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7

“예수는 혁명가…교회가 곧 기독교라는 생각은 위험”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예수는 혁명가…교회가 곧 기독교라는 생각은 위험”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예수는 혁명가…교회가 곧 기독교라는 생각은 위험”



등록 :2015-12-22



김형석 명예교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김 교수가 모교인 연세대 뒷길을 걷고 있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본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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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목사도 아니고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그는 철학자이다. 평생을 철학교수로 살았다. 지난 9월 그는 96살의 나이에 <예수>를 썼다. 그가 쓴 <예수>는 1만권 이상 팔렸다. “예수가 누군가를 묻고, 그 예수와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경건히 탐구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된다면 그 이상의 고마움이 없겠다”고 서문에서 겸손하게 책을 쓴 이유를 밝혔다.



그가 예수를 안 것은 중학교 1학년, 14살 때였다. 건강이 나빠 삶의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그 겨울 그는 예수를 만났다. “내가 찾은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었고, 영혼의 친구로서의 예수였다”고 한다. 그는 고백한다. “예수를 안 뒤 지난 80년 동안 하루도 하나님과 예수는 내 생활에서 떠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예수를 잊거나 떠난 때가 있어도 예수는 항상 내 곁에 있었다. 나는 가까이 있기 때문에 모르는 점이 많았던 예수를 지난여름 다시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예수를 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알려주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 주제는 과연 인간 예수가 우리의 신앙적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목사도 아니고 신학 전공도 안한

나이 96살, 평생 평신도







건강 나빠 삶의 한계 느꼈던 14살

독서를 통해 예수를 알고

그의 가치관, 기독교 정신 체화







목사의 설교로 예수 알았다면

이미 기독교를 포기했을 것

그들은 기독교 지식에만 매달려







큰 교회가 성공이라는 생각에

참된 기독교 정신 버려

교회만 가면 천당 간다는 건 죄악







김수환 추기경 말처럼

교회는 사회 위해 있는 것이지

사회가 교회 위해 있는 것 아니다







지금도 하루 2번 강연, 원고지 40장 써



그가 말하는 ‘친구’는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이 땅의 지성인들이었다.



백살을 그리 멀리 남겨놓지 않은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사진)는 놀라우리만큼 건강하다. 1970년대 중반 그가 쓴 에세이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60만 독자가 읽었다. 허무와 죽음, 고독과 절망, 좌절감 속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절망을 극복하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그의 철학적 수필집은 당시 초베스트셀러였다.



그는 지금도 하루 두 차례의 강연을 하고, 원고지 40장 이상의 글을 쓴다. 대장 내시경은 평생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위 내시경은 20년 전에 딱 한 번 해봤다. 물론 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어릴 때 그는 건강의 열등생이었다. 중년까지는 친구들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그는 젊은 시절 못지않은 정열과 건강으로 노년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의 건강 ‘비결’을 우선 물어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우선 그에게 <예수>를 쓴 이유를 물었다.





김형석 명예교수는 <예수>를 쓴 이유는 인간 예수임을 밝히고, 그가 그리스도임을 주변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한국 교회 비정상적 모습 걱정



“나는 독서를 통해 예수를 알았지, 결코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안 것이 아니다. 만약 설교를 통해 기독교 신앙에 접근했다면, 이미 기독교를 포기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통해 예수를 알고, 예수의 인생관, 가치관, 그리고 기독교 정신을 체화했다. 목사들은 예수의 인생과 가치를 알려주기보다는 기독교 지식을 전달하려고 애쓴다. 지식은 새로운 지식이 들어오면 교체된다. 또 참된 신앙에 들어가는 데는 열쇠가 필요하다. 그 열쇠는 바로 예수이다. 예수와 나의 관계를 알지 않고는 기독교 주변에만 서성이게 된다. 많은 교인들이 ‘나 교회 다닌다’며 만족한다. 교회에 가서 헌금을 많이 하면 높은 직분도 준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를 만났나?’ 물으면 ‘아직 못 만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는 인간 예수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책임을 감당한 인간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는 이어서 한국 교회의 비정상적인 ‘교회주의’를 걱정했다. “오늘날 교회는 사랑의 봉사보다는 소유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좀더 큰 교회, 좀더 많은 신도를 자랑한다. 유럽의 수백년 걸려 지은 큰 성당은 건축미와 예술성은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성당의 건축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굶주림을 견뎌야 했고, 고귀한 생명과 인권이 유린당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예수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유럽에선 이미 1970년대 버림받아



교회가 곧 기독교라는 생각이 위험하다고 했다. 기독교는 가족과 병원 같은 많은 공동체를 포함하고 있고, 대표적인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이다. 그는 김수환 추기경이 말한 “교회는 사회를 위해 있는 것이지, 사회가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바티칸 교황이 이런 생각을 하는 데는 1500년 걸렸다. 젊은 김수환 신부가 이런 생각을 했기에 비슷한 생각을 한 바오로 6세가 그를 추기경으로 발탁했다는 것이다.



“큰 교회가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교회는 참된 기독교 정신을 버렸다.” 그는 1972년에 세계일주 여행을 하며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이미 그때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버림받고 있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교회는 한때 700명까지 신도가 있던 대형교회였으나 당시 예배 보는 신도가 20명뿐이었다. 목사는 5명이나 됐는데 예배 보는 내내 목사들은 입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다음주에 들른 영국 런던의 가장 오래된 큰 교회는 일주일 있다가 문을 닫는다고 했다. 천주교 성당도 마찬가지였다. 코펜하겐의 큰 성당은 문을 닫고 도서관과 주민센터로 변했다.” 그는 교회주의에 빠지면 기독교 정신이 버림을 받는다고 했다. 목사의 설교에는 교리와 교권은 있는데 인권은 없어서 지성인들이 교회를 외면한다고 했다. “큰 교회 목사들은 교회에 안 오면 죄인이라고 강조한다. 죄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다. 목사들이 교회만 나오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고, 교회만 나오면 천당을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했다.



그는 예수의 혁명가적 정신을 강조했다. “예수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도덕적인 인간의 의무를 다하도록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신앙적 은총을 내린다고 했다. 또 정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이는 복이 있으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의 표현은 그 자체가 계명과 교리에 속박됐던 구약 전체에 대한 도전이자, 로마제국의 권력에 대한 항거적인 혁명정신”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한 사람의 통치자를 위해 모든 사람이 노예화되는 것을 정당시하던 당시 시대정신을 뒤엎는 소중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평신도이면서 권위 있는 성경학자이길 원하는 김 교수는 가난한 목수로 일하던 예수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인류를 구원하며 느껴야 했던 인간적 고뇌와 두려움을 성경 곳곳에서 느꼈다고 한다. 그런 예수이기에 평생 함께한다고 했다.








지팡이 보청기 틀니 없이 꼿꼿



그에겐 노인들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지팡이나 보청기, 틀니가 없다. 50살 중반부터 혼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수영을 일주일에 세 번, 30분씩 한다. 그것이 그의 장수와 건강의 비결일까?



