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0

박정미 - 괴테의 입맞춤과 사랑 -토마스 만,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를 읽고 얼마 전 도서관 서가를 훑어보다가... | Facebook

박정미 - 괴테의 입맞춤과 사랑 -토마스 만,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를 읽고 얼마 전 도서관 서가를 훑어보다가... | Facebook

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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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입맞춤과 사랑
-토마스 만,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를 읽고

 얼마 전 도서관 서가를 훑어보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실제 주인공 로테가 인생 말년에 괴테를 만나러 바이마르에 갔다고? 재미있는 착상인데 저자가 누굴까. 
세상에! 그 자신 독일문학사의 우뚝한 봉우리면서 괴테 애호가인 토마스만이 아닌가. 
더구나 이 소설은 1816년 로테가 실제로 바이마르를 찾아 괴테를 만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씌여졌다고 한다.
 얼른 책을 뽑아와 읽기 시작했지만 사실 쉬운 책은 아니었다. 별다른 스토리라인이 등장하지 않고 괴테문학과 인생에 대한 해석이 등장인물의 장광설로 주구장창 이어졌다. 지겨워져서 괴테와 로테가 다 늙어 만나는 장면이나 구경하고 반납할 작정으로 마지막 장으로 훌쩍 건너뛰었는데! 
대단한 반전이 있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처음부터 경건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괴테의 여성편력은 유명하다. 나이 74세에 17세 소녀 울리케 폰 레베초프를 사랑하여 청혼까지 할 정도였다. 그의 생애는 사랑의 생애였으며 그가 사랑한 여자는 새벽 하늘의 뭇 별처럼 반짝이다가 금세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의 왕성한 창작열, 불타는 예술혼에 기름을 대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괴테는 “인생의 절정은 사랑이고, 사랑의 절정은 입맞춤이야. 입맞춤은 사랑의 시이자 뜨거운 열정의 봉인이며, 관능적이면서도 플라톤적이지.”라고 사랑을 예찬했다.
하지만 로테는 괴테의 비서로 일한 적이 있는 리머박사와 옛일을 회상하다가 괴테의 사랑을 “아이도 생기지도 않는 입맞춤”에 불과하다고 저격한다.

“박사님, 그 때 열아홉살 이후 44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록 그 빚은 저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어요. 괴로운 수수께끼지요. 뭣하러 숨기겠어요. 씰루엣 그림에 만족했고, 시에 만족했고, 그 사람 말마따나 아이도 생기지 않는 입맞춤에 만족했던 거죠. 아이들은 다른 사람한테서 생겼지요. 죽은 아이들까지 합치면 열한명의 아이들이 케스트너의 올곧고 정직한 사랑으로 태어났지요.”

 로테는 괴테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약혼자 케스트너와 결혼하여 다복한 가정을 일구었고 끝까지 남편과 아이들에게 충실한 생을 살았다. 하지만 괴테는 수많은 사랑을 뒤로하고 결혼을 피해다니다가 느즈막에 많은 이들의 실망과 반대를 무릅쓰고 정식결혼식을 올렸다. 그것은 자신을 돌보아주던 하층계급의 동거녀와 그 여자와의 사이에 생긴 아들에게 법적인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로테와 달리 괴테의 진짜인생은 펜을 들었을 때 펼쳐졌으며, 진짜자식은 하나뿐인 아들 아우구스트가 아니라 그가 쓴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아직 맹랑한 풋내기였지만 재기가 넘쳤지. 벌써 예술에 대해서나 사랑에 대해서나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고, 사랑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예술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 새파랗게 젊었지만, 이미 예술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랑과 인생과 인간을 배반할 용의가 있었지.”

 로테에 대한 사랑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태어났고, 마리안네 빌레머 부인에 대한 연정으로 ‘서동시집’을 썼으며, 올리케에 대한 사랑과 체념의 비감이 ‘마리엔바트의 비가’를 낳았다.

