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종교간 대화.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종교간 대화. Show all posts

2023/07/18

강민창: 제주도, 토지정의가 실현된 첫 번째 지역이 되길 갈망하며 > 토지+자유연구소이야기

제주도, 토지정의가 실현된 첫 번째 지역이 되길 갈망하며 > 연구소이야기

[8월 토지+자유 이야기] 제주도, 가 실현된 첫 번째 지역이 되길 갈망하며

작성자 : 관리자 (211.227.108.***)

조회 : 846 / 등록일 : 20-02-09 
=====

제주연구센터, 3차 연구에 돌입!

작년 말부터 시작한 제주연구센터의 제주연구 2차 과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제주고백교회 목사이면서 세인트하우스(펜션)의 대표인 강민창 님의 후원으로 시작된 이 연구는 

토지투기와 난개발과 막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제주도에 지역주민과 자본이 상생할 수 있는 대안을 만드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진행한 2차 연구는 원인진단입니다. 왜 제주도 주민의 삶의 질은 저하되고 자연환경은 파괴되고 있는지를 근원에서부터 진단하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연구를 책임지고 있는 조성찬 박사와 이성영ㆍ김성훈 연구원이 7월 9일에 제주도에 내려가서 연구 성과를 제주도의 주요 인사들을 모시고 발표하고 의견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3차 연구를 시작하는데요, 첫 연구로 삼은 것은 지금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예래휴양주거단지에 대한 대안 마련입니다. 제주 예래휴양주거단지 공사는 2015년 7월 10일 전후로 중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3월 20일 대법원이 예래휴양주거단지 도시계획 인가를 무효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제주도에는 현재 제주국제자유도시 건설이라는 기치 하에, 예래휴양주거단지 개발사업과 유사한 개발사업이 무려 44개에 이르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예래휴양주거단지에서 시작된 불똥이 다른 개발사업에 번지게 되면 제주는 파산 위기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대안 마련이 시급합니다. 하여 조성찬 박사는 토지정의에 입각한 맞춤형 대안을 연구하여 그 결과를 8월 11일 제주에서 발표하였습니다. 저희는 수난의 땅인 제주도가 토지정의가 실현된 첫 번째 지역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계속 지켜봐주시고 성원해주십시오.



‘공정국가’ 담론의 확산을 위하여



남기업 소장은 지난 6월 17일 <내일로 가는 길>에 가서 조찬 강연을 했습니다. <내일로 가는 길>은 내년 총선 출마를 준비하는 분들의 모임입니다. 강연 제목은 “공정국가, 대한민국의 새로운 길”이었습니다. 이런 강연들을 통해서 기존의 진보와 보수의의 틀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국가모델이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려고 합니다.

한편 남기업 소장은 <공정국가 2.0> 집필의 일환으로 한국 사회에 제출된 중요한 대안들을 비평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로 전남대 김상봉 교수가 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2012)에 대한 서평을 발행했습니다. 이 책에는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새로운, 어찌 보면 대담한 제안이 담겨있습니다. 기업의 활동주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이사를 선출하고, 주주들은 배당과 감독의 권한을 주자는 내용입니다. 뿌리부터 논증하는 방식을 택하지만, 제시하는 처방은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아무튼 이 책은 <공정국가 2.0> 구성에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그동안 한국 사회에 축적된 지적 자산들을 흡수하고, 그것들을 공정국가의 틀 안에서 녹여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성영 연구원의 논문이 <서울도시연구> 제16권 제2호에 “국공유지 점유자들의 주거권 해결을 위한 공공토지임대형 사회적주택협동조합 모델 연구”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또한 조성찬 박사의 연구 논문은 <북한연구학회보> 제19권 제1호에 “북한의 관광산업에 기초한 '토지사용료 순환형 경제발전 모델”이란 제목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앞의 연구는 지방정부와 국공유지 점유자들의 접점을 찾아 갈등을 풀 수 있는 방식의 대안개발 모델을 제시했다는 데 의의가 있고, 뒤의 연구는 토지사용료라는 관점에서 북한의 발전모델을 제시했다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다. 

연구소는 꾸준히 학문 영역에서도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즐거운 휴가 보내시기 바랍니다. 9월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목회자 강민창 씨가 전하는 ‘쉼과 회복’ 이야기- 충북인뉴스 2014

“해수욕보다 즐거운 가을 제주로 오세요” < 사회 < 기사본문 - 충북인뉴스



“해수욕보다 즐거운 가을 제주로 오세요”
기자명 오옥균 기자
입력 2014.09.03
==

목회자 강민창 씨가 전하는 ‘쉼과 회복’ 이야기

해안 올레길을 따라 펼쳐진 주상절리가 눈길을 끄는 예레동. 제주도를 대표하는 관광지인 중문관광단지와 지척에 있는데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갖췄지만, 오랫동안 외지인들의 눈을 피해 조용한 시골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곳이다.

제주도 취재과정에서 만난 강민창(45) 씨. 그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 진학을 위해 육지로 떠난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20여년 만의 일이다. 강 씨는 이제 고향에서 자신의 길을 완성하려고 한다.




육지로 떠난 그는 목회자가 되었다. 그리고 돌아와 이제는 고향 사람들과 이곳을 찾는 이들이 종교적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고 평안을 얻도록 하는데 정진하려 한다.



올해는 첫 결실인 세인트하우스의 문을 열었다. 현재의 모습을 한마디로 말하면 펜션이다. 누구나 예약하고 객실료만 지불하면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펜션 지하에는 예배실이 있고,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예배가 진행된다. 또 1층에는 (사)프로보노 국제협력재단이 운영하는 공익형 커피 전문점이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 여느 펜션과 다른 점이다.

세인트하우스가 추구하는 것은 ‘쉼과 회복’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사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목사도 펜션 주인도 아닌 이사장이라 칭한 데서 이곳을 힐링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가 엿보인다.

그는 “이곳은 생태공원과 올레길, 오름 등 쉼과 회복을 얻을 수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사람의 역할이 더해져 치유하고 회복하는 완전한 곳이 될 수 있도록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며 목표를 설명했다.

카메라 앞에서 웃으며 포즈를 취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해외자본 유입의 심각성이 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제주도에서 개발되지 않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외국자본들이 호시탐탐 노려왔던 곳이다.

결국 수년전 말레이시아 버자야 그룹이 제주도로부터 개발승인을 받아 1조 8000억원의 거대자본을 투입해 휴양형 주거단지 조성에 들어갔다. 카지노는 물론 의료시설, 상업시설이 들어설 계획이라서 현지인들의 우려는 커졌고, 개발 중단을 요구하는 소송이 진행 중이다.

