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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5

정산 송규 종사 WBS 원음방송


정산 송규 종사

WBS 원음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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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8 views  Feb 15, 2019
원불교를 창교하신 소태산 대종사와 더불어 
회상 창립의 시작이셨던 아홉 분의 선진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야기 

정산 송규 종사 편

송정산(宋鼎山)의 『수심정경(修心正經)』에 나타난 내단적(內丹的) 수행이론 - 제3장 명연기방법을 중심으로 -

송정산(宋鼎山)의 『수심정경(修心正經)』에 나타난 내단적(內丹的) 수행이론 - 제3장 명연기방법을 중심으로 -


송정산(宋鼎山)의 『수심정경(修心正經)』에 나타난 내단적(內丹的) 수행이론 - 제3장 명연기방법을 중심으로 -
The Study on the Theory of Naedahn Practice Appeared in Sooshimjunggyung - Focused on the 3rd Chapter, the Method of Myungyunkee –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2009, vol., no.42, pp. 69-100 (32 pages)

UCI : G704-002009.2009..42.004  

발행기관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분야 : 인문학 > 종교학
김수인 /Kim, Su-in 1
1원광대학 박사과정

초록 열기/

본 연구는 원불교의 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1900-1962)의 『수심정경』의 성립배경과 내단적 수행이론을 제3장 명연기방법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먼저, 『수심정경』의 성립배경을 살펴보면 송나라 말에 영보파 정사초가 지은 『태극제련내법』이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음양학파인 이옥포에 의해 가감되어 『영보국정정편』으로 이어졌다. 그 후, 정산 송규는 이를 유가⦁불가⦁도가의 회통적 성격을 추가 보완하여〮『수심정경』으로 정립하였다. 그로인해『수심정경』은 수양서이자 내단서의 면목을 갖추게 되었고 성명쌍수적인 관점에서 유⦁불⦁선의 회통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수심정경』의 제3장 명연기방법론은 실질적 내단수련의 과정과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다음의 일곱 가지의 수행이론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내단적 수행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 첫째, 감리교구론은 수화이기를 내단수련의 근원적 원리와 수행이론의 핵심으로 밝히고 있다. 
  • 둘째, 외련지법론은 수심공부에 관련된 것으로 수승화강의 수련에 앞서 마음단련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을 잘 보존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 셋째, 내련지법론은 원불교 단전주선의 실행지침으로 단전주선의 실행방법을 밝히고 있다. 
  • 넷째, 명공충실론은 연정화기의 과정으로 몸수련인 명공부의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다. 
  • 다섯째, 성공개오론은 단전주선의 결과로서 정신적인 깨달음이 열리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 여섯째, 금기론은 초학자들이 수련하는 과정에서 주의할 사항들을 제시하고 있다. 
  • 일곱째, 정정론은 수도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수련에 대한 기본 과정, 목적, 가치 등을 밝히고 있다.

『수심정경』은 다른 내단서와 달리 수련의 원리, 실행과정, 수심에 대한 부분, 몸공부인 명공과 마음공부인 성공에 대한 부분, 그리고 수양의 체득인 정정의 원리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수심정경』은 유·불·선을 회통한 새로운 수련서로서의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앞으로도 『태극제련내법』과 『수심정경』에 대한 연구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져 그에 대한 가치가 더욱 드러날 수 있기를 제언한다.


This study examined the background of the Sooshimjunggyung, which was written by the second Jongbubsah, Jungsahn Songkyu(1900-1962), along with the theory of Naedahn practice, by focusing on the third chapter of the Sooshimjunggyung, the Method of Myungyunkee. In terms of its background, the Taegukjaeryunnaebub, written by Jungsacho of the Yungbo school in the late Song Dynasty, spread to Korea, and then was adapted into the Youngbogookjungjungpyun by Lee Oak Poe of the Yin and Yang school. Jungsahn Songkyu then transformed it into the Sooshimjunggyung by integrating its ideas with those of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The Sooshimjunggyung thus became a book about practice and of Naedahn, with a special focus on integrating the three religions from a Sungmyungssangsoo point of view. The third chapter of Sooshimjunggyung, the Method of Myungyunkee, specifically described the courses and the contents of Naedahn practice. In particular, it emphasized the specific and practical methods of Naedahn practice through the following seven theories of practice.
First, Ghamreegyogooron clarified the notion of Soohwaeegi(the conception of water and fire as two energy flows) as a fundamental principle of Naedahn practice, and as an essence of its practical theory. Second, Woiryunjeebubron, which was about Sooshimgongboo(preparations for one’s mind to begin practice), emphasized the necessity of developing the body as part of the process of first cultivating one’s mind before engaging in the practice of Sooseunghwaghang (ascending the water energy and descending the fire energy). Third, Naeryunjeebubron manifested the method of Dahnjunjoo meditation as a practical guide to Won-Buddhism and Dahnjunjoo meditation(Resting in the Elixir Field Method). Fourth, Myunggongchoongshilron presented the importance of Myunggongboo(practice for developing one’s body) as a process of Yunjunghwaki. Fifth, Sunggonggaeohron described the process of enlightenment as a result of Dahnjunjoo meditation. Sixth, Gumkiron presented the precautions for the beginners while doing the practice. Seventh, Jungjungron described the practitioners’ attitude of mind and the basic process, purpose, and value of the practice.
Unlike other Naedahn books, the Sooshimjunggyng clearly explained the principles and processes of practice, the preparations necessary for one’s mind to begin practice, Myunggongboo (practice for developing one’s body) and Sunggongboo(practice for cultivating one’s mind), and a part of the principles of Jungjung(a state of stability and calmness), which is achieved by cultivating the mind. It can be concluded that the Sooshimjunggyng made a significant contribution as a practical guide to integrating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with those of Won-Buddhism. It is recommended that more studies on the Taegukjaeryunnaebub and the Sooshimjunggyng should be done to distinguish their values.


