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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3

삶의 절벽에서 만난 스승, 공자 | 이인우 | download on Z-Library

삶의 절벽에서 만난 스승, 공자 | 이인우 | download on Z-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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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다.

아래로 사람을 배워 위로 천명에 이르고자 했을 뿐이다.

하늘만은 이런 나를 알아주시리라.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 _《논어》 <헌문> 37장

나, 이생李生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하늘에 감사드린다. 불초한 몸으로, 한 위대한 인간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행복을 누렸다. 나는 본래 노나라 사람이 아니라 동쪽 바다 건너 청구 땅 동이東夷 사람이다. 이곳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공자孔子께서 세상을 떠난 지 2500여 년 뒤에 태어났다. 어느 깊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친 몸을 공원 그네에 두고 캄캄한 하늘을 무연히 바라보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춘추시대 말엽의 중국이었다.

나는 졸지에 미지의 과거에 떨어져 낯선 시간, 낯선 공간을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을 찾아 열국을 주유하던 공자와 조우하여 그 일행의 짐꾼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 동행하는 동안 나는 미래에서 막연히 알던 공자라는 사람과 그 제자들의 이상을 향한 열정과 선의에 대한 믿음을 교감했다. 그때 가슴을 파고들었던 벅찬 감동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 놀라운 기쁨에 젖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열망조차 잊었다. 아! 나, 이생은 비록 짐을 나르고 교실을 청소하는 어눌한 이방인에 불과하나, 먼 미래로부터 불려 온 것은 한 위대한 사람의 생애를 증거하라는 소명召命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에 나는 감히 스스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려 한다. 부디 이 죽간들이 만고풍상을 견뎌내어 인간 공자의 꿈과 뜻이 온 누리에 퍼지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일러두기


1. 이 책은 공자의 삶과 사상을 소설 형식으로 쓴 것이다. 그러나 책 속의 대부분 내용은 《논어》, 《사기》 <공자세가> 등을 비롯한 원전과 후대 학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공인된 연구결과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야기 전개상 필요한 경우에만 허구적 요소를 가미했다.

2. 이 책에 수록된 〈공자세가〉의 역문은 ‘제자백가 중국철학서 전자화 계획(http://ctext.org/zh)’의 <공자세가> 원문을 저본으로 하였으며 다음을 참고했다. 시라카와 시즈카, 《공자전》, 김하중 옮김(지인사, 1977). 사마천, 《사기 세가》, 김원중 옮김(민음사, 2007). 필요한 경우 필자가 보충한 말이나 짤막한 설명은 ( ) 안에 넣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공자, 위대한 사상의 시작

후세에 공자, 즉 ‘공 선생님’으로 불리게 될 공구孔丘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479년에 죽었다. 고대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공자 사후 388년 뒤에 완성한 불후의 명저 《사기史記》에서 공자의 일생을 ‘세가世家’, 즉 제후의 전기에 포함시켰다. 그는 《사기》 <공자세가>*에서 공자 사상의 위대성과 후세에 미친 영향을 총평한 뒤, 공자를 ‘지극한 성인[至聖]’으로 결론지었다.

* 부록의 번역 전문 참조


나는 공씨의 서를 읽고 그 사람됨의 위대함을 상견했다.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묘당에 있는 수레와 의복과 예기禮器를 보았으며, 여러 유생들이 그 집에서 예를 시습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경모하는 마음에 고개를 숙인 채 배회하며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천하에는 군주로부터 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이 있었지만, 살았을 당시에는 영화로웠으나 죽고 나면 그것으로 모두 그만이었다. 공자는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그 덕이 십여 대에 걸쳐 전승되고, 학자는 그를 종주로 삼고 있다. 천자, 왕후로부터 중국에서 육예六藝를 말하는 자는 모두 선생을 표준으로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최고의 성인可謂至聖이라 할 만하다.1


사마천이 공자를 성인이라고 말하고 나서 또 200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유교 문명권 밖에서도 공자는 수세기 전부터 주목의 대상이었다. 20세기 저명한 중국사가 중 하나인 미국 역사가 헤어리 글레스너 크릴Herrlee Glessner Crill은 서구 세계에 공자의 진면목을 전한 명저 《공자 : 인간과 신화Confucius, the Man and the Myth(1949)의 첫머리를 이렇게 쓰고 있다.


2500년 전 중국에서 태어난 한 사람의 일생처럼 인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예도 없을 것이다.


사마천과 크릴이 시공과 문명의 차이를 초월해 공감한 것은 공자 사상의 위대한 휴머니즘이다. 공자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성의 본질을 이해했으며,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최초의 사상가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던 것이다.

공자는 인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愛人]2

공자의 이런 교육적 언설은 인류 평등의 본질을 고뇌해온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혁명의 외침이나 다름없었다.

공자는 특정한 종교적 교리나 이념을 세우기 위해 자기 생각을 주창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인간다운’ 덕목들을 인간성에서 이끌어내 함양하고자 했다. 그는 위정자는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하며, 백성은 올바른 도리로 교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배자 또는 지도자는 반드시 도덕과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 사람은 지위나 권력이 아니라 도덕적 수양의 정도에 따라 군자와 소인으로 나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생각은 단순한 개인적 수양론에 머물지 않고 현실 속으로 들어가 계급을 초월하여 도덕 중심의 인간관과 사회관을 형성했다.3

공자가 살던 때는 어떤 시대였을까? 기원전 5~6세기 지구촌 곳곳에서는 철학과 종교의 새싹이 돋고 있었다.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피타고라스학파가 처음으로 ‘철학Philosophia’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등장을 예고했다. 중동의 이란 고원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나타나 선악의 투쟁이라는 자신의 세계상을 가르쳤으며,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예수 신앙의 모태가 되는 히브리 선지자들이(엘리아에서부터 이사야, 예레미아, 그리고 제2의 이사야까지) 줄지어 출현하고 있었다. 또한 인도 문명권에서는 힌두경전 《우파니샤드Upanisad》의 형성과 더불어 석가모니가 공자와 거의 동시대를 살며 종국에는 종교가 될 자신의 사상을 전파한 때였다.4

이때의 중국은 이른바 춘추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이미 목가적인 부족 시대도, 왕도王道의 시대도 끝나고, 바야흐로 패권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격렬한 약육강식의 다툼은 훗날의 사가들이 전국시대라 부르는 시기의 서막이었다. 정의가 승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정의를 결정하는 타락과 혼란의 시대 한복판에 공자라는 사람이 서 있었던 것이다.

노나라 곡부 동남쪽에 위치한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난 공자는 이름이 구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아버지 숙량흘은 공자가 세 살 때 죽었으며,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가 20대 초반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10대부터 생계를 떠맡아 창고지기, 목장지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5 공자는 자신이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많은 데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하자 미천한 출신이어서 그렇다고 담담하게 토로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일생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로 요약했다.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주관을 세웠다. 마흔에는 마음의 흔들림이 없게 되었고, 쉰에 이르러 하늘이 부여한 사명을 알았다. 예순이 되니 험한 말에도 웃을 수 있었고,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가는 대로 하여도 도에 벗어남이 없었다.6


공자는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스스로 삶을 개척했다. 그의 말처럼 하늘을 원망하지도, 사람을 탓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쉼 없이 배워서 천리에 통달하려고 한 일생이었다. 그는 서른에 자립한 이래 혼란한 시대를 자신의 이상으로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의 이상은 한 사람의 추구로 실현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그는 그가 살던 시대에 비해 지나치게 미래의 사람이었고, 그의 시대는 그의 이상이 실현되기에는 아직도 먼 과거였다.

공자는 50대에 이르러 정치에 나서 노나라 개혁을 시도했다가 귀족들과 기득권 세력에 막혀 실패하자 망명길에 올랐다. 여러 나라를 떠돌며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고 했으나 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나라가 없었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장기간 굶주림에 시달리는 곤경에 처할 때도 그는 자신의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

공자의 학당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민간 학교였다. 철저한 귀족 중심의 사회에서 공자가 일반 서민 자제까지를 교육 대상으로 삼은 민간 교육기관을 연 것은 실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자가 당시까지는 귀족의 학문이었던 시·서·예·악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구름같이 사람들이 몰려와 마침내 공자의 문도가 3천 명을 넘었다는 찬탄의 소리가 천하에 퍼졌다. 그들 가운데 각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과 학문을 발휘하여 공자의 직제자로 인정된 문도는 70명이 조금 넘었다. 공자가 14년 동안 이상을 찾아 여러 나라를 유랑할 때 스승과 함께 풍찬노숙하며 간난신고를 겪었던 자로子路, 안연顔淵, 자공子貢, 재여宰予 등 열 명의 제자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특히 학덕이 뛰어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기억되었다. 만년의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시서예악의 전적들을 정리하고 노나라 역사서 《춘추春秋》를 찬술하며 위대한 고도古道를 후세에 전했다. 공자는 망명에서 돌아온 후 5년여를 더 살다가 일흔셋의 나이에 수많은 제자들의 애통 속에 곡부 북쪽 사수泗水 근처 언덕에 묻혔다. 개혁가로선 실패한 삶이었으나, 교사로서는 행복한 죽음이었다.


공자의 죽음은 위대한 사상의 시작이었다. 나는 생전에 선생님이 즐겨 신으시던 가죽신을 가슴에 품고 운구 행렬의 맨 뒤에서나마 선생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참례하는 영광을 누렸다. 제자들은 예법에 따라 스승의 묘를 3년간 지켰다. 세상에 전하는 가장 위대한 책, 《논어論語》는 시묘하던 제자들이 밤마다 각자 스승에게 들었던 가르침을 서로 확인하며 기록한 데서 기원했다. 나는 묘당으로 저녁밥을 나르며 그들이 치열하게 토론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나는 꿈속에서 노나라로 건너왔으나, 그것이 하늘의 뜻임을 진심으로 확신하게 된 것은 나에게도 저 위대한 무덤가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위대한 교사였으며, 저 문도들은 아름다운 제자들이었다. 낯선 시공을 방황하다 우연히 공자 일행의 짐꾼이 되었던 나, 이생은 지상 최대의 행운아다. 수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선생님의 곁에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니.

노나라 정치개혁에 실패한 공자는 55세 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나라와 임금을 찾아 망명길에 올랐다. 주유열국周遊列國은 14년간 계속됐으나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자는 떠돌이 망명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자는 끝까지 문명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이상적인 인간과 나라를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68세 때 노나라에 돌아와 73세에 죽을 때까지 후학을 가르치고 고전을 정리하여 자신의 사상을 후세에 남겼다.

이 최후의 20년을 같이한 자로, 안연, 자공, 재여 등의 제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공자의 분신이었다. 그들도 자신의 시대를 인간다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선의善意를 다 바친 사람들이었다. 스승과 더불어 저 풍찬노숙의 시간을 함께하면서 사상의 정수를 가다듬으며 후세의 동아시아인들이 경외하는 이상적 인간의 원형질을 빚어냈다. 그들이 비바람 속에 걷던 광야의 길 위에서 지금 우리가 사색하고 행위하는 사상과 도덕, 정의와 용기, 인간성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씨앗들이 뿌려졌다.

군자가 유랑할 때 길은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이상을 좇는 그들을 반겨주는 현실의 목적지는 없다. 유랑하는 군자는 길 위에서 꿈을 꾸고 길 위에서 죽는다. 25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군자의 유랑은 수많은 동아시아인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세상을 품는다는 것

윗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친구에게는 믿음직하며

아랫사람을 품어주는 사람이고자 한다.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_《논어》 <공야장> 25장

공자 일행을 따라 궐리闕里*에 온 나는 공문의 일꾼이 되었다. 학당 안팎을 청소하고 공자와 주요 제자들의 수발도 거들었다. 공자의 주유천하 시절 나를 짐꾼으로 채용했던 자공이 오갈 데 없는 내 처지를 딱하게 여겨 특별히 배려해준 일자리였다. 나는 학당에서 부지런히 몸을 놀려 금세 새 문도들에게도 성실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쉬는 시간에는 귀동냥으로 들은 공부에 대해 질문해 문도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친숙해진 젊은 문도들은 그저 짐꾼에 불과한 나를 특별히 이생이라 불러주었다. 떠돌이 이방인 출신인 나로서는 과분한 호칭이었다.

* 노나라 수도 곡부曲阜의 마을 이름. 공자가 자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공자의 사당이 있다

사실상 제2의 개교를 맞이한 학당에는 가르침을 청하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맹희자孟僖子 같은 노나라의 저명한 귀족들도 자식들의 교육을 맡길 만큼 공자는 훌륭한 교사로 인정받았다.1 그런 일급 교사가 유수한 제자들을 이끌고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이 사방 퍼지자 노나라는 물론 이웃나라에서도 천 리를 마다하지 않고 청년 학도들이 궐리의 학당으로 몰려든 것이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교문 앞을 쓸면서 죽간 보따리를 짊어지고 손에는 정성스레 준비한 예물을 든 청운의 젊은이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찾아오는 학생들로 이처럼 문전성시를 이루자, 학당의 부교장 겸 학생회장 격인 공자의 수제자 자로는 신이 나서 온 궐리가 떠나가도록 소리치기도 했다. “누가 노나라에 현자가 없다고 하는가? 천하의 준재들이 모두 궐리에 모이고 있지 않은가!”

일찍이 공자는 “육포 한 꾸러미를 들고 오는 정도의 예[束脩之禮]를 갖춘다면 모두 가르치겠다”2고 했다. 공자의 계급을 초월한 교육 방침은 신분의 굴레에 묶여 있던 많은 젊은이들을 자극해 학문의 길로 이끌었다. 공문의 명성이 높아지자 하루는 미개하여 말조차 잘 통하지 않는 호향이라는 마을에서 한 소년이 찾아왔다. 몇몇 제자들이 이 야만족 소년을 내쫓으려 했으나 공자는 그를 만나 따스한 말로 격려해주었다. 제자들이 호향 풍속의 야만성을 들어 공자의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옳은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그 선함을 받아들이고, 옳은 길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사람은 그 불선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뿐인데, 굳이 사람에게 심하게 할 필요가 있느냐. 그 사람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다가오면 그 깨끗함으로 받아들이고 지나간 허물은 따지지 말자.3


유가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에서 사상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물론 공자 사상의 보편성이 있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다른 문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고 스승에 대한 믿음이 그 어떤 학파보다 강했던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공문에서 많이 배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교육에는 신분의 차별이 없다는 시대를 앞선 공자의 혁신적 교육관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가르침에는 신분의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4


만세사표萬歲師表의 첫 출발

공자는 서른 살 무렵 본격적인 전업 교사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서른에 자립했다[三十而立]’고 한 공자의 말은 실제로 그 무렵 학인學人으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독립적인 행보를 본격화했던 자신의 체험을 술회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미래에서 온 속인俗人으로서 나는 무려 2500여 년 전에 어떻게 공자가 전업 교사로 나설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것도 완고한 귀족 중심의 신분사회에서 일반 서민까지 교육 대상으로 삼았는지 말이다. 설사 민중을 대상으로 한 교육 시설을 구상한다 해도, 집단으로 사람을 교육하려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 목표와 내용, 교수 방법 등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부유한 귀족이 아닌 가난한 사 계급의 젊은이가 사실상 최초로 그것을 실현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느 날 나는 공자의 가장 오랜 제자로서 젊은 시절의 공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로를 붙잡고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자로 님, 저는 이 학교의 일꾼이 된 것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중국에 나라가 세운 관학 말고 이렇게 큰 사학이 또 있을까요?”

“단언컨대 없다.”

“우리 선생님은 어떻게 젊은 나이에 이런 멋진 학교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요? 자로 님은 오래전부터 선생님과 함께하셨으니 잘 아시겠지요?”

자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선생님은 공경대부公卿大夫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셨기 때문이다.”

“네?”

“선생님은 부유한 귀족이 아니라서 정식으로 관학에 들어가 배울 수 없었다. 선생님은 배움을 원하고 배울 능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학교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이 가지셨다.”

“그런 생각을 오로지 선생님만 한 것은 아닐 텐데요?”

“선생님은 홀어머니 봉양을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일하는 틈틈이 예악禮樂과 역사, 시를 공부했다. 일정한 스승은 없으셨다. 그저 모르는 게 있으면 각 분야의 여러 전문인을 찾아가 예를 갖춰 질문하기를 누구보다 즐기셨다.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옛것을 좋아해 힘써 배우기를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5는 선생님의 회고는 이때의 학구열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이처럼 열심히 공부해 점차 선생님의 학문이 깊어지자 이번에는 거꾸로 선생님에게 질문하러 오는 전문인들이 생겼다. 선생님은 이들과 효율적으로 문답하기 위해 날과 장소를 정해 모임을 가졌는데, 여기에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약간의 예물을 가지고와 참석하기를 청하면서 자연스레 학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 그것이 선생님이 전업 교사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겠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사람들이 선생님에게 예물을 바친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세금을 걷으러 갔었으니까. 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자 자로가 고개를 한번 갸웃하더니 말했다.

“이보게 이생.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면 괜히 나의 옛일을 들춰보고 싶은 건가?”

자로의 과거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나는 속이 뜨끔했지만, 자로의 입을 통해 공자의 젊은 시절을 듣고 싶었다.

“세금을 걷다니요? 정말 몰라서 묻습니다.”


자로초견子路初見

자로는 솔직하고 용감하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나라 제후국 시민권자인 국인 출신이 아니라, 토착민으로서 이류 국민 대접을 받던 야인 출신이었다. 어려서 집을 떠나 협객 무리에서 무예를 익혔다. 돈이 모이면 식량을 사서 백 리 길을 짊어지고 가서 부모에게 직접 밥을 지어드리는 효심을 발휘하는 사람이었다.6

자로는 10대 후반에 곡부 시장의 무뢰한이 되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동네 건달 두목쯤 되었는데, 스스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보호자를 자임했다. 그는 훗날 사마천이 《사기》 <유협열전游俠列傳>에 담은 유협의 원형 같은 인물이었다.

어느 날 자로는 궐리에 사는 한 남자가 자기 초옥에 학당 간판을 내걸고 사람 가르치는 일로 먹고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아보니 공구라는 이름의 키다리인데, 나이가 자기보다 불과 아홉 살밖에 많지 않았다.

“어떤 놈이 내 허락도 없이 이 동네에서 영업을 하는가?”

