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30

[진중권의 트루스오디세이]주류가 된 진보, 파탄 난 민주화 서사….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진중권의 트루스오디세이]




주류가 된 진보, 파탄 난 민주화 서사….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진중권의 트루스 오디세이
주류가 된 진보, 파탄 난 민주화 서사….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입력 2020.04.30 04:30


<16>부친 살해의 드라마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한국 정치는 그동안 두 개의 큰 이야기로 움직여왔다. ‘산업화’와 ‘민주화’ 서사. 이 두 서사는 동시에 두 세대를 대표한다. 산업화를 이끈 할아버지 세대와 민주화를 이룬 아버지 세대. 이번 총선을 통해 사회의 주류는 전자에서 후자로 교체됐다. 하지만 이것이 산업화에 대한 민주화 서사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586세대가 새로 주류로 등극함으로써 민주화 서사 역시 해방서사로서 생명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1968년 12월 21일 서울-인천 간(23.4km) 경인 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개통 테이프를 끊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보수의 이야기



과거에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큰 이야기는 박정희 정권이 쓴 반공과 ‘산업화 서사’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의 국력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었고, 북한은 이를 토대로 적화통일을 추구했다. 끝없는 남침의 위협 속에서 시민들은 반공전사와 산업전사로서 ‘싸우면서 일하는 보람’에 살았다. 전쟁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시절 정권은 국민의 레드 컴플렉스를 자극하는 것만으로 쉽게 독재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산업화는 눈부신 업적이었다. 농경사회였던 한국 사회는 단기간에 산업사회로 변모한다. 고도성장은 독재체제에 대한 시민의 염증을 성공적으로 무마했다.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 할 수 있었던 것도 시민들 사이에 이 국가발전전략에 대한 암묵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농사를 짓던 사람들에게 기계와 결합한 산업생산력은 기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 놀라움은 지도자에 대한 종교적 외경에 가까운 숭배로 이어졌다.

박정희 모델은 1979년 그의 시해와 더불어 막을 내린다. 하지만 박정희식 고도성장의 신화는 3저(저유가·저금리·저원화가치) 호황에 힘입어 그의 사후에도 지속되다가, 결국 1997년 국가부도 사태와 함께 막을 내린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는 이를 대신할 대안 서사를 만드는 데에 실패했고, 아직도 실패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박정희식 고도성장의 서사를 재활용했고, 박근혜 정부는 통치방식마저 유신시대로 되돌렸다가 탄핵을 당하고 만다.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로타리에 집결한 시민과 학생들을 향해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를 저지하자 한 시민이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진보의 이야기


산업화세대의 자식들은 아버지를 살해하려 했다. 배우지 못한 아버지들이 힘들게 가르쳐놨더니, 대학에 간 자식들은 반공전사와 산업전사가 되기를 거부하고 민주투사와 통일일꾼이 되려 했다. 자식 세대의 투쟁 이야기 역시 아버지들의 전쟁 이야기 못지않게 절절했다. 이들의 부친살해는 1987년 시민항쟁으로 시작해 30년 만인 2017년 대통령 탄핵으로 완료됐다. 이번 총선은 그 사실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민주화 세대는 아버지 세대가 만든 터부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임수경의 방북은 몇 년 후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선거 때마다 ‘북풍’이 불까 걱정하는 것은 민주화 세력이었으나, 요즘은 외려 보수진영에서 ‘북풍’을 걱정하는 상황이다. 산업화세대의 업적은 역설적으로 반공의 성채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 체제대결에서 남한의 압도적 승리로 북한이 과거만큼 위협적 존재로 느껴지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사이에 공동체의 기억도 바뀌었다. 부모에게 전쟁 얘기를 듣고 자란 자식들이 이제는 부모가 되어 자식들에게 반독재 무용담을 들려준다.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반공 영화를 보고 자랐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변호인’ ‘1987’ ‘택시운전사’를 보며 자랐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비롯해 남북관계를 다룬 영화도 북한의 만행이 아니라 분단의 비극을 강조한다. 그 사이에 할아버지 세대는 ‘국제시장’을 내놨을 뿐이다.
◇진보의 종언


사실 민주화세대는 그 동안 꾸준히 보수화해 왔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혁명을 꿈꾸던 이들은 급속히 체제에 포섭돼 아파트를 가진 중산층으로 변모한다. 산업화세대는 이들을 데모만 하느라 ‘직접 돈을 벌어보지 못한 세대’라 매도하곤 했다. 하지만 새로이 도래한 정보사회에서는 80년대에 운동을 하거나, 그 분위기에 동조했던 이들이 외려 생산의 중추가 됐다. 2000년대에 벤처나 인터넷 기업들을 세운 것도 이들이다.

