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30

함석헌 사상의 내용과 성격(박재순)

함석헌 사상의 내용과 성격(박재순)
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 사상의 내용과 성격(박재순)마리산인
2006. 12. 18. 14:26댓글수0공감수0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
http://www.ssialsori.net/data/ssial_main.htm

씨알사상연구회 월례발표회(2004년 9월)
<씨알의 소리> 2004년 11,12월
------------

함석헌 사상의 내용과 성격
박 재 순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


함석헌은 20세기가 시작되는 해에 태어나서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다가 일찍이 기독교 신앙과 근대적 교육을 하는 소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평양고보 3학년 때 3.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민족과 민중의 하나 되는 감격을 경험한 후 오산학교에서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을 배웠다.1) 40세까지 서구적인 학문과 문화, 기독교 신앙에 심취했다. 유영모의 영향으로 그리고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불경을 비롯한 동양경전에 깊이 몰두하면서 기독교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었다.2)

함석헌은 남강 이승훈의 독립정신과 민족애를 물려받고, 우찌무라 간죠의 무교회신앙에서 순수하고 자립적인 깊은 신앙을 배웠으며, 유영모로부터 동양·한국적인 정신과 기독교사상을 결합하는 깊은 정신과 사상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함석헌은 치열한 삶과 투쟁 속에서 인간과 역사, 신앙과 우주에 대한 독창적이고 활달한 사상을 형성했다.




1. 함석헌 사상의 핵심




독재와 폭력에 맞서 싸우면서 함석헌이 닦아낸 사상의 핵심은󰡐스스로 함󰡑이다. 그는 특권을 누리지 않는 보통 사람을 씨로 표현했다. 그의 사상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씨사상은 풀뿌리 민주 철학이다. 씨은 나라와 역사의 주체이다. 씨 하나 속에 수억 년의 과거가 담겨 있고, 앞으로 펼쳐질 수억 년의 미래가 들어 있듯이, 한 인간 속에는 과거 역사와 미래 역사가 담겨 있다. “너는 씨이다. 너는 앞선 영원의 총결산이요, 뒤에 올 영원의 맨 꼭지다․․․지나 간 5천년 역사가 네 속에 있다.”3)




씨 속에 하늘의 생명기운이 맺혀 있듯이, 역사와 사회의 밑바닥에서 수천 년 동안 온갖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민족의 삶을 지탱해온 민중 속에는 큰 힘과 지혜가 숨어 있다. 함석헌은 “민중의 본바탕을 밝혀내기만 하면 큰 기적을 행할 수 있다.”4)고 했다. 모든 정치가와 종교지도자는 민중을 가르치기 전에 민중에게 겸허히 배워야 한다. 민중과 유리된 정치는 반드시 타락하고 민중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둘째, 생명 평화의 철학이다. 씨의 생명활동은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이 함께 어우러져 벌이는 생명의 춤이고 잔치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울리고 서로 느끼는 생명 축제이다. 한 알의 씨처럼 한 인간이 역사와 사회의 바닥에 서서 자신을 비우면 진리와 사랑,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늘나라의 생명잔치가 시작된다. 씨(民)의 삶 속에서 자연생명과 역사와 신앙이 서로 어우러지고 서로 통한다. 생명의 자발성과 사랑에 근거하여 비폭력 평화의 사상을 제시하고 실천했다.




셋째, 믿음(종교)과 생각(과학)이 통일된 철학이다. 함석헌은 1950년대 후반부터 줄기차게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한다.”라고 외쳤다. 생각은 󰡐스스로 하는󰡑 마음의 일차적 기능이다. 생각에는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靈感)이 있다. 생각하면 생각(영감)이 난다. 󰡐하는 생각󰡑으로 󰡐나는 생각󰡑을 얻고, 󰡐나는 생각󰡑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5) 생각은 믿음(영감)에 이르고 믿음은 생각을 깊게 한다. 신앙과 과학이 충돌하거나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이 발달하면 신앙은 과학 위에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야 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앙의 세계가 요청된다. 현대문명의 근본 문제는 신화를 잃어버리고 하느님을 떠난 데서 생겨났다.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스스로 하는󰡑자율성의 영역이 급속히 확대된다. 유전자 조작과 생명 복제와 같은 문제는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판단이 요구된다. 주체적이고 성숙한 책임성은 깊은 믿음과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함으로써 운명적인 삶에서 󰡐스스로 하는󰡑주체적인 삶으로 바뀐다.







넷째, 동서문명의 종합을 추구한 통일 철학이다. 함석헌은 서구문화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에 태어나 개인의 인격과 영혼을 쇄신하는 기독교 복음과 신앙에 깊이 들어갔고 서구의 현대학문으로부터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정신을 익혔다. 그의 삶과 사상 속에서 지구화가 이루어지고 동서문명과 정신의 융합 및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의 삶과 사상 속에 서구의 기독교 신앙과 비판 정신이 배어 있으며, 그 속에서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정신과 문화가 살아났다. “우리 역사, 우리 문화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사회의 문화가 󰡐한󰡑(크고 하나임)에서 나왔고 󰡐한󰡑을 목표로 하고 나아간다.”6)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인 󰡐한󰡑을 세계통일의 근거와 목표로 제시했다.




함석헌의 사상은 씨(民)을 역사와 사회의 주체로 놓고 씨을 하늘처럼 섬기는 풀뿌리 민주 철학, 모든 문제와 일의 중심에서 󰡐나󰡑를 문제 삼는 주체 철학, 겨레의 얼과 혼을 추구한 민족 철학, 한국․동양의 정신문화와 서양의 정신문화를 융합하려는 세계 철학이다.7) 그의 사상은 생각(과학)과 믿음(종교), 몸(육체)과 영혼(정신), 삶(실천)과 이론(학문), 남한(자본주의)과 북한(공산주의)의 통일을 추구하고 국가와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 세계정부를 꿈꾸는 통일 철학, 기독교에 바탕을 두면서도 기독교 울타리를 넘어서 유교․불교․도교․힌두교에 두루 통하는 보편적인 진리의 자유로운 세계를 열었던 종교다원주의 철학이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명예교수인 유동식 박사는 <대표적 한국인>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원효와 율곡과 함석헌을 꼽았다. 이 세 사람은 각기 불교, 유교, 기독교에 뿌리를 두면서도 자기 종교의 울타리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면서도 󰡐큰 하나됨󰡑(한)을 추구한 종합적인 사상가들이고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천하고 행동한 사상가들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동식은 세 사람 가운데서도 동서문명이 만나는 세계적인 지평에서 창조적이고 종합적인 사상을 펼쳤다는 점에서 함석헌이 가장 위대하다고 보았다.







2. 시대적 성격과 내용적 독창성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은 매우 역동적이고 종합적이며, 날카롭고 깊다. 그의 이런 사상은 다석 유영모의 깊은 사유와 체험적 깨달음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독창성과 심오함은 역사와 민중에 충실했던 자신의 치열한 삶과 경험에서 그리고 삶과 역사의 한 가운데서 초월과 절대(하나님)를 만나는 깊은 체험과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1) 시대의 성격과 동서정신의 창조적 융합




지난 500년의 역사는 서세동점의 역사이면서 동서문명이 충돌하고 결합되는 세계화의 과정이었다. 동서문명이 충돌하고 결합되는 세계사의 과정에서 두 문명이 가장 깊고 창조적으로 만난 자리가 한국 근현대의 역사와 사회였다고 생각한다. 서구문명의 진출과 침략, 팽창과 확대로 이루어진 동서문명의 만남과 충돌의 자리는 동양과 제3세계였다. 미국과 유럽의 서구에서는 동서의 만남이 진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럽인과 미국인은 동양정신과 문화를 존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진지하게 경험하지 못 했다. 이슬람 문명권은 서구문명과 배타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사회적 근대화가 충실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전통문화와 서구근대문화의 결합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도에서 기독교는 여전히 주변적인 종교이며 엄격한 신분제도에 매인 전통사회와 종교문화가 온존하고 있다. 남미 그리고 필리핀에서는 전통문화가 압살되고 정복자의 문화가 지배했다.



