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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7

'퀘이커 평화주의자' 이행우 선생을 보내며

'퀘이커 평화주의자' 이행우 선생을 보내며


'퀘이커 평화주의자' 이행우 선생을 보내며

[기고] 평화통일운동가 이행우 선생의 '진주알 잇는 실' 같았던 삶
김성수 <함석헌 평전> 저자 | 2021-10-26 

나는 1980년 대 초반 함석헌(1901-1989)을 처음 만나며 금방 '함석헌에 미친 사람'이 되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3554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65180)

1984년 5월 군대에서 제대하고 철도청에 복직한 나는 서울 명동 전진상교육관과 향린교회에서 매주 함석헌이 강의하는 노자와 장자 공부모임을 참석했다. 한 번은 노자 공부모임에서 바로 옆자리에 앉은 분이 퀘이커 교도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85년 어느 날 그의 손에 이끌려 서울 신촌 봉원동에 있는 퀘이커모임을 처음 찾았다. 그곳에서 나는 예배 후 함석헌이 강의하는 성경과 퀘이커 공부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다.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중년의 재미동포가 미국에서 한국 퀘이커 모임을 방문했다. 그는 예배 후 그의 생생한 '북한방문기'를 들려주었다. 그 재미동포가 이행우 선생(1931-2021)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한국전쟁 중 함경남도 북청에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전쟁피난민' 출신이라 이행우 선생의 북한방문기에 온 시각을 곤두세우고 깊은 관심을 갖고 들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9329)

▲오른쪽 끝이 이행우 선생이다. ⓒ김성수 제공

당시는 광주학살로 손에 피를 묻히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기라 북한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사항이었다. 그래서 이행우 선생은 전두환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재미동포라 전두환 정권은 그를 철저히 감시는 하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지는 못했다. 이행우 선생은 그 후에도 거의 매년 평생 40번 이상 북한을 방문했고 방한 할때 마다 퀘이커모임에서 북한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이행우 선생은 그의 스승 함석헌을 모시고 서울퀘이커모임에 참석했고 1960년엔 함석헌과 함께 서울퀘이커모임을 창립했다. 그리고 1968년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퀘이커연구소 펜들힐로 유학을 갔고 그 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정착했다. 전주고등학교와 서울대 수학과 출신이었던 그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곧 컴퓨터 전문가로 직장을 잡아 지난 2003년 73세의 나이로 현업에서 은퇴했다. 컴퓨터 전문가 1세대로 수입도 좋았지만 그는 그와 가족이 평생 살 집 하나 마련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평생 번 돈을 한반도 평화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썼기 때문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단란하게 휴가나 여행을 가기 보다는 그는 자비를 털어 미국, 북한. 일본, 중국, 유럽을 방문해 정치인, 관리, 시민활동가, 학자, 언론인들을 만나며 한반도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했고 국제회의를 개최했으며 그들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해 달라고 설득했다. 그 외에도 그는 자비를 털어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영어논문집을 제작해 이들에게 배포했고 민주화운동으로 고난을 받고 있는 한국의 재야인사나 정치범들을 위해 미국에서 모금을 해 한국으로 돈을 송금해주었다.

1974년 한국민주화운동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해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를 미국에 결성하면서 그는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인사들이 거의 수입이 없는 실업 상태였기 때문에 재미동포들에게 모금활동을 하여 국내에 돈을 보냈던 것이다.

1982년에는 미국 퀘이커(AFSC)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해 북한 관리들을 만나 한반도 평화통일문제, 조미관계 개선문제, 북조선대표단을 미국에 초청하는 문제 등을 협의했다.

1986년 그는 한겨레 미주홍보원을 설립, 'Korea Report'라는 영문보고서를 발간해 대미홍보와 국제연대 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이 보고서를 발간하기 전에는,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미국에서 한국문제를 분석한 영문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미국 고위관리, 정치인, 학자. 언론인들이 그가 낸 보고서에 큰 관심을 보였고 미국사회에 한반도평화통일의 중요성에 대해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1987년엔 그는 미국의 지인들과 한국지원연대(Korea Support Network)를 결성,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국제사회에 알렸다.

1989년엔 전국대학생협의회를 대표해 방북한 대학생 임수경이 문규현 신부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일이 있었다. 그 때 이행우 선생은 대학생 임수경을 무사히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미리 문규현 신부와 함께 방북해 '임수경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북한당국의 협조를 구했다.

1994년에는 대기근으로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했다. 그러자 이행우 선생은 기근으로 고통받는 북한동포들을 인도적으로 돕기 위해 미국 퀘이커들과 함께 방북해 북한의 농업을 지원하고 인적교류를 추진했다.

1995년 그는 미주평화통일연구소, 1998년에는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을 설립했다. 이런 단체들을 통해 이행우 선생은 한반도 평화통일문제에 대한 논문을 발간했다. 그리고 그가 발간한 논문들은 남북과 해외동포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그런 긍정적 반응을 바탕으로 다른 한반도 평화통일운동단체들과 적극적 연대활동을 벌였다.

이행우 선생의 이런 물밑 작업과 각고의 노력은 마침내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가능하게 했고 한반도 평화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행우 선생의 한반도평화통일을 위한 보이지 않는 헌신적 봉사와 희생 덕에 마침내 지난 2000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늦게나마 그의 한국 민주화운동, 남북한 긴장완화, 한반도 평화통일 노력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지난 2011년 이행우 선생은 한겨레 통일문화상을 받았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83611)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난 2013년, 45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그는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고 곧 한국국적 회복을 신청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정권과 그 뒤를 이은 박근혜 정권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행우 선생의 국적회복 신청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한편, 지난 2012년 8월 나는 북한 실향민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실의에 빠져있었다. 그러던 중 그 다음해인 2013년 귀국한 이행우 선생을 나는 매주 서울퀘이커모임에서 만나며 마치 아버지가 죽음에서 돌아온 것처럼 느꼈다. 그는 내가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극우 인사 이영조 진실화해위원장을 상대로 고소한 법적소송에서도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79063)

그리고 그런 이행우 선생의 따스한 격려에 힘입어 나는 지난 2016년 마침내 이영조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https://www.khan.co.kr/economy/economy-general/article/201605281843001

한편, 지난 2020년 8월 그는 광복회로부터 "한반도 분단극복과 통일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광복평화상'을 받았다.

올해 9월 나는 암으로 병상에 누워계신 이행우 선생께 문안인사차 영국에서 국제전화를 드렸다. 올해 3월 어머니를 보내고 코로나 때문에 어머니 장례도 참석 못해 힘들어 하던 내게 선생은, "성수, 힘내야지! 그리고 오래 살자!"라며 오히려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그런 선생이 지난 10월 16일, 암으로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그의 부인과 두 아들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장례를 진행한 뒤 그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모셨다.

함석헌 선생이 내게 정신적 할아버지와 같은 분이였다면 이행우 선생은 내게 정신적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6447

이행우 선생은 달변가가 아니었지만 그 말씀의 내용은 늘 놀라웠다. 그의 가장 큰 무기가 '진실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화려한 무대 뒤에서 남을 위해 조용히 일만 하셨다. 그는 아름다운 '진주목걸이를 이어주는 실' 같은 분이었다. 진주목걸이가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한 여인의 목에 당당하게 걸릴 수 있는 것은 그 진주 하나하나 속을 관통하여 이어주는 가느다란 '보이지 않는 실' 때문이다. 내가 보는 이행우 선생은 그런 분이었다. 그는 입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남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몸소 본을 보여 주셨다. 그런 이행우 선생이 너무 그립다. 내년에 모국에 가면 반드시 어머니와 그의 묘지를 찾아가 머리 숙이고 목 놓아 마음껏 울고 싶다. 선생님, 너무나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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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행우 선생 : 1931년 1월 3일 전북익산 생. 1955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수학과 졸업, 그 해에 해군장교에 임관,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 교수. 1957년 군복무를 마치고 이리 남성고등학교, 서울 동북고등학교, 숭문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 한양대학교 출강. 종교는 퀘이커교. 1968년 미국퀘이커교단 초청으로 유학, 퀘이커교육기관인 펜들힐(Pendle Hill)에서 1년간 퀘이커교에 대하여 공부. 공부를 마치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정착, American Bank(1969-1979), Burroughs Corp.(1979-1980), Polymer Corp.(1980-1986), Delaware Investments(1986-2003) 등에서 Systems Analyst로 근무. 2011년 한겨레통일문화상, 2020년 '광복평화상' 수상. 2021년 10월 16일 하늘나라로 가심.


▲이행우 선생 추도식 안내문


2021/01/30

[통인] 평화로, 평화로 가는 길 - 이행우 평화운동가 - 월간참여사회 - 참여연대

[통인] 평화로, 평화로 가는 길 - 이행우 평화운동가 - 월간참여사회 - 참여연대

[통인] 평화로, 평화로 가는 길 - 이행우 평화운동가
 2014년 04월  2014.04.07 (14:38:32)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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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 평화로 가는 길
이행우 평화운동가
 

인터뷰 박정은

정리 송윤정

사진 박영록

 

 

참여사회 2014-04월호

"나는 “HERE AND NOW”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늘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내 양심에 비춰서 양심에 따라서 하는 것이지요.
평화를 원하고 전쟁을 반대하면 그렇게 되도록 운동을 해야지요."

 

이행우 선생은 재미 평화운동가다. 퀘이커교도다. 북한이 미국, 한국과 전혀 교류가 없던 시절부터 북한 알기 운동을 지속해왔고, 그 과정에서 북한을 수십 차례 방문했다. 재미동포 운동 단체인 미주동포전국협의회NAKA를 조직하였고, 미 의회와 정책 담당자들을 상대로 평화를 위한 로비 활동을 해오고 있다. 선생의 이름이 생소한 독자가 많으리라. 막후에서 일하는 탓이다. 올해 나이 84세. 최근엔 북미 간 교류가 거의 단절된 현 상황에서도 3년째 남북미 반관반민 대화를 3년째 진행 중이다.

 

한국을 떠난 지 46년이 되셨어요. 미국에 가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대학 들어가던 해에 한국 전쟁이 났는데, 퀘이커들이 병원을 복구하고 간호사들 교육하고 구호물자도 나눠주고 그랬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외국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이 굉장히 유세를 했어요. 구호물자 나눠 준다면서 좋은 집에 살고, 도둑이 많으니까 집에 철조망도 많이 치고. 근데 퀘이커들은 조금 달라. 보통 한국 사람 사는 구공탄 때는 작은 집을 빌려서 살면서 봉사활동을 하더라고요. 굉장히 감명을 받았어요. 1960년 12월 18일에 정식 퀘이커 한국 모임이 시작됐고, 이후로 나는 퀘이커 모임 계속 나갔어요. 그러던 중 68년에 미국 퀘이커 성인 교육 센터 펜들힐에서 초청이 와서 1년 동안 퀘이커 역사 공부를 했어요. 어떻게 초청이 왔는지 몰랐는데, 가서 보니 함석헌 선생이 나를 추천했다고 하더라고.

 

1년 계획으로 가셨다가 정착하신 거예요? 

퀘이커 공부 1년 하고 수학을 공부하려고 했어요. 내가 한국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거든요. 그런데 수학 공부를 다 못해서 한국에 못 돌아왔어요(웃음). 펜들힐 일 년 공부하고 나니 서른여덟 살인데,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집에는 내가 부양해야 할 식구들이 있었어요. 수학 공부 하긴 틀린 것 같고, ‘이제 컴퓨터 시대로 간다, 컴퓨터를 공부를 해서 우선 먹고 살 도리를 하자’ 싶더라고. 그래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4개월 단기 속성으로 배웠어요. 그리고 34년 동안 컴퓨터 일로 내 생계를 유지했어요. 일흔 세 살 까지 일하고, 이제 은퇴한지 십년이 넘었지.

 

한국엔 언제 처음 들어오셨어요? 

80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왔어요. 열흘 와 있는 동안 5·18이 일어났어요. MBC 방송국에 있던 조카딸을 통해 광주의 참상에 대해 들었어요. 그리고 그때 함석헌 선생님 댁에 자주 있었는데, ‘내일 몇 시에 광주 도청에 쳐들어간다’ 그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전화가 오더라구요. 그 전화에서 이야기 한 그 시간에 딱 사건이 일어났어요. 군부 안에 사람들이 몰래 나와서 공중전화에서 알려 준 거죠. 그리고 5월 20일쯤엔가 미국 돌아가는 길에 동경에 들러서 정경모, 오재식, 박형규, 지명관을 만났어요. 만나서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했지요. 그 사람들은 일본에서 세계로 5.18을 알리는 일을 하고, 나는 미국에 가서 또 자세히 알리고 그랬어요.

 

좌우를 잇고 남북을 잇다 

 

미국에서 평화운동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퀘이커들이 1970년대부터 북한을 열자는 운동을 했어요. 그러다가 북한이 유엔에 옵저버로 참가하게 되고, 유엔에 나와 있는 북한 사람들이 1980년 9월에 미국친우봉사회(AFSC,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대표 세 사람을 초청했어요. 미국 민간 단체에 처음으로 북한이 문을 연 거예요. 다녀온 세 사람과 저녁 먹고 얘기하다가 갑자기 퀘이커들이 좌우로 갈라진 동포 사회가 함께 운동할 수 있게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동포들과 미국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남북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AFSC에서 코리아 컨퍼런스를 열었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어요. 그리고 1981년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첫 회의를 했어요.

 

당시 동포 사회가 갈라져 있었다고요?

선통일 후민주는 좌로, 선민주 후통일은 우로 갈라져 있었어요. 누가 회의하자 그러면 누가 오는지 물어보고, 반대편 사람이 오면 안 오고, 친구였었어도 상종을 안할 정도로 심했어요. 함석헌 선생께서 그런 걸 보시고선 1980년에 내가 한국 다녀갈 때 “이번에 가면 싸우지 말고 같이 좀 잘 해라”고 당부하신 것도 있었고, 퀘이커들이 한다고 하면 아무도 누가 하냐고 묻지 않고 함께할 것 같기도 해서 제안한 거였어요. 아니나다를까 초청인들은 다 왔어요. 성공리에 됐어요.

 

이후로 AFSC가 한국 문제에 개입하게 됐어요.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컨퍼런스를 81년, 82년, 83년 세 번 하고, <코리아 리포트>도 나오고……. 당시 미국에 한국 문제 전문가들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 역사, 군사, 정치, 분단 문제 등 분야별로 다룬 책 『투 코리아 원 퓨처』를 냈어요. 85년에 나오자마자 일본, 한국에도 번역해서 나왔어요.

 

그때부터 최근까지 계속 남한, 북한, 미국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계신 거네요. 

나는 미련하거든. 한 번 시작하면 계속 끝까지 하는 사람이에요. 빠져 나오지도 못하고. 어디가도 앞에 나가서 연설하고 하는 건 좋아하지도 않고. 같이 만나서 얘기하는 자리 만들고 하는 건 좋아해요. 재미가 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도 방북 하셨지요? 

그렇지. AFSC에서 처음 북한에 다녀오면서 우리도 북한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그 때 국무성에서 비자를 안 내줬어요. 그래서 AFSC 코리아 데스크 직원이 매주 목요일에 항의하러 국무성에 갔어요.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까지 가려면 기차로 두어 시간, 국무성에 다녀오려면 하루가 다 갈 정도였지요. 이렇게 몇 달을 다녀도 북한 사람들이 못 와서 우리가 미안해하고 있었는데, 북한에서는 미국 정부가 그러더라도 우린 당신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으니까 다시 한 번 부르겠다, 그래서 제2차 북한 방문을 하게 됐어요. 그 방문단에 내가 들어가서 1982년에 처음 북한에 다녀온 거죠. 2주인가 열흘인가? 갔다 와서 언제 누굴 만나서 무슨 얘길 했는지 자세히 써서 AFSC에 보고 했어요. 그 때는 김정일이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라 불리던 시절인데, 내가 김정일이 어떻게 후계자가 되었냐고 물어보고 그랬어요.