생산에서만이 아니다. 소비에서도 이들은 구매력이 가장 강한 계층이다. 그 구매력에 힘입어 광고를 먹고 사는 언론매체에까지 자신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반면, 과거의 산업화세대는 노령화로 이미 구매력을 잃은 데다가, 그 수마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과거의 선거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갈리는 경계가 40대 유권자층에서 형성되곤 했다. 어느새 그 경계는 50대로 올라갔고, 머잖아 60대로 진입할 것이다.

이번 선거결과를 두고 나이가 들어도 세대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코호트 효과’가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하는 ‘에이징 효과’를 압도했다는 평이 나온다. 하지만 그 두 효과가 중첩해 나타났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즉, 코호트 효과로 투표에서 진영은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에이징 효과로 아예 진영 자체가 보수화했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존재’는 오래 전에 기득권층으로 변했으면서, 의식으로는 자기가 진보라 믿는 것이다.
조국 사태 이후 우리 사회는 공정과 정의의 가치가 흔들리게 됐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의 국회 인사청문회가 치러졌던 2019년 9월 6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민주광장에는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가 숙환(위선과 편법)으로 별세했다는 장례식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뉴시스
◇더 나쁜 아버지


조국 사태는 존재와 의식의 이 괴리를 상징한다. 민주화 세대가 그를 두둔한 것은 그것이 한 ‘개인’이 아니라 한 ‘세대’의 특징임을 시사한다. 그들은 진보가 아니라 실은 보수다. 산업화의 추억에 갇힌 미련한 보수를 제치고 정보화의 흐름에 적응한 노련한 보수가 등장한 것이다. 최근 비리와 성추행사건은 주로 이들이 일으키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개혁의 레토릭을 자신들의 비리를 덮고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벌써 정계와 관계, 방송과 신문, 시민단체와 지식인층을 망라하는 거대한 기득권의 커넥션을 구축했다. 비리가 터질 때마다 그 커넥션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그 압도적 헤게모니를 이용해 감시와 비판의 목소리를 순식간에 잠재워 버린다. 낡은 보수의 나쁜 모습을 업그레이드한 버전으로 체화한 것이다. 기득권을 확보한 그들은 그 커넥션을 활용해 자신들이 누리는 특권을 자식 세대에 물려주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렇게 바꿀 것보다 지킬 것이 더 많은 보수층이 됐다. 그리고 그들이 살해한 나쁜 아버지보다 더 나쁜 아버지가 됐다. 산업화세대는 적어도 그들에게 일자리도 얻어주고, 아파트도 한 채 갖게 해줬다. 하지만 586세대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일자리도, 아파트도 주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식들에게 재산과 학벌을 물려주느라 그 검은 커넥션을 활용해 다른 젊은이들에게서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마저 빼앗아 버린다.
2019년 9월 19일 서울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학생회관 앞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의 사퇴를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보수화한 젊은이들


산업화 서사와 함께 민주화 서사도 파탄이 났다. 우리 세대가 아버지 세대의 전쟁 이야기에 넌더리를 냈던 것처럼, 요즘 젊은이세대는 아버지 세대가 늘어놓는 민주화 서사를 냉소한다. 그 잘난 민주화가 이뤄진 사회에서 성공의 지름길은 상속과 세습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수저를 잘 물고 태어난 소수를 제외하고, 수저를 잘못 문 대다수 젊은이들은 민주화의 위선을 경멸하며, 민주화한 사회의 현실에 절망한다.

최근 20대의 정치적 성향이 노년층과 동조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그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를 20대의 보수화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 세대를 불신한다고 해서 그들이 할아버지 세대를 신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당층으로 남아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부친을 살해하려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민주화세대에게는 정치적 ‘집단’으로 조직하는 데에 필요한 서사, 즉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뤄졌고, 사회주의는 몰락했다. 자본주의 서사가 통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적 양극화 속에서 경제적 불안정은 날로 심화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이 모든 상황을 고립된 ‘개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불만은 있지만 표출할 수가 없다.