동양과 서양의 정신적 만남과 융합은 동북아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서구문화의 도전과 충격으로 동양정신과 문화가 깨어났고 사회적 근대화와 혁신적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과 일본과 한국은 사회경제적 근대화와 민주화를 달성했으면서 동양적 전통과 정신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공산화되면서 전통문화는 억압되고 서구정신(기독교)문화는 배제되었다.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에 의해 천황제와 전통종교 신도를 바탕으로 서구기술문화와 결합하여 군사제국주의로 치달음으로써 일본민족과 서구정신문화의 깊은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조선왕조가 붕괴되면서 민중이 민족사의 전면에 나섰고, 한국민족(민중)과 서구정신문화의 깊은 만남이 창조적으로 활달하게 이루어졌다. 한국정신과 기독교의 깊은 만남이 이루어졌고, 기독교 정신과 서구 근대정신의 도전과 충격으로 민족정신이 깨어나고 민중의 각성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동서정신문화가 가장 창조적으로 만났고 융합되었다. 기독교 신앙과 근대민주정신의 수용으로 한국근현대사는 동학혁명과 3.1운동, 4.19혁명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함석헌(1901-1989)은 개신교와 서구근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던 시기에 살았던 사상가였다. 한국의 근현대사 자체가 한국적 동양적 정신문화와 서구 기독교 정신 및 서구 근대문화의 창조적 만남과 융합의 과정이다. 동학, 증산교와 한국기독교, 3.1독립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자체가 동서정신문화의 종합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인물들,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이용도, 안병무, 문익환 등은 동서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창조적 인물들이다. 한국근현대사는 서구문명과 동양문명의 공존과 상생의 가능성, 융합(fusion)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함석헌은 한국의 근현대사의 중심에서 민중의 자리에서 동서정신문화의 깊은 만남과 창조적 융합을 경험하고 그것을 창조적 사상으로 형성하고 삶으로 피어낸 이다. 그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동서정신문화를 종합한 민주사상을 폈다. 그는 기독교신앙정신을 등뼈로 해서 이성적인 과학정신과 민주정신을 바탕으로 동양정신과 한국정신문화, 유교, 불교, 도교의 정신세계와 두루 통하는, 물질과 정신, 자연과 역사, 신앙과 이성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사상을 펼쳤다.




2) 함석헌 사상의 독창성




1930년대 근대 인류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비관적일 때, 파씨즘적 전체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전쟁, 세계대전과 집단학살이 준비되고 대공황이 일어났을 때,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에 달했을 때인 1933년부터 조선역사를 썼다.



그는 고난의 민족사를 십자가 고난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민족을 하나의 인격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민족에게 적용시키고 고난 받은 한민족이 세계평화와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아적 구실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세상의 죄 짐을 진 어린양, 세상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양으로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함으로써 인류의 죄를 씻고 화해와 구원을 가져오듯이, 고난 받는 한민족이 고난의 짐을 짐으로써 세상을 화해와 평화의 세계로 이끈다고 보았다.



믿음의 주체(나, 민중, 민족)와 대상(그리스도, 하나님)을 일치시키며, 오늘 ‘나’, 또는 ‘민족’이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구원을 스스로 성취한다는 주장은 오늘의 삶을 강조하는 주체적이고 일원론적인 동양적·한국적 사고를 반영할 뿐 아니라 씨·민중을 민족 또는 그리스도(하나님)와 일치시키는 민중적 사고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고난받는 사람을 통해 치유되고 죄의 속량이 이루어지고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고난의 종의 노래’(이사야 53장)와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 대한 성경의 해석을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삶에 직접 적용한 것이며 성경의 역사적 진리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밝혀진 성경의 진리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이다. 인간의 고통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는 온전히 드러나며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나’와 ‘너’의 경계와 벽, 적대와 갈등의 깊은 골을 넘어 ‘하나’로 되어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에 이를 수 있다. 함석헌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체의 자리에서 보는 것이며 “너를 나로 본 것”이다. 전체의 자리에서 본다는 것은 ‘타자’ 속에서 ‘나’를 보는 것이다. 예수는 전체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역사상에 일인칭을 똑바로 쓴 사람은 예수밖에 없다”고 했다.8) 이처럼 전체의 자리에서 ‘나’와 ‘너’를 볼 때 비로소 화해와 평화의 길을 여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함석헌은 제3세계의 식민지적 고난을 패배주의나 전투적 투쟁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고난을 승화시켜 고난 받는 민중과 민족을 생명과 평화를 실현하는 주체로 제시했다. 함석헌의 민족사 이해는 1960년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기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보편사적 이해를 추구했으나 십자가 고난의 관점에서 민족사를 본 것은 변화가 없다.



민족사에 대한 그의 해석에는 민중적 관점, 민족적 관점, 세계적 관점이 결합되었고, 기독교의 신앙과 동양의 영성이 결합되었다. 그는 풀뿌리 민주주의자이면서 겨레 얼을 추구한 민족주의자이고 세계평화를 추구한 세계주의자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민족사에 적용함으로써 이미 함석헌은 민족과 성서, 민중과 예수를 긴밀히 결합시켰고 오늘 우리의 주체적 삶과 책임적 실천을 강조했다. 이로써 함석헌의 민족 주체적 신앙과 사상의 틀과 방향은 정해졌다. 그의 신앙과 삶은 역사와 사회에 책임지고 행동하는 신앙이었다. 그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데 머물지 않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삶을 살려고 했다.



기독교의 십자가 신앙을 민족사에 적용하여 일관성 있게 해석한 것 자체가 기독교 역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새롭고 독창적이다. 또한 함석헌이 실존, 민족, 민중, 세계평화를 아우르는 깊고 열린 사관(史觀)을 제시한 것도 독창적이다. 동양, 한국적 정신과 기독교 정신, 개인과 전체, 영적 깊이와 과학적 이성, 헌신적 신앙과 주체적 책임성을 역동적으로 결합한 것은 그의 사상의 크기와 창조성을 드러낸다.




3. 기본 사상의 내용




1) 정신적 우주관;




함석헌은 상대성원리에 따라 시간과 공간을 4차원적으로 이해하며, 현대 원자물리학에 따라서 물질을 과정과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는 물질을 “입자와 파동의 생성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우주, 세계는 생성하는 과정과 사건이다. 물질은 운동의 굳어진 것이고, 시간은 정신이 폭발하고 나가는 뒷 파동이다.”9) 그는 또한 고생물학자이며 카톨릭신학자인 샤르댕을 따라서 “뜻, 생각, 정신에서 물질도 나왔다.”고 본다.

함석헌에 따르면 우주 물질의 힘은 믿음, 뜻에서 나오며 통전하는 힘이다. 생명, 물질, 하나님, 인간, 역사는 스스로 함의 원리를 따른다. 스스로 함의 주체는 정신과 의식이다. 물질은 운동의 굳어진 것이며, 시간은 정신의 폭발한 결과이다.



물질, 힘, 시간의 근원을 정신으로 보았고 정신을 자유로운 주체, “스스로 하는 나”로 보았다. 스스로 함, 나, 주체, 정신은 모순의 통일이며 까닭 없음이다. “물질에 까닭 있지 정신, 생명에는 까닭 없다. 그 자신이 까닭이다. 정신, 신은 까닭 없이 있는 이다. 인격의 본질, 생명의 근본은 스스로 하는 자기초월이며 까닭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10)



함석헌의 이런 주장은 관념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서처럼 물질과 정신, 현실과 관념을 이원론적으로 갈라놓고 물질과 현실을 정신화, 관념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물질과 정신, 현실과 관념(생각, 뜻)을 통전적으로 본다. 다만 정신과 뜻에 비추어, 정신과 뜻을 통해서 물질과 현실을 본다. 정신과 뜻은 물질의 주체이며 의미이다. 함석헌에게는 물질과 정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몸과 마음에는 떼지 못하는 관계가 있다. 인격은 몸·마음이 하나된 것이다...우주가 무한하다 하여도 그 중심은 나요, 만물이 수없이 버려져 있다 하여도 그것을 알고 쓰는 것은 나다. 내가 스스로 내 몸의 귀함을 알아야 한다. 욕심의 하자는 대로 끌려 내 몸을 허투루 다루는 것은 내 몸을 천대함이다. 중심이 되고 주인이 되는 이 몸, 이 마음을 허투루 하면 우주와 만물은 차례와 뜻을 잃고 어지러워지고 맞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조심이란 몸 공경이다.”11)



