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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12

기독교와 불교, 목표는 하나…신과 하나되어 유한성 극복하는 것 : 벗님글방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기독교와 불교, 목표는 하나…신과 하나되어 유한성 극복하는 것 : 벗님글방 : 휴심정 : 뉴스 : 한겨레:


기독교와 불교, 목표는 하나…신과 하나되어 유한성 극복하는 것

등록 :2022-03-11

도(道)는 아무런 걸림이 없는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이 균형을 유지하며 완전하여 모양이 없다.(圓同太虛 無欠無餘, 信心銘) 온 세상에는 시공(時空)이 끊어진(마음을 비운) 보편적인 하나님(부처님)으로 충만하여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 즉 마음자리(光明)의 작용을 보게 되며’, 형상(相)이 본래 형상(相)이 아닌 것을 알면 여래(神)의 모습을 보게 된다.(금강경) 하나님은 오직 한(One) 생명으로 온 세상에 충만하며(諸法實相), 그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왜냐하면 실상(生命)인 하나님(부처님) 외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헛되고 헛된 허상’(諸法空)으로 꿈과 그림자와 같기 때문이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금강경)


하나(One)의 진리인 하나님(부처님)을 현대물리학은 ‘우주에는 오직 에너지뿐이다’(에너지 一元論)라는 명제로 증명하고 있다. 인도의 성자(聖者)인 라마나 마하리쉬는 “모든 종교가 만나는 그 한 지점은, 신(神)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신(神)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예수가 이 세상(코스모스·몸과 마음)에 오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One)의 실상을 바로 보도록 하기 위함이다.(正見)

신(神)은 구약의 질투하고 징벌하는 창조주의 신과 같이 주객이 나누어지는 외부의 신이 아니며, 궁극적 하나(One)의 진리(生命)이다. 따라서 이원적 창조주인 신은 ‘아비 마귀, 살인한 자, 거짓말쟁이 그리고 거짓의 아비’로서 대상의 신이기 때문에 ‘죽음의 신학자’들은 신은 죽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 분(One)이 아닌 주객의 이원으로 나누어지는 신에게 ‘왜 이 세상에 악이 있는가?’(신정신·神正論)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주장한 것은 20세기 서양인들에게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예수에게는 원죄·처벌·심판과 같은 관념이 없었으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일체화를 자신의 즐거운 소식으로 살았다’고 하였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의 진리’(신의 현존)에 대한 신뢰(信心不二)와 마음의 눈(영안·靈眼)을 뜨는 것이다.

‘전체로서 하나(One)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는 시공(時空), 주객을 초월한 진리(생명)이며(無所不在), 참나(靈)인 내 마음의 본질 즉 본래 성품이다.(我是而成佛) 또한 전적으로 타자(他者)가 될 수 없고, 우주적 생명(One)의 궁극이며 전체적 공동의 생명이 바로 편재하는 하나님이며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깨달은 자)는 ‘하나님과 하나(One)’가 된 자이며 신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우리들이 ‘하나님과 하나(One)’가 되기 위하여 즉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다. 즉 타락한 죄인이 구원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원성의 거짓된 나(겉 사람·ego)로부터 벗어나 하나(One)인 참나(속사람·靈)를 깨닫도록 하는 기도이다.

자신의 신적인 본성(神性)을 잊어버린 기독교인은 죄인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도의 성자 라마크리슈나는 종교의 단일성을 주장하면서 “예배실에 모여서 신을 생각하고, 이름을 부르며, 찬양을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영적이어야 하며 더불어 스스로 진리(神性)를 깨우쳐야 한다”고 하였다.

신학자 틸리히는 신비적 현존(現存)인 하나님(부처님)을 ‘존재의 근거’라고, 샤르댕 신부는 ‘순수 에너지’(One)라고, 심층 생태론자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와 불교가 목표로 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성품인 무한한 하나님(부처님)과 하나(One)가 되어 유한성(ego)을 극복하는 영원한 환희이다.(成佛).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온 세상에 충만한 하나님(부처님)을 깨닫기 위해서이며, 이러한 하나(One)의 진리를 깨닫는 방법 중 하나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의 말씀처럼 시간을 초월한 묵상기도, 명상, 참선, 침묵 수행 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부처님)은 모든 감각을 초월한 궁극적 경험의 영역이며, 모든 것은 오직 한(One)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一切唯心造, 화엄경)

글 구자만(개신교 장로· 신학자· 신흥지앤티 회장)


연재[휴심정] 구자만의 종교회통


예수와 부처는 영적인 눈을 뜨게하려 왔다
등록 :2021-12-03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이란 온 우주에는 하나(One)의 진리(생명)로 충만하며, 그 외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겉모습인 허상을 진리의 실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죄이며(요 9: 41), 또한 모든 형상 있는 것은 허망하니, 형상을 본래 형상이 아닌 것을 알면, 진리(One)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주를 전체로서 하나(One)인 것으로 보는 ‘자유와 구원의 자리인 진리’(요 8:32)는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 ‘비유와 상징’ 에 대하여 장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공간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이며, 깨달음이 아닌 인간의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이해한다면 결국 위험에 빠질 것이다”.
유한 상대적인 세계(ego)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 절대적인 세계(One)인 진리(神)를 논(論)할 때 결국 ‘비유와 상징’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영(靈)의 전체성이 아닌 오직 문자나 언어적 해석’(고후 3:6, 고전 1:17)에 의한 독선과 배타성을 버려야 하며, 또한 ‘영적인 진리’(One)는 오직 기독교만 독점할 수 없다(마 5:45).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진리(神)’는 범신론을 주장하는 신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하여 ‘지고(至高)의 일자(一者)’ 즉 ‘만유가 그곳으로부터 나오고 또 그리로 돌아가는 곳’으로 설명된다. 플로티누스는 ‘일자(一者)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고, 엑카르트는 ‘하나님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은 전체성이며 세계의 근원이다’고 하였다. 또한 바가바드 기따에서는 ‘영혼이 해방된 자는 모든 것이 브라흐만(神)이라는 확신을 갖는 자’라고 한다. 따라서 말의 지혜로 만들어낸 신이 진짜 신이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믿도록 강요하는 것은 무지 때문이다(고전 1:17).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사라지는 꿈과 안개와 같지만(諸行無常), 시공을 초월한 진리(One)는 영원하며, 또한 성경 속에 있는 예수의 가르침(진리)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이다. 아인슈타인은 ‘우주는 따로 떼어질 수 없는 에너지의 역동적인 그물(網)이다’(에너지 一元論, E=mc²)라고 ‘하나(One)의 진리(神性)’를 설명한다. 이러한 진리(One)에대하여 현대 과학자들은 ‘물질은 존재하지 않으며 전자기장(電子氣場)의 빛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으로 증명하고 있다.
온 우주에는 ‘생명의 빛인 그리스도로 충만하고”(요 8:12, 롬 1:20), 불성의 광명이 두루 해 있으며(光明邊照), 모든 것은 오직 진리(생명)인 브라흐만(Brahman) 뿐이다. 진리복음에서는 “아버지 자신 외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만물이 그에게서 나온 것들이다”고 하며(롬 11:36),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것이다(요 1:3). 여기서 그리스도는 역사적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모든 것의 바탕이며, 진리(생명)인 神性(energy)이며, 상대적인 것을 초월한 절대적인 하나(One)이다(골 3:11).
예수와 부처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불이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요 18:37) 즉 “나는 본래 신(부처)이다”(我是而成佛, 요 10:34)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함인 ‘영안(靈眼)의 눈뜸’(One)(요 9:39)을 위함이다.