양당 혹은 1.5당의 기득권 체제 속에서 젊은이들은 고작 선거용 홍보물로 쓰이다 버려질 뿐이다. 대안이 없을 때 남는 것은 냉소적 태도뿐.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이들이 ‘공정’과 ‘정의’라는 화두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결과의 불평등은 용인해도 과정의 공정성만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다. 진보가 아직도 가능하다면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사회가 젊어지려면 이제 우리가 그들에게 살해당해야 한다.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불교언론-29. 허준의‘잔등’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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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허준의‘잔등’

이미령
승인 2015.03.17 11:54


소년의 뱀장어와 할머니 잔등불에 담긴 증오 혹은 연민


▲ ‘잔등’
허준 중편소설
창비출판사
20세기 한국소설 제12권1945년 8월15일 마침내 일제가 항복했습니다. 정말이지 그들은 지독했습니다. 남의 땅에 무단으로 쳐들어와서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 빼앗았습니다. 이 땅의 주인들은 저항 한 번 못 하고 고스란히 다 내줘야 했습니다. 그랬던 시절이 이제 끝이 났습니다.

해방을 맞아 이 땅 38선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들어왔고, 저들의 통제 아래 그럭저럭 새로운 질서가 잡혀가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패전한 일본인들의 입장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이제 서러움과 모진 학대는 저들 차례가 되었습니다.

월북작가 허준의 중편소설 <잔등>은 바로 이런 시점에 함경도 청진 땅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만주에서 살고 있던 화가지망생 천복은 해방 조국을 맞아 친구 방(方)과 함께 서울로 돌아오기로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만주 장천을 떠나 회령까지 도착했고,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함경도 청진 땅으로 들어오려 했다가 만원기차에서 친구와 그만 헤어지고 맙니다. 천복은 우여곡절 끝에 트럭을 얻어 탔고, 수많은 난민들을 지붕 위까지 싣고 오느라 더디게 달리던 기차보다 더 먼저 청진에 도착합니다.

청진에 도착한 그는 친구가 탄 기차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냅니다. 해방을 맞고 보니 억척스레 만주 땅을 개척했다가 일본인들에게 고스란히 토지를 빼앗긴 친척들도 생각납니다. 저들도 이제 떳떳한 독립국가의 주인으로서 제 권리를 되찾을 수 있겠지…하며 자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을볕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강둑에서 하릴없이 상념에 잠겨 있는 그때 난데없이 소리가 들립니다.

찰그닥-.

소년 하나가 강에서 뱀장어를 잡아 강둑에 내던지는 소리입니다. 얼핏 보기에도 나이 어린 소년인데 뱀장어를 삼지창으로 찍어 낚아 올리는 솜씨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가리가 삼지창에 찍혀 피투성이가 된 뱀장어는 뭍으로 내동댕이쳐지기 무섭게 필사적으로 물을 향해 꿈틀거립니다.

‘삼지창 끝에 박히었던 장어의 대가리는 옥신각신 진탕으로 이겨져서 여지없이 된 데다가 뛰는 때마다 피가 뿜어져 나온 부분이 모래와 반죽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장(細長)의 동물은 그 전신 토막토막이 전수이 생명이라는 듯이 잠시도 가만있지는 아니하였다. 제가 얼마나 뛰랴, 뛰면 무엇 하랴 하고 얕잡아보고 앉았는 사이에 여러 번 여러 수십 번도 더 툭툭거리기질을 하는가했더니 어느 덧 물 언저리까지 접근하여 가서 한 번 더 뛰면 물속으로 뛰어 들어갈 수가 있게까지 된 것이 아닌가.’

하여, 천복은 서둘러 일어나 뱀장어를 다시 낚아 올려 이전 자리에 팽개쳐버립니다. 소년이 힘들게 낚은 것을 눈앞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지요. 하지만 뱀장어는 어떻게 해서라도 물로 들어가려 몸부림을 칩니다. 작가는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목숨이 어디가 붙었는지도 모르는 그 목숨에 대한 본능적인 강렬한 집착-그리고 그 본능의 정확성은 놀라리만큼 큰 것이었다. 곰불락일락 쳐보아서 전후좌우의 식별이 없이 그저 안타까워서 못 견디는 맹목적인 발동같이 보이지만 나중에 그 단말마적 운동이 그려나간 선을 따라가보면 그것은 언제나 일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이 찾아야 할 방향을 으레 지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뱀장어를 지켜준 덕분에 주인공 천복은 소년과 말문을 트게 됩니다. 열서너 살 정도 된 소년은 이 뱀장어를 수용소에 갇혀 있는 일본인들에게 판다고 말합니다. 일본인들은 전 재산을 재주껏 빼돌리고 감춰둔 채 스스로를 알거지라고 하소연하고 있지만 그래도 음식 본능은 감출 수 없는지 소년의 뱀장어를 사먹기 위해 품에서 돈을 꺼냅니다. 소년은 뱀장어를 팔면서 낯을 익혀둔 일본인들이 재산을 빼돌려 수용소를 탈출할 때 그들을 검거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도 합니다.

