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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8

붓다의 생애와 사상 – 마성 글, - 산자야 (13 mentions)

붓다의 생애와 사상 – 디지털 불교

붓다의 생애와 사상


불타(佛陀)와 불전(佛傳)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이 글은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3년 4월호), pp.11-19에 게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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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이번 호부터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불교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붓다의 생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불교계에서는 출가 · 재가를 막론하고, 붓다의 생애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거나 거의 무시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재가 불자들은 붓다의 생애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국불교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인 기복적인 신앙과 잘못된 신앙 형태들은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야기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자신의 인격향상과 올바른 불교관 정립은 물론 잘못된 불교 신앙을 바로 잡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500여 년 간 인류의 스승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었고, 불교의 개조(開祖)로서 받들어져 온 고따마 붓다(Gotama Buddha)께서 실제로 어떠한 생애를 보냈으며, 또 그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가능한 한 정확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 공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붓다의 생애 속에는 신화적(神話的) · 전설적(傳說的)인 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붓다께서 가르쳤다는 교설(敎說) 속에도 후세 사람들의 가필(加筆)과 윤색(潤色)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러한 후대의 요소들을 되도록 배제(排除)하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서의 붓다의 생애와 그 가르침을 가능한 한 사실에 가깝게 접근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실시해 온 연구 방법론입니다. 주로 서구의 불교 학자들은 신화와 전설로서의 붓다가 아닌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붓다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고자 시도하였으며, 지금도 이러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이기영(李箕永) 박사가 처음으로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 붓다의 생애를 다루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이기영 지음,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의 불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높게 평가 받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출판될 당시(1965)에는 아직 학문적으로 이러한 접근 방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책이 한국의 불자들에게 많이 읽혀졌더라면 한국불교는 지금보다는 좀더 나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상황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제는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생애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신화와 전설로 가득 찬 불전문학(佛傳文學)에 기록된 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붓다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연속 강좌를 마련하게 되었음을 밝혀둡니다.

2. 붓다의 호칭(呼稱)과 불전(佛傳)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붓다를 가리킬 때, 일본의 불교 학자들은 대부분 ‘석존(釋尊)‘이라고 부릅니다. 예로부터 중국 · 한국 · 일본에서는 관례적으로 ‘석가족(釋迦族)의 존자(尊者)’라는 의미로 ‘석존(釋尊)’이란 존칭을 널리 사용해 왔습니다. 이 말은 원래 중국에서 ‘석가모니 세존(釋迦牟尼 世尊)’ (혹은 釋迦牟尼尊) 또는 ‘석가세존(釋迦世尊)’ (혹은 釋迦尊)이라고 하던 것을 줄여 쓴 말입니다.1)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석가(釋迦)’라고 하는 호칭도 사용되고 있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붓다가 출생한 종족의 이름이지 자신의 이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관용적으로 쓰여진 익숙해진 호칭입니다.2) 그런데 “불타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석가모니, 또는 석존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3)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석존의 호칭으로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붓다(Buddha)’입니다. 이것은 인도 · 동남아시아 및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널리 채용되고 있는 호칭입니다. 중국에서는 ‘불(佛)’, ‘불타(佛陀)’로 음사(音寫)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4) ‘붓다’라는 말은 불교의 전용어가 되었지만, 본래는 보통명사이며 자이나교(Jaina)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붓다란 ‘깨달은 사람(覺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석존 이외에 또 다른 붓다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이미 초기불교에서도 석존 이전에 여섯 명의 붓다가 존재하였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존을 고타마(Gotama)라고 하는 그의 족성(族姓)에 따라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팔리어 경전에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 용례가 있어5) 흔히 남방불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호칭입니다. 서양의 많은 학자들도 이 명칭을 쓰고 있으며, 근래에는 일본의 학자들도 즐겨 사용하게 되었습니다.6)