예수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5-26)고 말씀하셨다.
주관과 객관, 선과 악 등의 이원성(ego)을 초월한 절대 무차별의 전체성으로 또한 한결같이 “있는 그대로” 낙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無爲自然). 우리는 둘이 아닌 근본자리를 깨닫고 만물과 하나(One)가 될 때(요 2:4, 갈 3:28) 즉 진리가 시방세계에 두루 충만하게 있음을 자각할 때 바로 천국을 이루게 된다(요 17:21).
‘개체는 전체’(一卽多)이므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진리(One)대로 만족과 평화로움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 불이의 진리(One)에 의하여 창조주와 피조물, 신과 인간, 마음(靈)과 물질 등의 이원적 분별은 모두 유기적 관계의 하나 속으로 사라진다. 현대과학은 물질을 형성하는 원자는 텅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에너지의 상호변화로서 근원은 하나라고 한다(心物一元, 퇴계). 진리인 ‘근본 성품’(神性)은 우주에 편재하는 영(靈)으로 예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동일하며(요 15:27), “부처의 마음은 중생의 마음과 아무 차별이 없는 하나(One)이다”(화엄경). 미즈마로 교수는 “절대자로서의 신이 상대자인 인간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그 신은 절대자 이름을 가진 상대자에 불과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불이의 진리 안에서는 생사문제 조차도 대립이 아니라, 서로를 도와주는 상보적이며, 순리적인 현상이다. 고통을 벗어나 행복하게 사는 길은 영원한 진리인 ‘자신의 생명’(true Self)을 되찾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사물의 본질(One)을 깨닫는 것이다. 즉 생각을 억지로 고요하게 할 것이 아니라, 나와 우주 만물이 “하나(One)의 생명”(神)이라는 것을 믿고, 신의 뜻 즉 천지 우주의 오묘한 순리에 따른 삶이다.
우리의 고통과 공포가 시작되는 것은 ‘무한한 존재’(true Self)라는 참된 성품에 한계를 정하고 유한한 존재라고 여기는 에고(아집)때문이다. 예수는 모든 문제의 해결은 절대(One)에 있는 것이므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비유하여 ‘하나(One)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공중의 새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날아다니게 하는 영원한 ‘하나의 생명’(true Self)은 똑 같이 우리의 내면에도 신비롭게 작용하고 있다. 남전(南泉)선사가 ‘평상심이 도’라고 한 것같이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수행이고, 해탈이고, 도이다.
글 구자만/개신교 장로& 신학박사 &신흥지앤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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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을 넘어서야 절대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등록 :2021-11-24