함석헌은 정신을 전체, 하나님으로 본다. 그는 하나님, 전체, 아가페의 관점에서 우주와 역사, 생명을 보았다.12) 하나님을 부르면 ‘나’와 우주가 하나로 통전된다. 믿음은 전체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인간의 본 바탈을 창조적 지성, 이성으로 보았다. 생각하는 내 속에 우주가 열린다. 내 속에 열린 우주와 세계가 하나로 되며, 몸과 우주의 일치에 이른다. 하나님, 전체, 우주를 모신 '나', 몸, 맘이 우주의 중심이다. '나'는 코로 우주의 숨을 쉰다. “내가 하나님의 콧구멍이요, 우주의 숨통이다.”13)







2) 주체사상




함석헌사상의 중심은 나를 찾고 세우는데 있다. “ ‘나’-주체성 상실이 모든 고난과 간난의 근본원인이고 죄이다. ‘나’를 잃은 죄가 역사와 인생의 고난을 가져왔다.”14) 생명과 정신의 근본원리가 󰡐스스로 함󰡑인데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남의 생각과 힘에 눌려 살면 생명과 정신은 파괴되고 쇠퇴한다. 스스로 힘 있게 살려면 나를 찾아야 하고, 나를 찾으려면 나를 깊이 파야 한다. 나를 깊이 파는 길은 생각하는 길밖에 없다. 생각함으로써 나를 찾고 세운다. 살림의 뿌리는 생각함에 있다. 살림의 주체는 나이고 나를 찾고 세우는 일은 생각에 있다. 그는 명상이나 감흥, 감정보다 생각함을 철학과 종교의 근본행위로 보았다.15)




스스로 함의 주체로서 “나”는 개체이면서 전체이다. “나”는 자기부정과 죽임에서 참된 나, 전체로서의 나로 드러난다. 함석헌의 나의 주체성은 무한한 깊이, 초월, 절대, 순수를 지향하며, 구도자적 자유와 평화, 사랑을 추구한 공동체적 개방성을 지닌다. 이처럼 함석헌의 󰡐나󰡑는 타자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다. 함석헌에게서󰡐나󰡑는 초월적 타자와 인격적 관계 속에 있으며, 사회적 타자와의 일치와 상생을 지향한다. 함석헌의 주체성은 타자와 맞서고 타자를 정복하고 희생시키면서 자아의 실현과 확장을 추구한 서구의 근대적 주체성과는 다르다.16)




얼과 정신은 주체이고 󰡐나󰡑이다. 󰡐나󰡑는 물질의 주체이며, 스스로 하는 자유로운 인격이다. 물질과 현상에는 원인, 까닭, 인과관계가 있으나 정신에는 까닭이 없다. 저 자신이 까닭이다.17) 인간은 물질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다. 물질과 자연 현상은 인과관계의 사슬과 법칙에 매여 있으나 마음, 정신, 신은 원인, 까닭 없이 스스로 자유롭게 있다. 마음과 정신은 까닭을 밖에 갖지 않고 자기 안에 갖는다. 제가 삶의 이유이고 동인이다. 제가 곧 까닭이다.. 그러므로 자유다. 결정론은 없다. 전통과 권위도 없다. 모든 우상은 부서진다.




스스로 하는 존재가 되려면 스스로 하는 힘과 의지, 스스로 하는 삶의 궁극적 근거와 동인, 신적 씨앗, 불빛, 인(仁)이 있어야 한다. 제 안에 스스로 함의 근거가 있다. 스스로 함의 원리와 근거가 고장 난 것이 죄다.18) 죄는 전체, 신과 하나인 '저'에 대한 불신앙이다. 죄는 스스로 함의 부정이며 불가능이다. 스스로 함은 '저'와 신이 하나임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 스스로 함은 신, 우주와의 합일, 일치이다. 전체의 자리에 섬이다. 나를 버리고 나에게서 자유로워져서 참 나, 전체의 나, 신과 하나로 된 나에 이를 때 비로소 중단 없는 스스로 함의 삶이 나온다.



예수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했는데, 함석헌에 따르면, “사람을 낚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낚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를 낚는 것이다.19) 나의 본성, 어짐, 혼을 낚는 것이 내가 사람 되는 것이며, 나를 일깨우고 붙잡음이 나를 사람으로 세움이고 스스로 하게 함이다. 사람이 되어 스스로 일어섬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스스로 일어나야 하며, 내가 나를 붙잡아 일으켜야 한다. 나를 붙잡는 것, 내 삶의 본성을 살리는 것이 기도이고 예배이며 믿음이고 명상이다.



스스로 함은 자유의 원리, 신앙의 원리, 사랑의 원리이다. 이것은 저항의 원리, 비폭력 평화의 원리이다. 이것이 반국가주의와 세계평화주의의 원리이며 기초이다.




(1) 얼 힘을 기름




함석헌은 인간을 인격, 정신, 얼로 보았다. 얼은 개성적이고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인생과 역사와 문화와 교육과 종교의 목적은 얼 힘을 기르는데 있다. 지식과 기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직접 주고, 받을 수 없고 얼과 정신을 통해서만 깨달음과 이해를 통해서만 전해진다.20) 얼 힘 없으면 인생과 문명은 무너진다.



󰡐스스로 하는 나󰡑는 통일성을 지닌 존재이다. 분열, 갈등, 혼란, 분규, 얼크러짐에서는 힘찬 스스로 함의 삶이 나올 수 없다. 얼은 생명의 꼭대기 한 점이다. “교육의 목표는 위대한 얼의 사람을 길러낸다는 한 점에 집중되어야 한다.”21) 원기는 회개, 자기부정을 통해서 전체생명에로 돌아갈 때 나온다. 원기, 생명력, 생기에 가득 찰 때 자유롭고 힘 있는 행위가 나온다. 회개는 하나님, 전체 생명이 하나 되는 자리로 돌아감이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자리에 설 때 스스로 하는 얼 힘이 솟는다.22)




(2) 유기체적 전체 생명; 진화의 절정이며 우주의 중심




우주 자연의 물질과 생명 세계에서 인간이 가장 존귀하고 위대하다. 인간을 대자연 생명세계의 일부로 보면서도 새로운 영적 존재로 상승하고 비약할 존재로 보았다. 인간이 생명진화의 절정과 목적이라고 보면서도 인간의 얼을 유기체적 전체 생명의 자리에서 보았다. 얼은 개체를 지탱하는 정신이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정신이다. “오늘 내가 있고 내 머리에 생각이 솟는 것은 전에 억만 생명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요, 억만 마음이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 몸은 무한 바다의 한 물결이다. 내가 일어선 것은 내가 일어선 것이 아니요, 이 바다가 일으켜 세운 것이다.”23) 내 몸과 마음은 생명진화의 오랜 역사를 지닌 것이다.

인간의 몸과 정신이 우주의 중심이다.24)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하나님과 닿아있으며 통해 있다. “이 나는 작고 형편없는듯하지만 저 영원 무한에서 잘라낸 한 토막 실오라기이다.”25) 함석헌은 인간의 깊은 죄를 말하고 피조물로서 작고 유한한 존재임을 강조하지만 인간을 신과 일치된 존재, 신과 통하는 존재로 본다. 내가 우주의 주인이고 왕이다. 모든 것은 인간 안에 “나” 안에 있다. 나를 존중하는 데서 생각과 삶이 시작한다. “거울에 비치는 네 얼굴을 보라...그것은 백만년 비바람과 무수한 병균과 전쟁의 칼과 화약을 뚫고 나온 그 얼굴이다.”26)



인간영혼의 정점에서 하나님과 통하는 한 점에서 인간의 얼과 정신에서 하나님과 일치하고 통하면 무한한 얼 힘, 영적 힘이 나온다. (하나님과 일치된) 나를, 기운을 펴야 한다. 하나님과 일치된 나를 펴기만 하면 우주와 역사를 돌릴 수 있는 힘을 얻는다.