This study examined the background of the Sooshimjunggyung, which was written by the second Jongbubsah, Jungsahn Songkyu(1900-1962), along with the theory of Naedahn practice, by focusing on the third chapter of the Sooshimjunggyung, the Method of Myungyunkee. In terms of its background, the Taegukjaeryunnaebub, written by Jungsacho of the Yungbo school in the late Song Dynasty, spread to Korea, and then was adapted into the Youngbogookjungjungpyun by Lee Oak Poe of the Yin and Yang school. Jungsahn Songkyu then transformed it into the Sooshimjunggyung by integrating its ideas with those of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The Sooshimjunggyung thus became a book about practice and of Naedahn, with a special focus on integrating the three religions from a Sungmyungssangsoo point of view. The third chapter of Sooshimjunggyung, the Method of Myungyunkee, specifically described the courses and the contents of Naedahn practice. In particular, it emphasized the specific and practical methods of Naedahn practice through the following seven theories of practice.
First, Ghamreegyogooron clarified the notion of Soohwaeegi(the conception of water and fire as two energy flows) as a fundamental principle of Naedahn practice, and as an essence of its practical theory. Second, Woiryunjeebubron, which was about Sooshimgongboo(preparations for one’s mind to begin practice), emphasized the necessity of developing the body as part of the process of first cultivating one’s mind before engaging in the practice of Sooseunghwaghang (ascending the water energy and descending the fire energy). Third, Naeryunjeebubron manifested the method of Dahnjunjoo meditation as a practical guide to Won-Buddhism and Dahnjunjoo meditation(Resting in the Elixir Field Method). Fourth, Myunggongchoongshilron presented the importance of Myunggongboo(practice for developing one’s body) as a process of Yunjunghwaki. Fifth, Sunggonggaeohron described the process of enlightenment as a result of Dahnjunjoo meditation. Sixth, Gumkiron presented the precautions for the beginners while doing the practice. Seventh, Jungjungron described the practitioners’ attitude of mind and the basic process, purpose, and value of the practice.
Unlike other Naedahn books, the Sooshimjunggyng clearly explained the principles and processes of practice, the preparations necessary for one’s mind to begin practice, Myunggongboo (practice for developing one’s body) and Sunggongboo(practice for cultivating one’s mind), and a part of the principles of Jungjung(a state of stability and calmness), which is achieved by cultivating the mind. It can be concluded that the Sooshimjunggyng made a significant contribution as a practical guide to integrating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with those of Won-Buddhism. It is recommended that more studies on the Taegukjaeryunnaebub and the Sooshimjunggyng should be done to distinguish their va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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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수심정경, 수승화강, 내단수행, 단전주선.
Jungsahn, Sooshimjunggyung, Sooseunghwaghang, Naedahn Practice, Dahnjunjoo Meditation.

1997 남북화해와 송정산의 『건국론』 원불교신문

남북화해와 송정산의 『건국론』 < 사설 < 사설/칼럼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남북화해와 송정산의 『건국론』
기자명 원불교신문
입력 1997.11.07


-한국원불교학회 ’97 추계학술대회를 보고정산 송규(1900~1962) 종사의 생애와 사상을 기리기 위한 각종 사업계획이 활발히 진행되는 가운데 「남북화해와 송정산의 건국론」을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한국원불교학회가 주최하고 정산종사 탄생백주년 기념사업회가 후원한 한국원불교학회 ’97 추계학술대회가 지난달 2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성황리에 마침으로써 기념사업 추진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소태산 대종사의 상수제자 이며 우리 회상의 법모이신 정산종사께서 친히 지으신 건국론은 원불교의 교리에 바탕하여 건국 민의 도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1945년 10월에 발표한 정산종사의 건국론 서론에 보면 정신으로써 근본을 삼고, 정치와 교육으로써 줄기를 삼고, 국방과 경제로써 가지와 잎을 삼고, 진화의 도로써 그 결과를 얻어서 영원한 세상에 뿌리깊은 국력을 배양하자는데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정산종사는 건국론에서 마음의 단결, 자력확립, 충의봉공, 통제명정, 대국관찰 등 다섯가지 방안을 건국의 기본정신으로 제시하는 한편, 동포들에게 건국사업에 적극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건국론 제2장 「마음단결」 부문을 보면 마음단결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으로, 
  • 첫째 각자의 주의에 편착하고 중도의 의견을 받지 아니해서 서로 조화하는 정신이 없는 것이요, 
  • 둘째 각자의 아상에 사로잡혀 捨己尊人하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 것이요, 
  • 셋째 불같은 정권야욕에 沈感하여 대의정론을 무시하는 것등 
열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정산종사의 이같은 주장은 52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한번 재음미해 볼 필요가 있으며 건국론에 대한 평가 또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특히 정산종사께서 건국론을 통해 강조한 中道主義에 바탕한 정치비전에 대한 연구는 물론, 
金奎植 려운형 조소앙 등이 제시한 건국론과의 비교 검토작업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정산종사의 중도주의는 過와 不及이 없는 것으로 예를 들면 관리는 관리에 대한 권리, 민중은 민중에 대한 권리, 자본주는 자본주에 대한 권리, 노무자는 노무자에 대한 권리가 서로 공평, 정직하여 조금도 강압과 착취와 횡포를 자행하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정산종사의 중도주의는 정치, 경제, 국제관계 등에서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당시 진보와 보수, 좌와 우로 나뉘어 극한 대립을 벌이고 있던 양대 세력과 논리를 平하려 했던 점에서 주목된다.

정산종사께서는 또한 중도주의로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구체적 방안으로 국영과 민영의 혼합경제 체제를 제시하고 있으며, 정부의 지도 감독하에 면단위의 공익재단 건설, 일본인 재산의 국유화, 정치 도덕사업등 각 분야 공로자 우대, 영재교육 및 세습제도 철폐 등을 밝히고 있다.

정산종사의 건국론은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의 준거가 되는 자주·평화·민족단결의 사상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화해와 남북통일의 근간이 되는 중도주의 통일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정산종사께서 건국론에 밝힌 중도주의는 진보적 자유민주주의 이론복지사회주의적 논리뿐 아니라 극단적인 보수와 체제혁신논리까지도 능히 탕평하고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정산종사께서 친히 저술하신 건국론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 역사적 자리매김을 통해 스승님께 크게 보은하고 나아가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에 기여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원불교신문 wonnews0601@hanmail.net

송규(宋奎)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규(宋奎)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규 (宋奎)


송규
원불교
인물
일제강점기 원불교의 제2대 종법사.
이칭호정산(鼎山)
인물/근현대 인물성별남성출생 연도1900년(고종 37)사망 연도1962년본관야성(冶城)출생지경상북도 성주군더보기
접기/펼치기목차
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참고문헌
접기/펼치기정의
일제강점기 원불교의 제2대 종법사.