 

방북 여러 번 하셨나요? 

서른 번 넘어서는 세질 않아서… 아마 사십 번 가까이 했을 거예요.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곳을 가봤어요. 나같이 각계, 위에서 아래까지 만난 사람은 드물어요. 김일성하고도 밥 먹고, 실무자도 접촉 하고.

 

이후로도 계속 북한과 교류를 하셨나봐요.  

AFSC에서 북한의 집단농장과 미국의 농장이 자매결연을 맺어 교류할 수 있도록 했어요. 우리가 초청해서 이북 대학 교수들, 농업 기술자들이 미국에 다녀가고, 미국의 농업 기술자가 북한의 농장을 시찰·컨설팅 하고 필요한 것을 지원했죠. 잘 되니까 자매결연 농장을 4개로 늘리게 되었고, 또 그 후엔 다른 단체들도 북한 농장과 자매결연을 맺기 시작했어요.

 

참여사회 2014-04월호

 

한반도 평화, 미국이 관건이다 

 

1990년대엔 미주동포전국협의회(NAKA, National Association of Korean Americans)를 만드셨지요? 

1993년에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잘 알고 지내던 한완상이 통일원 장관이 됐어요. 이 기회에 퀘이커가 남북문제 중재자 역할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퀘이커들이 월남전 종식할 때나 중국 개방할 때 중재한 경험이 있거든요. 그래서 남북에 접촉을 했어요. 그런데 한완상이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이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재미동포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운동을 하는 게 맞다는 거지. 북한 쪽에서도 똑같은 얘길 해요. ‘문제는 미국이다, 미국을 움직여라’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퀘이커 조동설, 이승만 목사, 나, 세 사람이 미국 정부 상대로 하는 운동을 하기로 합의를 했어요.

 

세 분이 NAKA를 창립하신 거예요?

우리 셋이 안 되니까 확대를 해서 10명을 모았어요. 미국은 땅덩이가 넓어서 비행기 타고 해야 하니까 10명 모으려면 3개월이 걸려요. 근데 10명도 모자라서 10명을 더 뽑아서 20명이 하자고 합의를 했어요. 20명이 모이면 또 새로 시작을 해요. 처음 하는 것 같이. 그러면 또 1년이 걸려요. 조직을 만들어 놓으면 사람이 안 와요. 조직을 만들 때 같이 해야지. 사람들을 모아서 ‘뭐 만들자’ 할 게 아니라, 그걸 만들자는 의견이 10명 모두에게서 스스로 다 나오도록 해야 해요. 그래야 이 사람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거든. 그렇게 해서 미국 전역에서 150명의 대표가 만든 단체가 NAKA, 미주동포전국협의회예요.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당시 국회의원 이만섭이 정부에 동포들 동향을 보고하면서 미국에 조총련 같은 단체가 생길 거 같다고 했는데, 동아일보 1면 탑에 그 기사가 나왔어요. 그게 우리 얘기였어요. 이승만, 조동설, 이행우, 이북 다녀온 빨갱이 셋이 주모자 아니냐, 이렇게 돼버린 거지. 언론에 그렇게 나오니까 모아 놓은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어요. 내가 지금까지 통일 운동하면서 아는 사람들은 안 넣고 대학 교수, 엔지니어 이런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모았었는데, 다 떨어져 나갔지. 그러고 나면 다시 모집하기가 더 힘들었어요. 1993년 5월에 시작했는데, 1994년 10월 29일에서야 창립이 됐어요.

 

1994년 국내는 박홍 총장이 주사파 발언하고 ‘주사파’ ‘빨갱이’ 이런 단어들이 횡행했던 때였어요. 지금 종북 논란처럼요. 

이승만 목사가 NCC? 회장이었어요. 그러면 백악관 조찬기도회도 나가요. 클린턴 옆에 앉아서 얘기하고. NAKA 창립총회할 적에 클린턴 대통령을 초청했더니 축사를 보내왔어요. 우리보고 빨갱이라 하면 “그럼 미국 클린턴 대통령도 빨갱이라는 거냐” 했죠.

 

NAKA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첫째, 한반도의 평화와 평화적인 통일을 우선적으로 한다. 두 번째, 재미동포들의 인권과 권익을 보호한다. 세 번째, 우리 민족의 문화를 미국에 알린다. 네 번째, 소수민족과 우릴 위해서 같이 노력한다. 이렇게 하니까 어느 목사가, “지금 통일 이런 얘기하면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아간다. 그러니 통일 얘기를 빼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첫째 항목을 네 번째에 넣는 걸로 조정했었어요.

 

뉴욕에서 만들어서 워싱턴에 갔어요. 국무성에 얘길했더니, “한국계 미국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당신들이 처음으로 찾아왔다. 환영한다” 그러더라고. 다음에 의회 외교위원회 사람들을 만났는데, 거기서도 “지금까지 어떤 한국계 미국인도 와서 얘기하질 않았다”그러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했어요. 1년에 두 번 NAKA 이사회를 할 때 국무성, 의회를 방문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얘기해주고 그 사람들 얘기를 듣죠.

 

대화로 함께하는 남북미

 

2004년부터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국제회의를 조직하기 시작하셨지요. 

2000년대 들어와서 국회의원들을 모으면 괜찮겠다 싶었어요. 법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얘기를 하고, 그들이 행정부에 얘기할 수 있도록 하려는 거죠. 당시 미국 민주당 외교위원회 간사 바이든에게 호스트가 되어 국회의원들을 모아달라고 얘길 했어요. 북한에서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오게 하려고 했는데, 북한에서는 오려고 하는데 미국 정부에서 허가를 안해줬어요. 그래서 북한 UN대사를 찾아가서 얘길 하고 박길연, 한성렬 UN대사가 참석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남한에서는 장영달, 김재윤, 강혜숙, 선병렬, 이창복 의원이 왔어요. 미국 상하원 의원이랑 민간 유명인들도 좀 오고, 그래서 2004년 7월 20일에 한반도평화안보포럼을 열었어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계속 하려고 했는데 미국에서 북한 사람들 비자를 안 내줘서 못했어요.

 

4년 뒤에 한반도평화포럼을 열었던데요. 

2009년에 백낙청 교수랑 몇 사람이 모여서 얘길 하다가, 워싱턴에서 회의 한 번 하자고 제안했어요. 미국 체류 등 모든 건 내가 책임지기로 했지. 그래서 온 사람이 백낙청, 오재식, 박원순, 이명숙(목사)예요. 존 케리 의원이 호스트가 돼서 9월 14일에 한반도평화포럼을 했어요.

 

2012년부터는 남북미의 정부와 민간 대표들이 함께하는 당국대화에 준하는 회의를 3년째 진행하고 계십니다. 요즘처럼 남북관계가 경색된 시기에 남북미가 함께 만나다니 놀라운 일인 것 같아요. 

남북미 의원들만 중심으로 해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6자회담 구성에 독일도 함께 하고, 그러면 좋은 회의가 될 것 같더라고요. 그 제안을 독일 에버트재단에서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나하고 에버트재단 폴만 소장하고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는데, 북한에서 학술회의 형식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신대, 시라큐스 대학, 태평양세기연구소, 세 곳을 더 섭외해서 공동주최했어요. 그 첫 회의가 뉴욕에서 2012년 3월 7일부터 9일까지 한 동북아평화협력회의예요.

 

당시 회의에 함께한 사람들이 쟁쟁했어요. 그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일단 북한에서 안 오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북한 UN대사에게 얘기했죠. 평양에 연락해서 대표를 보내달라고. 존 케리는 의회에서 외교위원장을 하고 있었어요. 쭉 같이 해왔으니 이번에도 참석하기로 했죠. 그리고 또 헨리 키신저가 생각났어요. 북미 교섭할 때 헨리 키신저가 가끔 오는데, 북한 사람들이 키신저 얘기는 굉장히 경청한대요. 키신저가 중국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고, 국무장관도 했고, 그가 온다면 다른 학자나 관료들과 교섭하기가 더 좋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헨리 키신저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니, 2004년 한반도평화안보포럼을 같이 했던 도날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가 있었어요. 그레그를 통해서 헨리 키신저에게 얘기를 했더니 성사가 됐어요. 그래서 헨리 키신저, 존 케리 위원장이 오기로 했고, 남한에선 백낙청, 손학규, 임동원이 온다고 얘기하면서 북한은 거기에 상응하는 사람을 내보내라고 했지. 리용호 외무성 부상이 왔어요. 다 해서 남한, 북한, 미국, 중국, EU, 독일, 일본, 몽골, 러시아, UN에서 참석했어요. 회의는 채텀하우스 룰?로 했어요. 그래서 내용을 발표도 못하긴 했지만. 내가 지금까지 조직한 것 중 가장 큰 회의였죠.

 

요즘 사람들은 남북은 왜 만나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만나야 문제가 풀리죠. UN에 있는 나라들이 이해관계가 있으니까 싸워요. 문제가 있을 때 퀘이커 유엔 오피스는 그 나라 사람들을 초청을 해요. 저녁이나 먹읍시다, 하고. 정치적인 얘기 안 해요. 그냥 우선 친해지고 서로 이해하자는 거죠. 그러고 나면 그 전 같으면 싸울 것도 안 싸우고 풀리지 않을 것도 풀려요. 거기서 나도 좀 배웠죠.

 

 

활동가로서, 조직가로서 

 

40년 가량 계속 이 판에서 중재를 하고 의견을 모으고 계세요. 

그러니까. 누구 말마따나 미친놈이지.

 

비결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여러 사람들을 모아서 일을 하잖아요. 그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게 해야 해요. 여러 단체가 모일 때 조정은 내가 다 해도, 사실 그 단체들이 알아서 조정한 것처럼 보이도록 해야 해요. 역할을 나눌 때면 사람들이 체면 가리지 않고 서로 드러나는 역할을 하려고 해요. 그러면 회의 끝나고 나서 하나씩 따로 만나거나 전화로 얘기해요. 나는 전혀 개입한 것 같지 않고, 자기들이 자진해서 양보하고 조정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거죠.

 

사람 뿐 아니라 재정도 필요할 텐데요. 

나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프로그램이 좋으면 돈이 나와요. 2004년 한반도평화포럼 할 때, 사람은 다 조직이 됐고, 북한 사람들이 오게 하려면 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들어오게 했어요.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 도날드 그레그와 약속을 잡고 갔더니 만나자마자 "요새 퀘이커들이 일 잘해" 하더라고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얘기야. "내가 너 퀘이커라는 거 알아. 니가 뭐 했는지 알고." 이런 소리거든요. 그 사람이 CIA 이런 것만 평생 한 사람이예요. 그래서 나도 조사한 걸 얘기했지. "당신말이야. 좋은 대학 나오고 CIA 등에서 일 잘했더라. 우리랑 만나줘서 참 고맙다”고 얘기했지. 그랬더니 두 번째로 "이게 니 아이디어냐, 바이든 아이디어냐?" 묻더라고. "우리 아이디어인데, 바이든이 받아들였다"고 했지. 그 다음에 "너 돈 있냐" 물어봐서 돈 없다고 했더니 "같이 하자" 그러더라고. 얘기가 1분 30초 만에 다 끝났어요. 그리고 회의가 성공리에 잘 됐어요. 워싱턴 포스트에 보도가 됐는데, 도날드 그레그가 사회를 봤으니 기사에 이름이 나고 그랬죠. 끝난 뒤에 통화를 하는데 도날드 그레그가 “처음엔 잘 될지 의문이었는데, 이행우와 (코리아 소사이어티) 부회장이 밀어붙여서 했다. 그런데 결국 공적은 나한테 돌아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이건 시작이다. 앞으로 계속 같이 하자” 그랬더니 오케이 했어요. 이후로 같이 잘 하고 있지요.

 

사람 모으는 것, 예산 만드는 것, 다 고민해서 이뤄내신 건데, 누군가 알아봐주지 않는 건 서운하지 않으세요? 

누가, 내가? 사업이 잘 끝났으면 됐지. 나는 사람들 모아서 조직해 주는 거, 그거 밖에 못해. 다른 건 못하니까. 무대 체질도 아니고, 아래에서 봐야 다 보여.

 

위에서 봐도 다 보이는데요?(웃음) 

대부분 사람들이 그걸 좋아해요. 운동 하는 사람 중 내가 만난 상당수가 직책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해요. 그리고 감투를 쓰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No! 같이 일하도록 해야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질 않아요. 그런 상하관계를 만드는 식으로 하면 조직이 오래 못 가요. 그리고 직책을 만들었으면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서 실행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명함부터 찍어 가지고 다니더구만요. 아니, 그걸 감투라고 생각하면서 무슨 운동을 해요? 다들 같이 좀 힘 합쳐서 직책만 생각하지 말고 해야 하는데, 그게 좀 어려운 것 같아.

 

젊은 활동가들에게 

 

박근혜 정부의 통일대박론 어떻게 보세요?

통일이 되면 그야말로 대박이지.

 

박근혜 정부가 그냥 해보는 소리는 아닌 것 같고, 준비는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잘 되면 좋은데, 그렇게 해서 될까? 보수들이 하면 추진력 있을 수 있죠. 중국 개방도 공화당 시절에 했고. 우리가 얘기를 하면 안 들어도 박근혜 대통령이 추진하면 보수 단체들이 반대하지 않을 거거든요. 그들이 뭔가를 하면 우리가 필요한 부분을 밀어줘야 하는 건데… 그런데 지금까지 하는 거 보면, 별로 신용이 안 가요.

 

젊은 평화활동가들이 많지 않아요. 일하기 쉽지 않은 영역인데다, 통일은 멀고, 북한도 맘에 안 들고, 한국 정부도 맘에 안 들고, 빨갱이니 뭐니 하는 논란에 휩싸이기 쉽고. 게다가 평화는 너무 크고 먼 문제처럼 여겨지다보니 동기 부여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끈기있게 잘 해야지요.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동지를 구해서 자꾸 넓혀가야지요. 전쟁이라는 것 여러분은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전쟁 없애야 하거든요. 그럼 어떻게 전쟁을 없애느냐. 전쟁을 하지 않도록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 해야지요. 나는 무엇보다도 통일이 돼야 한다고 봐요. 통일이 돼야만 평화가 유지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싫어하거나 나와 맞지 않는 사람까지도 같이 살아야지요.

 

근데 젊은 친구들은 전쟁을 잘 모르잖아요? 관심도 별로 없고…….

내가 놀랜 게 뭐냐면, 내가 어떤 모임에서 북한에 식량 주자니깐 안 된다 이거야. 아프리카에 굶는 사람이 많은데 아프리카를 줘야지 왜 북한에 주냐는 거야. 북한 사람들 식량 주면 군인들 먹는다고 하는데, 군인들도 먹여야지. 그러니까 잘 먹여서 빨리 친해져서 총을 안 겨누게 해야지. 왜 그 생각은 안 해.

 

수십년 평화 운동을 계속 해오신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나는 “HERE AND NOW”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늘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내 양심에 비춰서 양심에 따라서 하는 것이지요. 평화를 원하고 전쟁을 반대하면 그렇게 되도록 운동을 해야지요. 일이 잘 되고 안 되고는 문제가 아니예요. 잘 되도록 내가 최선을 다할 따름이지.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지금까지 내 평생 내가 가난하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고, 내가 부자라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항상 좋은 사람들과 함께 뜻있는 일을 했어요. 내가 이렇게 돌아보니까, 내가 만난 사람은 다 좋아.

