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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5

한국의 간디 "세계적인 철학자" 위대한 종교지도자 함석헌의 추악한 진실 2023

한국의 간디 :: 함석헌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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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간디 "세계적인 철학자" 위대한 종교지도자 함석헌의 추악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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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간디
함석헌 2023. 1. 1.

함석헌의 모든 진실이 담긴 책이 발매됩니다. 그 전에 작가 조순명의 에필로그를 실었습니다.



한국의 간디 함석헌에게서 나는 사탄을 봤다.

함석헌 외삼촌 영전에




외삼촌, 당신이 세상을 떠나신 지도 어언 34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당신을 떠나보내지 못 하고, 이런 글을 또 쓰고 있어요.

이것은 결코 당신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어서가 아닙니다.

당신에 대한 저의 네 번째가 되는 이 글은 사실은 우리 민족에 대한 마지막 호소입니다.

그들... 종교계, 언론계, 재야세력, 야당 그리고 국가권력이 하나 같이 당신의 정체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끌고 다니면서 이용하더니, 돌아가신 후에는 유해까지

국제시장에 내다 팔아먹고 있어요.

생전에 그들의 속셈을 꿰뚫어 보고 계셨던 당신은 이런 말씀을 남겼지요.

‘또 사랑이 무엇이 사랑인가? 살아서 우리가 그것을 말려드리지도 못 하고 또 죽은 후에 그

비판조차도 못 하면 무슨 사랑인가?

[새 시대의 전망] 중에서



당신이 정신없이 타락할 때 면전(面前)에서 “계집질하지 말라!” 고 직언한 사람은 유영모 선생님과 저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낀 사람도 유영모 선생님과 저뿐이고,

유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지금, 당신을 비판할 수 있는 사람도 저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해방 직후 저의 아버지는 신의주(新義州) 동중학교 교사로, 당신은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교육부장으로 계실 때 가끔 우리 집에 와서 저녁도 자시고 아버지와 담소도하고, 주무시고 가곤했지요.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어수선한 소리에 눈을 떴더니, 캄캄한 방 한 구석에서 당신이 가슴을 치고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의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형님, 어디 아프우? 불 켜라우?

“아아니, 괜찮아.”

그 후에도 여러 날 밤 당신의 기도 소리에 단잠에 설쳤지만, 두 번 다시 아버지의 “형님, 어디 아프우? 불 켜라우? 라는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나누다가, 당신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저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말라귀’ 라는 마귀가 우리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리 없었던 아버지는 그냥 듣기만 했고, 당신도 추가설명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7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그것은 분명히 당신이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전쟁을 예견(豫見) 하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다른 증언이 있습니다.

‘6,25가 터진 바로 일주일 전의 일요일, 그러니까 1950년 6월 18일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이 화산은 속에서 불길을 뿜어대고 있는데, 그 정상에서는 살짝 덮여 있는 이 지각(地殼)이 언제 터질 줄도 모르고 왜들 이렇게 까불고만 있는지 참 답답하기만 하다‘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난 그 다음 주일에 6,25는 터지고 말았다.

물론 그 말씀을 하신 선생님도 6,25를 미리 아시고 하신 말씀은 아니셨겠지만, 여하튼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동족상쟁의 쓰라림을 겪었으며 나 개인에게도 깊은 흔적을 남긴 6,25 사변이라는 전쟁의 몇 해를 보내면서 나는 선생님의 그 예언자적인 말씀을 되새기곤 하였다.‘

김용준 명예교수(고려대학교)

[나의 스승 咸錫憲] 중에서

지금까지 6,25를 예견한 사람은 당신뿐인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당신이 1947년 남한에 와서 제일 처음 하신일이 무료로 숙직을 제공해주고, 지극 정성으로 돌봐준 노연태 외항선장의 부인 권정님과 간통하는 일이었습니다.

최원극(五山학교 30회 전 주한미국 대사관 기획고문)의 증언에 의하면, 권정님은 당신을 ‘주님’ 이라고 부르며 음행했다고 그럽니다.



1960년 초 어느 날 당신과 같이 길을 가다가 제가 이런 말을 불쑥한 적이 있지요.

“거짓의 가면을 벗어라!”

지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느 책에서 그런 구절을 읽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그 대목을 인용했을 뿐입니다.

그 때는 제가 당신의 정체를 알기 전이었으니까, 당신의 비행을 빗대갖고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지요.

그 말을 듣자마자 당신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저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지요. 왜냐하면 항상 다정했던 당신의 얼굴이 아니라 험상궂은 사탄의 형상이 거기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제가 놀라서 당신을 빤히 쳐다보니까 당신의 얼굴이 ‘하이드 씨’에서 ‘지킬 박사’로 천천히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쏘는 듯한 눈길을 제가 피하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는 눈에서 악의가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제가 사탄을 봤다는 말, 다시 말하면 당신이 사탄이라는 소리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저의 주관적인 판단일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1947년 월남 후 종교지도자의 가면을 쓰고, 입으로는 거룩한 말씀만 골라서 하면서, 수십 명의 여성(제자 최원극은 수 백명 이라고 증언함)을 성폭행한 것은 사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짓이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사탄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과사전 등을 훑어 봤지만 피상적인 표현뿐이었지요.

그래서 저 나름대로 이렇게 정의해봤습니다.

첫째 외모가 출중하게 잘 생길 것. 당신은 해방 전 정주(定州) 五山학교에서 학생들로부터 ‘예수’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으니까, 딱 어울리는 외모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많은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을 정도로 말을 잘할 것. 저는 지금까지 당신보다 말 잘하는 사람을 보지 못 했습니다.

셋째 박학다식(博學多識)할 것. 오죽하면 五山학교 학생들이 당신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에서 ‘함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불렀겠습니까?

함석헌만큼 많이 읽고 많이 아는 사람 없었고, 함석헌만큼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도 없었다.

김동길 박사 (단국대 석좌교수, 연세대 명예교수)

넷째 말과 행동은 정 반대일 것. 당신은 입으로는 천사의 말을 하면서도 행동은 그와 정 반대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함석헌, 당신은 분명히 사탄이었습니다.

만일 함석헌이 사탄이 아니면 대한민국에는 사탄이 없다고 저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함석헌이라는 이름은 밝히지 못 했지만 분명히 당신을 빗대서 비판한 글을 남긴 언론인이 있습니다. 그는 조선일보 전 논설고문 선우 휘로 [鮮于 煇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스님의 入寂과 어린이

오늘날 남들이 다 아는 상스럽지 못한 소행을, 자기도 제자도 함께 덮어주거나, 감싸고 돌아감으로써 세상을 속이며, 정신적인 스승인 양 거드름을 피우거나 敎祖처럼 모셔지고 있는 경우를 흔히 볼 때마다, 인간이 지닌 약점을 아예 탁 터놓고 누구에게도 속임없이 “적어도 나한테는” 살다간 탄허 스님의 참된 인간상이 새삼스럽게 그리워지는 것이다.

조선일보(1983. 6. 12)



선우 휘는 당신의 비행을 글로만 규탄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나타냈습니다.

당신이 논설고문실에 들어가면 선우 휘는 항상 정중한 태도로 맞이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82년 어느 날, 당신이 논설고문실에 들어섰는데도, 그는 취기(醉氣)가 돌아 불그스레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기만할 뿐 인사말도 없었다고 합니다.

멋쩍어진 당신 편에서 먼저 한마디 했다지요. “아침부터 약주가 좀 과해졌구만...”

선우 휘는 아직 쇼파에 몸을 묻은채 내뱉 듯이 한 마디 했습니다. “씨 X놈의 세상, 술 안 먹구 무슨놈의 재미루 살갔습네까?”

이것은 제가 목격한 장면이 아니라, 그 날 당신을 수행했던 전덕용(씨알의 소리 초대편집장)의 증언입니다.

선우 휘가 이렇게 강력하게 글로, 몸짓으로 당신의 부도덕한 행위를 규탄 할 수 있었던 것은 [거짓 예언자 조순명著]를 읽고 당신의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선우 휘는 할 말 다한 셈입니다. 당신만이 아니라 ‘함께 덮어주거나 감싸고 돌아가는 제자’도 싸잡아갖고 나무랐습니다. 짧지만 이 한 편의 글이 한국 언론은 결코 함석헌의 비행을 묵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 글이라고 저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외삼촌, 당신이 쓰신 책 가운데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 권만이 혼이 살아 있을 때 쓴 것이고, 나머지는 전부 초점이 흐리고 횡설수설하고 있다고 꿰뚫어본 눈이 있어요.

그 눈은 한국인의 눈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일본인의 눈이랍니다. 이것은 제가 직접 들은 얘기가 아니라 배명수[십자가 복음] 편집 겸 발행인의 증언임을 밝혀둡니다.

“도쿄(東京)대학의 역사과 조교수가 서울에 왔을 때 내가 만난 적이 있어. 그는 무슨 말 끝에 [함석헌 전집 10권]을 전부 읽었는데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권만이 ‘함선생의 혼이 하늘을 찌를 듯이 살아 있을 때’ 쓴 것이고 나머지는 전부 초점이 흐리고 횡설수설 하고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함선생이 남한에 와서 왜 그렇게 갑자기 변했는지 모르겠다’ 면서 머리를 갸우뚱하잖아.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어. 왜냐하면 그는 조형이 쓴 [거짓예언자]나 [웬말인가 咸錫憲]을 읽기는 고사하고 구경도하지 못한 사람이거든. 그런데도 그런 날카로운 평을 하드라니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당신이 30대, 사생활이 깨끗할 때 정주(定州) 五山학교에서 쓰신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의 개정판이고, 나머지는 전부 남한에 와서 간통과 강간을 식은 죽 자시 듯하면서, 그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글재주 부린 것이니까, 바른 글이 나올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당신의 교묘한 글재주에 속아서 박수쳤는데 그 일본인 조교수만은 속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배명수의 증언은 다시 이어집니다. “언젠가 일본에서 온 무교회 회원을 만났더니 대뜸하는 말이 ‘함선생 야말로 남,북한 한국민족의 정신적인 지도자인데 그런 분을 어떤 사람이 여자문제로 모함하드라 면서 몹시 분개하드라니까.’ 나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일본에는 [함석헌을 생각하는 모임]이 여러 개 있대.



외삼촌 해 마다 개나리가 피는 춘3월이 오면 당신의 알뜰한 제자들은 함석헌을 찬양하는 [함비어천가](咸飛御天歌)를 부르는데 재작년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합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이 낳은 현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민주운동 실천가이며, 평화운동가이신 함석헌(1901~1989.3.13.) 선생님의 탄신 117주년을 맞이하여 기념식 및 기념강연을 개최한다.

함석헌은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정신을 고양시키는 역사학자로서 기독교 사회운동가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장준하, 김재준, 문익환 등과 더불어 독재정권과 싸우며 한국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셨다.

1970년에는 언론의 자유가 차단된 시절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민중들의 뜻을 대변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우리셨다.

평화를 향한 함석헌의 열정과 희생이 인정되어 세계퀘이커 연합인 “친우봉사”(Friends Service Council, 현 퀘이커 평화와 사회적 증언)로부터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두 번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되기도 했다.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 함석헌의 삶과 사상은 지금도 학자, 사회운동가, 정치인, 역사가와 언론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뜻을 모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널리 알리고 그의 뜻을 실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1998년 [함석헌 기념사업회 사단법인]을 창립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 [함석헌 선생님의 탄신 117주년]을 맞이하여 [함석헌 기념사업회]주관으로 기념모임을 갖는다. 이번 기념 모임은 기념영상 기념축사와 강연, 축하연주 등으로 진행되며 씨알들의 만찬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기념강연에는 김주영 박사(독립기념관 연구관)가 “3.1독립선언 100년 씨알정신을 말하다”라는 제목으로 3.1운동의 정신과 씨알사상을 연결하고 그것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를 되짚어 본다.

평화를 사랑하고 깨어 있는 씨알들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함께 참여해 민족의 역사와 미래를 향한 함석헌의 뜻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 한다.

2018년 3월 5일

함석헌 기념사업회 (사)

이사장 문대골 목사


놀랄 일은 다시 이어집니다. 함석헌의 정체를 결코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일단의 목사와 교수들이 42년 동안 새빨간 것짓말로 세상을 속이면서, 계집질한 것밖에 없는 함석헌을 팔아 [함석헌 씨알학교]를 창립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창립취지문을 원문 그대로 인용합니다.



‘함석헌 씨알학교’ 창립취지문

우리는 현대문명의 발달 속에 온갖 편리와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면 깜짝 놀랄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연은 회복될 수 없이 파괴되고, 지구공해와 기상이변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며 멸종되는 동식물의 수는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대로 인류위기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결국 인간은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핵무장과 유전자 조작, 인간복제와 로봇인간이 그것이다. 이런 일을 계속하면서도 어떤 반성이나 인간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도 보기 어렵다.더 편리하고 더 좋은 기계를 찾으며 기계의 종이 된 것도 망각하고 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나간다면 인류종말의 날이 오지 않는다는 어떤 보장도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아직 희망은 있다. 여기 한 사람, 우리가 존경하고 가르침을 받을 스승 한 분이 계시다. 이 분은 바로 함석헌 선생이다. 우리는 선생이 보여주고 남겨주신 ‘씨알정신’을 살리는 길이 아니고는 이 난국을 이기고 위기를 극복할 길은 없다고 확신한다.

선생은 1901년 구한말에 태어나서 일제강점기를 지나 공산치하와 자유당독재 5.16 군인정치와 신군부시대를 겪으면서 오직 참됨과 의로움과 바른 말씀을 외치다 수난을 당하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90평생을 일관하셨다.

선생은 말하기를“나는 창세로부터 내려오는 바통을 받았다. 나는 이것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고 가야한다. 이것을 받을 사람은 받아요!”하신다.

또한 “10년 교육을 해도 이 백성의 정신지도자가 되어보겠다는 한 청년을 보지 못 하였고 그렇게 가르치는 한 사람의 교사를 보지 못 하였다.”고 탄식하신다.

오늘 우리가 ‘함석헌 씨알학교’를 창립하는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선생이 넘겨주려는 ‘참의 바통’을 받아들 사람을 찾고 또한 ‘이 백성의 정신지도자가 될 청년’을 길러내는 것이다.

물론 이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일은 반드시 해야하고 시급한 일이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다.

‘함석헌 씨알학교’의 시작을 세상에 알린다. 강호에 계시는 많은 씨알들과 뜻 있는 동지들의 성원을 바란다. 가자, 씨알학교로! 살리자, 씨알정신을!

2020년 3.1운동 101주년을 맞으며,



함석헌 씨알학교 창립준비위원회

위원장 박선균




교수진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장)

김신보 (씨알사상연구원장)

박선균 (씨알의 소리 편집주간)

문대골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전기호 (씨알 평화연구소장)

최정윤 (씨알아카데미 원장)

김조년 (한남대 명예교수)

장영호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

특강: 이은선 교수

이호재 교수




외삼촌, 1965년 여름 사회경험이 별로없는 29세의 저에게 닥친 [함석헌 사건] 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저는 피하지 않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해결해 보려고 애썼습니다. 저의 고민을 원고지 1천3백5십매에 담아 여러 사람들에게 읽히고 평을 구했지요.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했는데 남정현 작가는 ‘매끈한데’라고 한 마디 해줬습니다. 양영호 작가(함석헌의 둘째 며느리)는 이렇게 평했습니다.

“그 원고의 전반부는 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후반부는 참 잘 됐어요.”

원고의 전반부는 [함석헌 사건]을 사실 그대로 표현한 것이고, 후반부는 ‘우리가 그토록 아끼고 기대했던 함석헌이 여자 하나에 걸려서 쓰러지게하는 하나님,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울부짖는 것이었지요.

김동길 박사에게 그 원고를 보여줬더니 이렇게 평했습니다. “미스터 조는 함선생을 죽일 때는 언제고, 살리려고 몸부림치는 건 또 뭐야? 코미디언이 코미디하고 먼저 웃는 것 봤어? 코미디언은 코미디하고는 뒤로 물러서는 거야. 웃는 것은 청중들 몫이지. 그런데 미스터 조는 그것을 혼자 다 했어. 혼자 쓰고 혼자 평하고, 그러면 독자들 몫은 뭐야?”

김동길 박사의 평을 받아들여, 양영호가 칭찬한 후반부를 저는 미련없이 잘라버렸습니다.

김박사는 저의 원고를 읽어봤으니까 다음과 같은 대목도 봤을 겁니다.

‘.......어느날 함석헌은 권영희를 범했다. 자연히 몸에 이상이 안 생길리 있나. 진찰 결과는 임신 3개월, 그녀는 핏기없는 얼굴로 함석헌을 찾아가 진찰결과를 말했다. 그런데 대답은 지극히 빨리 나오고 짧았다. “떼버려!” “네? 어린 생명을 어떻게?” 그럼, 넌 그 애를 낳을 작정이었냐?“

”......................“ 권영희는 울면서 돌아섰다. 멀리 사라져가는 그녀의 축늘어진 어깨를 바라보면서 함석헌은 그 일로 말미암아 자신의 파국을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사상계(思想界)로부터 원고청탁이 하나 들어왔다. 제목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나중에 그 글이 하마터면 그의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는 구렁텅이에서 그를 구해줄 줄은 그 자신도 생각지 못 했을 것이다.

[함석헌과 한국지성들] 上,下 중에서



김동길 박사는 이 글을 읽고도 함석헌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네요.

“누가 뭐라고해도 사상적으로 우리시대의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거인이 있다면 그가 함석헌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일찍이 사상계(思想界)에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산다]는 글을 썼다.

철학을 전공해 유럽과 미국 유수한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고 돌아온 철학자는 여럿 있지만 한국 국민의 생각에 함석헌만큼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우리 현대사에 없을 것이다.“

김동길 박사의 함석헌 찬양은 다시 이어집니다. “누구보다도 감정이 풍부했던 함석헌이 이성을 사랑한 사실이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그가 어느 여성을 사랑하는 것 같은 눈치만 보이면 주변 ‘속물’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스승인 그를 비난했다.

함석헌 면전에서 ‘계집질하지 말라’고 직언한 사람은 유영모와 저뿐이었다고 앞에서 이미 밝혔습니다. 그렇게 직언한 사람을 보고 ‘속물’이라면 함석헌이 ‘개잡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가 뭐라해도 사상적으로 우리시대의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거인이 있었다면 그가 함석헌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찬양한 김동길 박사는 ‘성물(聖物)인가요?



김동길 박사는 다시 말합니다.

“함석헌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독일 문호 괴테는 70, 80이 될 때까지 젊은 여성들을 사랑했는데 왜 한국 사람인 나는 그러면 안 되나.’하며 탄식 아닌 탄식을 하기도 했다.

괴테가 70세 때 19세의 소녀를 사랑했다는 소리는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함석헌 당신처럼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처녀의 목에 칼드리대고 강간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 했습니다.

김동길 박사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하네요.

“내가 보기에는 괴테가 천재였던 것처럼 함석헌도 천재였다.”

조선일보(2018. 1. 8)



이상은 조선일보(2018. 1. 8)

[Why? 특별기획]


[평생을 1일 1식..... 말과 글로 ‘양면도’ 휘두른 시대의 사상가]라는 제목하에 김동길 박사가 함석헌을 소개한 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1982년 [합동출판사]에서 [거짓 예언자]를 출간하기 전 김석재 사장은 그 책이 나오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염려해서 각계 각층 인사들에게 여론조사를 해봤답니다.

목사들은 태반이 반대인 반면 작가들은 그와 반대로 태반이 찬성이었답니다. 어느 현직 판사에게 물어보니까 원고 내용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고 매수만 묻더랍니다. 1천 3백 5십여 매라니까 그 판사님 대답이 “그러면 그 원고는 사실일 개연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말로 원고지 천오백여매 메우기기란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언도하더랍니다.

그 판사는 원고를 읽어보지 않고 매수만 묻고도 ‘사실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언도했는데 김동길 박사는 원고를 읽고도 독자들에게 ‘내가 보기에는 괴테가 천재였던 것처럼 함석헌도 천재였다’고 소개하다니.......