그러나 이기영 박사는 그의 저서 <석가>라는 책에서 붓다란 말은 불교의 이상적 존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서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에 불교의 개조(開祖) 개인을 지칭할 때에는 ‘고따마 붓다’란 호칭을 쓰거나 ‘석가모니(釋迦牟尼)’란 존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원래의 인도음 샤캬무니(Sakyamuni)를 한자로 음사한 것인데, ‘샤캬(釋迦)’란 고따마 붓다가 탄생한 종족의 이름이고, ‘무니(牟尼)’란 ‘거룩한 분'(聖者)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샤캬무니’라고 하면 샤캬족 출신의 성자란 뜻이 되므로 고유명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7)

필자는 개인적으로 ‘붓다’라는 호칭을 선호합니다만 여기에서는 특별한 구별 없이 ‘붓다(佛陀)’, ‘석존(釋尊)’, ‘세존(世尊)’, ‘석가모니(釋迦牟尼)’ 등의 호칭을 두루 사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 여러 호칭들은 서로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붓다’라는 호칭이 낮춤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이 단어 속에는 이미 깨달은 자라는 뜻과 존경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높임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붓다의 전기에 관한 자료는 매우 많습니다. 불교경전 중에서 부처님의 생애를 주제로 한 것을 일반적으로 ‘불전(佛傳)’, ‘불전경전(佛傳經典)’, ‘불전문학(佛傳文學)’이라고 합니다. 불전은 산스끄리뜨어, 팔리어, 한역(漢譯), 티베트어 역본(譯本) 등 오래된 불전만 하더라도 20여 종에 이릅니다.8) 그 중 중요한 것으로는 산스끄리뜨어로 씌어진 <마하바스뚜(Mahavastu, 大事)>, <랄리따비스따라(Lalitavistara)>와 불교시인 아쉬바고사(Asvaghosa, 馬鳴; A.D. 2세기경)에 의해서 카비야체(體)라는 아름다운 미문(美文)들로 씌어진 <붓다짜리따(Buddhacarita, 佛所行讚)>, <자따까(Jataka, 本生潭)>의 서문에 해당되는 인연품(因緣品), 한역으로는 <보요경(普曜經)>,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등이 있습니다.9)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붓다가 입멸한 후 수 백년이 지난 뒤 성립한 것이고, 더구나 불타로서의 석존의 위대함을 찬탄하는 입장에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여러 가지 창작과 가탁(假託)이 부가되어 비역사적·신화적인 요소가 대단히 많습니다. 따라서 붓다를 역사적 존재로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불전문학의 원천이 되었던 것, 다시 말해서 초기불교 성전인 <율장(律藏)>과 <아함경(阿含經)> 가운데 전해지고 있는 붓다의 전기적인 기술을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기성전의 기술은 불전을 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하여진 것이 아니라 교단 규칙의 제정이나 중요한 설법과 관련하여 붓다의 사적(事蹟)을 단편적으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사적 역시 창작이나 신화적 요소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인간 붓다의 생애 전모를 있는 그대로 묘사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야겠지만, 초기성전이 전하는 바에 의해서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붓다의 단서는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10)

3. 붓다의 전기(傳記)를 대하는 태도

지금까지 우리는 불전 혹은 불전문학에 기록된 내용으로써 붓다를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헌들을 통해서는 역사적인 붓다의 생애 혹은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붓다를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헌에 나타난 부처님의 일대기는 너무나 신격화(神格化)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쉬바고사(馬鳴)에 의해 씌어진 장편 서사시(敍事詩) <불소행찬(佛所行讚)>이 그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아쉬바고사는 인도 카니쉬카(Kanisika)왕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대략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11) 불교시인(佛敎詩人)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입니다. 이 책은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붓다의 모습보다도 신격화된 부처님의 덕[佛德]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헌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부처님은 우리와 너무나 동떨어진 인물입니다. 그의 능력은 감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스리랑카 출신 불교 학자인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과거의 여러 종교 지도자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붓다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도 온갖 형태의 신화와 전설들로 점철되어 왔다. 신화와 전설을 역사적인 실제 사건과 구분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려운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열렬한 광신도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문제이다. 신화를 해석하는 사람은 신화란 독실한 신도의 소박한 상상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광신도의 저항이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냉정하고 신중하게 분석해 보면, 신화란 극적인 설명이 요구되는 실제의 역사적 사건들이나 복잡한 인물 성격과 관련하여 감정이나 정신상의 사태들을 상징화한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12)

