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9

소태산 평전 - 솥에서 난 성자 김형수 2016

[전자책] 소태산 평전 : 알라딘  Sejin 서재에

[eBook] 소태산 평전 - 솥에서 난 성자
김형수 (지은이)문학동네2016-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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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주간 2위|
Sales Point : 49

8.5 100자평(0)리뷰(4)

종이책 페이지수 : 460쪽

책소개
한국의 4대 종교 중 하나인 원불교는 물질문명의 급격한 발전을 정신문명이 따르지 못할 것을 미리 깨달은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에 의해, 인류의 정신문명을 이끌어나갈 새 시대 새 종교로서 시작되었다. 우리 민족이 배출한 걸출한 사상가로부터 탄생한 자생 종교라는 점에서도 그 존재 의의가 큰데, 그런 원불교가 세상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지 벌써 백 년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교조 소태산의 일대기를 한 권의 평전으로 봉전한다.

소태산 박중빈은 전남 영광 백수면 길룡리 사람이다. 구한말, 민중의 삶이 점점 비참해져가는 가운데 의지할 곳 없던 전남의 민초들은 증산교 치성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지도자 강증산이 사망하고, 신도들은 크게 방황하며 증산의 재림만을 간절히 기원했다. 때마침 박중빈이 대각하여 새로운 사상적 지도자로 우뚝 서자, 그를 증산과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러나 박중빈은 그의 사상과 증산교의 교리를 확실히 구분했다. 증산교의 신비주의에서 탈피하고 생활 속에서 깨닫는 도를 설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목차


프롤로그 발견자 _007
1장 궁궁을을弓弓乙乙 _055
2장 눈보라 사이 별빛같이 _085
3장 소를 찾아 나서다 _117
4장 고행苦行 _157
5장 옛사람이 먼저 보았네 _195
6장 버려진 땅은 없어 _227
7장 떡이 아니라 밥이여 _261
8장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_301
9장 미륵의 눈빛이 떨어진 자리 _341
10장 우주 속으로 돌아가다 _375
에필로그 인류세人類世 _419

집필과정 및 자료 해제 _437
작가의 말 _453
인명 색인 _456


책속에서


P. 59~60 인간에게는 자신의 뜻을 감격적으로 전하기 위해 때로 본말을 전도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서사 본능이 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 이야기를 전하는 자들도 그랬을 것이다. 범인에게 구원의 길을 찾은 전범典範을 보여주고 싶어서 성자 이야기를 꺼냈다가, 결국 옆구리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부처님이 될 것을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을 만들거나 숫처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예수처럼 살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야기한 셈이다. 접기
P. 114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있던 순간부터 세상은 모르는 것투성이였지만 그는 무방비의 상태로 안내판 하나 없는 우주의 어느 모서리에 놓여 있었다. 어른들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으니, 그는 모든 것을 혼자 묻고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그걸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태초의 고독을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들은 세계의 원본 앞에 너무도 쉽게 좌절하고 투항하여 세간의 상식이 내모는 쪽으로 마구 달아나버린다. 그러나 진섭이는 달랐다. 비록 어려서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있을 때조차도 그는 어머니의 등이 아니라 별빛 아래서 잤다. 어머니의 품을 빠져나와 고샅에서 노는 동안에도 하늘이 이야기책이고, 달력이고, 삶의 안내서였다. 거기에서 점점 복잡한 의문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접기
P. 165~166 이제부터 불경스런 짓을 저지를 심사인바 만일 불상에 영험이 있다면 내게 큰 벌을 내릴 것이다. 급살을 맞거나 신체의 어디가 어긋나 병신이 되어도 하는 수 없다. 처화는 작심을 하고 불상 앞으로 다가가 뺨을 냅다 후려쳤다. 왜 이게 부처님의 뺨인가, 쇠붙이의 뺨이지. 천둥벼락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이번에는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얼마나 떨리는지 공포감을 이기기 어려웠다. 온몸에 땀을 쏟고 가슴이 짓눌렸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하룻밤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가 지자 심한 두려움 속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일어날 때 죽어 있거나 신체 어디가 망가져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보니 표시가 나는 곳이 없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동네 한 바퀴를 돌아도 평소와 똑같았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을 대하는 것을 봐도 역시 변화가 없었다. 산신님이 허망했고, 도사가 허망했듯이, 불상 또한 허망할 뿐이었다. 접기
P. 197 과학은 물질의 세계요 사상은 정신의 세계이다. 현상계의 만물은 감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운동하는 법칙은 냄새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 사람도 몸을 지배하는 마음은 감각할 수 없지만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몸은 쉽게 느낄 수 있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법칙을 ‘도道’라고 한다. 바로 그같은 것, 그동안에는 느끼지 못했던 세상의 무엇이 홀연히 눈앞에 있었다. 접기
P. 315 사람들은 자꾸 일어났다 스러지고 응결됐다 해체되는 것들에 집착한다. 바다에서 파도가 일었다가 없어지듯이, 허공에서 바람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듯이, 땅 위의 물체들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해간다. 문제는 그 너머에 있는 것. 불교적 인식에 의하면 잠시 출현했다 해체되는 것은 인간의 눈에만 보이기도 하고 곤충이나 특정 동물의 눈에만 보이기도 한다. 세계의 본체는 저 홀로 유구하다. 접기
P. 330 소태산은 늘 생활 속에서 상황에 맞게 가르침을 주었다. 오늘날 소태산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말씀’이 놓였던 배경화면이 생략된 채 전해진다. 때문에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그는 항상 ‘보편’이 아니라 ‘구체’를 말했다는 점이다. 소태산은 현실 속에 살아 있는 경전을 보라고 강조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다수가 글을 배우지 못한 까막눈이었고, 그중에도 부녀자들이 많았다. 소태산은 그들에게 맞는 훈련법과 교리를 내놓아 정기 훈련을 실시하면서, 경이 많으면 사람들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한다經多返迷人고 설했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형수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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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설가,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가끔 이렇게 허깨비를 본다』,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조드-가난한 성자들 1,2』,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평론집 『흩어진 중심』 등과 『문익환 평전』, 『소태산 평전』, 『김남주 평전』을 출간했으며 작가 수업 시리즈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로 큰 반향을 얻었다. 2023년 518문학상(본상)을 수상했다.