외삼촌 1965년 여름 원효로 집에서 당신과 곽분이 문제로 가족회의를 여러 번 했습니다, 저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만일 외삼촌이 내가 하는 말을 듣지않고 곽분이와 은밀히 놀아나면서 세상을 속이는 언행을 계속하면 그때는 그녀와의 관계를 낱낱이 폭로해서 다시는 세상을 우롱하지 못 하게하겠다”고 말입니다. 대부분 아연해서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김삼종(함석헌의 누이동생 함석보의 차남)은 당신의 시집 [水平線 너머]를 읽어보이며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시집 밑천 삼진 못할 내 목 잘라 쟁반에 담고 춤추는 오그라진 속아 네 눈에 원수 갚음의 속살 소용 없느니라.

나의 죽음이 쓴 빛살 이미 네 살을 뚫어 꿰지 않았느냐? 나는 영원히 빈들에 메아리를 울리는 죽지 않는 외치는 소리.”

“여기에서, ‘시집 밑천 삼진 못할’의 ‘삼진’은 ‘오삼진’ 이름을 빗대서 한 말이야. 이런 말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라구.”

"야, 이것이 어떻게 하늘이 내린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냐? 미친놈의 소리지.“

"형 어떻게 외삼촌 보고 미친놈이라고 말 할 수 있어?"

"미친 사람 미친놈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럼 미친님이라고 부르란 말이냐? 외삼촌이 1960년 초 천안(天安) 씨알농장에서 오삼진 목에 칼들이대고 강간한 사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런데 오삼진은 외삼촌을 강간죄로 고소하지않고,"

“'나쁜짓 그만하고 회개하고 새 사람 되시오.' '위선 그만 떨고 강원도 안반덕에 가서 감자농사나 지으면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시오.' 라고 충고의 뜻을 담은 엽서를 여러장 원효로 집으로 보냈어. 그것은 우편함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나도 쉽게 읽을 수 있었지."

"만일 그 때 오삼진이 강간죄로 고소했더라면 외삼촌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몇 년 동안 콩밥신세를 지고 사회에서 매장되고 말았을 거야. 그런데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오삼진은 그러지 않았어. 그러면 외삼촌은 오삼진에게 백배(百拜), 천배(千拜)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러기는 고사하고 ‘삼진’이라는 이름을 교묘하게 끼워넣고 140行의 장시(長詩) [나는 빈 들에 외치는 소리]라는 詩로 저주를 퍼붓다니 그래 이것이 미치지 않고 정상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냐?“

”..............................“

김상종은 더 이상 저에게 항의하지 못 했습니다. 며칠 후에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제 앞에 나타났지요.

“형 나는 그저께 곽분이가 [대방동 시립부녀보호소]에서 퇴근하기 전에 그녀집에 가서 가정부에게 곽분이 심부름을 왔다고 속이고 그녀방에 들어가 일기장을 훔쳐내다 다 읽어봤어. 그 일기장을 읽어보니까 울화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술을 잔뜩 마시고 밤에 외삼촌 방에 들어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겄어. 그러고 대들었지."

”'외삼촌, 저는 어제 곽분이 집에 가서 대학노트 5권으로된 일기장을 훔쳐내다 전부 읽어봤습니다. 그 일기장을 흝어보니까 외삼촌이야말로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던데 그러면서 왜 우리를 철저하게 속였습니까?' 라고 대들었어. 만일 그때 외삼촌이 거짓말을 하면 박치기를 하려니까 벌벌 떨면서 사실대로 대답하더라.”

“내가 처음 실수했을 때(노연태의 부인 권정님과의 간통사건)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빌었어야하는 건데 그럴 용기가 없어서 못 하고 거짓말로 덮었어. 그러다가 또 실수하게 되니까 더 큰 거짓말을 하게된 거야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세상을 속이면서 살아왔다."

외삼촌, 당신이 김동길 박사가 평한 것처럼 괴테같은 천재인지는 몰라도 초인(超人)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새파란 외조카 김상종의 박치기 협박에 벌벌 떨면서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세상을 속이면서 살았다.’고 고백했으니 말입니다.

김상중은 그 후에 캐나다에 이민 가서 잘 사는 줄 알았는 데, 뜻밖에 부음이 날아왔습니다. 가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서 위스키병을 꺼내 병채로 마시곤했다고 그럽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그가 왜 그랬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김상종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당신을 하늘이 내려보낸 인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함석헌이 다른 여자도 아니고, 제가 사귀던 곽분이 집에 가서 누워 『씨알의 소리』에 실릴 원고를 읽어주면 그녀는 당신의 바지를 벗기고 생식기를 빨아주고,

‘오늘도 나오지 않는 그의 바나나물을 빨아 먹었네.’

라고 일기에 쓴 것을 보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저는 곽분이 일기장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김상종보다 먼저 읽어본 유창현과 전덕용으로부터 한 번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일기보다 더 생생한 곽분이의 고백을 - 1964년 겨울 선혜학원 (강원도 간성면 선유실리) 박정순이 (이대 국문과) 옆자리에 있는 곳에서 함석헌에게 강간당했다고 통곡으로 하는 소리 - 를 1965년 여름에 들었습니다.

함석헌 문제로 제일 처음 제가 찾아가 상의한 사람은 당신의 오랜 신앙동지인 송두용 선생, 그는 저에게 이렇게 충고 했습니다.

“조군이 함선생에게 대들겠다면 나는 말릴 수없지만, 그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짓일 거요.”

그로부터 자그마치 5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지금, 바위가 깨졌나 계란이 박살났나를 판별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입니다. 이것은 저의 창작소설이 아니고, 제가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강간당한 피해 여성들의 이름까지도 전부 실명으로 표기했습니다.

그것은 털끝만큼도 그녀들의 부끄러움이 아니고, 그런 짓을 하고도 평생 동안 성자연하면서 세상을 속이다가 『용서를 빕니다.』는 대국민 쪽지 한 장 남기지않고 떠난 함석헌 당신의 죄상을 밝히기 위해서 입니다.



외삼촌, 하늘나라에서 거짓 짐을 벗어버리고 영면하소서.



2023년 2월 6일 당신의 외조카 조순명 아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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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진실한국의 간디 "세계적인 철학자" 위대한 종교지도자 함석헌의 추악한 진실구독하기

2025/03/06

[김조년] 제자리로 돌아와서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제자리로 돌아와서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제자리로 돌아와서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5.03.04 
한남대 명예교수

2024년 12월 3일 깊은 밤부터 오늘까지 잠자고 일어나고, 밥먹고 물마시고 일하고 여가를 활용하고 맘 편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주말이면 가족이나 친지들과 함께 기쁘고 즐거운 맘으로 이 땅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서나 맘에서 아주 험한 쌍욕을 내뱉고 살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게 내뱉으면 잠시 속은 시원할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의 속은 또 얼마나 더러워지고 기분 나쁘고 찜찜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되었을까? 정치나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가졌든 아니든 눈만 뜨면 새로운 소식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궁금해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밤사이에 별고가 없기를 바라면서 맘을 쓰는 것은 전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생활이다. 복잡한 생활이라고 하지만, 아침에 해뜨고 저녁에 해지는 것이 걱정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 없이도 더 깊이 믿고 살듯이 돌아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주말만 되면 서울로, 부산으로, 대구로, 광주로, 대전으로 달리면서 원정집회를 열듯이 하는 이 모양은 정상일까? 이것은 비상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비상시국이다. 이렇게 어지럽게 살게 된 책임은 일단 대통령에게 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어떤 집단의 책임을 맡은 자에게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나, 그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을 통합하여 화해롭게 살아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을 책무가 있다. 그런데 특히 이번 대통령은 자기 편 사람들로 파당정치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나는 그가 대통령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우리 사회나 이웃관계를 위해서 좋다고 공개서한을 쓴 적이 있다. 그나 그를 돕는 사람들이 그 편지를 읽은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읽은 일반 사람들은 그는 절대로 그 편지에 들어 있는 내용대로 하지 않을 것인데 왜 쓸데없는 편지를 쓰느라 애를 먹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 글을 쓸 때 진정으로 그와 우리 사회를 깊이 생각하였다. 살 길이 거기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상계엄선포’라니! 그 순간부터 일반 시민들은 정신을 차리고 사회를 제대로 돌아가게 하려고 무척 애를 쓴다.

우리는 이미 비상계엄상황을 가지고 온 상당히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수사에서 밝혀진 것들이 간간이 보도되거나, 헌법재판소에서 진행되는 탄핵재판과정을 통하여 큰 갈래는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을 보면서 비상계엄을 선포할 상황이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왜 그렇게 했는가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그래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대통령은 탄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 우리 사회는 정상생활로 돌아갈 길이 열리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또 바라기 참으로 힘든 것을 그에게 요청한다. 재판을 받기 위하여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그가 깊게 성찰하여 통합하는 말을 내어놓으면 좋겠다. ‘나는 대통령의 정당한 통치행위를 한 것이니 나를 믿어달라’는 말로 패를 갈라놓는 대신, ‘나는 내가 한 일의 대가를 기꺼이 받을 것이니 시민들은 한 맘으로 다투지 않고 화해롭게 살기 바란다’는 말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시민들을 갈라놓는 말을 더 이상 하지 말기를 바란다. 생활을 잃어버린 시민들이 제자리로 돌아와 정상생활을 하도록 하는 성찰의 말을 그가 하기 바라는 것은 난망한 일인가? 아니, 그래도 나는 그가 달라지기를 바란다.


이번 비상계엄사태가 우리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일까를 많은 분들이 자주 생각할 것이다. 나도 생각해본다. 다 알 듯이 사회는 끝없이 달라진다. 제도도 달라지고,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모습도 달라진다. 그러면서 점점 더 개인들이 자기중심으로 가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또 공동체를 구성하는 존재들로 다른 이들과 함께 꾸리지 않으면 삶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홀로 살면서 또 함께 살아갈 길을 찾는다. 나는 이번 기회에 이 부분이 좀 더 명확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장자를 읽다가 이런 대목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상자에 보물을 넣고 자물쇠로 잠그고 끈으로 잘 묶어 두었다. 그런데 도적놈은 그 상자를 몽땅 들어가버렸다. 그러면서 자기가 가져가는 데 안전하게 되었는가 자물쇠를 확인하고 묶은 끈이 단단한가를 살핀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런 내용이 있다. 큰 도적은 나라나 집단을 도적질하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귀한 보물들, 즉 사상 철학 윤리와 도덕 관습 따위를 함께 훔쳐간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잘 활용하여 성현의 정치를 하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들어 내는 온갖 제도, 문화, 철학과 사상과 과학 따위는 매우 귀한 보물들이다. 그것들이 나라라는 틀 안에 있다. 지금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나라라는 틀을 가지려는, 아주 험하게 말하면 훔치려는 행위는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온갖 감언이설로 시민들의 맘을 얻고 표를 얻는 자가 나라라는 보물상자를 얻는다. 못된 도적은 그 속에 들어 있는 보물들을 제 멋대로, 제 동무들과 나누어 즐기는 것으로 쓴다. 이 때 제대로 되려면 그들에게 맘을 주고 표를 준 주인들이 깨어있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은 깨어 있는 시민, 생각하는 시민이 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깨어 있다는 것을 언제나 스스로 깨우치고 알리는 행동도 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제 삶을 살 것이다. 대신 살아주는 이는 없는 법이니, 내 삶 내가 살아간다는 의식으로 살 일이다.

2024/07/11

[김조년] 어느 길을 걸을까? < 금강일보 2024.07.09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어느 길을 걸을까?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어느 길을 걸을까?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4.07.09

한남대 명예교수

길을 갈 때 우리는 언제나 갈림길에서 망설이게 된다. 어느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가? 선택하기 전에는 선택의 가능성이 무수히 많지만, 그러나 그 중 어느 한 길만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미리 어디를 가야 한다는 목적이 확실히 설정되어 있다면 갈림길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지 않겠지만, 우리 인생길은 결코 그렇게 어디를 가야 하는 것처럼 분명한 길이 앞에 깔려 있지 않다. 물론 어디로 가겠다고 목적이 설정되었다 할지라도, 일단 어느 길로 접어들면 거기에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나서 다시 결정해야 할 상황에 맞부딪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무수히 많은 갈림길에 선다. 아니, 그 갈림길에 선다기보다는 갈림길 자체가 내 삶인지 모른다. 그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여 가는가 하는 것이 내 삶인지 모른다. 설령 누구인가가 겉으로 보기엔 그냥 자연스럽게 그 길을 선택하여 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길을 가는 그는 내심 깊은 확신과 목적에 따라서 그 길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평탄한 길을 잘 걸어온 듯한 내 앞에도 언제나 많은 갈림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왜 어찌 그 길을 선택하였을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집에서 나서서 동구밖에 서 있는 큰 느티나무가 있는 곳까지는 두 길이 있었다. 하나는 동네를 가로질러 가는 마을 길이요, 다른 하나는 나무다리를 건너서 논둑길을 따라 가는 길이었다. 나는 논둑길을 즐겨 걸었다. 학교를 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느티나무 밑에서는 선배들이 언제나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다 모아놓고 때가 되면 줄을 맞추어 학교로 갔다. 신작로를 따라 가야 하기에 안전하게 가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집단으로 하는 것이 싫었다. 그때 나는 아이들이 느티나무 밑에 모이기 전이나, 이미 학교로 떠난 뒤에 자주 신작로길 대신 조금 높게 쌓여 있는 뚝방길을 따라서 가기를 즐겼다. 무엇이 나를 그런 길을 선택하게 했는지 모른다.

또 내 인생길에는 훨씬 더 많은 갈림길이 내 삶에 언제나 놓여 있었을 것이다. 상급학교에 진학한다든지, 어떤 과목을 더 공들여 공부한다든지, 언제 어떤 것을 읽고 쓴다든지, 누구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늘 갈림길에서 선택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때로는 내 스스로, 때로는 어떤 강요에 의하여 선택하였을 것이다. 그러할 때 나는 어떤 길을 어떤 원칙에 따라서 어떻게 선택하였을까? 나는 물과 바람을 따라 사는 삶이면 참 좋겠다고 언젠가부터 생각했다. 물길은 항상 낮은 데로 나있다. 항상 물은 낮은 데로 지극히 자연스럽게 흐른다. 그 자연스러움이 좋다고 생각해 왔다. 노자 도덕경을 읽을 때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아주 잘 사는 것은 마치 물과 같다고 했으니. 그리고 또 내가 좋아하는 바람은 어디로 흐를까? 빈 데로 흘러간다. 꽉 찬 데는 피하고 바람은 언제나 텅 비고 틈이 있는 곳을 찾아 흐른다. 좋고 나쁘고 선하고 악한 것을 고르지 않고 그냥 빈 곳으로 흐른다. 그렇게 하여 온갖 소리를 다 낸다. 그것처럼 나도 살고 싶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나 젊었을 때는 가능하면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고 싶었다. 사상체계도 그랬다. 이리저리 헤맨다. 그러나 험하고 낮고 더럽고 힘드는 길을 선택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물론 때때로 가다보면 험하고 더럽고 낮고 힘드는 곳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냥 우연일 뿐, 내가 그러한 길을 선택하여 만났던 것은 아니다. 그곳으로 가면 그런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미리 알아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조금 나이가 들어서는 가능한 한 넓은 길 평탄한 길을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 길을 택하면 그리 가지 않을까 하는 맘으로 선택하지 않았을까? 생각으로는 좀 개척이 가능한 곳, 모험할 수 있는 곳, 힘들어도 의미가 있는 곳을 선택하고 싶었겠지만, 실제로 내 발길이 잡은 방향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지 않았을까? 저것을 따라가면 분명히 가시밭길이나 자갈길을 갈 것이라고 판단될 때는 그 길을 버리지 않았을까? 그리고는 가능한 한 그러한 고난의 길이 아닌 길을 찾으려고 애를 쓰지 않았을까? 그러나 삶의 길은 한 번 방향을 잡았다고 하여 그 길로 쭉 가는 것은 아니다. 편안할 것이라고 판단되어 선택한 길을 가다보면 또 거기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또 다른 상황들이 다가온다. 가는 곳마다 끝없는 갈래길이 수도 없이 많이 펼쳐진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고, 어떤 집단도 나라도 사회도 다 그렇겠지.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때 그때 골라서 가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묘한 힘에 의하여 내가 그곳으로 인도된 것이 아닐까 느낄 때도 많다. 물론 내가 골라서 간 길이지만, 분명히 나 혼자만이 결정한 것이 아닌, 그 어떤 힘의 작용으로 그 길을 내가 간 것이 아닐까? 그 힘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때대로 할 수만 있다면 정의롭게, 사랑스럽게, 평화롭게, 정직하게, 부드럽게, 서로 어울리면서, 아름답고 낭만스럽게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하고 싶다. 그런데 어떤 때는 편하고 쉬운 길을 가겠다고 선택하면 맘이 매우 불편할 때도 있다. 그 때는 어렴풋이 내 속에 자리잡은 어떤 삶의 원칙이나, 옳다고 여겼던 것과 어긋나는 길을 내가 선택했던 것이 아닐까? 그와 다르게 어떤 때는 좀 힘들고 고난스러운 길을 따랐는데, 몸과 삶이 편하지 않지만 맘은 아주 편안한 것을 느낀다. 이 때는 분명히 내 속에 있는 어떤 기운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가 지금 매우 힘든 길을 뻑뻑하게 맘 편하지 않게 가는 느낌이다. 사람들 맘 속이 편안할 어떤 힘에 따라 가는 사회문화의 정착은 어떻게 될 수 있을까?

2024/03/20

[김조년] 양심: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양심: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양심: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4.03.19

한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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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일요일 오후 국립대전현충원 장병4묘역 413판 13706호 해병 채수근 상병의 묘소에 다녀왔다. 아직 시들지 않은 꽃다발들이 여럿 놓여 있었고, 그와 함께 훈련을 받은 1289기 동기들이 갖다 놓은 꽃다발이 있었고, 군대 내무반 그의 사물함에 있던 메모장과 필기도구와 기타 소소한 것들이 비를 맞지 않게 만들어진 유리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의 편지가 새겨 있었고, 죽은 뒤 자신이 천국에서 썼으리라는 가상의 편지가 새겨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있었다. 비석 뒷면에는 2003년 1월 2일 전북 남원에서 출생하여 2023년 7월 20일 경북 예천에서 순직했다고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비석 옆면에는 2023년 보국훈장 광복장이 추서되었다고 새겨져 있었다. 그것으로 그의 죽음은 정리된 것일까?

한참 바라보고 고요히 생각하여 보았다. 비약이긴 하지만, 이 때 내 맘 속에 채수근 상병과 세월호 침몰로 사망한 단원고 학생들과 이태원 할로윈 축제 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우리의 개인과 사회양심을 재어보는 잣대요 저울이며 비춰보는 거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 두 이름이 크게 맞대어 나타났다. 해병대령 박정훈과 대통령 윤석열이었다. 한 이름은 숙연하고 자랑스럽고 산뜻하고 옷깃을 여며 다시 입에 올려 부르며 예배하게 하지만, 다른 한 이름은 다시 생각하거나 부르고 싶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한다. 이 때 양심이란 말이 가슴을 세게 쳤다.

양심, 양심이 무엇일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산다면 양심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한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양심, 그것은 ‘하느님이 돌보시고 이끄시는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에 따라서 다른 말로 바꾸어 불러도 될 것이다. 아무튼 양심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활력소다. 그것이 파랗고 팔팔하게 살아 있다면 온 뫔 전체를 빛나고 당당하게 이끌어 놀라운 삶을 살게 하지만, 그것이 쭈그러졌거나 구멍이 났거나 더러움으로 덮여버렸다면 온 뫔이 축 처지고 생기가 없고 무기력해진다. 나는 최근에 이 양심이 파랗게 살아서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듣고 그 행동을 바라보는 나에게도 고마움과 생생함을 주는 사람을 매스컴을 통하여 보았다. 다시 써보지만 그 이름은 박정훈이다.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으면서 그를 그답게 만든 양심이 어떤 외부의 영향으로 구겨지는 슬픔을 맛보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이 때 세상을 떠난 채 상병이 왜 이렇게 크게 온 사회를 뒤흔드는가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그와 비슷한 사건들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미미한 것으로 처리될 수도 있었을 이 사건이 왜 유독 큰 문제로 떠오르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 이 시대를 시험하는 시험지요, 이 시대의 양심을 재어보는 잣대요 저울로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해본다. 그 시험 저울의 한 면에는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국가권력이 올려져있고, 한 쪽에는 대령 계급장을 단 한 군인과 그를 응원하는 보이지 않고 소리도 별로 없는 듯이 지켜보는 것들이 올려져있다. 올바른 일을 했기 때문에 그에게 덧씌워진 항명죄로 재판을 받는 그를 거대한 국가권력이 합심하여 어렵게 할는지도 모른다. 물론 무죄로 풀려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죄가 있다고 판결이 되든, 아니면 무죄가 되든 그가 던진 양심의 빛은 맑고 밝게 빛날 것이다. 설령 국가권력이나 언론이나 여론이나 법해석과 법적용을 통한 집단테러로 그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이 난다 할지라도 그는 살고 그를 어렵게 한 것들은 시들한 삶을 살 것이다. 그이의 당당한 모습을 보라. 그러나 그를 죄 주겠다는 직위를 가진 사람들, 그들이 최고통치자든, 장관이요 별을 몇 개씩 단 사령관이든 그들의 얼굴에서 빛을 느낄 수가 없다.