자로는 부하들을 이끌고 공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겁을 줘서 이른바 ‘세금’을 뜯어낼 작정이었다. 자로는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대뜸 칼을 뽑아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떠냐? 키만 껑충한 위선자 같으니라고. 내 칼춤 솜씨에 기가 팍 죽지?”

자로가 의기양양하게 공자를 노려보며 칼춤을 끝내자, 공자는 태연하게 한번 웃은 뒤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 그대가 잘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그렇다. 긴 칼이었다면 더 잘했을 거다.”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닙니다. 칼솜씨에 학식을 갖춘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우습게 여기겠습니까?”

“네 눈엔 내가 우습게 보이냐? 공부? 그딴 거 없어도 날 우습게 여기는 놈은 이 바닥에 아무도 없다.”

“사람은 가르쳐주는 친구가 없으면 들은 것조차 잃게 됩니다. 나무도 먹줄을 받은 뒤라야 비로소 반듯해지고[木受繩則直] 사람도 충고하는 말을 잘 받아들여야 지혜로워지는 법입니다[人受諫則聖]. 그러므로 배움은 묻는 것이 중요하니[受學重問] 군자라면 배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君子不可不學].”

무식해서는 골목대장 노릇조차 쉽지 않다는 걸 체험으로 알고 있던 자로는 공자의 말에 번개를 맞은 듯했다. ‘어라, 이건 뭐지? 저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고, 굽은 듯하면서도 탄력 있게 뿜어 나오는 저 강기剛氣는? 앎이란 저런 기품을 얻기 위함인가?’ 머리는 이리저리 안개 속인데 말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나갔다.

“웃기고 있네. 남산의 대나무는 아무도 잡아주지 않아도 저절로 곧고, 그것을 잘라 쓰면 물소의 가죽도 뚫을 수 있다. 굳이 따로 공부를 해서는 무엇 한담?”

자로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공자는 이미 그의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시겠습니까? 화살 한쪽에 깃을 꽂고 다른 한쪽에 촉을 갈아서 박는다면 깊이가 더욱 깊어지지 않겠습니까? 굳이 배움을 마다할 게 무엇입니까?”7

자로는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거참, 번지르르하게 말은 잘하네.’ 휑하니 돌아서서 나오고 말았다. 그날 이후 한동안 자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저잣거리에서는 자로가 좀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얼마 후 공자가 길을 갈 때면 웬 젊은이가 두 팔을 크게 휘저으며 뒤따르게 되었는데, 자세히 보니 무뢰한 자로였다.

“그날 이후 나는 한시도 선생님 곁을 떠난 적이 없다. 그런 나를 선생님은 ‘중유는 나의 수제자요, 경호대장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암, 수석 자리가 아니면 누가 우리 선생님을 지킬 것인가? 어떤 놈이든 하늘같은 우리 선생님의 털끝 하나 건드리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랬지, 그때는. 하하하.”

나는 예순이 코앞인 할아버지 자로가 어린아이처럼 으스대며 옛일을 추억하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고 부럽기도 하던지, 슬그머니 그를 좀 골려줘야겠다는 심술이 일었다. 자로의 협객 기질이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것인지도 궁금했다.

“그래도 제가 볼 때는 안연 님이야말로 공자님의 수석 제자인 것 같습니다만…”

나는 자로가 무슨 소리냐고 되받을 틈도 주지 않고 잽싸게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이 안연 님을 보실 때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연인을 보는 듯합니다. 어떨 때는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모를 눈빛으로 안연 님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로 님이 수석 자리를 자처하셔도 선생님의 마음속에는 안연 님이 으뜸 제자가 아닐까요?”

자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놈. 네가 나를 시험하려 드는구나, 허허. 이생아. 너는 내가 회(안연의 이름)를 질투하는 것 같냐? 그래, 말해주마. 사실 나는 회가 지겨울 때가 있다. 나는 회처럼 어디 하나 허물이 없는 그런 완벽한 사람은 솔직히 정이 안 간다. 그러나 나는 회를 미워할 수 없다. 이유는 한 가지, 네 말대로 선생님이 그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선생님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를 내가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느냐?”


스승과 제자

해가 바뀌어 궐리 학당에 봄꽃이 만발할 무렵, 자로에게서 전갈이 왔다. 안연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다과를 나눌 테니 준비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얼마 전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가 병으로 죽었다. 자로는 스승이 아들처럼 사랑하는 제자 안연을 앞세워 아들을 잃은 스승을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위안의 자리가 은근히 기다려졌다. 선생님을 가까이서 뵈며 세 군자가 나누는 대화를 직접 들을 기회가 어디 흔한가! 나는 다과는 물론 선생님을 위해 지난 가을 빚어서 고이고이 모셔둔 술을 꺼내 따뜻하게 데워놓았다.

세 사람은 학당 후원의 누각에 나란히 앉았다. 연지 옆에 세워진 이 대에서는 학당 안의 교실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스승과 두 제자는 서로 차를 따라주며 학교 일에 관해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과에 이어 준비한 술상을 내어가자 공자께서는 미소로 반기며 “자네가 빚은 술은 특히 맛이 좋으이. 고향의 술인가?” 하고 물어주셨다. 이윽고 자로가 선생님을 위해 거문고를 연주했다. 자로의 연주 실력은 별로였지만 공자께서는 즐겁게 들으셨다.

“중유仲由(자로의 이름)의 금 실력은 언제나 늘꼬? 허허.”

뒤이어 안연이 특유의 섬세함으로 거문고를 켜자 숲의 새들도 지저귐을 멈추고 연주를 듣는 듯했다.

“오랜만에 너희와 함께 금을 연주하니 연못의 잉어들도 춤을 추는 듯하구나.”

연지를 내려다보면서 혼잣말하듯 하는 공자의 목소리에서 문득 처연함이 묻어났다. 자로는 아차 싶었다. ‘백어의 이름 리는 잉어라는 뜻이 아닌가. 백어를 잃은 슬픔을 위로하는 자리가 하필이면 잉어가 헤엄치는 연지라니, 나도 참 한심한 사람일세…’ 자로가 울상을 감추며 안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회야, 네가 좀 분위기를 바꿔보려무나.’ 안연이 자로의 뜻을 눈치 채고 공자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 마당 맨 앞 교실을 보십시오. 신입생 교실인데 어느 해보다 글 읽는 소리가 청아합니다.”

자로가 거들었다.

“저들이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불원천리不遠千里한 인재들이 아닙니까! 으하하!”

공자께서도 웃으셨다.

“유는 늘 들통날 아첨만 하는구나. 안 그러냐, 회야?”

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안연은 더욱 진지했다.

“선생님. 사형의 말이 지당합니다. 선생님이 아니 계시면 노나라, 아니 천하에 어찌 저런 소리가 울려 퍼지겠습니까? 들어보십시오. 제가 처음 선생님께 배우러 왔을 때 해주신 바로 그 말씀이 아닙니까?”

안연이 선창한다.


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자로가 흥에 겨워 큰 소리로 화창한다.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와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안연이 단정하게 무릎 자세로 고쳐 앉아 공자에게 읍하고, 자로는 일어서서 읍한 뒤 오른팔을 공손하게 앞으로 펼친다. 가운데 앉은 공자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제자들에게 답례하신다. 세 사람이 미소 가득한 얼굴로 합창한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함이 없으니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8


가장 이상적인 사람

감격에 겨운 듯 자로가 공자 앞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선생님, 제게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신입생들이 공부하는 교실 이름을 지금부터 학습당學習堂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들어가는 문은 학이문學而門이라 하고, 나오는 문을 시습문時習門이라고 하고요. 하하, 그러면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을 어찌 잊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유의 말이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하지만 배움이란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교실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유야, 회야, 나는 이제 늙었으니 저 학생들의 교육을 제자인 너희에게 맡기고 싶구나. 너희는 우리를 찾아와 문행충신文行忠信9을 연마하고자 하는 저 갸륵한 젊은이들을 장차 어떻게 이끌어줄 생각이냐?”

자로가 먼저 대답했다.

“외람되지만 제가 저자의 왈패에서 조그만 고을의 읍재까지 해봤습니다만, 사람은 일정한 물산物産이 있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물질은 선비로서 구할 바가 못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저들에게 먼저 그런 모범을 보일까 합니다. 제가 타고 다니는 수레, 저의 좋은 관복이나 예복을 저들과 나눠 써서 그것이 낡고 헐어서 못 쓰게 되더라도 하나도 아쉬워하지 않겠습니다[願車馬 衣輕裘 與朋友共 弊之而無憾].”

공자가 그 대답을 듣고 흐뭇해했다.

“훌륭하다, 나의 유. 자고로 자기 가진 것을 남과 나누면서 조금도 아쉬움이 없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중유는 물질로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구나.”

안연의 차례가 되었다.

“저는 가난해 나눌 재산이 없습니다만, 지식이 약간 있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솔선할까 합니다. 저는 남들보다 학문이 높다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깔보지 않겠으며, 공로와 업적이 넘치더라도 그것을 자랑삼지 않겠습니다[願無伐善 無施勞].”

공자가 그 말에도 흡족해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나의 회. 높은 경륜과 지식을 갖고도 오만하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다. 회는 지극히 겸손하여 지식으로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구나.”

선생님은 내가 올린 술잔을 또 비우셨다. 이윽고 자로가 공손히 말했다.

“선생님,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가르침이 없으니 중요한 무엇이 빠진 것만 같습니다. 선생님이 저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연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사형과 더불어 감히 가르침을 청합니다.”

공자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말씀했다.

“유야, 회야. 내가 무엇을 더 새롭게 말하겠느냐? 나는 그저 저들에게 이런 사람이면 족하다.”


윗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친구들에게는 믿음직하며, 아랫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람이다.10


정적이 흘렀다.

뭔가 특별한 말씀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자로는 순간 멍한 표정이었다. 두 눈을 감은 채 듣고 있던 안연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말씀을 마친 선생님은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학당 쪽을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셨다. 몇 초의 정적이 더 흘렀을까,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일어나 스승에게 절을 올리고는 한참을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스승이 전하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가르침 속에서 두 제자는 자신들의 전 생애를 두드려오는 깊고 깊은 울림을 들었던 것이다.


열락대 아래서

나는 누각 아래서 술을 데우며 세 사람의 말씀을 잇달아 들었다. 진리란, 아름다운 사제 간이란 과연 이런 것이 아닐까? 물질로도 지식으로도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이상理想, 윗사람에게는 편안한 사람이자 친구들에게는 신의로운 사람이자 후배들에게는 진실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도대체 더 이상 무슨 말로 사람의 도리를 요약할 수 있을까? 이 간명한 명제가 실은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던가.

훗날 자로와 안연에게서 이날의 말씀을 전해들은 여러 제자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 대화를 스승의 어록에 담은 것은 이 문답이 내포한 인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한 결과였다. 적어도 현장을 지켜본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밖으로 드러나는 인과 안으로 깊이 감추는 인의 화음을 그들도 분명 들었던 것이라고.

나는 그날부터 연지의 누각을 열락대說樂臺라 부르기로 했다. 그날의 대화를 기념하고 그것을 직접 들은 기쁨을 자축하는 의미였다. 그날 밤 나는 향기 나는 먹을 갈아 깨끗이 씻은 붓으로 푸른 죽간 위에 선생님의 말씀을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써내려갔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배나 윗사람에게는 뭘 맡겨도 안심이 되는 사람,

친구와 동료에게는 뭘 같이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

후배와 부하들에게는 진심으로 이끌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었으면 한다.


자로와 안연이 이 말씀을 열락대에서 듣다.

아래에서 이생, 술을 데우며 귀를 세우다.

궁핍에 맞서다

군자는 본디 궁하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진다.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_《논어》 <위령공> 1장

꾸르륵.

옆에 누운 채나라 출신 배불뚝이 짐꾼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밥차 오는 소리인가?”

쪼로록.

이번엔 내 배에서 나는 소리다.

“사돈 남 말 하네.”

둘이서 마주보며 힘없이 웃는데, 발을 드리운 천막 안에선 거문고 소리가 낭랑하다.

배불뚝이가 명아주를 씹으며 심드렁하게 내뱉는다.

“너네 선생이란 작자는 이 와중에도 거문고를 타고 싶을까?”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새나온다. 진나라 도읍인 완구를 출발할 때 고용된 짐꾼들은 공자에 대한 존경심이 높지 않았다. 급기야 공자는 위선자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말까지 나왔다.

“혹시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 아닐까? 생풀을 씹고 있는 아랫것들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것 같아.”


전란에 휩싸인 대륙

나는 중국 땅에 떨어지기 전, 열국을 주유하던 공자 일행이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의 들판에서 식량이 떨어져 7일 동안 굶주림에 시달리며 고난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기원전 489년, 공자가 열국을 주유한 지 8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그런데 이른바 진채지액陳蔡之厄의 고사를 바로 내가 직접 겪게 될 줄이야…

이 무렵 중국의 여러 나라들은 크고 작은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공자가 주로 머물던 진나라와 채나라는 강대국인 초나라와 오나라의 쟁투에 휘말려 망국에 가까운 고초를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는 북방의 강자인 진나라로 유세를 가려다 포기하고 방향을 바꿔 남방의 강자 초나라로 가려 했다. 초나라 소왕昭王은 공자도 높이 평가한 바 있는 임금인데, 그가 공자의 명성을 듣고 자기 나라에 초빙하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돌던 차였다. 그래서 거리상으로도 가까운 초나라 동맹국인 진나라에 머물며 평소 공자를 존경해온 사성정자司城貞子*를 통해 초나라 쪽과 방문 교섭을 벌이던 중이었는데,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진나라를 침공했던 것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로 잘 알려진 숙적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굴복시킨 부차는 초나라까지 제압해 명실상부한 패자覇者가 되고자 했다. 동맹국인 진나라를 친 것도 실은 초나라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초 소왕도 직접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기에 이른다.

* 성의 관문 방비를 담당하는 대부

두 라이벌 간의 대회전이 진나라 땅에서 벌어질 것이 확실해지자 사성정자는 공자 일행에게 피난을 권유했다.

“일단 채나라 부함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곳 총독이 초나라 대부 심제량沈諸梁인데, 그라면 선생님을 잘 보살펴드릴 겁니다. 소왕과의 면담이 성사되면 그때 초나라에서 안전하게 모셔 갈 겁니다.”

이때가 기원전 489년, 노 애공 6년으로, 공자의 나이 예순셋이었다.


공자, 계략에 빠지다

공자가 초나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완구의 대부들에게 알려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은 공자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 공자를 대접하는 듯했지만, 속으로는 공자를 경원했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개혁을 추진한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공자가 초 소왕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진나라와 채나라는 초와 오 양쪽 모두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따라서 두 나라의 권문세족들 상당수가 초와 오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는데,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공자가 영명한 초 소왕과 친해지는 것이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공구 그 늙은이가 초나라 왕에게 그동안 우리가 공작을 벌인 일들을 고해바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은 자기 목을 쓰다듬으며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래서 두 나라 대부들은 서로 연통을 넣어 어떻게든 공자가 소왕을 만나지 못하도록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병家兵을 동원해 공구 일행의 호위병을 흩어버리고 식량을 빼앗겠소.’

‘우리는 어떤 마을에서도 공구가 유숙하지 못하도록 조처하겠소.’

이런 사정을 제대로 알 리 없는 공자 일행이 초나라로 향하던 중 한 강가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는데, 어디선가 일단의 무리가 들이닥쳐 일행을 포위했다.

“식량을 죄다 내놓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자공이 이들을 달래어 식량을 내주며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에게 침착하게 물었다.

“당신들은 어디서 왔소?”

“우린 채나라 사람들인데 진나라 전투에 끌려갔다가 도망치는 중이다. 너희도 남쪽으로 가지 말고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게다.”

그렇게 말하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는데, 그때 나는 그자가 누더기 안에 갑옷을 받쳐 입은 것을 얼핏 보았다. 나중에 확신하게 된 일이지만, 그들은 패잔병으로 위장한 진나라 대부의 병사들이었다.

식량을 잃은 공자 일행은 그때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맹수와 습지의 해충을 피해 이동하며 며칠째 들판을 헤맸지만, 제대로 된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 간혹 마주친 어떤 군영이나 마을도 일행을 받아주지 않았다. 어느 마을에선가 한 선비가 귀띔을 해주는 바람에 우리는 비로소 그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윗선에서 읍재에게 낯선 대부 일행을 보면 절대 마을에 들여놓지 말라고 했답니다.”


군자는 원래 궁하다

훗날 유가들 사이에서 전설이 된 이 진채지간의 고난에서 공자를 수행한 제자는 자로, 자공, 안연, 재여 등이다. 이때 자로가 쉰다섯 살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3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이 밖에 다른 제자들도 몇 명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자주 일행을 벗어나 왕래하였기에 누가 더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짐꾼으로는 위나라에서부터 따라온 나와 진나라에서 고용된 수레꾼을 합쳐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굶주림에 시달리며 들판을 헤맨 지 이레째 되는 날, 우리 일행은 채나라 접경 마을 부근의 한 언덕에 도착했다. 그때 재여는 지치고 굶주린 상태에서 독초를 잘못 먹고 한구석에 뻗어 있었고, 안연은 나물을 다듬고, 자공과 자로는 불을 지피고 있었다. 숨겨둔 묵은 보리마저 바닥나 곡식 한 톨 없이 명아주로만 국을 끓여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짐꾼들은 그 사정을 알고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는 게 아니냐고 수군대고 있는데, 공자가 거처하는 천막 안에서 또 거문고 소리가 난 것이다. 공자가 나지막이 시를 읊는 소리까지 흘러나왔다.11

“아니, 선생님은 우리 고통을 정녕 모르시는 건가? 모른 척하시는 건가?”

자로가 온 사방에 들으라는 듯이 소리치며 불쏘시개를 냅다 집어던졌다.

자공은 그런 자로를 제지하지 않은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대저 선하고 의로운 자는 복이 있고, 악하고 불의한 자는 죄를 받는다고 했다. 어쩌서 평생 인과 의만을 쫓아온 우리가 이렇게 짐승처럼 굶주린단 말인가? 정녕 하늘은 착한 자의 편인가?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싶다!”12

자로의 성난 불평에 우리 일행은 아연 긴장했다. 자로가 이처럼 대놓고 공자를 비난한 적은 없었다. 짐꾼들도 서로 눈치 보며 몸을 사렸다.