소년의 눈에는 일본인에 대한 분노와 경멸이 이글이글 불타오릅니다. 하긴, 왜 안 그러겠습니까.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그냥 놔둘 수가 없지요. 당한 만큼 되돌려줘야 셈이 맞을 것입니다. 아니, 죄 없이 당한 설움까지 갚으려면 저들은 곱절로 당해도 쌉니다.

아닌 게 아니라 청진 땅에서 마주치는 일본인들은 이미 그 죄를 다 받고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재산을 몰래 감추고 탈출하려다 붙잡혀 모진 매질 끝에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질 않나, 사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아내 홀로 남아 자식들을 안고 업고 걸리고 동냥질하며 아오지나 고무산으로 떠날 기차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을까요? 아마 몰랐을 겁니다. 남의 땅을 무단으로 쳐들어와서 이 땅의 본래 주인을 노예처럼 부리며 대대손손 호위호식하며 잘 살리라는 생각만 했을 것입니다. 땅과 가족과 이름과 생명마저 빼앗긴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돌아보지 않았을 테지요. 그런데 바로 그 일을 지금 저들이 고스란히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본인들은 마지막까지 잔인했습니다. 도망치면 시내에 있는 아이들 학교마저 불 질러 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려면 그나마 곱게 갈 일이지 그런 해코지까지 하고 떠나다니, 이런 사악한 자들이 또 어디 있을까요? 천벌도 아깝습니다. 그래서 어린 소년은 뱀장어를 미끼로 일본인들을 조롱하고 감시합니다.

그런데 작가는 주인공 천복의 발길을 장터의 어느 국밥집으로 향하게 합니다. 밤새도록 희미한 잔등불 하나 밝혀 놓은 채 새색시마냥 오두마니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주인입니다. 천복은 술 한 잔 받아 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머니가 불면증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낮에 아주 잠깐 잘 뿐 밤이 되면 잠이 오지 않아 이렇게 희미한 잔등을 밝혀 놓고는 장터를 오가는 사람들을 망연히 내다보고 있다는 거지요.

할머니의 사연은 기가 막힙니다. 일찌감치 남편과 아이들을 조르륵 앞세우고 늘그막에 얻은 막내아들 하나를 의지하며 살아가는데 이 아들이 해방되기 직전 옥사했기 때문입니다. 단 며칠만 버텨주었더라면…. 할머니 가슴에 일본에 대한 원망과 저주가 가득할 법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 눈에는 못된 패전국가의 포로가 아니라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처참한 몰골만이 보입니다.

‘더부룩이 내리덮인 머리칼 밑엔 어떤 얼굴을 한 사람인지 채 들여다볼 용기도 나지 아니하는 동안에, 헌 너즈레기 위에 다시 헌 너즈레기를 걸친 깡똥한 일본 사람들의 여자옷 밑에 다리뼈와 복숭아뼈가 두드러져 나온, 두 개 왕발이, 흐물거리는 희미한 기름불 먼 그늘 속에 내어다보였다. 한 팔을 명치끝까지 꺾어 올린 손바닥 위에는 옹큼한 한 개의 깡통이 들리어서 역시 그 먼 흐물거리는 희미한 불그늘 속에서 둔탁한 빛을 반사하고 있으며.’

“저겁니다. 저것들입니다.”

할머니는 ‘저것’을 보고 있습니다. ‘저것’이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아이 업은 일본여자가 깡통을 들고 동냥하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는 할머니입니다. 모진 세월을 지독한 아픔 속에 지내오다 보니 원망도 증오도 재가 되었는지, 남은 것은 그저 목숨에 대한 안쓰러움뿐인 것만 같습니다. 죽고 죽이고 죽이게 하며 아비지옥의 세월을 거친 결과가 지금 그렇습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깡통 들고 동냥 하는 저 일본여자의 모습은 소년의 삼지창에서 대가리가 으깨져 피투성이가 되어도 제 살 곳을 찾아가겠다고 단말마적 발악을 하던 뱀장어와 다르지 않습니다.
목숨은 그렇습니다. 목숨은 살고자 합니다. 살아 있어야 목숨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숨이라는 본능 앞에서 우리는 모두가 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그 누구도 목숨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뒤집혀졌으니 이제 네가 죽을 차례라는 법은 없습니다.

국밥집 할머니는 자식을 앞세우면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고통을 다른 이들이 겪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할머니가 새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아오지에서 실려 온 일본인 포로들의 추위와 굶주림을 달래주려고 한밤중에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말아 내주는 일이 전부입니다. 할머니의 그 행동은 화려하거나 찬란하지 않습니다. 벽 틈으로 새어들어 오는 바람에 너울너울 춤을 추는 부끄러운 등잔불빛 정도입니다. 작가는 그걸 이렇게 표현합니다.