접기/펼치기개설


본관은 야성(冶城). 본명은 송도군(宋道君), 법명은 규(奎), 호는 정산(鼎山). 1900년 8월 4일 경상북도 성주에서 아버지 송벽조(宋碧照), 어머니 이운외(李雲外)의 장자로 태어났다.
접기/펼치기생애 및 활동사항


9세에 할아버지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좋은 스승 만나기를 염원하던 중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少太山)박중빈(朴重彬)을 만나게 되어 원불교에 입문하였다.

원불교 첫 사업으로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길룡천을 막는 방언공사를 통해 농경지를 확보하면서부터 박중빈의 인정을 받고 핵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방언공사가 끝나자 박중빈은 송규를 비롯한 8인 제자들과 함께 교단 창립의 정신 결속과 진리의 감응을 얻기 위하여 기도를 하였는데, 송규는 중심 위치에서 이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 뒤 부안 내변산에서 박중빈과 함께 3년 동안 원불교정전을 초안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하였으며, 1924년 원불교 임시 명칭이었던 ‘불법연구회’ 교단의 총부가 전라북도 이리(현재 익산지방)에 건설되자, 연구부장·교무부장·총무부장·교정원장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942년 박중빈의 『불교정전(佛敎正典)』 편찬을 보좌하다가 1943년 6월 박중빈이 사망하자 종통을 계승하여 종법사에 취임하였다.

이어 교단의 해산과 일본 불교화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일제 압력에 대처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새로운 국가건설의 방향을 제시하는 『건국론(建國論)』을 발표하는 한편, 국가의 긴급한 사업으로서 3대사업을 추진하였다.

첫째, 전재 동포 구호사업(戰災同胞救護事業)으로서 일본·만주·중국 등에서 귀국하는 전재 동포를 구호하기 위해 서울·익산·부산 등지에 임시구호소를 설립하는 한편, 전재 고아를 수용, 양육하도록 하였다.

둘째, 한글보급운동으로 전국의 원불교 교역자를 소집하여 먼저 한글교육을 실시하고, 그들이 각 지방으로 되돌아가서 한글보급과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셋째, 교육사업으로서 오늘의 원광대학교 전신인 유일학림(唯一學林)을 설립하고, 중등부와 전문부를 두어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리하여 사회 정화와 봉공정신을 교육이념으로 심으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그는 교단의 재정비를 서둘러서, 1947년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명칭을 ‘원불교’로 정식 개명하여 선포하였고, 1948년에 원불교 교헌(敎憲)을 제정, 통과시켜 원불교 교단조직의 기초를 세웠다.

이어 장차 원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교화·교육·자선이라는 3대목표로 정하고, 영육쌍전(靈肉雙全)·이사병행(理事並行)으로 자기교화·인간교화·사회교화를 추진하였다.

교단 운영은 경제 자립이라는 교조정신을 원칙으로 하고, 외세를 막아내는 힘은 순수 민족 자본 형성에 있다고 믿어 신자를 가르치며 자력갱생으로 교세의 확충을 꾀하였다. 1953년부터는 교조의 언행록인 『대종경(大宗經)』의 편수를 시작하여 발간하도록 하였으며, 예전(禮典)·세전(世典)을 완성하여 세간 출세간의 생활법도를 새시대에 맞게 제시하기도 하였다.

1962년 1월 22일에 그는 박중빈이 내놓은 일원대도(一圓大道)의 자각 위에서 장차 전인류가 나아가야 할 이상향(理想鄕)을 제시하였다. 이를 ‘삼동윤리(三同倫理)’라 했으며, 그의 최후 법문이기도 하다.

그의 사상체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교조인 박중빈이 제시한 ‘일원상의 진리’를 중심으로 하여 원불교의 일원종지를 확신하도록 신념체계를 세운 점이다.

그는 1932년에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원각가(圓覺歌)」라는 장편의 가사를 지었는데, 우주와 인생의 근본 진리에 대해 변(變)·불변(不變)이라는 인식원리를 통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고, 나아가 이 진리를 실생활에까지 활용할 것을 밝혔다.

둘째, 일원상의 진리에 바탕을 둔 사회 개혁 및 국가건설에 대한 경륜을 실천하게 하였다. 광복 직후에 발표된 『건국론』을 살펴보면 치국의 방법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도치(道治)로써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의 진리를 깨치게 하며, 다음은 덕치(德治)로 지도자가 솔선수범해서 대중을 덕화, 감화시키는 길이며, 마지막으로 정치(正治)로써 법 준수와 정의를 세우는 일을 실행하자는 것이다.

셋째, 일원상의 진리에 바탕을 둔 범인류의 생활규범과 문명의 진전에 대응하는 이상세계의 전망이다. 이것은 삼동윤리의 법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모든 종교와 교파가 근본은 다 같은 한 근원의 도리인 것을 알아서[同源道理], 모든 인종과 생령이 그 근본은 다 같은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임을 알아서[同氣連契], 각각 다른 주의 주장으로 모든 사업을 하지만 결국 이 세상을 개척하는 데에 한 힘이 되는 것을 알아서[同拓事業] 다같이 행동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정산의 ‘삼동윤리’는 모든 종교·철학·사상이 지향할 바를 제시한 것으로서 곧 전 인류가 나아가야 할 포월(包越)의 윤리요, 대동화합(大同和合)의 윤리로 평가된다. 저서로 『금강경의 현대적 해석』과 『불법연구회창건사』가 있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정산법사의 사상』(원불교사상연구원, 1992)
『원불교와 한국사회』(류병덕, 원광대학교 출판국, 1977)
『정산종사법어』(정화사, 1973)
『원불교교고총간 전6권』(정화사, 1969∼1974)
『원불교교전』(정화사,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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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표지 원불교 검정색
원불교 대각여래위
소태산
박중빈
정산
송규
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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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
송도성
상산
박장식
용타원
서대인
원불교 2~4대 종법사
송규
宋奎 | Song Gyu
정산 송규
출생
경상북도 성주군 유곡면 구성리
(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박실마을)[1]
열반
1962년 1월 24일 (향년 61세)
법호
정산(鼎山)
종법사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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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3. 삼동윤리4. 여담

