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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4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 오강남 <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 특집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 오강남 <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 특집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 오강남
기자명 오강남
입력 2009.09.22

들어가면서

《불교평론》에서 요청한 원고의 제목은 ‘도마복음 등 외경과 불교와의 관계’라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최근에 펴낸 《도마복음》 풀이 책1)을 중심으로 해서 《도마복음》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에서 어떤 의미가 있고, 또 앞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도마가 인도로 갔던가, 도마와 인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역사적 진위를 밝히는 작업 등은 이 글의 범위 밖의 것으로서 논의에서 제외됨을 처음부터 밝히는 바이다.

심층에서 만나다

세계 여러 종교를 살펴보면 각 전통에는 두 가지 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쉬운 표현으로 하면 표층(表層)과 심층(深層)이라 할 수 있다. 서양 말로는 엑소테릭(exoteric)과 에소테릭(esoteric)이라 하는데, 불교적 용어로 현교적(顯敎的) 차원과 밀교적(密敎的) 차원이라 할 수 있을까.

표층 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경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종교를 자기중심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경전의 문자적인 뜻 너머에 있는 더 깊은 뜻을 깨쳐 나가려고 노력하고, 무엇보다 종교를 자기중심적인 나를 비우고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찾는 길로 받드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참 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불교에도 표층 불교, 심층 불교가 있고, 그리스도교에도 표층 그리스도교, 심층 그리스도교가 있다. 물론 각 종교마다 표층과 심층 중 어느 것이 얼마나 더 두꺼우냐 하는 비율상의 차이점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그 명칭이 말해주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성불, 곧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심층을 강조하는 종교라는 뜻이다. 그러나 불자들 모두가 다 성불을 궁극 관심사로 여기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많은 불자들이 기복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이상할 것도 없는 현상이라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종교인은 표층적인 관심에서 시작하여 심층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적어도 한국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이 표층적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에 깨달음이라는 심층의 차원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 뿐 아니라 심층을 이야기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이단이라든가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다른 점 한 가지는 불교인들의 경우 자기는 아직 표층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깨달음 같은 심층을 목표로 삼고 있거나 심층적인 불교를 받들고 있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리스도교의 심층적 차원을 이상으로 여기거나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이들을 배척하고 정죄한다는 사실이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유영모, 함석헌 선생님을 백안시하거나 배척한 것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일이 한국 그리스도교에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한국 그리스도인들만의 책임이나 잘못은 아니다. 왜 그런가?

《도마복음》의 배경

1세기 그리스도교가 발생하고 2, 3세기에 걸쳐 발전하면서 그리스도교 안에도 몇 갈래의 신앙 형태가 생겨났다. 지금 우리의 분류를 적용하면 초대교회에 크게 표층적인 그리스도교와 심층적인 그리스도교가 병존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믿는 믿음의 단계에 만족하는 표층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이런 단순한 믿음의 단계를 지나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깨달음의 단계를 추구하는 심층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이들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물’로 세례를 준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오로지 ‘첫 단계’에 불과하므로 이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세례 요한 스스로도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마3:11, 눅3:16) 세례를 주리라고 예언했는데, 바로 이런 세례를 받아 영적으로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층적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물로 세례를 받았을 때는 하느님을 창조주나 심판자로 믿고 우리 스스로를 ‘하느님의 종’으로 여기고 살았지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이제 하느님을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보게 되고 자기들을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로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질투하고 진노하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새로운 하느님, 우주의 질서로서의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과 불로 받는 제2의 세례를 아폴루트로시스(apolutrosis)라 불렀는데, 이는 노예가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는 것과 같은 ‘놓임’이나 ‘해방’, ‘해탈’을 뜻하는 말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표층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는 ‘믿음’을 강조한 데 반하여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비밀을 깨달아 아는 것을 그들은 ‘그노시스(gn굅sis)’라 불렀다. 한문으로 이를 보통 ‘영지(靈知)’라고 번역하고, 영어로는 ‘knowledge’라 옮기는데, 우리말로 ‘깨침’ 혹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원의에 가깝다. 그노시스는 불교의 ‘반야(般若, praj괴켥)’ 곧 혜(慧), 명(明), 지혜(智慧), 현대어로 통찰, 꿰뚫어 봄, 직관 등에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속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 내에 있는 이런 소수의 심층 그리스도인들이 눈의 가시처럼 여겨졌다. 이런 소수의 과격한 주장이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표층 신도들과의 차별화를 불러오기 때문에 교회 내에 불필요한 분열을 조장한다고 보았다. 특히 이들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 내의 계급제도라든가 조직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성향을 보이므로 교회의 권위와 일치를 저해하는 세력으로 여겨졌다.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초대 그리스도교에서는 불행하게도 심층 그리스도교가 억압받고 박해받는 소수의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4세기 이런 심층 그리스도교는 지하로 내려가거나 쇠퇴하고 만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젊은 추기경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등장 때문이었다. 4세기 초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을 통치할 하나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종교, 하나의 신조, 하나의 성서’로 통일할 것을 요청했다. 그에 따라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예수를 하느님과 ‘동질’이라 주장하던 아타나시우스가 예수의 인성을 주장하던 아리우스(Arius)파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아타나시우스는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다양한 신앙 형태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들을 드러내고 있던 그리스도교 문서들을 일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쪽복음처럼 개별적으로 떠돌아다니던 그리스도교 문헌들 중 27권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정경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이 지금 그리스도교에서 신약(新約)이라 부르는 그리스도교 경전이다. 그는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367년 자기의 신학적 판단 기준에 따라 ‘이단적’이라고 여겨지는 책들을 모두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심층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던 깨달음 중심의 문서들은 물론 이런 파기 처분의 대상 1호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집트에 있던 그리스도교 최초의 수도원 파코미우스(Pachomius)의 수도승들이 그 수도원 도서관에서 이런 문헌들을 몰래 빼내 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다음 나중에 찾기 쉽도록 산기슭 큰 바위 밑에 있는 땅속에 숨겨놓았다.