독일 신학자인 불트만은 성경을 설명하고 있는 서구신학의 세계관과 하나님의 개념은 현대과학의 인식에서 보면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동양신학은 현대과학의 발전 특히 양자 물리학과 상대성 이론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또한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One)라는 “예수의 온전한 가르침”을 잘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점점 쇠퇴하고 있는 원인은 동양사상과 현대 과학이 증명하고 있는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과 유기체적 통합성인 “하나(One)의 진리”(마 23:9, 갈 3:20)를 외면하고, 이원성의 서구적 사유(ego)로 성경을 해석함으로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외면한 탓이다. 다원신학(多元神學)을 펼친 함석헌선생은 “진리는 하나(One)라는 것을 거부한 모든 종교는 장래에 결국 몰락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점점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며(딘 2:4), 모든 만물과 사람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행 17:28) 따라서 이 말씀이 진리라면 기독교 외의 다른 사상에서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시므로 동양사상 역시 “하나님의 보편적인 계시”(롬 1:20)로 보아도 무방하다. 과거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드류 신학대 석좌교수인 스위트는 “성경연구를 나누고 쪼개는 분리(ego)의 서구식이 아니라 상반된 요소를 통합적(One)으로 접근하는 동양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의 폴 니터교수가 대학원의 강의 교재로 출판한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 일 수 없었다>는 책 역시 둘이 아닌 진리(One)의 보편성을 설명하고 있다. 분석심리학자인 융은 동양사상이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면서 “유한한 물질적 삶에 지친 현대인이 정신적 삶에 매혹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학자 데이비드 트레이시는 “다른 동양의 종교들과 심각한 대화를 하지 않고 기독교 조직신학을 논의하는 것은 이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서구 이분법적 사상으로는 과거와 다른 현대인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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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는 희랍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전체성을 보지 못한다. 뜨거운 사막만 계속되는 건조한 사막문화와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해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로 서로 나누는 서구의 배타주의 방식의 틀 아래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리를 강조하는 서구의 “상대적이며, 이원론적인 세계관”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는 적절하지 않다는 “현대물리학이나 ‘이것도 저것도’(both-and)의 전일성(One)과 상보성을 주장하는 동양사상” 이원론적 세계관인 기독교는 비이원론적인 “현대물리학과 동일하게 주장하는 동양의 사상”에 의하여 심각한 자기정체성의 위기에 직면에 있다. 양자역학의 탄생에 크게 기여한 하이젠베르크는 “주체와 객체, 신과 인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는 것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고, 아인슈타인은 “물질은 에너지이며, 물질과 공간은 단일한 전체의 분리될 수 없는 상호 의존적인 면이다”고 증명하였다. 따라서 성경은 기존 이원적 서구식 문화를 배척하는 새로운 시대(New Age)와 신과학시대에 따라 비이원적 동양사상 즉 “일체 존재의 모두가 신성(불성)뿐이다”(막 12:32)고 하는 ‘하나(One)의 진리(생명)’에 의하여 재해석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다.
즉 무(無), 공(空), 기(氣), 선(禪) 등의 비이원성과도 다르다. 독일 신학자인 몰트만교수는 “21세기 신학의 과제는 유럽중심에서 아시아중심의 신학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였다. 미국의 성공회 주교인 존 쉘비 스퐁 주교가 쓴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책 제목이 시사하듯 작금의 상황을 냉철하게 인식하여, 성경을 동양적 하나(One)의 진리로 재해석하여 서구적 이원론으로 왜곡된 현재의 교리를 시정하고, 기독교의 부흥을 위하여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여야 한다. 즉 하루속히 하나(One)의 영적운동으로 물질주의라는 수렁에서 벗어나야 한다.
루터가 “본질로 돌아가자”고 말한 것처럼 지금의 세계 흐름은 초종교적 영성시대가 열리고 있다. 불안이 가득 찬 현대 사회는 믿음을 넘어 “불이(不二)의 진리”(One)를 바로 알고,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 등을 초월함으로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리는 거듭남이 요청된다(요 8:32). 이러한 하나(One)로 거듭남(覺)은 예수의 말씀을 불이인 동양적 문화로 잘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새사람(true Self, 엡 4:24)이 되게 하며, 분별과 시비(ego)를 초월한 자타일체(自他一切)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가 넘치게 한다. 하나(One)의 진리인 신성(true Self)의 자각은 “진리(One)에 눈을 뜨게 하며”(눅 10:23), 인격의 완성과 더불어 자아(ego)중심에서 실재(One)중심으로 변화되게 한다. 즉 개체적인 삶(ego)의 고통에서 벗어나 전체적(영적)인 삶(One)의 절대행복의 경지를 맛보게 한다.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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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궁극적 의미와 그에 따른 인생을 어떻게 살지를 고심하는 자, 문자주의를 벗어나 예수의 온전한 진리(One)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자(요 18:37), 거듭남으로 많은 선지자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진리(One)를 체험하길 원하는 자(눅 10:24), “이 세계는 무엇이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자각하여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하고자 하는 자, 진리에 대한 無知 타파와 “참된 나”(神性)의 깨달음으로 영성을 더욱 풍성히 하려는 자, 아집을 버림으로 무아(無我)의 진리(One)를 깨달아 지금 여기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자(눅 17:21), 영혼을 정화시킴으로 높은 수준의 영적 성장을 이루고자 하는 자, 여러 가지의 문제 특히 악과 고통을 치유하고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여 자유와 행복인 “영생의 구원”(One)을 추구하는 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시아적 문화인 불이의 진리(One)로 역사하시는 성령에 귀를 기울어야한다.
지금의 상황은 이원성(二元性) 시대의 산물인 “서구 신학”을 벗어나 현대 과학시대와 초종교적 영성 시대의 산물인 “비이원성(One)의 신학”의 출현이 요구된다. 전 감리교신학대학 변선환 학장은 “종교의 등불은 달라도 빛은 하나이며, 타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으므로 지구촌에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과 그 진리성을 인정하되 종교간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종교를 배워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새로운 신학이 정립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원적인 현 시대에 맞는 새로운 보편종교로서 합리적이면서, 하나(One)의 진리인 “동양신학(歸一神學)”이 움트는 계기를 기대한다. 또한 예수의 말씀인 “보아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 13:13)의 영적 의미를 잘 이해하여 이 땅에 종교 간의 대화가 풍성해지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이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 모두 신성(참된 나)을 회복하는 깨달음(거듭남)을 통하여 지금 여기서 절대 행복인 “천국의 삶”(One)을 맛보길 기도한다(요 3:3).
글 구자만/신흥지앤티 회장 &신학자 &장로교회 원로장로
<필자소개>

구자만 신흥지앤티 회장 &신학자 &장로교회 원로장로.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신흥목재사를 차려 50년간 운영해온 신흥지앤티 구자만 회장이다. 연세대에서 석사를, 강남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며 신학을 공부한 신학자이자 장로교회 원로장로다. 좋아하던 골프까지 팽개치고 성경과 불경을 연구해 ‘신심명을 통한’<성경과 도마복음의 새로운 풀이>에 이어 <하나의 진리, 예수의 가르침>을 펴냈다. koojm@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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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1

알라딘: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길희성 2019

알라딘: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길희성 (지은이)분도출판사2019-04-05





9.6 100자평(2)리뷰(3)
이 책 어때요?

312쪽

목차

1 엑카르트와 현대
 2 엑카르트 해석의 중심 문제들 
3 엑카르트의 시대와 삶 
4 신과 세계: 하나, 존재 
5 신과 영혼: 지성 
6 초탈과 돌파 
7 하느님 아들의 탄생 
8 하느님 아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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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길희성 (지은이)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현재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열어 종교간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성을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종교에서 영성으로』, 『종교 10강』, 『일본의 종교문화와 비판불교』, 『인문학의... 더보기


최근작 : <일본의 정토 사상>,<지눌의 선禪 사상>,<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사상> … 총 39종 (모두보기)

평점 분포

9.6


대신비가의 신비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르토 2013-01-20 공감 (2) 댓글 (0)


오랫동안 "찜" 해 두었던 명저 드디어 구매... 만지기만 해도 뿌듯~
밭고랑 2012-07-02 공감 (1) 댓글 (0)


마이리뷰



정말 놀라운 책...


