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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8

[우학스님의 유튜브불교대학] ④ 사주팔자와 운명 - 불교신문

 [우학스님의 유튜브불교대학] ④ 사주팔자와 운명 - 불교신문



[우학스님의 유튜브불교대학] ④ 사주팔자와 운명

우학스님 한국불교대학大관음사 회주
승인 2020.09.04 


운명 탓할 게 아니라 개척해가는 불자가 되자

오늘 주제는, ‘사주팔자 믿지 말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라!’입니다. 30대 젊은 사람이 제게 말했습니다. “스님, 어디 가서 물어보면, 저는 사주가 안 좋답니다. 뭐든 다 안 된다고 하니, 제가 살맛이 안 납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주팔자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청춘의 기를 죽이는가…?’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주(四柱)란 ‘생년·월·일·시’를 말합니다. 올해가 경자년이면 경자가 연주(年柱)가 됩니다. 이렇듯이 월주(月柱), 일주(日柱), 시주(時柱)를 세울 수 있습니다. 팔자(八字)란 사주를 세울 때 사용된 천간지지 여덟 자를 아울러 하는 말입니다. 명리학(命理學)에서는 이 사주팔자가 전적으로 운명을 결정한다고 봅니다.

수행을 통한 마음공부라야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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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많은 의아스러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18년 대한민국 통계청에서 내놓은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1년에 태어난 신생아 숫자는 32만6822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365로 나누면 하루에 895명이 태어나는데, 이 895명을 다시 12지(支)의 12로 나누면 74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즉, ‘사주팔자가 같은 사람이 하루에 74명이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74명이 사는 모습이 같을까요?

아주 탐구심이 강한 어떤 사람이 ‘과연 나와 사주가 똑같은 사람들이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진 뒤 일일이 직접 찾아다니면서 조사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가 아주 딴판이었습니다. 직업이 다 다르고, 성격이 다 달랐다고 합니다. 물론, 부모 복도 다르고, 부부연, 즉 부인을 얻는 것도 다르고, 공부 머리도 다르고, 용모도 다르고, 재물 복도 다 달랐답니다. 그리하여 하던 역학(易學) 공부를 다 집어치웠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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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리얼한 얘기를 하나 더 해드리겠습니다.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의 일입니다. 그때 대단한 두 분, 즉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맞붙었습니다. 선거 당일, 오후 6시가 거의 다 될 즈음 한 방송사에서 전국의 역술인들에게 ‘이번에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겠는가?’라고 물은 내용을 발표하였는데, 그 당시 역술인들의 85%가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점쳤습니다. 그런데 개표 결과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보더라도 사주팔자만 가지고 운명을 논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사주팔자는 선천운(先天運)을 논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은 후천운(後天運)의 요소들이 함께 작용합니다. 저 개인의 견해로, 후천운의 요소는 다음 여섯 가지입니다.

즉, ‘노력·환경·적선(積善)·성명(姓名)·조상의 음덕’이 각각 5%씩 차지하고, 다른 25%는 ‘마음의 힘’이라고 봅니다. ‘마음의 힘’은 물론,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칩니다. 과거의 업으로 인해 50% 선천운이 사주팔자에 나타났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현재 ‘마음의 힘’이 업으로 연결된 그 선천운을 충분히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마음의 힘을 극대화하는 것이 불교적 수행입니다. 가끔, 사주팔자가 안 좋아서 출가했다는 스님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잘 사는 수가 많습니다. 예전에 송광사 방장으로 계시던 구산(九山) 대선사의 전기를 보니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 당대의 유명한 역술인이 ‘세속에 살면 일도 안 되고 단명한다’ 해서 출가를 하였는데, 스님께서 오래 건강하셨던 것은 물론이고, 총림의 방장까지 오르셨으니, 이 역시 불교 수행만이 살길임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불교 수행은 ‘마음의 힘’을 키우는 일입니다. ‘마음의 힘’이 운명을 통째로 바꿀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운명을 감정하는데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모든 불자들은 어떻게 하면 ‘마음의 힘’을 극대화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마음의 힘’을 극대화하는 데는 여러 가지 수행이 있습니다. 참선, 정근기도, 사경, 독송, 절 등입니다. 

우학스님이 쓴 ‘마음 부처’.

좀 더 확신을 드리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구 선생이 17세 때, ‘어떻게 살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마의상법(麻衣相法)이라는 관상 책을 보면서 운명학에 대해 연구를 하였답니다. 수개월 동안 공부를 이어가던 중에 마지막에 적힌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라는 말에 책을 덮었다고 합니다. ‘관상은 몸상에 미치지 못하고, 몸상은 심상에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의 심상(心相) 역시 ‘마음의 힘’, ‘마음 에너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시 말을 만들었습니다. ‘선천운불여심상(先天運不如心相)’입니다. 선천운, 즉 사주팔자니 관상이니 하는 것은 마음의 상, 즉 마음 에너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마음의 스트레칭을 잘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긍정적 심성(心性) 견지(堅持)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보살심을 굳게 가지라는 말입니다. 저의 이론으로, 보살이 가져야 하는 여섯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즉, ‘6대 보살심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덕분입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여섯 가지입니다. 이러한 보살심, 긍정적 마음이 자기 인생을 윤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불성(佛性), 부처님의 성품이 있음을 굳게 믿고 ‘나는 긍정적으로 살겠다’, ‘나는 긍정적 인생관을 가지겠다’는 생각이 투철해야 합니다.

둘째, 우주적 심성 견지입니다. 우주적으로 심성을 굳게 지니려면, <금강경> 수행이 꼭 필요합니다. 금강경을 항상 독송하고 사경하면 좋습니다. 금강경 첫머리에 보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즉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을 다 제도하리라’라고 서원 세우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렇게 서원을 세워야 깨달음도 얻고, 인생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주적 심성 견지, 즉 우주적으로 그 마음을 굳게 지니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을 내가 다 제도하겠다’, ‘내가 나보다 못한 이웃을 위해서 살겠다’, ‘내가 지옥 중생까지 다 제도하겠다’ 이 얼마나 스케일이 큰 일입니까. 

이처럼 우주적으로 크게 마음을 내면, 우리의 삶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근원적,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힘이라면 과거 전생의 나쁜 업도 다 녹여가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주적 심성 견지’가 얼마나 중요한 지 이해가 되리라고 봅니다.

마지막 셋째, 이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셋째는 결정적 심성 견지입니다. 우리는 결정심(決定心)이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합니다. 결정심 또는 결정적 심성이란, ‘수행을 통해서 나의 업을 모두 갈아엎겠다’는 것입니다. ‘다부지게 수행하여 전생부터 쌓아온 이 업을 갈아엎고, 전혀 새로운 나로 태어나겠다’라는 서원이 결정적으로 그 마음 가운데 자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실한 결정심입니다.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면, ‘나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과거의 업까지 녹일 수 있는 마음공부를 아주 다부지게 하겠다’라는 결정심이 있는 사람은 분명히 전혀 다른 빛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수행은 곧 음식을 숙성시키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중생의 나’를 잘 숙성시키면 ‘부처의 나’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숙성이란 현재 나의 기질을 완전히 죽이는 것입니다. ‘대사일번 절후소생(大死一番 絶後蘇生)’ 입니다. 즉, ‘크게 한번 죽어야 다시 태어난다’ 라는 이 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간에 흔히 쓰는 말로 절처봉생(絶處逢生)이 헛말이 아닙니다. 막다른 길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사는 것이 좀 힘드네….’ 또는 ‘나는 업장이 좀 두텁네…’ 등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죽는 것을 각오하고, 삼천 배라도 수십 번 해볼 일입니다. 아니면, 무문관에 틀어박혀 몇 개월이고 스님들처럼 면벽참선도 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 전체를 완전히 갈아엎을 수가 없습니다.

180도 달라진 삶은, 불퇴전의 용기를 가지고 부단히 정진할 때 가능합니다. 수행은 절대 일회성 내지는 말뚝 신심으로는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결연한 각오로 꾸준히 하기만 하면 사주팔자, 관상의 선천운은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세 가지를 마음속 깊이 잘 받아들인다면 분명히 성공적인 인생을 구가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창조주입니다. 

심시조주(心是造主)! 제가 지어서 자주 쓰는 말입니다. 운명을 탓할 것이 아니라 운명을 창조해가는 불자 되시길 기도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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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대한 내용은 한국불교대학 유튜브불교대학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無一 우학 한자성어 ④ 柵隙狍掠(책극포략)

울타리에 구멍이 나 있으니, 고라니가 노략질 한다

무일선원 무문관이 있는 경주 감포의 연대산에는 고라니가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고라니가 심어 놓은 작물을 해치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절 아랫동네 한 신도는 며칠 전에 고라니가 옥수수 밭을 작살내는 바람에 농사를 다 망쳤다고 푸념하는 소리를 해댔습니다.