그는 나이를 먹어도 일을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한다. “건강을 잊었어요. 아마도 건강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일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며 “앞으로 1년은 더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기자는 대학 1학년 때 그의 ‘철학개론’ 강의를 들었다. 중간고사 문제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차이를 논하라”였다.(그때 그 과목을 C학점을 받아 장학금을 못 받았다) 점심 대접을 하고 싶었으나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가 음식점에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해 예약을 부탁했다. “몇 분 오시냐?”는 질문에 그는 “한 명”이라고 답한다. 문득 그가 지난 세월 익숙해졌을 ‘인간적 고독’에 대해 떠올랐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723093.html?_ns=c1#csidxbd5b6cd7cc18d2280450ec13c8a6664

2017/12/26

EYE VISION

We are quickly approaching the day when people who suffer from the most common causes of vision loss and blindness, such as macular degeneration, glaucoma, cataracts, corneal visual impairment, diabetic retinopathy, and even near and far-sightedness can kiss goodbye to their glasses or contact lenses and even forget about considering Lasik operations...
This is thanks to a breakthrough from a retired United States Marine Corps along with a medical researcher, with over 26 years experience, that is going to change everything we thought we knew about deteriorating vision...
No more corrective lenses or dangerous eye operations! Would you be willing to try a "Delicious Smoothie" that could stop and even reverse the problem of deterioration in your vision naturally?  
Mr. Bill Campbell, a retired Sergeant in the United States Marine Corps, in a brave (and lucky) attempt to save his wife from going blind discovered a remote Aboriginal army unit deep in the Australian Outback. The eyesight of these Aboriginal is up to FOUR TIMES better than ours (all because of their diet). 
 
Against all odds he was able, with the help of Bunji, an Aboriginal soldier and independent medical researcher, to develop a natural recipe that is up to 3 TIMES MORE POWERFUL than those consumed by the Aboriginal. This recipe is now clinically proven for reversing even the worst cases of visual impairment and also protect against devastating eye diseases and blindness for life.
He said that he just couldn't see his wife becoming blind, losing her independence, and becoming more and more depressed. He wanted to find a better future for her.
Now, after months of extensive research, study and experiments later, David Lancaster, the independent medical researcher has discovered a surprisingly simple way to turn the ancient Aboriginal recipe to a simple recipe that can be made at home and that actually can reverse even the worst cases of visual impairment and protect against devastating eye diseases and blindness for life, giving you back the perfect 20/20 vision.
This new method was met with harsh criticism from the optometry industry, but he was never criticized by those who actually try it; most of them experienced success in just a few weeks. 93% of the participants in the trials achieved 20/20 vision while the rest reported dramatic improvements in their vision.
Bill says that this method has proven results, and these results can speak for themselves.
By now you’re probably wondering why you’ve never heard of this method. The answer is pretty simple really; the 36 billion dollar optometry industry will never tell you that there’s a quick, easy and natural way to restore your vision, because almost nobody would ever need a pair of glasses ever again! The optometry industry NEVER attempt to get to the root cause of the problem in order to actually make your eyesight better – because that would destroy their business model!
Even though Mr. Campbell was heavily pressured by Big optometry companies to let the issue go, he went ahead and created this presentation to let people around the world know that they can make a change and free themselves from the failing eyesight.
Watch the Presentation Below Right Now!
Vision Video
There has been quite a shocking response to the presentation, which has been shared and seen by many eye vision communities thanks to the power of the internet.
Some viewers are outraged over the information being suppressed and hidden, while others are just happy to find out that their lives can improve significantly and they can get achieve 20/20 vision again.
Bill is keen to stress that everyone can follow this method. He says that you would be surprised how powerful these ingredients when consumed at the right time and dosage each day.
Of course, viewers must exercise common sense and check their eye vision regularly. This video could be pulled down any moment, so make sure you click on it and watch all of it if it’s still up for you.

2017/12/25

필립 제이슨 - 나무위키



필립 제이슨 - 나무위키



필립 제이슨

최근 수정 시각: 2017-12-22 19:15:05



Phillip Jaisohn / 피제손, 서재필(통칭)
1864년 1월 7일[1] ~ 1951년 1월 5일








1. 개요2. 이름3. 생애4. 논란5. 기타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이 글의 대부분의 소스는 시사저널 1994년 기사에서 발굴되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내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을 짐승처럼 부려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조선의 무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언론인, 군의관, 정치가, 의학자였다. 미국에서 해부학자, 시인, 소설가, 의사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달성이고, 자(字)는 윤경(允卿), 호는 송재(松齋)·쌍경(雙慶)이다.
2. 이름[편집]


'서재필'의 어순을 바꿔서 '필재서'로 만든 다음 영어화시켜서 필립 제이슨이 되었다. 성 표기가 일반적으로 '제이슨'에 많이 사용되는 'Jason'이 아닌, 'Jaisohn'으로 약간 특이한데 그 당시 그의 이름을 들은 미국인 기자들이 발음 나는 대로 적은 것이 변형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전 세계에서 이 사람 한 명만 갖고 있던 성씨였다. 덧붙여 서재필이라고 부르면 언짢아 했다고. 물론 jaisohn이 아닌 jason으로 불렀어도 서양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특이한 성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필립이나 제이슨 둘 다 이름으로 쓰지 성으로 쓰는 경우는 없으니까.
3. 생애[편집]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2] 가내마을에 있는 외가 성주이씨 집안에서 동복 현감[3] 서광효[4]과 이씨 부인의 셋째 아들 서재필로 태어났다.

뒤이어 어렸을 때 아버지 서광효의 6촌 형제이자 그의 7촌 아저씨인 충청남도 은진에 사는 서광하의 양자로 갔다. 서광하의 처가가 유명한 안동 김씨로, 양 외삼촌 김성근의 집에 갔다가 그의 친척 손자뻘 되는 김옥균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된다.

1879년에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전강에서 1등하고 1882년 별시문과에 합격, 교서관 부정자, 훈련원 부봉사 등을 지내고 일본으로 유학, 1884년 토야마 소년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했다. 이때 양어머니 김씨의 상을 당했지만 특별히, 신식 군대를 창설할 목적으로 설립된 병조예하 신식 군대 훈련소 조련국 사관장이 되어 생도들을 양성하다가 갑신정변에 참여한다. 젊은데다가 생도들을 거느린 무관이었기 때문에 정변의 행동대장 격으로 활약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약관의 나이로 참여하다가 말 그대로 집안이 멸문지화를 겪는데 아내는 자살하고 하나 있던 아들은 돌봐주는 이 없어 굶어죽는다. 양가(養家), 친가(親家) 가릴 것 없어 양아버지 서광하는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하였고[5], 생부 서광효는 자결하였다. 생가 형제들 중 맏형 서재춘은 감옥에 갇혔다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살해당했다. 생모 이씨는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고 서모와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미 다른 집으로 양자로 간 동생 서재창 역시 도주하다 잡혀 처형당했으며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함경도로 피신한다. 화를 피한 사람들은 아직 어렸던 남동생 서재우와 큰 형 서재춘의 아들 서명원, 서재창의 유복자 서O석[6] 등이 있었고 결혼한 누나들도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피했다. 당시 개화파를 지원해주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사자들은 몰라도 가족들까지 연좌제로 몰살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며 조선을 경멸하게 되었고 이후 흑화하게 된 것에 갑신정변 후폭풍의 영향이 크다고 보여진다.

