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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5

일본 천황가는 단군(檀君)의 후손이다[2] < K스피릿 2010

일본 천황가는 단군(檀君)의 후손이다[2] < 문화 < 기사본문 - K스피릿

일본 천황가는 단군(檀君)의 후손이다[2]
K스피릿
입력 2010.09.09 16:05기자명홍윤기 석좌교수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지 100년을 맞은 치욕의 8월29일에 이번 두 번째 원고를 쓰고 있다. 아직도 일본은 그들이 저지른 불법 침략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터무니없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어 우리 국민을 분노시키고 있다. 그들이 언제까지 강제 병합을 버틸 것인가.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조상이 일찍이 상고시대 일본 땅에 공고하게 심었던 우리 국조 단군왕검의 천신 신앙에 대한 역사를 바로 익히도록 힘쓰자.



▲ 일본천황이 대상제 때 입는 즉위복 오른 쪽(마주볼 때) 어깨의 해신(日神)의 상징인 우리 동이(東夷) 민족의 ‘삼족오’를 일본의 황국신도주의자들은 엉뚱하게도 ‘야타노가라스’(八咫烏)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 미에현(三重縣)에 있는 왕실 최고의 사당 이른바 국가 신도의 성전이라는 이세신궁을 세웠을 때 본래 이곳에 모신 신은 단군왕검을 신봉하던 조선신(朝鮮神)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그 터전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주신으로 삼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와 같이 역사를 뒤집은 것은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역사를 조작한 ‘황국신도(皇國神道) 2천 6백년 만세일계의 천황’이라고 하는 역사 날조 당시의 처사였다. 그들은 일본 이세신궁의 단군 신앙을 말살하면서 천조대신을 신주라고 위작(僞作)했다. 대다수 일본인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으나 그것은 너무도 큰 반역사(反歷史)의 죄악이다.

19세기 말엽, 도쿄대학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 교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주신은 본래 부여의 영고신(迎鼓神), 고구려 동명신(東明神), 예(濊)의 무천신(舞天神) 등등 조선신(朝鮮神)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숨기고 천조대신을 주신으로 삼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神道は祭天の古俗/신도와 제천의 옛 풍속]1891).

이 논문에 당황한 일본 군국주의자들(倉持治休 등)은 구메 구니다케 교수댁을 기습하여 일본도(日本刀)를 교수의 목에 들이대고 논문을 취소하라고 협박했다. 교수는 끝내 그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옳은 것은 옳다.”고 주장했다([東京日日新聞] 1982. 3. 4일자).

살벌하기 그지없던 19세기 말엽 군국주의 치하에서도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학문의 자유와 양심에 입각한 이성적이고 냉철한 연구론을 발표했으나 극단적인 극우 반한 세력들의 가택 습격까지 받은 것이다. 일제 군국주의자들은 강압적으로 구메 구니다케 교수를 도쿄대학의 현직 교수직에서 추방하고야 말았다. 그뿐 아니라 논문을 게재한 학술지 <사학회잡지>와 <사해>는 판매금지 처분했다. 당국의 압박뿐 아니라 황국 신도가며 극우 역사가는 박사를 불경이라 매도하며 황실(皇室)의 이름을 빌어 사회적 압박을 가했다.”(무카사카 이쓰로 向坂逸郞[嵐のなかの百年/폭풍 가운데 백년‥學問彈壓小史]1962). 이렇듯 극단적인 황국 신도가들은 조선 단군 역사 말살책에 광분했다.





구메 쿠니다케 교수, “이세신궁은 본래 단군 받드는 조선민족의 모든 신을 제사모셔온 사당”발표후 핍박받아





▲ 평남 용강읍 5~6세기 벽화 고분인 고구려 고분[쌍영총] (전실 천정 연꽃 아래쪽 우측 옆의 삼족오 그림)



근년에 와서도 황국사관은 한일관계사를 부당하게 왜곡하고 있어서 양식 있는 일본역사 학자들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가토 아키라(加藤 章) 교수는 “생각하자면 전후사(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 속에서 역사교육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은 ‘황국사관’으로부터 껍질을 벗는 데서 시작되었다. 과거의 국사교육(일본 강점기의 잘못된 신도주의 황국사관 교육, 필자 주)에 대한 틀 바꿈이 시행되었으며 그 후에 학습 지도요령이 거듭하여 개정되었다.