마에스터 엑카르트는 동양과 서양의 정신세계를 연결시켜주는 놀라운 책이다.

서유럽의 삼위일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내재된 인간의 본성중 신의 영역에 해당되는 지성을 찾기위해서 돌파를 통해서 그 근저까지 내려가서 신을 만나는 체험을 강조하는 그의 논리는 마치 불교의 사상과도 흡사해서 마치 빨려들듯 읽어나갔다.

초반부의 개념이해가 어려워서 좀 진도가 안나가는걸 빼고는 뒷부분은 정말 정신없이 빠져들듯이 읽어서 정말 좋은 책인거 같다.

이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신과의 만남,체험을 강조하는 그의 논리가 신비주의 사상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 신비주의중에서는 나와의 개인적 경험과의 접점을 찾아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저자처럼 '신의 계시'수준은 아니었지만 깊은 성찰을 통한 수련으로 한평생을 산 영적인 거인이 수천년을 건너 시공을 초월해서 오늘날의 나에게 깊은 영감을 준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만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교회의 가르침가운데에서

칭의의 구원만을 강조하면서 어린 신앙의 양산만을 그래서 대형화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부르는 교회의 모습에 싫증이 나신 분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도 중요하며 구원에는 성화의 구원과 승영의 구원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원하는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 접기
도사 2010-02-24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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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에크하르트 입문서


"단언컨대" 최고의 에크하르트 입문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영성 분야가 각광받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에크하르트는 반드시 주목해야 할 영성가라고 생각된다. 원서만 읽었을 때 솔직히 이해하기 쉽지 않았는데 한글로된 입문서가 출간된지 뒤늦게 알았다. 비교사상상적 관점에서 에크하르트의 사상, 삶, 핵심 주제들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정리해 두었다. 출간된지 10년이나 지났지만 오랫만에 참 좋은 책을 구입하게 되어 기쁘다.
박사 2013-08-2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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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엑카르트의 초월
Thanks to
러브굿 2010-12-10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언어에 대하여



서양철학사 관련 책을 읽은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칸트를 필두로 한 독일관념론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에서 정립된 철학용어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런 철학사의 흐름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으나, 일본이 근대화되던 시기에 독일관념론의 용어들을 번역하면서 한자로 조어한 용어들이 현재 우리나라 언어로 고스란히 계승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철학용어는 결코 무시할 게 못된다.

우리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서양철학사 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할 때 독일관념론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도 다름아닌 그 번역용어들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 아닐 것이다. 가령, “관념”, “객관”, “인식”, “본질”, “오성”, “이성”, “지성”, “현상”, “경험”, “감각”, “감관”, “의미”, “근거”, “인과” 등등의 낱말들은 길게 역사를 추적하면, 일본 번역어를 거슬러올라가 독일관념론,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철학용어에 다다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그 용어들을 입에 올릴 때 우리의 개념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우리의 개념은 그 체계와 분리된 의미를 띠기 어렵다. 다름아닌 일본 번역어가 독일관념론에서 정의된 개념에 맞게 번역된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이 칸트라는 저수지로 흘러든 뒤 이후의 철학사를 향해 흘렀다는 칸트주의자들의 평가는 과장된 면이 있겠으나, 적어도 그 용어들의 흐름을 고려해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닐 성싶다. 그만큼 우리는 그 용어들을 독일관념론에서 정의된 개념의 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개념틀은 엄밀히 말해 한 시대의 정신에 불과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그 용어들의 역사성을 밝혀내면서 개념틀을 뿌리채 흔든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라이프니츠-볼프 이래의 개념체계, 즉 몇 세기에 걸쳐 서양철학사를 주조했던 개념체계를 해체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현대독일어 문법에 허용되지 않는 희한한 독일어를 남발하는 것은 독일철학 용어로 편입된 언어들을 옛 시대의 의미로 복원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그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으니까.


에크하르트는 라이프니츠-볼프보다 약 400년 앞선 세대에 속한다. 따라서 그의 논고에는 “인식”, “이성”, “오성”, “본질”, “현상”, “근거” 등의 독일어가 등장하지만,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개념틀 내지 독일관념론의 개념틀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까닭도 바로 이러한 철학사적 흐름 때문이다. 바꿔 말해, 에크하르트의 글에 등장하는 “인식”, “이성”, “오성”, “본질”, “현상”, “근거” 등의 낱말들은 강단철학에서 협소한 개념체계로 굳어지기 이전의 의미를 갖고 있다. 거기에다 그의 중세고지독일어(Mittelhochdeutsch)는 현대독일어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언어에 접근할 때 매우 조심스럽게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다가가야 할 것이다.

가령, “ein lebende wesende istige vernünftigkeit”(이부현은 “살아 있고 본질적이고 존재하는 이성”으로 옮겼다)에서 “wesend istig”(본질적이고 존재하는)라는 낱말들은 현대독일어에서 이미 사어가 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형으로부터 “Wesen”(본질)이라는 명사의 동사가 있었으며, “Sein”(존재)이라는 명사 내지 동사의 형용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본질하다”로? 아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어법상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질”이라는 번역어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의 협소한 개념에만 적합할 뿐, 그 이전의 언어세계에는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경우 현대독일어에 남아 있는 “abwesend”(결석하다), “anwesend”(참석하다)라는 분사형을 함께 거론하며 “Wesen”이 원래 동사임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본질” 대신에 “임재하다”, “임하다”, “출석하다” 등의 의미로 개념을 복원시킨다. 이렇듯 언어들이 본래의 의미로 회귀하게 되면, 독일관념론같은 개념체계는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사상누각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 체계는 한갓 협소한 시대정신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언어는 독일어의 본래 의미와 함께 움직인다. 따라서 에크하르트의 글을 읽을 때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라이프니츠-볼프 체계 이래 형성된 개념틀을 깡그리 잊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철학적 개념들을 거의 모두 잊고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따라서 본래적인 이해로 보면 신은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지성이거나 인식이므로, 그러니까 다른 어떤 존재도 섞이지 않은 순수 인식이므로, 그 유일무이한 신이 자신의 인식을 통하여 사물들을 존재 속으로 호출하기 때문이다, 다름아니라 신 안에서만 존재는 인식이므로. . .

