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은이),안인희 (옮긴이)바오2009-05-04
원제 : Castellio gegen Calvin oder Ein Gewissen Gegen die Gewa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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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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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나치의 탄압을 피해 망명지를 떠돌았던 위대한 전기작가 츠바이크가 혼신의 노력으로 발굴해낸 16세기의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의 전기다.
이 책은 주인공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 여느 전기처럼 주인공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기보다는 “정신적 독재자이자 광신적인 주지주의자”였던 칼뱅과 그에 맞서 목숨을 걸고 “관용과 양심의 자유를 부르짖은” 카스텔리오를 대비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두 인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도록 한다.
이 책은 제1장인 “칼뱅의 권력 장악”부터 제5장까지 칼뱅의 종교적 독선과 광신적 행태, 비인간성과 잔혹함을 묘사하고, 그의 지배 하에 있던 제네바를 히틀러 독재에 비견되는 독재체제로 고발하는 데 할애한다. 그런 다음 제5장부터 마지막 제9장까지는 “편협한 광신주의자” 칼뱅과 그 일파에 맞선 “자유로운 영혼” 카스텔리오의 고독하고 치열한 싸움을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이 책은 저자인 츠바이크가 살았던 부조리한 시대에 대한 고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츠바이크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하고 있던 시기에 이 책을 썼다. 실제로 책 속에서 저자는 단순히 종교적 폭력과 광기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단일한 신앙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되고 조작.지배되는 사회가 얼마나 끔직한 공포정치를 낳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목차
옮긴이의 글
머리말
제1장 칼뱅의 권력 장악
폭력으로 구축한 새 질서
시대의 요청을 꿰뚫은 젊은 칼뱅
이제 제네바에서 자유는 끝났다
인류는 위대한 편집광에게만 굴복한다
정복자 칼뱅
제2장 자유를 질식시킨 광신주의
성서정치
광신적 주지주의자 칼뱅의 초상
모든 길의 심판자
교회계율과 도덕경찰관
금지, 금지, 금지!
테러는 독재의 영원한 법칙
잿빛 그림자의 도시
제3장 자유와 양심의 수호자
독재자의 가면을 벗긴 페스트
자유로운 양심, 카스텔리오
양심, 독재와 맞부딪치다
카스텔리오, 제네바를 떠나다
제4장 불운한 희생양
신학의 돈키호테, 세르베투스
열정과 용기
망각을 모르는 증오
교활한 살인 음모
세르베투스, 감옥에서 도망치다
제5장 ‘다른 의견’의 비극적 종말
잔인한 비극이 시작되다
위선의 제물
세르베투스의 미칠 듯한 분노
화형의 불길이 정신까지 태울 수는 없다
마지막 절규
제6장 관용의 선언
폭력에 반대한다!
옹색한 변명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광신주의와의 싸움
자유 영혼의 목소리는 언제나 살아 있다
제7장 폭력에 맞서 양심이 일어서다
검열, 탄압, 음모
살인자 칼뱅을 고발하다
한때의 자유주의자여, 왜 ‘다른 의견’을 죽였는가?
칼뱅은 유죄! 유죄! 유죄!
제8장 폭력이 양심을 제거하다
권력의 테러
독재권력의 속성
덫을 놓아라!
명예로운 자는 극단적인 증오에 중독되지 않는다
화해와 관용을 모르는 광신자
패배한 관용의 화신
죽음이 그를 구원할지니
제9장 카스텔리오의 부활
칼뱅주의의 유산
관용과 해방의 정신으로
카스텔리오, 부활하다!
모든 칼뱅에 맞서는 어떤 카스텔리오
*카스텔리오를 세상 속으로 이끌어내다
-크누트 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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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1536년 5월 21일 일요일. 장엄하게 울리는 팡파르의 부름을 받고 제네바 시민들은 중앙 광장에 모여들었다.
도덕적?종교적?예술적 신념이라는 내면세계에 국가가 끼어드는 것은, 침범할 수 없는 개성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이며 월권이다.……국가권력은 의견 문제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른 의견, 다른 세계관을 갖는다고 해서 거품을 물고 미쳐 날뛰는 일이 왜 필요한가. 어째서 끊임없이 경찰을 부르고, 살인에 이르도록 미워한단 말인가.……혼자만이 옳다는 오만에서 잔인함과 박해가 나온다.……오직 높으신 분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때로는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런 탄압과 박해들이 일어난다.……카스텔리오는 단 한 가지만이 야만성에서 인류를 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관용이다. 우리의 세계는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진리들을 위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서로 나란히 모여 살 수 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신념을 판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접기

P. 27 역사는 정당할 때가 없다. 역사는 냉정한 연대기 기록자로서 결과만을 헤아릴 뿐, 도덕적인 척도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는 오직 승리자만을 응시하며 패배자들은 어둠 속에 남겨둔다. 이 ‘이름 없는 용사들‘은 거대한 망각의 구덩이 속에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고 내던져져 있다. 십자가도 없고 화환도 없다. 희생의 행위가 헛되이 끝나고 말았기에 십자가도 화환도 이 잊혀진 자들을 찬양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순수한 마음에서 감행되었던 어떤 노력도 헛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떠한 도덕적인 노력도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영원한 이상을 위해 너무 일찍 나타났던 사람들, 그래서 패배한 사람들도 패배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미를 실현했다. 한 이념을 위해 살고 죽는 증인과 확신을 얻은 사람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념은 지상에 살아남기 때문이다. 접기