가만히 생각하여 본다. 이렇게 고난을 받는 양심, 팔팔한 양심 때문에 고난을 받는 사람은 고난으로 그 자신도 빛나지만 우리 사회 전체의 꺼져가는 양심을 살리는 일을 한다. 그가 그렇게 어렵게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지만, 그것으로 놀랍게 사회양심은 뽀송뽀송 살아나며 파릇하게 된다. 설령 그가 재판에서 죄가 있다고 판결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기소문과 판결문이 합하여 더러운 사회양심을 고발할 것이다. 그 고발장은 다시는 그와 같은 반양심스런 국가권력행사를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대통령이라고 사사로이 권력을 행사하거나, 피의자를 먼 나라에 가서 일하게 하는 대사로 임명하거나, 그 임명장을 마치 구원의 소식이나 되는 듯이 덥석 받아서 멀리 도망하게 되는 그런 쪼잔한 행동을 다시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게 했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얼마나 궁색하던가? 그래서 채 상병의 죽음과 그 원인을 밝히려는 이 과정은 곧 우리 사회의 양심을 재어보는 시험지란 말이다. 거기에 박 대령이 자기 양심으로 답을 썼다. 또 다른 답을 써야 하는 것들이 자기가 써야 할 답을 채점관의 채점란에 쓰려고 한다. 이러한 우스운 일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집단양심은 파릇한 곳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게 될 것이다. 양심은 시대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나타나는 것이지만, 간혹 한두 사람의 놀라운 양심의 소유자를 통하여 전체를 관통하고 밝히는 보편양심으로 개인과 사회 전체를 밝혀준다. TV 화면에 당당하게 비치는 박 대령의 얼굴과 생기 잃은 대통령의 얼굴은 바로 이 두 세력이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가를 예시해주는 장면이다. 나는 모두가 다 생기 있는 얼굴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2024/02/10

[김조년] 내 삶: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할 수밖에 없는 것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내 삶: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할 수밖에 없는 것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내 삶: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할 수밖에 없는 것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4.02.06 

입춘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입춘대길’ ‘건양다경’ ‘만사형통’ ‘기운생동’ ‘윤집궐중’ 등 가족이나 집단이나 개인에게 축복하고 기원하는 글을 써서 대문이나 다른 쪽문에 한자 팔(八)자 모양이나, 한글의 ㅅ 모양으로 붙여 놓았다. 그 문을 통하여 그런 기운이 들어오기를 바라기도 하였을 것이고, 그것을 보거나 그 문을 통하여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그런 기운이 들기를 바라는 맘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말들을 새봄을 맞는 인사로 써서 붙이거나 아는 벗들에게 보낸다. 나는 이것을 지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고쳐서 ‘새봄 새날같이 산뜻하고 팔팔하게’라고 써서 나 자신에게 보냈고 또 몇 벗들에게 보냈다. 이 말을 생각하고 쓰고 보내면서 내 삶은 어떠한가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우리의 일생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과 하고 싶지 않지만 하는 일 중에 어느 것이 더 많을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정말로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만을 하고 살 수 있을까? 사람은 정말로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 잘 사는 것일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끊으면 정말로 행복할까? 이쯤에서 나는 가만히 이제까지 내가 살아오는 동안 어떻게 무엇을 하고 살아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얼마만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으며, 얼마만큼 많이 하고 싶지 않지만 하였든지, 아니면 할 수밖에 없어서 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내 삶은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지 않은 일, 하고 싶은 것인지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거나 하지 않는 일, 또는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어떤 의무감이나 관습에 따라서 하는 것 따위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싶은 것 중 어느 것을 했으며, 지금 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 할 가능성이 있고, 전혀 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분류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고 싶지 않은 것 중에서 이미 한 일, 지금 하고 있는 일, 언젠가는 그만두고 싶은 일과 하고 싶지 않지만 도저히 그만 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일 따위로 나누어 따져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큰 종이에 그런 것들을 나열하여 써보고는, 그것들의 우열이나 경중을 살펴서 분류하여 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벌려놓고 보니 하고 싶은 일 중에 내가 잘하였다고 판단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하여 능력이 좋은 것도 있고, 전혀 능력이 없어서 지루하거나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다. 또 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아주 탁월하게 그 일을 잘 수행한 것도 있고, 하기 싫지만 삶의 형편을 보아서 도저히 중단할 수 없는 것이거나, 또 중단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때로는 그러한 일들을 내가 스스로 찾거나 맡아서 하는 것도 있고, 남이 떠넘기기에 받아서 하는 일도 있다. 어떤 것은 은근히 바라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 마치 떠밀려서 하는 것처럼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어영부영하다가 세월을 보내면서 한 삶을 유지한 때도 있다. 어떤 흐름에 밀려 사는 삶도 있다. 따지고 보니 이것도 내 삶이요, 저것도 내 삶이다. 그러나 또 엄격히 살피면 이것도 내 삶이 아닌 듯, 저것도 내 삶이 아닌 듯한 것이 얼마나 많던가? 아무리 따져도 딱 이것은 내 삶이고, 저것은 내 삶이 아니라고 자르고 갈라서 판가름할 것이 나타날 것 같지 않은 것도 참 많다. 그래도 새해가 되고, 새봄이 되니 내가 참살이를 하는가 아니면 헛살이를 하는가를 따져본다.


어찌 보면 내가 고르고 바라는 것이 내 삶인 듯이 보이지만, 어떤 때는 전혀 그렇지 않지만 그냥 내 앞에 그 때 그렇게 다가왔기에 그것을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인 듯이 보이기도 한다. 한 발 살짝 옆으로 비켜섰더라면 전혀 그 때와 같은 그 삶을 만날 수 없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삶이 이렇게 진전되지 않고, 아주 딴 방향으로 흘러가는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이 우연인 듯 필연이고, 필연인 듯 우연으로 보이는 것이 얼마나 많던가? 겉으로 나타나는 내 삶은 꼭 이것이라야 한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아니라고 하여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 의지에 의하여 선택하여 사는 삶인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더 엄밀히 따지면 그런 내 의지에 의한 것인 듯 전혀 나 밖의 어떤 것에 의하여 그렇게 이끌리어 된 삶인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누구는 ‘하느님의 발길에 채여서’ 산 삶이라고 자신의 삶을 규정하기도 했다. 꼭 그이의 삶만이 ‘그의 발길에 채여서’ 산 것이던가? 모든 삶에는 ‘그이의 이끄심’이 있어서 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 삶이 아닌가? 언젠가 말했듯이 내 삶으로 엮여진 것들은 다 내 것인 듯 공공한 것이란 말이다. 내가 살지만 남과 함께 그렇게 사는 것이고, 사사로운 듯 공공한 삶을 산단 말이다. 모든 삶이 다 내 삶이 아닌 듯 내 삶이다. 싫다 좋다를 떠나서 일단 내게 다가오는 그것은 다 내 삶이란 말이다. 거기서 가질 자세는 불을 보듯이 분명하다. 어떤 삶의 양상이든지 나는 그것을 통하여 행복하고 정의롭고 당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또 내 삶의 방향설정은 어떤 삶의 상태가 아니라 ‘선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내 삶이라고 선언하고, 또 이 삶에서 나는 행복하다고 선언하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선언’하면서 긴 나그네 길을 가는 것이 아닐까?


2024/01/11

[김조년] 나에겐 가을서리 같고, 남에겐 봄바람 같이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나에겐 가을서리 같고, 남에겐 봄바람 같이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나에겐 가을서리 같고, 남에겐 봄바람 같이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4.01.09


어려서부터 집안의 어른들이나 학교 선생님들께 참 많이 듣고 스스로 그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것이 있다. ‘나에겐 가을 들판에 내리는 서리(추상·秋霜) 같이 엄하게 하고, 남에게는 훈훈한 봄바람(춘풍·春風)처럼 하라’는 무서운 말이다. 요사이는 기후가 많이 변해서, 또 사람들이 추위나 더위를 이겨내는 기술을 많이 개발하여 자연이 주는 그대로를 오롯이 받아들여야 했던 때와는 전혀 달라져서 이 말을 받는 느낌도 상당히 많이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가을들판에 서리가 내리면 어느 정도 싱싱하던 농작물들은 후줄근해지고 성장을 끝낸다. 가을서리는 그런 면에서 보면 무서운 형벌이다. 채찍이다.

그것처럼 사람이 사람답게 제대로 자라고 살려면 자기 자신이나 제 식구들이나 주변의 사람들의 잘못에 대하여는 가을 서리처럼 무섭게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신 남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는 모든 것을 녹이고 포근하게 감싸서 언 것을 녹이고 새싹을 틔우게 하는 훈훈한 봄바람처럼 대하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는 참 좋았다.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도 좀 해 보았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더 많이 느낀다. 성경에도 나오듯이 내 눈에 들어있는 대들보 같이 큰 흠을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들어 있는 아주 작은 티끌을 보고 나무라는 놀라운 능력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내 몸에 묻은 똥을 보지 못하고, 남의 옷에 겨가 살짝 묻은 것을 아주 더럽다고 심하게 나무란다.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과는 달리 자라면서 내가 익힌 실제 생활은 이렇게 거리를 많이 하고 있었다. 어느 한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상당히 넓고 많은 사회분야에 늘펀하게 깔려 있는 것이 그런 것인 듯하다.

요사이 나는 많은 사람들을 참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 중에 두 사람을 압축하여 보게 된다. 그들을 보면서 인생을 참 어렵게 사는구나 하는 참 안쓰러운 느낌을 가지기도 한다. 하나를 볼 때는 저 인생이 왜 저렇게 곤고하고 힘들어야 하는가 하는 아픈 맘을 가진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도 받지만, 그에 못지않게 심하게 욕먹고, 경찰과 검찰에 의하여 굉장히 심하게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고, 그러다가 심지어는 목에 칼을 받아 생명의 큰 위험에서 기적같이 살아났다는 그 사람을 볼 때, 왜 저 인생이 저렇게 힘이 들까 맘 깊은 곳에서부터 아픔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저러한 어려움이 파도처럼 겹쳐서 다가오는 데 왜 그는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보겠다고 자기 몸을 단련하면서 살까?

그런가 하면 또 한 사람은 남의 몸과 맘속에 붙은 작은 먼지까지도 탈탈 털어보는 삶을 그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살았던, 그래서 온 몸과 마음이 그렇게 남의 잘못을 찾고 벌주는 것이 일생일대의 과제로 알고 사는 사람도 내 눈에는 참 불쌍하게 보인다. 뭐 할 일이 없어서 남의 잘못이나 파고 캐는 일을 제 사명으로 삼고 사는 인생을 어떻게 귀한 일을 한다고 칭송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그런 삶 때문에 나라의 일반 사람들의 삶까지도 책임 지는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그 부인과 주변 사람들에 아주 지저분한 일들이 많다고 언론과 사람들이 말한다. 그렇게 남의 잘못을 파내는 탁월한 능력과 눈길이라면 자기 자신이나 주변에도 추상같은 엄혹함으로 다스려 공정한 삶을 스스로 살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어서 그 높은 자리에까지 올려놓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그는 엄정하지 않구나 하는 판단을 하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 남에게는 엄격하지만, 자신과 주변에는 봄바람처럼 훈훈하다는 판단을 하게 하는 일을 그는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그의 화면에 비치는 얼굴에는 평온함이나 안온함이 보이지 않고, 불안과 분노와 짜증이 가득히 보인다. 그 때 저 인생도 참 불쌍한 존재로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한 개인의 비리를 잘못 수사하거나 수사하지 않았다고 국회에서 특별검사법을 만들어 수사해야 한다는 것은 보통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국회에서는 대통령 부인이 저지른 일에 대한 공식 수사가 없었다고 하여, 특별검사를 동원하여 수사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는 그 법을 즉각 거부하였다. 모든 정치행위에 진실성이 얼마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른바 국정책임자는 자기 전 존재로 참을 실현하므로 국민을 교육할 의무가 있다. 공인이라면 자신과 주변을 깔끔하고 깨끗하게 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어떤 불미스러움이 자신이나 주변에서 일어났다면 철저하게 털고 나가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그는 이번 자기 부인에 관련된 문제로 일어난 그 일을 수사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렸다. 가장 큰 공공한 권력을 사사로운 일을 지키는 데 사용한 못된 사례가 될 것이다. 자기와 관련된 문제를 자기가 결정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 하는 제척사항에도 벗어나는 일이다. 상대방이 졸렬한 정치행위로 했다고 한다면, 정정당당하게 참의 길로 가는 자세를 보여야 했다. 공공함을 좁은 사사로움으로 처리한 그 인생이 참 불쌍하게 느껴진다.

한 인생에 대하여는 왜 그런 곤고한 삶이 끝나지 않고 지속될까 안타까운 맘이 들면서 그 고난의 음침한 굴을 속히 벗어날 수 있기를 빌고, 또 한 인생에게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너무 큰 자리에 앉아서 허덕이는 그 모습을 볼 때 참 슬프고 안타깝다. 여기는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요, 이 옷은 내가 입을 것이 아니다 하고 훌훌 벗어던지는 그 인생의 놀라운 기적을 볼 수 없는 것일까? 다시 나에게는 가을서리 같고, 남에게는 봄바람 같은 삶을 생각해본다.

2023/10/05

[김조년] 깊은 숨을 쉬고 < 금강일보2023.10.04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깊은 숨을 쉬고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깊은 숨을 쉬고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3.10.04 10:1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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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 명예교수

작년부터 나는 이상스럽게 진정으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글을 자꾸 쓰게 된다. 이것은 나에게 하나의 슬픔이고 비극이다. 나에게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도록 하는 우리의 현실 역시 내가 판단하기에 슬프고 비극스럽다. 나는 정말로 정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지 않다. 불평과 불만과 비판 대신에 희망과 긍정의 말들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다. 때로는 깊은 시를 읊고 싶고, 깊은 사상을 음미하면서 나도 그렇게 깊게 들어가고 싶다. 달라지는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평화롭고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고 있는 우리의 정치상황을 볼 때 내 생각의 실마리는 그런 것으로 가지 않고, 자꾸 정치현실 문제로 치달린다. 그렇다고 내가 정치 일선에 나서겠다거나 어느 정치가를 지지하면서 자문하고 싶은 맘은 조금도 없다. 다만 정치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삶이기에 그것들에 무관심하고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 벌써 한 해 반에 가까워온다. 그 동안에 무엇이 달라졌나? 입법부가 무기력해졌고, 대통령실은 입과 귀를 막아버린 것처럼 보이고, 행정부도 소통이 없어졌다. 여야 정치가들의 대화나 논쟁이 없다. 정치가 달라지려면 법을 만들거나 고쳐서 제도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당이 입법부에서 소수라는 것 때문에 법개정이나 제정을 통한 제도 개편은 전혀 시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야당이 주도한 법은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린다. 누가 보아도 꼼수라고 할 수밖에 없는 시행령을 통하여 법제정의도와는 상반되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들이 많다. 대다수 국민들이 바란다는 검찰개혁은 행정명령을 통하여 무력하게 되었다. 오히려 검찰국가라는 말이 나올 만큼 더 강력하거나 살벌한 검찰권력이 모든 분야에 관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검찰출신 대통령을 정점으로 굉장히 많은 분야를 검찰 출신으로 채웠다는 비판을 받는 지경이 됐다. 검찰권력은 정점을 이루고 있다. 정점에 다다른 흐름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돼 있다. 높을수록 흘러내리는 속도와 힘은 강하고 빨라 깊은 곳으로 빠진다.

한일관계를 부드럽게 했다고 하지만, 한미일 군사동맹을 새롭게 하면서 북한, 러시아, 중국과 대척하는 갈등관계를 고조시키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세계의 강대국, 또는 선진국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하면서 지나친 미국 중심의 외교와 국방관계에 빠진 형국이다. 더 깊은 미국 중심의 종속국가체제로 들어간 상황이다. 이렇게 되니 국가 원수라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평화를 말하지 못하고 신냉전과 전쟁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갈등구조를 강화하게 하였다. 핵무기보유와 핵전쟁의 위협에 대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최근에는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여 도발할 경우 그 정권 자체가 위험하게 될 것이란 말을 하였다. 우리 한반도에서 남과 북 중 어느 측이 먼저 핵무기를 쓴다는 것은 남북 모두 전멸할 것을 각오한 악한 행위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먼저 쓰고 나중에 응징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핵개발과 핵무기사용 자체가 없도록 하는 평화체제로 나가는 정책이라야 옳다고 본다. 그런데 화해와 상생의 이야기와 정책은 없고, 오로지 군사우위와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살벌한 말로 일관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폭넓은 대외무역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물가는 수시로 오르고, 소상공인들의 가게들이 문을 닫는 것이 높아진다. 서민경제는 어렵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자동화하면서 사람들의 일자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부자감세정책으로 세수는 줄어들고, 그에 따른 재정긴축으로 축소된 부분들이 너무 많다. 특히 내년 예산에 반영될 기초연구분야의 광범위한 예산감축은 깊고 지속되는 연구와 기초학문을 어렵게 만들 것은 불을 보듯이 분명하다. 특히 연구인력을 지원하는 정책이 사라질 때는 새로운 인력을 기를 수가 없고, 유능한 연구자를 지속하여 지원할 수 없게 된다. 자연스럽게 유능한 인력들은 다른 나라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한 두 번의 그런 정책의 실수는 굉장히 장구한 세월 어려움에 처하게 만들어 회복과 갱생을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정책실현은 관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언제나 민과 관과 기업과 시민사회단체들의 공동작업이 아니고는 원활하게 사회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서 민과 시민단체들과 공동작업이나 연대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이것은 민주사회에서 퇴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아마 이런 형태로 조금 더 가면 또 다른 진영의 협력단체들을 인위로 만들게 될지 모른다.

이러다 보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대통령은 자기 자신을 바꿀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판단하는 듯하다. 학습능력이 떨어지거나 상생의 소통을 차단한 듯이 보인다. 그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이 늘지 않으면 그의 동력은 사라진다. 그도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흔히 나오듯이 극노했다거나 대노했다는 소식이 자주 들린다. 불안하고 불편하다. 들리는 말에는 그에게 참을 말하는 참모가 없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자신도 불행하고, 사회도 국가도 불행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그의 퇴진을 외치는 집회를 이어가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날까? 어찌해야 할까? 그래서 깊은 숨을 쉬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숨을 깊이 쉬는 것, 그것은 성찰이요, 연구요, 다짐이요, 자기변혁이다. 능력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그 자리에 앉은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를 넘어 전체 역사를 생각하는 간절한 맘을 모으는 일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잘한다고 생각하는 검찰권력을 버리고, 부족하다고 여기는 민생경제를 위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겸손히 배울 일이다.

 

2023/09/13

『폭력-비폭력의 사회문화 변증법』김조년 교수 특강을 마치고..202308

『폭력-비폭력의 사회문화 변증법』김조년 교수 특강을 마치고..


『폭력-비폭력의 사회문화 변증법』김조년 교수 특강을 마치고..

2023. 8. 23 기린 활동_NGO/활동 현장


2023.8.8(화) 저녁 7시30분 온라인으로 『폭력-비폭력의 사회문화 변증법』 특강이 진행됐습니다. 100여명이 참여하였고, 한승희 대표의 환대와 인사로 강의가 시작됐습니다. 강의날이 입추였고, 김조년 교수님이 아침에 매미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깼는데 그때 적었던 글귀를 읽어주셨습니다.