위에서 지적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붓다의 생애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생애에 있어서 신화와 전설의 부분을 삭제한다고 해서 부처님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붓다의 모습을 통해 진실로 인류의 스승으로서의 참모습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붓다의 생애를 공부하는 목적은 그러한 붓다의 생애를 거울삼아 우리들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여 역사적 인물로서의 고따마 붓다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근대 학문의 원전비평(原典批評)의 방법을 채택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성전(聖典)이라 할지라도 역사적 소산(所産)임을 인정하고, 그것은 사상의 발전에 기초하여 성립한 것임을 생각할 때, 후대의 전적(典籍)보다도 오래된 전적에 의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된 전적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부분에 의거할 것입니다.13)

둘째, 우리는 고고학적(考古學的) 자료에 의거하여 확실한 증거를 찾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성전 중의 가장 오래된 부분에는 비교적 신화적 요소나 붓다의 초인화(超人化), 신격화(神格化)는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혀 신화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문헌에 근거하는 한, 신화적이지 않은 석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묘사(描寫)를 꿰뚫고, 역사적 면모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 즉 고고학적 자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4)

셋째, 우리는 불교경전 중의 가장 오래된 것과 그와 거의 동시대의 다른 종교의 성전과를 비교해서 그 사상의 같고 다름을 밝히는 것이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붓다의 교설이 지니는 의의(意義)를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15)

넷째, 우리는 남방계의 불전(佛傳)에 의거하여 붓다의 생애를 조명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불전경전(佛傳經典)은 남방에 전해진 것(南傳)과 북방에 전해진 것(北傳)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생애를 표현하는 방법에도 남전과 북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방의 불전에는 부처님의 생애를 ①탄생, ②깨달음을 이루다(成道), ③최초의 설법(初轉法輪), ④열반에 들다 라는 네 가지 사건(四大佛事)을 중심으로 설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와는 달리 북방의 불전에서는 ①도솔천에서 내려오시다(下天), ②마야부인의 태내에 들다(托胎), ③탄생(降誕), ④출가(出家), ⑤마귀 파순과 싸워 이기시다(降魔), ⑥깨달음을 여시다(成道), ⑦처음으로 설법하시다(初轉法輪), ⑧열반에 들다(涅槃)의 여덟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기에 더 상세히 하여 청년 시대, 결혼, 규방 생활, 고행, 깨달음의 자리에 있다 라고 하는 네 가지 항목이 더 추가되어 12 항목으로 된 것도 있습니다.16)

이와 같이 북전의 불전에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생활을 거쳐 출가하고 고행해서 마왕을 항복 받고 성도하기까지의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주로 남전의 불전에 의거하여 붓다의 생애를 조명해 나갈 것입니다.

Notes:

1) 비교적 오래된 ‘釋尊’의 용례는 曇無讖 譯 <金剛明經> 권1에 나온다.
2)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초기·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민족사, 1989), p.34.
3) 와다나베 쇼오꼬 지음·法頂 옮김, <불타 석가모니> (서울: 샘터, 1990), p.5.
4) 후지타 코타츠 外, 앞의 책, p.35.
5) 이를테면 <테라가타(Theragatha, 長老偈> 91게송.
6) 후지타 코타츠 外, 앞의 책, p.35.
7) 李箕永 著,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知文閣, 1965), pp.278-281 참조.
8) 후지타 코타츠 外, p.35.
9) 스가누마 아키라 지음·편집부 옮김, <부처님과 그 제자들> (서울: 봉은사출판부, 1991), p.35.
10) 후지타 코타츠 外, 앞의 책, p.35.
11) E. H. Johnston, Buddhacarita or Acts of the Buddha (Delhi: Matilal Banarasidass, 1984), p. xvi, (初版本은 Calcutta에서 1935년에 刊行되었다. 金浩星, “Buddhacarita(불소행찬)에 나타난 초기 Sankhya 思想 硏究” (碩士學位論文, 東國大 大學院, 1988), p.3에서 재인용.
12) David. J. Kalupahana, A History of Buddhist Philosophy: Continuities and Discontinuities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2); D. J. 칼루파하나, 김종옥 옮김, <불교철학사-연속과 불연속> (서울: 시공사, 1996), p.54.
13) 이기영, <석가>, pp.1-2 참조.
14) 이기영, <석가>, p.2.
15) 이기영, <석가>, p.2.
16) 스가누마 아키라 지음, 앞의 책, pp.35-36 참조.