이 한자성어를 만들 즈음은 고구마 순이 올라올 때였습니다. 그물망으로 울타리를 쳐두었는데도, 한번 농장에 나갔더니 고라니가 고구마 순을 죄다 잘라먹었습니다. 고라니가 울타리 작은 틈새를 뚫고 들어온 것입니다. 절 사람들은 ‘고라니 이놈!’ 하고 씩씩대지만 이것은 고라니 탓이 아닙니다. 고라니는 본래 천성적으로 그렇게 살아갈 뿐이므로 울타리를 완벽하게 치지 않은 우리 잘못입니다.

우리 선가에서는 예로부터 ‘벽극풍동 심극마침(壁隙風動 心隙魔侵)’이라는 말을 씁니다.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듯,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침범한다’ 라는 뜻입니다. <금강경>에서는 ‘항복기심(降伏其心)’으로 표현됩니다. 그 마음이 곧 울타리 구멍이요, 벽의 틈입니다. 수행하는 우리 불자들은 남의 탓을 하기보다는 먼저 자기한테 문제가 없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특히 마음을 잘 부릴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세운 ‘사역기심 팔법(使役其心 八法)’입니다. 첫째, 그 마음을 잘 들여다보라(入觀其心). 둘째, 그 마음을 잘 알아라(善解其心). 셋째, 그 마음을 항복시켜라(降伏其心). 넷째, 그 마음을 흔들림 없이 하라(不動其心). 다섯째, 그 마음을 얽어매지 마라(不絆其心). 여섯째, 그 마음을 활기차게 써라(活用其心). 일곱째, 그 마음을 즐겨라(遊戱其心). 여덟째, 그 마음을 잘 유지하여 지켜라(維持其心). 

결론입니다. 마음이 자기를 다스린다고 하지만, 수행을 통하면 지혜가 나타나 마음을 다스립니다(智顯使心). 더욱더 나아가면 마음과 지혜가 원융한 자리로 들어갑니다(智心圓融). 공아(空我), ‘진리적 나’가 춤을 춥니다.

심의식(心意識) - 식의 윤회(사띠비구)- 심상(心相)(해피스님이야기 190929)





심의식(心意識) - 식의 윤회(사띠비구) - 심상(心相)(해피스님이야기 190929)

    0   468 2019.10.02 10:19

24 https://youtu.be/0au6PwhuRTo



▣ 심의식(心意識) - 식의 윤회(사띠비구) - 심상(心相)(해피스님이야기 190929)



[동영상] https://youtu.be/0au6PwhuRTo







불교학연구회 논문 발표회에서 만난 몇몇 교수님들과의 대화 이야기를 정리하였습니다.







1. 심(心)과 의(意)와 식(識)이라는 세 가지 이름의 마음에서 동질성과 함께 차별성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였습니다. → 「조건에 따라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이것, 마음!」







2. 사띠 비구의 일화를 들어 식(識)이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주장의 오류를 지적하였습니다. mahātaṇhāsaṅkhayasuttaṃ (MN 38-갈애 부서짐의 큰 경)(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04_08&wr_id=4)에서 부처님은 식(識)이 윤회한다는 사띠 비구의 말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 식이 ‘말하고 경험되어야 하는 이것이 여기저기서 선하고 악한 업(業)들의 보(報)를 경험한다.’라는 두 번째 대답에서 꾸짖습니다. 식(識)의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상견(常見)에 대한 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교수님의 ‘잘못 가르치고 있었네요.’라는 말씀에 대해 ‘그렇기는 하지만 교수님의 책임은 아닐 것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으니까요.’라고 답한 점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3. 어떤 법사님은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작용하는 영역 즉 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에 대한 경전 근거를 물었습니다. 직접적인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경들을 꿰어서 삶을 이해할 때 알 수 있는 내용이라고 답하였습니다. 특히, 상(相-nimitta)과 심상(心相-cittassa nimitta)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두의 평화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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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평화<연재>정상덕의 평화일기(47)
정상덕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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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26  18: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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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덕 (원불교 교무)



  
▲ 평화를 제 눈앞에서 나누고 싶었습니다. [사진제공-정상덕 교무]
평화일기를 쓰는 이유는

“마음은 형체가 없으므로 형상을 볼 수 없다고 하며, 성품은 언어가 끊어졌으므로 말로 가히 할 수 없다고만 한다면 이는 참으로 성품을 본 사람이 아니니, 이에 마음의 형상과 성품의 체가 완연히 눈 앞에 있어서 눈을 궁글리지 아니하고도, 능히 보며 입만 열면 바로 말할 수 있어야 가히 밝게 불성을 본 사람이라고 하리라”[대종경 성리품 6장]는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을 새기며 평화를 제 눈앞에서 나누고 싶었습니다.

몸으로 밀고 나가야하는 글쓰기로 책임있는 평화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사실을 바탕으로 써야 했기에 한 문장 한 문장 진실과 마주해야하는 고통이었습니다. 평화의 글쓰기는 과거, 현재, 미래를 화해시키기도 합니다. 

평화일기를 쓰며 만난 르 코르뷔지에, 라이너스 폴링, 마리아 몬테소리, 함석헌, 넬슨 만델라, 무함마드 유누스. 이 여섯 분은 현장에서 끊임없이 평화와 비평화로 갈등하는 제게 묵직한 울림과 함께 듬직한 응원군이 되어 다시 세상의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등을 밀어주는 평화의 실천가들이셨습니다.

평화를 담고 싶습니다.


이 세상 모든 전쟁과 갈등을 해결할 힘은 무엇일까요? 원불교 소태산대종사님의 마음 사용하는 법(用心法)을 알아차리고 부터는 선입관념이나 차별성이 아닌 일하는 현장과 만나는 사람의 행동을 판단의 중심에 세우려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도 골상(骨相), 관상(觀相), 심상(心相)을 지나 태도를 중요시하는 태상(態相)의 시대입니다.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써먹기 위함에 있다’는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그 정신을 평화의 솥에 담고자 평화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평화와 걷고 싶습니다.

세상을 잇는 평화일기는 종교와 세상의 현장을 걸어 다닌 이야기입니다.

평화는 흙냄새 풍기는 발바닥에서 나와서 양심의 혼을 따라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평화는 허리를 숙인만큼 많이 만날 수 있는 전율 같은 것이었습니다.

평화일기는 제 몸으로 들어온 평화라는 가치를 관찰하는 이야기입니다.

평화를 짓고 싶습니다.

2018년 현재 제 삶의 중심은 원불교소태산기념관 건립현장에 있습니다.

건축 책임자로서 건축허가, 건축설계, 철거, 건축시공, 건축감리, 건축감독 그리고 건축 노동형제들과 만나며 평화는 더욱 중요한 실천덕목이 되었습니다.

‘안전이 평화’이고, 정직한 공정이 평화입니다. 건축에 사람을 향한 온정과 가치를 담은 이름을 부여하고 함께 하는 평화의 정신이 깃들고 작동하는 건축물 짓는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평화를 잇고 싶습니다.

원불교 성지인 경북 성주 소성리 사드배치 후 촉발된 원불교 평화운동을 전개하며, 성지 수호를 넘어 더 큰 평화운동의 관점으로 가고자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평화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인류의 보편적 희망인 평화를 만나고자 동시대에 사회 전분야에서 미지의 길을 개척해 걸어간 평화실천자들의 삶의 궤적이 소태산의 평화정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유아평화교육의 개척자 마리아 몬테소리에서 근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 두 번의 노벨상 수상자인 과학자 라이너스 폴링, 종교인이자 씨알사상가 함석헌, 정치가 넬슨 만델라에 이어 경제학자 무함마드 유누스. 이 여섯 분은 20세기 동시대에 태어나 살았다는 시대적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는 원불교 창교자이신 소태산 대종사가 탄생한 1891년의 시대성과도 촘촘히 연결됩니다. 이들의 민족과 활동영역은 아프리카에서 서유럽과 남유럽, 아시아, 아메리카까지 전세계 지도위를 이으며 연결됩니다.

여섯 분은 평생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지만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평생 고뇌하며 조롱, 비난과 위협을 받음에도 ‘인류 공동선을 향한 평화’라는 신념을 각자의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으셨던 분들입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연민성을 바탕으로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직면, 각 전문 분야에서 진실과 진리를 구현하며 행동하는 양심의 원형질로 진화시켜나갔습니다. 

인류는 원래 하나의 생태,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인간의 욕심으로 그 원래이던 하나의 고리가 끊어졌지요. 그 고리를 다시 잇는다는 것이 불교의 연기론 사상이며, 끊어진 원이 회복되어 이어질 수 있도록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어서는 것이 원불교 일원사상입니다. 

지난 겨울, 광장의 촛불에서 보여준 한 사람의 힘을 세계는 여전히 주목하고 있습니다. 모두의 평화를 향하여 공익적으로 재구성하고, 실천의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의 평화로 이어가도록 오늘도 적공 정진하겠습니다.
 


원기 103년 2월 26일 정상덕 합장



  
 
원불교 교무로서 30여년 가깝게 시민사회와 소통하고 함께해 왔으며, 원불교백년성업회 사무총장으로 원불교 100주년을 뜻 깊게 치러냈다.