1. 개요[편집]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

정산종사 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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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수제자이자 일제강점기 말기와 해방 초기 및 6.25 전쟁 시기 원불교를 이끌며 초석을 다진 원불교의 두 번째 종법사.[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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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생[편집]

"송 규는 보통 사람의 지량(知量)으로 능히 측량할 인물이 아니다. 내가 송 규 형제를 만난 후로 그들로 인하여 크게 걱정하여 본 일이 없었고, 무슨 일이나 내가 시켜서 아니한 일과 두 번 시켜 본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 되고 그들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었다"
- 소태산 대종사, 대종경 신성품 18장
" 내가 이 세상에서 본 한국인의 얼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익산 원불교 총부에서 본 송정산 선생의 얼굴이었다.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사람의 얼굴이 얼마나 닦고 닦았으면 지혜와 자비로움이 넘치는 그런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에 감동했다"
- 숭실대 고 안병욱 교수 (동아일보 기고, '가장 아름다운 얼굴' 에서)

1900년 8월 4일 경상북도 성주군 유곡면 구성리(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박실마을)에서 아버지 구산 송벽조(久山 宋碧照)와 어머니 연안 이씨 준타원 이운외(準陀圓 李雲外)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 송도군(宋道君). 8세부터 족손(族孫) 송준필의 문하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인류를 구제하는 인물이 되겠다는 뜻을 품고 스승을 찾아다녔는데, 마땅한 인연을 찾지 못하고 전라도까지 건너오게 되었다.[7]

1917년에 정읍 화해리에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처음으로 만났고, 이듬해 대종사가 있는 영광으로 찾아가 사제의 연을 맺었다. 당시 제자들 중 나이는 가장 어렸으나 수제자로 인정받았으며 대종사는 송규를 "우리 회상의 법모(法母)"라고 칭찬했다.

이후 대종사를 보필하여 원불교의 교리를 제정하고 기반을 닦는 데 공헌을 하였으며, 1943년 대종사 열반 후 뒤를 이어 2대 종법사가 되었다.

일제 말기 어려운 시국에서 원불교를 지켜내었으며[8], 해방 후 '원불교' 교명을 확정하였다.[9] 해방 직후 혼란한 사회에서 전재동포 구호사업을 펼쳤고, 6.25 전쟁 등 험난한 시기를 이끌었다. 1961년 4월에 삼동윤리를 발표한 뒤 이듬해 열반했다.

정산종사의 법문을 수록한 정산종사 법어는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집인 대종경과 더불어 원불교 교서로 쓰인다.

그 외 시자 박정훈이 기록한 법문집 <한울안 한이치에>, <원각가>, <불법연구회 창건사>, <건국론>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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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종사 종법사 추대식

3. 삼동윤리[편집]

- 동원도리: 세계 모든 종교가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근본적 진리는 모두 같다는 의미
- 동기연계: 모든 인류와 생령들이 이름은 다르지만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라는 의미.
- 동척사업: 각종 사업과 주장이 서로 다르고 모순되어 보이지만 궁극적 목적은 더 좋은 세상의 개척으로 동일하다는 의미.

정산종사의 대표 사상으로, 이렇게 모두가 하나인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화합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4. 여담[편집]

  •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이며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정전 편찬 당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산종사가 초안을 준비하면 대종사가 감수하는 식. [10]
  • 대종사 사후 원불교 교명을 확정하고 대종사의 언행을 모은 '대종경'을 발행함을 비롯하여, 원불교 기도식에 쓰이는 '영주'를 짓는 등, 현재 원불교의 기본 틀은 정산종사 시기에 대부분 갖추었다.
  • 정산 종사의 아버지인 구산 송벽조 선생은 일제강점기 당시 천황을 꾸짖는 투서를 조선총독부에 익명으로 보냈다가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일제에서 그 지역에 백일장을 주최하고 필체를 대조해서 적발했다고 한다. 때문에 소태산 대종사 역시 경찰서에 가서 고초를 겪었다.
  • 동생인 주산 송도성 종사[11]와 더불어 원불교 최고법위인 대각여래위로 추존되었다. 역대 대각여래위는 소태산 대종사를 포함해서 총 6명으로, 형제로서는 유일한 사례.
  • 상기 이유로, 성주군 초전면 정산종사 탄생가(원불교 성주성지는 '여래 2명을 배출한' 원불교 성지다. 원불교 5대 성지 중 소태산 대종사와 관련되지 않은 유일한 성지.
[1] #[2] 충숙공파(고산리)-단구공파 30세 홍(鴻) 항렬.[3] 본명 송인기(宋寅驥). 자는 치원(致遠), 법호는 구산(久山)이다. 1876년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고산리(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서 아버지 송성흠(宋成欽, 족보명 송성흠宋性欽, 법명 송훈동)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인엽(李仁燁)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나 박중빈의 권유로 1919년 10월 20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현 백수읍) 길용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이후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로 이주하여 살면서 불법연구회 진안군지부 교무 겸 전도를 역임하다가 1939년 한반도 남부 지방에 큰 가뭄이 들자, 그해 7월 14일 '조선에서 재해가 빈발함은 요임금과 탕왕의 시대에도 없던 일로 천황은 은사를 베풀고 천지신명께 기원하라'는 취지의 편지를 쇼와 천황에 보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40년 3월 13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불경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바 있다.#[4] 연안 이씨 이병균(李炳均)의 딸이다.[5] 누나가 전주 이씨 정석군(貞石君) 이융생(李隆生)의 후손인 이해철(李海哲)과 혼인했는데, 슬하 셋째 딸이 박동묘와 혼인하였다.[6]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창시자 사후에 분열되거나 멸망했음을 생각하면, 역사적으로도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그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7] 이 과정에서 증산 계통의 종교 중 하나인 보천교의 교조 차경석을 만나기도 했으나, 올바른 도인이 아니라 판단하고 떠났다. 또한 강일순의 외동딸 강순임을 만나 정심요결(正心要訣)이라는 도교의 내단수련서를 전해 받았다고도 한다. 강순임은 훗날 남편과 함께 증산법종교를 창시하였다.[8] 대종사 열반 당시 일제에서는 "불법연구회(원불교)는 이제 끝" 이라 생각했다. 당시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창시자 사망 후 망하거나 제자들의 갈등으로 분열되는 양상을 생각하면 당연한 판단이었다. 정산 종사 취임 후 대종사 열반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운영되는 불법연구회의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9] 대종사 당시의 공식 명칭은 '불법연구회'였다.[10] 유학자 집안 출신인 정산 종사와 달리, 대종사는 어릴 때 서당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글에 밝지 못했다.[11] 소태산 대종사의 사위이자 정산종사의 동생으로, 대종사의 법문을 기록하여 남기는 등 원불교 초창기 기틀을 다지는 데 공헌을 많이 하였다. 해방후 전재동포 구호사업의 총책임자였는데 이때 병을 얻어 40세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알라딘: 정산 송규 평전 - 원불교 2세 교주 송규 일대기 이혜화 (지은이)