P. 189 쉽게 정열적으로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래 망설이는 사람, 내면에서 진심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천천히 결심하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모든 정신적인 투쟁에서 가장 훌륭한 투사들이다. 모든 다른 가능성들이 사라지고, 무기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그들은 무겁고 편치 않은 심정으로 방어를 위해서 일어선다. 그러나 이렇듯 가장 어렵게 싸움을 결심한 사람들이야말로 언제나 가장 단호하고 확고한 사람들이 된다. 접기

P. 227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 제네바 사람들이 세르베투스를 죽였을 때, 그들은 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희생시킨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불태워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다. 단지 신앙을 위해 불에 타 죽음으로써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접기

P. 270 고발당한 수치에 대한 보상으로,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의 장례식은 일종의 도덕적인 승리의 행진이 되었다. 카스텔리오가 이단의 의심을 받고 있는 동안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침묵하던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와 자신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했던가를 보여주었다. 살아서 미움받는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을 옹호하는 것이 언제나 더 편하기 때문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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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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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빈과 베를린 대학에서 독일문학과 프랑스문학을 전공했다. 1901년 첫 시집 『은빛 현』을 출간하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당시 자원입대하여 군 신문의 기자로 활동했고, 전쟁 종식 후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세 거장』 『악마와의 투쟁』 『세 작가의 인생』 『로맹 롤랑』 등 유명 작가들에 대한 평전을 발표했다. 또한 역사적 인물을 통찰하는 심도 있는 전기 『조제프 푸셰』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스튜어트』 등을 집필하며 세계 3대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무엇보다 「불타는 비밀」 「아모크 광인」 「감정의 혼란」 등, 프로이트의 영향하에 욕망하는 인간의 내면과 인간관계에서의 심리작용을 예리하게 포착해낸 완성도 높은 중단편들로 평단과 대중을 모두 사로잡았다.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금서 탄압과 압박에 시달리다, 1934년 런던으로 피신해 영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이후 유럽을 떠나 브라질로 망명했다. 1939년 소설 『초조한 마음』을 발표했고, 1941년 자전적 회고록 『어제의 세계』와 소설 「체스 이야기」를 완성했다. 1942년 정신적 고향인 유럽의 자멸로 우울증을 겪다 유서를 남기고 아내와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접기