옛날 전제정치(專制政治) 아래서는 자칫 잘못하면 역적(逆賊)으로 몰리기도 일쑤였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族譜)에서 빼어 버리기도 했고 또 항렬자도 바꾸기도 했다. 저 유명한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의 주동자들의 경우가 그랬다.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泳植)·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을 주축으로 한 개화당(開化黨)의 혁명이 3일 천하로 끝나면서 그들은 사대당(事大黨)인 민정권(閔政權)에 의해 역적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均자 항렬은 규(圭)로 홍영식(남양 홍씨)의 植자 항렬은 표(杓)로 박영효(반남 박씨)의 泳자 항렬은 승(勝)으로 서광범(달성 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으로 서재필(달성 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꾸고 말았다.[7]

그는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제물포로 도망가 일본 상선에 오른다. 그러나 서재필 등을 인도하라는 고종의 요구에 다케조에 일본 공사가 이들을 내리라고 한다. 그러나 용기있는 일본 상선 선장의 거부로 다행히 목숨을 구하고[8]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1년간 생활하다가 미국으로 다시 건너간다.

후에 미국에서 시민권[9]을 취득하고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꾼다. 의사 면허를 얻어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인종차별의식이 팽배했던 미국에서 동양인 의사가 먹힐 리는 없고,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던 도중에 당시 김홍집 4차 내각[10]에 있던 왕년의 동지 박영효가 필립을 다시 부른다. 때문에 다시 조선을 문명화한다는 의식이 들었는지, 미국인 자격으로 귀국하여 조선 정부와 함께 독립문 건립을 시작으로 하는 일련의 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것이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으로 이어졌다. 피제손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이 시기에는 조선정부에서 월급까지 받았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순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발행해 서민들도 문물을 접할 기회를 확대했다는 것. 그의 정치적 입장도 있었던 탓에 독립신문은 대부분 서민들이 많이 구독했다. 한글화에 도움을 준 인물이 국어학자 주시경. 당시 부책임자였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독립신문 발행이 온전히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되어 있고 국내 대부분의 교과서도 '독립신문=서재필 공로'로 거의 도식화되다시피 해 소개하고 있으나, 실상은 꽤 달랐다는 게 중론. 무엇보다 필립 제이슨은 신문 발행과 관련된 일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그가 독립신문에 관여한 것은 영문으로 발행되는 페이지의 논설을 작성한 정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되고 있다. 한편 그가 관직을 역임한 적도 없고 순수하게 나라를 위해 애국심으로 활동했다는 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중추원 관리로 추천되었고 귀국할 때는 당초 예정된 정부 관리로서의 봉급을 몽땅 챙겨서 떠났다. 이건 열정페이로 돈 안 받어야 했다가 아니다. 피제손의 행동이 당시 한중일에 넘치던 외국인 고문들과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 외국인 고문들도 물주의 이익을 위해서 성실히 일했다. 독립신문 관련해서 언급 안되는 소재는, 미국으로 추방될 처기다 된 필립 제이슨이 자기 돈 들여서 설립한 것도 아닌 독립신문을 일본이나 러시아에 매각하려고 한 흔적도 있다는 것이다. 이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윤치호가 이어받는다.

더구나 그의 운동이 독립이라는 구호에도 불구하고 중국러시아를 견제하는 데에만 주력하고 미국일본 등의 이권 침탈에는 소극적이었다는 한계와 함께 그의 친일, 친미적 성향과 맞물려 결점으로 지적받기도 한다. 조선으로 돌아올 때도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해서 한국계 미국인이나 다름없다는 말도 있다. 독립신문에서도 자신을 서재필이 아니라 필립 제이슨의 한역인 피제손이라고 적었다. 사실 본인은 한국에서의 연고가 전부 끊겨버린 탓에 본인은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한국에 와서도 모국어보다 영어를 즐겨 썼다고 한다. 이 때문에 90년대에 본격적으로 친미 매국노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심지어 한국어 대신에 영어를 쓰고 김치 대신 빵을 먹자는 소리까지 했다고 한다.어륀지 파동이 100년 앞섰습니다. '미국인'인 필립 제이슨이 미국을 비난하지 않은 것은 그렇다쳐도, 일본의 입장까지 두둔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헐버트나 언더우드 같은 외국인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 출신 미국인으로서 역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독립협회 출신에서 친일파가 나온 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추정된다.[11] 어떤 사료에는 심지어 일본과는 계속 친하게 지내야한다는 등의 발언도 했던 듯.[12]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점점 정치화되었고, 초기에는 나름대로 양호하였던 정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필립 제이슨은 미국으로 추방되게 된다. 서울대 교수 신용하는 정부가 독립신문을 탄압한 이유로 "수구파 정부에 대한 비판, 제정 러시아의 침략간섭정책 비판, 탐관오리의 부정부패 고발, 전제군주권에 대한 비판, 국정개혁과 민권신장 주장, 서재필의 오만한 처신"을 뽑기도 했다.[출처] 나머지는 정치적 대립이지만, 마지막만은 서재필 개인의 문제이다. 하지만 독립협회 내부에서는 여전히 입지가 남아 있어서, 독립협회 인사들이 참여한 중추원 최초 의제에서 필립 제이슨을 각료로 추천하는 인물도 있었다.[14].

미국으로 추방된 이후에는 조용히 미국인 의사로 지냈다. 2차 대전 연간에 인쇄업을 하다가 망한 이후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식 편지보내기나 단파 라디오 방송 등의 최소한의 독립운동의 흔적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필립 제이슨을 독립운동가로 부르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독립운동 활동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였으며 미국에서 꾸준히 활동을 하였다. 다만 그 방법이란 게... 한마디로 편지보내기 운동이다. 외교론의 입장이었던 이런 활동은 이 시기에 굉장히 많다. 물론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전시기도 아니고, 일정시기 이정도 활동으로 독립운동가로 강조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수인 것도 사실이다. 이후 미 언론에도 꾸준히 기고활동을 했었으나 대공황으로 인한 보유주식 폭락으로 인한 실패와 그 이전의 사업의 실패등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렸고 대학 강사와 병원 의사를 하기도 했다.[15] 이와중에도 이상재,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조선에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서재필이 미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일제는 그를 구금할수가 없었다. 더불어 의사였기 때문에 미국의 태평양 전쟁 참전 이후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했으며 1945년 1월 공로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이승만의 경우는 미국에서 건너온 독립운동가라는 평판이 지배적[16]이며 이런 저런 루트를 통해서 일제 연간에 국내 미국 유학파 세력들에 충분히 어필했고 이것이 해방후 정치입지 구축에 나름대로 기여했고 또 영어, 친미파, 반공산주의, 미국 유학 경험 등을 배경으로 미국과의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친일이 경력 없었다는 점으로 인해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필립 제이슨의 경우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독립운동과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20년대 이후 지속된 생활고로 인해 독립운동 지원이 힘들어 기고 활동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거지만.

