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0

Philo Kalia - *춤, 신명

Philo Kalia - *춤, 신명 20대에 교회에서 즐겨 불렀던 시드니 카터(Sidney B.Carter)가... | Facebook

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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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신명

20대에 교회에서 즐겨 불렀던 시드니 카터(Sidney B.Carter)가 1963년 5절로 작시한 “춤의 주님”(The Lord of the Dance)은 창조부터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십자가와 부활을 춤추는 주님을 통해 그린다. 춤은 창조와 구원, 새 창조의 기운이고 리듬이고 활동이다.

사실 종교사에서 오래된 인도의 시바(Shiva)신은 춤추는 신이다. 발리 출신 화가 다르사네(Nyoman Darsane, 1939~)는 이러한 전통(힌두교)을 계승하여 예수님을 춤꾼-창조자, 춤꾼-종, 춤꾼-선생, 춤꾼-전사로 그린다. 그는 발리의 문화와 서양 기독교의 갈림길에서, 발리는 나의 몸이고, 기독교는 나의 삶이란 말로써 양자를 통합하려고 한다. 달리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의 전부이지만 그 삶은 발리의 문화적 패션을 통해서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춤은 발리 문화의 통합적 요소이며 발리의 전통 종교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성서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춤은 다윗의 춤이었다.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린 전사 영웅이라기보다는 시인이고 하프를 타는 뮤지션이고 춤꾼이고 예루살렘 성전을 설계한 건축가였다. 성서에 언급된 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홍해를 건넌 기쁨과 환희에 젖어 추는 미리암의 춤(출 15:19~21)을 ‘광복의 춤’이라 했다. 다윗의 춤(삼하 6:14~22)은 신명의 춤이고 입다의 딸의 춤(삿 11:34~40)은 恨의 춤이었다. 잠언에서 지혜는 “나는 매일매일 그의 기쁨이었고, 나는 날마다 그 앞에서 춤을 추었다. 나는 그가 만드신 땅 위에서 춤을 추었다”(잠언 8:27-31)라고 말한다. 시편의 시인은 하느님은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신다”(시편 30:11)고 노래한다. 누가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풍악과 춤추는 소리”(눅 15:25)를 듣는다.

나는 『기독교미학의 향연』(2018)에서 “춤과 신학”이란 제목으로 한 꼭지를 쓰고 그 후 『K-신학. 한국신학의 부활』(2024)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계를 탈춤의 미학으로 풀었다.
미켈란젤로의 이 그림, “해와 달, 땅과 초목의 창조”를 처음 봤을 때 적잖게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하느님을 상징으로 작게 손가락만 그린 것도 아니고 이렇게 대놓고 그렸던 역사적 사실에 놀랐고, 하느님이 한 화면에 두 번 등장한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리고 무엇보다 뒤로 돌아선 인물이 하느님이고 몸의 부끄러운 부분으로 생각했던 하느님의 엉덩이까지 실팍하게 그려졌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앞이 깜깜해졌다. 생각이 멈추고 호흡이 잠깐 정지했다. 신학은 미켈란젤로 이후 500년이 지나서야 셀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에 의해 비로소 <하느님의 몸>(Body of God, 1993)에 관해 말하지 않는가). 나는 이 그림을 『예술신학』(2010)의 표지로 삼았다. 그런데 이 표지 그림을 물어보면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나오는 하느님의 몸이라고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에서 창세기의 하느님의 창조로부터 노아의 홍수에 이르는 원창조 이야기(창 1~9장)를 삼등분하여 9개의 그림으로 그렸다. 천지창조의 처음 세 그림은 ① 빛과 어둠의 창조, ② 해와 달 초목의 창조, ③ 물과 바다의 분리
책 표지 그림은 두 번째 그림으로 셋째 날 땅과 초목의 창조와 넷째 날 큰 빛(해)과 작은 빛(달)과 별의 창조를 한 화면에 담았다. 성경대로 하면 그림의 왼쪽부터 시작해야겠지만 오른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미켈란젤로는 영원한 하느님이 여러 자세를 취한 모습을 그렸다. 감상자를 마주 보고 다가오는 이글거리는 하느님의 얼굴, 뒤돌아선 하느님의 엉덩이, 팔을 뻗어 손가락을 내미시는 하느님 등 항상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모두가 하느님의 춤, “몸짓말”(김남수)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서는 하느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하지만, 화가 미켈란젤로는 춤으로, 몸짓말로 창조하시는 하느님을 그린다.
미켈란젤로는 교회미술사상 처음으로 신성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얼굴과 신체를 그림으로써 이를 보여주었다. 동방정교회도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십계명의 둘째 계명 때문에 성상을 그리지 못하다가 하느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을 근거로 성상을 그렸으며, 삼위일체를 묘사하는 성화까지는 나타났으나 성부 하느님을 독자적으로 그리진 못했었다. 그런데 초기 르네상스의 기운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이 한계를 부순 대담한 사람이다.
미켈란젤로는 둘째 계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 그는 모든 기독교를 위한 하느님의 이미지를 그렸다. 그는 남이 가르쳐준, 혹은 전해오는 하느님 이미지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구약의 욥이 결국 생명의 하느님을 귀로 들어 안 것이 아니라 제 눈으로 직접 뵈었듯이(親見), 그의 실존 안으로 깊이 파고든 하느님을 체험했고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상징적 사유를 통해 이 문제를 과감히 헤쳐 나갔다.
이제 상징적 사유를 넘어 몸짓말인 춤이 나타났다.
춤은 기독교 신앙을 감각화하고 신체화하며 지상화한다. 춤은 ‘지상화된 기독교’(earthed Christianity)를 향한 발걸음이다. 하느님 나라의 지상적, 육체적, 감각적 차원은 신앙의 요체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신체의 사멸성을 오롯이 직면하지 못하고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달콤한 솜사탕 안으로 도피하여 현세의 삶을 결함있는 삶이라고 믿으면서 이를 방치해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로고스)의 성육신, 곧 몸짓말이 된 생명력 넘치는 몸은 새로운 육체적 창조를 의미한다. 성육신은 활신(活身)의 사건이다. 성육신의 사건은 인간의 온갖 종류의 몸, 노동하는 몸, 광장의 몸, 휴식하는 몸, 아름다운 몸, 추한 몸, 섹시한 몸, 고단한 몸, 일그러진 몸, 아픈 몸, 먹고 마시는 몸, 음악을 연주하는 몸, 춤추는 몸 등을 몸받아 직접 느끼게 한다. 그리스도의 몸짓말은 초월적 아름다움과 철저한 비참함, 탁월한 성취와 처절한 실패, 하늘의 광채와 지상의 고통, 영광스러움과 연약함, 황홀한 감격과 무기력감 등 서로 반대되는 것들의 내왕으로써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