최근작 : <감정의 혼란>,<아메리고>,<아메리고> … 총 157종 (모두보기)
안인희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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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일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독일 밤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했다. 《데미안》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한독문학 번역상)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한국번역가협회 번역대상) 《광기와 우연의 역사》 《히틀러 평전》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등 유럽 정신과 문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저작들을 우리말로 옮겼고,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등을 썼다.
최근작 : <중세 이야기>,<한 권으로 읽는 북유럽 신화 반지 이야기>,<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 총 13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신정국가를 건설한 칼뱅의 독재와 폭력에 맞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며 관용을 부르짖은 위대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
역사에서 잊혀졌던 카스텔리오의 감동적인 싸움을 20세기 최고의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역사의 전면에 부활시킨다!
종교적 광기와 독재의 폭력이 지배하던 시대, 박해받는 ‘다른 의견’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걸고 단호하게 맞섰던 위대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
오늘, 그의 양심과 용기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붓끝을 통해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다!
_역사에서 잊혀진 인물, 카스텔리오의 부활
흔히 “역사는 승리자들의 기록”이라고 한다. 실제로 역사는 정당할 때가 없다. 역사는 냉정한 연대기 기록자로서 결과만 헤아릴 뿐 도덕적인 척도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는 오직 승리자만 응시하며 패배자들은 어둠 속에 남겨둔다. 이 책의 주인공 카스텔리오 역시 역사의 패배자로 철저하게 잊혀진 인물이다. 그의 맞수인 칼뱅(올해로 탄생 500주년을 맞는다)은 종교개혁을 이끈 인물로, 또 개신교 신앙의 아버지로 오늘날에도 널리 추앙받고 있지만, 그에 맞서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관용을 부르짖었던 카스텔리오는 그 존재조차도 희미하다.
실제로 승리자 칼뱅에 관한 기록이나 자료, 책자는 수없이 많이 남아 있지만, 카스텔리오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그의 초상화는 겨우 한 장만 남아 있다). 하지만 전기작가 츠바이크는 수백 년 동안 잊혀졌던 16세기의 인문주의자이자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던 카스텔리오를 부활시켜 오늘 우리에게 소개한다.
_양심적인 지식인 카스텔리오의 전기
이 책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망명지를 떠돌았던 위대한 전기작가 츠바이크가 혼신의 노력으로 발굴해낸 16세기의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의 전기다. 원제는《폭력에 대항한 양심-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Castellio gegen Calvin oder Ein Gewissen gegen die Gewalt》이며, 1935년에 독일어로 처음 출간되었다. 이 책은 주인공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 여느 전기처럼 주인공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기보다는 “정신적 독재자이자 광신적인 주지주의자”였던 칼뱅과 그에 맞서 목숨을 걸고 “관용과 양심의 자유를 부르짖은” 카스텔리오를 대비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두 인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도록 한다.
이 책은 제1장인 “칼뱅의 권력 장악”부터 제5장까지 칼뱅의 종교적 독선과 광신적 행태, 비인간성과 잔혹함을 묘사하고, 그의 지배 하에 있던 제네바를 히틀러 독재에 비견되는 독재체제로 고발하는 데 할애한다. 그런 다음 제5장부터 마지막 제9장까지는 “편협한 광신주의자” 칼뱅과 그 일파에 맞선 “자유로운 영혼” 카스텔리오의 고독하고 치열한 싸움을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_관용의 화신
‘관용’에 관한 유명한 경구가 있다. 바로 볼테르의 것이다.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견해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 편에 서서 끝까지 싸울 것이다.” 카스텔리오는 볼테르에 앞서 이 경구를 글자 그대로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젊은 신학자 세르베투스가 성서 해석에서 칼뱅과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화형 당하자, 그의 신학적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옹호함으로써 스스로 박해를 선택한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츠바이크는 “감히 카스텔리오를 볼테르나 에밀 졸라, 로크, 흄 같은 인물들과 함부로 비교하려 들지 말라. 이러한 비교는 카스텔리오가 한 행위의 도덕적인 높이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훨씬 후대의 인문주의적 시대에 살았던 볼테르나 에밀 졸라와 달리 카스텔리오는 지지자나 후원세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뱅의 흉포한 권력에 대항해 단신으로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이단자에 관하여》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카스텔리오의 관용의 외침은 유럽에서 선구적인 것이었다.
_치열한 논쟁의 기록
이 책은 칼뱅과 카스텔리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카스텔리오가 벌떼처럼 달려드는 적들에 맞서면서도 온건하고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흠잡을 데 없이 설득력 있는 논리로 칼뱅 일파의 논리를 공박하는 부분이다. 오직 자신의 견해만을 진리라고 강변하면서 다른 모든 의견을 이단시하는 칼뱅에 맞서 카스텔리오는 이렇게 반박한다.
“국가권력은 의견 문제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른 의견, 다른 세계관을 갖는다고 해서 거품을 물고 미쳐 날뛰는 일이 왜 필요한가. 어째서 끊임없이 경찰을 부르고, 살인에 이르도록 미워한단 말인가.……혼자만이 옳다는 오만에서 잔인함과 박해가 나온다.……오직 높으신 분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로, 때로는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런 탄압과 박해들이 일어난다.”
_폭력과 독재를 고발한다!
이 책은 저자인 츠바이크가 살았던 부조리한 시대에 대한 고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츠바이크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하고 있던 시기에 이 책을 썼다. 실제로 책 속에서 저자는 단순히 종교적 폭력과 광기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단일한 신앙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되고 조작?지배되는 사회가 얼마나 끔직한 공포정치를 낳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칼뱅과 카스텔리오의 싸움을 통해, 독선과 광기에 사로잡힌 지도자와 그가 행사하는 권력과 규율이 그 어떤 다른 의견이나 개성도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그와 동시에 카스텔리오를 그런 체제의 폭압성에 맞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끝까지 양심을 지켜낸 인물로 묘사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종교적’ 외투를 쓰고 있지만 다분히 ‘정치적’인 주제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카스텔리오의 삶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출현한 독재에 맞서 영웅적으로 투쟁한 참되고 올곧은 지식인의 모델로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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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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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사상의 자유와 존중 그리고 무엇보다 관용의 정신에 대한 깊은 성찰을 넘어서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탄핵의 강을 건너는 이 순간에 이 책이 크나큰 교훈과 위로를 일깨워 준다는 점은 정말 놀랄만한 미덕이다!


막시무스 2025-03-23 공감 (38)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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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믿고 보는 츠바이크. 신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칼뱅이 어떤 사람인지, 자유를 얻자 어떻게 다른 이들의 자유를 말살했는지, 그 위중한 공포와 폭력의 시대에 저항한 시대의 양심적인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


transient-guest 2018-01-23 공감 (1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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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을 비판하기 위해 쓴 글이라 약간 감정적 편파성이 느껴지는 것을 제외하곤 현실에 대입해도 전혀 문제되지 않을만한 날카롭고 통찰력있는 글입니다.

책한엄마 2017-04-11 공감 (1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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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가 이렇게 서툴게 글을 쓰는 작가였는가 라고 의심할만큼 그답지 않은 글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겠으나 투박하다는 느낌이 들 만큼 칼뱅에 대해서 매섭게 서내려갔다. 카스텔리오의 모습을 그리기 보다는 칼뱅은 비판보다 비난에 가까운 글이 아니었나 싶을만큼.


하루 2014-04-30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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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극히 건강한 정상인으로서 자신의 건강과 쾌락을 기뻐했다. 츠빙글리는 처음 목사로 일하면서 곧바로 사생아를 낳았고, 루터는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마누라가 싫다고 하면 하녀가 있지.‘˝ 응? 이게 칭찬할 일인가? 칼뱅과 카스텔리오의 외모비교 부분도 츠바이크 글 같지 않다..