출가생활의 결실에 관한 경 5

디가니까야 5회 
출가생활의 결실에 관한 경 5

빠알리대장경(디가니까야)
디가니까야 5회 출가생활의 결실에 관한 경 5
Buddhastudy 2020. 10. 13.

아자따삿뚜 왕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한 때 저는 ‘산자야 벨랏티뿌따’라는 수행자를 찾아갔습니다.



제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산자야 벨랏티뿌따 존자여,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술을 갈고 닦아 그 결실을 통해 행복과 만족을 느끼고

나아가 여러 수행자들에게 보시함으로써 고귀하고 신성한 과보를 받습니다.



존자여, 존자도 이와 같이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생활의 결실을

저에게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산자야 벨랏티뿌따 존자가 대답했습니다.

”대왕이여, 만약 대왕이 제게 ‘저 세상이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그리고 만약 제가 ‘저 세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저 세상이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다’고도 하지 않고, ‘저렇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다’라고도 ‘아닌 것이 아니다’라고도 ‘다르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대왕이 제게 ‘저 세상이 없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다’고도 ‘저렇다’고도

‘아니다’라고도 ‘아닌 것이 아니다’라고도

‘다르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만약 대왕이 제게 ‘저 세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또는 ‘저 세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다’ ‘저렇다’ ‘아니다’‘아닌 것이 아니다’ ‘다르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산자야 벨랏티뿌따 존자에게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생활의 결실을 물었는데,

그는 회의주의론을 펼쳤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는 망고나무에 대해 물었는데 빵나무를 설명하고

빵나무에 대해 물었는데 망고나무를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찌 나의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수행자나 바라문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존자의 말을 기뻐하거나 비난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저는 세존께 같은 질문을 드립니다.

세존께서는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생활의 결실을 저에게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대왕께서는 나의 질문에 대답해주십시오.



여기 대왕의 하인이 한 사람 있다고 합시다.

충직한 하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며

무슨 일에도 순종하고 유쾌하게 일하며

그대의 심기를 헤아리기 위해 항상 그대의 안색을 살핍니다.



어느 날 하인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공덕의 과보란 참으로 경이로운 것이로구나.

마가다국의 주인 아자따삿뚜 왕도 인간이고 나도 역시 인간인데,

좋은 공덕으로 좋은 과보를 받은 왕은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신처럼 마음껏 누리고 즐기지만

나는 그의 감각적 욕망을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공덕을 지어야겠다.

그러니 나도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리라.‘



대왕이여, 그리하여 그 하인은 출가수행자가 되어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스스로를 단속하며

절제하고 자족하고 멀리 여읨을 즐깁니다.



그런데 대왕이여, 만약 그대가

그대의 하인 중에 한 명이 출가수행자가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시 그를 데려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며

무슨 일에도 순종하고 유쾌하게 일하며

그대의 심기를 헤아리기 위해 항상 그대의 안색을 살피라고 명령하시겠습니까?“



대왕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하고

그를 반기며 의복과 음식과 거처와 필요한 약품을 마련해 그를 보호할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것이 제가 대왕께 알려드리는 첫 번째 출가생활의 결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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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의 자유사상가의 한 사람인 아지타 케사 캄발린이 주장한 유물론ㆍ쾌락지상주의의 설을 신봉하는 학파. 아지타의 4원소설은 영혼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으로, 정통 브라만 사상의 아트만을 부정하는 한편, 당시 사람들이 가장 중대시한 업보의 유무의 문제에 관해서도 선악 행위의 보답은 일체 부정하고 도덕도 종교도 필요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내세를 인정하지 않고, 업보를 부정하고 현세의 쾌락을 지상으로 하는 사상을 산스크리트어로 로카야타(lokāyata)라고 하며, 불전은 <순세외도>라고 번역하는데 후세에는 차르바카(Cārvāka)라고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순세파 [順世派]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한국사전연구사)