사회 교화 활동에 주력하여 평화, 통일, 인권,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늘 천착하고 있다.

사랑방 - 심상 론(心相論)

사랑방 - 심상 론(心相論)



심상 론(心相論)

김길호



심상론(心相論)





관상 법(觀相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상(心相)의 판단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 심상은 무엇인가요? 심상은 마음을 쓰는 태도를 말합니다. 일찍이 관상학의 원조(元祖) 마의선생(麻衣先生)은 사람의 운명을 판단함에 있어 먼저 그 사람의 형상과 모습을 보기 전에 그 사람의 내면에 감추어진 마을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설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만상(萬相)이 불여심상(不如心相)」이기 때문입니다. 일만 가지의 상이 제아무리 좋아도 그 사람이 품고 있는 마음의 상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곧 육체를 운전하는 주인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석가도 화엄경에서 “일체가 유심조(一切有心造)”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모든 업(業)을 짓고 선악을 만들어 가는 주인이기 때문에 그 마음의 행위에 대해 가장 많이 강조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형상(形相) 이전에 마음이 먼저 생겼으며 따라서 그 마음은 형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마음의 행위에 따라 미추(美醜)가 하나의 형상이 되어 외적(外的)인 상(相)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무릇 인간에게 있어 밖으로 드러나는 고결한 인품과 천박한 인품 역시 모두 마음의 소산(所産)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을 잘 닦아서 심상을 좋게 쓰게 되면 그 행위가 음덕(陰德)이 되어 자연히 몸과 얼굴에 스미어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드려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 사람의 운명 역시 점차 행운에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란 무형(無形)이므로 안에 숨어서 밖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형상만이 유형이므로 겉으로 나타날 뿐이지요.



분명히 사람의 형상은 마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상은 무형의 심경(心鏡)에 의해서 비춰지는 겉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반드시 유형은 무형에 의해서 수시로 변화하는 상(相)인 까닭에 늘 수신(修身)과 공덕(功德) 쌓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인간이란 자기의 심상에 의해서 골격과 기색(氣色), 수염과 머리카락, 눈썹과 피부, 눈빛(眼色)까지도 심덕(心德)의 유무에 따라 변모해 가는 것입니다.



만일 마음은 있으나 상이 없으면 형상은 밖으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없어지면 형상도 자연히 마음 따라 멸(滅)해지는 셈이지요.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옛사람들의 겉모습은 비록 짐승 같았으나 평소 심상을 잘 갈고 닦았기에 그 모두가 덕인(德人)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 사람들의 겉모습이 얼핏 보기엔 사람같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짐승보다 못한 생각이 도사리고 있어 파렴치한이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질고 착하지 못한 것의 모든 차이점은 이 겉모습(外樣)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그 사람의 마음하나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 과학자 ․ 수학자인 데카르트(R. Decartes 1596-1650)는 이 심상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를 한 분인 것 같습니다. 그는「남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은 얼굴을 아름답게 한다. 그러나 남을 원망하는 나쁜 마음은 고운 얼굴을 추악하게 만든다.」「남을 증오 하는 감정이 얼굴의 주름살이 되고,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고운 얼굴을 추악하게 만든다.」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양의 동 서를 막론하고 마음이 아름다워야 좋은 얼굴을 갖는 것은 진리인 걳 같습니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때의 있었던 실화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흐린 날씨에 봄비는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이었습니다.



서당의 훈장은 출타를 하고, 학동들은 좋아라하고 뛰어 놉니다. 그때 한 역술가(觀相家)가 비를 피하여 서당의 마루에 걸터앉습니다. 그 술객은 배운 것이 역술이라 학동들을 보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들의 관상을 보아줍니다.



「너는 장차 커서 관리가 되겠다. 너는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겠다. 너는 장사를 하되 크게 성공하여 거상(巨商)이 되겠다.」 등등, 그런데 유독 범증엄에게는 일언반구가 없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범증엄이 역술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장차커서 무엇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범증엄이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마찬 가지였습니다.





내리던 비는 그치고, 역술가는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한참을 걸어 들녘을 지나는데 들 가운데 성황당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성황당 안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립니다. 궁금하여 성황당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성황당 안에는 어떤 어린 아이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저는 장차 커서 경세가(經世家)가 되여 치국안민(治國安民)의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제가 장차 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차선책으로 사람을 살리는 의원이라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간단히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애처롭고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자신의 몸을 내던지고 죽기를 각오한 처절한 기도는 몇 시각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서당에서 관상을 보아주었던 범증엄 이라는 학동이었습니다. 역술가는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하며 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학동을 불렀습니다.



“관상이 불여심상(觀相 不如心相)이라! 관상이 마음의 상만 못하다. 다시 말하면 심상이 불여용심(心相不如 庸心)인 것이다. 너의 마음의 상이 관상을 능가한다. 너는 앞으로 네가 원하는 대로 하 거라,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그가 바로 전국시대 때 유명한 재상 범증엄 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관상이 심상만 같지 못하고, 심상이 덕 상만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덕 상도 바로 용심(庸心 : 用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용심이 바로 마음공부입니다. 마음을 바로 써야 덕 상도 만들고 심상도 만들며, 관상도 좋아지는 것이지요!



그 마음을 잘 쓰는 공부! 마음을 요란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으며, 그르지도 않게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이지요. 우리 마음공부 잘 하여 좋은 상을 만들어 갑시다. 그것이 바로 심상 론일 것입니다.

삶과 운명 :: 심상

삶과 운명 :: 심상

심상

운명 2017. 4. 25. 08:29
임오壬午일의 단상 - 심상

심상心相이란 마음속에 떠오르는 심상心象을 보는 것입니다.
도인의 경지가 아니면 쉽사리 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상相이란 상태를 보는 것이고 
상象이란 조짐을 보는 것입니다. 

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心好不如德好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 심호불여덕호
관상은 체상보다 못하고 체상은 심상보다 못하고 심상은 덕상보다 못하다. 
관상책으로 유명한 마의상법 마지막 구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관상은 얼굴에 나타나 있는 상을 읽는 것이고 
체상은 몸에 나타나 있는 상을 읽는 것이고
심상은 마음에 나타나 있는 상을 읽는 것이고 
덕상은 덕을 행하는 마음의 상을 읽는 것입니다. 

마의선사가 열심히 일하는 머슴을 보고 곧 죽을 상이니 몸조심하라고 하자 
머슴은 한탄하며 계곡물을 바라보다 떠내려가는 개미를 측은하게 여기고 구해줍니다. 
마의선사는 돌아가는 길에 머슴을 다시 보자 부귀장수할 상으로 바뀌어 있음을 보고
크게 깨닫고는 마지막 구절에 적어넣었다고 합니다.

공자 역시 관상불여심상觀相不如心相이라 하여 심상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줍니다. 
마음의 중요함을 말하는 것들이지요.

임오壬午나 병자丙子는 비록 적지에 앉아 매우 어렵고 힘들지만 
수화기제水火旣濟의 공功을 이루기에 부귀한 상이기도 합니다. 


무공사주심리상담학회


출처: https://mugong98.tistory.com/entry/심상 [삶과 운명]



마음 공부방 > 즉설문답 > 원불교의 수행, 즉 삼학수행의 요지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마음 공부방 > 즉설문답 > 원불교의 수행, 즉 삼학수행의 요지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작성일 : 12-05-24 21:00

원불교의 수행, 즉 삼학수행의 요지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33 

지금 삼학수행 11개 과목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삼학수행의 정기훈련법이 11가지로 나누어있다보니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할지 길이 막막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루의 일상생활하기도 빠듯한데 거기에다 수행이라는 명목 하에 11개 과목을 하나하나 챙기려니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예비교무 시절에는 주어진 시간에 시키는 것만을 따라하니 흉내는 내었지만 교도들을 교화하면서 그 바쁜 와중에 자신의 삶까지 스스로 돌보아야하니 정말로 수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출가자들이 그러할진대 재가교도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소태산 그 분께서 익산 총부에 주석하고 계실 때는 재가출가를 불문하고 여름 한철 겨울 한철 하선과 동선을 통하여 수행 정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전통이 사라진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스스로 수행해나가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 처했습니다, 좌선이야 시간을 내서 하기는 한다지만 생활에 쫓기다보면 설교를 준비하는 일도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냥 일상적이며 반복적인 일과로 하루를 끝내고 맙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 처해있으면서 치열하게 신앙하고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 깊이 들어가자니 시간과 정성이 부족하고 그러자고 앞으로 더 나아가자니 꽉 막힌 은산철벽에 갇혀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출가자들은 깨달음의 길을 포기하고 그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서 일상적인 삶과 생활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당연히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그에 따라 자신뿐만 아니라 원불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마련이죠. 살긴 살아가는데 열정과 희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저 수동적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당연히 교화가 정체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교단의 현실이 됩니다. 교화자 스스로 구도자로서의 열정과 열망이 지극하다면 그는 생명에너지가 충만할 것입니다. 깨달음의 과정 속에서 느껴지는 그 열정과 열망은 당연히 그 자신을 넘어 주변으로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스스로 자신의 집 안에 갇혀 나올 수 없으니 그는 정체할 수밖에 없고 에너지는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당연히 교단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소태산 그 분께서 이루고자 했던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가슴깊이 받아들이면서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의 길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일은 우리 세대에 주어진 필연적인 과제입니다. 원기 100년 안에 그 기반이 닦이고 그 기반을 통하여 이웃과 사회로 전이되어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을 세워나가지 못한다면 소태산 그 분의 비전과 꿈은 영영 사라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삼학 수행을 11개 과목으로 정리해놓고 그 방법들을 제시해놓았지만

실질적으로 삼학 수행을 통해서 성취하고자하는 목적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바로 집착심을 제거해나가는 것입니다!