수상 : 2016년 만해문학상
최근작 : <삶은 그렇게 물길 따라 흐르고>,<[큰글자도서] 김남주 평전>,<신영일 평전> … 총 4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저자는 교도가 아니면서도 맑은 영혼의 소유자답게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를 성자로 알아보고 그의 평전 집필에 발심하였다. 뒤이어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현지답사를 수행하며 자신의 독서와 성찰을 거듭하였다. 여기에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전기 작가의 재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으니 김형수의 문학세계에도 우뚝한 봉우리 하나가 솟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 책은 결코 소설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직한 평전으로 교단 안팎에서 두루 읽힐 역작이다. _백낙청(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그간에는 내 몸이 어떤 영원성의 일부였다. 그런데 5월이 가고 난 뒤에는 세계가 영영 파괴되고 말았다. 잿더미의 삶을 경험한 것이다. ‘평범한 성자’를 그때 알았으면 참 좋았을 것을.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주에 갇혀 숱한 날을, 납득도 할 수 없고 해명도 불가능한 현실과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세월호’처럼 가라앉아가는 세계에 대한 아득한 불안, 그 속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눈빛들, 그것을 등진 채 고통스런 연민을 감내해야 하는 대다수의 영혼들. 더이상 팔 것이 없어서 신체의 일부를 팔아야 하는 황폐한 사회를 정치적 수사와 미학적 왜곡으로 뒤덮는 현실이 내게는 끊임없이 두 세기를 하나의 시간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나는 결코 21세기로 건너갈 수 없었던 것이다.
작가는 모든 글을 오늘의 자리에서 쓴다. 내가 이 평전을 쓰게 된 건 순전히 거리에 가득찬 ‘숱한 오늘들’ 때문이었다. 아직도 종료되지 않는 5·18에 대한 감정이 내 해석의 중심축에 있었다. _김형수, ‘에필로그’에서