육사외도(六師外道)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아지타 케사캄바린

육사외도(六師外道)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육사외도 (六師外道)
===
불교 개념 

서기전 500년 무렵 인도에서 활동하던 6명의 자유사상가를 불교 입장에서 가리키는 불교용어.
===
개설
육사외도(六師外道)[cha-tīrthika(산스크리트어, 이하 ⓢ로 표기), 
cha-titthiyā(팔리어, 이하 ⓟ로 표기)]는 
붓다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으며, 
『베다(Veda)』의 전통과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바라문교주1의 지배 질서와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이들을 ‘육사’가 아닌 ‘육사외도’라 한 이유는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단의 사상가들이었기 때문이다.

===
연원 및 변천
불교가 흥기할 무렵인 서기전 6~5세기의 인도는 사회적 · 사상적으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족의 정착이 마무리되면서 농업 생산의 증대와 더불어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의 발전을 촉진하고, 이 도시들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국가들이 형성되었다.

도시에서는 상공업자들이 화폐경제에 의해 큰 부를 축적하였으며, 길드와 유사한 조합을 구성하고 완전히 도시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제까지는 제사를 관장하는 브라흐마나(ⓢbrāhmaṇa)와 정치를 관장하는 크샤트리야(ⓢKṣatriya)가 사회의 지배자였지만,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상공업자와 서민인 바이샤(ⓢvaiśya)에 의해서 기존의 카스트 제도는 질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적 사정을 배경으로 『베다(Veda)』의 전통과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바라문교(Brahmanism)의 지배 질서와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많은 자유사상가들 · 종교 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 들이 바로 어원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란 의미를 지닌 사문(沙門, ⓢśramaṇa, ⓟsamaṇa)이다.

이들은 유물론, 쾌락주의, 숙명론, 도덕 부정론, 회의론, 고행주의와 같은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불교의 문헌들에서는 이들이 62가지로 분류되어 ‘62견(見, ⓢdvāṣaṣṭi-dṛṣṭi, ⓟdvaṭṭhi-paṭipadā)’이라 하고, 그 가운데 특히 유력한 6명의 지도자를 칭하여 ‘육사외도’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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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푸라나 캇사파
푸라나 캇사파(ⓢPūrana Kāshyapa, ⓟPūraṇa Kassapa)는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더라도 악을 행한 것은 아니며, 제사, 보시, 수양 등을 해도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선악의 행위는 도덕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일종의 무도덕주의(無道德主義) 또는 도덕 부정론(道德否定論)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주장은 당시 도시 문화의 도덕적 난숙함과 그에 따른 도덕적 퇴폐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나중에 강물에 들어가 자살하였다고 전한다.

막칼리 고살라
막칼리 고살라(ⓢMaskarin Goshālin 또는 Maskarin Goshālīputra, ⓟMakkhali Gosāla)는 모든 생명체가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나 그들이 청정하게 되고 해탈하는 것은 원인도 조건도 없다는 우연론(偶然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사람의 행위나 운명은 모두 자연계의 운행이 정한 약속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며, 그대로 방치해 두면 840만 대겁(大劫)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경과하여 저절로 해탈에 도달한다고 하는 숙명론(宿命論, fatalism)을 주장하였다.

초기 불교의 문헌들에서는 이것이 ‘윤회를 통한 청정(ⓟsaṃsāra-suddhi)’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인간의 노력이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결정론(決定論, determinism)을 옹호하였다. 그는 생명체가 땅 · 물 · 불 · 바람 · 허공 · 득 · 실 · 괴로움 · 즐거움 · 태어남 · 죽음 · 영혼이라고 하는 12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엄격한 고행(苦行)[ⓢtapas, ⓟtapo]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가 세운 교단을 ‘아지비카(Ājīvika)’라고 한다.

