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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9

한 윤정 [13] 생태문명, 고등교육, 아름다움의 생태학 – 제이 맥다니엘 미



[13] 생태문명, 고등교육, 아름다움의 생태학 – 다른백년




[13] 생태문명, 고등교육, 아름다움의 생태학

제이 맥다니엘 미 헨드릭스대 철학과 교수한 윤정 2020.02.10 0 COMMENTS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에서 “강도”(intensity)라는 용어가 맡는 역할에 가장 상응하는 용어는 “아름다움의 힘”이다. … 물론 여기서 “아름다움”은 자연의 미적 성질이나 예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의 경험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은 경험이 갖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그 주요성분은 감각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다. 비록 감각이 감정의 깊이에 명백하게 관여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 화이트헤드는 아름다움을 어떤 경험의 계기에서 주체성이 갖는 조화의 완전함이라고 이해한다. 그것의 힘은 두 가지 요소, 즉 구성요소의 다양성과 그러한 구성요소를 개별적으로 느끼면서 얻는 강도를 조합하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강도란 여전히 가치에 기여하는 것이지만, 여러 구성요소 중 하나로서 기여하는 것이다. – 존 캅, 「화이트헤드의 가치론」(https://www.openhorizons.org/whiteheads-theory-of-value.html)어니스트 캘런벡의 1975년 소설 <에코토피아>의 영화 이미지컷. 미국 샌프란시스코 일대를 배경으로 에코토피아라는 이상향의 생활을 그렸다.



개요와 소개

“아름다움”은 생태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여기서 아름다움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1)일상의 직접성에서 감정적으로 느낀 경험의 조화와 강도, (2)그러한 느낌을 환기시키는 경험의 객체, 즉 타인, 다른 형태의 생명, 인간 관계, 자연 세계를 뜻한다. 아름다움이란 반드시 예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삶의 예술적 측면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관계적 관점에서 볼 때 아름다움은 삶 자체의 내면에서 발현하는 활력이자 번영이다. 인간은 삶의 모든 순간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이는 다른 동물도 그렇다. 아름다움은 삶을 “삶”답게 만드는 요소이다.

아름다움의 경험에 수반되는 마음과 정신의 성질은 인간의 정신적 알파벳을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 폭넓은 감정들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주목(attention), 연결(connection), 헌신(devotion), 열광(enthusiasm), 신념(faith), 용서(forgiveness), 감사(gratitude), 관용(generosity), 환대(hospitality), 상상(imagination), 정의(justice), 친절(kindness), 경청(listening), 사랑(love), 의미(meaning), 양육(nurturance), 개방성(openness), 재미(playfulness), 호기심(questing), 삶에 대한 열정(zest for life), 그리고 신비에 대한 감각 등이다. (번역자주: 필자는 아름다움과 관련된 감정의 요소가 갖는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해 알파벳 순서로 단어를 나열했다.) 생태문명은 교육과 예술, 건강한 가정 생활과 시민으로서의 삶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이런 감정적 성질들을 느끼고 알고 실제 그렇게 살도록 돕는다. 또한 이를 통해 타인이나 보다 큰 생명공동체에 존중과 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생태문명은 아주 이상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위한 온실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다섯 가지 형식은 생태문명에서 특히 중요하다: (1)자연적 아름다움 (언덕과 강, 나무와 별), (2)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예술, 음악, 그림과 음악의 풍경), (3)사회적 아름다움 (사람들, 그리고 인간세계를 넘어선 사회로부터 얻는 관계의 느낌), (4)도덕적 아름다움 (연민, 친절, 정의), (5)전인적 아름다움 (깊이와 넓이를 동반하는 ‘폭넓은’ 영혼의 성장). 이러한 것들은 모두 ‘아름다움의 생태학’의 구성요소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태문명이라고 하는 건축물을 세우고 유지하게 만드는 벽돌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인가!

이런 공동체가 “아름다운” 이유는 창조적이고 연민적이고 참여적이고 다양하고 포용적이고 동물에게 자비롭고 지구에 좋고 정신적으로 만족스러우면서 누구도 뒤처지도록 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등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런 공동체를 상상하고 발전시키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갖추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생태문명이라는 “전공”의 목적이다. 이 전공의 예비 과정은 “아름다움의 생태학: 세계 최고의 희망으로서의 생태문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이 이러한 다양한 아이디어에 대한 더욱 심화된 고찰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네 부분으로 나눠진다: (1)왜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2)아름다운 공동체, (3)대학의 생태문명 전공에 아름다움을 도입하기, (4) 아름다움의 생태학.



1. 왜 아름다움이며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수 년 전에 맥신 홍 킹스톤(湯婷婷)이 우리 대학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명예교수인 그녀는 재능 있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중국계 미국인이 미국에서 겪는 경험에 대한 여러 편의 논픽션 저자이기도 하다.

킹스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일에 강연을 했는데, 그녀는 킹의 연민적 공동체에 대한 구상을 자신의 참조틀로 사용하였다. 알다시피 킹은 연민적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beloved community)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서로를 걱정하며 보살피는, 그러면서 누구도 뒤처지도록 방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문구였다. 사랑의 공동체는 연민적인 공동체이며 애정 어린 공동체이다.

킹스톤은 킹의 문구에 기대어 예술이 어떻게 그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배려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킹의 문구를 인용할 때마다 실수로 “사랑의 공동체” 대신 “아름다운 공동체”(beautiful community)라고 말하곤 했다. 그 때마다 그녀와 청중들은 매번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 지점에서 킹스톤은 결국 고쳐 말하기를 그만두고 강연 내내 예술과 정의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계속해서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나를 포함한 청중들은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문구에 익숙해졌고 또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그리고 킹스톤에게 사랑의 공동체는 사실상 아름다운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다움 자체처럼 본질적으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언어가 필요하다.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시적인 언어 말이다. 이 점은 뛰어난 과정철학자인 샌드라 루버스키가 쓴 「아름다움을 말하라(Speak the Name of Beauty)」라는 짧지만 우아한 글을 떠올리게 만든다.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연과 아름다움 사이의 연결을 분명히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자연의 질에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요하다. … 자연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위한 미결정적인 배경이나 인간이 가치를 매기는 마술봉을 휘두른 다음에야 가치를 얻는 중립적 캔버스가 아니다. 자연 세계는 각자 가치를 가지는 생명들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경이로운 풍성함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삶을 격상시키는 만드는 관계들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가치다.

이처럼 자연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 그리고 삶을 격상시키는 아름다움이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킹스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녀의 강연이 끝나갈 즈음에 한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지구와 다른 생명체를 어떻게 취급하게 될까요? 그들은 올바른 대접을 받게 될까요?” 그녀의 대답은 긍정이었다. 킹스톤은 이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생명의 그물의 아름다움에 대해, 인간과 다른 생명체에 대해 수용적일 것입니다. 그것은 생태 공동체가 될 거예요.”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인간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아니라 지구에 기반을 둔 공동체로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개념을 확장시켜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대학생들이 그러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공부할 수 있는 “전공” 혹은 전문분야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2. 아름다운 공동체

세계 어딘가의 대학에 생태문명 전공이 개설되어 있다고 상상해보라. 나아가 그 전공이 캠퍼스 내에서 가장 인기 있다고 상상해보라. 학생들은 그 전공이 실천적이면서 희망적이고 전일적이면서 창조적이기에 매력을 느낀다. 생태문명 전공의 목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활기차고 삶을 격상시키는 공동체를 지역 단위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기술과 능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킹스톤의 말을 빌리자면, 아름다운 공동체 말이다.

이런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그런 공동체의 아홉 가지 중요한 특성 혹은 성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창조적이다.

(2)연민적이다.

(3)참여적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참여한다.)

(4)다양하다. (공동체가 종교적, 문화적인 다양성을 환영한다.)

(5)경제적으로 포용적이다.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며 경제적 격차가 크지 않다.)

(6)동물에게 자비롭다.

(7)지구에 좋다. (오염을 수용하고 자원을 공급하는 한계 내에서 살며 다른 생명체의 서식지를 남겨둔다.)

(8)정신적으로 만족스럽다.

(9)누구도 뒤쳐지지 않는다.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보살핀다.)

이러한 공동체의 “영성”은 감성적 지성과 일상에서 구현된 지혜가 조합된 것으로, 종교를 갖고 자신의 종교로부터 “영성”을 찾아내는 사람들에게도, 영성에는 관심이 있으나 특정 종교에 연계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수용 가능한 것이다. 영성은 인간성의 영적 알파벳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서로 관련된 형식의 마음과 정신의 광범위한 특성을 포함한다: 주목(attention), 연민(compassion), 연결(connections), 친절(kindness), 경청(listening), 상상(imagination), 재미(playfulness), 호기심(wonder), 침묵(silence), 정의(justice), 숭배(reverence), 삶에 대한 열정(zest for life). (번역자주: 여기서도 다시 알파벳 순으로 단어를 나열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내가 “전인적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것의 부분들이다.

물론 이러한 공동체는 바람직한 이상이다. 지구상의 어떤 공동체도 이러한 특성들을 완전히 구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홉 가지 이상을 상당한 정도로 실현한 현존하는 공동체들은 사실상 생태문명이라고 하는 건축물을 구축하는 벽돌들이다. 생태문명 전공은 학생들이 이러한 공동체를 세우고 발전시키도록 돕는 걸 목적으로 한다. 그 과정에는 긍정심리학, 도시계획, 유기농업, 사회정의, 영성, 종교 간 대화, 교육, 건강 관리, 환경경제학, 진화생물학, 생태학 실습 등의 과목이 포함된다. 생태문명 전공은 또한 학생들이 스스로 프로젝트를 설계하고 실행하며 평가함으로써 생태문명의 역동성을 구현하는 실천적이며 능동적인 배움의 요소가 요구된다.



3. 대학의 생태문명 전공에 아름다움을 도입하기

생태문명 전공을 위한 예비 과정은 “아름다움의 생태학: 세계 최고의 희망으로서의 생태문명”이라 부른다. 이 과목은 학생들에게 생태문명의 철학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전반적인 사상,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이상인 “아름다움의 힘”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가르친다.

처음에 학생들은 교과목의 제목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을 듣고 놀랄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과 개별적인 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서양철학의 편협한 척도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사적인 감각, 개인의 취향 혹은 예술에만 한정된 어떤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움은 공공의 선도 아니며 “실제 세계”에 속하는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교수들은 이 과목에서 아름다움이 사실은 공공의 선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아름다움은 단순한 예쁨도 아니며 예술 작품에서 발견되는 성질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화이트헤드가 “아름다움의 힘”을 통해 말하고자 한 어떤 것이다. 아름다움은 조화와 강도의 조합이며 경험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활력이다. 아름다움은 인간과 여타의 생명체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힘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인간, 그리고 인간을 넘어선 것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활력과 살아있음(강도)의 감각을 조합한다.

교수들이 강조하듯 아름다움을 이렇게 이해할 때 그것은 우리를 이끄는 이상이자 희망의 원천으로서 생태문명과 그것의 출현을 위한 일차적인 가치가 된다. 학생들은 곧바로 이 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생태문명이 파국적인 미래에 대한 공포나 현재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분노로부터 출현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한다. 생태문명은 좀 더 창조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갈 수 있다는 감각으로부터 등장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것보다 좀더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감각 말이다. 아름다움은 희망을 제공한다.

다음으로 학생들은 몇몇 화이트헤드의 관념을 배우며 그 관념들을 통해 교수들이 “아름다움의 우주론”이라 부르는 것을 형성하게 된다. 이 관념들은 다음과 같다.

(1)인간은 생명의 그물의 일부다: 인간이 거대한 생명의 그물의 일부이지 그 바깥에 있지 않다는 관념.

(2)모든 것은 상호 생성의 과정에 있다: 전체로서의 그물, 그리고 그물의 각 매듭은 언제나 과정 혹은 되어감에 있다는 관념.

(3)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내재적 가치가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각자의 권리로서 가치를 지니며 존중 받아 마땅하다는 관념.

(4)모든 곳에 살아있음의 활력과 같은 것이 있다: 땅의 가장 깊은 곳부터 하늘의 가장 높은 곳까지 “생명” 혹은 “살아있음”과 같은 것이 있다는 관념.

(5)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에 의해서 내면적인 활력을 얻는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그 안에 만족 혹은 삶의 충족을 향한 에로스가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경험의 풍부함 혹은 “아름다움”을 지향한다는 관념.

(6)전체로서의 우주 또한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에 의해 움직인다: 우주 안에서 모든 것이 살아가고 움직이고 자신의 존재를 갖는 동시에 전체로서의 우주 자체가 어떤 종류의 생명이며 우주 역시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향한 에로스를 갖고 있다는 관념.

이러한 관념들은 학생들이 지식을 얻기 위해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는 식의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이런 관념들은 고려해볼 가치가 있는 것으로, 또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질 때 아름다움의 생태학을 위한 우주론적 배경을 형성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다른 철학적, 문화적 전통, 아마도 특히 동아시아 전통들에서 유사한 관념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강조된다.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전통으로부터 비슷한 관념을 찾고 공유하도록 권장된다.



4. 아름다움의 생태학

이렇게 학생들은 아름다움의 생태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입문한다. 생태문명을 건설하고 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종류의 아름다움들이 있다. 자연적 아름다움,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관계적 아름다움, 도덕적 아름다움, 전인적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몇몇 중요한 점에서 구분되기는 하지만, 서로 통합되어 생태문명의 아름다움이 된다. 아름다움의 생태학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자연적 아름다움: 언덕, 강, 나무, 별, 동물, 식물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서로 연결돼 존재한다.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에서 외경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과학연구가 증명하듯 인간의 행복에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샌드라 루버스키의 말의 떠올려라: “자연 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위한 미결정적인 배경이나 인간이 가치를 매기는 마술봉을 휘두른 다음에야 가치를 얻는 중립적 캔버스가 아니다. 자연 세계는 각자 가치를 가지는 생명들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경이로운 풍성함이다.”

(2)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 인간이 설계한 다양한 형식의 아름다움.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은 도구와 가구, 건물과 도시경관 같은 유형의 생산물을 포함하며 상징과 로고스, 이야기와 시, 춤과 음악 또한 포함한다.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참여하거나 그것과 협동한다. 그것은 거대한 생명의 그물과 함께하는 공동창조의 행위이다.

(3)관계적 혹은 사회적 아름다움: 사람들이 우정과 가정생활, 그리고 인간을 넘어선 세계와 맺는 만족스러운 관계에서 오는 아름다움. 이런 아름다움은 예를 들어 유교경전, 성경, 코란의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는 긍정적 연결의 영성에도 내포돼 있다.

(4)도덕적 아름다움: 연민, 봉사, 정의를 추구하는 행위에서 오는 아름다움. 수필가 이푸 투안은 이를 이렇게서술했다: “사심 없는 기품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관용의 행위는 용기 있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아름다움의 사례이다. 진실된 겸손도 이타적인 사랑과 마찬가지로 예시가 될 수 있겠다. 몇몇 사람이 신체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듯이 몇몇 사람은 도덕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도덕적 아름다움은 타고 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고무하는 사회에서는 쉽게 등장하고 번창한다.”

(5)전인적 아름다움: “통합적인 되어감”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지혜와 연민, 창조성을 키우는 전인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혹은 되고자 추구하는 아름다움. 아일랜드의 시인 존 오도노휴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아름다움은 멋진 사랑스러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보다 통합적인 것, 실체가 있는 되어감, 원만함의 출현, 은혜로움과 우아함의 위대한 감각, 깊이에 대한 깊은 감각, 그리고 만개하는 삶에 대한 풍성한 기억으로의 돌아감에 관한 것이다.”

예비과정의 끝에서 학생들은 아름다움이란 관념이 이처럼 생태적인 문맥에서 이해될 때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생태문명을 실현시키고자 활기차게 노력하기 위한 촉매로 작용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또한 지구에 기반을 둔 사랑의 공동체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이며, 아름다움이 갖는 매력은 삶의 활력과 격상을 위한 영감을 제공한다는 맥신 홍 킹스톤의 생각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제이 맥다니엘

미 헨드릭스대 철학과 교수, 웹사이트 오픈 호라이즌즈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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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12] 커먼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잭 월시



[12] 커먼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 다른백년




[12] 커먼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잭 월시 독일 포츠담 고등지속가능성연구원(IASS) 연구원한 윤정 2020.02.03 0 COMMENTS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

기후변화는 “공유지의 비극”으로 볼 수 있으며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사회적, 생태적 시스템 붕괴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공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기후변화는 집단행동에서 비롯된 대표적 문제이며 현재의 정치제도는 사회적, 생태적 문제가 복합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개럿 하딘은 1968년에 쓴 유명한 논문「공유지의 비극」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들은 국가나 시장이 개입하지 않으면 공유지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세이가 발표된 이후 50년 동안, 우리는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규제와 민영화가 어떻게 전세계 공유자원을 관리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 그것을 망쳐왔는지 지켜봤다.



신자유주의의 공공재 민영화는 공유지의 비극을 자연자원의 영역(공기, 물, 토양 등)으로부터 사회보장의 영역(보건, 교육 등)으로, 마침내 사회적 교류와 내적 삶의 영역(기업 소유의 디지털 기술, 소셜미디어, 광고의 확산을 통해)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기후변화는 공유자원의 민영화와 잘못된 운영의 결과이지, 하딘이 주장한 대로 민영화와 규제를 더 진전시키기 위한 구실은 될 수 없다. 하딘은 공유에 기반을 둔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못 이해한 것으로 비판 받아왔다. 공유지에 대한 그의 이해는 정치, 경제 제도에 널리 수용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는 대신, 개인을 강요당하지 않는 한 협력할 능력이 없는 자율적, 이성적, 이기적 존재로 바라보는 신고전주의적 관점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됐다.

엘리노어 오스트롬의 선구적인 작업은 하딘과는 대조적으로 공유자원이 협력을 장려하고 무임승차자들이 자원을 취하지 못하게 막도록 구상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의 저서 『공유자원의 관리』(1990)는 공유자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8가지 핵심 원칙을 제시했다. (역자주: 이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명확한 경계 ②규칙의 부합성 ③집합적 선택장치 ④감시활동 ⑤점층적 제재 ⑥분쟁해결장치 ⑦규칙제정권리 ⑧최소한의 자치권 보장) 수십 년 간 오스트롬은 어떻게 공유자원이 자율 조직되고 자율 규제되는지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대규모 연구작업을 수행했다.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2009년 여성으로서는 처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에게는 놀랍게도, 오스트롬은 사람들이 시장 또는 국가의 개입이 아닌 효율적 의사소통, 신뢰, 호혜성을 바탕으로 공유자원을 자율 관리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의 업적 덕분에 공유자원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더욱 잘 이해되고 확립되었다.



자본주의 대안으로서의 커먼즈

지난 수십 년 동안 공유자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심오한 연구가 확산됐으며 이는 중요한 고려대상이다. 오스트롬은 제도경제학과 게임이론의 방법론을 채택했는데 이는 그의 작업이 주류학계에 호소력을 갖게 한 동시에 연구의 범위와 관련성에 제한을 가했다. 오스트롬이 채택한 방법론은 자기 이익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개인을 전제했다. 개인에 대한 그의 방법론적 편견은 예컨대 마르크시즘 연구가 탐색했던 것과 같은 구조적, 정치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공유자원의 사유화, 즉 인클로저 운동은 자본주의의 출현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역사적으로 인류에 의한 기후변화는 인류의 독특한 특성에 기인한 게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의 글로벌화 때문이다.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리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은 인류가 지질을 변화시키는 지구물리학적 세력으로 출현한 시기를 1800년 전후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잡는다. 이는 기후위기의 바탕에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요구되는 정도의 시스템 위기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제이슨 무어는 인류세보다는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이 말은 모든 인간이 기후변화에 똑 같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훨씬 정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보다 직접적인 책임은 인간과 자원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다.

