 ‘공(空)의 공화(空化)’이며 ‘공’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 상호관계성의 사상은 ‘적’이라 할지라도 ‘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의 의사소통을 통해 함께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비폭력’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야마모토 쿄시 : “다시 한 번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은 비소(卑小)한 자기의 체험을 성역화(聖域化)시키지 않고 지금의 자기를 처음으로 되돌려 출발한다는 것이군요. 저희가 발행하고 있는 [미래공창신문]도 매호(每號) 낼 때마다 처음부터 출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래공창(未來共創)”이란 세상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얏!” 하고 기합을 내면서 실제로 한 걸음을 밟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당연히 장애나 어려움이 수반됩니다. 뜻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진심과 진심이 서로 메아리치는 것을 에너지로 삼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진하는 길 위에서 공명(共鳴)·공진(共振)·공동(共働)할 수 있는 ‘타자’가 나타나면 ‘타자’와의 영(靈)과 혼(魂)과 심(心)과 상관연동해서 미래를 개신(開新)합니다. ‘타자’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하여 대화·공동·개신의 연쇄가 나선형으로 상승해 나가면 국내외의 (특히 동아시아의) 동지(同志)들과 더불어 공복세계(共福世界)를 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를 들면 그전까지의 위로부터 아래로 베푸는 성현문명(聖賢文明; 정치권력·종교적 권위에 의한 지배·명령)에서 아래(민중)로부터 일어나는 ‘활사개공(活私開公)’ 문명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타자와 함께 하기”이기 때문에 한 개인에 의한 ‘창조’나 ‘독창’이 아니라 ‘공창’인 것입니다. ‘공창’의 ‘창(創)’은 ‘창발(創發)’의 준말입니다. 뜻을 가진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창출·창신(創新)하는 것, 즉 ‘개신(開新)’을 말합니다. 개신이라는 사태는 근원적인 우주생명력(영성靈性)과 개체생명력과의 공진(共振)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공창이란 자력(自力)·공력(共力)·타력(他力)이 상관연동하는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겠지요. 정토진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성입니다. 이것을 ‘타력(他力)’이라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창 : 아미타불의 무한한 자애로움=타력에 의해 구제되는 것이지 자력작선(=자기 힘으로 선을 행함)은 털끝만큼도 관여되지 않는다는 것과 우분투와는 접점이 있습니까?




기타지마 기신 :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흔히 자력(自力) 구원의 선구자로 알려진 도겐(道元)4도 [정법안장(正法眼藏)]의 <생사장(生死章)>에서 생사를 떠난 ‘구원’은 저편에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이 점에서는 신란(親鸞)5도 도겐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종교적 구원, 인간적 성장은 ‘자’가 아니라 외부성(外部性)으로서의‘타’의 작동에 의해 일어난다는 점에서는 우분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타’의 비분리성, 외부성으로서의 ‘타’(부처)에서 “자기중심주의가 너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나에게 맡겨라”라는 아미타불의 부름을 듣고 그것에 의해 자아에게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타력의 가르침’은 우분투의 사상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창 : 아프리카 문학에는 ‘자력본원(自力本願)’ 같은 생각은 없습니까?




기타지마 기신 : 아프리카의 문학작품에 처음에는 데카르트 이래의 ‘자아’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작가들이 서양에 유학하거나 서양식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과 격투하는 가운데 그런 ‘자력적 자아’는 모두 파괴되고 아프리카적인 사고방식으로 회귀하게 되었습니다.

“단편화된 아프리카를 하나로 만들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라고 응구기를 비롯해 여러 작가들이 말합니다. 다시 말해 상실·분단·소외된 상태로부터 인간을 되찾는 사상으로서 ‘우분투’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각국이 차례차례로 독립한 1960년대는 서양식의 발상과도 겹치는 리얼리즘 문학작품이 많이 나타나서 서양인도 일본 지식인도 그것을 읽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아프리카의 현실이 해결될까?”라는 의문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립에 의해 지난날 백인이 흑인을 직접 지배하는 ‘식민지주의’는 끝났지만 경제적·문화적 자립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실은 글로벌 지배의 신식민지주의로 이행했을 뿐이 아닌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지 않은가? 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결과 “이러한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을 아프리카 토착사상·문화의 현대화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고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시도가 1970년대의 남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48년에 시작된 남아프리카 백인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표면상 “너희들(흑인)은 너희 생각대로 하라. 우리들(백인)은 우리 생각대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실은 다릅니다. 근본 전제에는 흑인과 백인의 평등성은 없습니다. 실제로는 “흑인은 백인과 따로 ‘원주민답게’ 살면 된다. 너희들은 백인으로 대표되는 문명인이 될 리 없으니까 우리들의 지도 아래 사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들 백인은 너희들과 다른 문명인으로서 생활한다”는 것으로 ‘분리발전’의 미명 아래 흑인, 칼라드(혼혈인), 아시아인 억압을 강화했습니다.