강 씨도 동참했다. 최근에 진행된 항소심에서는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지만 사실상 이미 수천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사업을 되돌리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그는 “거대 자본의 횡포와 싸우는 일은 어렵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쉼과 회복의 공간을 만들겠다는 내 개인적 목표가 더욱 절실해졌다. 잘못을 되돌리는 일과 내가 해나갈 일 모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양포럼/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 동양일보

동양포럼/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기자명 박장미
입력 2019.02.24 


(왼쪽부터) 오강남 캐나라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용환 충북대 교수,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양포럼운영위원회는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대화를 펼치고 있다. 지난 12월 7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김용환 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참석한 가운데 도마복음과 도덕경, 장자가 노년철학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도마복음은 지금 성경에는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 당시 복음서적이 여러 개 있었는데 기독교는 그 중에서 4개만 뽑고 나머지는 폐기처분 시켰습니다. 그 폐기된 복음서들은 대부분 깨우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도마복음입니다. 4세기 이집트 나카마디라는 수도원은 폐기된 복음서적은 항아리에 모아 땅에 묻었습니다. 그러다가 잊어버려서 1945년 어떤 농부가 거름을 채취하다가 땅에서 발견했다고 해요. 도마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 그것이 자유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본받아야 잘산다는 것이 기본인데 도마복음은 속에 있는 하나님을 찾아라, 그러면 자유를 준다는 내용입니다. 도마복음 내용 중에서 노인과 아이에 대한 내용을 뽑아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실 도마복음에는 예수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오직 어록 114개만 있습니다. 도마복음 4절에는 “여러 날을 보낸 늙은이도 칠 일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게 생명이 어디 있는가 물어보기를 주저해서는 안된다. 그리하면 그 사람은 살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 될 것이고, 모두가 결국은 하나가 될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남자아이의 경우 8일째에 할례를 하는데 여기에서 7일은 아직 성별이 갈라지지 않은 때입니다. 이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직 안된 상태 즉 순수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죠. 나이든 사람도 초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갖게 되면 아이처럼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순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그런 것을 깨달으면 어린아이고, 깨닫지 못하면 깨달은 사람에게 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길 잃은 양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에서는 길 잃은 양이 불쌍한 존재ㅈ만 도마복음에서 길 잃은 양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훌륭한 양이에요. 인습적인 세상에 머물 수 없는 특출난 존재로 자신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은 99마리의 양보다 네가 더 소중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통속적인 사고방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탈출하는 이야기인데 도마복음은 보통사람처럼 삶을 살지 말고 특출한 사람이 되어라. 내 속에 있는 신적 요소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늙은이가 아이한테 배우라는 것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동양사상의 음양도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것입니다. 노인들이라고 해서 연령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깨치면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마지막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른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참모습을 믿지 않고, AD4세기에 로마가 세계 종교학에 많은 신화적 요소를 가미한 예수를 믿고 있기 때문에 노년 사회에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을 극진히 모신 자식에게는 유산을 주지 않고, 모두 교회에 기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사람을 천사라고 칭송했고, 마지막 남은 집도 교회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아버님을 모시려니까 너무 돈이 많이 들어서 교회에 가서 기부한 것을 조금 돌려달라고 호소를 했지만 교회는 거부를 했다고 해요. 왜 그분이 그런 결정을 했느냐 생각해보면 죽어서 천국에 가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노인을 위해서, 너무 천국에 집착을 하고 있으니 도마복음을 통해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을 다시 찾고, 그를 통해 인간의 상식수준이 회복되어야 온전한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 교수 “도마복음에는 천당이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깨우쳐서 자유로움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절에 “추구하는 사람은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당연하게 생각하다가 다른 차원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면 처음엔 당황, 혼란, 더 궁구해보면 ‘아 그럴수도 있나’하는 놀라움을 갖게 되고 마지막으로 자유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절대적인 영원불멸의 진리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요즘 신학자 중에는 마르크스 볼브라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가 지금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옛날 패러다임에 입각한 기독교 즉 인습적인 기독교,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기독교로 나누고 인습적인 기독교는 천당, 지옥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특징 지었습니다. 새로운 기독교는 변화의 기독교 즉 의식의 변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의식의 변화를 가지고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세상을 본 사람으로 예수님처럼 새롭게 눈을 뜨자는 것을 추구합니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오늘 주제와 관련해 말씀드리면 노인상은 전통적인 것과 변혁적 노인상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점은 믿음에 중점을 두는 기독교와 깨달음에 중점을 두는 기독교가 있다는 것. 일본에 쿠우카이(空海)라고 하는 불교 지도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신자가 이것 저것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진리를 요약을 했으니 그것을 믿고 날마다 암송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이초(最澄)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믿음과 깨달음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이것을 노인상과 연결짓는다면 전통적인 노인상이라는 것은 ‘노인은 이래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영어로 하면 Transformational 노인상인데 지금 정해져 있는 노인상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과거지향적이고, 고정되고, 비관적이고, 모든 면에서 비건설적인 노인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노인은 지혜가 있고, 경험이 풍부하고, 어느 세대보다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세대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다가 미국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남성 청장년 중심사회라는 것입니다. 여성이나 아이, 노인은 철저하게 배척당하는 사회였다고 느꼈습니다. 어린아이와 늙은이는 청장년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애를 낳아서 키우는 것을 다 끝내면 가치가 없느냐, 아니에요. 생물학적인 생산성은 없지만 문화적인 생산성은 더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손자를 통해 개체생명과 우주생명과 연결된다고 느꼈습니다. 아침마다 유치원에 데려다주는데 그 손을 잡을 때마다 제 개체생명을 넘어서는 역동하는 생명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도마복음에서 오늘 인용해주시는 말을 보고 진정한 혼과 혼이 통하는 관계가 맺어지면 우리는 어린아이로부터 우주생명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되고 노인과 어린아이가 함께 미래를 여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구나 느꼈습니다.”



▷오 교수 “서양에서는 에이지즘(ageism) 연령차별주의라는 말도 나왔는데 에이지즘이 너무 보편적입니다. 사실 동양에서는 나이가 많을수록 좋았어요. 우리 속담에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아이의 단순성, 진실성과도 관계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속설로는 아이가 누구에게 의지하듯 노인도 누구에게 의지한다는 것인데 깊이 들어간다면 기존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서 아이처럼 초이분법적 상태로 가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김 주간 “일본에 옹동론(翁童論)이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이라는 노인과 아이고 중장년은 불안정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아동과 노인의 힘이 상생의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데 그 첫 단계가 바로 깨달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주생명과 연결된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가질 때 어린아이와의 마주침 속에서 노인이 그것을 다음 세대로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405060세대는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시기에요. 하는 일에 힘을 전부 쏟기 때문에 현세중심이 됩니다. 하지만 그 일이 다 끝나서 708090세대가 되면 우선 직장에서 나오고, 사회적인 일에 관여하는 것이 드물게 되니까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여를 해야 합니다. 노년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노인상에서는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사회에서도 숨어서 기여 하는 노인들이 있다. 일본 사회가 굉장히 청결한데 사람들이 다니기 이전에 노인들이 눈에 뜨이지 않게 청소를 합니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그런 마음을 갖지 않는데 계속 이렇게 한다면 혐노 의식만 커지고 세대 간 관계가 개선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노인을 철저하게 싫어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노년층을 ‘노인충’이라고 부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늘 해주신 말씀들이 이러한 인식을 바꾸는 하나의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 교수 “제가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1절에 “이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라는 구절입니다. 노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공포라고 생각합니다. 노인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도마복음의 이 구절은 뜻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오 교수 “풀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적인 것, 심적인 것, 영적인 것, 신비주의적인 해석이 있는데 보통 1~2층에서 끝납니다. 3~4층까지 가면 신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희랍에서 생명이라는 것은 두가지가 있어요. 비오스와 조에인데 비오스는 생물학적인 생명력, 조에는 의미있는 삶, 깨어진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인 몸은 죽은 것이에요. 몸은 죽지만 신과 하나가 되었을 때 의미 있는 삶이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저의 생각은 조에는 생물학적 생명이에요. 비오스는 도시국가 안에서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생명력이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조에와 똑같이 개체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체생명이면서 동시에 우주생명과 연결되는 것은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호흡이라고도 하는데 우주의 기를 들여 마시고 자기 속에 있었던 오염된 공기를 뿜어내면서 순환을 하는 과정에서 우주생명과 개체생명이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비오스와 조에는 생물학적 생명과 사회학적 생명인데 개체생명을 구성하는 요인이고, 이것을 넘어서는 우주생명은 영성, 영혼이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하는 것은 생물학적이고 정치사회학적인 생명은 죽지만 우주생명과 연결이 됐을 때는 죽지 않는다는 그런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오 교수 “도덕경의 기본 가르침은 도. 도를 우주의 기본 원리, 실제로 여기고 그것에 따라 살면 덕을 본다고 합니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에요. 도를 말로 제약하면 그것은 더이상 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가장 강조하고 있습니다. 56장에 보면 지자불언 언자불지(知者不言 言者不知)라는 말이 있는데 아는 사람은 말이 없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신에 대해서, 도에 대해서 안다고 떠드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 도마복음 어디나 똑같습니다. 도덕경은 ‘무위’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행동, 억지로 하는 행동, 이기적인 행동을 다 배제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라는 뜻입니다. 무위는 노년이 되어서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년이 되면 무위자연을 할 수 있는 요건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공로를 인정하지도 않고 다투지도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 일방적인 사고, 고정관념, 선입견을 하루하루 없애는 것이 도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노년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김 주간 “저도 노년철학을 하는데 있어서 동양의 전해 내려온 문헌을 하나 찾아서 거기서 여러 가지 발상의 근거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도덕경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는 ‘무’를 명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하다’라는 동사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장년에는 유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큰데 노년이 되어서는 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무나 공을 이해하는 단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년기에서 중장년기에 열심히 배운 뒤 노년기에 가서 배운 것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며 벗어나고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년기를 이렇게 받아들어야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중장년기처럼 앎을 추구하면 안되고 거기서 벗어나서 영혼의 탈식민지화해야 합니다. 노년은 노년답게 자연스러워야하고 젊음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연령차별이 굉장히 심각한 사회입니다. 생각을 바꿔서 우선 연령차별을 바꾸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거기에 오늘 요약을 해주신 것이 노년기 철학적 마음가짐에 기본이 된다고 생각이 되어서 공감을 합니다.”