다행히 자본주의 시스템의 대안은 이미 존재한다. 「복수우주(Pluriverse)의 공유지」(2015)라는 에세이에서 아투로 에스코바르는 공유화(commoning)의 실천이 글로벌 산업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 여러 개의 세계들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커먼즈(역자주: 영어로는 모두 commons로 표기됐으나 이 글에서는 맥락에 따라 공유지, 공유자원, 커먼즈로 번역했다. 커먼즈는 현대 사회운동으로 물질적, 비물질적 공유자원은 물론 참여자들의 주체성 변화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원어 그대로 표기한다) 운동은 글로벌 시장 혹은 국민국가에 의한 가치의 포획과 맞서는 시스템적 대안을 위한 존재론적 복수성-Pluriverse-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현재 공유화 실천의 정치적 잠재력을 간과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적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핵심적인 참조점으로 여전히 자본주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J. K. 깁슨-그래함은 이런 경향을 “자본중심주의”라고 비판했다. 그와 동료들이 개발한 다양한 경제연구 프로그램은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커먼즈에 기반한 경제의 수백 가지 사례를 보여준다. 이런 일련의 경험적 연구는 커먼즈 운동으로 자본주의의 대안들이 수렴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장, 국가, 그리고 커먼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여전히 지배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공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목격하고 있다. 인류역사 전반에 걸쳐 공유화의 실천은 생산의 기본 방식이었고, 얼마나 많은 무급노동이 여성과 유색인종에 의해 수행됐는지를 고려할 때 사회적 재생산의 기본 방식 역시 대부분의 경우 공유화를 통해 이뤄졌다. 오늘날 현대 커먼즈 운동은 이런 공유지에 대한 전통적 지식과 새로운 도시, 디지털 커먼즈를 결합한다. 철학자 안드레아 베버는 심지어 공유화가 사실상 자연의 재생산에서도 기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로서의 실재」(2015)라는 논문에서 그는 “커먼즈는 실존적인 동시에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관계의 존재론을 묘사한다. 공유화는 지구상의 생명체의 공존을 서로 연결되고 창조적인 과정, 생물권과 문화권의 활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썼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활력 역시 언제나 공유화에 의존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된 적이 없다.

가까운 미래에는 이것이 단순히 계속될 수 없다. 세계 경제성장은 꾸준히 감소하며 우리는 경기침체의 시기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비어있는 세계에서나 제대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착취논리는 더 이상 가득 찬 세계에서는 지속될 수 없다. 기후변화는 시장과 국가 시스템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하며 시스템의 일부는 향후 수십 년에 걸쳐 붕괴될 수도 있다. 공통의 자원을 공유하는 일은 불안정성, 갈등, 점증하는 자원부족으로 압박을 받는 점점 더워지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건을 제공하는데 필수적이다.

최근 공유 기반 경제학의 폭발적 증가는 이런 시스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 공유에 기반한 시스템은 자원 처리량을 최대 80 %까지 줄이면서 번영을 유지할 수 있다(Rizos, X., & Piques, C. (2017). Peer to peer and the commons: A path towards transition. A matter, energy and thermodynamic perspective. Amsterdam, Netherlands: P2P Foundation). 미셀 보웬스와 호세 라모스는 공유 기반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실험이 포스트 자본주의 단계로의 전환을 위한 맹아 형태를 구성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Bauwens, M., & Ramos, J. (2018). Re-imagining the left through an ecology of the commons: Towards a post-capitalist commons transition. Global Discourse. doi: 10.1080/23269995.2018.1461442). 공유화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넘어선 제3의 공급부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력적인 시장과 국가 시스템은 공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지원할 수 있다.

서울시는 이런 좋은 사례를 실천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2년부터 공유도시 정책을 시행했으며 불과 3년만에 서울시민은 연간 120억원, 서울시는 1조1800억원을 절감했다. 이 정책으로 1,280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9,800톤까지 줄었다. 여러 국제기구들이 이 정책의 성공을 인정하고 있지만, 서울시는 대중의 인식과 의지를 높이는 것이 시급한 당면과제라고 시인한다.



커먼즈를 위한 사고방식

패러다임 변화가 진정한 것이 되려면 사회적, 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 도넬라 메도스는 대규모 사회적 전환을 촉진하는 가장 전략적인 레버리지 포인트는 사고방식(mindset)의 차원에 있다고 주장한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데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현재 상황이 시사하는 것처럼 만약 커먼즈 운동이 시스템 위기의 제한된 조건에서의 자원이용에 대한 광범위한 대응이 되려면, 사람들의 사고방식, 사회적 규범, 행동양식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관계적 세계관과 존재론은 인류세에 인간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많은 관련이 있다. 인류세의 생명의 복잡성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질문할 뿐만 아니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비인간 행위자들의 권위와 역할을 존중하는 윤리학의 개발을 요구한다. 내가 내부주체성(intra-subjectivity)이라고 부르는 윤리학을 따르는 공유참여자들이 늘어난다면, 단순한 P2P 경제학을 넘어 공유화를 확장함으로써 보살핌을 모든 존재로 확장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자연이 우리로부터 분리된 요소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상호작용 안에서 공동 생산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관계가 외적으로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의존적이며 내적 인식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호의존성 개념과 구별된다. 내부주체성은 어떻게 모든 존재가 서로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연결돼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고통과 더 깊이 연결될수록 우리는 그것이 타자의 고통과 어떻게 구성적 관계를 갖는지 더 잘 알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서 타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더 많이 행동하게 된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우리가 어떻게 자연-문화를 공동 생산하는지, 자연과 문화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 어떻게 더 긍정적으로 사회-생태적 시스템 위기를 완화시키는지 보다 잘 이해하도록 해준다. 인류세에 각자 능력이 많이 다른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에게로 확장되는 보살핌의 윤리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주체성과 행위자라는 개념을 날카롭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의 삶이 문제인지, 우리가 어떻게 인간적 품위를 갖추고 지킬 수 있을지, 보다 생생하고 우호적인 세계를 향한 전환의 집단적 조건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지 등 복잡한 질문들의 해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공유화는 우리의 비분리성, 상호의존성, 공존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물질적으로, 관계적으로 서로에게 연결되는 방식이다. 협동조합과 풀뿌리 조직을 결합한 잘 조직된 커먼즈는 투명성, 평등, 존중을 실천함으로써 다양한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신뢰를 만들고 책임을 실천하는 것은 성공적인 자기조직과 운영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우분투의 서술처럼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역자주: 우분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건국이념으로 사람들간의 관계와 헌신에 중점을 둔 윤리사상이며, 그 자체로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는 뜻이다.) 초기불교의 보살사상에 응용한다면, 세속적이고 영적인 운명의 결합으로서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에서 생겨난다. 포용성의 확장은 다른 사람을 주변화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의식은 물질적 인프라와 욕망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물질의 전환과 의식의 전환은 함께 이뤄진다.

거의 인식되지 않지만 공유화는 물질적, 사회영성적 교환-스스로 조직하고 서로를 책임지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교환-이라는 형식으로서 이중의 원자가를 갖는다. 합리적인 자기이익을 정책화하고 규제함으로써 공동자원을 관리하는 정책입안자들과 달리, 공유참여자들은 커먼즈를 땅과 공동체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라는 감각으로 운영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서부해안의 어부들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의무로부터 나온 “신사협약”을 따른다. 유사하게 오픈 소스 디지털 커먼즈 운동은 자발적인 교환이 교육과 리소스에 대한 공공의 접근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오픈스트리트맵의 데이터와 정보를 공유하는 자원봉사자들의 글로벌 커뮤니티는 의료시설, 관공서, 공공시설에 대한 리소스와 정보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한다. 이들은 합리적 자기이익으로부터 행동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타자에 대한 헌신의 감각에 따라 서로의 요구를 보살피는 것이다.





커먼즈의 생태계

개럿 하딘,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엘리노어 오스트롬도 현재 패러다임 안에서 공유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켰다.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공유를 대상물로 여기는 그들의 이해방식은 암묵적으로 실체의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커먼즈는 외부의 권위에 의해 주어진 공식적인 규범과 규칙의 존재로 인해 협력하는 합리적, 자율적 개인들에 의해 구상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개인, 시장, 국가에 대한 자유주의 이론을 경유한 커먼즈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생활을 운영하기 위해 부과된 일련의 과정과 체제로 커먼즈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커먼즈 운동이 글로벌 사회운동이 된다면 어떻게 커먼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사람들의 가치와 세계관을 재형성할 것인가. 공유화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공리적 차원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커먼즈 패러다임이 관계적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로버트 울라노비치는 『세 번째 창』(2009)이라는 저서에서 근대성으로의 중요한 전환을 이룬 세 가지 세계관을 제시했다. 첫째는 기계론의 세계관으로 데카르트, 흄, 칸트, 베이컨, 특히 뉴턴과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형성됐다. 두 번째는 진화론의 세계관이며 카르노와 다윈에 의해 형성됐다. 두 번째 세계관은 첫 번째 세계관보다 진보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관계의 원동력으로서 협력의 중요성, 진화에서의 창발이론, 자연-문화의 동시생산과 같은 최근의 발견을 깎아 내린다. 세 번째 세계관인 관계적 혹은 생태적 세계관이야말로 커먼즈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장 관련이 깊다. 아직 초기단계인 이 세계관은 생태적 혹은 과정적 형이상학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시스템을 상향과 하향의 과정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관계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 커먼즈는 탄생 이전에 미리 존재 지어진 대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실천에 의해 생성된다. 공유화에 대한 이런 합리적 관점은 차이들의 조화를 실현하는 데로 나아간다. 또한 “커먼즈의 생태계”를 상상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커먼즈 공동체들을 가로지르는 역동적 연대와 협력을 실현한다(Bauwens & Lamos, 2018). 이런 관점은 공유참여자들(commoners)이 서로의 번영을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고 바라보며, 자유와 자기결정이 인간과 비인간 존재, 힘, 자원들로 이뤄진 공동체들과의 보다 풍부하고 정교하게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삶의 내재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 유쾌하게 어울려 사는 공동체들에 의해 활성화되는 창발적 과정으로서 나타난다.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자기결정과 공동체의 연대 사이의 조화롭고 끝없이 복잡한 대조를 통해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 커먼즈 운동의 가장 고무적인 측면은 그것이 생태적 방식의 사고, 존재, 행동을 선취하면서 관계적 세계관 안에서 공동체가 번영하기 위한 이미 검증된 수단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시스템 위기에 대한 광범위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집단적으로 커먼즈를 삶의 방식으로서 탐색해야 하며, 더 큰 문화적 전환의 한 부분으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삶의 모습으로 상상해보는 일이 요구된다.




잭 월시

독일 포츠담 고등지속가능성연구원(IASS)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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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11] 사회적 경제의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정건화 한신대 교수



[11] 사회적 경제의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 다른백년




[11] 사회적 경제의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정건화 한신대 교수한 윤정 2020.01.27 0 COMMENTS


문제는 경제다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 그것은 정보의 문제도,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의 문제이다.” 오래 전 책을 읽다가 메모해둔 구절이다. 작가는 문학작품에 대해서 한 이야기였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에 해당하는 말이고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환경, 생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후변화와 문화적 인식과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미국 예일대의 문화인지 프로젝트) 결과에 따르면 새로운 정보가 자신의 신념체계를 흔들어놓을 우려가 있을 때 인간의 두뇌는 불청객을 격퇴하기 위해 ‘지적인 항체’를 생산한다. 사람들은 현실과 가치관 사이의 갈등을 경험할 때 현실을 부정하는 편향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왜 생태위기 징후에 대해 이런 ‘지적인 항체’를 갖게 되었을까?



뉴욕 타임즈가 레이첼 칼슨의 『침묵의 봄』 이후 가장 중요한 환경 관련 저작으로 꼽은 책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저자 나오미 클라인은 “기후변화는 자본주의와 지구와의 전쟁”이고 자본주의가 언제나 아주 쉽게 승리를 거두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전쟁은 벌써부터 진행되어 왔고, (…) 매번 경제성장의 필요성을 내세워 기후행동을 미루고 이미 합의한 온실가스 감축 약속을 깨뜨리면, 자본주의는 이긴다. 위험성 높은 석유와 가스 채취 산업에 아름다운 바다를 내주는 것만이 경제위기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리스 사람들을 설득하면, 자본주의는 이긴다. (…) 베이징에서 숨이 차 쌕쌕거리는 어린 자녀에게 귀여운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방진 마스크를 씌워 학교에 보내는 수고쯤은 당연히 감수해야 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면, 자본주의는 이긴다. 어차피 우리 앞에는 채취냐 내핍이냐, 오염이냐 가난이냐 하는 암울한 대안만 남아 있다고 자포자기할 때마다, 자본주의는 이긴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오미 클라인, 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2016: 45-46)

여기에는 비단 기업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자연과 세상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에 기반한 삶의 태도와 생활방식도 포함된다. 현재의 글로벌 세계경제질서가 기후변화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위기를 만들어낸 주범은 아니다. 이미 인류는 1700년대 말부터 석탄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도 생태계 파괴를 자행했다. 자본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 경제권에서도 다를 바 없었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관념의 모험』에서 지적한 대로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너무나 근본적이어서 인식하지 못한 채 넘어가곤 하는 관념이 있어왔다. 그 관념은 그로 인한 피해자들조차도 그러한 관념을 공유할 위험이 있다.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인식되는 관념뿐 아니라 인식되지 못하는 관념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문화적 서사가 달라져야 하기에 문명적 수준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태적 위기의 근원 역시 “자연은 무한하고 통제와 지배가 가능한 대상이고 인류는 자연을 지배할 권리와 능력을 부여 받았다”는 우리들의 관념에 닿아 있다.

그렇다면 생태와 조화를 이루는 경제로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이 기존 사회, 경제 모델의 기저를 이루는 논리적 가정들은 물론이고 거기에 내재한 가치 체계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세계관에까지 의문을 제기하는, 문명적 수준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생태적 위기를 초래하는 자연관과 세계관을 넘어 생태와 조화를 이루는 경제시스템에 대한 상상과 전망이 필요하다.



자연의 경제와 인간의 경제

오늘날 우리가 생태계라 부르는 개념은 지질학자였던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집필하면서 언급한 “상호 연관된 종들의 얽힌 복합체”에서 유래한다. 다윈은 동물과 식물을 “복합적 관계의 그물에 의해 함께 묶여진 존재”로 규정했고, 에른스트 해켈은 훗날 다윈이 생존경쟁의 조건(들)이라 부른 동식물 간의 “복잡한 상호 관계들에 대한 연구”를 생태학이라 이름 붙였다.

생태(ecology)와 경제(economy)의 영어 표기와 발음은 서로 닮았다. 실제로 다윈은 생명체의 생존과 생활을 위한 활동을 묘사하면서 “자연의 경제”라는 표현을 『종의 기원』 여러 곳에서 직접 사용한다. 그는 “자연의 경제”를 생물학적 개인, 종과 환경 사이에 상호 작용하는 복잡한 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썼고, 이를 반영해서 해켈 역시 생태학을 “자연의 경제에 관한 지식의 본질”이라 정의했다. 다윈이 자연을 “경제”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은 아닐 수 있지만 자연과 경제 사이의 연관과 유사성을 언급한 최초의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Hardy-Vallée, Benoit, “The Economy of Nature: A Brief Introduction”, y, http://naturalrationality.blogspot.com/search?q=Darwin, 2007)

지구가 제공하는 자연의 경제 내에 인간의 경제가 하위체계로 존재하고 있음은 불변의 사실이다. 생산, 분배와 소비 등 인간의 모든 경제활동은 변환된 에너지를 이용해서 물질이나 비물질적 재화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환하는 과정이다. 자연 생태계에서 경제 시스템으로 에너지와 물질이 유입되어 경제활동에 사용되고 이후 폐기물 형태로 자연 생태계로 배출되는 것을 자원흐름(through-put)이라 한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이 같은 자원흐름의 과정을 매개로 자연 생태계 안에 배태되어 있다. (조영탁, 『한국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 생태경제학의 기획』, 2013)

그러므로 생태와 경제는 시스템으로나 순환으로나 당연히 서로 연결되어 있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경제의 순환은 생태계의 순환체계 안에 포함되어 진행된다. 그러나 경제학은 지구 생물권의 존재에 무관심하며 생태계의 순환에 무지하고 경제순환의 물리적 한계를 무시한다. 생태와 경제의 다양한 연관 속 상호작용과 그 효과를 외부성이라는 개념 안에 집어넣은 다음 경제분석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고 예외적인 경우 아주 제한된 방식으로 그 효과를 고려할 뿐이다. 더욱이 토양이나 기후, 생물다양성 등 지구 생물권의 대치할 수 없는 역할은 전혀 고려 사항이 되지 않는다. 하나의 사례로 인류가 먹는 농작물의 70%는 식물이 열매를 맺도록 꽃가루 운반자 역할을 하는 꿀벌의 도움으로만 경작이 가능하지만 경제학자들 중 다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세르주 라투슈, 탈성장사회, 양상모 옮김, 오래된 생각, 2014)

스웨덴의 환경학자 요한 록스트롬이 제시한 후 UN 리우환경회의 등을 통해 수용된 행성한계는 1)기후변화, 2)해양의 산성화, 3)오존 고갈, 4)질소 순환, 5)물 사용, 6)토지 이용 변화, 7)생물다양성 손실, 8)에어로졸 증가, 9)물질 오염 등 9개 영역으로 구성된다. (Rockström et al., 『Bankrupting Nature: Denying Our Planetary Boundaries』, Kindle Edition, 2013) 행성한계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유한한 생태계에 속해 있고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성장이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구 자원의 소비가 생물계의 수용 능력, 즉 지구의 생태용량 한계를 넘어 변곡점에 이르면 지구 시스템의 회복력이 손상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적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경제 시스템이 사용하는 “자원흐름의 규모”가 커지고 “자원흐름의 독성”이 강할수록 자연 생태계의 부담과 피해는 커진다. 지금은 자원흐름의 규모가 자연 생태계의 수용범위를 넘어서려는 상황이고 자원흐름에서의 “감량화”와 “탈독성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다. (조영탁, 위의 책, 2013: 349)

그럼에도 경제학은 거의 대부분 이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아마도 언젠가 우리의 미래세대는 생태와 경제가 하나의 동일한 과정임에도 당시 세대가 왜 그렇게 생태와 경제의 연관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놀라움과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이 간극을 연결하고 단절을 메우는 새로운 경제학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실은 이미 오래 전에 미국의 경제학자 케네스 볼딩이 “유한의 세계에서 기하급수적인 경제성장이 끝없이 계속될 것으로 믿는 자는 미치광이이거나 또는 경제학자이다”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거의 주목 받지 않았다. 생태학에서 다루는 에너지 흐름과 물질순환을 경제학에서의 경제순환에 명시적으로 도입하고 연결하려는 시도가 생태경제학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경제학의 가장 변방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 (Costanza Robert, Herman Daly, Richard Norgaard et. al., 『An Introduction to Ecological Economics』, St. Lucie Press, 1997)

생태학과 경제학의 통합, 생태와 경제의 통합은 당위적 차원의 필요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현상유지는 더 이상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닌 것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턴 보고서(『Stern Review: The Economics of Climate Change』, 2006.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영국의 경제학자 니콜라스 스턴이 온난화의 위험성을 경고한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로, 기후변화를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환경과 경제가 상충하는 의제가 아니라는 내용을 담았다)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방식의 경제, 사회적 행태가 지속되면 20세기 전반기 공황이나 세계대전과 같은 규모의 파괴적 영향이 나타날 것이고, 그에 따른 온갖 위험과 효과를 전부 고려하면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비용으로 매년 인류 전체 GDP의 5~20%를 지불하게 될 것이라고도 추정한다. 또한 앞으로 10~20년의 시기가 이후 21세기 후반 기후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크고, 지금 행동에 나선다면 최악의 효과를 피하기 위한 비용은 매년 전체 GDP의 1% 정도이므로 비용 대비 편익이라는 경제적 고려에서도 합리적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피크오일, 즉 화석에너지 시대의 임박한 종언 또한 현상 유지가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님을 말해준다. 웬델 베리와 웨스 잭슨은 화석연료의 고갈과 탄소배출의 한계점이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지만, 그러한 한계가 없다면 우리는 원하는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비록 전환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이러한 전환이야말로 인간 사회가 지닌 성찰과 적응의 능력을 보여준다는 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Mary Berry, 『A Conversation Between Wendell Berry and Wes Jackson』, Kindle Edition, 2017)

제4차 산업혁명이 운위되고 “노동의 종말”과 “고용 없는 성장”이 현실화되는 상황도 생태적 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기회를 제공한다. 프란츠 알트가 강조한 대로 고용 없는 성장과 생태 위기는 우리가 조망할 수 있는 시간표 안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이자 동시 해결이 모색돼야 할 문제이다. 알트는 재생에너지로 전환함으로써 생겨나는 일자리는 낡은 에너지원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없어지는 일자리의 5배에 달하며, 앞으로 에너지 전환만큼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것은 없다고 강조한다. (프란츠 알트, 『생태적 경제기적』, 박진희 옮김, 양문, 2004: 15, 82)





생태적 전환과 사회적 경제

생태적 전환을 위한 대안적 경제의 단위 요소들은 당위와 윤리의 차원에서 이미 실행의 차원으로 내려와서 현실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실험의 사례들과 성과를 축적하고 있다. 세계경제 위기에서 협동조합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경제가 주목 받고 성장하는 동시에,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대규모 자원의 집중과 소비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경제와는 다른 대안경제를 시도하는 소규모 프로젝트들이 성장하고 있다.