그러나 역사교육의 목표나 내용에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 특히 이웃 나라이면서 과거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한국과의 관계에서 일본 측으로서는 자각적으로 충분한 검토를 하는 일이 시행되어 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철저하게 행해진 일본 제국주의 비판 하에서 자라난 세대와 일본의 전후세대 사이에는 한국에 대한 역사교육에서 커다란 간격이 벌어지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라고 견해를 피력했다. (논문<日韓歷史敎育交流のなかで/일본과 한국 역사교육교류에 대하여>, 1993).

<일본서기> 기사에서 천일창왕자가 신라로부터 일본에 건너갔다는 것은 신라 왕실과 신라계 스진왕가의 밀접한 혈연관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지금도 일본 각지에는 천일창왕자의 신주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들이 곳곳에 많아 그 당시 천일창의 존재가 왕에 필적하는 신분이었음을 살피게 한다.” (다니가와 겐이치 谷川健一 [靑銅の神の足跡] 集英社, 1979). 그렇다면 과연 그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연오랑인가라는 추찰도 동시에 앞으로의 연구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곰신 신앙은 곧 한국 고대의 단군 신앙(檀君信仰)인 동시에 천손(天孫) 신앙

천일창 왕자에 의하여 일본에 천신 제사 의식이 등장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곰신단(熊の神籬)을 가리켜 18세기의 저명한 고증학자 도데이칸(藤貞幹, 1732~97)은 그의 역사 고증 저서인 [쇼코하쓰]([衝口發],충구발)에서 다음과 같이 신라의 신앙 체계라고 단정했다. “곰신단(熊の神籬)의 신리(神籬, 히모로기)는 후세의 신사(神社, 사당)이니라. 무릇 신리는 그분의 몸으로 삼아 제사 드리는 분을 모시는 물건이로다. 신리를 ‘히모로기’(比毛呂岐)라고 새겨서 읽는 것은 본래 신라말(新羅語)이며, 신라어를 그 당시 일본에서 빌려서 쓰게 된 것이로다. 천일창이 가지고 온 곰신리도 천일창이 조상을 신주로 모신 것임을 알아둘 것이다.”


이처럼 도데이칸은 곰신 신앙은 곧 한국 고대의 단군 신앙(檀君信仰)인 동시에 천손(天孫) 민족인 한국 민족의 조상 단군을 섬기는 신앙의 발자취를 천일창의 곰신단을 통해서 지적하고 있다. 더구나 주목되는 것은 신라의 ‘이두(吏讀)’가 일본 고대에 일본어 표기법으로 처음 등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실은 이두에 의하여 일본말의 한자 표기법인 ‘만엽가나(萬葉假名)’가 일본에 생겼다는 것은 일본강점기 서울의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과 오구라 신페이(小倉新平) 교수가 밝힌바 있다. ([吏讀の硏究], 1925).



해마다 11월 23일 저녁이면 곰신단에 의해 일본 고대왕실 신상제(新嘗祭) 제사에 조선신 신주들 세분을 모셔오고 있는 것이 오늘날까지 일본 황실의 왕실법도(<延喜式 연희식> 전50권, 927년)에도 밝혀져 있다. 즉 ‘한신韓神’이라는 제목의 축문에는 원신(園神, 신라신) 한 분과 한신(韓神, 백제신) 두 분의 신주를 제사 모시며 현재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 겨레가 동이(東夷)이며 고조선과 부여(扶餘, 만주 벌판)시대에 천신(天神)에게 추수를 감사하고 제사 지낸 영고(迎鼓)며, 고구려 때의 동맹(東盟.東明)이나 예의 무천(舞天), 마한의 10월제 등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 거행했던 제사축제였다. 농본(農本)시대에 가장 고맙고 또한 두려운 존재는 하늘의 조상인 천신이었기에 결코 잊지 않고 외경하며 숭앙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농경시대는 햇빛과 비를 잘 내려주시는 ‘풍백, 운사, 우사’등 우리의 하늘 신을 우러렀고 쇠붙이를 달구어 삽, 괭이 따위 농기구며, 전쟁 도구로서 칼이며 창을 만드느라 대장간을 세웠다.

“천일창은 대장간이며 철기(鐵器)문화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왔다.”(다니가와 겐이치谷川健一 [靑銅の神の足跡])고 했거니와 곰신단을 모시고 아울러 전쟁 도구인 칼을 가지고 왜(일본)로 건너갔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강력한 무력이었으며 현재까지도 천황가의 신보인 옥과 거울도 가지고 건너감으로써 왕도(王道)를 형성하는 삼박자를 빈틈없이 갖추었던 것이다.