잠시 후 공자가 거문고 연주를 마치고 제자들을 불렀다.

“얘들아, 이리 들어오너라.”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 가슴마저 떨려왔다. 저러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혹여 돌이킬 수 없는 금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유야, 사(자공의 이름)야, 회야,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자로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분한 나머지 불평을 쏟아내긴 했지만, 정작 스승의 얼굴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잔뜩 굳은 얼굴로 퉁명스레 되물었다.

“선생님, 군자가 이처럼 궁지에 빠져도 되는 겁니까?”

공자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거문고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군자는 원래 궁하다.”

옆에서 듣던 자공의 얼굴에 일순 실망의 빛이 스쳐갔다. ‘사람이 굶어죽는 판에 방책은 강구하지 않고 군자연만 하실 건가?’

안연은 나뭇가지로 바닥에 뭔가를 끼적이며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자로는 공자의 말에 억지로 누르고 있던 분노가 치밀어 오른 듯했다.

“선생님, 이 판국에 웬 궁자 타령이십니까?”

발끈하려는 자로를 공자가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진다.”13

자로가 순간 얼굴을 숙여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춘 채 자공과 안연을 돌아보았다. ‘얘들아, 선생님이 지금 뭐라고 하신 거니? 그러니까 나더러 소인이라는 말인가?’ 자로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공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환난에 처해서도 덕을 잃지 않는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은 서리와 눈이 내린 뒤라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다.”14

그러고는 비파를 끌어당겨 안더니 현을 뜯기 시작했다.


춤추는 자로

공자와 제자들 사이에 있던 이 아슬아슬한 ‘언쟁’에 대해 훗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실제로 제자들의 항의 강도가 훨씬 셌는데, 유가들이 공자 위주로 사실을 축소 왜곡하지 않았느냐는 게 의혹의 요지였다. 자로가 공자의 따끔한 일갈에 승복하지 못한 채 ‘비파 소리에 맞서 방패를 잡고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도 후세에 전해졌는데, 이는 반대로 반유가들이 공자와 그 제자들을 폄훼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잘못 전승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자로가 왜 방패를 잡고 춤을 췄는지 직접 보지 못해 말하기 뭣하지만, 자로가 춤을 춘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날 그 언덕에서 내가 본 바는 이러했다. 나와 짐꾼 몇 명은 천막 앞에서 숨 막히는 일촉즉발의 사제 대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뭔가 한바탕 난리가 날 것 같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쥐죽은 듯하던 천막 안에서 비파 소리가 나더니, 성난 얼굴로 천막 안으로 들어간 자로가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그럼 그렇지. 자로 같은 단순한 사람이 노련한 공구의 상대가 못 되지. 원래 군자가 궁할 궁자인 걸 여태 몰랐단 말인감? 안다고 하면 가난뱅이 신세를 면할 수 없고, 모른다고 하면 소인이니, 그동안 따라다닌 세월이 아깝도다, 흐흐.”

짐꾼들 사이에서 이런 야유가 흘러나오는데, 자로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재여가 널브러져 있는 나무 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선생님 말씀은 높아도 너무 높아…”

자로는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이, 모르겠다. 나라도 가서 직접 식량을 구해봐야겠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자공이 뛰어와 자로의 행방을 묻고는 자기도 식량을 구해 오겠다며 언덕을 내려갔다. 나는 안연과 함께 막 나물을 뜯으러 나서던 참이라 고갯길을 향해 가는 자로를 멀리서 볼 수 있었다. 몇십 보쯤 뒤에서 비탈에 미끄러지며 쫓아가는 자공의 모습도 보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고개 중턱을 넘어가던 자로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우리 쪽 언덕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돌아서서 가기를 두어 번 하더니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자기 무릎을 치고, 또 자기 머리를 몇 번 치는 듯하더니 이윽고 오른팔, 왼발, 왼팔, 오른발을 번갈아 놀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가는 것이었다.

“안연 님! 저기 보세요. 자로 님이 춤을 춥니다!”

천막에서 나온 뒤 내내 말이 없던 안연이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중유 사형이 춤을 춘다고?”

춤추는 자로를 발견한 안연의 얼굴에 금세 기쁨의 꽃이 피어났다.

“그럼, 그렇지!”

안연은 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내던지고 공자가 있는 천막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래전 집을 떠난 형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전하러 아버지에게 달려가는 막내아들 같았다.

“선생님! 중유가 춤을 춥니다!”

천막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선생님, 자로 사형이 춤을 춘다니까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안연이 기다리다 못해 발을 걷었다.

잠시 후 조용하던 천막 안에서 거문고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흐름결을 타던 금 소리는 어느덧 격정적인 선율을 내뿜었다.


이심전심

공자 일행이 굶주림에서 벗어나 다시 초나라를 향해 갈 때 자로가 선발대가 되어 일행과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자로를 수행하면서 그날 일에 대해 물어보게 되었다.

“왜 춤을 추셨습니까?”

자로는 내 어깨를 감싸고 걸으면서 몰래 비밀을 털어놓는 소년처럼 속삭였다.

“이건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그게 말이야, 이상했어. 나는 분명 잔뜩 화가 나 있었는데, 머릿속에선 자꾸 한 줄기 번개가 번쩍거리는 거야. 선생님의 그 눈빛! 목소리는 엄중하게 꾸짖고 있지만, 눈빛은 그게 아니었어! 그건 오직 우리 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눈빛이었어.

‘유야, 너까지 왜 이러느냐? 너마저 이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저 어린 제자와 수행자들은 또 어디에 손발을 두어야 하겠느냐? 유야, 우리는 군자다. 군자는 어려울수록 더욱 의연하고, 소인은 어려움에 빠지면 과장한다. 너와 나는 젊어서 만나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서로를 격려하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군자가 어려움을 과장하면 소인이 된다는 걸 우린 잘 알고 있잖느냐? 선비가 현실과 타협하고 어려움 앞에 무릎 꿇을 때는 핑계를 찾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덕을 잃고 절개마저 꺾여 역사에서 오명을 뒤집어쓴 이가 얼마이더냐?’

언젠가 선생님이 내게 말씀하셨지. ‘이 세상에 도가 행해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 저편으로 가야 한다면, 그런 나를 따라나설 자 자로뿐이로다’15라고. 그 말씀을 듣고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나는 선생님의 그 눈빛에서 선생님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오랜 세월 선생님이 가장 믿고 의지해온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확신했다네. 그 생각을 하니 어찌나 감격스럽던지 그만 저절로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겠나?”


공자의 눈물

자로가 춤을 춘다는 안연의 외침에 나머지 일행도 모두 언덕 위로 뛰어 올라갔다. 공자의 거문고 소리가 들판 가득 퍼져가는 가운데 자로가 춤을 추며 고갯마루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자공이 손을 흔들며 그 뒤를 따랐다. 거문고 소리가 거기까지 들렸는지 모르겠으나, 그때 내 눈에는 마치 자로가 거문고 선율에 맞춰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안연과 나는 나물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채 두 사람의 모습이 고개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한참 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훗날 안연이 자로에게 귀띔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그때 거문고를 켜던 공자의 눈가에도 촉촉하게 물기가 어렸다고 한다. 붉은 노을이 대륙의 지평선을 찬란하게 물들이던 어느 저녁의 일이었다.

군자는 진실로 궁한 자이니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을 뿐이다.

吾道 一以貫之 _《논어》 <이인> 15장

초나라 소왕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난 공자 일행은 이레 동안 들판을 헤매며 굶주림에 시달리는 고난을 겪는다. 공자는 그런 곤경 속에서도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제자들은 지치고 병이 나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공자 일행이 이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자공의 수완 덕분이었다. 식량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간 자공이 거짓말처럼 쌀을 구해 나타난 것이다.

자공의 활약으로 배고픔에서 벗어난 공자와 제자들은 모처럼 여유로운 마음으로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공자가 강론을 예고한 터였다. 공자의 이날 강론은 훗날 유가들 사이에서 공자 정신의 불굴성과 위대함을 증언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게 된다. 역사가의 엄정함과 작가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교직한 극적인 문체로 유명한 사마천이 이 전설적 이야기가 지닌 불멸성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수백 년 뒤의 사람임에도 마치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처럼 이날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해놓았다. 현장에서 직접 강론을 들은 나조차 놀랄 정도로.

아무튼 이 사건은 유가들이 스승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불후의 전설이 됐다. 기독교에서 예수가 행한 산상수훈山上垂訓이나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처럼 말이다. 그날 내 눈에 비친 공자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그가 불안과 초조감을 연륜의 힘으로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그래서 말인데,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그날 공자는 자신의 강론이 지니게 될 거대한 역사성을 의식했을지 모른다고.

이날 강론은 문답식으로 진행됐다. 사마천은 공자와 제자들이 각각 따로 문답한 것으로 기록했으나, 실제로는 언덕의 큰 살구나무 아래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둘러앉은 가운데 이뤄졌다. 강론에 참석한 사람들은 문답을 나눈 자로, 자공, 안연뿐 아니라 재여를 비롯해 몇몇 제자가 더 있었다. 장소가 노천인 덕분에 우리 짐꾼들도 뒷줄에 둘러앉아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이날의 강론이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나 이생이 있으니 ‘거의’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날 청강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참석자 이름을 다 기억해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의 도에 잘못이 있는가

선생님이 강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행을 둘러보다가 나와 눈을 맞추며 말씀하셨다.

“들판을 걸으며 불렀던 노래를 다시 한 번 불러보겠느냐?”

나는 황송하여 잠시 어쩔 줄 모르다가 배불뚝이 채인을 일으켜 세워 진나라 짐꾼들에게 배운 노래를 함께 불렀다.


어느 풀인들 시들지 않고 배겨날까

어느 날인들 우리 행군 멈출 때 있을까

슬프다 우리 신세 사람 대접 못 받네.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건만

왜 들판을 헤매는가

슬프다 우리 신세 아침저녁 쉴 틈이 없네.16


노래를 마치자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공자가 제자 중 가장 연장자인 자로에게 먼저 말했다.

“우리도 저 노래처럼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들판을 헤매고 다녔다. 왜 이런 고생을 하는가? 과연 나의 도가 아직은 많이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뭔가 잘못해서인가? 유야, 어째서 우리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자로가 대답했다.

“제가 궁금한 점도 그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덕을 쌓고 의를 지킨 지 오래십니다. 곤경에 처할 때도 의연히 인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진나라, 채나라에 여러 상하 대신들이 있음에도 선이 닿는 이가 하나도 없습니다.17 우리가 아직 인의 경지에 들지 못해서인가요, 지의 경지에도 들지 못해서인가요? 사람들이 우리의 갈 길을 이처럼 가로막으니 말입니다.”

공자가 탄식했다.

“아, 실로 덕을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구나!”18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유야, 내 말해주마, 그런 것이 아니다. 네 말대로 인하다고 해서 반드시 남이 믿어준다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처럼 수양산에서 굶어죽지 않았을 것이다.* 네 말대로 지혜로운 자라고 해서 반드시 남에게 인정받는다면 왕자 비간比干이 심장이 갈라지는 화를 입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가 이어 모두를 향해 말했다.

*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무왕의 은나라 정벌이 적절치 못함을 간했으나 무왕이 듣지 않자, 주나라의 녹을 받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뜯어 먹다가 굶어죽었다.

** 은나라 주왕의 숙부인 비간은 주왕의 폭정을 직간하다 죽임을 당했다.

“군자로서 학식이 넓고 뜻이 깊음에도 시대를 만나지 못한 이가 많다. 어찌 홀로 나뿐이겠느냐? 깊은 숲 속의 난초가 보아주는 이가 없다고 해서 향기를 내뿜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군자란 도를 닦고 덕을 세우다가 곤궁에 빠진다 해도 절의를 바꾸지 않는 법이다. 시대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시운時運이며, 살고 죽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군자는 오직 쉼 없이 자신을 닦으며 때를 기다리는 자이다.”19

공자가 자공을 돌아보며 같은 질문을 했다.

“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의 도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자공이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지극히 원대하여 세상의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선생님께서 약간 도를 낮추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공자가 한동안 말없이 자공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희에게 ‘군자는 본래 궁하다’고 했다. 사야, 내가 너희보다 많이 배웠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냐?”

자공이 공손하게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이 아니라면 감히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사야, 네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나의 도란 한쪽을 낮추어 다른 쪽을 높이고, 하나를 내주어 다른 하나를 취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나의 도는 하나로 모두를 꿰뚫을 뿐이다.”20

공자가 이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훌륭한 농부가 씨 뿌리기를 잘한다고 해서 수확까지 잘되리란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기술자가 물건을 아무리 잘 만든다고 해도 항상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군자가 아무리 그 도를 잘 닦아 기강과 계통을 세운다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도를 부지런히 닦지도 않은 채, 스스로 도를 낮추어 세상에 받아들여지기만을 바라고 있다. 이래서는 그 생각이 원대해질 수 없고, 그 뜻이 넓어질 수 없는 것이다.”

질문이 마침내 안연에게 돌아왔다. 우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회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의 뜻을 듣고 싶구나.”

안연이 묵상하듯 앉아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수줍은 듯하면서도 단호한 말투였다.

“선생님의 도는 지극히 원대합니다. 천하의 그 누구도 능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선생님께서 이미 도를 추구하고 행하고 계신데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은들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군자의 참모습은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서야 드러나는 것입니다. 도가 닦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치욕이요, 도덕이 높은 인재를 쓰지 않는 것은 그 나라의 수치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걱정이겠습니까? 군자의 참모습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입니다!”

안연이 말을 마치자 공자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보아라, 여기 안씨의 아들이 있다! 만약 회가 돈을 많이 번다면, 나는 그의 집사라도 되고 싶구나.”21


한겨울 소나무가 푸르른 것은

나와 몇몇 제자들은 강론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문답의 여운에 젖어 있었다. 화제는 단연 안연의 대답이었다. 다른 제자들도 공자와 안연의 문답을 들으며 희열로 가슴이 벅찼는데, 정작 안연은 스승의 칭찬에 얼굴이 빨개졌다. 그 모습을 보고 짐꾼들까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안연의 답변이야말로 공자가 이 굴욕의 고난 속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자, 자신이 직접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보아라, 여기 진정한 군자들이 있다!” 안연은 공자에게 제자이기 이전에 같은 수행의 길을 가는 벗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안연이 저 높은 곳에서 스승과 함께 노니는 경지를 보여주었다면, 자로는 보통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단순하고 감정에 솔직한 사람답게 자로의 사고 회로는 늘 선악의 인과관계를 축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자로의 울분에 더욱 공감했다. 하늘에 도가 있다면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자는 벌을 줘야 마땅하지 않은가? 도대체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행한 일과 복은 반드시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것, 바로 그러하기에 천명天命이 존재한다는 걸 공자는 잘 알고 있었다.


유야, 천명과 시운은 사람의 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군자는 학문을 함에 있어 배부르게 먹는 것과 안락한 거처를 바라지 않는다.22 군자는 그러므로 보답을 바라고 인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다. 먼저 실천하고 요행히 보답이 주어진다면 따를 뿐이다.23 인격을 닦는 목적이 명성이나 부에 있지 않을 때, 그 도는 비로소 도로서 가치를 지닌다. 그리하여 군자는 한겨울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과 같다. 날이 추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시들지 않는 기상을 우리가 알게 되지 않더냐?24


자공의 질문이야말로 다들 하고 싶었으되 감히 꺼내지 못한 우문이었다. 자공은 불굴의 철인에게 역사상 가장 세속적인 질문을 던지는 악역을 맡은 셈이니, 그야말로 가장 용감한 질문자였다.

“도를 약간만 낮추면 안 되겠습니까?”

참으로 절묘한 질문이 아닌가? 명민한 현실주의자 자공은 공자의 이상이 이 비루한 세상에서는 실현될 가망이 거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공은 그래서 평소에도 이 질문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선생님은 그저 모르는 척하십시오. 눈높이를 낮추는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현실 감각 하나는 끝내주는 이 자공이 선생님을 중원 제일의 명망가로 만들겠습니다!’

이런 자공의 현실 감각을 훤히 꿰뚫어본 이가 또 누구인가? 공자는 ‘하늘을 상대로 한 장사꾼’이다. 그랬기에 ‘지상의 장사꾼’인 자공의 제안을 웃으며 일축할 수 있었다. 공자가 일찍이 자공이 내놓은 것과 같은 타협안을 수용했다면 일세의 명재상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만세의 스승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노래를 부르는 이는 누구인가

감흥이 지나가자, 이상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공자가 안연을 칭찬하며 한 말이 눌러앉아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안연이 돈을 많이 벌면 그의 집사가 되겠다는 말씀은 정말 유쾌한 극찬이지만, 정작 그 말뜻이 정확히 가슴에 와 닿지 않아서였다. 단표누항簞瓢陋巷의 청빈한 생활을 하던 안연은 팔자에 없는 부자의 길을 획책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을 전제로 그 사람의 창고지기가 되겠다니,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일까? 반어나 역설일까? ‘네가 결코 부자가 될 리는 없지만, 비록 가난한 삶이라도 너와 함께하마.’ 아니면 비유로 해석해야 할까? ‘너의 창고에 도가 가득 쌓인다면 나는 그 도를 관리하는 창고지기가 되어도 좋으리…’ 허허, 하필이면 왜 부자였을까? 아무래도 이건 공자가 특별히 나에게만 남겨준 숙제인 듯했다. 나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혼자 실없이 웃다가 요기尿氣를 풀러 밖으로 나왔다. 어둠 저편에 긴 그림자가 하나 서 있었다. 공자였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니 안연이 함께 있었다.

광활한 평원의 검은 반구에 은하수가 가득한 밤이었다.

“회야, 왜 자지 않고 나왔느냐?”

“선생님이 겪으신 고초를 생각하니 마음이 분합니다.”

안연은 어제 거문고를 켜며 몰래 눈물을 흘리던 공자의 모습이 가슴에 화인火印처럼 박혀버린 모양이었다.

공자는 자신을 절대적 표상으로 여기는 순결한 정신의 안연이 무척 사랑스러우면서도 걱정이 됐다. 이상이 높으나 현실을 모르는 그가 혼탁한 세상과 부대끼다 상처를 입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어둠속에서 공자의 말이 들렸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마치 거대한 강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웅혼했다.