한국 토착사상사의 굳건한 축, 원불교의 교조敎祖 소태산
치열한 정신의 탐험자요 사상가였던 성자의 족적을 따라 걷다

한국의 4대 종교 중 하나인 원불교는 물질문명의 급격한 발전을 정신문명이 따르지 못할 것을 미리 깨달은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에 의해, 인류의 정신문명을 이끌어나갈 새 시대 새 종교로서 시작되었다. 우리 민족이 배출한 걸출한 사상가로부터 탄생한 자생 종교라는 점에서도 그 존재 의의가 큰데, 그런 원불교가 세상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지 벌써 백 년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교조 소태산의 일대기를 한 권의 평전으로 봉전한다.
집필은 일찍이 『문익환 평전』을 펴내며 역사적 사실에 엄정히 입각하되, 소설적 상상력이 가미된 서술로 인물의 족적을 곁에서 따라 걷듯 섬세하게 기록한 바 있는 작가 김형수가 맡았다. 그리고 그의 평전 집필 방식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소태산이 숨쉬었던 일 분 일 초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재현해냈다. 김형수는 특유의 꼼꼼한 성미로 치밀한 자료 조사와 현장답사를 거듭했으며, 교단의 감수를 거침으로써 이 책을 더욱 사실적이고 정확한 평전으로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교도가 아닌 저자에게 기나긴 고행의 여정이었을 이번 집필에 발심하게 된 계기는 필시 소태산이 손수 말하고 행하며 보여준 그의 사상적 깊이에 경도된 경험일 것이다.

소태산 박중빈은 전남 영광 백수면 길룡리 사람이다. 구한말, 민중의 삶이 점점 비참해져가는 가운데 의지할 곳 없던 전남의 민초들은 증산교 치성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다 지도자 강증산이 사망하고, 신도들은 크게 방황하며 증산의 재림만을 간절히 기원했다. 때마침 박중빈이 대각大覺하여 새로운 사상적 지도자로 우뚝 서자, 그를 증산과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러나 박중빈은 그의 사상과 증산교의 교리를 확실히 구분했다. 증산교의 신비주의에서 탈피하고 생활 속에서 깨닫는 도를 설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증산’이라는 호를 한글로 풀어 쓰면 ‘시루산’이 되는데, 박중빈은 스스로를 ‘시루가 아니라 솥단지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하여 ‘솥에 산’을 한자로 음사音寫한 ‘소태산’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시루는 솥에 잠시 거는 것이고, 솥은 밥을 짓기 위해 매일 써야 하는 것이다. 시루로 찌는 떡은 잔치를, 솥으로 짓는 밥은 일상을 의미한다. 소태산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 ‘솥’으로 표상했다는 것은 당대 그 누구보다 진리에 통달해 있었음에도,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깨우침’의 추구를 가장 중요한 단초로 삼았던 그의 사상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그는 제자들에게 어떠한 기행과 이적도 기록으로 남기지 말 것을 당부함으로써, 한사코 신격화되고 숭앙되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 했다. 그런 소태산을 ‘솥에서 난 성자’라 명명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보편성의 힘이 이렇듯 원불교를 세기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산 종교’가 되도록 이끌어준 것이 아닐까.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따라 읽는 것은, 온몸으로 가시덤불을 헤쳐나가는 한 인간의 너덜너덜해진 살갗을 지켜보는 일과 같다. 어려서부터 사고의 폭과 깊이가 남달랐던 그는 일곱 살 무렵 이성이나 감각으로 감지되지 않는 세계의 실체를 알고 싶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구도의 여정을 시작했다. 직접 산신을 만나려고 기도도 드려보고,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과 만나고자 각처를 헤매기도 했지만,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결국 직접 입정삼매에 들어 스스로 깨쳐야만 한다고 느끼게 된다.
김형수는 그후 소태산이 겪는 고행을 읽는 이가 피부로 느낄 수 있게끔 묘사한다. 소태산은 수행에 들자 혼몽과 망각을 반복하고 헛말을 하기도 하며, 장에 가는 길에 명상을 시작해 한나절을 길에 우뚝 선 채 보내기도 한다. 정신의 고투가 육신을 파괴하여 병색이 완연한 폐인처럼 보였다. 그러다 1916년 음력 3월 26일, 더이상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완전한 긍정적 상태”에서 소태산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이는 경험을 한다. 아주 먼 곳에서 구해야 한다고 여겼던 깨달음이 사실은 일체만물에, 자신의 주변에, 그리고 자기 안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엇의 영향도 받지 않고 홀로 진리를 깨친 뒤 여러 경전을 구해 읽어보니 그 결이 『금강경』과 같기에, 소태산은 석가모니를 자신의 종교적 연원으로 정하게 되었다.