아지타 케사캄바린
아지타 케사캄바린(ⓢAjita Keshakambala 또는 Ajita Keshakambalin, ⓟAjita Kesakambalin)은 인간이 흙 · 물 · 불 · 바람의 4원소로 구성되어 있어서 죽으면 각 원소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이 생전에 짓는 종교적 · 도덕적 행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철학적으로 유물론(唯物論, materialism)이요, 인식론으로 보면 감각론(感覺論, sensationalism)이요, 실천적 측면에서 보면 쾌락주의(快樂主義, hedonism)의 입장에 서 있었다고 생각된다.

파쿠다 캇차야나
파쿠다 캇차야나(ⓢKakuda Kātyāyana, ⓟPakudha Kaccayāna)는 땅 · 물 · 불 · 바람의 4원소 외에 괴로움 · 즐거움 · 생명을 추가하여 7요소를 설했다고 한다. 또한 7요소는 불변하기 때문에 비록 사람을 죽이더라도 칼은 이 7요소의 간격을 통과했을 뿐이며 살인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요소만의 실재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은 후세의 바이셰시카(Vaiśeṣika)로 계승 · 발전되어 갔다.

산자야 벨랏티풋타
산자야 벨랏티풋타(ⓢSamjayin Vairatīputra, ⓟSañjaya Belaṭṭhiputta)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거나 서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회의론(懷疑論, skepticism)의 입장도 취하였다. 즉 내세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서는 확정적인 대답을 제시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뱀장어와 같이 잡기 어려운 답변(Ⓢamarā-vikṣepika, Ⓟamarā-vikkhepika)’이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사조는 어떠한 의미에서 붓다의 무기(無記, Ⓢavyākṛta, Ⓟavyākata)와 4구부정(四句否定)에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니간타 나타풋타
니간타 나타풋타(ⓢNirgrantha Jnātiputra, ⓟNigaṇṭha-Nātaputta)는 자이나교의 개조인 마하비라(Mahāvīra)이다. 니간타(Nigaṇṭha)는 오래전부터 있던 한 교단의 명칭이었으나, 그가 이 파로 들어간 뒤에 그의 설을 고쳤으므로 자이나교가 성립되었다. 그는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부정주의(不定主義, syādvāda) 또는 상대주의(相對主義, anekāntavāda)를 내세웠다.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엄격한 고행(苦行, ⓢtapas, ⓟtapo)의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죽이지 말고 훔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거짓말 하지 않고 소유하지 말라고 하는 오대서(五大誓, ⓢpañca-mahā-varata)를 제정하였다.

그의 세계관은 세계가 영혼(jīva)과 비 영혼(ajīva)으로 대별된다고 보는 이원론(二元論, dualism)이 특징이다. 그리고 비 영혼은 운동의 조건(dharma), 정지의 조건(adharma), 허공(ākāśa), 물질(pudgala)의 4실체(asti-kāya)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는데, 때로는 별도로 시간을 부가하는 경우도 있다.

현황
자이나교를 제외하면, 이들 자유사상가들의 교단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아지비카만은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 시대까지 불교와 자이나교와 함께 유력한 교단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후대에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한편 자이나교는 마하비라의 시대에 이미 유력한 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후 불교와 함께 바라문교에 대항하는 혁신적 종교의 양대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서기전 3세기에 자이나교는 동인도에서 서인도의 구자라트(Gujarat)와 라자스탄(Rajasthan)으로 이주했다. 현재도 이 지역의 상인 계층을 중심으로 수백만의 신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육사외도는 비록 유물론, 쾌락주의, 숙명론, 도덕 부정론, 회의론, 고행주의와 같은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베다(Veda)』의 전통과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바라문교의 지배 질서와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는 측면에서 공통된다. 육사외도로 대표되는 이단적 · 혁신적인 사상 조류는 서로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하면서 불교가 태동하던 당시에 커다란 소용돌이로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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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브라흐마잘라 숫따(Brahmajāla-sutta)」, 「사먄냐빨라 숫따(Sāmaññaphala-sutta)」
  • 『장아함경(長阿含經)』-「범동경(梵動經)」, 「사문과경(沙門果經)」
  • A History of Buddhist Philosophy: Continuities and Discontinuities(David J. Kalupahana, Delhi: Motilal Barnasidass, 2006)
  • A History of Pre-Buddhistic Indian Philosophy(Benimadhab Baruna, Delhi: Motilal Banarasidass, 1970)
  • Early Buddhist Theory of Knowledge(K.N. Jayatilleke,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63)