8.15 광복 이후 미군정에 의해 귀국해서 라디오 방송으로 연설을 영어로 방송했다고 한다. 남한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고령으로 거절. 게다가 아무래도 해외에 오래 거주한 터라 당연히 민중의 지지도 그다지 높지 못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반 평생을 미국에서 산 미국인인 본인에게 왜 그런 일을 시키냐며 미군에 항의까지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지지자가 없지는 않았는지, 국회에서 간선으로 실시한 제1회 대통령 선거에서 1표를 얻긴 얻었다. 다만 왜 미국인을 뽑느냐 그럼 다음엔 트루먼도 뽑을 거냐하고 국회의원들이 단단히 반발하면서 무효표 처리되었다(...).

하지만 정반대로 미국으로 쫓겨난 이후에는 그냥저냥 미국인 의사로 잘 먹고 잘 살았으나, 독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자리 하려고 귀국했었다는 설도 있다. 미국에서 대통령 푸시가 들어온건 사실이다. 독립신문과 비극적 가정사로 대중의 지지[17]또한 얻고 있었다. 그러다 이승만과 경쟁구도로 국민 관심이 모아졌을 때 대놓고 영어로 연설을 해버린다. 필립 제이슨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이를 까지만, 필립 제이슨이 의도적으로 행한 자폭이라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어린 나이에 급제하고 미국에서 의사고시에 합격하는 등 머리에는 일가견이 있는 양반이 한국어가 어려워서 연설을 영어로 한다는 건 '나 안하겠소~'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니면 독립협회 시기 미국으로 추방된 이후 한국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방송할 형편이 아니었거나.

어쨌든 필립 제이슨의 고사로 인해 이승만과 필립 제이슨을 경쟁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은 틀어졌고 이는 이승만이 추후 미국으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내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미국인 여성과 결혼한 다음 미국에서 병원 차린게 잘 안 되니깐 다시 도로 한국으로 돌아와 버리는 만행(?)도 저질렀다.[18][19]

일제강점기의 전체를 미국인으로 조선의 독립 전선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했지만(혹은 안했지만)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필립 제이슨의 유해는 1994년 서울 국립서울현충원으로 환국되어 안장되었다. 이때 필립 제이슨의 영정을 운구한 외종증손 이상호 전 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이사장은 "나는 죽은 다음 '나쁜 놈, 더러운 놈' 소리 듣지 않아야겠다 생각했다"며 당시의 소회를 밝혔다. 관련기사 필립 제이슨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들 사이에서는 그가 저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이유는 일명 조중동 언론들이 그를 추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돈다. 실제로 조선일보의 기획기사 현대사 인물 재평가 시리즈의 두번째 인물이었고, 필립 제이슨의 운구가 현충원에 안장된 1994년에 한겨레신문에서 업적 없는 사람이 현충원 갔다고 깐 적도 있어, 정치 성향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4. 논란[편집]


2017년에 황태연 교수에 의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링크) 놀랍게도 중앙일보에 이러한 주장이 실렸다. 앞 항목에서는 조중동이 그동안 서재필을 띄워 왔다고 기술되어 있었지만, 이와는 반대되는 주장이 소개된 것.

해당 기사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고종이 다시 없을 성군으로 묘사된다. 일제 밀정이였으면 일제시대에 떵떵거리고 잘 살았어야지 미국가서 그 고생하면서 의사가 되었겠나 해당 교수의 저서로는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공자와 세계』(전 5권·2011) 등이 있다.

5. 기타[편집]


흔히 서재필 '박사'라고 많이 언급하지만 필립 제이슨은 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없다. 이는 사람들이 Dr. Jaisohn을 '의사 서재필'이 아닌 '박사 서재필'로 잘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다.[20]

유일한 박사가 1926년에 설립한 제약 회사인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마크는 서재필이 만들었다고 한다. 유일한이 회사 설립을 위해 귀국하기 전에 만난 자리에서 서재필이 주었다고 한다.

1896년 4월 23일 경성(서울)에 거주하는 미국인들과 미국 해병대원들의 야구 친선경기가 있었는데 그 중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이름으로 출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6번타자 중견수로 출전하여 2득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1950년 9월 14일 병석에서 존 하지에게 보낸 서신이 남아있다. # 요약하자면, '자신이 한국인들로부터 건네받은 한국의 정치 및 경제적 상황에 대한, 치우치지 않은 정보'를 월터 스미스 장군 산하의 육군정보처에 제공하고 싶다는 내용.

네이버에서 필립 제이슨을 13일의 금요일의 살인마 제이슨으로 만든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다. #관련 포스트

94 주진오 ‘서재필 신화’ 왜곡된 진실들



시사저널 - ‘서재필 신화’ 왜곡된 진실들




‘서재필 신화’ 왜곡된 진실들

주진오 교수 특별 기고 / “업적 재평가해야”

주진우 교수 ㅣ | 승인 1994.04.28


서재필은 구한말의 대표적 개화사상가이며 <독립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으로서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 작년 7월 한국신문협회와 국가보훈처가 서재필 유해 봉환 사업을 확정한 후 그의 유해는 4월4일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와 더불어 역사학계와 언론학회에서는 서재필 재조명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4월2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언론학회 언론사연구회 세미나에서는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관한 쟁점들이 쏟아져 나와 눈길을 끌었다. 정진석 교수 (한국외국어대)는 이 날 ‘서재필과 <독립신문>에 관한 논쟁점들’이라는 발제논문을 통해 서재필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비판적 시각을 대비하여 정리한 바 있다.

그는 서재필을 한국의 볼테르라고 한 대전대 이광린 총장(《한국의 개화사상 연구》일조각, 1979), 서재필의 독립형회 창설과 독립문 건립, 배재학당 강의를 강조한 오세응 의원(《서재필의 개혁운동과 오늘의 과제》고려원. 1993), 서재필의 주권재민의식 계몽과 언론 발달에의 획기적 기여, 과감한 한글 전용을 조명한 서울대 신용하 교수 (《독립협회 연구》일조각. 1976)등의 연구서를 각주로 달아 긍정적인 평가 내용을 정리했다. 

또 서재필의 친일적인 행적과 미국인 행세를 비판한 경상대 여증동 교수 (《고종시대 독립신문》형설출판사, 1992), 서재필이 중추원 고문으로 매월 3백원의 급료를 조선 정부에서 받았으므로 <독립신문>은 순수한 민간지가 아니라고 평가한 부산대 채 백 교수(《독립신문의 성격에 관한 일연구》한울. 1992) 등의 연구서를 각주로 달아 비판적 논제를 뒷받침했다.