에너지 전환의 대표적 사례인 독일의 경우, 체르노빌원전 사고를 보고 충격을 받은 독일 남서부 슈바르츠발트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주민 650명이 원자력 발전으로 생산한 전기를 독점 공급하는 민간기업에 대항해서 1986년 시작한 재생에너지 사용 캠페인이 그 첫걸음이었다. 그로부터 25년후 독일에서는 지역사회의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에너지 협동조합이 활발하게 결성되어 2011년말 현재 439개가 되었다. (Osha Gray Davidson, 『Clean Break: The Story of Germany’s Energy Transformation and What Americans Can Learn from It』, Kindle Edition, 2012) 에너지 협동조합 설립 성과로 독일에서는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의 47%가 시민들이나 협동조합을 통해 이루어지고 태양열, 풍력, 바이오매스 등으로 구성되는 재생전기의 65%가 개인이나 협동조합, 지역공동체 소유로 운영된다. 에너지 전환은 단순히 깨끗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 아니라 기업이 지배하는 집중된 에너지 시스템으로부터 소규모의 분산적이고 분권화된 사회로의 사회경제적 전환이다. (Arne Jungiohann, Craig Morris, “Germany Shows It Is Worth Fighting for Energy Democracy”, Resilience.org, June 22, 2017)

제레미 리프킨의 제3차 산업혁명 논의는 지금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제4차 산업혁명’ 논의와는 달리, 경제산업구조 재편과 고용전략 수준에 머물지 않고 에너지 분산과 사회권력의 분산이라는 이중의 의미에서의 “파워 투 더 피플(시민에게 권력을 넘기는)” 기획임을 강조한다. 지역과 공동체가 기반이 될 때 보다 수평적이고 분권화된 정치시스템과 보다 분산된 공동체, 협동조합 등의 사회적 경제를 지탱하는 에너지 시스템이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웨스 잭슨 또한 로컬을 지켜내고 유지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가치 있는 일이며 그것이 바로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라 말하며, 로컬푸드 운동 역시 단순히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경제와 새로운 시스템에 필요한 결정적인 계기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Wes Jackson, “Toward an Ignorance-based Worldview”, Bill Vitek and Wes Jackson, 『The Virtues of Ignorance: Complexity, Sustainability, and the Limits of Knowledge』, Kindle Edition, 2018)

제레미 리프킨은 한걸음 더 나아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과 새로운 에너지 체계의 결합을 통해 “협력적 공유사회”라는 새로운 경제시스템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고 선언한다. 그는 『한계비용 제로 사회』(안진환 옮김, 민음사, 2014)에서 공유경제 확산과 확대의 기술적, 경제적 배경을 설명하는데 현대 자본주의 발전의 성과로 만들어진 커뮤니케이션, 에너지, 물류인터넷 등으로 구성된 글로벌 신경네트워크는 거의 대부분의 재화와 서비스의 한계비용을 거의 0으로 수렴되게 함으로써 자유재와 풍요로운 자원(제한된 자원이 아닌!)을 보편적인 상황으로 만들면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배분에서의 시장 영역과 이윤 창출 영역을 축소시키고 글로벌 공유자원의 영역을 급격히 확장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협력적 공유사회”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이미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일상 경제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대안적 경제의 다른 이름이다. 주거, 돌봄, 재생에너지, 도시농업과 도농교류, 보육, 의료, 온라인 오픈 플랫폼과 쉐어웨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출현하고 성장하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공유경제, 공동부엌, 지역재단, 전환마을 등이 그 형태들이다. 여기에 사회적 금융, 크라우드 펀딩, 지역화폐, 대안화폐, P2P 대출, 타임 뱅크, 크레딧 유니온, 윤리적인 은행 등 새로운 금융 거래 형태들이 협력적 공유경제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 역시 이 같은 사회적 경제의 구성요소들을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와 구별되는 협력적 공유경제의 핵심 경제단위로 제시하고 있으며, ILO(국제노동기구)는 이미 10여년전 “생태적, 사회적, 공동체적 목표가 하나로 수렴되는, 지속 가능한 사회발전 모델”로서 사회적 경제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생태문명을 위한 경제 체제

인간은 자신이 빅뱅으로 창조된 우주의 일부로서 최소한 두 번 초신성을 통해 재활용된 우주먼지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아는,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이 자신의 우주적 기원에 대한 인식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지구 생태계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주와 우리의 관계이며, 웬델 베리와 웨스 잭슨이 청지기 역할이라 표현했던(Mary Berry, 위의 책, 2017), 지구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인 인간의 책임 있는 역할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이제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구원할 위치에 있다. (찰스 버치∙존 캅, 『생명의 해방: 세포부터 공동체까지』, 양재섭∙구미정 옮김, 2010:132) 생태적 경제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너무 늦지만 않다면 그것은 인류 출현 이래 인류가 행한 가장 위대한 선택이 될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사물과 세상, 자연을 인식해온 방법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서 “무한성장” 이란 관념이 갖는 반생태적, 반우주론적 함의를 돌아보고, “생태적 인간(Homo Eologicus)”을 향한 문화적 진화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생태위기는 우리가 익숙한 사회, 우리가 익숙한 문명의 급진적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산업사회, 산업문명의 전환은 실로 지난한 과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해야 한다. 새로운 문명의 명칭이 무엇이든 핵심은 생태문명, 생태친화적 문명이 될 수밖에 없다. 생태문명을 위한 경제 체제는 지구의 수용능력 안에서 운용되는 생태적 경제가 되어야 한다. 무한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주의 대신 경제생활의 목적과 가치가 반영된 경제활동을 하는 개인과 경제조직, 새로운 경제주체를 만들어내고 경제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와 유∙무형의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그것은 재생에너지와 농업, 교통과 휴먼서비스를 중심으로 분권화된 지역들에 기반한 사회적 경제 생태계의 구축이 될 것이다.




정건화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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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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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 – 다른백년




[10]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

정민걸 공주대 교수한 윤정 2020.01.20 0 COMMENTS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

1972년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발표된 이후, 경제성장 위주로 달려오던 현대 문명이 지속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구환경이 더는 인류문명을 지탱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문명의 방향을 전환하지 못하면 인류가 지속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의 한 결과로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이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의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제안되었다.



이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을 사람들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해하고 있다. 한 극단은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무한의 경제성장을 지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는 방향이며, 다른 한 극단은 지구, 정확히 말해 인류를 위기에 봉착하게 할 경제 성장을 중단하고 지구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준 내로 경제규모를 한정함으로써 인류도 지속되도록 하는 방향이다. 현실에서 각각의 집단이나 개인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 양 극단의 스펙트럼 중 어느 한 지점으로 각자 이해할 것이다.

무한 경제 성장의 욕구를 담보하는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개념이 이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 수식어가 제안되었으며,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 언급될 때 대부분의 경우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의 해석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많은 논의에서 추구하는 바는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이라 볼 수 있다. 이 경우 지속 가능한 발전에서 ‘생태’가 중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민의 의식과 행동이 변해야 한다. 의식과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방안의 하나는 교육이다. 이러한 목적의 교육 중 하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큰 줄기인 생태 개념을 시민이 이해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행동으로 실천하도록 하는 생태교육이다. 하지만 생태교육의 개념에 대해 아직 명확한 정의가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생태교육의 정의

생태(ecology)의 뜻은 학문으로서 생태학(ecology)의 정의가 생태학자의 수만큼 다양한 것처럼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인간의 개입이 전혀 없는 순수 자연의 상태나 그 속성을 전제하기도 하고, 인간에게 전혀 위해가 되지 않는 환경의 상태를 전제하기도 한다. 인간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 상태는 인간 개입이 없는 자연이 순수하고 안전하다는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을 수도 있고, 위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인간이 철저하게 개입해야 한다는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을 수도 있다. 후자에서 인간의 개입은 전자의 순수 자연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훼손 행위를 방지하는 개입일 수도 있고, 인간이 자연을 적극적으로 안전하게 개조하는 개입일 수도 있다.

자연 개조를 옹호하는 관점에서의 생태 용어 사용은 생태농법에 대한 인식에서 볼 수 있다. 생태농법으로 생산된 농작물이 인간 건강에 좋다는 관념은 인간을 위한 식량생산의 도구로 자연을 이용하면서 인간 건강에 좋도록 자연을 개조하는 개입을 정당화하고 옹호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생태교육에서 말하는 생태는 순수 자연을 전제하며 무한의 물질순환을 통한 생태계의 지속성 개념에 바탕을 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다. 생태계는 개별 구성원인 종보다는 구성원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로서 하나의 계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

즉 생태교육에서 생태계는 인위적인 개입 없이 무한히 지속될 수 있는 물질의 순환계로 여겨진다. 에너지는 생태계 외부에서 안으로 흘러 들어와 생태계 내 생물구성원의 연결망(관계)을 통해 전달되다가 외부로 흘러 나가는 일방향의 흐름을 보여주지만, 물질은 생물공동체 밖의 무생물 구성원에서 생물공동체 내로 들어와 생물 구성원의 연결망을 통해 전달되다가 공동체 밖의 무생물 구성원으로 되돌아가며 생태계 내에서 무한히 순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생태교육에서 생태는 인위적인 개입, 즉 에너지의 투입 없이 무한히 순환하는 상태나 속성을 말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 개념에 기초한 생태도시는 환경에 위해가 발생하지 않는 자연 순환의 도시로서 지속 가능한 발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생태도시에서는 생태위기를 초래하지 않고 도시 문명이 지속되면서 자연 생태계의 생물상도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이상적으로 전제된다.

이처럼 생태교육에서 생태란 인간 문명 내에서 무한의 순환에 저해가 되지 않도록 인간 이외의 생물 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간까지 포함한 모든 생태계의 구성원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생태의 정의에 기초한 생태교육은 순수 자연이 무한의 순환을 하듯 인간과 자연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인간 문명이 지속될 수 있는 시민의 행동 양식을 익히게 하는 교육으로 정의할 수 있다. 생태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 즉 생태주의에 이념적 바탕을 두고 있는 생태교육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인식하고 인간이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이라는 점이 강조되기도 하다.

요컨대 생태교육은 일차적으로 현대 문명의 지속 불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자연 생태계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민의 생태소양을 높여 생태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생태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 생태교육의 목적은 생태시민이 인간 이외의 생물구성원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도록 함으로써 현대문명이 자연과 공존하고 지속 가능하게 하며 인류공동체 구성원들도 평등하게 공존하도록 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통합적 생태교육

20세기 후반부터 융‧복합적 또는 통합적 접근이 중요시되고 통합적 접근의 교육이 강조되면서 공통과학이나 공통사회 교과목이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도입되었고, 생태교육에서도 통합적 교육의 요구가 높아졌다.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가치관 변화와 사회 제도와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 생태시민의 개별 행동과 사회행동이 교정되도록 하는 데 기반이 되는 생태교육은 통합과학이나 통합사회를 넘어 전 분야가 통합하는 접근이 더욱 절실하다.

‘통합’은 표준대국어사전의 정의를 참조하면 ‘둘 이상을 하나로 합치는 일’로 교육에서는 ‘학습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학습결과를 종합하고 통일하는 일’로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통합적 접근’은 ‘경험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치관과 태도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분야의 시각에서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통일된 해석과 결론을 내리는 접근’으로 규정될 수 있다. 통합적 접근을 통해 개인의 가치관과 태도는 조정 변경되고, 조정된 가치관과 태도에 따라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개인의 반응, 즉 행동이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통합적 교육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답이 없다. 고등학교에서 형식적인 문∙이과 통합교육과정이 도입되었고 대학에서도 여러 분야에서 통합교육이 시도되고 있지만, 실제 교육내용이나 방법은 단순한 메들리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통합교과목이라는 명목 하에 한 교과목에 다양한 분야를 넣어놓고 한 교사가 가르치거나 다양한 전공 교사들이 연이어 가르친다고 통합적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분야를 학습하며 형성된 다양한 시각으로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분석하고 통합할 수 있게 훈련시키는 교육이 진정한 통합적 교육이다. 각 분야를 폭넓고 심도 있게 가르침으로써 배양된 학습자의 다양한 시각이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을 한층 더 심도 있게 분석하고 해석하며 통합할 수 있다. 이렇게 분석되고 해석된 결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충을 종합적인 틀에서 포괄하여 차이를 줄이고 조화로운 통일을 만들어가는 통합 훈련을 하는 것이 진정한 통합교육이 될 것이다.

생태교육은 이러한 진정한 통합적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교육이다. 환경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일차적인 단순한 해석들이 서로 상충되더라도 개인 또는 사회는 하나의 실천적 결론을 강제적으로라도 내려야 하며, 그러한 훈련이 이루어지는 교육이 생태교육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합적 결론을 내려야 하는 사례를 들어보자.

자동차의 연비를 개선하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이러한 기술 개발을 친환경적이라거나 생태적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연비가 개선된 차를 소유하게 된 개인은 친환경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보다 운행의 경제효율이 개선되어 운행 시간과 거리를 늘리기 때문에 연료의 소비량이 늘어나고 실제 배출되는 공해기체도 늘어날 수 있다. 낮은 연비 때문에 자동차 소유를 꺼렸던 사람도 자동차 운행의 경제효율이 개선됨에 따라 자동차를 구입하고 운행에 합류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공해기체의 배출총량이 친환경기술 개발 이전보다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 게다가 늘어난 차량을 소화하기 위해 도로 수요까지 늘어 자연이 더욱 훼손될 수 있다. 실제 역사는 이러한 현상을 증명해왔다.

이와 같이 환경부담 감소라는 개별 기술의 분석이나 해석이 기술수요 증가라는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분석이나 해석과 상충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상충을 해결함으로써 환경부담의 총량이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게 하는 제도적 해결책을 생각해 보자. 단순한 접근으로 자동차 운행수요를 줄이는 방법은 연료가격을 올려 연비개선에 따른 운행의 경제효율을 이전과 같게 되돌리거나 오히려 개악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자동차 운행이 유지되거나 감소함으로써 환경부담의 총량을 줄일 수는 있다. 그런데 이런 제도적 대응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기술자나 회사는 연비를 개선하는 기술을 더는 개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복합된 환경문제나 생태문제에 대한 문제 중심 혹은 과제 중심의 생태교육은 진정한 통합적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교육을 이끌어갈 교사를 어떻게 훈련하고 양성할 수 있는지의 난제가 있다. 과학, 기술, 사회, 인문 분야의 지식을 모두 갖춘 교사가 통합적 교육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각 분야의 지식이 부족한 교사라도 통합적 접근의 교육을 이끌어 갈 수 있는지 명쾌하게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속 가능성의 생태학적 이해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이 중심이 되는 생태교육은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원리를 자연 스스로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생태계에서 찾으려 한다. 그런데 과거와 같은 경제성장 방식이 더는 지구에 부담을 주지 않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하에 제안된 지속 가능한 발전이 인간에게 경제 성장을 중단하거나 축소하도록 경고하기보다는 경제 성장의 부작용을 줄이거나 없앰으로써 지속적으로 경제 성장을 키우려는 욕구를 오히려 더 자극하고 있는 듯하다. 그 결과 친환경 또는 생태 기술을 개발하여 지구 자원(물질과 에너지)의 소비가 계속 늘어나도록 하는 경제 성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물질의 상을 변환하는 모든 에너지 흐름의 과정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지구의 무질서도(엔트로피)를 높이며 최소한 인류의 지속성을 저해한다. 이러한 엄연한 우주법칙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인류 문명은 소비를 유지하거나 줄이기보다는 늘리는 방안을 생태계의 원리에서 찾으려 노력한다. 생태계는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는 계이기 때문에 생태위기를 악화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물질 소비와 에너지 소비를 늘리는 경제 성장 방안을 제공할 수 없다.

성장의 욕구를 채우려는 지속 가능성 요구와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르는 생태계의 본질은 서로 모순된다. 진정한 생태교육은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고 우주의 법칙을 따르는 지속 가능성에 부응하는 인류 문명의 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

모든 생태학 교과서는 생태계 내의 무한한 물질 순환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생태계 내에서 생물공동체를 거쳐 순환하는 물질은 전체 물질 중 극미량에 불과하다. 거의 모든 물질은 저장고에 머물러 있다. 극미량의 물질이 생물공동체를 거쳐 순환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간접적인 에너지는 상대적으로 막대하다.

광합성을 통해 생물공동체가 직접 사용하는 태양에너지의 양은 지구에 유입되는 양의 0.023%에 불과한데 비해 지구 밖으로 반사되어 나가는 34%를 제외한 66%의 태양에너지는 극미량의 물질이 순환하는 생물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도록 지구의 무생물 환경을 유지하는 데 쓰인다. 극히 적은 양의 물질과 에너지를 생물공동체가 직접 이용하고 나머지 거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생물공동체 밖에 머물기 때문에 지구는 생물공동체가 지속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반증은 제한된 공간에서 생물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실험이었던 ‘생물권 2’(생물권 1은 지구이므로) 실험이다. 1991년 미국 아리조나 주 남부 오라클의 사막지대에 1만2000㎡의 거대한 유리온실을 지구의 축소판인 바다, 습지, 열대우림, 사막, 초원 등과 3800여 종의 각종 동식물, 자원참가자 8명이 2년간 함께 지냈다. 그러나 제한된 밀폐 공간에서 생물공동체의 생명현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계속 증가하는 무질서도를 감당할 수 있는 거대한 무생물 공간이 없던 생물권 2는 지속되지 못하고 2년 만에 종료될 수밖에 없었다.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물질 순환은 생태계 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지속 가능한 생물공동체가 이용하는 생태계 내 에너지도 극소 분량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의 무한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지구 내 물질과 에너지의 소비를 계속 늘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은 불가능하다.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원리는 인류 문명의 물질과 에너지의 소비를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할 때만 인류 문명이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류 문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은 물질과 에너지 소비의 팽창이 아니라 다른 수준의 질적 향상, 정확히 말하면 자연의 과정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며 한정된 수준 내의 물질적 풍요를 수용하고 만족하는 정신적 행복의 향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생태교육의 이념

물질과 에너지 소비를 지속적으로 팽창하려는 무한 탐욕은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 따라서 생태교육이 추구하는 지속 가능성은 인류 문명의 물질과 소비를 한정된 수준 이하로 제한하는 생태적 지속 가능성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인간 사회로 확장하는 논의가 필요하다.