이렇게 숨겨진 문서가 1,600년이 지난 1945년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500Km 떨어진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열세 뭉치로 묶여 있는 이 파피루스 서류 뭉치들 속에는 모두 52종의 문서가 들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지금 그리스도교에서 가지고 있는 정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이름의 복음서들, 예를 들어 《도마복음》 《빌립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복음》 《요한의 비밀서》 등이 있었다.

이런 문서 중 가장 크게 주목 받은 것이 《도마복음》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져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도마복음》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를 혁명적으로 바꾸어주었기 때문이다. 22세에 옥스퍼드대학교 교수가 되고, 그 후 신비주의에 관해 방대한 저술을 낸 앤드루 하비(Andrew Harvey) 같은 이는 1945년에 발견된 이 《도마복음》이 같은 해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가진 문헌이라고까지 하면서 《도마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도마복음》을 읽을 경우 그리스도교에는 표층적인 신앙 형태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심층적인 차원이 거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던 종래까지의 일반적 오해를 불식(拂拭)시키기에 충분하다는 뜻이다. 《도마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깨침’을 강조하고 있고, 거기 나오는 예수는 스스로 깨친 이로서 제자들에게 ‘깨침’을 가르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마복음》의 특징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은 사본의 필체로 보아 대략 기원후 350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 자체는 여러 가지 정황을 참작해볼 때 기원후 약 100년경에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50년에서 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라 여겨지는데, 그렇게 본다면 《도마복음》은 성경에 나오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적어도 10년 내지 20년 정도 더 오래된 전승을 포함한 복음서라는 이야기가 된다.

《도마복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이 114절의 간단간단한 예수님의 말씀만 적어 놓은 ‘어록’이라는 점이다. 이 말씀들 중 약 50% 정도가 성경에 나오는 공관복음서들의 말씀과 평행을 이룬다. 그러나 《도마복음》이 공관복음과 다른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공관복음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예수님의 기적, 예언의 성취, 재림, 종말, 부활, 최후 심판, 대속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그 대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gn굅sis)’을 통해 내가 새사람이 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한다는 점이다.

특히 《요한복음》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더욱 두드러진다. 《요한복음》에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3:16)고 하거나, 예수님을 “나의 주요, 하나님”(요20:28)으로 믿는 등 ‘믿음(pistis)’을 강조하고 있는 데 반해 《도마복음》에는 ‘믿음’이라는 낱말이 딱 한 번, 그것도 제자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깨침을 궁극 목적으로 하는 불교나 기타 세계 신비주의 종교 전통과 궤를 같이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도마복음》과 불교는 다 같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필자는 그동안 논문이나 책을 통해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 배울 것은 배우고 가르칠 것은 가르쳐 주는 협력관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대화를 한다면 무엇보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의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이곳저곳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2)

이제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도마복음》 중에서 불교의 기본 가르침과 맥를 같이하는 것 몇 구절을 인용하여 불교와 연관해서 살펴보면서, 이런 작업을 통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가 어떻게 더욱 활기 있게 진행될 수 있을까를 모색해보는 계기가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하고 기원해본다.