▷오 교수 “장자에 붕새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해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나중에 새가 되면 붕(鵬)이라고 합니다. 크기도 무척 커서 날개를 피면 하늘 구름과도 같다고 합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이면 남해(南海)로 날아간다고 해요. 9만리 정도는 올라가야 바람이 날개 밑에 그만큼 쌓이게 되어, 남쪽으로 날아가는데 매미와 작은 새는 그것을 보고 붕새를 비웃습니다. 자기들은 있는 힘을 다해 팔짝 뛰어 날아서야 겨우 나무 위에 올라가는데 뭐하러 9만리나 날아서 남쪽으로 가냐는 겁니다. 저는 붕처럼 되지는 못해도 붕을 비웃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우물 안 개구리’도 장자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제약을 벗기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세계는 더 깊은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변화되고, 그만큼 자연스러워지는 것입니다. 한쪽 면만 보는 사람은 융통성을 가질 수 없어요. 양쪽을 다 봐야 합니다. 양쪽을 다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장자에서 말하는 의식의 변화입니다. 장자 2편에는 남곽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곽자가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빙그레 미소지으니까 옆에 있던 시종이 “오늘은 예전 모습과 달라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남곽자는 자신이 오상아(吾喪我)를 했다고 대답했어요. 오상아는 내가 나를 여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자기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서 특수 인식을 활성화 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특수인식을 활성화시킨 대표적인 사람으로 포정이 나옵니다. 포정이 소를 춤추듯이 잡으니까 왕이 기술이 좋다고 칭찬을 했어요. 그런데 포정은 이것은 기술이 아니고 도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다가 기술 경지를 넘어서면 도의 경지에 오르는 것. 오상아를 해서 인식이 변화하는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인데 유교에서도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의식의 변화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의식의 변화를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는 좌망(坐忘)이 있습니다. 안회는 공자에게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룬 것 같다고 보고했어요. 공자가 자기는 인이니 의니, 예니, 악을 다 잊었다고 했고 결국에는 좌망을 했다고 했습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서 큰 트임(大通)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또 심재(心齋)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마음을 굶긴다는 것입니다. 공자와 안회가 등장하는데 위나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니 안회가 가서 돕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안된다고 했어요. 마음을 굶어야 한다고 했지요. 지금 마음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장자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눈을 뜨는 것을 강조합니다. 의식이 변화한다는 것은 모든 수행의 기본입니다. 장자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장자는 부인이 죽었는데 북을 치면서 춤을 췄다고 합니다. 자기도 감정적으로는 슬펐지만 죽음은 사계절의 변화와 같아 철이 바뀐다고 울어봐야 공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물의 실재를 직관함으로써 죽음과 삶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물의 두면이라는 것을 알고 슬픔을 극복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죽음과 삶이 문제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오른 것이죠. 죽음을 슬퍼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노인상과 연관 지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노자, 장자를 그대로 따라할 수 없지만 이정표로 삼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노년이 됐을 때 이러한 경지에 오르면 살기 편해지지 않을까요.”



▷김 교수 “장자가 노년철학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여러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습니다.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절대화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어떤 특정 교리에 얽매여서 굴복되고 왜곡되어선 안된다는 모습을 자세하게 제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세가지 키워드 오상아, 좌망, 심재. 인상 깊었고 오늘 노인철학에 주는 메시지는 깨달음의 밝은 빛을 통해 노인의 어두움을 벗어버리면 노년이 황혼기라는 착오에서 벗어나 황금기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빛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 주간 “노년기에 접어들어서 그 이후를 생활하는 것이 오상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무장화된 자기 자신을 말하는데 70세 정도 넘으면 그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상’은 장사를 지낸다는 것인데 무장된 자기를 장사지내는 과정이 바로 노년기의 인생입니다. 오상아를 하지 못하는 노인은 젊은 세대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는 다섯 개의 구멍을 말하는데 첫째가 귀. 귀로 들을 소리를 듣고, 듣지 않아도 되는 소리는 듣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눈인데 안봐도 되는 것은 보지 말고 봐야 될 것만 보라는 의미. 세 번째는 입이고 네 번째는 코입니다. 우주 생명을 순환하는 것이고 마지막은 항문입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대장, 소장, 직장, 항문을 연구한 의사가 있는데 그 사람은 오래살려면 장이 건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목구비까지는 신경을 쓰는데 항문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먹어서 속에 넣는 것만 생각하지 내놓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순환을 코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항문도 똑같은 비중으로 순환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다섯가지의 구멍이 제대로 기능을 하는 것을 ‘오’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지식이나 재산이나 명예로 무장된 자기를 장사지내고 온전한 자신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오상아’라고 합니다. 제가 노년기의 삶은 바로 오상아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상아는 과정일 뿐입니다. 오상아를 하면 자기를 비우고 타자를 제대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타자와 진정한 만남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A, 죽어서 가는 세상을 B라고 할 때 A에서 죽으면 B에서 어린아이로 태어나 살게되고, 또 거기서 죽으면 다시 A로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탈바꿈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선생님 말씀을 듣고 굉장히 좋은 점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앞으로도 오 교수님께서 노자와 장자를 통해 어떻게 노년철학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소스를 발견, 연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리 박장미 기자>



동양일보TV




박장미 pjm8929@dynews.co.kr

2023/07/17

종교대화, 이찬수,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비교하며 알 수 있는 것들 230717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비교하며 알 수 있는 것들:

그리스도의 몸보신불의 구조적 유사성을 중심으로

 

 

이찬수

 