(1)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의 생태철학적 반성

많은 생물학과 인문사회학 책들이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을 생태계의 존속 방식인 것처럼 호도한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생태계는 지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강자가 약자를 초토화하고 박멸하여 강자가 취할 수 있는 약자가 더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강자로 비유되는 포식자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포식활동을 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포식자는 약자로 비유되는 피식자에게 무심할 수밖에 없으며, 피식자도 그렇게 무심한 포식자에게 도피활동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무심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포식자와 피식자는 한 생태공간에서 동시에 공존한다. 필자는 이러한 공존을 ‘모자람의 지혜(frugal wisdom)’를 바탕으로 하는 ‘무심의 공존(disinterested coexistence)’이라 명명하였다. (『이해하는 생태학: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찾아서』, 공주대 출판부, 2005)

이와 반대로 인간의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철저한 약자의 멸살로 공존이 무너지는 것을 ‘지나침의 무지(indulgent ignorance)’라 명명하였고, 그 결과는 인류 미래의 지속 불가능성으로 나타난다. (‘함께하는 사회의 구현: 4대강 사업의 이기적 탐욕과 생명경시 극복’, 『생명연구』45호, 2017)

절제하지 못하고 탐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인류는 자연과 공존하지도 못하고 인류공동체가 갈등 없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될 수도 없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은 물론, 인류공동체의 갈등 없는 공존을 위해서 인류는 생태계가 보여주는 ‘모자람의 지혜’를 탐욕을 억제하는 자기 절제의 지혜로 깨닫고, 생태계가 보여주는 ‘무심의 공존’을 타자의 생존과 권리를 존중하는 타자 배려의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류 문명은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토대로 자연이 보여주는 생태 평등(ecological equality, 정민걸, 위의 논문, 2017)을 인간 사회의 공동체에서도 구현하는 지혜로운 문명으로 발전해 가야 할 것이다.

(2)함께하는 생태시민의 자아실현

생태계가 지속되는 원리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생태계가 붕괴될 수 있는 과도한 에너지 전환의 과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작동하는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이다. 이 생태계 지속성의 원리는 물질과 에너지 소비의 무한한 팽창을 희구하는 인간의 무한 탐욕과 기술능력 과신으로 공존을 무너뜨리는 지나침의 무지와 대조된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해서 무한소비 탐욕의 발로인 지나침의 무지를 생태철학적으로 반성하고 소비를 생태적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한도 내로 절제하는 ‘모자람의 지혜’가 시민의 삶을 이끌어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소비가 절제된 이러한 시민이 생태시민이다.

생태교육은 생태계의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이념으로 지향하며, 학습자가 이런 이념을 체득함으로써 생태시민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러한 생태교육은 자연과 인간, 인류공동체의 생태 평등을 구현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

생태교육은 학습자가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인간의 탐욕에 비추어 그릇되게 이해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생태계는 ‘모자람의 지혜’로 ‘무심의 공존’을 구현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생태계 내에서 능력이 모자란 구성원들이 서로를 관조하며 공존한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도 생태교육이 학습자에게 생태계 지속성의 바탕인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깨닫게 하고 자연에 대해 인간의 능력을 절제하고 생태계의 존재를 무심하게 관조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무한 탐욕에 빠져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인류공동체는 구성원 간 불평등의 심화로 구성원들이 지속적으로 함께할 수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의 바탕인 ‘모자람의 지혜’와 ‘무심의 공존’을 이념으로 하는 생태교육은 단순히 자연과 인간의 공존만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함께 하는 생태 평등도 구현하는 교육이다.




정민걸

공주대 환경교육과 교수

한 윤정 [9] 생태교육을 위한 패러다임 재구축 – 김홍기 서울대 교수



[9] 생태교육을 위한 패러다임 재구축 – 다른백년

[9] 생태교육을 위한 패러다임 재구축

김홍기 서울대 교수한 윤정 2020.01.13 0 COMMENTS


기후위기에 따른 생태교육의 시급성

최근 수년간 급격한 기후변화와 전지구적 생태계 파괴를 경험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인류는 불안한 마음으로 디스토피아가 다가옴을 지켜보거나 애써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과학기술 낙관주의에 빠져있다. 현 인류가 처한 이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극적인 처방은 과연 있는 것인가? 지구 환경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국제적 노력과 크고 작은 규모의 사회조직체들의 활동으로만 충분한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류 문명을 개조하지 않는다면 디스토피아는 예상보다 빠르게 도래할 수도 있다. 기존 과학기술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중심적 환경주의 운동과 교육은 임시방편적이고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반면 인간과 생태계와의 화합을 주창하는 탈인간중심적 종교와 신비주의 철학은 현 인류문명의 토대가 된 과학기술의 견고함에 쉽게 무너져 버릴 수 있다. 현 인류에 닥친 지구 생태계의 문제는 매우 복잡하지만 동시에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다.

우선 인류 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곳에는 생태철학의 담론이 있어야 하는데, 현대 과학기술의 토대가 된 근대적 세계관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져야 한다. 또한 새로운 생태문명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생태교육이 학교교육 현장에 커리큘럼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는데, 과학적 자연관과 인본주의적 능력배양 중심의 근대 교육의 한계를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 결과적으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지구의 문화는 과학기술, 생태계, 문명이 공진화하는 선순환 관계를 전제로 하는데, 현재의 환원론적이며 기계론적 과학기술에 대한 탁월한 대안으로서 생태과학의 패러다임이 과학계에서도 인정받아야 한다.

생태철학의 담론은 오랜 역사를 통해 발전하였고 현재에도 유효하지만 생태과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가장 구체적이며 작은 실천부터 가능한 생태교육의 발걸음은 이미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철학과 과학연구의 새로운 세계관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세계관의 한계

17세기에 이르러 중세의 세계관이 종말을 고하면서 시작된 근대에는 인간, 신, 자연 간에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었다.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본주의는 교권과 스콜라 철학의 권위로부터 해방된 인격체로서의 개인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이로써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이 가능해졌다. 자연사물과 정신의 공통된 존재론적 기원으로서 그 자체가 탐구의 목적이었던 신의 위상은 중세를 벗어나면서 기껏해야 과학적 인식의 객관적 타당성과 보편성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지표로 전락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한 복음주의 신학은 각 개인이 신과의 접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개인주의적 구원의 체계를 교리화한 것이다.

근대철학의 합리론과 경험론을 대표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론과 베이컨의 우상론은 자연세계의 진리에 접근하고 개인의 지적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과학혁명이란 이름 하에 자연세계의 여러 단면들을 탐구하는 여러 개별 과학분야가 이 시기에 태동하였다.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 자연현상은 관찰할 수 있고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으로 제한됐으며, 수학적 언어만이 이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수단이 되었다.

한편 개인의 자유, 평등, 인권, 복지, 자본, 부의 개념이 근대 이후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었다. 자연세계는 인간과 분리된 객관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자원의 의미로 전락하였다. 일부 환경주의자들에게는 지속 가능한 지구환경이란 인류가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지구자원을 잘 사용할 수 있는 경제적 관점에서 규정될 수 있다. 이는 근대의 사유체계가 지식확장의 주체인 인간과 탐구의 대상인 자연세계가 철저히 분리된 이원론적 실체론을 기반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기계론적 인과론을 기반으로 이루어졌고 더 명확한 지식을 얻기 위해 자연세계를 더 작은 단위의 현상으로 환원하여 설명하게 되었다. 예컨대 복잡한 생명현상은 더 작은 단위의 분자수준에서 설명하고, 이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 화학과 물리학적 지식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생명현상, 기후변화, 국제정치상황 등은 단순히 환원적이고 기계론적인 방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인류문명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여러 기이한 부작용들을 현재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생태철학의 역사

지구환경 위기의 근본적 원인인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는 생태적 패러다임은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것인가? 제도화된 종교에 예속된 중세의 세계관과 권위에서 해방되어 인간중심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근대의 세계관은 인류의 전 문명에서 볼 때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종류의 세계관이 이미 동서양에 더 넓고 깊이 퍼져 있었다. 따라서 이런 세계관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오래 전 동양의 도가사상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도, 자연세계를 개별화된 개체와 부분으로 나누지도 않았다. 자연에 존재하는 각 개체들의 개별적 차이를 인정하지만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고 자연 개체들의 내재가치가 존재함을 믿었다. 생태학(ecology)의 어원인 그리스어 ‘oikos’(eco)는 가족, 집, 가정을 이루는 가족 구성원, 사회를 이루는 작은 단위 공동체를 의미한다. 자연은 모든 구성원들이 상호작용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지어가는 가정과 같은 것이고 생태지혜(ecosophy)는 노자가 말한 ‘유무상생(有無相生, 있고 없음은 서로 상대하기 때문에 생겨남)’, 즉 타자를 향한 관계적 진상을 깨닫는 직관적 통찰을 의미한다. 불교의 근본인 연기사상과 생명존중 사상에 따르면 법계와 생태계는 모든 존재가 상호 연결된 세계라는 점에서 같고 모든 생명체에 내재된 가치가 바로 불성이라고 가르친다.

기독교에서도 인간의 타락 이전에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분리가 존재하지 않았고,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죄로 분리된 관계성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고, 사랑으로 연합되는 전 우주적인 공동체가 교회라고 여겼다. 도교, 불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심층생태학을 주창한 아른 네스는 자연보존운동을 지향하는 표층생태주의가 여전히 인간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소아(self)에 국한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지구 안의 모든 것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심층생태학은 생물권 전체와의 일체 의식을 경험하면서 최대의 대아(Self)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관이라고 주장하였다.

근대철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정신과 철저히 분리된 물질의 개념을 공고하게 만들었지만 정신과 육체 사이의 인과적 관계에 대한 그의 기계론적 설명은 모순이 많았다. 또한 과학적 탐구의 대상인 자연은 인류의 발전과 진보의 수단으로만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발전시키려고 한 스피노자는 아이러니하게도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윤리학)』에서 초월적 인격신을 거부하면서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이 되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의 개념을 이끌어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고 신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거나 파악될 수 없으며 모든 개체들은 시공간 안에서 신의 속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양태 혹은 변형태라고 설명했다.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자연관에 따르면 신은 자연에 내재할 수 밖에 없으며 신과 분리된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전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사건, 경험들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고 이 모든 것들은 체계적으로 통합된 전체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란 무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스스로의 변화 생성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의 생태론은 인과적으로 연결된 유기체로서의 생명에 대한 직관적 인식을 통해 자연전체와 자연법칙을 통찰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니체도 초인의 정신은 바로 어린아이와 같이 자연적 삶을 누리고 스스로 자유롭게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19세기 말 이후 생태적 세계관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철학자는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이다. 그의 유기체철학 혹은 과정철학은 절대 시공간 속에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를 갖지 않고 동일하게 정지해 있는 것으로 존재하고 파악되는 ‘실체’라는 개념의 과학적 유물론을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로 여겨지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경험을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에 의해 구성되어 이름 붙여진 것이다. 각각의 현실적 계기는 그에 선행하는 (과거의 세계 전체인) 경험의 계기들을 통해 자신을 구성해가는 과정으로서의 존재이다. 이런 현실적 존재가 자기를 구성하는 생성의 과정을 파악(prehension)이라고 명명하였다.

화이트헤드는 자연의 모든 생명체도 인간이 가지는 경험의 정도는 아니라 해도 파악의 과정과 경험을 가지며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또한 시공간적으로 상호 연결된 자연 내의 모든 유기체들은 내재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생태계 내에서 생기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간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자기(Self)의 존재를 세계와 분리시키지 않고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생태교육의 핵심인 것이다.



생태과학의 등장

현대 물리학에서는 기존의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인과율로 설명될 수 없는 자연의 복잡한 현상을 유기체적 자연관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의 생물학과 임상의학 분야에서는 복잡한 생명현상을 기계론적이고 미시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믹스(omics, ‘체학’이라 번역되며 생명과학에서 분자들이나 세포 등의 집합체 전체를 뜻함)라는 분야가 등장해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유전체학(Genomics), 단백질체학(Proteomics), 후성유전학(Epigenomics), 대사체학(Metabolomics), 연결체학(Connectomics) 등이 그 예인데 단백질, 신경세포 등 몸 속의 여러 단위들 간의 상호작용과 연결에 대한 패턴을 분석하여 생명현상을 설명하려는 세부 학문분야들이다. 기존의 기계론적이고 선형적인 방식으로는 복잡한 생명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실험실 연구를 넘어선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 방법론이 복잡한 인과성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20세기 인공지능과 로봇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이버네틱스란 분야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상호관련성을 밝혀 시스템 스스로가 어떻게 자기를 조직하고 환경에 적응하는지를 개념화하였다. 오늘날 정보기술 분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월드와이드웹 기술도 정보와 데이터들의 연결을 통해 엄청난 양과 종류의 정보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초연결사회를 만들어가는 4차 산업혁명의 개념 역시 사람, 기계, 데이터, 환경이 서로 연결되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혁명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미 과학기술의 페러다임은 환원주의와 기계론을 넘어서 전체적 관점에서 관계와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구현하려고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에도 이런 패러다임을 적용할 수 있을까?



화이트헤드의 교수학습 원리

화이트헤드는 생태적 교육에 있어서 생태적 자기(Ecological Self)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 즉 생태교육은 한 개인이 세계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게 도와주는 도덕교육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실천적 요소라고 하였다. ‘생태적 자기’는 개인을 넘어 이웃, 사회, 인류, 생태계, 우주와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기본 개념이며 자기 초월성과 연결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학습자는 세계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 상호 의존하면서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고 이 관계성을 통해 생명이 유기적으로 끝없이 탄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로서의 개별 학습자는 고립된 에고(ego)가 아닌 사회적 관계를통해 다른 존재들과 연결된 자기(Self)의 존재를 경험하는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이며, 지식이 아니라 지혜의 눈으로 세상의 당면한 문제들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것을 학습해야 한다. 학습자 자신과 연결된 다른 존재들의 경험을 함께할 수 있는 마음을 공감이라 하며, 생태적 교육은 자연의 모든 존재들과 공감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주장하였듯이 교육은 교실 내에서 생기 없는 관념(inert ideas)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경험과 체험을 통해 창조성을 배양할 수 있는 환경을 학습자와 교사가 함께 가꾸어가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도덕과 교수학습의 네 가지 방법적 원리를 제시하였다.

(1) 상호성의 원리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는 관점에 기초한다. 교사와 학생은 양방향으로 경험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상호 파악(prehension)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파악의 주체가 된다. 이렇게 교육은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세계에 대해 배우고 공통의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인 것이다.

(2) 관계성의 원리는 도덕이 기본적으로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입장에서 관계가 확대되어감에 따라 발생하는 도적적 개념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도덕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원리이다. 즉, 교육은 ‘관계적 자아’에 바탕을 두고 생태환경이나 주변 이웃과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책임감을 발전시키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도덕교육은 다양한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통해 관계적 자아와 가치관계를 확장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3) 리듬의 원리는 학습자의 정신발달의 리듬적 특성을 고려한 교수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리로서, 인간의 삶과 교육이 주기적으로 순환되는 리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화이트헤드의 리듬의 원리는 그의 합생의 원리(다자가 모여 또 다른 하나의 존재가 되는 원리)와 일맥상통하는데 교육은 지속적인 파악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인 것이다.

(4) 조화의 원리는 추상적 사상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과 조화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지혜를 강조한다. 교양교육은 조화의 원리를 토대로 추상적 이론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조화의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자율과 훈육을 학습자의 정신발달의 특성과 전체 학습의 과정을 고려하여 학습 단계별로 조화롭게 커리큘럼에 적용함으로써 지혜롭고 창의적이며 책임감 있는 사회의 구성원을 길러내는 것이 화이트헤드 교육철학의 핵심이다.



생태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

생태교육은 근대의 기계론적 패러다임 안에서 생태적 내용만 교육하는 것이 아니다. 인본주의, 과학주의를 넘어 관계, 과정, 연결이라는 사고가 교육의 핵심원리가 될 때 진정한 생태적 교육이 실현될 수 있다. 생태철학과 생태과학에서 도입된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태교육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과 교수학습의 방법론이 재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근대적 세계관의 전환과 생태적 자기의 형성이 이뤄져야 한다.

아직 제도권 교육에는 도입되고 있지 않으나 여러 대안학교들과 지역공동체들에서 생태교육을 실천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다양한 생태교육 커리큘럼과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학습을 통해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유기적 관계를 깨달을 수 있는 생태적 감수성을 높이고, 타인 및 자연과의 유대감을 통해 정서적으로 안정된 건강한 자아 발달에 도움을 주려는 노력들이다.

생태교육은 과학기술, 생태계, 문명이 공진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하고 구체적인 시도이다. 진화는 한 개체가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환경을 구성하고 관계의 연결망으로 서로 이어져 있는 모든 개체들이 서로에 대해 적응해가는 과정이다. 지구 환경도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스스로 적응하고 자기조직화 하는 창조적 활동을 하고 있다. 생태교육은 인류가 지구와 함께 건강하게 진화할 수 있는 실천적 발걸음이다.




김홍기

서울대 치의과대학 교수, 의료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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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8] ‘자연’과 ‘과학’의 관계를 재정의하기 – 필립 클레이튼



[8] ‘자연’과 ‘과학’의 관계를 재정의하기 – 다른백년




[8] ‘자연’과 ‘과학’의 관계를 재정의하기

필립 클레이튼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교수한 윤정 2020.01.06 0 COMMENTS


왜 자연과 과학의 재정의가 필요한가

나는 자연과 과학이 이해되는 방식의 혁명적인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설명은 역사 혹은 철학 수업이 아니다. 이것은 정책결정, 정책의 프레임 구축, 지구의 미래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 마련에 필요한 설명이다. 현대적 가정의 바깥에서 “자연”과 “과학”을 생각하는 방식을 배움으로써만 우리는 문명적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통제 아래 놓인 지구와 생태계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또 “과학”은 이런 지배력을 뒷받침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인류는 자동차에서부터 화력발전소, 핵무기에 이르는 많은 기술을 통해 지구의 미래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한다. 이런 기술은 폭발적인 과학지식을 통해 발명되고 실용화됐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를 바꿈으로써만 우리는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할 때만 새롭고 진정한 생태문명을 향해 진전하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이것은 “큰 그림”의 문제이지만 추상적이지도, 우리와 무관하지도 않다. 정부, 교육, 산업, NGO 등이 정책과 우선순위를 바꾸려면, 현재를 넘어 우리가 생태문명이라고 부르는 목표를 향한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정책변화를 위해서는 우리 인간이 급속도로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현대(지난 50년 정도) 이전까지 아주 명백하게 보였던 근본적 가정을 의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생태문명연구소는 전 세계에 있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조직들과 협력한다. 이들은 이미 기후위기와 그것이 지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재해석을 내릴 때만, 인류는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사실상 생태계 전체가 인간의 통제에 들어간 후현대에 자연과 과학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현대 이전의 자연과 과학

오늘날 자연세계에 가해진 피해의 많은 부분은 자연이 “몰가치하다”, 즉 인간이 원하는 방식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현대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자연이 이런 방식으로 몰가치하다고 여겨진 적은 없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서도 그랬고 동양도 마찬가지다. 만약 자연이 몰가치하다면, 과학도 몰가치하다.

서양철학의 탄생을 생각해보자.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데이터와 패턴뿐만 아니라 자연의 기본원리(archē)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의 과학은 실증적이기보다 철학적이었다. 심지어 서양역사상 최초의 실증주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물리학이나 생물학을 배우는 목적은 인간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는 수단이었다. 이 초기 과학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신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대신 위대한 유교사상가들처럼 가치의 패턴이 이미 자연 속에 들어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결코 자연을 지배의 대상이나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600년경 현대가 시작되기 직전, 만물의 가치에 대한 믿음은 서양철학에서 정점에 달했다. 유럽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이 만물을 창조한 데는 각각의 이유가 있고 모든 것이 신성한 질서에 따라 적절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전체로서의 자연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신의 선함을 드러냈으며, 모든 생명은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여겼다.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과학은 일종의 자연신학, 즉 신의 과학이었다. 자연신학에서 신은 부분적으로 세계를 통해 이해됐으며, 세계는 신을 통해 온전히 이해됐다.



과학과 현대 세계

오늘날 환경위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시기인 이른바 현대를 끝내고 있다. 현대의 기원은 약 400년전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인간이 유일하게 생각하는 존재(res cogitans)라고 가르쳤다. 동물은 “단지 기계”이며 자연은 인간의 문명과 사고의 확장을 위한 배경에 그쳤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과학이 그저 인간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인간의 지구 지배를 위한 도구로 여겨지는 것도 놀랍지 않다.