그가 신라인 스진왕조의 제2대 왕인 스이닌천황에게 찾아갔다는 것은 스이닌천황을 신라 왕족으로서 승인하고 일본 열도의 신라인 정복 왕조를 공고하게 떠받쳐 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고대 한국인들이 하늘의 신 환인(桓因) 등 천신(天神)의 후손인 천손족 (天孫族)이라는 것은 중국 고대 역사인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등으로도 밝혀진 바 있다. 그 점은 일본 <고사기>의 신대(神代) 기사 등과 함께 일본 고대 사학자들의 공론이기도 하다. 왜나라 최초의 정복왕인 스진천황의 숭신(崇神)이라는 휘(왕의 이름)에도 ‘신을 숭배한다.’는 천신신앙사상(天神信仰思想)이 구체적으로 내포되어 있음을 본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우(水野 祐) 교수는 천일창왕자가 스진왕조 때 칼이며 옥과 거울 등 신보(神寶)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데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칼은 옛날부터 일찍이 금속기(金屬器)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옛날 귀화인계의 대장간 기술자 집단, 이를테면 천일창 전설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신라계 귀화인들의 신보(神寶)였다고 생각한다. 옥과 거울과 칼이라는 신보(神寶)를 천황이 갖추어서 갖는 데서 비로소 주권의 표상으로서 ‘삼종의 신기’(三種の神器)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고 단정했다.(水野 祐[天皇家の秘密/천황가의 비밀] 山手書房, 1977)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단군의 천신 신앙과 고대 일본 지배의 왕가 형성을 진솔하게 시인하는 증언이다. <계속>

홍윤기 석좌교수 ykhong@ub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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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u○○ (so**) 2010-09-27 16:09:33 IP무서운 교육의 힘 외곡된 사실도 교육을 통해 진실로 탈바꿈하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합니다.답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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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비게○○ (bi**) 2010-09-26 06:39:23 IP천손문화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 한국과 일본의 뿌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천손문화를 통해 진정 하나됨을 위하여.. 국혼의 부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대한민국의 홍익대통령이 국민들의 손에 의해 창조될 것을 확신합니다.답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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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돌○ (tl**) 2010-09-25 18:10:06 IP단군할아버지의 당당함과 자랑스러움을 한국에서 더 많이 알고 기리길 기원합니다.답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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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속○ (jh**) 2010-09-25 13:11:09 IP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1인!답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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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보○ (se**) 2010-09-24 17:40:12 IP일본 축구 대표팀 유니폼에도 삼족오가 있더라구요~^^ 근데.. 일본선수들은 그 의미를 모른다는거/??ㅋㅋ답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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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 (jd**) 2010-09-24 16:33:18 IP그렇군요.. 우리의 역사가 그곳에 있었군요답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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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a○○○ (비회원) 2010-09-24 15:53:59 IP삭제일본이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실제 실물로 많이 보유하고 있슴을 천손 문화 탐방을 통해서 직접 확인 한 나 이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뿌리가 한국인 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문화 유적 역시 한국인 천손으로 부터 세워진 문화임도 모른채 살고 있는 민족이다. 그것보다도 한국의 더 큰 문제는 바로 우리의 "민족혼"이 없다는 것이다. "민족혼"을 되 살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제대로 찾읍시다.답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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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 (비회원) 2010-09-16 18:08:57 IP삭제자신의 뿌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미래를 개척하는 기반이 된다. 이러한 왜곡은 결국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평화의 에너지가 아닌 반목과 대립으로 향하게 한다. 결국 일본이라는 나라의 미래는 자신의 과거 왜곡으로 인해 자신을 치고 주변을 치는 마이너스 에너지를 행하게 된다. 큰 의식으로 스스로를 인정하고 포용했으면 한다. 그것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첫 출발점이 될 것이다.답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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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비회원) 2010-09-13 23:34:46 IP삭제단군의 자손이면 뭐합니까, 우리민족에겐 가장 큰 죄인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천왕이라는 호칭을 써줄 필요도 없습니다. 일왕이면 족합니다.답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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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비회원) 2010-09-10 20:49:10 IP삭제일본의 극우파 들은 인간이기를 거부한것인가? 어찌 부모와 조상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인가? 물론 우리나라에도 그런 인간들이 있으나, 그 인간들의 뿌리는 일본의 식민사관에서 비롯된것. 일본은 처절하게 반성하고 사죄하며 보상해야 할것이다.답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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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s○○○ (비회원) 2010-09-10 09:30:02 IP삭제사람이 아무리 못되어도 양심이라는것이 있습니다
극우파들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일본을 있게한 일본의 뿌리는 바로 단군이고 백제,고구려,신라임을 잊지 말아야 할텐데