주1
불교에 앞서 고대 인도에서 경전인 베다의 신앙을 중심으로 발달한 종교. 우주의 본체 곧 범천(梵天)을 중심으로 하여 희생을 중요시하며 난행고행과 조행(操行) 결백을 으뜸으로 삼는다.  
김한상

반드시 출가해야 해탈하는가 < 수행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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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출가해야 해탈하는가
수행
입력 2003.10.15 

부처님이 왕사성 죽림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그 무렵 앵무라는 바라문이 볼일이 있어 왕사성의 어느 거사 집에 가서 기숙하고 있었다. 앵무 바라문은 그 거사에게 ‘때때로 찾아 뵙고 존경하며 가르침을 받을만한 스승’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다. 거사는 서슴없이 부처님을 천거했다. 이에 앵무 바라문은 부처님이 계신 죽림정사로 찾아가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을 여쭈었다.

“도를 닦으려면 집에 있으면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 집을 나와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

“나는 도를 닦는 사람이 집에 있느냐 혹은 집을 나오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집에 있거나 나오거나에 관계없이 삿된 행(邪行)을 하면 나는 그를 칭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삿된 행을 하는 사람은 바른 지혜를 얻지 못하며 법다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에 있거나 나오거나에 관계없이 바른 행(正行)을 하면 나는 그를 칭찬한다. 왜냐하면 바른 행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바른 지혜를 얻으며 법다움을 알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큰 공덕과 이익을 얻으려면 집에 있는 것이 좋습니까, 집을 나와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

부처님은 출가 강조한 적 없어 진실한 수행여부가 더 중요

“그것은 일정하지 않다. 집에 있는 사람으로서 큰 재앙이 있고 다툼이 있으며 원망과 미움이 있어서 삿된 행동을 하면 큰 결과를 얻지 못하고 공덕이 없다. 또 집을 나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작은 재앙이 있고 다툼이 있으며 원망과 미움이 있어서 삿된 행동을 하면 큰 결과를 얻지 못하고 공덕이 없다. 그러나 집에 있는 사람으로서 큰 재앙이 있고 다툼이 있으며 원망과 미움이 있더라도 바른 행을 실천하면 큰 과보를 얻고 큰 공덕이 있다. 또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작은 재앙이 있고 다툼이 있으며 원망과 미움이 있더라도 바른 행을 실천하면 과보를 얻고 큰 공덕으로 얻는다. 이것은 진실이며 허망한 말이 아니다.”-중아함 38권 152경 〈앵무경(鸚鵡經)〉

- 출가생활이란 가정과 가족을 떠나 수행에 전념하기 위한 최상의 선택이다. 부처님도 수행을 위해 출가를 했고, 수많은 제자들도 같은 길을 걸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가수행을 결행하자 부처님은 한때 외도들로부터 ‘과부들의 눈물’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출가수행자가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의 눈물도 늘어난 데서 생긴 일이었다. 특히 산자야의 제자 사리불과 목건련이 250명의 추종자와 함께 개종을 하자 외도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캄바라라는 외도는 이를 막기 위해 마나기라는 여제자를 거짓으로 임신시켜 부처님을 모함하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출가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가급적 부모와 가족의 동의를 받도록 권하기까지 했다. 출가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일종의 고육책이었다.이 경전은 바로 그 무렵에 설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목할 점은 여기서 부처님은 결코 ‘출가지상주의’를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가르친 해탈이란 올바른 방법으로 수행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출가라는 형식이 아니라 누가 더 진실하게 수행하느냐 하는 내용에 있다. 실제로 〈증일아함경〉 3권 청신사품에는 우바새로 법을 증득한 사람이 40명이나 거명되고 있다. 우바이도 30명이나 된다. 이는 법의 증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를 말해주는 증거들이기도 하다.
홍사성/ 불교평론 편집위원[불교신문 1973호/ 10월17일자]
[불교신문 1973호/ 10월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