이런 자연의 모습을 감안할 때 데카르트가 선택한 과학이 어떤 종류인지 상상할 수 있다. 바로 물리학이다. 동시대에 토마스 홉스가 주장한 것처럼 만물이 “움직이는 물질”에 불과하다면,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은 운동의 방정식이다. 실제로 토마스 홉스가 이런 말을 한 뒤 40년이 지나기 전에 뉴턴이 운동의 방정식을 제시했다.

이제 이 글의 핵심적 생각에 이르렀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자연에 대한 연구, 즉 우리가 선호하는 과학의 종류를 결정한다. 즉, 자연이 과학을 결정한다. 만약 자연이 생명체를 포함한다면, 자연은 생명과학을 이용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자연이 실재하는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한다면, 자연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 인류학, 역사, 문학, 그리고 예술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서구에서 근대가 탄생할 때 선구적인 과학자들은 이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들에게 자연은 기본적으로 원자, 나중에는 부원자적 입자가 된 물질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전 세계로 수출한 세계관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생각을 퍼트리기 쉬웠던 이유가 있다. 자연을 단지 객체로 바꿔놓는 게 인간에게 강력한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관이 배와 비행기, 총과 핵폭탄,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만들어냈다. 전세계 지도자들은 이런 세계관이 생산한 기술에 대한 대가로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과 상충하는 세계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문제는 이런 기술들이 이윤의 극대화를 주장하는 주주들과 “공동선”을 위해 조금도 헌신하지 않는 다국적 기업들을 양산한다는 점이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지속적인 성장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원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권력을 잃으니까!) 국내총생산(GDP)을 기반으로 성공을 측정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통제에 저항하는 국가들은 가난에 허덕이다가 국민들의 반란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작은 거라도 원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권력을 유지하려면 설사 기후변화를 일으킬지라도 국민들이 원하는 단기적 이익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서 교훈은 분명하다. 자연은 과학을 결정하고, 과학은 기술을 결정하며, 기술은 정치와 경제적 전지구화의 형식을 결정한다.

그런데 과학과 자연 사이에 형성된 역학의 나머지 절반이 있다. 자연이 과학을 결정하는 게 맞지만, 과학도 자연을 결정한다. 즉, 우리가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 가정들은 결국 우리가 연구하는 자연을 정의하게 된다. 아브라함 매슬로우가 썼던 오래된 표현인 “당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가 망치라면, 모든 것을 못처럼 다루고 싶어질 것이다.”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과학에 반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과학도로서 과학의 진보가 인간의 생존에 결 정적임을 강조하고 싶다. 점점 더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는 실험가들은 세계에 대한 풍부한 데이터를 얻고, 과학자들은 이 데이터를 이용해 경험적 일반화를 도출하고 자연의 기본법칙을 공식화한다. 이런 지식 없이는 기후파괴의 실제 규모를 알지 못했을 것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비하는 방법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400년 동안 과학은 현대적 세계관의 시종으로 이용됐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과학과 가치 사이에 더 견고한 장벽을 쌓기 위해 투쟁해왔다. 과학자들은 “문화적 전통과 미신에 구속되면 과학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래된 미신을 없애고 그것을 (과학이라는) 새로운 미신으로 대체하기 위해 현대적 지식을 수용해야 한다.

가장 최악은 현대적 세계관이 과학은 몰가치적이어야 한다, 즉 모든 가치를 넘어 존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점이다. 이런 잘못된 주장은 지난 400년 동안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우위가 전통적 가치를 현대성의 세계관과 가치로 대체하는 비용을 치렀다는 명백한 사실마저 부인한다. 예를 들어 객관적이고 입증 가능한 지식만이 가치가 있다,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정량화되고 통제되고 사용될 때만 정확하게 이해된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고 우리의 필요에 맞게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독보적이다, 물질 이상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생기, 의식, 예술과 종교, 선악-은 물질/에너지가 진화과정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복잡한 방식일 뿐이다 등의 주장이 우위를 얻었다. 어느 신경학자가 내게 말했듯, “전선과 화학물질, 그게 우리의 전부이다.”

어떤 실수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자연을 인간이 제약 없이 사용하는 자원의 집합으로 만든 게 그런 경우다. 결과적으로 깨끗한 공기, 파란 하늘, 마실 수 있는 물, 건강한 토양이 손상됐다. 기업농이 전통적인 농장을 대체했고, 교통체증은 세계의 거의 모든 대도시에서 자전거와 보행자들을 대체했으며, 알고 통제하려는 욕구가 연결하고 보살피고 보호하려는 바람을 대체했다. 대학과 기업은 가치중립적인 곳이므로 학생과 노동자들은 가치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게 됐다. 현대성은 식민권력의 확장과 함께 지구 전체에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를 전파했다.



몰가치의 과학과 몰가치의 자연을 넘어

과학이 승리를 선언한 이후 수세기 동안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다. 독립성에 기초한 실증과학은 이제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오늘날 과학, 기술, 산업이 “몰가치적”이라는 생각은 지구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종을 위험에 빠트렸다. 자연에 대한 현대적 관점은 대양의 산성화, 토양이 죽은 농경지, 사막의 확장, 지하수면의 감소, 급속한 지구온난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현대과학이 지식과 가치를 분리하고,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몰아내고, 지혜의 단련을 끝없는 소비의 즐거움으로 대체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고 지구 생태계가 붕괴지경에 이르렀음을 발견했다.

좋은 소식은 대안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성이 붕괴하면서 후현대가 등장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이 새로운 대안은 사람들이 땅, 공동체, 그들의 거처를 구성하는 생태계와 유기적으로 상호 연결돼 살아갔던 근대 이전시기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성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붕괴하면서 우리는 전근대의 선조들과 원주민들의 가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물론 전근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이것은 일종의 낭만주의이다-지구와 더불어 사는 새롭고 지속 가능한 방식을 창조하는데 과거의 중요한 요소들을 혼합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두 가지 중요한 단계가 있다. 첫째, 과학은 자연을 단지 “움직이는 물질”의 연구로 해석하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인간사회도 수많은 생태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양한 생태계의 상호연관성을 연구하는 새로운 생태과학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 둘째, 근대성을 벗어나 지속가능성으로 이동하는 것은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만큼 과거의 잔재로부터 새로운 문명이 탄생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생태적 사고와 문명적 변화가 필요하다.



생태문명을 향하여

“생태문명”은 네 층위의 조화가 이뤄진 후현대적 비전인데, 이는 사회, 과학, 전통적 가치, 생태적 사고를 규정하는 방식들 사이의 조화를 가리킨다. 이는 강력한 비전이다.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문명”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사회를 전체적으로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뜻한다. 문명은 개별적인 법, 정치, 기술 이상이다. 문명이란 한 집단의 전체 생활방식, 지구화 시대에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우리는 집단이 공유한 가치와 열망을 가리켜 영어로 “에토스”란 단어를 사용한다. 한 집단의 에토스를 보존하는 것은 오래된 풍습과 가장 깊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문제는 단순히 개별적 정책들, 즉 정부가 원자력의 사용을 승인할지 말지, 누가 자동차를 소유할지, 혹은 사회가 어떻게 농업을 조직할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생태문명이란 용어는 환경이란 용어를 확장시켜 한 집단의 모든 생활방식을 포함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생태농업은 기업농이 해온 고도의 석유의존 관행을 줄이고, 보다 전통적이며 지속 가능한 방식의 농업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생태경제학은 단순한 GDP를 넘어 경제적 성공을 측정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인간의 복지와 화합을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 사회의 다른 분야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새로운 네 층위의 비전에서 두 번째는 과학이다. 현대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가끔 과학과 기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자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이 복잡한 문제를 가진 현대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원시적 농업이나 토착민의 생활방식, 즉 삶이 보다 단순하고 과학이나 기술이 없던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생태문명 건설이라는 목표는 과거로의 퇴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태문명은 과학이 여전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계를 계승하므로 전근대가 아니라 후현대라는 목표를 갖는다. 과학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 과학을 통합시킨다. 생태문명은 탈과학(post-scientific)이 아니라 현대가 가진 해로운 가정들에서 벗어나 자연과 과학을 보다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과거의 과학은 사회와 지구를 위해 봉사하는 시종이었으나 지금의 과학은 주인이 되어 인간과 문화를 노예로 만들었다. 이런 추세를 역전시키려면, 공동선을 위한 과학에 재정지원을 하는 등 사회와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후현대의 우선순위에 봉사하는 과학의 인도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기술이 개발될 수 있다.

네 층위의 비전 중 세 번째는 전통문화의 가치이다. 이것은 서구인들이 종교라고 지칭하는 믿음과 실천의 집합인데 종교라는 말은 동양보다는 서구의 문화적 맥락에 좀더 편안하게 맞는다. 만약 우리가 종교라는 용어를 쓴다면, 후현대 종교만이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역자주: 불교나 힌두교는 서구인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체계화하기 이전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체계화, 권력화된 서구의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배타성과 획일성으로 인해 수많은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됐다.)

후현대 종교는 현대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각 문명이 가진 오랜 지혜를 돌아보며 우리가 사는 후현대 세계에 각자의 전통을 적용한다. 자신의 종교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대신, 상대방의 문화적 전통이 가진 지혜를 배우려고 한다. 후현대인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실천할 수 있다. 믿음과 실천이 사회에 유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일 필요는 없다.

누구나 “생태문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종교적 헌신 없이도 환경이라는 최우선의 가치를 위해 깊이 헌신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동물의 합일은 여전히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의 심오한 표현이 될 수 있다. 두 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유교는 상반된 힘과 이해들, 즉 남성과 여성, 통치자와 백성,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 지구와 조화롭게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라는 요구는 아마 우리 시대의 가장 높은 가치일 것이다. 도교는 차이간의 균형을 강조하는 또 다른 모델을 제공한다. 균형이란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사회의 각 부분들, 혹은 과학과 가치 사이의 균형을 의미할 것이다. 한쪽이 다른 쪽을 힘으로 억누를 때 불균형이 발생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 군사강국과 약소국가, 북반구와 남반구가 그런 사례들이다.

생태문명의 네 층위의 비전 가운데 마지막은 생태적 사고, 즉 환경 전체를 고려하는 과학, 철학, 정책이다. 생태학은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건강한 생태계는 그 생태계의 모든 유기체들 사이의 적절한 균형에 달려있다고 가르친다. 환경이 균형에서 벗어나면 생태과학이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행동지침을 제공한다. 정책이 확고한 생태적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다면 그 정책은 모든 구성 요소들 사이의 균형이 깨지더라도 바로 회복되도록 사회를 구조화할 것이다.



간단한 예: 과학 정책

한국과 미국 같은 국가의 정부는 과학정책을 구상하고, (미국의 경우) 국립과학재단(NSF), 국립보건원(NIH) 같은 과학단체들에 기금을 할당한다. 이런 정부출연기관들은 지원기준을 정하고, 이들의 기금 지원은 해당 국가의 과학연구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기금 지원결정을 내릴 때 그들은 과학을 어떻게 정의할까? 주요한 기금은 대개 매우 전문화된 프로젝트에 투입되는데, 그 이유는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의 개입도 차단되는데, 그 이유는 “인류의 장기적 이익”과 같은 목표는 5년 이내의 지원으로는 정확히 측정되거나 시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체적 기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어떤 “가치”가 기금 수혜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아이러니하다. 우선 정치적 가치인데 과학계에서는 기금을 받기 위한 전투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다음은 기금 지원기관의 특수한 가치인데, 이 기관들은 현재 과학적 패러다임 안에서의 정확성과 일관성이 유지되는지, 그리고 3년 내지 5년의 수혜기간 내에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는지 증명하기를 요구한다.

이런 가치들이 지원기준이 되면 결국 우리와 자연세계의 관계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이론과 기술을 지원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한 기술과 사회를 조직하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방식을 연구하고 증진시키는 과학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비전이 있는 장기 연구를 지원하는 일이 어렵기는 해도 NGO나 민간기부자들을 통해 약간의 지원이 가능하다. 시민들이 지속 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지원을 요구한다면, 정부도 정책 변화로 응답할 것이다.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

우리는 자연과 과학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를 살펴보았다. 지구는 위기에 처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자연을 인간의 소비를 위한 자원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런 자원을 어떻게 측정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할지 결정하는 수단이 됐다.

나는 건강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지구를 보호하려면 여러 과학분야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태문명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말만 하면 안 된다. 이런 종류의 사회질서가 어떤 것인지, 물리적∙생물학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엄격한 자연과학은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확신하는 후현대적 맥락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깊은 상호연관성을 인정하면서 생태과학과의 대화 속에서 후현대적 자연관을 세워나갈 때 모든 것이 변화한다.

전근대 시대에 인간은 자연과 가치를 통합할 수 있었다. 현대과학은 인간과 생태의 심오한 가치를 저버린 대가로 성공했으나 불균형의 과학이 됐다. 후현대 과학의 임무는 높은 수준의 현대과학을 과학분야 상호간의 관계, 지구와의 온전한 관계라는 가치 아래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다. 생태연구는 지구의 미래를 담보하려면 어떤 종류의 균형이 필요한지 밝혔다. 사고방식 혹은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은 사람들을 각자의 환경과 보다 가깝게 통합시키는 수단으로서 각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기를 권한다. 과거의 지혜와 미래의 생태학이 함께 현재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생태문명으로의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더니즘의 힘은 여전히 우세하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쉽게 통제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많은 정부들은 계속해서 지구의 이익보다 자국의 이익을 앞세울 것이다. 많은 소비자들은 사회의 이익보다 자신의 안락과 욕구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장기적 해결책보다 쉬운 단기적 대응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구의 미래는 위태롭다. 우리가 계속 상위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개인들은 계속 자신에게 가장 이익을 주는 생활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가치를 오직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정의하는 것은 지구의 생물다양성을 파괴하고 대규모 멸종을 낳으며 지구상 생명의 정교한 균형을 손상시킨다. 새로운 생태문명은 자연 본연의 가치라는 기반 위에서, 그리고 그 가치가 지구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지침으로 기능할 때만 이뤄질 것이다.




필립 클레이튼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교수, 생태문명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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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한 윤정 [7] 대학이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 – 마커스 포드 철학자



[7] 대학이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 – 다른백년




[7] 대학이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

마커스 포드 철학자한 윤정 2019.12.23 0 COMMENTS


대학의 탄생과 변화

대학은 1000년전 지금과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탄생했다. 그때는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기술도 거의 발달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어서 지상에서의 존재란 영원한 삶으로 가는 중간단계라는 종교적 사고방식이 지배했다. 그때 이후 많은 것이 변했고 대학도 중세에서 현대, 후현대로의 역사적 변천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대응해 여러 차례의 중요한 변형을 겪었다. 현재 세계의 상태를 고려할 때 고등교육의 주요한 목적은 무엇일까? 중요한 전제 가운데 하나는 고등교육은 인간이 더 의미 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도록 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적 정의와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증진시키도록 도움으로써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학은 이런 역할에 실패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 도덕적 헌신을 상실하고, 다른 면에서 잘못되고 파괴적인 사고방식에 헌신하며, 또 다른 면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아는 걸 어렵게 만들기조차 한다.



현대 대학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존재이다. 과거에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었지만 이제 매우 세속적인 기관이 됐다. 한때는 엘리트 집단이었으나 이제 수백만의 학생들에게 열려있다. 이론을 모든 것의 우위에 놓는 동시에 지극히 실용적이어서 문학비평과 이론물리학이 컴퓨터 프로그래밍, 엔지니어링, 경영, 디자인과 나란히 존재한다. 대부분 학문분과들이 각자의 형이상학적 배경을 가졌지만, 대학의 전반적 구조는 통일된 세계관의 가능성을 갉아먹는다. 대학들은 경제성장에의 헌신이라는 지배적 문화에 긴밀하게 묶여있는 동시에 이성과 숙고의 삶을 증진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문화적 전통을 보존하려는 기관이면서도 이런 전통의 기본적 가정들이 타당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세계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거나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현재 형식의 대학을 심각하게 재고할 이유가 없다. 현대 대학들은 세계가 현재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데 공로를 세웠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에 공헌했으며 부분적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기여했다. 그러나 최소한 진보의 길에 서지는 않았다. 현대 대학들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적과 바탕의 가정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은 산업과 정치의 지도자들, 계획가와 분석가들, 교사와 시민들을 교육하며 우리의 파괴적 관행을 떠받치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발전시키고 합법화한다. 현대 대학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환경위기가 가장 심각하고 사회적 부정의(이는 환경의 쇠퇴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가 역사상 가장 증가한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공동체 해체와 환경 파괴에서 대학이 해온 역할은 크게 주목 받지 않는다. 환경위기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과잉인구, 과소비, 대규모 산업, 공공정책,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라는 성경의 가르침 등에 초점을 두었다. 대학은 대규모 산업, 정부, 종교의 이해와는 떨어져 있거나 거기에 적대적이라고 스스로를 이해했다. 전반적으로 대학구성원들의 입장은 자연세계의 파괴에 대한 비난이 다른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동체 붕괴에 있어서도 대학의 책임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현대 대학들이 도시화를 촉진하는 이동성과 개인주의를 교육한다는 사실은 대체로 간과돼왔다.



현대적 믿음에 대한 대학의 헌신

나는 현재 형식의 대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데, 특히 학문분과, 철학적 유물론, 그리고 경제주의-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는 믿음-에 대한 헌신 때문이다. 대학이 세계의 선을 위한 세력이 되려면 이 세 가지를 넘어서야 하며 인간의 삶이 갖는 의미, 지구와 모든 서식자의 내재적 가치, 생명이 갖는 상대적 속성을 긍정하는 세계관을 보증해야 한다.

학문분과는 매우 강력한 동시에 통일된 세계관의 가능성을 저해하는 특별한 방식의 구조적 사고이다. 대학이 분과 형식의 사고에 매진하는 한, 대학은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학문분과의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일관성과 통일성과 의미가 부족하다. 한 분과의 다양한 전제와 발견은 다른 분과의 전제와 발견에 의해 영향 받거나 점검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무제한의 경제성장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가정하는 반면 물리학자들은 지구의 파괴를 경고하는데, 이런 경고와 발견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고려되지 않은 채 넘어간다. 마찬가지로 물리학자들은 모든 실재가 물질로 환원되고 그런 물질은 내재적 가치, 경험, 자유가 없다고 가정하는데 비해 (암묵적으로는 대다수 과학자들을 포함해서) 대학의 다른 학자들은 최소한 인간의 삶에는 의미가 있고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의 행동과 믿음에 책임이 있다고 가정한다. 대학의 분과구조는 이런 모순적 관점이 어떻게 두 가지 모두 진리로 통용되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공존하는 것을 허용한다. 전반적으로 통일된 실재에 대한 관념을 공유하는 대신, 서로 정반대인 추상적 개념을 내놓는다.

이런 방식으로 현대 대학은 현대성의 한 버전인 철학적 유물론이라는 후현대적 입장을 보태놓는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실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 그리고 중력 같은 물질적 힘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대학에서 발견되는 근대적 세계관, 즉 오래 되고 이원론적인 세계관의 잔여일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세계관이다. 유물론은 초기의 이원론에 비해 더 큰 장점을 갖는다. 비이원론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으로 분명한 실체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데 따른 문제를 피해간다. 이렇게 설명되지 않는 것에는 경험(인간의 경험을 포함), 자유(인간의 자유를 포함), 내재적 가치(인간의 내재적 가치를 포함), 도덕적 미적 규범 등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생명이 없고 의미와 목적을 피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물론이라는 세계관을 향유하는 개인의 존재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현대 대학은 또한 경제주의에 경도돼 있다. 경제주의에 따르면 세계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돈으로 해결되며 돈은 은총처럼 무한하다. 세계경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섯 배나 팽창했는데도 세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다수가 더 나빠졌다는 사실, 전반적인 환경이 전지구적 부의 증가에도 불구하고(대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심각하게 쇠퇴했다는 사실은 이런 믿음에 대한 반증이 되지 않는다. 세계의 경제활동이 무한히 팽창하며 모든 이들에게 이익을 주고 건강한 생태권역과 양립 가능하다는 믿음이 너무 깊은 나머지, 경제주의가 보편적 부라는 공공연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에 설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주의는 잘못되고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점점 큰 지구의 쇠퇴와 인간의 고통을 가져온다. 단순히 말해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한 경제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현대 대학들이 직간접적으로 경제주의를 지지하는 한, 환경적으로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공정한 세계와 한편이 될 수 없다. 경제주의는 삶의 의미를 소비와 소득의 관점에서 정의하기 때문에 이런 목적을 수용한 대학은 자연세계의 파괴를 가속화하고 인간의 고통을 증진시킬 뿐이다.