“회야, 나는 하늘이 주는 괴로움 따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주는 이 행복과 기쁨은 뿌리치기 어렵구나. 고맙다, 회야, 그러나 지금 나의 슬픔을 너무 애달프게만 여기지 말아라. 하늘이 주는 시련을 참을 수 있는 자라면 사람이 주는 기쁨과 슬픔도 기꺼이 초월할 수 있어야 하리니. 회야, 너는 나를 그렇게 여기거라.”

그 목소리는 마치 거짓 없는 삶을 살아온 가난한 아버지가 이제 막 거친 세상으로 나가려는 아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안연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흐느낌 같은 바람소리만이 어두운 밤공기를 타고 들판으로 퍼져나갈 뿐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숲 속에 남겨둔 채 조심스레 인기척을 감추고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약 200년 뒤에 쓰인 《장자莊子》에는 이날 두 사람의 심야 대화가 묘한 형태로 남았다. 기록한 이가 장주莊周 자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가를 조롱하는 빼어난 우언寓言으로 곧잘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했던 장자 일파가 왜 이날의 대화를 자기들의 경전에 남겼는지 짐작 못 하는 바는 아니다. 장자의 우언들이 유파 간 경쟁에서 비롯된 교묘한 의미 조작에 불과하다고 해도, 적어도 이날에 대한 묘사만큼은 내가 목격한 진실과 맥이 통하는 바가 있었다. 아, 그때 나 말고 또 누가 어둠속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그때 내가 그 은자를 만날 수 있었다면 내 이 기록은 얼마나 더 풍요로워졌을까!

은자가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공자는 안연이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슬퍼할까봐 걱정되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회야! 하늘이 주는 고난쯤이야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주는 은혜와 기쁨은 견디기 어렵구나. 회야, 잊지 마라. 세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하늘과 사람은 하나일 뿐이니, 지금 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이가 누구이겠느냐?”25

이것이 운명이라면

어떤 사람이 자서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아, 그 사람, 그 사람…”

或問子西 (子)曰 彼哉 彼哉 _《논어》<헌문> 10장

굶주림에 시달리는 고난 속에서도 의연했던 공자는 다시 길을 떠나 마침내 초나라 변경 지대에 이르렀다.26 멀리 성문 위로 초나라 깃발이 보이자 제자와 짐꾼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 초나라다!”

“영도*에 들어서면 초나라 왕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우리 선생님을 맞이할 테니 드디어 고생이 끝나겠구나!”

* 초나라의 수도.

모처럼 공자 일행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당시 초나라는 북방의 진나라와 더불어 중국의 양대 강국이었다. 공자는 애초 진나라로 가려 했으나 진나라 대부들이 살해당하고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바람에 방향을 남쪽으로 돌린 것이다. 이처럼 공자가 강대국을 상대로 유세하려 한 까닭은, 자신의 정치사상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에 있었다. 조국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겪은 정치적 좌절의 반작용이기도 했다. 자로는 그때마다 탁자를 치며 울분을 토했다.

“이럴 바엔 중앙 무대로 직행합시다! 거기에서는 훨씬 뛰어난 임금과 대부들이 우리를 제대로 평가해줄 겁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말은 안 했지만 자로의 주장에 공감했다. 특히 초나라 소왕은 나랏일에 헌신적인 군왕일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공자를 존경하고 있다지 않은가.

공자 일행이 저마다 부푼 기대감에 젖어 발걸음도 가볍게 초나라 국경도시를 지나갈 때였다.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얼굴은 숯을 칠한 듯 검은 사내가 조용히 공자의 수레에 접근했다. 그는 수레를 따라 걸으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어찌 그리 덕이 쇠했느냐?


거리의 소음 때문에 노랫소리가 멀리 퍼지지는 않았지만, 쇠똥받이 삼태기를 들고 수레 옆을 걷던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공자가 고개를 내밀고 수레를 모는 자공에게 물었다.

“사야, 지금 이게 무슨 소리냐? 어디서 나를 부르는 것 같구나.”

자공이 공자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우리를 따르며 노래를 합니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어찌 그리 덕이 쇠했느냐?

지나간 일은 그렇다 쳐도, 다가올 일은 충분히 알 만하지 않은가.

그만두시게! 그만두시게!

지금 정치에 뛰어드는 건 위험천만이라네.


노랫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공자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공자가 급히 수레에서 내려서며 외쳤다.

“유야, 사야, 저분을 모셔 오너라! 내 그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사내는 공자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내가 모습을 감추자 공자가 길게 탄식했다.

“초나라에 올 때 내심 그와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오늘 그가 떠났으니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27

“선생님, 아는 사람입니까?”

자로가 물었으나, 공자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공자와 함께해온 자로는 짚이는 데가 있었다. ‘아마 육통陸通일 것이다.’

눈치 빠른 자공이 자로에게 물었다.

“아까 그 미친 사람을 아십니까? 감히 선생님께 덕이 쇠했다고 지껄이다니 몹시 불경합니다. 정치를 하면 위태롭다는 건 또 뭡니까? 초나라에 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육통이라면 초나라 조정과 등진 채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숨어 산다는 은사隱士였다. 언젠가 선생님이 “일어나 세상을 떠나간 은자가 일곱 있다”28고 하셨는데, 그중 한 사람이 육통 아니던가?* 오늘 선생님의 태도를 보니 육통과 아는 사이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육통은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선생님을 만나지 않고 가버린 것일까? 자로는 느닷없는 육통의 출몰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 주자朱子, 즉 주희朱熹는 《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 “일곱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니, 굳이 찾아서 채우려 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논어》의 다른 편에 등장하는 주나라 시대의 현인 또는 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대체로 백이, 숙제, 우중虞仲, 이일夷逸, 주장朱張, 류하혜柳下惠, 소련少連 등이다. 이 밖에 장저長沮, 걸익桀溺, 장인丈人, 신문晨門, 하조荷蓧, 의봉인儀封人 등과 더불어 육통, 즉 접여接輿가 꼽힌다.

“이보시게, 자공, 자네가 먼저 영도로 들어가 초나라 조정에 무슨 일이 있는지 상세히 알아보게. 지금은 전쟁 중이니 매사 신중하게 살펴가며 선생님을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자공을 태운 말이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쏜살같이 남쪽으로 내달릴 즈음, 운명은 엇갈리고 있었다. 초나라 소왕이 전선으로 가는 군대와 함께 비밀리에 영도를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때는 전선의 백골이 시든 풀에 덮이기 시작하는 늦가을 무렵이었다.


불구대천의 원수, 초 소왕과 오자서

초나라 소왕은 오나라가 초나라의 위성국 진나라를 침공하자 원군을 보내면서 자신도 최전방 군사도시인 성보로 갔다. 소왕은 왜 왕성을 비우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직접 출전해야 했을까? 일찍이 소왕은 오나라 왕 합려闔閭가 초나라 망명객 오자서伍子胥의 보좌를 받아 영도를 함락시킬 때 수도와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굴욕까지 겪은 터였다.*

* 합려는 오나라 제24대 왕. 왕위가 사촌동생 요한테 넘어가자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 오자서와 의형제 사이인 자객 전제專諸가 생선 뱃속에 감춘 비수로 요왕을 찔러 죽였다. 쿠데타에 성공한 합려는 오자서를 재상으로 삼아 초나라를 패배시키고 남방의 패자로 군림했다. 오자서는 합려와 그 아들 부차를 남방의 패자로 끌어올린 공로로 오나라 원훈으로 추앙받았으나, 정치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태재 백비伯嚭와 대립하다가 부차에 의해 자결을 강요받았다. 오자서는 부차가 내린 촉루검으로 자살하면서, 자기의 두 눈을 뽑아 성문에 걸어 월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훗날 부차는 월나라 구천에게 패하여 나라를 잃게 되자, 저승에 가서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며 보자기로 얼굴을 가린 채 죽었다.

소왕의 아버지 평왕平王은 역사에 두 가지 오점을 남겼다. 하나는 아들의 비로 맞이한 진나라 여인을 후비로 삼아 소왕을 낳은 일이고, 또 하나는 간신의 참소에 속아 충신 오사伍奢와 그의 아들 오상伍尙을 무고하게 죽인 일이었다. 이때 오사의 작은아들 오원伍員이 복수를 맹세하며 달아났으니, 그가 희대의 책사 오자서이다.

오자서는 망명지를 전전하다 합려의 쿠데타를 도운 공으로 오나라 재상이 된다. 오자서는 《손자병법孙子兵法》으로 유명한 병법가 손무孫武와 함께 오나라 군대를 천하무적의 강군으로 조련하여 망명 19년 만인 기원전 506년 조국 초나라로 쳐들어간다. 소왕은 오나라의 침공에 수도를 빼앗기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도망쳐야 했고, 원한에 사무친 오자서는 죽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친 후 충신을 알아보지 못한 죄라며 시체에 채찍질을 300번이나 했다. 그 후 오자서는 초나라 충신 신포서申包胥가 자신의 행위를 비판하자 사과의 뜻을 전하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吾日暮途遠 故倒行而逆施之]29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오자서의 죽마고우였던 신포서는 오자서가 망명하면서 “반드시 돌아와 초나라를 뒤엎을 것”이라고 했을 때, “노력하시게, 자네가 초나라를 뒤엎는다면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부흥시킬 걸세”30라고 말한 인물이다. 신포서가 진나라 궁정 뜰에서 칠일 밤낮을 엎드려 간청한 끝에 구원병을 얻어서야 소왕은 영도로 돌아올 수 있었고, 끝내는 오나라를 피해 더 먼 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수모를 치렀다. 소왕은 즉위하자마자 오사를 참소했던 간신 비무기費無忌를 죽여 오자서의 분노를 달래려 한 터였지만, 이로써 오나라와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공자를 가로막은 자서

국경도시에서 육통, 이른바 초광접여楚狂接輿를 만난 뒤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공자 일행 앞에 영도로 먼저 떠난 자공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자로가 놀라 물었다. “아니, 어찌된 일인가?”

“사형, 영도까지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초 왕이 영도를 떠나 전방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래? 어디로 갔다고 하던가?”

“제가 알아본 바로는 성보라고 합니다.”

“성보라? 차라리 잘됐다. 성보라면 여기서 가까운 곳이다.”

“그런데 그게…” 자공이 말꼬리를 흐리더니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도 소용이 없을 듯합니다. 초나라 재상 자서子西가 선생님의 초 왕 면담을 취소시켰다고 합니다.”

“무엇이?” 자로는 땅을 쳤다. “자서 그 사람, 그 사람이 우리 선생님을 음해했단 말인가?”

자서는 소왕의 이복형이자 초나라의 재상인 영윤令尹이었다. 애국심과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높고,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 경륜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명재상 소리를 듣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왜 자기 임금을 공자와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일까? 전말은 이러했다.

공자가 초나라로 오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소왕은 크게 기뻐하며 공자를 제후의 예로 맞이할 결심을 했다. 자공이 들은 바로는 소왕이 초나라 서사 땅 700리를 공자에게 봉해 다스리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방 순시 중이던 자서가 이 소식을 듣고 일정을 취소하면서까지 급히 영도로 돌아갔다. 자서는 왕실의 맏형이자 재상으로서 오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 초나라를 부흥시키는 일을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의 인재 등용 기준은 오로지 부국강병이었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오자서 같은 책사와 손무 같은 병법가였으니, 인의를 주장하는 공자는 당장 쓸모가 없어 보였으리라.

* 원래 서사書社는 영토 안의 인명과 토지를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25가구가 사는 지역을 묶어 1사라 한다. 따라서 서사 700은 1만 7500가구가 있는 지역을 말한다. 이를 땅 700리라고 한 것은 사마천의 착오라는 것이 정설이다.

자서는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어린 동생이자 군주인 소왕을 앉혀놓고 물었다.

“전하께서 사신으로 삼아 다른 제후에게 보낼 만한 사람으로 자공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를 보필할 신하로 안회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의 장수감으로 자로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전하의 장관감으로 재여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서가 일어나 소왕 앞에 엎드려 말했다.

“전하! 우리 초나라 조상께서 나라를 여실 때 국토가 50리에 불과했습니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이 중원을 차지할 때도 그 출발은 사방 100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자는 천하를 돌아다니며 삼황오제의 치국 방법과 주공과 소공召公의 사업을 주창하고 있습니다. 그런 공자에게 700리나 되는 땅을 하사하여 현명한 제자들과 함께 다스리도록 한다면 인심이 어디로 흐르겠습니까? 장차 전하께서는 조상이 물려주신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31

소왕은 형의 말을 듣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가뜩이나 오나라에 눌려 자기 대에서 사직을 잃을까 심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소왕은 자서의 말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비록 공구가 성인이라 하더라도 조상이 물려준 종묘사직과 바꿀 수는 없지… 아, 과인이 어리석어 잠룡潛龍에게 날개를 달아줄 뻔했구나…’


이것이 운명이라면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공자는 한동안 깊은 사색에 잠겼다.

‘소왕이 나를 존경한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가 처한 정치 현실은 참으로 엄혹하기만 하다. 자서의 행위도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아주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초나라 왕을 만나지 못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공자는 분연히 일어나 수레에 올랐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나는 초 왕을 만나야 한다. 전쟁에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는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보라. 나는 밝은 덕으로 정치를 아름답게 밝혀 고단한 인민들을 더 높은 선의 세상으로 이끌고자 한다.32 비록 그곳이 화살이 빗발치는 전쟁터라 해도 나는 한순간도 인을 이루는 길을 외면할 수가 없구나!’33

“가자, 성보로! 유야, 사야, 어서 성보로 가자꾸나!”

공자 일행이 다시 행로를 바꿔 성보로 향하던 중 또 다른 급보가 전해졌다. 한 번 엇갈린 운명은 갈라진 강물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일까. 초 소왕이 성보 진중에서 급사한 것이다.

병이 잦았던 소왕이 어느 날 병석에 들었을 때 하늘에 불길한 기운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해석하는 이가 없자, 주나라 태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점을 치게 했다. 태사는 소왕에게 불길한 징조이니 제사를 지내 그 징조를 신하들에게 돌리면 화를 면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소왕이 말했다. “내 병을 없애려고 그 병을 신하에게 옮겨놓는 것이 초나라에 무슨 득이 되겠는가? 나에게 큰 잘못이 없다면 하늘이 어찌 나를 죽게 내버려둘 것이며, 죄가 있어 벌을 받는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고 옮겨지는 것이겠느냐?”

진중에서 소왕의 병이 더욱 깊어지자 태사가 “황하의 신이 저주하니 하신河神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청했다. 소왕이 웃으며 거절했다. 신하들이 나서서 거듭하여 권하자 소왕이 말했다. “나는 초나라의 군주다. 내가 빌 곳이 있다면 우리 초나라의 강산이지, 중국의 강산이 아니다.* 내가 비록 부덕하나, 남의 나라 귀신에게까지 죄를 짓지는 않았다.”

* 황하는 초나라가 아니라 주나라에 속한 강이라는 뜻이다. 당시 초나라는 자국을 중국의 일원이 아닌 독자적인 천자국으로 여겼다.

훗날 공자도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소왕의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소왕이 대도大道를 알았으니 그가 나라를 잃지 않음은 실로 당연하다.”34

소왕은 임종에 앞서 자서에게 왕위를 넘기려 했다. 그러나 자서는 왕위를 사양하고 비밀리에 영도로 철군해 소왕의 어린 아들 혜왕惠王을 옹립한 뒤 소왕의 장례를 거행했다. 소왕은 군왕의 자질을 가졌으나 시운을 만나지 못한 슬픈 운명의 임금이었다. 그의 기개 어린 최후가 초나라에 전해지자 수많은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애달파했다.

소왕의 부음을 노상에서 들은 공자는 수레를 멈추고 영도를 향해 예를 갖춘 뒤 탄식했다.

“지난번에는 북방의 황하를 건너지 못하더니 이번엔 남방의 평원을 건너지 못하는구나. 아, 이것이 나의 운명이란 말인가…”


초광접여가 노래를 부른 뜻은

공자 일행은 진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초나라 국경도시를 다시 지나가게 되었다. 수행자들은 새삼 초광접여의 노래가 떠올랐다. 그 미친 자가 부른 노래의 뜻을 이제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초나라의 광인 접여, 즉 육통은 소왕의 등극을 반대한 가문 또는 파벌에 속했거나, 아니면 자서가 집권할 때 반대 세력에 속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집권 세력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 일급 지식인이던 육통은 문둥병 환자처럼 꾸며 타인의 접근을 원천봉쇄함으로써 일신을 보존했다. 그것은 자신을 탄압하는 조정에 대한 야유의 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나, 이생이 훗날 여러 경로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공자는 35~37세 무렵 망명지 제나라 수도 임치에서, 아니면 46세 때 주례周禮를 배우러 갔다가 노자老子를 만나게 된 주나라 도읍지 낙양에서 육통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하여 혼란스러운 천하를 구하는 도에 관해 밤을 새워가며 토론하고, 때로는 울분에 젖어 통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육통이 조국 초나라로 돌아간 뒤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초광접여라는 은자의 이름으로 공자 앞에 딱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일만 세상에 전해질 뿐이다.

따라서 육통에 대한 나의 추론은 어디까지나 한 구경꾼의 상상력에 불과하다. 다만 ‘초광접여의 노래’35만큼은 단순한 은자의 풍자가 아닐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그가 풍자 이상의 실제적 그 무엇을 공자에게 암시하려 했다고 믿는다.

‘여보게 중니, 예전의 총기를 잃었는가? 진나라 대부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의 죽음을 보고도 모르겠나? 지금 초나라에 가면 도를 펴기는커녕, 뼛속까지 군국주의자이자 맹목적 왕당파인 자서에게 자칫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네. 중니, 그대는 이미 세상과 서로 어긋나 뜻이 맞지 않거늘, 다시 수레를 몰아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36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본령인 교육에 전념하시게. 천하에 도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만이 지금 자네가 실천해야 할 천명일세. 내가 아는 한 그 사업은 중니 자네 같은 봉황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네.’


원한과 복수의 소용돌이

위나라로 돌아간 공자는 거기서 5년여를 더 침잠한 뒤 예순여덟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국 노나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전념할 수 있었다. 공자와 초 소왕의 만남을 가로막은 자서는 공교롭게도 공자가 죽은 해에 같이 죽었다.