 

1. 들어가는 말

 

종교 간 대화/비교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종교의 외적 표현들을 중심으로 하는 현상학적 비교, 사회 정의를 위한 실천 지향적 대화, (), (), () 처럼 종교들의 근원적 원리와 세계의 차이점이나 공통점을 찾기 위한 철학적 대화 혹은 논리적 비교 등 다양하다. 어떤 방법이든 이들 행위가 외견상 뚜렷한 차별성 속에서 느껴지던, 아직은 모호한 상통성 내지는 유사성이 대립과 갈등으로 아파하고 있는 우리의 삶에 조화와 일치라는 유용한 의미를 가져올 수 있다[1]면 바람직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리스도인과 불자가 예수와 붓다를 이해하고 신앙해온 과정을 비교하며 이들의 종교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가령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되게 해주는 근거가 그리스도라면, 불자를 불자되게 해주는 근거는 ()이다. 이때 그리스도인에게 지니는 그리스도의 의미와 불자(특히 대승불교도들)에게 지니는 의 의미는 과연 얼마나 다르고 혹은 얼마나 상통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 초월적 존재인 그리스도와 아미타불 같은 보신불에게서 구체적 을 상상하는 경우를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몸보신불(報身佛) 개념이 탄생되고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비교해보면서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와 불자에게 붓다는 서로 비슷한 깊이를 지니고서 비슷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역사적 예수가 초월적인 그리스도 차원으로 확대되고, 붓다의 영역이 고타마에 제한되지 않고 보신불이라는 초형상적인 세계로 전개되어 나가는 과정을 비교하면서 이 종교들의 대중적 전개 양상의 유사성을 밝히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인간 종교 심성의 구조적 유사성을 드러내 볼 것이다.

 

2. 하느님-예수, -붓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로 인해 생겨났다. 물론 역사적 예수는 철저하게 신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신의 차원까지 높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사후 제자들은 예수 선포의 확실성을 위해 예수 자신까지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그것도 외아들로 불리게 되었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품안에 계시는 외아들 하느님이신 그분이 알려주셨다.(요한 1,18) 이 말의 기본적인 의미인즉, 한 집안의 아들을 보면 그 아버지가 연상되듯이, 보이는 예수가 보이지 않는 신을 쏙 빼 닮았다는 뜻이다. 제자들이 스승 예수를 통해 하느님을 새롭고도 결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러는 가운데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게 모든 것을 넘겨주셨다(마태 11,27) 내지는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14,9)는 전승도 생겨났다.

이와 비슷하게 고타마 싯달타는 깊은 수행과 명상 속에서 인생의 원리,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았고, 그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며 살았다. 그는 법이 나의 스승(장아함 1 『大本經』)이라 말했고, 그가 최후로 남긴 유언도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自燈明 法燈明)는 것이었다. 내가 열반하더라도 법신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면서, 자신이 설한 율()과 법()을 그의 사후(死後)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쳤다.(『대반열반경』) 그는 제자들에게 깨달은 이, 붓다로 불리게 되었다. 물론 붓다 자신은 스스로를 신격화하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가 가르친 법이 그의 인격을 통해 드러났다고 믿었다. 예수 선포의 확실성을 위해 예수 자신까지 높이기 시작했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처럼, 이것은 고타마 붓다에 대한 존중과 숭배로 이어졌다. 법이란 무시이래 주어져 있고 돌아가고 있는 보편적인 진리이지만, 제자들은 그 진리를 붓다가 보여준 진리, 붓다 안에서 드러난 진리로 알아들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와 비슷하게, 이것은 남전(南傳) 니카야에서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드러나고 있다.

 

3. 예수-그리스도, 색신-법신

 

예수와 고타마 붓다는 분명히 역사 내적 존재이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예수와 고타마 붓다는 모두 그들이 전하고 실천한 하느님의 말씀 혹은 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주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역사적 예수 및 고타마 붓다가 하느님 말씀의 구체화 및 영원한 법의 구체화로 고양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법은 세존을 근본으로 하고 세존에 의해 이끌리며 세존에게 의존한다.(남전 『니카야』, 북전 『아함경』) 보편적이고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 법을 역사적 존재인 예수, 붓다에게서 보는 것이다. 육신(사륵스)이 된 말씀, 붓다에게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법의 도식으로 이들을 설명하면서, 점차 예수와 붓다를 각각 예수와 붓다되게 해준 그 선행적 원리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예수의 말씀과 붓다의 깨달음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된 제자들 중 일부는 이들 사후 각각 예수야말로 본래 영원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신 분이셨는데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가 다시 본래 위치만큼 들어 높여지셨다(필립 2,6-11)는 예수 선재(先在) 신앙을 발생시켰고, 고타마 싯달타가 붓다가 된 것은 금생에 6년 동안 고행해서 얻은 결과였다기보다는 수많은 생애를 거듭하면서 끝없이 수행하고 선행을 쌓은 결과라는 신앙을 낳았다. 그 결과 붓다의 전생 이야기(자타카)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둘 다 존재의 기원을 현재 이전의 자리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 역사적인 예수는 선재하는 하느님 말씀의 육화이듯, 고타마 붓다는 세상 돌아가는 근원적이며 선행적인 이치를 결정적으로 드러내준 구체적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본래 하느님의 모습을 한,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는데,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으며, 고타마 붓다는 이미 수도 없이 되풀이된 전생 속에서 무시이래 돌아가고 있는 세상의 이치를 비로소 진작에 깨닫도록 되어 있었던 분이라는 견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험적인 차원에서는 예수/붓다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법을 알아들었지만, 논리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법이 예수/붓다를 예수/붓다되게 해준 근거가 된다는 식으로 풀어나간 셈이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교에서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과 그 육화 도식으로 하느님과 예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면, 불교에서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법신(法身, dharmakāya)과 그 구체화로서의 색신(色身, rūpakāya) 도식[二身說]으로 법과 붓다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4. 붓다의 몸

 

물론 그리스도교에서든 불교에서든 이러한 구분 혹은 몸 개념은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불교에서는 더욱 그렇게 보인다. 불교적 몸(kāya)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가 물리적 혹은 생물학적인 몸이라면, 둘째는 본질 혹은 주요 부분[]이라는 의미에서의 몸이다. 그런데 중생은 흔히 오온(五蘊)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생물학적인 몸에 매인다. 그 몸을 불변하는 실체처럼 여기고 그 욕구에 집착한다. 이것을 신견(身見)이라 한다. 물론 신견은 극복과 타파의 대상이다. 이 몸뚱이가 오온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몸에 대한 집착이 제거될 때 진여를 보게 되는데, 그 진여를 제대로 본 근원적인 주체가 바로 법신인 것이다. 앞의 표현대로 하면, 세존에 의해 이끌린 법, 즉 붓다에게 결정적으로 드러난 법이 바로 법신인 것이다.

