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n Bida
아이가 만 세 살이 되던 2010년 처음으로 네팔을 방문했어요.
그래서 자식에게만큼은 그런 고통을 물려 주고 싶지 않아서 임신을 하자 바로 직장을 그만두고, 마당있는 시골집으로 이사를 갔어요. 그리고 산파를 불러 방에서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만 세 살이 될때까지는 마치 절집의 불목하니처럼 부처님을 모시듯 아이를 삶의 가장 큰 우선 순위에 두고, 늘 따뜻하게 품고 살았습니다.
아이가 만 세가 되던 날, 가족들에게 네팔에 다녀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했으면 ‘내 대에서 유아기의 애착 장애로 인한 고통은 끝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네팔 공항에 딱 도착한 순간부터 울기시작했어요. 아들이 너무 보고 싶었던 거예요.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기에, 지나가는 모든 아기들이 다 아들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엄마를 따라 다니는 아기 염소만 봐도눈물이 줄줄 나더라구요.
당초 계획은 안나푸르나로 트레킹을 가는 것이었지만 제 눈에는 길거리에 아기를 안고 구걸하는 엄마들만 보여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를 오래 젖 먹여본 엄마들은 압니다. 아기가 젖을 다 빨고 나면 당이 떨어져 손발이 떨리고,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여전히 배가 고파서 빈 젖을 빨고 있을 때, ‘누군가 지금 내 입에 밥 한 숟갈만 넣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히 듭니다.
요즘은 카트만두에서 잘 보기 어렵지만 15년 전만 해도 큰 대로변 아닌 곳에는 아스팔트가 거의 깔리지 않았어요.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가에 때묻은 숄을 두루고 그 안에 아기를 안은채 담벼락에 머리를 기대고 쓰러져 있는 젖먹이 엄마들의 모습이 더러 보였어요.
아들 생각에 그 모습이 눈에 밟혀서 도저히 산에 갈 수가 없었어요. 그건 머리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가슴으로 아이랑 엄마의 상태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트레킹을 위해 준비했던 돈으로 빵과 아이들 먹을 것을 사서 돌아다니며 나눠주고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제 얼굴은 밝고 환했습니다.
그게 저의 첫 봉사활동의 시작이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셀 수없이 네팔을 다녔네요.
전 아직까지 한 번도 트레킹을 못했지만 지금은 히말라야가 제2의 고향이 되었고 그 마을 사람들은 겨울이 오면 해마다 절 기다려요.
그 길을 멈추지 않고 갈 수 있도록 도움주셨던 이름모를 많은 선한 손길을 기억합니다.
여러분들이 지닌 그 자비와 공동선을 향한 연대의 마음이 제 안에도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쐐기풀을 자르고 실을 만드는 히말라야 산골 여인들의 손길이 제 어깨 위에 얹혀 있는 듯 느껴집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속한 상호 연결된 존재라는 걸 압니다.
네팔 사람들 덕분에 부족한 제가 이 길 위에 서있습니다.
아직 실력이 없어서 싱잉볼에 마음을 온전히 담는 테크닉은 부족하지만 사랑과 감사를 담아 연주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단비다공정무역
#아시안프렌즈
#한국싱잉볼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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