자서의 죽음은 복수가 복수를 낳는 원한의 굴레 속에 있었다. 초 소왕의 아버지인 평왕이 오자서의 아버지를 죽였고, 오자서는 평왕의 시체를 욕보였다. 오자서는 자기가 세운 왕의 아들 부차에게 자살을 강요당한 뒤 시체가 강물에 던져졌고, 소왕은 복수의 일념 속에 살다 진중에서 죽었다. 아버지 평왕에게 여자를 빼앗기고 쫓겨나 죽은 태자의 아들은 아버지의 한을 풀려다 이를 반대한 숙부 자서를 살해하고 자신도 진압군에 쫓기다 자살했다. 자서는 두 번이나 왕위를 마다하고 공자의 인의마저 사양하며 조국의 부흥을 도모했으나 조카의 손에 불의의 죽음을 당했다.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다하고자 했음에도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이들에게도 천명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을까?

일흔셋 노경의 공자는 봄볕이 짙어갈수록 종종 가뭇없는 상념에 빠질 때가 많았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문병을 하던 차에 문득 자서에 대해 묻자, 공자가 낮고 느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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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삶의 절벽에서 만난 스승, 공자, 이인우 2016 절판

알라딘: 삶의 절벽에서 만난 스승, 공자


삶의 절벽에서 만난 스승, 공자 
이인우 (지은이)책세상201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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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 【白川靜孔子傳 제1장-東西南北의 사람】

(1) Namgok Lee - 이인우 선생의 번역을 통해서 현대 일본의 거장(巨匠)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을 만난다. 배우는... | Facebook

Namgok Lee

  · 
이인우 선생의 번역을 통해서 현대 일본의 거장(巨匠)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을 만난다.
배우는 것이 기쁜 것을 실감케하는 노년의 행운이다. 
주공(周公)과 양호를 공자와 이렇게 만나게 하는 것은 물론 시라카와의 상상력이다.
나에게는 논어의 여러 구절들이 보다 생생한 상상력으로 다가온다.

【白川靜孔子傳 제1장-東西南北의 사람】 <16>
꿈과 그림자①
  자료를 따라 공자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대체로 이상과 같다. 귀국 후의 공자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할 만한 것은 없다. 아들 리鯉를 잃고 이어서 안연을 잃은 공자는, ‘아,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가’(선진-역주1)라고 탄식하며 깊은 슬픔에 잠긴다. 망명 중에 고락을 함께 한 자로도 위나라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사상가로서 원숙해진 공자는 74살로 죽을 때까지 수년간을,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뜻깊고 행복감에 찬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나, 차라리 너희들의 손에 죽으련다’(자한-역주2)라고 한 공자는 말 그대로, 제자들로부터 心喪3년의 복장服葬을 받았다. 벽안의 크릴이 ‘생애 중에 3년을 이런 일로 보낸다는 것은 서양인의 머리로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면서도, 이 시기에 제자들의 공적인 활동이 거의 기록돼 있지 않다는 사실로 미루어 ‘기적은 역시 실제로 일어났었다고 믿어지는 것이다’(크릴 저, <공자> 중에서)라고 쓴 그대로이다.
  공자의 죽음은 평온했고 평범했다. <예기> ‘단궁 상’에, 죽기 7일 전 아침 일찍 ‘태산이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쓰러지는가, 철인은 이제 시들어지는가’라고 노래하며 죽음을 예언했다고 하는 것은 물론 지어낸 이야기다.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에게 죽음은, 죽는 것이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자에게는 죽음에 대한 기록이 없다. 물론 <춘추>의 경문에는, 애공조에 ‘16년 여름 4월 己丑, 공자 卒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애공으로부터는 弔祭辭(추도사)로 뢰誄가 내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 전승은 없다. 와쓰지 박사(역주3)는 저 ‘죽음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크릴, <공자>) 전기의 의미를 다른 이유로 중요시 한다. 분명 탁월한 지적으로, ‘삶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선진-역주4)라고 한 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산다는 것이 모두 죽음에의 의미부여였다. 더욱이 ‘삶을 구하여 인을 해치지 않고,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위령공-역주5)라고 하듯이 죽음은 삶 속에 포함되어 있다. 공자의 죽음이 왜 위대한 죽음이었는가는 크릴이 놀라움에 가득 차 서술하고 있는 제자들의 心喪3년이라는 사실로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공자의 생애에 관한 전기적 사실의 서술은 끝났다. 그러나 사실이 반드시 진실은 아니다.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진실인 것이다. 공자를 大聖이라고 쓰는 것은 차라리 쉽다. 그것은 공자의 전기적 사실 속에서 아름다운 어록인 <논어>의 말을 적당히 보태면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세가’ 이래의 수많은 공자전은 대개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의 의미를 푸는 것은 실로 쉽지 않다. 의식의 밑바닥에 고인 그 어떤 것에도 조명을 비추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다이몬의 속삭임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델포이의 신탁에 어째서 그토록 헌신을 필요로 했는가. 성자라 일컬어지는 사람에겐 그러한 不可解한 면이 있는 것이다. 공자의 전기 중에서도 그 행동을 설명할 무언가가 필요한 때가 있다. 공자의 언동에는 사람들이 꿈꿀 때와 같은,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느끼게 할 때가 있다. 또 어떤 때는 무엇인가 환영에 두려워 떠는 듯한 모습이 있다. 공자가 지닌 꿈과 환영에 대해 잠시 자유로이 말하고 싶다.
【白川靜孔子傳 제1장-東西南北의 사람】 <17>
 꿈과 그림자②
  공자는 巫女의 자식이었다. 아비의 이름도 모르는 庶生子였다. 尼山에 빌어 태어났다는 것도 일반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저 나사렛 사람처럼 신은 기꺼이 그런 자식을 선택한다. 공자는 선택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나타날 때까지는 아무도 그의 前半生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 신은 스스로를 맡겨온 자에게 깊은 고뇌와 번민을 안겨주어 그것을 자각시키려 한다. 그 자각을 얻은 자가 성자가 되는 것이다.
  공자는 일생 꿈꾸기를 계속했다. 꿈에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周公이었다. 殷周혁명, 西周의 창업을 이룩한 이 성자는, 明保라 불린 주나라 최고의 성직자이며 또한 그 문화의 창조자였다. 동시에 이 성자는 또한, 비극의 성자이기도 했다. 공자는 만년의 어느 날 ‘심하구나, 나의 노쇠함이여. 오래구나, 내가 꿈에서 다시 주공을 뵙지 못함이’(술이-역주1)라고 탄식하고 있다. 공자는 평생 주공을 꿈에서 보고 주공과의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주공이 공자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는 지는 알 수 없다. ‘斯文을 잃지 말라’라는 것과 같은 명령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자는 안심하고 天命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천명을 말하는 행위는 모독이나 다름없다.
  공자에게는 또 하나의 幻影이 있었다. 그것은 다이몬으로 인식되었던 신의 소리가 아니라 현실의 인물로서 행동한다. 그러나 공자는 아마도 그 인물 속에서 다이몬과 같은 이상한 무언가의 그림자를 느끼고, 그를 두려워하고, 때로는 반발하고, 때로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된다. 그것은 양호라는 남자였다. 양호는 <논어>와 <맹자>에 양화陽貨라는 이름으로 보이는 사나이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와 양호의 만남은 공자가 아직 17살도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계씨가 士에게 향응을 베풀 때, 공자도 문학을 닦는 사람의 하나로 여기에 참가했다. 그런데 양호가 ‘계씨는 선비를 대접하는 것이지, 감히 그대를 향응하는게 아니다’라며 공자를 물러가게 했다. 이때의 공자는 아직 어머니의 상중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사기>의 해석이다. ‘세가’ 속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사의 하나인데, 이것은 어쩌면 양호 계통 자료의 殘片이 삽입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양호는 뛰어난 文辭의 소유자였다. 그것은 ‘양화편’ 첫장에 보이는 공자와의 문답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巫史의 学에도 통해 있었다. <좌전>‘애공9년에는 그가 <주역>을 가지고 전쟁의 길흉을 점치는 기사가 있다. 공자학파의 손으로 이뤄진 문헌에 이와같은 기사가 있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필시, 양호도 또한 공자와 같이 師儒에서 나와, 時政의 개혁에 나서고, 門弟를 거느리고, 당시의 귀족정치에 도전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의 학파에 전해진 자료는 유학의 융성에 따라 소실된 것 같은데, 얼만인가는 儒家의 자료 속에 섞여 들어가 있는 것이다.
 양호는 공자보다 다소 연배가 위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일찍부터 계씨를 따랐지만 3가의 전제정치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3가를 누르고 자신의 전제정권을 세운 것도 그에게는 혁명의 행동이었다. 공산불요도 그 때 양호와 한 동아리였다. 양호는 아마도 공자를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지로 여기고 초빙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를 경원했다. 그래도 공산불요의 초빙에는 적극 응하려고 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비슷했을 것이다. 다만 공자는 양호를 거부했다. 양호가 전제에 성공하자, 공자는 곧바로 제나라로 망명해 古樂 연구 등을 하고 있다. 
【白川靜孔子傳 제1장-東西南北의 사람】 <18>
 꿈과 그림자③
  양호는 3년 후 실각했다. 3가가 단결해 자기 세력을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양호는 노나라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옥대궁을 훔쳐 제나라로 망명했다. 상징이 있는 곳에 君權의 정통성이 있다는 생각이리라. 제나라에서도 그는 門下를 임금 쪽에 붙이고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다. 양호가 제나라로 망명해 오자 이번에는 공자가 서둘러 귀국하고 있다. 그 후, 협곡의 회담으로 제·노 양국관계가 개선되었다. 제나라는 더이상 양호를 머물게 내버려둘 수 없어 그를 잡으려 했으나, 양호는 용케 망명해 송나라로 달아났다가 晋으로 가 趙簡子 밑으로 들어간다. 양호가 멀리 가버린 뒤에는 공자의 세상이다. 자로가 계씨의 宰(가신의 우두머리)가 되고, 공자도 노나라 국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공자의 三桓억제책도, 양호와 근본적으로는 다를 게 없었다. 공자는 자로를 시켜 3환의 사읍을 무장해제시키려 한다. 처음에는 순조로왔지만 결국 실패하고 공자도 양호와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나라로 갈 수 없다. 그래서 연고를 찾아 위나라로 갔다.
   위나라에서는 상당한 대우도 받았고 제자들도 각각 벼슬살이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공자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아무튼, 그럭저럭 지내기로는 그리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는 환영에 시달린다. 애공2년(전493) 후원자였던 위영공이 죽자, 진나라가 그동안 송나라에 망명해 있던 태자를 위나라에 입국시켰다. 주모자는 조씨(조간자), 태자를 받들고 위나라 잠입에 성공한 사람은 진나라에 망명해 있던 양호였다. 환영은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공자는 서둘러 다시 남방의 陳나라로 간다. 가는 길에 광땅에서 포위를 당하고, 송나라에서는 환퇴의 습격을 받는다. 제자들에게도 불안한 안색이 농후하다. 
  이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공자는 주공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하늘이 아직 사문을 없애려 하지 않으시는데, 광인 따위가 나를 어찌하겠는가’ ‘하늘이 덕을 나에게 주셨다. 환퇴가 감히 나를 어찌하랴’. 몰래 쫓아오는 환영에 떠는 공자는 주공의 목소리에서 생기를 되찾는다. ‘양화편’에는, 양화와 공산불요의 이야기와 함께 불힐佛肹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불힐은 중모中牟라는 진나라 도시의 재.  그 땅을 거점으로 진나라에 반기를 들려고 할 때 공자를 초빙한다. 자로는 이때도 강경하게 반대한다. ‘불힐, 중모로써 반란하려 합니다. 선생님, 왜 가시려 하십니까’라는 강한 어조로 반대한다. 공자는 이에 대해, ‘참으로 굳센 것은 갈아도 닳지 않는다. 진실로 흰 것은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며, ‘나 어찌 저 박이겠느냐. 마냥 한 곳에 매달려 사람들이 따먹지 못하게 하겠느냐‘라는, 공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투를 하고 있다(역주1). 무언가 집착하고 있는 듯한 語氣이다. 불힐의 반란은, 아마 <좌전>에 기록된 애공5년(전490) 조앙趙駚이 위나라를 치려고 중모를 포위했을 때의 일인 것 같다. 중모는 본래 위나라 땅으로, 이때 그 귀속을 놓고 晋나라와 衛나라 간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벌써 위나라를 떠나 陳나라에 가 있었다. 아마도 그곳으로 불힐의 초빙장이 날아왔을 것이다. 양화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晋나라와 衛나라의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이라면 조씨에게 돌아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환영은 떨어져 있다. 이제 그 환영에 한 방 먹이고 싶다. 공자의 마음 속은 반발심과 증오로 들끓고 있다. 저 공자답지 않은 말투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역시 그 환영을 향한 말이었다고 해석하고 싶다. 환영에 대해 한 말이므로 이것은 당연히 실현되지 않았다.
 공자는 다시 남쪽 초나라로 간다. 여기서는 환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환영이 없는 곳에는 긴장도 없었다. 공자는 뒷날의 반란자인 白公등의 무리에게 다소의 영향을 남기고 떠났다. 공자와 의견이 맞지 않았던 섭공葉公이 그 백공의 난을 평정하고 있다.
【白川靜孔子傳 제1장-東西南北의 사람】 <19>
 꿈과 그림자④
  모든 희망을 잃고, 공자는 다시 陳으로 돌아왔다. 이미 70에 가까운 공자에게 더 이상의 방황은 무리였고, 불가능하기까지 했다. 노나라에서는 제자 염구와 유약이 스승의 귀국 공작을 계속 벌이고 있었다. 공자 추방을 주도했던 계환자도 이미 죽고(전492), 염구도 실권자 계씨의 재가 되어 있다. 계씨에게 공자 復國의 양해가 떨어지자, 사자가 공자를 향해 서둘러 떠났다. 高師를 앙망하는 젊은 학도와 광간狂簡(뜻이 크고 진취적인 사람-역자)의 움직임도 보고되었다. 공자는 귀국을 결심한다.
  공자는 위나라로 돌아갔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는 불힐의 반란을 도우려한 뒤에는 조간자와 만나기 위해 黃河까지 갔다가 2명의 현인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희망을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하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간자는 양호의 주인이 아니던가. 양호는 애공9년(전486)에는 아직 건재해 있었다. 만약 공자가 황하가에 갔다면, 그것은 이 귀국길의 일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처음에는 晋나라에 갈 희망을 품었던 듯 하다. 그러나 양호가 그곳에 망명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양호도 아마 죽었을 것이다. 귀국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공자는 이 황하의 물결을 건너갔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귀국하기로 한 지금, 그 기회는 이미 사라졌다. 공자는 황하의 물가에 서서 탄식했다고 한다.
    아름답구나 강물이여, 양양하구나. 丘, 이를 건너지 못하는 것은, 天命이      런가.
  공자는 여기서 마침내 환영과 결별한다. 그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논어>에 ’선생님, 강가에 서서 말씀하기를, 흘러 가는 것이 저와 같구나, 낮밤을 가리지 않는구나‘(자한-역주1)라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이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귀국하고나서의 공자는 더는 환영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동시에, 주공을 꿈에서 보는 일도 없어졌다. 그러나 환영은 과연 양호의 환영이었을까. 환영은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양호를 매개로 한 자기 자신의 그림자는 아니었을까. 자기의 理想態에 대한 否定態로서의 타락한 모습을 공자는 양호에게서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공자는 항상 주공을 꿈에서 보고 있었기에, 이상태를 향한 希求를 버리지 않았다. 그것이 공자의 구원이었다. 처음의 망명 이래 22년간, 공자는 하나의 목소리와 하나의 그림자 속에 살았다. 그 목소리와 그림자 어느쪽이든, 공자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사람은 누구라도 모두, 그러한 소리를 듣고 그림자를 보며 산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자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뜻에서, 공자나 소크라테스같은 사람은 희귀한 인격이었다. 위대한 인격이었다. 그리고 그 점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위대한 인격의 생애를 꿰뚫는 리듬을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자의 망명생활, 따라서 그 생애의 주요한 부분에는 긴장된 아름다운 리듬이 흐르고 있다. ‘너희들은 나에게 숨기는 게 있는가. 나는 그대들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 나의 행한 일, 너희들과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나니. 이것이  丘이니라’(술이편-역주2)라고 공자 스스로 말하고 있음에도, 공자의 주위에는 일종의 신비주의가 떠돈다. 제자들이 ‘숨긴다’고 느낀 것은, 아마도 그 아름다운 리듬을 움직이고 있는 무언가를 감지했다는 뜻이리라. 나도 공자의 생애 속에서 그와같은 리듬의 흐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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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 
안회의 죽음에 대한 공자의 절망과 통곡을 일본인 학자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1910~2006)는 그의 저서 <공자전(孔子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군요.