‘혁명은 가혹한 것이었고 또 가혹하여도 할 수 없을 것임에 불구하고 (중략) 덥석덥석 국에 말아줄 마음의 준비가 언제부터 이처럼 되어 있었느냐는 것은 나의 새로이 발견한 크나큰 경이가 아닐 수 없었다. 경이보다도 그것은 인간 희망의 넓고 아름다운 시야를 거쳐서만 거둬들일 수 있는 하염없는 너그러운 슬픔 같은 곳에 나를 연하여 주었다.’

천복은 천만다행하게도 친구를 만났습니다. 이제 그들은 어깨 겯고 서울로 향하겠지요. 소설을 다 읽고 생각해보니, 그 후 이 땅에 대살육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떠올라 새삼 몸서리가 쳐집니다. 뱀장어를 잡으며 일본인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던 소년도, 하얗게 밤을 새며 따끈한 국밥으로 생명을 안아주던 할머니도 그 아수라장에서 어찌되었을까요?

문체가 너무나 고색창연해서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다가 덮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모쪼록 당신이 이 작품을 지금 새롭게 만났다면 천천히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혁명이라는 불길 속에 목숨은 뱀장어처럼 단말마적인 발악을 하는 가운데, 흐릿한 등잔불 같은 온정이 흐믈흐믈 춤을 춥니다. 목숨을 향한 경외와 너그러운 슬픔을 지독하리만치 세심하게 묘사한 문체에 곱절은 감동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령 cittalmr@naver.com

Beyond Belief: The Secret Gospel of Thomas | November 21, 2003 | Religion & Ethics NewsWeekly | PBS



Beyond Belief: The Secret Gospel of Thomas | November 21, 2003 | Religion & Ethics NewsWeekly | PBS
Beyond Belief: The Secret Gospel of Thomas
November 21, 2003

Doubting Thomas
by Allen D. Callahan

Style, grace, lucidity and charm: traits seldom encountered in works of biblical scholarship and almost never encountered together. But those familiar with the work of Elaine Pagels — and few are not, judging from her commercial success as an author (yet another trait rare among works of serious scholarship) — have discovered that these unexpected pleasures are to be expected in everything she writes. And Pagels’s most recent bestseller, BEYOND BELIEF: THE SECRET GOSPEL OF THOMAS (Random House, 2003), is more of the same. The combination of such an erudite mind and such engaging prose makes her arguments for the virtues of the Gospel of Thomas almost irresistible. Almost.

Pagels’s advocacy for Thomas as a source for early Christianity and a resource for contemporary spirituality is appealing. But the gap between her interpretation of Thomas as a guide to contemporary seekers and the text of the Gospel of Thomas itself requires too great a leap of faith based on what Thomas has to offer. We have good reasons for doubting Thomas.

Pagels sees the Gospel of Thomas and other apocryphal Christian literature as shut out of the ecclesiastical smoke-filled room that foisted the canon upon early Christianity. But the formation of the canon was a complex process that started long before the Council of Nicea in 325. The canon lists of the fourth century — and there were several different though similar canon lists in existence by that time — reflected to a great extent literature that had been on the reading list of churches throughout the Roman Empire for centuries. This was so even among the Gnostics; when they wrote commentaries, canonical scriptures were their texts of choice. The canon invariably provided the grist for their exceedingly fine-grinding exegetical mills. Apocryphal texts, Gnostic or otherwise, riff on the texts that we have come to call canonical and upon which all Christian literary cachet depends.

Biblical texts were the common ground of the Gnostics and the orthodox, even though the partisans often did not recognize them as such. The arch-orthodox Irenaeus claimed that the Gospel of John declares the divinity of Jesus. On this he agreed wholeheartedly with his Gnostic nemesis Valentinus. Together the two affirmed the importance of the Gospel of John, as did the apocalyptic Montanists, who were otherwise so different from both the orthodox and the Gnostics.

According to Pagels’s reconstruction of the first four centuries of the Common Era, the bishops voted Thomas out and John in because the latter better served orthodoxy. That “official version” is represented in the Gospel of John which, on Pagels’s reading, marshals a theology that intentionally contradicts the Gospel of Thomas: “what [the Gospel of] John opposed … includes what the Gospel of Thomas teaches.” Whereas “the Gospel of John helped provide a foundation for a unified church… Thomas, with its emphasis on each person’s search for God, did not.”