법 자체는 구체적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지만, 역사적 존재인 붓다에 의해 알려진 법에는 상상 가능한 어떤 형식이 있다. 법 자체에 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더한 이유도 어찌되었든 역사적 붓다에 의해 상상 가능한 어떤 것이 말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발생한 법신은 구체적 존재인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 근거한 구체적 가르침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본 요소들의 집합과 같다.[2]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깨달음 자체가 완벽한 것이어야 하고, 완벽한 깨달음이란 진여에 대한 깨달음이자 동시에 진여에 의한 깨달음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법을 법되게 해주는 근본 요소들이 고타마 붓다에게서 드러났다고 보았다. 바꾸어 말하면 고타마 붓다는 법을 법되게 해준 근본 요소들을 드러낸 존재이다. 법신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색신인 것이다. 색신과 법신을 총칭하여 불신(佛身)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색신과 법신 도식은 초기부터 확립되어 있던 교리가 아니다. 이신설(二身說)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원시 불교 단계에서의 이신설과 대승불교 초기경전에서의 이신설의 개념은 서로 다르다. 원시불교에서 이따금씩 등장하는 법신이라는 용어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붓다에 대한 찬탄의 표현일 때가 많았다. 붓다가 가르쳐주고 보여준 법이 바로 그 붓다 안에서 다 드러났으니, 그 분이야말로 순수한 근본 요소들의 총체와 같다는 의미가 원시불교에서의 법신이라는 용어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구체적 존재인 고타마 붓다의 모습에 대한 기억과 연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붓다 사후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모습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다. 그러자 붓다의 육체적 흔적, 즉 유골(śarīra)과 같은 구체적 사물을 숭배하는 탑돌이 신앙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법신 자체보다는 법신을 알려준 고타마 붓다를 그 법신의 구체화[化身, nirmanakāya]로 알고 숭배하는 것이다. 탑돌이 신앙인들은 붓다의 생물학적인 몸에서 그 몸을 몸 되게 해주는 근원적이고 이상적인, 즉 완전한 요소들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붓다의 유골을 숭배했다. 그렇지만 붓다의 형상을 만들지는 않았었다. 붓다가 성취한 열반은 구체적인 형상을 초월한 곳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라져 버린 자에게는 더 이상 형태가 없다[3]고 하듯이, 붓다의 형상을 만들기보다는 다만 탑돌이 행위를 통해 붓다의 몸의 흔적을 기억하면서 그의 깨달음의 능력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에서는 역사적 존재인 석가모니 숭배나 그 유골을 숭배하는 탑돌이 신앙인들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반야경』에서는 역사적 존재가 아닌, 반야바라밀이 참된 부처의 몸[佛身]이라고 주장한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고타마 붓다보다는, 경험적으로는 붓다에게서 비롯되었지만, 이론상으로는 그 붓다를 붓다되게 해준, 이미 선재하는 진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붓다 그 본래 모습은 역사적 존재 혹은 그 생물학적인 몸이 아니라, 붓다의 지혜(반야)라는 것이다.[4] 『유마경』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벗이여, 여래의 []신이란 법신인 것이며, ()에서 생긴다···” 이렇게 초기 대승경전에서는 붓다의 지혜라는 의미에서 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팔천송반야경』에는 색신과 법신을 구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래는 그의 색신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법신은 여래로서, 법의 참 본성은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5] 이런 표현을 통해 육신을 지녔던 석존에 매이지 말고 그의 지혜, 그가 실현한 무아의 진리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붓다의 아들들이여! 여래는 하나의 특별한 법이 아니고 특수한 형태의 움직임도 아니다. 법신은 특수한 장소에 머물지 않으며 그 구제 활동도 특정한 사람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 도리어 법신은 그 자체로 무한한 법, 끝없는 움직임, 무수한 몸 속에 존재하며 일체 중생의 구제를 위해 두루 일한다.[6] 역사적 존재로서의 고타마 붓다에 대한 강조로부터 역사적 구체성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로서의 법신에 대한 강조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불신()身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인 것이다. 물론 몸 숭배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언설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당시 이미 붓다의 유골과 같은 육체적 흔적에 집착하는 불탑 신앙자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7]

 

5. 그리스도의 몸

 

이러한 불신론의 전개는 성서가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초기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다가 점차 초형상적 그리스도로 전이했던 것과 유사하다. 원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한편에서 예수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또는 교회와 함께 하는 예수를 느끼면서 그것을 예수에 대한 신적 선재성 개념으로 발전시켰고,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를 보지 못한 제자단에게 예수의 확실성을 전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신앙을 발생시키기도 했다. 가령 서기 70년경 기록된 『루가복음』에서는 예수를 보지 못한 후대 교회 구성원들이 예수의 육체성에 집착하던 것을 반영하여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고 전한다: 왜 당황하며 어찌하여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의심을 품습니까? 내 손과 발을 보시오. 바로 나입니다. 나를 만지고 살펴보시오.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습니다.(루가 24,39) 부활한 예수가 자신을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을 향해 던졌다는 이런 식의 표현은 실상 예수의 몸에 매이던 초기 신자들의 입장을 반영한다.

그러나 육체는 어디까지나 제한적 존재이다. 이러한 반성 속에서 예수의 육체적 제한성보다는 영적인 보편성이 점점 더 부각되기에 이른다. 가령 서기 100년경 기록된 『요한복음』에서는 진정한 부활은 육체적 차원을 넘어선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가령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들은 제자 토마가 예수의 몸을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 뒤 홀연히 나타난 예수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나를 보고서야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이 복됩니다.(요한 20,29).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고 믿는 교회 구성원들의 분위기를 반영하여 예수가 자신의 몸을 드러내 보여준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육체성/구체성을 넘어서는 곳에서 진리의 모습이 보인다는 사실이다.[8] 진리는 역사적 구체성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대중은 예수의 육체성에 집착했다면, 경전 기록자와 같은 엘리트층은 육체적 제한성을 넘어서는 곳에서 진리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전개되어간 성서의 역사도 전체적으로는 예수의 몸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는 쪽으로 전개된다.[9] 

 

 

6. 영적인 몸

 

중요한 것은 나중에 상상되고 신봉되는 예수의 몸은 역사적 예수의 몸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역사적 예수 사후(死後)에 그분의 몸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된 제자단/교회에서는 역사적 예수를 본래 하느님의 모습을 하고 계셨다는 이상적인 분, 즉 초월적 그리스도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초월적 그리스도는 예수에 대한 모습이되, 죽은 예수가 제자단에게 계속 힘을 불어넣고 있으며,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여전히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재해석된, 예수의 초형상화이다. 이것은 부활의 관념과 연결된다.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에 대한 표현들은 예수가 그 추종자들 중에 계속 현존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회화적 기술(wordpicture)이다.[10] 이미 죽었으나 추종자들에게 여전히 현존하는 예수, 그가 부활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물론 이 초월적 그리스도도 예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그에게도 이 있다. 그렇지만, 바울로에 따르면, 그것은 몸이되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 1고린 15,44)이다. 땅에 묻혀서 썩어 없어질 몸과 달리, 언젠가 다시 일어날 몸이다(1고린 15). 그 몸은 신에 의해 들여 높여질 현재 몸의 영적인 차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적인 몸은 생물학적인 몸과 전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 몸을 지니고 산 결과이기도 하다. 생물학적인 몸은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바울로에 따르면, 그 썩을 것이 뿌려져서 영적인 몸으로 재탄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재탄생의 근거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이다. 바울로는 예수가 이미 그런 영적인 몸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부활의 첫 열매 - 유일한 열매가 아니라 - 로 믿었다. 사람들도 예수처럼 영적인 몸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흙으로 빚어진 그분의 형상을 지녔듯이, 장차는 천상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49) 천상에 속한 그분의 형상, 즉 그리스도의 형상이 말하자면 영적인 몸이다. 이렇게 초기 교회는 여전히 예수에 의해 능력을 부여받고 있는 자신들의 경험을 영적이고 초월적 그리스도로서 표현했다.