이렇듯 그의 책임질 일 없이 입맞춤에 그친 사랑은 막강한 지적 예술적 생산능력을 자랑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역시 나의 본령은 행복한 입맞춤이지. 뭔가를 예감하는 뜨거운 열정이 금방 시들어버릴 아름다움에 잠깐 머무는 것이지. 바로 이것이 예술과 인생의 차이이기도 해.
사람들이 누구나 추구하는 사랑의 충족, 즉 자식을 낳는 일은 시의 관심사가 아니니까.
시라는 것은 세상의 딸기입술에 정신적인 입맞춤을 하는 것이지-----.”

 이러한 사고의 변전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라기 보다는 예술가와 생활인의 차이에 기인할 것이다.
예술가는 작품의 완성을 향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생활인은 실제적 삶의 성과를 추구한다. 누가 더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다른 것이다. 삶의 의미와 행복을 두는 곳이 다른 것이다.

“그 사람의 천성에는 뭔가 비현실적이고 인생을 의탁하기 힘든 무엇인가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로테가 괴테를 미심쩍어한 이런 기질을 생활인은 민감하게 의식하고 피해간다. 뿐만 아니라 예술가 또한 생활을 같이할 결혼은 생활인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안다. 작품을 위해서라도 삶은 유지되어야 하므로.
그래서 세상의 로테는 괴테보다는 케스트너를 택하고, 클라리사는 피터를 거절하고 댈러웨이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괴테는 자신을 이해하기 보다는 존경하고 생활을 돌봐준 크리스티네와 결혼했고 로댕 역시 연인 까미유 클로델을 버리고 재봉사 출신인 아내 로즈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젊은시절 죽을만큼 고통스럽게 사랑하다가 헤어진 지 44년만에 처음으로 옛 사랑을 만나게 된 괴테의 반응은 어땠을까?
 괴테는 느닷없는 롯테의 등장이 “사람들의 호기심과 감상주의와 악의에 빌미를 주는 일”이 될까봐, 즉 자기 체면이 구겨지는 사태가 생길까봐 몸을 사리고 철저하게 의례적이고 정치적인 행사로 만남을 기획한다. 괴테는 날을 잡아 여러 유력인사들과 함께 로테를 점심식사에 초대하고 외교적인 태도로 상황을 제압하면서 용의주도하게 관계의 진실을 피해가는데 성공한 것이다.
 즉 그는 로테 앞에서 옛 연인이 아니라 바이마르공국의 막강한 권력자이자, 살아서 ‘위대한 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명예의 정점에 서있는 인물상에 충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위대함과 비겁함이 남자의 무기라면 그의 여인에게는 진실함과 솔직함이 있지 아니하던가. 
로테는 괴테의 인생에 명멸하는 뭇 별 중에서도 독보적 지위를 확보한 샛별 같은 존재였다. 
젊은 시절 무명의 괴테와 인연을 맺었던 로테야말로 괴테의 이름과 권력에 짓눌리지 않고 맞상대로 나설 수 있는 여자였다. 그리하여 로테는 어둡고 흔들리는 밤의 마차 안에서 괴테에게 반말로 맞서게 된다. 그의 모든 허위의식을 뚫고 회심의 일격을 가함으로써 사무치도록 그리운 진실의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현실일까, 환상일까. 두 사람의 대화일까, 영혼의 대화일까. 경계를 해체하고 뭉개는 작가의 섬세한 붓질 위에 이 책의 중심주제가 괴테의 입을 빌어 장엄하게 울려퍼진다.

 ”사랑하는 영혼이여, 이제 작별과 화해를 위해 속마음을 털어놓고 대답해주지. 당신은 제물에 관해 말했는데, 그건 신비로운 사건이어서 이 세계, 인생, 인격, 작품과 위대한 통일을 이루고 있고, 모든 것은 다만 형태만 바뀔 뿐이야.”

“사랑스럽고 천진난만한 당신한테 말하건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곧 제물이자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야. 한 때 당신을 향해 불탔고, 지금도 언제나 당신을 향해 불타서 정신과 빛을 발하는 거야.”