이인우 선생의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안연이 죽자, 공자 슬퍼하며 말하였다. “아,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顔淵死 子曰 噫 天喪予 天喪予 (11/8)
안연이 죽으니, 공자께서 통곡하였다. 공자를 따르던 한 제자가 말하기를, “선생님께선 너무 슬퍼하십니다.” 
“아, 그렇게 보였느냐. 그 사람을 위해 통곡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그리하겠느냐.” 
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11/9)> 

<<공자문례(孔子問禮)②

문례설화는 <장자(莊子)>에 처음 보이며 그 창작자는 장자 일파이다. 그러나 ‘천도편(天道篇)’에 보이는 문례의 설화는, 공자에게 묵자류의 ‘겸애무사(兼愛無私)는 인의(仁義)의 정(情)이다’라고 주장하게 하는 등 장자 말류가 지어낸 것인 듯하다. 장자는 유학(儒學)에 깊어서 장자의 사상은 유가의 비판으로부터 나오는 바가 있다. 장자가 문례설화를 가지고 그 학통(學統)을 높이려고 했을 리는 없다. 장자의 유가 비판은 종종 공자와 안회의 문답이라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안회 말하기를, “(도에)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중니(仲尼) 말씀하시기를,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인의를 잊어버렸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가(可)하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뵙고 말하기를,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예악을 잊어버렸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가하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장자 ‘대종사(大宗師)’
안회는 생각이 깊고 자득한 사람이다. 그 스승에게 고하기를 ‘인의를 잊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승은 ‘가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아직은 멀었다’라고 한다. 다른날에 또, 이번에는 ‘예악을 잊었다’고 한다. 인의예악은 당시 유가의 근본 주장이다. 그러나 스승은 역시 ‘아직 멀었다’고 한다. 공자는 이 준재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설화 속의 공자는 후학에 의해 노모스화된 유가 교설의 초극(超克)을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뵙고 말하기를,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좌망(坐忘)한 것 같습니다. 중니가 깜짝 놀라 얼굴빛을 고치며 말하기를, “무엇을 좌망이라 하는가?” 안회가 말하기를, “지체(肢體)를 버리고, 총명(聰明)을 물리치고, 형태를 벗어나고, 지(知)를 제거하고, 대통(大通)과 같아졌습니다. 이를 좌망이라고 합니다. 중니 말하기를, ”같아지면 곧 좋아함(주관)이 없어진다. 화(化)하면 곧 상(常; 고정된 상태)이 없어진다. 너는 과연 현명하구나. 구(丘)는 청컨대 너의 뒤를 따르련다. -상동
좌망이란 지각적인 것, 이성적인 것의 방기(放棄)를 말한다. 말하자면 직관(直觀)이다. 그것은 노모스적인 원리로서의 인의예악을 버리는 곳에서 생겨난다. 공자에게서 밝혀진 이데아적인 세계는 이윽고 유묵(儒墨)의 무리에 의해 노모스적인 사회적 일반자로 전화(轉化)되었다. 그것은 집단이 가진 규범성에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만 하는 세계이다. 묵자와 맹자의 학설은 그 사상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자는 그 집단의 초월성으로 인해 주체적인 삶이 자유롭게 숨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의 충동은 극도로 억압된다. 따라서 노모스적인 세계의 부정은 개인의 주체성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 되며, 보다 근원적인 생의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생의 철학, 실존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이 생기게 되는 것은 대개 그러한 사상적 요구로부터이다. 장주의 사상이 종종 생철학이나 실존척학으로 여겨지는 것도 또한 그런 의미에서이다. 
<장자>에는 공자와 안회가 토론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 이밖에 8조 정도 더 있는 것으로 보아 장주는 이 두 사람을 토론시키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그것은 공자의 권위를 상징적인 것으로 하고, 우언(寓言)의 세계에서 이를 비판하는 수사적인 편의에서라기보다도, 조금 끼어드는 식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그런 형식으로 자기 사상의 초극을 바랐던 것은 사실은 공자 자신이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논어>‘공야장편’에 공자와 자공의 문답 1조가 보인다. 공자가 자공에게, ‘너와 회는, 누가 더 나은가’라고 묻는다. 자공은 물론 한 점이나 두점 정도 접고 있는 상대이다. ‘사(賜; 자공의 이름)가 어찌 감히 회를 바라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압니다. 사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공자는 ‘아무렴. 나나 너나 모두 그와 같지 못하다’라고 한다. 자공이 아직 공자의 망명길을 함께 하고 있던 때의 일일 것이다. 그 때 벌써 공자는 이 젊은 준재가 자신을 뛰어넘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화는 공자가 단순히 사람의 재능에 대해 논한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말한 인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설사 안회 뿐이었다고 해도, 안회가 당시 공자보다도 높은 자각에 도달해 있을 리는 없다. ‘따르고자 하여도 유(由; 방법)가 없을 뿐’(자한편)라는 것이 당시 안회의 영탄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공자는 한번 형성된 사상이 지닌 완결성은 그 완결성으로 인해 스스로 한계를 가진 것이 됨을 이미 통찰하고,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데아적인 완성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데아는 영원히 그 실현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아의 체인(體認)은 언제나 인격적인 주체의 실천에 의한 것인 이상, 그 새로운 발전은 다른 인격의 실천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공자는 그런 의미에서 그것을 안회에게 기대했던 것이다. 안회를 잃었을 때, ‘아아,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라고 길게 탄식했던 것도 그런 의미였다. 공자는 이미 새로운 이데아의 주체적 행위자를 찾고 있던 것이었다.
필시 장주는 이 공자의 원망(願望)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장주는 공자와 안회와의 토론이라는 우화형식을 통해 이를 실현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장주를 공자의 사상적 계보의 정통 계승자라고 하고, 또 안씨의 유(流)에 속한다고 하는 곽말약씨의 설에 찬성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이다. 장주는 새로운 이데아의 탐구자였다. 그리고 노모스적인 세계 속에 살면서 이데아를 회복했다. 다만 그 회복은 노모스적인 세계의 부정을 통하여 행해졌다. 따라서 저절로 그것은 공자의 그것과는 다르게 되는 것이다. 공자에게서 인(仁)은, 전통의 모든 의미가 이데아로서 거기에서 체인(體認)되는 장(場)이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장자는 그것을 실체화하고 있다. 장자가 말하는 도란 이데아적 실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에는 분명히 계보적인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를, 이 학파에 초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장주의 후학들에 의해, 공자문례의 설화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공자문례 설화의 사상사적 의미이다. 다만 노자의 사상은 아마도 장자보다 늦게 형성되었고, <노자>라는 책으로 정착한 것은 더욱 후의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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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川靜孔子傳 제4장-유교의 비판자】 <57>
孔子問禮②

문례설화는 <莊子>에 처음 보이며 그 창작자는 장자 일파이다. 그러나 ‘天道篇’에 보이는 문례의 설화는, 공자에게 묵자류의 ‘兼愛無私는 仁義의 情이다’라고 주장하게 하는 등 장자 말류가 지어낸 것인 듯하다. 장자는 儒學에 깊어서 장자의 사상은 유가의 비판으로부터 나오는 바가 있다. 장자가 문례설화를 가지고 그 學統을 높이려고 했을 리는 없다. 장자의 유가비판은 종종 공자와 안회의 문답이라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안회 말하기를, 회, (도에)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仲尼 말씀하시기를,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회, 저는 인의를 잊어버렸습니다. 중니가 말했다. 可하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다른 날, 다시 공자를 뵙고 말하기를, 회,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회, 예악을 잊어버렸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가하다.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장자 ‘大宗師’
안회는 생각이 깊고 자득한 사람이다. 그 스승에게 고하기를 ‘인의를 잊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승은 ‘可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아직은 멀었다’라고 한다. 다른날에 또, 이번에는 ‘예악을 잊었다’고 한다. 인의예악은 당시 유가의 근본주장이다. 그러나 스승은 역시 ‘아직 멀었다’고 한다. 공자는 이 준재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설화 속의 공자는 후학에 의해 노모스화된 유가 교설의 超克을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른 날 다시 공자로 뵙고 말하기를, 회,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말하기를, 회, 坐忘한 것 같습니다. 중니가 깜짝 놀라 얼굴빛을 고치며 말하기를, 무엇을 좌망이라 하는가? 안회가 말하기를, 肢體를 버리고, 聰明을 물리치고, 형태를 벗어나고, 知를 제거하고, 大通과 같아졌습니다. 이를 좌망이라고 합니다. 중니 말하기를, 같아지면 곧 좋아함(주관)이 없어진다. 化하면 곧 常(고정된 상태)이 없어진다. 너는 과연 현명하구나. 丘는 청컨대 너의 뒤를 따르련다. -상동
坐忘이란 지각적인 것, 이성적인 것의 放棄를 말한다. 말하자면 直觀이다. 그것은 노모스적인 원리로서의 인의예악을 버리는 곳에서 생겨난다. 공자에게서 밝혀진 이데아적인 세계는 이윽고 儒墨의 무리에 의해 노모스적인 사회적 일반자로 轉化되었다. 그것은 집단이 가진 규범성에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만 하는 세계이다. 묵자와 맹자의 학설은 그 사상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자는 그 집단의 초월성으로 인해 주체적인 삶이 자유롭게 숨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의 충동은 극도로 억압된다. 따라서 노모스적인 세계의 부정은 개인의 주체성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 되며, 보다 근원적인 생의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 생의 철학, 실존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이 생기게 되는 것은 대개 그러한 사상적 요구로부터이다. 장주의 사상이 종종 생철학이나 실존척학으로 여겨지는 것도 또한 그런 의미에서이다.
<장자>에는 공자와 안회가 토론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 이밖에 8조 정도 더 있는 것으로 보아 장주는 이 두 사람을 토론시키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그것은 공자의 권위를 상징적인 것으로 하고, 寓言의 세계에서 이를 비판하는 수사적인 편의에서라기보다도, 조금 끼어드는 식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그런 형식으로 자기 사상의 초극을 바랐던 것은 사실은 공자 자신이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논어>‘공야장편’에 공자와 자공의 문답 1조가 보인다. 공자가 자공에게, ‘너와 회는, 누가 더 나은가’라고 묻는다. 자공은 물론 한 점이나 두점 정도 접고 있는 상대이다. ‘사賜(자공의 이름)가 어찌 감히 회를 바라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압니다. 사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공자는 ‘아무렴. 나나 너나 모두 그와같지 못하다’라고 한다. 자공이 아직 공자의 망명길을 함께 하고 있던 때의 일일 것이다. 그 때 벌써 공자는 이 젊은 준재가 자신을 뛰어넘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화는 공자가 단순히 사람의 재능에 대해 논한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말한 인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설사 안회 뿐이었다고 해도, 안회가 당시 공자보다도 높은 자각에 도달해 있을 리는 없다. ‘따르고자 하여도 由(방법)가 없을 뿐’(자한)라는 것이 당시 顔子의 영탄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공자는 한번 형성된 사상이 지닌 완결성은 그 완결성으로 인해 스스로 한계를 가진 것이 됨을 이미 통찰하고,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데아적인 완성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데아는 영원히 그 실현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아의 體認은 언제나 인격적인 주체의 실천에 의한 것인 이상, 그 새로운 발전은 다른 인격의 실천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공자는 그런 의미에서 그것을 안회에게 기대했던 것이다. 안회를 잃었을 때, ‘아아,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라고 길게 탄식했던 것도 그런 의미였다. 공자는 이미 새로운 이데아의 주체적 행위자를 찾고 있던 것이었다.
필시 장주는 이 공자의 願望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장주는 공자와 안회와의 토론이라는 우화형식을 통해 이를 실현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장주를 공자의 사상적 계보의 정통 계승자라고 하고, 또 안씨의 유에 속한다고 하는 곽말약씨의 설에 찬성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이다. 장주는 새로운 이데아의 탐구자였다. 그리고 노모스적인 세계 속에 살면서 이데아를 회복했다. 다만 그 회복은 노모스적인 세계의 부정을 통하여 행해졌다. 따라서 저절로 그것은 공자의 그것과는 다르게 되는 것이다. 공자에게서 仁은, 전통의 모든 의미가 이데아로서 거기에서 體認되는 場이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장자는 그것을 실체화하고 있다. 장자가 말하는 道란 이데아적 실재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에는 분명히 계보적인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를, 이 학파에 초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장주의 후학들에 의해, 공자문례의 설화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공자문례 설화의 사상사적 의미이다. 다만 노자의 사상은 아마도 장자보다 늦게 형성되었고, <노자>라는 책으로 정착한 것은 더욱 후의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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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0

농촌과 목회 | '북한'의 검색결과



농촌과 목회 | '북한'의 검색결과



북한 (12)
농촌과 목회 56호(2012년 겨울호)2018.03.30
농촌과 목회 61호(2014년 봄호)2018.03.30
농촌과 목회 65호(2015년 봄호)2018.03.22
농촌과 목회 42호(2009년 여름호)2017.11.14
농촌과 목회 23호(2004년 가을호)2017.11.08
농촌과 목회 21호(2004년 봄호)2017.11.08
농촌과 목회 17호(2003년 봄호)2017.10.13
농촌과 목회 11호(2001년 가을호)(2)2017.10.13
농촌과 목회 10호(2001년 여름호)2017.10.13
농촌과 목회 7호(2000년 가을호)2017.10.13
농촌과 목회 56호(2012년 겨울호)
2018.03.30 16:47, 053호-056호(2012)



1390_2012_겨울호_56_권두언_북방의끓는가마가안보이는가?_한경호
1391_2012_겨울호_56_이명박정부에서의생명과평화_생명의강을다시흐르게하라!_최병성
1392_2012_겨울호_56_이명박정부에서의생명과평화_강정,생명과평화가무엇이더냐?_서성환
1393_2012_겨울호_56_이명박정부에서의생명과평화_생명과평화의눈으로보는원전건설_이승무
1394_2012_겨울호_56_이명박정부에서의생명과평화_골프장건설로아파하는사람,생명체들_박순웅
1395_2012_겨울호_56_이명박정부에서의생명과평화_한반도평화의위기와통일선교_김병균
1396_2012_겨울호_56_농촌목회이야기_잔잔하게두드린농촌목회이야기_김영진
1397_2012_겨울호_56_농촌목회이야기_금모래(金砂)교회이야기_한양호
1398_2012_겨울호_56_도시작은교회이야기_취리(取利)하는자들을찾아서_박성구
1399_2012_겨울호_56_귀농이야기_기쁨과행복을주는귀농생활_이종란
1400_2012_겨울호_56_팔당이야기_팔당농민들의삶과투쟁_서규섭
1401_2012_겨울호_56_마을만들기_지역을살리는협동조합만들기7단계_이인우
1402_2012_겨울호_56_농촌목회자와건강_병알아보는값_임락경
1403_2012_겨울호_56_목회단상_목회를하다보면(4)-한국교회의연합운동에대한단상_장의성
1404_2012_겨울호_56_목회단상_품이넓은사람-돌아본농촌목회7년8개월_손은기
1405_2012_겨울호_56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
1406_2012_겨울호_56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곤충이야기-송장벌레_
1407_2012_겨울호_56_축산분뇨처리_가축분뇨의액비처리를통한 _이명규
1408_2012_겨울호_56_탈핵과에너지_한국에서의에너지전환,현황과전망_박진희
1409_2012_겨울호_56_북한바로알기_북한농업과농촌의활동체계와현실_채경희
1410_2012_겨울호_56_북한바로알기_분단을치유하는소통의해설사_김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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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과 목회 61호(2014년 봄호)
2018.03.30 16:35, 061호-064호(2014)



1508_2014_봄호_61_권두언_한국교회파괴의주범,공로주의_한경호
1509_2014_봄호_61_한국기독교사상의광맥을캐본다_다석유영모선생의성경이해와영성_박재순
1510_2014_봄호_61_한국기독교사상의광맥을캐본다_함석헌선생과21세기한국교회_이은선
1511_2014_봄호_61_한국기독교사상의광맥을캐본다_탈(脫)중심의신앙인김교신_신익상
1512_2014_봄호_61_한국기독교사상의광맥을캐본다_한국인자신의교회설립자최태용_박숭인
1513_2014_봄호_61_한국기독교사상의광맥을캐본다_장공김재준목사의신학과지향_김희헌
1514_2014_봄호_61_농촌목회이야기_지켜야할현장,구성중앙교회이야기_배중훈
1515_2014_봄호_61_농촌목회이야기_‘나눔의집’을통한지역섬김이야기_국충국
1516_2014_봄호_61_농사이야기_유병태집사의농사이야기_유병태
1517_2014_봄호_61_농촌목회자와건강_쑥_임락경
1518_2014_봄호_61_목회단상_목회를하다보면(9)-야훼하나님과이스라엘_장의성
1519_2014_봄호_61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
1520_2014_봄호_61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곤충이야기-노린재_
1521_2014_봄호_61_성경과농사_농사용어속에나타난성서신학(4)_이영재
1522_2014_봄호_61_새로운복음_도마복음읽기(1)_한석진
1523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스리랑카의생명농업_LalithGunathilaka
1524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지구를치유하는생명농업_NishanthaGunaratne
1525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생명과삶을위한오리사농민들의투쟁_VincentRajkumar
1526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자바의농촌교회와유기농업_SuwartoAdi
1527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지역의전통적지혜와생물다양성_JunpiterPakpahan
1528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태국그리스도교회의사회개발및사회적단위에서행하고있는유기농업체제_NuttapongManeerkorn
1529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캄보디아에서의생태-경제-교육-선교모델_SornSarath
1530_2014_봄호_61_남북농업교류_남북한농업기술협력과정과방향_곽강수
1531_2014_봄호_61_농업과공동체_공동체삶의기초,농업_강동진
1532_2014_봄호_61_협동조합_협동조합,이렇게만들었습니다_정성회
1533_2014_봄호_61_치유와삶_운봉자연치유센터이야기_김경수
1534_2014_봄호_61_핵에너지_원자력에대한거짓신화와진실_KNCC
1535_2014_봄호_61_3ㆍ1운동_3ㆍ1운동95돌기념남북공동합의문_KNCC






1508_2014_봄호_61_권두언_한국교회파괴의주범,공로주의_한경호.pdf

1509_2014_봄호_61_한국기독교사상의광맥을캐본다_다석유영모선생의성경이해와영성_박재순.pdf

1510_2014_봄호_61_한국기독교사상의광맥을캐본다_함석헌선생과21세기한국교회_이은선.pdf

1511_2014_봄호_61_한국기독교사상의광맥을캐본다_탈(脫)중심의신앙인김교신_신익상.pdf

1512_2014_봄호_61_한국기독교사상의광맥을캐본다_한국인자신의교회설립자최태용_박숭인.pdf

1513_2014_봄호_61_한국기독교사상의광맥을캐본다_장공김재준목사의신학과지향_김희헌.pdf


1514_2014_봄호_61_농촌목회이야기_지켜야할현장,구성중앙교회이야기_배중훈.pdf

1515_2014_봄호_61_농촌목회이야기_‘나눔의집’을통한지역섬김이야기_국충국.pdf

1516_2014_봄호_61_농사이야기_유병태집사의농사이야기_유병태.pdf

1517_2014_봄호_61_농촌목회자와건강_쑥_임락경.pdf

1518_2014_봄호_61_목회단상_목회를하다보면(9)-야훼하나님과이스라엘_장의성.pdf

1519_2014_봄호_61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pdf

1520_2014_봄호_61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곤충이야기-노린재_ .pdf