《도마복음》 제22절: 예수께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젖 먹는 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둘을 하나로 하고, 안을 바깥처럼, 바깥을 안처럼 하고, 높은 것을 낮은 것처럼 하고, 암수를 하나로 하여 수컷은 수컷 같지 않고, 암컷은 암컷 같지 않게 하고, 새로운 눈을 가지고, 새로운 손을 가지고, 새로운 발을 가지고, 새로운 모양을 가지게 되면, 그러면 여러분은 그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도마복음》의 핵심과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구절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도마복음》 제4절에서 늙은이라도 갓난아기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젖먹이 갓난아기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 복음서에도 같은 말이 있는데, 거기는 어린아이가 갓난아기라는 말이 없다. 또 천국에 들어가는 요건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마18:4) 것이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마복음》에서는 자기를 낮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나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는 것과 직접 관계가 있다는 말이 없다. 그와는 달리 《도마복음》은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요건으로서 ‘젖먹이 갓난아기같이 됨’이라고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며, 이 젖먹이 갓난아기들이야말로 ‘둘을 하나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둘을 하나로 만든다는 생각은 제4, 22절에 나왔고, 23, 48, 106절에도 계속 나온다. 무슨 뜻인가?

첫째, 물리적으로 갓난아기는 남성의 아버지와 여성의 어머니 ‘둘이 하나가’ 되어 생긴 결과다. 그 아이도 나중에는 대부분 남성이나 여성이 되겠지만, 아직 할례를 받기 전의 갓난아기는 남녀로 분화되지 않은 하나의 상태, 합일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반대같이 보이는 것을 한 몸에 합치고 있는 종합이다.

둘째,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식론적으로 아이는 아직 나와 대상을 분간하는 이분법적 의식이 없는 상태다. 즉, 주객(主客)이 분화되지 않았다. 이런 의식 상태에서는 ‘내외(內外), 상하(上下), 고저(高低), 자웅(雌雄)’ 등 일견 반대되고 대립되는 것 같은 것을 반대나 대립으로 보지 않고 조화와 상보의 관계로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갓난아기의 특성으로서, 이런 특성을 가져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태극기 가운데 붉은색(양)과 파란색(음)으로 된 태극의 음양(陰陽)에서 음과 양의 관계를 말할 때, 음이냐 양이냐 하는 양자택일(兩者擇一)이나 이항대립(二項對立)식 ‘냐냐주의(either/or)’의 시각으로는 실재의 진면목을 볼 수 없고, 음이기도 하고 양이기도 하며 동시에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라는 ‘도도주의(both/and, neither/nor)’적 태도를 가질 때 사물의 전체를 본다고 한다. 음과 양을 독립된 두 개의 개별적 실체로 보지 않고 한 가지 사물의 양면으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요즘 말로 고치면 ‘초이분법적 의식(trans-dualistic consciousness)’을 갖는다는 것이고, 좀 더 고전적인 말로 하면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가 말하는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를 발견하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의 세계를 초월하여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라는 것이다.

사실 세계의 여러 종교에서 ‘양극의 조화’처럼 중요한 개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양의 조화를 말하는 태극 표시는 말할 것도 없고, 위로 향한 삼각형과 아래로 향한 삼각형을 포개놓은 유대교의 ‘다윗의 별’이라든가, 수직선과 수평선을 교차시킨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나, 두 원을 아래위로 반반씩 겹쳐놓고 그중 겹쳐진 부분을 잘라 만든 초기 그리스도교의 물고기 상징, 불교 사찰에서 보는 만(卍) 자 등이 모두 이런 양극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제23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택하려는데,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입니다. 그들이 모두 홀로 설 것입니다.”

여기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천 명 중 한 명”, 심지어 “만 명 중 두 명” 꼴이라니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기보다 더 어려운 셈이 아닌가.