대각 이후 종교적 지도자로서 소태산의 행보는 사뭇 독특하다. 제자들을 모아서는 수련을 하는 게 아니라 간척사업을 시작하더니, 그렇게 얻은 곡식으로 정신 수양보다 굶주림을 먼저 해결했다. 그는 이렇게 민중의 ‘존재의 건강성’부터 회복시킴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일제의 압박이 극심해지던 시기에는 ‘조선의 간디’로 불리며 민족의 정신적 뿌리 역할을 하던 자신으로 인해 교단 전체가 수모를 당하리라 예견했다. 소태산은 결국 일제에 저항하는 대신 병을 얻어 열반함으로써 일본을 안심시키고 원불교를 ‘황도불교화’의 위험에서 구해냈다.
허위와 허식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그가 얻은 진리로써 온 세상을 구제하려는 일념으로 살다 간 소태산.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세계의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듯하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담는 그릇의 외관이 아니라 그 뜻을 상대방이 가장 잘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하는 것이며, 조선과 일본의 갈등처럼 보이는 충돌 양상도 크게 바라보면 관계에 해害를 끼치는 자와 이利를 더하는 자가 있을 뿐이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불변하는 세상의 이치를 그는 한눈에 꿰고 있었다. 열반의 순간에도, 그에겐 생과 사 또한 ‘상태의 변화’일 뿐 서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였으리라. 소태산의 육신이 소멸함으로써 『소태산 평전』도 끝을 맺게 되지만, 이 거대한 사상가는 세계의 일부로서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다. 접기


평점
분포

8.5



부처님 오신 날- 솥에서 난 성자, 박중빈



원불교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 대종사 소태산 박중빈. 어렸을 때 이름은 박진섭, 그 다음 이름은 박처화, 그 다음이 박중빈. 오랜 구도 끝에 진리를 발견한 사람. 발견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알린 사람.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는 일제시대. 민족이 억압을 받던 시대. 민중을 구원한다는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민족 구원? 아니다. 민족이라는 한계를 정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원하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는다. 조선인, 일본인, 그리고 세계인을 구원하려는 목표를 세운다. 이것이 종교다.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는. 지금은 특정 집단에 국한되어 다른 집단을 배제하고 있지만, 종교의 처음이 그랬을까?




배제가 아니라 포용 아니었던가. 누구나 나와 같은 존재라는 인식. 그래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 나만이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깨우치는 세상. 그렇다고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강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도록 이끌어주는 과정.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소태산! 한자어로 살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를 많이 쓰던 시대였고, 호(號)라든지 자(字)라든지 본명 외에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한자를 썼으니, 박중빈 역시 자신의 호를 한자로 음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솥에 산'이라고 부른다. 솥을 생각한다. 솥이 무엇인가.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로 바뀌는 공간 아닌가. 그렇게 바뀌기 위해서는 그냥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열기와 습기 등을 견뎌내야 한다. 그것을 견뎌내면 다른 존재로 바뀌게 된다. 그것을 하는 존재가 바로 솥이다.




쌀과 물을 넣고 끓이면 밥이 되듯이 솥은 하나의 세상에서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솥에 산'이라는 이름에는 이미 다른 존재로 변한 자신을 말해주고 있으며,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변하게 한다는, 함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솥에는 어떤 존재들이 들어갈까? 소위 귀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 들어갈까? 아니다. 솥에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이 들어간다. 그냥 보통 존재들. 그것들이 솥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살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 나온다. 그렇다고 솥에 보통 것들, 귀하지 않은 것들만 들어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솥에는 귀한 존재들도 들어간다. 당시 귀하던 고기도 솥에 들어가 삶아지지 않던가. 그러면 다른 음식이 되어 나온다.




즉 '솥에 산'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있다. 약한 하층민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권층도 포함한 모두를 아우르는 진리. 그것을 설파하고 함께하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 맞게 소태산은 약한 사람들이 더 힘들어지지 않는 삶을 살게 한다. 간척사업을 해서 식량난을 해결하고 자금을 확보하려든지, 당시 가장 약한 층에 속했던 여성들도 동등한 대우를 받고, 동등한 활동을 하게 한다든지, 일제 순사 출신까지도 포용을 하며, 일본인인 경찰 고위 관료조차도 함께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다양한 종교를 아우른다. 진리의 길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 사람을 배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끌어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도록 할 뿐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깨치지 못하면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도 강조한다.




지금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소태산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엄혹한 일제시대, 어떤 사람들은 소태산이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3.1운동 당시 제자들의 태도에서도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소태산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때가 오지 않았다는 판단도 있고, 종교를 민족의 한계로 국한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있다.




이런 소태산의 모습에서 예수나 부처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들 역시 민족적 요구와 진리 추구 사이에서 민족의 입장에 서라는 요청을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민족의 경계 내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종교로 설 수 있지 않았을까.