당시 인구의 약 80%를 차지한 아프리카 흑인은 이에 대해 철저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열등한 인간이 아니다. 원래 아프리카에는 공동체 속에서 서로 도와주면서 인간적으로 풍요롭게 살아온 체험이 있지 않은가?” 이러한 입장에서 흑인이 아프리카문화를 파헤치고 이론화시키는 과정에서 아프리카에는 상호관계성을 의미하는 ‘우분투’라는 대단한 사상·문화가 있다는 것이 의식화되었습니다. 이것이 흑인의 단결과 저항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반(反)아파르트헤이트 활동가인 스티브 비코(Steve Biko, 1946-1977, 30세로 고문사)는 말합니다. “우리는 결코 백인들의 말처럼 ‘열등한 인간’이 아니다. 서양인과 팽팽하게 맞서 싸운 줄루인(Zulu)의 영웅 샤카(Shaka)6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프리카에는 상호관계성을 통해 인간이 되어간다고 하는 우분투 사상이 있다. 이것은 실은 기독교에 상통하고 있다. 이것을 축으로 한 연대투쟁이 필요하다.”

남아프리카의 흑인은 80%가 기독교인입니다. 스티브 비코는 1970년대에 토착문화의 현대화를 축으로 하여 해방운동과 기독교를 결부시켜 흑인들을 단결시켰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흑인의식운동’입니다. 그 기본사상은 백인 배제가 아닙니다. 먼저 흑인이 자립하고 주체화하자는 것입니다. 흑인을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무시한 백인의 지도하에서 연대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니까 백인과 대등하고 평등하게 연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상이 발전해서 80년대에는 ‘전인종(全人種) 평등주의’의 운동이념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백인도 흑인도 컬러드(혼혈인)도 가리지 않는 종교인·사회주의자·노동조합의 연대에 의한 무혈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김태창 : 제가 남아프리카에 갔던 1990년대에는 백인만이 분리해서 사는 스텔렌보슈(Stellenbosch)에 스텔렌보슈대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레토리아(Pretoria)에 있는 흑인 대학에서는 흑인 엘리트가 양성되고 있었습니다. 지금 기타지마 선생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한 지붕 아래에 살면서 “너는 네 생각대로 해라. 나는 내 생각대로 한다”는 식의 공생사회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에 있는 케이프타운대학에 가보니까 중국인도 인도인도 백인이나 흑인도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 그랬군요.




김태창 : 2000년에 들어서면서 만델라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이 매개해줘서 제가 추진하던 교토포럼을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에서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국제회의의 주제는 “아프리카의 미래를 함께 연다”는 것으로 정하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도 참석한다는 약속도 받아냈습니다. 장래세대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고, 거기서 모든 인종이 공복(共福)의 세계를 실현한다는 주지의 가사를 제가 쓰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곡가가 작곡해서 대학의 합창단이 그것을 부른다는 합의도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정치적 불상사 때문에 만델라 대통령이 퇴진하는 바람에 그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남아공의 국민과 만델라 대통령, 현재세대와 장래세대가 함께 열기를 바랐던 미래는 ‘무지개’(Rainbow) 공동체였습니다. 서로 다른 종족들이 함께 사는 공생사회(共生社會; symbiotic society)이기보다는 서로 개성을 존중하면서 함께 살고 살리는 가운데서 서로가 행복해지는 상생사회(相生社會; convivial community)를 지향한다는 강력한 소망과 소신이 있었습니다.




야먀모토 교시 : 김태창 선생님도 아프리카와는 그전부터 깊은 인연이 있으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무언가 인상에 남는 일은 있으신지요?