But the Council of Nicea had little to do with the Bible, and the text of John was superfluous to the proceedings. Pagels herself reminds us that some of the bishops at Nicea were troubled because the proposed language of the Nicean Creed was not biblical. Even the Nicean definition of Jesus as “begotten not made” has no real relation to the description of him as “the only begotten” in the Gospel of John. (This latter phrase is a holdover from the Old Testament, where it means “beloved.” God uses it in his conversation with Abraham to describe Isaac, who certainly was not Abraham’s only son.) And as Pagels also points out, in several places the Gospel of John seems to flatly contradict the other three canonical gospels; it was apparently unknown to the early church fathers Ignatius, Polycarp and Justin Martyr, and John had been associated with heretics. Not a compelling pedigree for a text pressed into service as a rallying point for ancient orthodoxy.

But the ultimate purpose of the genealogy of Christian orthodoxy in BEYOND BELIEF is to buttress Pagels’s claim that orthodox Christianity has stolen from us an authentic, first-century Christian spirituality to which the Gospel of Thomas bears witness. This alternative collection of sayings in effect gives us another Jesus, and Pagels says as much. The Nag Hammadi texts “revealed diversity within the Christian movement that later ‘official’ versions of Christianity had suppressed.” Pagels writes of her surprise at finding “unexpected spiritual power” in the sayings from Thomas that call for a personal, inner-directed quest for the divine. The Jesus of the Gospel of Thomas “does not tell us what to believe but challenges us to discover what lies hidden within ourselves.” “I realized,” Pagels goes on to comment, “that this perspective seemed to me self-evidently true.”

Pagels speculates that some Egyptian monks placed Thomas and the other Nag Hammadi texts in a six-foot cylindrical jar to save them from the wrath of the orthodox book burners. The jar served as an earthen time capsule for the ancient texts until an Egyptian shepherd discovered them almost sixteen centuries later.

Reading Thomas now, it is easy to see why it might have been a favorite in the monastery. Thomas is shot through with a curmudgeonly, monastic sensibility. Its sayings badmouth weddings, marriage and sex. The phrase “a single one” in Thomas translates from the original Coptic the Greek loan-word monachos — “monk.” The word appears in two other sayings in Thomas. One of them has Jesus say, “There are many standing at the door, but only those who are solitary (literally, “those who are monks”) will enter the bridal chamber.” A monk in the newlywed suite: the austerity here is almost morose, the imagery of a true libido wet blanket. Thomas’s Jesus comes off as a Gnostic killjoy.

Thomas has a healthy monastic disdain for wealth and the wealthy. Those who are well dressed, i.e., well heeled, are incapable of knowing truth. Rich people are fools, and Thomas agrees with the book of Proverbs and Mario Puzo that fools die. Thomas forbids interest and speculation, detests merchants, and warns that businessmen will not enter “the Kingdom of the Father.” Would-be Thomas Christians working on Wall Street? Don’t even think about it.

And just as any celibate ascetic, Thomas has no use for women. The concluding saying of the Gospel of Thomas is cold comfort for feminist seekers: “Simon Peter said to them, ‘Make Mary leave us, for females are not worthy of life.’ Jesus said, ‘Look, I shall guide her and make her male, so that she too may become a living spirit resembling you males. For every female who makes herself male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The text leaves undetermined who this “Mary” is. Mary the mother of Jesus, perhaps? Or Mary Magdalene? Or some other Mary? According to the words of “the living Jesus,” however, it doesn’t matter. Whoever they are, women who aspire to Thomas’s version of enlightenment must undergo, at the hands of Jesus, a Gnostic sex change operation.

Like some early Egyptian monks who fled society to wander in deserted places, the Gospel of Thomas is big on bowling alone. The following enigmatic saying is one of several in Thomas that tout the superiority of the single life: “Jesus said, ‘Where there are three deities, they are divine. Where there are two or one, I am with that one.” The text here may be corrupt: nevertheless it seems to echo a saying in the Gospel of Matthew,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in my name, there am I in the midst of them” (Matthew 18:20). Thomas’s version of the saying serves notice on Matthew’s chummy spirituality.

In the opening chapter of BEYOND BELIEF, Pagels recalls her reacquaintance with her own faith on a walk-in visit to the Church of the Heavenly Rest in New York. “From the beginning, what attracted outsiders who walked into a gathering of Christians, as I did on that February morning, was the presence of a group joined by spiritual power into an extended family.” It is very hard to imagine the writer of the Gospel of Thomas being attracted to what Pagels found at the church that day. He makes a point of inveighing against just such fraternizing. Pagels’s translation of another saying, paralleled in both Matthew 9:37-38 and Luke 10:2, sharpens the point: “Jesus said, ‘The harvest is great but the workers are few, so ask the master of the harvest to send workers to the fields’.” But the later clause literally says, “So ask the master of the harvest to send a worker to the fields.” The singular, in view of Thomas’s predilection for singulars, is not an unimportant detail; one worker will do. For the Gospel of Thomas, two’s a crowd.