2020/12/24

알라딘: 퀘이커 350년 하워드 브린튼,마가렛 베이컨 (지은이),함석헌,퀘이커 서울모임

알라딘: 퀘이커 350년

퀘이커 350년   
하워드 브린튼,마가렛 베이컨 (지은이),함석헌,퀘이커 서울모임 (옮긴이)퀘이커서울출판부2018-03-01원제 : Friends for 300 years
359쪽

책소개

퀘이커는 전 세계적으로 평화와 화해를 위한 활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기독교 소수 종파로서, 3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전쟁에 반대하고 폭력에 저항하는 사회활동으로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 친우봉사회가 노벨평화상(1947)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의 구성은 크게 17세기 중엽 이후 300년 동안 친우회(퀘이커)의 역사를 담은 ‘퀘이커 300년’과 20세기 중.후반부터 21세기 초엽까지를 기록한 ‘그 후 50년’으로 나뉜다.
목차
「퀘이커 350년」 한국판 서문 5
「퀘이커 300년」 한국판 서문 8

퀘이커 300년
1. 주님을 우러러보기 위해 12
2. 속의 빛의 체험 33
3. 사상으로서 속의 빛 56
4. 예배 모임 96
5. 감화 130
6. 결의에 이르기까지 152
7. 모임 공동체 178
8. 모임과 세계 214
9. 퀘이커 역사와 종교형식 256
10. 퀘이커 사상과 현대 291

그 후 50년
그 후 50년 317

부 록
「퀘이커 300년」을 지은이의 말 336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하워드 브린튼 (Howard Haines Brinton) (지은이) 
미국 물리학자이면서 역사학자, 퀘이 커 사상가. 『퀘이커 300년』은 그가 남긴 많은 저서 가운데 가장 명저로 꼽히고 있다. 부인인 안나 브린 튼(Anna Brinton)과 퀘이커 명상기관인 <펜들 힐> 의 초석을 다지는 데 공헌한다.
최근작 : <퀘이커 350년>

마가렛 베이컨 (Margaret Hope Bacon) (지은이) 
미국 작가, 퀘이커 역사학자. 평생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인권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필라델피아 인권상’ 등을 수상한다.
최근작 : <퀘이커 350년>


함석헌 (옮긴이) 

일제하의 민족 운동가, 그리고 이후 민주주의 인권 운동가이자 종교·평화 사상가로서 끝없는 실천의 인생을 산 함석헌(咸錫憲)은 아버지 함형택(咸亨澤)과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로서의 진로를 결정,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갈 생각으로 평양의 관립인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2학년이던 1917년 8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살던 황득순(黃得順)과 결혼을 한다(슬하에 2남 5녀). 3학년이 되던 1919년에 당시 숭실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친척 형 함석은이 찾아와 평안남북도 학생 운동의 책임을 그에게 맡기고 역사적인 3·1 운동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의사를 꿈꾸던 함석헌의 생애는 크게 바뀌게 된다.
3·1 운동 참여 이후 학교를 자퇴하게 된 함석헌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수리조합에서 조합원 일을 하며 2년 간 방황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일단 학업을 이어 나가기 위해 경성으로 가게 된다. 신학기 시작을 놓쳐 입학할 학교를 찾지 못했던 그는 함석규 목사의 추천을 받아 1921년 정주의 오산중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길에 오른 함석헌은 고심 끝에 교육자로서의 진로를 정하고 이듬해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甲組)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당시 일본식 국가주의로 무장된 직업 교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학교의 수업 과정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평생 친구가 되는 김교신(金敎臣)과 친분을 가지게 되고 이어 그가 나가고 있던 우치무라 간조의 성경 연구 모임에 같이 참여하게 되면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김교신을 포함해 여기서 만난 조선인 친구들(유석동,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6명은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성서 연구를 지속하면서 1927년 7월 동인지 성격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도쿄에서 창간한다. 창간호(국판 44쪽)에 발표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활자화된 함석헌의 첫 번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귀국 후 오산학교에 부임해 역사와 수신(修身)을 가르친다. 한편으로는 ≪성서조선≫을 발행하면서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고 다수의 글을 발표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지만 그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 운동은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한다.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종교 사상을 개척해 나가던 함석헌은 1933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송두용의 집(서울 오류동)에서 가진 성서 모임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초고를 발표하고 토론을 거친 뒤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에 연재한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역사 왜곡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우리의 역사를 바로 보고자 하는 이 글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 이 글은 일제 당시 검열로 삭제되었던 부분을 포함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1950. 3. 28), 이후에는 ‘성서적 입장’을 빼고 대폭 수정해 ≪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2)로 제목을 변경·출간했는데 민중의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씨? 사관’을 보여 주는 그의 중요한 저술이다.
일제 말기 점점 노골화되던 식민지 교육 정책 속에서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이 강조되자 더 이상 선생직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함석헌은 1938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이해에 자식 둘을 홍역으로 잃는다. 1940년 평양 송산리의 송산(松山)농사학원을 인수해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전 주인이었던 김두혁(金斗赫)이 도쿄로 유학 가서 도쿄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과 만든 소위 ‘계우회(鷄友會)’ 모임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어 1년 여 동안 평양의 대동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결국 농사학원은 폐원되었고, 아버지는 옥살이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1942년 3월 ≪성서조선≫에 김교신이 쓴 권두언을 문제 삼은 일제의 폐간 조치와 더불어 함석헌 역시 연루자로 지목되면서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다. 출소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중 오랜 벗이자 스승의 관계였던 김교신의 사망으로 인한 큰 충격과 슬픔 속에서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공간에서 여러 자리에 불려 다니며 평안북도 임시 자치 위원회 문교부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인 ‘신의주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또다시 50여 일을 감금당하고 만다.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또다시 투옥된다.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 한 달 만에 석방되었으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 때문에 당시 내려진 ‘지주 숙청령’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결국 1947년 월남을 감행한다. 1년여 후 아내와 자식 일부도 월남했으나, 어머니는 내려오지 못하고 이산가족이 된다.
월남 직후 오류동 노연태의 집에서 지내면서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를 시작하고, 유영모 선생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 김해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때 가진 한 성서집회에서 그간의 무교회주의와 결별하는 신앙적 변화를 겪게 된다. 퀘이커(Quaker)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즈음으로 여긴다. 휴전 이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강연 활동과 양계장을 하며 어렵게 삶에 정착해 나가는 가운데 ≪말씀≫, ≪편지≫ 등의 신앙 잡지에 여러 글을 발표한다. 그중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한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그는 기독교의 타락상과 계급화를 비판했는데, 이 글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후에도 함석헌은 ≪사상계≫에 영향력이 큰 글들을 발표하면서 장준하와 함께 군사 독재와 치열하게 싸우는 길을 걷게 된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위해 기증(정만수 장로)받은 천안(봉명동)의 땅에서 교육과 농사를 함께하는 공동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곳의 이름을 ‘씨?농장’이라고 했는데, 후일에 직접 번역해 책으로 출간한 간디의 자서전을 읽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58년 8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20여 일간 구금되는, 이승만 정권 시기 대표적인 필화 사건을 겪는다. 함석헌의 첫 번째 정치 평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로 인한 필화 사건 이후 함석헌은 오히려 왕성하게 글들을 발표하면서, ‘씨?농장’에서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 투쟁을 전개하는 등 사회적인 목소리를 높여 간다. 1961년 ≪사상계≫ 7월호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게 된 당시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글 <5·16을 어떻게 볼까>로 인해 사장이었던 장준하와 취재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당시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정작 함석헌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1962년 2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3개월 예정 방미 길에 오른다. 귀국한 직후 7월에 오산학교 강당에서 귀국 강연회(오산학교 동창 주최)를, 이어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상계≫주최의 시국 강연회를 연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미처 입장하지 못한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기마 경관대까지 출동한 이 강연회를 함석헌은 스스로 ‘사회 참여의 시작’으로 보았는데, 이후 장준하와 더불어 활발한 강연을 통해 군사 정권의 잘못을 꾸짖는 한편 굴욕적인 한일 협정의 비준을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 1965년에는 이를 위해 각 분야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 수호 국민 협의회의 상임 대표로 선출되기도 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을 위한 개헌을 앞두고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한편, 1970년에는 4·19혁명 10주년에 맞추어 개인 잡지 성격의 월간지 ≪씨의 소리≫를 창간하지만 두 달 만에 폐간 조치를 당하게 된다. 이후 법정 투쟁 끝에 승소해 이듬해 8월에야 복간호로 3호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에는 이후 1988년까지 지속된 ≪노자≫와 ≪장자≫ 접기
최근작 : <함석헌 수필선집 (큰글씨책)>,<함석헌 수필선집>,<들사람 얼> … 총 57종 (모두보기)

퀘이커 서울모임 (옮긴이)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의 구성은 크게 17세기 중엽 이후 300년 동안 친우회(퀘이커)의 역사를 담은 ‘퀘이커 300년’과 20세기 중.후반부터 21세기 초엽까지를 기록한 ‘그 후 50년’으로 나뉜다. 전반부를 저술한 하워드 브린튼(Howard Haines Brinton, 1884∼1973)과 후반부를 쓴 마가렛 베이컨(Margaret Hope Bacon, 1921∼2011)은 모두 퀘이커리즘(Quakerism)에 정통한 역사학자로서 그 자신들 역시 퀘이커였다. 특히 브린튼 선생은 1950년대 후반 방한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이었다.
『퀘이커 300년(원제, ‘Friends for 300 years’)』은 1960년대 초반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선생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을 마쳤으나 출간하는 데 어려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500권을 내는 데 500불이 필요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브린튼 선생은 <필라델피아 연회의 체이스 펀드(Chase Fund of Philadelphia Yearly Meeting)>에 요청하여 500불의 출판기금을 주선해주었다. 이와 함께 미국에 거주하던 이행우 친우에게 당신의 사진과 서문, 서명을 건네주시며 한국판 출간의 권한을 서울모임에 맡겼다. 저자 서명은 모두 세 개를 주셨는데 이행우 친우로 하여금 “가장 보기 좋은 것으로 골라 쓰라”는 당부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너무 연로하여 점자를 쓰면 안 될 정도로 선생의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퀘이커 300년』 한국판이 우여곡절 끝에 빛을 본 지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지나갔다. 서울모임은 2014년 12월 28일 ‘퀘이커 신앙을 한국 사회에 올바로 알리고 친우회의 내적 성숙’을 기하기 위한 목적으로 『퀘이커 350년』 출간 계획을 수립했다. 이 날은 친우회가 한국 땅에서 공식적인 첫 예배모임을 가진 지 1만 9천 7백 34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이는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진작부터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역사의 필연성 위에 이미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1953년 6.25전쟁의 폐허 위에 미국과 영국의 친우들이 도착했던 때,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친우회는 일찍이 노예제도, 아동에 의한 노동과 착취, 소수자에 대한 차별, 전쟁과 테러, 총포와 화약을 비롯한 무기사업 등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폭력에 저항해오면서 사회책임을 실현해왔다. 21세기에 들어 친우회는 자연과 환경, 특히 핵 문제에 대한 깊은 우려 속에서 이를 새로운 실천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들에 대한 어떠한 임무도, 지침도, 교리도 명시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이 책에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비추고 계시는 빛 즉, 우리 안에서 발현하고 있는 ‘속 빛(inner light)’이다. 우리 친우회에는 수세기가 넘는 고요예배와 집단명상 가운데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의제가 있다. 그것은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후세에 전승시켜 왔던 퀘이커들의 방향성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다름 아닌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왔던 ‘평화’라는 진리로 향하는 길이었다.
평화! 그것은 우리 퀘이커들에게 가능해도 가야 할 길이었지만 불가능해도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특히 한반도와 같이 좌.우로 갈라진 이념과 남.북으로 분단된 특수한 현실 속에서도, 평화! 그것은 한국 퀘이커가 지향하는 가장 높은 이상이었다. 우리는 세상에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떠한 경우에도 내세우지 않고 가장 고요하고, 가장 평화로운 방법을 찾아 실천해왔다. 이러한 취지를 확산시키는 데 이 책을 출간하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분께서 주관하시는 일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어나니(요한복음 1장 9절)”....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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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는 전 세계적으로 평화와 화해를 위한 활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기독교 소수 종파로서, 3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전쟁에 반대하고 폭력에 저항하는 사회활동으로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 친우봉사회가 노벨평화상(1947)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서울과 대전 두 곳에 모임이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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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5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이웃종교의 향기 신년기획 1]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 free_flying@catholicnews.co.kr )
승인 2014.01.07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새해를 맞아 3회에 걸쳐 익숙한 듯 낯선 종교를 찾아갑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활동도 활발하고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흔히 만나기는 어려웠던 종교, 한국인의 문화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종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새해에 처음으로 만난 종교는 종교친우회, 즉 퀘이커 서울모임입니다.



▲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후문 인근에서 50년째 계속된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후문을 지나 주택가 골목 막다른 곳에 이르자, 녹색 대문을 단 오래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널찍한 방 안에 십여 명의 사람이 둥글게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앉아 있다.

시작을 알리는 어떤 신호도 없이, 앉은 이들은 함께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자연스레 말을 꺼낸다.

“지난주 강정 후원 음악회와 밀양 유한숙 씨 추모 미사에 다녀왔어요. 신앙이라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계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침묵. 잠시 뒤 다른 이가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민주주의, 권력, 마리아의 찬미. 긴 침묵 끝에 나누는 이야기들은 예상보다 훨씬 정치적인 내용이다. 한 시간이 지나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함께 일어나 손을 잡고 원을 만들더니 인사를 나눈다.

벌써 50여 년째 일요일 오전 11시면 이 아담한 집에 모이는 이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즉 한국 퀘이커(Quaker)들이다.

17세기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형식적 예배에 반대해 시작된 퀘이커,
신비주의 전통에서 ‘직접 체험하는 하느님’을 강조

퀘이커는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됐다.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George Fox)는 당시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 형식적 예배 등에 반대하며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Inner Light)’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교리에 앞서 신앙의 체험을 중요시했고, 하느님의 신성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전통을 받아들이며 성직자 없는 평등한 모임을 시작했다. ‘퀘이커’란 ‘하느님 앞에 전율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초기에는 조롱하는 의미의 별명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제도가 지니는 경직성을 거부한 퀘이커 모임은 형식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들의 모임에는 성직자도 없거니와 ‘준비’도 없다. 그저 ‘내면의 빛’에 인도되길 바라며 침묵할 뿐이다. 퀘이커 모임에서 침묵은 ‘말에 의지하지 않는 기도’이며,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깊은 내면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이다. 이런 비움과 경청의 시간 속에서 빛이 주는 무언가에 감화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깨달음을 벗들과 나눈다. 이날 모임에서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였지만, 평상시 나눔은 성서 묵상, 일상의 이야기, 시, 노래 등 방법과 내용에서 매우 다양하다고.

하지만 퀘이커의 침묵은 오롯이 개인의 몫인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퀘이커가 된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의 명상이 동양의 참선과 다른 점을 ‘공동체성’이라고 강조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지요.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 ‘The voice of Ham Sokhon’, Freinds Journal, 1984)

곽봉수 씨는 처음 모임에 참석 했을 때 “함께하는 침묵 가운데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83년 <마당>지에 실렸던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퀘이커 모임을 찾은 이래 꾸준히 모임을 지키고 있다.



▲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이 모든 친우(friend)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문양효숙 기자




교리도 신학도 없지만, 단순 · 정직 · 평화 · 평등의 원칙 지켜야
신앙과 삶의 실천은 분리될 수 없어

공동체성과 더불어 퀘이커의 중요한 원칙은 단순, 정직, 평화, 평등이다. 퀘이커는 형식이나 교리는 없지만, 이런 것들이 진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 믿는다. 곽봉수 씨는 “퀘이컬리(Quakerly)란 말이 있다”고 설명했다.

“‘퀘이커다운’이란 의미인데요, 예를 들면 평화 선언을 반대하는 사람은 퀘이커가 아니에요. 전쟁을 옹호하면 퇴출시키죠. 닉슨 대통령도 거짓말을 해서 퇴출됐어요. 정직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거니까.”

