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9

Dan Bida 아이가 만 세 살이 되던 2010년 처음으로 네팔을 방문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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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 Bida

아이가 만 세 살이 되던 2010년 처음으로 네팔을 방문했어요.

저는 기질적으로 감각이 예민한데다 불안정한 어머니와 애착장애로 오랜 세월을 공항장애와 알콜 중독으로 많이 고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식에게만큼은 그런 고통을 물려 주고 싶지 않아서 임신을 하자 바로 직장을 그만두고, 마당있는 시골집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리고 산파를 불러 방에서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만 세 살이 될때까지는 마치 절집의 불목하니처럼 부처님을 모시듯 아이를 삶의 가장 큰 우선 순위에 두고, 늘 따뜻하게 품고 살았습니다.
아이가 만 세가 되던 날, 가족들에게 네팔에 다녀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했으면 ‘내 대에서 유아기의 애착 장애로 인한 고통은 끝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네팔 공항에 딱 도착한 순간부터 울기시작했어요. 아들이 너무 보고 싶었던 거예요.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기에, 지나가는 모든 아기들이 다 아들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엄마를 따라 다니는 아기 염소만 봐도눈물이 줄줄 나더라구요.
당초 계획은 안나푸르나로 트레킹을 가는 것이었지만 제 눈에는 길거리에 아기를 안고 구걸하는 엄마들만 보여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를 오래 젖 먹여본 엄마들은 압니다. 아기가 젖을 다 빨고 나면 당이 떨어져 손발이 떨리고,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여전히 배가 고파서 빈 젖을 빨고 있을 때, ‘누군가 지금 내 입에 밥 한 숟갈만 넣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히 듭니다.
요즘은 카트만두에서 잘 보기 어렵지만 15년 전만 해도 큰 대로변 아닌 곳에는 아스팔트가 거의 깔리지 않았어요.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가에 때묻은 숄을 두루고 그 안에 아기를 안은채 담벼락에 머리를 기대고 쓰러져 있는 젖먹이 엄마들의 모습이 더러 보였어요.
아들 생각에 그 모습이 눈에 밟혀서 도저히 산에 갈 수가 없었어요. 그건 머리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가슴으로 아이랑 엄마의 상태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트레킹을 위해 준비했던 돈으로 빵과 아이들 먹을 것을 사서 돌아다니며 나눠주고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제 얼굴은 밝고 환했습니다.
그게 저의 첫 봉사활동의 시작이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셀 수없이 네팔을 다녔네요.
전 아직까지 한 번도 트레킹을 못했지만 지금은 히말라야가 제2의 고향이 되었고 그 마을 사람들은 겨울이 오면 해마다 절 기다려요.
그 길을 멈추지 않고 갈 수 있도록 도움주셨던 이름모를 많은 선한 손길을 기억합니다.
여러분들이 지닌 그 자비와 공동선을 향한 연대의 마음이 제 안에도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쐐기풀을 자르고 실을 만드는 히말라야 산골 여인들의 손길이 제 어깨 위에 얹혀 있는 듯 느껴집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속한 상호 연결된 존재라는 걸 압니다.
네팔 사람들 덕분에 부족한 제가 이 길 위에 서있습니다.
아직 실력이 없어서 싱잉볼에 마음을 온전히 담는 테크닉은 부족하지만 사랑과 감사를 담아 연주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단비다공정무역
#아시안프렌즈
#한국싱잉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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