The greatest problem for Pagels’s endorsement of Thomas, however, is what its sayings do not say. Early in her book she speaks of her admiration for Christian communities as places where people stand in solidarity against that last of natural shocks that flesh is heir to — death. Recalling her first visit to the Church of the Heavenly Rest, where she began to revisit her own faith, she writes, “Here is a family that knows how to face death.” Pagels writes movingly of the support she received at the church during the illness and sudden death of her six-year-old son. There she found a fellowship in which “those who participate weave the story of Jesus’ life, death, and resurrection into their own lives,” a story that “simultaneously acknowledges the reality of fear, grief, and death while — paradoxically — nurturing hope.”

But that story is missing in Thomas. It is a gospel without the Passion; it offers a way of discipleship without a via dolorosa. There is nothing about resurrection, either of Jesus or anyone else. The “living Jesus” of Thomas speaks of suffering and death quite, well, dispassionately. The gospel presents “the secret sayings that the living Jesus spoke,” and there is no suggestion that Jesus has or will “taste death,” as Thomas puts it. So too for those who understand his sayings: “And he [Jesus] said, ‘Whoever find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 Thomas understands death not as a problem of humanity but as a challenge of hermeneutics.

Thomas shares detachment from death with other Nag Hammadi texts. In passing Pagels discusses the Gospel of Truth, which discourages believers from seeing Jesus “nailed on a cross” but instead recommends that they visualize him as “fruit” on the tree of knowledge in Paradise that imparts wisdom to those who eat it. The writer transforms the grim reminiscence of Jesus’ violent death into an allegory of enlightenment.

Another Nag Hammadi document that Pagels cites with approval, the Apocalypse of Peter, depicts Jesus “glad and laughing on the cross.” This is Gnostic spin control on what the Apostle Paul called the scandal of the cross — the savior of the world publicly tortured to death, the son of God nailed naked on a crude wooden gibbet. In their tacit flight from human suffering, these texts have drained the Crucifixion of its blood.

Pagels concludes her book by damning the orthodox, ancient and modern, with faint praise so suavely written that we might overlook its condescension:

How can we tell the truth from lies? What is genuine, and thus connects us with one another and with reality, and what is shallow, self-serving, and evil? Anyone who has seen foolishness, sentimentality, delusion, and murderous rage disguised as God’s truth knows that there is no easy answer to the problem that the ancients called discernment of spirits. Orthodoxy tends to distrust our capacity to make such discriminations and insists on making them for us. Given the notorious human capacity for self-deception, we can, to an extent, thank the church for this. Many of us, wishing to be spared hard work, gladly accept what tradition teaches.

But it is the unorthodox traditions of Nag Hammadi that taught that death is ultimately a language game, that the cross was more like apple picking than agony, and that the Crucifixion could be a laughing matter. And the orthodox, with all their shortcomings, would have none of it. It was the orthodox who insisted on doing the existential heavy lifting that a cross-bearing gospel demands — truly hard work.

It’s ironic. With poignancy Pagels has shown her readers that she herself is deeply touched by and deeply in touch with our common mortality — that touchstone of the best of Christian spirituality — more deeply than anything we read in the Gospel of Thomas.

Allen D. Callahan is a biblical scholar and the author of the forthcoming book THE SPIRITUAL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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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일레인 페이절스 (지은이),하연희 (옮긴이)루비박스2006-05-15원제 : The Gnostic Gospels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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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쪽
152*223mm (A5신)
333g
ISBN : 9788991124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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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성경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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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는 한 농부가 붉은 토기 안에 담긴 고문서 뭉치를 발견한다. 우여곡절 끝에 학자들이 손에 넣은 그 문서에는 초기 기독교의 한 분파인 영지주의(그노시즘)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첫 줄부터 내용이 심상치 않다. "이는 살아 계신 예수께서 이르시고, 그의 쌍둥이 형제 유다 도마가 기록한 비밀의 말씀이다."

이것이 지금 '나그함마디 문서'라고 불리는 복음서(외경)들이다. 이 중 도마, 마리아, 빌립, 바돌로매 복음서 등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최고의 사도였다"는 내용은 소설 <다 빈치 코드>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력한 설이 되기도 했다.

종교학자인 지은이가 이들 문서를 자세히 분석, 영지주의 분파의 교리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단으로 박해받은 만큼 우주의 기원에 대한 유사 철학적 서술, 신화, 마법, 신비의식의 지침들까지 등장, 초기 기독교의 정통 교리에 정면으로 도전한 그들의 담론이 생생이 드러난다.