체험적 신앙을 중시하는 퀘이커에게 이런 원칙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퀘이커들은 소리 없이 강정마을을 후원하고, 대한문 미사에 간다. 얼마 전에는 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씨알여성회 상임이사인 곽라분이 선생은 “이름을 내놓지 않을 뿐, 늘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다’에서 ‘우리’보다는 ‘한다’에 더 중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나’뿐만 아니라 ‘퀘이커가 한다’는 자국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아요. ‘우리’가 드러나는 것보다 힘을 보태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 이슈에 더 집중해요. 그게 우리 성향이죠. 퀘이커는 아주 조용히 일해요. 그러면서도 가장 진보적이죠. 역사적으로 보면 노예해방 문제, 감옥 개선 문제, 여권운동 등을 아주 초기부터 해왔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무엇이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는 퀘이커 신앙은 자연스럽게 평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초기부터 남부 흑인노예를 북쪽으로 탈출시키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운동을 비롯해 여성참정권 운동, 교도소시설 개선운동 등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퀘이커는 전쟁을 반대하고 분쟁지역의 복구 및 재건사업을 돕는 등 평화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 · 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호 및 복구활동에 힘입어 1947년 퀘이커 단체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미국 친우 봉사단)는 개인이 아닌 단체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창기 친우 이행우 선생, 미국 퀘이커단체에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함께해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퀘이커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전북 군산도립병원(현 원광대병원)에 5년간 의료봉사를 하러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이 떠난 뒤, 감명을 받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모임이 한국 퀘이커의 시작이었다.

모임에서 만난 이행우 선생은 1960년 12월 서울에서의 첫 번째 모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퀘이커로 살아온 종교친우회의 산 증인이다. 그는 미국 생활 45년간 미국 NGO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AFSC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평생을 한반도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바쳤다. 이행우 선생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와 수감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지학순 주교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고, AFSC 대표로 방북하고 북한과 교류해온 경험으로 1989년 문규현 신부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행우 선생은 자신이 활동한 AFSC와 함께 대표적인 국제 퀘이커 평화기구인 FCNL(Friends Committee on National Legislation, 국민 입법을 위한 친우위원회), QUNO(Quaker United Nations Office, 퀘이커 UN 사무실)등의 활동을 소개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 단체들은 이미 활동한지 70년도 넘은 국제 로비단체들로 미국과 UN에서는 법률을 검토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행우 선생은 “분쟁지역에서 갈등 양국을 편들지 않는 무조건적 구호활동으로 신뢰감을 쌓은 퀘이커 단체들은 국제회담을 주선하기도 하고, 이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 1960년대 첫 모임부터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 그는 평생 한반도 통일운동과 한국 민주화 인사를 도왔다. ⓒ문양효숙 기자




케이커 모임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제,
개인의 욕구를 넘어서 참 자아와 만난 공동체의 선한 결정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행우 선생은 “퀘이커 모임은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제로 한다”고 말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요?”
“휴회하고 다음 모임으로 결정을 미룹니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반대하면 그 사람이 반대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요. 대신 누군가 발언할 때 경청해야 합니다. 즉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발언을 독차지하지도 않습니다. 명상을 한 후 토론하고요.”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겠네요. 영원히 결정 못 하는 것들도 있을 수 있고요. 지금은 20여 명의 모임이니까 그렇다 쳐도 모임이 100여 명이 되어도 그렇게 결정하나요?”
“그럼요. 서두르지 않아요.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친우회 모임이 커지면 나누기도 합니다.”

의견 일치를 위해 한 세기를 기다린 것도 있다. <퀘이커 300년>(하워드 브린턴, 함석헌 역, 한길사, 2009)의 저자 하워드 브린턴은 1696년부터 흑인노예를 사는 것을 경고해 왔던 연회(1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 격의 퀘이커 모임)가 1776년에 이르러서야 노예를 지닌 사람을 모임에서 제명한다고 선언한 과정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브린턴은 “언제나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진리 전체를 볼 수가 없고, 개인보다 모임 전체가 더 많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며 진리를 깨닫는 주체로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한다. 또한 만장일치체가 권력과 욕망을 넘어서는 방법이라 설명한다.

“얼핏 보아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보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려면 표면에 있는 자기중심의 여러 욕망보다 더 깊은 데 숨어 있는 참 자아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참 자아는 서로 더불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입니다. …… 투표법은 큰 힘이 작은 힘과 맞서서 거기 어떻게 맞춰갈까 하는 억누르기 위한 수단입니다. …… 투표를 하면 대체로 일이 빠릅니다. 하지만 유기적인 자람은 느립니다. 투표법에서 각 개인은 단 하나 또는 일정한 수의 표를 가질 뿐입니다.” (위의 책, 188~190쪽)

퀘이커는 모두 친우(friend)…나이나 신분, 지위와 상관없는 자유로운 교제
절차나 형식보다는 ‘그렇게 사는 삶’을 중요시 여겨

55년 전 처음 친우회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묻자, 이행우 선생은 “누구나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위계가 없는 게 참 좋았다”고 답한다. 옆에 있던 이는 “처음 모임에 왔던 날, 어떤 사람이 ‘하안거 다녀왔다’고 하자, ‘아, 그랬어요?’ 하며 모두 긍정하더라”며 “관용과 인정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퀘이커는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을 ‘벗(friend)’이라고 부른다. 요한 복음서 15장의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는 예수의 말씀에 기초해, 모든 이가 나이나 신분, 지위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서로 교제를 나누는 평등한 관계임을 말한다.

벗(friend)은 회원(member)과 참석자(attender)로 나뉜다. 외국에서 “Are you Friend?”는 “당신은 퀘이커인가요?”라는 질문이다. 회원이 되고자 하면 자신이 참석하는 모임에서 의사를 밝히고 나름의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참석자(attender)라 해도 모임이나 활동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회원이 되면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그저 벗이다.

하지만 퀘이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절차나 형식보다 자신의 내적 인정이며,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1962년에 예순둘의 나이로 미국 퀘이커 학교인 펜들힐에 머물렀던 함석헌 선생이 “이제 퀘이커가 되어야겠습니다” 하고 결심을 밝혔더니, 주변의 퀘이커들이 “당신은 이미 퀘이커인걸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를 잘 드러낸다.



▲ 1960년대 초창기 모임 때의 기념사진. 가운데 함석헌 선생이 있고 그 왼쪽 뒤가 이행우 선생이다. ⓒ문양효숙 기자




신조가 없으니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 정답을 줄 수 없다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찾는 사람(seeker)”

이행우 선생은 “우리는 신조(Creed)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친우(friend)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다 다르다”면서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하 정답을 줄 수 없어요. 단지 자기가 이해한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뿐이지요. 자기가 믿는 것만이 퀘이커라고 하면 잘못됩니다. ‘내가 배운 건 이런 거야. 하지만 미세하게 각자의 삶에서 다 달라’,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다른 사람은 이렇구나’ 해야죠. 경계가 없어야 해요.”

평생을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에게 퀘이커로 배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나는 아직 찾고 있어요.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Seeker(찾는 사람)니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2020/02/04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 불교포커스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 불교포커스




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이웃종교의 향기 신년기획 1] 퀘이커 서울모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승인 2014.01.12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www.catholicnews.co.kr 문양효숙 기자 | free_flying@catholicnews.co.kr 승인 2014.01.07 11:17:40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새해를 맞아 3회에 걸쳐 익숙한 듯 낯선 종교를 찾아갑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활동도 활발하고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흔히 만나기는 어려웠던 종교, 한국인의 문화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종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새해에 처음으로 만난 종교는 종교친우회, 즉 퀘이커 서울모임입니다.






▲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후문 인근에서 50년째 계속된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후문을 지나 주택가 골목 막다른 곳에 이르자, 녹색 대문을 단 오래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널찍한 방 안에 십여 명의 사람이 둥글게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앉아 있다.



시작을 알리는 어떤 신호도 없이, 앉은 이들은 함께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자연스레 말을 꺼낸다.

“지난주 강정 후원 음악회와 밀양 유한숙 씨 추모 미사에 다녀왔어요. 신앙이라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계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침묵. 잠시 뒤 다른 이가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민주주의, 권력, 마리아의 찬미. 긴 침묵 끝에 나누는 이야기들은 예상보다 훨씬 정치적인 내용이다. 한 시간이 지나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함께 일어나 손을 잡고 원을 만들더니 인사를 나눈다.

벌써 50여 년째 일요일 오전 11시면 이 아담한 집에 모이는 이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즉 한국 퀘이커(Quaker)들이다.

17세기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형식적 예배에 반대해 시작된 퀘이커,
신비주의 전통에서 ‘직접 체험하는 하느님’을 강조

퀘이커는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됐다.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George Fox)는 당시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 형식적 예배 등에 반대하며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Inner Light)’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교리에 앞서 신앙의 체험을 중요시했고, 하느님의 신성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전통을 받아들이며 성직자 없는 평등한 모임을 시작했다. ‘퀘이커’란 ‘하느님 앞에 전율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초기에는 조롱하는 의미의 별명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제도가 지니는 경직성을 거부한 퀘이커 모임은 형식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들의 모임에는 성직자도 없거니와 ‘준비’도 없다. 그저 ‘내면의 빛’에 인도되길 바라며 침묵할 뿐이다. 퀘이커 모임에서 침묵은 ‘말에 의지하지 않는 기도’이며,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깊은 내면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이다. 이런 비움과 경청의 시간 속에서 빛이 주는 무언가에 감화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깨달음을 벗들과 나눈다. 이날 모임에서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였지만, 평상시 나눔은 성서 묵상, 일상의 이야기, 시, 노래 등 방법과 내용에서 매우 다양하다고.

하지만 퀘이커의 침묵은 오롯이 개인의 몫인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퀘이커가 된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의 명상이 동양의 참선과 다른 점을 ‘공동체성’이라고 강조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지요.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 ‘The voice of Ham Sokhon’, Freinds Journal, 1984)

곽봉수 씨는 처음 모임에 참석 했을 때 “함께하는 침묵 가운데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83년 <마당>지에 실렸던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퀘이커 모임을 찾은 이래 꾸준히 모임을 지키고 있다.



▲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이 모든 친우(friend)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문양효숙 기자
교리도 신학도 없지만, 단순 · 정직 · 평화 · 평등의 원칙 지켜야
신앙과 삶의 실천은 분리될 수 없어



공동체성과 더불어 퀘이커의 중요한 원칙은 단순, 정직, 평화, 평등이다. 퀘이커는 형식이나 교리는 없지만, 이런 것들이 진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 믿는다. 곽봉수 씨는 “퀘이컬리(Quakerly)란 말이 있다”고 설명했다.

“‘퀘이커다운’이란 의미인데요, 예를 들면 평화 선언을 반대하는 사람은 퀘이커가 아니에요. 전쟁을 옹호하면 퇴출시키죠. 닉슨 대통령도 거짓말을 해서 퇴출됐어요. 정직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거니까.”

체험적 신앙을 중시하는 퀘이커에게 이런 원칙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퀘이커들은 소리 없이 강정마을을 후원하고, 대한문 미사에 간다. 얼마 전에는 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씨알여성회 상임이사인 곽라분이 선생은 “이름을 내놓지 않을 뿐, 늘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다’에서 ‘우리’보다는 ‘한다’에 더 중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나’뿐만 아니라 ‘퀘이커가 한다’는 자국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아요. ‘우리’가 드러나는 것보다 힘을 보태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 이슈에 더 집중해요. 그게 우리 성향이죠. 퀘이커는 아주 조용히 일해요. 그러면서도 가장 진보적이죠. 역사적으로 보면 노예해방 문제, 감옥 개선 문제, 여권운동 등을 아주 초기부터 해왔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무엇이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는 퀘이커 신앙은 자연스럽게 평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초기부터 남부 흑인노예를 북쪽으로 탈출시키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운동을 비롯해 여성참정권 운동, 교도소시설 개선운동 등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퀘이커는 전쟁을 반대하고 분쟁지역의 복구 및 재건사업을 돕는 등 평화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 · 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호 및 복구활동에 힘입어 1947년 퀘이커 단체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미국 친우 봉사단)는 개인이 아닌 단체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창기 친우 이행우 선생, 미국 퀘이커단체에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함께해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퀘이커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전북 군산도립병원(현 원광대병원)에 5년간 의료봉사를 하러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이 떠난 뒤, 감명을 받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모임이 한국 퀘이커의 시작이었다.

모임에서 만난 이행우 선생은 1960년 12월 서울에서의 첫 번째 모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퀘이커로 살아온 종교친우회의 산 증인이다. 그는 미국 생활 45년간 미국 NGO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AFSC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평생을 한반도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바쳤다. 이행우 선생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와 수감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지학순 주교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고, AFSC 대표로 방북하고 북한과 교류해온 경험으로 1989년 문규현 신부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행우 선생은 자신이 활동한 AFSC와 함께 대표적인 국제 퀘이커 평화기구인 FCNL(Friends Committee on National Legislation, 국민 입법을 위한 친우위원회), QUNO(Quaker United Nations Office, 퀘이커 UN 사무실)등의 활동을 소개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 단체들은 이미 활동한지 70년도 넘은 국제 로비단체들로 미국과 UN에서는 법률을 검토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행우 선생은 “분쟁지역에서 갈등 양국을 편들지 않는 무조건적 구호활동으로 신뢰감을 쌓은 퀘이커 단체들은 국제회담을 주선하기도 하고, 이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 1960년대 첫 모임부터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 그는 평생 한반도 통일운동과 한국 민주화 인사를 도왔다. ⓒ문양효숙 기자
케이커 모임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제,
개인의 욕구를 넘어서 참 자아와 만난 공동체의 선한 결정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행우 선생은 “퀘이커 모임은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제로 한다”고 말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요?”
“휴회하고 다음 모임으로 결정을 미룹니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반대하면 그 사람이 반대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요. 대신 누군가 발언할 때 경청해야 합니다. 즉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발언을 독차지하지도 않습니다. 명상을 한 후 토론하고요.”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겠네요. 영원히 결정 못 하는 것들도 있을 수 있고요. 지금은 20여 명의 모임이니까 그렇다 쳐도 모임이 100여 명이 되어도 그렇게 결정하나요?”
“그럼요. 서두르지 않아요.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친우회 모임이 커지면 나누기도 합니다.”

의견 일치를 위해 한 세기를 기다린 것도 있다. <퀘이커 300년>(하워드 브린턴, 함석헌 역, 한길사, 2009)의 저자 하워드 브린턴은 1696년부터 흑인노예를 사는 것을 경고해 왔던 연회(1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 격의 퀘이커 모임)가 1776년에 이르러서야 노예를 지닌 사람을 모임에서 제명한다고 선언한 과정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브린턴은 “언제나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진리 전체를 볼 수가 없고, 개인보다 모임 전체가 더 많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며 진리를 깨닫는 주체로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한다. 또한 만장일치체가 권력과 욕망을 넘어서는 방법이라 설명한다.

“얼핏 보아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보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려면 표면에 있는 자기중심의 여러 욕망보다 더 깊은 데 숨어 있는 참 자아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참 자아는 서로 더불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입니다. …… 투표법은 큰 힘이 작은 힘과 맞서서 거기 어떻게 맞춰갈까 하는 억누르기 위한 수단입니다. …… 투표를 하면 대체로 일이 빠릅니다. 하지만 유기적인 자람은 느립니다. 투표법에서 각 개인은 단 하나 또는 일정한 수의 표를 가질 뿐입니다.” (위의 책, 188~190쪽)

퀘이커는 모두 친우(friend)…나이나 신분, 지위와 상관없는 자유로운 교제
절차나 형식보다는 ‘그렇게 사는 삶’을 중요시 여겨

55년 전 처음 친우회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묻자, 이행우 선생은 “누구나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위계가 없는 게 참 좋았다”고 답한다. 옆에 있던 이는 “처음 모임에 왔던 날, 어떤 사람이 ‘하안거 다녀왔다’고 하자, ‘아, 그랬어요?’ 하며 모두 긍정하더라”며 “관용과 인정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퀘이커는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을 ‘벗(friend)’이라고 부른다. 요한 복음서 15장의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는 예수의 말씀에 기초해, 모든 이가 나이나 신분, 지위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서로 교제를 나누는 평등한 관계임을 말한다.