알라딘: 정산 송규 평전


정산 송규 평전 - 원불교 2세 교주 송규 일대기 
이혜화 (지은이)
북바이북2021-07-10

















Sales Point : 195
392쪽


책소개

소태산 박중빈과 원불교문학을 연구해온 저자 이혜화가 『소태산 박중빈의 문학세계』, 『원불교의 문학세계』, 『소태산 평전』, 『소설 소태산』에 이어 『정산 송규 평전』을 출간했다. 정산 송규는 소태산 박중빈을 잇는 원불교 2세 교주다.

소태산은 살아생전 정산에게 2인자 자리를 맡기며 “우리 회상의 법모요, 전무후무한 제법주다”라는 말을 남겼다. ‘법모’는 교단에서 정산의 역할이 소태산의 아버지 역에 대응하는 어머니 역이라는 의미이다.

‘제법주’는 법을 만드는 주인공이라는 뜻인데, 이는 소태산이 법을 만들고, 정산은 그를 보완하고 확장하는 역할을 맡았음을 의미한다. 이 책을 통해 정산이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책무를 얼마나 잘 이행했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Ⅰ. 하늘·땅·사람
앞 이야기/ 그를 낳은 땅 별고을/ 그가 겪은 시대
Ⅱ. 성주 시대
선비의 길목에서/ 구도의 습관/ 이소의 날갯짓
Ⅲ. 호남 유력
일차 시도/ 상도 전라도/ 만국 양반/ 소태산을 만나다
Ⅳ. 법인성사
송도군의 영산 합류/ 바다를 막다/ 핏빛 손도장/ 일가 영광 이주
Ⅴ. 변산 시대
월명암 중이 되다/ 한 제자 두 스승/ 석두암 시절/ 송도성의 변산/ 하산 준비
Ⅵ. 익산 시대
불법연구회 창립/ 익산 새미르/ 회색의 이치/ 영광에서 정산은/ 소태산의 황혼
Ⅶ. 대명 시대
후계자/ 구름이 걷히다/ 해방과 현실 참여/ 정산과 주산 형제/ 유업을 계승하고자
Ⅷ. 전란과 병고
전쟁의 소용돌이/ 산 넘고 물 건너 ①/ 산 넘고 물 건너 ②/ 온몸으로 경륜을
Ⅸ. 여래여거
입멸 준비/ 니르바나/ 뒷이야기
Ⅹ. 예언과 일화
한국의 미래/ 정산의 성격/ 전생과 후생/ 스승 소태산과 효/ 인간미/ 병고/ 호생의 자비/ 역사와 예언

저자 후기
부록_ 정산 송규 연보/ 참고 문헌/ 원불교 관련 저서 수정 자료
접기


책속에서



P. 18 원불교에서 교조 소태산 박중빈과 후계자 정산 송규의 관계는 어땠을까? 일단 수운과 해월의 관계 유형에 부합할 것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간다면 종교사 전반에서도 그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완벽하고 아름다운 승계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앞선 교조 쪽에서도 그러하거니와 뒤선 후계자 처지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수운의 후계 구도가 남접과 북접의 대립으로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든가, 이후 교단이 천도교, 시천교, 수운교 등 여러 개의 종파로 분열되었다든가 하는 데 비하면, 소태산의 후계 구도는 온전했고 분열 또한 없었기 때문이다. 소태산과 정산의 계승은 교권의 인계인수라는 물리적 주고받기뿐 아니라, 소태산과 정산 상호간의 미진한 부분을 한 팀이 되어 완성하는 상보적 관계가 더 이상 바랄 수 없이 이상적이다. 그리고 정산 쪽에서 보면 이 ‘계승’이 곧 정산의 생애를 설명하는 핵심 열쇳말이기도 하다. 접기
P. 262 대산 김대거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좌우보처불은 문수, 보현보살이시다. 우리 소태산 대종사 부처님의 좌우보처불은 정산 종사와 주산 종사이시다.”(<교사이야기>, 34) 했더란다. ‘대지(大智) 문수보살, 대행(大行) 보현보살’이라 하듯이 문수는 지혜로, 보현은 실행으로 중생제도를 돕는 역할이니, 정산이 문수에 상응하고 주산이 보현에 상응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정산과 주산의 성격과 능력의 차별성을 잘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동네 사람들이 정산은 선동(仙童, 신선 세계 산다는 아이)으로 주산은 장수(將帥)로 부르기도 했다 하는 말이나, 사람들이 형을 외유내강에 춘풍화기(春風和氣, 봄날의 따뜻한 바람과 화창한 기운)로, 아우를 외강내유에 추상열일(秋霜烈日, 늦가을의 된서리와 한여름의 불볕)로 평하였다는 말이 근사한 지적이라 할 만하다. 접기
P. 337 11시 40분, 산회하라는 정산의 지시로 대중을 흩어 보냈다. 12시 10분쯤 알부민 주입이 끝나고 정산이 말했다. “종사님께 할 일을 다 못 해드리고, 어머니 앞에서 떠나게 되고, 정전 일과 영모전 일 못 끝내서 미안하다. 종사님은 만고대성이시다.” 첫째는 소태산의 뜻을 받들고 추모하는 사업들을 충분히 진척시키지 못함을 안타까워한 것이요, 둘째는 모친 이운외가 91세로 아직 생존해 있는 터에 먼저 감을 죄송해하는 것이요, 셋째는 『정전』의 수정 편찬과 더불어, 소태산 이하 역대 선령들의 위패를 모시고 추모하는 공간인 영모전(永慕殿) 건립에 미처 힘이 닿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니 이것은 첫째의 구체적 내용이기도 하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혜화 (지은이)

소태산 박중빈과 원불교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자는 국문학을 전공(고려대 문학박사)하면서 관련 저술 활동에 나섰다. 