 

7. 보신불

 

마찬가지로 역사적 붓다 사후 그가 가르친 법 자체가 인격화한다. 그러면서 고타마 붓다가 영원한 법의 구현자이시듯, 그렇게 초월적 형상을 지닌 붓다가 여럿 있었음은 물론 지금도 서방의 깨끗한 땅에 그러한 초형상적 붓다(아미타불, 약사불, 아촉불)가 계시다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붓다는 중생이 원하는 바에 따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스스로를 나투는 분이다. 십력(十力), 사무외(四無畏),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등과 같은 불과(佛果)의 공덕의 초형상적 구체화이다. 이것 역시 고타마 붓다로 인한 영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주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드러나는 붓다가 인간 신앙의 대상이고 귀의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불제자들은 이 초형상적 붓다에 귀의한다. 그 초형상적 붓다가 바로 보신(報身, sabhogakāya)으로서의 붓다인 것이다.

보신불이란 사전적인 의미에서 보살이 서원하고 수행한 결과 얻은 초자연적인 몸, ()으로 인해 받은() 불신(佛身)이다. 그런데 그렇게 받은 몸이 정말 불신이려면, 논리적으로 보건대 그것은 로부터 와야 한다. 앞에서의 표현을 빌면, 법신 자체가 자신을 비우고 상대화하여 그 서원과 수행 속으로 들어오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신의 하향적 자기 비움과 보살의 상향적 서원과 수행이 만나는 영역이 보신불의 세계이다. 그러기에, 역사적 전개의 양상을 따르자면, 보신불은 다양한 중생의 구원적 요청에 부응하여 생겨난 붓다의 다양화이지만, 논리적으로는 절대적 법신이 스스로를 부정하여 상대적 법신의 세계로 드러낸 결과이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고타마 붓다로 인해 알려지고 가능해진 초월적 붓다의 세계라는 점에서 보신불 신앙은 석가모니불과 그 불을 신앙하는 중생과의 연결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발생한 것이다. 열반에 든 석가모니불을 대신해 지금 여기서 자신들에게 직접 은혜를 베풀 붓다로서 요청된 존재인 것이다.

보신불은 역사적 석가모니불에 의해 알려졌으나 그 역사적 제한성을 초월한다. 역사 안에서 역사 너머의 진리가 개시되는 것이다. 역사적 존재인 석가모니를 통해 역사 이전적 석가보살 이야기가(자타카)가 발생되었듯이, 보신불 사상은 중생 구제를 위한 서원을 하고 그를 실현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 사상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보신불은 보살 신앙에서 성립된 대승불교도들의 귀의와 믿음의 대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불자들이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나무석가모니불)한다고 말하지만, 그때 귀의처인 석가모니불은 사실상 보신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 법신불을 알려준 이라는 신앙적 확신 속에서 재조명된 석가모니불, 바꾸어 말하면 보신불의 차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지만, 그때의 예수는 사실상 초월적 그리스도나 다름없다. 이미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 있고 들어 높여져 있는 그리스도이기에 그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간다고 믿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가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었다고 믿는다지만, 사실상 그렇게 태어날 수 있는 존재는 이미 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린 초월적 그리스도이고, 고타마 싯달타가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고통 없이 태어난 뒤 바로 걸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외쳤다지만, 사실상 그런 신비로운 탄생이 가능한 근거는 이미 신처럼 들어 높여진 보신불의 차원에서 재조명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나 붓다나 모두 괴로운 육체 덩어리를 지니고 살았지만, 그리스도나 보신불의 몸은 그러한 근원적 괴로움의 초월자 차원에서 재조명된 몸이라는 점에서 둘 다 마찬가지의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자렛 예수라는 역사적 개체와 고타마 싯달타라고 하는 역사적 개체가 말 그대로 개체에 머물지 않고 그 개체를 개체되게 해준 원천적 실재와 직접 연결되며, 그러한 신앙적 확신 속에서 다시 보인 초역사적 개체들이 그리스도이고 보신불이다.

 

8. 아미타불, 지장보살, 예수

 

대표적인 보신불이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은, 석가보니불의 설법에 따르면, 법장보살이 원을 세우고 수행하여 도달한 붓다이다. 아미타무한한 수명(無量壽, Amitayus) 혹은 무한한 빛(無量光, Amitabha)이라는 뜻으로서, ()의 공덕, 법력, 기쁨의 형상이며, 중생을 구원하는 자비의 몸의 상징이다. 한 마디로 법신의 초형상적 구체화이다.[11] 중생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할 일은 그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외우는[南無阿彌陀佛!] 것으로 족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누구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자비의 서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신불의 신앙 구조는 예수야말로 하느님의 외아들이기에 그 아들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들이 다 해준다(요한 14,13-14)고 하는, 하느님의 외아들 혹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앙적 구조와 상통한다.[12]

아울러 지옥으로 간 예수지장보살 신앙도 마찬가지의 신앙적 구조를 반영해준다. 가령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지난 천오백 년 동안 전 세계 많은 교회에서 여전히 바쳐지고 있는 대표적인 신앙고백문인 사도신경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Hell)에 가셨다는 구절이 있다.[13]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뒤 땅에 묻혔고 저승, 즉 지옥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갇혀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1베드 3,19)라고 하는 한 전승이 잘 설명해준다. 여기서 갇혀있는 영혼들이란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1베드 3,20), 이른바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간주되는 이들이다. 대홍수 때 노아의 식구들만 구원받았고, 다른 이들은 저주받아 영원히 죽어버렸다는 일반 상식과는 달리, 예수는 그들을 영원한 죄인으로 두려 하지 않았고, 그들을 지옥에 남겨두고자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이다.(1베드 4,6a)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지옥을 포함하여 육도 중생을 다 구원하기 전까지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地藏菩薩)의 모습과 닮아있다.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는 중생이 단 하나라도 남아있는데 어찌 홀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반성 속에서 스스로 지옥에 남아있기를 자청한 보살이 지장보살이다. 그의 서원은 중생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니, 그 고통을 해결하기 전에는 절대로 열반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었다.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자타불이적 마음 자세와 같은 맥락이다. 지장보살은 일체 중생의 구원 이전까지 스스로 붓다가 되기를 유보했기에 여전히 보살로 불리지만, 그러한 보살 정신은 이미 중생의 구원 요청에 부응하여 생겨난 보신불 신앙과 기본 구조에서는 다르지 않다. 모두 역사적 존재에 의해 알려진 초월적 세계가 중생 구원의 요구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 초형상적 구원자들의 모습인 것이다.

 

9. 신앙적 깊이의 상통성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와 보신불이라는, 양쪽 신앙 구조의 핵심에 놓여있는 것들은 그것을 신앙하는 이들에게 비슷한 깊이를 지닌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의미와 불자들에게 아미타불, 지장보살 등 다양한 구원자들이 지니는 의미는 깊이의 차원에서 대립되기는커녕 상통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 = 아미타불이라거나 그리스도 = 지장보살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불자들의 신앙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구원의 가능성을 지옥에까지 열어둔 지옥 정복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육도를 헤매는 중생이 하나라도 남아있는 한 결단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에 대한 불자들의 신앙은 인간 구원 열망의 다양한 표현 형식으로 읽혀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응당 이러한 구원의 표현 형식은 모순과 우열 차원에서 밝혀질 수 있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저마다의 신앙 체험의 근거가 되는 각 전통의 깊이, 혹은 그 전통 안에서 발생한 신앙 체험의 깊이에는 서로 물리칠 수 없을 유사성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는 신학자 존 캅(John B. Cobb, Jr.)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불교 신자가 아미타에서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불교 신자들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아미타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14]고 한 말은 당연하며 타당하다. 또 김경재가 산의 등정로는 다르지만 호연지기는 비슷하다라는 말을 통해 “‘구원에 대한 이론과 개념 설명이 설혹 종교마다 다양할지라도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태도에는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바 있는데,[15] 그러한 주장 역시 저마다 궁극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 내지는 근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체험은 세계관과 그 표현 방식상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물리칠 수 없을 비슷한 깊이를 지닌다는 이 글의 핵심과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10. 보편성의 추구와 언어적 과장