벗(friend)은 회원(member)과 참석자(attender)로 나뉜다. 외국에서 “Are you Friend?”는 “당신은 퀘이커인가요?”라는 질문이다. 회원이 되고자 하면 자신이 참석하는 모임에서 의사를 밝히고 나름의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참석자(attender)라 해도 모임이나 활동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회원이 되면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그저 벗이다.

하지만 퀘이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절차나 형식보다 자신의 내적 인정이며,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1962년에 예순둘의 나이로 미국 퀘이커 학교인 펜들힐에 머물렀던 함석헌 선생이 “이제 퀘이커가 되어야겠습니다” 하고 결심을 밝혔더니, 주변의 퀘이커들이 “당신은 이미 퀘이커인걸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를 잘 드러낸다.



▲ 1960년대 초창기 모임 때의 기념사진. 가운데 함석헌 선생이 있고 그 왼쪽 뒤가 이행우 선생이다. ⓒ문양효숙 기자
신조가 없으니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 정답을 줄 수 없다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찾는 사람(seeker)”



이행우 선생은 “우리는 신조(Creed)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친우(friend)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다 다르다”면서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답을 줄 수 없어요. 단지 자기가 이해한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뿐이지요. 자기가 믿는 것만이 퀘이커라고 하면 잘못됩니다. ‘내가 배운 건 이런 거야. 하지만 미세하게 각자의 삶에서 다 달라’,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다른 사람은 이렇구나’ 해야죠. 경계가 없어야 해요.”

평생을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에게 퀘이커로 배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나는 아직 찾고 있어요.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Seeker(찾는 사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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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정치인 만나다 로비스트로 오해 받기도 - 오마이뉴스

미국 정치인 만나다 로비스트로 오해 받기도

[인터뷰]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자, 이행우 선생

11.06.18 15:50l

최종 업데이트 11.06.18 16:27l

김성수(wadans)

 시상식에서 인사하는 이행우 선생
▲  시상식에서 인사하는 이행우 선생
ⓒ 곽봉수




번 돈 모두 한반도통일운동에 써



1985년 나는 함석헌 선생님을 쫒아서 서울퀘이커모임에 처음 나갔다. 나가고 얼마 안 되어서 한 중년의 재미동포가 서울퀘이커모임을 미국에서 방문했다. 이 중년의 재미동포가 모임에 나올 때는 건장한 사람들이 모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또 모임 집 전화도 잡음이 심했다. 전화도청을 하는 것 같았다.



서울퀘이커모임에 당시 재야인사 함석헌 선생님이 매주 나오시고 전두환 정권하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이 중년의 재미동포는 한 번 서울퀘이커모임집에서 '북한방문기'를 이야기 해주었다. 달변은 아니었고 말씀은 어눌했지만 그 내용은 놀라웠다. 그 중년의 재미동포가 이행우 선생님이고 그와 나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이행우 선생님은 매년 한국을 방문해서 당시 '철없는' 나에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행우 선생님이 1968년부터 미국에 사셨으니 그가 미국에 산 지는 43년이 된다. 미국에서 컴퓨터전문가로 직장생활을 하셨고 65세가 정년인 미국 직장에서 2003년인 73세에야 현업에서 은퇴했으니 그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집 한 채 가진 것이 없다. 미국에서 34년간 컴퓨터전문가로 일한 그지만 가진 재산도 없다.



그는 34년간 컴퓨터전문가로 일하면서 모든 휴가와 돈을 한반도평화통일운동에 썼다. 휴가를 내서 단란하게 가족과 여행가는 대신 그는 자비를 털어 한반도문제를 분석한 보고서를 냈고, 한국의 민주화운동가를 도왔으며, 미국정치인들과 관리들을 수시로 방문했다. 또 중국, 북한, 유럽을 방문해서 조국의 평화통일과 긴장완화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설득했다. 문자 그대로 '공생애'를 산 것이다. 그래서 그를 잘 모르는 한 일본인은 이행우 선생이 '전업로비스트' 인 줄로 오해하기도 한다.



진주목걸이를 이어주는 실 같은 사람



이행우 선생님은 달변가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분석력과 종합력, 거시적 미시적 시각에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보통 분석력이 뛰어난 사람은 종합력이 떨어지고, 큰 그림을 잘 보는 사람은 세밀한 것을 놓치기 쉽다. 그러나 이행우 선생은 이 둘을 다 잘한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무기는 '진실함'이다. 지난 6월 17일 이행우 선생은 제17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았다.



이 기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지난 1주일간 이행우 선생님을 전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자주, 수시로 만났다. 그를 만나면서 이행우 선생님이 아름다운 '진주목걸이를 이어주는 실'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주목걸이가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한 여인의 목에 당당하게 걸릴 수 있는 것은 그 진주 하나하나 속을 관통하여 이어주는 가느다란 '보이지 않는 실' 때문이다. 다음은 이행우 선생님과 지난 일주일간 만나며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먼저 수상을 축하드린다. 그동안 한국 민주화운동, 남북한 긴장완화, 한반도 평화통일에 공헌하셨기에 이번 한겨레 통일문화상을 받았다. 1974년 한국민주화운동인사들의 가족을 돕기 위해 '한국수난자가족돕기회'를 결성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는데 당시 구체적으로 어떻게 민주화운동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도왔는가?

그분들을 위해 송금을 해 주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민주화운동인사들이 거의 수입이 없는 실업상태였기 때문에 재미동포들에게 모금활동을 하여 국내에 돈을 보냈다. 그러나 모금과정에 기부자 이름이 드러나면 동포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동포들 중엔 이에 예민하게 반응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후원금 낸 분들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면서 장부나 재정보고서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시카고의 김00'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



- 박정희 정권의 견제가 있었을 텐데 송금은 어떻게 했나?

초대회장 김순경 박사가 가톨릭교도인 관계로 미국에 있는 가톨릭 메리놀 선교회를 이용했다. 한국에 그 지부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 메리놀 선교회에 돈을 기탁하면 거기서 한국 메리놀 선교회로 보냈고 한국 선교회에선 그 돈을 지학순 주교에게 전달했다. 그러면 지 주교가 수감자나 가족에게 돈을 전달했다. 그러다 보니 수혜자 중엔 가톨릭교도가 많았다. 그래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그 다음번엔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문익환 목사에게 보냈다. 그러면 이번에는 개신교 수혜자가 많았다.



나중엔 함석헌 선생에게 보냈고 함석헌 선생이 지인을 통해서 대체로 균형 있게 수감자나 가족에게 돈을 전달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분들 중에서도 특히 감옥소 앞에서, 시골에서 면회 온 수감학생 가족들에게 직접 돈을 쥐어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 수혜자 중엔 동아투위 기자나 해직교수 등도 있었다. 기부자와 수혜자 명단 등 기록을 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 보낸 액수는 얼마나 되나?

당시 한국에서 가구당 한 달 생활비가 약 100불 정도 필요했다. 최대 많이 보낸 것은 1년에 약 8천불정도였다.



- 북한은 반미감정이 팽배한 국가다. 그리고 AFSC는 미국의 NGO 단체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단체다. 어떻게 이러한 예외적인 일이 가능했는지, AFSC는 어떤 단체인가?

AFSC는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의 약자로 미국퀘이커교 봉사단체다.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터를 찾아다니며, 내 편 네 편을 가르지 않고 구호봉사 활동을 폈다. 이를 평가 받아 AFSC는 194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아마도 그러한 경력이 북한의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AFSC가 북한과 교섭하는 데 7-8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일본 동경에 있는 AFSC 지부가 조총련을 통해서 북한과 교섭하는 한편, 동시에 뉴욕에 있는 퀘이커유엔사무소(QUNO)가 북한유엔대표부를 통해서 북한과 교섭을 시도했다. 이러한 과정에 7-8년이 소요됐던 것이다.



- 1986년 한겨레미주홍보원을 설립, 영문 'Korea Report'를 발간하여 대미홍보와 국제연대 활동을 하셨고, 1987년엔 미국의 지인들과 한국지원연대(Korea Support Network)를 결성,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홍보하셨다. 당시 미국사회나 의회의 반응은 어땠나?

우리가 이 보고서를 발간하기 전엔 한국문제를 분석한 영문 자료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미국 고위관리, 정치인, 학자들이 아주 흥미로워했다. 당연히 우리 보고서는 정말 미국에서 인기가 있었다. 수신자는 미국의 모든 국회의원, 고위관리, 연구소 연구원들이었다. 상황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엔 계간으로, 다음엔 격월간으로, 월간으로 발행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인문사회학을 공부한 한국 분 4-5명이 거의 전적으로 상근하다시피하면서 이 보고서 발간에 온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부었다. 공병우 박사, 임창영 박사, 브루스 커밍스 교수, 정경모 선생 등이 고문으로 애써주셨다. 당시 한국 상황에 대한 영문분석 자료가 없는 풍토에서 우리가 발간한 보고서가 미국사회에 대단히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 북한대표들은 미국 내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들었다. 1988년에 당시 미국주재 북한유엔대표가 선생님 댁에서 머물렀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가?

북한대표들은 미국 내에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뉴욕 콜럼비아 서클 밖 25마일 이상을 벗어날 경우 미 국무성의 허가가 필요하다. 이동의 제약이 많다. 그러나 아무래도 퀘이커들이 10여년 이상 북한과 미국 양국정부로부터 동시에 신뢰를 쌓아서인지 미국정부에서 허가해 주었다. 북한대표들은 우리 집에서 2박 3일을 지내며 여러 가지 대화도 나누었고 이곳저곳을 방문했다.



1989년 문규헌 신부와 함께 방북



- 1982년 AFSC 대표로 방북하셔서 한반도 통일문제, 조미관계 개선문제, 북조선대표단 초청문제 등을 협의하셨다. 그리고 1989년엔 방북한 임수경 학생이 문규헌 신부와 함께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선생님께서도 문 신부와 함께 방북하신 것으로 안다. 그 때 상황을 좀 말씀해 달라.

문규현 신부 방북 이전에 개신교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가톨릭도 방북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당시 문 신부는 미국에 유학중이었다. 그래서 한국 가톨릭에서는 미국에 있는 문 신부를 북에 보내고자 했다. 그래서 문 신부와 한국말이 유창한 미국인 조셉 베네로스 신부(한국이름 배종섭)가 가기로 했는데 초행길이라 북한에 한번 가본 경험이 있는 나에게 함께 가자는 요청이 왔다. 그래서 문 신부, 조셉 베네로스 신부,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함께 방북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직후, 가톨릭교인 임수경 학생의 판문점 귀환 일이 발생했고, 이 일로 문 신부가 다시 방북하여 임수경 학생을 데리고 판문점을 넘어 오게 되었다.



- 89년 당시 북한에 대한 인상이 어땠나?

82년 방북 땐 정말로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생각하는 북한 인민이 많았다. 그런데 89년엔 사회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보였다. 북한을 지상낙원이라 말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 1990년 1차 범민족대회로 세 번째 방북하셨고,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신 것으로 안다. 남한정부는 현재까지도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여긴다. 남한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대한 입장은?

87년에 문을 연 평화연구소의 조성우 소장이 세계평화대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한 데서 범민련이 시작되었다. 재야 평화세력은 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세계평화대회를 조직, 성균관대에서 개최했다. 이런 흐름에 맞불을 놓으려고 노태우 정권도 올림픽 평화대회를 개최했다. 성균관대에서 열린 재야의 세계평화대회가 "범민족대회"를 제안했고, 89년에 남·북·해외(미주, 유럽, 일본) 등이 각각 추진본부를 결성해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90년 6월에 제1차 실무회담이 베를린에서(해외와 북), 7월에 제2차 실무회담이 서울에서(해외와 남), 8월에 제3차 실무회담이 평양에서(해외와 북) 열렸으며, 드디어 8월 15일에 연세대(남)와 판문점(해외와 북)에서 각각 범민족대회를 개최했고, 여기서 "범민련"을 제안하고 합의하여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정부가 태도를 바꿔 범민련을 이적단체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조치다.



- 노태우 정권이 퇴진하고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미국동포운동의 내용과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에서 "미주동포전국협회"를 결성하여 미 의회 로비, 북과의 교류, 동포사회 홍보 등의 활동을 했는데, 이 협회의 결성목적과 당시 느낀 소회나 애로사항은?

미주동포전국협회는 미국 입법부와 행정부를 설득해 한반도 긴장완화에 도움을 주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과거 중국의 '죽(대나무)의 장막'을 개방, 포용할 때라든가 월남전 종식 때라든가 미국 퀘이커들이 중재자 역할을 했는데, 여기서 힌트를 얻어 남북문제에도 미국 퀘이커들이 중재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남북 정책결정자들을 만났는데 양쪽의 의견이 같았다. 그 의견의 요점은 재미동포는 미국정부를 설득하는 활동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북한 측에서도 미국정부를 설득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양쪽의 의견이 이렇게 같았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미주동포전국협회였다. 협회 결성 시 네 가지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다. 표면적인 순서로 보면 먼저 재미동포의 인권과 권리 신장, 미국 내 우리 문화의 보급, 미국 내 소수민족과의 연대와 평화 활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북통일 기여 등이었다. 미국정치인들에게 내용적으로는 로비를 했으나, 로비스트로 등록을 하면 비용이 많이 들어서 등록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교육과 홍보를 위해서 만나고 싶다고 하면서 만났는데, 의외로 미국 정치인들이 잘 호응해 주었다.





 미주연합 회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행우 선생▲  미주연합 회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행우 선생ⓒ 이행우




 미주연합 회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행우 선생

▲  미주연합 회원들과 함께. 가운데가 이행우 선생

ⓒ 이행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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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미주평화통일연구소를 설립했고, 1998년에는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을 설립했는데, 이 기구들의 설립이유, 주요역할, 성과가 무엇이었나?

미국운동의 중심과제가 통일문제로 옮아가자 이론의 개발이 절실했다. 이에 따라 1995년에 미주평화통일연구소(98년 통일학연구소<한호석 소장>로 개편)를 설립했다. 또 북미주조국통일동포회의(1998년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으로 확대)를 결성했다. 말한 대로, 이론적 뒷받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북 및 해외 동포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들을 얻고 있다. 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은 주로 남북의 통일운동단체들과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



- AFSC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바 있고, 그래서 한국인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천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니다. 추천하지 않았다. 퀘이커들은 정치인을 노벨평화상후보로 추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그러나 1979년과 85년엔 함석헌 선생을, 1992년엔 문익환 목사를 추천한 바 있다.



- AFSC 아시아지역위원회, 국제실행위원회, 예산위원회 위원으로 24년간 활동 하였고, 또한 앞에서 말한 단체 등을 통해 미국 사회의 행정부, 입법부에 대화통로를 마련하신 바 있다. 한반도 통일문제, 북한문제,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꾸준히 일해 오면서 대북관계에 대해 미국정치인들과 고위관료들의 대응방안이나 태도를 보셨는데 어떻게 평가하는가?

공화당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고 민주당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다. 이들은 다 한반도 문제를 잘 아는 전문가들이다. 공부를 많이 한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남북의 평화통일을 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냉철한 국익 우선주의자들이다. 똑바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한국의 미래는 이들 손에 놀아날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한국이 잘되는 길이 미국이 잘되는 길이고 미국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설득했다.