“서재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는 정교수이 말처럼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작업은 학계의 쟁점 가운데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시사저널》이 서재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 역사학자 주진오 교수 (상명여대 · 한국 근대사)의 글을 싣는 까닭은 오직 적극적이고 공개적인 사실 검증을 통해 서재필에 관한 논의가 발전적으로 전개되기를 바라는 데 있다. 아울러 주진오 교수의 글에 대해 반론할 지면은 언제나 열려 있음을 밝힌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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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쓰는 것은 누구인가. 이것은 최근 필자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주제이다. 그동안 서재필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필자를 비롯하여 학계 일부에서 제기된 바 있었다(필자의 ‘유명인사 회고록 왜곡 심하다-서재필 박사 자서전’ 《역사비평》1991년 가을호, ‘순국선열 유해 원칙 따라 송환토록’ <한겨레신문>1993. 7. 30 참조).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서 정부나 대부분의 언론은 전혀 검증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동안 필자가 제기해온 것은 단지 시각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평가’차원만이 아니라 ‘사실’의 차원에서였다. 왜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거부하거나 묵살하는가.

서재필 신화의 한 원인은 서재필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에 대한 1차 사료를 많이 수집한 방선주 박사(한림대 교수)도 ‘서재필은 과거를 회상할 때 무책임할 정도로 시일을 혼동하였고, 냉엄한 이국 사회에서의 처신상 그때그때 적당히 호도하는 습성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그의 회고는 학계의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만 역사적 사실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선배 학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노력 없이 그의 회고에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어떤 경우 그 자신조차 한 적이 없는 말까지 만들어서 신화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그를 둘러싼 신화를 사실에 입각하여 차례차례 벗겨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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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1863년 논산 출신이다.
서재필이 1864년 11월생이라고 한 최근의 보도는 잘못이다. 그는 음력 1863년 11월 28일생, 양력으로는 1864년 1월7일생이다. 그의 고향은 충남 논산이다. 최근 그의 생가라고 해서 각광을 받고 있는 전남 보성은 그의 외가가 있던 곳이다. 물론 그의 어머니인 성주 이씨가 친정에 가서 그를 낳았으므로 보성이 그의 생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가 일곱살 때까지 성장했다고 하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 그가 서울로 가기까지 성장한 곳은 논산이었고, 그의 아버지와 첫 부인 광산 김씨의 묘소가 있는 곳도 논산이다.

서재필은 1890년 이후 자신을 서재필이라 부르지 않았다.
서재필이 서재필로 산 기간은 그의 생애에서 3분의 1도 안 되는 26년 간에 불과하다. 그가 미국 시민권을 얻어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 된 것은 1890년 6월이었으며, 그후 그는 자기를 서재필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가 시민권을 얻을 때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서광범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때 법원에서 행한 선서에서 ‘이후 조선국왕에 대한 충성을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포기한다’고 하였던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가 의사 면허를 취득한 것은 1893년 가을이었으며, 1894년 6월에 미국인 뮤리엘 암스트롱과 재혼하였다. 1893년 8월14일 워싱턴으로 서재필을 방문했던 윤치호는, 그가 우리말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일본이 조선 정부에 권고하여 추진하였던 갑신정변 망명자 귀환 사업에 호응하지 않았던 이는 서재필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다가 정부의 집요한 요청에 따라 1895년 12월 25일에 귀국하였다. 물론 그의 여권은 미국 정부가 발행한 것이었고 이름 역시 필립 제이슨이었다.

서재필은 귀국후 철저하게 미국인 제이슨으로 행세하였다. 또한 미국인이기 때문에 조선 정부의 정식 관리가 아닌, 고문관이 되어 최고의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자기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는 경우에도 제손박사 또는 피제선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텔레비전을 유심히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의 묘비명에도 역시 필립 제이슨으로 적혀 있다.

서재필은 박사가 아니다
그가 다닌 대학은 워싱턴의 컬럼비안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크란 대학이다. 이 대학은 워싱턴의 고졸 공무원들을 위해 세운 야간 대학으로 컬럼비안 대학교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는 1888년 코크란 대학에 입학하여 자연과학을 주로 공부한 후, 다음해에 역시 야간 3년제 외과대학에 등록하였다.

그는 3년 후인 1892년 의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년 간의 인턴 생활을 거쳐 1893년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 때부터 닥터 필립 제이슨이 되었다. 그러나 이 때의 닥터는 박사가 아니라 의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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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창간과 독립문 건립은 서재필의 개인 업적이 아니다
실제로 먼저 신문 발간 구상을 한 것은 유길준을 비롯한 김홍집 정권이었다.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 유길준 정권은 무너졌으나 새로 등장한 박정양 · 이완용 정권은 친미파 관료들이 주도하였다.

따라서 미국인인 서재필은 신문 발간 작업을 오히려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조선 정부는 <독립신문>에 필요한 모든 비용과 편의를 아낌없이 배려하였다. 따라서 <독립신문> 발간은 개혁파 관료들의 개혁 이념을 국민에게 계몽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선 정부가 추진한 것이었고, 서재필은 이를 맡은 실무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립신문> 소유권을 일본에 팔아 넘길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때 일본 공사측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고 구두 계약까지 맺기에 이르렀다. 서재필은 출국 직전 일본 공사관에 구두 계약을 이행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독립신문 매수의 건’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1898년 1월 15일). 만일 일본측이 약속을 지켰다면 <독립신문>은 일본 정부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독립문 건립과 관련한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이를 주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은문은 그가 헌 것이 아니라 이미 청일전쟁 당시 헐려 있었던 상태였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하여야 정확하다. 서재필은 자서전 등을 통해 여기에 들어간 비용을 모두 자기가 출자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왕실은 물론이고 각계 각층의 모금을 통해 충당하였다는 것이 당시 자료를 통해서 확인된다.

서재필은 추방된 것이 아니었다
1897년에 들어와서 러시아의 적극적인 간섭정책과 대한제국 수립을 통한 황제권 강화는 서재필과의 대립을 야기하였다. 이때부터 정부는 그를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서재필은 남은 계약기간의 봉급을 모두 지불하면 해약하고 출국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결국 1898년 4월 남은 7년 10개월분 봉급에다가 두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여비까지 보태어 받아냈다. 이 때 <독립신문> 창간 비용은 공제되었다. 빈약한 재정에 시달리고 있는 조국에 그렇게 막대한 돈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됐을 뿐이라는 점이다. 즉 서재필이 고국에서 강제로 추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인을 추방할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 점은 그가 ‘나를 추방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정부뿐이며 미국정부가 그런 일을 할 리 없다’(《The Independent》1898. 1. 22)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추방이 아니라 자진 귀환일 뿐이다. 이는 그가 돈을 받고 난 다음 ‘만일 봉급을 2배로 올려준다면 남아 있을 생각도 있다’(《윤치호 일기》1898. 4. 22)고 말한 기록에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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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느라 무일푼이 된 것은 아니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의사가 아닌 문방구상인, 인쇄업자로 변신하였다. 1904년부터 사업을 시작해 그 이듬해 필라델피아로 자리를 옮겼으며 1914년부터는 단독으로 필립 제이슨 상회(Phllip Jaisohn & Company)를 세워 1924년까지 운영하였다. 물론 이 사업에 들어간 자금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받아낸 돈이었다. 한때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본점을 두고 두 곳에 분점을 운영할 만큼 번창하였다고 한다.