집착심은 고통의 근원이며

스스로를 구속시켜나가는 원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깨닫고 난후

최초로 밝히신 가르침이 바로 집착을 벗어버리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苦集滅道! (고집멸도)

고통은 집착으로부터 일어나는 것

그 집착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팔정도를 닦아라!』



『세상은 無常한 것이다! (諸行無常 제행무상)

無常한 것이기에 나라는 실체는 없다! (諸法無我 제법무아)

그를 깨닫지 못하고

그 무엇엔가 집착되어있으므로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음이니! (一切皆苦 일체개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 (涅槃寂靜 열반적정)』



정신을 수양하고 사리를 연구하며 작업을 취사하는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집착심을 제거함으로서 마음을 맑히고 마음을 밝히며 마음을 올바르게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궁극은, 불교적 세계가 표방하는 중생 구원의 실질적인 과제는 집착심을 제거함으로서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아함을 비롯한 반야, 금강, 화엄, 법화의 세계는 바로 마음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집착의 세계가 형성되고 그 집착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 그리고 그 집착을 넘어서면 또 어떠한 세계가 전개되어지는지를 밝혀나간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마음공부의 표준, 즉 삼학 수행의 표준은 집착심을 어떻게 제거해나갈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합니다.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집착하고 있는지를 모르면서 좌선의 일미를 이야기하고 염불의 공덕을 자랑한다면 그가 하는 좌선과 염불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겉으로 드러난 자신의 능력을 더 내세움으로서 그는 깨달음에 더 멀어지고 맙니다.



정신 수양, 즉 마음을 크게 쉼으로서 定을 기르고 빈 마음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동정 간에 불리선법이 될 수 없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홀로 좌선하고 있을 때 - 그것도 적적성성한 선의 일미를 맛보고 있을 때를 기준으로 - 그리고 상대가 드러나지 않을 때는 마음의 청정함을 느끼고 희열에 차 있다가 경계를 만나 마음이 흔들리고 어두워지며 감정의 기폭에 휩쓸려 마음의 근원을 잃어버린다면 그의 수양은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물론 적적성성한 경지에 이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마음이 종잡을 수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혼란스러우면 앉아있어도 오히려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조는 것이 훨씬 편하지요. 그러니 수양이 될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습관에 젖어 수십 년을 앉아있는다 해도 그는 마음의 한 자락을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포기를 하고 말기도 합니다.

정신수양 즉 定을 함양하는 공부는 실질적으로 생활 속에서 집착심을 제거해나가는데 있습니다. 집착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신 수양을 하는 것이지 다른 목적을 위하여 수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경계를 만나 요동을 치고 혼란스러운 것은 마음을 흔드는 요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그 원인을 無明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無明의 시원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홀연연기라 말합니다. 홀연히 그 어디에선가 집착을 부르는 그 어리석은 마음이 나타났다고 말이죠. 제가 위에 밝혀놓은 <마음의 원리> 장을 참조하시면 그 집착의 시원이 되는 無明이 어디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났는지를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정신 수양의 요지는 바로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시간이 나서 조용한 곳에 머물러 좌선을 할 때는 마음을 비움에 그 표준을 삼아야합니다.

그래서 나는 無者 화두를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無는 없다는 無가 아니라 비워져있음을 마음의 눈으로 통찰해나가는 것입니다. 조용한 시간은 상대할 그 어떤 대상이 없기에 몸의 감각기관이 쉴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되며 육근이 쉬어짐으로 해서 마음의 비워져있음을 통찰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앉아 있다고 해서, 감각기관이 교류할 수 있는 그 대상 사라졌다고 해서, 마음의 작용마저 쉬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감각의 작용들로 인하여 잠재의식 안에 가두어져있던 대상을 잃어버린 마음의 상들은 몸이 쉼으로 해서 더욱 더 요동을 치기 마련입니다. 끊임없이 심상을 일으켜내서는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묶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바로 집중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죠. 그 집중의 방법이 호흡이 되었건 관찰이 되었건 화두가 되었건 관계없이 그 심상의 요란함을 지워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염불도 흩어지고 산란한 마음들을 묶어낼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좌선과 염불을 11개 과목 중 정신 수양을 위한 과목으로 채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좌선은 앉아만 있다고 해서 더 깊은 체험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집착심이 얼마나 제거가 되었는가에 따라 좌선의 깊이도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집착심은 내려놓지도 못하면서 좌선의 일미를 맛보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좌선의 깊이는 그 집착심의 무게와 관계가 깊습니다. 그런데 집착심은 혼자 있을 때 잘 드러나지를 않습니다. 상대를 통하여, 즉 어떤 대상을 통하여 그 집착심은 드러납니다. 몸과 마음이 그 어떤 대상과 부딪침으로 해서 마음의 파장이 일어납니다. 그 파장을 깊이 통찰할 수 있다면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집착하고 매여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어떤 대상과 부딪침으로 해서 고통스럽고 화가 나기도 하며 자신도 억제할 수 없이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를 깊이 관찰해보면 그 과정을 통하여 마음의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엑스레이 사진처럼 마음의 실질적인 움직임들을 살펴나갈 수 있는 것이죠.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예전에 스님들이 홀로 깊은 산중에서 수행을 하다가 탁발을 하러 시장에 내려가는 이유는 바로 마음의 흔적을 발견하고 더 깊은 마음의 흐름들을 깨닫기 위해섭니다. 똑 같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로 자신이 대하고 있는 관계와 그 일들과 그 상황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자신의 마음들을 깊이 통찰해나감으로서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집착하고 매여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그 집착심을 제거해야한다는 그 강력한 목적성에 목표를 두고 있다면 그러한 기회는 그에게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 실질적인 것은 집착심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 과정들을 통해서 그를 발견하고 끊임없이 인지하고 있다면 그는 언젠가 자신에게 드러났던 그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정 간 불리선법인 무시선 무처선은 매우 훌륭한 소태산 그 분의 마음 훈련법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일일시시로 그가 대하고 있는 관계와 일과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하고 그를 통하여 집착심을 제거해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생활선이자 정신수양의 참된 의미일 것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는 정좌하여 마음을 비우고 마음의 근원성을 통찰하며 마음이 일을 당해서는 마음의 작용과 그 흐름들을 인식하고 마음의 본질, 즉 그 허상을 통찰해나아가라!

이것이 바로 정신 수양의 요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리연구의 목적은 집착심이 어디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깊이깊이 통찰해나감으로서 몸과 마음의 원리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대상을 넘어서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즉 사랑에 눈이 먼 사람들은 오직 그녀 그이만이 관심의 대상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 그 외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일과 사물의 이치나 세상사가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잘 알 수 없는 것이죠. 집착하는 대상에만 관심을 둔다면 실은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쳐나가는 그러한 존재요소들과 그 변화에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변화와 존재의 실상에 대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존재의 원리를 알 수가 없기에 그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전반적인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사리연구는 일과 이치를 연구하여 존재의 원리를 깨닫는 일이지만 이 또한 그 길을 찾아내지 못하면 마음의 주변을 빙빙 돌 뿐 참다운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일과 이치는 바로 마음에 관한 일과 이치를 말합니다. 물론 주어진 세계 - 즉 우주와 지구와 생명과 역사등 - 를 관찰하고 비교 분석하고 깊이 연구해나감으로서 지혜를 터득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자칫 마음의 근원을 벗어나면 그가 아는 것은 지식에 불과할 뿐 영혼의 자유로움으로 인도하는 지혜의 빛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앎에 묶이고 그 앎에 집착하기에 권위와 권력적 속성을 벗어날 길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원리를 터득하고 통찰해내지 못한다면 그는 올바른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집착심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상관관계에 의하여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 집착심의 일어나고 사라져가는 그 전 과정을 깊이깊이 통찰해나가는 일이 바로 사리연구의 핵심이 됩니다. 그 아무리 경전을 외우고 의두와 성리에 밝다고 해도 그 몸과 마음의 원리에 의해서 드러나는 그 집착의 전 과정을 올바르게 통찰할 수 없다면 그는 올바른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앎이 칼날이 되어 수많은 이들을 어둠 속에 묻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앎이 오히려 집착의 원인이 되어 질 수도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일과 그가 처한 상황과 그가 대하고 있는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작용을 깊이 세밀하게 통찰하고 그에 따라 스스로 그 몸과 마음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사리연구의 핵심이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집착해있으며 또 그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쌓아올린 그의 경험과 체험은 그를 원하는 많은 이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하고 체험해본 길이기에 다른 이들의 상태를 이해하고 온전히 바라봐 줄 수 있으며 그를 통하여 올바른 안내를 해줄 수 있습니다.