힌두교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즉, 깨달음의 길(j괴켥na marga), 신애(信愛)의 길(bhakti marga), 행함의 길(karma marga)이다. 깨달음의 길이란 우주의 실재를 꿰뚫어 보는 통찰과 직관과 예지를 통해 해방과 자유에 이른다는 것이고, 신애의 길은 어느 특정한 신이나 신의 현현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믿고 사랑하고 받드는 일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고, 행함의 길이란 도덕규범이나 규율을 잘 지키거나 남을 위해 희생적인 선행을 많이 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세 가지 구원의 길 모두 자기중심적 자아를 극복함으로써 새사람이 되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실행하기에 상대적으로 어려운 길과 쉬운 길로 나누기도 한다. 깨달음의 길은 가장 가파르고 어려운 길이라 상근기(上根器)에 속하는 소수에게만 가능하다고 본다. 일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따르는 길은 신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신애의 길이다.

불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있다.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성불하겠다는 선불교의 길을 보통 ‘난행도(難行道)’라고 하고, 아미타불의 원력을 믿고 “나무아미타불” 하며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토종의 길을 ‘이행도(易行道)’라고 한다. 물론 참선하겠다는 사람보다 염불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스스로’ 깨달아 알라는 깨달음의 길은 그만큼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던 모양이다. 결국 《도마복음》식 기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보다, 예수를 믿고 은혜의 선물로 주는 영생을 얻으라고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길을 채택한 사람들이 숫자적으로 더 많았다.

그러기에《요한복음》은 정경으로 채택되어 그리스도교의 정통 가르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반면 《도마복음》은 사라지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식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신앙의 심층 차원을 알아볼 기회가 없던 일반인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인기 품목이 되기 어려웠던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문맹률이 97퍼센트 이상이던 고대 사회와 달리 이제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인터넷 등 대중 매체의 발달로 정보화 시대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나 필자도 한 세대 전에 태어났으면 그리스도교에 깨달음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을지 모른다. 그야말로 이제는 들을 귀, 알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 《요엘》서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욜2:28)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그 후’가 오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지적·영적 환경 속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가물에 콩 나듯’이가 아니라 가마솥에 ‘콩 튀듯’이 등장하리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가톨릭 최고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도 21세기 그리스도교는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신비주의적’이라는 말은 물론 깨달음을 강조하는 심층적 종교의 태도를 의미한다. 독일의 신학자로서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도 근래에 펴낸 그의 책 《The Silent Cry》에서 신비주의 체험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이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른바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ysticism)’를 주장했다. 지금 유럽이나 미국에서 참선이나 명상이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현상이 이런 흐름을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제28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설 곳을 세상으로 정하고, 육신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들이 취해 있음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목말라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 영혼은 이런 사람의 아들들로 인해 아파합니다. 이는 이들이 마음의 눈이 멀어 스스로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취해 있지만, 술에서 깨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온 목적을 천명한다. 그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려는 것이 아니다. 술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인간 실존의 한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만을 실재인 줄로 알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인간들에게 현상계 너머에 있는, 혹은 그 바탕이 되는 실재(實在), 진여(眞如), 여실(如實), 자신의 참모습을 보도록 깨우쳐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마음의 눈이 멀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지혜와 깨달음이 바로 우리 앞에 있는데, 그것을 잡지 못하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절망만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취해 있지만 우리의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를 깨우기 위해 일부러 육신을 쓰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술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나면, 그리하여 심안(心眼)의 개안(開眼)이 있기만 하면, 완전한 ‘의식의 변화’를 맛보게 된다고 했다.

마지막 구절은 종교사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발언이다. 여기에서 “술에서 깨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이라고 할 때 ‘의식을 바꿀 것이다’라고 번역한 이 말의 원문은 콥트어 판에서도 그리스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메타노이아(metanoia)’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을 때 그 ‘회개’에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메타노이아’는 어원적으로 ‘의식(noia)의 변화(meta)’를 의미한다.

단순히 옛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는 식의 회개라는 뜻 그 이상이다. 우리의 이분법적 의식을 변화시켜 초이분법적(trans-dualistic) 의식을 갖게 된다고 하는 뜻이다. 말하자면 성경 복음서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이란 결국 ‘우리의 이분법적 의식을 변화시키고, 그로 인해 하느님의 주권이 내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 풀이해도 무리가 없다. ‘의식의 변화’ 혹은 변혁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갖게 되기를 바라던 최대의 소원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사실 우리 주위에 있는 불교나 유교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불교에서 ‘붓다’ ‘부처’ ‘불(佛)’이란 ‘깨침을 얻은 이(the Awakened, the Enlightened)’라는 뜻이고, ‘불교’라는 말 자체가 ‘깨침을 위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성불하라.”는 말은 “깨침을 얻으라.”는 뜻이다. 유교에서도 신유학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성학(聖學)’이라고 했는데, ‘성인들의 가르침’이라는 뜻보다는 ‘성인이 되기 위한 가르침(Learning for Sagehood)’이라는 뜻이 더 강하고, 성인이란 한문의 ‘성