언젠가부터 알든 모르든 누군가가 이런 저런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하면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수락하면서 이 강의를 하게되었다고 말해주셨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오늘날 사람들이 왜 비폭력을 말할까? 지금 문명화 사회는 폭력과 비폭력 중 어느 것이 더 많고 깊은 중점을 두고 사람들이 생각할까? 폭력과 비폭력은 인간 본성일까, 버릇일까? 내 자신이 바닥부터 폭력 속에서 폭력을 기르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등의 질문들이 자신에게 던져졌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폭력성이 있는 언어를 사용할 때는 '사이다' 같다고 하고, 비폭력의 언어는 좋은 물처럼 '밍밍하고 맛이 없다'고 표현하는데 그때 노자를 떠올렸다고 하며, 노자의 말씀을 나눠주셨습니다.

좋은 것, 잘하는 것은 물과 같다. 그 물은 낮은대로 흘러가는데 모든 것들에 이득을 주면서도 다투지 않으면서 자기 것으로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물은 끊임없이 만물이 싫어하는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비폭력의 삶은 이런 물 같은 삶이 아닐까.

폭력은 공기처럼 우리 주위에 늘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시작을 생각해보면 나, 우리라는 울타리를 치기 시작하면서 폭력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조직, 체계 속에서 '당연하다는 것'을 창출하게 되는데 사회적 현상으로 전쟁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에 문명 과정이라는 것은 폭력과 폭력에 대응하는 비폭력의 변증관계에 있는데 살벌한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비폭력의 삶을 살고 제도를 만들고 하지만 그것이 다시 억압과 폭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폭력의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비폭력의 삶을 살았던 분들을 보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에 폭력으로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획일 잣대라고 합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매우 다양하고 유니크해서 하나의 잣대로 재는 것은 가능하지 않는데 수학능력시험처럼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하나의 잣대로 잴려고 합니다. 얼마전 전주 비바체 실내악 연주회에서 쇤 베르크의 피아노 5중주 연주를 들었는데 불협화음이 화음이 되는 걸 보며 무조음악이라는 것이 클래식의 틀을 벗겨내는 음악의 비폭력 운동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집 근처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짜증내지 않듯이 생명의 소리는 무조음악과 같고, 비틀즈나 재즈, 히피들, BTS 등의 음악은 음악의 비폭력 운동이지 않을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비폭력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먼저 인생관, 세계관이 달라져야 하는데 모든 사람은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고 하는 인생관이 있으면 나도 존귀하며 상대도 존귀하다는 철학이 형성되고 수련을 통해서 보편 철학, 원리를 체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 공부를 하는 것이 중요한데 고전을 읽을 때는 나에게 보낸 편지라고 생각하고 읽는 게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존경하는 김성순 선생님과의 일화를 들려주셨는데 김성순 선생님이 함석헌 선생님이 쓰신 <뜻으로 본 한국역사> 책을 가지고 계셔서 앞에 보니 "김성순 군에게, 1992년 함석헌"이라고 쓰여있었다고 합니다. 이 헌사는 나올 수 없는 게 함석헌 선생님이 1989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받으셨냐고 여쭤보니 "내가 선생님께 받았지. 내가 서점에서 사가지고 내가 썼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지식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련이 중요한데 일상에서 수련으로 끊임없이 나타나야한다고 했습니다. 비폭력대화야말로 맑은 삶, 평화로운 삶, 비폭력이라는 삶이 있을 때에 비폭력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화가 날 때 잠시동안 숨을 쉬고 즉각 반응하지 않고 생각해보는 것, 이런 것들이 치열하게 일상에서 수련돼야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암담한 현대사회를 생각하게 되는데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세 가지 막막한 어려운 상황, AI, 기후환경 변화, 전쟁의 일상화를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세가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적 실천의 결과인데 인간의 문명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일어났지만 또다시 장구한 세월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명함에 쓰셨던 문구를 읽어주시면서 희망의 말을 전해주셨습니다.

한방울의 먹물이 한동이의 물을 더럽힐 수 있다면,
한방울의 맑은 물이 대양과 같이 오염된 바닷물을 맑힐 수 있지 않을까.

강의 후에 참여하신 분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고, 아쉽게도 한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훌쩍 지나 짧은 소감들을 나누며 강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23/07/18

비폭력의 길 특강((8/8, 온라인) '폭력-비폭력의 사회문화 변증법'의 주제로 김조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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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의 길 특강((8/8, 온라인)
'폭력-비폭력의 사회문화 변증법'의 주제로 김조년 교수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듣고 함께하는 시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ㅇ일시 : 2023. 8. 8(화) 저녁 7시 30분 ~ 9시
ㅇ장소 : 온라인 ZOOM (추후 공지)
ㅇ강사 : 김조년 교수 (한남대 명예교수)
ㅇ대상 : 관심있는 누구나
ㅇ참가등록: https://event-us.kr/BmaiDd5KpLYf/event/66233
ㅇ참가비 : 10,000원 ※ 후원회원 무료
- 참가비 납부: https://online.mrm.or.kr/7gJ4h3r
- 직접입금 계좌: 국민은행 012501-04-230391 한국NVC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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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4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 김조년(Cho-Nyo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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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house Lecture 2018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
-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하여 -
 김 조 년(Cho-Nyo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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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house Lecture 2018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 
- 새로운 종교를 찾기 위하여 - 
  김 조 년(Cho-Nyon Kim) 
 
* 왜 나는 이 강의를 맡았는가? 모든 것은 변하고 또 변한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에서 항상 경험하는 것이 변화다. 관점도 달라지고, 세계도 달라진다. 민족도 국가도 종교도 철학도 그 내용이 달라지면서, 그것을 보는 관점도 달라진다. 달라짐은 때때로 있던 것들이 사라짐이지만 동시에 새로 운 모습으로 확장되는 것이요 풍부하여짐이다. 그래서 동시에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새 로운 것은 덧붙여진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통과 정체성의 문제이 면서 새롭게 첨가되는 깨달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퀘이커를 만난 뒤부터 퀘이커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어떤 것도 규정하거나 기준이나 신조를 만들려 하지 않는 퀘이커의 전통과는 아 주 먼 시도였다. 그러나 내가 퀘이커의 회원으로 정식 등록 된 뒤에도 이에 대한 노력을 끝없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퀘이커 됨이란 무엇인가를 내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하 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이미 형성된 퀘이커됨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찾는 자(seeker)로서의 진지한 자세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노력할수록 퀘이커들이 주장하고 살아가는 것들이 내게 구체적으로 잡히기보다
는 모두 추상적이었다. 막연하였다. 
예를 들면, ‘내면의 빛’ ‘내면의 소리’, ‘내 안에 계신 그 님’. 퀘이커들이 말하는 이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불교와 유교와 도가와 한국 고유의 생활(민속)종교 속에서 살아왔던 우리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옥황상제’, ‘용왕’ ‘염라대왕’이나 ‘극락’ 또는 ‘서방정토’ 따위, 또는 기독교인이 된 뒤 수도 없이 많이 들어온 ‘하느님’, ‘성령’, ‘메시아’, ‘그리스도’, ‘구 원’, ‘해방’이나,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도’(Tao), ‘진인’(眞人), ‘자연’ 또는 불가(佛家)에 서 말하는 ‘내 안의 부처’나 ‘성불(成佛; 부처가 됨)’, 해탈 등이 모두 추상적으로 다가왔
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분명한 것이 없었다. 다만 이러한 추상개념들은 일상생활과 매우 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분명하였다. 
그래서 그런 개념들의 설명이나 이해보다는 좀 더 일상생활과 긴 한 관계가 있다는 퀘이커들의 생활태도에 대해서 더 끊임없이 궁금하였다. 다시 말해서 퀘이커가 매우 좋 아하고, 모두가 실천하려고 하는 말들, 즉 평화(Peace), 단순함(Simplicity), 평등 (Equality), 컴뮤니티(Community), 진리(Truth),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진실 (Integrity) 등도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이것들 역시 이해하고 실천하기에 매우 쉽지가 않다. 그 말들에 대해 매우 깊은 매력을 느끼지만, 그것들을 생활에 적용하여 실 천하려 할 때 매우 추상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그것들은 상황과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복잡해지고, 생활공동체는 깨지고, 평화보다는 다툼과 전쟁의 위험으로 가 득하고, 통합과 함께하는 삶보다는 분별, 분열이 가득하고, 점점 더 차등이 심화되며, 자 연파괴를 넘어 생명의 종말을 촉구하는 문명의 발달과 사건들이 많아지는 이 때에 이런 퀘이커의 전통처럼 내려온 삶을 실현할 길이 어디에 있는가? 특히 가장 단순하게 산다는 것이 곧 복잡하고 화려하게 살도록 규정된 현대문명사회에서 어떻게 그 삶의 전통을 지 키면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세계는 전과 같이 민족과 나라와 지역을 넘어 인류를 생각하고 전 지구를 하나로 보며 문화의 융합과 공존을 꾀하는 지금, 어느 한 종교의 종파성을 주장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미 한계를 넘었다고 본다. 퀘이커는 어떤 종파성에 얽매는 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끊 임없이 하여 왔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함은 물론 중요하다. 이러한 때 동양의 고전 중에서 가장 평화롭고, 단순하며,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아 끼고 귀하게 보며, 형식과 규범을 넘어 자연(도)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주장한 도가의 이론과 삶을 찾아보는 것은 퀘이커 종교성 확장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것들을 비교하 는 것이 아니라 퀘이커를 보충하거나 확장하기 위하여 도가의 영성, 또는 신비를 살피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영성과 신비는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건들에서 들어나기 때 문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내가 낳고 자란 한국사람들의 일반적 종교생활, 종교성과 나의 성
장을 살펴보고, 한국사회를 오래도록 이끌어 온 유교, 불교, 민속종교들의 진화와 새로 들어온 기독교의 토착과정을 간단히 살핀 뒤, 퀘이커가 추구하는 것들과 도가에서 추구 하는 핵심점들의 만남을 살펴본다. 그런 다음에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살아간 한국의 초기 퀘이커 중 한 사람인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살핀다. 마지막으로 퀘이커로서의 내 삶의 방향설정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주로 질문 형태로 정리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주장이 아니라 내 궁금함의 표현이다. 이것은 나의 퀘이커 됨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요구이다. 이것은 동시에 미래의 퀘이커를 걱정할 만큼 젊 은 퀘이커들이 현격하게 줄고, 퀘이커들의 노화현상은 바로 직면한 문제다. 이것은 퀘이 커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경험하는 현상이다. 그러한데도 많은 사람들은 바로 퀘이커 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종교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서 어떤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바로 전통적 퀘이커를 선전하고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문화전통과 종교전통의 진수와 퀘이커의 진수를 접목시켜 확장된 종교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는 퀘이커의 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 다. 
나는 퀘이커를 만난 것을 매우 큰 기쁨이요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 동시에 매우 큰 삶 의 부담으로 느낀다. 신앙과 그 믿음을 일상생활에서 실현하는 문제에서 퀘이커들이 모 범이 되어 그 흐름에 몸을 싣고 싶지만, 나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는 점 에서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이 형식화한 세계에서 실제를 살고 싶은 맘에서는 내 자신 이 퀘이커를 만난 것을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 믿음에 성실하지 못하는 것에서는 내가 퀘이커라고 누구에게 말하는 것을 매우 주저스럽게 한다. 특히 초기의 퀘이커 선배들, 조지 폭스의 일기를 읽으면서 나에게는 그런 감동과 떨림과 진리에 대한 헌신의 움직임 을 경험할 수 없는 것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 당시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종교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체에 흘 던 것같은 느낌이 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의 흐름과 기성종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노력 등에서 사회 전체 는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느낀다. 그러한 때이지만 조지 폭스 등 초 기의 친우들의 삶은 매우 곤고하였으며 이상한 것으로 취급을 받았다. 그러한 상황 속에 서도 믿음을 지키려는, 곧 진리를 따르려는 그 삶은 매우 감동스럽다. 그것은 마치 신약 성경의 사도행전을 읽을 때 느끼는 감동과 같다. 내 자신도 그런 삶 속에 있고 싶다. 그 러나 지금은 매우 비종교적 사회분위기, 종교없는 종교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사는 느 낌이다. 물론 종교라는 조직과 교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수는 매우 많지만, 형식화한 종교에서 내용에 충실한 종교생활을 실천하는 수는 매우 적다. 동시에 종교, 정치, 경제, 문화, 학문, 일상생활의 친분과 교류에서 비종교적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는 듯하다. 이러 한 때 깊은 종교성을 띈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는 초기의 퀘이커 친우들이 가졌던 철저한 진리추구와 그 삶을 실 현하려다가 겪은 고난의 경험이 없다. 매우 평범하고 평이한 종교의 삶을 살아왔다. 그 러므로 내 말 속에서 종교성이 매우 희박하며, 일상생활에서 거룩함을 찾기가 어렵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으로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몸에 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속에 살고 있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 또는 내 속에 있는 빛의 작동을 따라서 내 일상생활을 이끌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이것은 일종의 철저하지 못한 내 삶의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퀘이커의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솔직한 대답을 던져 주기가 쉽지가 않다는 점이다. 그러면 서도 이 강좌를 하겠다고 대답한 것은 단순히 이런 내 자신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종교적 사회분위기, 문화체계 속에서 어떻게 종교와 비종교가 구별되지 않으면서도 진리를 실현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질문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하여 우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펼치겠다. 그러니까 이 말 은 나의 퀘이커 깨달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묻 는 것이다. 
 
1. 나의 성장과 내 주변의 종교성 나는 무종교적이지만, 유교적 가정생활의 전통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내 가정은 유 교전통의 교육과 생활윤리 속에서 살았다. 그래서 형식상으로는 불교나 무속 또는 한국 적 샤마니즘의 생활풍속이 우리 가정에는 없었다. 우리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무 속신앙의 전통을 우리 가정에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점을 치거나 절을 찾아 부처에게 기도하고 시주하는 일이 없었다. 그분들의 언어생활에서 신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
다. 그 대신 사람이 죽고 나면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혼은 하늘로 날아가고 백은 땅에 묻힌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이 때 사람이 살아 있 때는 하나였던 것이 어떻게 죽 은 다음에는 혼(魂)과 백(魄)으로 나뉘어 각각 자기들이 갈 곳으로 가는 것인지가 매우 궁금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지도 않았지만,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그에 대 하여 자세히 설명하여 주신 적도 없다. 그러나 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할 때, 그 하늘 이라는 곳이 어디일까가 몹시 궁금했고 그것을 알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모르는 채 그 냥 자랐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집안에 차려놓은 빈소에 상징으로 만들어 놓은 혼백함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어른이 돌아가시면 집에는 빈소를 차렸다. 빈소에는 종 이상자로 만든 혼백함이 있었다. 그 안에는 청색실과 홍색실을 꼬아서 혼백을 상징하는 실무더기를 넣어두었다. 그러니까 빈소를 차리는 동안은 그 혼백상자가 죽은 사람을 상 징한다고 보는 것이었다. 그 빈소에 아침과 점심과 저녁 세 번의 상식(밥상)을 올렸다. 그 때는 언제나 혼백함을 열어서 죽은 혼령이 식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완전히 상 징을 통한 의식행위(儀式行爲)지만 아주 진지하게 그 일을 하였다. 그리고 삼년이나 일 년이 되어 탈상할 때는 그 혼백함 속에 있는 청실과 홍실을 꺼내어 땅에 묻거나 불에 태 웠다. 백을 상징하는 청실은 무덤 앞에 묻고, 혼을 상징하는 홍실은 불에 태워 날렸다. 이렇게 하여 죽은 사람은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는 예식을 치 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집에서 하는 유일한 종교행위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 은 엄 히 따지면 종교행위라기보다는 단순히 조상신을 섬기는 효도행위에 속하는 것이 었다. 그러니까 조선사회를 이끌어 왔던 유교, 그 중에서도 성리학계통의 신유교를 생활 윤리로 믿었던 가정 전통은 다른 종교행위에 대하여 배타적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신 유교와 성리학 전통과 위배되거나 배치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매우 크게 배척을 받았 던 조선시대의 전통이 우리 가정에는 일상생활 문화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이변이 생겼다. 내 증조할머니의 큰아들의 가정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며
느리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큰 손자가 죽었다. 이에 그녀는 매우 크게 상심하였다. 이 때 예수교전도사를 만나서 기독교의 복음을 듣게 된다. 그 뒤 그녀는 매우 열심히 교회 에 나갔고,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기도 방식은 한국 전통가정의 기도방 식과 같았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장독대에 물을 떠놓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 두 손을 모으거나 비비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젊어서 죽은 영혼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살아 남은 큰 아들의 안녕된 삶을 비는 기도였다.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몸을 단장하 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것은 바로 우리사회의 생활신앙전통과 일치하는 행위였다. 가정 에 무슨 일이 있거나 어떤 사람이 아프거나 멀리 떠난 가족을 위하여 빌 때는 언제나 그 와 비슷한 기도를 하는 것이 그 당시 우리 사회의 일상문화였다. 그렇게 빌고 난 뒤 일 상에서 일을 하면서 찬송가를 입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 중 가장 많이 부른 것이 ‘예 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네’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전통은 그녀의 며느리에게 내려 졌고, 나중에는 손주며느리에게 전해졌다. 물론 그녀가 직접 그들에게 전도한 것은 아니 지만, 그런 가정의 영향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내 할아버지는 이런 기독교 신앙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다. 큰 갈등은 아니었지만, 유교전통의 가정분위 기와 기독교 신앙이란 새로운 흐름 사이에 묘한 갈등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물 론 내 증조할머니나 할머니는 철저한 기독교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 에, 유교식의 가정윤리나 조상에 대한 제사행위를 진행하는 데는 별다른 갈등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중국에 가톨릭이 전달되었을 때, 그리고 조선왕조 때 한반도 에 전달된 가톨릭과 유교 사이에 매우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제사갈등 같은 것이 우리 가 정에서는 없었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미래의 삶이 나 일상생활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내 고향 마을에는 불교사원도 없었고, 유교식 사당도 없었다. 향교나 서원이 있는 마 을이 아니었다. 내 고향마을은 한국 전통사회에서 지배계급에 속하는 양반들이 사는 곳 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조선사회의 철저한 유교식 예식이나 예법으로 마을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연말에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 한 해를 시작하는 날 동네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는 산제당이 있었고, 성황당이 있었으며, 마을 입구에는 마을수호신으 로 장승이 세워졌었다. 많은 사람들은 절기에 따라서, 각자 자기집의 전통에 따라서 자 기들이 믿는 신에게 빌었다. 때로는 부엌신에게, 때로는 장독대신에게, 때로는 우물신에 게, 때로는 나무신에게 빌었다. 묘하고 큰 바위나 몇 백년 묵은 큰 나무나 깊은 골짜기 나 우물은 또한 기도터가 되었고, 그것들을 숭배하기도 하였다. 일종의 애니미즘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들에게 신은 일상생활 속에 있었다. 어느 집에나 그 집을 지키는 지킴이, 즉 업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의 전통사회에는 기독교에서 말하 는 것같은 유일신 개념이 없었다. 신은 매우 다양하였고, 많았으며, 각각 기능을 담당하 는 것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옥황상제라는 최고신이 있었으나 그것은 개념상의 신이었을 뿐,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기도의 대상은 아니었다. 물론 조상에 대한 숭배심은 매우 강했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 런 모든 제사와 비는 행사에는 언제나 음식이 마련돼 있었고, 그에 해당하는 상징물을 마련하였다. 거기에는 일정한 그에 맞는 의식행위가 있었다. 그러할 때는 언제나 전통으 로 내려오는 신의 이름들을 상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개별적이지 체 계를 갖춘 조직이 아니었다. 아플 때나 깊은 병에 걸렸을 때, 가정이나 한 사람에게 어 려운 일이 있을 때는 그들은 그들이 믿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이 것들은 조직되지 않은 일상생활의 종교적 예식행위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기독교 교회에 나갔다. 매우 낯설었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았다. 열심히 다녔지 만 의심스러운 것이 참으로 많았다. 그 중에 왜 기도할 때 꼭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하 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는 자기가 빌고 기도하는 것이지, 꼭 누구를 대신 불 러서 그의 이름으로 내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과 연결돼 있는 것으로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으로 비는 것이라 고 하였다. 내 죄를 그가 짊어지고 죽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점 이었다. 이것이 곧 십자가 신앙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그렇게 나를 대신 해서 죽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요 그는 그인데 그가 어떻게 나를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인가? 그런 그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설교나 기도 또는 찬송가를 부를 때 피, 죄, 원죄, 죽음, 구원, 부활, 영생, 멸망, 지옥, 천당, 천사, 마귀, 싸움, 승리, 사랑, 평화 따위의 말들을 많이 들었다. 그 중에서 피와 죄라는 말이 들어간 찬송가를 부를 때는 매우 거북스럽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찬송가의 내용들이 매우 전투적인 것이 많아서 함께 부르기가 많이 불편하였다. 사랑과 저주나 멸망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으며, 평화와 싸움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가를 알 수가 없었다. 유교나 도가에서, 또는 일반 민속신앙에서는 원죄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 았기 때문에 기독교회에서 말하는 원죄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더욱이 이해하기가 힘든 것은 믿음이라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내가 받은 교육은 유
교식 윤리교육이었다. 그것은 성인을 모델로 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바탕으로 하는 끊임없이 자기를 갈고 닦아 가는 생활윤리를 매우 귀중한 것으로 알고 지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흠결이 없이 사는 것을 매우 훌륭한 덕목으로 알고 지내기를 바랐
다. 인(仁)한 삶, 즉 자비와 사랑의 삶과 의(義)의 삶, 즉 정의로운 삶 사이에 나타나는 갈등과 모순을 어떻게 조화하면서 살 것인가를 배웠다. 오랜 논쟁의 유교전통인 사람의 본성은 선한 것이냐 아니면 악한 것이냐 라는 결론 없는 논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 었지만,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무조건 모든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다는 것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무수히 많이 설교하였지만, 그것을 들으면서도 시원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히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예수라는 사람이 모든 사람을 원죄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대신 피를 흘려 죽었다는 것 이었다. 그는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세상 사람들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와서 죄인들을 위하여 죄없이 피를 흘려 죽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믿으면 죄로부터 해방되어 구원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듣기 전에 살았던 굉장히 많은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것을 모르고 모두가 다 멸망의 구 텅이 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것인가? 아직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구원 은 없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많이 들었다. 매우 심한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을 발견하 였다. 그것을 내가 따라 믿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천당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의 내세에 대한 이야기는 공포를 주기도 하지만 전혀 심각하게 다가오지가 않았다. 불교에서 말하 는 서방정토, 또는 극락이라는 것과 같은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하였다. 물론 끊없는 윤 회를 말하는 불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같이 느껴졌다. 
또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인간은 인격존재다. 인격이란 자기 자신을 결
정하는 아주 고유한 분야다. 그러니까 인격이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어느 인간이든 남의 삶을 대신하여 살 수 없는 것처럼, 죽음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지 않던 가? 그런데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의심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으 면 크리스천들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믿겨지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데,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겨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 러나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맴도는 논리였다. 여러 신학적인 글들 을 읽을 때도 이 부분에 대한 논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상태에 서 계속하여 교회에 나갔고, 기독교라는 틀 안에 있었다. 그러니까 인격을 가진 나라는 존재와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과정이 곧 나의 기독교교회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는 중에 하워드 브린턴(Howard H. Brinton)의 책 『퀘이커 300년』이 함석헌의 번
역으로 한국에 소개된 것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하였다. 형식과 내용에서 상당한 공감을 가졌다. 물론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함석헌의 다른 글을 읽으면서 퀘이 커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서울의 퀘이커 모임에 가끔 참석하고, 독일에 서 머무는 동안 퀘이커모임에 참석하면서 차차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가면서 퀘이커 회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 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함께 독 일 북서부 4계회에서 회원이 되었다. 물론 이 때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서 왜 내가 퀘이커가 되는 형식절차를 밟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기도 하였다. 독일에 계 속하여 있겠다면 회원이 되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면 회원이 아닌 데 퀘이커모임을 주관하는 것은 이상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백을 하였고 인 터뷰를 통하여 정식 독일연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대전에서 몇 친구들과 함께 퀘이커리즘에 대한 공부를 시작 하였다. 처음에는 매일요일마다 짧은 고요예배에 긴 공부를 하였다. 차차 고요예배 시간 을 늘려 한 시간의 고요예배를 마친 뒤에 한 시간 동안 공부를 하였다. 여러 참여자들이 정식으로 퀘이커 월회를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공부를 시작한 지 6년만에 대전 월회로 출발하고 FWCC에 등록하였다. 나는 종교경전을 다양하게 읽는다. 기독교의 성 경 신약과 구약을, 불교경전과 도가경전을 읽으며, 때때로 유교의 경전을 읽는다. 이러할 때 나의 기독교에 바탕을 둔 퀘이커 신앙에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고, 폭넓은 종교성을 얻게 된다. 이미 내 성장배경을 말하면서 밝혔듯이 내 삶 속에는 한국의 유교, 불교, 도 가와 민속신앙의 전통이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것들에 대한 체계있는 공부를 정식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삶과 사회공기로서 내 속에 그것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느낀 다.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은 기독교와 퀘이커리즘의 삶이 나를 이끈다. 
 