김태창 : 예. 1980년대 초기의 일이니까 기억이 희미해졌지만 저도 한국정부와 UNDP(유엔개발사업)의 지원을 받아서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근교에서 농촌개발을 위한 국제봉사활동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은 다언어(多言語) 상황에서 의사소통의 어려움=불통(不通) 문제였습니다. 아프리카 각지에서 모인 여러 종족들 앞에서 영어로 이야기를 하고, 그것이 즉석에서 여덟 개의 언어로 통역되었는데 과연 이렇게 해서 상호이해가 가능한지 의심스럽고 아주 불편하고 이상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우물을 파게 되었는데, 저는 우물을 잘 팔 수 있도록 “모두 함께 기도를 올립시다”라고 제안했습니다. 예배라는 딱딱한 형식은 취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루에 세 번, 모두가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신에게 기도를 올리면 어떨까라고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분이 손을 들고 “왜 하루에 세 번 신 앞에서 꼬리를 흔들어야 됩니까?”라는 뜻밖의 질문을 하였습니다.

통역에 의하면 그 부족에는 ‘기도’에 해당되는 어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키우는 동물이 인간에게 아양 떨 때 꼬리를 흔드는 비유를 들어서 ‘신에게 기도하다’라는 뜻을 표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다언어 소통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마을 근처에 우물이 없어서 여성들이 매일 몇 킬로나 걸어서 물을 뜨러 가서, 물병을 머리에 이고서 나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질학자가 아니지만, 그래서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간절한 소원이 있었는데 “왠지 이곳을 파면 물이 나올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20미터 정도 파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기적처럼 물이 나왔습니다. 모두가 감동했습니다.

그때 어느 아프리카 사람이 저에게 “선생님은 어느 우주에서 오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외계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들이 살고 있는 우주와 제 우주가 다르다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일본 신화에 하늘에서 강림한 신이 야마토정권(大和政權)을 만들었다는 천손족(天孫族)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저를 자기들과 다른 우주에서 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복수 우주설’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우주는 하나로 우리는 그 우주 안에서 서로 맺어져 있다고 말하지만 기실 우주는 여러 개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기타지마 기신 : 그랬군요. “당신은 어느 우주에서 왔습니까?”라는 말은 매우 아프리카적인 표현인 것 같습니다. 제 친구가 아프리카를 위해서 여러 가지 도와주었는데 고맙다고 말하지 않으니까, 그 친구가 “적어도 감사하다는 말만큼은 해 주시면 어떤가요?” 라고 조심조심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상대방 노인이 빙긋 웃으면서 “당신은 젊군요. 그렇다면 당신이 해준 일은 어떤 보답을 받기 위해 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당신이 해준 일은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떤 보답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백년 후, 천년 후에는 보답을 받게 될 것이오. 그게 세상 이치니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시오”라고 타일러 깨우쳐 주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아무래도 자기 안의 사고의 테두리에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투투 씨는 “하느님은 크리스챤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김태창 : 신이 크리스챤이라면 크리스챤이 아닌 사람들의 신이 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원인이 되어 종교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지 않습니까? 일부 사람들이 신을 독점하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요? 




기타지마 기신 : 맞는 말씀입니다. 정토진종의 승려인 저는 타종교의 사람들, 나아가서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과도 사귀고 교류해야만 풍요로워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다종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기본 정신이자 공(空)·연기(緣起) 사상입니다. 제가 어딘가에 머물러 버리면 독선주의가 될 뿐이니까요.




야먀모토 교시 : ‘독선주의’라고 하면 현실의 종교 신자들이 갖는 일종의 선민의식에 대해 싫증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종파가 최고의 가르침이다”라는 고정관념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공(空)’이라는 자기가 앉아 있는 대지에 뿌리를 내려 버리고 자기와 자기 주변의 나무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공의 대지화(大地化)’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방금 말씀하신 ‘공의 공화(空化)’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 여기는 순간 ‘오만’이라는 악마(魔)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깨달음(불법)과 오만(마성) 사이의 거리는 근소하면서도 무한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란이 ‘지옥일정(地獄一定)’이라고 말했듯이 아주 심각한 자기응시·자기비판·자기부정·자기반성이 모든 종교 신자들에게 늘 요구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종교나 국수주의에게 혼이 영토화 되어 버리면 간단하게는 혼이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도쿄의 지하철 독가스 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 신자가 악몽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피부 색깔(백색·흑색·황색)이나 민족에 의한 차별은 불화와 폭력의 원인이 됩니다. (다음 호에 계속)




주석

1. 원저의 제목은 Charles Villa-Vicencio, Spirit of freedom : South African leaders on religion and politic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이고, 일본어 번역서의 제목은 [南アフリカの指導者、宗教と政治を語る―自由の精神、希望をひらく](東京: 本の泉社, 2012)이다.