(3) 섬기는 삶




우주와 역사의 중심에 인간을 세우면서도 그 중심의 높이와 깊이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보았다. 전체의 자리에 선 나는 하나님과 이웃과 더불어 있는 존재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존재이다. 거룩한 창조자, 무한한 절대자 앞에서 자기를 회개하고 비워야 한다. 스스로 서는 것이 민주의 시작이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이 나라사랑의 기본이다. “나라 사랑하거든 네 옆의 사람부터 존경하라. 네가 만물의 왕이라면 그도 만물의 왕이다. 네 부엌에서 밥을 짓는 식모는 네 식모가 아니요, 영원한 님의 아내다. 너를 섬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이’를 모시러 왔다.”27)



제 할 일을 남에게 시키는 버릇은 계급사회의 못된 습관이다. 섬기는 삶은 제 몸을 제 손으로 섬기는데서 시작된다. “네 몸 대접 네가 해라...제 신발도 닦지 않는 청년이 이 다음 사회봉사, 인류공헌이라니 곧이들리지 않는 말이다...네 몸 거둠 네가 하는 것이 데모크라시의 첫 걸음이요, 하늘나라 준비다.”28)




3) 세계평화사상과 비폭력저항




70년대에 대표적인 진보적인 지식인들(송건호, 박현채, 백락청 등)은 민족주의자였다. 생활방식과 사고는 서구적으로 하면서도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살았던 사람, 민족정기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함석헌은 세계평주의를 내세웠다. 오산학교 학생 시절에 웰즈(H.G. Wells)의 「세계사대계」에서 세계국가주의에 대한 이상을 접하고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리고 일제의 혹독한 식민통치를 겪으면서 함석헌은 한민족의 평화정신과 기독교의 평화주의에 근거하여 함석헌은 50년대 중반 이후 비폭력 평화주의와 세계평화사상을 내세웠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으나 다가오는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세계평화를 열망하고 추구했다. 그는 민족을 사랑했으나 국가는 비판했다. 민족들의 독특한 정신과 문화가 피어나는 세계공동체를 지향했다.



함석헌에 따르면 이제 인류역사는 완성기에 접어들었다. 민족국가들을 넘어서 세계가 하나로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29) 동(복종, 통일, 되풀이 지킴)의 역사와 서(저항, 자유, 진보)의 역사가 만나고 있다.30) 역사는 중도(中道)를 지키고, 한(韓; 큰 하나)을 붙잡고 밝히면서, “비폭력평화주의, 세계국가주의, 우주통일주의”로 가야 한다.31)




그의 평화주의는 한국인의 평화정신과 기독교의 평화주의에 근거한다. 한국인의 심성이 인정 많고 착하다는 점에서 평화적이라고 보았다. 6.25 전쟁 때 피난 가는 기차에서 음식이 부족한 형편인데도 반드시 옆 사람에게 음식을 권하고 함께 먹는 것을 보고 함석헌은 “한국인의 저 착한 마음으로 세계에 크게 공한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인의 종교문화의 맨 꼭지가 신선사상이라면서 자연과 하나 되기를 열망하는 한국인의 정신문화는 평화적이라고 보았다. 한국의 신화도 평화적이고 한국인의 이름에도 평화의 열망이 담겨 있고, 역사적으로도 다른 민족을 침략한 일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평화민족임을 내세운다. 한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을 이루는 “한”사상이 하나(一)와 크다(大)를 함께 나타내는, 크게 하나 됨을 추구하는 평화사상임을 강조했다.32)



그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비폭력 저항정신을 추구했다. 그는 치열하게 저항하고 투쟁했으나 비폭력과 사랑의 포용주의를 추구했다, 원수와 싸우되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기고 짐을 떠나서 싸우라고 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원수는 없다. 그의 평화주의는 전체를 끌어안는 사랑의 포용주의이다. “가룟 유다가 지옥 밑바닥에서 이를 독독 갈고 있는 한 천국은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 가룟 유다와 화해하기 전에는 천국은 완성될 수 없다.”33)



그는 섬김과 살림의 사람이었다. 그는 후배가 “디디고 설 흙”이 되고자 했다. 지배, 권위의식을 철저히 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라 할 수 있는 안병무와 김용준을 형이라 불렀다. 누가 의견이나 조언을 구할 때마다, 자기의견을 강요하지 않고 늘 “글쎄”라고 해서 “글쎄”가 그의 별명이 되었다.




4) 과학적 사상; 생각과 믿음과 행동의 일치




함석헌은 호기심, 탐구심을 평생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 역사적 새로움, 삶의 새로움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영원한 어린이였고, 과학적 탐구심을 지닌 영원한 학생이었다. 80대에도 예쁜 조가비 모으고, 예쁜 그림 오려 붙였고, 늘 새 책을 읽었다. “과학의 시대는 씨의 시대, 씨의 아구를 트이어 눈을 트고 입을 열게 한 것은 참의 과학이었다. 씨은 과학으로 말한다.”34) 감정의 종교는 낮은 것이고, 이성으로 닦여진 신앙이 깊고 높다. 함석헌의 믿음은 생각하는 믿음이다.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의 통전된다. 생각으로 역사의 뜻을 알고 주체, 나가 된다. 생각은 믿음에 이른다.



생각하면 믿음이 깊어지고 자유로운 실천에 이른다. 생각은 물질적 사건적 현상의 깊이를 파헤쳐 없음과 빔의 까닭 없는 자유에 이르고 물질과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부정과 죽음에 이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르고 없음과 빔의 자유에서 자기를 버리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35) 자아도 물질도 없고 하나님만 있으면 단순하게 믿고 자유롭게 행동하게 된다.







5) 역사철학; 씨사상




함석헌은 자신의 역사관과 인생관을 씨사상으로 나타냈다. 씨은 자연과 인간과 초월의 차원을 통전시키는 개념이고 역사의 중심이며 주체이다.




(1) 자연과 역사와 초월적 영성의 통전




역사는 기후 토질 지리 조건, 민족의 특질, 신의 뜻, 의미로 이루어진다. 역사는 나사바퀴, 수레바퀴처럼 발전한다. 역사는 미완성이며, 되풀이하면서 자란다.36) 함석헌은 우주생명진화의 맥락에서 역사를 보았다. 뇌신경과 뇌세포 속에, RNA, DNA 속에 생명진화와 인류사, 민족사가 통조림 되어 있다.37) 생명진화를 거쳐 인류로 진화했듯이, 인류역사의 진화를 거쳐 초정신, 초인류로 진화한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 한, 우주, 전체와 하나 된 인간, 새 인간, 새 종교를 기다렸다.38) 하나님을 찾음이 사람의 바탈이며 역사를 낳는 것은 아가페다. 사랑의 임(하나님)을 찾는 것이 역사이다.39)



씨은 인간과 자연생명의 일치를 뜻한다. 씨은 자연생명의 본질이면서 인간생명의 본성을 나타낸다. 인간과 우주생명은 일치하고 통한다. 또한 씨의 속에는 신적 생명의 씨앗, 본질이 담겨 있다. 씨은 초월적 존재이며 영원한 존재이다. 씨을 떠나서 하나님을 만날 길도 없고 구원받을 길도 없고 진리를 찾을 길도 없다.

씨은 전체(나무)의 하나(일부)이면서 자신 안에 전체를 품고 있다. 씨은 자기를 버리고 깨뜨리고 내맡기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이다. 죽음으로써 사는 생명의 길을 보여준다. 씨은 흙과 물과 바람과 햇빛과 함께 어우러져 생명을 창조하는 상생과 공생의 평화세계를 보여 준다.




(2) 씨; 역사의 주체




씨사상은 민주사상이다. 씨 속에 생명의 본 바탕이 비교적 옹글게 남아있고, 삶의 지혜와 힘이 있으므로, 씨에게 배우고 씨이 앞장 서게 해야 한다. 씨을 가르치려들지 말고, 이끌려고 하지 말라고 함석헌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에게 경고했다. 씨이 혁명의 주인공이 되고, 정치의 주역이 되게 하라고 역설했다. 이미 50년대에 함석헌은 국민이 주체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원리와 지침을 제시했다.40)

민이 역사와 사회의 주인이며, 하나님과 직통하는 존재이다. 역사의 씨인 민 속에 민족정신과 생명이 온전히 담겨 있고 5천년 민족사가 담겨 있다. 더 나아가서 우주 생명진화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41) 현재와 미래의 역사와 생명진화의 운명이 씨의 손에 맡겨져 있다.