신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은, 신의 온 존재는 인식 자체이므로 신은 순수 지성이라는 점이다.

Es ergibt sich also offentlich, daß Gott im eigentlichen Verstande einzig ist. Und da er Intellekt oder Erkennen ist, und zwar reines Erkennen ohne Beimischung irgendeines andern Seins, so ruft dieser einzige Gott durch sein Erkennen die Dinge ins Sein, eben weil in ihm allein das Sein Erkennen ist . . . Er wollte und lehren, daß Gott reiner Intellkt sei, dessen ganzes Sein das Erkennen selbst ist.

— Josef Quint, Deutsche Predigten und Traktate, 7. Auflage, 24면

위 인용문에서 “신은 지성”, “신은 인식”, “신은 순수 인식”, “신의 존재는 인식 자체”, “신은 순수 지성” 등의 표현을 현대적인 개념틀로 파악한다면 십중팔구 그르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번역은 이렇게밖에 하지 못할 것이고, 필연적으로 중층적 몰이해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러나 그 중층적인 몰이해를 걷어낼 수 있는 역량의 독자들을 위해서, 물론 그런 독자들은 소수이겠지만, 그래도 각 용어들에 대하여 엄밀히 번역해야 한다. 가령 우리말의 자연스런 가독성을 위해 “Intellekt”, “Vernunft” 등을 일괄적으로 “이성”으로 번역한다거나, “Vernunft”의 번역어로 “지성”이나 “이성”을 번갈아 채택한다거나 하지는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이부현의 번역은 이런 착오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의도적인 것인지 착오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그의 일관되지 못한 번역어 채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나중에 이부현의 번역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 개념들, 즉 “순수 인식”, “인식 자체”, “순수 지성” 등의 개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그 개념들의 변천사를 면밀히 검토한다하여 그 의미가 포착될 리는 만무하고, 우선은 자신이 그 개념들에 대하여 품고 있는 의미를 모두 털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개념들은 에크하르트의 직접 경험을 시사하는 암시의 언어일 뿐, 사상 체계를 확립하거나 분석하는 치밀한 논리의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문제는 역시 경험이다. 성실한 책읽기와 분석을 요구하는 언어가 있는 반면, 고도의 직접 경험을 요구하는 언어도 있다. 에크하르트의 언어는 바로 후자의 언어이다. 남녀의 감정놀음인 사랑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직접 경험을 요구하는 판에,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사태를 가리키는 언어를 그런 경험이 전혀 없이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다.

신비가는 그 어떤 사상가보다도 언어를 그 극한까지 밀어붙혀 사용한다. 그는 당대의 언어는 물론 당대의 사상적 체계조차도 자신의 경험 뒤에 따라오는 하나의 그림자, 하나의 가벼운 도구로 사용한다.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역사적으로 흔들린다는 의미에서 그 언어는 극한에 이른다. 바로 이 의미에서, 니체는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이고 비유가 무엇인지 더 이상 개념을 얻지 못하리라”고 단언한다.

이미지나 비유가 어느 사상체계나 어느 감각세계 내에서 그 구조에 맞게 피어나는 꽃이라면, 신비가의 경험에서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사용하는 모든 수법들, 모든 표현들, 모든 사상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구조 자체가 이미지요 비유가 된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영원의 철학”의 언어가 아니라 (그런 형이상학적 언어를 추종하는) 철학자들의 심리를 폭로하는 실마리, 즉 일종의 비유나 이미지 같은 것, 심리학적 언어가 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빌어 말하자면, 현실은 (혹은 현실이라고 믿는 그 무엇은, 혹은 철학자들이 몸담은 사상체계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또 다른 그림자인 것이다. 그리하여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와 실제, 비유와 사실 간의 복합적 관계가 혁신되거나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비가의 언어라는 언어는 모두 이미지나 비유나 상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가면에 가깝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는 이미지나 심리의 연상을 따라가면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그것은 그림자 놀이이므로), 사상서들을 읽을 때는 추론이나 논변, 논리를 따라가면 그 귀결에 도달할 수 있지만(그것 역시 그림자 놀이이므로), 신비주의 문헌을 그런 식으로 독해하면 필연적으로 그림자에 속아넘어가 좌초하게 될 것이다(그것은 그림자 놀이가 아니라 그림자 바로 그것일 뿐이므로).

가면은 가면 뒤에 얼굴이 있다는 것만 알릴 뿐, 얼굴을 묘파하지 않는다. 가면과 얼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이 강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말라. 이 진리와 같아지지 않는 한, 이 강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폐되지 않은 진리, 즉 신의 마음으로부터 직접 도래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 설교 32

그의 강론, 그의 언어는 그림자와 그림자가 긴밀히 연계되는 그림자 놀이가 아니다. 그의 언어는 찰나찰나 흔들리는 그림자, 찰나찰나 명멸하는 그림자, 순수한 그림자다. 진리를 가장 덜 은폐하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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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조 2009-07-15 공감 (3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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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신비 신학자요 수도자였던 에크하르트. 기도만 할줄 알았는데 그의 관한 책이 적지 않다. 안셀무스가 논리적 신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면 에크하르트는 신비주의를 추구한다. 그의 관한 책을 일단 찾아 놓고 조금씩 정리해 나가자.


에크하르트의 책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아직 영어로는 많이 번역되었지만 한글로는 몇 권되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서적이 더 많다. 일단 독일어 논고와 설교1이 보이고, 선집이 한 권보인다. 이 세권부터 사는 것이 우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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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7-12-13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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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31

알라딘: 범한대역 바가바드기타 | SNUP 동서양의 고전 13 길희성

알라딘: 범한대역 바가바드기타
범한대역 바가바드기타  | SNUP 동서양의 고전 13  
길희성 (옮긴이)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13-06-20
원제 : Bhagavadg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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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본4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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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바가바드기타>는 독립적인 책으로 읽히지만 실은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일부로서, 비슈누의 여덟 번째 화신 스리 크리슈나의 경전이다. 
도합 18장 700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절은 범어 32절로 짜여 있다. 
<기타>의 핵심 사상은 요가에 있으며, 그 내용은 크리슈나가 전쟁을 앞둔 주인공 아르주나의 고뇌에 응답하는 설교로 구성된다.