2. 다나베 하지메(田邊元, 1885-1962)는 일본의 철학자로,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와 더불어 교토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니시다의 제자였으나 뒤에 스승을 비판하고 ‘절대변증법’과 ‘종(種)의 입장’을 주장했다.

3. 응구기 와 씨옹오의 저작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응구기 와 씨옹오 저, 이석호 역, [정신의 탈식민지화], 아프리카, 2013. 원제는 Ngugi wa Thiong’o, Decolonising the mind: the politics of language in African literature, James Currey, 1986이다.

4. 도겐(道元, 1200-1253)은 일본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초기의 선승으로, 이른바 ‘가마쿠라 신불교’ 조사(祖師)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창시자이다. 조동종은 ‘수증일여(修證一如)’에 입각하여 ‘지관타좌(只管打坐)’를 강조한다. 즉 오로지 좌선에만 집중하는 묵조선(黙照禪)을 강조하는 것이 조동종의 특징이다.

5. 신란(親鸞, 1173-1263)은 일본 가마쿠라 전기~중기의 승려로, 이른바 ‘가마쿠라 신불교’ 조사(祖師)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창시자이다. 전수염불(專修念佛), 정토신앙을 강조한 정토종(淨土宗)의 창시자인 호넨(法然)을 스승으로 섬겼다. 뒤에 신란은 아미타불의 절대적인 원력(願力)에 매달려 구원

받는 절대타력의 신앙을 강조했다.

6. 샤카(Shaka, 1787-1816)는 줄루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본래 약소 부족이었던 줄루족의 왕이었는데 새로운 장비와 전략전술을 고안하고 주변 국가와 부족들을 병합·흡수하면서 남부 아프리카에 커다란 줄루왕국을건국했다.





한일 학자간 영성개신 철학대화(1,2) 김태창, 야마모토 쿄시, 카마다 토지 |2018

한일 학자간 영성개신 철학대화(1) 김태창 | 동아포럼·카마다 토지 | 교토대학

정리 : 조성환

by소걸음Jan 24. 2018

개벽신문 제67호, 2017.9


[편집자주] 이 글은 동양포럼의 김태창 선생과 교토대학의 카마다 토지 교수가 2015년에 ‘영성’을 주제로 나눈 대화로, [미래공창신문] 영성특집호(제24호. 2015년 6월)에 실린 글을 조성환 박사가 번역하고 각주를 단 것이다. 분량상 2회에 나누어 연재한다.



한일 학자간 영성개신 철학대화(1)
할 수 있었다. 김태창 선생과 야마모토 쿄시 편집장에게 심심한 경의와 감사를 드리고 싶다. 2. 한일 학자간 영성개신 철학대화 : 일본적 영성과 한적 영성의 만남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편집장) : 카마다 토지 선생님의 [강좌...댓글0Jan 24. 2018by소걸음

한일 학자간 영성개신 철학대화(2)

의 개신(開新)을 통해서 신천신지신인(新天新地新人)의 상관연동적 혁신을 실천하는 영도(靈道)·영통(靈通)·영변(靈變...시각에서 보면 ‘분열상태’로 보일지 모르지만, 한적 영성의 측면에서 보면 견고한 일원 통합지배가 아닌 고차기능적인 유연한...댓글0Jan 28. 2018by소걸음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共創) 2018 김태창, 야마모토 쿄시, 후카오 요코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共創)

by소걸음,  Jan 18. 2018

1
정리·번역 | 야규 마코토·박장미 | 개벽신문 제65호(2017.7)

[편집실 주 : 이 글은 2017년 8월 14~16일에 동양포럼 주최로 열린 한·중·일 철학·문학 대화를 위한 사전의 준비작업의 일환으로 그해 3월 1일 오후 일본 오사카의 타카츠키시(高槻市)에 있는 후카오 요코(深尾葉子) 선생의 자택에서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겸 편집인의 사회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과 후카오 선생이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이라는 주제로 나눈 대화 내용을 미래공창신문 재외기자 겸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소 연구원 야규 마코토(柳生眞) 박사가 번역한 것이다.]