 

그리스도교에서나 불교에서나 중생의 몸 자체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유한한 것이다. 굳이 사고(四苦)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원치 않는데도 병들어 괴로워하다가 결국 쇄락하고 마는 것이 인간의 몸뚱이다. 사성제 중 첫 번째인 인생의 괴로움에 관한 진리(苦諦) 역시 병들고 늙어가는, 몸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만족을 포함하는 말이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요소인 오온(五蘊) 가운데 첫째인 색온(色蘊) 역시 신체의 물리적인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 몸이 인간 괴로움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역으로 그 몸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의 극복이 불교적 깨달음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붓다나 예수 같은 이들이 바로 그러한 괴로움을 극복했다고 믿어지면서, 불만족스럽고 제한적인 몸의 차원을 넘어선 존재 차원에서 재조명되었고, 중생의 구체적인 구원 욕구에 부응하는 초월적 존재로 바뀌어 것이다. 예수와 붓다로부터 비롯된 두 종교 모두 구체적인 몸을 초월적인 몸으로 전개시켜온 역사를 가진다.

이러한 역사에는 서로 공통되는 이유와 논리가 뒷받침되어 있다.

첫째는, 전술했듯이, 이것은 중생이 예수예수의 말, 붓다붓다의 법을 일치시키는 데서 비롯되는 일이다.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세계와 붓다가 전한 깨달음의 법이 정말로 하느님이고 법이려면 그렇게 발설한 예수와 붓다가 하느님 및 법과 동일해야 한다. 그 동일시를 위해 구체적 역사를 절대적 세계로까지 초월시켜 구체적 역사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외적 확장을 통한 보편에의 추구인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내적 본질을 깊이 천착하며 거기서 보편적 원리를 발견해가는 방식도 있다. 전자가 대체로 중생의 길에 가깝고, 후자는 대체로 철학 혹은 신학자의 길에 가깝다.

그런데 이 둘은 외견상 역방향인 듯해도 보편에의 추구라는 점에서는 사실상 만난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지으면, 몸이 없어야 할 초월적 존재에 몸을 붙이는 행위는 역사와 초월, 부분과 전체를 연결시키고 역사 내 제한적 존재를 초월적 보편자와 동일시함으로써 현실의 대립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종교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언어의 문제이다. 모든 언어에는 경계가 있다. 어떤 언어든 그 개념적 제한성 때문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다른 언어와 세계를 가린다. 실선적 경계가 있는 언어를 사용할 때 그 너머의 세계나 특별한 경험을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보편적 세계, 특별한 경험을 적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일종의 과장법을 쓰게 된다. 일상적 경험은 일상적 언어로 어느 정도 전달되지만, 비일상적 경험 내지 일상 너머나 그 근원에까지 연결되는 세계에 대해 말할 때 어느 정도 과장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때 발화자가 말하려는 내용을 긍정적으로 전달하려면 일정 부분 과대평가를 하게 되고, 부정적으로 전달하려면 과소평가를 하게 된다. 과대든 과소든 모두 지나침, 과도함, 과장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과장하는 이유는 발화자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전달하는 방식에는 발화자의 의도가 들어있다. 청취자도 그 과장법을 수용하면서 발화자의 의도를 이해하게 된다. 본 의도는 그 과장된 표현보다는 작은 세계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하지만 청취자가 다시 발화자가 되면 마찬가지로 과장된 언어를 사용하곤 한다.

이러한 적어도 종교적인 영역에서 과장법은 단순 오류가 아니다. 경험과 의도를 전달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이러한 과장적 전달이 계속되고 중첩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과 관점이 형성된다. 그 개념과 관점이 기존의 대상을 재형성 혹은 재구성한다. 그러면서 그 대상은 과장되기 이전의 존재와 불연속적 연속 혹은 연속적 불연속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 과정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누군가 불어 단어 nu를 발음하면, 피상적인 관찰자는 거기서 하나의 구체적인 언어 대상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주의 깊게 검토하면, 그 고찰하는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서너 가지의 현상을 잇달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음으로서, 개념의 표현으로서, 라틴어 nūdum의 해당어로서 등등. 대상이 관점을 선행하기는커녕, 관점이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인상이다. 더구나 문제의 현상을 고찰하는 이 여러 가지 방식 중, 어느 것이 나머지에 비해 선행하거나 우월하다고 예견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16]

 

예수의 선포와 붓다의 깨달음이 대중 안에서 살아나가는 방식에는 언어의 특징과 구조가 한 몫 한다. 예수를 신처럼 받듦으로써 예수의 가르침을 지속해나가고, 석가모니 붓다의 몸에서 정신적인/영적인 몸과 신통력의 몸으로 옮겨감으로써 법을 지속해나간 것은 굳이 해석학의 기본원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오해가 커진 것이라기보다는 중요성이 변화한 것이다.[17] 특히 신의 개념과 영역이 자연스럽게 전승되고 통용되는 곳,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 사유가 문화화되어 있는 곳, 현실 너머(초월)에 대한 상상이 익숙한 곳에서의 과장법은 자연스럽고 더 효과적이다.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자라났던 그리스, 로마, 인도처럼 다신교적 세계관이 자연스러운 곳일수록 예수가 신적 그리스도로, 고타마 붓다가 초월적 보신불로 전개되어가는 것은 대중의 익숙한 화법이다. 초월의 개념이 다소 약한 중국을 거치며 확립된 선불교 전통에서는 인격적 신앙관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도를 배경으로 형성된 불교가 기존의 언어를 계속 초월시켜 온 것은 자연스럽다. 그것이 중생의 종교적 심성의 근간이다.

역사 내적 예수와 붓다를 역사 초월적 그리스도와 보신불로 승화시켜온 종교적 심성은 서로 모순이 아니다. 전술했듯이, 경험적으로는 예수/붓다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법을 알아들었지만, 경험의 확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법이 예수/붓다를 예수/붓다되게 해주었다는 논리로 뒷받침하는 방식이다. 예수를 바로 그 예수로 만들고, 붓다를 바로 그 붓다로 만든 근원에 대해 후학들이 신(), 일자(一者), (), 절대무(絶對無)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며 역사와 보편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오기도 했다. 예수와 붓다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육체를 가지고 여전히 고통받는 중생의 삶이 유의미하려면, 그 고통을 이미 극복하고 초월의 세계와 합일한 사례가 있어야 한다. 나아가 제한적 육체가 보편적 세계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애당초 있어야 한다. 이 스승들은 그리스도인과 불자에게 그 가능성을 구현한 드문 사례들이다.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진리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신념이 부분과 전체를 연결키시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 내적 구체성과 역사 초월적 보편성이 서로 만난다. 역사 안에 역사 너머의 세계를 담는 행위, 가령 지옥에 있는 중생들까지 구원한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행위에는 궁극적으로 천국과 지옥,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이 사라지는 곳에서야 진리가 완성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예수가 하느님이 되고, 붓다가 법(진리) 자체가 되어야 결국 모든 것과 모든 곳이 하느님 나라, 불국토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존재의 몸을 그리스도법신불로까지 끝없이 초월시켜 왔지만, 그 초월성의 정점에서 만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초월적 세계를 상상하도록 한 역사적 세계의 본질이다.