6) 대종합의 통일사상




함석헌의 사상은 아주 쉬우면서 매우 어렵다. 그의 생각과 통찰이 삶의 체험에서 우러났고, 일상의 삶, 구체적인 현실, 몸과 영혼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맘으로 함께 느낄 수 있다. 누구나 읽고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정신과 사상은 현실의 상대세계를 뛰어넘어 모든 잡다함과 다양함을 하나로 꿰뚫는 절대, 초월, 궁극의 자리에서, 죽고 다시 사는 깊은 신앙체험의 자리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깊고 높은 깨달음의 미묘함과 역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그의 글은 깊은 감동과 충격을 주면서도 높은 하늘을 보는 듯, 깊은 바다를 보는 듯, 어지럼을 일으키고 너무 높고 깊어서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함석헌은 구체적인 삶의 철학자이면서 모든 것을 하나로 꿰뚫는 대종합의 사상가이다. 그는 몸과 영혼, 물질과 정신을 통전적으로 보았다. 그는 민중의 자리에서 전체의 자리에서 믿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에게는 민중, 민족, 세계평화, 신앙적 실존의 차원이 긴밀히 결합되었다. 그는 누구보다 더 민중주의자였고, 누구보다 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으며, 누구보다 더 개방적인 세계평화주의자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진지하게 신앙적 실존의 진실을 추구하는 철저한 구도자였다. 민중, 민족, 세계평화, 종교적 실존을 추구한 초월적 자유인이고 저항적 행동인이었고 비판적 지성인이었다.

그의 삶과 사상 자체가 대종합을 이루었다. 겨레얼과 기독교신앙, 동양정신과 서양정신, 몸과 정신, 자유와 평등, 물질과 정신, 이성과 신앙, 이론과 실천, 인간과 신, 역사와 자연, 민족과 민족을 크게 하나로 통일하려 했다.




그는 한겨레가 언어와 문화 속에서 정신적으로 닦아낸 “한 사상”이 하나님 앞에 내놓을 업적이라고 했다. “한”은 한님, 하나님과 한겨레를 함께 나타내고, 개체와 전체, 큰 하나 됨을 뜻한다. “한”은 세계화되는 인류의 하나 됨을 지향하는 정신적 바탕이 된다. 함석헌은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에서 우주적 일치와 종합의 근거를 발견한다. 민족의 원형질인 “한 사상”과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대종합의 근거가 되었다.

함석헌의 글과 사상에는 유교의 선비정신, 기독교의 죄의식과 역사적 책임의식, 노장사상의 무위자연, 불교의 없음과 빔, 한국의 한 사상, 서구의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이 녹아있다. 함석헌이 깊은 믿음으로 없음과 비움 속에 자기를 잊고 자기를 버림에서 행동의 자유가 나온다고 할 때, 기독교 신앙과 동양적인 정신이 결합되어 있다.









1) 함석헌의 생애에 대해서는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1”, 함석헌전집4. 201쪽 이하 참조.


2) 함석헌의 신앙이 변화되고 발전된 것에 대해서는 함석헌, “이단자가 되기까지”, 함석헌전집4. 177쪽 이하. 특히 196-197쪽 참조.


3) 함석헌, “씨의 설움”, 함석헌전집4. 76쪽.


4) 함석헌, “새 나라 꿈틀거림”, 함석헌전집2. 294쪽.


5) 함석헌,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 함석헌전집 8. 56쪽 이하.


6) 함석헌, “새 윤리”, 함석헌전집2. 348쪽.


7) 함석헌, “우리 민족의 理想”, 함석헌전집1. 361-3쪽.


8) 함석헌, “인간을 묻는다”(송기득과의 대담), 함석헌전집 4. 344쪽.


9) 함석헌, “레지스땅스”, 함석헌전집2. 187쪽.


10) 함석헌, “인간혁명”, 함석헌전집2. 95쪽.


11) 함석헌, “살림살이”, 함석헌전집2. 313쪽. “새 나라 꿈틀거림”, 같은 책. 262쪽.


12)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 함석헌전집9. 14-5쪽.


13) 함석헌, “살림살이”, 함석헌전집2. 307쪽.


14)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185쪽.


15) 함석헌, “새 시대의 종교”, 함석헌전집3. 213-4쪽.


16) 서구의 대표적인 신과학적 생태주의 사상가 에리히 얀치의 사상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아라”는 자기 개념, 그리고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헤겔의 “자기의식” 철학적 전통에 서 있다. 얀치의 우주는 헤겔에 의해 대표되는 모놀로그의 신령(神靈)이다. 그러나 한국적 사유인 동학사상에서는 한울‘님’과의 대화의 길이 열려 있다. 이준모, 밀알의 노동과 共進化의 敎育. 한국신학연구소, 1994. 274쪽.


17) 함석헌, “인간혁명”, 함석헌전집2. 95-6쪽.


18) 함석헌, “인간혁명”, 함석헌전집2. 96-100쪽.


19) 함석헌, “새 나라 꿈틀거림”, 함석헌전집2. 295-6쪽.


20) 함석헌, “살림살이”, 함석헌전집2. 303쪽.


21) 함석헌, “살림살이”, 함석헌전집2. 306쪽.


22) 같은 글. 310-311쪽.


23) 같은 글. 304쪽.


24) 함석헌, “살림살이”, 전집2. 307쪽.


25) 같은 글. 306쪽.


26) 같은 글. 313쪽.


27) 같은 글. 314쪽.


28) 같은 글. 314쪽.


29)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31쪽.


30) 같은 책. 61-2쪽.


31) 같은 책. 297쪽.


32) 함석헌, “새윤리”, 함석헌전집2. 347-348쪽.


33) 함석헌, “펜들힐의 명상”, 함석헌전집3. 317-8쪽.


34) 함석헌, “씨의 설움”, 씨의 소리. 1970. 4.


35) 함석헌, “열 두 바구니”, 함석헌전집4. 393-4쪽.


36)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56쪽 이하.


37) 함석헌, “씨의 설움”, 함석헌전집4. 76쪽.


38)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전집1. 26쪽.


39) 같은 책. 52-3쪽.


40) 이에 대해서는 박재순 “함석헌의 민주정신”, 씨의 소리. 2003년 3-4월호 참조.


41) 함석헌, “씨의 설움”, 함석헌전집4. 76쪽.


좋아요공감
공유하기
글 요소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오미환 기자 입력: 2007

 


[스크랩]<18>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종교와 사상/우리 시대의 명저 50
2008. 7. 25.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우리 시대의 명저 50] <18> 영광이 아닌 고난의 역사, 그것을 담금질이었다 말하는…
일제 때 월간지에 연재 글 모아 1950년 책으로
고구려 이후 역사를 불행의 박물관' 혹독한 평가
학계 "주관적" 비판 불구 주체적 역사 인식 '호평'







“고난의 역사! 한국 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은 고난이다. 이 땅도 이 사람도 큰 일도 작은 일도 정치도 종교도 예술도 사랑도 무엇도 무엇도 다 고난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고 쓰라린 사실임을 어찌할 수 없다.”

함석헌(1901~1989)의 명저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우리 역사를 그렇게 규정한다. 심지어 동서양 문명의 온갖 찌꺼기와 패악이 한데 모인 ‘세계사의 하수구’라고, ‘삼천리 강산은 불행의 박물관이요, 삼천만의 생명은 죄악의 실험관’이라고 말한다.

이보다 혹독할 수는 없다. 몸 둘 바를 모르게 후려치는 이 가차없는 자기비판은, 그러나 결코 절망이나 패배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한국사만 그런 게 아니고 인류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라고 상기시키면서,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고난에는 뜻이 있다고 말한다. 고난은 인간과 역사를 성숙시키는 시험이며, 그 가운데 스스로를 돌아보고 고난을 극복함으로써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수난의 여왕’ 한국의 역사는 결코 실패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도덕적으로 한층 높이 올릴 세계사적 사명이 있다고, 세계사의 고난을 온 몸으로 받아낸 민족이야말로 가장 높은 도덕으로 인류를 구할 수 있으므로 이 일은 오직 우리만이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함석헌이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반 월간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1950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그 후 1961년 셋째 판을 내면서 <뜻으로 본 한국 역사>로 제목을 바꿨다. 처음에는 기독교적 사관에서 출발했지만, 기독교가 유일한 진리는 아니며 모든 종교는 따지고 보면 하나라는 생각에서 그의 사관이 특정 종교를 넘어 보편적 지평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단순한 한국사 통사가 아니라 역사철학에 방점을 찍고 있다. 책 첫머리를 역사와 사관에 대한 철학에 할애하고 나서 한국 역사를 짚어간다. 내용은 통절하다. 입말이 살아있고 에두르지 않으면서 곡진하고도 우렁차게 사자후를 터뜨리는 함석헌의 글쓰기는 그 충격과 감동의 폭에서 가히 전율적이다.