일본 천황가는 단군(檀君)의 후손이다[1] - K스피릿

일본 천황가는 단군(檀君)의 후손이다[1]  - K스피릿

단군조선의 제후국 왜국(倭國)
기자명 고성시사신문  승인 2017.04.28 0

서 재 순
삼산면 병산리

 우리 조상들이 세운 세계 역사상 첫 국가 형태인 환국에 이어, 배달국,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우리겨레에게는 이(夷) 또는 예맥(濊貊)이라는 별칭 외에도 가락(伽倻), 구리 또는 구려(겨레, 갈래 종족, 나라, 성스러움의 뜻)라는 별칭도 있어 이것이 후에 고구려, 고려로 이어졌음은 반복해사 밝힌바 있다. 우리의 이족(夷族)중에도 여러 갈래가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백이(伯夷)다. 이 백이족은 몸에 문신을 새기고 옛날 발해 지역에 살다가 동쪽의 섬으로 흘러 들어가 살았다. 왜인의 본류는 위(魏)나나의 후예들이고 후에 진한과 마한 사람들 일부가 합류한 집단으로 나중에는 백제인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나중에 섬으로 이주한 왜인들은 가죽신을 신고 벼를 심고 모시로 길쌈을 했으며 뽕나무를 길러 누에를 쳤다. 그리고 생강, 귤, 후추, 들깨 등을 생산했다. 이 밖에도 그들은 청옥, 흑진주, 꿩 등을 생산하거나 사냥했다. 단군조선에서 맨 처음 일본 규슈(九州)지역으로 흘러 들어간 사람은 협야노(陜耶奴)다. 기원 전 2174년 가륵단군(嘉勒檀君 3세 단군)때에 예읍의 추장 소시모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단군은 대장군 여수기(余守己)에게 토벌을 명했다. 여수기는 며칠 동안 소시모리를 추격한 끝에 예 땅의 변방에서 반란군과 일대 격전을 벌여 소시모리를 격파했다. 이 때 소시모리의 참모 협야노는 격전의 틈을 타 부하 서너 명을 데리고 도망을 쳤다.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서봐야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협야노 일행은 여수기의 추격을 피해 육로를 버리고 바다를 택했다. 조각배에 몸을 싣고 성난 파도에 맞선 것이다. 한 달 동안 항해한 후 낮선 섬에 닿았으니 이곳이 삼도(三島: 九州)이다. 그 곳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벌거벗은 몸으로 몸에 뱀, 들쥐 등의 문신을 새기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고 있었다. 키는 작고 허약해 보이는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흔히 ‘왜놈’ 하면 키 작고 볼품없는 사람을 연상하는 것이 여기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왜인(일본인)들은 우리와 같은 조선인들의 후손이니 키가 작거나 못난 사람들은 아니다. 협야노 일행은 그들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대륙에서 익힌 무예 실력을 한껏 발휘하면서 그들을 위압하자 그들은 협야노의 말을 잘 따랐다. 씨 뿌리고 가꾸는 법을 그들에게 가르치고 풀잎으로 옷을 만들어 앞을 가리도록 했다. 원주민들에게 대륙의 생활습관을 알려주자 그들은 순순히 협야노를 따르고 존경했다. 협야노는 삼도에 처음으로 소도(蘇塗)를 마련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스스로 삼도의 천황위에 올랐다. 원주민들은 협야노를 천황으로 받들고 복종을 맹세했다. 이렇게 하여 협야노는 조선족이 왜를 정복한 첫 번째 인물이 된 것이다. 삼도의 인구가 점차 늘어났다. 이웃나라나 섬에서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삼도로 흘러들어 정착하는 인구가 점점 늘고 있었으니 이들을 하이도인(蝦夷島人)이라 불렀다.
 구 후 기원 전 723년 삼도에 단군조선의 특사가 파견되었다. 원주민과 하이도인 사이에 반목이 생겨 원주민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소도를 모시고 삼신에 제사 지내는 하이도인들에게 원주민들은 처음에는 고분고분했다. 그러다가 하이도인들이 원주민들을 심하게 다루게 되자 반기를 들게 된 것이다. 원주민들이 소도를 부수고 소도를 위협했다. 협야노가 삼도의 주인이 된 후 처음으로 위협을 받은 것이다. 삼도의 구마소에서는 조선에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특사를 보낸 것이다. 이에 사벌 단군은 오가의 대표들을 모아 파병에 대해 논의했다. ‘삼도는 협야노 장군이 터를 닦은 후 우리의 예법을 숭상하는 조선의 거수(제후)국입니다. 원주민들의 행패에서 우리 배달나라 후예들을 구해야 합니다’ 오가의 의견들이 일치했다. 사벌 단군은 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에게 명하여 선단을 만들어 군선을 띄웠다. 파병 군선은 파도도 없는 바다를 무사히 건너 삼도에 도착했다. 언파불합 장군은 삼도의 해변에 군막을 치고 작전 회의를 열었다. ‘원주민들이 한꺼번에 쳐들어오면 오히려 사움은 쉽게 끝날 수 있습니다. 만일 놈들이 전면전을 피해 기습전을 펴면 이곳 지리에 어두운 우리가 불리합니다.’ 언파불합 장군의 작전참모가 말했다. ‘그렇다면 기습작전에 대비하도록 합시다. 해변의 숲을 감시하고 바다를 이용하여 쳐들어올지 모르니 방심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언파불합 장군은 난장이 같은 원주민들과 싸우려니 우스운 생각도 들었으나 그들은 음흉하고 잔인하다는데서 방심할 일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삼도에서 군막을 설치한 그 날 밤 야음을 틈타 원주민들이 습격해 왔다. 그들이 천막을 에워싸기를 기다려 몰래 숲속에 매복시켜 놓은 군사들에게 북을 쳐 공격을 명했다. 원주민 반란군들은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받아야 했다. 적은 궤멸되고 살아남은 적들은 도망을 쳤다. 언파불합 장군은 지리에 어두운 아군이 실수라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추격을 중단시키고 낮에 적의 진지를 휩쓸어 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척후가 보고한다. ‘궁궐이 있는 산성 밑에 놈들의 진지가 있습니다. 진지는 통나무로 만든 움막 같고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돌도끼와 몽둥이 뿐이었습니다.’ 원래 삼도의 원주민과 원정군과의 싸움은 싸우기도 전에 먼저 승패가 갈린 싱거운 싸움이었다. 그들이 원정군의 칼, 창, 활 등의 무기를 한 번이라도 본 일이 있다면 희생을 무릅쓰고 싸울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원정군이 원주민군 진지를 엄습해 들어가자 원래부터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인지라 금방 진지가 무너졌다. 그리고 그들은 항복했다. 언파불합 장군은 더 이상의 희생자를 내지 않고 반란군 지도자들을 데리고 산성의 궁궐로 들어갔다. 협야노의 후손들과 조선에서 흘러 들어간 하이도인들이 언파불합 장군을 맞아 승리의 축하연을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언파불합 장군은 반란군 지도자들에게 이후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것이 첫 번째 일본에 대한 조선의 원정 기록이다