2. 한국의 종교다원성; 유교, 불교, 도교, 생활(민속)신앙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다원성을 가진다. 국가지배이데올로기와 생 활윤리로 유교, 불교가 오래도록 지배하였고, 도교와 민간신앙은 바로 이러한 외래 종교 들과 조화하면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이끌어 왔다. 다시 말하면 학자들의 주장들이 서 로 다르긴 하지만, 한국의 재래종교로 도가 또는 도교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중국에 서 들어왔다는 주장도 있다. 그 주장이 어떠한 것과 상관 없이 도가사상과 도교신앙은 한국인의 정서 밑바닥에 넓고 깊게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중국과는 달리 도가 사상이나 도교신앙이 한국 역사상의 어떤 왕조의 국가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한 적은 없
다. 그렇지만 근 1천년 가까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역할한 불교나 그 뒤를 이어 유교가 역할하던 시대에도 이것들은 일반 사람들의 신앙과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대적으로 볼 때 체계를 잡거나 거대한 세력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민간신앙 위 에 중국을 통하여 유입된 불교가 지배한 뒤,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인 유교가 유입되었 다. 이 두 이데올로기는 정치와 문화계에서 서로 충돌하면서도 공존하였다. 때로는 박해 를 받은 적도 있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완전히 사라지거나 소멸된 적은 없다. 그러 니까 왕조가 바뀌거나 사회 질서가 기존 이데올로기로 지탱할 수 없이 되었을 때는 언제 나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들어와 새로운 기운을 사회에 불어 넣었다. 고대국가들 이 기틀을 잡기 시작할 때 민간신앙으로는 국가제도를 이끌거나 새로운 국민정신을 집합 시킬 능력이 없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교의 힘이었다. 한국에 불교가 유입된 것은 고대국가 형성과 틀을 같이 한다. 한반도에 있었던 왕조들을 이끈 종교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는 불교였다. 그러나 달라진 사회와 국제간의 교류는 새로운 종교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였다. 이 때 들어온 것이 신유교였다. 신유교는 조선 왕조의 굳 건한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편협한 유교유일체제는 정신세계뿐 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경제, 정치생활에 매우 좁은 한계를 가지게 했다. 이 때 중국을 거쳐서 새로운 종교와 철학이 도입되었다. 그것이 바로 18세기 후반에 들어온 가톨릭이 었다. 아주 철저한 신분체계와 현실중심의 유교윤리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던 이들 은 기독교의 평등사상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것은 잠자던 영혼들을 깨우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소식은 신분사회에 살던 그들에게 복음 이었다. 그러한 사상과 믿음은 지배계층에게는 기존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위기상황으로 인식되었다. 이 때 개혁성향을 가지거나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엘리트집단들 이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이들은 곧 일반 시민들의 삶을 향상시킴 에 새로운 종교이데올로기를 도입하기에 이르 다.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 지배계층은 아 주 강력하게 새로 유입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서도 논란이 된 제식논쟁과 직결된다. 
그 뒤 백년이 지나서 개신교가 새로 유입되었다. 가톨릭은 당시의 국가이데올로기인 유교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하여 매우 큰 저항에 부딪혀 상당히 많은 희생자를 낸 반면, 그 뒤 들어온 개신교는 전교의 어려움은 없었다. 의료와 교육과 자연과학기술을 가지고 들어온 개신교는 많은 일반 사람들과 왕조와 지배엘리트들에게 깊은 관심의 대상 이 됐다. 특히 왕조가 힘을 잃고 일본에 의한 강제 통합과 통치가 시작되면서 한국민의 민족의식과 개신교는 일치하는 활동을 하였다. 국권을 상실하여 발생한 민족의식과 새로 들어온 개신교는 공통의 관심사항을 가지게 됐다. 개신교가 들어오면서 한국은 미국과 유럽에 문을 열게 되었고, 그들의 과학과 민주주의와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러한 것들은 민족주의와 함께 성장하였다. 민족주의를 등에 업은 개신교의 선교전략은 한국인의 심성에 깊이 파고들었다. 이 때 전파되기 시작한 기독교의 사상은 이제까지 한 국을 지배했던 유교나 불교의 생활관습과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 때에는 한국 사회의 전통과 역사상에 있었던 종교체계들을 다시 정리하여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형성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크게 성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중 동학(東學)은 려오는 서양의 문물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신운동으로 민간에 깊이 파고들었으나 양반지배계층을 중심으 로 정치를 이끌던 세력에 의하여 철저하게 박해를 받았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상의 핵심 은 기존의 유교나 불교에서 주장하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래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민 간신앙으로 깊게 자리를 잡았고 널리 퍼졌다. 이 동학은 일본의 통치에 항거할 때 개신 교와 함께 민족 독립의 입장에서 공동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정부의 강력한 박해로 공개활동을 금지당했으며, 조직적으로 박해를 받아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이들 사이에는 상호 경쟁과 공존의 과정을 겪는다. 동학, 천도교 등으로 이름이 바뀐 이 신흥종교는 한 국의 전통사상과 기독교의 신과 인간에 대한 사상을 통합한 내용이 많이 들어 있었다. 
결국 한국사회에는 역사적으로 불교, 유교, 재래종교와 기독교가 차례로 유입되어 사 회에 매우 중요한 정신활동과 일상생활에 큰 역할을 한다. 새로운 종교나 사상체계가 들 어왔을 때는 언제나 기존의 종교나 사상체계와 갈등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 나면서 새로운 사상체계는 과거로부터 전통으로 내려오는 기존의 정신세계와 사상체계, 그리고 생활습관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신유교는 불교의 것을 흡수하 였고, 불교는 새로 들어온 유교를 흡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맨 뒤에 들어온 기독교 역시 이미 이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불교와 유교 그리고 민간 신앙의 이데올로기와 생활습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논리와 교리 상으로는 서로 배치되는 점이 많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상생활에서는 서로 혼용하고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기존의 사상체계는 새로 들어온 사상체계를 부분적으로 받 아들여 자신의 것을 개선하였고, 새로 들어온 사상체계는 기존의 사상과 생활습관을 받 아들여 토착화하거나 정착하는 데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곧 갈등과 공존을 가능 하게 한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혼용, 또는 혼합은 곧 다른 종교들이나 사상체계 들 속에서 자기 종교나 사상체계의 핵심사상의 일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완전 히 배제할 수밖에 없는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수용할 가능성이 큰 유사성이나 같은 점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점이 바로 갈등과 공존의 이율배반적 상황을 가져오게 한다. 자신의 종교나 사상체계를 확정하고 유지하기 위하여는 다른 종교나 사상체계와 다르다 는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들 속에 있는 핵심요소들을 활용하거나 차용할 수밖 에 없다. 그것은 곧 현실 종교의 모순과 딜레마를 나타낸다. 이것은 한국과 같은 다원종 교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종교를 가지고 다른 종교와 교섭하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 여 진화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자리에서 극단적 진보론자들은 ‘모든 종교는 하나다’ 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종교다원성은 곧 종교일원성에서 만난다. 즉 개별 종교들의 다양한 차이들을 깊이 파고 들어갔을 때 궁극에서 만나는 것은 한 점이라 는 것이다. 바로 궁극의 그 한 점을 찾기 위하여 모든 종교는 각각 자기의 자리에서 자 기의 방식으로 출발하지만 궁극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의 다원성을 주장하고 인정하게 되는 데, 그것의 이면에는 종교는 하나라는 종교일 원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확신이 뒷받침한다. 바로 이 점이 종교의 진화와 다른 종교와의 대화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종교나 사상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한국의 것들은 중국의 것들과 매우 비슷한 점이 많
다. 중국으로부터 왔거나 중국을 통하여 왔기 때문이다. 유교와 도교는 중국에서 왔지만, 불교와 가톨릭은 중국을 통하여 들어왔다. 그것들은 이미 중국에서 많이 진화된 모습이 거나 토착화와 전교의 갈등을 경험한 뒤에 들어왔다. 그 대신 개신교는 부분적으로 중국 을 통하여 왔고, 큰흐름은 미국과 서양의 선교사를 통하여 들어왔다. 일찍 들어온 것들 은 민속종교와 갈등하면서 융화하였고, 뒤에 들어온 것들은 앞에 들어온 외래종교와 민 속종교와 갈등하면서 융화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존재하는 큰 종교들,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는 고유한 민속종교와 다른 외래종교들과 부딪치면서 융합된 복합성을 띈다. 그렇 게 하여 한국화한 것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내 개인 자신은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옛날이 야기나 선조들의 이야기 또는 생활이야기를 통하여 유교, 도교, 불교와 민속신앙이 혼합 된 삶의 지혜, 체험, 학문, 도덕과 종교의 체험담을 정신적 양식으로 삼고 자랐다. 체계 있는 교육이나 종교행위로서가 아니라, 비공식 일반 삶의 이야기와 생활을 통하여 여러 종교들이 녹은 생활문화 속에서 자랐다. 그러므로 내가 기독교를 만나기 전에 이미 내 속에는 한국사회의 오랜 종교전통들이 녹아서 흘러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국가형성을 위한 정신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민속종교와 유, 불, 도 교의 사상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 영향은 그 뒤 국가가 형성되고, 견고하게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있었을 때에도 다른 사상들과 어느 정도의 갈등은 있었지만, 대개의 흐름은 서로 용납하는 분위기가 지배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3. 한국의 종교들과 기독교의 만남 어떤 종교가 되었든 새로운 지역에 전파 되어 그곳에 뿌리를 내리려면 순수하게 자기 자신만이 가지는 것을 주장하고 유지할 수가 없다. 종교가 어느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은 그곳의 긴 역사과정에서 형성된 문화 속에 정착되는 것을 말한다. 한 종교가 새로운 사 회로 들어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한 사회가 새로운 종교를 유입하 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때까지 그 지역에서 살아왔던 삶의 자세들, 생각들, 의 식(儀式)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또한 그들이 사용하였던 언어(개념) 속으로 들어가지 않 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전래되는 종교들의 변이가 일어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측에서 는 굉장히 심한 갈등에 부딪치게 된다. 때로는 대화라는 상황으로, 때로는 박해라는 양 상으로, 때로는 무관심이란 자세로 나타난다. 어떠한 상황으로 전개된다고 할지라도 이 미 그 땅에 자리를 잡고 있던 것들과 관련을 짓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새로운 종교의 전파다. 이런 과정에서 종교들은 새롭게 진화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한국은 다종교 사회다.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종교들이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됐고, 생활문화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 새로운 종교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을 때에도 과거에 있었던 종교와 생활문화는 주류의 자리에서 곁 가지로 려 났을 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 삶과 생각과 제도와 의식 속 이나 밑바닥에 남아서 기능한다. 새로운 체제에서 살아남는 것과 새로운 지역에서 널리 퍼지는 것은 바로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접촉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접촉점이 바로 공 존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종교들의 대화가능성과 토착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인류라는 것이 가지는 어떤 보편성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인류라 는 존재가 어떤 상황, 어디에 있든지 꼭 가지게 되는 공통의 종교성이 있다는 것을 말한
다. 이것이 서로 다른 종교가 공존하는 근거가 되며, 모든 종교들이 다른 종교에 의하여 진화하는 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에 있었던 많은 종교들과 기독교를 비교해 볼 이유가 생긴다. 한국에 고유하게 오래도록 전통으로 내려오는 종교들과 기독교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불 가능하고 의미가 없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과 개념들이나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변화 되었으며, 같은 존재를 두고 각각 다르게 이름을 붙이고 있기도 하지만, 같은 이름을 쓰 는 같은 종교 안에서도 시대의 변화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이미지가 달라지기 때문이 다. 때로는 신, 하늘, 도, 절대자 따위로 각각 불리지만 그것들은 궁극존재 즉, 최초, 최 후, 지고하고 심오하며, 개인 안에 실재하는 존재라는 데서는 일치한다. 신앙의 대상으로 서 그것들은 그렇게 사용되어 왔다. 동시에 인간 삶의 실천에서도 역시 용어와 이미지가 각각 달랐다. 죄로부터 벗어나며, 고통을 넘어서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며,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도 역시 같은 노력이었
다. 그러니까 믿음과 실천의 부분에서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는가를 간단히 살피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른 점과 비슷한 점 또는 같은 점을 간단히 살피는 것이 의 미가 있을 것이다. 
유교와 도가 또는 도교는 중국에서 수입되었다. 불교는 중국을 거쳐서 한반도에 들어
왔다. 물론 중국에서도 많은 변화를 거치고, 새로 들어온 종교들과 공존하고 다투면서 변화된 것이었지만, 한반도에 들어온 각 종교들은 또 한 번 굴절 내지는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이름을 쓰지만 내용은 매우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유교와 불교, 도교나 도가에서는 직접 신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 같은 인격존재로서의 신개념이 그들에게는 없지만, 신과 같은 기능과 역할을 하는 궁극존재는 있다. 그것이 바로 그것들의 종교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인격신이라고 하지만 만남은 비인격적이고, 비인격신이라고 하지만 만남은 또 인격적이 다. 그러니까 신이 어떠하다는 것은 어떤 논리나 교리가 아니라 만남의 체험이라고 보아 야 한다. 비록 개념 설명에서는 인격과 비인격이라는 것이 구별 될 수 있는 것이지만, 만남은 모든 곳에서 인격적이라는 점이다. 그런 인격적 만남이 아니고는 결코 삶의 변화 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란 궁극존재와 직접 만남을 통하여 자신과 그가 하나 가 되는 체험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는 죄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각종 신들에게 빌고 기도 를 하지만, 그것은 죄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인간집단인 국가와 민족(종족) 의 안녕을 위한 것이며, 현세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인간과 집단이 할 일의 핵심은 하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따라서 생활하는 것이었
다. 하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자기수양, 곧 성인에 이르는 자기 닦음의 길을 끊임없이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일이었다. 그 중 하나가 인 (仁)을 행하는 것이면서 조상을 숭배하는 일이었다. 이 부분에서 기독교와 큰 갈등을 일 으켰다. 조상에 대한 숭배는 종교행위는 아니지만 가족전통의 예식행위였다. 그 문제는 온갖 가족행사에서 항상 부딪치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중국에서도 크게 부각된 것이었 고, 한국에서도 꼭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문제에 대한 가톨릭과의 갈등은 지금은 해소 되었으나 개신교와는 아직까지도 해결해야할 문제로 남았다. 기독교인도 물론 조상에 대 한 생각을 깊이 하지만, 예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면서 동시에 상당한 유연성 을 가진다. 즉 상당한 부분 타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다른 사회윤리문제에 서는 크게 부딪칠 문제가 아니다. 
민속종교와 기독교의 관계: 샤마니즘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무교와 민속종교는 한국사 회에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것은 서양식의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활신앙이 었다. 옥황상제라는 최고 신이 있었지만 그는 기도의 대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역, 종 족, 가족, 시대에 따라서 기도의 대상이 되는 신은 매우 다양하였으며 변하였다. 이 경우 모든 신들은 일종의 기능상의 신이었다. 다신인데 어떤 우열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 능상의 문제로만 일상생활에 대두되었다. 이 민속신앙은 유교 불교 기독교의 예식과 생 활에도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그런 의미로 보면 민속종교 즉 무교는 지금도 살 아서 계속하여 생성되는 현대종교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정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유교는 생활윤리로 작용할 뿐, 어떤 종교적 교육이나 체계있는 조직으로 존재하
지는 않는다. 사원이나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권위 있는 유교교사나 학파의 흐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한국이 유교사회라고 서양에서는 흔히 말하지만, 그것은 그냥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생활화된 문화들이 있기 때문만으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정당 한 것인지는 매우 궁금하다. 유교는 인간과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윤리를 강조하였기에, 그것이 곧 일상생활로 크게 자리잡고 있다.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숭상하는 입장 에서가 아니라, 전통으로 내려오는 생활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유교사회라고 할 때는 의미 있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맹자와 순자로 나뉘는 인간의 본 성이 선하냐 악하냐는 논쟁을 통하여 인간은 온전함에 다다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상 정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수양을 추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를 받아들임에도 계속된 자기성장과 성찰을 추구하는 것이 매우 자 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많은 사원이 있고 승려를 양성하는 학교가 많았다. 여러 해 전부터 학생수가 줄고 승려지망생들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 신도들에게서 불교신앙은 크게 줄어들지는 않고 있다.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대학, 고등학교가 있고, 장례식을 치르는 기 관이 많다. 죽은 이를 위로하고 극락에 이르는 길을 찾고, 살아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일상에서 힘든 이들이 고요함을 찾고 평안을 누리기 위한 프로그램 을 절에서 많이 진행한다.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고,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메시지는 매우 강력한 희망을 일반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돈오(頓悟)나 점수(漸修)를 주 장하는 파가 있지만, 어느 것을 주장하든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상대 안에 절대가 있고, 삼라 안에 열반이 있으며, 속된 것 안에 성스러움이 있음을 인정하는 대승 불교의 입장이 한국불교에서는 강하다. 불교 내 종파들끼리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지 만, 불교와 민속종교인 무교와의 결합은 특이하다. 이것은 불교가 한국사회에 적응하고, 전파하는 전술의 결과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상숭배의 예식이 불교식으로 정착되기 도 하였다. 열반과 해탈의 전통과 서방정토나 극락을 그리워하는 정서는 구원과 천당을 말하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큰 거부감이 없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도교는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사당도 없고, 교사도 없다. 다만 
일을 마친 사람들, 사회생활의 일선에서 물러난 사람들,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도 교나 도가적 삶을 흠모하여 추구하는 것이 전부일 수 있다. 그러나 매우 힘있게 삶을 영 위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삶은 자연에 순응하는 도가스러운 삶을 사는 것임을 천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바닥의 정서로 깔려 있기는 하지만,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특히 문명비판적 관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도가철학은 현대인들의 쉼없는 삶, 끊임없이 급하게 변화하는 사회의 무의미성을 체험할 때 도가에서 강조하는 관조와 놓음 의 삶은 새로운 숨통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일반 교육기관을 많이 운영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를 운영하며 특히 기독교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기관을 많이 운영한다. 병원과 각종 사회서비스기관을 운영하면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사회전반에 서 비스를 제공한다. 특히 현실에 깊이 관여하는 사회운동을 벌여 정치와 경제계에 깊이 관 여한다. 진보경향이 있는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에 대한 관심도 많이 가지지만, 보수경향 의 기독교는 개종과 선교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진다. 종교간 갈등은 이러한 분파에서 많이 심화돼 있다. 각 종교를 신봉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토착화를 생각하는 이들은 서로 교류가 많다. 에큐메니칼 차원의 기독인들은 다른 종교의 성직자나 신도들과 교류를 많이 한다. 그들 사이에서는 개종을 전제로 하는 논쟁은 지금은 별로 없다. 다만 자기 종교 속에 타종교 의 교리나 윤리를 어떻게 수용하고 인정하고 생활방법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한다. 진보 경향이나 보수 경향의 종교인들은 각각 자기들이 관심을 가지 는 부분들에 대한 공동대응을 많이 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모임이 아니라 정치나 경제 또는 사회문제에 대한 공동대응에서 공통점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종교 안에서 진 보와 보수 경향의 흐름들이 서로 교류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수와 보수 끼리, 진보와 진보끼리는 풀어야 할 문제들을 놓고 다른 종교들과 함께 할 때가 많다. 
 