그가 보기에 우리 역사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다. 고구려가 망한 날, 우리 역사는 좁은 한반도에 갇히면서 비극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를 업은 비루한 외교로 반도의 절반을 얻었다는 점에서 통일이 아니라 잃어버림이라고, 그 과정에서 민족정신이 기울었다고 말한다. 고려는 주체성을 잃은 문화를 되살리고 민족을 새로 통일할 의무를 지녔으나 실패했다고 말한다.

조선 500년은 옛 고구려의 기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주저앉으면서 시작했다며, 민족정신과 국민적 이상이 빠진, 다시 말해 중축이, 등뼈가 부러진 역사라고 말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해방, 분단, 전쟁과 그 후로 이어진 역사에 대해서도 그는 통렬한 자기 반성을 요구한다. 이 모든 불의와 좌절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 해방 후 독재화 되어가는 정치 밑에서 민중이 점점 깨어나고 있음을 그 증거로 든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은 민중임을 분명하게 못박는다.

이 책은 우리말로 쓴 최초의 한국 통사이자 역사 대중화의 효시다. 함석헌 생전에 다섯 번째 판까지 나왔고 이것이 가장 널리 보급됐다. 한길사는 20권으로 완간된 함석헌 전집의 첫 권으로 1983년 이 책을 냈낸 데 이어, 2003년 요즘 젊은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어려운 말을 풀어서 다시 냈다. 한길사의 2003년 판은 지금까지 10쇄를 찍었고, 매년 4,000부 정도 꾸준히 팔리고 있다. 이 책의 힘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새삼 알 수 있다.

두 세대 전 일제강점기에 초고가 씌어졌고, 단행본으로 처음 나온 지도 반세기가 지난 이 책이 이처럼 길고 강한 생명력과 파급력을 지닌 이유는 뭘까. 작고한 역사학자 천관우는 이 책을 두고 “사료의 창고가 아닌 펄펄 뛰는 역사”라고, “함석헌은 분명한 사관을 가지고 한국사를 일관되게 서술한 우리나라 당대의 첫째가는 역사가의 하나”라고 평가한 바 있다. 역사적 사실의 자세한 기록보다 해석의 역사, 뜻의 역사에 중점을 둔 것은 함석헌 자신의 뜻이었다.

책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얼마나 많은 역사가들이 공정한, 객관적인, 과학적인 역사를 쓰려다가 죽은 뼈다귀의 이름만을 적어놓고 말았나! 그것이 역사, 적어도 산 역사를 지어가는 씨알(역사의 주인, 민중을 가리키는 함석헌의 용어)이 살기 위해, 그 역사를 짓는 힘을 얻기 위해 읽고 싶어하는 역사는 아니다.”

사학계는 이 책과 함석헌의 사관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주관적 해석에 치우쳤다고, 종교적 색채가 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자 김상봉(전남대 교수)은 함석헌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뜻으로 본 한국 역사>, 이 한 권이 있어 20세기에 한국철학이 있었다”고 단언한다. 20세기 우리 역사의 불행은 남의 것을 받아들이기만 했지 주체적인 철학이 없었다는 데 있으며, 함석헌의 지성사적 의의는 철저한 자기반성과 주체적인 인식을 철학적 사유의 중심에 놓을 것을 요구했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함석헌은 고난으로 점철된 한국사의 의미를 묻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일제와 싸웠고, 독재와 싸우며 투옥과 석방, 가택 연금의 고난을 거듭했다. 민주화와 인권 운동에 앞장선 사람은 누구나 그의 영향을 받았다.

함석헌은… "역사의 주인은 씨알" 한국사에 큰 족적

한국의 간디, 시대의 양심, 민중의 대변자, 지사적 사상가, 민족혼의 역사가, 겨레의 예언자, 민권 운동가, 민족의 스승, 종교가, 언론인, 싸우는 평화주의자….

우리는 함석헌을 그렇게 부른다. 그는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거인이다. 함석헌을 존경하는 이들은 이 모든 표현을 합쳐서 '민족의 큰 스승'이라고 부른다.


그의 뜻과 자취는 죽지 않았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책에서 지성의 행로를 구하고 있고, 함석헌기념사업회(이사장 이문형)와 씨알사상연구회(회장 박재순)가 그의 뜻을 잇고 있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학술행사와 출판 등을 통해 함석헌과 그의 사상을 기리고 있다. 씨알사상연구회가 매달 하는 연구발표회에는 학자와 일반인 등 20~ 30명이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연구회는 최근 그간의 월례 발표회 논문을 책으로 묶어 <씨알 생명 평화>를 펴냈다. 함석헌이 1970년 창간한 잡지 <씨알의 소리>도 계속 나오고 있다. 현재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이 잡지는 올해 1ㆍ2월 호로 통권 194호를 기록했다. 군부 독재 시절 민중의 자각을 깨우는 불길이 됐던 이 잡지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가 8년 만에 복간됐다.

씨알사상연구회 박재순 회장은 "함석헌은 위대한 사상가인데, 그동안 민주화운동가나 언론인으로만 많이 알려진 감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함석헌 사상은 동서문화의 창조적 융합이며 세계에 내놓을 한국사상"이라며, "우리는 아직도 함석헌 사상의 인문학적 충격과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요즘 인문학의 위기론이 높지만, 진짜 위기는 우리의 삶과 역사가 하나가 된 주체적인 사상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1970년대 등장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한국의 민중신학은 씨알(민중)을 역사의 주인으로 보았던 함석헌 사상에서 뻗어나온 것임을 환기시킨다.

빈민의 의사로 존경 받았던 고 장기려 박사는 "함석헌 사상은 500년 후에야 널리 알려질 것"이라고 했다. 그의 사상이 그만큼 넓고 크고 깊다는 뜻이다. 박재순 회장은 "함석헌 바로 알기는 아직 초보 단계"라며 "선생의 사상을 체계화하고 정리해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함석헌 연보

1901년 평북 용천군 출생

1919년 3ㆍ1운동에 참가했다가 평양고보 중퇴

1921년 오산학교 편입, 이승훈ㆍ유영모 영향을 받음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입학, 역사 전공

1928년 귀국해서 오산학교에서 교편 잡음

1938년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 거부로 오산학교 사임당함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1년간 복역

1945년 신의주 학생사건으로 소련군에 체포ㆍ구금

1947년 월남

1956년 <사상계> 집필 시작

1958년 <사상계>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20일간 구금

1961년 5ㆍ16을 정면 비판한 '5ㆍ16을 어떻게 볼까' 발표

1970년 <씨알의 소리> 창간

1971년 삼선개헌 반대 투쟁

1976년 3ㆍ1 민주구국선언 참가

1977년 3ㆍ1 민주구국선언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받음. 그후 형 집행정지와 1980년 복권

1979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됨. 명동YWCA사건으로 계엄사 합수부에 의해 15일 구속

1985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두 번째 추천됨

1989년 88세로 타계



오미환 기자 mhoh@hk.co.kr

입력시간 : 2007/05/02 19:19:28
수정시간 : 2007/05/02 20:08:39



출처:한국일보 2007.5.2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5/h2007050219183884330.htm

한국형 탄소중립위원회, 허울뿐인 조직 전락 우려 < 기후변화 < 환경뉴스 < 기사본문 - 환경일보

한국형 탄소중립위원회, 허울뿐인 조직 전락 우려 < 기후변화 < 환경뉴스 < 기사본문 - 환경일보


한국형 탄소중립위원회, 허울뿐인 조직 전락 우려

기자명 최용구 기자
입력 2021.04.29 

영국 CCC, 자체적으로 예산 관리할 권한 가진 독립적인 전문가 조직
탄소중립 이루려면 사회 전체 변화 불가피, 책임만 있고 권한은 없어

지난 4월16일 열린 '탄소중립 산업전환 추진위원회' 출범식 당시 /사진출처=산업통상자원부


[환경일보] 최용구 기자 = 탄소중립추진위원회가 곧 출범한다. 관건은 탈탄소를 위해 얼마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가지고 책임과 권한이 있느냐다. 하지만 당장 정부를 제외한 학계와 단체, 국회 차원에선 “실질적인 변화를 담보할 수 없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지난 4월26일 진행된 에너지전환포럼 주최 탄소중립세미나에서 영국 기후변화위원회(CCC) 소속 레베카 히튼(Rebecca Heaton) 박사는 “CCC는 독립성이 보장됐다. 오로지 개인의 역량과 전문성을 기준해 각계에서 구성원을 선출하다 보니 정치적 이득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며 “자체적으로 예산을 관리할 권한을 가진 것도 독립성을 키우는 환경”이라고 밝혔다. 이날 영국의 사정을 물은 국내 전문가들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정부와 상생한 성공사례 CCC

영국은 2008년 세계 최초로 기후변화법을 도입했다. 최근 열린 기후정상회의를 앞두고는 2035년까지 1990년 대비 온실가스를 78% 줄이겠다고 국제사회에 발표했다. 기존 2050년 탄소중립의 실행을 구체화할 중간지표를 제시한 것이다. 이 같은 변화의 중심엔 독립적 기구 CCC가 있다.