제77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입니다. 내가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통나무를 쪼개십시오.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돌을 드십시오. 거기서 나를 볼 것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 정도를 검토할 수 있다. 우선 생각해볼 것은 “나는 빛”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나’가 무엇일까 하는 문제이다. 《도마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나’는 한 개인으로서의 역사적 예수님 한 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요8:58) 있었던 그 ‘우주적 나(Cosmic I)’, 곧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한 신성, 하느님, 참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이 제사를 지낼 때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향한 제사임을 강조한 향아설위(向我設位)의 개념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한울님을 모신 내가 곧 한울님이니, 제사를 지내도 그것이 곧 자신에 대한 제사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도 부처님이 어머니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큰 소리로 “하늘 위와 아래에 나밖에 존귀한 것이 없다(天上天下唯我獨尊).”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의 ‘나[我]’도 한 개인으로서의 아기 부처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초개인적 자아(transpersonal self)’, ‘참된 자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이런 초아적 요소를 ‘불성(佛性)’이라 부른다. 이것이 천상천하에서 가장 존귀하기에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 의미를 가질 뿐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빛’이라는 것이 상징하는 종교적 의미이다. 종교사를 통해 볼 때 많은 종교 전통들은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빛’을 강조한다. 우리 속에 있는 신적 요소, 신성, 참나, 참생명은 바로 ‘빛’이라고 한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인습적인 의식에서 벗어나 변화되고 고양된 순수 의식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그 ‘빛’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에 보면 우리 속에 있는 브라만[梵] 혹은 참나[我]를 두고, “그대 홀로―그대만이 영원하고 찬연한 빛이시나이다.”라고 하였다. 불교인들이 염불을 통해 체현하려고 염원하는 ‘아미타’불도 ‘무한한 빛’, ‘무량광(無量光)’의 부처님이다.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 전통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13세기 문헌 《조하르(Zohar)》도 문자적으로 빛을 의미하고, 그 문헌에서 언급되는 절대자 아인소프(En-Sof)도 분화 이전의 무극(無極) 상태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빛’이라 했다.

그리스도교 동방정교 전통에서도 ‘신의 영광’이란 빛이신 신의 특성을 이야기한다고 보고, 이런 빛을 보는 사람이 신과 합일의 경지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퀘이커 교도들도 침묵의 예배를 통해 ‘내적 빛’을 체험하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신비주의 전통에서 ‘빛’은 때 묻지 않은 순수 의식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우리의 내면 세계의 찬연함을 말해주는 가장 보편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주목할 것은 이 절이 말하고 있는 ‘범재신론적 신관’이다. 본문에 ‘나’ 혹은 ‘신성(神性)’이 ‘통나무’에서도, ‘돌’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했다. 도가 문헌 《장자》에 보면 누가 장자에게 “이른바 도(道)라고 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장자가 “없는 데가 없다.”라고 하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한다. 결국 땅강아지나 개미에도, 기장이나 피에도, 기와나 벽돌에도, 심지어 대변이나 소변에도 있다고 하며 이른바 도의 ‘주편함(周遍咸)’적 특성, 도의 편재성(遍在性)을 강조한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이사무애나 사사무애의 경지다.

나가면서

지금껏 《도마복음》 중 단지 몇 절을 뽑아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필자는 앞에서 말한 《도마복음》 풀이 《또 다른 예수》라는 책 서문에서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염원을 밝힌 바 있다. 여기서도 같은 염원을 가지고 이 글을 썼다.

이 짧은 글에서 독자들이 《도마복음》이나 불교의 깊은 가르침이 다 같이 우리에게 ‘심층’ 차원의 종교를 지향하도록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므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이웃 종교’임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손을 잡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데 협력하는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고, 이로 인해 세상이 그만큼 더 밝아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이다. ■




오강남 /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교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는 《길벗들의 대화》 《도덕경》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장자》 《예수는 없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 《세계종교 둘러보기》 《또 다른 예수》, 번역서로는 《종교 다원주의와 세계 종교》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귀향》 《예언자》 등이 있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