 
4. 기독교 또는 퀘이커에서 주의할 도가사상의 핵심 
도가에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라고 할 수 있는 도(道, Dao)는 유한한 우리 인 간의 생각, 연구, 언어, 느낌으로 적절히 표현할 수 없는 존재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 터 나왔다는 도는 무한히 신비롭고 오묘하다. 모양이 없고 이미지가 없다. 이름도 없고 성질도 없다. 그러므로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성적 사유나 추 리로서 인식할 수가 없다. 다만 상징으로만 이야기 될 뿐이다. 이미 도라고 말한 도는 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것이라고 이름한 순간 그것이 이름과 실재가 일치하는 것이 아 니기 때문이다. 결국 부정을 통하여 실재를 인식하고 경험하고 느껴야 하는 존재다. 다 시 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는 인식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거부함으로 도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프로그램이 없는 퀘이커에서 예배나 일상생활에서 하는 고요히 함은 불교에서 하 는 참선을 참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은 혼탁해진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방법 이다. 마음을 오로지하여 궁극적 진리를 깨닫는 것이 목적이다. 맘을 깨끗이 하는 것이 첫째 길이다. 그 다음에 모든 집착을 버리고 무심의 상태로 접어드는 일이다. 그렇게 하 여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초월한 궁극의 실재로서의 무의 진리를 깨달아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한다. 내면의 세계를 직관하므로 그 속에 있는 불성을 만나는 일이다. 이것 은 기독교 수행자들이 드린 기도, 즉 마음을 비워 생각과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오로지 내맡기는 것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고요한 중에 찾고 말씀 을 기다리는 퀘이커의 예배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자기부정을 통한 새로운 만남을 의미한다. 부정을 통한 절대긍정에 도달하려는 도가의 사상체계는 퀘이커 리즘을 확장하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도가의 사상체계를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 정리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 의미
가 있다고 본다. 관계 또는 사회윤리의 실천으로서의 무위, 박(樸; 소박, 단순), 도 그리 고 근본으로 돌아감을 간단히 살펴본다. 
도덕경을 읽을 때 일반 사람들이 가지는 자신감, 위로감은 무엇일까? 거기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 지극한 경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진실되게 하면 다 이룬 것이 된다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다 시 말하면 사람이 도달해야 할 고정된 단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능력 상황 처지에 따른 진실된 과정을 중요하게 본다는 말이다. 어린아이와 청장년과 노인이 도달 할 기준을 일정하게 설정할 수가 없다. 각자 그들에게는 각각 다른 기준이 제시된다. 다 양한 기준은 곧 다양한 사람들의 그들 나름의 기준과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도가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도가의 신비체험은 황홀한 것이 아니라, 어둡고 중립적이며 불확실하다. 그래서 믿음 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한 직접 체험에 근거한다. 여기서 말하는 직접체험 이란 단순한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삶의 신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간단 히 도가철학을 원칙과 역동적 힘과 행위 또는 삶의 실천자세를 나누어 생각하여 본다. 우선 도(道, Dao)에 대한 이해다. 도는 궁극적 절대실재로서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이다.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것의 어머니다. 자애롭고 생산하는 실재다.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이미지를 그릴 수 없는 무의 존재다. 부정으로서만 설명이 되는 없음의 존재다. 들어도 들을 수 없고, 보아도 볼 수 없으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다.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그냥 작용만 볼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의 원천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까 맣고 까만 카오스다. 무한의 가능성을 가진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아주 묘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꼭 설명이 필요하다면 텅 비어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깊은 골짜기, 가장 낮은 넓고 깊은 바다, 어머니 또는 낮은 곳으로만 흘러드는 물을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계시성과 구원성을 가진다. 그래서 영생의 개념을 가진다. 구원과 영생은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도는 어떤 특정한 상층계급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도의 나타남과 실현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 지만 언제나 일상성이다. 그것은 일종의 로고스이면서 길이다. 길은 곧 길을 가는 것이
다. 원칙과 삶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 그 원칙이 실제 생활에 적용되는 것은 상대성과 평등성이다. 균형을 잡기 위한 작용은 언제나 상대세계를 이용하면서 그것을 넘는 절대 적 평등성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귀함이나 천함이 없고, 높고 낮음이 없으며 빠르 고 느림이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도(道)가 작용하거나 인간들이 그 도를 따라 올바르게 활동하고 생활하는 자세
는 바로 무위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앞뒤의 문맥이나 흐름을 보면 ‘하지 않음으로 함’이란 모순스런 해석이 된다. 도는 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을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마치 그릇이나 연못에 물이 차면 넘쳐흐르듯 이, 길이 기울면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듯이,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하면 새싹이 돋아나 듯이, 더위가 극에 달하면 차차 기온이 내려가고, 추위가 극에 달하면 기온이 올라가듯 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되는 것을 말한다. 억지로 인간의 힘을 더하여 작용하지 않게 하 는 일이다. 이것은 때를 기다리는 일이요, 기다릴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다. 지나치 게 문명과 제도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규제하거나 이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위는 도덕과 예법과 형식을 떠나는 삶을 추구한다. 아나키스트적 삶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드럽고, 자비롭고, 겸손하며, 약하고 비우는 삶의 자세는 무위의 한 가 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다툼과 폭력의 사회양상이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것은 모순스런 용어, 즉 적극적 수동성이라고 보아야 할까? 
이러한 삶은 원초적 상태, 즉 박(樸, natural disposition)으로 돌아가야 가능하다. 박의 상태는 쉽게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소박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 물이 들여지지 않은 상태, 타고난 그 모습 그대로의 상태, 영아와 같은 상태, 뿌리로 돌아간 상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다섯 가지 색은 눈을 멀게 하고, 다 섯 가지 소리는 귀를 어둡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은 입을 더럽힌다. 이러한 꾸밈들은 사 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여 탐심에 가득한 삶으로 이끈다. 그것이 잘못된 문명과 삶을 유 발하는 시작이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언제나 투박하지만 갈고 닦이지 않은 원시상태를 희구한다. 그것은 인간이 타고난 생명본질인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이미지로 표시하고 설명해보자. 도가의 신비주의와 궤이커 신비주
의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퀘이커 신비주의와 도가의 신비주의의 만남에 대한 설명을 위의 이미지
를 통하여 할 수 있다. 퀘이커를 상징하는 Q자는 퀘이커의 믿음과 실천을 의미한다. Q글 자의 O부분은 믿음, 원칙을 의미한다면 ~는 생활실천을 의미한다. Q자 중 O에 해당하 는 것은 신, 퀘이커식 표현으로는 내면의 빛, 내면의 소리, 내면의 스승을 의미한다. 그 것은 도가에서 말하는 도(道; Tao)와 같다. 이것이 어떻게 생활에 작용하는가? 퀘이커들 은 기다리고 찾는다. 그 행위는 일상이나 예배시간이나 깊은 침묵으로 연결된다. 고요히 함으로 말씀을 기다리고, 내면의 소리를 듣기를 바란다. 어떤 행동이나 활동이 아니다. 그것을 도가식으로 말하면 무위(Wuwei; 無爲)다. 하지않음의 함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말로 하면 성령이 내려질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일이다. 그렇게 하여 신, 내면의 빛, 또는 도에 다다르는 깨달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때 활동이 일어난다. 이 활 동이 작동하는 방법은 단순성, 단순함이다. 그것을 도가에서는 박(樸; Po´)이라고 한다. 박은 전혀 작업을 하지 않은, 깎지 않은 그냥 통나무다. 그것을 의역한다면 단순함이다. 순수함이다. 있는 그대로,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모습 이다. 그러니까 도가 일상생활에서 실현되고 실천되려면 무위, 즉 하지않음의 함으로서 도를 체득해야 한다. 그것을 체득한 다음에는 아주 순수하고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 어 떤 문화나 교양이나 기교를 섞지 않은, 받은 그대로 살아가는 일이다. 퀘이커의 삶의 증 언이란 바로 단순함, 순수함에서 시작된다. 퀘이커의 증언이 되는 Peace, Equality, Integrity, Community는 바로 Simplicity를 기반으로 한다. 이것이 곧 퀘이커와 도가의 만남의 핵심이면서, 두 체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바로 그 점에서 두 사상체계와 삶의 체 계는 만난다. 이렇게 볼 때 퀘이커가 동양사상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가 있다. 이렇게 하여 퀘이커가 확장되고 진화할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종교는 그래서 끊임없이 확장되고 자란다. 완성된 교리가 없다. 그것이 살아있는 종교의 핵심이다. 이러 한 종합된 삶을 살고자 한 사람이 함석헌이다. 함석헌이 주장하는 씨의 자세와 삶이 바 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이러한 도가적 사상체계를 어떻게 기독교적 체계와 합 하여 자기의 삶으로 이끌었는가? 
 
5. 함석헌(Ham Sok Hon)의 삶과 사상; 종교적 신비와 일상생활 한국의 초기 퀘이커요 현대사상가인 함석헌의 종교사상과 삶에 대한 간단한 고찰이 필 요하겠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를 접촉하고 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 길 은 다양하게 바뀌었다. 처음 장로교인으로 시작하고 성장하였고, 일본에서 유학할 때 우 찌무라 간조로부터 ‘무교회신앙’을 배우고 상당한 기간 그 안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원숙 기에 퀘이커가 되었다. 한국의 퀘이커는 함석헌의 영향이 크고, 나 자신도 그에게서 받 은 영향이 크다고 믿는다.  
“나는 학교에서 전공하는 것이 역사, 윤리, 교육이었으므로 그 방면의 책을 읽어감에 따라 종교를 차차 과학적인 자리에서 보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기독교는 결코 유일의 종교가 아니요, 종교 중의 하나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동경에 있는 동안 처 음에는 『기탄잘리』를 읽은 것이 시초가 되어 타고르의 책을 계속해 읽었다. 범신적이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내 신앙하여 가는 데 아무 지장이 되는 것을 느끼지 않고 좋았다. 타고르를 읽다가 간디를 읽게 되었다. (…) 우찌무라 선생의 영향으로 칼라일을 읽었다. 『옷의 철학』은 몇 번 읽었다. 그도 교회에 갇힌 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 에서 알게 되어 러스킨을 읽었다. 그도 교회주의는 아니지. 톨스토이는 전부터 읽는데 그는 물론 교회에서 파문을 맞았으니 말할 것도 없다. 우찌무라 선생도 십자가 신앙을 고조하느니만큼 톨스토이는 참 신앙이 아니라 했지만, 나는 우찌무라 선생을 전적으로 존경하면서도 그 점만은 불복이다. 또 선생의 소개로 쉬바이쩌를 알고 읽게 됐는데 쉬바 이쩌는 결코 정통 신자는 아니다. 오산에 교사 노릇을 하는 동안에 동경서 받은 영향으 로 무교회적인 독립 신앙의 입장에서 성경을 원문에 따라 연구해 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역사는 줄곧 웰즈(H. G. Wels)의 문화적인 자리에서 보아왔고 과학에 충실하면서 옛 신앙을 건질 수 있는 데까지 건져보자는 고등비평학자의 정신을 따랐다. 그렇게 성경 을 보았다. 역사에서는, 그 때 한창 성한 공산주의의 유물사관을 전혀 눈감고 아니라 할 수는 없어 알대로 알아보려 애썼다. 그 결과 근본에서 틀린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현 실적인 면에서 어느 부분의 진리를 가진 것으로 단정했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울 감 옥에 있는 동안 불교 경전을 조금 읽었다. (…) 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와는 근본에 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온 후 늘 공부하면서도 감히 손을 못 대 던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 피난 중에 해를 두고 이름만 듣고 보지 못한 『바가밧 기타』를 우연히 헌책집에서 발견했을 때 기쁘던 생각, 인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 고 읽을수록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장자』를 읽기 시작했다. 점점 껍질 이 좀 떨어지는 듯함을 느꼈다. (…) 이렇게 오는 동안 역사적 예수를 믿느냐 하는 것, 속죄는 어떻게 해서 되느냐 하는 것, 하나님은 정말 인격신이냐 하는 것, 영원한 생명, 하늘나라는 무어냐 하는 의심이 새롭게 일어났다. (…) 나는 지금 종교는 하나다 하는 생 각이다. (…)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는 생각은 켸켸묵은 생각이다. 허공에 길이 어디 따로 있을까? 끝없이 나아감, 한없이 올라감이 곧 길이지. 상대적인 존재인 이상 어차피 어느 한 길을 갈 터이요, 그것은 무한한 길의 한 길밖에 아니 될 것이다. 나는 내 가는 길을 갈 뿐이지, 그 자체를 규정할 자격은 없다. 이단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 맘이 바로 이단이람 유일의 이단일 것이다.”  이런 선언 뒤에 그는 자기의 독자적 신앙노선을 걷는다. 
무교회와 헤어지는 데는 우선 자신보다는 인생 전체를 보자는 것, 앞에 올 것을 보자
는 것, 무엇에 들어붙지 말고 자유하자는 것, 남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 되어 보자는 맘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니 나만이 아버지 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진리의 산에 오르는 길은 매우 많은 것이 눈에 보였다. 걷는 그 자신에겐 이 길 외엔 딴 길이 없단 말이지 객관적으로 그 길만이다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많은 사람 이 얼마든지 기어오르는 길이 있다. 절대의 자리에서 하면 길은 유일의 길이다. 하지만 상대의 자리에서 하면 무한한 길이다.(9, 예: 314) 상대의 세계에 있는 ‘종교’, 기독교는 이제 그에게 여러 종교 중의 한 종교일 뿐이다. 그러니깐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라는 것은 상대계의 좁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겸손해야 한다. 개별종교는 하느님을 담을 만큼 크지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를 삼고, 사도를 뽑은 것은 최소 한의 껍질을 가지는 상징행위였다. 그래서 함석헌도 가능한 한 상징으로 시작된 ‘엉터리’ 를 붙잡지 말고 자유의 영으로 살자는 것이었다.(9, 예: 315) 
그래서 그에게 참 길은 너도 나도 기독교도도 이교도도 다 같이 더듬어가는 길이다. 나만이 아들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은 동물희생을 했지만, 이제 네 신조희생을 해야 할 것”(9, 예; 317)이라는 것이다. 정통이냐 미신이냐는 나와 하느님 사이에서만 알 뿐이다. 획일이 아니라 내 소리를 내자는 것이 참찾아 나가는 길이다.(9, 예;318) 나만을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믿고 세계가 구원되어야 한다. 장차 오는 세대를 위해 믿는 믿음이 정말 구원하는 믿음이다. 나(진리)는 지나간 모든 인류 속에 있고, 장차 올 인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멸망할 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9, 예; 318-9) 만인 구원론이다. 
함석헌은 새시대에 맞는 종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지금의 종교들은 새 시대에 맞 지 않는 낡은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로: 1) 기독교 교리의 완성, 2) 점점 제도적으로 되 어 가는 점, 3) 공세적이 되지 못하고 수세적이라는 점, 4) 점점 더 피안적이 되어가는 점, 5) 내분이 심하다는 것이 바로 새 종교를 필요로 하는 징표라는 것이다.(3, 새종: 221-222) 낡은 것은 새 것을 예견하고 주문한다. 썩음이 지극하거나 충격이 강력할 때 새로운 흐름은 솟아오른다. 
이 시대가 새로운 종교를 낳을 ‘그때’가 멀지 않다는 표시의 두서너 가지 징표가 있다. 
1) 현대의 전쟁의 성질이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2) 원자학의 발달이다. 3) 세계관 문제다. 4) 생명공학의 발달이요, 5) 전 세계가 하나의 연결망 속에 있다는 점이다.(3, 새 종: 223-228)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나게 될 새종교는 어떤 모습일까? 
그 새 종교의 모습을 그려보면 대강 이렇게 나타날 것이라 한다. 모습을 그러보는 것
은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맘에서 새 종교는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1) “그 얼굴의 테두리를 말한다면 둥글 것이다. 하나란 말이다. (....) 모든 종교는 하나다 하는 것을 거 부하는 종교는 앞으로 몰락할 것이다. (....) 세계를 온통 한 집안으로 만드는 말씀을 주실 것이다. (....) 앞으로 세계는 하나 될 터이요, 그것을 위해서 한 종교가 있을 것이다.” 2) “그 담 그 얼굴의 빛깔을 말하면 무색일 것이다. 더 합리적이 되어간단 말이다. (....) 이 이성의 문제는 과학에 대한 문제다. (....) 과학도 종교도 다 생명의 자라가는 일면인데 이 날까지 반대방향에서 서로 욕을 하며 파 들어간 셈이다. (....) 이기고 지고의 감정에 붙잡 혀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못 간다. 과학이 이긴 것도 종교가 진 것도 아니다. 영원무 한의 세계에 들어갈 때까지의 종교요 과학이지, 들어가면 이도 아니요, 저도 아니다.” 3) “이것은 인간관에 관한 문제다. 사람이 그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문제다. (....)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자연세계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이 제 자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하는 데 가서 맺힌다. (....) 미래의 종교는 이 지친 인생을 다시 일으키는 종교여야 할 터인데, 그렇기 위하여서는 그 분열된 인격을 재통일 하는 새 인간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을 뚫려 비친다고 하였다. 육이 영의 거침이 되는 것도 아니요, 영이 육을 배척하는 것도 아닌 인간이다.”(3, 새종: 229-235) “미래의 종교는 인격의 종교, 논리의 종교기 때문에 맘의 종교요, 맘의 종교기 때문에 깨달음의 종교다.”(3, 새종: 239) 그것은 언제나 ‘시재(時在, now-here)’, 이 지금-여기에 산다.(3, 말 씀: 143) 지금-여기가 바로 현실이다. “종교는 현실을 잊어버림이 아니다. 현실을 건지는 것이다. 현실을 건지기 위해 가장 작은 정도의 조직이 필요하다.”(3, 말씀: 145) 거대조직 이 아니라, 최소한의 조직과 형식이 필요할 뿐이다. 미래의 종교는 시재의 종교이기에 지금-여기를 놓고 하늘나라를 말하는 것은 구원이 될 수 없고, 회개가 될 수도 없다. 잠 꼬대에 지나지 않는다.(3, 말씀: 146) 물론 목적은 하늘에 있다. 하늘에 오르잠이 종교의 길이다. 그러나 땅을 박차지 않고 날아오르는 새는 없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도 이루어지이다’ 한 것은 바로 시재를 귀히 여긴다는 뜻이다.(3, 말씀: 146) 
그래서 현실의 종교라면 현실을 사는 민중, 밑을 중하게 여긴다. “정말 종교는 민중을 
취하고 잠들게 하는 것이 아니오, 불러일으켜 싸우게 하는 것이다.(....) 아무도 악과 싸우 지 않고 선한 영이 될 수 없는 한, 현실에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죄악은 곧 현실적 사실, 현실은 곧 죄악적 존재, 죄악은 사회적 현상인 것이므로, 산 종교는 사회악과 죽어도 마 지않는 싸움을 싸우는 민중의 조직적 활동이다. (....) 현실의 죄악과 싸워 이김으로 나타 나는 하나님, 그것이 곧 그리스도다. 우리 종교는 현실적 과학적이어야 한다.”(3, 말씀: 
146-7)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과 싸울 것인가? 
싸울 목표는 둘이다. “하나님과 민중. 둘이 하나다. 하나님이 머리라면 그의 발은 민중
에 와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발이 땅을 디디고 흙이 묻은 것, 그것이 곧 민중이다. (....) 하나님 섬김은 민중 섬김에 있다. 가장 높음이 가장 낮음에, 가장 거룩함이 가장 속됨에, 가장 큼이 가장 작음에 와 있다. 진리는 민중에 있다. 민중이 하나님의 발이라 하는 말 은 민중은 보이는 전체란 말이다. (....) 발을 씻음은 민중을 씻음이다. 절대 거룩한 하나 님, 그에게는 문제가 있을 것 없고, 더러워진 발인 민중을 깨끗이 하면 된다. 그래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하신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는 민중이다. 작지만 크다. 작다는 것은 낮단 말이다. 하늘에 비하면 말할 수 없 이 낮지만 땅에서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교회요, 나라요, 문화요, 세계요, 그것은 다 이 밑바닥 위에 세운 건축에 지나지 않는다.”(3, 말씀: 147-8) 이 민중, 이 씨을 일으키는 하나되는 믿음으로 지극히 작은 조직이 필요하다.(3, 말씀: 149) 그래서 그는 이미 퀘이커 를 만나기 이전에 퀘이커가 돼 있었고, 그래서 만나서 서로 같다는 것을 확인하였을 뿐 이다. 
 