저서로 『소태산 박중빈의 문학세계』(1991), 『원불교의 문학세계』(2012) 등의 연구서 외에 
『소태산 평전』(2018)과 장편소설 『소설 소태산』(2020)이 있다. 

이 밖에 교양서로 『책, 꽃만큼 아름답고 밥만큼 소중하다』(2007), 『미르』(2012), 『설화, 욕망을 품다』(2018) 등을 냈다. 

다년간 여러 대학에 출강했고, 고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했다. 
현재는 연구와 저술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다.


최근작 : <정산 송규 평전>,<소설 소태산>,<소태산 평전> … 총 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대종사는 우리의 정신을 낳아주신 영부(靈父)시라면
정산 종사는 그 정신을 길러주신 법모(法母)시라.”
- 대산 김대거

교조 박중빈 소태산과 2세 교주 정산 송규의 안정적 계승

국가나 종교, 기업을 막론하고 창업자(시조)의 최대 고민 중 하나는 후계 구도일 것이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이룩한 성취를 계승할 후계자가 마땅치 않거나, 있다 하더라도 온전한 계승에 성공하지 못할 경우, 그간의 업적이 부정당하게 쓰이거나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계 문제라면 어느 대(代)인들 중요하지 않겠느냐만 특히 창업 1세와 2세의 경우에는, 계승의 제도화가 정착하기 이전이므로 후계자의 안정적 계승은 더욱 비중이 큰 과제일 수밖에 없다.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과 원불교 2세 교주인 정산의 계승은 교권의 인계인수라는 물리적 주고받기뿐 아니라, 소태산과 정산 상호 간의 미진한 부분을 한 팀이 되어 완성하는 상보적 관계이다.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산 쪽에서 보면 이 ‘계승’이 곧 정산의 생애를 설명하는 핵심 열쇳말이기도 하다.

원불교 2세 교주 정산 송규의 삶을 들여다보다

정산 송규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여러 곳을 전전하다 19세에 전남 영광으로 건너와 소태산을 만났다. 이때 소태산의 아홉 제자와 더불어 열 번째 제자이자 중앙 단원이 되었다. 일제의 탄압 속에 깨달음을 구하려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소태산의 말과 글을 새기고 확장하는 원불교 제법주로서의 역할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정산의 가족 또한 전남 영광으로 이주해 오며 원불교 교도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독립한 후에는 원불교 전체가 나라의 재건을 위해 국민을 돕는 일에 힘썼다. 정산은 생애 말 병상에서도 제법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교도들을 불러 원불교의 말과 글을 정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정산의 이러한 간절함은 정산이 떠나고 나서도 그에 말에 따라 교단 차원에서 원불교의 말과 글을 오롯이 정립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정산 송규는 우리 회상의 법모요, 전무후무한 제법주다.”

소태산은 살아생전 정산에게 2인자 자리를 맡기며 “우리 회상의 법모요, 전무후무한 제법주다”라는 말을 남겼다. ‘법모(法母)’는 교단에서 정산의 역할이 소태산의 아버지 역에 대응하는 어머니 역이라는 의미이다. ‘제법주(制法主)’는 법을 만드는 주인공이라는 뜻인데, 이는 소태산이 법을 만들고, 정산은 그를 보완하고 확장하는 역할을 맡았음을 의미한다.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의 삶이 사람들을 모으고 자신의 뜻을 전하며 교단의 기틀을 세우는 데 집중했다면, 원불교 2세 교주인 정산의 삶은 소태산이 전하려는 뜻을 갈고 닦아 후손들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데 집중했다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의 생을 온전히 그려낼 수는 없겠지만, 『정산 송규 평전』을 읽다 보면 정산이 원불교 교조 소태산의 후계자로서 소태산이 말한 법모이자 제법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끊임없이 나아갔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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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송규 평전』
기자명 이은선 기자   입력 2021.07.23  

이혜화 지음 / 북바이북·값 18,000원

[원불교신문=이은선 기자] 원기103년(2018) 『소태산 평전』을 냈던 이혜화 작가가 소태산 대종사의 뒤를 이어 종법사를 역임한  정산종사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남다른 어린 시절과 구도의 습관, 소태산 대종사와의 만남, 종법사 취임, 투병 생활 등 정산종사의 면면을 상세하게 풀었다.

책의 서두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소태산 대종사와 후계자 정산종사의 계승 관계다. 이 책은 ‘종교사 전반에서 그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완벽하고 아름다운 승계라고 할 만하다’고 말하며 ‘후계 구도가 온전했고 분열 또한 없었다’는 것을 그 이유로 제시한다.

저자는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계승은 교권의 인계인수라는 물리적 주고받기뿐 아니라 상호간의 미진한 부분을 한 팀이 돼 완성하는 상보적 관계가 더 이상 바랄 수 없이 이상적이다”며 “정산종사 쪽에서 보면 이 계승이 곧 정산종사의 생애를 설명하는 핵심 열쇳말이기도 하다”고 서술했다.

『정산 송규 평전』은 크게 10가지 주제로 구성됐다. 하늘·땅·사람, 성주 시대, 호남 유력, 법인성사, 변산 시대, 익산 시대, 대명 시대, 전란과 병고, 여래여거, 예언과 일화 등이다. 부록으로 실린 연보에는 탄생에서부터 열반 후 성탑 재건에 이르기까지의 중요 사항과 미국발 세계 경제공황, 중일전쟁, 8·15해방, 김구 서거, 6·25전쟁 등 당시 국내외 상황을 시간순으로 게재해 정산종사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소태산 평전』과 『정산 송규 평전』은 처음부터 연이은 출판물로 기획된 것이 아니다. 때문에 같은 사항을 다룰 때에는 차별화가 힘들어 상당 부분을 전작인 『소태산 평전』에서 옮겨다 썼다. 소태산 대종사와 약 24년을 함께한 정산종사의 구도의 길이 궁금하다면 이 두 권의 평전을 함께 읽어 보길 추천한다. 참고로 『정산 송규 평전』에는 『소설 소태산』, 『원불교의 문학세계』를 포함한 그동안 작가가 써온 원불교 관련 저서 중 오탈자 등 수정자료가 첨부됐다.