사리연구는 존재하는 세계의 실상과 허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는 공부입니다. 이는 경전의 뜻을 믿고 따른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경전의 의미는 그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그 깊이와 차원을 달리 하기 때문에 그 경전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더욱 더 깊이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삼아야합니다. 그냥 믿고 말씀을 따른다고 해서 그것이 교조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크게 낭패할 일입니다. 수행자는 더욱 더 깊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해감으로서 또 다른 깊이와 폭으로 자신의 의식을 확장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전의 의미도 자신의 영적인 성장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묶여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없다면 그는 자칫 길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쌓아올린 장벽에 갇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리연구, 즉 지혜를 얻고자 하는 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앎과 행위를 비쳐 보아야합니다.



끊임없이

왜?

왜 그러한 것인가?

나의 앎이 진실한 것인가?

나는 근원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로운가?

살려주는 마음으로 살았는가?

존재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가?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

부처란 무엇인가?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진정 무엇일까?

무시선 무처선을 어떠한 심법이며 행법일까?

등등

끊임없는 회의와 물음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자신의 앎과 행위들을 살펴보아야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무턱대고 믿고 따르는 일이 무척이나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미혹으로부터, 맹신으로부터, 자기적 체험으로부터 벗어나고 진정한 깨달음을 행하기 위하여 멈추어질 수가 없는 구도의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어나가면서 비로소 진정한 앎, 즉 지혜의 문을 두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자신의 두발로 걸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의존하지 않고!

그리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면 비로소 주변이 보이고 세상이 보이고 일과 이치에 눈이 떠집니다. 알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만큼 세상이 드러나 보이게 됩니다. 인위적인 앎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지혜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 무엇엔가 집착해 있음으로서

관심은 당연히 그 집착의 정도만큼 그 대상에 기울어질 것이고

그에게 보여지는 세계 또한 그 만큼 밖에 열려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상은 그에게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만큼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올바른 지혜는 집착을 벗어버림으로서 존재하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존재 상태를 온전히 통찰해냄으로서 존재 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없는 세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남으로서 존재의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리연구의 올바른 수행방법인 것입니다.



작업취사는 실질적인 행위에 관한 수행을 말하며 그 역시 집착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그 목적을 두어야합니다.

원불교 정전에 『작업이란 함은 무슨 일에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을 작용함을 이름이요, 취사라 함은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림을 이름이니라』하였습니다.

육근 즉 몸과 마음을 사용할 때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일까요?

자칫 정의를 사회적 혹은 역사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작업취사의 요지는 그 목적성을 상실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작업취사는 마음의 근원을 밝혀나가는 수행이 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정의와도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마음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이나 역사적 관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필요합니다. 그 기준을 올바르게 세워놓지 못하면 자기적 견해에 따라 정의는 자의적으로 해석되기 쉽습니다.

마음의 근원성을 찾아나가기 위한 방편으로서 삼학을 이야기하고 그의 수행을 말하고자 한다면 정의는 곧 집착심을 놓아버림으로서 드러나지는 올바른 관계의 정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착심은 이기심을 낳습니다.

이기심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하며 따라서 관계는 언제나 마찰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기심을 버린 사람은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이기심과 이기심이 충돌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둘 사이에 일어나는 파장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면 그 둘은 서로서로 충돌의 희생자가 되기 마련이고 그들에게 정의란 드러날 수 없습니다.

정의란 이기심을 버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과 연민의 마음이 있는 이들에게서나 드러날 수 있는 성숙한 마음의 상태가 드러나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바로 집착심을 내려놓고

그 집착심을 내려놓음으로서. 존재하는 세계의 실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있는 그대로를 바라봄으로서, 세계를 포용하고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기심을 내려놓음으로서 관계를 사랑과 자비로 이어줄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이기심의 원천은 자기 집착이며 이러한 자기 집착은 탐.진.치(탐욕, 성냄, 어리석음)라는 삼독심을 관계 속에서 발현하게 합니다. 불의, 즉 올바르지 못한 행위의 원천을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작업취사는 그리 어려운 공부가 아닙니다.

즉 생활 속에서 집착심을 발견하고 그를 발견하면 즉시 내려놓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일단 집착심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발견했다하더라도 쉽게 놓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의지와 열망과 열정은 필수불가결한 준비과정입니다.

나는 꼭 내 존재의 끝을 보고 말리라!

나는 부처를 꼭 이루고 말리라!

나는 이렇게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

나는 내가 주인이 되어 세상을 창조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내가 행복의 주인공이 되어 우리 가정을 세상에서 낙원으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 어떤 나름의 확고한 의지와 열정이 있어야합니다.

마치 죽음의 경계에서도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그 의지의 산악인들처럼!

그러한 마음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면 애초에 삼학 수행은 그 올바른 길을 걸어 나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쌓아놓게 되고 자신에게 편하고 좋은 쪽으로 나아가다보면 그는 마음이 가야할 올바른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등반가에게 희열은 남들이 볼 수 없는 세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각 속에 세상을 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오감으로 신비로운 세상을 경험하면서 자기 성취의 기쁨을 만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공부나 삼학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존재 세계의 실상을 스스로 경험해나감으로서 보여지는 세계의 신비로움과 조화로움, 그리고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창조적으로 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움이 그에게는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마찰과 충돌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삼학수행을 실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입니다. 바로 내가 어디에 어떻게 집착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작업취사의 표준은 생활 속에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해나가면서 옳은 것은(德) 취하고 이기심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여행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다가 걸리거나 막히는 것이 있으면 깊이깊이 탐구하여 왜 그러한 것인지를 깨닫고 어떻게 구속된 상황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탐구하면서 그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면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타적인 마음을 취하면 됩니다.

작업취사의 요점은 바로 불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양성하는 일입니다.

불의를 제거하는 일은 근원적으로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생각을 버리는 일입니다.

바로 그 뿌리인 집착심을 제거해나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집착심을 제거해나가면

나와 너를

하나의 마음으로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 하나의 마음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마음

그리고 연민의 마음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줌으로서

관계는 따뜻함으로 서로를 살려주게 됩니다.

포용하고 품어주고 살려냄으로서 관계는 아름답게 꽃이 핍니다.

내가 대하고 있는 일과 그 사람 사이에서

품어주는 마음

포용하는 마음

살려내는 마음이 아니거든

반드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깊이 통찰해 보아야합니다.

왜 그러한 마음이 되지를 못하는가를 깊이깊이 바라본다면

당신은 당신이 볼 수 없었던 그 무명의 어두운 마음들, 즉 자신이 인식할 수 없었던 집착심의 뿌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지속하다보면 어느새 당신은 자유로운 영혼 따사로운 영혼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해있을 것입니다.



삼학 수행은 따로 떨어져있는 공부가 아닙니다.

그 셋은 하나의 공부 과정이며

그 하나의 과정 속에

그 셋이 다 함께 합니다.

정기훈련법에 나타난 삼학수행 11개 과목은 따로 떨어져있는 공부들이 아니며

충분한 시간을 내어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을 때

그 기본적인 토대를 구축해나갈 수 있는 훈련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처해있는 삶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치열할 생존경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먹고 산다는 자체가 가진 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게는 매우 고달픈 일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지켜내지 못하면 가족은 자칫 해체될지 모르는 위기상황 속에서 살아나가는 이들이 우리의 주변에는 가득합니다. 치열함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교도님들은 이렇듯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던져 가족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애를 쓰는데 의식주 걱정 없이 살아가는 구도자들이 치열하게 수행해나가지 못하고 그들의 정신적인 의지처가 되어줄 수 없다면 그 빚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구도의 끝은 결국 사랑과 자비 그리고 연민의 마음을 발현하는 것입니다.

삼학 수행의 끝 역시 배려와 존중 그리고 사랑과 자비의 마음입니다.

구도자가 생활 속에서 그 마음을 발현하지 못한다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더욱 깊이 통찰해내야 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수행을 하고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내가 관계하는 그들과 소통하고 나누기 위하여 구도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무언가를 향해서 수직적으로 나아가 지혜의 빛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라면

사랑과 자비는 수평적인 나눔의 길입니다.

구도의 끝은 그 수직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지혜는 결국 사랑과 자비의 길을 찾아나가는 것이며

사랑과 자비의 길은 결국 지혜를 통하여 완성됩니다.

지혜 없는 사랑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소유욕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죠.

또한 따뜻함이 없는 지혜는 지혜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 안에 가두어놓은 앎은 따뜻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착심을 내려놓는 그 모든 작업들!