6. 항상 자라는 종교와 인생; 절대구원에 이르기까지 함석헌은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뜻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기독교국가나 기독 교사회를 만드는 것이 의미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민족에게 부여된 사명을 완 수하는데 그 책임을 맡겨 준 것이라고 판단한다. 불교가 못한 것 유교에게, 그것이 못한 것 기독교에게 책임을 맡겨 주었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기독교가 다하지 못할 때는 다 른 것에게 그 자리를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하나의 목적이 아 니라 수단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수단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단순히 자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구로 선택한 것과는 다르다. 모든 종교는 하느님 앞 에 평등하다. 다만 그가 노는 역할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를 뿐이다. 
그는 선생에게서 해방되고, 남의 종교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자신이 되고 싶었고, 자기 종교를 가지고 싶었다. 즉 ‘내 생각, 내 믿음’을 가지기에 맘을 모았다. 이렇게 되어 그는 서대문감옥에 있는 동안 크게 달라졌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 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 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여기에 곁들여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한 것이 세계주의와 과학주의다. 세계는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국가주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것이요, 독단적인 태도를 내버리고 어디 까지 이성을 존중하는 자리에 서서 과학과 종교가 충돌되는 듯한 때는 과학 편을 들어 그것을 살려 주고 신앙은 그 과학 위에 서서도 성립이 될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을 찾아
야 한다는 것이다.”(1, 뜻: 17-18) “성한 혼에 모든 종교는 다 하나님 말씀”(죽, 열: 280)인 것처럼 문제는 ‘하나님의 입’이요,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었다. 
 오직 제 종교만을 가지자는 한 사람의 노력에서 세상의 구원을 본다. ‘제 종교’란 하
느님과 맞대결하는 종교, 그래서 신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자 즉 중간자 없이 하느님과 마주 서는 한 신자만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대신 시키지 않는 다. 누구를 대신 내세우지도 않고 누구의 대신 노릇을 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 는 인격, 그것이 그리스도다.”(죽, 열: 285) 하느님 앞에 직접 서고자 하는 그는 기독교인 으로서 노자와 장자를 좋아하고(끝: 56), 생명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진리가 있다면 그 것은 ‘모든 인간은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는 간디를 좋아하였다.(끝: 62) 동 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을 통하여 궁극적 긍정인 영원한 긍정에 도달한다는 칼라일 을 통하여 절대긍정주의자가 된다.(끝: 58) 한 번 만들어 놓으면 ‘네가 이제 알아서 살다 가!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로 해 봐’ 하고 하느님이 준 자유를 사랑한다.(끝: 68) 이 렇게 그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 자유하는 개인은 독 불장군이 아니라, 전체를 나타내는 개인이다. 그래서 그러한 개인과 전체의 융합이 중요 하다. 현실 속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바로 개인의 삶 속에서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나 타낸다.(끝: 역, 150) 
하나라는 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그 다 음 것도 그와 같으니 이웃 사람을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걸 받 아가지고 베드로와 바울이 ‘머리는 예수요, 우리는 다 몸이다’ 라고 말한다. 머리는 제일 높고 몸은 낮다는 것이 아니고, ‘우린 다 하나다’ 하는 걸 말하는 거다.”(끝: 고, 192-3) 개인과 전체는 함석헌에게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한 개인 속에 다른 개인이 들어 있고, 다른 개인 속에 들어있는 내가 전체를 이룬다. 개인은 전체의 표현이면서 전체는 개개인 을 모아 놓은 것 이상의 역동성이다. 개인이면서 전체, 전체를 중심에 두면서 개인을 자 유롭게 하는 영성공동체를 함석헌은 새로운 종교의 모습으로 본다. 그것을 그는 퀘이커 에서 느낀다. 
가능하다면 평화주의자 예수의 삶을 따르자는 것이다.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퀘이커의 성경읽기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하는 일에 투신한다.”(3, 퀘: 154) 그런 퀘이 커는 동양사상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함석헌은 언제나 노장사상과 불교의 선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특히 노장사상을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는데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벌이는 행동은 목숨을 걸고 하는 수밖에 없다. 양심을 때리는 
데는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내 몸으로 폭탄이 되는 거다. 특히 평화주의자의 구령은 ‘자 기희생’이다. 죽자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정성으로 기도하고 노력하면 하느님이 역
사하실 것을 믿는 것이다.(3, 퀘: 165-6) 
타종교와 대화를 좋게 보고, 노장사상이나 불교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자기를 계시한다 고 본다. 함석헌은 타골과 간디를 읽으면서 보편주의적 입장에 서게 되었다. 꼭 기독교 에만 진리가 있다는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누구든지 자기 종교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 다. 적어도 도덕적인 종교라면 진리는 하나이고 같은 거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즉 종
교의 본질은 하나라는 입장이다.(3, 퀘: 155) 
그는 언제부터 노장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그리스도교와 같은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일까? 이 두 사이에 충돌은 없는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가까 워 오면서부터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졌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인간의 사회 살림이 근본 에서부터 크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경계가 달라지 는 정도가 아니라 생활방식과 사회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달 라지면 어떻게 달라질까? 종교의 역할이 무엇일까? 종교는 새로운 문명이 나오려고 할 때 앞장을 서서 지도하려고 할까? 문명에 앞장서서 인류를 건진다고 하는 성현들이 말한 것처럼, 과연 기존 종교들이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는 40세 때 그 대답을 부정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종교는 못할 거라고 보았다. 종교 들이 정치에 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대전이란 것이, 지금까지 있던 대국주의, 대 국가주의, 혹은 국가지상주의, 정부주의, 지배주의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관 이 새로워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민중을 위해 있는 국가라야지 민중이 국가를 위해 서 존재해야 된다는 그따위 국가는 없어져야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런 뜻이라면 이를 위해서 동양사상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3, 퀘: 156-7) 
그렇게 하여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불교의 해탈도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것 으로 본다. 기독교에서는 죄, 인도식으로 표현하면 무지라고 표현하지만, 인간으로서 하 는 자리는 한 자리라고 본다. 이렇게 볼 때 그들 사이에는 충돌될 요소가 아무 것도 없
다. 아마 기독교에서 찾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자리를 노자 장자가 말한다면 도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그걸 관념적으로 분석하지 말고, 실제로 믿는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그 자리가 그 자리 아니겠느냐고 본다.(3, 퀘: 158) 
함석헌은 내세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는 것으로 부정한다거나 긍정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것보다 궁극 목적은 사람이 영원 무한에 도달하는 거라고 본다. 죽어가지고 부 활한다는 것보다 ‘예수는 부활해 가지고 죽었다’고 함석헌은 본다. 죽어도 죽지 않는 생 명을 찾는 것이다. 즉 부활이란 나긴 물질적인 것으로, 육적인 것으로 났지만 생명이 인 간에게 와서는 소위 정신적이라고 하는 데까지 갔다. 아직도 물질적인 것을 완전히 벗어 나지 못하지만, 몸이라는 것은 죽은 후에 무슨 형식으로 되겠는지 그 때 가봐야 알 것이 니까 모르지만, 믿음으로 인해서 그 어느 세계에 올라갈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수 와 소크라테스 같은 이가 나왔다는 것은 정신계가 있다는 증거다.(3, 퀘: 159-160) 그러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세라는 것은 오늘의 세계를 시간적으로 연장해서 죽은 후에도 영원히 호화로운 생활을 가지기를 열망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높은 데 올라가는 것, 그것이 하늘나 라 가는 것이다.(3, 퀘: 160) 그래서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는 비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채우는 것을 통하여 진리의 자리에 선다.(3, 퀘: 169) 이것에서 기독교와 선이 만 나게 된다. 
“미국의 어느 신학교에 갔더니 노장사상을 모르고서는 신학을 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 더군. (…)  하나님이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다는 그것 얼마나 높은 사상이야요? (…) 이보다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원의 세계입니다. 이 우주의 본의가 무엇인고 하니, 온 갖 꽃과 수만 가지 식물이나 곤충들만 보더라도, 다원의 세계이지요. 왜 이처럼 다원적 이냐는 샤르뎅이 다 지적했지만, 우주의 근본원리가 다(多)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여럿 입니다. (....) 이 단계에서 인류가 생각할 것은 다원적으로 하면서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나 하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이 원하는 바일 거요. 생명의 목표가 그런 거니까.”(3, 퀘: 172) 다원, 전체, 하나, 동양과 서양, 기독교, 불교, 선, 노장 따위를 구별하는 것을 그 는 싫어한다. 관념으로는 나눔이 될는지 모르지만, 삶으로는 모든 것이 하나 속에 포섭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한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종교는 완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에게 종교는 완성된 것이 없다. 계속하여 변하고 흐르며 새롭게 달라진다. 그래서 과정의 종교, 길 위에 있는 믿음이요 자라나는 것만이 있다. 그것은 생 활종교라야 그 길을 따를 수 있다. 신도 미완성이요 자라는 것으로 보는 그에게 현실종 교와 믿음이 완성되어 나타날 수는 없다. 끊임없이 되어갈 뿐이다. 
 
7. 함석헌의 기독교이해와 다른 사상체계 함석헌의 기독교이해는 동양사상과 긴 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그의 예수 이해 와 동양철학의 관계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가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정 리하고 주장한 씨이란 것은 ‘맨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맨사람의 좋은 예가 예수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 예수에게서 맨사람은 ‘어린아이’ 였다. 어린아이가 되는 그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태어남은 어머 니 탯집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다시남이 아니다. 꼭같이 육으로 낳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시남은 영으 로 낳는 것이다. 다시남은 곧 그렇게 낳는 것을 통하여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닐까? 개인으로도 다시 나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도 다시 나고, 모 든 것에서 다시 낳는 것이 곧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것을 동양에서도 함께 말하였다. 특히 노장사상에서는 동심론(童心Q)에서 이것에 깊이 관여하였다.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그는 현덕(玄德)한 사람이다. 노자 28장을 보자. 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위천하계 상덕불리 복귀어영아(知其雄 受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上德不離 復歸於嬰兒). 수컷(하늘, 양)을 알고 암컷(땅, 음)을 수호하면 천하의 생명수 인 골짜기의 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덕인 자연을 잃지 않고, 영아의 동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함덕지후 비어적자(含德之厚 比於赤子). 덕을 돈후하게 품게 되면 마치 영아와 같이 된다. 벌이나 독충이 쏘지 않고, 맹수나 새들도 덤비거나 쪼지 않는다. 이것이 노자가 보는 맨사람이다. 혹시 함석헌은 씨을 이 지경의 사람들로 본 것일까? 지극히 부드러우면서도 어린아이의 손아귀와 같이 단단하게 잡고, 부드럽기 한이 없어서 물컹한 듯 하지만, 모든 것을 다 함유하는 영아. 부드럽고 약함으로 주변을 다 정리하는 어린아이. 동심(童心)은 진심(眞心)이요, 진심은 최초부터 있었던 맘, 곧 흠이 없는 동심 이라는 것이지 않을까? 그 진심을 잃으면 참 사람, 즉 맨사람으로서의 씨을 잃는 것이 다. 이것이 씨의 맘이지 않을까? 함석헌은 기독교에서나 노자가 추구하는 진실된 사람 을 그것으로 본 듯하다. 조금 더 노장사상을 어떻게 보았는가 살펴보자. 함석헌은 노장이해, 아니 노장의 삶의 자세를 이렇게 이해했다. 
“노자ㆍ장자는 한마디로 이 현상세계를 초월해 살자는 것이다. 초월한다는 말은 결코 내버린다는 말이 아니다. 이 현상계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양으로 꿈도 아니요, 허망한 것도 아니요, 내버려야 하는 악한 것도 아니다. 노자ㆍ장자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살지도 않았다. 이 현상의 세계는, 그 안에 태어난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피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그런 것, 자연적인 것이다. 자연이므로 필연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 그 태도가 문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기 때문이다. 생각하므로 알게 되고(知), 좋고 나쁘고가 판가름되며(情), 그에 따라서 선택하고 버리고가 나타난다(意). “그럴 때 이 생각하는 나와 나를 둘러싸는 세계 또는 그 안에 있는 나와 마찬가지로 생 각하는 사람과의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상대에서 절대를 보아 절대에서 상대가 나왔음을 안다. 그렇게 함이 현실을 초월함이 다. 절대도 영원 무한, 상대도 영원 무한, 상대에 살면서 절대에 하나 되기 때문에 ‘현지 우현’(玄之又玄)이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 속에서 그대로 절대와 하나 되기 때문 에 ‘중묘지문’(衆妙之門)이다. 노자ㆍ장자의 삶은 도에서 시작되고 도에서 끝난다. 끝이 시작이요, 시작이 끝이다.”  
도는 “모든 것의 근본이기 때문에 그것은 원인 없는 원인이다. 스스로 그런 것, 곧 자 연이라고 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음, 곧 무라고 하기도 한다.”  그 도를 깨달으려면 어 떻게 하면 될까? 노자는 지적으로는 허무(虛無), 적막(寂寞), 염담(염淡)을 강조했고, 실 행으로는 무위(無爲), 유약(柔弱), 부쟁(不爭), 복귀(復歸)를 말했다.  
이렇게 주장한 노자를 평화주의자로 이해한다. “노자처럼 시종일관 순수한 평화주의를 
부르짖은 사람은 없다. 더구나 살벌한 부국강병주의의 춘추전국시대였다.”  노자는 무위 로 하자는 것, 정치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을 실제 삶에서 실현한 이가 장자다. 무치의 정치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삶의 원리에 적용된다. 즉 모든 생 명존중과 생명의 자기통치능력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장자는 가난했지만, 벼슬을 싫어했고, 제삿집 돼지로 사느니 차라리 시궁창에서 뒹구
는 돼지가 좋다고 했다. 높은 관직을 주어 모시려는 왕이 보낸 사자에게 그것을 강조해 말한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 앉는 대신 포악한 지배자의 착취 아래 사는 씨을 건져주기 위하여 불같은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이다. 임금, 학자, 호걸, 영웅이라는 존재들이 그의 붓끝에서는 한갓 지푸라기도 되지 못해 한다. 이러한 전통은 예수의 삶과도 통한다. 함 석헌은 이러한 삶의 자세를 그의 유명한 논설 ‘들사람 얼’(야인정신)에서 잘 표현한다. 이러한 정신은 구약성경에서는 이사야와 예레미아와 아모스 같은 선지자의 삶에서 그 모 범을 본다. 함석헌의 국가주의비판은 이러한 노ㆍ장의 무치의 정치와 예수의 하늘나라 개념에서 따온 것임이 분명하다. 현실세계에 살면서, 그것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으면 서 새로운 참의 세계와 나라를 꿈꾸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들의 융합이라 할 수 있다. 
 