1521_2014_봄호_61_성경과농사_농사용어속에나타난성서신학(4)_이영재.pdf

1522_2014_봄호_61_새로운복음_도마복음읽기(1)_한석진.pdf

1523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스리랑카의생명농업_LalithGunathilaka.pdf

1524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지구를치유하는생명농업_NishanthaGunaratne.pdf

1525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생명과삶을위한오리사농민들의투쟁_VincentRajkumar.pd

1526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자바의농촌교회와유기농업_SuwartoAdi.pdf

1527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지역의전통적지혜와생물다양성_JunpiterPakpahan.pdf

1528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태국그리스도교회의사회개발및사회적단위에서행하고있는유기농업체제_Nu

1529_2014_봄호_61_아시아생명농업포럼발제문_캄보디아에서의생태-경제-교육-선교모델_SornSarath.pdf

1530_2014_봄호_61_남북농업교류_남북한농업기술협력과정과방향_곽강수.pdf

1531_2014_봄호_61_농업과공동체_공동체삶의기초,농업_강동진.pdf

1532_2014_봄호_61_협동조합_협동조합,이렇게만들었습니다_정성회.pdf

1533_2014_봄호_61_치유와삶_운봉자연치유센터이야기_김경수.pdf

1534_2014_봄호_61_핵에너지_원자력에대한거짓신화와진실_KNCC.pdf

1535_2014_봄호_61_3ㆍ1운동_3ㆍ1운동95돌기념남북공동합의문_KNCC.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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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과 목회 65호(2015년 봄호)
2018.03.22 15:51, 065호-068호(2015)



1608_2015_봄호_65_권두언_대한민국은민주공화국이다_한경호
1609_2015_봄호_65_국가란무엇인가?_국가란무엇인가?_유시민
1610_2015_봄호_65_국가란무엇인가?_성경을통해보는국가_권진관
1611_2015_봄호_65_국가란무엇인가?_근대서구사상에서의국가이해_박일준
1612_2015_봄호_65_국가란무엇인가?_국가와시장사이에서정의를묻다_신익상
1613_2015_봄호_65_국가란무엇인가?_삼평리농촌할매들에게국가는무엇인가?_백창욱
1614_2015_봄호_65_농촌목회이야기_무주가당교회이야기_김길선
1615_2015_봄호_65_농촌목회이야기_남부중앙교회와천안동산교회의교류이야기_박용태
1616_2015_봄호_65_농촌예수마을_농촌에들어가예수마을을일구는도시교회이야기_최재호
1617_2015_봄호_65_농부목사_농부가된이경한목사이야기_이경한
1618_2015_봄호_65_농촌목회자와건강_콩밥먹기싫다_임락경
1619_2015_봄호_65_목회단상_목회를하다보면(13)-역지사지(易地思之)와황금율_장의성
1620_2015_봄호_65_목회단상_벼랑끝에서맞는봄-마을을교회로_이진
1621_2015_봄호_65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
1622_2015_봄호_65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곤충이야기-사마귀_
1623_2015_봄호_65_성경과농사(8)_롯의이농과아브람의귀농_이영재
1624_2015_봄호_65_새로운복음_도마복음읽기(5)_한석진
1625_2015_봄호_65_협동조합_협동조합운동을통한치유와화해의사역 _한경호
1626_2015_봄호_65_평화운동_퀘이커리즘과평화운동_정지석
1627_2015_봄호_65_농과인문학_농과인문학,농민은천민(天民)이다_서성열
1628_2015_봄호_65_북한농업_북한의농업문제,극복대안과전망_김철
1629_2015_봄호_65_치유와건강_내가만난순리치유_강상빈


1630_2015_봄호_65_동학이야기_민초(民草),혁명을말하다_박맹수



1608_2015_봄호_65_권두언_대한민국은민주공화국이다_한경호.pdf

1609_2015_봄호_65_국가란무엇인가_국가란무엇인가_유시민.pdf

1610_2015_봄호_65_국가란무엇인가_성경을통해보는국가_권진관.pdf

1611_2015_봄호_65_국가란무엇인가_근대서구사상에서의국가이해_박일준.pdf

1612_2015_봄호_65_국가란무엇인가_국가와시장사이에서정의를묻다_신익상.pdf

1613_2015_봄호_65_국가란무엇인가_삼평리농촌할매들에게국가는무엇인가_백창욱.pdf

1614_2015_봄호_65_농촌목회이야기_무주가당교회이야기_김길선.pdf

1615_2015_봄호_65_농촌목회이야기_남부중앙교회와천안동산교회의교류이야기_박용태.pdf

1616_2015_봄호_65_농촌예수마을_농촌에들어가예수마을을일구는도시교회이야기_최재호.pdf

1617_2015_봄호_65_농부목사_농부가된이경한목사이야기_이경한.pdf

1618_2015_봄호_65_농촌목회자와건강_콩밥먹기싫다_임락경.pdf

1619_2015_봄호_65_목회단상_목회를하다보면(13)-역지사지(易地思之)와황금율_장의성.pdf

1620_2015_봄호_65_목회단상_벼랑끝에서맞는봄-마을을교회로_이진.pdf

1621_2015_봄호_65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pdf

1622_2015_봄호_65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곤충이야기-사마귀.pdf

1623_2015_봄호_65_성경과농사(8)_롯의이농과아브람의귀농_이영재.pdf

1624_2015_봄호_65_새로운복음_도마복음읽기(5)_한석진.pdf

1625_2015_봄호_65_협동조합_협동조합운동을통한치유와화해의사역__한경호.pdf

1626_2015_봄호_65_평화운동_퀘이커리즘과평화운동_정지석.pdf

1627_2015_봄호_65_농과인문학_농과인문학,농민은천민(天民)이다_서성열.pdf

1628_2015_봄호_65_북한농업_북한의농업문제,극복대안과전망_김철.pdf

1629_2015_봄호_65_치유와건강_내가만난순리치유_강상빈.pdf

1630_2015_봄호_65_동학이야기_민초(民草),혁명을말하다_박맹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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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과 목회 42호(2009년 여름호)
2017.11.14 12:11, 041-044호(2009)

1061_2009_여름호_42_권두언_왜,대통령을의지하려하는가?_한경호
1062_2009_여름호_42_농촌교회복지선교현황을진단한다_농촌교회복지선교현장이야기_좌담회
1063_2009_여름호_42_농촌교회복지선교현황을진단한다_농촌아동,청소년들을위한복지선교이야기_김정운
1064_2009_여름호_42_농촌교회복지선교현황을진단한다_농촌노인복지에대한접근,어떻게할것인가_유수상
1065_2009_여름호_42_농촌교회복지선교현황을진단한다_결혼이민자정책의바람직한방향과과제_고은영
1066_2009_여름호_42_농촌교회복지선교현황을진단한다_복지선교에대한성서적이해_이승열
1067_2009_여름호_42_농촌목회이야기_하나님나라의도구,용학교회이야기_박석종
1068_2009_여름호_42_농촌목회이야기_도‧농교류사업을꿈꾸는새로운목회_박재현
1069_2009_여름호_42_귀농대담_박후임목사의눈에비친땅과노동이야기_임혜난,유효민
1070_2009_여름호_42_청소년수련회_옥동교회청소년수련회이야기_엄용식
1071_2009_여름호_42_농촌사회변동_진통하는농촌사회_김조년
1072_2009_여름호_42_목회와역사의식_6‧25전쟁은무슨전쟁이었나?_김흥수
1073_2009_여름호_42_농촌목회자와건강_가축과축산_임락경
1074_2009_여름호_42_목회단상_기적은가까이에있다-약장수와목사_김일균
1075_2009_여름호_42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
1076_2009_여름호_42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들풀이야기-애기똥풀_
1077_2009_여름호_42_해외민중선교_노동자,빈민과함께한가나이(金井愛明)목사_스즈키
1078_2009_여름호_42_해외민중선교_가나이(金井愛明)목사에대한회고_최정석
1079_2009_여름호_42_불교와의대화_목회자가읽어본법구경(4)_장의성
1080_2009_여름호_42_농업과통일_북한농업개발사업의어제와오늘_이용범
1081_2009_여름호_42_신학과강단_욥의고난설화에대한논의_게르하르트폰라트








1061_2009_여름호_42_권두언_왜대통령을의지하려하는가_한경호 .pdf

1062_2009_여름호_42_농촌교회복지선교현황을진단한다_농촌교회복지선교현장이야기_좌담회 .pdf

1063_2009_여름호_42_농촌교회복지선교현황을진단한다_농촌아동청소년들을위한복지선교이야기_김정운 .pdf

1064_2009_여름호_42_농촌교회복지선교현황을진단한다_농촌노인복지에대한접근어떻게할것인가_유수상 .pdf

1065_2009_여름호_42_농촌교회복지선교현황을진단한다_결혼이민자정책의바람직한방향과과제_고은영 .pdf

1066_2009_여름호_42_농촌교회복지선교현황을진단한다_복지선교에대한성서적이해_이승열 .pdf

1067_2009_여름호_42_농촌목회이야기_하나님나라의도구용학교회이야기_박석종 .pdf

1068_2009_여름호_42_농촌목회이야기_도‧농교류사업을꿈꾸는새로운목회_박재현 .pdf

1069_2009_여름호_42_귀농대담_박후임목사의눈에비친땅과노동이야기_임혜난유효민 .pdf

1070_2009_여름호_42_청소년수련회_옥동교회청소년수련회이야기_엄용식 .pdf

1071_2009_여름호_42_농촌사회변동_진통하는농촌사회_김조년 .pdf

1072_2009_여름호_42_목회와역사의식_6‧25전쟁은무슨전쟁이었나_김흥수 .pdf

1073_2009_여름호_42_농촌목회자와건강_가축과축산_임락경 .pdf

1074_2009_여름호_42_목회단상_기적은가까이에있다-약장수와목사_김일균 .pdf

1075_2009_여름호_42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 .pdf

1076_2009_여름호_42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들풀이야기-애기똥풀_.pdf

1077_2009_여름호_42_해외민중선교_노동자빈민과함께한가나이(金井愛明)목사_스즈키 .pdf

1078_2009_여름호_42_해외민중선교_가나이(金井愛明)목사에대한회고_최정석 .pdf

1079_2009_여름호_42_불교와의대화_목회자가읽어본법구경(4)_장의성 .pdf

1080_2009_여름호_42_농업과통일_북한농업개발사업의어제와오늘_이용범 .pdf

1081_2009_여름호_42_신학과강단_욥의고난설화에대한논의_게르하르트폰라트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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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과 목회 23호(2004년 가을호)
2017.11.08 16:36, 021-024호(2004)

0593_2004_가을호_23_머리말_‘먹을것’이없는세상_한경호
0594_2004_가을호_23_유전자조작농산물(GMO)과농촌목회적대응_유전자조작생물책(00)란무엇인가?_김은진
0595_2004_가을호_23_유전자조작농산물(GMO)과농촌목회적대응_유전자조작이생태계에미치는영향과대책_박병상
0596_2004_가을호_23_유전자조작농산물(GMO)과농촌목회적대응_유전자조작식품,얼마나우리식탁을침범하고있는가?_이진아
0597_2004_가을호_23_유전자조작농산물(GMO)과농촌목회적대응_유전자조작의기독교윤리적문제_박종균
0598_2004_가을호_23_농민과토지_하의삼도농민들의토지항쟁사_이문명
0599_2004_가을호_23_정의와생명_때가찼고(TheTimehascome)_세계개혁교회연맹
0600_2004_가을호_23_통일농업만들기_북한의축산과남북협력방안_지인배
0601_2004_가을호_23_생명공동체이야기_유기농업운동애서유기적삶으로_김병수
0602_2004_가을호_23_도농교류이야기_부산YWCA의생활협동운동이야기_윤신옥
0603_2004_가을호_23_생명농업이야기_한국생명농업운동의역사_최병칠
0604_2004_가을호_23_농촌목회이야기_찾아가는목회생활속에함께하는목회_유수상
0605_2004_가을호_23_1980년대기독교농민운동_나의농민운동이야기_배윤호
0606_2004_가을호_23_도농교회간의교류_여름자연채험수련회를다녀와서_김형준
0607_2004_가을호_23_단체이야기_기독요생명운동네트워크창럽이야기_강상빈
0608_2004_가을호_23_해외농촌선교_한국농촌교회방문기_YahyaTirtaPrewita
0609_2004_가을호_23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
0610_2004_가을호_23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들풀이야기-쑥_
0611_2004_가을호_23_농촌목회자와건강_먹지말고참아라정_임락경
0612_2004_가을호_23_목회단상_아~녕하셰어~져오사니-쓸쓸하지않은빈자리-작은소자로오산주님_조일륜
0613_2004_가을호_23_이사람을보라_새로운미래를열어가는남상도목사_박주열
0614_2004_가을호_23_농촌교회의신학과강단_일제하YWCA의농촌운동_최민자
0615_2004_가을호_23_추수감사절설교_‘찌라도’감사_한철인
0616_2004_가을호_23_치유와목회_치유의은사_염기석
0617_2004_가을호_23_치유와목회_금식을통한치유와영성_김수영








0594_2004_가을호_23_유전자조작농산물(GMO)과농촌목회적대응_유전자조작생물책(00)란무엇인가_김은진.pdf

0595_2004_가을호_23_유전자조작농산물(GMO)과농촌목회적대응_유전자조작이생태계에미치는영향과대책_박병상.pd

0596_2004_가을호_23_유전자조작농산물(GMO)과농촌목회적대응_유전자조작식품,얼마나우리식탁을침범하고있는가_이

0597_2004_가을호_23_유전자조작농산물(GMO)과농촌목회적대응_유전자조작의기독교윤리적문제_박종균.pdf

0598_2004_가을호_23_농민과토지_하의삼도농민들의토지항쟁사_이문명.pdf

0599_2004_가을호_23_정의와생명_때가찼고(TheTimehascome)_세계개혁교회연맹.pdf

0600_2004_가을호_23_통일농업만들기_북한의축산과남북협력방안_지인배.pdf

0601_2004_가을호_23_생명공동체이야기_유기농업운동애서유기적삶으로_김병수.pdf

0602_2004_가을호_23_도농교류이야기_부산YWCA의생활협동운동이야기_윤신옥.pdf

0603_2004_가을호_23_생명농업이야기_한국생명농업운동의역사_최병칠.pdf

0604_2004_가을호_23_농촌목회이야기_찾아가는목회생활속에함께하는목회_유수상.pdf

0605_2004_가을호_23_1980년대기독교농민운동_나의농민운동이야기_배윤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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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_2004_가을호_23_단체이야기_기독요생명운동네트워크창럽이야기_강상빈.pdf

0608_2004_가을호_23_해외농촌선교_한국농촌교회방문기_YahyaTirtaPrewita0608_2004_가을호

0609_2004_가을호_23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pdf

0610_2004_가을호_23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들풀이야기-쑥_.pdf

0611_2004_가을호_23_농촌목회자와건강_먹지말고참아라정_임락경.pdf

0612_2004_가을호_23_목회단상_아~녕하셰어~져오사니-쓸쓸하지않은빈자리-작은소자로오산주님_조일륜.pdf

0613_2004_가을호_23_이사람을보라_새로운미래를열어가는남상도목사_박주열.pdf

0614_2004_가을호_23_농촌교회의신학과강단_일제하YWCA의농촌운동_최민자.pdf

0615_2004_가을호_23_추수감사절설교_찌라도감사_한철인.pdf

0616_2004_가을호_23_치유와목회_치유의은사_염기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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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과 목회 21호(2004년 봄호)
2017.11.08 16:31, 021-024호(2004)



0542_2004_봄호_21_머리말_주체사상을알자_한경호
0543_2004_봄호_21_북한농촌선교를준비한다_북한의농엽현항_편집실
0544_2004_봄호_21_2003년북한의작황과식량수급전망_FAO_WFP
0545_2004_봄호_21_2003년북한의작황과식량수급전망_북한농촌선교어떻게할것인가?_최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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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9_2004_봄호_21_80년대기독교농민운동_나의농민운동이야기_오덕훈
0550_2004_봄호_21_농목이야기_감리교농목의활동과역사_이헌
0551_2004_봄호_21_도농교회의나눔_영락교회여전도회와옥방교회_최명화
0552_2004_봄호_21_생명농업이야기_최병칠의생명농업이야기_최병칠
0553_2004_봄호_21_자연괴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
0554_2004_봄호_21_자연괴더불어사는지혜_들풀이야기-질경이_
0555_2004_봄호_21_세상바로보기_출애굽-선민의식의빛과그늘_미야다미쓰오
0556_2004_봄호_21_농촌목회자와건강_짜릿한안수기도_임락경
0557_2004_봄호_21_목회단상_농촌목회자의자존섬_박철
0558_2004_봄호_21_목회단상_아싸라삽시다-하나님아부지!_김재검
0559_2004_봄호_21_이사람을보라_21세기를준비하는농민주형로_김남철
0560_2004_봄호_21_성경과농업_농부이신하나님_박성원
0561_2004_봄호_21_농촌교회의신학과강단_1970-80년대YMCA농촌사업의전개와그성격_윤호충
0562_2004_봄호_21_농촌교회의신학과강단_대안(생명)농업의성서적기초_한경호
0563_2004_봄호_21_부활절설교_부활하신예수를생각하자_고정수
0564_2004_봄호_21_목회와치유_하나님나라회복으로써의치유_염기석
0565_2004_봄호_21_생명과교육_왜생명교육인가?_고제순
0566_2004_봄호_21_서평_건강한흙은건강한삶의열쇠_정진석