slobe00 2020-01-08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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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누구인가?
내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처음 알게 된 건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다.
맨 앞 부분에 이 작가 이름이 나오고 동상이 나온다. 그 이후 영화에서 언급도 없다.
뜬금없이 이 작가는 왜 등장했는지 궁금했다. 마치, 아주 예전에 온 길가에 붙여놓은 "선영아 사랑해."문구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그의 마지막이다.
그는 유럽에서 과감한 글을 써오다 결국 브라질로 망명한다. 자신 의견이 들어서질 않고 계속 세계는 어둠으로 들어가 나올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결국 젊고 예쁜 아내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고 보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나온 지배인이 이 작가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쓴 글은 "남"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자신을 올리기 보다 타인을 옹호하고 도와주는 사람. 약한 자를 크게 만드는데 탁월한 문필 능력을 자랑한다. 그가 쓴 책 대부분은 100년 이상을 견뎌낸 고전이 되었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정신은 아직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다시 저 영화를 본다면 예전보다 좀 더 강렬한 감동을 받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칼뱅을 비판하다.
칼뱅과 세르베투스, 그리고 카스텔리오
역사는 승자들이 쓴 새로운 '소설'이다.
칼뱅은 자신이 주장한 신교를 만들어 성공시켰다. 구 가톨릭에게 칼뱅은 이단이었다. 그렇지만 역사는 칼뱅에게 "위인'이라는 말을 붙인다. 그가 역사에서 승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에니어그램 1유형으로서 자신이 가진 이상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카리스마와 올곧은 정신은 많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자유와 권위 사이에서 언제나 되풀이되는 이 불가피한 결정은 어떤 민족, 어떤 시대, 어떤 사람에게도 면제되지 않는다.


내 생각은 그렇다. 인간이란 항상 완벽할 수 없다. 완벽을 꿈꾸는 칼뱅이란 사람에게 과연 "흠 없음"이 가능할까? 하나님은 그에게 한 가지 '실험'을 주신 것 같다. 사람을 구하는 의사였던 '세르베투스'는 다른 사람 영혼도 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을 읽다가 그런 영감을 받았나 보다.
"악마는 하나님의 본체의 일부"란 의견을 제시한다. 이에 칼뱅은 "마녀"를 화형에 처했던 당시 엄격한 가톨릭 사회에 그를 '이단'이라고 신고하며 세르반투스를 밀고해 카톨릭 감옥에 넣게 만든다.
당시 카톨릭도 스스로 자정작용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고인 물을 빼고 새로운 사상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기에 세르반투스 언행과 그가 출간한 책에 대해 엄한 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결국 세르반투스는 감옥에서 쉽게 빠져나온다. 많은 일을 겪고 결국 칼뱅은 자신이 가진 권위를 지키기 위해 세르반투스를 화형 하라는 판결을 스스로 내린다. 자신이 혐오해 마지않은 일을 자신이 직접 행한 것이다. 마지막 세르반투스 절규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했던 절규와 같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언제나 자기 시대를 잘 모르는 사람은 바로 그 시대 사람들이다.
이 시기에 용감한 사람이 세르반투스를 옹호한다. 그가 바로 카스텔리오다. 역시 칼뱅이라는 권력자에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명으로 글을 쓴다. 무명이었지만 이 글을 쓴 자가 누구인지 칼뱅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칼뱅이 "기독교강요"란 책을 냈을 때 카스텔리오가 자신 책에 대한 출판을 정중하게 요청했다. 당시 카스텔리오 책은 흠 없고 우아하고 훌륭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칼뱅은 감정적으로 변한다. 주변에 카스텔리오 책에 대해 폄하하고 비판하며 깔본다. 결국 카스텔리오는 출판을 할 수 있는 권리까지 잃고 평생을 궁핍하게 살다 간다.
폭력을 쓰지 않고 폭력을 당했던 사람들이 진짜 영웅임을 기억해야 한다.
항상 회사는 인재를 원한다고 소리친다. 그런데 직속 상사가 자신 위치를 위협하는 인재임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할까? 아마 칼뱅이 카스텔리오에게 가진 생각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먼저 올라오는 싹을 제거해야 내 권력은 계속 유지될 것이기에..
권위란 폭력 없이는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권력을 뽑아야 하는 지금.
독재자의 권위가 처음으로 흔들리고 난 후에도 실제로 무너지기까지는 정말 길고도 험한 길이 놓여있다.
독재자 딸이 결국 해냈다. 독재자의 잔재를 뿌리 뽑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우린 새로운 권력을 뽑는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는 천칭자리다.(별자리를 배우고 좋은 건 내 의견에 대한 방패막이 생겼다는 점이다.) 지난 두 번 정권을 기득권 세력이 했으니 이번 정권은 진보 정권에게 기회를 주면 평형을 이뤄주는 예쁜 저울이 될 것 같다. 보수도 진보도 서로 불안한 점이 있지만 일단 이번 정권은 이전보다는 다른 새로운 정권이었으면 하는 게 내 내면적 생각이다.

저자는 신교가 기독교 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던 시절에 대한 명쾌한 통찰력을 갖고 있다. 이를 이용해 그가 살고 있는 현재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과거에 대해 쓴 책을 읽으면서 몇 백 년 전 과거를 보는 동시에 이제 올 미래를 본다. 책이란 존재가 가진 무궁무진한 능력이다.
사실 그가 하는 말 대부분을 인정하진 않는다. 특히나 칼뱅과 카스텔리오 외모를 가지고 비교했을 때는 대인배같지 않았다. 왜 싸우다 할 말 없을 때 "너 몇 살이야?"라고 묻는 느낌? 요즘 남은 칼뱅 초상화들이 미화되어서 그렇게 느꼈을지도 있지만 말이다. 요즘 대통령 후보 외모뿐 아니라 포스터 가지고 말이 많다. 그걸 보면 또 저자가 이야기한 외모에 대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역사는 계속된다.
사실 이 책을 읽을 때 내 몸 안에서 격렬한 거부반응이 몰려왔다. 내가 생각했던 세계가 우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내게 칼뱅은 어두운 가톨릭 시대에 한 줄기 빛이고 고결한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이 무너짐을 겪으며 또 현시대 다른 분이 가진 그 마음을 이해하기로 했다.
역사는 그 알 수 없는 목적지로 나아가기 위해 때때로 우리에게 알 수 없는 퇴행을 마련해놓는다.