8 퀘이커로서의 나의 삶 나는 퀘이커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 믿음과 실천을 꼭같이 중요하게 여기는, 아니 하나로 보는 퀘이커로서 그러한 전통을 내 자신이 지킬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깊은 회의가 온다. 특히 옛날에 비하여 사치스럽게 살 수밖 에 없는 오늘과 같이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 과연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 무엇 일까? 태어남 자체가 환경파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 과연 자연 생태계를 파괴 하지 않고 사는 길이 무엇일까? 처음부터 끝까지가 오로지 경쟁과 다툼을 부추기는 삶의 패턴에서 함께 살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가? 지나치게 체계화하고 조직화한 사회에서 과연 자연스럽고 바람과 같은 영의 인도를 받아서 살 수 있을까? 점점 국가주 의가 굳어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 인류는 하나의 생명체계 속에 있다는 믿음과 철학을 어 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맹세를 하지 않고, 서약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삼아왔던 퀘이 커의 삶을 모든 것이 서류와 사인으로 이루어지는 디지털화한 사회에서 어떻게 자기 양 심을 주장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할 때는 내 숨이 막히는 듯하다. 그 러나 그러한 답답하고 꽉 막힌 듯한 현실에서 작은 활로를 찾아 나가는 것이 또 퀘이커 가 찾아나갈 길이 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느낌으로 잡는 실천 가능한 좁 은 길을 찾는 것이 계시를 기다리는 삶이요,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신비로움이 되지 않 을까? 그러니까 신비함이 없는 듯한 삶에서 신비체험을 할 수 있는 날카로운 기다림이 필요한 시기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다음과 같은 삶의 자세로 내 삶을 이끌고 싶다. 
한반도는 한 민족은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와 두 나라로 갈 라져서 다투는 현실 속에 있다. 나는 전 인류는 민족과 개별국가를 초월해야 한다는 철 학과 믿음 속에서 현상태에서 어떻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에 깊 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내 개인이 먼저 평화가 되고, 화평한 맘으로 살아갈 것을 노력할 일이다. 그것과 동시에 주변의 사람들과 화평한 삶을 나눌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하여 일단 나는 내 얼굴과 맘 속에서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함을 실천하려고 한다. 나와 다른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관용하는 훈련을 쌓아야 함과 동시에 획일화하려는 전통과 사회흐름과 대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 것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캠페인을 벌이려 한다. 그것은 좌우의 이 념이나 노선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어떤 전쟁도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가진 늙은이들과 함께 전 국토를 순례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던 지역을 찾아서 평화의 기운 을 불어 넣는 일을 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르다. 동시에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 들이다. 이것을 실현하는 순례의 길을 걷고자 한다. 
평화의 기운은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창의적으로 비폭력과 평화의 상태로 
바꾸는 훈련이 필요함을 느낀다. 내 자신이 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활동 가로 참여하면서 직접 경험한 결과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돌보고, 모든 문제를 비폭력 평화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과 빠르게 반응하고 행동하기 전에 깊게 생각하여야 하고, 최선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을 자신의 개인 생활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훈련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그것은 내 자 신이 AVP훈련가로 여러 번에 걸친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확신하게 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워크숍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내 중요한 생의 과제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끊임없이 일반 시민과 비폭력 평화사상에 대한 연구와 강좌와 포럼을 통한 평화분위기 의 확산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적대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신뢰가 없는 자도 그것이 있 는 자처럼 신뢰하는 부드럽고 유연한 삶을 일상에서 훈련하는 일이다. 그것은 부드러움 이 강력함을 포섭하고, 유연함이 경직된 것을 녹인다는 도가철학의 일상화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특수한 사람만이 그러한 훈련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반 사람이 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그것이 곧 사람들에게 내면의 빛이 있다는 것, 내면의 스승이 있다는 것, 불성을 가지며 도와 접촉 할 수 있는 길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의 믿음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일상의 신비체 험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는 곧 지극한 정상생활이다. 
그러나 현대생활, 특히 문명한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일상의 쉼이 부족하고 깊은 숨쉼이 부족하다. 그래서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지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이끄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과 분위기에 끌려가면서 힘 들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어느 철학자가 분석했듯이 현대사회는 피로사회다. 나 에게는 피로를 느끼는 그들을 이끌고 평안한 곳으로 안내할 능력과 비전이 없지만, 그분 들과 친구처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물론 나는 특별 상담사도 아니고, 갈등해결사도 아니며, 그와 같은 훈련을 쌓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립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방황하는 사람의 친구가 되고 싶은 맘이 참으로 많다. 그것이 내 나름으로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길이라고 느낀다. 그런 접촉, 만 남은 일대일의 개별만남도 가능하지만, 어떤 프로그램을 통한 소그룹으로 만날 수도 있 다고 확신한다. 아주 지극히 당연한 진리 안에서 살고 싶다. 즉 모든 것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다.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관습도 다르고, 옷도 다르며, 생활하는 모습도 다르다. 그 다름은 하나의 큰 희망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이 하나의 근원에서 나와서 종국 에는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거부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살고 있 는 지역의 시냇물은 가까운 산골짝에서 발원하여 흐른다. 그것은 곧 내 농토와 내 집의 마시고 사용하는 물을 제공한다. 나는 그 물 때문에 산다. 그러나 그 물은 흐르고 흘러 서 거대한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한없이 넓지만 하나의 바다다. 거기에서 하나가 된다. 결국 모든 실개천과 강을 거쳐서 바다로 흘러든 물은 한 물로 친하게 지낸다. 모든 물은 곧 친구들이다. 이런 비유를 우리의 논의인 종교와 생활, 신앙과 실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의 핵심들은 각각 문화와 시대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출발하고 다르게 실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추구하는 궁극은 하나에서 만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결 국 친구다. 유대교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민속종교가 곧 한 물에서 친한 친구로 살되 자기의 고유한 전통과 삶의 길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을 하는 것이 내 과제 중 하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다리의 종류는 각종 분야별로 다양할 것이다. 나는 적어도 3 가지의 참여를 통하여 다리를 놓을 수 있을 것이다. 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Quaker 그리고 Amnesty International의 적극활동가로서 국경 없는 삶으로 다리를 놓은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다른 문화 종교, 사람(인종), 문명, 관습 따위를 직접 간접으로 경험하 고, 그 속에서 알짬을 찾아서 새롭게 배우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열린 자세에서 항 상 찾아가는 자의 삶을 이끄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2022/11/20

[김조년] 이럴 수는 없어 : 10·29 이태원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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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이럴 수는 없어 : 10·29 이태원참사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2.11.15


한남대 명예교수

마침 연세대학교 학생들에게 ‘풀뿌리 시민사회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어서 서울에 갔다. 아름답고 넓은 캠퍼스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학생들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러 해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은 사회운동을 펼칠 주제를 찾기는 쉽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그에 맞는 시대의 얼굴과 소리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민감한 촉각을 가지고 찾아낼 때 아주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주 순수한 맨사람의 맘, 맨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주 깊은 곳에, 일상에 자리잡은 심각하나 드러나 있지 않은 문제를 찾아서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시대의 얼굴은 무엇이며,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는 어떤 것일까? 이것을 깊이 생각하다가 이태원을 가기로 했다.

지하철 녹사평역에서 내려 10월 29일 밤에 사라져 간 이들을 애도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합동분향소로 갔다. 경찰 몇 사람이 서 있었고, 국화꽃을 나누어 주는 검은 옷 입은 젊은 두 여인이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조문객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유족같지는 않았다. 자원봉사자인가? 아니면 파견된 공무원인가? 거기에는 영정도 위패도 없었다. 그냥 하얀 국화꽃으로 그런 장소라는 것을 표시하였을 뿐이다. 나는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거기에 국화꽃 한 송이를 놓고 눈을 감고 머리를 숙여 묵념하였다. 부끄럽게도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렇게 참담하게 죽어간 그들을 떠올리려 해도 그것이 내 맘에 담겨지지가 않았다. 참 맘이 답답할 뿐이었다.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걸어서 이태원역으로 갔다. 참혹한 일이 벌어진 해밀턴호텔 앞 인도에는 많은 국화꽃들이 놓여 있었고, 상당히 많은 것들은 이미 시들어가고 있었고,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써놓은 쪽지들이 가득하였다. 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의 사진이 틀에 넣어져 있었고, 애도의 뜻으로 가지고 온 아직 뚜껑이 열리지 않은 와인병과 소주병들이 애도의 쪽지들이 붙은 옆에 모아져 있었다. 사고가 난 골목길은 경찰관들이 지키고 선을 쳐놓아서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멀리에서 보니 그 골목에는 어지럽게 흩어진 쓰레기들만 보였다. 짧고 좁은 골목이 깊게 보이지 않았다. 약간 경사가 져있었고, 옆으로 굽어 있었기에 골목길이 멀리까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는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등록된 어느 민속굿을 하는 분들 십여명이 굿을 하여 원혼을 달래고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이런저런 예식을 올렸다. 그 옆에는 스님 같은 한 분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나 일부러 거기를 찾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거나 합장을 하고 간단히 목례를 하기도 하였다. 맘이 참 허전하였다. 이럴 수는 없다는 맘만 들었다.

‘이럴 수는 없어/ 10ㆍ29 참사가 있던/ 이태원 해밀턴 호텔 앞/ 합동분향소와 사고현장이/ 성의도 진정도 애도도 위로도 없는/ 원한만 쌓이게 할 듯/ 위패도 영정도 없는/ 의미 없는 시들어 말라 썩어질/ 흰 국화꽃만 차가운 분노를 기다릴 뿐/ 반성도 각오도 변화도 없는/ 거짓 껍질만 있는 곳/ 죽고 또 산 원혼이 슬피 우는 곳/ 살아 숨쉬는 민중의 소리 없는 분노와 차가운 속 맘이 가득/ 이렇게 민중을/ 소위 국민을 홀대할 수 없다는 날카로운 판단이/ 다시 찾을 맘 지워버려/ 벌건 대낮에 악귀 되어/ 그 스스로 갖는 무지와 오만으로/ 마감할 그날이 다가올 수밖에/ 이럴 수 없는 그짓으로/ 스스로 판 무덤일 수밖에’


이런 예감이 내 가슴을 가득채웠다. 사진을 구하는 것은 유족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왜 그렇게 졸지에 간 그들의 이름만이라도 거기에 내놓지 않았을까? 그 사건이 있고 얼마간 그런 행사에 갈만한 자녀를 둔 내가 아는 사람에게 혹시나 하는 맘에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이런 큰 사건이 난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맘을 함께 하여 슬퍼하고 위로하고 싶어한다. 간 사람이야 말이 없지만, 남은 가족들이나 친구들 또는 아는 사람들은 맘 깊은 곳에서 같이 있다는 것을 나눈다. 그렇게 해도 일생을 안고 살아야 할 응어리를 가슴에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안전을 강조하지만 ‘국가는 없다’는 말이 실감나도록 그냥 지워버리려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했다. 어디에 사는 어떤 사람이 그런 참사를 당했는지 모르게 둔 것은 정부나 당국에서 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보도에 의하면 생명을 잃은 158명 중 10대가 12명, 20대가 104명, 30대가 31명, 40대가 8명, 50대가 1명(이 소식 이후에 2명이 사망하였다는 데, 그들의 연령대는 모르겠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슬픔을 당한 분들과 함께 할 길이 없다. 세월호침몰사건 때는 짧은 순간에 슬픔과 어처구니 없음이 확 올랐다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런데 이번 10ㆍ29 참사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벙벙하다가 차차 어처구니없음과 시민들의 관심과 분노가 증폭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정부에서는 빨리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느낌을 주지만, 아마도 상당히 오래도록 이 문제는 현 정부를 잡고 늘어질 것같다. 유족들끼리, 그와 같은 일을 이미 당했던 사람들이나 그분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은 분들의 맘이 연결되지 않고 완전히 단절되고 고립된 맘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됐다. 책임소재를 밝히고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변을 당한 분들을 씻어주고 안아주는 일을 전체가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것은 정부가 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하지 않으면 시민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원한의 소리가 지루하리만큼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22/09/24

[김조년] 현대문명생활과 에너지 문제 (1) < 칼럼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현대문명생활과 에너지 문제 (1)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현대문명생활과 에너지 문제 (1)
입력 2022.09.20

한남대 명예교수

인류역사에서 불(에너지)을 발견하여 사용하게 된 것은 누가 보아도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거대한 사건이다. 불 사용을 경험한 인류는 끊임없이 불, 곧 에너지개발과 진화에 어마어마한 힘을 쏟았다.

에너지의 원료가 되는 것들이 끊임없이 발굴되었고 개발되었다. 그 중 인류문명 전환에 커다란 획을 그은 것들이 나무들과 풀들을 말려서 사용하던 것을 넘어 화석연료들, 즉 석탄과 석유자원을 활용한 일이다.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이 천연가스다. 그것들의 끝없는 활용범위가 넓어지고 커지면서 인류의 물질충족효과가 커졌다.

안락한 삶을 보장하는 생산성의 확장은 두 가지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하나는 그것들을 사용하면서 나타나는 오염문제요 다른 하나는 자원의 고갈문제다. 모든 인류의 생활분야에서 에너지활용량이 항상 그리고 계속하여 급격히 증가하면서 오염증가와 자원고갈문제 역시 함께 커지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따른 비용이 계속하여 상승하였다. 그래서 깨끗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 에너지원을 찾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그것이 핵에너지다. 핵발전소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건설되어 전기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아주 놀랍게 확보되었다. 깨끗한 에너지라고 선전되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산화탄소배출은 없지만, 방사능오염과 위험을 극복할 길은 거의 없다고 판명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핵발전을 한 다음에 남는 핵재를 안전하게 처리하거나 보관할 능력을 확보한 기술은 지금까지 개발되지 않았다. 땅속이나 바닷속에 임시 저장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저장소들도 곧 한계에 부딪힌다고 한다. 장구한 세월 동안 방사능오염은 축적될 것이란 것이 일반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논의되고 찾아진 것이 신재생에너지다.

오늘날 기후위기의 차원에서 볼 때, 세계 어디에서나 화석연료의 사용은 곧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모든 생산품에서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증명, 즉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를 사용하였다는 확실한 증명이 없으면 수출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산업구조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류문명의 딜레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개발되고 논의되는 것이 다시 말하지만 이른바 신재생에너지다. 바람과 물과 태양과 수소와 생물(바이오)에너지다.

물론 이 중 바람과 물을 이용한 에너지 생산은 매우 오래된 것들이다. 다만 사용이 불편하고 에너지 생산이 대량으로 지속하여 나오지 않는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화석연료와 핵을 사용한 에너지생산이었지만, 지금 그것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위험을 걱정하게 만들었다.

정부에 따라서 에너지 정책이 왔다갔다 한 것이 많다. 그 중 특히 크게 쟁점이 되는 것이 핵에너지와 신재생에너지다. 우선 핵에너지에 대한 논쟁은 끝없는 줄다리기 게임으로 이어진다. 에너지생산과 자본의 카르텔은 끝없는 문제로 등장한다.


그것을 넘어 위험의 문제는 깊게 생각할 일이다. 지진과 화산폭발과 전쟁과 끝없는 태풍이 다가와 핵발전소를 뒤집을 가능성은 항상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런 논의는 널리 알려진 결론이다. ‘1. 상상 가능한 사고는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 2. 사고가 일어날 때는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3. 사고는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원인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는 바로 이 점을 그대로 증명해 주고 있다.

그래서 정권의 변화와 상관없이 상당히 빠르고 안전하게 그리고 지속하여 탈핵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 옳다고 나는 본다. 그 옳은 것을 실천하기 위하여는 신재생에너지 정책이 치밀하고 안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평화의 문제와 함께 정권을 넘는 광범위하고 솔직한 논의를 거친 결과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최근에 대통령도 개탄스럽다고 말하고 정부에서도 문제로 삼으면서 감사원이 철저히 감사하겠다는 태양광발전시설확장과 관련된 부정을 캐내는 문제는 심각하게 중요하다.

물론 잘못된 것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것은 철저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신재생에너지개발의 필요성과 공급에 대한 흐름을 끊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안 된다. 우선 잘못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 대신 태양광발전의 공급을 끝없이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산림이나 농지를 훼손하는 것은 안 된다. 그 대신 활용가능한 곳을 최대한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엔 고속도로나 고속도로 주변의 경사면, 노천주차장, 그리고 모든 건축물의 옥상과 벽들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건물들에 새롭게 시설하는 것은 비용도 별도로 들고 미관상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 건축할 건축물들에 대하여는 태양광발전시설을 강력하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하려면 기술이 탁월하게 개발되어 아름답고 작고 효율이 높은 다양한 형태의 태양광전기 패널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색깔과 모양으로 아름다운 지붕을 조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느 시기까지 하겠다는 조급함을 버리고, 정권의 바뀜과 상관없이 지속되는 안전한 에너지확보정책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깨끗하고 안전하면서 지역중심의 에너지정책은 필수조건이라고 본다.

 

2022/07/15

[김조년] 국제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국제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국제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기자명 금강일보   입력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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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대 명예교수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치부될는지 모르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이렇게 생각했다. 서로 평화롭게 살려고 한다면 이러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국경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민족과 민족 사이에 순수 혈통논쟁이 없어지고, 종교와 종교들 사이에 순수 진리논쟁이 없어지며, 기업들 사이에 지나친 경쟁과 기업비밀들이 가득히 쌓이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나는 바란다.

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같이 공부하는 동무들끼리, 같은 또래들끼리 무서운 경쟁을 하지 않고 서로 돕고 사이좋게 사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학교사회가 되면 참 좋겠다. 나라와 나라들 사이에서도 어떤 강력한 나라의 힘에 어떤 작고 약한 나라들이 제 주관대로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일 없이 서로 대등하게 떳떳이 마주서는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

그러려면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체제가 아니라, 작은 행정단위 정도로 국가경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말 속에는 거대한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인도 등이 작은 행정단위의 국가체계로 변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어 있다. 정치행정을 그렇게 하되 상호간의 교류는 지금 인터넷이 연결되듯이 온 세계가 아주 긴밀하게 엮여지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평화로운 사회가 올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온 세계가 진통을 겪는다. 누가 먼저 침공하거나 전쟁을 도발했는지에 대한 논쟁도 끝나지 않았고, 왜 일어나게 된 전쟁인지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언제 어떤 식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르는 무모한 전쟁이란 것만 느낀다.

무수히 많은 피해자들이 나오고, 굉장히 많은 삶의 기초들이 파괴되며, 국제관계가 냉랭하게 진전된다는 것만 나는 알 뿐이다. 지극히 적은 수의 사람들이나 기관들만이 그 전쟁이 지속되기를 바랄 뿐, 대부분의 나라와 사람들은 전쟁이 곧 끝나기를 바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나토회원국들의 정상들이 모인 이유는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다. 국제패권경쟁에서 미국중심의 서방세계를 공고히 하겠다는 모임이었다는 것 역시 너무나 뻔하다. 특히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강력한 견제가 필요하다는 미국행정부의 판단이 크게 작용한 모임이라는 것도 모두가 다 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나토의 비회원국 네 나라, 호주 뉴질랜드 일본 한국의 정상들도 초청되어 참여하였다. 그 의도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 아니던가?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거부하기는 쉽지 않겠다고 보았지만, 한국에서는 참석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직 새로운 정권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내 국제 문제를 파악하지도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많은 국제정상들의 얼굴이라도 익히는 것이 좋겠다는 뜻으로라도 가는 것이 좋겠다는 심정으로 참여할 때 매우 안타까웠다. 우선 당장 그 회의의 결과가 우리 삶에 미치는 것은 아니겠지만, 서서히 그러나 빠르면서도 넓게 나타날 것이라고 나는 본다. 이러한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국제관계로서 평화의 문제는 정권이 바뀜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쉽게 달라질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물길이 흐르고 방향을 틀듯이 긴 시간과 공간을 두고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관계가 몹시 복잡하고 촘촘히 얽혀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더욱이나 평화로운 생활에 관련이 있는 국제관계는 점점 더 빠르고 견고하게 평화체계로 전환되어 굳어져야 한다고 본다. 한반도에서처럼 입만 떼면 한 민족이라고 말하면서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정전상태를 70년 가까이 유지하여 으르렁대는 데가 어디에 있을까? 얼마나 깊은 불편함과 불안함 속에서 쓸데없는 군비경쟁에 온 힘을 쏟아붓는가? 그래서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남북한 간에는 빠른 시간 안에 정전협정을 종전선언과 함께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모든 교류를 순조롭게 서로 협조하면서 할 일이다. 도토리 키재기 식의 다툼은 참으로 의미가 없다고 본다.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저렇게 군비를 확충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물론 어떠한 경우가 되어도 핵무기를 포기하게 하는 것은 옳다. 그러기 위하여는 안전한 평화체계를 서로 보장하고 확보하는 길이 가장 빠르지 않을까? 그렇게 하여 종국에는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들도 폐기되어 이 지구상에 핵없는 단계에까지 가야 한다. 안전한 안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가장 견고하고 아름다운 안보체계는 좋은 평화체계라고 본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거대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과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들 관계에서는 어디와도 종속관계나 적대관계로 대할 일이 아니다. 한미관계가 공고한 동맹관계라면, 이제는 한중관계, 한러관계 역시 견고한 동맹관계로 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선 미국도 포함하여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 일본, 몽골 등의 나라들이 참여하는 동북아시아 평화체계가 구축되면 좋겠다.

문명은 바람처럼 물처럼 흐른다. 하늘의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지고 멈췄다 흐른다. 한 때 그리스 로마 이집트 영국 등을 높이던 문명,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을 높이던 문명, 한 때 고대 중국과 인도를 이끌던 높은 문명은 아메리카로 흘러갔고, 그 문명의 흐름은 곧바로 동북아시아 쪽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사이비 애국주의식의 주장이 아니라, 문명 전환과 흐름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정점이나 바닥은 없다. 내가 분명히 전망하는 것은 거대한 국가체계는 작은 행정단위의 나라들로 갈라져서 활동할 것이다. 노자가 말했듯이 닭울음 소리가 들리는 작은 단위의 생활공동체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둔 국제관계를 이루도록 우리 행정부는 노력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