  •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겸 편집
  • 김태창 : 동양포럼 주간
  • 후카오 요코(深尾葉子) : 오사카대학 준교수

시간 : 2017년 3월 1일

장소 : 오사카의 타카츠키시(高槻市)

片岡 龍 카타오카 류 | 도호쿠 대학 대학원 문학 연구과

카타오카 류 | 도호쿠 대학 대학원 문학 연구과 ·
教授
片岡 龍
KATAOKA Ryu





교수카타오카 류카타오카 류


사상사란
다리를 잡는 것


사상사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와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과 다른 문화를 살던 사람들과의 시공을 넘은 대화입니다.
또, 문학·역사·철학 등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사이, 나아가 문계와 이계의 울타리도 극복해, 다양한 학문 영역의 기간이 되어, 학문과 사회의 교대에도 적극적인 것이 사상사의 맛입니다.
 정해진 방법은 없습니다. 우선 자신의 간절한 질문을 찾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나의 경우는 동아시아, 특히 한국·조선과 일본 사이, 또 일본 중에서도 오키나와나 동북 등의 변경에 나타난 현대적 과제를 의식하면서 그 지역의 독특한 사상·문화·종교적인 전통 를 검토하려고합니다.
공공이란, 생명이란, 영성이란, 평화란, 그 문제를 자신의 말씀으로, 친밀한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말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현재의 내 과제입니다.
동시에 다른 과제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면서 더욱 더 문제 관심을 넓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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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loring the history of thought is like building a bridge

The history of thought helps cover the gap in time and space between our contemporaries and those who lived in the past, as well as people who belonged to a different culture. Another specific characteristic of the history of thought is that it seeks to link scientific research with society, as it breaks down the barriers between human sciences and humanities such as literature, history, or philosophy, and transcends the gap between humanities and natural sciences, serving as a lynchpin for various disciplines.

There is no template for this research. The first step is to determine the most urgent question for oneself. Personally, I strive to develop a new look on specific ideologies, cultures, and religious traditions of the East Asian countries, especially Japan and North and South Korea. In doing so, I also address issues that emerge between those countries today, as well as problems that characterize the frontier areas of contemporary Japan ― Okinawa and Tohoku.

My current aim is to master the vocabulary that will allow me to talk about the concepts of public sphere, life, spirituality, and peace in my own terms, as well as discuss them with people around me.
On the other hand, I am always willing to listen to issues raised by others, since doing so helps me expand my awareness about different probl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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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 약력
저서·논문 등주요 담당 과목일본사상사개론약력1965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동양 철학을 전공. 한국·숙명여자대학 강사 등을 통해 현재 동북대학 문학연구과 교수. 전문은 일본 사상사 동아시아 비교 사상. 최근에는 동아시아발 공공철학·생명사상에 관심을 깊게 하고 있다.

편저서에 「일본 사상사 핸드북」(신서관, 2008), 
「공공하는 인간 1 이토 닌사이」(도쿄 대학 출판회, 2011), 
「공공하는 인간 2 이시다 우메이와」(도쿄 대학 출판회, 2011) 등 .

학위박사(문학)

연구분야 
  • 일본사상사, 
  • 동아시아 비교사상연구과제유교를 중심으로 한 근세 동아시아 사상사(1995~) 
  • 동아시아로부터의 공공 철학·생명론의 탐구(2009~)
  • 근대 동아시아의 영성론·평화 사상의 재검토(2015~)

연구 키워드유교, 실학, 공공, 생명, 영성, 평화

소속 학회 등일본사상사학회, 중국사회문화학회, 일본유교학회 등연구자 소개 DBhttp://db.tohoku.ac.jp/whois/detail/7e380965111118071e55a531baf653fd.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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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藤仁斎―天下公共の道を講究した文人学者 (公共する人間) 単行本 – 2011/1/1
片岡 龍 (編集), 金 泰昌 (編集, 原名)


「道なるものは天下の公共、人心の同じく然るところ」----17世紀の京都、「武」に偏した時代に抗し、一市井人として『論語』と『孟子』というアジアの古典に立ち向かった仁斎。「公共的な対話」の場を重視した仁斎は、人間社会を、そして人や自然の「生命」のつながりをどう見ていたのか。
「길이 되는 것은 천하의 공공, 인심의 똑같은 곳」
----17세기의 교토, 「타케」에 편향한 시대에 저항해, 이치이이인으로서 「논어」와 「맹자」라고 하는 아시아의 고전에 맞서는 인사이. 「공공적인 대화」의 장을 중시한 인사이는, 인간사회를, 그리고 사람이나 자연의 「생명」의 연결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320 페이지 