칼뱅은 자신이 한 세르반테스에게 행한 화형에 대해 명쾌하게 해명할 수 없었다. 옳지 않은 일에 대한 글은 제대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란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는 역사는 변한다.
언제나 가장 완벽한 극단은 마지막에 서로 만나는 법이다.
권력은 자유의 반대말인가? 고인 물은 썩는다. 역시 오래된 권력은 쇠퇴하게 되어있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고 잡은 권력이라도 결국엔 어쩔 수 없이 변질된다. 이는 내가 가진 개똥철학이 아니다. 오래된 역사가 그렇게 증명해준다. 이를 저자가 다시 한 번 칼보다 강렬한 문장으로 또 한 번 깨우쳐준다. 그렇기에 감정에 치우쳐 있지 말자. 항상 깨어있자.
지금 이 시대는 변하고 있다.
권력자들이 자유정신의 입을 틀어막고서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는 것과 더불어 새로운 양심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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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엄마 2017-04-21 공감(33)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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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5~36년 영국에 머물며 쓴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는 16세기 스위스 제네바에서 강력한 신정국가를 건설, '도시와 국가 전체를 엄격한 복종 기구로 변화'시킨 칼뱅과 이런 칼뱅의 광신적인 독재에 맞서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며 '관용'의 정신을 주장하고 이를 몸소 실천한 위대한 인문주의자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1515~1563)의 투쟁을 다룬 책이다. 책의 원제는 '칼뱅에 저항한 카스텔리오 또는 폭력에 저항한 양심'이다.
1553년 10월 27일 오전 11시, '다 떨어진 넝마 조각을 몸에 걸친 죄수가 감방에서 끌려나'와 땅에 쓰러져 머리를 숙인 채 판결문을 듣는다.
"우리는 그대 미겔 세르베투스에게 다음 판결을 내린다. 쇠사슬로 묶어 샹펠 광장으로 끌고 가 산 채로 화형에 처한다. 그와 더불어 그대의 몸이 재가 될 때까지, 그대가 쓴 책의 원본과 인쇄된 책도 함께 불태운다.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는 본보기를 남기도록, 그대는 이렇게 삶의 시간을 끝내야 한다." (p.169)
미겔 세르베투스는 에스파냐 출신의 젊은 신학자로 성서 해석에서 칼뱅과 다른 생각(삼위일체에 반대)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이는 볼테르의 말을 인용하면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으로, 가톨릭의 종교재판을 비판하며 '모든 사람에게 성서 해석에 대한 자유로운 권리를 인정'(p.178)해야 한다는 개신교의 이념에 반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개신교 종교개혁가로서 자신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이단자를 죽이는 것은 범죄행위'이자 '인문주의의 모든 원칙을 부인하는 행동'이라고 말하며 사상의 자유를 옹호했던 칼뱅은 권력을 장악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은총을 내리셨다"고 말하며 '전형적인 독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도시와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칼뱅에게 맞선다는 것은 '황제나 교황을 적으로 삼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칼뱅을 의심하고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것은 잔인한 고문과 처형으로 이어졌다.자유롭고 유쾌한 도시였던 제네바는 칼뱅의 계획대로 '아무런 저항도 없는 단 하나의 의지, 곧 칼뱅의 의지에 복종하는 상태'(p.89)가 되었다.
세르베투스의 잔인한 처형이 옳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식과 덕망이 있는 인문주의자들은 쉽게 체념했고 공식적으로 침묵을 고수했다. 그렇기에 칼뱅의 독재는 흔들림이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침묵하지 않은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칼뱅의 탄압으로 제네바에서 쫓겨나 바젤에 은둔하고 있던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였다. 카스텔리오는 '관용'만이 이러한 야만성에서 인류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세상은 단 한 가지가 아닌 수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으며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 명의 죄 없는 인간이 불에 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카스텔리오는 광신주의 독재와의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이러한 일들 자체가 아주 잔인한 짓이다. 그러나 그 행위자들은 자신들의 비행을 그리스도의 옷자락으로 덮고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행했을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더욱더 무서운 죄를 범한다." (p.202)]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의 명이 아닌 장 칼뱅의 명으로 '학자가 다른 학자에 의해서, 신학자가 다른 신학자에 의해, 그것도 사랑의 종교란 이름으로'(p.202) 죽임을 당했다. 카스텔리오는 절망하여 하나님께 외친다.
["오 그리스도여, 진정 이런 일을 허락하셨나이까? 그와 같이 사람들의 가죽을 벗기고 절단 내는 살상을 저지르는 이 사람들이 진정 당신의 종입니까? 그와 같이 잔인한 살육 장면에 당신의 이름을 증인으로 부르는데도, 당신은 인간의 살에 굶주기리라도 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여, 당신께서 진정으로 이런 일을 명령하신다면 사탄이 할 일은 어디에 남아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이런 일을 하신다고, 사탄처럼 이런 일을 하신다고 주장하는 이 무서운 모독이여! 악마의 의지력, 악마나 만들어낼 만한 그런 일들을 그리스도께로 미루는 이 인간들의 극악한 용기여!" (p.204)]
카스텔리오는 '샹텔 광장에서 미겔 세르베투스에게 종교적 살인을 행한 죄목으로 장 칼뱅을 고발'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호하고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세르베투스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우기는 칼뱅을 향해 카스텔리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 제네바 사람들이 세르베투스를 죽였을 때, 그들은 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희생시킨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불태워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다. 단지 신앙을 위해 불에 타 죽음으로써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p.227)]
칼뱅의 권력 앞에서 카스텔리오는 '코끼리 앞의 모기'였다. 이 승산없는 싸움의 결과로 카스텔리오는 더 이상 말할 수도 글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저서들은 금지, 압류되어 불태워졌다. 따라서 그가 주장한 관용의 정신은 현실 세계에서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했으며, 카스텔리오는 검열과 감시 속에서 그저 체념하며 견딜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어떠한 폭력도 '진리'만은 건드릴 수 없다는 믿음이 그에게 위안이자 힘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칼뱅의 도시 제네바는 카스텔리오를 포기하지 않고 '수많은 간계'로 계속 덫을 놓았다. 설상가상으로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에 앞장선 멜랑히톤이 공개적으로 카스텔리오의 편을 들자 칼뱅은 <불량배의 중상모략>이라는 글을 써 카스텔리오를 더욱 강하게 비방한다. 이것은 글이 아니라 온갖 욕설과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광기에 찬 분노의 폭발이었다고 츠바이크는 말한다. 이 문서는 다음과 같은 천박한 문장으로 끝난다.
"하나님이 너 사탄을 없애주시기 바란다!"(p.246)
또한 칼뱅은 후계자 베즈를 앞세워 카스텔리오를 '사탄이 선택한 그 사람'이라며 악의에 찬 공격을 계속 퍼붓는다. 칼뱅 세력의 천박한 비방과 비교했을 때 카스텔리오의 답변은 얼마나 인간적이고 품위가 있는지, 또한 그가 이 폭력의 시대에 관용의 정신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신은 스스로 기독교도로 자처하고, 복음서를 믿는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의지를 실천한다고 자랑한다. 또 복음서의 진리를 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면서 어째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가? 어째서 남을 비방해서는 안 된다고 강단에서 가르치면서 당신이 쓴 책들은 비방으로 가득 차 있는가? 당신은 나의 오만을 꺾어버리겠다면서 그토록 거만하고 멋대로이고, 또 자신감에 넘친 태도로 마치 당신이 하나님의 심판석에 앉아서 하나님 심정의 비밀을 다 깨달은 것처럼 내게 유죄판결을 내리는가?......한 번쯤 당신 자신으로 돌아가서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라. 가능하다면 한 순간만이라도 자신을 의심해보라.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것을 당신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을 쇠하게 만드는 이 자기 사랑을 그만두고,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 특히 나 개인에 대한 미움을 중지하라. 우리 서로 너그럽게 겨루어보자. 그러면 내가 경건하지 않다는 것도 당신이 내게 덮어씌우려 하는 다른 오명처럼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몇 가지 점에서 당신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라.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 차이가 있다 해도 마음만은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p.254,255)]
아! 이것이 진정한 종교인, 신학자의 모습 아닌가! 진정한 기독교인이 보여줄 수 있는 관용의 정신을 이토록 품위있게 보여준 카스텔리오,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나는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서로 생각은 다르지만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더욱 서로 사랑해야 한다'(p.255)는 카스텔리오의 말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정신이며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랑일 것이다.
칼뱅은 카스텔리오의 활동만을 억압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후 명성까지도 철저히 죽였다. 츠바이크는 우리가 이 위대한 인문주의자를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수십수백 년 동안 검열에 의해 인쇄 금지를 당했는데 어떻게 그를 알겠는가!'(p.25)라며 탄식한다.
또한 세르베투스에 대한 카스텔리오의 항의를 '수천배나 더 유명한 칼라스 사건에 대한 볼테르의 항변이나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졸라의 항변과 비교하려 들지 말라'(p.23)고 말한다. 볼테르는 카스텔리오보다 훨씬 더 인문주의적인 시대에 살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왕과 영주들의 보호가 있었다. 졸라도 역시 전 세계의 관심과 지지가 그를 지탱해 주고 있었다. 이들은 '타인의 운명을 위해 자신의 명성과 안락을 걸었을 뿐'(p.24) 카스텔리오처럼 자신들의 목숨을 건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역사에서 왜 잊혀졌는지, 역사란 역시 '권력을 가진 자에게 이로운 것'(p.238)임을 다시한번 느꼈다.
토마스 만은 이 책을 읽고 츠바이크에게 카스텔리오를 알게 되어 정말 기쁘고 당신의 책과 당신께 감사드린다고 편지를 보냈다. 나 또한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던 카스텔리오를 이렇게 알게 되어 기쁘고 츠바이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목 디스크로 책도 잘 못 읽고 스마트폰, 컴퓨터 사용도 힘들어 100자평으로 독후감을 대신하려고 했으나 카스텔리오라는 훌륭한 인물과 이런 인물을 세상에 알린 츠바이크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카스텔리오라는 이름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주면 좋겠다.
카스텔리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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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12-19 공감(24)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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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된 칼뱅, 되살아난 카스텔리오