·, 천국·지옥이라는 이원론을 넘어서는 곳과 일체중생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곳은 동일하다. 그런 식으로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모든 이원적 사유를 포섭하는 근원적 세계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1디모 2,4)는 성서와 일체중생실유불성(열반경)이라는 불경은 대극합일적이다. 궁극적으로 외부와 내부, 초월과 내재는 서로 만난다. 두 종교 전통의 역사는 인간 종교 심성의 구조적 유사성과 함께 무엇보다 신앙적 깊이의 상통성을 잘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들인 것이다.



[1] 이찬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교토학파와 그리스도교』(다산글방, 2003), 159.

[2] 법신 개념을 구체화했던 세친의 『섭대승론석』에는 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첫째가 태어나면서 얻어진 생물학적인 몸이라면, 둘째는 공능(功能), 즉 어떤 작용의 능력으로 얻어진 것이다. 풀어 말해 두 번째 의미의 몸은 무명에 의해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그 움직임, 즉 업에 따라 받은 과보라는 의미이다: 미혹(無明)에 의거하여 선업과 악업과 부동업을 일으키고 업으로 말미암아 일곱 가지 인식의 결과를 얻으며 인식의 결과에 의거하여 다시 미혹을 생하는 것을 사람의 공능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大正藏 31, 254쪽 下) 그러니까 공능으로 얻어진 몸이란 업을 받아 다른 작용을 일으키도록 전해주는 주체인 셈이다. 그런데 법신은 무명에 의한 업의 연결고리를 끊은 인식주체이다. 이와 관련하여 『섭대승론석』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번뇌를 끊는 도를 일으켜 닦을 때 인식주체의 허구적이고 비실제적인 부분을 떠나 인식주체의 본질적이고 실제적인 부분과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에 전의(轉依)라고 이름한다. 이 전의로 말미암아 금강도 뒤에 법신을 증득하는 것이다.(앞의 글, 같은 쪽) 여기서 전의는 유가행파의 핵심 개념이다. 허망한 연기(緣起)의 세계가 진실한 성기(性起)의 세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유가행파에 따르면, 중생은 세상 만사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일어난다(依他起性)는 사실을 모른 채 망상에 사로잡혀 있지만(遍計所執性), 만일 그러한 타자의존적 사물의 실상(依他起性)을을 제대로 깨닫게 되면 사물의 원만 구족한 모습(圓成實性)이 드러나게 된다. 한 마디로 의타기성에서 원성실성으로의 전환이 바로 전의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 그러한 전의가 일어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일체 사물이 여래, 즉 법신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불교적 형이상학이 전제된다. 본래 그러한 존재이므로 비로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의 표현에 따라 정리하면, 본각(本覺)을 비로소 시각(始覺)하는 것이 전의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중생이 바로 여래의 성품을 모시고 있는 여래장이기 때문이다.

[3] 『숫타니파타』 제5품 제7; 『숫타니파타』, 석지현 옮김(서울: 민족사, 2001), p.274.

[4] 武內紹晃, 「佛陀觀の變遷」, 『大乘佛敎とは何か』(『講座·大乘佛敎』卷1)(東京: 春秋社, 昭和56),  162참조.

[5] The Perfection of Wisdom In Eight Thousand Lines & Its Verse Summary, tr. by Edward Conze, Bolinas: Four Seasons Foundation, 1973, p.291.

[6] D. T. Suzuki, Outlines of Mahayana Buddhism, New York: Schocken Books, 1963, p.224에서 인용.

[7]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고타마 붓다 화장 후 남은 206개의 유골은 고타마 족속과 관계가 깊은 다른 여덟 부족들에게 배분되었고, 이들 부족에서는 이것으로 무덤을 만들어 붓다를 숭배했다. 후에 아쇼카 왕은 이 유골 숭배를 통해 불심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 붓다의 무덤을 다시 열어 유골을 가루고 만들어 팔만사천개의 스투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숫자가 정확한지는 알 길이 없으나 모두 고타마 붓다의 몸과 관련된 물건들을 통해 고타마의 가르침을 확인하고자 하는 몸 숭배 신앙의 일환이다.

[8] 존 도미닉 크로산, 『역사적 예수』, 김준우 옮김(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pp.640-41 참조.

[9] 물론 이것은 경전상에 나타난 종교적 엘리트들의 접근방식일 뿐이다. 실제로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대중화의 길을 걸으면서 사실상 다양한 불상, 성상들을 만들어내고 예수와 붓다의 구체적 모습에 집착하는 역사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경우는 불탑(佛塔, 스투파) 신앙에서 불상(佛像) 신앙으로,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로 성상파괴적 자세에서 성상옹호적 자세로 바뀌어갔다. 특히 불교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던 쿠샤나 왕조를 거치면서 서기 1세기 말경부터 동전 같은 곳에 붓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서기 120-130년경에는 구체적인 불상이 제작되기에 이르렀다.(高田修, 『불상의 탄생』, 이숙희 옮김, 서울: 예경, 1994, pp.202-204; p.112쪽 참조) 이론적으로는 붓다의 몸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고 보편적 진리를 향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역사적이고 구체적 존재에 대한 숭배로 이어졌다는 뜻이다. 가령 서기 200년경 기록된 『금강경』에서는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뇨?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런 기록 자체가 사실은 대중의 신앙에서는 몸의 형상, 즉 불상에 대해 집착하고 있음을 반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대승불교로 이어졌다. 이에 비해 유대교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애당초부터 신을 인간적 형상에 따라 묘사하는 데 익숙한 그리스 문화에 노출되어 있었던 초기 교회 구성원들은 예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데 익숙했다. 다만 그리스의 아폴로 신과 같은 모습에서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된 이후부터는 로마 황제를 닮은 예수의 상이 제작되는 등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예수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상상은 대중의 신앙 속에서 더 지속되어온 것이다.

[10] 크로산, 앞의 책, pp.201-202.

[11] 아미타불도 『법화경』에서 말하는 아미타불과 『화엄경』에서 말하는 아미타불은 뉘앙스가 다르다. 법화경의 아미타불은 석가모니 열반 후 석가모니불을 대신해줄 만한 초역사적인 붓다이다. 이미 머나먼 옛날부터 성불해있는 붓다, 아미타유스(無量壽)이다.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면서 언제든 어디서든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 초월적 형상의 붓다인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에 등장하는 아미타불에게는 구체적인 형상의 개념이 약하다.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은 시방에 편만한, 보편적이고 무한한  붓다이다. 그래서 화엄경의 아미타불은 아미타바(無量光)이다. 법화경의 아미타불이 역사적인 붓다 중심적이라면, 화엄경의 아미타불은 법 중심적이다.(武內紹晃, 앞의 글, 163-164頁 참조)

[12] 아미타불과 예수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는 이찬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교토학파와 그리스도교』, 236-263쪽 참조.

[13] 한국 개신교에서는 이 가운데 예수가 저승/지옥에 가셨다(descended into Hell)는 구절을 누구인가 언제인가 슬쩍 빼버렸다. 하지만 천주교회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구절을 담아 신앙고백을 한다.

[14] B. , 『과정신학과 불교』, 김상일 옮김(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177.

[15] 김경재, 『이름없는 하느님』(서울: 심인, 2002), p.235.

[16]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최승언 옮김, 민음사, 2021, p.13.

[17] 폴 윌리암스, 『서양학자가 본 대승불교』, 조환기 옮김, 시공사, 2000, p.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