320 ペー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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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版社からのコメント
「愛」、人口に膾炙したこの言葉を、ひとかけらの諦めや蔑み無しに語る大人は現代の日本にどのくらいいるだろう。朱子学を徹底的に学び、いつしか疑いを抱き、孔孟の原点に立ち返った伊藤仁斎は、日常的な他者との関わりの中に道を見出す。人を赦すこと、人を忖度すること、人を愛すること。それらの言説の背後には、精密な学究と切実な苦悶があった。まずは原点に辿り着き、そして原点から出発する。本書はその困難と意義を問う。【担当編集者】
=== 출판사로부터의 코멘트 「사랑」, 인구에 췌장한 이 말을, 한사람의 포기나 멸치 없이 말하는 어른은 현대의 일본에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주자학을 철저히 배우고 언젠가 의심을 품고 공묘의 원점으로 돌아온 이토 닌사이는 일상적인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길을 발견한다. 사람을 용서하는 것, 사람을 학대하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 언론 뒤에는 정밀한 학구와 절실한 고민이 있었다. 우선은 원점에 도착해, 그리고 원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책은 그 어려움과 의미를 묻습니다.


著者略歴 (「BOOK著者紹介情報」より)
片岡/龍
1965年生れ。東北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准教授。日本思想史、東アジア思想史

金/泰昌
1934年生れ。公共哲学共働研究所長。1990年来日。政治哲学・比較社会思想(本データはこの書籍が刊行された当時に掲載されていたものです)

登録情報
出版社 ‏ : ‎ 東京大学出版会 (2011/1/1)
発売日 ‏ :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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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共する人間2 石田梅岩―公共商道の志を実践した町人教育者 単行本 – 2011/10/14
片岡 龍 (編集), 金 泰昌 (編集)


「士農工商は天下を治めるたすけとなる」――江戸期,都市化・経済化の流動的な波の中で,人々の生のつながりの公共的意義を説いた梅岩.広範な影響を及ぼしたその心学は,人々に希望を与え,世界のすべての存在が共に幸福になることをめざす創造的・運動的な営みであった.

長さ300ページ


商品の説明

出版社からのコメント
自己を利する,自他双方を利する,天下を利する――江戸期,商人蔑視の風潮の中で,「心学の祖」とされる石田梅岩によって,利益追求の新たな可能性が拓かれた.しかしその道は険しい.「我」の心と「天」の心を重ねることは,本当に可能なのか.そして,その道を庶民にも広げることはできるのか.彼が見出した方途は,学を実践し,それを庶民に開くことだった.「倹約」と「正直」,聞き慣れたはずの言葉は,新たな響きを帯びる.【担当編集者】

자기를 승리, 자타 쌍방을 승리, 천하를 승리한다. 열렸다. 그러나 그 길은 험하다. 「나」의 마음과 「하늘」의 마음을 거듭하는 것은,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그 길을 서민에게도 펼칠 수 있는가. 그가 발견한 방도는 학을 실천하고 그것을 서민에게 여는 것이었다. '계약'과 '솔직', 익숙해져야 할 말은 새로운 울림을 띤다. 



内容(「BOOK」データベースより)
「士農工商は天下を治めるたすけとなる」―江戸期、都市化・経済化の流動的な波の中で、人々の生のつながりの公共的意義を説いた梅岩。広範な影響を及ぼしたその心学は、人々に希望を与え、世界のすべての存在が共に幸福になることをめざす創造的・運動的な営みであった。
「사농공상은 천하를 다스리는 죽음이 된다」―에도기, 도시화·경제화의 유동적인 물결 속에서, 사람들의 삶의 연결의 공공적 의의 를 설득한 매화 바위.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그 심학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세계의 모든 존재가 함께 행복해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창조적·운동적인 행위였다.

著者について
片岡 龍:東北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准教授
著者略歴 (「BOOK著者紹介情報」より)
片岡/龍
1965年生れ。東北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准教授。専門は日本思想史、東アジア思想史

金/泰昌
1934年生れ。公共哲学共働研究所長。1990年来日。専門は政治哲学、比較社会思想(本データはこの書籍が刊行された当時に掲載されていた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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登録情報
出版社 ‏ : ‎ 東京大学出版会 (2011/10/14)
発売日 ‏ : ‎ 201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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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文

  85

MISC

  67

書籍等出版物

  16

講演・口頭発表等

  50

その他

  17

종이

  85

기타

  67

도서 및 기타 출판물

  16

강연·구두 발표 등

  50

기타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