목차

Ⅰ. 아르주나의 낙심 arjunavi?ada-yoga
Ⅱ. 이론의 요가 s??khya-yoga
Ⅲ. 행위의 요가 karma-yoga
Ⅳ. 지혜의 요가 jn?na-yoga
Ⅴ. 행위의 포기 요가 karmasa?ny?sa-yoga
Ⅵ. 명상의 요가 dhy?na-yoga
Ⅶ. 지혜와 통찰의 요가 jn?navijn?na-yoga
Ⅷ. 불멸의 브라만 요가 ak?arabrahma-yoga
Ⅸ. 으뜸 지식과 으뜸 비밀 요가 r?javidy?r?jaguhya-yoga
Ⅹ. 현현의 요가 vibh?ti-yoga
?. 만유의 형상을 알현하는 요가 vi?var?padar?ana-yoga
?. 신애의 요가 bhakti-yoga
ⅩⅢ. 밭과 밭을 아는 자를 구별하는 요가 k?etrak?etrajnavibh?ga-yoga
ⅩⅠⅤ. 세 요소를 구별하는 요가 gu?atrayavibh?ga-yoga
ⅩⅤ. 지고의 인격 요가 puru?ottama-yoga
ⅩⅤⅠ. 신적 운명과 악귀적 운명을 구별하는 요가 daiv?surasa?padvibh?ga-yoga
ⅩⅤⅡ. 세 가지 믿음을 구별하는 요가 ?raddh?trayavibh?ga-yoga
ⅩⅤⅢ. 해탈을 위한 포기의 요가 mok?asa?ny?sa-yoga

추천글
인도의 지혜 - 헤르만 헤세 (소설가, 시인) 


저자 및 역자소개
길희성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현재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열어 종교간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성을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종교에서 영성으로』, 『종교 10강』, 『일본의 종교문화와 비판불교』, 『인문학의 길』,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인도철학사』, 『일본의 정토사상』, 『보살예수』, 『지눌의 선사상』 등이 있다. 현재 길희성 전집(‘종교와 영성 연구’ 약 22권)을 순차적으로 출간 중이다. 접기
최근작 : <일본의 정토 사상>,<지눌의 선禪 사상>,<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사상> … 총 3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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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인도의 ‘위대한 영혼(mah?tma)’ 간디는 영국 유학 시절 에드윈 아놀드 경의 『바가바드기타』의 영문 번역서(The Song Celestial)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후 이 고전을 평생 자기 삶의 확고한 지침서로 삼았다. “『기타』는 나의 행동의 틀림없는 안내자가 되었으며, 모르는 영어 단어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듯이 나는 나의 모든 어려움과 시련을 해결하기 위해 이 행동의 사전을 찾아보았다.”고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하고 있다. …… 현대 힌두교를 만든 것은 바로 『바가바드기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힌두교 개혁가들에게 자신들의 종교 전통에 자긍심을 불어넣고 그들의 정신적 정체성 형성에 주춧돌로 작용한 책, 그리하여 힌두교의 바이블처럼 숭앙받는 책이 이 고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에 힘입어 『기타』는 현대 인도인뿐 아니라 전 세계 지식인과 종교인의 사랑을 받는 고전이 되었다." - ‘해설’중에서 발췌

『바가바드기타』는 독립적인 책으로 읽히지만 실은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일부로서, 비슈누의 여덟 번째 화신(avatara) 스리 크리슈나의 경전이다. 도합 18장 700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절은 범어 32절로 짜여 있다. 『기타』의 핵심 사상은 요가에 있으며, 그 내용은 크리슈나가 전쟁을 앞둔 주인공 아르주나의 고뇌에 응답하는 설교로 구성된다. 접기

알라딘: 영적 휴머니즘, 최고 종교학자 길희성이 꼽은 영적휴머니스트는


최고 종교학자 길희성이 꼽은 영적휴머니스트는

등록 :2021-08-10 
조현 기자 사진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심도학사의 서재에서 만난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조현 기자종교는 모든 가르침의 근원이다. 또한 종교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살육하고, 전쟁을 일삼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도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사회와 남북의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갈등과 적개심을 가장 부추기는 것도 종교라는 이름을 내세운 이들이다. 따라서 종교는 가장 고귀한 인간을 지향하지만, 평균적인 인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중세적 억압을 넘어 인류 진보가 얻어낸 ‘휴머니즘’과 이상적 종교성인 ‘영성’이 만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할까.


길희성(78) 서강대 명예교수가 <영적 휴머니즘>(아카넷 펴냄)이란 책에서 제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길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으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거쳐 학술원 회원이기도 한 그는 2011년부터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지어 영성적 고전공부를 이끌어왔다. 지난 6일 심도학사에서 만난 길 교수는 평생을 씨름해온 종교적 여정을 마치고 정자에 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무려 900여쪽의 이 책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길 교수는 크리스천이다. 외조부를 비롯해 집안에 목사와 장로들이 많다. 한완상 교수 등과 힘을 모아 새길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보조지눌의 선사상을 연구해 불교를 가르쳤고, <보살예수>나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같은 다원주의적 저작과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책을 썼다. 부드러운 성품과 달리 독선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예언자처럼 매섭게 비판해와 보수개신교계에선 그를 반기독교인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가 종교적인 책을 ‘최후의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기독교와 종교적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해오다 왜 말년에 ‘영적 휴머니즘’을 들고 나왔나?

“목욕물이 더럽다고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릴 수는 없다.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는 외피고 본질은 영적 휴머니즘이다. 이제 종교적 인간보다는 영적 인간을 말할 때가 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

―‘영적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모두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라는 예수 자신의 가르침에 근거한 휴머니즘이다. 이런 영적 인간관은 불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유교 등 세계 모든 주요 종교 전통의 공통적인 핵심이다.”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심도학사에서 만난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 조현 기자―‘세속적 휴머니즘’으로는 부족하다고 보는 이유는?