즉, 종교는 경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경계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핍박을 받고 있지만, 핍박하는 사람들이 다른 민족 전체는 아니니, 다른 민족의 성원들과 함께 그러한 억압을 떨쳐내고 진리의 길에 들어서려고 하지 않았을까.




솥은 자신에게 들어온 존재들을 가리지 않는다. 그 각각 다른 존재들이 솥 안에서 하나가 된다. 여럿이 하나가 되는 일, 내가 어거지로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다. 소태산은 그런 일을 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가 된 법은 어디로 갈까? 일귀하처(一歸何處)라고 묻는다고 한다.




어디로 가긴. 다시 만법(萬法)으로 가지. 그 만법은 예전과 같은 만법이 아닌 변한 만법. 즉 만이지만 하나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솥에서 다른 존재로 하나가 된 존재는 다시 여럿에게로 돌아간다. 여럿에게로 돌아가는 하나. 그 만법과 하나가 바로 원이다. 일원이다. 돌고돈다.




하여 원불교의 상징이 원이다. 돌고 돎.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소태산 박중빈.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남겼던 진리의 길. 그것은 희망의 길이자 행복의 길이었을 것이다. 솥 속에서 다른 존재로 변한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소태산이 우리에게 보여준 진리의 길일 것이다.




참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평전이었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만법귀일이 아니라 만법이 만법으로,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를 만들고 더 높고 튼튼하게 쌓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와 다른 너는 몰아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함께해야 할 존재라는 것. 솥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기를 함께 견뎌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뜨거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안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소태산의 사상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종교를 떠나서 한 사람의 일생을, 고민을, 그가 한 실천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로 이 책은 큰 의미를 지닌다.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부처님 오신 날. 소태산 그의 사상과 실천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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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ye91 2025-05-05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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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77 소태산 평전



숲노래 책읽기 2021.5.2.

인문책시렁 177




《소태산 평전》

김형수

문학동네

2016.6.1.







《소태산 평전》(김형수, 문학동네, 2016)을 익산에 있는 마을책집을 나들이하면서 장만했고, 찬찬히 읽다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러고서 한참 덮다가 다시 펼쳤는데, ‘평전이라는 책을 이렇게 써야 하나’ 싶어 아리송했고, ‘평전’ 이름이 붙은 책을 왜 읽기 꺼려했는지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소태산이라고 하는 이름인 분을 책·글·누리집(위키백과)을 바탕으로 둘레 여러 사람한테서 들은 말을 바탕으로 글(평전)을 짜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어요. 아니, 소태산이라는 분이 아닌 다른 사람을 놓고도 ‘평전’을 쓴다면 이런 얼개가 될 테지요.




누구 이야기이든 그이가 스스로 남긴 글이 아니면 모두 ‘남이 바라보면서 쓰는 글’입니다. 어느 누가 쓰든 자취글(평전)입니다. 높여야 할 글도 낮춰야 할 글도 아닙니다만, 자취글을 쓸 적에는 ‘높여야 할 만한 훌륭한 길을 걸은 사람’ 이야기를 쓰기 마련이니, 글쓴이는 으레 이 대목에서 걸려 ‘차분하게(객관적) 쓰겠다(표현)’며 머리를 싸매지요. 이러면서 자꾸 추임새를 곁들이는데, 《소태산 평전》은 내내 추임새에 휩쓸리다가 정작 ‘소태산이라는 이름으로 익산이라는 고장에서 새빛을 열려고 한 발자국’을 들려주는 책 구실하고는 한참 동떨어진 곳까지 나아갔구나 싶어요.




이럴 때에는 차라리 ‘평전 아닌 소설’을 쓰면 좋겠습니다. 국도 찌개도 아닌, 그냥 맹물을 마시는 길이 훨씬 나을 테니까요.