서재필은 조국에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18년 월신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뒤부터였다. 더욱이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재미 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서재필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필라델피아 동북부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인연합대회를 주도하고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그 후 서재필은 1921년까지 조선의 식민지 현실을 미국인들에게 알리는 일에 몰두하였다. 미국이 일본에게 압력을 가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그의 활동이 얼마나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이 때의 공로는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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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차원을 벗어나 서재필이 전 재산을 이 활동에 쏟아 부어 무일푼이 되었다는 신화가 만들어졌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이런 신화는 서재필 자신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활동에 필요한 홍보책자들은 모두 그의 사업체에서 인쇄하였으나 그는 꼬박꼬박 인쇄비를 받았다. 오히려 당시의 기록을 통해 재미 동포들이 어려운 생활 속에서 헌신적인 모금 운동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서재필이 주도하는 홍보사업에 만도 모금액 중 1만2천9백69달러가 지출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이 시기 활동 자금을 전적으로 자기가 댔다는 서재필의 회고는 과장이다.

더욱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그가 활동을 포기한 것은 1922년 2월인데 그의 필립 제이슨 상회는 1924년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점이다. 전재산을 날렸다는 사람이 몇년후까지 사업체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최근의 한 연구는 1921년부터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서재필의 독립운동연구’ 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7집. 1993).

그는 자기가 미국인임을 늘 강조하였다
그는 미국인으로서 <독립신문>을 통해 미국의 이미지를 절대적으로 미화하였다. 심지어 미국의 경인철도 부설권, 운산금광 채굴권 침탈을 환영하였다. ‘속마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나라와 맺은 것이며 지금까지 어느 열강과 맺은 조약보다 유리한 계약’ (《The Independent》1896. 4. 16)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미국의 필리핀 · 하와이 · 쿠바 점령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시하였다. 1898년 당시 그의 출국을 만류하는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보낸 답장에는 조선 정부를 ‘貴 政府’라 부르고 있다. (<독립신문> 1898.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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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조선인들에게 ‘계몽’한 내용 가운데에는 완전히 미국식 풍습을 모범으로 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면, ‘남의 집에 갈 때 파 · 마늘을 먹고 가는 것이 아니고, 남 앞으로 지나갈 때는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한다’ (<독립신문> 1896. 11. 14). ‘조선 사람들은 김치와 밥을 먹지 않고 소고기와 브레드를 먹게 되어야 한다’ (<독립신문> 1896. 10. 10)는 것이 있다.

1919년 한인연합대회 의사록에서도 그의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여전히 강조되고 있었다. 회의 벽두에 애국가가 아닌 미국 국가를 부르게 하고,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의장 취임사에서도 ‘만일 대회 진행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사임하겠다’는 것을 못박고 있었다.

서재필은 스스로 미국에 묻히기 원했다
광복 이후 미군정은 김규식의 건의를 받아 들여 83세의 고령인 그를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1947년 7월에 도착한 그는 이때에도 자기를 필립 제이슨이라 하였고 모든 발언은 영어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모 묘소를 한번도 참배하지 않는 등 한국인으로서 동질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헌국회를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미국 국적이 문제였다. 그는 대통령 추대 운동자들로부터 미국 국적 포기를 요청받았으나 끝내 거절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미국 땅에 묻혀 있는 것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다. 그에게는 여러 차례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여생을 고국에서 보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번번이 거부하였고, 자기가 선택한 미국 시민으로 살다가 죽었다. 누구나 자기가 죽어서 묻힐 자리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후대 사람들이 마음대로 옮겨서는 안되며 이는 사실상 고인의 뜻에도 위배되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밖에 사소하지만 틀린 사실들

첫째, 그는 18세 때 장원급제한 것이 아니다. 그는 20세인 1882년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최연소 합격자이기는 하지만 丙科 3등으로 급제하였다. 장원급제는 甲科 1등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그가 다녔다는 도야마(?山) 육군학교는 일본 육사의 전신이 아니다. 이 학교는 하사관학교로서 사관학교와는 관계가 없다.

셋째, 이와 아울러 신문 대담에서는 서재필이 의대생 시절 암스트롱양의 가정교사를 하다가 결혼했다고 하면서, 장인은 미국 연방 정부의 초대 체신부 장관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정교사를 했다는 근거는 제시된 바 없었다. 그리고 아내의 아버지인 조지 암스트롱은 미국 철도우편국 창설자이자 초대 국장이었을 뿐이며 서재필이 암스트롱양과 결혼하기 전인 1871년에 죽었다. 결혼 당시에는 신부의 어머니가 화이트라는 사람과 재혼한 상태였다.
그러니 장인인 문방구를 처분하겠다는 서재필에게 반발하여 서재필이 이혼하겠다고 하자 암스트롱 가문에 이혼이란 없다고 꾸짖었다는 것도 성립될 수 없다. 이혼 요구설 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한 집에서 살았지만 별거상태였다는 것도 어떤 근거를 가지고 한 말인지 궁금하다.

넷째, 서재필이 의대에서 수석을 했으나 황인종이라는 이유로 백인에게 밀려 차석 졸업을 했다는 주장은 어떤 자료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가 병리학 강사로 발령을 받았으나 학생들에게 보이콧 당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섯째, 그가 다시 들어간 의대는 존스 홉킨스 대학이 아니라 펜실베니아 대학이며 특별 연구생이었다.

여섯째, 서재필이 6·25가 일어나자 자진해서 김일성에 반대하는 방송을 했으며, 그때부터 북한 역사책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말이다.
서재필은 우리와 같은 핏줄을 나누었을지 언정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 필립 제이슨이었다. 그가 미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한 후 고국 땅을 밟은 것은 다 합해서 5년을 넘지 못한다. 그것도 두번 다 미국에서보다 훨씬 넉넉한 봉급과 지위를 주었을 때에 한해서였다. 그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그를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여기고 환영하였으며 이 땅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두 번 다 이를 뿌리치고 자기가 선택한 나라 미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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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안전지대였던 미국에서 미국 시민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경력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체포와 고문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고통스럽게 투쟁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자신의 오랜 투쟁 경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경우도 많았다. 우리는 그들을 쉽게 매도하고 만다.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실 서재필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상황 판단력과 현실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나다. 그 결과 미국으로 건너간 다른 초기 이주민들이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주변인으로 살아간 반면에 그만은 중심부로 살아간 반면에 그만은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는 그는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이며 ‘세계인’의 선구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재미동포 사회나 의사 · 언론인 · 동창회 · 문중 등이 그를 기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기에 필자가 개입하여 논란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국가적인 사업으로 유해 송환 사업을 벌이고 신화를 만들어 그를 찬양하는 것은 전적으로 별개 문제이다. 서재필은 결코 우리가 후손들에게 귀감이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일제 밀정, 안중근은 고종 밀명 받고 거사”

“서재필은 일제 밀정, 안중근은 고종 밀명 받고 거사”



“서재필은 일제 밀정, 안중근은 고종 밀명 받고 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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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관련 저서 4권 출간한 황태연 동국대 교수
올해 1월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을 출간한 황태연(62·사진) 동국대 교수가 지난주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을 잇따라 펴냈다. 지난해엔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도 냈다. 내년엔 『한국 근대화와 정치사상』(이상 청계출판사)을 펴낼 예정이다.