그 일을 그 무엇이라 부르든 그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 작업이 어떤 종교, 어떤 영적 그룹들 사이에 일어나든지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더 좋은 길이라고 다툴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을 나는 과연 올바르게 걸어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유롭고 따뜻한 마음들이 서로 전해질 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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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입문을 위한 강화 <13>

기자명 조정중
입력 1974.08.25


진리란 무엇인가 Ⅲ-그 신앙을 중심으로
우주만유와 만법의 근원되는 원리를 신앙의 대상
사은 실체는 법신불의 화신으로 사실적으로 감응

생멸거래 간에 심신작용에 따라 인과응보가 나타나 진리란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진리를 어떻게 참되게 신앙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더 부심해야 할 관심사가 현대 지성인들에게 요청되는 과제가 아닌 가 본다. 진리를 사고하는 지각과 진리를 행하는 실천이 일치하기 어려운 것이긴 하나 현대인의 생활은 너무나 심한 知와 行의 거리감을 지니고 있다. 대개의 경우 종교적 신앙을 통하여 모시고 받드는 가운데 경전은 심상으로 진리를 터득하려 하지 아니하고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인식하려 하기 때문에 결국 속 깊은 진리의 심연에 이르지 못하여 진리를 다툴만한 소지와 신념과 힘을 갖추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를 경시하는 경향에 흐르게 되었다. 동서양의 진리는 필요 한계를 넘을 만큼 너무 구체적으로 분석 소개되어 사람마다 진리의 개념파악 정도는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사회상은 참이 실현되지 못하고 허위와 원망의 가면이 세를 더해가고 있는 현실은 바로 우리 개개인의 심중에 진리를 존중하게 받드는 신앙심이 없는 데 기인한다. 진리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각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주관적인 입장에서 진리를 체 받고 모시는 것은 진리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학적 이해와 종교적 신앙이 병행될 때 비로소 바른 믿음과 바른 앎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러한 正信 正覺을 기초로한 참된 마음바탕과 생활기조 위에서 올바른 진리 실천도 나오게 된다. 대종사께서는 법신불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게 함으로써 종교적 진리신앙의 길을 열었고, 법신불사은을 신앙의 강령으로 밝힘으로써 과학적 진리파악과 실제적 실용성의 문을 열게 되었다.

먼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진리는 무엇인가 생각하여 본다. 사람들은 자기 상황에 따라 여러 방향에서 발심하고 신앙하게 되지만 이를 종합하여 보면 ①안정과 해탈을 얻기 위하여 ②완전무결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③구족한 은혜를 얻기 위하여 ④지극한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신앙하게 된다. 구함을 해결해주는 진리는 양면적인 모습을 갖는다. 즉 절대적 하나인 동시에 보편적 다수이며, 본체이면서 현상적이며 영원이면서 순간적이며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이며 불변의 無인 동시에 가변의 有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절대적이요, 근본적인 면을 주체로한 진리 표현을 「법신불일원상」이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보편적이요, 현상적인 면을 주체로한 진리표현을 「법신불사은」으로 하여 신앙의 강령 즉 신앙 방법의 표준으로 세웠다. 법신불일원상은 신앙의 대상이 될 세 가지 방향의 진리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어느 특정인격이나 한 물건을 신앙치 아니하고 우주만유 허공법계 전체를 신앙하는 것으로 이는 개체의 특성을 믿는 것이 아니고 우주만유와 만법의 근원이 되는 원리를 신앙의 대상이 되는 진리로 믿는 것이요 둘째, 모든 형식이나 가식의 신앙을 떠나서 자연계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현상 즉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실체는 곧 법신불의 화현이며 법신불의 권능을 가지고 있음으로 사실적으로 감응할 수 있는 진리를 신앙의 대상이 되는 진리로 믿는 것이요 셋째, 미신적인 토속신앙이나 요행신앙을 떠나서 생사거래 간에 심신작용에 따라 인과응보가 있게 되어 하면 한만큼 되고 가면 간만큼 오는 진리를 신앙의 대상이 되는 진리로 믿는 것이다. 이어 신앙의 강령인 법신불사은의 진리면을 살펴본다. 사은에 있어서의 진리는 인과보응의 진리가 주체가 되고 신앙은 진리적 사실신앙에 연관 지을 수 있다. 우주에 유형무형의 일체 존재자는 진리를 갊지 않는 바가 없으므로 곧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부처요, 불생불멸로 인과보응의 권능을 행사하는 진리이며 죄복을 직접 주재하는 생불인바 우주만유가 생성 발전하는 데 있어 서로 바탕이 되고 근원이 되며 도움이 되어서 피차가 없어서는 생존할 수 없는 관계를 恩으로 천명하여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고 사은을 신앙의 강령으로 정하였다. 사은의 진리면에서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은혜의 진리요, 둘은 보응의 진리이다. 대종사께서는 사은을 정하시고 사은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니 보은하라 하셨다. 사은으로부터 은혜도 입고 해독도 입고하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은혜만을 입었으니 의무적으로 보은하도록 한 것이다. 사은으로부터의 被恩은 한량없는 것이지만 한편 피해의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면 그도 또한 견줄만한 비중에 이른다. 그러나 삼대력을 갖추어 솔성을 순리자연하게 하는 경우 해독과 죄업은 경미한 것이며 그나마 숙세에 지어 놓은 업과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사은의 전체적인 은혜는 은혜다 해독이다 하는 상대적 위치의 은혜가 아니고 大悟의 경지에서 체험할 수 있는 지극한 경지의 은혜를 말한다. 그러므로 사은께서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순역경계에 구애 없이 근본적으로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혜는 진리에 근거한 것이며 또한 사은께서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근본적 진리이다. 사은은 또한 보응하는 진리가 있다. 陰陽相勝의 원리에 의하여 가는 자는 오게 하고 오는 자는 가게하며 惡因은 惡果로 보응하며 강자약자의 진강급과 사시의 순환원리 등은 사은의 근본진리이다. 진리가 무엇인가 추구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참된 믿음과 같이하여야 한다.


조정중 webmaster@wonnews.co.kr

아침숲속 * 마음공부

아침숲속 * 마음공부



마음공부 가이드북/마음공부 연구 논문

아침숲속 2010. 1. 18. 20:54
「마음공부」와 「원불교 마음공부」



1. 「마음공부」가 보편화 되고 있다.


대종사께서는
「천하에 벌여진 모든 바깥 문명이 비록 찬란하다 하나
오직 마음 사용하는 법의 조종 여하에 따라
이 세상을 좋게도 하고 낮게도 하나니,
···················
그러므로 그대들은 새로이 각성하여
이 모든 법의 주인이 되는 용심법(用心法)을 부지런히 배워서
천만 경계에 항상 자리 이타로 모든 것을 선용하는
마음의 조종사가 되며,
따라서 그 조종 방법을 여러 사람에게 교화하여
물심 양면으로 한 가지 참 문명 세계를 건설하는 데에
노력할지어다. 」(대종경 교의품30)라고 말씀하셨고,


정산종사께서는
「사람의 뿌리는 마음이라 무엇보다 먼저
마음공부에 힘써야 훌륭한 인격을 이루나니,
이 마음공부를 여의고
어찌 혜복의 결실을 바라리요.」(정산종사법어 무본편 9장)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급속한 과학 기술의 발달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하였지만
마음의 여유와 평화는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함께 찾아오지 못한 채 오히려 인간 관계가 삭막해지고,
헛된 욕심에 이끌려 더 괴롭게 생활하는 사람들을
언론 매체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풍요가
꼭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어서 인지
사회에서는 점점 ‘마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어렴풋이 나마 ‘혜복의 결실을 얻으려면
사람의 뿌리인 마음을 알고,
또 마음공부를 해서 훌륭한 인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 것이지요.


이에 따라 여러 영성단체에서도 ‘마음공부’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각 영성단체의 이념에 따라 ‘마음공부’의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음을 맑히고 밝히는 도덕사업을
여러 곳에서 함께 하게 되었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공부’의 수요자 입장에서는
시장에서 제품을 고를 때처럼
각 영성단체에서 내어놓은 ‘마음공부’의 특성을 잘 파악하여
가장 실용적이고 효율성 있는 공부길을 잡아
꾸준히 공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원불교 마음공부」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나?


「원불교 마음공부」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원불교 마음공부」는
성리(性理) 즉 대소유무의 이치에 바탕하여(性理大全)
남·녀·노·소·선·악·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실생활에서 마음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법을 밝히고 있습니다.



1) 우주 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 성품의 원리인
       대소유무의 이치를 실생활에 그대로 활용한다.


「원불교 마음공부」는
우주 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 성품의 원리인
성리를 대·소·유·무(大·小·有·無)로 밝혀서
성품의 대소유무의 이치를 그대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대소유무의 이치의 의미를 살펴보면
대는 진공, 빈자리, 소는 천차만별 나타난 자리,
나타난 그것이 무한하게 변화하는 것이 유무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대·소·유·무로 나누어 본다면
한 생각 나오기 전을 大(眞空)=분별이 없는 자리, 변함이 없는 자리....
한 생각 분별하여 나올 때가 소(妙有)=분별이 나타나서, 차별이 생겨나며...
나온 그 생각이 취사선택으로 죄복간 변화되는 것을
有無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은현자재 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그러나 한가지 유의할 점은
대·소·유·무의 이치에 바탕하여 마음공부 할 때
대·소·유·무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대·소·유·무가 양면적이고 동시적이라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심지(心地)를 흔히 요란함·어리석음·그름을 없다고 하는데
대종사님은 대소유무의 원리로 원래 요란함·어리석음·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자리란 대소유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대소유무의 분별이 없는 자리라고 하셨습니다.