[2021년 7월 19일자]

키워드#정산 송규 #원불교 #이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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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 평전 - 원불교 교조 박중빈 일대기
이혜화 (지은이)북바이북2018-11-16












































516쪽

책소개

젊은 시절부터 평생에 걸쳐 원불교 교조 박중빈(법호 소태산)의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써온 저자 이혜화가, 『소태산 박중빈의 문학세계』, 『원불교의 문학세계』, 『소태산 박중빈』 등에 이어 박중빈의 일대기를 그린 『소태산 평전』을 출간했다.

『소태산 평전』은 한 종교단체의 우두머리 박중빈이 아닌, 누구보다도 인간적이고 인류와 세계를 사랑했던 교조 박중빈의 생애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악한 장난꾸러기 아이였던 박중빈이 구도자의 길에 이르기 위해 정진하고, 교조가 되어 교인들의 마음과 삶을 세심하게 살피는 모습에서, 이 시대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과 종교단체가 가져야 할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목차


Ⅰ. 서장–하늘·땅·사람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없다/ 출세와 후천개벽/ 출세의 공간–호남/ 영광, 그 땅의 의미/ 가계와 혈통

Ⅱ. 아동기–맹랑한 싹수
춘삼월 호시절/ 달을 잡으려는 아이/ 퇴학 맞은 방화범/ 산신령을 찾아라

Ⅲ. 청년기–찬란한 귀환
15세에 결혼하다/ 도사를 찾아라/ 뒤뚱거리는 홀로서기/ 주막으로 혹은 파시로/ 다시 구도의 길로/ 노루목의 폐인/ 노루목에 피는 우담바라

Ⅳ. 영산에서–땅을 열고 하늘도 열고
에루화 낙화로다/ 최초법어와 방편 교화/ 처음을 함께한 제자들/ 문학가 소태산과 『법의대전』/ 여봐라 처자야 말 들어라/ 개교 표어와 남다른 생각/ 무모한 도전/ 벽해상전 꿈을 이루다/ 아홉 번째 제자 송규/ 개벽의 상두소/ 산상기도/ 땅공사 하늘공사

Ⅴ. 변산에서–숨어서 그물을 짜다
월명암 답사/ 모악산 금산사 탐방/ 일원상과 김제경찰서/ 내변산으로 숨다/ 봉래정사 석두거사/ 교법의 그물을 짜다/ 불교를 혁신하려면/ 정산 송규와 변산 제자들/ 하산을 준비하다/ 하산과 상경/ 익산 새미르/ 구타원과 그 일행

Ⅵ. 익산에서–일원화 꽃을 피우다
갑자년 이후/ 강약의 도리/ 도둑고개에서 피는 일원화/ 간이하게 비근하게/ 세상에 드러나는 불법연구회/ 불법연구회를 찾은 도산 안창호/ 소태산의 여행 일기/ 소태산의 금강산 탐방 ①/ 소태산의 금강산 탐방 ②/ 소태산의 경상도 여행/ 황정신행이란 인물

Ⅶ. 수난기–그래도 적은 없다
신종교의 수난/ 안도산 이후/ 일제 탄압의 대응법/ 감화되는 일경들/ 벼랑에 선 불법연구회/ 소태산을 따른 여자 제자들/ 인간 소태산의 아픔/ 서대원의 기행

Ⅷ. 입멸–소태산의 만고일월
열반 준비/ 불교정전/ 열반 전야/ 열반 ①/ 열반 ②/ 열반 이후 ①/ 열반 이후 ②

Ⅸ. 대단원–춤추는 니르바나
이제 다 이루었다/ 뒷이야기

후기
소태산 박중빈 연보
참고문헌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박중빈朴重彬,. 법호 소태산少太山.



P. 49~50 박중빈의 모친은 옥녀봉에 뜬 태양이 갑자기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꾸고 그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중빈은 제자들에게 태몽의 신비로 교조를 장엄하는 따위의 섣부른 짓을 하지 못하도록 엄히 당부하였다. 이 점은 박중빈의 의도를 톺아볼 필요가 있다. (…) 신비화되고 미화된 성자의 탄생담이 발심 단계에 있는 후세인의 의욕을 꺾고 아예 꿈조차 꾸지 못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니 그럴듯한 태몽도 없는 사람은 시작 단계에서 자포자기하는 좌절을 겪을 수 있다. 접기
P. 408 소태산이 돈암동 회관(경성지부)에 가자 산부처님(생불)이 온다고 소문이 나서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점심 식사 때 소태산은 상추쌈을 맛있게 들었는데 이를 보고 주민들이 실망했다. 식사가 끝나자 소태산은 변소에 일을 보러 갔다. 이 모습을 본 주민들은 모두 속았다고 하며 돌아갔다. 소태산은 익산 본관(총부)으로 돌아와서 황이천에게 말했다. “이천! 내가 경성 가서 부처님 시험을 보고 낙방했다. 나보다 더한 사람도 다 낙방하겠더라. 사람들이 나를 보고 다 도망갔다.” 설마 생불에게 공중부양이나 오병이어(五餠二魚,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였다 함)의 기적까진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최소한 보통 사람처럼 먹고 배설하면 안 된다. 미숫가루에 생수 한 잔이면 합격했을까? 용변은, 꾹 참고 있다가 아무도 몰래 일을 보았더라면 합격했을까? 접기
P. 424 소태산은 여성의 권리를 인권 차원에서 심각하게 인식하였다. 교법상 남녀 차별을 용납하지 않았던 소태산으로서도 난감한 일은 적지 않았다. 강연 훈련 때면, 남녀노소가 똑같이 연단에서 강연 발표를 하도록 했어도 여자 제자들은 너무나 수줍어하여 연단에 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경우에도 소태산은 커튼을 치고라도 강연을 하도록 조처하였다. 교무 양성도 남녀를 함께하였고, 새파란 애송이 정녀를 지방 교무로 파견하는 일도 꺼리지 않았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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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신문 2018년 11월 16일 출판 새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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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화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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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박중빈과 원불교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자는 국문학을 전공(고려대 문학박사)하면서 관련 저술 활동에 나섰다. 저서로 『소태산 박중빈의 문학세계』(1991), 『원불교의 문학세계』(2012) 등의 연구서 외에 『소태산 평전』(2018)과 장편소설 『소설 소태산』(2020)이 있다. 이 밖에 교양서로 『책, 꽃만큼 아름답고 밥만큼 소중하다』(2007), 『미르』(2012), 『설화, 욕망을 품다』(2018) 등을 냈다. 다년간 여러 대학에 출강했고, 고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했다. 현재는 연구와 저술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다.