대학이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데도 대학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하지 않는 열세 가지 생각이 있다. 더 나쁜 것은 이 모든 생각이 진리로 간주되며, 전 세계의 고등교육기관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인증됐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대학들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들에 자신의 권위를 부여한다. 그 열세 가지 생각은 다음과 같다.

1. 실재는 내재적 가치를 갖지 않는다.

2. 우주는 목적이 없다.

3. 진리, 정의, 아름다움은 완전히 주관적이어서 중요하지 않다.

4. 사회 전반의 건전도는 GDP로 측정될 수 있다.

5. 광범위한 경제적 불평등은 문제가 아니다.

6. 교육은 직업훈련과 출세에 관련된 것이다.

7. 공장식 농축산업은 효율적이고 필요하며 지속가능하다.

8. 모든 중요한 문제는 시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9. 개인이 사회보다 더 현실적이다.

10. 가능한 최선의 세계질서는 하나의 슈퍼파워만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은 미국이다.

11. 글로벌 경제는 필연적이고 지속 가능하다.

12. 전쟁과 부정의는 피할 수 없다.

13. 경제성장은 기후안정성이나 생물다양성만큼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

만약 한국과 미국이 지속 가능한 문명을 이루려면, 고등교육을 재발명하거나 현재 상태의 고등교육을 다른 종류의 고등교육으로 보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세계를 파괴하는 생각에 도전하고 그것을 보다 진실에 가까운 생각으로 바꾸도록 해주는 형식의 고등교육이 필요하다.

나는 위에 제시한 열세 가지 생각에 대해 토론하고 이 목록에 다른 생각들이 추가되기를 바란다. 아마 내가 만든 목록은 의도하지 않고 의식하지 못했지만, 미국 중심적일 것이다. 그러나 내 요점은 대학들이 당대의 문화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몇몇 중요한 생각들은 현재 구축된 고등교육의 맥락에서는 추호의 의심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형식의 대학이 세계를 파괴하는 생각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대학의 구조와 관련이 있고, 둘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형태 짓는 광범위한 문화적 가정과 관련이 있으며, 셋째는 정치적인 문제이다.



대학이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

오늘날 대학은 학문분과에 따라 조직돼 왔다. 과거에는 반드시 그렇지 않았고 미래에도 그럴 필요가 없다. 학문분과는 탐구분야, 기본적 가정의 세트, 방법론으로 구성된다. 학문분과에 맞지 않거나 현재 분과의 기본가정과 모순되는 생각은 오늘날 고등교육의 맥락 안에서는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내가 지구에서 인간이 영위하는 삶에 해롭다고 꼽았던 위의 모든 생각들은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

만물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예로 들어보자.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분과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 위에 놓여있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가능성을 음미하는데 닫혀있다. 이론상 철학 같은 다른 분과는 실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거나 이것이 실재에 대해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만물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말이 안 된다거나 우리는 물리학자들의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초점은 실재하는 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가정이 더 개연성이 있다고 설득하려는 게 아니다. 현재 대학이 구조화된 방식 때문에 이런 생각이 대학에서 타당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산업화된 농업은 산출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토양을 파괴하기 때문에 지속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들어보겠다. 농경제학이라는 분과는 그것이 바이오기술과 결합돼 있는데다 대규모 농화학제품 기업들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기 때문에 위의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이런 생각이 잘못됐다고 증명하거나 토론하지도 않는다. 그냥 무시해버린다. 많은 대학에 있는 환경연구, 지속가능발전, 음식연구 관련 학과들이 현대 농업은 지속 가능하다는 생각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지만, 이런 학과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일반적으로 대학 안에서 낮은 지위를 차지한다. 이 학과들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농업정책과 관행을 만들어내는 농과대학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대학들이 위의 열세 가지 생각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대부분이 이미 “상식”이 되어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등교육의 목적은 개인의 성취라는 생각과 끝없는 경제성장이 가능하며 바람직하다는 쌍둥이 생각을 예로 들어보자. 모든 사람들이 경제성장은 끝없이 가능하며 대학에 가는 이유는 좋은 직업을 얻는 것, 즉 많은 돈을 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국의 경우 고등교육이 고강도 노동, 탁월한 경제정책과 함께 삶을 엄청나게 개선한 주역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생각에 도전하는 것은 상식을 배반한다. 그러나 전체 그림은 좀더 복잡하다. 한국의 삶이 모든 면에서 과거보다 나아진 것은 아니며, 10년마다 두 배가 되는 경제성장 역시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강의 기적은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이것은 경제성장이 끝없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가정에 그 뿌리가 있다.

대학은 바깥 세계로부터 단절된 “상아탑”으로 불려왔다.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다. 그러나 더 깊은 진실은 대학이 사회적 구성물이며 문명의 상식이 교육과정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경영대학원과 경제학과는 경제학이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도덕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학, 최소한 미국 대학들이 “경제학은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도덕규범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처럼 위험한 생각을 고려하는 게 지극히 어려운 세 번째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다. 미국에는 대개 소규모인 사립대학들과 대개 대규모인 공립대학들이 섞여 있다. 미국의 대다수 학생들은 공립 대학에 다니고 있다. 공립대학 교수들은 각 주에 고용돼 있다. 일부는 종신직위를 보장받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현재는 70%의 교수들이 종신고용을 보장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다.

공식적으로는 모든 교수들이 어느 정도의 학문적 자유를 누리지만, 매년 계약이 끝나는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이런 자유는 다음 학년초에 계약을 연장해야 한다는 열망에 의해 제한된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다시 고용되지 않을까 두려워서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생각들을 강의하는 게 결코 편안하지 않다. 슬프게도 정규직 교수들조차 종종 승진하지 못하거나 학생들의 평가에서 별점을 덜 받을까 두려워서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는 생각들을 피한다.

한국 대학들이 대개 사립이라고 하더라도, 내 짐작으로는 상식적 생각들에 도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정치적 압력들이 존재할 것 같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전반적으로 대학들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들에 대해 다루지 못한다. 이런 일반화에는 예외가 있으며 이런 예외를 축하해야 하지만, 이런 예외가 더 큰 진실을 가리도록 허용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대학들은 상황을 호전시키지 않는다. 대체로 자신들의 상당한 권위를 공개적으로, 비공개적으로 잘못되고 파괴적인 생각에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지구를 파괴하는 “지식”을 재생산함으로써 상황을 점점 나쁘게 몰아간다.



대학을 변화시키는 두 가지 제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통할 수 있는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두 가지 제안은 가능성의 전부가 아니며 얼마든지 다른 제안이 더해지길 바란다.

큰 대학의 교수들은 위에 제시된 위험한 생각들 가운데 하나 혹은 그 이상에 대해 탐구하는 독서그룹을 조직할 수 있다. 대여섯 명으로 구성된 독서그룹에서 한 학기 동안 한두 권의 책을 공들여 읽도록 한 다음, 이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자신들과 전공이 다른 동료들과 서너 번 만나도록 하면 된다.

우리는 애팔래치안 주립대학(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중간규모 주립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이것과 비슷한 강의를 시도했다. 주제는 기후변화와 그것의 사회적 함의였다. 결과는 희망적이었다. 많은 교수들이 같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다른 교수들과 만나고, 자신들의 특수한 학문분과 바깥에서 중요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환영했다. 이런 위험한 생각을 가르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대학의 분과구조였다. 비록 임시적 토대에서 이뤄진 일이지만, 교수들이 자신의 전공을 넘어 함께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현재의 대학 구조를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 독서그룹이 거둔 눈에 띄는 성과는 어떤 생물학과 조교수가 학생들이 생물학 전공기초 강의에서 전지구적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 부분은 선택강의이며 많은 강사들이 이 부분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생물학과는 전공기초 강의에서 기후변화의 생물학적 함의를 필수강의로 지정했다. 이론상 다른 학과의 교수들도 전공기초를 정하면서 비슷한 결정을 할 수 있다.

이 강의에서 얻은 또 다른 결과는 약 100명의 교수들이 기후문제에 대해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정보를 자신들의 강의에 넣겠다고 자발적으로 서약한 것이다. 이런 서약은 교수들에게 부과된 의무사항이 아니라 개인적 결정이었으나, 그들이 이 서약을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현대 대학처럼 오래 되고 존경 받는 제도를 금방 뜯어고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함께 독서를 하는 것 같은 간단한 일들이 변화를 위한 맥락을 만들어내는데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종류의 분과를 횡단하는 노력들이 현대 대학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잠재력을 가질 것이다.

나의 두 번째 제안은 대학 바깥에 대규모로 존재하는 성인학습센터와 관련된 것이다. 1920년에 독일 철학자 프란츠 로젠츠바이그는 독일 대학들의 비인격적 교육에 맞서 레흐르하우스(Lehrhaus, 교육의 집)로 알려진 기관을 설립했다. (역자주: 당시 독일에서 제기된 평생교육의 필요성에 부응하면서도 유대의 전통에 기초한 성인교육기관으로, 회당(synagogue)을 학교(lehrhaus)로 바꾸되 거꾸로 하지 말라는 탈무드의 가르침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유대역사에서 첫번째 레흐르하우스는 제1차 바빌론 유수때 세워졌으며 혁신적 교육방법으로 신앙의 의무를 지켰다.) 레흐르하우스의 강조점은 전통적인 유대식 삶에 대한 현대성의 도전에 대응하고 비위계적인 교수법을 도입하는데 있었다. 1930년대에 나치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레흐르하우스는 독일에서 가장 활기 있는 교육기관이었다. 1970년에 레흐르하우스 모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느 정도 부활했다.

1960년대에는 몇몇 “대안대학”들이 미국에 설립됐는데, 이는 그 시대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제도권 대학들이 실패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지속 가능한 농업, 건강한 공동체, 지속 가능한 경제학 같은 구체적인 문제 혹은 생태적이고 정의로운 문명을 증진시키는 발상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조직하는 성인학습센터 혹은 “대학”을 설립하는 게 가능하다. 이런 “대학” 혹은 성인학습센터는 위에 제시된 위험한 생각들을 얼마든지 탐구할 수 있다.

나의 주안점은 현재 형식의 대학들이 문제의 일부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운영하는 대학들은 구조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지구를 파괴하는 생각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무능력하다. 물론 문화 자체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고등교육을 변화시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대학을 내부와 외부에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현대 문화의 모든 다른 측면들까지 변화시키려고 힘써야 한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출발점은 없다. 그럼에도 새로운 종류의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식의 고등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커스 피터 포드

철학자, 『현대 대학을 넘어: 구성적 후현대 대학을 향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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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이트헤드와 생태문명 – 다른백년




[6] 화이트헤드와 생태문명

존 캅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명예교수한 윤정 2019.12.09 0 COMMENTS


근대적 사고와 화이트헤드 철학

화이트헤드와 생태문명은 내 삶의 심장과 같은 주제이다. 나는 화이트헤드 철학을 만나면서 인생의 무의미함에서 탈출했다. 그의 철학은 근대적 사고를 무조건 규범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내 경험상 근대적 사고는 늘 니힐리즘으로 귀착된다. 무엇이 옳은지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근대적 사고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제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통찰이었다.



나는 화이트헤드를 통해 나의 주관적 경험, 목적, 결정, 감정이 완전히 현실이며, 따라서 인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또한 내 경험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비슷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모든 인간은 경험하며, 이는 모든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화이트헤드 철학은 경험의 어떤 특징들을 더욱 확장하면서 이원론을 피해가도록 도와준다. (역주: 흄, 칸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 철학자들은 우리와 세계의 관계가 감각기관, 특히 시각에 의해 중재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대상인 객체의 분리를 낳았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전제를 거부한다. 감각은 우리에게 의식적 지식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우리는 훨씬 근본적인 방식으로 세계의 존재를 느낀다. 화이트헤드는 전자를 현시적 직접성, 후자를 인과적 효과성이라 부르며, 실제 우리 경험을 분석하면 인과적 효과성이 현시적 직접성의 지각을 받쳐준다고 주장했다. 인과적 효과성의 지각은 앞선 사건의 어떤 측면을 새로운 생성의 참여자로 만드는데, 이를 파악이라 명명한다. 생성의 모든 순간은 물리적 극점과 정신적 극점을 동시에 지니기에 물리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라는 이원론을 대체한다.) 경험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내 경험,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의 경험이 갖는 가치를 매우 명백하게 만든다. 경험은 거기에 가치가 더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사실”이 아니다. 경험이란 “가치가 더해진 사실”이다. 경험에는 가치가 있고, 그것 자체가 가치일 뿐만 아니라 뒤따르는 경험의 가치를 증가시킬지, 감소시킬지 결정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느끼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이 중요하며, 차이를 만들어낸다.

화이트헤드 연구자들은 모든 것이 중요성을 갖는다고 여기며, 그러므로 사방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1969년 나는 갑작스럽게 내가 이전까지 당연시했던 사회구조와 개발 패턴이 인류를 전 세계적인 자기파괴로 이끌고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되었다. 사방에서 인간의 요구에 부응해온 세계의 용량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인간 자신을 포함한 자연을 착취하는 가운데 지속 불가능한 길을 가고 있다.

전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시대에 이런 사실을 알고, 인간사회를 지속 가능한 길로 돌려놓기 위해 헌신했다. 나는 그들에게 가담했고 지금까지도 그들 중 한 명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지속가능성” 이상의 것이다. 우리가 지속시키고자 하는 것은 건강한 공동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이라고 본다. 우리의 목표를 좀 더 매력적이며 의미 있는 방식으로 명명할 필요가 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세계관을 유기체 철학이라고 불렀다. 그의 핵심적 강조점은 유기체들의 상호연관성이다. 만약 화이트헤드가 생태철학이라는 용어를 알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철학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중국을 통해 나는 내가 희망하는 세계를 ‘생태문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역주: 중국은 2007년 제17차 공산당 당대회에서 생태문명 건설을 주요 국정지표로 처음 제시한다. 필자는 화이트헤드철학을 매개로 중국 학계와 지방정부의 생태문명 논의에 깊이 관여해 왔다.) 세계의 구조 자체가 매우 생태적이고, 근대성이 그런 생태적 특징을 약화시키거나 심지어 파괴해 왔음을 이해하게 됐을 때, 나는 내가 희망하는 세계를 생태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점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은 이 이름을 사용하며, 현재까지 유용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생태문명이라는 개념이 화이트헤드 연구자들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생태학이란 개념은 생물학의 하위분야에서 유래했으며, 자연에서 모든 식물이 다른 식물들, 곤충들, 동물들과 잘 연결됐을 때 잘 자란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대중의 주목을 끌게 됐다. 만약 자연이 건강한 상태이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개별 종의 건강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건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런데 근대 세계는 금전적 잣대를 들고 자연에 접근했다. 그 목적은 단위 면적의 토지에서 가능한 최대의 이윤을 거두는 것이다. 인건비가 내려가면 이윤은 올라간다. 따라서 생태계를 단일경작으로 대체하면 노동의 수요를 줄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생태학자들은 1960년대 후반에 대중의 주목을 끄는 방식으로 경종을 울렸다.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현대문명이 전체적으로 생태적 고려사항들을 무시하고 문명을 지속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했을 때, 이런 문명은 생태적으로 민감한 문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 철학 혹은 종교에 헌신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생각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화이트헤드 철학에 대한 흥미가 없더라도 생태문명을 지지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세계에서 철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일은 드물고, 만약 생태문명을 위해 헌신하는데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면 이 운동의 전망은 사실상 매우 암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화이트헤드 철학을 생태문명과 관련이 없는 것, 심지어 방해물로 만드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치중립적 교육의 문제

우리 시대에 대학들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봄으로써 화이트헤드의 생태철학과 생태문명이 갖는 관계에 대한 나의 관점을 설명할 수 있다. 현대 대학에 대해 나는 매우 비판적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생태학을 전공한 대학교수들을 통해 생태위기를 인식하게 됐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겠다. 좀 더 최근에는 기후학 교수들을 통해 기후 위기를 인식하게 됐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대학들은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제공하며, 때때로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이런 정보를 대중과 공유한다.존 캅 교수 <출처: 중앙일보>

그럼에도 이제 비판적으로 접근하겠다. 오늘날의 대학들은 여러 학과들의 집합으로 구성돼 있다. 이것은 어떤 특수하고 경계가 분명한 주제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보탠다는 연구 목표에 따라 조직된 것이다. 이런 학과들은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사심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각자의 분야에서 가치를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연구 목표를 이루고자 한다. 예를 들어 하버드 대학은 스스로를 가치중립적 연구중심 대학이라고 소개한다.

기후학자들이 나름의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은 인간의 활동이 기후를 부정적인 방향, 심지어 재앙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깊이 좌절했다. 그들은 지구를 인간이 살기에 쾌적한 상태로 만드는 기후에 가치를 매긴다. 나는 다른 학과에서도 이와 비슷한 어떤 가치들이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역할은 인정되지 않는다. 학계 분위기는 각 학과들이 건강한 지구에서 건강한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방향을 지향하도록 권유하지 않는다. 학계는 중립을 권유한다. 실용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대학의 연구 주제들이 연구자금의 수혜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이다.

대학교수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영향력 있는 책의 제목이 『당대의 세계를 구해라(Save the World on Your Own Time)』이다. 이 책은 대학 강의실에 가치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설명한다. 교수는 자신이 속한 분야의 지식을 증진시키고, 그것을 학생들과 공유하며,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 분야의 지식을 증진시키는데 참여할 수 있는지 가르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방대한 지식이 부족한 자원의 소모를 가속화하는데 쓰이는 시대에 교수의 역할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그런 염려가 자신들이 공부하는 내용과 방법에 영향을 미치도록 가르치는 것이며, 이것이 세계에 더 큰 이익을 가져온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가치중립적 고등교육은 모든 가치들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인본주의적 가치가 뚜렷했던 인문대학(리버럴 아츠 컬리지)들을 대체했다. 인문학 교수들은 학생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걸 목적으로 삼고, 학생들이 장차 사회의 지도자로서 자신들의 문화적 자산을 활용하도록 가르쳤다. 50년 전에는 많은 학생들이 이런 가치를 위해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더 보수가 높은 직업을 얻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다. 부라는 가치가 중심이 된 것이다. 이것은 사회 전반에서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에 대한 추구가 사회적 가치가 되면 될수록 다가올 재앙 또한 커질 것이다. 인류의 운명이란 관점에서 볼 때 고등교육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부에 대한 봉사와 부라는 목적의 전파는 우리의 건강한 생존 기회를 감소시키고 있다.

많은 교수들이 강의 외의 시간에 인류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일한다. 고등교육에 대한 나의 비판이 교수들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와는 관련이 없다는 식의 사고, 그 이상을 부추기는 시스템에 반대하는 것이다. 왜 이런 시스템이 고등교육을 바꿔놓은 것일까?



생태문명을 위한 철학의 역할

이 시스템은 근대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 개념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아마도 불가피한 결과물일 것이다. 근대문명은 눈부시게 성공한 자연과학과 함께 성장해 왔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기계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탄생했다. 이것은 자연에 내재한 어떤 가치도 부정해 왔다. 자연은 인간을 위한 도구적 가치를 가질 뿐이다.