정산종사께서는 도운편 31장에서
「불교의 진수는 공(空)인 바
      그릇 들어 가면 공망(空妄)에 떨어지며,
유교의 진수는 규모인 바
      그릇 들어 가면 국집하며,
도교의 진수는 무위 자연인 바
      그릇 들어 가면 자유방종에 흐르며,
과학의 진수는 분석 정확인 바
      그릇 들어 가면 유(有)에 사로 잡혀 물질에만 집착하나니,
이 네가지 길에 그릇 들어가지 아니하고
모든 진수를 아울러 잘 활용하면
이른 바 원만한 법통을 이루며 원만한 인격이 되리라.」하셨는데
네가지 길(불교·유교·도교·과학의 진수)에 그릇  들어가는 원인은
바로 대소유무의 이치를 따로 떨어진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대소유무가 양면적이며 동시적이라는 사실을 놓쳤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품이나 심지, 자성, 진리를 이야기할 때도
성품은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는 자리,
고요하고 텅 빈자리라는 무언가 깊은 수행을 통해
깨쳐야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관념에 잡혀있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요란한 마음이 일어남은 수행의 미숙이요,
참 마음이 아니므로 빨리 없애려하고 (-없게 하는 것으로서...)
세우고 돌려야 한다는 데 많이 걸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품은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건마는(大=眞空)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小=妙有)
그 마음을 통해 공부하여 변화되는(有無=造化) 것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마음이 아니라 한마음입니다.
대종사께서는
「사람의 성품은
정한 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無善無惡)
동한 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能善能惡)」(대종경 성리품 2장)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품은 없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닌
원래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것입니다.
밉고, 예쁘고, 옳고, 그르고, 화나고, 짜증나고,
즐겁고 등등으로 변화무쌍하고 다양하게 나타나는 마음은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그대로가 온전한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천지의 일기도 어느 때에는 명랑하고
어느 때에는 음울한 것과 같이,
사람의 정신 기운도 어느 때에는 상쾌하고 어느 때에는 침울하며,
주위의 경계도 어느 때에는 순하고 어느 때에는 거슬리나니,
이것도 또한 인과의 이치에 따른 자연의 변화라,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그 변화를 겪을 때에
수양의 마음이 여여하여 천지와 같이 심상하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그 변화에 마음까지 따라 흔들려서
기쁘고 슬픈 데와 괴롭고 즐거운 데에
매양 중도를 잡지 못하므로 고해가 한이 없나니라」(대종경 인과품 6장)
라고 말씀하셨습니다.(中道, 圓滿, 八正道)
그러므로 무시선법에서도 ‘사람이 만일 참다운 선을 닦고자 할진대
먼저 마땅히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삼으라’ 는
원리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회문에서도 이참과 사참의 원리로 참회하는 것입니다.

항상 마음이 즐겁고, 양보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따라 화나고, 짜증나고, 미워하는 마음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
인과의 이치에 따른 자연의 변화이며 마음의 원리입니다.
다만 
그 어떤 것이 마음을 통과하더라도
그것을 간섭하지 않고
그 있어지는 마음에
끌리는지 안 끌리는지 잘 살피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란한 만큼 마음공부하면 정력(定力)이 쌓이고,
어리석은 만큼 마음공부하면 혜력(慧力)이 밝아지고,
그른 만큼 마음공부하면 계력(戒力)이 얻어집니다.

일어나는 마음과 내는 마음은 다릅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모든 성인들이
아만심(我慢心),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을
내지 말라 했지, 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정전 교의편 일원상의 신앙에서도
일원상의 진리를
대소유무의 분별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로 믿으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믿으며,
그 없는 자리에서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며,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믿으며,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을 믿으며,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을 믿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하고 깨끗한 것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더러운 마음도 생겨납니다.
다만 보조국사가 수심결에서
“생각(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침(대조)이 더딤을 두려워하라.”하며,
또 이르되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치라. (앗! 경계다)
깨치면 곧 없어진다.”하였듯이(신앙=이완)
경계따라 있어지는 마음을
공부만 하자는 것입니다.(믿는 것이 곧 일원상의 신앙=처처불상)

「원불교 마음공부」는 이처럼
우리 성품의 원리인 성리를 대소유무로 밝혀서
온통(性理大全) 활용하면서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치를 보는데 걸림이 있으면
    대소유무로 풀어가고
일을 하는데 걸림이 있으면
    시비이해로 풀어서
    (의두는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이며
     과거 불조의 화두 중에서 의심나는 제목을 연구하여 감정을 얻게하는 것.)
실생활에 다달아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은 一切唯心造 時代가 아닌
用心法 時代에는
이치의 대소유무와 일의 시비이해로 공부하지 않으면
어리석다(愚)고 하셨습니다.
(愚라 함은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전연 알지 못하고 자행 자지함을 이름이니라.)



2)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대도를 체험하고 깨치도록 한다.

대산종사님께서는 청년 회원들에게
“『팔만대장경을 설해 주신 부처님의 근본 뜻과
  칠대교서(七大敎書)로 가르쳐 주신 대종사님의 근본 의의를
  한말로 표현해 보아라.』
『공(空)입니다.』
『그럴듯하다. 부처님께서는
 일체가 다 마음의 짓는 바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셨다.
 대종사님께서는
「마음을 잘 쓰라. 용심법(用心法)」이라고 하셨다.

 마음 하나 잘 쓰면
 그 사람은 가정에 있어도 성공하고,
 국가에 있어도 성공하고,
 어디에 가도 그 사람은 성공한다.”(대산종사 법문 수행편 1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의 用心法 性理의 특징, 마음공부의 특징은
바로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실지로 훈련하여
구전 심수(口傳心授)의 정법 아래
사람사람이 그 대도를 체험하고 깨치도록 하였다는 점입니다. (대종경 수행품22)
이에 비하여 과거 일체유심조의 佛敎 經典인 팔만 장경은
성리를 많이 아는 것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性理(마음의 원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지만
실제 생활에서 쉽게 원리를 알아 마음을 사용하기에는
내용이 번거하여 공부길을 잡는데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대종사님의 用心法 性理는
쉬운 말로 그 원리를 밝힌 데에 차별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부인들은 삼가 많고 번거한 옛 경전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마땅히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뛰어난 역량(力量)을 얻은 후에
저 옛 경전과 모든 학설은 참고로 한 번 가져다 보라.
그러하면, 그 때에는 십년의 독서보다
하루 아침의 참고가 더 나을 것입니다.(대종경 수행품 22장)


원불교의 마음공부인
대종사님의 用心法 性理는
‘우주만물의 본래 이치와
우리 자성의 원리를 해결하여 알자는 것’입니다.
과거 일체유심조의 佛敎 性理는
성리를 많이 알아서 해결 할려고 하였는데
원불교의 성리는 원불교 교리 전체가 一圓 性理이므로
유무식 남녀노소 선악귀천이 없이
法 대로 하면 일상 생활(경계)속에서
해결하여 알아 집니다.(=운전하듯)
성품의 대소유무 이치를 그대로 실생활에 활용하는 사람이
원만한 공부인 입니다.(人道上 要法=性理 大全)




3. 「원불교 마음공부」는 어떻게 하나요?
         -通萬法 明一心의 공부법 <일상수행의 요법>


대산종사께서 ‘대종사님은 교리 전체를 성리화시켜
주물주물 온갖 복혜를 다 만들도록 해주셨다.
이 또 대자대비가 아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듯이
원불교는 교리 전체가 성리입니다.
정전 교리도를 보면 일원상 밑에 사은사요 삼학팔조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이 다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교리 전체가 성리이기 때문에
일원 성리를 알면 모든 교리의 참뜻이 다 통하고
또한 교법으로 사는 분은 바로 성리로 사는 분입니다.

원불교 성리 공부는 삼학 공부로써 하게 됩니다.
우리 성품의 원리가 진공 묘유 조화(空圓正)의
세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 세가지 속성을 삼학으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정신수양으로 성품의 빈자리(진공)를 잘 지키고 기르며
사리연구로 성품이 밝고 밝아서
모든 분별과 차별이 나타나는 자리를 잘 알고 깨달아서
작업취사로 성품의 변화무쌍한 조화(造化)의 자리를
잘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원불교 교리 전체는 우리 성품의 원리를
온통(性理大全) 활용하면서 살 수 있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마음의 원리(性理), 대소유무의 이치인 성리(性理)를
가장 쉽게 실생활 속에서 해결하여 알게 해주신 법문이
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입니다.
一圓相의 진리, 신앙, 수행, 서원문, 법어의
큰 역량을 실생활 속에서 해결하여 알아가는
一圓 性理로 마음공부의 기본이고, 기초 공부가 되어
通萬法 明一心, 明一心 通萬法의 원리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마음공부는 見性을 중요시하였지만
새 시대는 견성보다 원만한 심법(대소유무)이 중요한 시대이므로
(법강항마위는·····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으며,
출가위는······대소유무의 이치를 따라 인간의 시비이해를 건설하며, -법위등급
佛供하는 것을 보면 견성한 것을 안다 -대산종사
견성유무는 事事佛供에서 확인
       대종사님은 [정전]에서 見性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심.)