0542_2004_봄호_21_머리말_주제사상을알자_한경호.pdf

0543_2004_봄호_21_북한농촌선교를준비한다_북한의농엽현항_편집실.pdf

0544_2004_봄호_21_2003년북한의작황과식량수급전망_FAO_WFP.pdf

0545_2004_봄호_21_2003년북한의작황과식량수급전망_북한농촌선교어떻게할것인가_최장원.pdf

0546_2004_봄호_21_2003년북한의작황과식량수급전망_내가살았던북한사회_조상철.pdf

0547_2004_봄호_21_생명공동체이야기_주민생활협동조합이야기_장건.pdf

0548_2004_봄호_21_농촌선교와운동_강화환경농업농민회이야기_김정택.pdf

0549_2004_봄호_21_80년대기독교농민운동_나의농민운동이야기_오덕훈.pdf

0550_2004_봄호_21_농목이야기_감리교농목의활동과역사_이헌.pdf

0551_2004_봄호_21_도농교회의나눔_영락교회여전도회와옥방교회_최명화.pdf

0552_2004_봄호_21_생명농업이야기_최병칠의생명농업이야기_최병칠.pdf

0553_2004_봄호_21_자연괴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pdf

0554_2004_봄호_21_자연괴더불어사는지혜_들풀이야기-질경이_.pdf

0555_2004_봄호_21_세상바로보기_출애굽-선민의식의빛과그늘_미야다미쓰오.pdf

0556_2004_봄호_21_농촌목회자와건강_짜릿한안수기도_임락경.pdf

0557_2004_봄호_21_목회단상_농촌목회자의자존심_박철.pdf

0558_2004_봄호_21_목회단상_아싸라삽시다-하나님아부지_김재검.pdf

0559_2004_봄호_21_이사람을보라_21세기를준비하는농민주형로_김남철.pdf

0560_2004_봄호_21_성경과농업_농부이신하나님_박성원.pdf

0561_2004_봄호_21_농촌교회의신학과강단_1970-80년대YMCA농촌사업의전개와그성격_윤호충.pdf

0562_2004_봄호_21_농촌교회의신학과강단_대안(생명)농업의성서적기초_한경호.pdf

0563_2004_봄호_21_부활절설교_부활하신예수를생각하자_고정수.pdf

0564_2004_봄호_21_목회와치유_하나님나라회복으로써의치유_염기석.pdf

0565_2004_봄호_21_생명과교육_왜생명교육인가_고제순.pdf

0566_2004_봄호_21_서평_건강한흙은건강한삶의열쇠_정진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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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과 목회 17호(2003년 봄호)
2017.10.13 16:37, 017-020호(2003)



0434_2003_봄호_17_권두시_들리시나요?옛물소리_임의진
0435_2003_봄호_17_머리말_시대정신의전환_한경호
0436_2003_봄호_17_주5일근무와도·농교회의선교적연대_농촌의여가문화와신앙생활_이정구
0437_2003_봄호_17_주5일근무와도·농교회의선교적연대_주5일근무,도시교회애바란다_김유석
0438_2003_봄호_17_주5일근무와도·농교회의선교적연대_주 5일근무,농촌교회에바란다_정태일
0439_2003_봄호_17_주5일근무와도·농교회의선교적연대_주 5일근무와도·농교회의연대방안_김수영
0440_2003_봄호_17_새시대의농촌목회_농사와함쩨하는농촌사역_이성호
0441_2003_봄호_17_광산촌선교_나의탄광촌복지선교활동_원응호
0442_2003_봄호_17_도시교회의농촌사랑_동신교회의농어촌선교활동_강동수
0443_2003_봄호_17_농촌공동체운동_새농촌건설운동,어떻게볼것인가?_유양종
0444_2003_봄호_17_농촌공동체운동_친환경농업과생태공동체운동_한경호
0445_2003_봄호_17_공동체운동과교육_키부츠의교육의원칙_아론야드린
0446_2003_봄호_17_시골교회짓기_전문가가보는농촌교회건축의설계_박대융
0447_2003_봄호_17_농촌목회와전례_전례와시간,동방정교회를중심으로_박순웅
0448_2003_봄호_17_농민운동_나의농민운동이야기,과정과반성_김종길
0449_2003_봄호_17_이사람을보라_농촌청소년들과더불어20년,이상출목사_김덕용
0450_2003_봄호_17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
0451_2003_봄호_17_농촌목회자와건강_한국이개판_임락경
0452_2003_봄호_17_목회단상_성도의빈자리-교육관건축과중학생들_남두환
0453_2003_봄호_17_후배목회자들에게_내가겪은목회갈등이야기_임기석
0454_2003_봄호_17_단체소개_“한국농어촌선교회"_김종순
0455_2003_봄호_17_북한의농업_북한농업정책의변화_권태진
0456_2003_봄호_17_해외농촌현황_카자흐스탄의농업과농촌현실_정준모
0457_2003_봄호_17_농촌교회의신학과강단_기독교인농학자김성원(聲遠)_한규무
0458_2003_봄호_17_농촌교회의신학과강단_농촌교회와노인복지선교_조시현
0459_2003_봄호_17_부활주일_부활신앙인의삶_심현섭
0460_2003_봄호_17_어버이주일_핑계대지맙시다_김일현
0461_2003_봄호_17_농촌목회자의고전읽기_노자가예수를만날때_장의성
0462_2003_봄호_17_단편소설_인용사전_김학진
0463_2003_봄호_17_서평_[농민예언자김영원의들소리]_박동현








0434_2003_봄호_17_권두시_들리시나요옛물소리_임의진.pdf

0435_2003_봄호_17_머리말_시대정신의전환_한경호.pdf

0436_2003_봄호_17_주5일근무와도·농교회의선교적연대_농촌의여가문화와신앙생활_이정구.pdf

0437_2003_봄호_17_주5일근무와도·농교회의선교적연대_주5일근무,도시교회애바란다_김유석.pdf

0438_2003_봄호_17_주5일근무와도·농교회의선교적연대_주 5일근무,농촌교회에바란다_정태일.pdf

0439_2003_봄호_17_주5일근무와도·농교회의선교적연대_주 5일근무와도·농교회의연대방안_김수영.pdf

0440_2003_봄호_17_새시대의농촌목회_농사와함쩨하는농촌사역_이성호.pdf

0441_2003_봄호_17_광산촌선교_나의탄광촌복지선교활동_원응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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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3_2003_봄호_17_농촌공동체운동_새농촌건설운동,어떻게볼것인가_유양종.pdf

0444_2003_봄호_17_농촌공동체운동_친환경농업과생태공동체운동_한경호.pdf

0445_2003_봄호_17_공동체운동과교육_키부츠의교육의원칙_아론야드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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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7_2003_봄호_17_농촌목회와전례_전례와시간,동방정교회를중심으로_박순웅.pdf

0448_2003_봄호_17_농민운동_나의농민운동이야기,과정과반성_김종길.pdf

0449_2003_봄호_17_이사람을보라_농촌청소년들과더불어20년,이상출목사_김덕용.pdf

0450_2003_봄호_17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pdf

0451_2003_봄호_17_농촌목회자와건강_한국이개판_임락경.pdf

0452_2003_봄호_17_목회단상_성도의빈자리-교육관건축과중학생들_남두환.pdf

0453_2003_봄호_17_후배목회자들에게_내가겪은목회갈등이야기_임기석.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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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1_2003_봄호_17_농촌목회자의고전읽기_노자가예수를만날때_장의성.pdf

0462_2003_봄호_17_단편소설_인용사전_김학진.pdf

0463_2003_봄호_17_서평_[농민예언자김영원의들소리]_박동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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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과 목회 11호(2001년 가을호)
2017.10.13 16:25, 009-012호(2001)



0256_2001_가을호_11_머리말_농사,화평과복의길_한경호
0257_2001_가을호_11_농촌교회와복지선교_농민유토피아‘새하늘새땅’을향하여_이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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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9_2001_가을호_11_농촌교회와복지선교_농촌교회를통한복지선교_김창렬
0260_2001_가을호_11_생명공동체이야기_산당교회와생명공동체이야기_한종현
0261_2001_가을호_11_생태마을만들기_문당리생태마을만들기100년계획_주형로
0262_2001_가을호_11_도시교회의선교징책_여의도순복음교회의농어촌선교정책_정재우
0263_2001_가을호_11_도·농교회사람나누기_함께살리는생명_이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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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2_2001_가을호_11_농촌작은학교살리기_거친들에씨를뿌린자는들을잊기어렵나니_한희철
0273_2001_가을호_11_농민들의북한방문기_너무나그리운또하나의조국에서_한승아
0274_2001_가을호_11_새로운농촌선교전략_정주목회란무엇인가?_차흥도
0275_2001_가을호_11_농촌목회자와영성_애니어그램영성이란무엇인가?_김영운
0276_2001_가을호_11_농촌교회의신학과강단_창조질서회복을위한인간론_김춘기
0277_2001_가을호_11_민담“떡하나주면안잡아먹지”의_역사적현실과민중의희망_박정세
0278_2001_가을호_11_추수감사주일_범사에감사하라_김기중
0279_2001_가을호_11_농업인의날_땅에서나는열매를바라는농부_이성행
0280_2001_가을호_11_농촌목회자의성경읽기_성경속에흐르는복음의원리_배광환
0281_2001_가을호_11_목회자의고전읽기_논어를어떻게읽을것인가?_장의성
0282_2001_가을호_11_농사정보_바이오농법이란무엇인가?_김종억










0256_2001_가을호_11_머리말_농사,화평과복의길_한경호.pdf

0257_2001_가을호_11_농촌교회와복지선교_농민유토피아새하늘새땅을향하여_이종록.pdf

0258_2001_가을호_11_농촌교회와복지선교_농민복지에대한선교신학적이해_김은수.pdf

0259_2001_가을호_11_농촌교회와복지선교_농촌교회를통한복지선교_김창렬.pdf

0260_2001_가을호_11_생명공동체이야기_산당교회와생명공동체이야기_한종현.pdf

0261_2001_가을호_11_생태마을만들기_문당리생태마을만들기100년계획_주형로.pdf

0262_2001_가을호_11_도시교회의선교징책_여의도순복음교회의농어촌선교정책_정재우.pdf

0263_2001_가을호_11_도·농교회사람나누기_함께살리는생명_이세우.pdf

0264_2001_가을호_11_농민과의료_안성의료생협이야기_유진상.pdf

0265_2001_가을호_11_광산촌선교이야기_황지중앙교회와광산촌선교_이상진.pdf

0266_2001_가을호_11_이사람을보라_등대선교회의안기창목사_손주완.pdf

0267_2001_가을호_11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pdf

0268_2001_가을호_11_농민독자의농사체험_고추농사단상_김순갑.pdf

0269_2001_가을호_11_농촌목회자와건강_흙토,황토백토_임락경.pdf

0270_2001_가을호_11_시골교회짓는이야기_아름다운시골교회를짓기위한제안_남기완.pdf

0271_2001_가을호_11_해외농촌선교이야기_정글(jungle)선교두번째이야기_오정면.pdf

0272_2001_가을호_11_농촌작은학교살리기_거친들에씨를뿌린자는들을잊기어렵나니_한희철.pdf

0273_2001_가을호_11_농민들의북한방문기_너무나그리운또하나의조국에서_한승아.pdf

0274_2001_가을호_11_새로운농촌선교전략_정주목회란무엇인가_차흥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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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7_2001_가을호_11_민담“떡하나주면안잡아먹지”의_역사적현실과민중의희망_박정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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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79_2001_가을호_11_농업인의날_땅에서나는열매를바라는농부_이성행.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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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1_2001_가을호_11_목회자의고전읽기_논어를어떻게읽을것인가_장의성.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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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민
2017.10.13 20:52 신고 EDIT/DEL REPLY
농촌과 목회 구독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요?
이강민
2017.10.13 20:52 신고 EDIT/DEL REPLY
농촌과목회 구독방법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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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과 목회 10호(2001년 여름호)
2017.10.13 16:24, 009-012호(2001)



0230_2001_여름호_10_머리말_농촌선교를활성화시키려면_한경호
0231_2001_여름호_10_생명시대의농촌선교_생명을위한새문명을지향하여_김용복
0232_2001_여름호_10_생명시대의농촌선교_농촌선교신학으로써의생명신학_이정배
0233_2001_여름호_10_생명시대의농촌선교_생명농업으로의회귀_이병철
0234_2001_여름호_10_생명시대의농촌선교_생명선교와목회적과채_천정명
0235_2001_여름호_10_생명공동처|이야기_송학교회와생명공동채이야기_엄태성
0236_2001_여름호_10_생태마을만들기_백운교회의생태마을만들기_남상도
0237_2001_여름호_10_도시교회의선교정책_새문안교회의농어촌선교정책_이상환
0238_2001_여름호_10_도·농교류이야기_단강과용두동,그얼싸안기_한희철
0239_2001_여름호_10_대안교육이야기_기독교적대안학쿄의과제와방향_홍순명
0240_2001_여름호_10_농촌교회와노인선교_가마골선교회의노인선교이야기_용석천
0241_2001_여름호_10_이사람을보라_유기농업의선구자,최병칠목사_손주완
0242_2001_여름호_10_자연과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박훈서
0243_2001_여름호_10_목회단상_촌에사는이야기_이화자
0244_2001_여름호_10_농촌목회자와건강_잡귀,귀신물러가라_임락경
0245_2001_여름호_10_시골교회짓는이야기_교회건축이렇게하지말라_남기완
0246_2001_여름호_10_해외농촌선교_몽골농업선교이야기_이혜식
0247_2001_여름호_10_북한농업바로알기_북한농엽의현실_정정길
0248_2001_여름호_10_해외농촌알기_중국농촌체제개혁과농촌사회실태_이정규
0249_2001_여름호_10_농촌교회의신학과강단_구약성서의절기와농사와의관계_김치홍
0250_2001_여름호_10_민담_꿩과나그네속의민중과희망_박정세
0251_2001_여름호_10_625_625를민족화해와대단결의날로삼자_이세우
0252_2001_여름호_10_맥추절_2001맥추절을지키라_박남규
0253_2001_여름호_10_광복절_미완의광복_노성철
0254_2001_여름호_10_농촌목회자의고전읽기_공자의군자론_장의성
0255_2001_여름호_10_농사정보_TAO농법이란무엇인가?_이명규










0230_2001_여름호_10_머리말_농촌선교를활성화시키려면_한경호.pdf

0231_2001_여름호_10_생명시대의농촌선교_생명을위한새문명을지향하여_김용복.pdf

0232_2001_여름호_10_생명시대의농촌선교_농촌선교신학으로써의생명신학_이정배.pdf

0233_2001_여름호_10_생명시대의농촌선교_생명농업으로의회귀_이병철.pdf

0234_2001_여름호_10_생명시대의농촌선교_생명선교와목회적과채_천정명.pdf

0235_2001_여름호_10_생명공동체이야기_송학교회와생명공동채이야기_엄태성.pdf

0236_2001_여름호_10_생태마을만들기_백운교회의생태마을만들기_남상도.pdf

0237_2001_여름호_10_도시교회의선교정책_새문안교회의농어촌선교정책_이상환.pdf

0238_2001_여름호_10_도·농교류이야기_단강과용두동,그얼싸안기_한희철.pdf

0239_2001_여름호_10_대안교육이야기_기독교적대안학쿄의과제와방향_홍순명.pdf

0240_2001_여름호_10_농촌교회와노인선교_가마골선교회의노인선교이야기_용석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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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5_2001_여름호_10_시골교회짓는이야기_교회건축이렇게하지말라_남기완.pdf

0246_2001_여름호_10_해외농촌선교_몽골농업선교이야기_이혜식.pdf

0247_2001_여름호_10_북한농업바로알기_북한농엽의현실_정정길.pdf

0248_2001_여름호_10_해외농촌알기_중국농촌체제개혁과농촌사회실태_이정규.pdf

0249_2001_여름호_10_농촌교회의신학과강단_구약성서의절기와농사와의관계_김치홍.pdf

0250_2001_여름호_10_민담_꿩과나그네속의민중과희망_박정세.pdf

0251_2001_여름호_10_625_625를민족화해와대단결의날로삼자_이세우.pdf

0252_2001_여름호_10_맥추절_2001맥추절을지키라_박남규.pdf

0253_2001_여름호_10_광복절_미완의광복_노성철.pdf

0254_2001_여름호_10_농촌목회자의고전읽기_공자의군자론_장의성.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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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3 16:19, 005-008호(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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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7_2000_가을호_7_세계화와농촌선교_세계화의사회경재적배경과역사_이명헌
0158_2000_가을호_7_세계화와농촌선교_농엽의세계화,무엇이문채인가?_허헌중
0159_2000_가을호_7_세계화와농촌선교_자본주의의세계화와신학의과채_채수일
0160_2000_가을호_7_세계화와농촌선교_농업의세계화와그대안적노력_한경호
0161_2000_가을호_7_도시교회와농어촌선교_사랑의교회의농어촌션교정책_심현섭
0162_2000_가을호_7_생명공동체이야기_푸영교회와선한농부마을이야기_김경준
0163_2000_가을호_7_이사람을보라_변두리에서사랑의꽃을피운김범얼목사_손주완
0164_2000_가을호_7_자연괴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편집실
0165_2000_가을호_7_목회단상_사랑의종_김종구
0166_2000_가을호_7_여름나물_학교가는길은자연학습장_박훈서
0167_2000_가을호_7_농민목회자와건강_추수감사절과초장절_임락경
0168_2000_가을호_7_시골교회짓는이야기_아주특별하게지은중원경교회_남기완
0169_2000_가을호_7_시골집짓기_인우재(隣愚齎)이야기_한희철
0170_2000_가을호_7_농촌과북한선교_국제옥수수재단과북한농업_임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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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7_2000_가을호_7_농사정보_지렁이의생태와농업적이용방안_이주삼
0178_2000_가을호_7_농사정보_유전자조작생물채(GMO,무엇이문제인가?)_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0179_2000_가을호_7_독자의글_농촌교회전망에대한소고_박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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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6_2000_가을호_7_머리말_풀과성경_한경호.pdf

0157_2000_가을호_7_세계화와농촌선교_세계화의사회경재적배경과역사_이명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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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3_2000_가을호_7_이사람을보라_변두리에서사랑의꽃을피운김범얼목사_손주완.pdf

0164_2000_가을호_7_자연괴더불어사는지혜_농촌잠언_편집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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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3_2000_가을호_7_농촌교회의신학과강단_복음서의농촌선교적이해_나요섭.pdf

0174_2000_가을호_7_논두렁에서읽는성서_생명의씨뿌리기_정호진.pdf

0175_2000_가을호_7_한글성서번역_룻이야기_김태종.pdf

0176_2000_가을호_7_예배설교 추수감사주일_은혜를아는사람_여태권.pdf

0177_2000_가을호_7_농사정보_지렁이의생태와농업적이용방안_이주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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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9_2000_가을호_7_독자의글_농촌교회전망에대한소고_박정도.pdf

0180_2000_가을호_7_독자의글_유기농공동체및생산자현황_편집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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