19세기 후반까지 근대문명은 이원론적이었다. 자연이 기계라는 사고와 함께, 근대문명은 고대 그리스와 히브리에서 유래해 중세에 통합된 인본주의적 이해를 계승했다. 인문학에는 중세 대학들의 사고가 뿌리내리고 있으며, 19세기까지 이런 전통은 계속됐다.

그러나 19세기에 찰스 다윈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증명했다. 이는 자연을 다시 생각해 보거나, 인간도 자연이라는 기계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기계론적 과학에 대한 근대의 헌신은 매우 확고한 것이었기 때문에 후자가 승리를 거둔다. 중세적 인본주의는 근대적 기계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계적 세계는 어떤 목적이나 가치도 갖고 있지 않다. 대학은 가치중립적이 되기를 스스로 희망했을 것이다.

물론 교수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를 좀비(기계인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마누엘 칸트는 우리가 좀 더 사실에 근거한 정보를 얻는데 사용하는 “이론적 이성”과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는데 필요한 가치를 고려하는 “실천적 이성”을 구별함으로써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데 기여했다. 칸트에게는 둘 다 중요했다. 그러나 대학들이 스스로를 이론적 이성의 영역에 가둠으로써 우리 문화에 지침을 주는 어떤 곳도 없었으며, 이는 아이들에게 가치에 대한 진지한 사고가 중요하지 않거나 심지어 가능하지 않은 종류의 일이라고 가르치는 결과를 낳았다.

교수들이 강의하지 않는 시간에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자유롭게 일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정보에만 가치를 두고 판단을 정지하도록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 같은 교육의 구조화는 현대세계의 근본적 믿음에서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것이 자기파괴를 피하도록 도와야 하는 절망적 상황에서 사회를 조직하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그 근본 전제들을 검토해야 한다. 이 전제들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더 나은 전제로 대체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데 철학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생태문명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의 문제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과 손자들이 쾌적한 지구에서 살아가길 바란다. 이는 행동의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윤리적 관점에서 현재의 나쁜 행동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구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쁜 행동이 근대적 원리와 믿음을 내면화한 많은 이들에게는 좋은 행동이 된다. 재차 강조하지만 토대를 이루는 믿음들이 문제다. 그러한 믿음들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토론해야 한다. 이것이 철학의 임무이다.

혹자는 대학의 철학 교수들이 이런 임무에 종사한다고 기대할 수도 있다. 몇몇 교수들은 그렇다. 아마 모든 교수들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기회를 주는 인식을 갖도록 학생들을 북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재의 본성에 관한 근본적인 전제들을 검토하는 철학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대부분의 근대철학은 이 과제를 스스로 포기했다. 근대철학은 다른 학과들과 나란히 서서 또 하나의 학과가 되고자 했다. 다행히 예외는 있다. 그러나 근대적 사고의 전제들을 비판하는 과제를 근대 철학자들에게 맡기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짧게나마, 필요한 비판이 제기됐던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다윈의 증명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왔다고 간주한다. 다윈의 증명은 근대의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극적 도전이었다. 형이상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나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응답이 가능하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하나는 자연에 대한 근대적 이해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그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기계론적 사고가 근대성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자연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공적 논의가 일어났다. 이 선택지는 신자연주의라고 불렸다. 이런 움직임은 기계적 모델이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없다는 과학적 증거가 늘면서 지지를 얻었다. 기계적 설명의 한계는 점점 상식이 되었다. 과학을 개혁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체로 학회나 대학으로부터 배제 당했지만, 반복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들은 바로 이런 신자연주의 철학자들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당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상가였으며, 오늘날에도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도 그 중 한 명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찰스 퍼스는 미국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있다. 이들보다 영향력이 적지만 많은 사상가들이 있었다.



기계론을 넘어 생태론으로

내가 명확히 했듯이, 나는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가장 종합적이고 통찰력 깊은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은 자연과학의 토대를 이루는데, 그는 뛰어난 수리물리학자였다. 나는 우리 화이트헤드 연구자들이 이런 신자연주의 사상가들의 후예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오늘날 과학자들의 발견이 이원론적 사고의 변화를 폭넓게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변화의 시기가 온 건 같다.

화이트헤드는 기계론에서 유기체론으로, 실체적 사고에서 사건적 사고로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형이상학의 변화이다. 실체는, 설령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디에 존재했는지에 상관 없이 그저 그것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사건은 오직 언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만 그것 자체일 수 있다. 사건이 관계들의 통합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실체에서는 관계들이 배제된다.

우리 경험에서 객관적인 것이 갖는 중요성으로부터 경험 자체의 중요성으로의 변화도 일어났다. 세계의 많은 부분이 감정으로 구성된다. 감정에는 근본적으로 가치가 들어있다. 가치중립적인 물체들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들의 영향을 받은 목적과 결단의 작용이 모든 경험에 들어있다.

형이상학 강의를 더 이어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생태적 형이상학은 기계적 형이상학과는 매우 다를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생태적 형이상학이 교육에 갖는 함의는 혁명적일 것이다. 경제학, 정치학, 농업, 산업에 갖는 함의 역시 혁명적일 것이다. 이 형이상학의 함의는 형이상학에 대한 의식적 지식이 없이도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움직임을 지지할 것이다.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많은 부분은 미래를 염려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에 대해 확신을 주고, 이를 지지한다.

근대적 정신은 형이상학을 거부했으며, 따라서 형이상학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주장에 설득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근대적 정신은 미국인들의 사고에 만연해 있다. 그들은 그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어할 뿐이다. 그래서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미국인들에게 모든 관심사는 이론적이기보다 실용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에 비해 중국에는 기본적인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개방성이 있다. 중국인들은 근대 유럽인들의 사고가 자신들의 전통적 사고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인식한다. 그들은 사고의 차이가 개인의 삶과 사회 제도에 만들어내는 차이를 목격했다. 그들은 또한 부르주아적 사고와 행동, 그리고 마르크시즘 사이의 깊은 차이 역시 경험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근본적인 믿음의 체계가 현실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비록 중국에서 생태문명이란 개념이 체계적 철학과는 상관없이 생겨났지만, 많은 이들이 중국의 생태문명 개념과 화이트헤드 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점은 중국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일을 진행하기 쉽게 만들었다. 우리는 생태문명이란 주제로 수많은 컨퍼런스를 열고, 그것의 현실적 성격을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보장받았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화이트헤드 철학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지만, 중국인들은 생태문명의 바탕에 깔린 전제들이 생태적 철학을 구성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개인에게 필요한 변화조차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해가 이제 등장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지식을 구획화하기보다는 지식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봐야 한다. 일상에서도 관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부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뿌리 깊은 전제는 점점 문제시되고 있다. 요컨대 근대성은 더 이상 대중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지배하지 못한다. 거기에 새로운 문명, 즉 생태문명을 향한 희망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 좀 더 좋은 철학이 그런 이상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




존 캅(John B. Cobb)

종교철학자,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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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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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5] 후현대화와 두 번째 계몽 –왕쩌허 중국



[5] 후현대화와 두 번째 계몽 – 다른백년




[5] 후현대화와 두 번째 계몽

왕쩌허 중국 후현대발전연구원 대표한 윤정 2019.12.02 0 COMMENTS


중국이 현대화의 곤경에 직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국내총생산(GDP)의 빠른 성장이 보여주듯 중국 현대화의 성과는 탁월했으나 그 대가 역시 매우 혹독했다. 그 대가는 환경문제, 점점 커지는 빈부격차,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의 상실 등이다.



중국 현대화는 무엇이 잘못됐을까? 누가 이런 곤경을 책임져야 할까? 이런 곤경에서 중국이 빠져나올 방법이 있을까? 현재 방식의 현대화에 대한 대안이 있을까?

물론 이런 질문은 대답하기 어렵고 쉬운 해결책이 없다. 그래서 이 글은 실제적이고 통합적이며 심오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지혜를 보태줄 수 있는 모든 이에게 보내는 초청장이라고 하는 게 맞다.

내 주장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기반한 구성적 포스트모던 사상이 중국의 현재 방식의 현대화에 대한 대안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성적 포스트모던 문화가 중국이나 세계 다른 나라에 정착되려면 “두 번째 계몽”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두 번째 계몽은 중국의 현대화에서 나타난 문제의 책임이 있는 첫 번째 계몽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두 번째 계몽은 중국이 현대성을 넘어 후현대성, 즉 후현대화로 불리는 과정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후현대화란 무엇인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 따라 후현대화를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현대화가 현대화와는 완전히 다르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나는 후현대화가 현대화의 긍정적 성취를 보존하는 동시에 현대화의 부정적 효과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데이비드 그리핀의 설명을 좋아한다.

그리핀이 볼 때 중국은 서구세계의 실수로부터 배움으로써 현대화의 파괴적 효과를 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이미 후현대화의 과정에 있다.

후현대화란 “경제를 인간과 모든 생물권역을 위해 다시 방향 짓는 것”을 요구한다. 중국의 후현대화는 경제성장에 대한 변함없이 헌신하기보다 공동선에 집중해야 한다. 그러려면 경제성장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인식해야 하고, 건강한 성장은 생태적 책임을 다하면서 인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이 후현대화로 전환하는데 있어 가장 큰 도전은 주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현대화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경제성장이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궁극의 선”이라는 현대화의 신화를 믿는다. 경제성장과 과학적 발견은 의심이 여지 없이 진보를 구성하는 요소로 여겨진다. 동서양,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을 막론하고 이런 개념이 우세하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경제성장을 추구하려는 주류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보도록 하려면 첫 번째 계몽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첫 번째 계몽은 무엇인가

첫 번째 계몽이란 이런 뜻이다: 1)17-18세기 유럽에서 이성과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 역사적인 지식운동, 2)중국에서 민주주의와 과학을 옹호한 1919년 5.4 운동. 중국에서 우리는 이런 계몽을 “미스터 민주주의”와 “미스터 과학”이라고 불렀다. 그 시절, 중국인들은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심지어 삶의 의미에 대한 대답까지 해줄 거라고 믿었다. 비록 첫 번째 계몽의 중국 판과 유럽 판 사이에는 시차가 있지만 이 둘은 역사적으로, 나아가 정신적으로 연관이 깊다. 둘 다 과학과 이성에 대해 온전하게 헌신(실제로는 숭배)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둘을 첫 번째 계몽이라고 부른다.

유럽과 중국에서의 첫 번째 계몽이 사람들을 전근대적 폭정과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혁명적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계몽의 성과 가운데는 자유의 개념, 민주적 참여, 그리고 개인의 위엄 등이 포함돼 있다. 이런 성과들은 높이 평가 받고 보존돼야 한다. 아직도 봉건적 이데올로기가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진 중국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런 가치를 증진시키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그러나 서구의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이미 사회적, 생태적 비용을 지적한 마당에 우리가 첫 번째 계몽의 한계를 지적하지 않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계몽은 현대화를 정당화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 근대화에서 경제적 성장의 숭배는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개인들의 성공이나 실패에는 무관심” 현대인에 대한 계몽의 강조를 명백히 드러내주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첫 번째 계몽의 한계는 무엇인가

첫 번째 계몽에는 다섯 가지 한계가 있는데,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하게 관련돼 있다.



1) 자연을 향한 제국주의적 태도

첫 번째 계몽은 자연에 대한 불경스런 태도를 취했다. 인간중심주의적 위치에서 자연을 정복, 조작, 지배, 착취하는 대상으로 취급했다. 계몽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었던 것은 자연과 타자를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자연은 제국주의적 태도에 따라 노예로 취급됐다. 이는 여성을 무시하는 태도와도 바로 통하는데, 계몽주의 문화에서 자연과 여성은 둘 다 “비이성적이고 불확실하며 통제하기 어렵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구의 상상력 속에서 두 가지가 상징적으로 연결돼 있는 만큼, 여성을 억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자연 역시 해방시켜야 한다는 점은 이제 많은 이들이 인식하고 있다.



2) 전통과 과거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

첫 번째 계몽은 인간이 어떤 성취를 이루려면 전통과의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전통과 과거에 대해 허무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유럽에서 과거는 “암흑시대”로 여겨졌다. 중국에서 전통은 완전히 폐기해야 할 쓰레기로 취급됐다. “유교의 폐기”는 현대화 시기의 가장 유명한 슬로건이었다.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은 우리 중국인들이 전통과 맺었던 내재적 관계를 끊어놓음으로써 “하늘과 도의 경외에 대한 존중”, “차이와의 조화”처럼 우리 전통에 존재했던 훌륭한 영적 자원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전통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나아가 전통에 대한 이런 허무주의적 태도는 오늘날 중국에서 믿음과 가치의 상실을 야기한다. 성스러움에 대한 신념과 감각의 부족으로 인해 사람들은 과학 혹은 금전처럼 세속적인 어떤 것을 쉽게 숭배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오늘날 서구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과학주의와 금전에 대한 숭배가 왜 그렇게 횡행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된다.



3) 과학 숭배

첫 번째 계몽주의 사상가 대부분이 과학을 숭배했다. 그들에게 과학은 우주를 사유하는데 있어 유일하게 정확하고 타당한 방법으로 보였다. 이런 확신에 기초해 종교적, 예술적, 직관적, 정서적 앎과 같은, 다른 방식의 우주에 대한 사유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억압하고 폐기시켰다. 생명에 대한 이 같은 “과학 유일”의 옹호자들은 쇼비니스트 과학자들이었다. 리유솅(李玉生)에 따르면, 중국의 계몽주의인 5.4운동 기간 동안 중국 과학자들은 자신들만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으며 중국의 발전은 완전히 자신들에게 달려있다고 믿었다. “나는 과학을 믿는다. 고로, 나는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당신보다 우월하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반대자들과 논쟁할 때 그들에게 이처럼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중국의 대표적 계몽주의 사상가인 첸두슈(陳獨秀)는 오직 과학과 민주주의만이 “정치적, 도덕적, 학술적 사고의 수준을 포함한 모든 암울한 면면”으로 부터 중국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이 인류의 문명을 증진시키는데 위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과학을 숭배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숭배가 중국이나 서구에서 모두 과학의 한계를 등한시하게 만든다. 사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숭배해온 서구의 과학은 기계주의와 환원주의라는 특징을 갖는 뉴턴 물리학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것은 많은 핵심적 측면에서 틀렸으며 새로운 이론이 이어졌다. 기계론적 과학의 시야에서 볼 때 기계인 자연은 “소리도, 냄새도, 색깔도 없는 무딘 물체”로 보인다. 막스 베버의 표현으로는, 세계는 현대과학의 힘으로 마법에서 풀렸다. 그러나 유명한 독일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에 따르면, “문명이 이끄는 대규모 불완전의 잠재적 원인”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4) 이성 숭배

과학 숭배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이성 숭배다. 첫 번째 계몽은 “이성의 시대”로 간주돼 왔는데, 이는 “이성이 그 시대의 통일적, 중심적 지점으로서 그것이 원하고 추구하고 성취했던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이성, 특히 “정서, 감각, 사회적 구성물, 비인지적 인식에 물들지 않은 순수 이성”이 발전의 원동력이며 새로운 문명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순수한 혈통의 이성은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과 소수 종족에 대한 억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수많은 역사적 증거들에서 드러난다. 이성은 우리를 더 아름답고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볼 때 이성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문화적, 영적 규범으로부터 추상화된 채 작동될 때 윤리적 차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성은 자신을 가치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비이성적인 어떤 것을 억압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작동할 수 있다. 이성은 행위자이자 심판이며, 이런 의미에서 독재자이다.

생명에 대한 “이성 유일”의 옹호의 또 다른 단점은 구획화하려는 경향이다. 이성에는 사회적 이성, 정치적 이성, 경제적 이성, 기술적 이성, 도구적 이성 등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각각 인간의 삶의 한 부분을 지배한다. 이런 종류의 이성의 지배는 현대 산업사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물론 이것이 이성의 전부는 아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사상에서 이성은 정서와 가치를 포함하며 사물을 이해하는 보다 통합적인 방식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첫 번째 계몽에서 이성은 도구적 이성으로 축수되고 폭넓은 시야를 보는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현대적 이성의 세 번째 단점은 개인주의로, “합리적인 자기이익”이 인간 활동의 근본적 동기라고 간주한다. 서구의 신고전주의 경제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합리적 인간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며,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끼친 결과를 고려하는 데는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5) 자유에 대한 일면적 이해

“자유”는 계몽주의의 보편적 슬로건으로서, 사람들이 전근대적 폭정의 억압에 맞서 싸우도록 독려하는데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촉진했던 자유의 개념에는 한계가 있다. 간단히 말해 계몽 사상가들은 자유를 공동체에 연결되는 방식이 아니라 고립된 개인의 소유물로서 여겼고,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그리고 (존 로크의 사상에서는) 재산을 소유할 자유로 한정시켰다.



두 번째 계몽은 무엇인가

현대화의 파괴적 결과는 위에 언급한 첫 번째 계몽의 한계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화를 뛰어넘으려면 첫 번째 계몽에 대한 반성에 기초한 두 번째 계몽이 필요하다. 우리는 후현대화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는 릭스 마이어에 따르면 “새로운 방식의 학습/교육, 경제 발전에 대한 새로운 접근, 리더십의 새로운 방식, 거버넌스의 새로운 개념, 나아가 더욱 복잡한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첫번째 계몽이 현대적 계몽이라면, 두 번째 계몽은 현대적 계몽을 완전히 배척하는 대신 그것의 많은 위대한 성취를 수용하는 후현대적 계몽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계몽은 어떤 내용을 함축하고 있을까.



1)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생태적 인식으로

인간중심주의가 오늘날 생태적 위기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두 번째 계몽은 인간중심주의와 그것이 갖는 자연을 향한 제국주의적 태도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첫 번째 계몽과 달리, 두 번째 계몽이 촉진하는 생태적 인식은 자연을 “주체”로 여긴다. 두 번째 계몽은 우리가 별, 바람, 돌, 흙, 식물, 동물과 내재적으로 연결된, 끊임없이 펼쳐지는 과정의 일부임을 깨닫도록 만든다. 자연은 GNP를 높이기 위해 냉담한 관리자의 입장에서 착취하는 가치중립의 “자원”이 아니다. 아직도 자연을 인간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일반적 환경주의 태도와 달리, 생태적 인식은 자연이 우리를 지킨다고 강조한다. 자연은 음식과 옷을 제공하고 우리의 신체를 키울 뿐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양육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대자연을 사랑하며 경외하며 존중해야 한다.



2) 서구중심주의를 넘어 상호보완적 인식으로

첫 번째 계몽과 현대화가 서구에서 등장했기 때문에 흔히 현대화는 서구식 현대화와 동일시된다. 서구식 현대화가 유일한 현대화의 발전모델로 보인다. 후쉬(胡適)나 첸슈징(陳序紅) 같은 몇몇 중국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서구문화, 특히 과학과 민주주의가 중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완전히 서구화된 중국”, 즉 정치, 경제, 문화에서 완전히 서구방식을 채택한 중국을 주장했다. 오늘날 이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여전히 이 이론의 영향력은 크다.

반면, 두 번째 계몽은 동서양 문명 간의 상호보완적 인식을 촉진한다. 제이 맥다니엘이 지적했듯이 상호 보완적 인식의 핵심은 각각의 전통보다는 그 전통들이 함께 어우러질 때 더 많은 지혜가 생기며,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배울 것이 많은데 그 이유는 “상대로부터 통찰력을 얻음으로써 서로 완전해지도록 돕기” 때문이다. 생태위기, 도덕적 위기와 같은 현대화의 파괴적 결과에 대처하기 위해 두 문명이 협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조화, 인(仁), 생태적 의식 등 중국 전통 속의 가치 있는 개념들은 현대화의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 재평가되고 부활할 수 있다.



3) 동질화에서 다양성으로

동질화란 현대화가 차이보다 같음, 다양성보다 통일성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글로벌화에 따른 토착문화의 파괴는 동질화의 사고이며 “타자”에 대한 폭력적 행위이다. 본질적으로 이런 사고방식은 다양성에 대해 매우 부정적 태도를 견지한다.