독립협회·독립신문 충격적 변질
고종의 후원 받아 창립됐으나
1898년 7월부터 친일로 등 돌려
일반적 통설과 다른 내용 많아
황 교수는 한때 마르크시즘 철학자였다. 1974년 서울대 외교학과 입학 이후 학생운동을 하며 마르크시즘을 접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에 유학해 마르크스 이론을 분석한 ‘지배와 노동’(91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랬던 그가 대한제국에 꽂힌 이유는 뭘까.

박사학위를 받고 나니까 마르크스의 황금기가 더 이상 아닌 점도 작용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에 대한 궁금증이었습니다. 마르크스를 하다 보면 막스 베버를 하게 되고 마르크스와 베버의 동양관과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동양관이 ‘동양 전제주의’로 같습니다. 이를 두고 강의 때 독일 교수와 논쟁도 벌였습니다. 동양에서 온 나는 그 테제가 맘에 들지 않았어요. 우리 역사를 봐도 신하들이 왕의 말을 따르기만 했나요? ‘전하,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가 얼마나 빈번했는데…. 서양에서는 좌파나 우파 모두 동양을 보는 시각이 잘못됐다고 느꼈습니다. 학위를 마쳐야 했기에 그 주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 수는 없었죠.

‘동양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그의 시도는 94년 동국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본격화됐다. 공맹 철학을 중심으로 동양사상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한국의 근대사 관련 자료도 모아 나갔다. 동양과 서양의 고금(古今)을 가로지르며 문명의 형성 과정을 재구성한 연구 결과물이 『공자와 세계』(전 5권·2011), 『감정과 공감의 해석학』(전 2권·2015)이다. 그리고 동양 속에 위치한 한국의 특수성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이 대한제국 관련 저서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질의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였고 조선시대와의 차이점은 뭔가요.
응답 :“대한제국 연구자에게 공히 인정되는 바는 조선은 전(前)근대 국가이고 대한제국은 근대국가라는 것입니다. 근대국가는 신분이 철폐된 사회이고 대의제가 실시된 사회죠. 서얼제도와 노비상속제는 고종 때 철폐됩니다.”


질의 :대한제국에 대의제가 있었나요.
응답 :“중추원이 대의제 기능을 했죠. 이 중추원이 일본 침략으로 더 발전을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일제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르는 게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중추원에는 과거 상놈들도 많이 들어갔어요. 황국협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데 다 보부상 출신입니다. 당시 주요 정치세력인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세력이 중추원의 주축이었죠. 50명 중추원 의관 중 독립협회 계열이 17명 정도, 황국협회 계열이 28명이었고, 나머지 5명은 나이가 들어 대우해야 할 인물들이었습니다. 중추원이 고종의 제안으로 설립되지만 고종의 말을 들을 근왕파는 홍종우 등 서너 명뿐이었죠. 서양 말로 하면 ‘왕당파’는 줄인 것입니다.”


질의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응답 :“독립협회는 처음 독립문 건립추진위원회로 출발하는데 고종의 조직이었습니다. ‘독립협회’란 명칭과 현판 모두 고종과 왕세자가 내려준 겁니다. 건립 자금의 17%는 고종과 세자가 내려준 내탕금이었고, 범국민적 모금운동을 하게 한 것도 고종이었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고종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출발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1898년 7월부터 성격이 변질됩니다.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가 일본에서 자기 세력인 이규완·황철·이정길 등을 한국으로 잠입시켜 왜인 거주 지역에 은거하게 하면서 독립협회를 배후 조종해 반(反)대한제국, 반(反)고종 변란단체로 바꿉니다. 그때부터 반러·친일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중심 의제가 됩니다. 이 정치결사들은 1898년 11월부터 1899년 1월까지는 암살과 폭란을 일삼는 폭력조직으로 변질돼 대한제국에 대한 변란세력으로 전락합니다.”


질의 :고종의 리더십 문제는 없나요.
응답 :“폭력으로 대하는 독립협회에 고종은 끝까지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독립협회는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고립당해 자멸합니다. 고종이 독립협회를 탄압한 것이 아닙니다. 황국신문·제국신문·매일신문 등 거의 모든 언론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행태를 비판했습니다.”


질의 :독립협회의 일반적 이미지와 다른데요.
응답 :“독립협회를 잘 알지 못하면서 띄우는 이들이 있고, 혹은 친일적 실체를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기존에 독립협회를 애국적 단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들의 친일을 증명하는 자료가 나오고 서재필·윤효정 등이 일제 밀정 역할을 한 사료가 나타나도 그런 사료들을 무시하고 감춰 버리기까지 합니다. 사료로 본 독립협회의 모습은 교과서에 나온 모습과 완전히 상반된다고 보면 됩니다.”


질의 :역사가 어떻게 그렇게 뒤집어졌나요.
응답 :“해방 후 최초 연구자들이 잘못한 것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갑신정변-갑오경장-독립협회로 이어지는 프레임은 교과서에서 어떻게 설명되나요? 개화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 실패했다고 하죠. 이것이 조선사편수회의 시각입니다. 우리 근대사를 기술하는 기본 프레임이죠. 해방 이후 많은 사가들이 식민사관 극복을 외쳤지만 그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부지불식간에 ‘은근한’ 친일적 기술로 끝났습니다. ‘노골적’ 친일은 최근에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질의 :한국 근대사를 직접 공부하면서 어려운 점이나 충격적 경험이 있다면.
응답 :“말씀드렸듯이 우선 사료로 보는 한국사와 우리가 가르치고 배운 한국사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근대사의 시작을 대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기술로 시작하는데 대개 고종이 동학을 탄압한 것으로 알고 있죠. 그런데 실제 사료를 보면 그렇지 않아요. 동학의 1차 봉기는 농민군이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삼남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곧 이어 2차 봉기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고종의 밀명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 밀지가 남아 있어요. 일본군이 그걸 빼앗아 일본공사관 기록에 남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료를 무시하고, 또 이 밀지의 누설을 막으라고 당부하는 전봉준의 친필 지시문도 무시해 왔습니다. 또 서재필의 일제 밀정 기록이 일본공사관 공식 기록에 나오는데 그런 것을 무시하고 서재필을 애국지사로 만들어 놨죠. 윤효정도 일제 밀정임을 정교가 『대한계년사』에 정확히 기록해 놨는데 오히려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고종의 밀명을 받고 움직였다는 점도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DA 300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제국과 인간 98] 서재필의 만행 - 오마이뉴스