이 조직은 매 5년마다 향후 12년 뒤 탄소예산을 설정해 정책 당국을 자문한다. 앞으로 무엇이 어떻게 다가올지, 그에 맞춰 어떤 걸 준비해야 하는지를 정부와 나누면서 감시하고 견제한다. 공감대가 쌓인 일관된 방향의 정책이 설계될 조건을 만들어 주는 셈이다.

선보인 정책이 실제 대중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모니터링할 전문가 조직도 갖췄다.

기후변화는 결국 모든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뀌어야 하는 문제임을 감안한 대응이다.

레베카 히튼 박사는 “시민들이 수용할만한 정책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기에 지속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수집한다”면서 “2035년까지 78% 감축이라는 한층 강화된 목표가 설정된 만큼, CCC는 더욱 심층적인 분석을 거쳐 많은 보고서를 제출하고 공론화되도록 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정책 당국과 공유되고 있는 영국기후변화위원회(CCC)의 이산화탄소 배출 저감 로드맵 /자료출처=Climate Change Committee

영국은 기후변화법 도입 후 40% 이상 온실가스 배출을 줄였다. 국제에너지기구(IEA) 통계에 따르면, 전력부문에서 석탄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제로에 다다르고 있다. 각국이 CCC의 존재감에 주목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탄소중립위원회 출범에 더해 탄소중립기본법 제정을 준비 중인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은 화상으로 진행된 이번 기후정상회의에서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강화해 올해까지는 유엔에 제출하겠다”는 입장만 내놨다.

2030년까지 현재의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미국과 2013년 대비 46% 감축이란 새 목표를 제시한 일본 등과 비교됐다.

2050년 탄소중립 선언을 넘어, 점차 시점이 앞당겨지고 그만큼 강화된 목표를 요구하는 대응 트렌드에 적응할 혁신책을 꺼내 보여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CCC에 대한 벤치마킹도 생각할 대안 가운데 하나다.

‘변화’ 얘기 못한 한국···예산 수반 독립성 보장 기구 절실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 박사는 “독립성이 보장되고 자체 예산을 갖춰 책임있는 역할을 할 위원회가 절실하다”면서도 “계획과 목표치를 잡아놔도 총괄할 역량과 이행을 점검할 수단이 부족하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덧붙여 “정부가 먼저 초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일부 조정하는 수준에서 위원회를 활용하는 기존의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영국처럼 90년 대비 78%를 줄일 수 있다는 혁신적 계획은 생각조차 할 수도 없다”고 꼬집었다.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며 연말까지 NDC를 조정하도록 내몰린 현 시점에, CCC을 본딴 위원회를 만든다고 한들 당장의 돌파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목표를 세워놔도 총괄할 역량과 이행을 점검할 수단이 부족한 '근본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당장 연말까지 NDC를 상향해야 할 정부가 풀어야 할 숙제다. /사진출처=Greenpeace

청년들의 목소리도 이를 뒷받침한다. 오동재 기후변화청년모임(빅웨이브) 운영위원은 “객관적 근거를 바탕으로 정책을 고민하기 보단 수단이 먼저 나오고, 그걸 정당화 하려는 증거들이 수집되던 현재까지의 관행을 과감히 떨쳐야 한다”면서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앞으로 출범할 탄소중립위원회 역시 변화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 경고했다.

탄소중립의 활로를 열어주기 위한 관련 법과 전문기구의 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정부가 그동안 운영되던 4개 기구(지속가능발전위원회·녹색성장위원회·국가기후환경회의·미세먼지특별대책위원회)를 합치면서까지 탄소중립위원회를 만드는 이유다. 문제는 어떤 효과를 낼 수 있을지다.

정부 안팎에 따르면, 이번 탄소중립위원회는 100여명 규모로 꾸려질 거란 전망이 지배적인데 벌써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하기엔 턱없이 못 미친다는 우려에서다.

이유진 박사는 “새로운 NDC 초안을 만드는 것부터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논쟁과 조정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이 정도 규모의 위원회가 감당하기는 어려운 일”이라면서 “정부가 사무국을 꾸리고 운영하는 구조에 민간 관계자들이 초대된 게 아닌, 민간이 더 개입될 수 있는 조건부터 만들어 지는 것이 우선”이라 거듭 당부했다.

관행부터 떨쳐야 바뀐다

비슷한 의견은 국회에서도 나온다. 김세호 이소영의원실 보좌관은 “탄소중립위원회 출범 취지에 걸맞는 의사결정을 하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예산이 주어지는 독립적 환경이 되기까지도 아직은 시간을 두고 풀어야 할 게 많다”고 상황을 전했다.

'영국의 기후변화 대응 성과와 탄소중립 이행방안'을 주제로 지난 4월26일 진행된 에너지전환포럼 주최 탄소중립세미나 당시 /사진=온라인 캡처

종합해보면 뿌리 박힌 문제의 원인부터 따져볼 수 있어야 법과 조직이라는 구조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란 신호다. 지나친 걱정일까.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한국과 영국은 전력시장제도에서 30년 정도의 격차를 보인다. 현재 우리의 석탄발전량이 30년 전 영국의 수준과 비슷한 것이 단적인 예”라며 “이런 실정에 상위의 구조만 영국을 흉내 낸다고 해서 의미있는 개선을 보이긴 힘들 것”이라 설명했다. 모범 답안이 있어도 수용할 수가 없는 현주소다.

알리나 아베첸코바(Alina Averchenkova) 런던정경대학교 그랜텀연구소 박사는 “기후변화 문제를 위한 위원회는 정부에 책임성을 명시해주고 명확한 매커니즘을 바탕으로 자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는 여기에 반응해야 한다”면서 “그럴려면 자금이 주어지고 다양한 기술적 전문성을 갖춘 이들로 위원회가 구성돼야 한다. 이것이 영국 CCC가 정부로부터 독립되고 정치적 공감대를 구축할 수 있던 이유”라고 조언했다. 다만 우리에겐 우선 풀어야 할 전제가 있다. 쫒아가야 하는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다.



키워드#탄소중립위원회 #탄소중립기본법 #에너지전환포럼 #영국 기후변화위원회 #CCC #녹색전환연구소 #빅웨이브 #NDC
최용구 기자 cyg34@hkbs.co.kr

Dark Night of the Soul - Wikipedia

Dark Night of the Soul - Wikipedia

Dark Night of the Soul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Jump to navigationJump to search

Dark Night of the Soul (Spanish: La noche oscura del alma) is a poem written by the 16th-century Spanish mystic and poet St. John of the Cross. The author himself did not give any title to his poem, on which he wrote two book-length commentaries: Ascent of Mount Carmel (Subida del Monte Carmelo) and The Dark Night (Noche Oscura).