ㅅㄴㄹ




인간에게는 저마다 타고난 심판의 본능이 숨어 있다. 주모는 처화의 어느 구석에서 성자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을까? 그무렵 인접 주민들 중에는 성자에 대한 악담을 지어내는 예도 없지 않았다. (25쪽)




소태산이 태어난 해를 딱히 특별한 때였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위키백과도 거리낌없이 단정짓는다. ‘1891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85쪽)




어린 날의 박진섭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웃들은 박진섭이 서당에 다녔지만 공부를 잘했던 게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천자문도 못 외우던 축에 끼어 주목할 것이라곤 없는 아이 같은 인상을 얻게 되었다. 당대 교육의 한계였다. (108쪽)




한번 돈 버는 요령을 터득한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다시 가난한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난 본 적이 없다. 그런 엄청난 풍경은 동서고금의 성자들에게서도 보기 힘든 일이다. (177쪽)




익산은 정신사적 내력이 심오한 땅이었다. 잡풀이 우거지고 황량한 빈터만 남아 있지만, 저 옛날 최고의 예술가와 과학자들이 모여 백제의 중흥을 이룰 대역사를 도모하던 곳이다.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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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1-05-0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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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평전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을 시대와 역사속에서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종교가 문학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평전이다.

어둡고 암울했던 시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하면서 세계의 본질에 닿기 위해 삶과 구도를 일체화시킨 진정한 이 시대의 거룩한 성자 소태산.

이 책은 소태산이 암울한 시대를 아프고 용기있게 그대로 통과하면서 진리와 삶을 어떻게 지켜내는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소태산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한결같고 소박한 신심에 감동이 오고 제자들을 챙기는 소태산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는 살아있는 소태산을 그대로 느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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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7indra 2016-10-1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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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에서 난 성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스러져가는 조선 말과 일제 강점기에 이땅을 출생지로 탄생하여 스승없이 홀로 구도- 고행- 대각을 이루고 앞으로의 세계 인류 구원을 위해 법을 편 원불교의 교조인데 저자인 김형수님은 원불교 교도가 아닌 한 시인이요, 소설가로서 이런 성자의 평전을 펴냈다는 것에 경외심을 보낸다.

나의 경외심의 첫번째는 종교적 객관자의 눈으로 소태산을 그려냄으로써 이땅에서 난 성자의 진면목을 편견이나 집착없이 써 낸 것이요,

두번째는, 시대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가히 암흑의 시기라고 할 조선 말과 일제 강점기 속에 이루어진 출생- 구도- 고행- 대각- 민중을 각성 지도한 역정들이었기에 그 역사적 자료들이 거의 뭍혀버렸고, 그나마 있다 해도그야말로 민믿한 생명력 없는 평면적인 자료들에 작가는 한국사의 사실적 리얼리즘을 그 바탕에 깔아 이 평전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점이요,

세번째는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성자로서의 소태산 대종사를 본인으로서는 다 그려낼 수가 없음을 미리 바탕에 깔고서 이 평전을 써내려 간 작가의 솔직함과 겸허함에 경외심을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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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2016-07-01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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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기 2021.5.10. 소태산 평전



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1.5.10.




《소태산 평전》

김형수 글, 문학동네, 2016.6.1.







누리수다를 폈다. ‘누리수다’라는 새말을 지었다.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이 있으려나? ‘인터넷 강의’나 ‘화상 강의’나 ‘줌 강의’를 나타낼 우리말이다. 누리그물을 열어 수다(얘기)를 펴기에 ‘누리수다(누리얘기)’이다. ‘누리’는 ‘누르다(누렇다)’하고 말밑이 같다. ‘누렇다 = 흙 = 땅’하고 얽히는 낱말이다. ‘누리 = 별(지구) + 터(세상·세계)’를 가리키는 얼개이기도 하고, ‘우주’를 가리키기까지 한다. ‘누리꾼·누리집·누리글월’처럼 ‘인터넷’을 나타내는 자리에서도 알맞게 쓸 만하다. 우리말로 써야 좋다고 여기지 않는다. 쉽고 수수하게 우리말로 새롭게 엮어서 쓰면, 우리 생각이 차츰 자란다. 생각에 날개를 달고서 홀가분하게 피어난다. 《소태산 평전》을 읽고서 왜 아쉬웠나 하고 누가 묻는다. 글쓴이가 글치레에 글멋에 글꾸밈에 글허울에 지나치게 갇혀서 아쉽다고 대꾸한다. 쉽고 수수하게 나아가면 될 텐데. ‘소태산’이라는 이름을 쓴 어느 분이 걸어간 길이란 ‘치레·멋·꾸밈·허울’이 아니라 ‘들꽃사랑(민중계몽)’이라고 느낀다. 들꽃이란 마음이 되어 들꽃하고 동무하면서 들꽃이 되려고 한 사람이 남긴 자취를 글로 써서 책으로 엮으려 한다면, 이 책에 담을 우리말이란 ‘들꽃빛’이 나야겠지.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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