 그 후 반세기 동안 삼도는 평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 이후 기원 전 617년 두 번째 반란이 일어났다. 또다시 원주민들의 반란인 것이다. 이에 조선에서는 배반명(裵槃命) 장군을 보내어 반란을 진압했다. 이것이 두 번째 원정이다. 그 이후 왜군은 수천 년에 걸쳐 수 없이 조선을 괴롭힌 집단이 되었으며, 고려 말 원나라 통치기간 중 여 . 몽 연합군이 두 번에 걸쳐 일본으로 쳐들어 간 일이 있다. 두 번 모두 전쟁에는 확실하게 이겼지만 거센 바람을 만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 바람을 일인들은 가미가제(信風)라 하여 그 신풍을 일으킨 신에 대한 신앙심을 더욱 굳건히 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느 역사가는 말하기를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역사 이래 수천 번의 외침을 잘 막아내어 이처럼 열강들 틈바구니에서도 잘 버티어왔으며, 단 한 번도 국경을 넘어 외국을 침략해 본 일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민족이라느니 하지만, 위의 전쟁기록 만으로도 사실이 아님을 말해준다. 침략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말은 결국 허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대한 어색하기 그지없는 억지 미화일 뿐, 약자의 변명 치고도 너무 궁색하기만 한 변명일 뿐이다. 우리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북부여, 그리고 삼국 시대 까지 우리겨레는 힘이 넘치는 역동성을 발휘하여 적의 침입에 방어전을 펴는 한 편, 수많은 침략전쟁의 주인공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오히려 더 자랑해야 옳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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