[일상수행의 요법]을 생활 속에서 대조하여
通萬法 明一心하는 공부를 할 때
수행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한 수행이 되어져서
삼학이 3가지 과목이 아니며,
(우리가 경전으로 배울 때에는
삼학이 비록 과목은 각각 다르나,
실지로 공부를 해나가는 데에는
서로 떠날 수 없는 연관이 있어서
마치 쇠스랑의 세발과도 같나니,-대종경 수행품 21)
팔조가 8가지 조목이 아니며,
솔성요론 16조가 16가지 조목이 아니고
삼십 계문이 30개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한 마음 밝히는 한가지 공부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많고 번거한 경전을 통해
문자화되고, 고정된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자신에게 벌어지는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을 공부하므로
실제 생활 속에서 깨치고 쉽게 응용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많고 번거한 모든 경전을 읽기 전에
먼저 이 현실로 나타나 있는
큰 경전을 잘 읽도록 부탁하노라. -수행품23)


영문법을 공부만 하다보니,
궁극적 목적인 영어 회화가
말을 먼저 배운 어린이들 보다
더 서툴고 두렵고 안 되듯이
우리 기성 세대가 마음 공부하는 것도
어린이들처럼 쉽고 간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교리를 마음공부를 통해 하지 않아
오히려 교리 때문에 마음공부에 어려움이 더 많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지식적인 사고가 절대 가치로서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힘이 되었지만
또한 한계이기도 하였습니다.


萬法을 공부만 했지
通萬法 明一心 공부가 약해서
항상 교리와 수행에 대한 가난과
지적인 교리 해석의 사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은
교리와 모든 법들이
결국 마음 공부를 통해 한 마음을 밝힐 수 있게 하여
明一心 通萬法 공부로
진리적이고 사실적인 우리의 실명화된,
생활법에 대조하는 마음공부입니다.


정산종사께서
?天下의 大道는 簡易하나니,
공부길을 잡은 이는 팔만장경을 단련하여
한두어 마디로 강령잡아 실행하나니라.?(정산종사법어 법훈편 8장)
라고 말씀하셨듯이
일상수행의 요법은
생활 속에서 실행할 수 있도록 내어주신 강령입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이 너무 간이하여
가볍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종사께서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그 뜻을 새겨서 마음에 대조하여
대체로는 날로 한번씩 대조하고
세밀히는 경계를 대할 때마다 잘 살피라?고 하셨으며,
(‘앗! 경계다’
=경계를 대할 때마다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잊지 말고 - 무시선법
=here & now
=순간마다 공부 챤스 경계마다 공부거리-좌산종법사)


정산종사께서는 
?참다운 자성 반조의 공부는 견성을 하여야 하게 되지마는
견성을 못한 이라도 신성 있는 공부인은
부처님의 법문에 의지하여 반조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바,
그 요령은 정전 가운데 일상수행의 요법을 표준하여
천만 경계에 항시 자성의 계 정 혜를 찾는 것이요?라고
하셨으며,
대산종사께서는
?일상수행의 요법에
전 생령이 구원을 받는 삼학팔조와
세계 평화의 근본인 사은에 대한 보은 불공생활과
온 인류가 서로 잘 사는 묘방인 사요?가
다 담겨있다고 하셨습니다.



4. 「원불교 마음공부」와 사회운동은 둘이다?


마음공부를 혹 한 개인의 공부같이 여길 수 있지만
자신의 마음공부를 근본으로 하여
세상을 밝히는 지혜와 힘을 기르는 공부가
마음공부입니다.(一心은 宇宙의 中心-大山-,응용하는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 하기를...,
                    개인에 비치면 개인이 도움을 얻고, 가정에..., 사회에..., 국가에..., 세계에...
                    자력은 타력의 근본, 타력은 자력의 근본)


정산종사께서는
?측량하는 사람이 먼저 기점을 잡음이 중요하듯이
우리의 공부 사업에도 기점을 잡음이 중요하나니,
공부의 기점은 자기의 마음공부에 두고,
제도의 기점은 자신의 제도에 둘지니라.
그러나 자신을 다 제도한 후에 남을 제도하라는 말은 아니니
마음공부에 근본하여 모든 학술을 공부하고,
자신 제도에 힘쓰면서 제도 사업에 힘을 쓰라 함이니라.? (정산종사법어 무본편 13장)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 5조에서 9조까지에 ‘돌리자’라고 하였는데
경계따라 있어지는 것(요란함,어리석음,그름,원망 생활,...공익심 없는...)을
무조건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 경계를 마음 공부로 돌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원리가 대소유무로 되어있는 것을 알기에
‘아! 원래는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것이구나’하고
그 마음 그대로 받아들이고 신앙(일원상의 신앙=대소유무)하여
감사 생활 하고자 하는 내가
원망 생활하는 나를 불공의 대상으로 삼아 돌리는 것입니다.
일상 수행에서는 돌리는 기쁨, 돌리는 재미, 돌리는 힘이
곧 신앙의 힘이 됩니다. (일원상의 신앙=전체 신앙=처처불상)
        (‘아는 사람 책임이고, 힘 있는 사람이 아쉬운 것입니다’-大山)
사회 운동 또한 마음 공부를 통한 신앙 없이
사회와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만 하면
서로서로 반목하며 상대방을 비난하는 마음만 자라나서
오히려 참다운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산종사께서는
?불공에는 자기 불공과 상대 불공이 있는 바,
이 두가지가 쌍전하여야 하지마는
주종을 말하자면
자기 불공이 근본이 되나니,
각자의 마음 공부를 먼저 하는 것은
곧 불공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니라.?
(정산종사법어 권도편 13장)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마음을 비운 만큼 은혜롭고
내가 은혜를 느낀 만큼 마음은 비워지는 것입니다. (無我=大我)


감사 생활하는 사람(경우에는)은
원망 생활하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대 우주만유 불공)
    원망 생활하는 사람(경우에는)은
    감사 생활하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자력 생활하는 사람(경우에는)은
타력 생활하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타력 생활하는 사람(경우에는)은
    자력 생활하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잘 배우는 사람(경우에는)은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배울 줄 모르는 사람(경우에는)은
   잘 배우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잘 가르치는 사람(경우에는)은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경우에는)은
   잘 가르치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공익심 있는 사람(경우에는)은
공익심 없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아
   공익심 없는 사람(경우에는)은
   공익심 있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아(대 인류 불공)

서로서로 신앙하며 불공할 때
비로소 대립이 사라지고
은혜롭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大山 宗師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法대로 하면,  1-4조는 大 中和力
 5조는 大 感化力,  6-9조는 大 均等力이 나온다.>하셨습니다.  



5. 「원불교 마음공부」는 ‘마음대조공부’


「원불교 마음공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원불교 마음공부」의 특성은
성리(性理) 즉 대소유무의 이치에 바탕하여(性理大全)
남·녀·노·소·선·악·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실생활에서 마음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법을 밝히고 있으며,
원불교 교리 전체는 우리 성품의 원리를
온통(性理大全) 활용하면서 살 수 있게 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불교 마음공부」는 ‘마음대조공부’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마음을 사용할 때는 대소유무의 이치에 대조하고,
진리를 공부할 때는 ‘일원상의 진리’에 대조하고,
신앙의 길을 찾을 때는 ‘일원상의 신앙’에 대조하고,
수행의 어려움을 느낄 때는 ‘일원상의 수행’에 대조하고,
서원에 반조할 때는 ‘일원상 서원문’에 대조하고
일상 생활 속에서 공부해 나갈 때는 ‘일상수행의 요법’에 대조하고,
참회할 때는 ‘참회문’에,
불공을 할 때는 ‘불공하는 법’에 대조하는 것입니다.
교리 전체가 우리의 마음의 원리인
대소유무의 이치에 바탕하여 짜여졌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법대로 대조만하면 됩니다.


「원불교 마음공부」는
막연히 마음을 공부하는 아니라
법대로, 대소유무의 이치에 자신의 마음을 대조하여
공부해 나가는
‘마음대조공부’라는 것에 그 차별성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 작용 하나하나에서부터
진리, 신앙, 수행, 서원과 생활 속에서 생기는
수행상의 모든 것을
확인 받고 공부길을 잡아갈 수 있는 공부법이야말로
마음공부를 통해
마음의 자유와 행복을 얻으려는 공부인들에게
가장 쉽고 바른 공부가 될 것입니다.


 글 : 박선태 교무



출처 : 원불교용원교당
글쓴이 : 원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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