"미 한반도전문가들 자국이익 우선...정신 차려야"



- 선생님의 노력과 주도로 2004년 미 의회에서 1차 남북미 3개국 의원포럼을 개최했고, 그 후 2009년과 2010년에도 2, 3차 남북미 3개국 의원포럼을 개최했는데 그 주요내용은 무엇이고 포럼의 성과를 평가한다면?

미 의회의 협조 또는 상원 외교위원장 초청 형식으로 한반도 문제에 관한 포럼을 여러 차례 조직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2004년 7월 20일 미 의회에서 처음 열린 3개국 의원포럼에는 남측에서 이창복, 장영달, 강혜숙, 김재윤, 서병열 의원, 북측에서는 박길연 대사, 한성렬 부대표, 미국 측에서는 Joe Biden(현 부통령), Curt Weldon 의원, 민간전문가로서는 Donald Gregg(전 주한 미대사), Don Oberdorfer, Marcus Nolans, Jack Prichard, Richard Solomon, Jon Wolfsthal, 박한식 등이 참여했다.



2009년 9월 14일과 2010년 7월 27일의 포럼에는 한국 측에서 백낙청, 오재식, 박원순, 이문숙, 김상근, 정현백, 김연철 등이, 미국 측에서는 Eni Faleomavaega, Joel Wit, John Feffer, Frank Jannuzi, Keith Luse, Scott Snyder, Karin Lee, J.J. Ong, John Park, Dennis Halpin, 오인동 등이 참여했다.



행사를 일부러 의회에서 하고 정치인들을 초대했는데 우리 의도는 한반도 문제가 언론의 관심과 주목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우리 계산은 적중했다.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참여하는 포럼이라 미국, 한국, 중국, 일본의 언론인 40명 정도가 와서 취재경쟁을 했다. 그리고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언론에서 우리 포럼을 크게 다루었다.



또 다른 우리의 목적은 미국 입법부를 통해 대북강경 정책을 취하고 있던 행정부를 견제하고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 그 덕인지 당시 경색되어 있던 북미관계가 완화되고 북미 간 대화창구 개통에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한다.



-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미 의회와 정책담당자에게 로비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어려움과 또 보람은 무엇이었나?

미국 관리와 정치인들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정치인들은 '돈'이나 '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인데, 나는 이 둘 다 없기 때문이다. 내가 취한 방법은 그들을 수시로 방문하는 것이었다. 1년에 20회 이상 의회를 방문한 적도 있다. 그러다보면 그들과도 친해진다. 휴대폰 번호, 나중엔 집전화번호도 준다. 그것은 언제든지 심지어 주말에 연락해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려면 몇 년 걸린다. 아마 내 나이가 자기 아버지 나이라 인간적으로 미안해서 그런 것 같다. 하여간 나중에 친해지고 맘도 통해서 남북문제 이야기를 하면 진지하게 경청한다. 보람은 바로 그들에게 남북문제를 이해시키는 것이고 그들이 내 말에 동의할 때다.



- 선생님 좌우명은?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지향하기 위해 한국 정부에 주고 싶은 조언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절대로 미국이나 주변 나라들이 남북을 위해 나서지도 않고 해결해 주지도 않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를 규정해온 어설픈 국제관계론이나 한미혈맹론의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지난 100년간 외세의 영향을 받아왔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나서서 우리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나는 우리 민족이 반드시 풀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에 우리의 힘과 능력을 확인했다. 우리도 우리 힘으로 우리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 위대한 힘과 의지를 다시 찾아 발휘해야 한다. 다가오는 총선과 대통령 선거가 중요한 까닭이다. 보수특권정당의 집권은 그들의 본색을 확연히 드러냈다. 평화와 통일지향적인 세력이 다시 집권하여 10년 동안 발전시켜온 역량과 성과를 되찾아 확실하게 구조적으로 매듭을 지어야 한다.



나의 좌우명은 역행(力行)이다. 힘써 행하라! '지금 여기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당장 여기서 필요한 일을 성심성의껏 부족한 대로라도 온힘을 다 해 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이행우 선생의 미주민족운동의 오랜 동지이며 시사평론가인 은호기 선생의 말로서 이 기사를 맺는다.



"이행우는 검소하고 성실하며, 옳은 일에 대한 주장을 확실히 하면서도 타협점을 찾는데 인색하지 않다.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일하는 편이며, 일의 성과를 나타내는 데에는 매우 절제적이다. 그의 성품이기도 하지만 퀘이커 교인의 정신이기도 하다."



** 이행우 선생: 1931년 1월 3일 전북익산 생. 1955년 서울대 물리과대학 수학과 졸업, 그 해에 해군장교에 임관, 해군사관학교에서 수학 교수. 1957년 군복무를 마치고 이리 남성고등학교, 서울 동북고등학교, 숭문고등학교에서 수학 교사, 한양대학교 출강. 종교는 퀘이커교. 1968년 미국퀘이커교단 초청으로 유학, 퀘이커교육기관인 펜들힐(Pendle Hill)에서 일 년간 퀘이커교에 대하여 공부. 공부를 마치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정착, American Bank(1969-1979), Burroughs Corp.(1979-1980), Polymer Corp.(1980-1986), Delaware Investments(1986-2003) 등에서 Systems Analyst로 근무.


16 한국퀘이커 - RE: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고기교회 - RE: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RE:퀘이커, 내면의 빛을 찾아가는 평화주의자
하늘기차 | 2016.11.29 18:48 | 조회 1068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새해를 맞아 3회에 걸쳐 익숙한 듯 낯선 종교를 찾아갑니다. 다른 국가에서는 활동도 활발하고 역사도 오래 되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모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흔히 만나기는 어려웠던 종교, 한국인의 문화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종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새해에 처음으로 만난 종교는 종교친우회, 즉 퀘이커 서울모임입니다.


▲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후문 인근에서 50년째 계속된 퀘이커 서울모임 ⓒ문양효숙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후문을 지나 주택가 골목 막다른 곳에 이르자, 녹색 대문을 단 오래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널찍한 방 안에 십여 명의 사람이 둥글게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앉아 있다.

시작을 알리는 어떤 신호도 없이, 앉은 이들은 함께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누군가 자연스레 말을 꺼낸다.

“지난주 강정 후원 음악회와 밀양 유한숙 씨 추모 미사에 다녀왔어요. 신앙이라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계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침묵. 잠시 뒤 다른 이가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주제는 민주주의, 권력, 마리아의 찬미. 긴 침묵 끝에 나누는 이야기들은 예상보다 훨씬 정치적인 내용이다. 한 시간이 지나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함께 일어나 손을 잡고 원을 만들더니 인사를 나눈다.

벌써 50여 년째 일요일 오전 11시면 이 아담한 집에 모이는 이들은 종교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즉 한국 퀘이커(Quaker)들이다.



17세기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형식적 예배에 반대해 시작된 퀘이커,
신비주의 전통에서 ‘직접 체험하는 하느님’을 강조

퀘이커는 17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됐다. 창시자로 알려진 조지 폭스(George Fox)는 당시 영국 공교회 성직자의 부패와 타락, 형식적 예배 등에 반대하며 모든 인간에게 ‘내면의 빛(Inner Light)’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교리에 앞서 신앙의 체험을 중요시했고, 하느님의 신성을 직접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전통을 받아들이며 성직자 없는 평등한 모임을 시작했다. ‘퀘이커’란 ‘하느님 앞에 전율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초기에는 조롱하는 의미의 별명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제도가 지니는 경직성을 거부한 퀘이커 모임은 형식이 없는 게 특징이다. 이들의 모임에는 성직자도 없거니와 ‘준비’도 없다. 그저 ‘내면의 빛’에 인도되길 바라며 침묵할 뿐이다. 퀘이커 모임에서 침묵은 ‘말에 의지하지 않는 기도’이며,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깊은 내면에 도달하기 위한 시간이다. 이런 비움과 경청의 시간 속에서 빛이 주는 무언가에 감화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깨달음을 벗들과 나눈다. 이날 모임에서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였지만, 평상시 나눔은 성서 묵상, 일상의 이야기, 시, 노래 등 방법과 내용에서 매우 다양하다고.

하지만 퀘이커의 침묵은 오롯이 개인의 몫인 것은 아니다. 1960년대 퀘이커가 된 함석헌 선생은 퀘이커의 명상이 동양의 참선과 다른 점을 ‘공동체성’이라고 강조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지요.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 ‘The voice of Ham Sokhon’, Freinds Journal, 1984)

곽봉수 씨는 처음 모임에 참석 했을 때 “함께하는 침묵 가운데에서 느꼈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1983년 <마당>지에 실렸던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퀘이커 모임을 찾은 이래 꾸준히 모임을 지키고 있다.


▲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이 모든 친우(friend)가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문양효숙 기자


교리도 신학도 없지만, 단순 · 정직 · 평화 · 평등의 원칙 지켜야
신앙과 삶의 실천은 분리될 수 없어

공동체성과 더불어 퀘이커의 중요한 원칙은 단순, 정직, 평화, 평등이다. 퀘이커는 형식이나 교리는 없지만, 이런 것들이 진리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 믿는다. 곽봉수 씨는 “퀘이컬리(Quakerly)란 말이 있다”고 설명했다.

“‘퀘이커다운’이란 의미인데요, 예를 들면 평화 선언을 반대하는 사람은 퀘이커가 아니에요. 전쟁을 옹호하면 퇴출시키죠. 닉슨 대통령도 거짓말을 해서 퇴출됐어요. 정직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한 거니까.”

체험적 신앙을 중시하는 퀘이커에게 이런 원칙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퀘이커들은 소리 없이 강정마을을 후원하고, 대한문 미사에 간다. 얼마 전에는 종교친우회 서울모임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씨알여성회 상임이사인 곽라분이 선생은 “이름을 내놓지 않을 뿐, 늘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한다’에서 ‘우리’보다는 ‘한다’에 더 중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나’뿐만 아니라 ‘퀘이커가 한다’는 자국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아요. ‘우리’가 드러나는 것보다 힘을 보태는 게 중요하지. 그러니 이슈에 더 집중해요. 그게 우리 성향이죠. 퀘이커는 아주 조용히 일해요. 그러면서도 가장 진보적이죠. 역사적으로 보면 노예해방 문제, 감옥 개선 문제, 여권운동 등을 아주 초기부터 해왔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무엇이 있다(That of God in everyone)’는 퀘이커 신앙은 자연스럽게 평등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초기부터 남부 흑인노예를 북쪽으로 탈출시키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운동을 비롯해 여성참정권 운동, 교도소시설 개선운동 등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퀘이커는 전쟁을 반대하고 분쟁지역의 복구 및 재건사업을 돕는 등 평화를 위한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 · 2차 세계대전에서의 구호 및 복구활동에 힘입어 1947년 퀘이커 단체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미국 친우 봉사단)는 개인이 아닌 단체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초창기 친우 이행우 선생, 미국 퀘이커단체에서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함께해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퀘이커도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전북 군산도립병원(현 원광대병원)5년간 의료봉사를 하러 온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이 떠난 뒤, 감명을 받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모임이 한국 퀘이커의 시작이었다.

모임에서 만난 이행우 선생은 1960년 12월 서울에서의 첫 번째 모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퀘이커로 살아온 종교친우회의 산 증인이다. 그는 미국 생활 45년간 미국 NGO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AFSC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평생을 한반도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바쳤다. 이행우 선생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인사와 수감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메리놀 선교회를 통해 지학순 주교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고, AFSC 대표로 방북하고 북한과 교류해온 경험으로 1989년 문규현 신부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행우 선생은 자신이 활동한 AFSC와 함께 대표적인 국제 퀘이커 평화기구인 FCNL(Friends Committee on National Legislation, 국민 입법을 위한 친우위원회), QUNO(Quaker United Nations Office, 퀘이커 UN 사무실)등의 활동을 소개했다. 우리에게 생소한 이 단체들은 이미 활동한지 70년도 넘은 국제 로비단체들로 미국과 UN에서는 법률을 검토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행우 선생은 “분쟁지역에서 갈등 양국을 편들지 않는 무조건적 구호활동으로 신뢰감을 쌓은 퀘이커 단체들은 국제회담을 주선하기도 하고, 이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 1960년대 첫 모임부터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 그는 평생 한반도 통일운동과 한국 민주화 인사를 도왔다. ⓒ문양효숙 기자




케이커 모임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제,
개인의 욕구를 넘어서 참 자아와 만난 공동체의 선한 결정을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행우 선생은 “퀘이커 모임은 모든 결정을 만장일치제로 한다”고 말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요?”
“휴회하고 다음 모임으로 결정을 미룹니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반대하면 그 사람이 반대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요. 대신 누군가 발언할 때 경청해야 합니다. 즉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발언을 독차지하지도 않습니다. 명상을 한 후 토론하고요.”
“시간이 엄청나게 걸리겠네요. 영원히 결정 못 하는 것들도 있을 수 있고요. 지금은 20여 명의 모임이니까 그렇다 쳐도 모임이 100여 명이 되어도 그렇게 결정하나요?”
“그럼요. 서두르지 않아요.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친우회 모임이 커지면 나누기도 합니다.”

의견 일치를 위해 한 세기를 기다린 것도 있다.
<퀘이커 300년>(하워드 브린턴, 함석헌 역, 한길사, 2009)의 저자 하워드 브린턴은 1696년부터 흑인노예를 사는 것을 경고해 왔던 연회(1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 격의 퀘이커 모임)가 1776년에 이르러서야 노예를 지닌 사람을 모임에서 제명한다고 선언한 과정을 기록했다. 이 책에서 브린턴은 “언제나 어떤 사람도 혼자서는 진리 전체를 볼 수가 없고, 개인보다 모임 전체가 더 많이 진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며 진리를 깨닫는 주체로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한다. 또한 만장일치체가 권력과 욕망을 넘어서는 방법이라 설명한다.

“얼핏 보아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 여겨지는 것보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하려면 표면에 있는 자기중심의 여러 욕망보다 더 깊은 데 숨어 있는 참 자아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맨 밑바닥에 있는 참 자아는 서로 더불어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아입니다. …… 투표법은 큰 힘이 작은 힘과 맞서서 거기 어떻게 맞춰갈까 하는 억누르기 위한 수단입니다. …… 투표를 하면 대체로 일이 빠릅니다. 하지만 유기적인 자람은 느립니다. 투표법에서 각 개인은 단 하나 또는 일정한 수의 표를 가질 뿐입니다.” (위의 책, 188~190쪽)



퀘이커는 모두 친우(friend)…나이나 신분, 지위와 상관없는 자유로운 교제
절차나 형식보다는 ‘그렇게 사는 삶’을 중요시 여겨

55년 전 처음 친우회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 묻자, 이행우 선생은 “누구나 평등하게 이야기하고, 위계가 없는 게 참 좋았다”고 답한다. 옆에 있던 이는 “처음 모임에 왔던 날, 어떤 사람이 ‘하안거 다녀왔다’고 하자, ‘아, 그랬어요?’ 하며 모두 긍정하더라”며 “관용과 인정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퀘이커는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을 ‘벗(friend)’이라고 부른다. 요한 복음서 15장의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는 예수의 말씀에 기초해, 모든 이가 나이나 신분, 지위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서로 교제를 나누는 평등한 관계임을 말한다.

벗(friend)은 회원(member)과 참석자(attender)로 나뉜다. 외국에서 “Are you Friend?”는 “당신은 퀘이커인가요?”라는 질문이다. 회원이 되고자 하면 자신이 참석하는 모임에서 의사를 밝히고 나름의 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참석자(attender)라 해도 모임이나 활동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회원이 되면 공식 회의에 참석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다.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그저 벗이다.

하지만 퀘이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절차나 형식보다 자신의 내적 인정이며, 진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1962년에 예순둘의 나이로 미국 퀘이커 학교인 펜들힐에 머물렀던 함석헌 선생이 “이제 퀘이커가 되어야겠습니다” 하고 결심을 밝혔더니, 주변의 퀘이커들이 “당신은 이미 퀘이커인걸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를 잘 드러낸다.