종교개혁 당시 성서해석의 자유를 요구하며 ‘종교적 관용‘을 강조했던 신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 역시 ‘권력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책은 ‘신교도에 의한 이단자 처형‘으로 기록된 어떤 사건을 다룬다.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종교개혁가 칼뱅(Calvin)은 제네바에 신정도시를 세우고 종교를 앞세우며 시민들을 압제로 다스린다. 그는 단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세베르투스(Severtus)‘라는 인물을 잔혹하게 화형에 처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제네바 시민은 공포와 무관심으로 칼뱅의 이와 같은 행위들을 제어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다.
이때 한 사람이 세베르투스 처형은 잘못이며 종교적 관용을 베풀라며 칼뱅과 맞선다.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인 것일 뿐이다˝
이 책 주인공 카스텔리오(Castellio)다.
인물묘사에 능한 츠바이크의 강점이 이 책에서도 드러난다. 책은 한 권이지만 카스텔리오, 칼뱅 이렇게 두 명의 평전을 읽은 기분이다.
칼뱅을 바라보는 츠바이크의 시선은 의외였다는 사실은 고백해야겠다. 츠바이크는 ‘칼뱅을 폭군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유형‘의 인간으로 분류한다. 비인간적란 이유 때문에서다. 종교개혁가 정도로 칼뱅을 알고 있던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츠바이크의 칼뱅 묘사가 하도 의심스러워 어느 정도나 사실인지 검색해보니, 실제로 기독교 내에서도 칼뱅의 행적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하니 츠바이크의 칼뱅에 대한 설명이 거짓은 아니었다. 종교개혁가들에 대해 공부를 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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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ist 2019-02-22 공감(14)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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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맞선 어떤 양심...