“중세적 신본주의를 깨고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쳐 자유와 인권을 중시한 게 ‘세속적 휴머니즘’이다. 그러나 예수를 근대적 의미의 휴머니스트로 보는 것은 착각이다. 세속적 휴머니즘이 지향하는 자유가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맹목적인 자유를 위한 자유가 되는 순간 에리히 프롬의 예견대로 독재나 전체주의로 도피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된다.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힘차게 외치고 출발한 프랑스 혁명 뒤에 공포정치가 도래한 것을 보라. 도덕과 공정한 정의, 영성을 상실한 근현대 서구문명의 한계를 세속적 휴머니즘이 보여주고 있다.”

―‘세속적 휴머니즘’에서 ‘영적 휴머니즘’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는?

“전통사회의 부조리한 사회제도와 관습에서 수많은 사람을 해방시켜준 계몽주의 이전이나 종교가 정치권력과 결탁해 질서를 유지하던 때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 휴머니즘의 토대가 되는 이성과 상식에 반해선 안 된다. 하나의 종교 전통에 고착되거나 매달리지 않고,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이며, 자연계를 감싸면서도 초월하는 따뜻한 인간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개신교 신앙인으로서, 철학자로서 가장 큰 고뇌는 무엇이었나?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주의적인 신앙과 정통 교리가 인간의 상식과 지성에 반하는 면이 너무 많고 크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지성에 부담을 주거나 상식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 종교가 좀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면 안 되나’ 하는 의문이 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철학자든 신학자든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내가 아는 서구 사상사를 장식한 위대한 사상가 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영적 휴머니즘’이 그 고뇌에 대한 답인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신앙을 유치하게 만드는, 신과 인간을 유사하게 생각하는 신인동형적 사고, 그리고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근본주의다. 많은 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 못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묻지마 신앙’에 빠지거나, 아예 종교에 담을 쌓고 세속적 삶에 자신을 맡긴다. 이 불행한 양극단의 선택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인천시 강화군 내가면 심도학사에서 심도학사 학장인 길희성 서강대 명예교수가 거닐고 있다. 조현 기자―고뇌는 젊은 날 교회에서 시작됐나?

“그렇다. 영락교회 신자로서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러나 전혀 감동이 없었다. 한국 개신교 주류를 복음주의라고 하는데, 말로는 죄인 죄인 하지만, 실제로는 죄의식이라는 게 없다. 차라리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면 낫겠는데 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승리주의에 젖어 타종교를 무시하고, 미국을 할아버지쯤으로 여겨 역사의식이라는 게 없다. 기본적 이성과 상식을 무시해 세속적 휴머니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신학적 상식조차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상징이고 ‘아날로지’(유비)다. 그게 신학의 가장 기본이다. ‘저 친구는 곰이다’는 말은 ‘인간이 아니고 진짜 곰’이라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데 문자주의, 근본주의에 빠진 한국 개신교 목사와 신자들은 ‘진짜 곰’이라고 한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있다는 것이다.”

―이성 없는 신앙은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 교회와 신학계는 이성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만, 이성 없는 신앙은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욕망과 생각을 하느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가 너무 쉽다. 중세를 대표하는 토머스 아퀴나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이어 신앙과 이성을 종합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철학적 이성보다 과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기술혁명시대다. 또 고대 그리스 철학보다 더 서양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을 매료시키는 불교나 노장사상 등이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어떤 철학이나 종교도 상대성을 초월하지 못하는 다원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토머스 아퀴나스의 사상적 한계도 분명하다.”

―대표적인 영적 휴머니스트로 예수와 중국 선불교의 임제 선사, 독일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제시한 이유는?

“예수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곧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보여준 참된 인간이었다. 에크하르트는 내가 아는 한,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와 우리 인간들 사이에 조금의 차이도 없다는 것을 대담하게 가르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임제는 불교 냄새도 풍기지 않고, 어떤 특정한 이념과 관념조차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이 당당하게 사는 벌거벗은 참사람이었다. 최시형은 경천, 경인에서 나아가 경물까지 가르쳤다. 슈바이처보다 훨씬 먼저 인간중심주의까지 넘어선 것이다. 길을 잃은 문명의 앞길을 비춰주는 이들이 바로 이런 영적 선각자들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well/people/1007175.html#csidx6d81bf98077c6628462c4a41b9aef68