Poem and treatise of St. John of the Cross[edit]

The poem of St. John of the Cross, in 8 stanzas of 5 lines each, narrates the journey of the soul to mystical union with God. The journey is called "The Dark Night" in part because darkness represents the fact that the destination—God—is unknowable, as in the 14th century, mystical classic The Cloud of Unknowing; both pieces are derived from the works of 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 in the sixth century. Further, the path per se is unknowable. The first verse of the poem is translated:[1]

In an obscure night
Fevered with love's anxiety
(O hapless, happy plight!)
I went, none seeing me
Forth from my house, where all things quiet be

—that is, the body and the mind, with their natural cares, being stilled. At the beginning of the treatise Dark Night (the Declaración), St. John wrote: "In this first verse, the soul tells the mode and manner in which it departs, as to its affection, from itself and from all things, dying through a true mortification to all of them and to itself, to arrive at a sweet and delicious life with God."

The "dark night of the soul" does not refer to the difficulties of life in general,[2] although the phrase has understandably been taken to refer to such trials. The nights which the soul experiences are the two necessary purgations on the path to Divine union: the first purgation is of the sensory or sensitive part of the soul, the second of the spiritual part (Ascent of Mount Carmel, Ch. 1, 2). Such purgations comprise the first of the three stages of the mystical journey, followed by those of illumination and then union.[3] St. John does not actually use the term "dark night of the soul", but only "dark night" ("noche oscura").

There are several steps in this night, which are related in successive stanzas of the poem. The thesis of the poem is the joyful experience of being guided to God. The only light in this dark night is that which burns in the soul. And that is a guide more certain than the mid-day sun: Aquésta me guiaba, más cierto que la luz del mediodía. This light leads the soul engaged in the mystical journey to Divine union.

The Ascent of Mount Carmel is divided into three books that reflect the two phases of the dark night. The first is a purification of the senses (It is titled "The Active Night of the Senses"). The second and third books describe the more intense purification of the spirit (Titled "The Active Night of the Spirit"). Dark Night of the Soul further describes the ten steps on the ladder of mystical love, previously described by Saint Thomas Aquinas and in part by Aristotle[citation needed].

The time or place of composition are not certain. It is likely the poem was written between 1577 and 1579. It has been proposed[by whom?] that the poem was composed while John was imprisoned in Toledo, although the few explicit statements in this regard are unconvincing and second-hand.[4]

The treatises, written sometime between 1578 and 1585, are commentaries on the poem, explaining its meaning line by line. Padre Lucinio del SS. Sacramento, who edited the critical edition (edition 5), with extremely thorough notes, of John of the Cross's Complete Works in the Biblioteca de Autores Cristianos series,[5] writes that "the idea of the 'night' to analyse the complex psychology of the soul under the purifying influence of grace is the most original and fruitful symbolic creation of the Mystic Doctor's doctrine."[6] The Ascent and the Dark Night should be considered as forming a single body as P. Lucinio states,[7] quoting Andrés de la Incarnación and P. Silverio de Santa Teresa. Both works were left uncompleted.

In Roman Catholic spirituality[edit]

The term "dark night (of the soul)" in Roman Catholic spirituality describes a spiritual crisis in the journey toward union with God, like that described by St. John of the Cross.

St. Thérèse of the Child Jesus and the Holy Face, OCD, a 19th-century French nun and Doctor of the Church, wrote of her own experience of the dark night. Her dark night derived from doubt of the existence of eternity, to which doubt she nonetheless did not give intellectual or volitional assent, but rather prevailed by a deepening of her Catholic faith. However, she painfully suffered through this prolonged period of spiritual darkness, even declaring to her fellow nuns: "If you only knew what darkness I am plunged into..!"[8]

While this spiritual crisis is usually temporary, it may endure for a long time. The "dark night" of St. Paul of the Cross in the 18th century endured 45 years, from which he ultimately recovered. The dark night of St. Teresa of Calcutta, whose own name in religion she selected in honor of St. Thérèse, "may be the most extensive such case on record", having endured from 1948 almost until her death in 1997, with only brief interludes of relief, according to her letters.[9]

In popular culture[edit]

T. S. Eliot alludes to "The Dark Night of the Soul" throughout his Four Quartets

Ernest Dowson alludes to the "obscure night of the soul" in his absinthe poem, Absinthia Taetra.

The Spanish singer Rosalía arranged a version of the poem Dark Night of the Soul and released it as a single titled Aunque es de noche.[10]

In his 1945 collection of essays, The Crack-UpF. Scott Fitzgerald penned his famous line, "In a real dark night of the soul it is always three o'clock in the morning".

As a comment on the shallowness of modern spirituality, author and humorist Douglas Adams parodied the phrase with the title of his 1988 science fiction novel The Long Dark Tea-Time of the Soul.

English electronic band Depeche Mode make a clear reference in "I Feel Loved", the second single released from the album Exciter: "It's the dark night of my soul and temptation's taking hold, but through the pain and the suffering, through the heartache and trembling I feel loved...".

Alternative rock band Sparklehorse, along with producer Danger Mouse and director and visual artist David Lynch, collaborated with a number of other artists on an audio-visual project titled Danger Mouse and Sparklehorse Present: Dark Night of the Soul.

Moby and Mark Lanegan wrote about the Night of the Dark Soul in their collaboration song titled The Lonely Night, released on Moby's eleventh studio album Innocents. The song was rerecorded for Moby's album Reprise containing acoustic and orchestral arangments of his older work.

In the 2011 video game Crysis 2, there is an unlockable achievement/trophy titled "Dark Night Of The Soul",[11] a reference to the Danger Mouse and Sparklehorse album of the same name.

The phrase has also been used as a song title by several other bands and music artists, including Steve BellThe Get Up KidsUlverMayhem, and Shai Linne in The Solus Christus Project.

Canadian singer Loreena McKennitt set the poem to music on her album The Mask and Mirror.

Composer Ola Gjeilo has written a SATB choral setting accompanied with piano and string quartet, fourteen minutes long, with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e poem.[12]

Northern Irish singer-songwriter Van Morrison writes about the "dark night of the soul" in a number of his songs, including "Tore Down a la Rimbaud" on A Sense of Wonder and "Give Me My Rapture" on Poetic Champions Compose. It also served as the inspiration for the title of the lead release of his 2019 album "Three Chords & the Truth."[13]

In his 1994 novel, InsomniaStephen King makes a reference to the F. Scott Fitzgerald usage when his protagonist first begins experiencing the signs of insomnia following the death of his [the character's] wife. King also references it in his 1982 short story "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

In modern mindfulness practice, many authors have named a similar phenomenon in meditation as the dark night of the soul after the poem. It is often described as a lengthened and intense state of depression or ennui caused by errant or irresponsible meditation practices. Author John Yates compares it to a Theravadan term, dukkha ñanas, or "knowledges of suffering".[14]

See also[edit]

References[edit]

  1. ^ Underhill, Evelyn. (1974). Mysticism. 12th ed.,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1930], p.83
  2. ^ https://www.michaelmirdad.com/dark-night-of-the-soul/
  3. ^ Underhill, Mysticism, Ch. 4.
  4. ^ Lucinio del SS. Sacramento, Nota Introductoria a la 'Subida' y la 'Noche' in Vida y Obras completas de San Juan de la Cruz, 5th ed., Madrid: Biblioteca de Autores Cristianos, 1954, p. 358.
  5. ^ Vida y Obras de San Juan de la Cruz, 5th ed. Lucinio del Ss. Sacramento, Ed. Madrid: Biblioteca de Autores Cristianos, 1964.
  6. ^ Lucinio del SS. Sacramento, Nota Introductoria, p. 359.
  7. ^ Nota Introductoria, p. 357.
  8. ^ Martin, James (29 August 2007). "A Saint's Dark Night". The New York Times.
  9. ^ David van Biema (23 August 2007). "Mother Teresa's Crisis of Faith". Time Magazine. Retrieved 7 April 2020.
  10. ^ [1]
  11. ^ https://www.trueachievements.com/a148428/dark-night-of-the-soul-achievement
  12. ^ "Dark Night of the Soul – Ola Gjeilo"olagjeilo.com.
  13. ^ "Van Morrison announces new album Three Chords and the Truth, shares "Dark Night of the Soul": Stream"Consequence of Sound. 1 September 2019. Retrieved 24 January 2020.
  14. ^ Culadasa PhD, John Yates. (2017). The Mind Illuminated : a Complete Meditation Guide Integrating Buddhist Wisdom and Brain Science for Greater Mindfulness. Immergut PhD, Matthew. London: Hay House Publishing. ISBN 978-1-78180-879-5OCLC 971364730.

Further reading[edit]

External links[ed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