“사랑하는 이여, 사물은 제각기 분리되어 생겨났다가 서로 교환하고 뒤섞이면서 통일성을 유지하고, 마찬가지로 인생도 그런식으로 자연스럽고도 인류에 합당한 모습을 드러내는 거야. 그래서 과거가 현재 속에서 형태를 달리하여 나타나고, 현재는 다시 과거를 되새기고 미래를 미리 내비치며,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는 유령처럼 어른거리는 미래로 충만해지는 것이지.
과거를 되새기는 감정, 미래를 예감하는 감정, 그런 감정이 무엇보다 중요해. 우리 자신을 향해 눈을 뜨고, 세계의 통일성을 볼 수 있게 눈을 크게 떠보자고. 눈을 크게, 즐겁게, 지혜롭게 뜨는 거야.”

 이 책을 보는 나도 이 책에 등장하는 괴테나 로테, 작가 토마스만만큼은 아니어도(그들은 모두 60대 형님들) 살만큼 살고 나이도 들만큼 들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바람기는 바람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신비로 덮을 생각은 전혀 없다. 괴테인생의 무수한 입맞춤식 사랑을 예술가기질 혹은 운명애, 영원회귀식으로 두루뭉수리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도 이 마지막 대화에서 바람기와 예술가적 사랑을 뛰어넘는 위대한 사랑의 실존적 모색을 보게 된다. 괴테의 위대함을 수용하고 위대한 사랑을 품은 예술의 길을 제시하는 토마스 만의 해석은 장엄한 교향곡의 마지막 피날레와도 같다. 구체적인 내 언어로 말 할 수는 없지만 아직 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앞으로 올 것만 같다.
박인만
시한성을 가진 생활인의 짧은 사랑의 순간만 알다가 무한한(?) 예술가의 사랑의 세계를 간접적으로라도 있을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역시 나도 한 생활인으로서 그 시한성을 지속시켜 나갈 기술들을 찿고 경험하지만...
우리 시대에 한 순간의 사랑의 감정을 영원한 생활인의 시간에 지속시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생각해 보는 어려운 글 잘 읽었습니다
2h
Reply
박정미
박인만 저는 사실 박선생님과 달리 예술가적기질이(기질만! 삶의 모습은 철저한 소시민적 생활인이죠) 승한 사람이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읽었어요. 내 안의 예술성을 꽃피우기 위해 삶의 문을 조금 더 열고 경험을 받아들여야한다는 쪽으로요. 위대한 작품은 어느 쪽에서 시작하든 오를 수 있는 봉우리를 내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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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의 로테 (Lotte in Weimar)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소설
초판 발행 1939
장르 소설



목차
1 작품소개
2 초판 정보
3 번역서지 목록
4 바깥 링크
작품소개
1939년에 발표된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로 작가가 미국 망명 시절에 집필한 것이다. 히틀러의 국수주의에 맞서서, 독일을 대표하는 진정한 인문주의자이자 세계시민인 괴테의 삶과 문학을 중심 주제로 다룬다. 괴테의 <베르터> 소설의 실제 모델인 샤를로테 부프가 1816년 9월 바이마르로 괴테를 방문한 사건을 토대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은 아홉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6장은 63세의 노부인 로테가 67세의 괴테를 방문하기 위해 바이마르에 도착하여 여러 방문객을 차례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로, 괴테와 그의 문학, 문화적 견해에 관한 대화가 주를 이룬다. 7장에서 비로소 괴테가 등장하고, 그의 독백과 일상이 제시된다. 8장에서는 괴테가 로테 일행을 초대하여 점심을 먹음으로써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마지막 9장에서는 연극을 보고 돌아오는 로테가 마차 안에서 괴테의 ‘환영’과 화해의 작별을 나눈다. 국내에서는 토마스 만의 다른 소설들보다는 상당히 늦게 2017년 임홍배에 의해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되었다(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