<Castellio gegen Calvin oder Ein Gewissen gegen die Gewalt>
칼뱅에 맞선 카스텔리오 또는 폭력에 대항한 어떤 양심
독일어 원 제목을 읽어보면, 음률을 살리려 애쓴 흔적이 느껴진다.
카스텔리오와 칼뱅의 첫소리가 비슷하지만 그 세계관은 정반대였듯이,
게비센과 게발트의 앞부분이 비슷하지만 반대의 뜻을 가진 낱말들을 찾으려 애썼을 것임이 느껴진다.
흔히 칼뱅을 유명한 종교개혁가라고 알고 있지만,
이 책에서 등장하는 칼뱅은 좀 다르다.
기존의 썩어빠진 가톨릭을 개혁하는 데 성공한 제네바에 등장한 칼뱅의 청렴함은 금세 폭력이 된다.
지극히 살피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없다는 말도 있듯, 칼뱅주의는 곧 독재의 그늘을 드리운다.
도시와 국가에서 권력을 가진 것은 모조리 그의 관전한 권리 아래 종속되고...
그의 가르침은 곧 법이었다. 그에게 반대하는 듯한 눈치만 보여도 곧 감옥에 가거나 추방되지 않으면
화형장의 장작더미가 기다리고 있었다.(12)
그에 맞선 카스텔리오라는 남자는 '코끼리 앞의 모기'에 비유된다.
이 모기는 힘없고 고독하지만 인문주의자의 역할을 다했다.
이 지상의 어떤 사람에게도 세계관을 이유로 박해할 권리는 없다.(14)
우리 인간 종족의 영원한 비겁성을 생각해볼 때,
시대의 권력자들에게 대핳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얼마나 추종세력을 억기 어려운가.
그렇듯 카스텔리오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그림자 외에는 뒤에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싸우는 예술가의 유일한 재산인 불굴의 영혼에 깃든 굽히지 않는 양심 말고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15)
이 책의 머리말만 세 번 네 번 읽었다.
이 책을 읽기 힘든 사람이라면,
이 책의 머리말만이라도 읽어 보기 바란다.
정신적인 면에서 승리와 패배라는 말은 그 의미가 다르다.
그때문에 언제나 승리자들의 기념비만을 바라보는 세상을 향해서,
수백만의 존재를 망가뜨리고 그 무덤 위에 자신들의 허망한 왕국을 세운 사람들이 인류의 진짜 영웅이 아니라,
폭력을 쓰지 않고 폭력을 당한 사람들이 진짜 영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야한다.
다시 말해 정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지상에서 인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폭력을 쓰지 않고 폭력을 당했던 사람들이 진짜 영웅임을 기억해야 한다.(27, 머리말)

조선 왕조의 상징 광화문 앞에서,
현대 폭력의 앞잡이 경찰(사실 저들은 군대를 가려고 지원한 의경들이다. 위법한 일이다.)들에게
캡사이신 물대포를 맞는 유가족이라니... 참혹한 현실이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이런 말이...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이런 말이 일상화된 나라...
슬픈 이 나라...
한 국민의 상당수가 내면적으로는 독재체제에 반항심을 갖고 있다 해도
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통합된 계획과 확고한 구조로 결집되지 않는 한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독재자의 권위가 처음으로 흔들리고 난 후에도 실제로 무너지기까지는 정말 길고도 험한 길이 놓여 있는 것.(98)
1935년 씌어진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 작품은
전체주의로 흐르고 있는 유럽의 분위기를 이미 예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종교전쟁 시기의 <특수한> 사건을 다룬 이 글이 인류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책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언제나 도발적 인간에게 굴복하곤 하는 인류는,
단 한번도 참을성 많고 공정한 사람에게 굴종한 적이 없었다.
오직 자신의 진리가 유일하게 가능한 진리이며,
자신의 의지가 세계 법칙의 기본 공식이라고 선포할 용기를 가진 위대한 편집광들에게만 인류는 굴종해왔다.(54)
이런 글을 읽으면서,
나치하의 독일 국민이,
일제 강점기 전쟁기의 일본 국민이,
그리고 박정희 독재개발 시기의 한국 국민이 떠오른다.
그들은 왜 박근혜를 찍는가...
저 '편집광'이라는 단어가 어떤 현상을 설명해주는 요약적 어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칼뱅과 카스텔리오 사이에는 <세르베투스>라는 돈키호테가 등장한다.
역사는 수많은 인간들 중 단 한 사람을 선택해 세계관의 대립을 조형적으로 보여주곤 했다.
그런 사람이 반드시 최고 수준의 천재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운명은 자주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주 우연한 이름을 골라서 후세의 기억에 뚜렷하게 새기곤 했다.(123)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런 말투가 좋다
전기 같은 것을 쓰다가도, 툭툭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들려준다.
마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사실, 이런 부분을 만나려고, 지루한 세르베투스와 칼뱅의 대결,
카스텔리오의 '반박문'들을 읽는 건지도 모른다.