▲ 1960년대 초창기 모임 때의 기념사진. 가운데 함석헌 선생이 있고 그 왼쪽 뒤가 이행우 선생이다. ⓒ문양효숙 기자

신조가 없으니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 정답을 줄 수 없다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찾는 사람(seeker)”
이행우 선생은 “우리는 신조(Creed)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친우(friend)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다 다르다”면서 “그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누구도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에 대하 정답을 줄 수 없어요. 단지 자기가 이해한 퀘이커리즘이 무엇인가를 표현할 뿐이지요. 자기가 믿는 것만이 퀘이커라고 하면 잘못됩니다. ‘내가 배운 건 이런 거야. 하지만 미세하게 각자의 삶에서 다 달라’, ‘나는 이렇게 보지만 다른 사람은 이렇구나’ 해야죠. 경계가 없어야 해요.”

평생을 퀘이커로 살아온 이행우 선생에게 퀘이커로 배운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무엇인지 물었다.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나는 아직 찾고 있어요. 퀘이커는 기본적으로 Seeker(찾는 사람)니까.”





평화교회 퀘이커로부터 평화목회에 대한 단상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대표


필자가 퀘이커와 인연을 맺은 것은 90년대 중반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이행우 선생님(현재 자주평화통일미주연합 고문)을 통해서이다. 자주연합단체의 활동을 하면서 이 선생님을 통해 함석헌 선생님과 퀘이커활동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해외봉사사무실인 미친우봉사회(AFSC)에도 들려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특히 관심의 동기가 되었던 것은, 아이들을 퀘이커 학교(Friends School)에 보내면서 거기서 폭력에 대응하는 철저한 교육, 아이들 인격존중과 평등에 대한 관점이 교사나 프로그램 속에 배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가 학위가 끝나가는 마지막 해 2001년 나 자신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선생님을 통해 필라델피아 남쪽, Wallingford에 소재한 퀘이커 교육기관이자 수련공동체인 펜들힐(Pendlehill;www.pendlehill.org)에서 가을학기를 보내게 되면서 평화교육에 관한 결정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생활하면서 내게 남겨진 인상적인 몇 가지 체험과 신학적 관점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적으로 본인이 펜들힐에 들어가고 나서 두 주 만에 9.11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 날은 논문 최종 본을 내는 날이어서 아침에 템플대 캠퍼스에 갔다가 학생들이 경악을 하면서 모든 학생들이 TV를 지켜보고 계속 전화를 사방으로 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각각 1시간에서 2시간 거리쯤의 위치에서 북으로는 뉴욕에, 서부 펜실베니아에 그리고 남쪽 워싱톤에 비행기가 각각 떨어지면서 가운데 위치한 필라델피아의 학생들에게도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당시 펜들힐에서는 지역사회에 매우 유명하면서도 영향력이 강한 일련의 공개강연회를 매 학기마다 해 오고 있었다. 이미 2년 전에 기획되고 1년 전에 주제와 강사가 섭외되는 이 공개강연회의 당시 주제는 “퀘이커와 돈”이었었고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맘모니즘에 대항한 대안적 삶에 대한 것이어서 꽤나 기대가 큰 주제였다.

그러나 9.11사태가 터지자마자 펜들힐은 이 주제를 즉각적으로 취소하고 이슬람에 대한 주제로 바꾸면서 미국내 및 해외의 이슬람 학자와 활동가, 이슬람권과 관계된 평화운동가 등으로 전면 교체하였고 이슬람과 관련된 주제가 다음 학기까지 지속되었다. 대게 참석자들은 처음엔 퀘이커들이 많았으나 보통 100-200명이 모이던 숫자가 여러 지역사회의 관심 있는 사람들로 인해 넘치면서 그 장소를 옮겨 대대적인 모임과 더불어 종교적 타자(religious Others)인 이슬람권을 알고자 하는 열정과 더불어 미국의 헤게모니 정책에 대한 각종 반대운동의 결성을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이것이 대단한 충격인 이유는 당시 9.11충격으로 집집마다 성조기가 날리고, '적'에 대한 날카로운 국가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어서 성조기없는 집은 이웃으로부터 테러를 당할 분위기였던 상황속에서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퀘이커 모임에서는 이념, 종교, 인종에 관계없이 고통 받는 타자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하는 게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놀라움으로 보게 된 것이다. 월남전중에 상선을 구입해서 구호물자를 베트남에 보내다가 미국함대가 이를 막고자 했던 사건이며, 20여 년 전에 이미 북한에 들어가 활동을 가장 먼저 종교기관으로서는 북과 접촉을 가진 곳도 퀘이커 단체였다. 17세기 중엽, 이미 미국의 퀘이커들은 흑인노예제에 대한 반대운동을 실시하고, 위원회를 두어 신도들을 찾아다니며 노예를 풀어줄 것을 권고하고 이것이 시행이 안 되자 연회에서 강제로 흑인노예주들에 대한 멤버쉽을 박탈시켜 퀘이커 숫자가 반으로 주는 일까지 감수하였다. 비록 전 세계에 현재 30만 밖에 안 되는 숫자이면서도 갈등해결과 지역빈민구제활동, 비폭력저항운동, 인권을 위한 정책로비활동, 국제구호와 국제연대, 평화활동, 그린피스운동의 경우처럼 녹색활동 등에서 독보적인 위치와 공헌을 하고 있는 데에는 이들이 가진 독특한 신앙관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창시자 조지 폭스(George Fox)가 1656년 론세스톤(Launceston)의 감옥에 있으면서 쓴 편지의 몇 단어를 차용하여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 “모든 이에게 있는 하느님의 그것에 응답하기(Answering that of God in everyone)"- 퀘이커란 하느님의 영에 의해 진동을 하는 자란 뜻이다. 퀘이커는 모든 인간은-남/여, 노/소, 정상인/장애우, 백인/흑인/황인, 신앙인/비신앙인을 막론하고 - 누구나 “하느님의 그것”이라 부르는 “신적인 빛,” “그리스도의 빛” “내적인 빛”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존중되어야 하며, 특별한 엘리트나 권위자에 대한 경칭을 갖지 않는다. 그러기에 성직자가 없으며 모두가 친우(friends)로 불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이 내면에서 흘러나온다. 타 종교에 대한 존중과 관심에 의한 종교 간의 대화가 이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이러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펜들힐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학습자와 강사(instructor)간에 구별이 없으며, 강사의 경력이나 질로 보면 수십 년간을 그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으로서 각자가 독보적인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겸손함과 마음에서 우러나는 따사로움과 인격적인 친밀성이 두드러진 특성임을 느끼게 된다. 무슨 결정을 할 때도 소수자의 신적인 빛을 이해하여 다수결로 정하지 않고 동의과정이라는 독특한 방식에 의해 전원합의의 전통이 수백 년간 지속되고 있다. 결정을 전원동의를 통해 한다는 사실은 외부인에게는 매우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내부로 들어와 그 과정을 보면 전원동의가 얼마나 강력한 신뢰의 서클을 형성하고 또한 행동에 단호한 힘을 발휘하는지 놀라게 된다. 퀘이커학교(Friends School)의 교실에서는 아이가 장애우이어도 교사와 지도자의 역할을 할 때가 있고, 어떠한 강제도 없으며, 어울림이 매우 자연스럽고 친밀한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어떤 갈등에 대해서도 아주 조심스럽고도 끈질기게 그러나 '나쁜 행동한 자'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에 집중하며 학부모와 학생들이 공동으로 대처하는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충격을 받곤 하였다.

우리의 예배처[교회]이자 모임장소로서 '모임집(Meeting House)'의 구조는 매우 간단하다. 평등의 원칙을 고려하여 가운데 빈 공간을 중심으로 한 팔각형내지 사각형의 의자 배치와 어떠한 성물-십자가, 촛대, 설교단, 성가대-도 없다. 이들 형식적인 것 모두가 신적인 빛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단지 각자는 조용히 모여 침묵기도를 드리며 어느 누군가가 성령의 감흥을 받고 그것을 말할 수 밖에 없다고 느끼면 전체를 향해 말하게 된다.

펜들힐의 공동생활에 참여하면서 느끼는 것은 말, 기도 혹은 노래 어떤 형식이든 가슴에서 울려 터져 나오는 그 메시지는 매우 직접적이고 강력하며 함께 모두의 가슴이 울리는 듯한 반향을 일으켜 매우 감동적이곤 한다. 혹은 감흥이 없을 때는 기다리다가 침묵으로 마치게 된다. 이런 형태를 통해 각자는 개인의 내적 수행(individual practice)을 통해 신께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의 내적 감흥에 자신도 울림을 받으면서 공동체적 수련 (communal practice)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선과 같으면서도 다른 것은 침묵이 있지만 깨달음/구원/계시의 통로는 관계적이고 공동적이라는 사실이 다르다.

침묵명상기도는 성령, 신적인 빛의 자유롭고 능동적인 역사를 위해 나의 활동, 나의 에고활동을 중지시킨다. 그러나 이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침묵의 시간을 갖을 때 이는 또한 ‘나의 말함’을 멈추고 미세할지라도 ‘타자의 음성 voices of Others'을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신적인 빛이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빈 공간을 허락할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퀘이커에게 있어서 영성은 말하기 보다는 들음이 영성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들음의 영성으로 인해 이들의 영혼이 다른 이들보다 얼마나 여리고 예민한지 느끼게 된다. 침묵이 단순히 내면의 고요만이 아니라 그동안 듣지 못한 타자의 음성이 나에게 말 걸게 오도록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정적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앙의 역동적 개입(engagement)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 “진리를 위해 용감해지기(Be valiant for the Truth)" - 진리는 단순히 추상이나 이해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는 확신(convincement)과 관계된 것으로, 그렇게 도달하고 견고히 지켜나가야 할 삶의 방식이다. 위의 “모든 이에게 있는 하느님의 것에 응답함”이 신적 빛의 경험(experience)과 존재에 관련된 것이라면 “진리를 위해 용감해짐”이란 "공개적으로 그 빛에 의해 걸어감(walking in the Light publicly)"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국가나 지배자에 대한 어떤 맹세니 징집문제에도 거부하고, 세상에 어떤 타협을 하지 않는 이유이다.

퀘이커 신앙에는 신적 빛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사회적 증언(social witness)이 분리되지 않는다. 펜들힐에는 영성을 위한 프로그램(치유기도, 성서연구, 신학...)등과 더불어 사회적 증언을 위한 프로그램 (폭력과 갈등대응, 지역빈민구호, 파트너쉽과 능력부여...)이 동시에 존재한다. 평화의 증언은 퀘이커 역사에 오래된 것이다. 장소, 혀, 펜 그 무엇이든 주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면 아끼지 않는다. 따라서 감옥이나 자기희생이 따를 지라도 진리일 경우에는 목숨을 거는 증언자가 되는 것이다. 상업에 있어서도 주변에서 누군가가 퀘이커라 할 때 그의 정직과 신용은 의심하지 않게 된다. 정찰제를 역사상 가장 먼저 도입한 무리가 퀘이커이며 퀘이커 상점에 대한 주변이웃의 신용은 확고하다.

* “모범이 되기(Be patterns, be examples)" - 진리에 대한 경험은 모범을 만드는 실험(experimental)을 강화한다. 이들은 선교(mission)이란 말을 안 쓰고 봉사(service)란 말을 선호한다. 따라서 세속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인권을 높이고 하느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누룩처럼 전위적인 일들을 만들어 낸다. 그 예가 감옥에서의 각종 자원 활동, 정신병동의 개선, 중재, 아동치유학교, 대안교육공동체운동, 평화활동이 그것이다. 모범이 되는 것에는 남들이 안한 가장 그늘진 곳을 먼저 찾아가서 삶의 예가 되는 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일단 정신병동이든 인권활동이든 먼저 모범을 보이고 다른 단체, 다른 기관들이 그 중요성을 깨닫고 동참하여 그 분야에 운동이 일어나면 과감하게 다른 그늘진 곳을 찾아 간다. 지금까지 수년간 쌓아놓은 기득권, 먼저 차지했으니 우리를 존중해달라는 그 어떤 표시도 없이 자신들의 공로를 남기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들이 퀘이커라는 신분도 이야기 하지 않고 오직 인류와의 연대, 공공의 선에 기여한 것으로 만족한다. 북한에 외부단체로서는 가장 먼저 들어간 퀘이커의 봉사활동은 아직도 북의 파트너는 해외구호단체가 와서 봉사를 하는 것으로 알지 퀘이커(그들의 신앙, 종교)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이렇게 퀘이커는 일을 함에 있어서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없이 타자를 일에 함께 관여시키는 방식을 통해 소유권이나 멤버쉽의 배타성을 주장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펜들힐의 교육이 종교적 타자인 누구에게나 열어 놓고 있는 것이 그 예이며, 수많은 퀘이커관련 봉사기관에 타 신앙인이 직원으로 와 있고 네트워크 활동에 과감히 이들 타자들과 더불어 활동하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봉사는 어느 특정한 공동체로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느님의 목적에 봉사하도록 지향한다. 즉 봉사는 진리를 널리 전파하고 인류를 생명으로 모으는 (“spreading the truth abroad...gathering up into the life") 것이며, 이들의 다양성을 존중함과 더불어 신의 생명과 능력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개신교들이 선교라고 부른 것에 대응하는 퀘이커의 봉사의 활동의 근본태도인 것이다.

모임집(우리의 교회에 해당)에서 상징화된 한 가지 생활방식은 또한 단순성(simplicity)에 대한 신앙실천-절제와 소박한 삶-에 대한 것이다. 과잉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옷, 소유물, 먹거리에서만 아니다. 퀘이커는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는다. 필자가 평화운동하면서 몇 가지 프로그램할 때 재정이 없어 쩔쩔매다가도-국가폭력에 대한 민감성 때문에 퀘이커는 정부돈을 받지 않는다- 어느 때 펀드가 들어왔다고 해서 그 출처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누군가 죽고서 기부가 들어왔다가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일처럼 말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수백년의 박해기간동안 국가로부터 재산박탈을 통한 생존과 그 박해받아 감옥에 들어가거나 남겨진 가족들 혹은 다른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같이 나눠야 했던 생활습관을 통해 이러한 소박한 삶과 자발성은 철저히 몸에 배여 있다. 그 예중의 하나는 평화 프로그램에 자원봉사를 통해 일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고, 퀘이커는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어느 나라 어느 집에 몇 명이 어느 기간동안 무료로 숙박을 할 수 있는지-보통은 여행자가 최소한의 실비를 자진해서 사례하는 경우가 많다- 네트워크가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중독으로부터 단순성의 실천은 대안적인 삶과 서로 돌보는 삶을 목표로 한다.

10년 동안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퀘이커 펜들힐에서 한 학기를 보내면서 마무리 될 수 있게 된 것은 내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동안 따라온 허무주의와 내적인 고통이 정리되고 꼭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됨으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실존적 교리로서 성육신 -let your life speak-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내 생으로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확신이 그것이다. 진리를 자기 삶으로 실험해야 한다는 사실은 평화교육운동을 하는 내게 있어서 근본체험으로 다가온 것이다.

진실을 찾는 벗들에게 (함석헌저작집) 함석헌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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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찾는 벗들에게 (함석헌저작집)

함석헌 지음
2009-03-13 | 한길사 刊
국판 | 반양장 | 620 쪽 | 20,000 원
978-89-356-6072-8 | 04800



친구, 친구! 없어요. 죄를 사하고 나를 일으켜주는 사람만이 친구인데 없나봐요. 나는 한 사람이 필요해요. 내 맘을 알아줄, 붙들어줄 한 사람! 예수가 있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예수 무얼 해요. 산피가 도는 구체...