동질화와 통일성을 선호하는 첫 번째 계몽과 달리 두 번째 계몽은 종족, 인종, 성, 문화, 종교를 포함한 인간 사회의 차이에 대해 매우 긍정적 태도를 보인다. 다양성을 존중할 뿐 아니라 감사하고 “영광”으로 여긴다.

구성적 포스트모던 철학의 설립자 중 한 명인 알프레드 노드 화이트헤드는 우리가 상향 발전하기 위한 조건은 다양성과 복수성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인간사회의 다양성은 “인간정신의 오딧세이를 위한 준비와 자극, 재료”라고 강조했다.



4) 자유에 대한 일차원적 이해에서 다차원적 이해로

첫 번째 계몽이 자유를 추상적으로 취급하는 것과 달리, 두 번째 계몽은 자유의 복잡성과 풍부함을 드러내며 특히 사회적 차원에서 그렇다.

첫째, 두 번째 계몽은 자유가 항상 긴장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절대적 자유란 없다. 푸코의 권력이론은 절대적 자유라는 개념을 약화시킨다. 푸코에게 권력관계는 편재한다. “사회의 급소를 구성하는 것”이 권력이다. 자유조차 권력의 효과이다. 행동의 가능성, 자유가 실행되는 조건을 생산하는 건 권력이다.

둘째, “사상, 언론, 혹은 종교의 자유”만 강조하는 첫 번째 계몽과 달리, 두 번째 계몽은 언론이나 사상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행동의 자유 혹은 실천의 자유에 주의를 기울인다. 언론, 사상의 자유와 대조적으로 행동의 자유는 원초적인 인간의 요구이다. 화이트 헤드에게 “자유의 본질은 목표의 실천가능성”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에게 언론의 자유를 갖다 주지 않았다. 그는 불을 구해왔으며, 이는 요리와 난방이라는 인간의 목적에 순종했다.”

셋째, 두 번째 계몽은 자유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다. 자유에 책임을 부과하며 자유와 책임 사이의 내재적 관계를 드러낸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책임이 자유에 선행한다고 보았다. 자유는 항상 내재적으로 책임과 관계가 있다. 이것은 책임이 자유를 제한한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책임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고 보았다. 이는 자유가 타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타자를 돕는데 헌신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찰스 버치와 존 캅의 표현에 따르면 “자유는 서로 벗어나는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위한 자유다.”



5) 순수 이성에서 미적 지혜로

우리 시대에 등장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신선한 지혜가 필요하다.” 불행하게도 현대적 이성은 내재적 약점, 특히 그것이 갖는 헤게모니, 가치로부터의 분리, 구획화, 좁은 시야, 통합적 전망의 부재 때문에 이 과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두 번째 계몽은 미적 지혜를 필요로 한다.

미적 지혜란 진선미를 조화시키기 위한 유기적 상호연관성의 개념에 근거해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미적 지혜는 과학적 합리성, 인지적 이성뿐 아니라 예술적 직관, 종교적 경험이 함께 발달한 것이다. 미적 지혜에서는 모든 종류의 인간경험이 상호 보완되며 보다 풍성해진다. 미적 지혜는 현대적 이성과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반한 현대 이성은 감수성, 느낌, 가치, 아름다움과 같은 “비합리적”인 요소를 배척하고 억압한다. 반면 “이것 그리고 저것”이라는 사고에 기반한 미적 지혜는 조화를 중시한다. 이런 점에서 정반대처럼 보이는 것을 통합 조화시키는 것이 본질인 도의 지혜이기도 하다.

미적 지혜는 어떤 면에서 서구의 지혜와 동양의 지혜의 결합이다. 사실 현대의 순수이성 혹은 도구 이성이란 이성이 도 혹은 가치에 내재적으로 관련돼 있다고 보는 중국문화에는 낯선 개념이다. 도가 없는 이성은 없다 .이런 이해에 기초해서 두 번째 계몽에 요구되는 미적 지혜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생명에는 가치가 내재한다는 생명관을 갖는다.

자연을 생명 없는 물질로 취급함으로써 세계를 탈마법화한 현대적 이성과 달리, 미적 지혜는 세계의 재마법화를 목표로 한다. 화이트헤드의 관점에 따르면, 자연은 자체의 완결성을 갖는다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의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과학도 미적 지혜의 관점에 설 때 보다 개방적이고 인간적이 된다. 과학 역시 재마법화돼야 한다.

후현대의 미적 지혜의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두 번째 계몽의 가치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유롭지만 책임감 있고, 과학적인 동시에 영성적이며, 인간적이면서 생태적이다. 중국과 세계가 소비주의의 천박함을 넘어 보다 의미 있는 삶의 방식으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런 비전이다.




왕쩌허

중국 후현대발전연구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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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한 윤정 [4]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살아있는 지구를 위한 시스템 – 데이비드 코튼

[4]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살아있는 지구를 위한 시스템 – 다른백년

[4]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살아있는 지구를 위한 시스템

데이비드 코튼 리빙이코노미즈포럼 대표,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한 윤정 2019.11.25 0 COMMENTS


현재 인류는 자멸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구헌장(Earth Charter)을 여는 글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지구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서 있다. 지금은 인류가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다.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출처: 한겨레>

인류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다. 지구와 호혜적 균형을 이루면서 평화, 아름다움, 창조력, 물질적 만족, 그리고 영적 풍요라는 오랫동안 부정돼온 인간의 꿈을 이루는 것은 우리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꿈을 실현하려면 우리를 그 꿈에서 멀어지게 했던 현재의 문화, 제도, 그리고 사회인프라의 깊고도 신속한 변화가 필요하다.

다섯 가지의 주요한 세계적 경향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뿐 아니라 인간의 자기멸종, 나아가 생명을 유지시키는 지구 용량의 잠재적 파괴라는 위협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경향은 지구의 지속력을 넘어선 소비 증가이다. 이는 잠재적으로 기후변화, 비옥한 토양의 유실, 깨끗한 담수 공급의 감소, 숲의 소멸, 어업 붕괴 등의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 글로벌 생태발자국 네트워크는 우리 인간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1.7배를 소비한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경제 성과의 결정적 척도로 쓰이는 국내총생산(GDP)을 계속 늘리고 있다. 사람과 지구에 대한 파괴적인 결과는 무시한다.

두 번째 경향은 극단적인 불평등의 증가이다. 우리는 소수 사람들이 필요 이상의 과도한 소비를 하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절망의 삶으로 빠트리는 세계적인 부의 격차를 인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6명의 금융자산이 인류의 절반에 달하는 38억 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자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

세 번째 경향은 생명파괴 기술에 대한 의존의 증가이다. 우리의 핵, 탄소에너지, 유전자 변형, 인공지능 기술은 지구에 점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종류와 잠재적인 영향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네 번째 경향은 정부와 공공정책에 대한 기업 통제의 증가이다. 우리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금융자산을 늘려주는 데 헌신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다국적 기업의 독점이 점점 집중되도록 방치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그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매수하고 나머지 구성원들에 비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더욱 증가시키는 정책을 촉진하는 능력을 키워준다.

다섯 번째 경향은 점점 증가하는 제도적 정당성의 상실이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기관들이 점점 절망의 삶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공포 속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선동을 목격한다.

내 나라인 미국은 이 다섯 가지 치명적인 경향을 주도하는 세력이자 이런 경향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는 절망 속에서 새로운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 앞의 도전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한국이 블룸버그 혁신지수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나라로 선정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잘못된 서사를 선택했다

우리 인간의 미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현재가 왜 이렇게 심각하게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엄청나게 나쁜 문화, 제도, 그리고 사회인프라를 선택해 왔다. 이제 전지구화된 하나의 종(種)으로서 우리는 돈을 명백한 공통의 가치로 선택하고 행복의 척도로 사용한다. 관계를 맺는 주된 방식으로 권력과 자원을 가지려는 경쟁을 선택한다. 규범이 되는 기관으로서 사적인 목적과 이윤을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을 선택한다. 그리고 우리의 주요 거주지로 사람보다는 차를 위해 설계된 도시를 선택한다.

우리는 서사의 창조물인데, 결함 있는 서사를 선택해왔다.

초기 인류는 상징적인 사고와 의사소통 능력을 발달시켜 점차 다른 종들과 스스로를 구별했다. .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소통하고 공유하기 위해 점점 더 정교한 서사를 창조했다. 공유된 신념은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능력의 기초가 되었다.

드문 경우를 빼면 우리는 태어난 집단의 서사를 진정한 현실로 단순히 받아들였다. 이것은 강력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서사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가상적으로는 제한 없는 규모의 일관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또한 한 사회의 서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배타적 목적을 위해 서사를 쉽게 조작하도록 만들었다. 현재 우리 인간의 오만, 자기파괴 능력, 그리고 서사적 조작에 대한 취약성, 이 모든 것은 제국주의 지배자들이 지난 5000년동안 인간과 지구를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의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조작해온 서사를 그대로 따른다. 과거에 그 지배자들이 왕들과 황제들이었다면, 현재 그들은 기업의 CEO들과 월 스트리트 금융가들이다.

현재 우리 인간의 불행은 거침 없이 미화된 서사이자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인,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사기에 넘어간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돈이 부이며, 돈을 버는 사람이 부를 창조하고, 개인이 얻은 이윤의 합을 넘어선 공동체의 이익은 없다고 믿도록 한다. 그리고 이윤을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우리 모두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 줄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접근을 통제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착취해 소수가 이익을 취하는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것의 가치와 논리는 신중하게 고른 “밈”(meme: 비유전적 문화요소로 문화의 전달방식임)을 통해 전세계 대중의 의식에 침투했는데, 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구인 “경제 성장” “개인의 자유” “자유시장” “자유무역” “투자자” “다국적 기업” “작은 정부” 등이다. 각각의 문구는 인류와 지구의 복지보다 사적인 금융이익을 우선시하는데 도움이 되는 암호들에 불과하다.

“경제성장”은 GDP를 증가시키는 것과 관계 없는 자조적 돌봄이나 헌신보다는 시장에서의 거래를 중요하게 여긴다. “개인의 자유”는 단정적으로 개인이 우월하다고 보고 공동체를 폄하한다. “자유시장”은 (규칙에 기초한 윤리적 시장과는 반대로) 기업이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라면 공공의 규칙, 감독, 공공선에 대한 배려를 벗어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자유무역”은 (공정하고 균등한 무역과는 반대로) 단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에게 시장, 노동, 자원 및 돈에 대한 무제한적 접근과 궁극적 통제권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한 사회적, 환경적 결과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우리의 정치제도는 보호가 필요한 공동체에 봉사할 의무를 가진 정부로부터 주주들의 금융배당을 최대화하는 것 외에는 아무 책임도 없다고 단언하는 다국적 기업에게로 권력을 쉽게 넘기도록 설계돼 있다.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에서 근본적인 요건은 돈이 숫자에 불과하고 돈을 벌기 위해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자살만큼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불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동양문화가 오랫동안 인식해 왔고 지배적인 서구문화가 오랫동안 무시해 왔으며 심지어 부인해온 근본적인 진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인간은 살아있는 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생명체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살아남고 번성한다.



우리 몸처럼 지구는 유기체이다

생태문명은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의 적절한 이름으로 보인다.

생태라는 말은 생명이 존재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을 만들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 자기 조직하는 유기체의 능력에 초점을 둔다. 문명이란 말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진정으로 겸허한 관계를 맺는데 요구되는 문화적, 제도적 전환의 깊이를 상기시킨다..

수십 조의 살아있는 세포로 구성된 공동체인 당신의 몸을 생각해보라. 이 세포들은 끊임없이 각자의 요구와 자신들이 의존한 몸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춘다. 그들은 각 세포의 연쇄적인 죽음과 재생, 기온의 변화, 영양분·물·정보 그리고 에너지의 다양한 투입을 포함한 변화의 조건에 끊임없이 적응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의식의 보금자리이자 에너지의 운반체인 당신의 몸을 창조하고 유지한다.

지구도 진정 엄청난 규모로 이와 똑같은 일을 한다. 지구 안의 무수한 단세포와 다세포 유기체들은 토양, 대수층, 숲, 해양생태, 하천, 강을 재생시키기 위해 에너지, 영양소, 물과 정보를 교환한다. 또 잉여의 탄소, 독소 및 기타 폐기물을 격리시키고 태양 에너지를 잡아두고 공기를 정화하며 날씨와 기온을 안정시킨다.

우리는 돈, 시장, 기업과 정부라는 인간의 제도에 상응하는 등가물 없이도 지구에서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작동하는지 이제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지구 간의 교환을 안내하는 수단으로서 돈, 시장, 기업과 정부라는 인간적 제도에 계속 의존할 가능성이 크지만, 이 제도들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현재 구조화된 대로 우리가 선택한 제도들은 의사 결정을 중앙에 집중시킴으로써 우리 중 가장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희생시키고 착취하도록 우리의 생존수단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를 이루려면, 이러한 제도들은 모든 사람의 물질적 충족과 정신적 풍요를 확보하기 위한 탈중심화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재구성되어야 한다. 또한 살아있는 지구가 온전한 건강과 활력을 갖도록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여기 퍼즐 조각이 하나 더 있다. 우리 인간은 공동체에서 살도록 진화했다.

최초의 인간이 지구에 발을 디딘 이래 대략 99%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조상은 사냥과 채집을 하는 종족으로서 다른 인간, 자연과 직접 연결된 상태로 살았다. 부족 구성원들은 함께 견과류, 씨앗, 과일, 그리고 야채 등을 찾으러 다녔다. 그들은 함께 사냥감을 쫓고 놀이를 즐겼다. 그들은 함께 공동부엌에서 함께 쓰는 불로 식사를 준비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이나 자연과 맺는 관계는 직접적이고 평생 유지됐으며 상대방이나 자신이 사는 지역의 실물과 동물에 대한 친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언제나 함께 생활하는 여러 세대로 구성된 가족 구성원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지지와 관여, 인내하는 관계를 경험했다. 청소년들 역시 부모들과 거의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그리고 자연과는 절대 떨어지지 않은 상태로 활동적인 야외생활을 영위했다.

이런 경험은 어린이들의 직접적인 행복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행복,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우리가 지금 사는 방식과는 얼마나 다른가! 세계적 추세에 대한 통계에 따르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1인 가구에서 혼자 살고 있다. 1960년대 이래로 1인 가구의 비율은 호주, 캐나다,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럼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현재 미국 아이들의 31%는 한부모 가정에서 살고 있다. 종종 한부모는 한 개 이상의 저임금 일자리에서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투쟁하는 엄마들로 긴 통근시간에 시달리며 사회보장을 거의 받지 못하고 동료나 이웃들과 어울릴 기회도 전혀 없는 경우가 많다. 아이는 대부분의 깨어있는 시간 동안 부모나 다른 친척들과 접촉하지 못 하고, 자연과의 접촉도 거의 혹은 전혀 없다.

이처럼 고립된 상태와 공동체의 지원 부족은 정신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국에서는 2000년 이후 자살이 25% 증가했으며 전문가들은 현재 미국 인구의 50%가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정신질환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지난 세기에 걸쳐 우리가 진보라고 자축했던 것들은 돈의 개입, 자동차, 기업, 그리고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는 정부 등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렇게 아둔하게 망쳐놓은 직접적 관계들을 복원해야 하는 당위에 직면했다.



생태문명은 공동체의, 책임 있는 삶이다

우리가 목표로 삼는 미래는 대부분 사람들이 대도시나 소도시 혹은 마을에 살면서 다른 사람, 그리고 자연과의 본질적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요소를 충족시키며, 우리가 지구에 가하는 총체적인 물질적 부하를 최소화하는 특징을 갖는다. 자동차에 대한 의존이 증가하고 각 가구를 고립시키며 생태적 통합성을 망치는 교외로의 무질서한 확산은 생태문명 안에는 설 자리가 없다. 또한 대도시에서 자동차의 자리가 없어져야 한다.

생태문명의 자동차 없는 도시에서는 다세대의 여러 가정으로 이뤄진 주거단지가 시설, 도구, 자원 및 노동을 공유하는 활력 있는 생태공동체로서 작동하며,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현재도 일부는 그런 것처럼 부족공동체로서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아이들을 보살피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편리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사회인프라를 설계해야 한다. 사람들이 필요한 서비스, 쇼핑, 교육, 영적 활동, 직장, 그리고 거주지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서 즐길 수 있는 여가생활 등의 수요가 충족돼야 한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섞이고 어울리는 매력적인 장소가 많은 것이 이런 도시들의 특징이 될 것이다.

호감 가고 개성적인 이웃들이 초고속 부상열차나 지하철로 연결될 것이다. 또 모든 사람이 초고속 인터넷으로 소통할 것이다.

교외로부터 철수하면서 도시와 농촌 지역의 경계는 도농간 연계와 공유를 용이하게 하는 방법으로 다시 그려질 것이다. 도시와 농촌의 지방정부가 음식, 물, 에너지, 물질적 필요 등 양 지역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협력할 것이다. 또한 공기, 물, 비옥한 토양의 자연적 재생을 가능하도록 하고, 인공비료와 살충제의 사용을 배제하며, 쓰레기를 재활용, 분해 및 재사용할 것이다. (역자주: 필자는 미국의 산업화와 경제적 번영의 결과물로, 중산층이 교외에 큰 저택을 짓고 각자 자동차를 이용해 도시로 출퇴근하는 생활방식에 대해 비판적이다. 생태문명을 위해서는 한국의 아파트처럼 도시의 밀집한 주거단지가 에너지와 자원의 이용이나 관계 회복에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는 오히려 “생태적인 삶” “귀농귀촌”이라는 이름으로, 공동화된 농촌지역에 대형 주택을 짓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기본적으로 관계의 자본화와 붕괴를 나타내는 지표인 GDP의 성장이 아니라 진정한 건강과 복지의 지표로 우리의 진보를 측정할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 건강하게 살며 삶을 즐기고 있는가? 아이들이 적절한 보살핌과 교육을 받고 있는가? 자연은 풍요로운가? 이런 것을 측정하는 지표들이 발전한다면, GDP가 증가하는지 줄어드는지에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지구적 수준에서 보자면, 우리는 다국적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세계에 걸쳐 돈, 인력, 재화가 이동하는 대신, 사람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더불어 살면서 건강과 행복을 최대로 누릴 수 있는 자립적인 생태권역경제를 선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계급분리를 최소화하고 평등을 최대화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도시가 주변 농촌 지역 및 농민들과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실천하려면 법률, 기술, 사회기반시설의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사유재산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라고 믿는데,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조금씩 재산을 가져야 한다. 가급적이면 자신의 집과 생계수단에 대한 소유권이 있어야 한다.

지역 참여적 소유의 필요성은 부의 재분배, 금융투기 해소, 독점기업 해체, 그리고 모든 사업체가 사업을 수행하는 공동체에 종속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의 필요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는 소규모 지역공동체 사업을 통해 가장 잘 성취된다. 아담 스미스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시장은 개인 농부나 장인이 개인 소비자들과 직접 거래하는 곳이다. 현대사회에서는 큰 규모의 사업이 필요하지만, 소유권은 지역적이고 안정적이며 평등해야 한다. 집중화되거나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의 소유권은 지역 협동조합원, 소비자, 지역사회 소유권을 위해 없애야 한다.

협력의 정신과 윤리에 따라 각 생태권역은 권역 안의 노동과 자원을 이용해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생태권역에서는 아이디어와 기술, 문화를 자유롭게 공유하며,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것은 이웃들과의 공정하고 균등한 교역으로 얻을 것이다. 은행, 금융, 그리고 소유권을 지역적으로 유지할 것이다.

인류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다. 우리는 현재 궤도대로 살면서 소수 사람들이 일시적 과소비를 즐기도록 도와주는 황금만능주의를 추구하다가 멸망할 수도 있다. 아니면 생태문명의 비전을 수용해서 모든 인간이 번영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문화, 제도, 사회인프라의 전환을 이루자는 공동의 목적에 동참할 수도 있다.

모든 이들을 위한 평화, 아름다움, 창조성, 물질적 충족, 영적인 풍요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가족, 공동체, 국가 모두가 같은 지구생명체의 구성원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갖고 함께 헌신해야 할 시간이 왔다.




데이비드 코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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