최근작 : <정산 송규 평전>,<소설 소태산>,<소태산 평전> … 총 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젊은 시절부터 평생에 걸쳐 원불교 교조 박중빈(법호 소태산)의 자료를 모으고 글을 써온 저자 이혜화가, 『소태산 박중빈의 문학세계』, 『원불교의 문학세계』, 『소태산 박중빈』 등에 이어 박중빈의 일대기를 그린 『소태산 평전』을 출간했다.『소태산 평전』은 한 종교단체의 우두머리 박중빈이 아닌, 누구보다도 인간적이고 인류와 세계를 사랑했던 교조 박중빈의 생애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악한 장난꾸러기 아이였던 박중빈이 구도자의 길에 이르기 위해 정진하고, 교조가 되어 교인들의 마음과 삶을 세심하게 살피는 모습에서, 이 시대의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과 종교단체가 가져야 할 정신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소태산의 생애가 온몸으로 구현한 가르침은
인류와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까?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었던 원불교 교조 박중빈의 일대기

박중빈(朴重彬), 법호 소태산(少太山), 존칭 대종사.
1891년 전남 영광에서 나서 고행 수도 끝에 1916년 깨달음을 얻은 후,
불법연구회(원불교 전신)를 창건하여 전북 익산을 중심으로 포교하다가 1943년에 사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교조를 만나다
대개 종교단체에서는 지도자를 ‘교주(敎主)’라고 부른다.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교조(敎祖)’라고 부른다. 교주가 종교단체의 지도자나 우두머리를 뜻한다면, 교조는 종교단체나 종교를 처음 세우거나 이끈 사람을 뜻한다. 이는 소태산이 인간과 세계를 대하는 자세와도 맞닿아 있는 호칭이다.
소태산은 자신이 종교단체의 우두머리라고 해서 극진한 대접을 받거나 존경받길 원하기보다, 교인들이 상처받거나 어려워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길을 찾기 위해 함께했다. 종교단체를 만들 당시에도 교인들의 도움을 무작정 바라기보다, 함께 일(방언공사)하고 돈을 벌어 교인들의 생계와 종교의 존립을 감당했다. 나아가 교리로서 ‘부부권리동일’이나 ‘남녀권리동일’ 등을 내세우며 여성의 권리를 인권 차원에서 진지하게 인식했다.
한 종교단체의 우두머리가 아닌, 그저 종교단체를 세우고 이끈 사람이 소태산이다. 『소태산 평전』에서는 소태산의 이런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마음의 문제를 가진 교인의 짐을 우스갯소리로 덜어주는 모습이라든지, 금전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는 모습이라든지, 교인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는 모습 등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 한 믿음직한 어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태산의 삶을 열 단계로 나누어 보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의 삶을 열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를 대종사십상(大宗師十相) 혹은 십상이라 부른다. 『소태산 평전』은 소태산이 나서부터 열반할 때까지의 생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려나가면서, 삶이 변화하는 각 시기를 십상으로 알기 쉽게 정리한다.
① 하늘을 보고 의문을 일으키는 모습(관천기의상), ② 삼밭재에서 기원하는 모습(삼령기원상), ③ 스승 찾아 고행하는 모습(구사고행상), ④ 강변에서 선정 상태에 몰입한 모습(강변입정상), ⑤ 노루목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 모습(장항대각상), ⑥ 영산에서 조수막이 둑을 쌓는 모습(영산방언상), ⑦ 피 지장으로 진리계의 인증을 받는 모습(혈인법인상), ⑧ 봉래산에서 교법을 만드는 모습(봉래제법상), ⑨ 신룡에서 법륜을 굴리는 모습(신룡전법상), ⑩ 계미년에 열반을 보인 모습(계미열반상).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교인들의 생존과 종교의 존립을 위해 경제활동을 함께하고, 많은 이들과 소통하며 교법을 만들고, 자신이 세운 종교의 미래를 위해 끝까지 노력하다 열반하는 단계 하나하나에서, 현대인들이 바라는 리더의 참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소태산의 생애가 온몸으로 구현한 가르침
“1943년에 열반한 박중빈은 21세기 원불교 안에서 생전보다 더욱 강력한 영향력으로 살아 있다. 한국 현실만 보더라도 그의 교법이 갖는 시대적 수요는 더욱 불어나고 있다.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가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다지만, 삶의 만족도나 행복지수는 오히려 떨어져 젊은 층은 ‘헬조선’을 입에 달고 산다. (…) 소태산의 생애가 온몸으로 구현한 가르침은 개인 구원과 더불어 사회와 국가의 구원, 더 나아가 인류와 세계의 구원을 담보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필자는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러 독자와 동행하는 짧지 않은 여행길에 나서려 한다.”
저자의 이 짧지 않은 여행길은 2년여 동안 계속됐다. 평생에 걸쳐 모아둔 자료와 인터뷰를 토대로 소태산의 생애를 정리하는 데만 2년여가 걸린 셈이다. 『소태산 평전』을 쓰며 저자는 기록자로서의 냉정함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소태산의 신화 비슷하게 남아 있는 이야기에 대한 나름의 현실적인 해석과 분석을 내놓은 것은, 이야기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애쓴 흔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저자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었을까. 확신하긴 어렵지만 독자에게 여러 가지 힌트를 준 것만은 분명하다. 소태산이 만들고 싶었던 종교단체의 모습이나, 교리, 그가 살아온 삶이 그것을 입증한다.
『소태산 평전』을 읽으며, 소태산의 생애를 통해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구원이라는 것이 현실세계에서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