[제국과 인간 98] 서재필의 만행 - 오마이뉴스




[제국과 인간 98] 서재필의 만행김갑수 항일역사팩션 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
08.08.10 12:48l최종 업데이트 08.08.10 12:48l
김갑수(kim gab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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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의 위선

김영세는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가 망한 원인을 다산 정약용에서부터 갑신정변에 이르는 친일 개화파에서 찾아, 조카 김문수에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정화에게 보낸 편지에 쓴 적이 있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갑신정변의 뒤를 잇는 것은 독립협회의 활동이었다. 그는 독립협회의 간부라는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았다. 독립협회는 고문 서재필, 회장 안경수, 부회장 윤치호(나중에 회장됨), 위원장에 이완용 등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매국노에 가까운 행적을 보이고 있었다.


회장단 중에서 이완용과 윤치호에 대해서는 이미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안경수(일본에서 김옥균에게 이토의 밀정 배정자를 맡긴 이)는 1898년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 양위 음모를 꾸민 사람이었다. 그 밖의 위원으로는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친일 단체 정우회의 총재를 지냈던 김종한, 미국 유학 출신으로 총독부 남작 겸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민상호, 을사오적 이근택의 동생이면서 총독부 남작인 이근호 등이 더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간부와 위원 중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이상재, 주시경밖에는 없었다.

1898년 독립신문의 논설에는, '이토 히로부미 씨는 당금 세계의 유명한 정치가요, 또 우리 독립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라. 이번 유람차로 오니 정부와 인민은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라노라'라고 되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독립은 대한의 자주독립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청나라의 종주권을 없애는 음모를 독립이라고 포장하여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었다. 당시 모든 일본인들은 일본이 조선에 독립문을 세워 주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서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요릿집 국취루에서 환송 잔치를 열어 주었다. 이토는 그 날 윤치호에게서 받은 선물에 대단히 흡족해 했다. 그는 답례로 자신의 사진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그가 윤치호로부터 받은 선물은 대형 은찻잔이었는데, 거기에는 새로 지은 독립문이 부조되어 있었다.

김영세는 독립신문의 논설들을 검토해 보았다. 독립신문 논설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일본 편을 들고 있었다.

- 1896년 독립신문 제6호 논설 : 일국이 두 해 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이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그것 또한 조선 인민이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 조선 인민 중에 일본을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 1896년 독립신문 제44호 논설 : 일본 정부와 일본 인민들이 조선이 진보하는 것만 즐거워하지, 어떤 나라이든지 도와주는 것은 상관 아니 하노라.... 조선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위한다는 것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

- 1897년 독립신문 제144호 논설 :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일본과 청국 사이에 싸움이 생겨 못된 일하던 청인 놈들이 조선서 쫓겨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천만 번이나 다행한 일이다.

- 1898년 독립신문 별호 논설 :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 돈을 써야 한다. 일본 은전을 여전히 일용한 일로 고시를 하였다 하니 우리는 전국 재정을 위하여 크게 치하하노라.

서재필의 만행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인이 있었다. 그는 극동에서 다 꺼져가고 있는 약소국 조선에 가면 할 일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약소국의 황제에게 독립신문을 만들어 나라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자고 제의했다. 그래야 열강의 침략 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회유했다. 황제는 그가 강대국인 미국인이란 점을 감안했다. 그래서 약소국의 황제는 그를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하기에 이른다.

황제는 그에게 신문사 건물을 장만해 주고 창업자금 4400 원을 따로 주었다. 그리고 미국인의 연봉으로 3500원 정도를 약속해 주었다. 소 한 마리가 20원에서 40원 정도였으니 그 돈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는 신문사 창업 자금 중 1400원으로 자기 저택을 구입했다. 갑신정변이라는 이름의 친일 쿠데타에 실패한 후, 목숨을 부지하려고 군함을 얻어 타 일본에 갔고, 일본에서도 겨우 뱃삯을 장만하여 미국에 갔던 기억이 격세지감으로 느껴졌다. 그는 미국에서 접시 닦으며 워싱턴 대학에 다닐 때의 일도 떠올려 보았다.

마침내 그는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일약 그는 약소국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약소국의 말과 글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약소국에 와서 단 한 번도 약소국의 말이나 글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만약 그가 18년 동안 성장한 그 나라의 언어를 정말로 잊은 것이라면 그는 기억 상실증 환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약소국의 황제는 화가 치밀었다. 그 미국인이 독립이라는 위장을 쓰고 교묘히 일본의 편을 들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조정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주관하는 독립협회는 친일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황제는 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미국인은 갑신정변 때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그의 하수인들이 그의 출국을 만류했다. 그는 영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는 약소국의 조정을 협박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 조정에 아직 계약 기간이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에 해당하는 임금 2만 8800원과 미국행 여비 600원을 일시불로 달라고 요구한다. 아니면 미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다. 가련하게도 약소국의 조정은 그의 요구를 전부 들어 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일본인들을 따로 만났다, 그는 그동안 독립신문이 일본을 많이 도왔으니 도의상 일본 측에서 신문을 매입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독립신문의 매각 교섭은 귀국 시일이 촉박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훗날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면서 스스로 의장이 되었다. 그는 회의가 시작될 때에 미국 국가를 부르게 했으며, 의장 취임사에서, "만일 대회 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의장직을 사임할 것입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45년 그 약소국이 독립을 얻게 되자, 80세가 넘은 그는 노구를 이끌고 다시 약소국에 들어와 기웃거린다. 그는 미국 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와서 그 나라의 국사를 좌지우지하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 약소국에는 그의 똥 속을 알고 있는 이승만이라는 노회한 사람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승만과 불화를 겪는다.

그는 친미 인사인 장덕수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어느 날 그는 어지러운 시국을 개탄하는 성명을 내고 다시 자기 나라 미국에 돌아가 버렸다.

지금도 한국인들은 서울 서대문 공원에 가면 서재필의 동상을 보게 된다. 1992년에 세워진 동상이다. 서재필은 오른 손에 독립신문을 들고 있었다. 동상 아래에는 서재필을 기리는 명문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 조국의 자주 독립과 민주 개화운동의 위대한 용장이며 우리 민간 신문의 신조인 독립신문의 창간 은인에 관한 공적을 간추려 명문에 대신한다.

서재필의 동상은 2008년 워싱턴에도 세워진다.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이라 하여 하루 쉬는 대한민국의 최대 일간지 조선일보는 1996년 서재필 일대기를 다룬 특집 기사를 대대적으로 게재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전시회까지 열어 서재필 붐을 조성하려고 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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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독립협회,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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