창조의 문제, 남녀 성 담론, 예수의 부활 등의 문제에서 영지주의가 정통 기독교와 해석을 어떻게 달리하는지 살펴보고, 이들이 박해 끝에 사라진 과정을 추적한다. 여기서 지은이는 이들이 교리상의 갈등보다는 기득권을 세우려는 정통파 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밀려난 면이 상당히 강하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승자가 정통이 되고 패자가 이단이 되는 기독교 내의 역사적/정치적 면모를 통해 종교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제안한다. 1980년 전미비평가협회상과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저작이다. 2008년 표지는 바뀌었으나 기존에 출간한 책과 같은 책이다.


목차


감사의 글
들어가는 글

1.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논란 - 역사적 사건인가, 상징인가
2. “하나의 하나님, 하나의 주교” - 유일신교의 정치학
3.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4. 그리스도의 수난 및 기독교도 박해
5. 누구의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가
6. 하나님의 지식: 영지

마치는 글
참고문헌


책속에서



역사학자의 임무는 특정 집단의 옹호가 아니요, 증거의 탐구이다. (...) 종교적 권위의 근원은 무엇인가?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 볼 수도 있겠다. '자기 자신의 경험의 권위와 성서, 의식, 성직자의 권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나그함마디 부근 절벽에서 파피루스가 가득 든 항아리를 발견했던 마호메트 알리는 당시 안에 금이 들어 있지 않아 잔뜩 실망했다. 그는 자신의 우연한 발견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그함마디 문헌들이 그보다 천 년 일찍 발견되었다면 이단의 글이라는 이유로 모두 소멸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켜켜이 쌓아온 문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인류가 새로운 견해를 정립하게 되었던 20세기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이 문헌들을 단순히 '광기와 모독'의 산물로 보지 않고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즉, 1세기 기독교인들이 경험했던 바를 되새기며, 소위 정통파 기독교 전통을 대신할 수 있는 강력한 대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들이 정면으로 제기했던 문제들에 우리가 이제야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 본문 230~231쪽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일레인 페이절스 (Elaine Pagels)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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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대학 해링튼 스피어 페인 칼리지 종교학과 교수이다. 1970년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콜럼비아 대학 버나드 칼리지의 종교학과 교수직을 역임했다.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각종 문헌 편집 작업에 참여한 바 있으며, 지은 책으로 <요한복음의 영지주의적 해석 (The Johannine Gospel in Gnostic Exegesis)>, <영지주의자 바울: 바울 서한의 영지주의적 해석 (The Gnostic Paul: Gnostic Exegesis of the Pauline Letter)>, <아담, 이브, 그리고 뱀 ... 더보기


최근작 : <아담, 이브, 뱀>,<믿음을 넘어서>,<사탄의 탄생> … 총 54종 (모두보기)

하연희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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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영과를 졸업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너무 무서워서 잠 못 드는 공학 이야기』, 『어느 노과학자의 마지막 강의』, 『프랑스 아이들은 왜 말대꾸를 하지 않을까?』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뜯어먹는 영어일기』가 있다.


최근작 : … 총 29종 (모두보기)
일레인 페이절스(지은이)의 말
나그함마디 문서를 이미 천년의 역사를 지닌 정통파 기독교 문헌과 비교해보면, 정치와 종교가 기독교 발전에 있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수의 육체 부활과 같은 정통파 교리에 어떤 정치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지, 부활에 관한 영지주의자들의 의견은 그와 어떻게 대립되는지 발견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의 기원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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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150년경 기독교와 불교의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불교는 인도 북부 지방에서 대승불교로 발전하고 불교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는 같은 시기 근동에서 영지주의로 태어난다 이것은 한 독자의 가설에 불과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두 종교의 사상이 너무나 비슷하다
北斗七星 2018-02-0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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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 너무 신비적인 가? 아직도 많은 것을 발혀지지 않았다.
거북이 2011-09-0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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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   이 책은 일레인 페이겔스가 영지주의와 정통 기독교의 관계를 사회/정치적인 사간으로 바라본 책이다. 영지주의가 무언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읽어야 할 개론서이다. 그녀의 글쓰기는 가히 놀랍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이 책은 술술 읽힌다. 영지주의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궁금하다면 이 책과 함께, <<이것이 영지주의다>>라는 책을 꼭 같이 읽기를 추천한다.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가 담지 못한 내용이 <<이것이 영지주의다>>에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 musn12 2006-12-12 공감(3) 댓글(0)