친구, 친구! 없어요. 죄를 사하고 나를 일으켜주는 사람만이 친구인데 없나봐요. 나는 한 사람이 필요해요. 내 맘을 알아줄, 붙들어줄 한 사람! 예수가 있다 하지만 성경에 있는 예수 무얼 해요. 산피가 도는 구체적인 예수만이 나를 위로하고 사하고 살리지. 없나봐요. 지금 내 방엔 아무도 없어요. 나 혼자! 안 형도 여기 없으니 이 편지지. 내 소원은 장발장이 되는 일. 그거 못 되면 삼손이라도! 죽으면서도 대적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러려면 참사람 소년이 나를 이 현 질서를 버티는 기둥까지 인도를 해주어야지. 나는 죽어 마땅해. 이 죽음이라도 이용하잔 말이야. 내가 죄는 지었지만 내 생각은 그래도 페스탈로치 모양 저 나무에 있어! 나는 불시로 떨어지는 병든 과일이지만 이거 썩어서라도 그래도 나를 길렀던 저 나무를 가꿔보잔 생각이오. 말이 아니 된 소리지, 말 아니 된 소리. 의형들은 아니 들을 거야, 아버지나 듣지. 아 형! 내 맘을 형용할 길 없습니다. 내일로 나를 벌하자는 사람들이 사회문제를 일으켜 영 매장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아멘! 미국을 가겠는지 독일을 가겠는지. 전재호신의全在乎神意.
형, 나를 버리시오. 그러나 자세히 듣고 보기나 한 후에.
●「젖을 내라는데 어미가 썩었소」



-




1
<안병무 님>
서로의 영이 살기 위해 주고받는 것
낡은 제도에 새 정신을
인 이야기
새 출발 기회 얻자는 것
마음의 정화 위해
젖을 내라는데 어미가 썩었소!
재기 신생
맘속에 명령을 받아야
인간적인 참, 하나님의 참
미국에서
내 맘이 나를 허하느냐 못 하느냐
세계의 새 종교운동과 평화운동
좀더 튼튼히 보고 생각을 새로이
유럽여행 계획
우선 안 형 논문부터
안 형 일에 방해 안 되도록
이번 길에 될 수록 볼 것 다 봐야
우선 런던으로
돌아가면 싸워야지
장차 올 것에 대한 준비
살아 있는 이 시간에
여정이 자꾸만 늦어집니다
이제 정말 가까이로 갑니다
런던 도착했소
나 자신이 나를 심판
그 나라 역사 있는 데
신흥국가를 보고 싶군요
공부 방해해 미안하오
참인물이 있다면
우리 일은 나로서 해결
건강이 걱정이군요
몸은 튼튼해졌소
민중이 정부를 신용 아니 합니다
비폭력 국민운동으로 민정 수립
민중이 일어서야
민중 계몽, 새 세력 육성
차라리 말하다가 죽기나 했으면
로스앤젤레스에서
안병무박사(安病無迫死)

<이준묵 님>
새 맘 되어 돌아가고 싶소
당나귀 되지 마셔
하늘나라 문을 교회당이 막았어
나라 못 일어서면 삼천만이 다 앉은뱅이
퀘이커 국제워크캠프
일반주민들과 접촉 있기를
워크캠프 건
속에 있는 것을 다 말할 친구
씨알 속에서 나를
인생의 끝은 차차 가까워 저쪽이 뚫려 비치는데
우리는 왜 이래야 합니까
혼자서 생각을 해남으로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예정대로
벗을 불러 하늘나라의 잔치를
마음만 서로 활짝 열린다면야
이 고난의 뜻

<이두수 님>
텅 빈 성전 안에는 하나님만

2
안반덕 씨알농장 일꾼들께
의(義)의 싸움 다 싸우고 기쁘게 만나는 날

<문대골 님>
여러 날이 지났소
감자는 될 수록 종자를 많이
소 건은 어떻게 됐소
소는 꼭 찾도록
한 푼도 두고 오지 못해 마음이
굶지나 않나 걱정
얼마나 힘들고 적적하오
송아지는 샀는지
대체 살아 있기는 하오
밝고 참된 혼을 기르는 도장

<김종성 님>
내 마음은 틀목집에
이 겨울을 참고 견디도록
적은 안에 있지 밖에 있지 않다
짐승들도 잘 있는가
골 안 곳곳에 아카시아를
마음이 급하오, 앞날이 없으니까
악이란 인간본질의 일면
제대했다니 좋고
잡지는 또 늦었소
이번 달엔 못 가게 될 듯
저번 주일에 참 미안하오
한 가지 묻겠소
도리가 통치 않는데
잡지는 난산 또 난산

<정만수 님>
비가 새고 파손된 곳 많습니다

<김숭경 님>
걱정 끼쳐 미안합니다
산양을 사려고
비준반대투쟁
자라나는 아이들
김지헌 군

<김태현 님>
아픈 맘을 참고
수고해서 얻은 첫 열매
죽으려던 마음도 살아납니다
삼무의 그 좋은 나라
보내주시는 열매 속에는
밀감 값도 싸다는데
향기롭게 내일을 밝혀주시오
정말 건강한 사람
난을 키우는 어려움

<석진영 님>
세상에서 그어논 금
그대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
시원한 소식입니다
역사의 솥에서 이런 불길이
민중이 참 담대해졌습니다
사람 사는 나라답게
사람은 혼자는 못 산다
고요한 시간, 생각하는 시간
교육이 최후의 보루
사상 없는 민중
십 년 만에 또 삭발을
고난의 짐이 이제 바로 시작
날씨까지 비정상

<이향 님>
있을 자리에 있으면
글이나 써가지고야
스스로 넝마인 줄 알았거든
작은 일을 참되게 하는 데
모든 장소를 성당으로, 모든 일을 예배로
내일 모레 달을 같이 바라면서
건강하셔서 일 많이 하셔요
고통 이기는 길, 새로남 없이는 있을 수 없어
비 오고 꽃 활짝 피니
가장 아픈 데를 치시잔 것
우로부터 고쳐나는 것
만물이 스스로 바르게 되다
깊은 숨을 소리도 아니 나게
요즈음 또 시국이
믿음이란 화(化)를 이루자는 공부

<이미경 님>
세상이 어지러워진 것을 멍청히 보고만 있으니
늘 하나님의 평화 속에
한 달 넘게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아가페 동산
깊이 생각하는 생활

<이오덕 님>
참사람의 씨알 가꾸기

<법정 님>
새로운 밝히심을

<이천우 님>
하나님이 나를, 민중이 나를 믿어주셔야지

<김조년 님·부인님>
어느 구석에 대 씨?이
모든 것을 아는 자리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
주의(主義)의 희생물
잡지에도 어려움 많습니다
세계권력쟁탈전의 악조건
말씀의 가뭄
믿음이 모든 고난과 시험을
명동(明洞)이 아니라 암동(暗洞)

3
<이행우 님>
나를 거꾸러뜨리려는 악은
참된 정신의 불붙음
대동(大同)하는 정신
금년 비에 또 지붕이 샙니다
전 대통령의 방일(訪日)
지금이야말로 성경연구를
모임집 문제
차차 정신이 둔해가고 할 일은 많고
일은 자꾸 밀리고 바쁘기만


<장익근 님·명옥 님>
생명의 씨를 보존했던 노아의 심정
국민 전체의 지혜와 용기를
비디오로 간디를
사람들이 제 하는 일터에 있지 못하고
마지막이 언제 올지
시국, 정말 걱정입니다
싸움만 있을 뿐, 나라는 어디로

<이열 님>
나는 님의 갈대피리입니다

<노명환 님>
언제 어느 날 그런 일이
수고하셨지만 이기셨으니
어려움이 많으신데
열린 마음으로 서로 대하면
고통 모욕을 당하고도 미워하지 않는 큰 마음

<유영빈 님>
맛있다, 없다를 가리지 말자
참교육은 혼으로
연전에 이미 영구독자가
『씨알의 소리』가 벼락을
믿는 사람만이 역사인
봄 잘 맞으십시오

<박선균 님>
열정만으로 오래 못 가
인생 전체가 훈련
스스로 유익을 얻도록
새 학기에 공부 잘하시고
마음은 가두어두면 썩고 마는 거요

<강기철 님>
오는 15일에 재판을
읽고 난 느낌
옛글 한 수
꾸준히 쉬지 않고 공부하시는 것이 고마워

<김대숙 님>
진작 말을 할 것이지
퀘이커 모임에 한번 와보시오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 말라

<홍재경 님>
써먹을 생각의 노예가 아니 되는 공부
언제나 굳세고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스스로 힘을 쓰시오

<서정웅 님>
길이 나타날 때까지 믿는 마음으로
말 들을 줄 아는 참 아는 사람
한국의 간디
‘아, 배고프다’ 소리가 자꾸 들려
누가 뭐라거나 나는 내 할 일을

<임명수 님>
타는 촛불처럼 빛을 내며
죽을 각오로 순간에 살라

<경옥 님>
명절 때마다 어버이 생각 갑절
잘못을 뉘우치는 일은 그렇게 아름다워
네 길을 스스로 열어라
하나님의 경륜

<전경임 님>
네 혼으로 노래를 부르라
낚시질꾼이 그 딸에게

한가람 뿌리에서 양 떼를 먹이는 목자께

4
모임의 형제들에게
공주로 보내는 글 1
앓는 이에게
청도로 보내는 글
너는 언제까지나 그 꼴일 터이냐
광주로 보내는 글 1
광주로 보내는 글 2
해남으로 보내는 글
홍동으로 보내는 글
○○○ 씨에게 보내는 답장
공주로 보내는 글 2
영원히 불어 오고가는 바람소리
안반덕으로 보내는 글
맘을 다하라

5
내외문답
고아원으로 보내는 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음악
동문서답
맘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 씨에 주는 물음
새것이 어디 왔느냐
내가 믿는 예수
어떻게 하는 것이 버리는 것이냐
죄는 참말로는 없다
오월을 생각해본다
전 세계의 친구들에게
새해 머리에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

6
<김용준 님>
우리는 언제나 사람답게 살아볼까
왜 이때껏 부버를 몰랐을까
날마다 마지막 날의 심정으로 살자
감사절 소감
영국은 여러 가지로 미국과 다르군요
양 치는 것이 흥미 있게 보여서 시험해보려오
필요하면 싸워야지요

<김세인 님>
『노자익』을 구해 보십시오
평화는 어서어서 강조되어야
앞으로 차차 어려운 시대가 될 것
『싸우는 평화주의자』가 발매금지 당했습니다
세배객이 예년보다는 줄었습니다
밥도 걸음도 말도 제대로

<홍성빈 님>
최후 진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박종택 님>
용서는 양심으로 해야지요
명상에 꼭 무슨 제목이 있겠습니까

<서형선 님>
호주행을 중지했소
이 인류는 결국 멸망할 것
명년 여름에 퀘이커 세계대회가 있습니다
계훈제 선생이 쇠약해져서 염려되오
어려움이 많아도 또박또박 일을 해나가시오
글도 늘 마음대로 내지 못하니 답답합니다

<한경원 님>
공공사업에 정신이 좀 있는 인물이 있습니까

<곽분이 님>
『성경』을 좀 진지한 태도로 가르쳐주어야겠다
이 나라야말로 제 얼굴 들여다볼 줄 모른다
일시적으로 좀 피곤했던 듯하다
깊이 생각해야 한다

<진영상 님>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만입니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서로 합하는 점에 갈 수 있어
사람이 자기를 불신하는 듯이 보이면 불쾌한 법

<함우용 님>
『씨알의 소리』 영인본 판매 때문에

<양영호 님>
일본에 한 주일 머물게 될 것이다

<정미희 님>
어린이라도 어찌 무심히 여길 수 있느냐

<함정해 님>
3년 전보다 더 건강해 보인다고
온실과 뜰의 꽃나무가 잘 자라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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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안병무 님
이준목 님
이두수 님

2
안반덕 씨알농장 일꾼들께
의의 싸움 다 싸우고 기쁘게 만나는 날
문대골 님
김종성 님
정만수 님
심숭경 님
김태현 님
석진영 님
이향 님
이미경 님
이오덕 님
법정 님
이천우 님
김조년 님·부인(이종희)님
이행우 님
장익근 님·명옥 님
이열 님
노명환 님
유영빈 님
박선균 님
강기철 님
김대숙 님
홍재경 님
서정웅 님
임명수 님
경옥 님
전경임 님
한가람 뿌리에서 양떼를 먹이는 목자께

4
백영자 님
전재경 님
장기홍 님
부산 모임 여러분께
공주로 보내는 글1
.
.
.

5
내외문답
고아원으로 보내는 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음악
동문서답
맘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
.
.
6
김용준 님
김세인 님
홍성빈 님
박종태 님
서형선 님
한경원 님
곽분이 님
진영사 님
함우용 님
양영호 님
정미희 님
함정해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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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웅혼한 역사의 외침, 민족의 큰 사상가 함석헌을 읽는다
서거 20주기 및 탄생 108주년에 새로운 편집으로 간행된 ‘함석헌저작집’ 전30권 !


불안과 위기의 이 시대에 함석헌 선생의 글을 읽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양심을 다시 찾는 일입니다. 이념에 사로잡히고,
무지와 물욕에 빠져 있는 우리의 잠든 혼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동서고금의 사상을 넘나들며 사람의 도리와 생명의 본질을 설파하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과 글은 오늘 우리들에게 삶의 비전이자 정신적 지표입니다. 선생의 저작은 상아탑 연구실이나 책상머리에서 쓴 것이 아니고 험난한 20세기 역사의 현장에서 몸소 체험하며 가슴에서 토해낸 ‘민족자서전’입니다. 정치와 언론, 교육과 종교의 혁명을 강조하며 다양한 삶(생명)의 원리와 실천론이 아우러집니다. 함석헌은 역사와 사회가 십자가를 이루는 교차점에 늘 서서 사유하고 실천한 공인으로, 지공무사의 정신으로 평생을 살아간 선비입니다. 민중들과 더불어 그들의 아픔을 보듬고 그들의 무지를 사랑으로 깨우친 씨알들의 스승이었습니다. 불안과 위기의 이 시대에 함석헌 선생의 글을 읽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양심을 다시 찾는 일입니다. 이념에 사로잡히고, 무지와 물욕에 빠져 있는 우리의 잠든 혼을 일깨우는 일입니다.
서거 20주기 및 탄생 108주년에 즈음하여 펴내는 ‘함석헌저작집’(전30권)은 1988년 전20권으로 간행된 ‘함석헌전집’을 토대로 그 이후 새로 찾아낸 72편의 시와 수십 편의 강연, 편지, 에세이를 수록하여, 오늘의 독자 감각에 맞게 새로운 디자인으로 편집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말씀과 글에는 마치 악곡의 변주곡처럼 거듭 반복되는 몇 가지 일관된 주제가 있습니다. 민중과 씨알, 민중사관 및 고난사관, 비폭력 평화주의, 국가(지상)주의 및 민족(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세계주의(globalism)로의 이행. 개혁과 혁명, 사회진화론, 종교적 가치관, 새 종교와 새 인류의 대망(待望). 개인주의를 넘어선 전체주의(holism), 상생론적 같이살기운동의 전개 등이 그것인데, 모두 혁명적인 거대 담론들입니다. 개인사와 민족사를 넘어선 인류 전체의 보편사 차원의 문제와 씨름하는 독창적 독자적인 담론들입니다. 이 주제들을 유의하면서 함석헌 선생의 말씀과 글을 읽는다면 우리는 큰 깨침을 얻게 될 것입니다.


22.진실을 찾는 벗들에게
“인생은 붙잡는 것이요 믿음은 놓치지 않는 것이다.”
함석헌저작집 제22권 『진실을 찾는 벗들에게』는 함석헌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다. 제6부에 실린 편지들은 새로 입수하여 이번 저작집에 처음 싣는다. 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