알라딘: 영적 휴머니즘
영적 휴머니즘 - 종교적 인간에서 영적 인간으로   
길희성 (지은이)아카넷2021-07-01

924쪽

책소개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학을 전공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50여 년 동안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피력해 온 탈종교 시대의 종교론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은 저자의 학문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는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 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목차
머리글 7
I. 영적 휴머니즘
1. 두 가지 휴머니즘 29
2. 영적 인간관 95
II. 성서적 신앙, 형이상학적 신관, 세속적 휴머니즘
1. 유일신신앙의 종교와 형이상학적 종교 144
2. 예언자 정신 151
3. 형이상학적 신관의 대두 159
4. 유일신신앙의 의의 167
5. 역사의 하느님 신앙과 신의 섭리 175
6. 토마스 아퀴나스: 신앙과 이성의 종합 223
7. 유명론과 종합체계의 붕괴 229
8. 오컴, 종교개혁, 그리고 서양 근대의 태동 239
9. 계시와 이성에서 신앙과 과학으로 243
10. 유명론, 도덕실재론, 목적과 의미가 사라진 세계 247
11. 위기에 처한 성서적 신앙 269
12. 스피노자와 칸트 이후의 신학 283
13. 세속주의의 종교비판 293
14. 다원화된 현대세계와 종교다원적 신학 299
III. 자연적 초자연주의: 영적 휴머니즘의 신관
1. 두 가지 창조론 335
2. 새로운 신관의 기본 구도 351
3. 로고스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 신의 양면적 본성 379
4. 창조 개념과 인과성의 문제 429
5. 보편적 성육신의 관점에서 본 창조와 구원 459
6. 무(無)로부터의 창조? 489
7. 악과 신의 섭리 문제 519
8. 특별섭리와 신의 행위 539
9. 부활신앙과 부활사건 563
10. 진화적 창조의 의미 591
11. 형이상학적 신관과 인격신관 607
12. 신론 후기 643
IV.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
1. 10가지 극한적 질문들: 세속화된 근대 이성을 넘어 675
2. 새로운 영성 745
3. 영적 휴머니즘의 길을 배우다: 4명의 영적 휴머니스트 837
부록: 심도학사 개원 강연문 857
참고문헌 869
찾아보기 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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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휴머니즘은 같이 갈 수 있을까?
P. 30
영성이란 신을 향한 갈망이며 신과의 일치를 위한 노력이다. 영성과 영적 삶은 종교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종교는 현대 세계에서 사라질지 모르지만, 영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본성상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영적 인간관에 바탕을 둔 영적 휴머니즘(spiritual humanism)은 서구 근대의 세속화된 인간관에 기초한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과 여러 점에서 다르지만, 둘은 휴머니즘의 정신으로 함께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한
다.  접기
P. 118
영적 휴머니즘은 성령을 받고 싶어 하고 성령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 내재하는 선험적인 영적 본성이라고 본다. 이 영적 본성은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험적(a priori)인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 혹은 하늘이 부여한, 성령을 갈구하고 성령을 받고 성령에 따라 살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인간 모두에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고, 사람이면 모두에게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수용할 수 있는 잠재적이고 선험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성리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이고 천성이다. 간단히 말해, 성령은 인간학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접기
P. 161
성육신 사상과 사건이 말하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완벽한 일치(divine-human unity, 신인합일)가 이루어졌다는 진리다. 문제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본성상의 합일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교 한 사람에게서만 이루어졌다는 배타적 주장에 있다. 앞으로 우리는 성육신이 모든 사람의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시각,... 더보기
P. 214
나는 세계를 신의 유출 내지 현현으로 보는 진화적 창조 개념에 따라 예수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만물이 신에서 출현한, 혹은 신이 낳은 자식과도 같은 신의 육화임을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실로 ‘파격적인’ 보편적 성육신 사상임을 나 자신도 잘 안다. 천지만물이 하느님으로부터 출현하는 장구한 세월에 걸친 진화적 창조의 정점에서 출현한 인간은 모두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성육신이라는 귀하디 귀한 존재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성육신은 2천 년 전에 유독 예수라는 한 사람에서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 해당하는 보편적 의미와 진리를 가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성육신 사건보다 더 놀라운 사건은 우주 138억 년의 진통 끝에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존재가 출현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접기
P. 319
인간의 무서운 편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교로‘부터’ 오는 편견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에 ‘대한’ 세속주의의 편견이다. 영적 휴머니즘은 이 두 가지 편견 모두로부터 자유를 주장하는 제3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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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길희성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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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2011년부터 현재까지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현재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열어 종교간 울타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영성을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 『종교에서 영성으로』, 『종교 10강』, 『일본의 종교문화와 비판불교』, 『인문학의 길』,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인도철학사』, 『일본의 정토사상』, 『보살예수』, 『지눌의 선사상』 등이 있다. 현재 길희성 전집(‘종교와 영성 연구’ 약 22권)을 순차적으로 출간 중이다. 접기
최근작 : <일본의 정토 사상>,<지눌의 선禪 사상>,<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사상> … 총 3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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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탈종교 시대에 종교가 아직 살길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이다. 영성이야말로 종교의 핵이다.”

기독교 신자이면서 불교학을 전공한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가 50여 년 동안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피력해 온 탈종교 시대의 종교론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은 저자의 학문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책이 될 수 있다는 심정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 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탈종교 시대에서 종교가 아직 살길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서 영성으로의 과감한 전환이며, 영성은 종교의 핵”임을 강조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종교간 그리고 성과 속의 경계를 넘어서는 제3의 길, ‘초종교적 영성’을 제안함으로써 유일신론을 넘어서는 ‘포월적 신관’을 제시한다. 인간 본연의 순수한 영성인 영적 휴머니즘을 회복하고 심화할 필요성과 종교의 유무를 떠나 개인의 진정한 ‘참 나’를 찾을 수 있는 열린 종교로의 전환을 거듭 강조한다.

I부 ‘영적 휴머니즘’에서는 세속적 휴머니즘과 영적 휴머니즘을 비교하면서, 두 가지 형태의 휴머니즘이 지닌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이 손을 잡고 함께 현대문명을 주도해 나갈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II부 ‘성서적 신앙, 형이상학적 신관, 세속적 휴머니즘’에서는 세속적 휴머니즘이 등장하여 근대 문명을 주도하게 된 과정을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성서적 신앙의 성격과 붕괴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사상사적으로 고찰한다. 아울러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의 붕괴와 정신적 공백에서 오는 위기, 특히 목적론적 세계관의 붕괴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근대 과학의 기계론적 사고와 세계관의 도전, 그리고 이로 인한 현대인들의 정신적 위기를 삶의 무의미성의 문제에 초점을 두고 고찰한다.

III부 ‘자연적 초자연주의: 영적 휴머니즘의 신관’에서는 이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초자연주의적인 신관에 있다는 판단 아래 ‘자연적 초자연주의’ 신관 혹은 ‘포월적 신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신관을 제시한다. 자연적 초자연주의 신관에 따르면, 신에게는 양면적 본성(the bipolar nature of God)이 있어 신의 ‘로고스’와 ‘원초적인 물질적 창조력’이라고 불렀다. 이 두 개념은 신의 양면적 본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새로운 신관의 두 축이다. 둘은 물질과 정신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적 사고로는 결코 잡히지 않는다.

IV부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에서는 새로운 신관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영적 휴머니즘의 길과 영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한다. 첫째, 영적 휴머니즘의 길이 오늘의 세계를 주도하는 세속적 휴머니즘적 상식과 이성에 따른 가치들에 반하지 않고, 오히려 세속적 휴머니즘보다 더 성숙하고 힘이 있는 진정한 휴머니즘이라는 점을 논한다. 둘째, 영적 휴머니즘의 직접적인 사상적 토대가 되는 영적 인간관과 신관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는 영적 삶의 근본 성격을 논한 다음, 이러한 영적 휴머니즘의 영성을 가르침과 삶 속에서 실현한 영적 휴머니스트 네 명(예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임제 의현 선사, 해월 최시형)을 소개하고 살펴본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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