피카소는 그런 세르베투스를 그림으로써,
핍박받는 인격, 인권에 대하여 그렸다.
최소한의 기본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추잡한 권력의 만행을...
이단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면,
나는 우리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이단자라 부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198)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인 것일 뿐이다.(227)
세르베투스의 화형에 대하여, 카스텔리오는 <관용 없음>에 관한 글을 쓴다.
그것은 곧 독선자 칼뱅에 대한 저항이 된 셈이다.
<모든 칼뱅에 맞서는 어떤 카스텔리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제목들은 참 멋지다.
칼뱅의 독재를 '금지, 금지, 금지'로 표현하고,
이에 맞서는 카스텔리오는 '칼뱅은 유죄, 유죄, 유죄'로 쓴다.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카스텔리오, 의심의 기술 중>
아, 이 구절을 읽으면서
민주주의가 온 줄 알았던 지난 날이...
그리고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모든 칼뱅에게는 어떤 카스텔리오가 필요하다.
그래서 어느 날, 칼뱅주의에 금이 쩌적 가는 날
카스텔리오는 잊힐지라도,
그렇게 빛은 오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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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5-05-03 공감(9)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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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있는 기독교인이라면 꼭 읽어야할 책


충격이다. 충격도 이런 충격이 없다. [기독교 강요]의 저자이자 개신교 신학의 기초를 닦은 위대한 신학자 칼빈은 알고보니 순 쫀쫀한 샌님에 사상적인 양아치에 불과했고, 칼빈의 손을 잡고 지상에 신정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스위스 제노바 시는 그런 칼빈에게 속아 종살이를 한 것이었다.
기독교인이, 아니 적당히 신학을 공부한 신학도나 목회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십중팔구는 화가 나서 책을 집어 던져 버릴 것만 같다. 아니면 교회에 모여서 이 따위 책은 읽지 말아야 한다고 금서로 지정을 해버릴 지도 모른다.
칼빈이라는 신학자가 개신교 내에서 가지는 무게감과 중요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로 부터 시작된 종교혁명의 열기는 칼빈이 없었다면 아마 중심을 잃고 시들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로 인해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적인 구심점을 가지고 탄탄한 교회를 비로소 세울 수 있었으며, 카톨릭 교회와의 끊임없는 신학적인 논쟁에서도 칼빈이 없었다면 개신교는 확고한 자기 진영을 구축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 대 신학자를 한낮 병적인 완벽주의에 집착하는 잔인한 독재자 정도로 묘사해놓았으니, 모르면 몰라도 칼빈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분노하거나 혹은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의 초판은 1936년 독일에서 채 읽히기도 전에 압류되었고, 프랑스어 판이 출간된 뒤로는 칼빈파로 부터 신학적, 정치적으로 심한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어느정도 이해할만도 하다. 왜냐하면, 비록 칼빈으로 인해 개신교 초기의 사상적 억압이 있긴 하였으나 그것을 카톨릭의 지배로 인한 중세암흑의 역사와 비할 바는 아니었고, 칼비니즘이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을 종합해 보면 칼빈의 과오는 어떤면에서는 옥의 티, 혹은 새발의 피 정도로 치부할 수 도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빈의 잔인함이 정당화되거나 미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카스텔리오의 말 처럼 살인은 어디까지나 살인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외친 기독교 사상의 대부가 기껏 사소한 교리차이 때문에 백주대낮에 불법으로 사람을 태워 죽이다니. 그런데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칼빈의 그 무자비한 살인이 칼빈의 말 처럼 신앙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추잡한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힌다.
탁월한 지성과 도그마와 권력욕이 빚어낸 결정체인 칼빈은 마치 괴물처럼 유럽의 자유로운 정신과 지성을 집어 삼켰고, 그리하여 지상에 신정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그 순결한 시도는 지상에 가장 잔인한 국가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반면, 칼빈의 광기어린 권력욕에 대항하고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양심과 관용을 지킨 카스텔리오는 어둠 속의 등불처럼 환하게 유럽의 양심을 지켜냈다. 그는 세르베투스의 억울한 죽음을 은밀히 사주한 칼빈에게 용감히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으며, 자신이 칼빈의 정치적 술수의 희생자가 되는 순간에도 끝까지 양심과 관용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은 그 시대의 거인이었다.
전체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차후에 연구해 봄 직한 주제도 있으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카스텔리오와 칼빈의 대결은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는지, 그리고 여전히 종교 갈등에 시달리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칼빈과 카스텔리오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를 절절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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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아빠 2013-05-24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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